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와 남자
2006년 12월 10일 본문 말씀: 전도서 7:23-29
(전 7;23)『내가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하며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 하였도다』
(전 7:24) 『무릇 된 것이 멀고 깊고 깊도다 누가 능히 통달하랴』
(전 7:25) 『내가 돌이켜 전심으로 지혜와 명철을 살피고 궁구하여 악한 것이 어리석은 것이요 어리석은 것이 미친 것인 줄을 알고자 하였더니』
(전 7:26) 『내가 깨달은즉 마음이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이 포승 같은 여인은 사망보다 독한 자라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는 저를 피하려니와 죄인은 저에게 잡히리로다』
(전 7:27) 『전도자가 가로되 내가 낱낱이 살펴 그 이치를 궁구하여 이것을 깨달았노라』
(전 7:28) 『내 마음에 찾아도 아직 얻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일천 남자 중에서 하나를 얻었거니와 일천 여인 중에서는 하나도 얻지 못하였느니라』
(전 7:29)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
전도자는 지혜를 찾는 자입니다. 그 과정 중에서 일어나는 일을 말씀하고 있는데, 이러한 과정은 성도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밖에 없는 고통 체험이기도 합니다. 즉 전도자 자신은 관심사가 지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지혜에 관심 두지 않고 살아가더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전도자는 인간 세상 전반에 걸쳐서 일관되게 적용되는 원리를 파악합니다. 그것은바로, ‘지혜에 관심없음’ 자체가 인간이 죄 지었음을 말해주는 증거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 관점에서 전도자는 인간 세계에 보다 세부적으로 파악하고자 합니다. 흔히 사람에 관한 사항이라면 남자나 여자나 구분 없이 다 같이 적용될 수 있으리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전도자가 경험하고 아는 바에 의하면 남자 끼리 적용되는 원리가 따로 있고 여자 끼리 통하는 원리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이로서 같이 ‘지혜에 관심없음’에 해당된다고 하더라도 여자가 ‘지혜에 관심없는’ 이유가 남자들 세계와는 달리 따로 규정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여성에 대해서 단적으로 말해서 ‘올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올무’가 미끼를 던져 자기 쪽으로 유인하는 기구를 말합니다. ‘지혜에 관심없는’ 여성일 경우, 나름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는, 남자를 유인하는 도구로서 자신을 굴리는데 있다고 단정합니다. 그래서 ‘지혜에 관심이 없는’ 남성에 경우, 그런 여자에게 걸려들었다면 빼도 박도 못한채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지경이랍니다.
함정, 덫, 늪, 이 모든 것이 여성에게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용어들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여성들에게 이런 요소가 나올까요? 전도자에 의하면 그것은 하나님에게 잘못 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지혜를 포기하게 되면 이런 지경에 빠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 인간의 원리였다는 겁니다.
특히 여성들을 통해 ‘지혜에 관심 안두기’ 경향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성들의 주된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이 점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는 남성과는 달리 여성들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저주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겁니다.
창세기 3:16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여성에게만 독특하게 적용되는 두 가지의 저주를 주셨습니다. 하나는 아기를 낳으면서 고통이 수반되는 저주를 말하고, 다른 하나는 남자를 사모하고 남자는 그런 여자를 통치하는 관계로 엮어버린 사태입니다.
이러한 저주는, 여성들보다 반드시 이렇게 실천해 옮기고 실행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만있더라도 이런 습성을 지닐 수 밖에 없는 채로 여성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현실을 말해주는 겁니다. 즉 이러한 일을 기피하더라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일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부인할 수 없는 운명으로 못박아 놓은 것입니다.
원래 죄를 안지었으면 고통은 커녕 여성에게 자식 생산 할 때, 마치 배설물을 배설할 때는 상쾌한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자연이 주는 행복감이 심히 괴로운 고통의 시간이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여성의 남은 생애와 신체는 자식과 떨어질 수 없이 함께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남자들에게는 자식이란, 항상 타인처럼 존재해 있습니다. 낳을 때도 자기 신체와 무관하게 태어났고, 낳은 후에도 남자들은 자식에게 그토록 애닳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직접 자신의 몸을 통해서 자식을 낳아야만 했던 여성에게는 자식은 항상 타인으로 남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장성하여 새살림을 채려도 어미의 마음은 노심초사 그 자식을 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여성이 ‘남편을 사모하는’ 저주도 마찬가지로 여성의 인생을 힘들게 됩니다. 남자는 가정에서 겉돕니다. 남자는 가정이 우선이 아니고 가정이 절대적인 조직체도 아닙니다. 항상 자신의 몸이 우선입니다. 자신의 즐거움이 가정의 즐거움보다 우선이요 자신이 쾌락이 가족 전체의 쾌락보다 우선입니다.
여성에게 있어 결혼이란 자신의 전부를 건 모험이요 동시에 절대적 희망과 행복을 오직 결혼을 통해서 획득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남성에게 있어 결혼이란 그냥 외부 변화일 뿐이지 자신은 결혼 전이나 후나 달라진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남성에게 있어 결혼 생활이란 ‘편리’나 ‘저렴한 휴식 공간’이라는 실용적 가치 그 이상의 의미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성에게는 가정이란 종교요 천국이요 영생의 공간입니다. 이 천국을 유지하려면, 남편이 제 자리를 지켜주어야 하는 법입니다. 즉 여성에게 있어 남편이 우선이 아니라 가정이 우선입니다. 가정을 위해서 남편이 있지, 남편을 위하여 가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남편을 가정의 화목과 즐거움을 위하여 희생해야 될 대상으로만 가치가 존속될 뿐입니다. 하지만 남자는 그 속성상 자신을 위하여 희생을 용의는 있으나 가정을 위하여 희생할 용의는 추호도 없습니다. 여기서 여성이 결혼을 통해서 얻고자 했던 희망 사항과 실제 현실과는 괴리가 발생합니다.
여성을 슬픕니다. 웁니다. 고통스럽습니다. 여기서 여성은 남성처럼 되고자 합니다. 전도자는 여성에 대해서 ‘신물이 난다’는 표현까지 사용하는 것은, 여성이 자신의 운명처럼 터져나오는 비극을 남성을 통해서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죄악의 다른 모습이라는 겁니다. 즉 지혜에 관심을 두고 살아야 될 여성들이 스스로 자신을 남성보다 밑지다고 여기고 남성을 어떻게하든지 자기 손아귀에 넣어서 영원한 보디가드로 부려먹을려고 합니다.
따라서 이런 여성들이 무기로 사용하는 것은 매혹적인 자신의 신체와 눈물을 미끼로 사용하는 겁니다. 하지만 남성들에게 있어 여성의 신체란, 잠시 맛 만보고 곧장 내다버리는 시식용일 뿐입니다. 남성들은 여러 여성을 통해 여성의 존재 의미를 정립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여성에게 있어 한 남성과 결합해서 남성의 전부를 자기 쪽으로 이전시키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여자의 저주 속에서 직접 뛰어들어오셨습니다. 그래서 여성의 아픔과 저주 속에서 생명을 만들어내십니다. 연약함과 폭력으로 인한 억울하게 희생 당함 속에서 비로소 생명을 찾게 하십니다. 그 예가 베드로전서 3:6-7에 보면,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 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라는 남편 속에서 메시야를 발견합니다. 즉 생명을 경험합니다. 남편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장차 남편 같은 메시야가 오심을 믿은 것입니다. 여성이란 이처럼 죽음의 저주 속에서도 생명을 바라보는 표준적인 새 인간성을 지니고 있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여자의 아픔을 통해 주님의 고통도 함께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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