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듣는 태도
2006년 9월 10일 설교 본문: 전도서 5:1-2
[1]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2]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오늘 본문에서 담박 알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전이란 말씀을 전하는 공간이다는 사실과 또 다른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장담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기껏 땅에서나 유통되는 사고방식에 불과하지 결코 하늘 나라에서도 통하는 사고방식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냥 잠잠하기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 될까요? 유대교인들이나 아니면 육적으로 성경을 해석한 사람은 아마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 구원받은 사람들은 이 본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논리로 그것이 가능할까요?
과연 잠잠하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할까요? 왜 잠잠해야만 할까요? 하박국 2:20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시기에 잠잠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문제는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이 땅에 등장하며 어떤 식의 잠잠함을 요구하느냐 말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오늘날 예배당을 자신의 성전이라고 간주하실까요? 아닙니다. 예배당에서 예배 드릴 때 조용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식의 ‘잠잠함’이 새로이 등장합니다. 누가복음 10:38-42에 보면,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리아의 태도는 세상적으로 통하는 소위 ‘귀한 분 대접하기’입니다. 그런데 동생 마리아는 성전이 무엇이며 그 성전에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성도가 어떤 식으로 잠잠해야만 하는가를 표준적인 양상을 보여줍니다. 마리아는 오로지 예수님의 말씀 듣기에 온 신경을 다 쏟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우리 인간들이 이 땅에서 미처 알지 못하는 귀한 하늘의 소식을 예수님을 통해서 듣고 싶어 한다는 태도를 보여주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 마르다는 예수님이 단지 자신의 정성과 성의를 받아주시는 분이라고 간주하고 있는 겁니다.
사실 마리아의 태도는 세상적인 규범에 비추어볼 때 별로 칭찬받지 못할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도리어 마리아를 꾸중하시기 보다는 칭찬하십니다. 즉 ‘잠잠함’이라는 의미가 단순히 입 다물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 앞에 자신의 죄인임을 인정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요한복음 9:41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자신이 당연하게 주님 앞에서 죄인되는 것이 합당하다는 고백을 뜻합니다. 만약에 조금이라도 자신이 죄인 아니라고 여기는 사람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이 토나 티를 잡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즉 “내가 주님 만나서 죄인에서 의인으로 벗어나려고 하는데 이 벗어나려고 하는 노력마저 죄란 말입니까? 이 노력을 발휘하겠다는 시도가 남이 아니라 나 본인에게서 나오고, 그 나옴이 귀한 일이라면 어떻게 제가 전적으로 주님 앞에 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라고 따지고 나올 것이 분명합니다. 바로 이러한 태도 자체가 주님 앞에서 ‘잠잠치 못한’ 건방진 태도로서의 죄인 것입니다.
아예 죄인됨을 기정 사실로 여기고 주님을 대하여야 합니다. 인간의 사상이 아무리 깊고, 장엄하고 고상하고 귀하다고 해봤자 어디까지나 땅에 속한 생각일 뿐입니다. 요한복음 3:31-32에 보면,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8:23-24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늘에 속했다는 말은 단순히 땅에서 우리 인간이 알고 있는 것에다 덧붙이는 새로운 지혜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은 그런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전적으로 땅의 인간들이 알고 있는 것과 대비가 되고 반대되는 말씀으로 다가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그냥 잠잠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 중의 괴수이기에 잠잠해야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늘의 뜻과 땅의 뜻이 얼마나 다른지 몇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로마서 9:19-23에 보면,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로마서 11:35에 보면,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들이 하나님께 바쳐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바로 이런 차이점을 알고 자기 죄를 안다면 우리는 주님 앞에 잠잠해질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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