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의 힘
2006년 8월 13일 설교 본문: 전도서 4:9-12
[9]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10]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11]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전도서와 잠언의 차이점은, 잠언에는 옳은 일과 옳지 않는 일을 분명히 구분짓고서는 그런 악한 일을 하지 말라는 식으로 적혀있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바르게 살면 복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전도서의 경우에는, 옳고 그름에 관한 구분이 있는 것이 아니라 평상시 인간들이 본성으로 살아가는 모습과 요령들을 그대로 적고 있으면서 결국에는 그것마저 헛되고 헛되다고 판정내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들이 판단하는 옳고 그름이 아무리 치밀하고 빈틈없이 정리한다할지라도 하나님 마음에 합당치 않으신다는 것인데 이는 그 원인이 이미 인간에게는 운명처럼 확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이 무슨 행동을 해도 그 목적하는 바와 의도성이 하나님의 뜻하고는 늘 상관없이 진행된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 두 사람이 상호 협력하는 것이 혼자 노력하는 것보다 수고한 대가를 얻는데 유리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을 위한 협력이며 누구를 위한 협력인가를 놓고 볼 때에,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부응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잠언 11:21에 보면, “악인은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할 것이나 의인의 자손은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들 끼리 마음 맞는다고 협조가 잘 되어도 도리어 하나님의 징벌을 더 보태는 일이 될 수가 있습니다. 차라리 의를 따르기 위해 악인을 멀리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복받을 만한 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벌려놓은 일을 달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성경 말씀을 도용하면 안됩니다.
한 사람이 일을 하다가 좌절하면 그런 자신을 도와줄 다른 동료가 있으면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 본문 말씀의 진정한 뜻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실시하는 과정을 통해서 성취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14:7-8에 보면,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 몸’을 이루는데 있어 주님께서는 이 전도서 말씀대로 서로 협력하고 협조하는 형식으로 이루어나가시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몸 이루기’는 결코 인간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께서는 해 내시는 일입니다.
이러한 일을 만약에 인간이 해 낼 수 있다고 시도하게 되면 반드시 오늘 본문에 대한 왜곡된 해석이 도출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면, “당회에서 결정내린 사항을 왜 제직회나 전 교인들이 왜 안 따라주는가? 교회 일하다가 낙심이 되면 비판할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용기내라고 격려해주는 것이 이 전도서의 말씀대로 된 주의 뜻이 아닌가”하는 식으로 곡해하기 십상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교회에 가던 아니면 집에 가던 항상 동일한 그 몸뚱아리입니다. 따라서 집에서도 자기를 위한 살던 자라면 교회에 가서도 마찬가지로 자기를 위해 삽니다. 반대로 집에서도 주를 위해 살면 교회에 가서도 주를 위해 살 사람입니다.
이것은 곧 ‘협조’나 ‘협력’이란 주님의 영께서 직접 주선할 문제이지 결코 인간들의 정치적 조직이나 제도를 수립해서 달성될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로마서 12장에서는 이것은, ‘영적 예배’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영적 예배란 같은 그리스도 몸 안에 있는 지체들을 인정하고 용인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즉 내가 받은 신앙이 내가 잘나서 받은 것이 아니라 기적적인 선물로서 생겨버린 신앙이라면 상대방의 신앙도 그런 식으로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존중이 인간의 능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는 말은 곧 ‘자기를 위한 일하는 것’을 결코 ‘주의 일’로 간주해주고 협조해서는 안된다는 말도 됩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일하게 되는 성령의 작업이라면 ‘서로’를 누락하지를 않게 됩니다. 즉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녔다 할지라도 인간들은 언제든지 신앙에 대해 회의와 의심을 순간이 찾아들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마침 교회에 막 등록한 교인 한 사람이 제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자신의 신앙의 문제점도 아울러 밝혀지는 계기를 접하는 경우이기도 합니다.
같은 교인들 끼리 서로서로 권면을 하다보면, 상대방에게 나타난 고민거리가 결코 그 사람에게만 국한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나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여지가 있음을 교회의 머리되시는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깨닫게 하는 방도로 서로를 만나게 하셨음을 알게 됩니다.
교회의 모든 운명을 총괄하시는 주님께서는 성도들이 어떻게 하든지, ‘자기를 챙기지 않게’ 하는 식으로 인도하십니다. 즉 나를 위한 교회도 아니요 내 구원을 위한 교회도 아니요,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한 교회도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위한 교회라는 점을 매순간 확실하게 정립케 합니다.
로마서 12:10에 보면,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서로’를 초월하고 벗어날 수 있는 성도는 존재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사람이 남들에게 신앙상담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신앙을 과시하는 기회가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께서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보라는 기회라고 여기고 봉사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붙여준 자를 함부로 무시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열왕기하 5장에 보면, 아담 나라 군대장관 나하만이 이스라엘의 어린 여종의 말을 믿고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옵니다. 문둥을 낫게 하겠다는 겁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선입견을 나하만 장군에서 빼내 주십니다.
하나는, 깨끗한 자연적 조건이 하나님의 병 치료에 유리할 것이라는 선입견과 둘째는 뭔가 신에게 바쳐야 그 바친 것을 통해서 보다 효력있는 기적을 얻게 된다는 선입견입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엘리사 선자자에 의해서 가로막힙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곧 우리 자신의 죄와 그 한계를 지적하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서로를 인정하고 그들의 복음적 고백을 존중하고자 하는 이유는 헛되고 헛된 인간이 그들 자신을 앞장 세우고서는 결코 하나님 말씀이 달성되지 못함을 분명히 하기 위함입니다. 자신의 신앙이 기적인 것처럼 복음적인 신앙을 지난 타인도 주님의 기적을 거저 받는 자로서의 가치를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을 내 위주로 보지 말고 주님의 십자가에서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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