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집과 잔치집
2006년 11월 12일 본문 말씀: 전도서 7:1-4
(전 7:1)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전 7: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전 7:3)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전 7: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일상적인 일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뜻이 나온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초상집이나 잔치집은 거의 누구나 다 참석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하나님의 뜻을 얻겠다는 마음도 갖지 아니하고 참석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초상집이나 잔치집에서 하나님을 뜻을 알 수가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잔치집과 초상집과 대비되는 개념입니다. 이것은, 거기에 참석하는 자들이 상호 다른 마음 가짐으로 참석하게 된다는 점을 전제해 두고 하시는 말입니다. 즉 잔치집에 가나 초상집에 가나 한결같이 오직 하나의 마음가짐으로 참석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래서는 아니된다고 충고하는 겁니다.
초상집에 가나 잔치집에 가나 동일한 마음가짐과 안목을 가지려면 양쪽 다 동일하게 적용하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 뜻이 무엇일까요? 이것을 알기 위하여 평소에 사람들은 왜 다른 마음가짐을 갖게 되는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화려하고 즐겁고, 화사하고, 흥겨운 것이 원래부터 인간이 누려야 될 생의 보람이요 행복이라고 간주합니다. 그렇다면 초상집의 어두운 분위기는 늘 일상과는 거리가 먼 일시적으로 참기만 하는 그만인 장소가 됩니다. 오늘 말씀으로 보면,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본질을 잘못 간주하기 때문에 발생된 일이라는 겁니다.
잔치집보다 초상집에 가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 그리고 초상집에 가기보다는 잔치집에 가는 것을 더 선호한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본성에 부합되지 못하는 모습이라는 겁니다. 우리의 본모습은 초상집에서 보여주는데 우리는 자신의 본성상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평소에게 인간에게 양면성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인간은 자신의 본질을 환경을 가지고 왜곡하는 습성이 있음이 폭로된 것입니다. 진짜 자아는 숨기고 환경 따라서, 감각이 요구하는대로 움직이면서 마치 자신은 그 즐거움과 쾌락을 마땅히 누릴 자격이 있는 것처럼 외부에 알리면서 삽니다.
즉 초상집에 가도 자기와는 상관없는 곳에 귀찮게 와있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결혼식을 좋아하는 이유는 인생의 절정을 구현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부의 화려함은 누구나 원하는 바입니다. 순백의 드레스는, 행복을 평생 내내 걸치고 살아야 마땅한 여인처럼 위장시켜 줍니다.
즉 비록 결혼식을 끝내고 현실 일방으로 되돌아오더라도, 일상의 평범과 초라함이 신부의 전부가 아니라 결혼식에서 보여준 그 우아한 자태가 이 여인에게 합당한 외모인 것을 상기시켜 주겠다는 겁니다. 또한 하객들은 그들을 함께 부러워하면서 그 아름다움에 축하하면서 합류한 자신들도 마땅히 그 화려함을 소유할 권리가 있음을 상기합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뜻’은 외면당하고 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천대받습니다. 인간의 죄악도 본성 때문에 천대받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 정반대 것을 원하라고 독촉하므로서 사람들로부터 미움받는 ‘하나님의 뜻’이 되어 버립니다.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장례식보다 자신의 결혼식을 아름답게 오래 기억하고자 할 것입니다.
하지만 참으로 하나님의 뜻이 임한 사람에게는 이러한 상식이 더 이상 허용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욥입니다. 욥의 초반기 인생은 매일 매일이 초호화 결혼식이라고 할만큼 웃음과 행복이 넘쳐 났습니다. 본인들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욥의 생활을 부러워했습니다.
욥에게는 다른 사람이 평소에 손꼽아 고대하면서 갖기를 원하는 복들이 종합선물세트처럼 한 데 모여있었습니다. 돈돼지, 인격 돼지, 건강 돼지, 인물 돼지, 신앙 돼지, 자식 훌륭하게 자라나지, 그 어느 것 하나 모자람이 없이 만족스러웠습니다. 인간이라면 결국 여망할 수 밖에 없는 복의 최정점을 욥은 한꺼번에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행복의 소유에 대해서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원인을 규명했을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모범적이고 훌륭하게 사니 하나님께서 그런 축복을 반대급부로 주셨다고들 해석했습니다. 이것은 곧 욥이 인격적으로나 행함에 있어 계속 이런 복을 받을 자격이 되는 것처럼 그런 높은 질을 유지한다면 당연히 재물이나 자식 복도 늘 유지될 것이라고 짐작케 하는 요인이 됩니다.
즉 나쁜 짓만 안한다면 이 복의 수준을 내려갈 리가 없다는 식으로 사람들의 욥이 가진 축복의 성격에 대해서 해석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상치도 못한 일이 욥의 가정에서 연발 터졌습니다. 가진 재산과 자식이 한 날에 몽땅 잃었습니다. 아내는 충격으로 인하여 신을 욕하라고 부추깁니다. 신에 대해서 복수라고 해야 되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게다가 욥에게 심한 악창이 돋아나서,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든지 식구들이나 친구들도 다 포기하고 떠나고 말았습니다. 상실입니다.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욥은 혼자말로 말합니다. “하나님 나에게 이런 저주가 임한다면, 나를 부자로 만들지도 말게 하시고 차라리 이 세상의 햇빛도 보지 못하고 태 안에서 죽은 자되었으면 더 좋았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욥의 이런 탄식을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들려질 것입니다. 본인들에게는 조금도 해당되지 않는 사건이라고 보려고 합니다. 욥,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사태라고 해석하고 싶어들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좋았던 시절과 괴로운 시절 그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확정지어놓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될 사태인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욥기 23:10에 보면,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는 우리의 길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도 욥에게는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길을 미리 아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다 뜻이 있어, 자신을 부자 되게 했고 망하게 하셨고, 또한 건강을 빼앗아가고 자식도 죽게 하셨음을 욥은 인정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에게는 아직도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미리 예측하고 탐색하고 짐작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우리의 허약하고 좁은 자신의 상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것을 믿다가는 실망만 터져나옵니다. 사람의 일생이란 없습니다. 있더라도 허사와 수고와 슬품 뿐입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 앞에 다시 우리는 늘 세웁시다. “누구든지 나를 믿은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11:25-26)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본 모습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앞에서 발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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