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아름다운 지혜(전7;11-14)이근호061126

아빠와 함께 2013. 7. 3. 13:15


아름다운 지혜 
2006년 11월 26일                               본문 말씀: 전도서 7:11-14 

(전 7;11) 지혜는 유업 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하도다』 
(전 7:12) 『지혜도 보호하는 것이 되고 돈도 보호하는 것이 되나 지식이 더욱 아름다움은 지혜는 지혜 얻은 자의 생명을 보존함이니라』 
(전 7:13)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전 7: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성경에서 지혜란, 단순한 지식이나 상식이나 처세술과 관한 것이 아니라 원초적 생명과 직결됩니다. 즉 지혜가 없는 자는 죽고, 지혜가 있는 자는 생명을 얻은 자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이 우주는 지혜라고 지칭되시는 그 분에 의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잠언 8:22-27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산이 세우심을 입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으로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지혜를 가까이 하지 않는 인간이라면 이미 생명은 물건너 간 겁니다. 내가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지혜가 나를 살린다는 생각이 안 생기는 사람이라면 생명이 없는 자이고 사망에 속한 자입니다. 

그렇다면 이 지혜가 우리가 어떤 식으로 파악하고 그 내막을 알아차릴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 쪽에서 다가가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 되시는 지혜가 우리를 조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조정으로 인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지혜와 지식에 한계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말씀처럼, “미리 장래 일에 대해서 자신이 주도권을 쥐지 못함‘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이 늘 받는 위치에 있지 이 세상이나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주도권을 쥐는 셈이 됩니다. 

이러한 전도서의 내용이 신약에 오게 되면 이렇게 됩니다. 마태복음 18:20에 보면,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28:20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들이 주님에게 요청해서 얻어진 상황이 아닙니다. 주님의 일방적인 배려입니다. 우리가 주님 곁을 떠나고 싶어도 이미 그럴 처지가 못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이로 인하여 주님은 본격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있음’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나름대로 ‘믿음’이라는게 있습니다. 자기 행위를 믿는 믿습니다. 이 믿음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어떤 때는 즐거워하고 어떤 때는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이 믿음은 인간 내부에서 얻어지는 것으로 인간은 자기 마음 내부에 선한 일과 악한 일을 일방적으로 구별하여 꼼꼼하게 가치를 부여해서 일종의 ‘가계부’ 같은 것을 형성시키게 됩니다. 

즉 하루를 살면서 자신이 착한 일 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마음에 한쪽에서 새겨넣고, 반면에 나쁜 짓이라고 여기는 것도 그 맞은편에 대비시켜 새겨넣고서는 그 둘 사이의 가치를 조율합니다. 전체적으로 오늘은 ‘선하다’, 혹은 ‘악하다’라는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판단을 내리는 작자는 누구란 말입니까? 바로 본인입니다. 

본인이 자기 행위에 대해서 최종 판단자로 행세하게 됩니다. 자신이 생각할 때, 선한 일이라고 간주되는 것은 장려하고, 악하다고 간주되는 것은 될 수 있으면 줄이려고 합니다. 이로서 자신의 판단 자체에 대한 신뢰만 믿음이 계속 유지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세상과 자신의 가치를 분석해 가는 것은, 그 인간 외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바른 판단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모든 것은 지혜 되시는 분의 나름대로의 계획에 따라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얄궂게도 이런 계획마저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마음판에 있는 선악 가계부에서 ‘선한 일’에 실을 수 있는 사항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을 내가 믿는다는 것은 선한 일이야“라고 간주하면서 자신의 선한 일 항목에 추가를 시키게 됩니다. 

그런데 방금 제가 말씀드린 것이 ‘자기 행함을 믿는 믿음’입니다. 자신의 행동과 마음가짐을 스스로 관찰하고 주시하고 분석하고 그리고 그 판단도 본인이 내리는 식이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들의 이런 믿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믿음이란 예수님만이 가진 믿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믿음’을 선물로 받지 아니하는 자는, 그 ‘예수님의 믿음’이 없다는 이유로 ‘믿는 자’라고 인정해주지를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믿음은 어떤 믿음을 말씀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것을 믿은 믿음입니다. 

즉 예수님은 자신이 행하신 일만 믿습니다. 인간이 행한 것을 철저하게 거부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자신이 행하신 것이 고집하십니다. 이 믿음이 선물로 성도에게 주어지면 성도 내부에는 갈등과 충돌이 발생됩니다. 물론 당연히 예수님의 믿음이 승리합니다. 

자신의 행위만을 인정하는 ‘인간의 믿음’과 ‘예수님 행위만’을 인정하는 ‘예수님의 믿음’은 결코 타협이나 협상의 대상이 아닙니다. 양보할 사항도 아닙니다. 하나가 다른 하나에 완전히 박살나야 합니다. 즉 예수님의 믿음 앞에서 인간의 자기 믿음은 완전히 박살납니다. 

마치 어린 소녀가 사는 어느 집에 소녀의 장난감이나 인형으로 가득차 있는 방이 있다고 칩시다. 어린 소녀는 매일같이 그 방에 들어가서 혼자 잘 놉니다. ‘이 장난감은 너무 마음에 들고, 저 장난감은 때가 묻었기에 싫고, 저 바비인형은 너무 예뻐서 내가 귀여워해주고, 저 이 바비인형은 얼굴이 못생겨 내가 미워해서 한켠에 치워놓고’하는 식으로 정리정돈 하고 있는데 갑자가 도로 건설용 중장비가 그 집안 전체에 들어닥쳐서 그 어린 소녀의 장난감 방은 순식간에 박살이 나고 맙니다. 

불도우즈의 강력한 바퀴 밑에서 바비인형이라든지 정들었고, 귀하게 간수하던 장난감도 그저 쓰레기더미의 일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게 바로 ‘주님의 믿음’이 들어오게 되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즉 주님의 믿음은 우리 인간의 믿음을 그냥 주지 않고 박살내어 버립니다. 

그 박살되는 힘이 되는 불도오주의 바퀴를 성경에서는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함께 계시는 말은, 곧 주님께서는 그냥 잔소리만 늘어놓으시는 분이 아니라 이 ‘사랑’으로서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리고 돌아가신 후 제자들이 한 장소에 모여있을 때, 예수님은 노크도 없이 그냥 그들 속에 들어오셨는데 그 때 도마에게 보여주신 것이 바로 이 ‘사랑’입니다. 즉 창자국과 손에 난 못자국이었습니다. 

이 십자가 사랑이야말로, 인간들의 자기 점검, 자기 관리적 ‘인간 믿음’을 박살냅니다. 이것이 지혜와 함께 한 삶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지어낸 죄에 대해서 우리가 스스로 속아 넘어가거나 정죄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