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서

다니엘서8강-이득없는 계시121115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3. 6. 9. 09:44

 

2012-11-16 06:41:36 조회 : 426         
이득 없는 계시 121115 이름 : 이근호 (IP:117.55.14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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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례 (IP:203.♡.41.16) 12-11-23 08:16 
가락교회-다니엘  6장(이득 없는 계시)121115-8강a -이 근호 목사

제 8강a

6장부터 하겠습니다. 6장에 보면 다리오 왕이 나오죠. 다리오 왕, BC220년 경, 서기 이전 220년 경 같으면 그때 예루살렘에는 뭐를 했느냐 하면, 예루살렘에는 학개가 와서 14년간 중단된 성전을 다시 수축하려고 시도하던 그때쯤 돼요. 학개란 선지자는 어디서 왔는가, 바로 바사나라에서 왔거든요. 바사나라는 또 뭐냐, 바사 나라에 유명한 왕이 있어요. 아하수에로 왕이라고 있거든요. 그건 그 후대고, 초반에 다리오 왕 시대인데, 고레스 왕 다음에 칸비세스, 다리오 왕, 그렇게 되는데 여기에 “다리오가 자기의 심원대로 방백 일백 이십명을 세워 전국을 통치하게 하고” 이렇게 통치하게 한다 했잖아요.

역사적으로 보면 총독이 한 이십 명이 돼요. 총독들이 이십 명을 깔아놓고 총독들이 세금 받아서 그렇게 나라를 통치하게 돼 있어요. 그런데 옛날 역사를 보게 되면 나라가 되던 국가가 되던 전부 다 뭘 해야 되느냐 하면 이윤, 이득이 남아야 나라가 됩니다. 실질적인 이득이 없으면 나라가 안 돼요. 나라라 하는 것은 한번 가진 것 가지고 우려먹는 식으로 되는 게 나라가 아니고 국가라 하는 것은 계속해서 이윤을 남겨줘야 됩니다. 나라도 회사하고 똑같아요.

만약에 나라의 왕이 돼서 나라에 대해서 이익을 제공하기 못하면 백성들이나, 특히 옛날에는 백성보다 더 무서운 세력들이 있습니다. 토호 귀족들이 있습니다. 이게 옛날 나라하고 요즘 국가하고 차이점이 그게 있습니다. 이걸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봉건국가라 합니다. 밑에 토속 귀족들이 있습니다. 삼국시대 선덕여왕 시대 때는 화백제도라 해서 토속들이 모여서 회의할 때 만장일치가 돼야 그래야 그 다음에 신라에서 왕이 일을 추진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왕이 추진할 때 항상 토호세력들이나 귀족들에게 뭐냐 하면 왕이 어떤 설치를 해서 이윤을 남겨줘야 돼요. 왕이 주로 하는 일이 뭐냐 하면 관개치수 사업을 했어요. 옛날에는 농경시대기 때문에 농사를 지었거든요. 그래서 홍수를 방어하고 또는 가뭄을 대비해서 이런 저수시설을 하게 되면 귀족들은 거기에 대해서 ‘야, 우리가 이번에 뽑은 왕은 괜찮은 왕이다. 계속 똑똑한 아들 둬서 계속 왕 하소서.’ 해서 세습제로 밀어붙이는 겁니다.

그러니까 왕은 이렇게 맛있는 거나 먹고 맛사지나 받고 즐기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하나의 기업의 회장으로서, 사장으로서 신경을 써서 해야 돼요. 그런데 이 치수사업을 하는 중에도 더 큰 사업이 뭐냐 하면 전쟁을 해야 됩니다. 전쟁이란 게 뭐냐 하면 깡패예요. 약한 것에 가서 뺏어 와야 됩니다. 왜냐 하면 옛날에는 개간을 하는데 한계가 있어요. 나무 베는 트랙터도 없고 하니까 항상 개간을 해놔야 이게 농사를 질 수 있는데 우리가 하지 않고 옆  쪽이 농토가 옥토다. 그러면 뺏어서 그걸 뺏는데 앞장 선 장군들에게 먼저 나눠주고 백성들에게 나눠주면 ‘아, 역시 우리 왕은 미래 지향적이다.’ 해서 계속해서 왕으로서 인정을 받습니다.

만약에 왕이 그것을 못하면 그 주변에 있는 귀족들한테 암살당합니다. 그게 바로 이 다리오 왕 때 여기는 방백 일백 이십 명을 세웠죠? 그래서 이것이 총독 일백 이십 명이 토호 귀족일 수 있고 성경은 정치적인 서술이 아니니까 어쨌든 간에 일백 이십 명을 세워 전국을 통치하는데, 여러분들 창세기 끝부분에 요셉이 몇 인자였죠? 바로 바로 밑이 요셉이잖아요. 요셉이 전국에 창고를 지어서 나중의 가뭄을 대비해서 막대한 예지를 가지고 곡식을 저장해 놨는데, 주변의 있는 나라들이 가뭄들을 때 막대한 이윤을 남깁니다. 요셉이 장사를 잘해서 애굽의 국가의 재산이 불어나게 해주니까 바로는 저절로 존경을 받고, 존경받을 때 그냥 받는다 하지 않고 신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이런 축복이 우리나라에 주어졌습니다. 당신은 그냥 사람이 아니고 신의 발바닥입니다. 신은 위에 계시고 인간은 밑에 있으니까 밑에서 위를 바라볼 때 신을 바라보면 신의 발바닥이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뭐로 본다? 신의 일부로 보는 거예요. 그럴 때 그 왕은 최고의 명예를 얻는 겁니다. 자기가 하는 모든 것은 그 자체가 법이 돼요. 그런데 왕으로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그렇게 신으로 행세해서 신의 값을 해야 돼요. 무슨 값이냐 하면 국가 전체의 이익을 남겨야 됩니다.

그런데 다니엘 6장을 하면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뭐냐 하면, 다니엘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국가에 이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국가에 이득이 없죠. 그러니까 성경 자체가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드는 게 뭐냐 하면 모든 사람은 항상 자기에게 이익이 있고 그리고 수입이 있는 경우는 우리는 그걸 축복이라 이야기하고 또는 감사할 마음 준비가 돼 있는데 다니엘 같은 경우에는 전혀 그 나라에 이익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익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으나마나 한 존재고 그럼 쓸데없는 존재인데 모든 것이 이익을 얻고자 하는 그러한 시대에 있어서 쓸데없는 이익을 주지 못하는 사람의 그런 이야기는 다 부실한 이야기처럼 취급될 것이고 있으나마나 한 존재가 되는데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우리 인생에, 또는 이 세상에 개입했을 때 우리가 그런 하나님을 감사함으로 그 하나님의 뜻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받기가 곤란하죠.

제가 하나님 믿었습니다. 믿고 난 뒤에 하나님이 저한테 이익 준 게 얼마나 됩니까? 한번 따져 봅시다.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그때는 하나님 자리에 우리가 마귀를 믿고 있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왜, 성경과 위배되기 때문에

그래서 여기서 한번 정리해 봅시다. 진짜 하나님은 전혀 우리가 기대하는 이익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사실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 우리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까? 그것은 우리가 이익을 받을 자격이 애초부터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성경 말씀은 우리가 더 소유하려고 축복이란 이름으로 더 끌어 모으려는 그런 자세로 나올 때, 바로 그 자세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세가 아니고, 마귀가 원하는 자세라는 것을 꼬집어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계시를 주신다는 겁니다.

그럼 일반교인들이 교회 갈 때 어떤 마음자세가 돼야 됩니까? ‘주여, 저는 또 뭐가 문제가 많습니까?’라는 마음가짐으로 교회 와야 되는데, 한국교회는 어때요? 벌써 교회 문 열 때부터 어떻게 합니까? ‘교회 왔습니다. 보너스 내놓으세요.’ 벌써 이익과 손해 보면 안 나올 수가 있습니다. 하고 협박 비슷하게 남들은 안 가는 교회를 내가 갔으니까, 남들은 안 믿는 하나님을 내가 믿었으니까 믿은 만큼 내 보상을 해줘야 다른 사람한테 전도가 막히지 않고 다른 사람한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마음껏 과시하고, 그러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나도 기분 좋고 사람들도 덩달아 기분 좋고, 우리가 이렇게 동업하면 장사가 잘 되지 않습니까? 이런 마음가짐으로 교회 가는 거예요. 목사들은 거기에 맞춰서 ‘이렇게 해서 누구 이익 봤습니다.’라는 이야기를 설교에 온 도배를 해버리고.

사도바울은 십자가 언급하면서 예수님 오신 것은 죽기까지 복종했다 했죠. 예수님이 죽기까지 복종해서 세속적으로 실질적으로 얻은 이익은 뭡니까? 아무것도 없죠. 이 세상 적으로 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서 얻은 이익은 뭡니까? 세상 것은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뭐 배고플 때 돌이 떡 되게 했다면 떡이라고 먹었죠. 그런데 그게 아니라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세상은 우리만 덜렁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뭔가에 포위 돼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것? 다른 하나님으로 섬기고 싶어 하는 것! 그러한 분위기 속에 참된 성도는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주변의 환경이 그렇게 녹녹지 않아요. 우리의 신앙을 돕지 않습니다. 이구동성으로 ‘교회 가서 이득 챙겨라. 만약에 교회 안 가면 있는 것도 날라 간다.’ 이런 협박 비슷한 분위기로 우리는 실제적으로 이익 챙기는 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 6장 오늘 내용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런 이익이 없는 숨어있는 하늘나라에서 다니엘이 툭! 하고 튀어나옵니다. 그렇다면 다리오 왕, 성경에는 다리오라고 돼 있는데 세상 역사에서는 다리우스, 다리우스 왕, 이 나라는 바사나라인데 바사나라는 페르샤라고 하는데 지금 어디냐 하면 이란입니다. 이란이라고 바뀐 것이 1900 년도 초반이고 그 전에는 페르시야였어요. 페르시야라는 것은 옛날 바사나라 영토를 다시 회복해 보겠다는 그런 정치적인 이념 때문에 페르시야라고 하다가 이란으로 바뀌었거든요. 이 바사나라의 영토가  어느 정도냐 하면 여기 터키 밑에 여기 지중해 있고요. 키프로스 크레타, 터키 밑에 지금 한참 내전 벌리고 있는 나라가 시리아인데 성경에서는 아람나라예요. 아람나라 밑에 가면 이게 북이스라엘인데 밑에 유다나라 합쳐서 이게 이스라엘! 북이스라엘 옆에 암몬이라는 나라가 있고 그 밑에 모압이라는 나라가 있고 그 밑에 에돔이란 나라가 있어요. 이쪽(에돔 우측)은 사막이고 그 우측에는 아라비아가 있습니다. 솔로몬 때 아라비아 여왕이 찾아왔죠. 암몬과 이스라엘 사이에 흐르는 강이 흐르는데 요단강이에요. 요단강은 2개의 호수 사이를 흐르는데 위에는 예수님께서 설교 많이 하셨던 갈릴리 바다예요. 밑에는 죽음의 바다라 해서 롯의 처가 소금기둥이 된 사해가 나오죠. 주일 오후 때 집사님이 왜 하필 소금기둥이냐 질문해서 설교로 연결시켜 했습니다.

바사, 페르시야 나라가 어디까지 점령했느냐 하면 이게 원래 페르시야 나라가 아니고 원래 그전에 바벨론 나라가 있었고 바벨론 나라 전에는 앗수르 나라가 있었어요. 앗수르, 세상적으로는 앗시리아, 앗수르에서 나라가 바벨론으로 바뀌고 바벨론을 누가 접수했는가, 바사가 접수하고 바사를 누가 점령했느냐 하면 바로 알렉산더가 세운 나라 헬라마케도니아, 헬라마케도니아가 어디냐 하면 지금의 그리스 나라예요. 위쪽에 반도가 있는데 아래쪽을 마케도니아, 위쪽을 아가야라 하고 여기 아테네, 스파르타, 고린도가 있는데, 이쪽 알렉산더 헬라가 전부를 다 점령했고 그래서 헬라마케도니아가 되었고, 이 바사나라는 총 200년 기원전 530년부터 330년까지 200년동안 점령해서 튼튼한 나라인데, 알렉산더한테 붙어서 한방에 올인해서 전쟁에 져서 다 날라 가 버렸어요. 요 헬라마케도니아 나라가 또 누구한테 접수 당하느냐 하면 마지막 최후의 제국 로마제국한테 당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 이야기가 다니엘 뒤에 나오거든요. 짐승 네 마리가 나오면서 이미 그 이야기가 성경 다니엘에 나오더라 말이죠. 그러면 성경에 나오는 이러한 이야기는 처음에 바벨론, 바사, 헬라마케도니아, 로마, 이래서 짐승이 네 개인데, 이 짐승 이야기 4개가 왜 성경에 나타나느냐 하면, 그건 세상 나라 짐승나라 설명하는 게 아니고, 예루살렘이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느냐 하는 것, 정작 하나님한테 관심 두고 신경 쓰는 것은 이런 나라가 아니고, 정작 하나님께서 심어놓은 나라, 그 나라가 뭐냐 하면 바로 유다나라인데요. 그게 왜 유다나라이냐, 우리가 알기로는 그걸 이스라엘이라 하잖아요. 그런데 제가 방금 이스라엘이라 하지 않고 무슨 나라라 했습니까? 유다나라라 했다고요. 아니 유다나라는 남쪽나라만 유다나라인데 남북 합해서 이스라엘이라 해야 옳지 않느냐 하는데, 그 나라를 제가 유다나라라고 한 것은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점점 더 세밀해지기 때문에 그래요.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북쪽 이스라엘을 포기하고 남쪽 유다나라를 챙기는 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시나리오, 계획서가 주어지기 때문에. 그 계획서를 언약이라 하는데 그 마지막 언약이 뭐냐, 그것이 다윗언약입니다. 다윗언약!

그럼 그 전에는 무슨 언약이냐, 그전에는 모세언약이죠. ①모세언약은 이스라엘 전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 언약이 사라지고 ②다윗이란 사람에게 준 언약은 오직 내 아들은 전체 이스라엘이 내 아들이 아니라, 오직 유다자손만 내 아들이 된다고, 아들 개념이 바뀝니다. 신기하죠. 그러다가 ③예수님이 오셔서 이제는 어느 집단이 아들이 아니고 오직 한명이 아들 이예요. 누가 아들입니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오직 예수님만 아들입니다. 이로써 한명으로서 아들은 끝나고 그 다음에 그 예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이 이제는 반대로 전체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유다가 아니고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전에 있던 이스라엘은 뭐고, 예수님 성령 받고 난 뒤에 이스라엘은 뭐냐, 전에 있는 것은 모형이라 하고, 성령 받아 새롭게 된 이스라엘은 이거는 실체라고 하는 겁니다.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건축 설계 사무소에 가면 설계사 책상에 모형이 있잖아요. 그 모형이 예쁘다고 그 안에 들어가서 살 수는 없는 문제입니다. 좁아서. 그런데 그걸 왜 만들어놨겠어요? 앞으로 내가 설계해서 완공되면 이 모습 나옵니다. 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구약에서는 설계도를 미리 만드는데 그 설계도는 재료가 뭐냐 하면(잘 들으세요.) 그 재료가 그 시대의 사람과 그 시대의 시간과 그 시대의 역사를 가지고 그 시대 사람들이 지었던 죄를 가지고 그런 모형을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 예수님 오시고 난 뒤의 인간의 죄는 옛날 구약 때 했던 그 죄하고 죄가 질이 달라요. 구약 때 죄는 뭐냐 하면 살인해야 살인죄고, 간음해야 간음죄고, 그 때는 안식일 어기면 죄고 십일조 안하면 죄고, 구약 때는 설계 사무소에 있는 모형에 있는 그 죄는 율법에 위반되면 다 죄가 되는 거예요. 십일조 안 하면 죄고, 안식일 안 지키면 죄고, 그리고 부모를 공경 안하면 죄고, 죄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뭐라 했습니까? 모형 이예요. 이제 실제로 모형을 완성해서 진짜 이스라엘이 오게 되면 무엇이 죄냐 하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게 바로 죄가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게 죄라 했잖아요. 이게 굉장히 어려운 말 이예요. 이걸 다른 말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자기의 행함을 기대하게 되면 그게 바로 죄가 됩니다. 왜냐 하면 오직 구원은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다 이뤘다는 것을, ‘내가 행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행해서 내가 구원받습니다.‘를 믿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가운데 뭐가 빠졌느냐 하면 ‘나 이것 행했습니다.’가 우리 구원에 전혀 보탬이 되거나 삽입되면 안 되고 그건 죄가 되기 때문에 빠져줘야 돼요. 방금 제가 이야기한 이야기가 너무너무 어려운 이야기예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나오는 답변은 한 개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해서 교회 되겠나?‘ 하는 이야기, 딱 그 이야기지, 딴 거 안 나와요. 그 이야기가 옳든 그르던 그건 문제가 아니고 그런 이야기해서 과연 교회가 유지가 되겠느냐, 딱 그 한 마디 나옵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죠. ‘당신은 그동안 예수를 믿은 게 아니고 눈에 보이는 교회를 믿었군요.’ 그럼 일곱 교회 지금 하나라도 있습니까? 없습니까? 일곱 교회 중에서 남아있는 교회 현재 하나도 없습니다. 왜, 터키는 대부분이 무슨 교입니까? 이슬람교죠. 일곱 교회가  지금 터키 지역이었는데 지금 없어요. 교회는 현재 우리가 아는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현재 교회는 등록하고 목사 데려다가 간판 걸고 헌금해서 부동산 매입해서 교육관 지으면 그걸 교회라 하잖아요. 성경에 그런 걸 교회라 한 적이 없어요.

교회는 뭐냐 하면 오직 성령이 임한 사람을 교회라 합니다. 왜 성경에 나온 그 명확한 개념은 놔두고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 개념을 자꾸 사용하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모르는 게 아니라 알죠. 사람들이 성령 안 받아도 천당 갈 수 있는 방법을 달라는 거예요. 성령 안 받고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성령은 십자가에서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십자가로 구원 됐습니다.’ 그걸 믿지 않고 천국 가는 방법은 없습니다. 못갑니다. 못 간다는 이야기를 해줘야 돼요. 교회에서! ‘오세요. 보내주겠습니다.’ 이러면 안 되고, ‘성령 없이는 육은 육으로 남기 때문에 성령 없이는 안 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해줘야 돼요. 괜히 교회라는 학원 다녀서 합격도 못하면 얼마나 섭섭합니까?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나라라 하는 것은 이득이 있어야 되는데 여기 다니엘의 존재는 어떤 이득도 그 나라에 제공하지 않습니다. 왜냐, 다니엘은 그 나라를 위한 사람이 아니고 숨어있는 모형, 숨어있는 하늘나라를 위해서 그 당시에 파견 근무하듯이 일종의 스파이, 바사나라의 스파이로서 가는 겁니다. 그렇다면 바벨론, 바사, 헬라, 그리고 헬라마케도니아, 그 다음에 로마는 결국은 그건 하나의 껍데기에 불과하고, 푸딩에 있어서 케이크라 하면 진짜 건포도는 빵 속에 숨어있어요. 다니엘처럼. 그리고 그 시대의 성도들처럼. 건포도 푸딩 알죠? 눈에 안 띄게 숨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심사는 그 바사나라, 헬라나라, 그런데 있는 게 아니고, 뭐에 있다? 그 안에 하나님이 심어 둔, 하나님의 신이 임한 다니엘 같은 사람한테 있거든요. 그러면 무엇이 짜그러 들어야 됩니까? 바벨론이 짜그러지고 바사나라가 짜그러지고 헬라나라가 짜그러지고 로마 나라가 망한다는 것은 무엇을 찾아내기 위함이죠? 그 안에 들어있는 진짜배기 이스라엘, 그걸 영어로 ramnants, 남은 자, 그 남은 자를 색출하고 뽑아내기 위한 작업으로서 하나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이 대한민국이 좋다, 나쁘다, 라고 할 것도 없고, 미국을 가도 미국을 부정하지 말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애써 부정할 이유가 없어요. 인큐베이터가 없으면 애는 자라지 않기 때문에. 그런데 신생아에게 인큐베이터는 아기에게 영양분을 공급하기 위한 인큐베이터라면, 성경에 나오는 인큐베이터는 뭐냐 하면 진짜 예수님이 주신 생명과 그리고 돈 벌어서 빵 사서 밥을 먹어서 얻고자 하는 목숨과의 그 차이를 보여주기 위한 인큐베이터, 그러니까 ‘~~는 아니거든.’이라고 말하기 위해서 아닌 것을 잔뜩 깔아놓는 그러한 역할이 바로 세상 나라가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의 기도 내용 중에 이런 게 있죠. “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너희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 이걸 진정성 있게 들으면 눈물 납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뭐라 하느냐, “우리는 고아네요” 예수님이 이야기합니다. “나는 너희들을 고아 같이 방치하지는 않겠다.” 그 말은 무엇입니까? ‘고아 맞다’는 이야깁니다. ‘네가 잘 봤어. 고아야. 너 어미 아비가 밥이나 먹여주고 술 먹으면 해장국은 끓여주는지는 모르겠지만 너의 마누라가, 그게 보호자가 아니야, 영적인 보호자는 진짜 하나님의 뜻을 거기다 쏘옥 심어놓고자 하는 모든 그 계통, 통로는 주변의 인물에서 오는 게 아니고 직접 너에게 하나님이 직접 너희를 관리하는 거예요.

지난 시간에도 했지만 “이미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는” 그 작업은 하나님이 직접 나서서 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심지어 구원받은 우리도 우리자신에게 그 작업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우리가 갓난아기처럼 살면 족합니다. 존재의 무게를 빼세요. 가볍게 삽시다. 내가 나를 내가 기대하는 이상형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분투노력 하지 맙시다. 그거는 자칫하면, 자칫한 게 아니고 당연히 그건 자기 의가 되고, 나중에 자기가 자기 구원받기 위해서 애썼던 모든 교회 다니고 봉사 헌금한 것, 전도한 것, 이것이 자기의 구원의 근거가 되는 줄 알고, 토대가 되는 줄 알고, 그렇게 복음과 위배되는, 십자가가 더 이상 쳐다보지 않고 자기 행한 것만 쳐다볼 수 있는 그런 위험도가 아주 강렬합니다. 그냥 맡기세요. 맡길 때가옵니다. 다니엘 세 친구처럼.

그리고 오늘 본문에 미리 이야기합니다. 오늘 본문에 다니엘처럼, 다니엘은 누구한테 맡겼느냐 하면 사자 굴에 있는 사자들에게 맡긴바 됩니다. 사자하고 다니엘하고 언제 친했다고, 안 친하죠. 그런데 바보 같은 사자가 멀뚱멀뚱, 일부러 달려 들으라고 굶겨놨는데 사자가 바보도 아니고 아이큐가 낮은 사자인지, 다니엘을 보고도 눈만 뜨고 있다 말이죠. 한 마리는 하품을 하고 있고, 먹기 싫다는 거예요. 주변에 있는 인물들은 그런 예상을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리오 왕은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었어요. 충신 다니엘을, 충신이란 다른 말로 뭡니까? 나라에 그만큼 공로를 했다 말이죠. 나라를 이끄는데 정치적인 지주가 되는 그런 다니엘을 내가 잘못 꼬임에 빠져서 내 손으로 죽이게 되다니, 잠도 못자고 벌벌 떨다가 아침에 가서 황급히 먼저 면회했잖아요.

‘다니엘아, 거기 잘 있나?’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다니엘 하는 말이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저를 살려냈네요.’라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이 대목이 6장 20절 21절 죽 나오는데, 이 대목을 보면서 여러분, 즐겁습니까? 아니면 스트레스 받습니까?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내 이야기라면 이건 화 날 이야깁니다. 왜 사람을 그렇게 간 떨어지게 만드느냐 말이죠. 여러분, 병 주고 약 주지 말고 병 없는 게 낫지 않을까요? 우리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십니까? 아예 고난 안 주고 늘 평안하게 살면 되지, 고난주고 기적적으로 살려주는 것, 기적적으로 살려주는 것도 간 떨어질 이야기다 말이죠. 그렇게 위태위태하게 해서 불안해서 하나님 믿겠습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것은 성도라 하는 것은 성도의 안정과 보존을 위해서 성도가 존재하는 게 아니고, 성도의 존재 이유는, 과연 하나님 살아있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내가 살만하다는 걸 증거 하는 게 아닙니다. ‘남은 죽어도 나는 살아나야 돼, 그것 때문에 성도가 있는 게 아니에요. 그건 일반 사람들한테 물었어요. 모든 세상 사람들은 세상은 멸망해도 자기는 살아있어야 된다고 우기는 인간들이예요. 그런데 성도만큼은 사나 죽으나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조치다. 살아계신 주님의 조치가 이렇다는 거예요. ’너희들한테 주님 안 보이지? 나를 봐라. 나 이렇게 곤궁에 빠졌고 나 기적적으로 살아가고 있잖아.‘ 그러니 주님께서는 죽이시기도 하시고 살리시는 분이라는 것을 몸소 자기가 시범 조교로 채택이 돼서 주님의 손에 놀아나고 있는 거예요. 성도가.

여기에 26절에 보면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라 내 나라 관할 아래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지니 그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변치 않으실 자시며 그 나라는 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그는 구원도 하시며” 그 다음에 뭐라고 하죠? “건져내기도 하시며” 건져내려면 이게 빠져야 되죠? 빠지면 자기 손으로 기어 올라오면 안 되잖아요.

이거 정리해 봅시다. 구원이란 절대로 내 손으로, 내 능력으로 구원되지 않는 상태임을 우리가 믿어야 됩니다. 구원이라 하는 것은 내가 십일조해서 십일조 한 복 온다. 이렇게 되면 안 돼요. 십일조를 퍼부었는데 돈 한 푼도 안 돌아오고 안 돌아온 게 아니고 올해 회사 망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뭘 요구했습니까? 십일조 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제안한 것이고, 십일조 그만큼 했으면 이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서 아들을 안 뺏어야 되잖아요. 십일조 한 것은 십일조 한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십일조 한 것을 받는 게 아니고 뭘 받기를 원합니까? 아브라함이 가장 아끼는 것, 다시 말해서 차라리 내가 죽을지언정 이 애는 다치면 안 된다는 그것, 그걸 주께서는 ‘이리 도, 이래 내놔.’ 경상도 말로 ‘인 도’ 이리 내놔, 이 뜻 이예요. ‘내 놔’ ‘이것만큼은’ ‘내 놔’ 내 놓는 방법도 그냥 주는 게 아니고 네 손으로 아주 회를 치듯이 ‘네 손으로 죽여라’

사랑 하는 자를 사람은 못 죽입니다. 사람은 누굴 죽이느냐 하면 마음속에 항상 살인이라 하는 것은 사랑 하는 자를 살인하는 게 아니고, 내가 꼴사나운 놈, 미운 놈, 요새 대통령 선거 때문에 미운 사람 한 둘이 아니죠. 미운 사람이 쥐도 새도 모르게 기차에 받히든지 교통사고가 나든지 우연을 가장해서 죽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하지만 그걸 죽인다는 것은 살려 달라 할 사람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만은 절대로 하나님이 죽이면 안 됩니다, 하는 것을 우리는 아침 눈 뜨면 늘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이여, 우리 애들하고 저 애들은 다치면 안 됩니다. 만약에 다치게 하면 나 하나님 안 믿을 거야.’ 이런 마음 자세로서 보람찬 하루 일과를 시작합니다.

교회 올 때도 성경책 들고 ‘하나님 성경책 들고 오는 것 사진 찍으세요. 내가 가는 이유는 내 자식 잘 되게 하기 위해 가는 것 아시죠?’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인간이 생각하는 이 모든 것이 이게 별나요. 이게 바사나라요. 이게 바벨론이고 로마입니다. 우리자신이 바로 로마시민이고 바벨론 시민인데 우리 속에 누가 있어야 돼요?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서 우리 뜻대로 말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예수님의 뜻대로 가니까 우리가 내가 할 수 없는 구원이 매일같이 발생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다니엘이 싸웠던 것처럼 우리는 매일같이 기독교와 싸워야 되고 교회와 싸워야 되고, 특히 나 자신과 매일같이 싸움이 일어나야 됩니다. ‘하나님 이익 주셔야 됩니다. 그래야 또 교회 갈 희망이 생깁니다. 만약 지금 이 어려운 환경을 더 어렵게 한다면 정말 제가 하나님 섬길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알아서 기세요. 알아서 잘 해주셔야 됩니다. 지금 바짝 장사 잘 되게 하시고 올려줘야 헌금도 두둑이 합니다. 하나님 아시죠?’ 이러한 나 자신, 이건 실질적인 이익이 없으면 하나님을 안 믿는다는 사실, 말을 달리하면 이익을 주는 분을 나의 신으로 나는 믿겠습니다. 나한테 입맛에 맞는, 나를 죽이는 하나님이 아니고 나를 살리는 경우에만 계속해서 믿을 용의가 돼 있다. 이러한 마음 자세,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죄인이란 뜻입니다.

또 정리하게 되면 구약에서의 죄라 하는 것은 그 시대상에서의 그들의 생존의 위협을 가하는 신은 나쁜 신이고, 생존에 유리하면 좋은 신이라고 믿는 이것이 바로 죄가 된다는 겁니다. 왜 자기 자신이 제일 소중하기 때문에.

그런데 신약에서의 죄는 뭡니까? 자기를 미워하지 않고 자기를 부인하지 아니하고 그게 바로 죄죠.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뭘 받을 것이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말을 나부터 먼저 적용시키는 사람, 그걸 적용 안 시키면 죄가 돼요. 그런데 우리는 아침이 이상해. 아침에 눈만 뜨면 우리는 적용을 뭐로 합니까? ‘나부터 살고 봅시다. 하나님.‘부터 나오는 거예요.

아침에 큐티하는 이유가 뭔데요? 새벽 기도 나오는 이유가 뭡니까? 다 나 잘되기 위해서 하는 거 아닙니까? 왜, 나는 소중하니까. 나는 소중하니까, 옆집이 소중한 게 아니고 내가 더 소중하니까.

다니엘 6장에 모든 주어진 환경이라는 것은 신약 성경에 있어야 될 오늘날 우리에게 일어날 일을 모형으로 그 시대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 말은 굉장히 간단하지만 이걸 설명하면 이렇게 긴 겁니다.

자, 그러면 구체적으로 한번 들어가 봅시다. 아까 이야기했는데 후딱 지나가서 잊어 버렸죠?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인큐베이터로 보는데 그건 중요한 것은 따로 있기 때문에, 자기 백성이 중요하다 했죠. 왜 자기 백성이 중요하냐, 자기 백성 안에 누가 들어있기 때문에? 장차 오실 예수님이 들어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제일 중요해요. 예수님을 위하여 우리가 있어요.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이런 말씀 있어요. “이제 누구든지 우리 가운데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이 없다.” 했죠. “우리는 더 이상 자기를 위해서 살지 말고 나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을 위해서 살게 함이라“ 고린도후서 5장 14절부터 17절까지 보면 그게 바로 새로운 ‘피조물이라. 예수 믿으십니까?’ ‘예.’ ‘그러면 당신 위해서 살지 않겠네요.’하고 말이 같은 내용의 말이어야 한다 이 말이죠. 그 말은 뭐냐 하면 뭐를 탈락시키기 위함입니까? ‘예수님이 나한테 잘해주기 때문에 예수 사랑합니다.’라는 자는 탈락될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까발려주는 거예요. 진짜 천국은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는 사람만이 갈 수 있는 곳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아무도 그 말씀 지킬 위인은 없죠. 그렇기 때문에 아까 이야기했지만 우리 힘으로 안 되는 것을 주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안 되는 걸 되게 하는 거예요.  여러분, 좁은 길 갑시다. 우리가 좁은 길을 왜 가야 돼요? 좁은 길이 좋은 길 같으면 자기 혼자 안 가겠죠. 많은 사람들이 찾겠죠. 그런데 좁은 길 특징이 뭐냐 하면 찾는 이가 없어요. 그러면 그 길로 가면 외롭잖아요. 우리 복음 아는 사람들이 저보고 늘 이야기하는 게 뭡니까? ‘목사님, 정말 외롭습니다. 이야기할 상대도 없습니다.’ 그 이야기 많이 듣게 됩니다. 누구하고 이야기해도 소통이 안 돼요.

그런데 제가 듣기에는 지금 자랑하고 있는 거예요. ‘목사님, 아유, 웬 은혠지 모르겠어요. 동창생이고 친구고 아들이고 자식이고 남편이고 다 떠나버리고 이젠 나만 가고 있어요. 웬 은혜 웬 떡인지 모르겠어요. 정말. 말씀이 이렇게 실현되다니.’ 이런 식으로 자랑하는 것으로. 그런 자랑은 해도 괜찮습니다. 왜, 십자가만 자랑하니까. 이게 인력으로 안 됩니다. 항상 거짓 선지자는 많은 사람들이 인정해야 그게 진리답다고 가르쳐요. 예수님은 열두 제자 다 떠나버렸는데.

그래서 항상 다니엘 하나 솎아내기 위해서, 다니엘은 아무것도 안 해요. 그런데 주변 환경이, 분위기가, 아까 인큐베이터라 했죠? 분위기가 벌써 움직여 가면서 다니엘 죽이기에 들어갑니다. 영화 ‘라이온 일 병 구하기’라는 게 있잖아요. 이건 반대입니다. 주변은 다니엘 죽이기로 나오는데 그런 제목을 영화제목을 단다면 ‘다니엘 살리기’입니다. ‘다니엘 구하기’ 그게 바로 구원이라는 겁니다.

그럼 한번 일단 적어볼게요. ➀번 모든 것은 그냥 평범하다. 조용해요. 그런데 드디어 하나님께서 작업을 시작합니다. 작업을 하게 되면, 여기 다니엘이 있다면 ➁ 다니엘 빼놓고 나머지 사람들은 뭐로 변하냐, 이게 바로 애굽으로 변합니다. ➂ 다니엘을 뽑아내면 출애굽이 되는 겁니다.

처음에 히브리인들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애굽에서 나왔죠. 그 다음이 되면 이스라엘에서 이스라엘이 나와야 됩니다. 왜, 이미 기존의 이스라엘은 이미 애굽화 되었기 때문에, 그런데 기존의 이스라엘이 애굽화 되는 것도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지는 거예요. 언약이란 말이 어렵지만 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이렇게 자꾸 주어지는 것은, 기존의 언약을 지켰다고 해서 사람들이 자부심을 갖게 돼요. 그러면 ‘기존의 법대로 내가 안식일 지켰으니까 난 죄 없다.’라고 하면서 마음은 뭐냐. ‘이 정도 말씀 지켰으니까 세상 것도 좀 주셔야죠.’라고 마음이 말씀 지켰다는 걸 근거로 해서 정작 내가 진짜 음흉하게 기대하는 것, 희망하고 소망하는 것, 그것 달라고 손을 내밀 때 손을 치기 위해서 새로운 언약이 집어 들어갑니다. 집어 들어가면 ‘하아, 고것도 죄였구나.’가 되는 거예요.

이 새로운 언약이 들어갈 때 등장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희생당해야 될 사사들과 그리고 선지자, 사무엘, 다윗, 사사들, 그리고 다말, 룻,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우리아 장군, 다윗은 자기가 다윗언약에 의해서 하나님의 아들이고 이제는 왕이니까 ‘으흠’ 하고 암몬나라, 암몬나라는 어디쯤 된다고요? 바로 시리아 밑에, 아람나라 밑에 암몬이고 그 밑에 모압이고 그 밑에 에돔이라 했죠. 자꾸 되풀이 돼야 돼요.

암몬 나라하고 우리아 장군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전쟁하고 있는데, 다윗은 할 일이 없어서 위에서 내다보니까 자기 밑에 어떤 여인이 뒤태가 장난이 아니죠. 잘 빠진 여자가 옷을 벗고 목욕을 하더라 말이죠. 그러니까 다윗의 관심사는 이스라엘을 어떻게 하나님 뜻으로 하느냐 하는 것은 날라 가 버렸어요. 왜, 남자니까. 나는 이스라엘의 왕이다. 나는 cia국장이다. 나는 아프가니스탄의 총사령이다. 백날 해도 남자니까, 남자니까 하나님께서는 총 사령관 cia국장을 부르는 게 아니고 ‘너는 남자였었어.’ 그걸 지적하는 겁니다. 나는 목사니까, 장로니까, 하나님께서는 ‘웃기지 마라. 나는 그런 거 안 통한다. 너의 타고난 죄 성,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죄를 겨냥해서 할 때, 그 죄는 율법을 지킨다고 죄가 없어지는 게 아니고, 오히려 율법이라는 것이 핑계로 덧대기, 위장용으로 율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우리의 근본적인 죄, ’말씀을 지켰습니다. 뭐 했습니다.‘를 가지고 사실은 그런 걸 잡아당겨서 자기 속에 은근히 노리고 있는 바를 그냥 억지로 억누르는 용도로 그동안 하나님 말씀을 인간들이 사용한 거예요.

그런데 고맙게도 그 껍질을 요렇게 양파껍질처럼 벗겨주시는 이 고마움! 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이발소나 미장원에 가보세요. 내 것을 깎잖아요. 얼마나 나쁜 사람입니까? 하지만 이발소 앉아 있으면 얼마나 고맙습니까? 내가 못 깎는 이 머리를, 내 털인데, 내 털을 왜 지가 깎아요? 깎아 놓고 돈까지 내라 하니. 우리가 스스로 우리는 감추기 급급한데 바깥에서 들어온 게 더러운 게 아니고 속이 더럽잖아요. 그걸 말씀을 통해서 그야말로 골수를 쪼개듯이 다 쪼개서 너는 뭘 행해도 죄가 된다는 것을 노출시켜 주는 그 고마움, 그게 직접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면 그런 혜택이 없습니다.

목사입네, 장로입네,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어디 하늘나라가 그런 데가 어디 있어요? 성령이 기름을 부었니, 받았니 발랐니, 다~ 아무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그건 남 속이기 위한 용도예요. 그걸 제가 뭐라 했느냐, 경건한 사기꾼! 경건을 상품으로 해서 사기를 치는 거예요. 경건함, 다윗이 그런 사람입니다. 다윗언약이 주어짐으로 말미암아 암몬과의 전쟁은 전쟁도 아니에요. 진짜 장차 오실 메시아 전쟁은 바로 외부 전쟁이 아니고 무슨 전쟁? 바로 내 안에 애굽이 있는 거예요. 애굽에서 나와서 애굽이 아니고, 내 안에 애굽을 하나님께서 일부러 만들어 내요. 내 안에 애굽을 계속 만들어 내요.

그래서 구원이라 하는 것은 내 힘으로 나를 끄집어 낼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께서 원하는 것은 율법도 아니고 제사도, 번제도 아니라 상한 심령이 되기를 원해요. 상한 심령! 상한 심령을 잘 모르시겠거든 한번 실험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고기 같은 거나 고등어나 물고기 같은 걸 가지고 쓰레기통에 한 5일간만 놔둬 보세요. 그거 들춰보세요. 그게 먹을만 합니까? 상했죠? 더러워서 못 먹어요. 냄새가 지독하죠. 그게 우리 모습입니다. 그렇게 푹~ 익어줘야 돼요. 썩어줘야 그때 주께서 원하는 상한 심령 이예요.

십일조 다림질해서 드리면 받는 게 아니고 소프라노, 알토, 베이스, 테너 그런 찬양과 비파소리, 다윗의 노래 가락, 찬송가 몇 장 그런 찬양을 받는 게 아니고, 경건한 우리 예배, 파이프 오르간 그 소리 듣는 게 아니고 푹~ 익어서 이제는 내가 봐도 내가 꼴 보기 싫어,  내가 봐도 ‘인간아, 왜 사냐.’ 싶을 정도 일 때 그럴 경우에 가지고 나오세요. 고거 주님 앞에 가지고 나오시면 주께서 ‘오~ 잘 익었네.’ 하고 받으십니다.

왜 이게 중요하냐 하면 우리아 장군이 죽었잖아요. 왜 죽었습니까? 누가 죽인 거예요? 다윗이 죽였죠? 그러면 우리아 장군은 피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누굽니까? 다윗이죠. 평소에 다윗이 우리아 장군한테 감정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일체 없어요. 일체 죽일 마음도 없는데 그놈의 여편네 때문에 그것도 바로 사택이 바로 자기 앞에 있어서 목욕하는 바람에, 그걸 주님께서 주선을 한 겁니다. 가해자 될 마음도 없는 인간을 가해자로 만들어 버리고, 피해 입지도 않을 인간을 나 때문에 피해 입은 자로 만들어 버릴 때, 그게 바로 주님의 언약이 완성이 되는 거예요.

나는 태어나기도 전에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누군지 몰라요. 초등학교 때 교과서에 예수님이 안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미 십자가 지심으로서 이미 피해자가 먼저 등장하고 ‘누구야? 저분을 저렇게 죽이신 분이.’ 나중에 성령께서 주선해주시니까 가해자 속에 제가 가해자로서 엮여 있더라 말이죠. 그걸 저는 이렇게 이야기했죠. 그걸 주일 낮에 ‘조합‘이라 했죠. 둘이 죄인과 의인의 조합, 이걸 영어로 하면 SET,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딱 세트가 될 때 요 세트가 될 때, 바로 언약이 구성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장난감으로 사용하는 겁니다. ‘자, 한번 보자, 요 다리는 어디 몸통하고 맞는가 보자, 머리 되시는 것은 예수님이고, 요 예수님하고 맞는 팔 다리는 오! 철컥, 맞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 머리 되시고, 우리는 주님의 몸에 지체가 되고, 딱 딱 끼어 맞춰져요. 그런데 나만 지체가 된 줄 알고 으스대는데 보니까 오! 여기도, 오! 저기도, 같이 눈으로, 어떤 이는 발로, 다리로, 손가락으로 다양성 있게 똑같은 일을 하는 건 아닌데, 그 일을 하면서 ’나는 상한 심령일 뿐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십자가 앞에서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그런 사람들이 모였다면, 그것이 공간과 지리적인 모든 것의 한계를 넘어서서, 그것은 바로 하늘나라 총회! 그게 바로 교회! 하나 밖에 없는 교회! 몸도 하나요. 교회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그게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니까 변화 산에서 제자들이 누굴 만났습니까? 거기서 엘리야 만났잖아요. 거기서 또 모세 만났죠. 멀리 가지도 않았어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같이 예수님 앞에 서니까 먼저 죽었던 사람들도 그 자리에 다 있네. 이것을 예수님이 뭐라 하셨느냐, “너희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볼 자가 있느니라“
10분 쉽시다.
 이한례 (IP:203.♡.41.16) 12-11-25 15:29 
가락교회-다니엘  6장(이득 없는 계시)121115-8강b -이 근호 목사

제 8강b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 한 걸 요약하게 되면, 주변에 있는 나라 바사(페르시야)나라는 그 나라를 하나님이 살리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다니엘을 통해서 숨어있는 하나님의 뜻이 용출된다. 용출이란 말은 샘이 솟아오르는 거죠. 그런데 다니엘이 나서서 설치지는 않았는데 주변 환경이 쫀다 하죠. 다니엘로 하여금 가만있지 못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가 성령을 받고 예수님의 성도가 되었으면 나는 가만히 있는데 내가 전도한답시고 돌아다니고 이러는 게 아니고 가만히 있는데 주변에서 툭툭 쳐서 시비를 건다니까요. ‘그렇게 나쁜 짓해서 구원받겠느냐’ 하는 식으로. ‘그러면 당신은 착하십니까?’ 하면 ‘나는 착하지, 이런 것도 착하고 저런 것도 착하고, 난 예수 믿고 난 뒤에 착한 거밖에 안 했다고. 나쁜 건 생각도 안 했다고.’  죽죽 이렇게 나오죠. 그러면 성경 한번 봅시다, 하고 성경을 들이대죠. 누구든지 자기를 미워하라. ‘실례하지만 자기를 미워하십니까?’ ‘아니, 나는 내가 굉장히 좋은데. 나는 내가 너무 좋아.’ 그러면 성경에 요한복음 12장하고 어긋나잖아요. ‘자식을 사랑하십니까?’ ‘아휴, 우리 자식 사랑하지.’ 그러면 마태복음 10장에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에 어긋나고, ‘누구 남을 미워해 본 적 있습니까?’ ‘아휴, 가끔은 미워하죠.’ 그러면 살인했네요. ‘혹시 기도하면서 맹세한 적 있습니까?’ ‘맹세하죠. 맹세 하는 식으로 기도하죠.’ 그러면 예수님께서 ‘맹세하지 말라‘는 것은 위반 했네요.

아까 처음에는 분명히 나는 예수 믿고 착한 일만 했다고 했는데 성경 말씀 직접 들이대 보니까 전부 다 위반되는 거예요. ‘혹시 실례지만 아버지 장례식 때 장례 치렀습니까?’ ‘아버지 장례 치러야지.’ 그러면 예수님께서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례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했는데 아버지 장례를 왜 치릅니까? 죽은 자는 나둬버리지.

성경을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기껏 있는 게 윤리 도덕 밖에 모르는 거예요. 선조들에게 배웠던 윤리 도덕적으로 내가 이 정도 선하면 되겠고 이 정도 악하면 신자답고 이 정도 악하면 안 되겠다 하는 진짜가 아니고, 이것은 모형 때 옛날 율법 십계명 지키고 그런 때 있었는데, 그런 것은 새로운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나로 인하여 누군가 피해를 본다는 사실,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나 때문에 예수님이 대신 죽었다면 그 정도로 나는 악한 자잖아요. 그런데 잔소리만 해도 구원될 것 같은데 ‘너 같은 인간은 내가 대신 죽지 않으면 구원 안 돼.’ 왜, 너는 강도보다 더 못하니까. 이렇게 될 때, 비로소 그걸 하나의 조합이라 했습니다. 나는 죄인 되고 그분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분.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라디아서 6장 14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이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린도전서 2장 2절의 말씀. 사도바울이 한 말씀이죠.

바로 그것이 실제기 때문에 모형으로 지금 중간에서 드디어 다니엘을 잡으려고 작업을 시도하는 장면이 다니엘 6장입니다. 신하들이 법을 하나 만드는데 그 법은 순전히 다니엘 잡기입니다. 빼도 박도 못하게 만들어요.

왜 다니엘을 잡으려고 했을까요? 그것은 이게 또 왕이 나빴어요. 사람은 칭찬을 공개적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사람을 누가 잘한다고 하면 가만있어야지, 만인 앞에서 ‘다니엘 같은 사람 내가 못 봤다. 훌륭하다. 정말 다니엘은 인간의 지혜를 능가해.’ 이렇게 나오면 없는 적도 적을 만든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옛날 어른들 하는 거짓말 중에 이런 거짓말이 있죠.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 하는 그런 거짓말이 있어요. 몰라, 나는 자식이 하나 밖에 없으니까 내가 그 자식 예쁜 건 알고 있는데, 자식이 둘되면 아마 상호간에 비교하지 싶어요. 형은 공부 잘하는데 너는 왜 농땡이냐. 동생은 건강한데 형은 왜 아파? 이런 식으로. 자연적으로 편을 갈라요. 아빠 엄마가 대놓고 물어요.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아예 대놓고 묻잖아요. 그러니까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나 자신은 무조건 신이 돼요. 나는 모조건 절대자가 돼야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가장 기분이 좋아요.

우리가 기분이 좋을 때가 언제냐 하면 나는 독보적인 존재라고 누군가 부추겨줄 때 그 기쁨 때문에 우리는 교회 가잖아요. ‘집사님, 최곱니다.’ 그런 소리 한 마디에 우리는 그 교회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목회라는 게 간단하죠. 사람들 칭찬만 잘 해주면 목회 잘 되게 돼 있고 부흥되게 돼 있어요. 죄가 어떠니, 죄인이라 지적하는 이런 소리 하면 목회 안 됩니다. 그래서 칭찬 받기 위해서 경쟁적으로 헌금을 더 하게 하고 기도도 더 많이 하게 되고, 칭찬 받으려고. 목사 칭찬은 하나님 칭찬으로 등식을 그렇게 머리가 가도록 그런 식으로 유도를 하죠. 그런데 그것이 그 본인을 망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다리오 왕이 다니엘에 대해서 그렇게 특이하게 특급 대우를 해주니, 다른 신하들이 다니엘을 잡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그게 다니엘 법이죠. 그러면 다니엘 법은 뭐냐 하면 이게 참 중요한데요. 다니엘 법이 뭐냐, 다니엘이 하는 일 가운데서 다른 사람과 특이하게 다른 사람은 안 하는데 다니엘이 여호와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특이하게 하는 행위, 그걸 찾아내면 되겠죠.

예수님 이야깁니다. 제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은 인간을 둘로 나눕니다. 알곡과 가라지, 염소와 양, 좋은 고기 나쁜 고기, 왼쪽 오른 쪽, 전부 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둘로 나누시는데 그 나누는 기준이 뭘까요? 교회 가는 일, 그게 아니죠. 기준이 뭐예요? 그 기준이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보고 사람들이 왔다가 다 가버렸어요. 참 외롭죠.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아버지가 나에게 오게 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요한복음 6장 65절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그렇다면 그 기준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기준입니까? 아닙니까? 지금 그걸 묻는 거예요. 내가 ‘나는 염소 싫어, 양이 되고 싶어. 나는 지옥 가기 싫어. 천국 가고 싶어. 나는 알곡 되고 싶고 가라지 되기 싫어.‘ 라고 하는 그 기준을 우리가 실천에 옮길 수 있는 행위에 속합니까? 아니면 우리의 행위에서 벗어난 기준입니까? 벗어난 기준이죠. 왜냐 하면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가 되잖아요.

요한복음 9장에서 어떤 소경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제자들이 뭘 물어보느냐 하면 ‘저 사람이 소경 된 것은 자기 죄 때문입니까? 부모 죄 때문입니까?’ 물은 거예요. 제자들이 묻는 객관식 항목은 몇 개입니까? 달랑 2개죠. 자기 죄, 아니면 조상 죄, 설마 둘 중에 하나는 맞겠지, 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그 둘에 해당되지 않은 제 3의 항목을 제시하죠. 자기 죄도 아니고 조상 죄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소경되어야만 했다. 소경 되어서 태어나야만 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해놓고 실제적으로 영광이란 말이 뭐로 바뀝니까? 예수님께서 “실로암에 가서 이 진흙 바른 것을 씻어라.” 하죠. 예수님께서 하는 행위가 곧 뭐다? 아버지의 영광이 되는 거예요.

그걸 우리한테 한번 적용시켜 봅시다. ‘예수님이여 내가 천국 가도록 작정된 것이 제 뜻은 아니죠?’ ‘아니지.’ 그래야 맞다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주여, 나 지옥 가기 싫어요. 저 천국 갈 테니까 예수 믿게 해주세요. 손들게요.’ 이것은 예수 믿겠다고 손들고 교회 앞에 나오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잖아요. 그것은 기준이다? 기준 아니다? 그건 기준이 될 수 없는 겁니다. 세례 받는 것, 그리고 성 만찬 떡 먹고 하는 것, 이것은 우리가 예수 믿는 기준이 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평소에 우리가 교회서 하는 것이 기준이 될 수 없다면, 평소에 성도에게 발생되고 있는 숨어있는 하나님이 우리를 당겨주시는 기준은 뭐냐, 그게 성경에 나옵니다. 로마서 8장이예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수능 점수 안 나오거나, 교회 교인 수 줄거나 헌금 안 나오거나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리스도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 이유가 뭐냐 하면 정죄하지 않기 위해서. 따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줬기 때문에 그래요. ”누가 너를 송사하리요. 누가 너보고 죄 있다고 고소하리요.“ 그 딴 말에 속아 넘어가지 말라는 거예요.

사람이 가장 이기기 힘든 것은 뭐냐, 자기가 자기를 치는 것을 가장 이기기 힘들어요. ‘난 벌 받아야 돼. 난 벌 받아야 돼.’ 이런 짓, 이런 짓을 우리가 멈출 수 없습니다. ‘나 같은 인간 죽어도 마땅해. 이런 짓을 하다니.’ 이렇게 자책하는 것. 자책한다고 구원받습니까? 자책은 바리새인들이 잘했어요. ‘나는 부족합니다.’라고 바리새인들이 잘했다고요. 예수님께서 ‘나는 자책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회개하는 그런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의사가 병든 자라야 의사가 필요하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도 필요 없다.‘ 했거든요.

바리새인들은 옛날 법에 의해서 옛 술을 옛 부대에 담지만 내가 너희들의 술이라면 너희를 담는 부대는 사람들이 생각 못하는 어떤 죄인도 구원이 되는 새로운 부대를 마련했어요. 그 부대 담아서 우리를 구원하는 거예요. 그 대표적인 것이 강도, 세리가 구원받잖아요.

저는 신문지상에서 성폭행 범, 징역 25년 받은 걸 보게 되면, 저런 인간은 사형 정도가 아니고 아주 자근자근 밟아서 죽여야 돼요. 그래도 그 피해가족들 아픔을 씻을 수가 없죠. 저건 어떻게 쥐포를 만들어서 하든지 어떤 식으로 해도 저건 그냥 죽여서는 안 돼, 라고 할 때 주님께서 우리보고 뭐라 했습니까? 남을 비판하는 자는 똑같은 기준에 의해서 너를 비 판 한다. 다시 말해서 저 인간이 성폭행 한 것은 성폭행 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른 거예요. 그 사람이 구원받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 들어갈 수밖에 없고, 네가 아직 성폭행 안 한 것은 네가 아직까지 성폭행할 만한 지경에 아직 이르지 않았고, 그걸 위해서 네가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안 한 거죠. 거기에 우리는 모든 일에 대해서 범사에 감사해야 돼요. 어떤 점에서? 내가 바로 지옥 가도 마땅한 상한 심령 맞습니다.‘라는 그걸 끄집어내는 하나님의 그 작용에 우리가 놓여있는 겁니다.

자, 다니엘이 기도를 했는데 그 기도를 잡는 법에 의해서 잡혔습니다. 자, 여러분들이 만약 다니엘이라면 여기서 어떤 반응을 보이면 좋겠습니까? ➀번 하나님, 기도하지 말까요? 기도했으면 주께서 이렇게 수월하게 기도하도록 기적이란 축복을 주셔야지 이건 기도 했다는 것 때문에 이렇게 살인 당하게 됐으니까 하나님 책임지세요.‘ 이렇게 나올 수도 있고, ➁번 나라 법이 있으니까 나라 법도 법이고 그 나라를 이끄시는 분도 주의 권세를 입어야 되는 거니까, 나는 나라의 법도 주님의 뜻이라 생각해서 한 두 달만 기도를 안 하겠습니다. ➂번 아무리 나라 법도 나라 법이지만 하나님 법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기도는 하되 몰래 속으로 남한테 안 들키고 속으로 ’하나님 기도했습니다.‘ 요걸로 때우겠습니다. 셋 중에 어느 쪽입니까? 여러분들이 성경 모른다 치고. 성경에 해답 없다 치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➀ ➁ ➂번 밖에 더 있겠어요? 왜, 인간은 기어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근거로 내가 하나님께 복을 따내고 구원도 받으려고 하는 시도가 우리 속에 있기 때문에 ➀ ➁ ➂번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어떻게 했습니까? 창문을 활짝 열어 제치고 ‘아, 여기는 장목반, 장목반, 아, 아.’ 하니까 기자들이 찰깍, 찰깍 사진 찍느라 난리 났어요. 다니엘 법어기는 것 사진 찍는다고. 다니엘은 활짝 열고 평소에 하는 대로 그렇게 하루 3번 씩 감사기도 했습니다. 다니엘이 하루에 2번 했는데 그날 한 번 더 추가한 것도 아니고, 5번 하던 걸 3번으로 줄인 것도 아니고, 그냥 다니엘 3번 한 것은 그전에 다니엘이 그런 법이 있기 전에 기도한 것이 자신의 뜻이 아니고, 주께서 시킨 겁니다.

이건 참 어려운 이야긴데요.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낫게 했죠. 그 의미가 뭐냐 하면 ‘세상이 그만큼 절망적이다.’ 이 말입니다. 소경이 눈을 뜨며 귀머거리가 나으며, 그만큼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나으며 절뚝발이가 걸으며 죽은 자가 살아난다. 이 말은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자기가 주님의 손이 필요치 아니하는 그러한 소경이 아니라고 우긴다면 그건 구원되지 못한다는 거예요. 말이 좀 어렵게 됐죠? 누구든지 ‘나는 눈을 떠도 소경이고 귀가 들려도 귀머거리며 나는 걸어도 절름발이며 살아도 죽은 자입니다.’라는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주님과 만나야 된다는 이야기예요.

‘나는 소경 아닌데 주님이 뭐 필요해?’ 이렇게 나온다면 그 자체는 이미 그른 거예요. 사람이 보는 것은 보지만, 보고 있는 자기 자신을 볼 수 없어요. 인간은. 그렇잖아요. 사람이 소리는 듣고 있지만 듣고 있는 자기 자신은 들을 수는 없어요. 아무리 애를 써도. 마치 자기 뒤통수를 못 보듯이, 인간은 자기 하는 것만 생각하지, 내 하는 것이 남들이 볼 때 ‘어떻게 생각해.’ 라는 것을 그것까지 도로 알 수 있는 방법은 인간에게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이 네가 일하고 공부하고 하는 행동이 내가 보기에 어떠냐를 미리 다 보여줬어요.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네가 어떤, 어떤 행동을 해도 십자가 죽을 수밖에 없는 행동밖에 나오지를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  왜, 십자가가 너한테 딱 맞는 조치다. 이 말 이예요. 딱 맞는 조치예요.

보통 병원의 의사 선생님이나 또 약사 선생님이 뭐라 합니까? 요거 잡수시고 식사 후 30분에 잡수세요. 라고 처방 전 내리죠? 주님이 내리는 처방 전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피 없이는 너는 지옥 간다. 그 처방 전 밖에 없어요. 그래서 교회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그것을 교회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 참, 이런 이야기하면 제가 가슴이 아픕니다. 딴 이야기들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교회 가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죕니다. 죄 짓지 맙시다. 여러분 이것이 이단이거든요. 우리는 이단 빠지지 말고 정통으로 갑시다.’ 결국 뭘 증거 한 거예요? 우리는 바른 선택이 우리를 구원한다. 이 소리 밖에 더 되겠어요?

제가 아까 이야기했죠? “아버지께서 오게 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는 이 기준은 내가 어떻게 변경하거나 내가 어떻게 손을 댈 기준이 아니죠? 그러면 우리 쪽에서 주님께 하늘나라 간다면 우리는 주님 앞에 헌금이고 뭐고 다 내놓고 충성을 다할 거예요. 심지어 베드로처럼 내 목숨 바쳐 가면서 천국 가겠다고 하겠죠. 주님께서는 ’아서라 말아라.‘ 베드로야 네 목숨 바쳐도 갈 수 없는 곳이 바로 천국의 처소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베드로 같은 경우에 자기 목숨 바쳐도 오지 말라는 거예요. 네 목숨 바친다고 해서 네가 구원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우리가 교회 충성해 봤자 우리 목숨 바치기까지는 안 하죠. 그 말은 뭐냐, 아무리 해봤자 그건 말짱 소용없는 짓이 되는 거예요. 교회만 살찌우고, 목사만 배불리는 것밖에 안 되고 아무 짓도 안 한 것이 되고, 목사 가정만 밥 먹여 살린 것밖에 안 돼요.

예수님이 딱 집어서 불러 줄 때는 항상 십자가로 불러주시기 때문에,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뭐냐 하면 항상 죄인 중에 괴수, 죄인의 모습으로 우리는 갑니다. 찡그리면서? 아니죠. 너무너무 감사하며, 나도 몰랐던 내 모습을 이렇게 십자가로 밝히 보여주시니, 세상에 누가 저를 이렇게 사랑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자기가 죄인된 것이 오히려 감사가 돼요. 그래서 예수님께서“간음한 여자 앞에 놔두고 주변에 둘러 싼 방청객들, 또는 심판관들 보고 뭐라 했습니까? ‘이 여자를 치려거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쳐라“ 다 갔습니다. 그러면 죄 있는 자가 그곳에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아무도 없고 주님께서 ”나는 여기 있잖아?’라는 말을 달리 둘러서 이야기해요. “ 너 주위에 누가 있더냐?”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게 뭐냐 하면 “지금 너 누구하고 대화하지?” 그런 뜻이다 말이죠. “너를 고소한 자가 주위에 있더냐?" 뻔히 둘 다 보고 있으면서 다 아는 이야긴데 왜 묻습니까? ”나는 너를 저들처럼 그것을 고소하려고 너를 부른 게 아니다. 너를 정죄하려고 부른 게 아니고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정죄 안 하기 위해서 그냥 아버지가 보낸 자기 때문에 그냥 받아주기 위해서 내가 이 땅에 와서 너 대신 십자가 죽는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의 상징은 오직 십자가입니다. 부활이 아니고 십자가예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꾀더냐” 갈라디아서 3장 1절, 십자가뿐입니다.

이것은 바로 평소에 다니엘이 3번씩 기도한 것이 ‘기도하면 응답이 될까?’ 이게 아니고 기도하는 기계로 만든 거예요. 따라서 다니엘은 기도하면서 주께서 시키는 대로 해야 내가 다니엘이지, 시키는 대로 안 하면 난 다니엘도 될 자격도 없다는 것을 늘 느끼면서 기도한 거예요. 그 기도가 자기 아이디어가 아니고 주께서 평소에 시키신 일관된 시나리오 속에 포함된 겁니다. 그 3번씩 기도하는 시나리오를 먼저 깔아놓고, 그리고 기도한 자를 잡아 죽이는 시나리오를 저쪽 이방민족을 통해서 바사나라를 통해서 그것을 거기서 하나로 종합을 시키는 대목이 다니엘 6장의 내용입니다. 여기에 누구까지 동원하느냐 하면, 동물에 있는 사자까지 동원시켜요. 아이쿠, 다니엘 참 대단한 사람이라. 하여튼 동물의 사자까지 동원시켜서 다니엘이 평소에 기도한 것이 다니엘 사적인 의견이 아니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살아있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로 기도했다는 거죠. 이걸 또 흉내 내서 ‘나는 하루 2번밖에 안 했는데 3번 하겠다.’ 이러면 안 돼요. 왜냐 하면 이것은 어디까지나 건축 설계사 책상 위에 있는 그때 그 당시의 모형이고, 지금은 기도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고, 기도 안 하면 미화원을 하든지 통장을 하든지, 통장하면서 살아가는 그것도 주께서 시키면 통장도 해야 되겠죠.

현재 내가 입는 것, 먹는 것, 마시는 것, 모든 것이 주의 뜻이니까 ‘감사합니다.’ 이렇게 하면 그 입는 것, 먹는 것, 마시는 것, 다 주의 일이예요. 제가 유튜브 ‘헌금’ 할 때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자기 집에 콩나물 사서 먹는 것도 주께서 주신 헌금 가지고 하는 건데, 왜 교회 내는 것만 헌금이냐 말이죠. 자기 집에 침대 사고 애들 피아노 가르치고 콩나물 사먹고, 소고기 사먹으면 뭐하노. 또 사먹고 또 소고기 사먹고. 백날 하는 것이 다 주의 주신 돈 가지고 하는데 다 좋은 돈인데, 꼭 교회 내는 돈만 거룩한 돈이고 자기 쓰는 것은 나쁜 돈이고, 그런 식으로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말이죠. 우리가 헌금하는 것이나 하나님이 매일같이 우리에게 용돈 주고 있다 이 말입니다. 그것도 값없이, 햇빛 주죠. 공기주죠. 잠 잘 때 심장 뛰게 해주지, 위장 뛰게 해주지, 거기다가 비까지 내리죠. 오늘 낮에는 서울에 눈까지 왔다면서요. 웬 보너스! 눈까지 줍니까? 눈에 가다 미끄러져서 관절염까지 보너스로 줄지 모르겠지만.

다니엘은 살아있는 그 자체가 하나님 작품입니다. 그것을 다니엘이 좋아하면 안 돼요. ‘역시 나는 하나님 작품이야.’ 이러면 안 돼요. 이건 다니엘을 위해서 다니엘 되게 한 것이 아니고, 다니엘 있어야 될 존재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누구하고 연결돼 있어요. 숨어있는 분과 연결돼 있어요. 숨어있다는 이야기했죠. 숨어있는 분이니까 여기 제가 장난을 치겠습니다. 숨어있는 분이 여기 나타난 눈으로 볼 수 있는 인간들의 무리, 인간들의 군집, 이게 무슨 나라죠? 바사나라죠. 바사나라는 바사나라 안에서의 죄를 끄집어내서 다니엘이 갖고 있는 그 주님구원과 연계시키는 겁니다.

출애굽할 때는 애굽나라의 사정과 히브리인들의 사정을 엮어서 출애굽을 만들 듯이, 사사시대에는 사사 주변에 있는 블레셋과 사사와 연계해서 그 시대의 죄와 그 시대 구원을 따로 보여주듯이, 다니엘을 바사나라의 형편과 그리고 이쪽의 다니엘과 엮어지는 거예요. 바사나라는 뭐냐, 120명의 총독을 거느리고 세금을 받음으로서 국가에 이득을 주죠. 국가에 이득을 주는데 다니엘은 어떤 이득을 주느냐 이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신하들이 원하는 이득을 주지는 않아요. 이 바사나라를 실제적으로 운영하시고 존재케 하시는 분은 너희들의 하나님이 아니고, 그냥 하나님도 아니고, 그냥 여호와도 아니고, 여기 다니엘 6장 26절에 나오죠. ‘다니엘의 하나님!’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그냥 하나님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신약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만이 진짜 하나님! 나를 존경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도 없고, 나를 피해서 갈 수 있는 하나님은 그건 우상에 불과하죠. 마귀에 불과한 거예요. 그래서 바리새인보고 여호와 믿는 걸 보고 ‘너희 아비는 악마다.’ 했잖아요.

~~의 하나님, 그래서 하나님 다 떼버리면 지상에 남겨놓는 흔적들은 뭡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세와 예레미야와 에스겔, 다니엘, 그리고 마지막 때는 누굴 증거 한다? 마지막 때는 선지자로 부분과 모양으로 증거 하시는 분이 마지막에는 누굴 통해서 증거 한다 했습니까? 오직 아들을 통해서 증거 한다. 히브리서 1장 2절 맞죠.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 마지막 때는 예수를 보내줬기 때문에 마지막 때 예수님이 오신 게 아니고,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 시대가 뭐가 된다? 마지막이라는 것이 판정난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지금 임박한 진노의 마지막 때 살고 있습니다. 2012년 끝나도 마지막이고 2012년 겨울 돼도 마지막이고 가을돼도 마지막이고 2012년 봄 돼도 마지막이고, 인간의 캘린더는 의미가 없게 됐어요.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숨어있는 하나님께서 누굴 통해서? 다니엘 주변에 일어나는 현상을 통해서 뭘 증거 한다? 숨어있는 하나님의 본색을 드러내죠. 여기서 인간 세상 사람들은 어떤 기적을 원하고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기적을 베풀면 그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 내가 제안하는 그 기적의 테스트에 통과하지 못하면 하나님도 엉터리다. 이렇게 하고 싶은 거예요.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십자가 달릴 때에 어떤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뺨을 때렸죠? 그리고 눈을 가리고 뺨을 때리면서 테스트합니다. ‘네가 진짜 메시아라면 우리 중에 누가 당신한테 귀싸대기 때렸게? 알아맞히면 믿어줄게.’ 이렇게 시험했죠? 또 시험했죠. 어느 강도가 ‘당신이 진짜 메시아라면 나를 이 십자가에서 훌러덩 벗고 다시 사면되면 그때 당신은 나한테 실질적인 이득을 줬기 때문에 내가 생각한 내 테스트에 당신이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내가 믿을 용의가 돼 있다.’ 이렇게 나온 겁니다.

그래서 이번에 책이 나왔어요. ‘복음과 기독교의 차이’라는 책이 나왔거든요. 그 책의 내용이 이런 게 나옵니다. 요즘 예수님은 오디션 받는 예수님이라고. 사람들에 의해서 사람들에게 납득이 되면 믿어주고, 납득이 안 되면 이단, 마귀로 간주하는 그런 예수처럼 사람들에게 심사받는 예수님이 돼 버렸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비교해서 마지막에 다 탈락시키고 자기한테 맞는 예수님을 선택할 정도로, 그 정도로 진짜 엉망입니다.

예수님이 진짜 메시아가 맞느냐 하는 것은 광야에서 이미 세 번식이나 예수님을 시험했잖아요. 돌이 떡 되게 해라. 그리고 기적을 보게 해 달라. 뛰어내릴 때 천사가 오든지, 와서 받혀주면 내가 메시아로 인정할게. 그리고 나한테 절해라. 모든 세상 영광을 주겠다. 세상 영광 싫어하는 인간 누가 있느냐, 너도 마찬가지잖아. 산다는 것이 세상 부귀 영광 보고 사는 건데 그거 마다할 사람 아무도 없다. 그러니까 나한테 절하면 너 원하는 것 다 줄게. 네 영혼을 나한테 거리하고 나한테 팔아라. 그런 뜻이죠.

그런데 제일 마지막 시험이 뭐냐 하면 바리새인가 사두개인들이 예수님한테 시험을 했어요. ‘당신이 진짜 메시아라면 기적을 보여 달라.’ 참 이 말씀이 정말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그 들 앞에서 ‘자, 보세요. 날이 날마다 오는 게 아닙니다. 보세요. 애들은 가라.‘ 해서 기적 세웠습니까? 뭐라고 이야기를 했느냐 하면 ’기적 속에 뭘 포함시키느냐 하면 이 세대, 나한테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는 이 세대를 거기다 재료로 집어넣는 작업을 했어요.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니, 내가 보여줄 기적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기적을 구성하는 데는 하나님만이 기적에 들어가는 게 아니고 이미 우리가 저질로 살아가는 그것도 뭐가 된다? 주님께서 이루시는 기적에 재료로서 필수적으로 발생돼야 되는 겁니다. 절에 가는 시어머니가 며느리가 교회 간다고 머리 쥐 뜯을 때, 며느리는 기도하기를 ‘어머니가 저렇게 날 핍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기도하겠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뭐냐 머리 쥐 뜯는 시어머니와 그래서 억울하게 당하고만 사는 며느리가 모아져야 그게 둘 다가 있어야 주의 기적의 재료가 돼요.

그 기적이 뭐냐 하면 이미 기적은 종결됐습니다. 요나의 기적은 끝났어요. 다른 기적 바라면 안 됩니다. 암 낫고 그런 게 아니고 기적은 끝났어요. 요나의 기적입니다. 요나의 기적이 뭐냐, 세 자로 하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났다. 이건 단순히 소생이 아니고, 너희들이 생각하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고, 너희들이 생각하는 생명은 그것이 죽음이라는 것, 나 봐라, 생명도 아닌 그 생명에 맞아 내가 죽었지만 아버지께서는 사흘 만에 참된 생명으로 살려냈잖아. 그러니까 너도 나처럼 뭘 통과해야 돼요? 가짜 죽음을 빨리 벗어버려야 된다니까.

사도바울이 소원이 그거예요. 이 되도 않은 이 생명(목숨)이라고 걸치고 있는 가짜 생명을 홀랑 빨리 벗고 내가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 내 마지막 소원입니다. 사도바울의 소원이 남북통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애 성적 올라가고 딸, 아들 시집 장가가는 게 소원이 아니고, 빨리 이 육을 벗어버리고, 고린도후서 5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벗어버리고 누구와 함께? 주와 함께, 얼마나 지독하게 사랑했으면, 그 그리운 사람과 함께 있고 싶은 것, 그래서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뭐할 것이다? 저주를 받을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주가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다니엘이 창문을 열고 기도한 것은 결국은 누구 보고 싶은 거예요? 이처럼 나를 파견근무 시켜놓고 맨날 같이 우리로 하여금 바사나라에서 살게 하시는 주님, 어서 나를 편하게 해 달라. 주님 책임지세요. 라고 주님 바라보는 그 마음으로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기도를 한 겁니다. 기도의 응답은 딴 게 아니에요. 저 죽으렵니다. 이게 기도의 응답 이예요.

‘지금 쌀 떨어졌거든요. 쌀 있어야 되니까 쌀 주시고, 그 다음에 차비도 좀 주셔야 되겠고.’ 이렇게 기도하면 주께서 뭐라 하는지 알아요? “너한테 있어야 할 것을 내가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런 이방인의 기도는 하지 마라” 예수님이 자기가 하는 자기 기도가 예수님을 이 땅에서 죽게 만들었어요. 겟세마네 기도에서!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이 내게서 떠나게 하옵소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예수님한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제자들한테도 이야기했어요. ‘우리 중에 누가 높습니까?’ 하니까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누가 높은가 하는 것은 안철수나 문 제인한테나 박 근혜한테나 묻고 나는 너희들이 그런 것은 하지 말고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같이 마셔야 된다는 것, 마실 수밖에 없도록 내가 그렇게 조치를 해줄 테니까 기다려 봐라. 기어이 내 쓴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하는 말이 “예수의 남은 고난을 내가 지금 감당하고 있다. 내가 이렇게 복음 전하는 것은 나를 위함이 아니고 너희들을 살리기 위해서 이건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부득불 이것이 나한테 곧 이게 상품이니, 착한 일한다고 보너스 받는 게 아니고, 내가 너를 위해서 고난 받는 이것이 바로 뭐다? 주께서 내게 주신 이게 상장과 상품 이예요. 이거 하고 상 받는 게 아니고 이 자체가 상이 되는 겁니다. 받은 면류관을 나중에 요한계시록 4장에 보면 받은 면류관을 주의 발 앞에 다 던져서 반납해 버리고, ‘제가 쓰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무슨 상급에 차등이 있습니까? 차등은 없어요. 현재 내가 어떤 꼬락서니로 살더라도 내가 보기에는 참 초라해 보이고 창기요, 세리요, 도둑놈이요, 강도라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완벽해요. 그런데 그런 완벽한 것을 우리는 믿지 못하죠. 왜, 우리의 모델을 세상에서 찾으니까. 가정 화목하고 돈 잘 벌고 인물 잘나고, 키는 180되고, 전부 다 이런 데서 찾는다 말이죠. 요새 아가씨들 힘들어 죽어. 뭐 복음 알면 된다 해놓고, 막상 소개하면 키가 작고 성격이 안 맞고 어떻고, 어떻고 저떻고 대학 안 좋은 대학 나왔고, 아버지가 교회 안 다니시고 온갖 것 다 따지죠.

다니엘이 하나의 모델이 된다는 것은 어떤 모델이냐, 다니엘은 기존의 모델도 그랬지만 이번 일을 통해서 다니엘이 모델로 하나 첨가가 됩니다. 어떤 것이냐, 죽었다가 살아난 존재! 죽었다가 살아난 존재는 장차 오실 예수님으로 보이죠. 그래서 다니엘을 볼 때 뭐라고 부릅니까? 다니엘아, 하지 않고 人子, 이 人子라는 명칭이 다니엘 300년 이후에 예수님한테 붙여지죠. 人子야, 그럼 예수님이 하는 기능 속에 뭐가 담겨 있다? 다니엘에게 일어난 일이 예수님 속에 그대로 다 담겨있겠죠. 그러면 예수님에게 속해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유다나라는 다니엘 입장에서 무슨 나라가 되겠습니까? 바사나라가 되는 거예요. 바사나라에 모든 일어난 일은 장차 예수님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나라에 앞서 먼저 시범 보인 그런 나라입니다.

그런데 바사나라라고 했지만 우리가 지난, 지난 시간에 그 나라를 바사나라도 무슨 나라의 연장이라 했습니까? 바벨론의 연장이죠. 그래서 이걸 어떻게 보느냐 하면 나뭇가지에 잎사귀가 나오잖아요. 그 잎사귀의 모든 진액은 어디서 나옵니까? 가지에서 나오죠. 아가씨들이 애인과 연못 가에 모여서 데이트하면서 아카시아 잎사귀를 떼면서 ‘사랑한다. 안 한다’ 잎을 떼면서 ‘사랑한다. 안 한다’ 하잖아요. 마지막에 ‘사랑 한다’ 나오면 사랑하는구나, 하고 좋아하고, ‘안 한다.‘가 나오면 다른 가지 잘라다 기어이 ’사랑 한다‘ 나올 때까지 또 하잖아요.

그처럼 모든 나무의 모든 229, 현재 모든 나라는 ‘바벨론, 바벨론, 바벨론, 바벨론 바벨론이 되는 거예요. 금 신상 다음에 은, 은 다음에 놋, 놋 다음에 철, 철 다음에 진흙과 철이 혼합된 그런 금 신상 안에서 벗어나지를 못해요. 그 말은 하나님이 바벨론을 다루는 법칙에서 어떤 세상 나라도 벗어나지를 못한다는 거예요. 그 말은 바벨론 나라 속에 다니엘이 있는 것처럼, 똑같은 법칙 안에 다니엘 같은 운명을 가져야 될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들이 바로 오늘날 교회고 오늘날 이스라엘입니다. 이제는 교회란 말은 하기가 힘들어요. 교회가 참된 이스라엘! 참된 성령께서 다니엘 같은 입장에 있으니까 이 다니엘 이야기가 이게 옛날이야깁니까? 지금 우리들의 이야기예요.

한번 정리해 보면, 이 다니엘이 갖고 있던 모든 것은 결국은 ‘다니엘 네가 있는 환경이 너를 그렇게 만들기 때문에, 너는 그 환경 속에 주께서 시키는 대로 만들어주신 대로 살아라.’ 그 말이죠. 살면서 주님이 어떻게 나로 하여금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해내시는지, 구원을 해내시는지, 심지어 인큐베이터까지 역할을 하는 주변의 이단들과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공격케 해서라도 기어이 작품 하나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 나는 오직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게 없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하는 교인들이 나와 줬으면 좋겠어요. 맨날 교회 자랑, 신앙의 연조 자랑, 자기 성화된 거 자랑, 선교 비 내는 거 자랑, 교회 섬겨서 자기 자식 잘 된 자랑, 아파트 넓힌 자랑, 차 바꾼 자랑, 교인 수 늘은 자랑, 헌금 자랑, 그런 것 좀 자랑하지 말고, 보세요. 우리가 강한 사람이 누가 있으며, 우리가 잘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약한 자를 택하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성경에는 그렇게 고린도전서 1장에 그렇게 돼 있잖아요. 그런데 요새는 반대가 돼서 ‘부러워라’ 약한 자를 통해서 강한 자를 부러워하게 하시고, 이렇습니까? 없는 걸 택하사 있는 걸 부러워하게 하시고, 이렇습니까? 없는 걸 택하사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아이구, 인간, 또 집 샀어? 아이구, 안 됐어, 안 됐어.’ 이렇게 모든 게 반대, 거꾸로 예요. 모든 게 교회서 축복이라는 걸 반대로 이야기해야 돼요. 저주가 축복이고 축복이 저주예요. 전부 다 뒤집어 버려요. 자기 사랑밖에 몰라요. 인간은. 사랑밖에 난 몰라, 누군가 이야기했지만,  자기 사랑밖에 모르니까 이게 주님의 십자가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죠.

그리고 이 바사나라의 종교는 고레스 왕은 마르둑 신이었습니다. 마르둑 신은 천지 창조할 때에 어둠과 빛이 싸워서 천지 창조를 했어요.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뭐냐, 창세기 1장에 보면 창조할 때 싸움한 게 아니고 ‘빛이 있으라’ 하매 그냥 있은 거예요. 그것을 해와 달은 알아요. 시편 19편에 보면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이건 들리는 소리는 없으나 서로 저희들끼리 통하는 거예요. 저주파인가 몰라. 고주파인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 소리가 뭐냐 하면 주께서 친히 우리를 다스리고 만들어내서 이끄십니다. 참새도 알아요. 참새도 주께서 친히 기르시고 들의 들풀도 주께서 기르시는지 아는데, 유독 잘났다는 인간만큼은 솔로몬의 옷가지고 자랑하고, 키 크려고 애쓰고, 자기중심으로 살잖아요. 잡초가 악이 아니고 참새가 나쁜 참새가 아니고 나쁜 놈은 누굽니까? 선악과 따먹어서 안에 마귀 들어있는 인간들이 하나님께 대드는, 하나님을 피해자로 만들고 있는 그런 악마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 앞잡이가 누구냐, 바로 서 있는 저나 여러분들이예요.

주께서 손을 대줘야 우리는 자기가 죄인인 걸 알지, 주께서 손을 안 대주면 우리는 복음 알았다고 그 복음 아는 것도 자기 잘난 체 할 수밖에 없는 것이 또 우리 모습이라. 매일같이 주께서는 매매해야 돼요. 그걸 매매하지 않고 수요일 날 제가 뭐라고 표현했습니까? 손가락 집어넣어서 그 다음에 주께서 한 손으로 등을 두드리면서 “빨리 토해내, 아이쿠, 술도 어지간히 처먹었어. 이렇게 처먹으니까……” 하면서 늘 등을 두드려가면서 속에 있는 악마적인 요소가 우리 속에 이런 게 들어있다는 걸 계속해서 토해서 ‘제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제가 상한 심령입니다.’라는 이러한 엮음, 이러한 조합, 죄인과 의인의 엮임, 이게 바로 성도입니다.

그걸 우리가 할 수 없고 우리 주변의 환경이 그렇게 만들어 냅니다. 그 환경 이야기를 하고 마치겠습니다. 어떤 환경이냐, 다니엘 법이죠. 누굴 잡아 죽인다? 다니엘 죽이기죠. 그러면 이 법을 위반한 국회의원들, 당시에 다른 라이벌 총독들, 라이벌 고위 간부들은 그 사람들은 현재 건재하죠. 아무 탈이 없죠. 이 법은 다니엘을 조지는 법이거든요. 이 사람들은 법을 잘 지켜서 자기 목숨을 살려고 한다 말이죠.

이 법은 다니엘이 다른 사람과 달리 하나님 믿는 것 때문에 특이한 행동, 다른 말로 하나님이 주신 특이한 거, 예수님 같으면 뭐가 특이합니까? 다른 사람은 다 살고자 하는데, 예수님은 혼자 뭡니까? 자꾸 죽으려고 하는 그 특이한 거. 그 특이한 것 때문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을 마귀 들렸다고 했잖아요. ‘저 미쳤어. 미쳤어. 법을 지키면 되는데 왜 자꾸 법도 지키지 않고 죽는다 해. 이상해, 나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다. 왜 자꾸 죽으려고 이야기하느냐.’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 다니엘을 죽이려고 다니엘을 공격하는 사람들, 법을 안 지켜서 죽기 직전에 있는 다니엘, 그리고 우리가 다니엘과 아는 친구나 다니엘과 동거하는 다니엘을 좋게 보는 사람 같으면 이중에서 어느 게 부럽습니까? 다니엘은 안 부럽죠? 왜, 곧 죽으니까. 누가 부럽습니까? 권력을 쥐고 있는 다니엘을 잡아 죽이려는 사람들이 부럽죠. 그 사람들이 더 좋아 보이죠. ‘저 사람 좋겠다. 다치지도 않고 직장 생활 잘 할 수 있고.’ 그런 부러움이 오늘날 우리 속에 있어요? 없어요? 있죠. 그러니까 우리가 바사나라라니까요. 바사나라의 신하들이예요. ‘아휴, 내가 이만큼 예수 믿었으면 이제 전세방이라도 옮기게 넉넉하게 주시지, 집도 옮겨야 되고 겨울에 추운데 보일러도 깔아야 되겠고, 아휴, 저 사람 좋겠다. 하하 웃으면서 보일러 팍팍 돌아가고, 이건 기름 값 아낀다고 비닐을 온 창문에 다 바르고 이건 토굴도 아니고.’ 우린 뭐가 부러우냐 하면 예수 믿는 게 하나도 안 부러워요. 예수 잘 믿는 게 부러운 게 아니고 예수 믿든 안 믿든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이 부럽잖아요. 왜냐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는 거예요. 예수님 복음 전하는 교회가 안 부럽고 헌금 많이 나오는 교회가 부러운 거예요. 큰 교회 다니는 내가 부러운 거예요. 돈도 안 나오는 개척교회는 안 부럽고.

우리 입장이 이 성경에 다니엘만 나오는 게 아니고 겸하여 다니엘 잡아 죽이는 바사나라의 속성이 매일같이 우리에게 샘솟듯이 솟아나는 거예요. 제사 신학교 학생들에게 ‘제발 스데반집사를 부러워하세요.’ 했거든요. 보니까 아무도 안 부러워해요. ‘여러분, 스데반집사 성령이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부럽죠?’ 하니까 안 부럽대요. 얼마 전에 차 바꾼 교회 당회장 목사들이 부러운 거예요. 영락교회, 충현 교회. 순복음은 안 부러워해요. 이단인 줄 다 아니까.

그러니까 결국 마귀가 우리를 유혹하기는 굉장히 쉬운 겁니다. ‘이렇게 이 말씀 지키시고 이렇게 시키는 대로 하시면 복 받습니다.‘ 좌편에는 건강이요. 우편에는 부귀요. 말씀대로 됩니다. 말씀을 믿어야 됩니다. 말씀대로 다 될 겁니다. 할 수 있거든 무슨 말이냐, 능치 못할 게 없습니다.’ 자꾸 이렇게 해서 우리 속에 잠자고 있는 바사나라의 속성을 맘껏 유발시켜서 그것을 축복이란 이름으로 하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의 축복은 뭐냐 하면 바로 “내 이름으로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옛날 선지자들도 이와 같이 고생을 했느니라” 좁은 길로 가는 것이 바로 축복입니다. 이것은 내 힘으로 갈 수가 없어요. 왜, 나는 바사나라가 좋으니까, 나는 바벨론이 좋고 헬라가 좋고, 이건 만날 승리하니까. 남한테 꿀릴 것도 없고 십일조 해서 카아네기처럼 부자 되고 싶고, 그 카아네기의 십일조는 사실은 십일조가 아니고 세금 포탈 용도예요. 그런 것은 사람들 귀에 들어오지 않아요. 어쨌든 부자 됐잖아.

그러니까 내 속에 잠자고 있는 마귀를 목사들이 그걸 자극시켜서 그걸 주의 뜻이라고, 축복이라고 유인합니다. 우리는 그게 아닌 줄 알면서도 그 소리가 듣고 싶어서 오늘도 보람찬 하루 주일 날 교회 나옵니다. 그 희망과 비전과 꿈을 제공하는 교회는 영원히 이 세상에서 망하지 않는다는 그런 모토, 그런 구호 관, 바사나라에서 지금도 바사 하늘을 덮고 있습니다. 우리고 거기 은근히 반 장난삼아 재미삼아 혹시나 될까봐 로또복권 당첨되는 기분으로 우리는 은근히 기대합니다. ‘저 십자가 아니까 주께서 내가 원하는 거 아시죠? 십자가 아니까 아쉬운 것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이런 식으로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절대로 우리 힘으로 구원이 안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십자가 지신 주님께서 우리를 가만두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것이 믿어진다는 것, 그리고 이 초라한 이 모습 자체가 주님 보시기에 흠도 티도 없는 완벽한 오늘 죽어도 낙원에 갈 수 있는 그 몸이라는 것을 여러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니엘 모습 보면서 우리가 그 시대 있으면 다니엘을 욕하고 다니엘에게 돌 던지고 다니엘을 반대하는 편승해서 다니엘을 잡아 죽이는 한패인 것을 저희가 알았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주님보다 우리 자신을 더 좋아하는 우리 모습을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발각되게 해주시고, 그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보혈의 피가 유효함을, 효력이 있음을 저희들이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