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분복(전5;18-20)이근호061015

아빠와 함께 2013. 7. 2. 16:36


분복 

2006년 10월 15일                            설교 본문: 전도서 5:18-20


(전 5:18)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로다』

(전 5:19)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분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전 5:20) 『저는 그 생명의 날을 깊이 관념치 아니하리니 이는 하나님이 저의 마음의 기뻐하는 것으로 응하심이라』


사람의 인생이란 자신의 해석한 해석물에 해당됩니다. 사람은 늘 자신을 평가하고 판단하고 해석내리고, 성공이다든지 실패라든지 단정짓습니다. 자살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자신에게 해석을 하지 않는다면 구태여 자살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현재 시점에서 해석의 종결을 선언하고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은 자입니다.


이 사람은 따지고 보면 극히 교만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세상만사 전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지도 못하고, 그리고 앞으로 어떤 일이 자기에게 들이닥치지도 제대로 미리 알지 못하면서 마치 세상을 다 알고 있는양 제멋대로 해석의 종결을 단정해 버린 경솔함을 범한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같이 자신을 평가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것을 최종 해석으로 단정지어서는 아니됩니다. 그렇다면 최종 진리는 어디서 얻어지는 겁니까? 바로 성경 말씀입니다. 세상은 이 성경말씀의 범주를 일체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미 최종 해석은 성경 안에 다 감겨있습니다.


성경 말씀은 단순히 우리보고 뭘 하라는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되는 길로 우리가 갈 수 없는 신세임을 통고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분복을 받았다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이 우리를 해석할 권한이 없음을 전제로 하신 말씀입니다.


쉬지 않고 우리가 우리 자신들을 해석하지만 그 해석을 의지하거나 믿거나 해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이미 다른 해석이 수립되었고, 또한 그 해석에 준해서 세상이 돌아가는 마당에 스스로 자기에게 따로 해석을 가하는 것은 곧 교만이요 자살의 동기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얻어받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요청한 사실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몫의 인생일 뿐입니다. 즉 흔히들 나의 인생이 잘 되기 위해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말들 하지만 옳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의 인생’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비현실적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인생’은 없습니다. 단지 주님의 행하셔서 늘여주시는 인생만 있을 뿐입니다.


내가 만들어 나가는 것이 내 인생이 아니라 주님이 만들어주시고 또한 쭉쭉 늘여나가시는 인생이 ‘나의 인생’인 것입니다. 따라서 계속에서 우리네 인생은 그 자체로 분복입니다. 인간들은 제각기 피자 한 조각조각들을 각자 부여받은 것처럼 각자의 인생을 분여받은 것입니다.


남녀가 만나 부부가 된 것도 각자의 몫의 피자 조각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상대방의 주인이 아니고, 또한 상대방이 나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네 인생의 주인이요 생산자는 따로 존재하십니다. 피조 조각은 전체가 아닙니다. 그 중의 일부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전체로 행세해야 될 과중한 업무를 부여받은 것이 아닙니다. 끝까지 일부이기를 우리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의 가치는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성경 전체는 ‘새언약’에 의해 묶여져 있습니다. 새언약이란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수용한 통로입니다. 새언약의 성취자는 나도 아니요 여러분들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 뿐이십니다. 그 새언약의 가치로 인해 모든 가치는 무가치로 들통나 버렸습니다.


따라서 부분적으로 존재하는 인생들이 독자적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나 의미를 찾을려고 해서는 아니됩니다. 우리 각자들은 결코 새언약의 성취지가 아니다는 사실에 눈이 뜨여져야 합니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알아차리는 일도 우리 능력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베드로후서 1장에서 보면, 우리 마음 속에 어두움 속에서 샛별이 떠오르는 듯, 이해의 새로운 관점이 떠오르게 되어야 비로소 알 수 있는 진리라고 말씀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해석과 육적 해석으로 구분되는 지점입니다. 만약에 사람이 육적 해석으로 자신의 인생을 해석하면 이렇게 됩니다. 여전히 자기 인생의 주인님은 본인이고 책임자도 본인이고 관리자도 본인이기에 자신의 존재 가치와 의미는 자기 하기 나름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나’라는 의식이 피어나면 필히 ‘남(타인)’이라는 의식도 동시에 피어나기 마련입니다. 이렇게되면 그 때부터 이 사람은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인생을 살게 마련입니다. 어릴적 학과를 파하고 같은 또래는 아동들이 한데 모여, 동네 공터에서 누가누가 싸움을 제일 잘하는지 결정짓는 주먹다짐이 흔하게 일어납니다.


비록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촌스럽게 주먹의 힘으로 우열을 논하지는 않지만 그 대신, 학력이나 직장의 질이나 가진 재산이나 직장에서는 승진 속도나, 소유된 권력의 강도나, 친구 자랑이나 배우자의 사회적 품위나 신체의 젊음이나 건장함을 가지고 우열을 논하게 됩니다.


이러한 비교 의식과 경쟁 의식은 결코 복을 누리는 식의 인생은 아닙니다. 그저 힘들게 자신의 위산과 자존심을 파수해야 하는 업무을 부여받는 것 밖에 안됩니다. 오뉴월의 처마 밑에서 졸리듯이 길게 하품하는 개처럼 그런 여유로움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아닙니다.


어느 이는 50살이 채 못된 나이에 벌써 4급이라는 고급 공직에 근무했지만, 자신의 가치에 흠이 되는 작은 일이 발생되니 가차없이 사표를 내고 그 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런 것이 과연 인생을 즐기기 위한 분복일까요 아니면 자신의 위신은 타인 앞에서 타인이 보란듯이 스스로 지키겠다는 심보입니까?


인생에 있어 영원한 의미는 새언약의 몫으로 돌려드려야 합니다. 우리 존재의 가치와 의미는 이미 새언약으로 완료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옆에서 함께 십자가 달려죽은 강도가 낙원에 가게 되었는데 그에게 있어 그것보다 더 고귀하고 대단한 인생의 가치가 또 있겠습니까!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해석을 나 자신이 내리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해석자는 확정되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신 것을 내 것이라고 여기지 말고 분복이라고 여기시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우리 자신의 원수가 되지 않고 적으로 달려들고 못살게 굴지 않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