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자
2006년 7월 23일 설교 본문: 전도서 3:16-21
(전 3:16) 『내가 해 아래서 또 보건대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고 공의를 행하는 곳에도 악이 있도다』
(전 3:17)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목적과 모든 일이 이룰 때가 있음이라 하였으며』
(전 3:18)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전 3:19)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전 3:20)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전 3:21)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해 아래서 사람들의 관심사는 자기 세계의 유지와 보존과 운영입니다. 보다 정의롭게 운영하면 이 세상의 허무가 해소되리라 여겼습니다. 사람들은 이 대자연 속에서 자꾸만 자기 것을 꾸미고 싶어합니다. 자신이 구성해놓은 작은 세상을 따로 챙기고 싶어합니다. 작게는 가정이 그러하고 크게는 국가가 그러합니다.
이로서 인간들은 자신들이 짐승의 수준에서 점차 벗어난다고 여깁니다. 국가적으로 이 세상 사회에는 보통 세 가지의 차이나는 분류와 구별됩니다. 하나는 왕입니다. 다른 한 그룹은 보통 평민들입니다. 또 하나의 그룹은 짐승에 가까이 못난 죄인들이요 가난한 자들입니다. 보통 평민들과 가난하고 죄많은 자들의 왕으로부터 지배를 받고 통치를 받는 것을 지극히 당연하게 여깁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을 지배해 달라고 그들을 원해서 세워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왕이란 고대로부터 최종 재판을 거행하는 자입니다. 재판이란 의로움과 악함을 구별하는 자리입니다. 왜 사람들은 의로운 사람이 왕으로 있기를 원할까요? 그것은 신께서 의로운 자에게 특별한 은혜와 혜택을 더 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실은 왕이 착하기 때문에 신께서 왕 답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왕으로 권력을 쥐고 있으니 할 수 없이 그냥 착하기만을 고대할 따름입니다.
사람들은 신으로부터 오늘 특별한 행운을 고대합니다. 그래서 신과 인간들 사이에 초월적인 인간이 중간에 자리잡아서 신으로부터는 복을 따내오고 아래로 백성들에게는 그 따낸 복을 대가없이 그저 제공할 수 있는 덕스러운 왕이 오래 자리잡기를 바랍니다. 소위 영웅인 자가 계속 왕이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전쟁에서 특별한 능력이 발휘되어 예상못할 기적인 승리를 낚아 채면 사람들은 그 사람을 지도자로 혹은 왕으로 영웅으로 계속 자기를 통치해 주시기 바라게 됩니다. 일반 사업체나 조직체나 공조직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작년보다 위에서 더 많은 예산을 따내오는 능력을 발휘하면 그 사람들은 계속 조직의 장으로 군림할 가능성이 높은 법입니다. 바로 이것이 권력의 원천입니다. 권력이란 사람들의 늘 상상하는 행위 가운데서 그것이 현실과 일치된다고 착각하는 지점에 발생됩니다. 즉 “당신이 바로 우리가 기다리던 영웅 맞습니다”라고 단정하면 그 사람에게는 권력이 임재된 순간입니다.
그 권력을 사람을 신이 내린 권위라고 단정하고 싶은 이유가 신과 자기네들 사이에 그 어떤 공백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권력을 쥔 사람은 자신이 그동안 획득한 부와 축복의 원칙에 근거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게 됩니다. 소위 재판을 벌리는 겁니다. 그 조직에 부를 증가시키는 경우는 신으로부터 축복받은 경우요, 반대로 그 조직에 소유된 부를 감소시키는 경우가 발생하면 그 사람은 신으로부터 저주받은, 조직에 합당치 않는 사람으로 판정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재판을 감행하는 왕의 성격에 맞지 않는 자는 그 왕이 있는 기간동안 자동적으로 신으로부터 저주받는 인물로 분류될 수 밖에 없을 것이요, 만약에 차기 왕이 자기 성경에 부합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신이 축복에 합당한 사람으로 대접받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들이 모두 ‘해 아래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 소용없는 헛되고 헛된 짓이라는 겁니다. 이 해 아래서 하나님께서 행라시는 바는 심판입니다. 심판이란 누구누구의 팔을 들어주면서 “당신이 이번 일의 승리자요” 선언해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동일하게 누구든지 짐승과 다를 바 없다는 그 원래성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은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의 안정된 운영과 미래의 번영을 추구하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묻는 바는 “네가 누군지를 아느냐?”입니다. 교회나 세상은 재미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정작 내가 누군지에 관심없으면 그런 세계는 자신을 코디하고 꾸미는 허상의 세계를 바라 볼 뿐입니다.
사람 곁에 짐승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 인간의 정체와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 시험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아무리 인간들은 바르게 재판해도 그 재판 과정 속에도 하나님의 심판이 스며들어가 있습니다. 즉 “짐승같은 인간들끼리 무슨 패가름을 하느냐?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라고 말입니다.
공중의 새를 바라보고, 들에 핀 이름없는 들풀을 무심한 마음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뉴월에 따뜻한 햇빛 쬐이는 곳에 나가서 벌러덩 사지 벌려놓고 잠을 자고 있는 개를 보세요. 그들에게 있어 인간들의 정치 사정에 전혀 관심 없습니다. 심지어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그 개를 잡아 먹는다 할지라도 그 개는 그날 쬐고 싶은 햇빛은 고민없이 만낏하며 쬐게 됩니다.
주님을 말씀하십니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사람이 진정 자기 본색을 아는 순간은 자신이 짐승과 마찬가지 운명이라는 것을 깨끗하게 받아들이는 순간입니다. ‘짐승되면 안된다’가 아니라 처음부터 짐승과 같은 길을 가게 되어 있는 존재라는 사실에 동의해야 하는 겁니다.
짐승보다 더 높은 가치를 얹었다면 그 얹힌 가치는 모두 인간이 조작한 것입니다. 심판받을 대상입니다. 가장된 것이고 과장된 것들입니다. 성경을 해석하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기대하는 바와 억지로 연결시키는 경향이 농후합니다.
예를 들면, 재판하는 과정에 부정에 개입하면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담당한다고 자신이 나서서 사회를 개혁하는 것이 정의 실천 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은 우리 인간보고 사회 개혁하는 영웅적인 업적을 남기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원래 자리가 바로 짐승임을 깨닫게 하는데 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봉사입니다. 자신이 짐승에 불과함을 알 때 비로소 봉사는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짐승같은 우리를 사용하여 자신의 의를 지상에 남기십니다. 그 능력 발휘를 위해 우리는 계속 짐승으로 남아야 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쓸데없이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자신을 과장되게 꾸미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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