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으심
2013년 6월 30일 본문 말씀: 스바냐 3:18-20
(습 3:18, 개역) 『내가 대회로 인하여 근심하는 자를 모으리니 그들은 네게 속한 자라 너의 치욕이 그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느니라』
(습 3:19, 개역) 『그 때에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하고 저는 자를 구원하며 쫓겨난 자를 모으며 온 세상에서 수욕 받는 자로 칭잔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
(습 3:20, 개역) 『내가 그 때에 너희를 이끌고 그 때에 너희를 모을지라 내가 너희 목전에서 너희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너희로 천하 만민 중에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모으시는 주체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모이게 하셨다는 것을 확인하지요? 오늘 본문에 보면, ‘대회’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큰 모임’이라는 말입니다. 일반적인 모임하고는 별다른 의미를 지녔다고 큰 모임이지요.
이런 큰 모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모임에 참석하는 자들은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한 바가 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바로 ‘하나님이 과연 계시긴 계시는구나’를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같은 이해에 대해서 당사자 유대인들이 크게 오해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자신들이 대회를 벌려놓고서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거룩한 성회를 령었다고 자부했을 경우에도 과연 자신들의 기쁨이 하나님이 기쁨이 되겠느냐 하는 겁니다. 당연히 안되지요. 이사야 1:11-15에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분명 정기적으로 대회로 모였지만 하나님에 의해서 진정한 대회라고 인정받지 못합니다. 받으시는 당사자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거부당한 절기가 무슨 소용있겠습니까 단지 인간들의 여흥에 불과합니다. 서로들끼리는 위로가 되겠지만 이로 인하여 진짜 하나님께서는 다른 쪽에서 기다리십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전적 무능자로 판정되는 그 시점, 그 현장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바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인간들은 자꾸만 하나님을 거룩하고 고상하게 상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회 가운데 부림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절기는 에스더 10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마치 유대인들의 승리처럼 느껴지겠지만 실은 어쩔 수 없이 상황에서 유대인의 무능력을 내보이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하만이라는 고위관리가 사적으로 유대인이 싫다고 해서 왕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바사 나라의 모든 유대인들을 다 죽이고 그들의 재산과 부동산까지 다 강탈하려는 음모를 꾸민 사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만이라는 자는 고위직이 누리면서 모든 유대인들이 자기 보다 낮은 직급에 있기에 마음대로 유린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만의 횡포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아무런 대책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에스더 왕비가 자신의 미모를 앞장 세워서 바사 왕에서 나아갔을 때, 왕은 평소와는 달리 그 미모에 혼이 나갈 지경인지 나라의 반을 왕비에게 떼어 주겠다는 파격적인 선심을 서슴치 않게 발설합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나 모르드개를 잡아 죽일 그 장대에 하만 본인이 매달려 처참하게 죽는 일이 일어나고 유대인의 지위가 하만으로 인해 격상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바로 이 기쁜 일을 축제화한 것이 부림절이다. 그렇다면 이 부림절기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모든 육은 하나님에 의해서 쓰여질 때는 항상 ‘무(無)’로부터 시작한다는 겁니다.
이미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거들 나버린 상태에서 오로지 하나님의 다음 조치를 죽은 자로서 기다리고 대기상태에 놓일 뿐입니다. 바로 이런 상태가 바탕이 될 경우에만 그 대회와 절기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절기가 됩니다. 포로잡혀가거나 주변나라로 흩어진 도망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회복되는 광경을 고대했겠지요.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인간의 체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자신들이 이해하는 한계선 그 정도입니다. 다시 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되돌아오는 날을 절기의 진정한 의미로 여긴다면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체험만을 인정하시는 언약적 조치에서 실시될 내용입니다.
유대인들은 고생을 생각하지 말고 고난을 생각해야 합니다. 메시아가 없었으면 생겨나지 을 고난 말입니다. 고생이란 사적인 괴로움에 불과합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지만 그 낙은 개인이 기대했고 개인중심으로 활용될 소지가 있습니다. 반면에 고난이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예수님께서 친히 준비해놓으신 코스입니다.
이는 그 관 속에서 예수님이 당하신 수모에 대해서 참석하는 것을 뜻합니다. 히브리서 5:7-9에 보면,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생하신 것은 밥이 없고 건강이 좋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자신의 뜻과 아버지의 뜻 사이의 갈등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고생이 아니라 고난입니다. 고난의 길을 가는 사람은 세상 낙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이는 다 인간들이 저지른 죄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유대인들은 강제로 살던 땅과 집과 재산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진정 이 땅에서 하나님의 모으심에 의해 기뻐하는 자들은 지상에서 예수님의 고난을 재생하는 사람입니다. 무로 내려가는 코스대로 하나님으로부터 인도받는 자에게만 해당되는 상황입니다.
인생이란 새끼줄은 하나님에 의해서 꼬이면서 대회라는 매듭이 만들어집니다. 이는 곧 자기 인생으로 여기면 고생이 되겠지만 예수님의 일로 여기면 고난이 됩니다. 이 고난은 자신의 자리, 곧 구원의 반석을 느끼게 만듭니다. 겉만 번지르르한 찬란한 자기 역사의 대단함을 속지 마시고 정작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고난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자리가 곧 예수님의 자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12강-습3장18-20(모으심)13063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스바냐 3장 18절에서 20절까지 말씀입니다. 구약성경1309페이지입니다.
스바냐 3:18-20
“내가 대회로 인하여 근심하는 자를 모으리니 그들은 네게 속한 자라 너의 치욕이 그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느니라 그 때에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하고 저는 자를 구원하며 쫓겨난 자를 모으며 온 세상에서 수욕 받는 자로 칭잔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 내가 그 때에 너희를 이끌고 그 때에 너희를 모을지라 내가 너희 목전에서 너희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너희로 천하 만민 중에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람이 뭐 ‘이렇게, 이렇게 하겠다.’ 하면 우리는 신뢰합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이 많은 일을 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이 뭐 ‘이렇게, 이렇게 하겠다.’ 하면 우리는 안 믿습니다. 보여야 믿죠.
만약 어느 배가 있는데 그 배 선장이 한 번도 선실에서 나온 적이 없고 그 선원들 가운데서 누구도 그 선장을 본 적이 없다면, 그 배는 누구에 의해서 움직이는가? 선실이 있다는 소문만 들었는데 한 번도 바깥에 나온 적도 없고 누구도 그 선장을 본 적도 없고, 그렇다면 그 배는 우리끼리 알아서 노를 저어서 간다. 또는 돛을 올려서 간다.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거기서 선원들이 자기들끼리 마음 안 맞는다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동안 한 번도 열리지 않던 선실 문이 열리면서 시커먼 굵은 수염을 한 선장이 나타나서 ‘누구야? 내 앞에서 반란을 일으킨 인간은?’ 하고 이렇게 나와서 반란 일으킨 사람을 벌주겠다면 그동안 도대체 우리가 만약 선원이라면 내가 나한테 스스로 속인 것인지 아니면 선장이 우리를 속여 왔는지 잘 분간이 안 될 것입니다.
여기 오늘 본문 19절에 보면 “그 때에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하고” 벌 준다고 돼 있는데 꼭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안 나타나는 선장 같아요. 평소에는 하나님을 그렇게 부르짖어도 나타나지도 않으면서 막상 벌한다 할 때는 불쑥 이렇게 나타나서 벌해버리면 그동안 인간들끼리 살아왔던, 인간들끼리 형성했던 모든 이러한 역사라는 것이 완전히 다 무가치하게 돼 버리죠.
그래서 오늘 본문의 해석하는 해석의 의미에 있어서 중요한 포인트는 18절에 나옵니다. “내가 대회로 인하여 근심하는 자” 큰 모임, 큰 집회를 대회라 합니다. 이 “대회로 인하여 근심한 자를 모으리니“ 이 말은 그동안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이 큰 모임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했거든요. 기뻐했는데 이스라엘 나라가 망하고 난 뒤에 모든 게 다 흩어져버렸으니까 그들이 축제 일 될 때마다 자꾸 옛날 생각이 나서 슬픈 거예요. ‘그때는 좋았는데 그때는 하나님 복을 받아서 우리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로서 영생을 날렸는데 이제는 이렇게 포로 잡히고 이게 무슨 꼴이냐? 이렇게 집도 없고 절도 없고 남의 나라 떠돌아다니는 집시 같은 생활을 하니까 처지가 참 보통 처지가 아니다.’ 그렇게 답답해했거든요.
그런데 남들 보기에 유대인들이 이렇게 포로 잡혔다. 우리는 떠돌아다닌다. 하는데 우리들 입장에서는 유대인에게 한 마디 하고 싶어요. 그 유대교라는 걸 버리면 되잖아. 그렇죠? 유대교를 버리면 되는 거예요. 남들은 우리보고 이단이니, 삼단이니 하는데 우리는 스스로 힘을 합쳐야 돼, 할 때 남들 보기는 간단한 거예요. 그게 니가 진짜 믿는 게 이단인지 삼단인지 남들이 이야기하는데 니가 스스로 그걸 자문해 봐라. 그리고 그게 틀리면 버리면 되잖아. 버리면 되거든요.
‘나 유대인 아닙니다.’ 이러면 얼마든지 사람들이 못 알아볼 텐데 유대인 티를 내니까 그렇게 독일에서 포로수용소 기어들어가고 수모를 당한 겁니다. 그런데 그들 입장에서는 그래요. 그들 입장에서 유대인을 버리면 되는데 이게 버리지를 못하게 돼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놓았어요.
우리보고 단군의 자손 포기하라고 포기하겠습니까? 텐노 반자이, 라 해서 일본천황만세라 하는 거거든요. 일제시대 때 우리 아버지 이야기하면 만날 그거 불렀다는 거예요. 일본천황만세 불렀다는 겁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그걸 했다는 거예요. 왜 그거 안 하면 죽으니까. 그거 안 해서 잡혀 죽은 사람이 주 기철 목사 아닙니까? 괜히 고집부리다가… 그게 무슨 관계있습니까? 일본천황만세, 이게 하나님의 뜻 같지만 자존심과 관련돼 있습니다. 뭐냐 하면 인생이라 하는 것은 누가 가져다주는 게 아니고 자기 행동하는 것이 두 겹, 세 겹 노끈 또는 밧줄 꼬이듯이, 짚 있잖아요. 짚으로 새끼 꼬아 노끈을 만들 듯이 인생이란 이런 식으로 꼬여서 그 다음날로 넘어가거든요. 꼬인 거하고 연관돼서 그 다음날이 있고 그 다음 날 되면 오늘 꼬인 게 내일 또 연결돼 있고, 자꾸 그런 겁니다.
보통 6월 달쯤 되면 자동차세 나오잖아요. 자동차세 고지서 왜 나옵니까? 당신 전에 자동차 산 적이 있다 이 말이거든요. 이미 일어난 꼬인 역사가 그 다음 역사로서 계속해서 이어지게 마련 이예요. 이어지는데 노끈의 매듭이 있어요. 그 매듭이 뭐냐 대회라는 거예요. 큰 모임이 있다는 겁니다.
큰 모임이라는 것은 내가 지키는 게 아니고 내 자체가 큰 모임으로 기쁨을 제공하는 하나의 재료로서 들어가야 되는데 이런 신세가 큰 모임도 못 모이니까 신세가 한탄스럽다. 그 말입니다.
군에 갔던 사람들이 제일 서러울 때가 언제냐 하면 평소에는 안 서러운데 집안 모일 때 추석 때, 또는 설 때, 특히 해군들 배타고 멀리 나가면 선상에서도 추석 제례 지낸다고 저희끼리 절하고 보이지도 않는 조상보고 절하고 하잖아요. 이게 특별한 날 때 그 매듭이 자기 인생을 만드는 겁니다. 그리고 혼자 있는 사람이 자기 생일 챙겨주는 사람이 없을 때 지 생일이 6월 달인데 아무도 생각 안 할 때, 도대체 내가 뭐 때문에 살지? 내가 사는 이유가 뭐지? 그걸 몰라요.
남녀가 서로 만난다. 그러면 꼭 매듭이 있어요. 우리 만난 지 100일, 우리 손잡은 지 50일, 이건 핑계거리고요. 우리 같이 커플 티 입은 지 60일, 우리 같이 커피 잔 마신 그날부터 30일, 그러니까 만날 빼빼로 데이라 해서 선물 주고 이러다 나중에 헤어지고, 꼭 이렇게 뭔가 챙기는 거죠.
매듭! 대회라는 것을 소개할 건데요. 대회라는 것이 초막절과 유월절이 제일 큰 겁니다. 초막절이 수장절이고 맥추절도 있지만 맥추절은 나중에 시들해지고 수장절과 유월절이 제일 크고 그중에 하나 끼어든 큰 절기가 뭐냐, 프림, 영어로 Purim, 또는 한글로 부림 절이란 게 있어요. 부림 절을 유대인들이 지키는데 제가 지금부터 하고 싶은 것은 유대인들이 큰 대회나 큰 집회를 지킨다는 그 자체가 유대인들이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걸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예를 들어서 에스더 제일 마지막에 보면 부림 절이라는 게 있는데 그 날은 어떤 날이냐 하면 유대인이 몰살되는 날입니다. 하만이란 사람이 있어서 왕한테 꼬질러서 ‘유대이란 인간은 모든 재산을 빼앗고 목숨을 죽여 버립시다.’ ‘이유가 뭐고?’ ‘나한테 까불잖아요.’ 단지 이유가 그거예요. ‘그들이 애 싫은데?’ ‘내가 싫다는데 왜 말이 많습니까? 결국 내가 싫기 때문에 내 눈에 싫은 인간이 설치는 것은 나는 못 봅니다.‘ 하고 하만이 객기를 오버를 했어요. 권력을 자랑해서.
그런데 하만은 누구? 모르드개라는 남자만 상대해서 그렇게 꺾으려고 했는데 하만이 몰랐던 것이 그 왕후 에스더의 미모를 하만이 우습게 본 겁니다. 남자라 하는 것은 이쁜 거한테는 슬쩍 넘어가잖아요. 뭘 해도 이쁜 것은 용서가 된다니까.
그러니까 이 에스더가 왕한테 가서 자기 미모를 들이댔잖아요. 미모를 들이대니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 거죠. 그 미모를 보고 왕이 뿅 가면서 ‘내가 이 나라를 반을 주겠다.’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미모 가진 것을 너무 자책하지 마시고 그것도 하나님의 복이다 이렇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충분히 이렇게 활용을 할 수가 있어요. 엉뚱한데 활용해서 문제지만. 하나님께서 활용할 수가 있습니다.
에스더가 미모를 들이대니까 아하수에로 왕이 하는 말이 ‘자, 내가 이렇게 이쁜 사람과 평소에 살다는 것을 미처 왜 몰랐을까?’ 우선 남편들이 이 역사적 사실을 인정 안 해줍니다. 맨 그 얼굴이 그 얼굴이지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어떤 때 보면 잘못 봐서 너무 이쁠 때가 있어요. 그 틈에 하나님께서 에스더를 9회 말 반전을 일으킵니다. 하만을 제거하고 그때부터는 이 유대나라에 그야말로 바사나라가 유대나라처럼 행세하는데 유대나라에서는 이것을 뭐로 보느냐 하면 요셉에게 주었던 그 요셉의 하나님이 요셉에게 일어난 똑같은 일을 되풀이했다고 본 겁니다.
유대인들이 모르는 게 있어요. 유대인은 이 부림 절을 지키면 똑같은 효과가 지키는 날짜에 나오리라고 생각한 것이 그들의 큰 과오였습니다. 굉장히 큰 잘못 이예요. 유월절도 그렇고 출애굽도 그렇고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으면 그 사건을 사용하시는 분은 하나님이 사용하지, 그 날을 지키는 우리 뜻대로 사용하는 날은 아닙니다.
안식일을 지켜라, 할 때 사람들은 안식일을 지키고자 합니다. 지킬 때 안식일 의미가 뭔지 모르고, 안식일 지켰으니까 반대급부나 반대 보상을 기대하듯이 안식일과 주일을 지키고자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유대인들이 똑같이 잘못 생각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를 이끌어 왔습니다. 쉽게 가겠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이끌어 왔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역사를 자기 역사로 본 거예요. 오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를 이끌어 올 때 그 매듭을 만들어 주는데, 매듭하나, 매듭하나, 밧줄을 만들 듯이 만들어 주는데 그 매듭 하나의 의미는 매듭의 끝 지점에 나타나신 분이 그 매듭의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인간의 육이라 하는 것은 어차피 닳고 닳으면 결국은 인간은 무로 돌아가거든요. 인간이 무로 돌아간다면 현재 하나님의 큰 대회나 기쁨이 있다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없어도 되는데 하나님께서 기쁨이라고 이유를 대면서 지금 내가 있게 했구나, 그걸 보고 우리가 기뻐하는 거예요. 내가 기뻐하는 것을 주님한테 요구하지 말고 나를 일절 무로 돌리는 거예요. 나는 없다, 없는데 나를 있게 한 어떤 분이 계시다. 그런데 현재 그분이 내가 여기 만들어놨다는 것은 기뻐 하셔서 만들어 놨기 때문에 나는 그걸 보고 기뻐한다. 이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기쁨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얻고자 하거든요. 그런데 얻고자 하는데 성경 전체는 우리가 무엇을 얻고자 하면 주는 것이 아니고 그 얻고자 하는 것을 내가 만들었다 해서 ‘무엇입니까?’가 아니라 ‘누구십니까?’로 묻기를 원해요. ‘주여 저한테 이렇게 살게 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우리가 이렇게 물어야 되는데, ‘하나님이여, 내가 원하는 것은 이것이니까 이런, 이런 것들을 주시옵소서. 그러면 하나님께 감사하겠습니다.’ 이렇게 되거든요.
그러면 결국은 그 사람한테 하나님은 없는 존재예요. 왜, 내가 있다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내가 있는 게 우선이기 때문에 나 외에 이 세상에 나머지는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방법은 항상 나로 하여금 없어도 되는데 어! 있네, 아! 주님께서 기뻐하셔서 있게 하셨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게 대회입니다.
이사야 1장 13절에 보면 “너희들이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그래서 월삭과 대회, 특별 명절 이렇게 모이는 것은 너희들이 뭔가 제물을 가져오는데 그것은 내 본 뜻이 아니다. 내 본 뜻은 아직까지 멸망돼야 될 너희들을 여전히 내가 살려내고 있다는 이 사실에 이해했지? 내가 너희들 덕에 나타나기 위해서 원래 대회라는 게 있습니다.
대회라는 것을 한번 정리해 보면 대회라 하는 것은 사실은 에스더 때 이미 유대인들은 하만 때문에 죽었다고 치자 이 말입니다. 하만으로 하여금 그렇게 미움 받게 한 그 일도 하만을 세운 일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자꾸 삭제시키고 없애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없애 놓고 ‘오! 여기 있네. 오! 이건 하나님의 기쁨이네.’해서 기뻐하게 만드는 그 작업,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대회로 기뻐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너희들을 포로 잡힌 가운데서 모으시고” 라고 했죠? “모으시고”라고 돼 있지만 역사적으로 따져보면 자기들이 알아서 기어들어왔지 모으지는 않았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여기서 “그들을 모으시고” 한다는 걸 안다는 것을 그들이 결국은 내가 어느 장소에 예루살렘에 모으겠다든지 이스라엘 나라를 만들겠다, 히는 이 모든 생각들은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어디 있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자기 양떼를 음성으로 듣게 하시고 모으시는 작업으로 지금 내가 이 동네에 이 도시에 이 마을에 이 지점에 박혀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제가 지난 목요일 날 대전에서 강의를 했는데요. 그 강의한 중요한 부분을 다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실 때 인간을 먼저 만드는 게 아니고, 인간의 자리를 먼저 만들었다 했죠. 기억나시죠? 인간의 자리를 먼저 만드시고 인간의 자리가 고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시켜주는 효과를 내게 돼 있어요.
어릴 때 많이 봤던 뻥튀기 기계 가운데서 쌀 알맹이를 놓고 압력으로 프레스를 꽉 눌러버리면 납작하게 뻥튀기가 만들어지잖아요. 그때 그 기계, 눌러서 납작하게 짜브러뜨리게 만드는 기계. 기계에서 하나 뽑아내고 주인아저씨가 기름을 칠한 솔가지고 칙칙 닦고 나서 다시 집어넣고 또 하고, 또 눌러버리면 또 생기고, 어릴 때 그 모습을 보니까 저 할아버지는 매일 같이 돈 번다고 생각했어요. 집어넣고 돈 나오고 집어넣고 돈 나오고. 지금 보니까 그 돈이 얼마 안 된다 생각되지만 그때는 신기한 거예요.
주님께서는 매일같이 프레스 시키는 거예요. 하나님이 모았다는 그 자체를 기뻐하라고 집어넣고 눌러버리고 다시 ‘너는 내가 기쁨으로 모아주니까 기쁨이 된 거야, 라는 식으로 하는 거예요. 그리고 돌아서서 딴 짓하면 또 집어넣고 또 눌러버리고, 우리는 우리의 자리가 더 중요한 겁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무너지게 돼 있고 반석 위에 지은 집은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다 했거든요. 그렇다면 우리가 주목해야 될 자리는 뭐냐 하면 남들 보기에 거창한 거, 이런 거 보지 말고 내 자리가 어떤 자리냐. 자리가 중요하지 나는 안 중요하고 니가 그 자리를 보느냐, 그걸 본다고요.
다시 말해서 나라는 인생의 매듭이라면 이 매듭을 꼬이게 하신 것은 니가 아니고 하나님이 몰래 뒤에서 우리 인생을 이런 식으로 매듭이 꼬이게 만든 거예요. 인생의 매듭이 꼬여도 너무 심하게 꼬인 분들은 참 가정적으로 매듭 꼬인 사람 골치 아픈 사람 많죠. 하지만 그 순간 이게 원래 허무하거든요. 허무하니까 도대체 이렇게 꼬이게 하면서도 결국 주께서 알려주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고생한다가 아니라 ‘내가 니 때문에 고난 받는다.’는 이해를 하란 말이죠.
고생 끝에는 낙을 기다리지만 고난 뒤에는 주님이 기다립니다. 우리가 고난의 길로 가야 주님이 보이지, 고생이다. 고생이다. 해버리면 빨리 이 고생 끝내고 내가 횡재하고 내가 당당한 자꾸 겉모습만 당당한 그날을 기다리거든요. 그렇게 되면 교회 다녀서 헌금하지 말고 로또 복권 사서 전부 로또 복권 붙들고 ‘주여, 주여,’ 기도를 해야 돼요. 고생 끝에는 낙에 오지만 고난 끝에는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겁니다. 그동안 내 인생을 고난 속으로 집어넣는 것.
여러분들의 인생이 이제는 고생으로 산다 하지 마시고 고난으로 사셔야 돼요. 그렇게 되면 오늘 본문 이 말씀 자체가 여기 20절에 보면 “그 때에 너희를 이끌고 그 때에 너희를 모을지라 내가 너희 목전에서 너희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너희로 천하 만민 중에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할 때 요러한 인생이 모이는 그때가 하나님이 진정으로 그동안 대회를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 부림 절, 이런 모든 대회, 집회의 참 취지가 바로 예수님 오시고 함께 함으로서 거기에 완성이 되는 겁니다.
끝으로 이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했거든요. 무슨 말이냐 하면 “얘들아 기뻐해라, 안식일은 너희들이 지키는 게 아니고 내가 그동안 내가 누구신가를, 나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동안 안식일 지키라고 했다. 해보니 니 욕심 생겨나고 안식일이 만만치 않지? 하지만 안식일은 어떤 날이냐 하면 바로 자비와 용서를 베푸는 날이 안식일이거든요. 그게 대회입니다. 큰일입니다.
매일같이 주님께서는 눌러버리고 다시 우리 자신을 보게 하고 또 눌러버리고 ‘내가 왜 살지? 내가 왜 있지? 주님의 말씀을 위하여, 주님의 사랑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가 지금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약에 주변 사람들이 ’아이고, 교회 다니는데 고생스러운데 교회 가지 마세요.‘라고 하거든요. ’주께서 이렇게 말씀 듣게 하시네요.‘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영적인 이스라엘로, 이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팔자가 아니라 주께서 이 말씀에 준해서 그대로 만들어 내는 주님의 작품으로서의 인생을 우리가 살아갑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고생했다고 하나님 앞에 불평하지만 사실은 이게 주님 십자가 가는 고난의 길인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주께서 일부러 만드셨는데 우리는 어찌 할 바 없어서 손을 놓았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손을 놓게 하시고 날마다 주께서 나서서 일처리 하시는 그런 식으로 동행이 우리 온 몸으로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첨부파일 : 12강-습3장18-20(모으심)130630-이 근호 목사.hwp (48.0K), Down:6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