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왕의 지혜(전8;1-6)이근호061217

아빠와 함께 2013. 7. 3. 13:36


왕의 지혜 
2006년 12월 17일                                    본문 말씀: 전도서 8:1-6 

(전 8:1) 지혜자와 같은 자 누구며 사리의 해석을 아는 자 누구냐 사람의 지혜는 그 사람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 
(전 8:2) 『내가 권하노니 왕의 명령을 지키라 이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였음이니라』 
(전 8:3) 『왕 앞에서 물러가기를 급거히 말며 악한 것을 일삼지 말라 왕은 그 하고자 하는 것을 다 행함이니라』 
(전 8:4) 『왕의 말은 권능이 있나니 누가 이르기를 왕께서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수 있으랴』 
(전 8:5) 『무릇 명령을 지키는 자는 화를 모르리라 지혜자의 마음은 시기와 판단을 분변하나니』 
(전 8:6) 『무론 무슨 일에든지 시기와 판단이 있으므로 사람에게 임하는 화가 심함이니라』 

이스라엘에게 있어 왕이란 최고로 중요한 인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세워준 인물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즉 이스라엘은 왕이 하나님에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구원이 결정됩니다. 백성은 그 왕의 능력 하에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만약에 이러한 왕의 능력을 거부하면 그 백성은 더 이상 그 왕의 백성이 될 수 없고, 따라서 구원이라는 것도 물건너 가는 겁니다. 사람들이 왕의 능력을 무시하는데는 나름대로 자기 판단이 따로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즉 “나도 안되는 일을 왕이라고 해서 할 수 있겠는가”라고 나오기 때문에 왕이 하는 일을 무시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런 반항을 하나님께서 용납해주지 않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지혜는 왕에게 전담되어 있고, 그런 왕을 함부로 판단한다는 것은 곧 왕으로 왕으로 인정못하겠다는 뜻이고, 이런 인간은 자신이 곧 왕이라는 말 밖에 안됩니다. 이런 경우는, 하나님의 지혜도 없는 주제에 감히 하나님의 지혜를 지닌 왕을 평가한 셈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왕을 세워주셨다는 말은, 더 이상 인간이 자력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시도는 다 무용지물이라는 뜻도 됩니다. 왕에게 복종하느냐 여부에 따라서 구원이 결정되는 것이지 결코 자신의 행동 여하에 따라 구원이 결정지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에게 있어 왕이란 다른 이방나라의 왕과는 다른 특별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에게 있어 왕이란 불필요한 존재가 되어버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옛날에는 여성들이 꼭 결혼을 해야하는 이유가, 가문의 대를 잇고, 가문을 살리기 위해서 혼인을 했어야 했습니다. 

즉 여성이란, 여성 본인의 영광이 아니라 가문의 영광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해야 될 역할자로서 가담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핏줄이 개인보다 우선하고 더 중요한 가치를 갖게 된다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자아의 추상화’가 일어났습니다. 즉 자아가 제일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보는 겁니다. 

이것은 곧 자신이 판단이 타인의 판단이나 가문의 판단보다 우선한다고 보는 겁니다. 이러한 풍토는 우리 사회에는 왕을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허수아비 왕만 왕으로 인정하고 실제적인 왕을 우리 사회에서 용납하지 않습니다. 각자 자신들이 이미 왕이 되어버렸는데 또 무엇이 왕이 필요하단 말입니까! 

이러한 현대인들에게 있어 구원방식에 대해서, 계속 자아의 결정권에 집착을 하게 마련입니다. 구원을 하나님이 보내신 왕이 해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태도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보는 겁니다. 물론 인간들의 이러한 경향은 오늘날 뿐만 아니라 옛날에도 엄연히 있었습니다. 

남들보다 많은 권력과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은 오늘날 현대인들처럼 자기 자신들의 왕적인 태도를 유지하게 됩니다. 그런 높은 지위의 사람들이나 남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여기는 자들은 자신의 판단력에 최종 판단을 맡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과연 이들은 하나님이 보내주신 왕이 따로 필요치 않는 자일까요? 

마태복음 27:37-42에 보면,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이스라엘 왕’을 사칭했다는 것으로 인한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의 판단을 받고 그 희생물이 된 것입니다. 즉 유대인들 중에 똑똑한 자들은 하나님이 보내주신다는 왕을 고대했습니다. 이스라엘 신앙의 특징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시여. 우리의 구원을 위해 왕을 보내주소서”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참되신 왕 앞에서 그들은 판단을 시작합니다. 아무리 봐도 예수라는 분이 하나님이 보내신 왕 답지를 않다는 겁니다. 

위엄도 없고, 자신들이 함부로 다루어도 반항치 않고, 폭력을 행사해도 묵묵히 얻어맞기만 하시는 겁니다. 그들은 결론 내리기를 예수라는 자는 이단임에 틀림없다는 겁니다. 만약에 이단이라면 반드시 살려두지 말고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기에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살해하고 맙니다. 

이로서 예수님의 모든 이야기는 끝이 났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주셔도 인간들의 판단력에 차지 아니하면 거부당하는 것이 당연한 겁니다. 이런 경우에는 옛날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에게 있어 영원히 시험은 바로 이것입니다. 과연 예수라는 자의 피가 자신의 죄를 다 씻을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혹시 예수라는 청년이 희대의 사기꾼이라면? 이런 경우라면 성도는 철저하게 죽은 예수에게 농락당한 셈이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사형시킨 그 때 그 검사들의 냉철하고도 현명한 판단력에 경의를 표하게 됩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판단이 오늘날 우리들의 판단보다 더 유리한 입장에 있다고 한다면 참으로 그들의 예수님 처형한 합당한 조치를 내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모든 일은 마무리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 번 세 번 와도 인간들은 또 죽음으로 보내고 또 죽음으로 보낼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무덤 속에 계셨던 예수님께서 사흘만에 부활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핍박했던 사울이라는 자에게도 찾아오고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들에게 동행하셨고, 제자들이 고기 잡던 현장에도 나타나셨고, 그 후 40일동안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이는 곧 진정한 왕이 이미 이 땅을 다녀갔음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인간의 그 어떤 판단도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알아보지 못함이 분명해졌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예수님께서 일부로 그렇게 하신 겁니다. 요한복음 12:40에 보면,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이제부터 믿게 되고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는 그 모든 것은 우리 인간의 판단력을 능가하는 능력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바로 이런 부활하심에서 나오는 능력을 그 누가 감히 막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본인도 막을 수 없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지혜를 알고 저희 얼굴에 광채가 피어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