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
2006년 11월 12일 본문 말씀: 전도서 6:10-12
(전 6:10) 『이미 있는 무엇이든지 오래 전부터 그 이름이 칭한 바 되었으며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 바 되었나니 자기보다 강한 자와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
(전 6:11) 『헛된 것을 더하게 하는 많은 일이 있나니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전 6:12)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 누가 알며 그 신후에 해 아래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
사람들은 자신이 과연 구원되었는지 아니되었는지를 확정시켜줄 특정 증거물을 잡아보기를 원합니다. 즉 하나님이 과연 자기를 구원했다면, “너는 이러이러한 일을 하기에 구원받은 것 맞아”라고 확정 지을 수 있는 일들을 소유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나는 이미 구원받았기에 내가 무슨 일을 해도 다 주의 뜻 맞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어 주위 사람들을 기를 죽입니다.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뜻으로 간주하는 것이 굉장히 위대한 신앙처럼 보이기 마련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자기가 하는 일 중에서 어떤 일은 하나님의 일이고, 어떤 일은 하나님의 아니다는 식으로 구분짓는 행위를 하는 사람의 눈에는 그 사람이 대단한 신앙인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아, 나도 언제쯤 저 사람처럼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일로 느껴질 수 있을까”라고 부러워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엉터리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는 일을 하나님의 뜻으로 간주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의 일은 어디있습니까? 구약에서 보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나옵니다.
이 나라는 대단히 특이한 나라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나 우리는 별 다를 게 없는 인간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나라에게 특별한 일들을 벌리십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본인들은 자기네들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황당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우리나 혹은 이스라엘 사람이나 모두 무기가 강력하고 군사 숫자가 많은 것이 승리할 것이 뻔합니다.
그러나 광야 아말렉과의 전쟁에서는 하나님께서 희안한 일을 벌리셨습니다. 산 밑에서 전쟁하는 군사들의 자질과 상관없이 산 위에서 모세가 지팡이들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니 산 밑의 전쟁은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들의 보편적인 상식에 맞지 않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우리 인간의 상식을 비켜갑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에게 인도함을 받는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하나님에게 항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라도 그랬을 것입니다. 또 예를 들면, 바사 나라에 잡혀갔던 유대인들이 몰살당할 지경에 빠졌을 때, 엉뚱하게도 ‘죽으면 죽으리라’는 황비의 헌신으로 그들의 입장은 역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다니엘 세 친구도 예상치도 못한 위협을 받았지만 불 속까지 들어가서도 살아돌아온 일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예상에 일치되지 않는 식으로 일하십니다. 그 이유는, 오늘 본문에 나온 것처럼, 이미 인간들이 어떤 존재며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미리 알기에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따라오라는 겁니다. 결코 강하신 하나님과 다투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예상 밖에 일을 하시는 것에 대해서 우리 성도들은 그 계획을 미리 알기를 원합니다. 즉 우리는 어떤 식으로, 또한 어디로 인도하지를 우리가 알았으면 합니다. 이사야 9:6-7에 보면,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뜻은 하나님이 친히 보내신 ‘한 아들’을 통해서 이루신다는 겁니다. 그 분이 하시는 일을 우리 인간이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열심히 하여금 그 일을 진행시켜 나간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일에 협조할 입장에 놓여있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분이 하시는 일과 우리가 벌리는 일 사이의 격차를 우리가 알게되므로서 우리로 하여금 그 아들을 증거케 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한 예를 들면, 마태복음 19:24-26에 보면,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람은 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일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보다 강한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냥 가능성으로 믿는다는 말이 아니라 자신이 결코 못함을 충분히 인정하는 전제 위에서 믿는 겁니다.
사람에게는 두 종류의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이 있고, 다른 하나는 자기가 조립해 낸 믿음이 있습니다. 조립해낸 믿음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노력의 일환을 두고 말합니다. 거기에 비해서 선물로 받은 믿음은, 비로소 자신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고 도리어 하나님의 뜻을 훼방하는 그런 죄인을 점을 깨닫는 것 가운데서 의지하게 되는 믿음입니다.
고린도전서 10:22-22에 보면,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은 자신이 신에게 바친 것에 의미를 둡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성만찬은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것에 의미를 둡니다. 살과 피입니다. 그 앞에서 우리 인간들은 할 말을 잊게 됩니다. 무엇인가 했다는 것이 참으로 무가치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죄일 수 밖에 없음을 드러내는 식으로 일하십니다.
교회 내에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 흔히 인간들의 위대한 종교적 활동상황들을 사례로 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오직 다윗의 자손에 관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언약하시기를, 다윗의 자손이 등장하게 될 터인데 그 다윗의 자손과 하나님과 맺은 약속 이외에는 일체 하나님의 일이 없음을 천명하실 작정이십니다.
그 다윗의 아들의 일은 우리 외부에게 다가오는 일입니다. 즉 우리 외부에서 다가오는 일로 인해 우리가 구원된다는 점 앞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을 부인해야 합니다. 이 둘이 합쳐져 하나님의 일이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 앞에서 비로소 우리 자신이 죄인임이 드러나고 그것을 통해서 왜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분이 모든 일을 다 하셔야 하는지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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