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소리와 끝 2006년 11월 19일 본문 말씀: 전도서 7:5-10 (전 7:5) 사람이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전 7:6) 『우매자의 웃음 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의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 (전 7:7) 『탐학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케 하느니라』 (전 7:8)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전 7:9)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전 7:10)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이 지혜가 아니니라』 하나님의 일은 일관성이 있어서 혼란스럽지 않습니다. 거기에 비해 우리들의 인간들 감정은 혼란스럽습니다. 조금 좋으면 좋아서 어쩔 줄 몰라서 웃음소리를 크게 하다가, 조금 기분 나쁘면 눈에서 눈물이 그렁그렁합니다. 본인이 본인의 마음을 한결같이 붙잡아 둘 수가 없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우매자의 웃음소리의 허무성을 통해서 인간의 허무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인간은 자신을 계속 믿고 있을 입장이 못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믿어야 된다는 말인데, 과연 하나님께서 일을 어떤 식으로 깔끔하게 하시기에 믿을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일은,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하십니다. 에베소서 5:14에 보면,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죽은 자들’ 개념에 유념하셔야 합니다. 즉 이미 완전히 시체가 된 송장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칭 펄펄 살아있다고 여기는 자들 두고 ‘죽은 자’들이고 지칭합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런 ‘죽은 자’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일상 생활을 하는 자들을 향하여 ‘너희들은 이미 나로 인하여 살아났느니라’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소위 ‘살아났다는 자’들이 의아해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과의 차이점이 분명히 있을 터인데 그것이 확연하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당황스러울 수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해서, 예쁜 여인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도 아니요, 예수 믿는다고해서 아플 때 병원에 가서 불신자인 의사의 도움을 거부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상 차이나는 면이 없다고 여겨질 수 밖에 없는 겁니다. ‘허무’라는 것을 느낀다는 것은 이미 ‘허무’의 상태를 외곽에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질 때나 성립하는 단어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의 웃음이 오래 가지 않고 금방 수그려든다는 사실로 인해 허무를 느낀다는 것은 이미 영원히 가는 웃음이 따로 있음을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죽은 자들’과 거기서 살아난 ‘산 자’의 차이점은 일시성과 영원성의 차이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요청이 있어 이미 죽어버린 그의 딸을 보려 갔는데, 주위에 둘러싼 조문객들은, 예수라는 분이 공연히 짓을 하고 있다고 판단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는 상태라는 겁니다. 실제로 사람들을 물리고 난 뒤 “소녀야 잠에서 깨어 일어나라”라고 하시니 그 소녀가 죽음에서 되살아났습니다. 이로서 이 소녀는 예수님 안에서 영속성 있는 생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영속성은 앞으로 소녀의 그 어떤 외부적 변화에도 변하지 않을 영속성입니다. 이런 변함이 없는 요소가 성도 안에 이미 박혀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인생이 허무한 증거 중의 하나가 그 웃음이 일관성있게 영속성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것은 ‘목숨의 성격’ 때문인데 허무한 목숨에서 나오는 웃음도 허무한 법입니다. 마치 상대방 정당 사무실에서 나오는 웃음소리는 이쪽 정당 사무실에서 듣기에는 ‘우매자의 웃음소리’로 해석합니다. 상대방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영원한 웃음이 어떤 식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 살아난 성도로부터 나올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이것은 성도 목숨의 성격이 결코 허무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웃음이어야 한다는 말도 됩니다. 과연 성도는 늘 히죽히죽 웃으면서 살아갑니까? 성도의 눈에서는 일체 눈물이 고이지 않는다는 겁니까? 아닙니다. 도리어 성도는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은 눈물을 흘리게 되어 있습니다. 시편 126:5에 보면,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4에 보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의 한평생이 눈물로 이어지는 인생임을 뜻합니다. 눈물없이 통과할 수 없는 곳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 성도가 가야할 팔자라는 겁니다. 베드로전서 4:13-14에 보면,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고난’과 ‘기쁨’이 다같이 들어있습니다. 즉 성도에게 있어 ‘기쁨’ 속에서 기쁨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고난’ 속에서 ‘기쁨’을 누려야 될 입장들이라는 겁니다. 고난 자체는 결코 즐거워하거나 기뻐할 게 못됩니다. 도리어 고난을 피하게 된 것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인생들의 본성입니다. 하지만 그런 식의 인생이라면 ‘죽은 자들’에 대해서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적어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났으면 ‘죽은 자들’에게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그 무엇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눈물’과 ‘고난’ 가운데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겁니다. 성도는 외롭습니다. 서럽습니다. 고달픕니다. 평소에 인정과 우정과 사랑을 단단히 엮어져 있다는 생각했던 사이나 관계들에게서 균열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 가운에서 즐거움과 기쁨을 갖게 된다면 이는 무슨 연유 때문일까요? 빌립보서 4:11-13에 보면,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도 바울의 지혜자로서 살아가는 비법과 공식을 갖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주 안에서 모든 것이 주님께서 친히 만드는 인생이지 결코 내가 만들어 나가는 나의 인생이 아니라는 겁니다. 즐거워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일과 슬픈 일로서 구분짓는 그 일까지 성도가 나설 필요없을 정도로 그 자체가 주님의 능력이 된다는 겁니다. 즉 주님이 모든 것이 ‘성공, 성공, 성공’ 인데 공연히 인간이 나서서 ‘실패, 실패, 실패’라고 규정지을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일을 다 이루었다’는 의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범사에 합력하여 일을 다 이루시는 그 분의 일관성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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