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을 산다 해도
2006년 10월 22일 설교 본문: 전도서 6:1-6
(전 6:1) 『내가 해 아래서 한가지 폐단 있는 것을 보았나니 이는 사람에게 중한 것이라』
(전 6:2) 『어떤 사람은 그 심령의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능히 누리게 하심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전 6:3) 『사람이 비록 일백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 심령에 낙이 족하지 못하고 또 그 몸이 매장되지 못하면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저보다 낫다 하노니』
(전 6:4) 『낙태된 자는 헛되이 왔다가 어두운 중에 가매 그 이름이 어두움에 덮이니』
(전 6:5) 『햇빛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나 이가 저보다 평안함이라』
(전 6:6) 『저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낙을 누리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
자신의 사는 가치를 사람들은 얻고자 합니다. 이왕 사는 것 성공했노라 소리를 주위에서 들으면서 살고 싶어합니다. 대단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다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허망이 만들어낸 망상을 쫓는 것 밖에 안됩니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의 인생이란 죽음 속으로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즉 동일하게 마감처리 된다는 겁니다. 끝이 동일하면 처음부터 모든 인생을 동일한 본질을 지니고 있었음이 분명하다는 겁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엄마 배속에서 잉태되었다가 몸 밖에 나와보지도 못하고 햇빛 구경도 못하고 그냥 어두움 속에서 유산된 아이가 이 세상의 유명세를 날린 자보다 더 편안하고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무두셀라와 같은 사람은 969세를 살았지만, 설사 1000년의 곱인 2000년을 산다할지라도 더 나은 행복을 누린다고 볼 수 없다는 겁니다. 이렇게 볼 때, 인생이란 죽음이 잠시 살아있는 모양새로 변형을 했던 기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죽음이 사라져버린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합니다.
그 누구에게도 자기 인생에 대해서 실패했느니 성공했느니 라고 평가할 그런 입장에 놓여 있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인생이 주는 삶의 무게에 아파하고 한숨 쉬고 탈진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힘들다, 힘들다’는 평소의 느낌의 되고 말았습니다.
왜 인생이 힘들까요? 그것은 자신의 본질에 대해서 정확히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의 본질, 즉 바탕은 생명이 아니라 죽음입니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선로 위를 한 순간도 이탈됨이 없이 마치 지프 채우듯이 차곡차곡 빠트림이 없이 자기 선로를 채워가고 있습니다. 죽음을 음미하면서 말입니다.
따라서 아예, 죽음을 위해 살아가는 중이다고 마음 먹으면 무리없는 인생이 될 것을, 자꾸만 자기 본질을 거역해서 살기 위해서 살려고 하니 자기 인생에 무리를 가하는 것이 됩니다. 자기가 자신을 못살게 굽니다. 성공적인 면면들을 만들어내놓아야 제대로 사는 것이라고 해당되지도 않는 사항을 창작합니다.
우리는 죽기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의식하던 아니하던 상관없이 처음부터 어떤 시스템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 시스템이란 다름아닌, 기어이 몸의 부활을 맞이해야 한다는 시스템입니다. 요한복음 5:28-29에 보면,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간단히 줄여서 생각하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멀리 못간다’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이 계획해 놓은 틀 자체를 아무리 반항하고 반발해도 멀리 못갑니다. 그 안에서 한 번에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기껏해야 자신의 본질만 더 깊게 노출시킬 뿐입니다. 사도행전 24:15에서는 더 단출하게 표현해 놓고 있습니다.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이사야 26:19에서는 아예 가만있어도 땅 자체가 시체들을 가만 놔 주지 않고 죽은 시체들을 내놓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온 세계는 들석들석거리고 싶습니다. 조용히 살다 조용히 죽고 싶어도 그것은 어디까지는 우리 인간들의 소박한 희망사항에 불과합니다. 우리 인간들도 어찌 할 수 없는 조건 속에 이미 던저져 버린 존재가 우리 인간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당연히 죽음으로 골인되는 인간은 ‘인생’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도록 살려내고 또 살려내는 겁니까?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 신명기 9:4-6에 잘 나왔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얻게 하셨다 하지 말라 실상은 이 민족들이 악함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니라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결코 다른 민족보다 우수하지를 않습니다. 그들은 목이 곧은 백성들입니다. 목이 곧다는 말은, 항상 최종적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고개 숙일 마음이 없이 오직 자신만이 최종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보통 인간들의 본성을 보여주는 자들입니다.
그런 이들이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약속의 땅에 들어간 것은 결코 그들의 의로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맹세와 언약을 하나님 스스로 달성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런 하나님에게 있어 이스라엘의 존재 가치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비록 의롭지 못하고 목이 곧다고 할지라도 그 사항이 결코 하나님의 일관된 구원의 능력을 저지할 수 없다는 것을 증거하는 증거인으로 동참하는 겁니다.
즉 마땅히 죽어야 될 자가 영생을 얻은 신분이 된 그 근거를 우리 인생에서 찾지 말고 다른 인생에서 찾아야 한다는 겁니다. 어느 누구도 나의 인생을 남이 대신해 줄 수는 없습니다. 비록 일인용 우산일지라도 억지로 두 사람이 함께 쓸 수는 있겠지만 나의 죽음을 나의 가족이 대신해 줄 수 없고, 내가 인생을 살면서 겪으면서 짓눌린 생의 무게와 고통을 타인이 대신 살아갈 수는 없는 법입니다.
하지만 이 법이 예수님에게서만 깨어집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대신할 수 없다는 그 인생을 대신해서 살아주셨습니다. 나의 인생에 그분의 인생이 차고 들어오시는 겁니다. 이로서 함께 사는 인생으로 변했습니다. 비록 우리의 몸은 날로 후패하지만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으로 인해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살기 위해 살지 말고 주님의 복음과 의를 위하여 죽는 삶이 되게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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