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도시의 모습(전5;8-9)이근호060924

아빠와 함께 2013. 7. 2. 16:08


도시의 모습 


2006년 9월 24일                            설교 본문: 전도서 5:8-9


[8] 너는 어느 도에서든지 빈민을 학대하는 것과 공의를 박멸하는 것을 볼지라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높은 자보다 더 높은 자가 감찰하고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이 있음이니라

[9] 땅의 이익은 뭇 사람을 위하여 있나니 왕도 밭의 소산을 받느니라


사람을 믿어서는 아니됩니다. 오죽했으면 성경에서 ‘원수는 자기 집안 식구니라’라고 되어 있겠습니까? 상대방을 대할 때 기대고 의지할 대상으로 상대방을 보지 말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실망하고 낙담하는 괴로움을 당하게 됩니다. 성경 전체가 ‘제발 사람믿지 말고 심지어 네 자신도 믿지 말라’라는 겁니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따로 있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대로 표현하자면, ‘높은 자보다 더 높은자’입니다. 사람들이 '높은 자보다 더 높은 자'를 믿지 않게 되면 자연적으로 낮은 시선으로 자기 주변의 사람을 훑게 됩니다. 혹시 자신이 만만하게 이용해 먹을 어리숙한 인간들이 없나하고 먹이감 찾듯이 찾게 됩니다.


사람들이 흔히 남들로부터 이용당했다고 불평하지만 실은 은연 중에 자신도 그 사람을 이용하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에 생긴 결과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남들로부터 학대받도록 조치하는 겁니까? 그것은 우리가 자신도 모르는 상태에서 남들을 학대하고 있음을 우리보고 깨닫기 하기 위함입니다.


즉 자신이 옳다고 인정받기 위해 성경을 본다든지, 교회를 나간다든지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그런 환경을 조성하신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잠재적으로 얼마나 이기주의며 그 이기주의로 인하여 타인들과 우리 주님이 얼마나 많은 욕을 얻어먹는지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낮은 시선에서 낮은 안목가지고 세상이 더럽다고 판정내릴 것이 아니라 나 자신도 더러운 세상에 뒤지지 않는 더러움을 품고 세상을 살아옴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사회 이 세상이 편하게 살도록 방치하지 않으므로 인하여 이제는 옆으로만 보는 시선을 위로 보게도 하십니다. ‘높은 자 위의 높은 자’까지 관계를 맺는 사람이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이러한 예가 성경에 여러 군데 나옵니다. 우선 창세기 42:1-5에 보면,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관망 만하느냐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리하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매 요셉의 형 십 인이 애굽에서 곡식을 사려고 내려 갔으나 야곱이 요셉의 아우 베냐민을 그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말이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 두렵다 함이었더라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양식 사러간 자 중에 있으니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있음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에서 안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동시에 그는 자기 아들 요셉이 여전히 죽은 인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설마 살아서 애굽에서 큰 권세가 되었는지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야곱은 그저 그냥 약속의 땅에 죽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긴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방적인 야곱의 뜻은 하나님에 의한 계속적인 가뭄으로 인하여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자기 뜻을 꺾고 양식을 사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비로소 거기서 죽은 줄만 알았던 아들을 산 채로 만나게 됩니다. 만약 야곱이 살던 땅에 기근이 없었더라면 그는 한발국도 옮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단순히 양식 구함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구함과 하나님의 약속이 일관성있게 진척됨을 실감하는 감격을 야곱은 누리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예는 열왕기상 17장에 보면, 거기에 사르밧 과부가 나옵니다. 너무 오랫동안 이스라엘 땅에 가뭄이 들어서 그녀는 마지막 양식을 입에 털어넣고 죽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때, 하나님의 종 엘리야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엘리야는 그 과부를 도와주기는 커녕 그 마지막 남은 양식까지 자기가 홀랑 먹어버립니다. 이렇게 되는 그 과부는 진짜 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자신의 목숨을 지탱할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 때 엘리야는 그릇들을 모아놓아라고 하고서는 그 그릇보다 참기름을 가득 넘치게 해서 그 참기름을 팔아서 기근 때까지 그 과부가 굶지 않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으로서 이야기가 끝나는게 아닙니다. 후속편이 재미있습니다. 갑자기 멀쩡하던 자기 아들이 시름시름 앓다가 급기야 죽고 말았습니다.


그럴 때 엘리야에게 고마움을 갖던 그 여인의 마음은 분노로 급변했습니다. 엘리야를 자기 자신을 더욱 힘들게 하는 나쁜 사람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이미 죽었던 그 아들마저 살려냅니다. 이렇게 해서 전에 과부의 그릇에 주었던 참기름이 단순히 참기름이 아니라 곧 죽은 자도 살리는 생명의 징표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5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여 살린 것은 단순히 그들을 배불리는 차원이 아니라 예수님 없는 인간은 이미 죽은 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표시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야곱의 경우나, 엘리야의 경우나 모두, 이 세상에서의 힘든 생활을 통해서 참된 생명은 이 세상 외부에서 은혜로 주어지는 것임을 알게 하는 일들입니다.


세 번째로 언급하고자 하는 예는, 야고보서 5장에 나오는 예입니다. 야고보서 5:4, 7-11에 보면,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에게 욥의 인내와 주님의 낮아지심을 온 몸으로 실감나게 하시려는 겁니다. 우리는 도화지와 같습니다. 도화지까리의 가치를 논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도화지 위에 무슨 그림을 남기느냐 하는 것은 ‘높고 높은 분’의 몫입니다. 그 분으로부터 왕 조차도 도움을 받을 정도니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눈에 보이는 사람을 의지해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영원한 왕이신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하신 일을 그냥 그대로 믿을 수 있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