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과 왕
2006년 9월 3일 설교 본문: 전도서 4:13-16
[13]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소년은 늙고 둔하여 간함을 받을줄 모르는 왕보다 나으니
[14] 저는 그 나라에서 나면서 가난한 자로서 옥에서 나와서 왕이 되었음이니라
[15] 내가 본즉 해 아래서 다니는 인생들이 왕의 버금으로 대신하여 일어난 소년과 함께 있으매
[16] 저희 치리를 받는 백성들이 무수하였을지라도 후에 오는 자들은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오늘 본문의 내용에서, 이 세상 안에서 사람들이 사람들로부터 받는 존경이라든지 인기라든지 사랑이라는 것은 얼마가지 못가고 헛되게 끝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사람들이 존경스러운 왕을 원하고 있으면서도 어디까지 왕을 위한 자신이 아니라 반대로 자신을 위한 왕으로 곧장 변해 버린다는 겁니다.
왕이라는 개념은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는 실감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벗겨놓으면 똑같은 인간인데 똑같은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왕이시여”하고 머리 조아리고 무릎을 꿇고 굴복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아니 배알도 없고 자존심도 없다는 말입니까?
왕이라는 정치 제도가 오늘날에는 매우 이질적으로 들리겠지만, 불과 몇 백년 전만해도 전 세계의 보편적인 질서 양상이 ‘왕 제도’였습니다. 살아있는 왕이 엄연히 있고, 그에게 무조건으로 복종해야 될 백성도 엄연히 있었습니다. 그들이 결코 머리가 나빠서도 아니고 자존심이 없어서 왕에게 엎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있어 ‘산다’는 것은 요즈음 식으로 자기 재산만으로 ‘가치있는 사람 살기’를 가능하지 않았던 사회입니다. 쉽게 말해서 재산이 전부가 아닌 사회였습니다. 그 때 그 사회는 대자연 속에서 덮쳐오는 권위와 전통이 살아있었습니다. 한 번 귀족은 영원한 귀족이요, 한 번 천민은 영원한 천민입니다.
인간의 마음 속에는 질서 의식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 질서에 대항해서 자신에게 가진 재산이 있다고 해서 자기 홀로 뒤덮고 싶은 사회가 아니라 도리어 순응하고 싶은 사회입니다. 사람이란 가진 재산만 쳐다보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존경할 자를 존경하고, 그 사람으로부터 사랑과 배려를 받는 가운데 사는 겁니다.
즉 양반이 쌍놈에게 배려를 해줄 때에, 쌍놈은 결코 양반의 재산을 일부 양보받았다고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양반 되시는 분으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았다는 그 관계의 돈독함이 더욱더 그 쌍놈으로부터 세상 살아갈 보람을 갖게 한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요즈음처럼 가진 재산으로 가치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해있는 사회의 전통과 문화에 즐거이 순응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인생이라고 본 겁니다.
그렇든 사회가 인간가 조밀해지고, 토지 중심으로 그 많은 인간들의 기본적인 욕구를 채울 수 없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과학 기술은 발달은 사람들이 소비하는 것보다 더 많은 물품들을 양산할 수 있었고, 그 여분의 물품들은 더 이상 전통이나 대자연에 영향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질서체제로 유지될 필요성을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즉 대자연의 것들이 비록 인류 공동의 재산이지만 보다 부지런한 사람이 있어 열심히 땅을 경작하고 나무의 실과를 채집했다면, 그렇게 해서 얻은 소득은 게으른 자가 결코 손대면 아니되는 배타적인 소유권을 획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소유권은 신이 내린 노동권에 의해서 제공된 것이기에 곧 그 소유권마저 신으로부터 합법적으로 인정받는 자기만의 재산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국가나 왕이란 백성들과 법적인 계약 관계에만 맺어져서 사람들이 자기 노동권에 의해서 얻어진 소유권을 타인으로부터 부당하게 빼앗기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만 할 뿐인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그 어떤 존경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자비라는 것이 있을 수 없고 대세를 쥐고 있는 것은 공동의 대다수가 지지한 법 뿐입니다.
즉 법에 의해서 질서가 잡히고 법에 의해서 재산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이로소 법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왕 제도란 명분이나 명목으로만 남아 있지 실질적으로 아무런 실권이 없습니다. 실권이란 사유재산을 갖고 있는 그들로부터 법적으로 위임받은 대목만 집행하는 전문 국가 공무원이나 관료들 뿐입니다. 하지만 그들로 제대로 치안이나 국방이나 조세제도를 운영못하면 언제든지 사유재산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바궈치기를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들에게 이미 운명처럼 익숙해진 민주주의제도란 실제로 하나님께서 정해준 정치제도가 아니라 도리어 인간들이 신의 굴레로부터 해방하고자 시도해서 만들어진 정치 제도입니다. 이 정치 제도 또한 추상적으로 머물지 않고 실질적으로 효과있는 행사되려면 민주주의 제도만 덜렁 남아있어서는 아니되고 ‘자본주의’라는 경제 제도가 뒷받침 되어야 합니다.
자본주의란 미래의 잉여가치를 얻기 위해 상품 유통에다 돈을 상품처럼 유통시키는 방식을 말합니다. 즉 교환용으로 쓰일 돈을 가지고 돈 자체에 무슨 사용가치가 특별히 있는 것처럼 가장해서 시장 내에서 퍼지게 하는 방식입니다. 즉 상품의 가치를 위해서가 아니라 돈 자체의 증식을 위해 돈을 굴리는 경제 방식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인해 더 이상 존경과 권위라든지, 사랑이라든지, 자비심이라든지 섬김이라는 것이 사회를 지배할 수는 없고 자본의 증식을 가능하게 하는가 아니면 자본의 증식에 방해되느냐를 놓고서 사회가 움직이게 된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이런 인간 사회를 인정해 주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인정해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은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는 나라입니다. 이사야 53:10-11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을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받은 저주를 대신 받아내신 분이십니다. 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위함이요 그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위함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원칙은,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상과 다릅니다. 자신이 노동한 것은 철저하게 자기 것으로만 가져가는 사회와 너무나도 대조가 되는 사회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이처럼 오늘날의 민주주의 제도와 다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품고 있는 소년이 하나님의 뜻이 되어 존경받는 왕이 된다할지라도 인간의 죄성은 그 소년에 대한 자비를 곧장 잊어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왕되심을 우리가 그냥 쉽게 잊는다면 우리가 멸망의 자식일 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로 하여금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진정한 왕이신 예수님의 사랑에 굴복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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