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대
2006년 7월 30일 설교 본문: 전도서 4:1-3
(전 4:1)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오호라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저희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저희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전 4:2) 『그러므로 나는 살아 있는 산 자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를 복되다 하였으며』
(전 4:3) 『이 둘보다도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서 행하는 악을 보지 못한 자가 더욱 낫다 하였노라』
흔히들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방식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방식으로 구원하신다고 합니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신약 성경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 하나님의 구원을 무덤에 있는 자도 무덤을 열어제치시고 구원하는 식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런 관점에서는 누가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넣는가 하는 주체자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그냥 교통사고로 누가 죽으면 그냥 팔자소관을 돌리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이웃집 사람이 의도적으로 지목한 자를 교통사고로 위장해서 죽이려고 한다면 이럴 경우에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죽음을 제공한 주체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사람이 단순히 죽어서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전부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 때문에 죽어야하며 누가 죽여야 하는지까지 파악되어져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에 관해서 구약의 출애굽 사건은 중요합니다. 거기에 보면 단순한 죽음의 분위가가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와 연관한 자들에 대해 필연적으로 압박이 주어질 수 밖에 없는 사회 구조적 장치가 드러나게 됩니다.
애굽에 있는 히브리인들을 학대할 수 밖에 없는 바로왕은 그 사회를 지탱하는 기초적인 부의 창출은 노예들의 노동력으로 충당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최고 행정관으로 당연한 조치를 내린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솔직함을 다음과 같이 드러냅니다. “여호와라는 신이 누군데 내가 그 신의 말을 들어야 하나?”입니다.
히브리인들의 기계처럼 부리지 아니하면 막대한 노동은 다른 사람이 대체되어야 합니다. 즉 바로왕의 입장에서는 노예는 완벽하게 노예임을 자각시키는 방식이 병행된체 노동을 강요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노예가 아니라면 개별적인 종교라든지 인격이라든지 세계관도 존중되어야 할 판입니다. 그렇게 되면, ‘남 좋아라’하는 노동을 과도히 하는 그 정당성이 사라지게 됩니다.
기계는 기계답게 노예는 노예다워야 거대한 국가 조직체는 돌아가게 됩니다. 노예들의 신을 행정관이 옹호해 줄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생산물이 감소되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들의 요구를 들어준다고 하면 이는 왕이 왕답게 처신 못하는게 됩니다. 국가라는 사회란 보편성이 개별성을 이기는 사회입니다. 학대받는 개별자의 비명소리를 다 들어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국가 사회가 유지될 수 없습니다. 학대하는 자는 반드시 있게 마련이고 학대받는 자는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학대하는 자나 학대받는 자는 모두 다같이 그런 구조의 틀에서 출생한 자들이요 그 구조적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 어느 인간이든지 자신의 부모를 본인이 선택해서 부모삼은 것이 아니듯이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안으로 던져진 존재들이요 그 나머지는 오로지 순응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곧 그 어느 누구도 항시 학대자의 입장에 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비록 남들로부터 학대받는 경우는 대단한 세상 부조리로 간주하면서 막상 자신이 남을 학대는 전혀 의식조차 하지를 못합니다.
소위 본의아니게 인간은 나의 존재에만 관심두다 보면 그것으로 인해서 남들에게 피해를 입히기 마련입니다. 한 도시에 있는 아파트 가격 담합 현상이 전체적으로 전세값의 상승으로 이어져 전세값을 미처 마련하지 못해 다음해에는 쫓겨나가야 될 가구수를 증가시킨다든지 아니면 전세값을 마저 채우기 위해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려는 사태를 확산시킬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한 사람만 계속해서 학대받는 경우도 없고, 특별히 한 사람만 계속해서 학대하는 경우도 없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그럴 바에야 차라리 태어나지도 않는 팔자가 최고라는 겁니다. 그만큼 세상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다는 사실은 또다른 경우를 말하고 있는 겁니다.
한 때의 경제학자들은 부의 증식에 있어 불합리한 중상주의, 즉 상업을 중요시 하는 경제정책보다 중농주의, 즉 농업을 중요한 하는 정책을 대안으로 내놓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에 있어 부의 증식이 단순히 돈의 흐름이나 화폐의 교환으로 없는데서 생겨날 수 없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공장에서 물품을 생산하는 것도, 단지 인간의 노동을 물질의 변형에서 투자했지 그것이 전체적인 새로운 이익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는 돈 버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돈을 날린 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다 정산해보면 결국 0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중농주의자들의 주장은 무엇입니까? 부의 증식이 화폐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대지로부터 발생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데 있습니다.
토지에다 인간들이 노동이 가미되면 값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햇빛과 공기를 무상으로 포획하는 효과를 낳기 때문에 인간의 노동가치 이상의 가치가 거기에 담겨서 전체적으로 부의 증가를 가져온다는 겁니다. 과연 농사짓고 사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에 허무하지 않는 인생으로 전환하는 묘책이 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왜냐하면 대자연은 인간편이 아닙니다. 대자연의 변덕에 인간의 모든 수고도 한꺼번에 다 날리고 부도 다 날아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야고보서 4:13-16에 보면,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 말씀은 우리보고 딴 마음 열심히 살아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비록 자기 삶에만 치중하는 상태에서 살더라도 여전히 우리를 살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지 우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라는 겁니다. 진정한 이 세상의 해결자는 지금 문 밖의 심판주와 상주해 계시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헛되고 헛된 세상에서 주님 기다리며 참고 살아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결코 나의 자랑거리로 작용할 수 없음을 명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전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고(전4;7-8)이근호060806 (0) | 2013.07.01 |
---|---|
인간의 수고(전4;4-6)이근호060806 (0) | 2013.07.01 |
심판자(전3;16-21)이근호060723 (0) | 2013.07.01 |
선물(전3;12-15)이근호060716 (0) | 2013.07.01 |
알 수 없도다(전3;9-11)이근호060709 (0) | 2013.07.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