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아

수련회를 다녀와서-부제 원망하는 삶

아빠와 함께 2024. 8. 11. 08:46

십자가를 원망하는 인생이었다. 따지고 보면 모든 게 원망이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뱉은 모든 말들은 원망이었다. 앞으로도 원망하며 살 게 된다는 것도 기정사실이다. 감사마저도 원망이었다. 뭘 부어도, 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라는 이름, 욕망의 구렁에서 올라오는 것은 십자가에 대한 원망이다. 거부할 수 없는데 거부해야만 하는, 거부하고 싶은, 거부할 수밖에 없는, 거부는 내 운명이다. 이 육신의 한계를 뚫고 벗어날 수 없다. 한 발 다가가면 두 발 도망가는 바보 같은 사랑을 하고 있다. 사랑이라고 하기엔 너무 궁색한 변명이나 해대고 있는 것 같기에 차라리 나를 위한 의미나 챙겨보고자 하는 짓이라고 고백하고 싶다.

지겹도록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 말의 세계에 갇혀 탈출할 수 없는 자포자기의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그럼에도 말의 세계는 여전히 좋다. 말은 단지 말뿐인데도 때로는 기분을 좋게 한다. 휴식을 주기도 한다.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말만 하지 않는다면 말보다 더 달콤한 디저트는 없을 것 같다. 우리가 이 말의 세계를 떠나서 어디로 가리요. “나”여기 살아있음의 힌트를 무한히 주면서도 결코 정답은 맞출 수 없도록 킬러문항을 출제하는 그 쾌감. 나는 소중하니까. 나 외에는 다른 그 무엇도 용납할 수 없다. 내가 여전히 살아있음만 증명해주면 된다. 나를 인정해주기만 하면 된다. 대신 가까이 다가오지는 말아야 한다. 내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 나는 다치고 싶지 않다. 나는 내가 지킬 거니까.

그럼에도 실상은 타인의 평가에 나는 죽어가고 있다. 그것도 시름시름 앓으면서 말이다. 타인의 말 한마디에 목숨 줄이 달려있어 떨어질까 굽실거리고 빌빌거리면서 차마 죽지 못해서 살아가야만 하는 구질구질하고도 구차한 인생이다. 벌레는 그 자체로 벌레라 평가당하지 않는데, 어쩔 땐 벌레만도 못한 평가를 받고 있다는 느낌을 맛본다. 벌레만도 못한 인생이다. 타인이 내려준 평가는 어쩌면 나 스스로가 거기에 맞춰 내린 평가이고 그 평가에 대한 한계를 뚫고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또 다른 한계다. 한계는 한계 너머를 볼 수 없고, 갈 수 없다는 것에 있어서 한계인 것이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그냥 이대로 살다가 죽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믿었던 종교도 한계다. 살아온 환경 속에서 내 나름대로 조립한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십자가, 구원, 복음, 믿음..., 소리 없이 야금야금 좀 먹듯 갉아먹은 흔적만 가득한 이 시점에서 펼쳐진 2024년 7월 28~30일에 열린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의 장은 좀 먹은 흔적을 아예 없애버린다. 누적된 지식들을 삭제시키고 다시 리셋해도 아쉬울 게 없다.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고 내일은 내일이다. 단절이다. 그러므로 이제 내 역사는 필요치 않다. 저주받아 마땅한 모든 인생들에게 종지부를 찍어버린 이스라엘 역사 안에 내가 들어가 있기에 따로 챙길 것이 없다.

준비된 빵이 있었다. 크림빵이었다. 원래는 반이 갈라진 빵 안에 크림이 있었는데 크림을 제거하고 소세지를 끼워 넣었다. 소세지를 빼면 그냥 빵이다. 빵은 이스라엘 역사고 소세지는 언약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를 해석함에 있어서 빵에 소세지를 끼워서 해석하게 되면 해석이 될 수 없다. 언약과 역사를 둘로 분리시켜서 따로 이해를 해야만 한다. 같이 해버리면 역사와 그 역사에 포함된 나를 해석할 수 있는 재주가 없다. 언약은 언약 나름대로 해야 할 일이 있고 이스라엘의 역사는 나름대로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같이 섞여서 할 일을 한다면 역사는 언약을 도용하고 포장해서 순수가 없는 위장이 되기 때문이다.

어두운 곳에서 스크린에 비치는 영화의 내용을 평가하지만 정작 그 영화에 참여한 적이 없는 것처럼, 무슨 수로 스크린 바깥에서 스크린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영화의 해석은 자기가 해놓고 그 해석에 끼어들지 않고 빠져버린다. 자기는 안 다친다. 자기를 숨겨놓고 바깥세상을 평가한다는 것은 반칙이다. 하나님께서 신명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네가 생각하는 평가의 한계를 뚫으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평가는 무엇이었을까? 소세지가 없는 그냥 빵이었다. 언약이 없이 역사로만 생각하고 이해했던 평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바탕이 기본적으로 깔려야 모든 것이 가능하다. 자기를 자랑하고 싶어서 신마저 고쳐서 자기이야기를 해야만 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하나님도 아실 것이다. 내가 하는 일들도 하나님이 찬성해줄 것이다. 내가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하는 것에 힘을 보태줄 것이다. 내가 사는 것에만 급급한 것도 하나님은 이해해주실 것이다. 내가 살아야 하나님도 손해 보지 않을 것이다. 계속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내 역사다. 빵뿐이다. 나를 어떻게 버릴 수가 없다.

뭘 어떻게 한다 해도 차마 나는 나를 버릴 수 없는 한계, 뚫을 수 없는 한계를 깔아놓고 언약이라는 소세지가 이스라엘 내부에 침투해서 이스라엘의 인식과 한계를 다 긁어낸다. 그럴 때 남는 것은 빈 공백이다. 구조라는 것은 특성상 중심이 있는데 율법은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그 중심이 빠져있는 구조로 율법은 개입된다. 빈 공백, 빈 중심, 비어있는 것에 인간들은 적응할 수 없다. 채워야 직성이 풀린다. 빈 노트에 무언가를 써야만하듯이. 엇갈린 생각들로 채워진다. 빵 안에 소세지가 들어감으로 빵은 더욱 풍성하고 맛있어졌다. 언약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언약 없는 이방나라를 조지면서도 정작 언약을 배반하고 이방신을 섬겼다. 율법의 빈 중심마저도 내 중심으로 바꿔치기 한 역사가 이스라엘 역사다. 그렇게 해서라도 계속해서 하나님은 율법을 따라오게 하고 경험하게 하고 나서는 아무것도 없게 하신다. 율법을 율법 속으로 사라지게 한다. 율법이라는 문자가 의인화되어 율법을 완성시키는 사람으로 나타날 때 “한계 뚫기”다.

모세나 예수님이 사는 환경은 광야였다. 그 광야를 이스라엘 백성도 살 수 있는 환경이라 오해했다. 광야는 그 자체로 떠날 곳이지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물이 없고 먹을 것이 없는 광야에 들어섰을 때 이스라엘은 한계를 알았다. 살려고 했지 떠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한계는 주님이 뚫어주시는 것이지 자기가 뚫으면 안 된다. 참, 웃기는 것은 자기가 뚫어놓고 주님이 뚫었다고 우긴다. 남이 내려주는 평가에 그만 휘둘리고 싶은데 여전히 나는 남들이 내뱉는 무수한 말들에 놀아나며 살고 있다. 복음으로 살지 못하면서, 십자가 은혜로 살지 못하면서, 유령으로 살지 못하면서 말만 살아있다. 차라리 말이나 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 말씀은 안 들려오고 안 듣는데 어쩌면 그렇게도 남들의 말은 예민하게 들려오고 잘 듣는지 모르겠다.

기막힌 반전이다. 광야라는 설정된 환경 안에서 40년 동안 뭘 할 것인지, 일상이 이미 계획된 프로그램으로 실행되어 있었다. 주님의 CPU중앙처리장치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계처럼 움직였다. 애굽에서 나오는 유일한 원칙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였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문설주에 발려지는 순간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출애굽은 살아서 나온 것이 아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그 가운데를 길처럼 건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뒤에 쫓아오는 애굽 군대에 대한 공포와 언제 다시 바닷물이 합쳐져 수장될 위기에 놓이게 될지 모르는 두려움에 휩싸여 산송장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들어선 출애굽의 여정에서 그들은 원망했고 불평했고 발악했다.

애굽이 그리운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광야에서 죽게 하려고 데리고 나왔냐고 쏟아낸 모세와 아론에 대한 원망은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다.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하고 마실 것을 주어야 하고 입을 것을 주어야 하고 잠잘 곳을 주어야 하고 가족을 주어야 함이 마땅한지. 하나님이 시나리오를 썼기 때문이다. 그 시나리오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인데도 그들은 이용당하고 있음을 알 리가 없다. 선악과 따먹은 상처가 곪아서 피고름이 나온다. 썩어서 죽으라는 것이다. 썩은 시체를 불태우면 모든 것이 깔끔하다.

육신의 아버지의 시신이 불태워졌을 때는 허무했다. 78년 묵은 죄인이 한줌의 재로 변한다는 것에. 육은 긴 시간인데 영은 한 순간이다. 시간의 기억 속에 잠재되어 있는 파편들이 무의식적으로 떠오를 때가 있다. 어느 날 아버지는 퇴근하고 오셔서 집에서 키웠던 오리의 목을 비틀어 죽이고 피를 내어 마셨다. 단순히 몸에 좋다고. 친구들이랑 노는 것에 빠져서 그만 집에 연탄불을 꺼트리고 말았는데 그 날 아버지의 신발로 맞았다. 한여름에는 밭일을 시키시더니 노랗고 단 참외를 사주셨다. 나이 드신 아버지는 무에 멸치를 넣어 조림을 해달라고 하셨는데 해주고 싶지 않아서 맛없다고 일부러 안 해드렸다. 아버지는 죽을 기한을 아셨나 보다. 내 종교적 열심히 아버지를 회개시켜보겠다고 시편 90편을 읽어드렸었는데 그것이 생각이 나셨는지 그 구절을 찾아달라고 하신 후 소리 내시며 몇 번이고 읽으셨다. 이 모든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무슨 소용이 있는 일들이었을까? 육을 구원할 수 있는 일들에 속하기라도 하는 일들이었을까?

선악과 따먹은 상처를 심어놓고 그 상처가 자라도록 사건이라는 영양제를 주사한다. 무럭무럭 자란다. 열매도 열린다. 그리고 베임 당한다. 율법을 주신 분, 율법을 완성하신 분,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신 분이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셔서 자기 백성들의 손에 죽는다.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고자 하는 마귀의 형상 속에 갇힌 그 의로 예수님을 내몰아 나무에 달리게 했다.

이렇게 해석한다는 것조차도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해석함에 있어 저주받은 해석이다. 해석할 수 없는 것을 해석하는 것이 상처를 주고 미끼를 던져 상처를 포획하는 하나님의 수법에 이용당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기에 진노를 쌓는 일을 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에 의해,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십자가. 십자가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었기에 인간의 협조 없이는 십자가로 인한 율법완성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착각에 빠져 악마의 하수인이요, 마귀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음을 잊었다. 하나님의 일에 인간이 주인공인 줄로 이해한 해석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스로 나무에 매달려 죽음으로 율법을 완성하셨다. 언약의 긴긴 과정이 필요했다. 혼자서만 살겠다고 복음의 틀을 벗어나지 않고 내 것도 챙기면서 적당하게 얼버무리고 살면서, 그것이 150년 동안이나 성전 문이 닳도록 들락날락거렸던 바리새인의 자기의의 틀, 내 중심의 구조라는 것은 눈곱만큼도 의심 안 한다. 그 어떤 누구도 사건이 찾아오지 않으면 분별할 수 없다. 다 망하고 다 불타버리고 다 저주받아도 혼자만 살아있기를 바라는 마음, 내 행함으로 구원받겠다는 마음, 바리새인적인 그 마음이 내 마음임을 부인할 수 없다.

사건이 덮쳐진 적이 없다면 우리의 연수는 일반이면 칠십이고 강건하면 팔십이다. 수고와 슬픔뿐인 연수를 자랑한들 무엇 하리. 신속히 날아갈 뿐이다. 주의 노의 능력을 누가 알며 주의 진노를 누가 두려워할까.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이다. 홍수에 쓸려 내려가는 인생. 아침에 잠간 피었다가 저녁이 되면 말라서 불쏘시개가 되는 풀과 같은 인생임을 알게 하셨다면 사건은 우리를 덮친 것이다.

엘리사가 우리에게 활로 땅을 치라 한다면 우리는 요아스 왕과 마찬가지로 세 번 밖에 땅을 칠 수 없는 자들이다. 우리 각자 앞에 놓여 있는 한계는 확정된 저주를 불러일으킨다. 마술사가 마법을 이용해서 저주를 푸는 것처럼 율법의 저주는 풀 수 있는 게 아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율법은 그 자체로서 불이다. 율법 속에서 불이 나오고 그 불은 모든 것을 싹 다 불태워버리고 다시 율법 속으로 사라진다. 율법이 쏘아대는 것은 죄다. 그 죄의 권능은 필히 사망이라는 결과물을 내놓아야 한다. 그 율법이 원하는 제물은 딱 한 사람 한 분에게 국한된다.

율법은 이스라엘에게 준 것이 아니었음이 발각된다. 율법을 주시고 회수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에게 주신 율법, 율례와 계명을 대대로 지키면 약속된 땅에서 삼사 대에 걸쳐, 아니 천대에 걸쳐 복을 받을 줄로 착각했던 것이다. 그 율법에는 나무에 달려 죽는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가 들어있다. 왜 나무에 달려 죽어야만 하는가? 율법은 저주만 있는 게 아니라 복도 있다. 율법 받은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는 것이 최종목적이지만 그 이면에는 망한 이스라엘에서 다시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드시는 것 또한 최종목적이 된다.

이스라엘은 떠나고 싶지 않았다. 애굽에서 태어나 애굽에서 살다가 애굽에서 죽는 것이 그들의 꾸었던 소박한 꿈이다. 비록 강대국인 애굽의 종살이는 하고 있지만 하루 세끼가 보장되고 잠잘 곳이 있고 가족을 번성시킬 수만 있다면 “여기가 좋사오니” 이 사랑에 그 어떤 것도 태클을 걸지 말기를 바란다. 그것이 눈 먼 사랑이라도 사랑은 사랑이라고 우기고 싶다. 이런 사고방식에 사로잡혀서 살아가고 있는 그들에게 찾아온 것은 더 가중된 노역이었다. 짚이 없는데 벽돌의 양은 늘어났고 그 기한을 맞추라고 채찍질 당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억지로 애굽에서 떠나도록 만드신다. 그들은 이제는 출애굽이 살길이라고 여겨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는 공간이동을 생각했다. 자기 것을 부둥켜안은 채 애굽에서 약속의 땅으로 한 발짝만 움직여 순간이동하면 되는 줄로 말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은 착각이었고 오해였다. 피의 전쟁이 개시되었다. 죽음의 천사가 들이닥쳤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애굽전역에 죽음을 휘둘렀다. 오직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문설주에 발려진 그 피만을 보고 내가 너를 넘어가리라. 누가 이런 것을 원했는데요? 잊고 살았던 선조들이 소환된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이 꿈틀대면서 땅이 흔들린다.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아브라함을 찾아와 고향을 떠나라고 하신다. 자식을 주시고 땅을 주시고 하늘에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민족을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맹세하신다. 일개 개인인 너를 통해서 나라를 만드시겠다는 뜻이다. 이 일에 있어서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 되고 저주의 근원이 된다. 그렇다면 모든 게 순탄하게 흘러가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분명히 주신다고 하신 약속의 자식은 생기기 않았다. 여종이나 취해서 대를 이어보겠다고 태어난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한계다. 그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 끝이었을까? 진작에 주시지도 않았으면서도, 본부인 사라와 여종 하갈의 싸움으로 가정이 파탄이 날 지경에 이르게 하셨으면서도 이제 겨우 아브라함 백세에 생긴 독자 이삭마저도 모리아산에 가서 제물로 바치라 하신다. ‘설마 죽이기야 하시겠어.’라는 생각이 또 다시 드러난 아브라함의 한계다. 수풀 속에 감춰진 양, 이삭 대신 바쳐진 그 양의 죽음은 이삭 대신 죽은 거고, 이미 죽은 거나 다름 없는 자식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었다는 것까지 연결시킬 수 없는 것도 아브라함의 한계다.

이삭은 장자인 에서를 사랑해서 그에게 모든 축북을 빌기 위한 힘을 얻고자 사냥한 고기요리를 먹고자 했다. 결국에는 야곱의 속임수에 속아 야곱에게 모든 복이 돌아가고 말았다. 뒤늦게 돌아온 에서에게마저 저주를 빌어야만 했다. 리브가 뱃속에 쌍둥이가 잉태되어 있을 때부터 이미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약속된 말씀이 엄연히 살아있음을 나중에 인정하게 되는 이삭의 한계다.

야곱은 열 두 명의 아들 중에서 요셉만 편애한다. 요셉이 형들에 의해 애굽에 팔려간 줄도 모르고 채색 옷에 묻어 있는 짐승의 피를 보고 죽은 줄로 알고 이제 자신은 음부에 내려가는 자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그런 요셉이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에 의해 먼저 앞서 애굽에 보내심을 받아 팔려가야만 했던 것을 꿈에도 몰랐던 것이 야곱의 한계다.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에게 스스로 세운 완성된 언약을 미리 내다보면서 이리저리 끌고 가시는 언약적 도구로 활용하기로 작정하셨다면 그 누구라 할지라도 어떤 일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다 할지라도 아무 상관이 없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역사적 이스라엘을 언약으로 관통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언약이나 율법이 없는 이스라엘은 역사만 있는 이스라엘이다. 그때에 존재했던 이방나라들과 똑같은 이방나라일 뿐이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건 언약도 있고 율법도 있는 이스라엘이 왜 망해야 하는지, 왜 역사적 이스라엘로 변질되어야만 했는지,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원래 이방나라고 원래 망하고 원래 저주받아야 하는 모든 세상나라에 대한 판단규정에서 택한 이스라엘백성마저 빗겨갈 수 없다는 것을 눈치 채야 한다.

언약이, 율법이 움직여서 찾아낸 이스라엘은 미끼다. 낚싯대에 꿰진 미끼는 물고기를 낚기 위해서다. 이스라엘이라는 미끼는 미끼 자체가 망함으로 말미암아 전 인류를 망하게 한다. 이스라엘이 저주받았다면 전 인류가 저주받은 것이다. 이스라엘이 불타버렸다면 전 인류가 불 타 버린 것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다면 전 인류가 추방된 것이다. 아담에게 내려진 말씀 “너는 정녕 죽으리라”는 전 인류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열조에게 돌아간 아담의 후손들, 그 열조가 물려준 역사만이 지금도 살아있다.

이 세상은 여기까지만 안다. 하나님이란 분이 이스라엘 백성을 택해놓고 선민 이스라엘을 망하게 했다는 여기까지만. 성령의 잉태로 태어나 33년을 살다가 십자가라는 처참한 사형도구에 죽임당한 예수님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너무 무섭다. 거론하기조차 싫은 이야기다. 예수라는 이름도 부르기 역겹다. 이토록 잔인한 본심이 인간들 속에 심겨져 있다고 해서, 선악과 따먹은 악마의 본심이 숨겨져 있다고 해서, 그렇다고 해서 말씀이 육신이 된 이 현실을 막을 수는 없다. 밀려오는 파도를 손바닥으로 막을 수는 없는 것처럼 “확정된 저주”를 피할 길이 없다.

인간의 현실은 일상의 반복을 피하지 못한다. 연결된 서수의 운동에너지만을 발산하며 사는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미지의 X라는 어떤 힘에 굴복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는데, 그것 때문에 알 수 없는 분노가 매일 치밀어 오른다. 가만히 있다가도 생뚱맞게 복수심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이유가 없다는 게 문제다. 너나가 모인 우리로 사이좋게 서수로 살고 싶지만 보이지 않는 기싸움에서 밀리지 않으려는 나라는 기수의 존재를 모두 다 들키지 않게 숨기고 있을 뿐이다.

모세가 마지막 경계선, 광야와 약속의 땅의 경계선에 서서 율법과 인간의 만남에 있었던 모든 사건을 재해석하면서 언급한 것이 신명기다. 율법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현재 우리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유월절 어린 양의 요소가 나오는 우리여야 한다. 수적 일의성에서 질적 일의성으로 바뀌는 원리는 어린 양의 피에 대한 취지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다. 수가 아무리 많은들 무엇이 유익하리요. 그 수가 아무리 많아도 개인이라는 하나를 벗어나지 못하기에 하나의 수만 있을 뿐이다. 하나, 하나가 모여 둘이 되어도 하나다. 개인이 모여 가족이 되고 가족을 묶어 사회가 되고 그 사회를 지배하는 국가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수적 일의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라는 하나의 존재를 결코 포기할 수 없으니까. 내가 없으면 가족도 없고 내가 없으면 사회도 없고 내가 없으면 국가도 없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수적 일의성을 벗어날 수 없는 집단이 자기라는 존재를 포기하고 오직 하나에 속해 자기가 사라지는 일이 출몰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뿌려진 하나, 하나, 하나는 그냥 하나다. 어린 양의 피로 말미암아서. “질적 일의성”에 속해 버린 것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환경은 광야라는 환경이다. 광야 없는 약속의 땅은 없다. 율법이 있지 아니하면 이 세상에 어느 것도 약속의 땅이 아니라는 것을 광야를 통해서 절실히 느껴야만 한다. 언약이 있는 백성과 언약이 없는 백성과의 차이가 주어지는 하나님의 원칙이 흐르는 곳, 그곳이 곧 약속의 땅이고 천국이다. 그 차이는 전쟁을 통해서 드러난다. 이스라엘의 승리가 아니고 하나님의 승리요, 하나님의 이름의 거룩한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맛사에서 하나님을 시험하고 므리바에서 하나님과 다투는 인생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메아리치도록 하신다.

율법 속에는 길이 있다. 그 길에서만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보인다. 율법 속의 길은 제사다. 제사가 풍성하게 드려지는 곳, 성전은 피가 흘러넘치는 곳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배반한 현장보존을 해둔 언약궤가 있는 곳이다. 그런데도 비어 있는 공간, 비어 있는 시간이다. 긴긴 그림자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기에 그렇다. 실체가 있었기에 그림자가 있었다. 단지 죄악이 관영할 때까지 비밀에 붙여놓았기 때문이다. 짐승의 죽음이 사람의 죽음이 될 때, 그 때가 비밀의 열쇠가 풀리는 때이다. 양을 잡다가 이제는 사람을 잡는다. 죄악의 관영이다.

율법은 할 일을 다하고 사라진다. 율법에 들어있는 복과 저주도 사라진다. 율법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켜야만 했던 그 시절도 끝이다. 율법의 완성으로 오신 예수님의 말씀이 전부요 복이요 저주다. 이스라엘의 망함으로 퍼져버린 율법, 율법의 경계선이 무너지고 율법은 이 세상에 바이러스가 되어 전 인류를 감염시킨다. 바이러스를 없앨 수 있는 방법은 다 태우는 것이다. 이 율법의 저주에 예수님마저 끼어들어 저주받았다. 십자가에서 저주받고 완성된 새언약, 말씀만이 살아있다. 죽는 것이 저주가 아니라 복이라는 것을, 이 세상에 태어남 자체가 저주라는 것을, 복을 주시기 위해 태어나게 했다는 것을, 입이 있어도 말을 할 수 없게 만든다. 할 말이 있다면 감사라는 말 외에는 없다.

수적 일의성에서 질적 일의성으로, 수적으로 내 존재를 지키려는 의미에서 어린 양의 피로 넘어오는 질적 일의성의 새로운 집단을 구성하는 방식에서 신명기 율법이 주어진 것이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서 죽는 것이 자연적인 것이다. 그걸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 보편적 현상이다. 거기에서 좀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해서 흙이니까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고상함도 있다. 그런데 여기에 모든 해석을 묵살시키는 언약이 개입된다. 언약적 속성 안에 들어있는 율법은 저주를 유발해서 죽음을 생산해내고 그 죽음은 생명을 잉태한다. 인간배제다.

그래서 아마도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의 신화처럼 다가올 수 있다. 어차피 죽을 인간을 이용해서 생명나무의 현실성을 구현하기 위한 하나님의 목적은 선악과 따먹은 인간을 추방시키고 두루 도는 화염검을 든 천사들로 에덴동산을 지키게 하셨다. 생명나무의 실체가 현실이 되기까지 하나님의 일하심은 지칠 줄 모른다.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심으로 다른 민족과 극단적인 차별화를 시킨 하나님의 사랑이 크면 클수록 질투는 불같다. 질투함으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대상은 다 제거된다. 나중에는 이스라엘마저 질투의 대상이 되어 제거된다. 이스라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심겨진 생명나무, 언약의 실체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내에 발생시킨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는 구제당하는 빚을 지고 있지만 갚을 길이 없는 자들이다. 이들에게 나라는 것은 없다. 자존심이고 자존감이고 뭐고 다 날아갔다. 바로 이처럼 우리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로서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머리가 있고 눈이 있고 코가 있고 입이 있더라도 그것들을 위하여 요구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붙이시매 전쟁을 할 수밖에 없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는 전쟁으로 인해 발생되었고 그들에게 베푸는 출애굽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이스라엘 내부는 제거 대상이다. 어린양이 대신 죽어 얻은 생명의 노선에서 이탈되어 거저 얻은 구원의 은혜를 갚는다고 설쳐대며, 제거하기 위한 방식으로 주신 율법을 오히려 지켜서 구원의 결과물로 삼고자 했다.

율법이 가리켜 지시하는 것은 딱 한 가지다. 유월절 어린양을 왜 잡았는가?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을 왜 죽였는가? 이스라엘은 모세의 돌판을 받았지만 이제 우리는 살아있는 말씀판이 된다. 원망하고 시험하고 다투는 일이 그대로 재현된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새언약을 성령이 부어주면 이스라엘 대신 죽은 어린양의 피 흘림이 나 대신 죽은 예수님의 피 흘림이 된다. 수적 일의성이 아니라 질적 일의성으로 바꿔치기 당한 현실. 율법이 속해버린 말씀의 현실 안으로 들어가 다 불태워버리는 심판의 자리에 그냥 참여하기만 하면 되는 “율법의 경로”를 보여준다.

빵이라는 역사만 있다면 문제될 게 없다. 망하면 이스라엘은 끝이라는 생각과 더불어서 유혹하듯 던져지는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이 전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이 있다. 빵 속에 끼워진 것이 있다. 언약이라는 소세지다. 이걸 눈에 보이지 않게 들리지 않게 치워버릴 재주와 능력이 인간에게 없다. 불가항력이다. 고생하다 흙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정녕 죽으리니, 죽음이 심판의 증거라는 발상의 전환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죽는 것이 말씀대로 되어진 것을 죽으면서도 몰라야 된다. 주님이 앞서서 이끄시고 기다렸던 곳이 계셨다. 움직이는 성막에서 고정된 성전으로의 완성이었다.

하나님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 모세를 부르셨다. 그런데 모세가 보니 떨기나무에는 불이 붙었으나 떨기나무는 타고 있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불타버리기 위해서 성전은 지어졌지만, 불이 붙었으나 떨기나무가 타지 않은 것처럼 불탄 성전에서 새 성전이 세워진다. 끝은 끝이 아니라 새로움이다. 기쁜 소식이 된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 혈통이 아닌 성령으로 잉태하사 다윗언약을 새언약으로 바꿔버리신 예수님. 하나님은 이 예수님하고만 상대하신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거룩한 곳에 섰으니 신발을 벗으라고 했다. 하나님은 이후에 약속에 땅에 들어선 여호수아에게도 마찬가지로 나타나신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신약에서 세례요한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한다. 어떻게 양이 사람이 되고 사람이 양이 되는가? 바로 율법이라는 다리를 통해서 신명기에서 보여주었다. 바로 레위지파다. 제사 드리기 위해 뽑힌 지파이다. 제사장은 성소에 들어갈 때 이미 죽은 자로 들어간다. 죽은 자로 들어갔다가 산자로 나오는데 그것은 제물의 희생덕분이다. 율법에 저촉된 백성들의 죄를 모아 제사를 드리고 제물의 죽음이 죄사함을 가져다준다. 진작 죽어야 되지만 지금껏 살아있다는 것은 어린양이 대신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율법이 작동되는 조건하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레위지파는 이스라엘의 모터요 엔진이다.

그러나 이 레위지파마저 형식적인 제사를 드림으로 실패하고 만다. 레위지파 대신 유다지파 출생 다윗을 왕으로 등극시킨다. 다윗은 왕이 되어 일천번제를 드리면서 궁정의 웅장함에 비해 하나님이 계신 곳은 누추하니 하나님이 계신 곳 성전을 짓겠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정작 다윗은 전쟁으로 손에 많은 피가 묻었다는 이유로 성전을 짓지 못하고 하시고 설계한 성전을 다윗의 아들 솔로몬으로 짓게 하신다. 솔로몬시대에 누린 태평성대와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에서 안연하게 누린 안식은 오로지 성전에서 드려지는 제사가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견고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레위지파에서 유다지파로 넘어온 제사마저 실패한다. 그 화려했던 솔로몬의 성전은 불태워졌지만 불 탄 그루터기에서 새 순이 돋는다. 다윗의 자손으로 예수님은 오셨다. “어린양과 동행”이다.

말의 세계는 내 의미를 절대 포기하지 못하는 세계이다. 말씀의 세계는 자기 의미만을 붙들고 있는 인간에게 맞아 죽는 세계이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으면 됐지, 십자가 복음 알았으면 됐지, 여전히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환경은 사건을 일으키고 내 존재가 살아있으면 예수님은 부재하심이 된다. 반대로 예수님이 살아계시면 내 존재는 없는 존재가 된다. 부재와 없음의 차이는 내 구원이 내존재의 최종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의 구원만이 최종의미가 된다는 것으로 생각해본다. 예수님의 죽음만이 예수 안이라는 천국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원리가 된다. 우리의 환경은 오로지 예수님의 공로만 드러내는 구원된 죄인이 되어야 마땅하다.

신명기에서 주어진 율법뿐만 아니라 모든 율법은 신약에 와서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통한다. 율법은 복과 저주를 전달하고 선악과 따먹고 끊어진 인간은 저주를 양산할 뿐이고 생명나무이신 예수님만이 율법을 다 이루심으로 복이 되신다. 율법에서 죄가 되는 시절은 끝났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가 되는 시절이 왔다. 모든 게 죄다. 그래서 우리의 육신 안에서 말씀은 펄펄 살아서 움직이는 것이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이 고백 하나로 신명기와 로마서의 만남은 이루어진다.

얍복 강가에서 밤새도록 씨름하며 환도뼈가 위골되어 절름발이가 된 야곱의 밤은 여호와의 밤이다. 그 밤으로 이스라엘의 모든 기억마저도 부정해버리는 시간요소를 삽입시켜 끊어주신다. 모든 시간은 안식년이고 희년이다. 과거에는 종이었지만 현재는 자유인이 되었다. 시간의 종결자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시간은 정지되어 있다.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 육신에 할례를 행할 수는 있었다. 분명 말씀으로 지시하셨으나 말로 변질되어 ‘그까짓 것 남성의 생식기 끝을 자르면 되지 않겠느냐’는 오기로 말이다. 그러나 마음에 할례를 행할 수는 없었다.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말로는 해결책이 없는 말씀이 왔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다 이루심만이 살아있어 분명한 차이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말의 세계와 말씀의 세계”다.

하나님의 율법해석의 작동에 의해서 추가적으로 새로운 복이 나오고 새로운 저주가 나온다. 우리가 생각하는 복과 저주와 차원이 다르다. 율법을 지키면 복이고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저주가 발동되는데, 어차피 모든 인간은 율법에 저촉되기에 일괄 저주가 팔자고 운명이다. 그런데 유월절 어린양이 이스라엘에게 들어왔다는 것은 의외의 것, 여분의 것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냥 복이다. 죽지 못하는 존재에서 유월절 양에게 추가된 하나님의 율법 해석 작용 때문에 복과 저주의 마지막 모습에 대해서는 우리가 손을 떼는 입장에 있다. 하나님 없이 죽는 상태는 저주로 마감되는데 유월절 양이 동반되면서 죽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 무덤 속에서 기이한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 주님의 율법해석이 작용해서 일방적으로 천국 갈 자는 천국으로 지옥 갈 자는 지옥으로 간다. 우리의 미래, 종말은 신명기의 내막에 다 들어있다. 어떻게 해도 하나님을 반드시 버리고 우상을 섬기고 귀신을 섬기며 이방신을 따라갈 것이다. 한 마디로 너는 네 인생에서 손 떼라는 거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나, 계시지 않나, 하나님이 있나, 없나, 이 본심이 발각될 때까지 죽어도 못 죽는다.

무엇이 복이고 무엇이 저주인가?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의 취지가 살아있으면 복이고 이것이 빠져 있으면 저주다. 악인은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다. 그 힘이 건강하다. 재앙도 없다. 고난도 없다. 항상 평안하다. 그런 악인을 질시했고 미끄러질 뻔 했으나 성소에 가서야 깨달았다. 내가 행복하고 고난 없는 게 복이 아니라는 것을. 복은 이미 유월절 어린양에게 일임되어 있는 것이다. 이 복의 실체는 보혜사(변호사)로 오신 첫 번째 예수님으로, 두 번째 보혜사(변호사)이신 성령님이 오셔서 마감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에게 주어진 혜택은 하나님의 율법해석에 아예 우리가 포함되어 버린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다.

선악과 따먹은 마귀의 본성을 물려받은 우리는 복도 싫고 저주도 싫다. 둘 다 싫다. 그냥 살고 싶다. 멍 때리면서. 그렇다면 하나님은 기어코 그리심(축복)산에 여섯 지파를 에발(저주)산에 여섯 지파를 세우실 것이다. 세운 그들을 통해서 율법을 외치게 한다. 외치면 하나님의 언약구조에 의해 새로운 현실을, 낯선 현실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이게 싫다. 따로 생각해 둔 내 현실을 다치기 싫어서다. 그것은 에덴동산에 심어 있는 두 개의 나무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가 있다는 이게 싫었던 악마의 본성을 닮음이다. 단일, 하나를 좋아한다. 나는 나만 좋아한다.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부단히도 시험하며 주도해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 열 번이나 거역하고도 또 거역하는 역사였다. 반석을 쳐서 그 깨진 반석에서 물이 나왔다.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쳤던 것이다. 그래도 믿을 수 없었다. 새로운 현실, 낯선 현실이 주어지기 전까지는. 유월절 어린양이 사람이 되어 나무에 달려 저주받아 죽기 전까지는. 나 “대신” 저주받아 죽은 그 “대신”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장착되기 전까지는. 하나님 자신을 쳤든 말든 반석에서 나오는 시원한 물만 마시면 그걸로 욕망은 잠시 채워졌다. 그러나 이후로는 평가의 한계를 뚫어주셨다. 천국도 내가 알아서 갔고 지옥도 내가 알아서 갔지만, 천국도 가라 하면 가고 지옥도 가라 하면 가는 주의 결정, 확정된 결정에 의해 판가름 났음을 인정할 수 있다. 이제 이후로는. 그렇다. 이제 이후로는 우리는 행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믿을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을 버리고자 부단히도 애쓰며 요동치는 우리에게 주어진 “복과 저주”다.

야곱의 복을 열 두 명의 자식이 그대로 전수받는다. 질적 일의성의 다양성이다. 이 원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원리를 바탕으로 해서 그대로 적용된다. 내가 믿고 싶은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복음을 만들어낸다. 주님과의 접촉이 가능하지 않은 존재라는 부정적인 요소가 빠져있음으로 인해 이 앎은 신학적인 지식에 불과할 뿐이다. 다이아몬드에는 단일적인 중심이 있고 각각의 다면체로 장식되어 있다. 본격적으로 언약은 언약 자체적으로 완성하기 위해 앞서 한 사람을 보냈다. 요셉이 종으로 팔려야 한다. 인간의 죄성과 본성은 휘말리는 것이다.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칙을 따라서 미리 그 과정에 전달되고 실시된 것이다.

이스라엘은 말씀의 생성물이 될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오셨다. 인간도 없고 모조리 죄짓는 육신만 있기에 그 죄 속까지 주의 말씀이 침투해서 들어온 것이다. 죄인이면 이 세상에서 뭐든지 할 수 있다. 저주의 양상이 다양하듯이 배당해주는 축복 또한 다면체, 다양체다. 배신하고 죄인이고 나밖에 모르는 경로를 따라가다 보면 단절을 만나고 값없는 은혜는 구원을 만난다. 복과 저주를 다면체로 받은 열 두 지파는 망했다. 하나님과의 단절은 망함이다. 망함을 토대로 열 두 지파는 영원한 천국백성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이중성이 드러난다. 구약적 이스라엘과 예수님 십자가 안에 품어낸 숨어 있는 이스라엘이 함께 거기에 스며있는 것이다. 구약적 이스라엘 백성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했기 때문이다. 돌이켜 고침을 받을까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개입하셨다. 하나님의 자체적인 해석과 작용으로 알아듣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인간은 배제당하고 망해야 한다. 신약적 이스라엘 백성이 알아듣게 되었다는 것은 내 노력, 내 행함이 아니라 성령의 선물로 던져준 것이다. 말의 세계와 말씀의 세계가 중첩된 유령 같은, 유령성을 지닌 희한한 존재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어떤 한 지파에게만 몰빵한 축복이 아니었다. 열둘이 반드시 하나로 집결되면서 복의 본질을 발견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여럿이 하나의 질적 일의성의 구조로, 새로운 현실의 전개 속에서 십자가를 경유해서 다른 사람을 보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할 이웃사랑은 없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이웃이고 예수님만이 이웃을 사랑하실 수 있다. 우리가 사랑할 하나님 사랑은 없다.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신 예수님만이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실 수 있다.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다 하나가 되어 우리도 그 안에 있다. 세상으로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신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말의 세계 속에 살면서 하나도 부럽지 않다. 말씀의 세계 속에 살면서 하나도 부럽지 않다. 부러울 게 없다는 것은 “복의 다면체”로 부르셨기 때문이다.

한계를 갖고 있으면서도 한계를 볼 줄 아는 몸이다. 그 몸 안에 순수사건을 지니고 있는 유령성을 지닌 몸이다. 모세를 통해 두 가지 현실이 펼쳐진다. 언약을 통해 전쟁하는 현실과 전쟁을 하면서 언약의 새로운 현실을 만드는 유령성을 지니는 집단이 등장된다. 이 조합을 만드는 언약의 현실이 삽입되어 있다. 시각적인 현실 속에 언약의 현실을 가진 성도가 섞여 산다. 첫째사망 첫째부활, 둘째 사망, 둘째 부활, 이 이중성으로 인해 본인도 종잡을 수 없는 현실을 산다. 나는 뭘 해도 죄가 되지만 그 일을 주께서 하신 것이 된다. 인간의 능력은 결국 추정하는 게 나라는 현실, 기존의 현실, 하나밖에 없는 단일현실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만 내 심적인 동요가 멈출 수 있을까? 솔로몬은 모든 게 헛되다고 한다. 천년이 하루 같은 모세의 유령성... 우리에게 여호와의 밤은 너무 길다.

우리는 죄를 말하기 위해서 앞에 놓인 선악과를 따먹을 수밖에 없다. 율법 책을 가져다가 언약궤 옆에 두면 반발과 반항의 증거가 된다. 이것을 함께 이동시키면 그 도착하는 곳이 천국이고 약속의 땅이 되는 것이다. 천국은 수치스러운 나의 과거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수치스러움을 우리 주님이 어떻게 해결하셨는지 주님만 영광을 받는 나라가 천국이다. 그래서 우리 남은 생애는 죄만 지으라는 것이다. 한계를 인정만 하지 말고 뚫어라. 율법은 뚫을 수 없는 우리의 한계를 고발하지만 희생당한 어린양이신 예수님으로 완성되고 새로운 하나님의 율법해석 작용에 의해 우리의 한계는 뚫린다. 그렇게 주님은 주님만 증거 하는 영원한 피조물로 우리의 자리를 고정시켰다.

광야와 약속의 땅 경계선에 있는 모세를 통해서 여호수아는 유령성을 봤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본 자로 다시 돌아올 이유가 없었지만, 모세의 온전함은 백성들 속에 가서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얻어먹어야 할 욕을 모세가 앞서 얻어먹는 것이었다. 모세는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죽고 시체는 찾을 길 없고 여호수아는 백성들과 함께 일어나 언약궤를 앞장세워 요단강을 건너간다. 모세의 유령성을 보았던 여호수아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천사, 군대장관을 만났다. “언제까지 인간일래? 너는 유령이 되어야지.”

예수님은 없다. 존재로서 계신다. 주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자기부재 증명이다. 모세의 시체나 찾는 단일현실에서 모세의 본질은 하나님의 언약과 함께 있다. 역사의 끝, 시간의 끝, 유령적인 시간성으로 인하여 우리의 일상은 순수사건과 연관해서 일어나는 언약적 고정성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선지자 모세로, 선지자 예수님으로, 우리라는 선지자로, “유령성”이다.

가야산에서 수련회가 끝나 가야산 호텔을 뒤로 하고 길을 내려올 때마다 천국을 품고 지옥에서 살아야 할 준비를 하면서 내려오는 것 같다. 이 생각이 바뀌지 않고 참석하고 돌아올 때마다 매번 그렇다. 천국을 품고 지옥에서 산다는 것은 뭘까? 천국일까? 지옥일까? 짬뽕은 짜장면이 될 수 없고 짜장면은 짬뽕이 될 수 없는데. 짬짜면이 있긴 하지만 그 본질적인 맛은 완전히 다르기에 품었다고 할 수 없다.

성도는 이중적인 삶을 산다. 그래서 유령이다. 지옥을 딛고 사는 것 같은데 천국에 가있다. 울고 웃고 먹고 마시는데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른다. 슬퍼서 울어야 하고 좋아서 웃어야 하고 배고파 먹어야 하고 목말라서 마셔야 하는데 그게 정당한지 의문이 든다. 유령이라며? 근데 유령을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본다는 게 한계다. 내가 만든 천국, 내가 만든 지옥, 내가 만든 하나님, 내가 만든 예수님, 내가 만든 성령님, 내가 만든 구원, 이 모든 것들을 우회했다. 내 말로 살면서도 억지로 꿰맞추는 말씀들. 아이러니하게도 말의 의미도 모르겠고 말씀의 의미도 모른다는 거다.

이제 와서 한 가지 깨닫는 것이 있다면 주님만 아시는 말씀의 세계를 아는 척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짝사랑이다. 내가 주님을 짝사랑하는지, 주님이 나를 짝사랑하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내가 주님을 짝사랑하고 있는 것 같다. 이거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이 짝사랑의 대상이기에 주님에게만 올인하는 짝사랑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면 주님이 나를 짝사랑하시는 걸까? 이것도 거짓말이다. 죄인이니까. 조작과 술수와 수작에 능한 죄인이라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일 뿐이다.

짝사랑은 사랑이 아님을 안다. 짝사랑의 실체는 자기가 자기를 사랑한 결과로 왜곡된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렴풋이 진짜 사랑을 생각해본다. 사랑 없는 세상에서 사랑을 남발하고 있는 가여운 사랑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 사랑을 덮어버렸지만, 사랑은 감출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고 숨길 수도 없다. 영원히 변치 않는 언약적 사랑, 영원히 갈라놓는 죽음마저도 불사한 사랑, 죽음을 투기해서 다시 살아난 사랑, 그 사랑은 하나님아버지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사랑하신 사랑이다. 창조주에게 피조물이 배반한 상처를 예수님이 대신 상처 입으심으로 갚아주신 사랑이다. 또한 피조물에게 낙인찍힌 상처 또한 회수하시는 사랑이다.

이 사랑 때문에 긴긴 역사를 끌고 오셨다. 그리고 역사는 사라졌다. 끝났다. 아니, 이제는 끝난 역사를 가지고 완성된 언약, 십자가로 다 이루신 그 이루심안에서 율법적 사랑을 마음껏 발휘하실 것이다. 그래서 진짜 성도는 법이 아닌 사랑으로 살기에 유령인 것이다. 죄가 많은 자는 많은 사랑을 받는다. 사랑을 많이 받았기에 죄를 많이 짓는다. 이보다 더한 자유가 또 있을까? 죄인 is 뭔들? 죄인이라 뭐든지 할 수 있다. 죄인이라는 사실에만 눈이 떠진다면 꿈을 꾸듯 서로를 알아본다. 갇힌 시공간이 하늘 문을 연다.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다 보면 어느덧 꿈에서 깨어날 때가 온다.

어떤 분의 글은 나에게 상처를 준다. 안주하고 싶은 내 욕심을 뭉개버리고 훌훌 털고 일어나 이 고통스러운 세상을 떠나고 싶게 한다. 그래서 상처다. 어떤 분의 말은 나에게 상처를 준다. 마음을 찢어놓고 달아나버린다. 서로 잘났다고 하는 말에서 너는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말씀으로 후딱 돌아서게 한다. 그래서 상처다. 어떤 분은 그냥 나에게 상처다. 아픔도 기쁨도 함께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 참 어렵고 어려워서 그냥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상처다. 나는 나에게 상처가 된다. 태어났다는 그 이유만으로 폐기처분될 쓰레기가 된다. 그래서 상처다. 상처뿐인 우리에게 비장의 무기가 있다. 원망이다. 원망하면 된다. 원망하는데도 주님의 사랑을 주신다. 모든 것에서 손을 떼게 하시는 사랑의 방식이다.

선을 행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법을 깨닫고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서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본다. 곤고하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줄까? 감사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는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게 되었으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것만 있으면 된다.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주지 않아도 상관없는 존재, 존재는 존재로 인해 삭제당하면 그만이다.

우리는 너무 몰랐다. 십자가, 십자가 하면 아는 줄로 착각했다. 모름과 앎의 차이에 우리가 죽인 예수님이 나무에 못 박혀 달려 피 흘리신 십자가 사건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거부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라는 백성을 만드셔서 언약을 세우시고 맹세하셨을까? 이스라엘 백성을 끝까지 끌고 가시는 이유는 단지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맹세하고 언약했기 때문일까? 변치 않는 하나님의 속성으로 말미암아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만드신 백성이기에 예뻐서일까? 말씀을 잘 듣고 착하기 때문일까? 불쌍해서일까? 마음에 들어서일까? 준 것도 없이 그냥 미운 사람이 있다. 반면에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그냥 사랑스런 사람이 있다. 뭐, 이거는 순 억지요 망상에 불과한 개소리지만. 그냥 사랑해서일까? 이 모든 질문들은 선악과 따먹은 마귀가 내뱉는 질문들이다. 마귀적 질문을 내뱉어야 마귀라는 존재라는 것을 드러낸다.

결론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저주받아 망했다. 피가 넘쳐흐르는 살육의 현장에 방치되어 있었다. 이걸로 끝난 것이다. 역사는 이걸로 끝이다. 그러나 언약은 살아있다. 언약만 살아있는 것이다. 언약만이. 언약의 주인공은 이스라엘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 발림으로 출애굽 했지만 나 대신 그 양이 죽어서 죽음을 면했다는 언약적 속성, 천사가 휘두르는 칼날의 의미를 전혀 눈치 챌 수 없었다. 본성에 딱 맞는 태생이 애굽이라, 애굽에서 나오고 싶지 않았는데 단지 벽돌 만드는 노역이 힘들었을 뿐인데 이스라엘 백성 앞에 자기들이 세우지 않는 자들이 떡하니 서서 바로 왕에게 백성들을 데리고 떠나겠다고 한다. 모세와 아론은 왜 바로 왕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서 있는 걸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기억하며 사는 것이 그들이 애굽에서 사는 목적이었다. “한 사람 요셉을 앞서 보내심이여” 개인적으로 시작된 가족이 집단적인 백성이 되기까지 기근과 흉년이라는 환경을 만들어내고 애굽은 곡식이 차고 넘치는 풍년의 환경으로 이끌어 가셨다. 여호수아는 약속한 땅에 들어왔을 때 거룩한 땅에서 신발을 벗으라 했다. 여호수아가 잘 싸워서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여호수아의 한계를 뚫어버리는 하나님의 의식이었다. 아람군대에 포위된 이스라엘 요아스 왕은 죽어가는 엘리사에게 의지했다. 엘리사는 함께 죽는 것이 복이라는 것을 모르는 요아스의 한계를 지적하고자 동쪽 을 열어서 활을 쏘라고 했고 그 활로 땅을 치라고 했다. 중풍병자는 자신의 병이 낫고자 했다. 예수님께 나왔을 때 죄가 사해졌다는 말씀을 들었다. 못 알아먹는 예수님의 말씀의 한계에 부딪혔다.

우리는 육신이 편하면 장땡이고 그것만 채워지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싸워서 이기기만 하면 아무런 상관이 없다. 우리는 아프지 않으면 만사오케이다. 여기 있는 나라는 존재, 이놈의 존재만 유지된다면, 이 욕망만 채워진다면, 끝없는 말을 한다. 말소리가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말은 그 자체로서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제발 한계 좀 드러내는 말 좀 했으면 좋겠다. 한계를 드러내도 너무 고상한 한계만을 드러낸다. 농담 따먹기 좀 하면 안 되나? 산다는 것 농담처럼 살아야 하는데. 말장난 좀 치면 안 되나? 산다는 것 소꿉놀이에 불과한 것인데. 십자가 복음이야기 하면 성도인줄 안다. 그런데 신기한 건 어떤 사람을 툭 치면 십자가 복음이야기가 줄줄줄 나온다. 다 외웠다. 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건 돈 버는 것하고 남 까는 이야기다.

우리는 환경마저도 장악해서 개선할 수 있다고 여긴다. 나하기에 달려있다는 말에 속아 넘어간다. 나만 잘하면 환경도 변하고 사람도 변한다는 것이다. 환경이 주어지고 그 환경으로 인해 한계를 알라는 것인데 언제나 나로부터 출발해서 나로 끝나는 선악구조 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물며 벗어날 수 있다는 그 의미조차도 모른다. 뭔들 알겠는가? 환경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에 대한 방안을 미리 만들어놓고 능숙하게 기다린다. 벗어날 수 없다고 하면서 벗어나고자 노력한다. 진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유령이 되었다는 것인데, 유령은 아무나 되나? 못 된다. 성령이 와야 한다.

우리도 요아스 왕처럼 화살로 땅을 세 번만 쳤을 것이다. 전에는 나라면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막 쳤을 텐데. 요아스 왕은 정말 바보 같다고 욕했을 것이지만 이제는 그 친다는 것에 의미가 사라졌다. 처음부터 안 쳤어야 했다. 엘리사의 죽음 앞에 끝장났다는 것을 알았어야 한다. 선지자 엘리사가 죽는 마당에 요아스 왕 자신도, 이스라엘도 선지자 없는 나와 내 나라가 무슨 권리로, 무슨 의미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 하지만 엘리사의 죽음이 최종 목적지는 아니었으니까. 영원한 선지자이신 예수님이 배후에 계신다. 엘리사의 묘실에 던져진 죽은 자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살아난 사실이 말씀해주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중풍병자로 예수님 앞에 갔다면 낫기를 바랐을까? 죄사함 받기를 바랐을까? 분명히 중풍이 나아서 건강하게 움직이고 생활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죄사함은 나중에 받아도 되니까. 우리는 말씀에 관심이 없다. 정신도 육신도 멀쩡해서 남들로부터 부러운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인기나 누리며 살고 싶다. 중풍병자에게 너무나도 낯선 말씀,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그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너무나도 낯설게 들려온다.

냉탕 24도, 온탕 42도를 오가며 몸을 단련시킨다. 젊은 자는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서, 늙은 자는 더 젊어지기 위해서, 이들 앞에서 나는 유령이다. 더우면 덮다고, 추우면 춥다고 배고프면 배고프다고, 이것저것 사고 싶으면 사고 싶다고, 아무것도 하기 싫으면 하기 싫다고 하는 그럴 권한이 있는지. 과연 마귀면서 그럴 권한이 있는가? 다 불타버려도 괜찮은 세계 말의 세계다. 회칠한 무덤이요 썩은 시체 냄새가 올라오는 말의 세계에 주님은 말씀의 세계로 오셔서 죽음으로 입을 다물게 하셨다. 아예 더 이상은 말을 하지 못하도록 죽이셨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내가 사랑으로서 반드시 죽여줄게. 너는 너의 고질병을 못 고치니까.” 우리 쪽에서 하나님을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지 거기에 호응해서 그걸 뻔히 알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다루셨는지 구원을 시켜놓고 샘플로, 시범조로 한계를 보여주는 첨예한 현장이 바로 신명기였다.

이 신명기를 통해 말과 말씀의 세계를 강의해주신 이근호 목사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만약에 이 세상에서 사랑스런 말이 있다면 그것은 목사님의 복음의 말씀일 것입니다.

 

댓글

 

임청일

 

십자가 마을에 온 이래 내가 본 수련회 소감들엔 새로움이 없다. 강의의 요약이요 해설 뿐이다. 이 많은 지식을 흡수한들 내 한계를 알 수 있는걸까? 행함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야고보 사도의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 라합의 반역이 믿음이라고 누가 알 수 있을까? 주님께서 믿음이라고 말씀 하셨기에 믿음의 행위인 것이다. 십자가 마을의 많은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성도의 교제를 나눈다. 자기 죄를 고백하고 즐거워한다. 그것이 믿음의 행위인가? 아무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한계 아닌가? 그래서 나는 "나는 아는데 너는 왜 모르느냐"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싫어한다.그냥 교만같고 그냥 판단같다. 그러면서 주님의 출애굽 정신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되게 하신 의미를 좀 더 체험하고자 안달할 뿐이다. 수련회를 통한 소득이라면 초보와 장성한 자의 의미를 좀 더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는 눈이 생겼다는 점이라고 할까?

 

이근호

 

“한 마디로 (말해서) 너는 네 인생에서 손 떼라는 거다.”

십자가 짊어지신 예수님은 너무 끔찍하고 직설적이라서 싫고, 하늘의 하나님은 솜사탕처럼 부드럽고 우아해서 섬기고 싶은 이 충동은 무슨 수로 고칠까?

고장난 기계를 전문가(성령님)에게 맡길 때, 비로소 구원은 그냥 주시는 것이지, 획득하거나 쟁취하거나 달성하는 목표가 아님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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