전도서

2013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2강-헛됨의 역할맡은 언약백성-내가 헛되니 너도 100%헛되다

아빠와 함께 2013. 8. 5. 22:03

 

2013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2

(강의:이근호 목사)

 

 

왕인데 무슨 왕이냐? 예루살렘의 왕입니다. 예루살렘이라는 그 지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장차오실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을, 지혜를 전도서란 형식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이라는 지점을 꼭 고수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면 시드시라든지 멜버른 안 그러면 LA, 전부 다 보낼 수 있는 문제인데 왜 예루살렘이라고 이렇게 한 지점을 고수하느냐?

 

그것은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는 우리 형편을 생각해서 일을 하십니다. 형편이 어떤 형편이냐 하면, 인간이 있으면, 인간은 육신으로 돼있지만 항상 인간은 자기를 인간이라고 생각해요. 인간은 절대자로 생각하거든요. 인간은 자기 주변 공간을 확장시킵니다. 이것이 절대공간이 돼요. 그 안에 자기가 들어있으니까. 그렇다면 어떤 지점에 두 개의 물체가 있다고 합시다. AB가 있다면 A는 위로 가고, B는 내려가는 거예요. 사람들은 자기가 가만있는데 이쪽이 움직인다고 보고, 이 사람은 자기는 가만있었는데 이쪽이 움직였다고 보고. 그것은 거리로서는 도대체 서로 보는 입장에 따라서 누가 옳은지 서로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이걸 확실히 규정지을 수 없어요. 이것이 갈릴레오의 상대성원리에요.

 

상대성원리에 의해서 자기 입장과 저쪽 입장이 서로 다른 이론이 나오거든요. 이게 나중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로 나오는데 그래서 뉴턴이란 사람은 누구, 누구라 하지 말고 절대공간이라고 너나 말고 따로 정하자. 데카르트가 만든 좌표가 있어요. y=x 중학교에 나오는 수학입니다. 이 지점은 y=4, x=5 이렇게 지정해버리자. 하지만 이것은 지정하되 절대공간 이것은 누구도 손 안 대기.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게 되면 그래야 뭔가 이야기가 되거든요.

 

이쪽에 어떤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78 지점에 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쪽이 움직이게 되면 당신은 얼마의 거리를 움직였다는 것이 절대공간의 좌표에 의해서 나타나니까. 바로 이런 절대공간, 절대시간에 고정된 이것이 바로 과학의 시작이에요. 과학이 모든 인간이 다 납득이 되는 보편적인 진리로서, 지혜로서 이미 등장하고 말았습니다. 과학을 잘 하게 되면 전쟁에 승리하고 과학을 못 하게 되면 패배하기 때문에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아프리카나 아시아는 유럽한테 국가적으로 큰 재난을 당하고 나라가 식민지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시절이 있었잖아요.

 

그래서 이것이 인간 쪽에서는 중요한 현실이라고 하는데 모든 것을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에서 과학적으로 이걸 첫째 시간에 규격화라 했지요. 이건 질보다도 양으로 인간을 따지는 겁니다. 지금 제가 왜 예루살렘이냐는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양으로 따지니까 절대적인 규격화 입장에서 진짜 절대적인 그러한 것을 항상 내세우기 마련이죠.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모든 것이 삼성그룹에서 결정하는 거죠. 절대적인 것이. 삼성그룹을 중심으로 해서 나라는 인간이 삼성그룹에서 멀어지면 쪼다고 삼성그룹과 가까이 가게 되면 성공한 인간이 되는 거예요. 로펌도 그렇고 야구고 삼성이 1등하잖아요. 4728. 우리나라의 수출도 삼성이고. 그래서 너, 빨리 공부해. 공부하란 말이야. 공부해야 삼성과 연관된 회사에 들어갈 수 있어요. 모든 게 삼성과 관련돼있습니다. 그리고 공직에서 퇴직해서 제일 잘 된 케이스가 삼성과 관련된 기업체에 들어가는 것, 연봉도 제일 세다는 데.

 

이러한 절대적인 공간을 잡습니다. 잡게 되면 이것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걸 냉철하게 보면 이렇습니다. 인생자체를 그래프로 수학으로 나타내는 거예요. y=ax+b. x를 독립변수라 하고 a, b를 매개변수라 해요. 지금 교육방송입니다. y=x의 그래프를 그리면 이렇게 되거든요. 절대공간에서. 1 갈 때 1 늘어나고, 2 지점 가면 2 늘어가고. 이렇게 되면 현재 내가 이 지점에 있다면 b라는 지점이 예상이 돼요. 그래서 인생이 뭐냐 하면 내가 예상한 그래프대로 희망을 걸고 그것에 필요한 모든 것을 열심히 매진할 때 그게 바로 인생입니다. y=x 좌표에요.

 

그런데 이 지점에 와서 갑자기 그래프가 이렇게 내려간다면 이것은 y=-x가 되는 거예요. 이것은 중학교에 나오는 겁니다. 혹시 기억나는 사람은 기억을 다시 새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이럴 경우에 이것은 인생이 하면 할수록 꼴아 박게 돼있어요. a 지점에서 이 지점이 안 보인다는 게 문제입니다. 이게 인생의 비극입니다. 모든 비극이 어떻게 될지를 몰라요. 이걸 수학에서 극대점이라 합니다. 이걸 사건이라는 거예요. 사건이란 내가 예상한 걸 꺾어버리는 우발적인 어떤 이벤트에요. 돌발사태에요.

 

딸이나 아들이 태어났다. 2년간은 누구나 영재입니다. 누구나 천재에요. 영재기 때문에 y=x그래프에서 a 지점이 영재거든요. 그러니까 이 얘는 b. b가 어디 있느냐 하면 삼성그룹이에요. 어쨌든 간에 뭘 하든 간에 삼성그룹과 관련된 걸 하면 성공한 겁니다.

 

그런데 얘가 공부를 잘 하고 있는데 고등학교 2학년 때 남자를 사귀었어요. 갑자기 여기서 웬 남자가 뛰어들어서 극대점이 생겨서 그 다음부터 책을 봐도 들어오지를 않네. 남자 얼굴만 나와서 성적이 완전히 20명 중에 19등으로 처박습니다. y=-x에요. 그러니까 부모 입장에서는 y=x를 유지하기 위해서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면, 그 남자를 죽이든지 해서 다시 이 그래프를 유지하려고 모든 노력을 하는 겁니다. 극대점을 없애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얘가 억지로 y=x로 가기는 가지면 이미 그 얘 마음속에는 사건의 상처를 안고 언제든지 다시 y=-x로 가는 겁니다. 그리고 그 아가씨는 말합니다. 나의 원래 인생은, 엄마 보기에는 y=x인데 내가 보기에는 y=-x가 나의 미래였습니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엄마의 인생을 주장하다보니까 내 인생은 이렇게 깨졌습니다.

 

그럼 엄마는 네가 너만 생각해서 네가 하는 걸 정당화하는데 대한민국에서 삼성그룹이라는 절대지점을 생각해본 적 있느냐? 네가 네 인생사는 건 좋은데 그로 말미암아 삼성그룹에서 이만큼 떨어졌다는 걸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이 말입니다. 이 삼성그룹을 전도서에서 해라고 합니다. 해 아래서 모든 것은 헛되다. 삼성그룹 밑에서 다 헛된 거예요. 적어도 교회가 부흥되려면 삼성그룹 임원 몇 명 다녀야 되고, 직원들도 승진하려고 올 거고. 그러면 목사의 노후는 된 거죠.

 

그런데 전도서에서 삼성그룹 대신 해가 집어넣었다는 말은 결국 허무가 허무를 너의 절대지점으로 박아 넣을 수는 없느냐고 우리한테 요청하고 있습니다. 허무하다는 사실을 우리의 절대지점, 삼성그룹 빼버리고 허무하다는 것. 그러니까 만약에 삼성그룹의 임원이 성령을 받았다. 그런 일을 별로 없습니다만 성령 받았다면, “주여, 죽여주옵소서. 이 그룹을 키우기 위해서 내가 하는 짓거리가 내가 봐도 참 치사스럽고 초라한데 이런 죄인을 죽여주옵소서.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가 삼성그룹에 입사하지 않았다면 그런 죄를 몰랐을 뻔했어. 그러면 지금까지 삼성그룹에서 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게 전도서 3장에 나옵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때가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그 때가 언제인지는 이야기 안 해요. 그렇지요. 결국 이건 하나마나에요. 하나님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삼성그룹이 있으면, 이 이야기는 하나마나입니다. 아마 삼성그룹에 입사한 사원들 모아놓고 교양강좌하거나 경영지침 내릴 때 목사 불러다가 이 야기하라고 시키지는 않을 거예요. “여러분, 성경말씀에 보니까 심을 때가 있고 뽑을 때가 있습니다.”라고 해놓고 심을 때가 바로 올해입니다. 뽑을 때는 중국 경기가 안 좋으니까 내년 봄 쯤 될 것입니다. 이렇게 지 마음대로 정해버려요. 결국 때를 정한다는 말은 여전히 삼성그룹은 자기가 절대지점을 포기 못하겠다는 이 말이거든요.

 

그게 삼성그룹뿐만 아니에요.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에요. 네가 많이 놀았잖아. 이제 공부할 때다. 엄마, 내가 공부할 때라고 전도서 어디 나오는데? 여기 나오잖아. 심을 때가 있고 뽑을 때가 있고. 엄마, 나 심지도 않았어. 왜 이래. 심지도 않았는데 자꾸 뽑으려고 해.

 

사람이 상대성원리에 의해서 각자 자기 주관이 있다보니까 절대기준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이 말씀이 진짜 기쁨으로 다가오는 사람은 바로 절대적인 허무를 자기 속에 심어놓은 사람 같으면 이런 때나 저런 때나 웃을 때나 울 때나 스쳐지나가는 갈 수밖에 없는 간이역, 빠르게 그냥 지나가는 인생이란 어차피 허무로 되돌아오게 돼있다는 걸 알 때 그 차창 가에 스쳐지나가는 모든 풍경에 마음 빼앗기지 않을 거라 이 말이죠. 그래서 나온 것이 그냥 범사에 감사하는.

 

그런 때가 있을 때 나는 어떻게 이용할 것이고 나에게 어떤 이익이 있느냐? 그러면 그것은 절대공간에 자기 자신이 놓여있는 거고, 지금 허무가 허무답게 하기 위해서 나를 어떤 식으로 사용했느냐? 그것만 있다면 울 때 울어줘야 되고 웃을 때는 웃어줘야 되는 거구나. 언제까지 웃을 것이고 언제까지 울 것인지는 내 소관이 아니고 그것은 나한테 허무를 심어준 그분의 소관이 되는 거죠.

 

이 허무를 우리 가운데 심어놓을 때 허무가 우리 속에 들어오는 방식은, 허무가 인격화돼야 돼요. 그래서 허무가 인격화된다는 말은, 예루살렘 왕이 인격화 되어서 이 땅에 와서 인생을 사는데 33년 동안 정말 헛되고 헛되며 헛되게 사신 겁니다. 진짜 허무가 뭔가를 제대로 보여주면서 사신 그분을 우리는 구주라고 믿습니다.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는 자는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 천하 자식을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않다. 아주 허무를 제대로 보여주는 거예요. 저는 그걸 삽질이라 하는데 우리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추방시켜버려요. 그 삽을 일본말로 수군포라 하는데 수군포로 전부 다 퍼내는 거예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뭐냐? 항상 우리 중앙에 있는 것을 구멍을 만들어서 허무만 그 자리에 있게 만들어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일에 감사하도록 찬양하도록 그런 조치를 성령께서 하시는 겁니다.

 

오늘 오후에 성전에 대해서 설교하는데 그게 역대상 29장의 다윗의 대목을 제가 설명했습니다. 그 대목에서 다윗이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제가 지금 받은 모든 돈과 재물과 권능은 다 주께 받은 겁니다. 이제 주께 받은 것을 성전 지음으로 되돌려드리겠습니다. 우리 인생은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에 불과한데 이런 돈보다도 성전 짓는 것이 옳습니다.”라는 식으로 기도한 것이 역대상 29장에 나와요.

 

그것을 성전건축 앞두고 부흥회 할 때 부흥강사들이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성전 짓기 부흥회는 두 가지에요. 학개서와 역대상 29장이에요. 학개서는 너희 집만 짓고 교회는 소홀히 해서 장사 되는가 보자. 협박조로 나오는 거고. 역대상 29장은 그동안 받아 놓은 것 하나님이 성전 지으라고 준 건데 그걸 자식들에게 줘봐야 자식들이 유산 때문에 의나 상하고 그러면 자식들이 배울 게 뭐가 있느냐? 이 판에 한 방 쏘라. 우리 아버지 믿음 좋다고 해서 자식들에게 신앙이나 남겨줘라. 거기다 또 역대상에 보면 더 놀라운 게 있어요. 지금 당장 돈 없더라도 나중에 작정해서 내라는 대목이 나온다고요. 이것은 교회 이름으로 적금 붓고 하면 되거든요.

 

그래서 그 대목을 설명하면서 제가 그랬어요. 그렇게 예배당을 짓거든 그 예배다을 옆에 있는 교회에 줘버려요. 그러려거든 그렇게 지어라. 수군포로 퍼내야 돼요. 예배당 지은 걸. 예배당 지으면 뭐 하노? 좋다고 소고기 사먹겠지. 그러니 예배당 지을 때가 있으면 내가 지은 예배당한테 밉상 받아서 쫓겨날 때도 있음을 염두에 두시고 헌금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교회에 헌금해봤자 돈만 빼먹고 나이 팔십 넘어서 돈 안 나오니까 다른 교회 가. 치매 환자가 우리 교회에 와. 쫓아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알고 헌금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헌금 안 하지요.

 

성경은 항상 해석할 때 원칙이 있습니다. 어떤 성경이든 예수그리스도를 경유해서 해석이 돼야 돼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유해서 해석돼야 됩니다. 이 말은 뭐냐? 주님이 보여줬던 허무를 경유해서 해석이 되게 되면, 처음에 경유하기 전에 다가갈 때는 내가 절대자야. 하나님은 나를 사랑해.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노래 부르며 들어가요. 이렇게 들어갔다가 나올 때는 저주받기 위해서 육신이 되었음을 알아야 돼요. 우리가 저주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는 그 사람은 성도 또는 영생 받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성경에서는. 그 대표적인 예가 사도 바울. 예수님도 마찬가지고. 열두 제자가 순교했잖아요. 이 땅에서 삼성그룹과 너무나 거리가 먼 성공했다는 것과 거리가 먼 그런 쪽이죠.

 

어떤 사람이 아브라함이 복 받았다고 하는데 아브라함 시켜볼까요? 양 몇 마리, 소 몇 마리 자라게 해줄 테니까 사랑하는 아들 바쳐볼 랍니까? 아브라함 살아온 인생이 한 마디로 걸레입니다. 사람이 고생을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야곱이 부럽다고요? 아들 잘 낳아서 총리 됐다고요? 야곱이 아들 잃어버렸는데요.

 

바로 현재 중심에 내가 있는 중심을 허무로 바뀌기 위해서는 여기에 단절이 필요합니다. 완전히 나라는 것이 조금이라고 이쪽으로 건너오지 못하도록 끊어버리는 그게 필요한 겁니다. 베드로로 자기 목숨 바치고 따라간다고 할 때 주께서 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따라 와봐야 못 온다. 그러니까 단절이 있음으로 내가 내 중심으로 생각하는 y=x에서 극대점 없이 그대로 이어지는 그 천국은 바로 지옥입니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에 불과하지 지옥입니다.

 

지금 내가 기대하고 희망 품고 있는 이 그래프 끝은 이걸 철학적 용어로 외삽이라는 어려운 용어인데 외삽이 뭐냐 하면, 그래프가 있다면 a 지점에서 b 지점까지 가요. 그 다음에 c 지점까지 이어가요. 아직까지 지하철 연장되지 안 됐는데 이어가서 c 지점도 연결 될 것이라는 것을 외삽이라 해요. 우리 기대치까지.

 

그러니까 이것이 오류가 뭐냐 하면, 여기서 일어나는 것이 그대로 여기서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지금 내가 하는 것이 의미가 있겠습니다. 지금 내가 예상한대로 결과가 안 나온다면 지금 내가 하는 것의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에 절대로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하나님에게 공갈치는 거예요. “하나님이여, 제가 헌금을 했는데 30, 60배의 보상이 없다면 헌금한 의미가 없습니다. 헌금의 의미가 있게 되기 위해서라고 반드시 약간의 행운과 보상이 따라줘야 우리 둘이 동업됩니다.” 이런 식으로 나오지요. 하여튼 인간은 못 됐어요. 그러니까 성경연구 많이 했다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성경에서 여러 가지 놀랄만한 대목이 있는데 생각하면 정말 놀라운 대목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예수님한테 물 한 모금, 옷 한 벌, 밥 먹여준 기억이 나지도 않는데 주님께서 덜렁 천국을 보내놓고 그 천국 간 사람에게 하는 말이, 내가 헐벗을 때 입을 걸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걸 주었고, 배고플 때 먹을 걸 주었고, 내가 옥 갇혔을 때 돌아보았느니라. 하니까 천국 간 당사자들이 하는 말이 뭐라고 합니까?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이거 희한한 일이에요. 오늘날 교회는 자랑질을 못해서 환장했는데. 감사헌금 올라가면서. 다른 동네 이야기지만.

 

그런데 막상 천국에서는 제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정답은 뭐냐 하면, 우리가 모르게 우리를 사용했기 때문에 우리 의사와 관계없이 주께서 일방적으로 주님한테 보탬이 되는 행동을 해놓고 우리에게 네가 했다고 이야기함으로써 정작 내가 한다고 하는 것을 절대 중심지에서 탈락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아이고, 어려워라. 진짜 어려운 이야기에요.

 

사람이 자기가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기억하기 마련이거든요. 그런데 아무리 해도 주를 위해서 한 적이 없는 거예요. 하지만 이것 하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이 땅에 사셨다면 그 사신 것이 주님한테 기회가 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만 이 소리 듣고 나 잘 살았지요. 라고 한다면 그건 전혀 기회가 안 돼요. 주님께서 피해가십니다. 우리의 모든 기억과 누적된 우리의 성과와 우리의 자랑질과 우리의 공로성과 심지어 나는 부족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멘트마저 피해버려요. 결국 그 멘트도 자랑질이 되니까.

 

의미가 없어요. 러니까 허무는 우리한테는 일체 우리 자신에게 의미를 주지 않는데 의미를 주지 않으면서 의미가 생기는 것은, 우리의 중심 되시는 분의 공로로 선물로 제공하기 때문에 나중에 천국 가서 면류관을 반납하면서 제가 쓰는 것이 합당하지 않고 주님께서 쓰시는 것이 합당하다고 주님 발 앞에 던지는 거예요. 사실은 면류관 던지지 말고 우리 몸도 던지시기 바랍니다. 이 몸은 주께서 키워주신 몸이라고 주님한테 안기란 말이죠.

 

그렇게 안길 때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런 하나님이 눈에 봐야 믿지요.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그런 하나님이 있는 걸 어떻게 압니까? 그러니까 왕이 등장하는 거지요. 그것도 예루살렘 왕. 예루살렘 왕이 등장해서 이 왕은 인간의 모든 것을 허무하다는 사실을 통보할 뿐 아니라 실제로 이스라엘을 허무한 이스라엘로 만들어버립니다.

 

이 전도서란 책을 두고 소위 원어깨나 하고 글깨나 읽었다는 구약의 학자들이 뭐라고 평하느냐 하면, 전도서는 이스라엘 초창기에 쓴 것은 아니고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난 뒤에 바벨론의 묵시적인 영향과 더불어서 멸망한 이스라엘, 유다나라를 다시 기억하고 위로하기 위해서 다른 방식의 하나님을 만들어서 백성들에게 위로 삼아준 책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게 되면 뭐가 빠집니까? 결국 성경책조차 인간을 위로하기 위해서 준 책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위로받을 이유가 있습니까? 우리는 이 땅에 잠시 왔다가 사라지는 엑스트라 같은 단역배우인데 단역배우를 위해서 카메라 3, 4대 대질 않아요. 무대의 주인공은 따로 있습니다.

 

제가 설교할 때 인용한 노래 가사가 있지요. 연극이 끝난 후에~ 연극이 끝난 후에 적막만이 남을 때 연기가 끝난 배우가 객석에 내려와서 텅 빈 무대를 보란 말이죠. 뭐가 남는지. 쫄랑대고 까불고 연기하고 했지만 어디까지나 하나의 연기였을 뿐이에요. 순간적인 일시적인 연기였습니다. 연기란 나이 들면 그만큼 숙달되지요. 연세 84세 때는 연기 잘합니다. 얼마나 연기 수준이 뛰어난지. 인생을 산만큼 늘어나는 것은 연기밖에 안 늘어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로 하여금 어설픈 연기지만 무대에 올려놓고 그 연극의 영원히 변하지 않는 주제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그것만 하나 남는 거죠.

 

그러면 예수님이 전도서를 던졌다는 말은 그냥 예수님이 다녀가신 거죠. 그러니까 잔잔한 호수 위에 독수리가 날아와서 물고기 하나 채서 올라갑니다. 이것이 하나의 사건이에요. 정리해봅시다. 사건이란 호수에 물고기가 튄다. 분명한 사건이죠. 그런데 주님께서 날 건졌구나. 하는 그 순간에 호수에 나무가 하나 있는데 삼십대 여자가 시체로 발견된 살인사건이 벌어졌어요. 그렇다면 지금 호수에서 물고기 튀어요, 안 튀어요? 살인사건이 일어나도 그 순간에 물고기 튑니까, 안 튑니까? 튀지만 주목은 받지 못하지요. 갑자기 엠비씨, 케이비에스 와서 들이대면서 이 삼십대 여자가 어떻게 됐는가? 거리의 cctv 조사하고 차량 조사하고 바쁘면 조용한 호숫가의 물고기 튀는 사건은 사라져버리고 살인사건이 부각되지요.

 

오늘날 우리의 일상의 모습입니다. 뭐 설교 들을 때 주여, 감사합니다.” 하다 예배당 문 열고 나갈 때는 복음은 끝났어. 복음이고 뭐고. 그러니까 이 사건의 현장에서 예배당 말씀을 들을 때는 주께서 나를 구원한 것 같은데 그 사건을 오래 기억하겠다고 속으로 다짐에 다짐을 하고 철석같이 믿었는데 막상 문을 여니까 다른 사건, 류현진이 4:1로 이겼다는 사건 있잖아요. 이런 사건 만나면 거기에 푹 빠져서 한일축구가 중요한 거예요. 새로운 사건이 주목을 받으니까 갑자기 y=-x가 아니고 y=x가 되어서 반드시 이번에 류현진이 이겨야 돼. 이런 나의 기대와 여망과 더불어 속에서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막 나오는 거예요. “주여, 주 뜻대로 될 줄 믿습니다.” 스스로 기를 넣는 거예요.

 

기도 안 해도 구원받았는데 갑자기 기도할 거리가 생겼다는 이 말은, 주께서 y=x의 주님 절대좌표가 아니고 허무를 위하여 몰려나온 그런 좌표가 아니고 내가 잘 돼야 된다는 것, 내가 뛰어나야 되고, 내가 유명해야 되고, 내가 남한테 자랑거리가 있어야 된다는 그 중심으로 갑자기 모든 사건들이 중요한 사건과 중요하지 않은 사건들의 분류체제가 이뤄지는 거예요.

 

그래도 수요일, 주일에 오게 되면 다 털어낼 수 있는데 다음 주일 바빠서 못 오고 한 달, 두 달 지나면 완전히 자기중심으로 되서 나중에 올 때는 따지러 와요. 오랜만에 올 때는 따지러 와요. 저도 복음 아는데 왜 하는 일마다 꼬이게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한 판 하려 그런 식으로 올 수가 있어요.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하느냐 하면 왕과 허무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1절도 못 넘어가고 있어요. 지금부터 이걸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부터 슬슬 해볼게요. 예루살렘의 왕이라 할 때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습니다. 성전이 있다는 말은, 주님의 이름이 계시는 곳이 성전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높은 산에 산당이 있었어요. 그 산당이 높으니까 신과 하늘과 가깝다고 생각하고 높은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거예요. 하지만 이런 것은 언약적으로 끊어져있기 때문에 응답이 되지 않습니다. 이 산당에 우상의 제단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요시아 왕은 산당을 다 지워버리고 예루살렘만 주목하도록 했지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여기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우진 하나님께서 그 다음 사업을 계속 이어간다는 것이 중요하거든요. 예수님 오실 때까지.

 

인생이란 존재가 아니고 발생이거든요. 뭔가 밀리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신체를 보면 놀랍지 않습니까? 손톱을 자라라고 명령한 적 있습니까? 하루에 몇 번 물 줬습니까? 그냥 손톱 자라죠. 머리카락도 자라고. 학생들 키도 자라고. 누가 걱정한다고 키가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는 말은 네 육신은 네 소관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네 소관도 아닌데 네가 왜 무엇을 입을까, 마실까 자꾸 제삼자가 남의 육신에 간섭하기를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우리는 제삼자거든요. 자아라는 것은 허구적 개념이에요. 우리 육신에 탈이 나서, 육신에 문제가 생겨서 생겨버린 것이 자아라는 겁니다.

 

자아가 생기기 때문에 아담은 자기 마누라 탓을 하고 마누라는 뱀 탓을 한 거예요.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자아가 생겼고 핑계를 대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전도서에 보면 사람을 짐승으로 취급해요. 너나 나나 다 똑같아. 다 같은 것으로 돌아가는 거야. 전도서 93절에 사는 것도 미친 것이다. 전도서에 보면 잠시 있을 때는 인간 모습으로 보이고 코끼리 모습이지만 죽으면 코끼리든 인간이든 한 곳으로 가느니라. 하여튼 인간이란 자체를 인정하지 않아요. 그 이야기를 지금 예루살렘 왕이 하고 있습니다.

 

주의 이름이 그냥 계신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 나름대로 y=x라는 일관된 계획을 밀어붙인다면 지금 여기 예루살렘에 와야 될 사람들은 복 받기 위해서 와서는 안 되고 주님이 하시는 일에 말려들어갈 수 있도록 와야 되는 거예요. 주께서 계산하는 일이 따로 있을 것인데 그 일에 우리가 참여되었음을 감사하는 식으로 여기에 들어가야 됩니다.

 

그만큼 우리 자신은 자기 나름대로 계획이나 예상된 미래는 성전 앞에 설 때 이미 포기해야 돼요. “주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지금 말고 앞으로 하실 일에 대해서 휘말리게 하옵소서.” 한다면 하나님께서 어떤 응답을 하시겠습니까? 그 소리 안 해도 이미 휘말려들었어. 염려하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 그렇다면 우리가 성전을 찾는 이유는 뭐냐? 교체지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내 뜻을 주님의 뜻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내 뜻을 다 들고 와야 돼요. 교회부흥, 선교, 전도, 전부 다 가져와서 뒤집어야 돼요.

 

주님의 이름이 계획대로 된다는 것은 다른 게 아니고 여기 왕이 있는데 임시적인 왕이지요. 주의 이름이 왕이 되는 겁니다. 그 왕이라는 개념이 세상에서 말하는 왕 개념으로 나오지 않고 다윗의 약속, 다윗언약에 준해서 왕이 오는 거예요. 다윗언약에 준해서 되는 왕은 어떤 왕이냐 하면, 아들입니다. 그러니까 왕으로 오시는 분이 하나님의 아들로써 이 땅에 왕이 될 때만 천국이 됩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1장에서 천국을 아들의 나라.

 

아들이 있다는 말은 아버지가 있다는 말인데 그러면 아버지가 아들을 만들었으니까 만들기 전에 아들이 없을 때도 있었겠네.”라고 이야기하는 파가 있었어요. 그 아이디어가 어디서 잘못 됐느냐 하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를 세상에 있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확대시켜서 동일한 관계라고 오해해서 나온 아들 개념입니다.

 

그렇게 오해할 것 같으면 아들을 사용하지 말든지. 하나님께서는 그거야 내 마음이지. 너희들이 맞는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맞는다고 생각해보란 말이죠.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개념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임시적이고 상징적인 관계이지 실제로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우리는 몰라요.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모든 관계는 예수님을 경유해서 파악하세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해서 하게 되면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임시적인 관계가 아니에요.

 

그럼 아버지(하나님)와 아들은 어떤 관계냐 하면 이겁니다. 요한복음에 나와요. 아버지를 대변하는 분이 아들이에요. 이것이 아버지가 생각했던 주님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것을 대신하는, 심판도 대신하고 선택도 구원받을 것과 고난도 대신하고 모든 것을 아버지를 대신할 때 아들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겁니다. 이런 용어를 사용한 것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 때문에 그걸 피해가기 위해서 그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애초부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사람들에게 맞아죽으려고 오신 거예요. 맞아죽어야 아들 됨이 드러나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간단한 용어로 하게 되면 아들은 하나님의 고통, 하나님의 마음, 아픔을 대변해 준다고 볼 수 있어요. 하나님이 아프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죽는다. 그래서 이것은 인간들이 하나님은 영원하고 아프지도 않을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보다 월등하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마귀로부터 온 잘못된 하나님 관이라는 겁니다.

 

실제적으로 하나님은 어린양으로 죽으신 하나님입니다. 죽었기 때문에 어떤 의미냐? 의미를 붙이지 마세요. 그냥 죽은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은 어떤 분이냐? 십자가에 죽으신 분.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사랑이다. 사랑이란 말 붙이지 마세요. 그냥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거기다 사랑 붙이면 그 사랑 개념은 어디서 나온 것이냐 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을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갖다 붙인 셈이 돼요.

 

성경에서 사랑 개념은 항상 예수님이 죽었다는 쪽으로 쏠려야지 나도 누구 사랑하는데 그 사랑으로 주님도 사랑해야지. 이런 식으로 사랑 개념이 같이 얽이고 설길 문제는 아닙니다. 사랑에 대해서 요한일서는 말하기를 분명히 너희들이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다. 그러면 그 사랑 개념에서 우리는 단절이 일어나요. 인간 쪽에서 하나님 쪽으로 갈 때 반드시 단절이 일어납니다. 몰라. 모르겠어. 도대체 내가 아는 게 뭐란 말인가? 아무것도 몰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알아야 되느냐 말이죠. 알아서 구원받을 사람 없어요. 몰랐는데도 구원받았어요.

 

십자가 달릴 때 예수님이 강도에게 천국 갈 시간 얼마 안 남았는데 조직신학 책 가져와. 삼위일체 배워야지. 그렇게 삼위일체 가르치고 신학 가르치고. 모세오경 누가 가르쳤어? 모르겠는데요. 강도질하느라 가스관 타고 칼 들고 설치느라 몰랐습니다. 안 되겠네. 빨리 교육시켜야지. 이랬습니까? 그냥 네가 오늘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그냥 가버려요. 아는 것도 없고 십일조 한 적도 없고 예배 참석한 적도 없고. 장립 집사? 미친 소리하고 있네. 누가 강도를 장립 집사로 세워요. 장로도 아니고 집사도 아니고 목사도 아니고. 그냥 그날 밤에 갔어요. 낙원에 갔다니까. 지금 천국 가 있어요.

 

이게 예수님의 고난입니다. 주님의 고난입니다. 그 고난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뭘 해도 허무하다는 것을 수용해줘야 돼요. 한 평생 사는 것이 미친 짓이에요. 결혼하더라도 결혼하는 것이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고 결혼해야 돼요. 평생 결혼 안 해도 미친 짓이요. 평생 모든 것이 우리는 주님 앞에서 하나의 연기 부리는 것이고 의미 없는 것이다. 의미 무엇이냐고 묻지도 마세요. 왜냐하면 의미는 우리가 묻는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의미 몰라도 구원받아요. 의미 몰라도 구원받는데 의미 알아서 뭐 할 건데.

 

예루살렘의 왕은 망하기 위해서 온 겁니다. 이스라엘이 망하는 거예요. 망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래야 인간 쪽에서 나오는 개념이 하늘나라와 섞이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철저하게 예수님을 배신해야 돼요. 예수님을 미워해야 돼요. 미워해줘야 구원에 온전히 예수님의 공로만 드러날 뿐이에요. 주님만 사랑하고 내가 주님 좋아하고 해서 둘이 만나면 이것은 나중에 천국 가서 지 자랑하기 바빠요.

 

, 주님 참 많이 사랑했습니다.” “그래 알지. , 많이 사랑했지.”라고 할 줄 알았지? 일체 주께서 우리를 부정하지만 우리도 한 고집하는 사람이라 절대로 육신이 있는 한 육신의 본성을 어길 수 없어요. 육신의 본성이 뭐냐? 주님 앞에 대들고 주님을 미워하는 겁니다. 우리는 y=x라는 그래프를 절대로 포기 못합니다. 지금 내가 생각했으면 반드시 예상한 대로 하나님께서 해주셔야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용의가 돼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을 결별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나 여기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변곡점, 십자가 사건을 집어넣으니까 내가 이렇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든지 나는 아마 안 될 거야. 하든지 간에 이 자체가 십자가 사건 안에서 헛된 사건이 돼버려요. 그것을 미리 전도서에서 보여줍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니라.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하세요. 헛되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말자 아니라 헛되기 때문에 마음껏 헛된 짓을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부탁~합니다. 마음껏 헛된 짓을 하시고 다만 십자가 앞에 서서 내가 하는 모든 것이 나를 구원하는데 조금도 보탬이 되지 않는 그런 헛된 짓임을 깨닫는 헛됨이라는 역할을 하도록 주께서 조치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헛된 사람은 이 세상에 어떤 인간 앞에서도 꿀리지 않습니다. ? 내가 헛되기 때문에 저 인간도 100% 헛됩니다. 이제부터 여러분들이 백설공주가 되셔서 거울 앞에 물으세요.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 누가 제일 헛되냐? 거울 앞의 왕비님도 헛되지만 더 헛된 여자가 있습니다. 저 숲속에 있는 백설 공주입니다. 그러면 그게 시기 나서 왕비가 사과에 살충제 뿌려서 공주 찾아가겠습니까? 안 찾아가지요. , 헛되구나. 삼성그룹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삼성그룹 임원들 고민이에요. 본인들은 이야기합니다. 이 자리 다 소용없는 기라. 삼성그룹 임원 아무것도 소용없는 기라. 다 헛된 겁니다. 마음껏 헛되다고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주님께서 헛됨의 역할을 하도록 언약 속에 집어넣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겁니다. 그 예수님을 우리는 왕으로서 모시는 겁니다.

 

 

내일 합시다.

 첨부파일 : 2013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2강.hwp (52.0K), Down: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