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지나친 의로움(전7;15-18)이근호061203

아빠와 함께 2013. 7. 3. 13:23


지나친 의로움 
2006년 12월 3일                                 본문 말씀: 전도서 7:15-18 

(전 7:15)  『내가 내 헛된 날에 이 모든 일을 본즉 자기의 의로운 중에서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 중에서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전 7:16)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케 하겠느냐』 
(전 7:17)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며 우매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느냐』 
(전 7:18) 『너는 이것을 잡으며 저것을 놓지 마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성경이라는 것은 착한 일하라고 장려하고 반대로 악한 일은 하지 말라고 방지하는 책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경우 같이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라’라고 나오면 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 최고로 의인되는 것을 막으시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사람의 욕망은 자아를 ‘최고의 의인’ 혹은 ‘궁극적인 완전한 의인’으로 변신하고자 하는데 까지 멈추지 않고 작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욕망을 절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욕망이 인간을 지배하고 통치하는 상황에 놓여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이러한 욕망이 있음을 간파하시고 다른 길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18절의 말씀입니다. “너는 이것을 잡으며 저것을 놓지 마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즉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지나치게 의인되는 노선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노선으로 들어서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곧, 스스로 최고의 의인되는 길이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노선이 아님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자신이 의인되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만 수행되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도 됩니다. 사람이 의인되고자 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 이외에 다른 이에게 별로 경외하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경외하려면 하루 종일 하나님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 생각을 할 틈이 없을뿐더러 만약 조금이라는 자기생각을 하게 되면 그 순간만큼은 하나님 경외가 소홀히 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보다는 자기 사랑이 우선인 그런 성향과 성격을 지니고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경외하기보다는, 그 대신 자신의, 완벽함을 추구하는 것이 죄악된 성격에 부합되고 자연스러운 욕구일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즉 아예 ‘맹세하지 말라’는 겁니다. 달리 말씀드리자면, ‘맹세하는 네 자신은 믿거나 경외할 대상이 못된다’는 말씀입니다. 달리 말씀드리자면, ‘네 자신에게 문제가 있기에, 문제성 있는 인간이 무슨 맹세와 다짐을 해도 거기서 나온 의로움은 결코 의로움일 수 없고 죄가 됨’이라는 뜻도 됩니다. 

한 예를 들겠습니다. 역시 산상설교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만약 이 말씀을 가지고 의인이 되고자 시도해 봅시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논리가 성립됩나다. “나는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이 새로운 피조물은 성령님이 계시기에 이제부터 예수님께서 명령하시는 모든 말씀을 지켜낼 수 있다. 따라서 이 산성설교도 나는 지켜낼 수 있다”라고 되어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리시는 ‘맹세’라는 겁니다. 

즉 ‘나에게 오른뺨을 치는 자에게 왼뺨도 내놓을 수 있을 것을 맹세한다. 이 결심으로 인해 나는 이 산상설교를 실제적으로 수행하는 새로운 피조물이다’라는 것이 됩니다. 이런 자는 실상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라 옛사람 그대로 존재하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자아가 그대로 살아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되살아나 그 자아로서 말씀을 본격적으로 지켜내겠다고 덤벼드는 겁니다. 

즉 말씀 지키기에 불필요한 자아가 여기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자아가 되고 만 겁니다. 진정 새로운 피조물은 이러한 고백을 하지를 않습니다. 자아가 다시 생생하게 살아났음을 말하는 자가 아닙니다. 그 대신, 예수님께서 자기 안에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말하는 자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간추리면 이렇게 됩니다. ‘십자가로 인하여 나는 죽은 자가 되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신다. 이를 믿느냐?’입니다. 그런데 자아를 포기 못하면 이렇게 됩니다. ‘나는 한 때 죽었지만 이미 지나간 과거사에 불과하기에 그런 것은 다 잊고 지금은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중요함을 믿느냐?’는 겁니다. 

이렇게 자아가 생긴 이상 반드시 ‘맹세’나 ‘결심’은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맹세나 결심없이 행동에 나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과연 주님께서 새로운 피조물에 대해서 일을 이렇게 하실까요? 아닙니다.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앉은뱅이는 결코 사도들의 경건이나 능력으로 일어나게 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주신 믿음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아무리 사도들이 큰 소리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천 번을 이야기해도 주님께서 그 앉은뱅이에게 믿음주지 아니하면서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겁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가 아무리 설교를 잘해도 성도에게 주님께서 믿음주시지 아니하면 믿지 못하는 것이고, 아무리 목사가 설교를 못해도 성도에게 주님께서 믿음주시면 그 나름대로 바르게 이해해서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 그 성도 안에서 역사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안하게 되는가? 가만있기만 하면 되는가? 고린도전서 9:16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이처럼 주님께서는 평생 성도를 따라다니면서 십자가 능력으로 죽이시고 그 성도 안에서 말씀이 역사하여 주의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하시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도 주님이 부활하셔서 일하심을 인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