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알 수 없도다(전3;9-11)이근호060709

아빠와 함께 2013. 7. 1. 08:53


알 수 없도다 

2006년 7월 9일                              설교 본문: 전도서 3:9-11


(전 3:9) 『일하는 자가 그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전 3:10)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전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일하는 자는 일을 할 때, 반드시 그 수고의 대가가 자기가 기대한 만큼 얻어지기를 바랍니다. 만약에 일은 자기가 했는데 남이 그 공로를 가로채거나 자기에게 돌아오지 않는다면 도저히 용서가 안 되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셨다면 그 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살이라고 하시렵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인간들이 영원의 세계의 내막과 원리를 모르기에 막무가내로 자신이 수고한 대가가 자기에게 남김없이 돌아와야 한다고 여기지만 실은 모든 수고의 공로자는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때를 조정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간들은 세상의 때를 자기를 위한 때라고 일단 간주하고 들어가기 때문에 거기서 행한 수고도 오로지 자기 몫으로만 돌아와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한 조치로서 자기 애씀이 자기 업적이나 공로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해야만 하는 이유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즉 영원의 세계는 자기 수고의 대가를 이 땅에서 찾을 수 있는 그런 세계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세계는 어떤 세계입니까?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을 길게 무한대로 늘어뜨린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이 아닙니다. 시간을 시간이라고 느끼는 것은 실은 인간의 신체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긴 시간을 보내더라도 어느 장소, 어느 세월을 가져도 그 시간을 느끼는 인간의 신체가 동일한 신체이기에 영원이 아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영원은 어떻게 주어집니까?


이러한 긴 시간관을 깨뜨리고 시간 자체가 무용지물임을 밝히는 능력이 곧 영원히 개입한 결과입니다. 영원 안에는 ‘전․ 후’의 구분이 무의미합니다. 즉 결과와 원인이 구분되지를 않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이 준비해 놓은 때요 시기입니다. 인간이 자기 노동의 대가를 얻기 위한 때라는 것은 없습니다.


또 영원의 세계에서는 ‘자아’라는 것을 용납해주지를 않습니다. 즉 ‘내가 한 수고’라는 것이 허용이 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한 분이신 예수님이 행하신 그 수고의 혜택을 우리 성도들이 그저 누리고 있는 관계입니다. 자아라는 것은 분열되고 분리될 때 발생하는 겁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기 전까지는 그저 한 몸이었습니다. 하지만 범죄하고 난 뒤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타인으로 간주할 정도로 명확히 자아성을 구축하게 됩니다.


인간의 자아성과 자기 수고에 대한 대가 추구가 하나님의 뜻과 얼마나 크게 충돌 되느냐를 잘 보여주는 것이 구약 요나 선지자의 경우입니다. 요나 4:10-11에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나 선지자는, 니느웨성에 대한 심판 선포 계획을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진행되는 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니느웨성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요나 선지자는 들러리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요나 선지자가 알 리가 없었습니다. 요나는 스스로 죽음을 택할 정도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실망을 느꼈습니다.


즉 자신이 친히 수고한 대가가 요나 자신의 영광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되레 반대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무시하는 것으로 다가온 것에 대해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더 인생을 살고픈 마음조차 포기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처음 요나가 고국에 있을 때에 하나님은 니느웨성 사람들의 운명에 대해서 멸망을 예언하셨습니다.


요나는 필히 그렇게 될 줄로 알았습니다. 하나님 예언에 착오라는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요나는 그 말씀을 해석하는 본인의 마음에 착오가 있음을 예감하지 못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성 멸망 선포에서 자신이 빠지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전하나 아니 전하나 니느웨성은  필히 멸망받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슨 연유인지 하나님은 도망치는 요나를 기어이 체포해서 니느웨성 해변가까지 부려놓습니다. 요나는 무성의하게 마지못해 니느웨성 사람들에게 멸망을 선포하게 됩니다. 그런데 요나 선지자가 도저히 예상치도 못할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180도로 그들의 태도가 돌변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그들은 크게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은 회개하는 심정으로 현실을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취할 태도는 오직 살려달라고 비는 것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철회해서 멸망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로 인해 삐져버린 자는 요나 선지자입니다.


자신이 예상하면서 수고한 결과가 실제 현실과 부합되지 않음으로 인해 자신의 위신이 형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더 이상 자신에게 존재 가치가 없음을 안 요나는 자결를 통해 하나님의 일에 누가 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요나가 한 가지 모르고 있는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회개란 반드시 은총을 입은 나 사람에게만 해당된다는 사실입니다. 즉 요나의 곁에 난데없이 박넝쿨이 속성으로 자라라서 죽으려는 요나를 시원하게 해주자, 요나는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이왕 죽을 것 시원하게 죽는구나 라고 생각날 만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갑자기 그늘을 제공하던 그  박 넝쿨을 말라 죽게 하자, 이번에는 요나가 더워서 죽겠다고 불평입니다.


즉 조금 전에 박 넝쿨의 혜택을 약간이라도 맛을 보았기에 그 혜택과 은총이 사라지는 아품이 얼마나 큰 것임을 새삼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제사 나타나셔서 요나를 꾸짖습니다. 아무런 수고도 없이 피어난 박 넝쿨이 요나를 얼마나 기분좋게 하고, 반대로 그 박 넝쿨이 말아죽을 때에 얼마나 요나를 섭섭하게 했는지를 친히 경험케 합니다.


이로 인해 요나가 보다 더 큰 은총의 증거로서 니느웨성을 바라보기를 요청하고 있는 겁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큰 은총을 실현시키는 도구로서만 쓰여진 것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에게 화를 낸 것은 아직도 본인이 모르고 있는 은총이 있기 때문에 일어난 겁니다. 하나님이 준비 하신 더 깊은 은총을 새삼 요나에게 더 알리기 위한 조치로서 하나님은 니느웨성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영원의 세계에서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기 위한 배치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아가 일방적으로 예상한 결과만을 고집하지 않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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