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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바냐10강-땅과 남은자(습3'9-13)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3. 6. 16. 18:11

 

땅과 남은자(스바냐 3: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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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06-16 15:49 
가난한 자의 믿음

2013년 6월 16일                     본문 말씀: 스바냐 3:9-13

(습 3:9, 개역) 『그 때에 내가 열방의 입술을 깨끗케 하여 그들로 다 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일심으로 섬기게 하리니』

(습 3:10, 개역) 『내게 구하는 백성들 곧 내가 흩은 자의 딸이 구스 하수 건너편에서부터 예물을 가지고 와서 내게 드릴지라』

(습 3:11, 개역) 『그 날에 네가 내게 범죄한 모든 행위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것은 그 때에 내가 너의 중에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를 제하여 너로 나의 성산에서 다시는 교만하지 않게 할 것임이니라』

(습 3:12, 개역)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너의 중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

(습 3:13, 개역)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치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궤휼한 혀가 없으며 먹으며 누우나 놀라게 할 자가 없으리라』

오늘 본문에 보면, 교만, 성산, 악, 거짓, 궤휼 이라는 단어들이 나옵니다. 이 단어들의 뜻을 오늘날 우리들이 안다고 여긴다면 이는 실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일단 구약의 계시 안에 놓여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해하는 개념이며 이 개념의 완성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확정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이라고 혹은 악이라고 자책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에게 죄를 지었기에 자결해도 마땅하다고 단정 짓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네가 죄에 대해서 알기는 알고 이 짓하느냐?”라고 말입니다. 죄 지어서 죄가 아니라 죄가 뭔지도 모르면서 죄라고 단정짓는 바로 그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방인들입니다. 이방인라는 규정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따로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나올 말입니다. 이것은 같은 인간이라도 하나님을 보는 관점이 일치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즉 이방인들이 생각하는 악한 것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언약을 통해서 전달받은 죄하고는 개념이 다릅니다.

이방인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죄지을 때만 죄가 나타나고 내가 죄를 안 지으면 죄가 안 나타난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유대인의 역사 속에서 보여주는 죄는 죄를 죄로 드러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공간과 시간적으로 몰고 다니시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이스라엘 전체가 이런식으로 이해했다가 아니라 그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신’을 받은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을 그런식으로 규정하면서 계시를 전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달된 계시는 그들이 지키고 아니지키고 상관없이 계시 스스로 그 성취에 나서게 되고 그 결과로 얻어진 것이 이스라엘 멸망의 역사입니다.

이 이스라엘의 멸망을 바라보면서 이방인들은 그들 자신의 운명도 점검되어야 하는 겁니다. 마가복음 7:26-28에 보면,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리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특별히 관심두신 이유는 비록 이방인이지만 유대인들의 관점을 확보해 있다는 겁니다. 즉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혜택은 유대인들에게만 자녀의 자격으로 주어진다는 것이 분명한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이미 이 여인이 믿고 있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은 다같은 인간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일은 언약에 근거해서만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간 중심이지 않다는 말입니다. 인간 구원에 협조하는 식으로 하나님은 일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비록 자녀에게 먼저 떡이 주어지지만 자녀가 그것을 버린다고 해서 그 버려진 가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수로보니게 이 여인의 생각입니다.

이방인인 우리 입장에서 우리는 두 가지 관점을 다 알아야 합니다. 하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어떤 식으로 이해했는가 라는 것과 또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서 세상을 어떤 취지로 다스리는가 라는 것도 놓쳐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가져야 될 관점은 로마서 9:21:23에 나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즉 유대인들은 자신이 우선이 아니라 자신을 만드신 분이 우선이고 그 분을 위해서 자신들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이 유대인이어야 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방인들은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해 신을 만들어놓고 믿는 식입니다. 자신이 갑이고 신은 을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이 반대가 되어야 되는 겁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에 있어 예수님이 자신을 개로 취급해도 조금도 거부하지 않고 도리어 반기는 것은 자신은 비록 이방인이지만 자신의 입장은 이스라엘과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세상을 보는 관점을 따로 인간을 살피는 내용도 달라집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사람이 뭐냐 했을 때, 가장 인간을 잘 안다는 방식이 바로 의사들이 사람을 해부해놓고 살펴보듯이 시각적 안목이 되는 겁니다. 또한 화가 사람을 그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이는 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여기는 것이 오늘날 과학적 안목입니다. 하지만 수로보니게 여인을 자신을 개로 간주하는 이 관점에 의해 인간 해체관점은 과학적으로는 도저히 접근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남은자, 혹은 악행이라는 이런 개념도 밝혀지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구약입니다. 구약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하나님의 관점은 결코 인간 위주나 인간 우선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아버지가 회사에 가서 고급 만년필을 선물받아서 집으로 가져왔다고 합시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그 만년필이 너무 예쁘서 자기가 써봅니다. 그리고 너무 만족스럽습니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보고 하는 말이, “아버지 고마워요 귀한 만년필로 귀한 딸에서 선물 주셔서 잘 쓰겠습니다”라고 하니 아버지가 하는 말은, “만년필 이래 내놔. 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만년필이 더 중요해”라고 말한다면 딸은 의이해할 것입니다.

약속의 땅에 관한 모든 내용이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전부 하나님 자신을 위함입니다. 즉 장차 오실 메시야의 주되심을 위하여 미리 일어난 상황들입니다. 따라서 땅으로 되돌아오는 남은자라는 개념은 구약의 구조에서 설명할 것이 아니라 구약의 완성인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담긴 내용으로 설명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약속의 땅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골로새서 3:1-3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는 겁니다.

즉 주님이 가 계신 그것이 구약에서 언급한 모든 것이 약속 성취하는 취지에서 몰려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2에 보면,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죄와 심판, 남은 자 등등의 모든 개념들도 모두 위에서부터 주어져야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땅에서 주어진 모든 개념들이 옳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은 자들이 품고 있을 죄라는 개념은 구약의 역사적 관점에서는 파악될 수 없고 신약의 십자가 복음으로만 해명되어야 합니다.

구약의 땅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땅에서 성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성전은 불탔기 때문에 지상의 남은자들이 지상의 예루살렘으로 복귀한다는 것은 의미가 맞지 아니합니다. 이미 성전은 하늘로 올라가 있는 상태입니다. 성전의 주인공이신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악의 문제도 이제 풀리게 됩니다. 남은 자들이 아무런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 것은 그들이 정신차렸거나 지난날의 잘못으로 크게 반성해서가 아닙니다. 십자가 죽음에 동참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오늘날 성령받은 성도를 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이 누구인지를 십자가 앞에서 알려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0강-습3장9-13(땅과 남은자)13061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스바냐 3장 9절에서 13절 말씀입니다. 구약성경1308페이지입니다.

스바냐 3:9-13

“그 때에 내가 열방의 입술을 깨끗케 하여 그들로 다 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일심으로 섬기게 하리니 내게 구하는 백성들 곧 내가 흩은 자의 딸이 구스 하수 건너편에서부터 예물을 가지고 와서 내게 드릴지라 그 날에 네가 내게 범죄한 모든 행위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것은 그 때에 내가 너의 중에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를 제하여 너로 나의 성산에서 다시는 교만하지 않게 할 것임이니라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너의 중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치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궤휼한 혀가 없으며 먹으며 누우나 놀라게 할 자가 없으리라“

우리가 방금 읽었던 것이 구약성경입니다. 신약성경은 아닙니다. ‘신약성경이 아닙니다.’라는 말은 구약 때란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 지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는 그런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는 어린양으로 오셨기 때문에 여기 나오는 이러한 수치, 교만이라든지, 자랑하는 것, 악을 행한다는 것, 거짓을 말한다는 것, 입에 궤휼한 혀가 있다. 이런 것들의 개념은, 그러한 정의는, 규정은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면서 일어났던 그 안에서만 이것이 밝혀집니다.

우리끼리 의논해서 ‘야, 거짓이 무엇인지 우리 한번 결정해보자. 이게 정답이야.’ 그것이 바로 거짓입니다. 인간들끼리 아이디어 짜내서 땅땅땅 해서 ‘이것은 거짓이야, 이것은 교만이야. 이건 나쁜 죄야, 이건 잘하는 짓이야.’ 이렇게 판정을 내려 봐야 소용없는 겁니다. 우리가 ‘이것은 나쁜 것이야. 이것은 악한 짓이야.’라고 이렇게 판결을 내려 보지만 주님께서는 그 판결을 비켜 지나가고 그런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어때요? 기쁜 소식 아닙니까?

우리가 ‘이건 분명히 내가 죄야. 이건 내가 죽고 싶어.’라고 해서 한강다리에 뛰어내리려 할 때 주님께서 ‘니가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네. 니가 니보고 죄야, 니가 니보고 정했지, 내가 언제 니보고 죄라고 뛰어내리라고 지시한 적이 있느냐.’ 괜히 지가 들은 풍월이 있어서 또 다른 사람들 사는 것 보고 좀 다르니까 ‘맞아. 내가 죄지은 거야. 죄져서 벌 받는 거야.’이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오해하지 말라는 겁니다.

신약 때는 죄가 뭐며 의가 뭐냐  하는 것은 십자가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약속 이예요. 그 약속은 비밀이고 성령이 아니고서야 밝혀지지 않거든요.

그렇다면 구약 때는 ‘목사님 구약 때는 비밀이 아니잖아요?’ 구약 때도 비밀 이예요. 왜 그러느냐, 구약 때는 우리는 이방인이거든요. 우리는 이방민족이라서 이스라엘이 어떤 감각으로 어떤 뜻으로 그들은 어떤 심정으로 하나님을 섬겼는가는 이방인은 빠지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이방인 입장이기 때문에, 구약 때도 하나님 뜻을 몰랐고 신약 때도 하나님 뜻을 모르고 그냥 우리는 자기 마음대로 사는 거죠.

의성 사투리에 이런 게 있습니다. 욕이 아니고 사투리니까, 하여튼 지끼는대로, 내가 그 이야기 들을 때 ‘아! 이런 심한 욕을?’ 그런데 그걸 자꾸 우리 장모님이 되풀이하니까 ‘아!’ 저건 욕을 하는 것이 아니고 지끼는대로 뭐라고 씨부리쌌노, 저게 뭐라고 씨브리쌌노, 분명히 강한 시옷이 들어가는데 욕은 아닌 것 같은데 교양 있는 말은 아닌 것 같고 경상도 사람끼리만 통하는 그거라 말이죠. 우리가 들으면 오해하기 쉽죠. ‘당신 방금 욕했어요?’ ‘아니 이건 우리끼리 언약입니다.’ 우리끼리 계시예요. 괜히 오해해서 나는 욕 안했는데 왜 욕을 해? 뭐라고 씨브리쌌노. 입에 지끼는 대로. 경상도끼리의 덕담입니다. 덕담까지는 너무 심했다. 하여튼 좋은 소리는 아닌데 편하게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괜히 이방인들이 그걸 자기 맘대로 평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이죠.

오늘 구약을 언급하면서 우리는 두 가지를 언급해야 돼요. 구약과 오늘날 이방인과 유대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떻게 차이가 나는가? 두 번째는 구약 그 당시와 예수님 십자가 질 때 그 의미가 뭐냐? 서로 개념이 다 달라요. 첫째 것은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사고방식이 다르다는 것, 두 번째는 구약과 신약의 사고방식이 다르다는 것, 이러나저러나 우리는 다 다르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사람이죠.

그럴 때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이란 보따리 안에 방금 우리가 몰랐다고 제켜 놓은 구약도 알게 되고 몰랐다는 십자가 안에 있는 진정한 의미도 알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먼저 “내가 진리 때문에 왔다.” 하니까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 했거든요. 그런데 그전에 이미 예수님께서 진리대로 살고 있었던 거예요. 예수님 자체가 진리인데 그걸 못 알아본다면 진리가 무엇이냐의 답변을 할 도리가 없어요. 예수님은 이미 이야기했잖아요. “내가 곧 진리요,” 내가 곧 진리요, 라는 말을 했으면 진리가 무엇이냐? 라는 질문을 할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진리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내가 어떻게 하면 진리를 압니까? 하는 질문인데 그것은 “내가 곧 진리다.” 함은 니는 진리가 아니라는 뜻이거든요. 진리 아닌 것이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도 진리가 아닌 거예요. 그러니까 니는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진리 모르는 채로 그냥 진리 모르는 채로 살면 된다. 그게 바로 진리가 되는 거예요. 모르고 살면 돼요.

문제는 모르고 살면서 안다고 생각하고 자책하고 뛰어내리려 하고 ‘이건 내가 사는 것도 아니야.’ 니가 뭘 안다고 인생에 대해서 그렇게 책잡고 니 인생에 대해서 악담을 퍼붓느냐 말이죠. 내 인생이라 하거든요. 주님은 ‘니 인생 아니거든’ 모르는 것 중에 하나 포함된 게 내 인생은 내 인생, 그것도 모르고 하는 거예요.

구약은 내 인생은 내 인생이 아니다, 가 구약 사람들의 사고방식입니다. 간단하죠. 대단히 간단한 거예요. 구약을 모르고 이스라엘 사람을 모르는 사람은 내 인생은 내 인생이니까 어떤 하나님을 믿을까, 그래야 내 신세가 좋아질까, 하지만 구약은 내 신세 좋아지라고 여호와 믿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만들어 낸 신세, 인생을 그들은 그냥 살아갈 뿐입니다.

이걸 로마서 9장에서는 토기장이 비유로서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토기장이가 토기를 만들 때 항상 토기는 토기장이가 따로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토기로서 존재해야 된다는 거예요. ‘나 토기니까 이젠 내 맘대로 담을 거야.’ 가 안 돼요. 하나님의 진노를 위한 그릇은 진노가 담기라는 것을 알아야 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담기는 그릇은 사랑이 담기는 걸 알아야 요게 이방인 관점이 아니고 성령 받은 구약 관점입니다. 물론 신약 관점도 되는데 그건 설명이 필요하겠죠. 일단은 구약으로 가서 십자가로 가야 되기 때문에 일단 우리가 구약으로 갑시다. 가기 전에 먼저 우리가 해야 될 것은 내가 우선이 아니고 나를 만드신 분의 우선으로 세상은 돌아간다고 부터 먼저 정립합시다.

자, 그런데 이렇게 정립하는데 방해되는 요소가 있어요. 뭐가 방해되느냐 하면 바로 의사들이 방해돼요. 갑자기 의사 이야기를 왜 하느냐 이렇습니다. 의사들이 사람을 진찰하면서 시각적으로 눈에 보이는 대로 관찰해요. 그리고 사람의 배를 갈라놓고 그걸 가르는 이유가 보겠다는 겁니다. 어디가 잘못 됐는지 동맥이 끊어졌는지 정맥이 막혔는지 보겠다는 거예요. 그게 사람에 의해서 사람을 해부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바로 보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하나님의 진리는 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언약으로, 말씀으로 해부를 해야 되는데 이방민족들은 계시고, 말씀이고, 언약이 없기 때문에 기껏 보는 것으로 보는데, 보는 것으로 인간을 해부하고 다루겠다고 하는 대표적인 직업이 뭐냐, 의사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의사만 되는 그러한 인식이 방송을 통해서, TV를 통해서, 나는 TV 나오면서 가운을 왜 입는지 이해가 안 돼요. 병원에서는 병균, 이러한 것이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가운 입는 것이 이해가 되는데 방송국 카메라 앞에서 가운을 왜 입습니까? 어쨌든 가운을 입고 병원에서 자기가 하는 이야기를 방송에 나와서 하게 됩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오늘 아침에 운동을 하는데 여기 앞에 오는데 우리교회서 100미터만 가면 거기에 아침 되면 노인네들이 모여 있어요. 운동하는 시설들이 다 돼 있고 나무들이 우거져 있어서 멋집니다. 이 동네서 제일 좋은 시설이니까 어머니도 아침에 거기 가셨다 오시는 것 같아요. 

팔십 다섯 쯤 되는 할머니인데 운동기구에 매달려 운동하면서 육십 다섯 쯤 되는 할머니보고 물어요. ‘내가 지금 운동하는 자세가 괜찮아요?’ 묻고 있더라 말이죠. 그래서 내가 지나가면서 들었으니까, 육십 다섯 쯤 되는 할머니가 하는 말이 그 할머니가 지혜로워요. ‘그 나이에 운동하는 자세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이렇게 기구 매달려서 운동하면 이게 자세 관계없이 이 자체도 축복이고 참 건강하신데 거기다 뭘 더 건강하기를…’  TV 보니까 운동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하여튼 TV가 사람을 망쳐요. 이 TV가 의사가 하는 이야기를 그대로 듣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의사는 인간을 말씀으로 해부하는 게 아니고 시각적으로 해부해요. 시각적으로 해부해서 째보면 그게 인간입니까? 그래서 천국 갑니까? 영생 얻습니까? 의사가 하는 말은 진리가 아니에요. 그러면 이방민족들이 아는 범위 한계에 속합니다. 구약은 사람을 해부할 때 의사가 눈으로 보는 것처럼 해부하는 게 아닙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이방여자거든요. 이방여자가 예수께 하는 말이 ‘예수여, 제 딸이 병들었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나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왔지, 이방을 위해서 온 것이 아니다.”라고 했어요. 이방민족과 이스라엘 민족을 나누는 겁니다. 딱 예수님께서 나눠요. 그러니까 그 여인이 하는 말이 주님 말에 동의해요. ‘맞습니다. 옳습니다. 저는 구약 입장에서 볼 때 저는 그냥 개 같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개도 주인의 빵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가 있다면 그걸로 먹어도 족합니다. 왜, 개는 개 입장에서 상에 올라가서 밥상 차려달라고는 못하고 그냥 주인이 먹는 거, 유대인들이 먹다가 실수해서 굴러 떨어진 그런 빵조각만 있어도 그것만 먹어도 구약 성경에 들어오신 하나님의 영생의 축복과 약속에 우리가 맛을 보고 끼어들 수가 있습니다.‘라고 그 여인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여인이 자기를 분석할 때 맥박 쟀습니까? 혈압 재는 거예요? 엑스레이 찍었습니까? 그래서 진정 내가 어떤 존재라는 것을 그래서 알았습니까? 구약 말씀의 입장에서 분해해 보니까 나는 바로 개며 개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있다면 바로 원래 아들들이 진리를 무가치하게 ‘에이 씨.’ 하고 갖다 버릴 때 ‘어이쿠, 웬 떡이고?’ 하고 그걸 주워 먹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영생의 쪼가리고, 영생에는 쪼가리만 먹어도 생명나무 먹은 걸로 간주해서 영생을 얻으니까 제가 이런 횡재가 어디 있습니까? 라고 할 때 “오늘 너에게 구원이 주어졌다. 니 딸이 낫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니가 구원받았어.” 라고 한 거예요.

여러분, 이제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는 방식을 알겠죠? 먼저는 유대인입니다. 먼저는 유대인이고 유대인이 ‘에이 씨, 이 쓸데없는 거.’ 하고 버리거든 뚜르르 구르거든 선착순으로 왁 달려들어서 개의 입장에서 그걸 주워 먹으면 되는 거예요.

이러한 생각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의 입장에서 세상의 인간들을 봤다는 거예요. 이건 눈으로 보는 게 아니고 말씀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모든 게 언약대로 순서대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첫 번째는 유대인이고 나중에는 헬라인이고, 유대인이 싫다고 한다면 그 나머지, TO(table of organization:인원편성표)를 이방인이 차지하는 겁니다. 로마서 11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자, 그렇다면 좀 더 진전해서 오늘 본문에 봅시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이스라엘에 있어서 내용은 뭐냐 하면 장차 너희들이 포로 잡혀서 되돌아 올 것이라 했어요. 돌아오게 되면 그때는 너희들이 정신 차려서 나쁜 짓 안 하고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면서 그때는 남은 자들, 13절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치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궤휼한 혀가 없으며 먹으며 누우나 놀라게 할 자가 없으리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보호하는 그러한 진짜 이스라엘이 될 것이다. 그런 내용입니다. 자 이 내용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상당히 어렵지 않게 느껴지는데, 이게 사실은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예요. 왜 어려운 이야기냐 하면 이스라엘은, 구약은 자기중심이 아니에요. 자기 구원중심이 아닙니다. 무슨 중심이냐, 하나님이 설치해 놓은 중심 이예요. 뭘 설치했는가? 땅을 설치하고 언약을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는 만나 같은 양식들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제사장 준비하고 성전 준비하고 이런 걸 준비했거든요.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아버지가 뭘 하느냐 하면 아버지가 직장에서 선물을 받은 만년필을 가져왔어요. 만년필을 가져오니까 아이가 ‘이거 아버지가 가져온 만년필을 내가 한번 써봐야지.‘ 써보니까 잘 나오더란 말이죠. 그래서 저녁에 아빠가 오니까 ’아빠 고마워, 아빠가 준 만년필이 이렇게 잘 나오는데 고마워요. 잘 썼어요.‘ 하니까 아빠가 꿀밤을 때리면서 ’나는 니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받은 만년필이 더 중요해. 그런데 니는 잘못 생각해서 마치 나를 위해서 아버지가 만년필을 가져 온 것처럼 니가 왜 그렇게 곡해하느냐?‘ 이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설치한 게 더 중요한데 유대인들은 오해하기를 내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땅을 주었죠. 언약을 주었죠. 하나님이 양식과 만나를 주었죠. 그리고 이방인들을 물리치게 해줬죠. 이게 전부 다 누구 좋아라고 한 거냐 하면 하나님의 본인 이름, 본인 좋아라고 한 건데 그들은 ‘언젠가 우리가 이 땅에 돌아오게 되면 하나님 제대로 섬겨야지.’ 이렇게 오해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그때에 내게 구하는 백성들 곧 내가 흩은 자의 딸이 구스 하수 건너편에서부터 예물을 가지고 와서 내게 드릴지라” 이렇게 돼 있을 때 이걸 구약 적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이 주신 그 땅은 여전히 그 땅이 있고 자기 백성은 잠시 잘못됐기 때문에 바벨론, 앗수르 포로 잡혀 가고, 포로 잡혀 간 그 사람들이 정신 차려서 예물 가지고 이 땅에 돌아오면, 그때는 삼세판으로 해서 전에는 실패했지만 이제는 제대로 해서 이 땅에서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된다.‘라고 그렇게 해석을 하는데 이것이 신약의 십자가에 의하면 그것이 잘못된 해석이 되는 겁니다.

구약을 해석하면서 하나님의 땅과 하나님의 이름과 성전과 백성이란 개념이 더 이상 구약적인 설치된 장치, 땅이라든지, 백성, 개념은 그 개념을 써도 그 성취는 신약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구약의 유대인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땅? 돌아올 땅은 없습니다. 남은 자? 저희끼리 주님을 위해서 사세요. 한다고 남은 자 아닙니다. 없어요. 이스라엘 백성 깨지면 그 설치도 같이 깨져서 없어요. 그러면 땅은? 하늘에 있어요. 백성은? 지금 하늘에 있어요. 하늘에서 신부 내려옵니다. 구원은 말씀 지키는 게 아니에요. 하늘에서 성령이 내려와서 십자가를 알게 해서 그 십자가로 용서 받은 자만 여기 남은 자가 돼요. 이거 제 맘대로 해석하는 거 아닙니다. 오해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바울이 편지에서 그렇게 이야기해요. 사도바울이 로마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이런 편지에서 구약을 해석하면서 사도행전도 마찬가지고, 구약을 해석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었다 하는 그걸 말하는 거예요.

그 이유를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존에 설치된 거, 땅과 백성들, 그걸 없앨 때에 그냥 없애는 것이 아니고 그 심판하는 출구가 있어요. 그 출구가 뭐냐, 성전, 하늘에 올라가는 성전에서 심판의 능력이 와서 자기 백성을 심판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뭐냐 하면, 신약에서는 구원하는 구멍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그 능력이 그 옛날에 이스라엘을 심판했던 그 심판의 능력에서 자비와 사랑이 나와요. 사랑은 최종적으로만 나오게 돼 있어요. 중간에는 사랑이 안 나오고 마지막 때는 온전한 사랑이 나오는데 그 온전한 사랑은 주님께서 심판할 수밖에 없는 그 기준이 확정돼 있고 확정된 기준에 의해서 모든 인간은 죄인이고 그 죄인에 의해서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너희들 모든 인간은 다 심판받아 마땅하지?’라고 분명히 다짐을 받아 놓고 그 다음에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지옥 가야 될 우리가 사랑을 입어서 구원 받는 식으로만 남은 자가 형성되는 겁니다. 이게 신약 적 방식 이예요. 왜, 우리는 어차피 개니까. 어차피 이방인이니까.

그러면 뭐만 사느냐, 하나님의 계시만 계속 완성돼요. 하나님의 계시만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생생하게 살아있는 겁니다. 그것을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옛날 언약은 너희들이 실패할 수밖에 없지만 새 언약에는 실패라는 게 없습니다. 왜냐 하면 우리가 지키면 실패인데 개 같은 우리가 지키면 개 같은 것 밖에 안 되는데, 주님이 지켜서 우리에게 은사라는 선물로 주시기 때문에 이미 주신 것 자체가 실패라는 게 성립이 되질 않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남은 자는 뭐냐, 신약에 보면 오늘날 예수님에 의해서 부름을 받은 자, 그들만이 스바냐 예언을 이루는 진실한 교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구약 성도도 되지 못하고 주님은 알 길이 없었던 우리들, 성령 받고 보니 구약의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처음이고 마지막이고 시작부터 온전한 것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안에 주님 사랑이 있고 용서가 있음을 우리는 세상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10강-습3장9-13(땅과 남은자)13061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스바냐 3장 9절에서 13절 말씀입니다. 구약성경1308페이지입니다.

스바냐 3:9-13

“그 때에 내가 열방의 입술을 깨끗케 하여 그들로 다 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일심으로 섬기게 하리니 내게 구하는 백성들 곧 내가 흩은 자의 딸이 구스 하수 건너편에서부터 예물을 가지고 와서 내게 드릴지라 그 날에 네가 내게 범죄한 모든 행위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것은 그 때에 내가 너의 중에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를 제하여 너로 나의 성산에서 다시는 교만하지 않게 할 것임이니라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너의 중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치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궤휼한 혀가 없으며 먹으며 누우나 놀라게 할 자가 없으리라“

우리가 방금 읽었던 것이 구약성경입니다. 신약성경은 아닙니다. ‘신약성경이 아닙니다.’라는 말은 구약 때란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 지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는 그런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는 어린양으로 오셨기 때문에 여기 나오는 이러한 수치, 교만이라든지, 자랑하는 것, 악을 행한다는 것, 거짓을 말한다는 것, 입에 궤휼한 혀가 있다. 이런 것들의 개념은, 그러한 정의는, 규정은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면서 일어났던 그 안에서만 이것이 밝혀집니다.

우리끼리 의논해서 ‘야, 거짓이 무엇인지 우리 한번 결정해보자. 이게 정답이야.’ 그것이 바로 거짓입니다. 인간들끼리 아이디어 짜내서 땅땅땅 해서 ‘이것은 거짓이야, 이것은 교만이야. 이건 나쁜 죄야, 이건 잘하는 짓이야.’ 이렇게 판정을 내려 봐야 소용없는 겁니다. 우리가 ‘이것은 나쁜 것이야. 이것은 악한 짓이야.’라고 이렇게 판결을 내려 보지만 주님께서는 그 판결을 비켜 지나가고 그런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어때요? 기쁜 소식 아닙니까?

우리가 ‘이건 분명히 내가 죄야. 이건 내가 죽고 싶어.’라고 해서 한강다리에 뛰어내리려 할 때 주님께서 ‘니가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네. 니가 니보고 죄야, 니가 니보고 정했지, 내가 언제 니보고 죄라고 뛰어내리라고 지시한 적이 있느냐.’ 괜히 지가 들은 풍월이 있어서 또 다른 사람들 사는 것 보고 좀 다르니까 ‘맞아. 내가 죄지은 거야. 죄져서 벌 받는 거야.’이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오해하지 말라는 겁니다.

신약 때는 죄가 뭐며 의가 뭐냐  하는 것은 십자가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약속 이예요. 그 약속은 비밀이고 성령이 아니고서야 밝혀지지 않거든요.

그렇다면 구약 때는 ‘목사님 구약 때는 비밀이 아니잖아요?’ 구약 때도 비밀 이예요. 왜 그러느냐, 구약 때는 우리는 이방인이거든요. 우리는 이방민족이라서 이스라엘이 어떤 감각으로 어떤 뜻으로 그들은 어떤 심정으로 하나님을 섬겼는가는 이방인은 빠지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이방인 입장이기 때문에, 구약 때도 하나님 뜻을 몰랐고 신약 때도 하나님 뜻을 모르고 그냥 우리는 자기 마음대로 사는 거죠.

의성 사투리에 이런 게 있습니다. 욕이 아니고 사투리니까, 하여튼 지끼는대로, 내가 그 이야기 들을 때 ‘아! 이런 심한 욕을?’ 그런데 그걸 자꾸 우리 장모님이 되풀이하니까 ‘아!’ 저건 욕을 하는 것이 아니고 지끼는대로 뭐라고 씨부리쌌노, 저게 뭐라고 씨브리쌌노, 분명히 강한 시옷이 들어가는데 욕은 아닌 것 같은데 교양 있는 말은 아닌 것 같고 경상도 사람끼리만 통하는 그거라 말이죠. 우리가 들으면 오해하기 쉽죠. ‘당신 방금 욕했어요?’ ‘아니 이건 우리끼리 언약입니다.’ 우리끼리 계시예요. 괜히 오해해서 나는 욕 안했는데 왜 욕을 해? 뭐라고 씨브리쌌노. 입에 지끼는 대로. 경상도끼리의 덕담입니다. 덕담까지는 너무 심했다. 하여튼 좋은 소리는 아닌데 편하게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괜히 이방인들이 그걸 자기 맘대로 평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이죠.

오늘 구약을 언급하면서 우리는 두 가지를 언급해야 돼요. 구약과 오늘날 이방인과 유대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떻게 차이가 나는가? 두 번째는 구약 그 당시와 예수님 십자가 질 때 그 의미가 뭐냐? 서로 개념이 다 달라요. 첫째 것은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사고방식이 다르다는 것, 두 번째는 구약과 신약의 사고방식이 다르다는 것, 이러나저러나 우리는 다 다르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사람이죠.

그럴 때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이란 보따리 안에 방금 우리가 몰랐다고 제켜 놓은 구약도 알게 되고 몰랐다는 십자가 안에 있는 진정한 의미도 알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먼저 “내가 진리 때문에 왔다.” 하니까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 했거든요. 그런데 그전에 이미 예수님께서 진리대로 살고 있었던 거예요. 예수님 자체가 진리인데 그걸 못 알아본다면 진리가 무엇이냐의 답변을 할 도리가 없어요. 예수님은 이미 이야기했잖아요. “내가 곧 진리요,” 내가 곧 진리요, 라는 말을 했으면 진리가 무엇이냐? 라는 질문을 할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진리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내가 어떻게 하면 진리를 압니까? 하는 질문인데 그것은 “내가 곧 진리다.” 함은 니는 진리가 아니라는 뜻이거든요. 진리 아닌 것이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도 진리가 아닌 거예요. 그러니까 니는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진리 모르는 채로 그냥 진리 모르는 채로 살면 된다. 그게 바로 진리가 되는 거예요. 모르고 살면 돼요.

문제는 모르고 살면서 안다고 생각하고 자책하고 뛰어내리려 하고 ‘이건 내가 사는 것도 아니야.’ 니가 뭘 안다고 인생에 대해서 그렇게 책잡고 니 인생에 대해서 악담을 퍼붓느냐 말이죠. 내 인생이라 하거든요. 주님은 ‘니 인생 아니거든’ 모르는 것 중에 하나 포함된 게 내 인생은 내 인생, 그것도 모르고 하는 거예요.

구약은 내 인생은 내 인생이 아니다, 가 구약 사람들의 사고방식입니다. 간단하죠. 대단히 간단한 거예요. 구약을 모르고 이스라엘 사람을 모르는 사람은 내 인생은 내 인생이니까 어떤 하나님을 믿을까, 그래야 내 신세가 좋아질까, 하지만 구약은 내 신세 좋아지라고 여호와 믿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만들어 낸 신세, 인생을 그들은 그냥 살아갈 뿐입니다.

이걸 로마서 9장에서는 토기장이 비유로서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토기장이가 토기를 만들 때 항상 토기는 토기장이가 따로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토기로서 존재해야 된다는 거예요. ‘나 토기니까 이젠 내 맘대로 담을 거야.’ 가 안 돼요. 하나님의 진노를 위한 그릇은 진노가 담기라는 것을 알아야 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담기는 그릇은 사랑이 담기는 걸 알아야 요게 이방인 관점이 아니고 성령 받은 구약 관점입니다. 물론 신약 관점도 되는데 그건 설명이 필요하겠죠. 일단은 구약으로 가서 십자가로 가야 되기 때문에 일단 우리가 구약으로 갑시다. 가기 전에 먼저 우리가 해야 될 것은 내가 우선이 아니고 나를 만드신 분의 우선으로 세상은 돌아간다고 부터 먼저 정립합시다.

자, 그런데 이렇게 정립하는데 방해되는 요소가 있어요. 뭐가 방해되느냐 하면 바로 의사들이 방해돼요. 갑자기 의사 이야기를 왜 하느냐 이렇습니다. 의사들이 사람을 진찰하면서 시각적으로 눈에 보이는 대로 관찰해요. 그리고 사람의 배를 갈라놓고 그걸 가르는 이유가 보겠다는 겁니다. 어디가 잘못 됐는지 동맥이 끊어졌는지 정맥이 막혔는지 보겠다는 거예요. 그게 사람에 의해서 사람을 해부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바로 보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하나님의 진리는 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언약으로, 말씀으로 해부를 해야 되는데 이방민족들은 계시고, 말씀이고, 언약이 없기 때문에 기껏 보는 것으로 보는데, 보는 것으로 인간을 해부하고 다루겠다고 하는 대표적인 직업이 뭐냐, 의사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의사만 되는 그러한 인식이 방송을 통해서, TV를 통해서, 나는 TV 나오면서 가운을 왜 입는지 이해가 안 돼요. 병원에서는 병균, 이러한 것이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가운 입는 것이 이해가 되는데 방송국 카메라 앞에서 가운을 왜 입습니까? 어쨌든 가운을 입고 병원에서 자기가 하는 이야기를 방송에 나와서 하게 됩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오늘 아침에 운동을 하는데 여기 앞에 오는데 우리교회서 100미터만 가면 거기에 아침 되면 노인네들이 모여 있어요. 운동하는 시설들이 다 돼 있고 나무들이 우거져 있어서 멋집니다. 이 동네서 제일 좋은 시설이니까 어머니도 아침에 거기 가셨다 오시는 것 같아요. 

팔십 다섯 쯤 되는 할머니인데 운동기구에 매달려 운동하면서 육십 다섯 쯤 되는 할머니보고 물어요. ‘내가 지금 운동하는 자세가 괜찮아요?’ 묻고 있더라 말이죠. 그래서 내가 지나가면서 들었으니까, 육십 다섯 쯤 되는 할머니가 하는 말이 그 할머니가 지혜로워요. ‘그 나이에 운동하는 자세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이렇게 기구 매달려서 운동하면 이게 자세 관계없이 이 자체도 축복이고 참 건강하신데 거기다 뭘 더 건강하기를…’  TV 보니까 운동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하여튼 TV가 사람을 망쳐요. 이 TV가 의사가 하는 이야기를 그대로 듣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의사는 인간을 말씀으로 해부하는 게 아니고 시각적으로 해부해요. 시각적으로 해부해서 째보면 그게 인간입니까? 그래서 천국 갑니까? 영생 얻습니까? 의사가 하는 말은 진리가 아니에요. 그러면 이방민족들이 아는 범위 한계에 속합니다. 구약은 사람을 해부할 때 의사가 눈으로 보는 것처럼 해부하는 게 아닙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이방여자거든요. 이방여자가 예수께 하는 말이 ‘예수여, 제 딸이 병들었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나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왔지, 이방을 위해서 온 것이 아니다.”라고 했어요. 이방민족과 이스라엘 민족을 나누는 겁니다. 딱 예수님께서 나눠요. 그러니까 그 여인이 하는 말이 주님 말에 동의해요. ‘맞습니다. 옳습니다. 저는 구약 입장에서 볼 때 저는 그냥 개 같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개도 주인의 빵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가 있다면 그걸로 먹어도 족합니다. 왜, 개는 개 입장에서 상에 올라가서 밥상 차려달라고는 못하고 그냥 주인이 먹는 거, 유대인들이 먹다가 실수해서 굴러 떨어진 그런 빵조각만 있어도 그것만 먹어도 구약 성경에 들어오신 하나님의 영생의 축복과 약속에 우리가 맛을 보고 끼어들 수가 있습니다.‘라고 그 여인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여인이 자기를 분석할 때 맥박 쟀습니까? 혈압 재는 거예요? 엑스레이 찍었습니까? 그래서 진정 내가 어떤 존재라는 것을 그래서 알았습니까? 구약 말씀의 입장에서 분해해 보니까 나는 바로 개며 개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있다면 바로 원래 아들들이 진리를 무가치하게 ‘에이 씨.’ 하고 갖다 버릴 때 ‘어이쿠, 웬 떡이고?’ 하고 그걸 주워 먹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영생의 쪼가리고, 영생에는 쪼가리만 먹어도 생명나무 먹은 걸로 간주해서 영생을 얻으니까 제가 이런 횡재가 어디 있습니까? 라고 할 때 “오늘 너에게 구원이 주어졌다. 니 딸이 낫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니가 구원받았어.” 라고 한 거예요.

여러분, 이제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는 방식을 알겠죠? 먼저는 유대인입니다. 먼저는 유대인이고 유대인이 ‘에이 씨, 이 쓸데없는 거.’ 하고 버리거든 뚜르르 구르거든 선착순으로 왁 달려들어서 개의 입장에서 그걸 주워 먹으면 되는 거예요.

이러한 생각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의 입장에서 세상의 인간들을 봤다는 거예요. 이건 눈으로 보는 게 아니고 말씀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모든 게 언약대로 순서대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첫 번째는 유대인이고 나중에는 헬라인이고, 유대인이 싫다고 한다면 그 나머지, TO(table of organization:인원편성표)를 이방인이 차지하는 겁니다. 로마서 11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자, 그렇다면 좀 더 진전해서 오늘 본문에 봅시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이스라엘에 있어서 내용은 뭐냐 하면 장차 너희들이 포로 잡혀서 되돌아 올 것이라 했어요. 돌아오게 되면 그때는 너희들이 정신 차려서 나쁜 짓 안 하고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면서 그때는 남은 자들, 13절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치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궤휼한 혀가 없으며 먹으며 누우나 놀라게 할 자가 없으리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보호하는 그러한 진짜 이스라엘이 될 것이다. 그런 내용입니다. 자 이 내용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상당히 어렵지 않게 느껴지는데, 이게 사실은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예요. 왜 어려운 이야기냐 하면 이스라엘은, 구약은 자기중심이 아니에요. 자기 구원중심이 아닙니다. 무슨 중심이냐, 하나님이 설치해 놓은 중심 이예요. 뭘 설치했는가? 땅을 설치하고 언약을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는 만나 같은 양식들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제사장 준비하고 성전 준비하고 이런 걸 준비했거든요.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아버지가 뭘 하느냐 하면 아버지가 직장에서 선물을 받은 만년필을 가져왔어요. 만년필을 가져오니까 아이가 ‘이거 아버지가 가져온 만년필을 내가 한번 써봐야지.‘ 써보니까 잘 나오더란 말이죠. 그래서 저녁에 아빠가 오니까 ’아빠 고마워, 아빠가 준 만년필이 이렇게 잘 나오는데 고마워요. 잘 썼어요.‘ 하니까 아빠가 꿀밤을 때리면서 ’나는 니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받은 만년필이 더 중요해. 그런데 니는 잘못 생각해서 마치 나를 위해서 아버지가 만년필을 가져 온 것처럼 니가 왜 그렇게 곡해하느냐?‘ 이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설치한 게 더 중요한데 유대인들은 오해하기를 내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땅을 주었죠. 언약을 주었죠. 하나님이 양식과 만나를 주었죠. 그리고 이방인들을 물리치게 해줬죠. 이게 전부 다 누구 좋아라고 한 거냐 하면 하나님의 본인 이름, 본인 좋아라고 한 건데 그들은 ‘언젠가 우리가 이 땅에 돌아오게 되면 하나님 제대로 섬겨야지.’ 이렇게 오해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그때에 내게 구하는 백성들 곧 내가 흩은 자의 딸이 구스 하수 건너편에서부터 예물을 가지고 와서 내게 드릴지라” 이렇게 돼 있을 때 이걸 구약 적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이 주신 그 땅은 여전히 그 땅이 있고 자기 백성은 잠시 잘못됐기 때문에 바벨론, 앗수르 포로 잡혀 가고, 포로 잡혀 간 그 사람들이 정신 차려서 예물 가지고 이 땅에 돌아오면, 그때는 삼세판으로 해서 전에는 실패했지만 이제는 제대로 해서 이 땅에서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된다.‘라고 그렇게 해석을 하는데 이것이 신약의 십자가에 의하면 그것이 잘못된 해석이 되는 겁니다.

구약을 해석하면서 하나님의 땅과 하나님의 이름과 성전과 백성이란 개념이 더 이상 구약적인 설치된 장치, 땅이라든지, 백성, 개념은 그 개념을 써도 그 성취는 신약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구약의 유대인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땅? 돌아올 땅은 없습니다. 남은 자? 저희끼리 주님을 위해서 사세요. 한다고 남은 자 아닙니다. 없어요. 이스라엘 백성 깨지면 그 설치도 같이 깨져서 없어요. 그러면 땅은? 하늘에 있어요. 백성은? 지금 하늘에 있어요. 하늘에서 신부 내려옵니다. 구원은 말씀 지키는 게 아니에요. 하늘에서 성령이 내려와서 십자가를 알게 해서 그 십자가로 용서 받은 자만 여기 남은 자가 돼요. 이거 제 맘대로 해석하는 거 아닙니다. 오해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바울이 편지에서 그렇게 이야기해요. 사도바울이 로마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이런 편지에서 구약을 해석하면서 사도행전도 마찬가지고, 구약을 해석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었다 하는 그걸 말하는 거예요.

그 이유를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존에 설치된 거, 땅과 백성들, 그걸 없앨 때에 그냥 없애는 것이 아니고 그 심판하는 출구가 있어요. 그 출구가 뭐냐, 성전, 하늘에 올라가는 성전에서 심판의 능력이 와서 자기 백성을 심판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뭐냐 하면, 신약에서는 구원하는 구멍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그 능력이 그 옛날에 이스라엘을 심판했던 그 심판의 능력에서 자비와 사랑이 나와요. 사랑은 최종적으로만 나오게 돼 있어요. 중간에는 사랑이 안 나오고 마지막 때는 온전한 사랑이 나오는데 그 온전한 사랑은 주님께서 심판할 수밖에 없는 그 기준이 확정돼 있고 확정된 기준에 의해서 모든 인간은 죄인이고 그 죄인에 의해서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너희들 모든 인간은 다 심판받아 마땅하지?’라고 분명히 다짐을 받아 놓고 그 다음에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지옥 가야 될 우리가 사랑을 입어서 구원 받는 식으로만 남은 자가 형성되는 겁니다. 이게 신약 적 방식 이예요. 왜, 우리는 어차피 개니까. 어차피 이방인이니까.

그러면 뭐만 사느냐, 하나님의 계시만 계속 완성돼요. 하나님의 계시만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생생하게 살아있는 겁니다. 그것을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옛날 언약은 너희들이 실패할 수밖에 없지만 새 언약에는 실패라는 게 없습니다. 왜냐 하면 우리가 지키면 실패인데 개 같은 우리가 지키면 개 같은 것 밖에 안 되는데, 주님이 지켜서 우리에게 은사라는 선물로 주시기 때문에 이미 주신 것 자체가 실패라는 게 성립이 되질 않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남은 자는 뭐냐, 신약에 보면 오늘날 예수님에 의해서 부름을 받은 자, 그들만이 스바냐 예언을 이루는 진실한 교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구약 성도도 되지 못하고 주님은 알 길이 없었던 우리들, 성령 받고 보니 구약의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처음이고 마지막이고 시작부터 온전한 것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안에 주님 사랑이 있고 용서가 있음을 우리는 세상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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