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기쁨
2013년 6월 23일 본문 말씀: 스바냐 3:14-17
(습 3:14, 개역)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습 3:15, 개역) 『여호와가 너의 형벌을 제하였고 너의 원수를 쫓아내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너의 중에 있으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습 3:16, 개역)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습 3:17, 개역)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사람이란 나름대로 기쁨거리가 따로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자기 위한 공간에는 그 기쁨과 관련된 것들로 장식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과연 여기에 누가 끼어들게 되면 사람들은 상당히 부담스럽게 느낍니다. 나 기쁨을 그 외부인이 훼손시킬 우려가 크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촌에서 시어른이 갑자기 들어서게 되면 일상의 일과가 흩어지게 됩니다.
평소에 습관처럼 반복되는 일상은 평소에 자신이 기대하는 기쁨을 얻기 위한 반복적이고도 기계적인 절차에 해당됩니다. 이것이 흩어지면서 자신이 기대하는 기쁨도 같이 날아가버립니다. 따라서 촌에서 올라온 시어른이 빨리 도로 촌으로 내려가서 그 전에 가졌던 기쁨얻는 회로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기를 바랄 뿐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 점을 고려해봐야 합니다. 첫째, 과연 우리가 시온이며 이스라엘이며 예루살렘이냐 하는 점입니다.
두 번째는, 과연 이 말씀에서 언급하는 기쁨이 평소에 우리가 기대한 그 기쁨과 동질한 것이냐는 겁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수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벌써 따로 기뻐할 거리가 자기 안에 꽉 차 있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기뻐할 거리는 내가 정하고 내가 선택하겠다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 인간에게 담기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본인들이 원하는 기쁨이 추방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게 추방되지 아니하면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무척 거북스럽고 실제로도 같이 살지를 못합니다. 하나님과 같이 사는 것이 싫다는 것은 곧 천국이 싫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천국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 싫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성도의 알맹이를 언약으로 바꾸는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13절에 나오는 시온, 이스라엘, 예루살렘이라는 이 개념들이 언약적인 개념으로 바꾸는 작업을 하나님께서 행하십니다. 당연히 이 작업을 통해서 인간들이 어떤 면에서 하나님과 자신에 대해서 곡해하고 있는지도 같이 드러나게 됩니다.
서귀포에 가면 화가 이중섭의 기념관과 기념거리가 있습니다. 그의 생가가 거기에 있습니다. 문제는 그가 그린 작품들은 있지만 막상 본인은 없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의 작품만 보고 돌아가지만 그를 만나보지는 못합니다. 만약에 그림보고 돌아가다가 막상 이중섭 본인을 만났지면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요즈음 뭐해도 계속 그림그리지 않고 자꾸만 귀신으로만 살거예요?”라고 할 것입니다. 즉 살아있다면 계속 작품 활동을 해야 합니다. 작품이 나와야 이중섭의 존재 가치가 이어진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은 이중섭과 같이 살고픈 마음은 없습니다. 그 대신 이중섭의 작품은 계속 접하는 것이 자신의 기쁨 중의 하나가 될 뿐입니다.
이처럼 인간들은 기어이 자신의 기쁨 요소를 포기할 마음이 추호도 없게 마련입니다. 이 불가능한 작업을 하나님께서 시도 하시게 됩니다. 비누 세척의 원리는 비누 분자가 계면활성제로 한 분자 내에 친수성 부분과 친유성 또는 소수성 부분을 모두 포함하는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비누의 분자는 미셀을 형성하여 그 안에 물에 녹기 어려운 친유성 오염물질을 녹여낼 수 있으므로 피부나 의복에 묻은 오염 물질을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언약의 완성이신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오실 때 먼저 죄인에 합류하십니다. 그 지점이 바로 세례요한이 물세례 장면입니다. 떼가 없으신 분이 인간의 떼를 입히기 위해서 죄인들 속에 들어오십니다. 그래놓고 자신이 대표적으로 십자가에서 부활하시므로서 의인으로 다시 태어나신 겁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 안’은 마치 두 가지 서로 반대되는 성질을 행사하는 계명활성체가 됩니다. 죄인이 자신에게 붙게 하셔서 의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작업을 수행하는데 인간은 반드시 ‘주체의 죽음’이 발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주체의 죽음’은 ‘죽음의 주체’로 바뀌게 됩니다.
즉 ‘나의 죽음’이 언약을 만나게 되면 ‘언약으로 야기된 죽음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이런 작업이 구약에서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그 중의 한 가지 예가 바로 다윗의 저지른 범죄와 그 죄를 규명하고 용서하기 위해 마련된 아라우나 타작 마당의 경우가 그것입니다. 사무엘하 24장에 보면, 다윗은 인구조사를 실시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진노하시기 위해 그 구실을 만드는 작업에 다윗이 말려든 것입니다. 물론 사단이 그렇게 다윗을 부추겨서 실시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다윗이 생각하는 그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숨어 있는 진리란 위반하므로서 그 진면목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 위반의 기회가 다윗과 이스라엘에게 부여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인구 중 7만명을 전염병으로 죽게 합니다. 많은 수를 기대했던 다윗은 자신이 생각한 그 이스라엘이 결코 하나님의 언약에 준한 그 이스라엘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참된 이스라엘은 그 안에 이스라엘의 죄와 그것을 제거하는 하나님의 자비의 요소가 같이 있는 언약적 효과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24:24-25에 보면,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은 오십 세겔로 타작마당과 소를 사고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아라우나 마당이 곧 장차 솔로몬 성전이 세워지는 그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새겨지는 그 대상자가 바로 예루살렘이여 시온이요 이스라엘입니다. 이들은 기존의 자신의 기쁨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이 기뻐하는 그 짓이 도리어 죄가 된다는 사실을 언약을 통해서 알게 된 자들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언약에 가담되어 있음을 감사하는 이가 진정 하나님의 기쁨을 아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란 그 깊숙한 중앙에 오직 언약의 완성인 십자가 피만 남겨져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죄가 들추어지면서 하나님의 피가 새롭게 다가서는 기쁨을 갖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11강-습3장14-17(하나님의 기쁨)13062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스바냐 3장 14절에서 17절 말씀입니다. 구약성경1309페이지입니다.
스바냐 3:14-17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여호와가 너의 형벌을 제하였고 너의 원수를 쫓아내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너의 중에 있으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시골에 있는 시어머니가 갑자기 예고도 없이 서울에 있는 아파트에 불쑥 나타나게 되면 불편합니다. 참 불편해요. ‘어머니 언제 가십니까? 촌에 언제 내려가시는데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요거 내 영역인데 왜 불쑥 허락도 없이 침범하십니까? 그런 뜻이겠죠.
사람이 내 영역에 침범해도 사람이 불편한데 하나님이 내 영역에 침범하면 이건 불편한 게 아니라 둘 중에 하나 죽습니다. 내가 죽든지 내가 하나님을 손봐서 죽이든지, 없애버립니다. 없애버리면 결국 그렇게 내 영역에 누가 외부인이 침입하는 게 싫다는 말은 그 내 영역 구석, 구석에 나의 행함과 나의 공로와 나의 착실함과 나의 역사와 찬란한 인생, 이 모든 것이 거기에 녹아져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와서 이것, 저것 잔소리하고 지적하게 되면 그건 우리가 괴로워서 못살죠. 그래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천국이라 하는 것은 내가 예뻐하는 나의 것이 고스란히 그대로 보존되는 그러한 세계에 우리가 이동해서 살아보기를 그렇게 원합니다.
그런데 성경의 원리는 단순해요. 진리라 하는 것은 숨어있는데 그것을 위반해야 비로소 그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우리는 가상진리, 나밖에 모르는 인간인데 하나님께서 나밖에 모른 인간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우선 조치가 중간에 개입합니다. 그 조치가 뭐냐 하면 ‘위반하라. 법을 어겨라.’ 이 말입니다.
법을 어기게 되면 위반한 만큼 하나 어긴 만큼 하나님의 저주가 주어질 것이고,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인간도 만만치 않죠. 하나님한테 대들게 될 것이고 ‘나는 이딴 신 안 믿을래. 다른 신 믿을래.’ 하고 다른 신을 쫓아가고 그쪽으로 얼굴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야 된다는 겁니다. 니가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여기 14절에 보면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라고 돼 있죠. 이 성경말씀을 주님께서 우리 속에 들어가기를 주께서 원하십니다. 들어가기를 원하는데 이 말씀이 우리한테 들어오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이미 우리가 기뻐하는 그 기쁨 꺼리가 이미 여기에 꽉 차 있어요. 가득 차 있습니다.
내년 되면 브라질에서 월드컵 열려요. 지금부터 젊은 사람들은 기쁨의 요소가 꽉 차 있습니다. 빨리 대표 팀 홍명보가 대표 팀 하든지 해서 제대로 된 축구 보여줘서 옛날에 16강, 8강, 4강 영화를 누리자. 지금 온 정신이 거기에 모여 있습니다. ‘지금 나는 이렇게 하면 기뻐할 거야,’ 라고 만반의 나름대로의 준비가 돼 있어요. 딸, 딸, 딸, 딸만 셋 낳은 집안에서 또 임신했다. 이미 그거는 기쁨의 요소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아들이겠지, 초음파 찍어보고 딸인데도 아들이라고 우기고, 그런 식이 있을 거예요.
사람이라 하는 것은 이미 자기가 감사하고 기뻐할 게 꽉 차 있습니다. 그걸 이렇게 들추어내지 아니하면 14절의 말씀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반하도록 그렇게 하는 겁니다. 위반하도록 하는데 우리는 위반하지 않고 그냥 내 기쁨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관람을 하는 식으로 그냥 스쳐지나가죠.
제가 서귀포에 간 적이 있어요. 서귀포에서 아는 사람을 만났는데 사람을 직접 못 만나고 그냥 그림 작품을 만났습니다. 이중섭 그림이라는 게 있고 거기 이중섭 화가 생가가 있고 거닐었던 거리도 잔디밭이 돼 있고 미술관도 3층인가 지어져 있어요. 그래서 이중섭을 돌아보면서 제가 느낀 게 있습니다. 자, 내가 이중섭 그림을 보고 앞에 잔디밭이 있는 생가 골목길을 갔을 때 지금 그때 만약 이중섭을 직접 만났다면 내가 무슨 말을 할 것이냐 말이죠. ‘아유, 아저씨, 살아있었네요. 요새도 작품 활동 하십니까? ’아마 분명히 제가 그렇게 이야기했을 거예요.
우리는 누굴 만났을 때 내 것이 빼앗기지 않는 조건으로 그 사람을 만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중섭 화가를 만났을 때 나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아요. 좋아할 사람도 아니에요. 술 먹고 했는데 좋아할 리가 없죠. 당신의 소 그림, 울퉁불퉁한 소 그림부터 해서 유명한 작품이 있어요. 그 그림이 이쁘더란 말이죠. 그래서 ‘당신은 계속 그림을 그리세요. 우리는 관람을 해줄 테니까 당신은 그림을 그리세요.’ 우리는 그쯤에서 이중섭과 고 정도 관계로 만납니다. 그림 그리시고 우리는 그림을 보고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이중섭과 같이 살고 싶은 생각은 없죠.
자, 우리가 만약 거리에서 예수를 만났다 합시다. 만났을 때 ‘예수님, 우리 집에 와서 사세요.’라고 할 사람은 거의 없어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은 고맙겠지만 우리 집에 들어와 살지는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왜, 내가 따로 기뻐하는 것은 따로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언젠가 제가 그런 예를 들었는데 학생들이 빠레트를 가지고 그림을 그릴 때 빨간색 칸 따로 있고 노란색 있는데 크레파스도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금색, 은색이 죽 있습니다. 칸칸이 있잖아요. 학교 다닐 때 통지표 보면 국어 양, 산수 가, 사회 미, 체육 수, 이런 식으로 죽 칸이 있듯이 우리가 보는 세상이라 하는 것은 정치문제, 경제문제, 사회문제, 해놓고 칸에다 옆에다 교회 가는 것, 딱 칸 하나 마련하는 거예요. 종교라는 것, 교회, 하나님이라는 것은 나와 함께 나의 집에 와서 사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해야 될 일 한 칸, 빠레트에 빨간색 한 칸, 한 칸만 차지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거 자기 일 할 때는 성경말씀 신경 못 쓰고, 하나님 신경 못 쓰고, 하나님 신경 쓰게 되면 요거 신경 못 쓰고, 내가 하는 일 중에 그저 일부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구원되겠습니까? 그것이 구원받는 사람, 천국 가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죠. 사도바울이 그렇게 살았던가요? 사도바울이 천막 장사하면서 일부 천막 장사도 중요하고 일부 내가 하나님도 섬긴다. 이렇게 살았다고 저는 보질 않습니다.
제가 사도바울이 천막장사 했다고 고린도에서 천막장사 했거든요. 하면서 로마에서 온 사람하고 동업해서 했는데 만약에 내가 장난 끼가 있어서 상상한 건데요. 만약에 그 당시에 고린도에서 천막장사 할 때에 고린도에 천막장사들이 파업이 일어났다면 거기 사도바울이 가담했을까?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파업해도 주동자가 돼서 노조 됐을까? 사도바울이 ‘천막 값 인상하라. 원자재가 올랐다. 천막 값 인상하라.’ 해서 청와대 앞에서나 광화문 앞에 가서 데모 했겠느냐 이 말입니다.
제가 하는 이야기의 취지가 뭐냐 하면 사람이 천막 장사 하면 천막장사는 따로고 말씀은 따로고 이게 인간에게는 성립이 안 된다는 겁니다. 천막장사를 통해서 영광을 돌리겠다고 한다면 이렇게 하면 돼요. 복음 전하지 말고 세상 적으로 말해서 아주 좋은 원자재를 가지고 공들여서 좋은 제품을 만들되 단가를 낮추어서 이문을 적게 남고 소비자에게 팔면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처럼 그렇게 느껴질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에서 그렇게 했던가요? 이렇게 했어요. 있는 자는 없는 자같이 하고 돈이 많은 자는 돈이 없는 자같이 하고 아내 있는 자는 아내 없는 자같이 하라. 왜 세상은 후딱 지나가니까. 그렇게 이야기했잖아요.
그러면 그에게 천막장사를 하는 것은 무슨 의미냐, 남한테 손 벌리지 않기 위해서 조치로서 임시방편으로 한 거죠. 하나님의 영광이라 하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 영광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이라 하는 것은 십자가로서 이미 확정이 됐다, 라는 것을 사도바울은 증거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오늘 본문 14절이나 이 모든 말씀이 우리 속에 오려면 우리 속에 삽을 가지고 구멍을 파야 됩니다. 현재 우리가 좋아하는 것, 우리가 기뻐하는 것, 하나님이란 나의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 잘 알아서 하세요. 내가 거기에 전적으로 정신을 못 썼습니다.‘ 하는 그 모든 것에 하나님은 삽을 가지고 전부 다 그걸 파버립니다. 파버리면 파고 난 뒤에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성경 말씀을 내가 니보고 지키라고 한 적이 없다. 여기 기뻐하라 해서 니가 ’내가 기뻐해야지.‘ 라는 것을 주님께서 요구한 적이 없어요. 여기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해서 맨날 우리보고 찬송가만 부르고 기뻐 노래하라고 그걸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이 14절의 말씀은 주님께서 이 말씀을 우리 속에 담아두기 위해서 삽으로 우리를 파는 작업과 동시에 이걸 집어넣는 작업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세탁할 때에 비누나 세제를 사용하잖아요. 비누를 사용할 때 때가 잘 집니다. 비누로 할 때 때가 지는 원리가 뭐냐 하면 이런 원리입니다. 이 비누의 분자 구조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한쪽은 물에 굉장히 달라붙고 한쪽은 물에서 멀어지죠. 물의 친수성, 물에서 멀어지는 건 소수성, 또는 친유 성, 기름에 가깝다 해서. 그것이 물 분자 속에 양쪽 다 들어있어요. 계면활성제라고 합니다. 경계면이 활성화된 그런 물체, 계면활성제가 돼서 그 기름 때를 빼서 물과 함께 씻겨 내려가면 때도 같이 씻겨 지는 그 원리거든요.
예수님 보세요. 예수님이 계면활성제입니다. 죄는 달라붙는데 죄가 달라붙는 이 작업을 세례요한한테 물속에 들어가면서 한 거예요. 세례요한이 사람들 모아놓고 ‘너희들 회개해야 된다. 죄 있는 자는 다 기어 나와.’하고 외쳤을 때 거기에 끼어들을 필요 없는 주님도 같이 거기 끼어들었거든요. 그래서 세례요한이 말렸어요. ‘예수님은 여기 오시면 안 됩니다. 여기는 죄인들만 오는 곳 이예요.’ 하니까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내가 죄 없지만 죄 있는 회개하는 무리 속에 내가 끼어들어야 이게 계면활성제가 되는 거예요. 내가 같이 거기 끼어들어야 예수님이 대표해서 사흘 만에 부활될 때 거기 예수님이 끼어드는 그 사람도 같이 부활의 세계에 같이 갈 수 있는 겁니다. 일종의 예수님은 비누죠. 들어가서 같이 한 통속이 되고 통속이 된 그것을 아버지께서 용서할 때 같이 용서할 때 같이 용서받아서 구원 될 때 그들도 같이 끼어들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는 말이 그 말 이예요. 죄로 끼어들어서 의로 튀어나와라 그 뜻이거든요. 그래서 14절에서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할 때 이 본문을 보면서 우리가 무엇에 주목을 해야 되느냐 하면 시온, 이스라엘, 예루살렘, 요 세 단어가 이게 무지무지하게 어려운 단어에요. 우리는 생각하기를 시온? 예루살렘? 이스라엘? 딱 나네. 이걸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는데 사람은 자기 자신이라는 그것을 이렇게 그걸 삽으로 퍼내버립니다.
이걸 어렵게 말해서 주체의 죽음이라고 하거든요. 주체는 나, 나의 죽음,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주체를 죽게 만들고 그 다음에 뭐로 바뀌느냐 하면 주체의 죽음에서 죽음의 주체 자가 되게 하는 합니다. 이미 나는 죽었고, 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는 자아로 만드는 거예요. 그러니 쉽게 말해서 ‘나는 비누가 있고, 나는 비누가 붙어있고. 이런 뜻입니다. 나는 때로서 비누와 붙어 있고 주님은 비누고 그 주님께 붙어있다는 예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는 의인 되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 시온이 어디 있고 예루살렘이 어디 있고 이스라엘이 어디 있느냐, 주님이 몰고 와요. 예수님 그곳이 시온이고 예수님 그곳이 이스라엘이고 예수님 그곳이 예루살렘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이걸 몰라요. 유대인들은 지금 예루살렘이 어디 있고 시온이 어디 있고 성전이 어디 있느냐 하면 지금도 이스라엘 나라 세워서 자기 나라 예루살렘에 헤롯성전이 있어요.
성전이 제일 먼저 나올 때 성막(텐트)으로 나와서 모세 때는 텐트로 나오다가 그것이 언약궤가 다윗 때는 길갈이란 곳에 있었고요. 그것이 다윗이 기브온 사람들이 사는 지역을 정복함으로서 이름을 예루살렘으로 바꾸면서 예루살렘에다 그 법궤를 안치했고 그 법궤 있는 곳에 다윗이 성전 짓겠다고 제안했고 하나님이 그걸 허락하셔서 그 아들 되는 솔로몬이 거기서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게 솔로몬 성전이라 돼 있는데 솔로몬 성전은 3층으로 돼 있고 높이는 20미터가 되는데. 그 다음에 나온 성전이 뭐냐 에스겔에 보면 새 성전 나옵니다. 에스겔 40장, 41장, 42장에 나오고 47장에 보면 새 성전에서 이상하게 물이 나와요. 저수지도 아닌데 물이 나와요. 물이 콸콸 나와서 성전에서 나온 물이 온 천지를 에덴동산처럼 생명을 준다고 그렇게 예언돼 있는 것이고요. 실제로는 솔로몬과 새 성전을 이렇게 설계도를 도면으로 기초를 해서 만든 것이 헤롯 때에 헤롯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무려 60년 동안 지은 것이 헤롯 성전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이 헤롯 성전 이예요. 유대인들은 들어가지도 못하고 거기 서쪽 벽에 앉아서 머리에 모자 하나 쓰고 몸을 흔들면서 계속 지금 ‘어서 우리 이스라엘 회복하옵소서.’ 이 짓하고 있어요. 군에도 안 가고 그러고 있는 인간들이 있어요. 이스라엘에는 이상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라에서 골칫거리인데. 메시아 온다고 기다리는 사람들.
그런데 그 성전이 사람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어요. 이 사람들이 뭘 모르느냐 하면 하나님은 언약으로 하기 때문에 성전이라 하는 것은 어느 지점에 부동산으로 성전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 완성된 상태가 그것이 시온이고 그게 예루살렘이고 그게 이스라엘 이예요. 언약이 완성된 상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2장에서 뭐라 하셨느냐 하면 ‘헐어버려라. 저거. 저거 헐어버려라.’ 그러니까 제자들이 ‘그럼 기도할 수가 없잖아요. 헐어버리면 그러면 기도 어디서 합니까? 어디에서 기도합니까? 어디에서. 저게 없으면 기도할 장소가 없지 않습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지금도 자기 집에서 새벽기도 하면 되는데 새벽기도 안 한다고 우리보고 뭐라 한다마는. 어디 기도할 장소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왜 기도할 장소를 찾습니까? 기도할 장소라 하는 것은 그건 하나님의 언약이 없는데, 하나님의 언약이 기도할 집이라는 것이 이미 사람으로 바뀐 지가 언젠데 아직도 기도할 자리가 있느냐 말이죠. 기도할 때는 너 혼자 하지 말고 주님과 함께 성령과 함께 기도하면 그게 기도하는 집이예요. “헐어버려라, 내가 사흘 만에 지을게.” 사흘 만에 지을 때 우리를 하나님의 집으로 우리를 만들어 낸 겁니다. 그럴 때 우리가 시온이고 우리가 바로 예루살렘이고 우리가 이스라엘 되는 거예요.
어떻게 그런 일이 있는가? 우리가 착해서 그렇습니까? 우리가 말씀 잘 지켜서 그런 거예요?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삽으로 이걸 파버린 겁니다. 우리를 죽일 때 그냥 죽이지 않고 우리한테 뭘 집어넣느냐 하면 언약이란 독약을 집어넣어서 우리를 살해해버렸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는 죽고 그 안에 독약이 피어나면서 독약 안에 있는 시온, 예루살렘, 이스라엘, 언약이 그걸 만개하면서 우리는 그 안에서 언약으로 새롭게 새로운 피조물 된 겁니다. 겁나는 이야기예요.
그 예가 사무엘하 24장에 보면 다윗이 나옵니다. 다윗이 여러분 훌륭한 사람인 거 다 알죠. 그런데 사무엘하 24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이렇게 돼 있어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라고 자꾸 우기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삽으로 파버리는 거예요. ‘이게 무슨 이스라엘이야?’ 하고 이스라엘을 진노하사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스라엘 사람들 있으니까 이스라엘이잖아요. 이스라엘을 없애기 위해서 이스라엘에 뭔가 구실이 있어야 되는데 그게 뭐냐 다윗으로 하여금 인구조사를 시킵니다.
다윗에게 인구조사를 시키는 것은 마귀가 작용해서 그렇게 시킨 거죠. 자기 수하에 사람들이 이렇게 많으니까 다윗은 아마 든든했을 겁니다. 마침 집에서 살림만 사는 주부가 남편이 주는 돈 가지고 가끔은 오전에 심심해서 서랍에 통장 몇 개인지를 세고 하는 그 기분, 적금 다음 달에 또 하나 탄다. 요거로 펀드를 넣을까? 안 그러면 변액 보험은 수상하다 하니까 그건 하지 말고, 포트폴리오를 쫙 깔아서 하나하나 이렇게 계산해 볼까, 그 이자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볼까,… 이렇게 연구한다 이 말이죠.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삽으로 파는 그 절차인지는 모르고 흐뭇한 거예요. 설교 초반에 뭐라 했던가요? 이미 감사할 게 꽉 차있다니까요. 꽉 차있으니까 성경말씀 감사가 안 들어오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놓고 다윗에게 인구조사 시켜놓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이스라엘 인구를 죽입니다. 7만 명 작살냅니다. 총 80만 명인데 이스라엘 중에 칼을 뺀 자가 80만이고 유다 사람이 50만, 합해서 130만인데 130만 명 중에서 7만 명을 주께서 작살냅니다. 전염병 퍼져서 다 죽게 하죠.
다윗은 비로소 아찔했을 겁니다. 아! 내가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니구나. 언약에 의한 말씀에 의한 이스라엘이 따로 있구나. 그것을 심어 넣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삽질해서 그냥 들어내는 거예요. ‘뭐 인구 많다고? 뭐 부흥됐다고? 내가 하루아침에 다 쫓아내봐? 다음 주일날 한 명도 안 오게 만들어 봐?’라는 식으로 싸움을 걸어 보낼 때 기가 찬 거예요.
그래 놓고 하나님께서는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 죄, 인구조사 한 죄, 마치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라고 우기는 그 다윗의 욕심 탐욕 그것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아라우나 타작마당으로 바꿉니다. ‘그냥 조용히 해라. 앞으로 잘 해.’ 이게 아니고 정작 심고자 하는 것을 심어놓습니다. 뭐냐 하면 그 죄를 위해서 하나님이 용서했다는 표시로 제단을 쌓는데, 그 제단이 아라우나 제단이고 그 제단이 장차 하나님의 성전이 거하시는 제단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성전을 딱 쪼개보면 그 안에 뭐가 담겨 있느냐 하면 인간이 이 땅으로 죄지어 왔습니다. 라는 것이 거기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지속적인 언약 완성 차원에서 그러한 무수한 죄들을 용서해 왔다는 사실이 겸하여서 안치돼 있는 곳,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제가 성전 공부를 나 홀로 하면서 무엇이 궁금했느냐 하면 세상 신전에는 무엇이 안에 모셔져 있을까? 궁금했었어요. 그래서 조사를 해봤죠. 이집트 신전에는 뭐가 있고 그리스 신전에는 뭐가 있고 로마신전에는 뭐가 있고, 이렇게 죽 조사를 해보니까 이방신은 뭐가 있을까 조사해 보니 거기 아줌마가 있어요. 그게 뭐냐 여신입니다. 여신!
아하, 이거는 로마 때뿐만 아니고 그 전에 있던 BC3000년부터 있었던 성전을 죽 조사해 보니까 거기에는 주로 여신들이 있었어요. 여신은 다산의 상징입니다. 풍요의 상징이고. 남자는 확 성질부터 내지만 여신은 여성답게 그걸 다독거려줘요. 그러니까 성전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가뭄 들고 농사가 잘 안 되고 홍수가 나고 살기 어려운 것은 남(男) 쪽 신이 우리 죄 지었다고 화내는 것이고, 부부사이에 ‘아이고, 여보, 그만한 거 철 모르는 사람을 그렇게 괴롭히나. 당신 성질도 참, 얘야 괜찮다. 내가 엄마다. 엄마.’ 엄마라는 표시로 용서를 해주는 신.
이것을 프로이드라는 사람은 인간의 모든 정신 속에는 바로 아빠와 엄마의 요소가 다 들어있어서 아빠는 법적으로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고 엄마는 그것을 용서하는 사랑으로 오기 때문에 사람들은 항상 이 세상 냉정한 세상에서 엄마 같은 사람을 찾아서 결혼도 하고 싶고 엄마 같은 목사, 엄마 같은 교회를 찾아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확 퍼내는 것 삽질하는 것, 이건 제발 하지 말라는 거예요. 제가 알아서 길 테니까. 알아서 잘 할 테니까 그저 용서나 해주시고 이 뇌물 받고 용서를 해 달라 그게 인간의 기본적인 종교심입니다.
그러니까 그 우상에 누가 다 넘어갑니까? 그 이스라엘과 유다가 다 넘어가서 나중에 결국 성전을 다 부숴버렸죠. 하나님께서! 이런 것은 천국이 아니라는 거예요.
천국은 뭐냐, 내 살겠다는 것이 아니고 살 수 있는 너희를 내가 살려줬다는 것이 그게 천국인데 신약 요한계시록에 보니까 피가 있어요. 피가! 마지막에 성전을 다 헤치고 가보니까 거기에 피가 있다니까. 피만, 거룩한 피가.
사람이, 참한 여신이 있는 게 아니고요, 고대 15000년 전에 알타미라 동굴 같은 데 보면 그 당시에 나오는 비너스라는 게 있어요. 비너스가 이쁜 게 아니고 옛날 비너스는 완전히 똥배 나오고 애 낳는 기계 같아요. 점차 이게 고상하게 됐지만. 옛날의 모든 것은 농사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신에게 ‘신이시여 이렇게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의 신이시여.’라고 대지는 엄마고 하늘은 아버지고 그랬던 겁니다. 아저씨는 없어요. 사람이 아담에서 나온 본성은 거의 비슷비슷합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예요.
“기뻐하라” 이 말씀은 성경의 말씀은 어떤 경우도 ‘우리가 지킬 수가 없다.’라는 것을 우리가 체험당하는 것,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이 자리에 하나님의 피만 남기겠다는 하나님의 일관된 줄기 찬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품이 오늘날 우리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어디 계셔서 활동하느냐? 딴 게 아니에요. 우리가 죄를 느끼게 만드는 게 예수님의 분주하신 활동의 방법입니다. 주님의 피 아니면 ‘아! 저는 살 필요도 없고 참 천국 갈 수 없군요.’라는 것을 깨닫게 하실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시는 성전, 그럴 때 그 사람은 뭘 기뻐하느냐 하면 포도주가 많고 무화과나무가 열매 많은 걸 기뻐하는 게 아니고 오직 구원의 하나님으로만 기뻐하는 그러한 성전의 표현을 해주는 겁니다.
끝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자기 바깥에 어떤 환경이 있느냐를 온 몸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우리가 있는 거거든요. 이 세상에 주님이 지금도 살아있다는 것을 오직 성전 되는 시온이나 예루살렘에 속한 우리들에 의해서 주님은 이렇게 지금도 용서하시면서 살려내고 있다는 것, 주님께서 그것이 오늘날 우리를 성전으로 삼아서 이 마지막 때에 주의 증인으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구약부터 있어 왔던 그 모든 하나님의 개입에 의해서 벌어진 사건들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됨을 감사합니다. 구약에 있었던 그들의 사람들의 잘못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은 우리 육신인 것을 잊지 말게 해주시고 그리고도 마지막 때에 다 이루었다 하시는 그 피가, 얼마나 십자가 그 능력이 곧 구원의 능력인 것을 저희들이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첨부파일 : 11강-습3장14-17(하나님의 기쁨)130623-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