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폐단(전5;13-17)이근호061008

아빠와 함께 2013. 7. 2. 16:27


폐단 

2006년 10월 8일                              설교 본문: 전도서 5: 13-17


(전 5:13) 『내가 해 아래서 큰 폐단되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 되도록 지키는 것이라』

(전 5:14) 『그 재물이 재난을 인하여 패하나니 비록 아들은 낳았으나 그 손에 아무 것도 없느니라』

(전 5:15)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 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전 5:16) 『이것도 폐단이라 어떻게 왔든지 그대로 가리니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가 저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전 5:17) 『일평생을 어두운 데서 먹으며 번뇌와 병과 분노가 저에게 있느니라』


사람이 낭패라고 여기는 것은 그만큼 선입견을 이미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뜻대로 되어야 될 것이 마음먹은대로 안되느냐 라고 하면서 짜증을 낼 때 낭패을 느낍니다. 오늘 본문에서 ‘폐단’이라고 간주되는 사례는 곧 인간은 뭘해도 항상 자신만의 선입견을 포기 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재산을 가진 소유주가 자기 재산을 본인이 지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달리 대안이 있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을 통해서 폐단이 나온다는 점입니다. 분명히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폐단은 폐단대로 나온다는 것이 기이한 현상입니다.


그 원인을 오늘 본문은 다음과 같이 규정합니다. 인간이 태어날 때에 ‘벌거벗은 채로 나왔다’는 겁니다. 이 점을 사람들은 자꾸 잊어버린다는 겁니다. 하지만 비록 인간들은 잊더라도 하나님은 잊지 않고 말씀대로 인간들을 벗거벗은 채로 죽게 하신다는 겁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자기 재산을 끝까지 갖고자 하여도 용납지 않고 아무 것도 못가진 채 죽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결국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폐단’이란 하나님 생각과 인간과의 생각에 틈이 발생한데서 오는 폐단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인간을 상대로 일을 추진하지만 인간들은 자꾸만 자기 뜻에 준해서 평가해서 곡해를 하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오늘 본문 말씀대로, 평생토록 인간들은 번심과 근심과 병으로 긴긴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하면 하나님의 뜻과 일치시킬 수 있을까요? 구약성경은 인간의 한계를 말해줍니다. 인간은 살면서 늘 허무나 폐단이 등장되는 식으로 살아가게 되고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게 마련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이것에 대한 해결책은 신약에 와서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구약의 사람들은 아무리 애써봤자 폐단과 허무를 남기지만 신약에서 성도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단, 그 과정에서 성도는 철저하게 자신의 죄인됨과 무능을 절감하게 됩니다. 한가지 예를 들면, 디모데전서 6:7-8에 보면,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이 말씀을 우리가 지킬 수 없습니다. 우리 성도들과 함께 계시는 주님께서 지키십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 성도는 철저하게 자신의 힘으로 이 말씀을 도저히 지킬 수 없었노라 라는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먹을 것과 입을 것’으로 족한 줄로 아는 마음은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에게 제공하시려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먹는 것과 입을 것’으로 도저히 만족 못하겠다고 버티는 마음입니다.


이 두 마음이 우리 내부에서 충돌하면서, 주님의 능력이 우리의 능력을 꺽어버리십니다. 누가 주님을 감히 이길 수 있단 말입니까! 주님을 이길 위인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대로 적용시키겠다는 것을 막아 설 자가 없습니다. 취소시킬 자도 없습니다. 물론 남들 보기에, 불신자들이나 다른 종교를 가진 자들도 이런 투의 사상을 펼칠 수는 있습니다.


따라서 전도서 말씀에서 이 디모데전서의 말씀 사이에 성도라는 특수한 신분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겉보기에 불신자들도 ‘무소유 사상’이라는 유사한 생각을 보여줄 수가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인간은 아무 것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는 점을 강변할 수도 있습니다. 누가 봐도 동의할 만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무소유적인 삶을 사는 그 본인을 부정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무소유 삶’을 산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결코 신앙적인 사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참된 신앙인은 자신의 구원이나 해탈을 위해 거룩한 생활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그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3:5-7에 보면,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아무 것도 아니요’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목회자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오류는, 자기 마음먹은대로 목회나 전도가 잘 안되면 짜증과 낙담을 한다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실은, 주님의 일은 주님이 하시니 인간들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은 마치 자기 일처럼 간주하면 안되는 겁니다.


아볼로나 사도 바울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주님께서 계속해서 그런 인간으로 유지시켜 주십니다. 그들은 단지 주님이 벌리시는 일에 동참시킨 자이고 주님에 의해서 다루심을 당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일을 하면서도 더욱 깊이, ‘내가 아무 것도 아님’을 절감하게 됩니다.


왜 그들이 그래야 합니까? 고린도전서 3:21-23에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물론 본인조차도 자랑할 수 없다는 것이 포함된 내용입니다. 왜 자랑하지 말라야 할까요? 그것은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소유로 이미 넘겨와 있는 이 현실성을 무시하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살면서 세상을 넓게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좁게 보면, 자신의 구역과 영역 싸움에 몰두 하게 됩니다. 따라서 자아 절대성에 입각하여 살게 되면 이것은 곧 주님의 뜻과 차이나기에 ‘폐단’을 낳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절대적인 분은 따로 계십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자만이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처음부터 아무 것도 아닌 자로 태어났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