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때가 있나니(전3;1-8)이근호060702

아빠와 함께 2013. 7. 1. 08:47


때가 있나니 

2006년 7월 2일                                설교 본문 :전도서 3:1-8


(전 3:1)『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전 3: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전 3:3)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전 3: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전 3: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전 3: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전 3:7) 『찢을 때가 있고 꿰멜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전 3: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때를 놓고서 하나님과 인간은 서로 싸우게 됩니다. 인간들은 말하기를, 자신이 내심 목적으로 두고 있는 바를 달성할 수 있도록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것이 생기도록 해 달라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꾸만 인간들의 그들의 때를 피해하십니다.


쉽게 말해서, 나고 싶지 않을 때에 나게 하시고, 죽고 싶지 않을 때에 죽게 하시고, 심고 싶지 않을 때가 심게 하시고, 뽑고 싶지 않을 때에 뽑게 하십니다. 죽이고 싶지 않을 때에 죽이게 하시고, 치료시키고 싶지 않을 때에 치료시킵니다. 이런 식으로 사랑하고 싶지 않을 때에 사랑하게 하시고, 헤어지고 싶지 않을 때에 헤어지게 하십니다.


인간들이 보아서 세상의 모든 변화는 다 자기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자기 유리한대로 해석하고 싶어 하고 이용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바램은 개개인마다 터지고 있는 자기 감정과 충동과 욕심에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즉 나에게 이익되는 것이 남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하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나에게 이익되니 만사가 원만하게 잘 되었다고 해석하고 싶어합니다.


‘신의 뜻대로=나에게 유리한대’로 라는 원칙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진리를 원합니다. 자기에게 신뢰성이 가는 진리를 원합니다. ‘때’라고 확정짓는 방식이 너무나도 일방적입니다. 자기가 납득이 되면 진리라고 보고 그 진리가 등장하는 것을 ‘의미있는 때’라고 잡고 싶은 겁니다. 


이것도 곧 인간들이 짐작도 못하는 ‘때’는 세상에 생겨나서는 아니 된다고 우기는 것을 전제고 하는 논리입니다. 만약에 자신이 짐작도 못하는 사건이 발생하면 자신들이 당황하게 되고, 자신들이 당황하게 되면 그동안 인간의 힘으로 수립된 모든 가치들이 함몰되며 그 이후의 세계에서 인간들이 배제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때’를 사용하실 때는 이처럼 이 세상의 원래 목적을 위해 인간들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비록 인간들이 두려워하거나 말거나 말입니다. 하나님의 ‘때’ 정하심은 숱한 세상 사람들의 입맛을 고려하고, 그들의 기도능력을 고려해서 정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을 배제하고 오직 한 분의 인간만을 고려해서 ‘때’를 지정하셨습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님이시면 그 때는 바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등장하시는 때입니다. 갈라디아서 4:4에 보면,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모든 때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셨다는 목적을 향하여 쏠리게 되어 있는 때입니다. 이로서 이 세상에서 많고 많은 개인적인 ‘때’와 ‘목적’은 의미를 상실하게 되어 버립니다. 개인적으로 어떤 목적이 있든지 개인적으로 어떤 소망이 있든지 상관없이 예수님 앞에서는 의미없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그동안 알고자 하고 또 붙잡기 위해서 아등바등했던 그 때는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그 ‘때’의 전부를 다 하나의 때 속에 다 집어넣어버렸습니다. 에베소서 2:2-3에 보면,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의 모든 것은 전부 다 ‘그 때’ 안으로 일괄적으로 쓸어 담겨져 버립니다. 그리고 그 평가는 한마디로 말해서 ‘악 영에 사로잡혀 있던 때’입니다. 즉 인간들은 그동안 악 영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각가지 소원이나 소망을 하늘을 향해 열심과 정성으로 기도했지만 그 부질없는 짓들을 한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인간의 가치가 헛됨을 노출시키는 새로운 때 개시되었습니다. 인간들의 타고난 감정과 충동이 죄로 묶여 있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셔서 새로운 때를 발진시켰습니다. 이 예수님의 때를 인간의 시간관점에서 바라보면, 마치 순서와 순서로 되어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입니다.


로마서 8:29-30의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미 완료된 신분이라는 겁니다.

 아직 시간적인 다음 때가 남아 있어 보이지만 실은 우리의 시간관념의 한계 때문에 이미 완료된 상황에 대해서 완료로서 보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마치 하늘의 별자리를 보면서, 별을 순서대로 하나하나 보게 되지만 우리가 아직 보지도 못한 별들도 우리가 보기 이전부터 이미 그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상황과 같습니다.


이것은 기존의 순서적 시간관념이 예수님의 때에는 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원리 앞에서 보면, 율법 아래 갇혀 있는 인간들은 그 모든 율법을 하나하나 지켜나가는 것에서 자신이 더욱더 훌륭해지는 것처럼 착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새로운 때를 몰고 오신 예수님 앞에서는 그런 시도가 의미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율법 지킴의 시간적 순서와 상관없는 자리로 우리를 건져 올리셨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4:8-11에 보면,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에는 오로지 이미 완료된 것으로만 꽉 차 있습니다. 인간들이 새삼스럽게 때를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때는 우리 인간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도적같이 오십니다. 이미 완료된 것을 믿는 자에게만 재림을 반길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처럼 인간의 요구하는 바를 들어주시지 않는 것은 인간 속에 이미 들어있는 엉터리 인생 목적을 폭로시켜 그것을 부정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전달된 그 약속의 내용만이 우리 성도의 진정한 목적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매사가 감사할 뿐입니다. 심지가 죽는 것까지!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뜻대로 일하시지 않는 것을 우리가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