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2006년 9월 17일 설교 본문: 전도서 5:3-7
[3] 일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
[4]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5]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
[6] 네 입으로 네 육체를 범죄케 말라 사자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으로 네 말소리를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
[7] 꿈이 많으면 헛된 것이 많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
하나님께 경외한다는 것을 설명하다면 꿈이 많고 말이 많은 경우와 대비시킵니다. 즉 진정 하나님께 경외하려면 꿈이 적어야 하고 말을 많이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 두 가지 경우의 대비가 우리들로서는 참으로 낯설어 보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 경외하는 것이 말을 많이 하지 않아야 하는 것과 연관이 되느냐 말입니다.
그것은 말이 많다는 것은 인간이 나름대로 자기 포부와 계획을 많이 생산해 내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인간이 제시하는 많은 계획이 실상은 하나님이 주신 뜻을 못마땅하다는 의사표시일 수가 있는 겁니다. 즉 하나님이 그렇게 믿덥지 않다는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까지 지루해서 기다릴 수 없다는 말도 됩니다.
독자적으로 계획을 하는 편이 속 편하다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모습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기는커녕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모독하는 경우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로 감사하고 만족 못하고 자신이 따로 생각해놓은 세상이기를 꿈꾸는 것, 이런 모습은 도저히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교회에서 아뭇 소리 안하고 입만 꽉 다물고 있으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일까요? 무게있게 처신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태가 될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입을 무겁게 해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요 많이 많이해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 인간은 도대체 어떤 식으로 처신하라는 말입니까?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우리 힘으로 이 말씀을 이룰 것이라고 간주해서는 아니됩니다. 도리어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자체적으로 한계와 위반자로 살아가고 있는 처지임을 알려주시는 겁니다. 즉 우리는 끊임없이 꿈들을 지어내고 그것들을 입을 통해서 남에게 발설하므로서 하나님에로의 경외하심을 훼방하는 어리석은 자로 처신하고 있음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그 한 예가 오늘 본문에서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라는 대목이 이 점이 말해줍니다. 인간들이 자신의 입을 통해서 쏟아낸 모든 것들을 과연 그 지킬 위인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경외하심을 방해한 겁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33-37에 보면,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경외하심에 대해서 인간의 계획이라든지, 맹세라든지, 다짐이 들어갈 자리가 아예 없다는 겁니다. 단지 인간은 하나님에게 이미 경외가 된 사항을 그냥 수납하고 은혜로 동참받게 될 뿐입니다. 그것은 인간을 말을 안했거나 아니면 자신이 내뱉은 말을 전부 다 성취시켰기 때문이 아니라 말씀의 성취성에서 인간들이 아예 배제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은 홀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자 안에 들어있을 경우에만 구원되는 겁니다. 인간이 만약 예수님 안에 있을 경우에도 인간은 입을 꽉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끊임없이 말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결코 그리스도 밖에서나 있을 수 있는 말을 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뜻, 혹은 하나님의 계시라고 쳐주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말을 많이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는 자신의 말이 아니라 자기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에 관해서 말을 꼭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야고보서 3:1-3, 과 6-10에 보면,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선생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에 굴레 씌우리라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의 혀에게서 나오는 말이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는 겁니다. 언어가 이런 역할을 하는 경우는 예수님의 복음에 관한 내용 뿐입니다. 소위 남들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살겠다는 사람은 엄중하게 그리스도 복음에 정확해야 한다는 겁니다. 만약에 예수님에 관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관한 내용을 마치 진리나 계시처럼 가르친다면 그 혀에서 나오는 말의 가르침으로 인해 듣는 사람을 멸망케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겁니다.
진정한 축복도 예수님의 복음에서만 나오고 진정한 저주도 예수님의 복음에 의해서만 지정됩니다. 남을 가르치는 자격이 있다고 스스로 우기만 자신이 느낀 것, 자신이 경험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시오 진리인 것처럼 떠벌이기 마련입니다.
이로 인해 다른 계시, 다른 복음, 다른 진리가 유포되면서 사람들을 혼란시켜 버립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자는 남들보다 더욱 무섭고 엄중한 심판을 받을 각오를 하라는 겁니다. 즉 참된 성령을 받은 자는 가르치는 자들이 복음으로 전하는지 그렇지 않는지를 잘 판가름하게 됩니다.
따라서 거짓으로 가르치면 당연히 반발하게 될 것이고, 이 반발에 대해서 소위 선생이라는 인위적 권위를 가지고 그 사람을 핍박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제발 그리스도의 복음 위주로 말을 해야 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복음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간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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