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득
2006년 6월 25일 설교 본문: 전도서 2:21-23
(전 2:21)『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써서 수고하였어도 그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업으로 끼치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라 큰 해로다』
(전 2:22)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전 2:23)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나의 수고로움의 가치를 타인이 알아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이고, 나는 나이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막대한 유산을 자식에게 남겨주면 자식들이 부모의 수고로움의 가치를 알아줄까요? 전도서는 말합니다. 그들이 알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전도서는 이런 세상의 상황들을 보고 깊이 탄식합니다. 헛되다고 말입니다. 왜 자신의 수고로움에 타인이 같이 호응하지 못하느냐고 안타까워합니다. 그런데 사실 성경의 내막을 보면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들의 수고들은 각자 자신의 가치로만 멈추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타인에게로 전달이 될 수 없습니다. 비록 유산을 남긴다 할지라도 수고한 사람의 가치마저 고스란히 넘겨질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유독 악해서가 아니라 인간은 하나님이 하실 일마저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19:23-24에 보면,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그러니까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제자들이 너무 놀라서 다음과 같이 응수합니다. “그러면 누가 천국에 들어갑니까?” 여기에 대해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시느니라” 즉 지금 예수님은 인간들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하시겠답니다. 낙타를 바늘 구멍 속으로 통과시키는 일을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예수님의 수고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관심이 없고 마냥 '왜 나의 수고가 그 가치를 주위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가 한탄스럽다’라고만 합니다. 어떤 특정인이 수고가 타인의 혜택으로 전달될 수 있는 경우는 특수한 경우뿐입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12;23-24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처럼 예수님에게만 그 희생의 결과가 다른 사람들의 것으로 넘어보게 됩니다. 이것이 ‘대속의 원리’입니다. 만약 저의 아버지께서 십자가 지시고 자식된 나는 그 아버지의 희생의 대가를 얻을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아버지는 메시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입은 메시야에 국한해서 적용되는 원입니다.
이 원리는 하나님께서 인간 세상을 다루시는 방식입니다. 창세기 12:3에 보면,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아브라함과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고 봅시다.
예를 들어 저의 성씨가 이(李)가니까 제 이름을 잠시 ‘이(李)브라함’이라고 봅시다. 그런데 제가 사는 앞집에 아브라함이 살고 있다고 칩시다. 저는 새벽 4시부터 밤 늦도록 일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상스럽게 저의 수고의 가치를 앞 집에 사는 아브라함이 안 알아주게 하십니다.
그런데 도리어 앞집에 사시는 아브라함에 대해서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앞 집에 사는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네가 복을 받고 만약 무시하면 너에게 저주가 임한다”고 말입니다. 왜 그러합니까? 왜 저는 안되고 아브라함은 됩니까? 저의 수고와 아브라함의 수고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은 언약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하나님의 일들이, 그 분의 일이 하나님이 언약의 일이라고 믿는 자에게는 그 믿음으로 복을 받도록 조처한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처럼 언약적인 수고는 자기 수고의 가치가 자기 수고로 멈춰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혜택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언약의 사람말고 일반인들은 자신의 수고는 남들이 안 알아주고 하나님도 안 알아주십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그 이유의 내막은 19세기 서양에서 일어난 대규모 정신적인 혁명을 통해서 밝혀졌습니다. 소위 ‘공산주의 혁명’입니다. 이 혁명의 취지는 간단히 말해서, 수고한 대가를 수고한 사람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중간에 가로채이는 경우가 생기지 않게 해야한다는 겁니다. 이 말은 곧 그들안 노동자들의 수고를 착취하는 세력이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들이 누구일까요? 그들이 자본가들이라고 합니다. 그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애써 수고한 것은 교환가치로 보지 않고 사용가치를 따져서 본래의 값어치를 하락시키고 거기서 나오는 잉여가치를 불로소득처럼 자신의 자본 증식에 꾀했다는 겁니다.
이 증식된 자본은 또다시 노동의 가치를 하락시키는 원인제공으로 작용해서 날이갈수록 수탈의 폭을 넓어진다는 겁니다. 원래 인간의 가치란 국왕이 있던 시대에서는 정체되어 있는 토지의 가치처럼 신분상 타 신분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만약에 훼손하게 자신의 신분마저 위태롭기 때문입니다.
즉 땅 주인인 귀족이 농부의 고유한 노동 가치에 의존하는 식으로 신분이 유지되고 이로 인해 국가가 질서를 잡은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도시로 몰리면서 노동의 가치는 공급의 과다로 인해 하락하게 되었고 이러한 하락을 부추긴 것은, 이자 이상의 소득을 획득하려는 자본가들의 욕심이 그렇게 유도했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국가 주도의 정치질서가 경제구조에 따라 경제의 힘에 편승한 정치 질서로 재편되는 겁니다.
역사란 실제적인 노동력에 의해서 진보, 발전하게 되어있기에 이제는 노동자들의 역사를 진보시키는 주체자가 되기 위해서 그동안 자본가들 손에 맡긴 이 사회에 대 구조개편을 감행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들은 인간들이 결코 노동 자체의 즐거움을 얻고자 하는 자들이 아니라 신나게 노는 것에 희망을 걸고 사는 인간들이라는 점을 모르고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수고는 줄이고 마음껏 놀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힘과 힘의 부딪침을 통해 나의 흥겨운 놀이는 곧 타인의 수고의 밑거름 위에서 이루어지게 마련입니다. 즉 내가 편하기 쉬기 위해서 남의 휴식을 깨는 도발을 저질러야 가능한 일입니다. 나의 수고의 가치를 뺏지 않고서는 나에게 휴식이라는 것은 없고 도리어 호시탐탐 남의 안일을 위해 배나 수고해야 될 노예가 되기 십상입니다.
이러한 인간 환경은 창세기 3장 이후 인간에게 허락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인간들은 죽도록 일해야 하는 것은 그 수고의 가치가 예수님의 수고의 가치에 미치지 못함을 알리기 위햐서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힘든 인생살이 가운데서도 거저 주신 영생의 가치를 잊지 말고 주님이 수고를 가리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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