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의 즐거움
2006년 10월 29일 본문 말씀: 전도서 6:7-9
(전 6:7) 사람의 수고는 다 그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차지 아니하느니라』
(전 6:8)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뇨 인생 앞에서 행할 줄 아는 가난한 자는 무엇이 유익한고』
(전 6:9) 『눈으로 보는 것이 심령의 공상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인간은 멀리 못갑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떠나 멀리 달아날 수가 없는 운명입니다. 죄와 심판과 최후를 고려하지 않는 하나님은 하나님도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포위된 상황입니다. 반항할 처지가 못합니다. 순종은 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선택할 처지가 아닙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영적’인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영적이기 전에 벌써 육적인 삶을 살아오고 있는 중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육적인 인간의 안타까운 현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그저 몸뚱아리 하나 만족하며 사는 것으로 끝입니다. 쉽게 말해서 ‘입’을 즐겁게 하며 사는 것 외에 다른 인생의 목적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고상한 핑계들로 위장을 해도 그런 것들을 다 벗기고 벗겨내면 남는 것은 몸이 주는 쾌락성 뿐입니다. 인간들은 본의 아니게 이런 몸을 모시면서 평생을 살아야 합니다. 결코 인간 문제는 심각하지 않습니다. 육신이 편하면 다 편한 것입니다. 즉 육신이 편한 쪽으로 자신을 몰고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그것이 우리 인생이 사는 목적이요 목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입을 즐겁게 하는 것만 인생의 목표를 세워놓았다 할지라도 그것을 달성할 수 있는 방도가 인간에게는 없다는 것이 인간을 힘들게 합니다. 입만 즐겁게 하면 되는데도 불구하고 그 입을 채우는 방법이 없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들이 날마다 상상과 공상을 한다는데 있습니다.
사람의 의식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것을 유지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데 단지 자신의 욕망이 그려낸 것을 상상한다는 겁니다. 이 상상으로 인해 만족함이 없습니다. 야망과 소망이 없으면 인생은 살 맛을 잃어버립니다. 인간들이 육신의 방법으로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반드시 이런 장벽을 만나게 됩니다.
인간이 야망과 소망은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것들입니다. 사람들은 전에는 순박하게도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욕망을 절제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선 요즈음은 이런 사상이 안 맞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사람이 욕망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인간이 몰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에 유행한 서양 철학에서는, 인간이 과학과 기술이 인간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콩도르세라는 철학자는 주장하기를, 무한한 과학과 기술의 진보로 인해 인류의 앞으로의 역사는 찬란한 이상세계만 기다리고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과학과 기술의 진보를 누가 감히 막아 설 수 있느냐고 장담했습니다.
과학의 기술의 진보는 단지, 과학계에만 해당되는 원칙이 아니라 정치와 종교와 윤리와 가정과 문화와 사회 전반에 걸쳐 등장되는 각양 단체들도 합리적인 조직체로서 발전하게 되는 인간의 정신 세계도 보다 진보하게 된다는 겁니다. 미신과 낙후된 신비감은 그 모호성을 거둬들이게 된다는 겁니다. 분명하게 확실한 진리만이 통용되고 허용되는 완벽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주장하는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무엇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이냐 하면, 여전히 안일하고 경제적으로 낙후된 지역이 방치되어 있음을 고려해서나 성립될 말입니다. 즉 미개한 아프리카나 아시아 국가들이 갖고 있는 자원들이 마치 긁어모으듯이 모아지면 이것이 과학과 기술이 진보의 성과를 빛나게 만들 쓸모있는 자원으로 부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같이 이 과학과 기술의 진보에 뛰어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양심? 품위? 인격성? 믿음? 이런 것들은 전쟁에서의 승리 앞에 다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오로지 누가 양적으로 많이 차지하느냐 하는 결과만이 ‘성공’이라는 휘호를 창공 높이 달게 만듭니다. 그 당시 동양의 세계는 점잖을 빼면서 사는 분위기였습니다. 사람의 품위는 양의 많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고상함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하늘에 내려주신 고운 품성이 있는 그 품성을 함양하는 길만이,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행복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세계가 과학과 기술력을 앞세운 무력 앞에 맥없이 무너져 버리고, 서양의 문물이 침범해 들어왔습니다. 이제 오늘날의 세계는 너 나 할 것이 없이 양으로 승부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현대인들의 심성도 이런 외부적 욕망의 산물로서 발생하는 겁니다. 즉 내가 내 욕망을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 욕망이 나를 지배하고, 또한 그 외부 욕망이라는 것도 이미 형성된 타인이 욕망이 집단적으로 나에게 강요한 것들입니다. 한 집단 내에서 형성된 욕망이 요구하대로 내 욕망이 용인하지 않으면 나를 그 집단에서 퇴출당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길들여진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나를 잃어버린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지경 속에서 성경은 어떤 해결점을 내놓는 겁니까? 성경이 보는 인간상은 오늘날 세상에서 말하는 것처럼 욕망의 달성에서 행복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먹으면서 행복해지는 인간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많은 양이 인간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달고 맛있느냐를 묻는 겁니다.
잠언 27:7에 보면,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는 말씀에 배곯아야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일 수가 있다는 겁니다. 사람은 떡로만 사는 자로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말씀으로 사는 자 되라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했습니다. 이 창조의 원리에 따라 인간은 행복해 질 수가 있습니다.
잠언 16:24에 보면,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행복해진다는 조건이 우리 인간이 이 말씀을 다 지켜야 한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열심히 탐구하고 연구하고 많이 읽어야 된다는 말씀입니까? 이런 방식도 역시 질적이 아니라 양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려는 근대 사고와 다를 바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씀으로 달게 산다는 것은 말씀의 내용대로 되어지는 것을 감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잠언 16:33에는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라고 되어 있고, 그리고 잠언 21:31에는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라 되어 있고, 잠언 27:1에는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시킨대로 사는 삶’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습니다. 이것이 말씀을 달게 느끼고 사는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매사를 하나님의 말씀에 준해서 벌어진 일로 여기고 순복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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