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2006년 7월 16일 설교 본문: 전도서 3:12-15
(전 3:12)『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전 3:13)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
(전 3:14)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 할 수도 없고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전 3:15)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
성경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농사짓는 농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집요한 목적하는 바가 분명히 계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밭으로 보시고 그 밭에다 온갖 것들을 뿌려놓으시고, 그 뿌려진 것들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회수하시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경외하심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경외한다는 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한 그 어떠한 생각도 나지 않는 경우를 말합니다. 즉 자기 생각에 몰두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을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하는 행위를 자신이 판단하게 되면 하나님께 경외가 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경우에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과 군중들이 어린아이들이 이 나라에 드디어 약속하신 그 메시야가 나타났다는 소문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거리로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유식한 성직자들이 판단하기에는 대규모 심리적 여파로 인한 혼란 그 자체였습니다.
군중들은 하박국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라는 약속을 구체화 시킬 메시야가 자기 기대에 등장하기를 학수고대했습니다. 그리고 메시야를 등장할 때의 광경을 소선지서에 근거해서 군중들은 자발적으로 연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제자들은 나귀를 타고서 말입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비이성적이고 판단력이 흐려진 벌어진 결과라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성적인 그 당시 성직자들이 군중들의 행태를 비난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각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즉 군중들이 나의 메시야적 입성을 환호하지 아니하면 길에 있는 돌들이 일어나서 나를 환호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메시야 앞에서의 인간들은 바른 태도가 어떤 것인지를 말해주는 겁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경외를 하면서 자아를 잃어버릴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물’로서의 인간입니다. 즉 인간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인간 따로 선물 따로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정말 먹고 마시고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선물이 되려면 그렇게 먹고 마실 수 밖에 없는 인간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일 경우에 국한합니다. 그런데 ‘먹고 마시면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이 말씀을 잘못 생각해서 오해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옵니다.
즉 “현재 내가 먹고 마시고 하는 것이 다 주님의 은혜요 뜻이니까 내가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간섭하지 말라 내 자유다!”라는 식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경외하심이 날아가 버린 결과입니다. 사람이란 이 땅에서 무엇을 하면서 낙을 얻든지 간에 자기 좋아라고 하나님께서 그런 선물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지금 일어나는 일이라도 이미 옛적에 다 일어난 일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이란 하나님이 쳐놓은 시간이라는 벽 속에 갇혀있다는 말이 됩니다. 쉽게 말해서 현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은 오로지 자신이 느꼈던 행복감을 근거나 과거 사람들의 불행을 말하기 싶상입니다.
오늘날 자신들이 놀고 있는 장난감이라든지, 골프라든지, 컴퓨터 게임이라든지 하는 것들을 맛보지 못한 옛날 사람들이 얼마나 불행한 삶을 보내었느냐는 식으로 안일하게 판단할 수도 있지만, 사람이 사는 낙이라는 것은 특정 물건이나 특정 사건이 자동적으로 품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물건을 모르면 불행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에는 나름대로 소박한 행복을 얼마든지 하나님께서 제공하셨습니다. 사람 사는 낙이라는 것은 소득에 의해서 확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는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알지 못하면 늘 행복이라는 목표점에 농락당하는 식으로 인생을 불행에 끌려다니게 되어 있습니다.
즉 사람이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선물로 인정하지 아니하면 본인은 어느새 권력자가 됩니다. 권력자란, 늘 자가 증식을 일어나지 아니하면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쉽게 말해서 더 큰 권력에 늘 새롭게 포섭되지 아니하면 불만족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신세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은 선물로서의 질적 하락을 야기시킨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에 질적으로 못하는 것이 과연 있을까요? 하나님의 경외하심에 과연 질적 차이라는 것이 있을까요? 자기를 잊어버린 상태에서 하나님만 경외하는 상태에 대해서 차이지는 것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1000원을 헌금하든지 십만원을 헌금하든지 질적으로 떨어지는 헌금이 될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오히려 천만원을 헌금하면서 하나님의 경외가 빠지고 자신의 행동이 강하게 의식될 때, 바로 이러한 상태가 질적으로 떨어진 행복일 뿐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삶이란 강한 본인 의식이 있어서는 선물로서 의식될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시간에 갇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자신이 자유롭게 풀려났다고 여깁니다. 과연 그럴까요? 베드로후서 3:4-8에 보면,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의 보전은 모두 농사짓는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 즉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한 배치물들인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먹든지 마시든지 주님의 선물인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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