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만족(전5;10-12)이근호061001

아빠와 함께 2013. 7. 2. 16:19


만족 

2006년 10월 1일                          설교 본문: 전도서 5:10-12


(전 5:10)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전 5:11) 『재산이 더하면 먹는 자도 더하나니 그 소유주가 눈으로 보는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전 5:12)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배부름으로 자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기쁨은 이 세상의 어떤 기쁨과도 족히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이 세상의 무슨 요소가 이런 기쁨을 뺏아가고 마는 걸까요? 그것은 인간의 만족을 따로 챙겨보겠다는 의도 때문입니다. 돈으로 인한 만족은 인간에서부터 시작해서 인간의 행함으로 인하여 마감되는 만족이라서 항상 여백이 남고 공백을 남깁니다. 


이 공백의 허전함을 인간이 무슨 수를 다 써도 채울수가 없습니다. 이럴 때는 추락하는 중력을 느껴야 합니다. 즉 한없이 한없이 추락하는 가운데서 그 뚝 떨어진 바닥에서 사람은 비로소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한 기쁨이 얼마나 실제적인 기쁨인가를 절실하게 느끼게 됩니다.


진작 추락할걸! 진작 높은 곳에서 미끌어질걸! 사람이 만족을 채우겠다고 나서는 것 자체가 진정 시도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아예 만족을 채워나갈 필요조차 없는 인생이라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인생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스스로 선택하는 인생일 수 없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자기 본성과 사회가 만들어주는 힘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뭔가 갖지 아니하면 생명에 위협을 느끼는 마련입니다. 따라서 예부터 사람들은 소유가 행복의 척도였습니다. 많이 가진 사람은 많이 행복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의 인생을 통해서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열왕기상 10장에 보면 솔로몬왕은 대단한 부자였습니다. 온갖 은과 금으로 만든 것들로 둘러싸여 살았습니다. 은이 돌처럼 흔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은과 금이 솔로몬의 영혼을 완성시켜주지 못했습니다. 그는 추락했어야 했습니다. 남들이 떨어지는 것보다 더 깊게 떨어져야 했습니다.


인생의 행복과 만족이란 돈과 상관없는 식으로 주어지는 법입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 인간사가 갖고 있는 한계를 말해줍니다. 은으로 만족할 수 없다면 진정한 만족과 행복에 대한 해답은 신약 성경에서 와서 풀릴 수 밖에 없습니다. 돈과 상관없이 인생의 만족은 어디서 오는 가를 말해줍니다.


고린도후서 6:9-10에 보면,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이상한 표현이 나옵니다.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는 대목입니다. 어떻게 아무 것도 없는데 모든 것을 가진 것일까요? 최고의 부자란 이 세상 모든 것을 가져서 더 이상 불만족이 생길 수 없는 상황을 말합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은 오로지 미흡함만 가득 차 있다는 뜻인데 어떻게 미흡함이 곧 만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여기에 해답은 고린도후서 8:9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부요한 분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부요한 분의 한 식솔로서 초청된 자는 자동적으로 부자집안 사람일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마치 문어머리에 달린 문어발이 따로 놀고 있으면 그것을 결코 문어라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겁니다. 그리고 진정 문어발이라는 문어머리가 가진 것을 공유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부요한 분이시기에 성도는, 비록 아무 것도 갖지 않더라도 이미 부자인 겁니다.


꼭 많은 재물을 개인 소유로 지니고 있지 않더라도 부자 집안 사람이라면 부자 맞습니다. 가난한 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 재산이 곧 그 사람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란 현대인들이 취사선택에서 결정한 사회가 아닙니다. 이 사회에서의 가치라는 것은 시장에서 발생됩니다.


타인이 애쓰고 수고한 것을 자기 것으로 전환시키는 곳이 시장입니다. 갖가지 교환이 교차하는 가운데서 자신의 노동보다 훨등하게 많은 수익을 챙기는 곳도 바로 시장입니다. 어떻게 벌었던간에 자신이 벌어드린 재물은 완벽하게 자신만의 소유라고 취급해주는 곳도 시장입니다.


이 시장이 발달해서 근대국가가 발전했습니다. 소위 칼빈주의에 근거해서 근면, 검소해서 확보한 재물은 절대적으로 그 본인의 것으로 간주해주는 사회입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적으로 능력의 차이가 난다는 요소를 소홀히 취급하여 가진 자는 더욱 가지고 되고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길 판입니다.


이러한 불합리를 보완하기 위해서 기회를 균등하게 주지만 그러나 인간들의 타고난 능력들의 차이들로 인하여 발생된 가난에 대해서는 무한대로 동정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아예 일어날 기력조차 없는 자들에게는 게으름피지 않을 정도의 도움을 제공해주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들은 모두 돈을 중심으로 인간의 가치에 서열을 매기는 방식의 이야기들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성도는 모두 한 성령을 주님으로부터 받은 바있습니다. 그렇다면 혈육에 의해서 조성된 가족보다 예수님의 피을 믿는 가족들이 더 영원한 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교회를 배척의 대상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교회 문제를 밀쳐버리려고 합니다. 이것은 세상 시장에서 형성된 개인주의적이고 개별주의적인 성향이 그대로 교회까지 이어져서 그러합니다. 머리가 없는 문어발은 결코 문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고 예수님을 머리로 모시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성도가 예수님으로부터 독립될 수 없다면, 예수님 안에 들어와서는 더 이상 돈의 미흡으로 인한 불만족성은 없어야 합니다. 이미 부요한 자로서 헌금해야 합니다. 과부의 동전 2개의 헌금은 예수님보시기에 천하의 부자가 낸 막대한 헌금보다 더 많은 헌금을 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 과부가 천하의 어떤 부자보다 부자라고 간주하셨기 때문입니다. 과부의 만족은 오로지 예수님이지 결코 자신이 낸 헌금 액수와 무관합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부자되었기에 더 이상 자신을 가난한 자로 간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 것도 가지지 않더라도 부자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불만족적 습성으로 인해 예수님의 만족을 훼방하지 않고 동참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