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다니엘 6장(이득 없는 계시)121115-8강a -이 근호 목사
제 8강a
6장부터 하겠습니다. 6장에 보면 다리오 왕이 나오죠. 다리오 왕, BC220년 경, 서기 이전 220년 경 같으면 그때 예루살렘에는 뭐를 했느냐 하면, 예루살렘에는 학개가 와서 14년간 중단된 성전을 다시 수축하려고 시도하던 그때쯤 돼요. 학개란 선지자는 어디서 왔는가, 바로 바사나라에서 왔거든요. 바사나라는 또 뭐냐, 바사 나라에 유명한 왕이 있어요. 아하수에로 왕이라고 있거든요. 그건 그 후대고, 초반에 다리오 왕 시대인데, 고레스 왕 다음에 칸비세스, 다리오 왕, 그렇게 되는데 여기에 “다리오가 자기의 심원대로 방백 일백 이십명을 세워 전국을 통치하게 하고” 이렇게 통치하게 한다 했잖아요.
역사적으로 보면 총독이 한 이십 명이 돼요. 총독들이 이십 명을 깔아놓고 총독들이 세금 받아서 그렇게 나라를 통치하게 돼 있어요. 그런데 옛날 역사를 보게 되면 나라가 되던 국가가 되던 전부 다 뭘 해야 되느냐 하면 이윤, 이득이 남아야 나라가 됩니다. 실질적인 이득이 없으면 나라가 안 돼요. 나라라 하는 것은 한번 가진 것 가지고 우려먹는 식으로 되는 게 나라가 아니고 국가라 하는 것은 계속해서 이윤을 남겨줘야 됩니다. 나라도 회사하고 똑같아요.
만약에 나라의 왕이 돼서 나라에 대해서 이익을 제공하기 못하면 백성들이나, 특히 옛날에는 백성보다 더 무서운 세력들이 있습니다. 토호 귀족들이 있습니다. 이게 옛날 나라하고 요즘 국가하고 차이점이 그게 있습니다. 이걸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봉건국가라 합니다. 밑에 토속 귀족들이 있습니다. 삼국시대 선덕여왕 시대 때는 화백제도라 해서 토속들이 모여서 회의할 때 만장일치가 돼야 그래야 그 다음에 신라에서 왕이 일을 추진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왕이 추진할 때 항상 토호세력들이나 귀족들에게 뭐냐 하면 왕이 어떤 설치를 해서 이윤을 남겨줘야 돼요. 왕이 주로 하는 일이 뭐냐 하면 관개치수 사업을 했어요. 옛날에는 농경시대기 때문에 농사를 지었거든요. 그래서 홍수를 방어하고 또는 가뭄을 대비해서 이런 저수시설을 하게 되면 귀족들은 거기에 대해서 ‘야, 우리가 이번에 뽑은 왕은 괜찮은 왕이다. 계속 똑똑한 아들 둬서 계속 왕 하소서.’ 해서 세습제로 밀어붙이는 겁니다.
그러니까 왕은 이렇게 맛있는 거나 먹고 맛사지나 받고 즐기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하나의 기업의 회장으로서, 사장으로서 신경을 써서 해야 돼요. 그런데 이 치수사업을 하는 중에도 더 큰 사업이 뭐냐 하면 전쟁을 해야 됩니다. 전쟁이란 게 뭐냐 하면 깡패예요. 약한 것에 가서 뺏어 와야 됩니다. 왜냐 하면 옛날에는 개간을 하는데 한계가 있어요. 나무 베는 트랙터도 없고 하니까 항상 개간을 해놔야 이게 농사를 질 수 있는데 우리가 하지 않고 옆 쪽이 농토가 옥토다. 그러면 뺏어서 그걸 뺏는데 앞장 선 장군들에게 먼저 나눠주고 백성들에게 나눠주면 ‘아, 역시 우리 왕은 미래 지향적이다.’ 해서 계속해서 왕으로서 인정을 받습니다.
만약에 왕이 그것을 못하면 그 주변에 있는 귀족들한테 암살당합니다. 그게 바로 이 다리오 왕 때 여기는 방백 일백 이십 명을 세웠죠? 그래서 이것이 총독 일백 이십 명이 토호 귀족일 수 있고 성경은 정치적인 서술이 아니니까 어쨌든 간에 일백 이십 명을 세워 전국을 통치하는데, 여러분들 창세기 끝부분에 요셉이 몇 인자였죠? 바로 바로 밑이 요셉이잖아요. 요셉이 전국에 창고를 지어서 나중의 가뭄을 대비해서 막대한 예지를 가지고 곡식을 저장해 놨는데, 주변의 있는 나라들이 가뭄들을 때 막대한 이윤을 남깁니다. 요셉이 장사를 잘해서 애굽의 국가의 재산이 불어나게 해주니까 바로는 저절로 존경을 받고, 존경받을 때 그냥 받는다 하지 않고 신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이런 축복이 우리나라에 주어졌습니다. 당신은 그냥 사람이 아니고 신의 발바닥입니다. 신은 위에 계시고 인간은 밑에 있으니까 밑에서 위를 바라볼 때 신을 바라보면 신의 발바닥이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뭐로 본다? 신의 일부로 보는 거예요. 그럴 때 그 왕은 최고의 명예를 얻는 겁니다. 자기가 하는 모든 것은 그 자체가 법이 돼요. 그런데 왕으로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그렇게 신으로 행세해서 신의 값을 해야 돼요. 무슨 값이냐 하면 국가 전체의 이익을 남겨야 됩니다.
그런데 다니엘 6장을 하면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뭐냐 하면, 다니엘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국가에 이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국가에 이득이 없죠. 그러니까 성경 자체가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드는 게 뭐냐 하면 모든 사람은 항상 자기에게 이익이 있고 그리고 수입이 있는 경우는 우리는 그걸 축복이라 이야기하고 또는 감사할 마음 준비가 돼 있는데 다니엘 같은 경우에는 전혀 그 나라에 이익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익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으나마나 한 존재고 그럼 쓸데없는 존재인데 모든 것이 이익을 얻고자 하는 그러한 시대에 있어서 쓸데없는 이익을 주지 못하는 사람의 그런 이야기는 다 부실한 이야기처럼 취급될 것이고 있으나마나 한 존재가 되는데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우리 인생에, 또는 이 세상에 개입했을 때 우리가 그런 하나님을 감사함으로 그 하나님의 뜻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받기가 곤란하죠.
제가 하나님 믿었습니다. 믿고 난 뒤에 하나님이 저한테 이익 준 게 얼마나 됩니까? 한번 따져 봅시다.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그때는 하나님 자리에 우리가 마귀를 믿고 있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왜, 성경과 위배되기 때문에
그래서 여기서 한번 정리해 봅시다. 진짜 하나님은 전혀 우리가 기대하는 이익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사실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 우리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까? 그것은 우리가 이익을 받을 자격이 애초부터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성경 말씀은 우리가 더 소유하려고 축복이란 이름으로 더 끌어 모으려는 그런 자세로 나올 때, 바로 그 자세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세가 아니고, 마귀가 원하는 자세라는 것을 꼬집어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계시를 주신다는 겁니다.
그럼 일반교인들이 교회 갈 때 어떤 마음자세가 돼야 됩니까? ‘주여, 저는 또 뭐가 문제가 많습니까?’라는 마음가짐으로 교회 와야 되는데, 한국교회는 어때요? 벌써 교회 문 열 때부터 어떻게 합니까? ‘교회 왔습니다. 보너스 내놓으세요.’ 벌써 이익과 손해 보면 안 나올 수가 있습니다. 하고 협박 비슷하게 남들은 안 가는 교회를 내가 갔으니까, 남들은 안 믿는 하나님을 내가 믿었으니까 믿은 만큼 내 보상을 해줘야 다른 사람한테 전도가 막히지 않고 다른 사람한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마음껏 과시하고, 그러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나도 기분 좋고 사람들도 덩달아 기분 좋고, 우리가 이렇게 동업하면 장사가 잘 되지 않습니까? 이런 마음가짐으로 교회 가는 거예요. 목사들은 거기에 맞춰서 ‘이렇게 해서 누구 이익 봤습니다.’라는 이야기를 설교에 온 도배를 해버리고.
사도바울은 십자가 언급하면서 예수님 오신 것은 죽기까지 복종했다 했죠. 예수님이 죽기까지 복종해서 세속적으로 실질적으로 얻은 이익은 뭡니까? 아무것도 없죠. 이 세상 적으로 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서 얻은 이익은 뭡니까? 세상 것은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뭐 배고플 때 돌이 떡 되게 했다면 떡이라고 먹었죠. 그런데 그게 아니라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세상은 우리만 덜렁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뭔가에 포위 돼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것? 다른 하나님으로 섬기고 싶어 하는 것! 그러한 분위기 속에 참된 성도는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주변의 환경이 그렇게 녹녹지 않아요. 우리의 신앙을 돕지 않습니다. 이구동성으로 ‘교회 가서 이득 챙겨라. 만약에 교회 안 가면 있는 것도 날라 간다.’ 이런 협박 비슷한 분위기로 우리는 실제적으로 이익 챙기는 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 6장 오늘 내용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런 이익이 없는 숨어있는 하늘나라에서 다니엘이 툭! 하고 튀어나옵니다. 그렇다면 다리오 왕, 성경에는 다리오라고 돼 있는데 세상 역사에서는 다리우스, 다리우스 왕, 이 나라는 바사나라인데 바사나라는 페르샤라고 하는데 지금 어디냐 하면 이란입니다. 이란이라고 바뀐 것이 1900 년도 초반이고 그 전에는 페르시야였어요. 페르시야라는 것은 옛날 바사나라 영토를 다시 회복해 보겠다는 그런 정치적인 이념 때문에 페르시야라고 하다가 이란으로 바뀌었거든요. 이 바사나라의 영토가 어느 정도냐 하면 여기 터키 밑에 여기 지중해 있고요. 키프로스 크레타, 터키 밑에 지금 한참 내전 벌리고 있는 나라가 시리아인데 성경에서는 아람나라예요. 아람나라 밑에 가면 이게 북이스라엘인데 밑에 유다나라 합쳐서 이게 이스라엘! 북이스라엘 옆에 암몬이라는 나라가 있고 그 밑에 모압이라는 나라가 있고 그 밑에 에돔이란 나라가 있어요. 이쪽(에돔 우측)은 사막이고 그 우측에는 아라비아가 있습니다. 솔로몬 때 아라비아 여왕이 찾아왔죠. 암몬과 이스라엘 사이에 흐르는 강이 흐르는데 요단강이에요. 요단강은 2개의 호수 사이를 흐르는데 위에는 예수님께서 설교 많이 하셨던 갈릴리 바다예요. 밑에는 죽음의 바다라 해서 롯의 처가 소금기둥이 된 사해가 나오죠. 주일 오후 때 집사님이 왜 하필 소금기둥이냐 질문해서 설교로 연결시켜 했습니다.
바사, 페르시야 나라가 어디까지 점령했느냐 하면 이게 원래 페르시야 나라가 아니고 원래 그전에 바벨론 나라가 있었고 바벨론 나라 전에는 앗수르 나라가 있었어요. 앗수르, 세상적으로는 앗시리아, 앗수르에서 나라가 바벨론으로 바뀌고 바벨론을 누가 접수했는가, 바사가 접수하고 바사를 누가 점령했느냐 하면 바로 알렉산더가 세운 나라 헬라마케도니아, 헬라마케도니아가 어디냐 하면 지금의 그리스 나라예요. 위쪽에 반도가 있는데 아래쪽을 마케도니아, 위쪽을 아가야라 하고 여기 아테네, 스파르타, 고린도가 있는데, 이쪽 알렉산더 헬라가 전부를 다 점령했고 그래서 헬라마케도니아가 되었고, 이 바사나라는 총 200년 기원전 530년부터 330년까지 200년동안 점령해서 튼튼한 나라인데, 알렉산더한테 붙어서 한방에 올인해서 전쟁에 져서 다 날라 가 버렸어요. 요 헬라마케도니아 나라가 또 누구한테 접수 당하느냐 하면 마지막 최후의 제국 로마제국한테 당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 이야기가 다니엘 뒤에 나오거든요. 짐승 네 마리가 나오면서 이미 그 이야기가 성경 다니엘에 나오더라 말이죠. 그러면 성경에 나오는 이러한 이야기는 처음에 바벨론, 바사, 헬라마케도니아, 로마, 이래서 짐승이 네 개인데, 이 짐승 이야기 4개가 왜 성경에 나타나느냐 하면, 그건 세상 나라 짐승나라 설명하는 게 아니고, 예루살렘이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느냐 하는 것, 정작 하나님한테 관심 두고 신경 쓰는 것은 이런 나라가 아니고, 정작 하나님께서 심어놓은 나라, 그 나라가 뭐냐 하면 바로 유다나라인데요. 그게 왜 유다나라이냐, 우리가 알기로는 그걸 이스라엘이라 하잖아요. 그런데 제가 방금 이스라엘이라 하지 않고 무슨 나라라 했습니까? 유다나라라 했다고요. 아니 유다나라는 남쪽나라만 유다나라인데 남북 합해서 이스라엘이라 해야 옳지 않느냐 하는데, 그 나라를 제가 유다나라라고 한 것은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점점 더 세밀해지기 때문에 그래요.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북쪽 이스라엘을 포기하고 남쪽 유다나라를 챙기는 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시나리오, 계획서가 주어지기 때문에. 그 계획서를 언약이라 하는데 그 마지막 언약이 뭐냐, 그것이 다윗언약입니다. 다윗언약!
그럼 그 전에는 무슨 언약이냐, 그전에는 모세언약이죠. ①모세언약은 이스라엘 전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 언약이 사라지고 ②다윗이란 사람에게 준 언약은 오직 내 아들은 전체 이스라엘이 내 아들이 아니라, 오직 유다자손만 내 아들이 된다고, 아들 개념이 바뀝니다. 신기하죠. 그러다가 ③예수님이 오셔서 이제는 어느 집단이 아들이 아니고 오직 한명이 아들 이예요. 누가 아들입니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오직 예수님만 아들입니다. 이로써 한명으로서 아들은 끝나고 그 다음에 그 예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이 이제는 반대로 전체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유다가 아니고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전에 있던 이스라엘은 뭐고, 예수님 성령 받고 난 뒤에 이스라엘은 뭐냐, 전에 있는 것은 모형이라 하고, 성령 받아 새롭게 된 이스라엘은 이거는 실체라고 하는 겁니다.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건축 설계 사무소에 가면 설계사 책상에 모형이 있잖아요. 그 모형이 예쁘다고 그 안에 들어가서 살 수는 없는 문제입니다. 좁아서. 그런데 그걸 왜 만들어놨겠어요? 앞으로 내가 설계해서 완공되면 이 모습 나옵니다. 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구약에서는 설계도를 미리 만드는데 그 설계도는 재료가 뭐냐 하면(잘 들으세요.) 그 재료가 그 시대의 사람과 그 시대의 시간과 그 시대의 역사를 가지고 그 시대 사람들이 지었던 죄를 가지고 그런 모형을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 예수님 오시고 난 뒤의 인간의 죄는 옛날 구약 때 했던 그 죄하고 죄가 질이 달라요. 구약 때 죄는 뭐냐 하면 살인해야 살인죄고, 간음해야 간음죄고, 그 때는 안식일 어기면 죄고 십일조 안하면 죄고, 구약 때는 설계 사무소에 있는 모형에 있는 그 죄는 율법에 위반되면 다 죄가 되는 거예요. 십일조 안 하면 죄고, 안식일 안 지키면 죄고, 그리고 부모를 공경 안하면 죄고, 죄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뭐라 했습니까? 모형 이예요. 이제 실제로 모형을 완성해서 진짜 이스라엘이 오게 되면 무엇이 죄냐 하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게 바로 죄가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게 죄라 했잖아요. 이게 굉장히 어려운 말 이예요. 이걸 다른 말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자기의 행함을 기대하게 되면 그게 바로 죄가 됩니다. 왜냐 하면 오직 구원은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다 이뤘다는 것을, ‘내가 행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행해서 내가 구원받습니다.‘를 믿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가운데 뭐가 빠졌느냐 하면 ‘나 이것 행했습니다.’가 우리 구원에 전혀 보탬이 되거나 삽입되면 안 되고 그건 죄가 되기 때문에 빠져줘야 돼요. 방금 제가 이야기한 이야기가 너무너무 어려운 이야기예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나오는 답변은 한 개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해서 교회 되겠나?‘ 하는 이야기, 딱 그 이야기지, 딴 거 안 나와요. 그 이야기가 옳든 그르던 그건 문제가 아니고 그런 이야기해서 과연 교회가 유지가 되겠느냐, 딱 그 한 마디 나옵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죠. ‘당신은 그동안 예수를 믿은 게 아니고 눈에 보이는 교회를 믿었군요.’ 그럼 일곱 교회 지금 하나라도 있습니까? 없습니까? 일곱 교회 중에서 남아있는 교회 현재 하나도 없습니다. 왜, 터키는 대부분이 무슨 교입니까? 이슬람교죠. 일곱 교회가 지금 터키 지역이었는데 지금 없어요. 교회는 현재 우리가 아는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현재 교회는 등록하고 목사 데려다가 간판 걸고 헌금해서 부동산 매입해서 교육관 지으면 그걸 교회라 하잖아요. 성경에 그런 걸 교회라 한 적이 없어요.
교회는 뭐냐 하면 오직 성령이 임한 사람을 교회라 합니다. 왜 성경에 나온 그 명확한 개념은 놔두고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 개념을 자꾸 사용하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모르는 게 아니라 알죠. 사람들이 성령 안 받아도 천당 갈 수 있는 방법을 달라는 거예요. 성령 안 받고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성령은 십자가에서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십자가로 구원 됐습니다.’ 그걸 믿지 않고 천국 가는 방법은 없습니다. 못갑니다. 못 간다는 이야기를 해줘야 돼요. 교회에서! ‘오세요. 보내주겠습니다.’ 이러면 안 되고, ‘성령 없이는 육은 육으로 남기 때문에 성령 없이는 안 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해줘야 돼요. 괜히 교회라는 학원 다녀서 합격도 못하면 얼마나 섭섭합니까?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나라라 하는 것은 이득이 있어야 되는데 여기 다니엘의 존재는 어떤 이득도 그 나라에 제공하지 않습니다. 왜냐, 다니엘은 그 나라를 위한 사람이 아니고 숨어있는 모형, 숨어있는 하늘나라를 위해서 그 당시에 파견 근무하듯이 일종의 스파이, 바사나라의 스파이로서 가는 겁니다. 그렇다면 바벨론, 바사, 헬라, 그리고 헬라마케도니아, 그 다음에 로마는 결국은 그건 하나의 껍데기에 불과하고, 푸딩에 있어서 케이크라 하면 진짜 건포도는 빵 속에 숨어있어요. 다니엘처럼. 그리고 그 시대의 성도들처럼. 건포도 푸딩 알죠? 눈에 안 띄게 숨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심사는 그 바사나라, 헬라나라, 그런데 있는 게 아니고, 뭐에 있다? 그 안에 하나님이 심어 둔, 하나님의 신이 임한 다니엘 같은 사람한테 있거든요. 그러면 무엇이 짜그러 들어야 됩니까? 바벨론이 짜그러지고 바사나라가 짜그러지고 헬라나라가 짜그러지고 로마 나라가 망한다는 것은 무엇을 찾아내기 위함이죠? 그 안에 들어있는 진짜배기 이스라엘, 그걸 영어로 ramnants, 남은 자, 그 남은 자를 색출하고 뽑아내기 위한 작업으로서 하나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이 대한민국이 좋다, 나쁘다, 라고 할 것도 없고, 미국을 가도 미국을 부정하지 말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애써 부정할 이유가 없어요. 인큐베이터가 없으면 애는 자라지 않기 때문에. 그런데 신생아에게 인큐베이터는 아기에게 영양분을 공급하기 위한 인큐베이터라면, 성경에 나오는 인큐베이터는 뭐냐 하면 진짜 예수님이 주신 생명과 그리고 돈 벌어서 빵 사서 밥을 먹어서 얻고자 하는 목숨과의 그 차이를 보여주기 위한 인큐베이터, 그러니까 ‘~~는 아니거든.’이라고 말하기 위해서 아닌 것을 잔뜩 깔아놓는 그러한 역할이 바로 세상 나라가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의 기도 내용 중에 이런 게 있죠. “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너희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 이걸 진정성 있게 들으면 눈물 납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뭐라 하느냐, “우리는 고아네요” 예수님이 이야기합니다. “나는 너희들을 고아 같이 방치하지는 않겠다.” 그 말은 무엇입니까? ‘고아 맞다’는 이야깁니다. ‘네가 잘 봤어. 고아야. 너 어미 아비가 밥이나 먹여주고 술 먹으면 해장국은 끓여주는지는 모르겠지만 너의 마누라가, 그게 보호자가 아니야, 영적인 보호자는 진짜 하나님의 뜻을 거기다 쏘옥 심어놓고자 하는 모든 그 계통, 통로는 주변의 인물에서 오는 게 아니고 직접 너에게 하나님이 직접 너희를 관리하는 거예요.
지난 시간에도 했지만 “이미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는” 그 작업은 하나님이 직접 나서서 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심지어 구원받은 우리도 우리자신에게 그 작업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우리가 갓난아기처럼 살면 족합니다. 존재의 무게를 빼세요. 가볍게 삽시다. 내가 나를 내가 기대하는 이상형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분투노력 하지 맙시다. 그거는 자칫하면, 자칫한 게 아니고 당연히 그건 자기 의가 되고, 나중에 자기가 자기 구원받기 위해서 애썼던 모든 교회 다니고 봉사 헌금한 것, 전도한 것, 이것이 자기의 구원의 근거가 되는 줄 알고, 토대가 되는 줄 알고, 그렇게 복음과 위배되는, 십자가가 더 이상 쳐다보지 않고 자기 행한 것만 쳐다볼 수 있는 그런 위험도가 아주 강렬합니다. 그냥 맡기세요. 맡길 때가옵니다. 다니엘 세 친구처럼.
그리고 오늘 본문에 미리 이야기합니다. 오늘 본문에 다니엘처럼, 다니엘은 누구한테 맡겼느냐 하면 사자 굴에 있는 사자들에게 맡긴바 됩니다. 사자하고 다니엘하고 언제 친했다고, 안 친하죠. 그런데 바보 같은 사자가 멀뚱멀뚱, 일부러 달려 들으라고 굶겨놨는데 사자가 바보도 아니고 아이큐가 낮은 사자인지, 다니엘을 보고도 눈만 뜨고 있다 말이죠. 한 마리는 하품을 하고 있고, 먹기 싫다는 거예요. 주변에 있는 인물들은 그런 예상을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리오 왕은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었어요. 충신 다니엘을, 충신이란 다른 말로 뭡니까? 나라에 그만큼 공로를 했다 말이죠. 나라를 이끄는데 정치적인 지주가 되는 그런 다니엘을 내가 잘못 꼬임에 빠져서 내 손으로 죽이게 되다니, 잠도 못자고 벌벌 떨다가 아침에 가서 황급히 먼저 면회했잖아요.
‘다니엘아, 거기 잘 있나?’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다니엘 하는 말이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저를 살려냈네요.’라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이 대목이 6장 20절 21절 죽 나오는데, 이 대목을 보면서 여러분, 즐겁습니까? 아니면 스트레스 받습니까?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내 이야기라면 이건 화 날 이야깁니다. 왜 사람을 그렇게 간 떨어지게 만드느냐 말이죠. 여러분, 병 주고 약 주지 말고 병 없는 게 낫지 않을까요? 우리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십니까? 아예 고난 안 주고 늘 평안하게 살면 되지, 고난주고 기적적으로 살려주는 것, 기적적으로 살려주는 것도 간 떨어질 이야기다 말이죠. 그렇게 위태위태하게 해서 불안해서 하나님 믿겠습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것은 성도라 하는 것은 성도의 안정과 보존을 위해서 성도가 존재하는 게 아니고, 성도의 존재 이유는, 과연 하나님 살아있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내가 살만하다는 걸 증거 하는 게 아닙니다. ‘남은 죽어도 나는 살아나야 돼, 그것 때문에 성도가 있는 게 아니에요. 그건 일반 사람들한테 물었어요. 모든 세상 사람들은 세상은 멸망해도 자기는 살아있어야 된다고 우기는 인간들이예요. 그런데 성도만큼은 사나 죽으나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조치다. 살아계신 주님의 조치가 이렇다는 거예요. ’너희들한테 주님 안 보이지? 나를 봐라. 나 이렇게 곤궁에 빠졌고 나 기적적으로 살아가고 있잖아.‘ 그러니 주님께서는 죽이시기도 하시고 살리시는 분이라는 것을 몸소 자기가 시범 조교로 채택이 돼서 주님의 손에 놀아나고 있는 거예요. 성도가.
여기에 26절에 보면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라 내 나라 관할 아래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지니 그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변치 않으실 자시며 그 나라는 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그는 구원도 하시며” 그 다음에 뭐라고 하죠? “건져내기도 하시며” 건져내려면 이게 빠져야 되죠? 빠지면 자기 손으로 기어 올라오면 안 되잖아요.
이거 정리해 봅시다. 구원이란 절대로 내 손으로, 내 능력으로 구원되지 않는 상태임을 우리가 믿어야 됩니다. 구원이라 하는 것은 내가 십일조해서 십일조 한 복 온다. 이렇게 되면 안 돼요. 십일조를 퍼부었는데 돈 한 푼도 안 돌아오고 안 돌아온 게 아니고 올해 회사 망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뭘 요구했습니까? 십일조 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제안한 것이고, 십일조 그만큼 했으면 이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서 아들을 안 뺏어야 되잖아요. 십일조 한 것은 십일조 한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십일조 한 것을 받는 게 아니고 뭘 받기를 원합니까? 아브라함이 가장 아끼는 것, 다시 말해서 차라리 내가 죽을지언정 이 애는 다치면 안 된다는 그것, 그걸 주께서는 ‘이리 도, 이래 내놔.’ 경상도 말로 ‘인 도’ 이리 내놔, 이 뜻 이예요. ‘내 놔’ ‘이것만큼은’ ‘내 놔’ 내 놓는 방법도 그냥 주는 게 아니고 네 손으로 아주 회를 치듯이 ‘네 손으로 죽여라’
사랑 하는 자를 사람은 못 죽입니다. 사람은 누굴 죽이느냐 하면 마음속에 항상 살인이라 하는 것은 사랑 하는 자를 살인하는 게 아니고, 내가 꼴사나운 놈, 미운 놈, 요새 대통령 선거 때문에 미운 사람 한 둘이 아니죠. 미운 사람이 쥐도 새도 모르게 기차에 받히든지 교통사고가 나든지 우연을 가장해서 죽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하지만 그걸 죽인다는 것은 살려 달라 할 사람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만은 절대로 하나님이 죽이면 안 됩니다, 하는 것을 우리는 아침 눈 뜨면 늘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이여, 우리 애들하고 저 애들은 다치면 안 됩니다. 만약에 다치게 하면 나 하나님 안 믿을 거야.’ 이런 마음 자세로서 보람찬 하루 일과를 시작합니다.
교회 올 때도 성경책 들고 ‘하나님 성경책 들고 오는 것 사진 찍으세요. 내가 가는 이유는 내 자식 잘 되게 하기 위해 가는 것 아시죠?’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인간이 생각하는 이 모든 것이 이게 별나요. 이게 바사나라요. 이게 바벨론이고 로마입니다. 우리자신이 바로 로마시민이고 바벨론 시민인데 우리 속에 누가 있어야 돼요?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서 우리 뜻대로 말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예수님의 뜻대로 가니까 우리가 내가 할 수 없는 구원이 매일같이 발생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다니엘이 싸웠던 것처럼 우리는 매일같이 기독교와 싸워야 되고 교회와 싸워야 되고, 특히 나 자신과 매일같이 싸움이 일어나야 됩니다. ‘하나님 이익 주셔야 됩니다. 그래야 또 교회 갈 희망이 생깁니다. 만약 지금 이 어려운 환경을 더 어렵게 한다면 정말 제가 하나님 섬길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알아서 기세요. 알아서 잘 해주셔야 됩니다. 지금 바짝 장사 잘 되게 하시고 올려줘야 헌금도 두둑이 합니다. 하나님 아시죠?’ 이러한 나 자신, 이건 실질적인 이익이 없으면 하나님을 안 믿는다는 사실, 말을 달리하면 이익을 주는 분을 나의 신으로 나는 믿겠습니다. 나한테 입맛에 맞는, 나를 죽이는 하나님이 아니고 나를 살리는 경우에만 계속해서 믿을 용의가 돼 있다. 이러한 마음 자세,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죄인이란 뜻입니다.
또 정리하게 되면 구약에서의 죄라 하는 것은 그 시대상에서의 그들의 생존의 위협을 가하는 신은 나쁜 신이고, 생존에 유리하면 좋은 신이라고 믿는 이것이 바로 죄가 된다는 겁니다. 왜 자기 자신이 제일 소중하기 때문에.
그런데 신약에서의 죄는 뭡니까? 자기를 미워하지 않고 자기를 부인하지 아니하고 그게 바로 죄죠.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뭘 받을 것이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말을 나부터 먼저 적용시키는 사람, 그걸 적용 안 시키면 죄가 돼요. 그런데 우리는 아침이 이상해. 아침에 눈만 뜨면 우리는 적용을 뭐로 합니까? ‘나부터 살고 봅시다. 하나님.‘부터 나오는 거예요.
아침에 큐티하는 이유가 뭔데요? 새벽 기도 나오는 이유가 뭡니까? 다 나 잘되기 위해서 하는 거 아닙니까? 왜, 나는 소중하니까. 나는 소중하니까, 옆집이 소중한 게 아니고 내가 더 소중하니까.
다니엘 6장에 모든 주어진 환경이라는 것은 신약 성경에 있어야 될 오늘날 우리에게 일어날 일을 모형으로 그 시대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 말은 굉장히 간단하지만 이걸 설명하면 이렇게 긴 겁니다.
자, 그러면 구체적으로 한번 들어가 봅시다. 아까 이야기했는데 후딱 지나가서 잊어 버렸죠?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인큐베이터로 보는데 그건 중요한 것은 따로 있기 때문에, 자기 백성이 중요하다 했죠. 왜 자기 백성이 중요하냐, 자기 백성 안에 누가 들어있기 때문에? 장차 오실 예수님이 들어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제일 중요해요. 예수님을 위하여 우리가 있어요.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이런 말씀 있어요. “이제 누구든지 우리 가운데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이 없다.” 했죠. “우리는 더 이상 자기를 위해서 살지 말고 나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을 위해서 살게 함이라“ 고린도후서 5장 14절부터 17절까지 보면 그게 바로 새로운 ‘피조물이라. 예수 믿으십니까?’ ‘예.’ ‘그러면 당신 위해서 살지 않겠네요.’하고 말이 같은 내용의 말이어야 한다 이 말이죠. 그 말은 뭐냐 하면 뭐를 탈락시키기 위함입니까? ‘예수님이 나한테 잘해주기 때문에 예수 사랑합니다.’라는 자는 탈락될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까발려주는 거예요. 진짜 천국은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는 사람만이 갈 수 있는 곳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아무도 그 말씀 지킬 위인은 없죠. 그렇기 때문에 아까 이야기했지만 우리 힘으로 안 되는 것을 주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안 되는 걸 되게 하는 거예요. 여러분, 좁은 길 갑시다. 우리가 좁은 길을 왜 가야 돼요? 좁은 길이 좋은 길 같으면 자기 혼자 안 가겠죠. 많은 사람들이 찾겠죠. 그런데 좁은 길 특징이 뭐냐 하면 찾는 이가 없어요. 그러면 그 길로 가면 외롭잖아요. 우리 복음 아는 사람들이 저보고 늘 이야기하는 게 뭡니까? ‘목사님, 정말 외롭습니다. 이야기할 상대도 없습니다.’ 그 이야기 많이 듣게 됩니다. 누구하고 이야기해도 소통이 안 돼요.
그런데 제가 듣기에는 지금 자랑하고 있는 거예요. ‘목사님, 아유, 웬 은혠지 모르겠어요. 동창생이고 친구고 아들이고 자식이고 남편이고 다 떠나버리고 이젠 나만 가고 있어요. 웬 은혜 웬 떡인지 모르겠어요. 정말. 말씀이 이렇게 실현되다니.’ 이런 식으로 자랑하는 것으로. 그런 자랑은 해도 괜찮습니다. 왜, 십자가만 자랑하니까. 이게 인력으로 안 됩니다. 항상 거짓 선지자는 많은 사람들이 인정해야 그게 진리답다고 가르쳐요. 예수님은 열두 제자 다 떠나버렸는데.
그래서 항상 다니엘 하나 솎아내기 위해서, 다니엘은 아무것도 안 해요. 그런데 주변 환경이, 분위기가, 아까 인큐베이터라 했죠? 분위기가 벌써 움직여 가면서 다니엘 죽이기에 들어갑니다. 영화 ‘라이온 일 병 구하기’라는 게 있잖아요. 이건 반대입니다. 주변은 다니엘 죽이기로 나오는데 그런 제목을 영화제목을 단다면 ‘다니엘 살리기’입니다. ‘다니엘 구하기’ 그게 바로 구원이라는 겁니다.
그럼 한번 일단 적어볼게요. ➀번 모든 것은 그냥 평범하다. 조용해요. 그런데 드디어 하나님께서 작업을 시작합니다. 작업을 하게 되면, 여기 다니엘이 있다면 ➁ 다니엘 빼놓고 나머지 사람들은 뭐로 변하냐, 이게 바로 애굽으로 변합니다. ➂ 다니엘을 뽑아내면 출애굽이 되는 겁니다.
처음에 히브리인들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애굽에서 나왔죠. 그 다음이 되면 이스라엘에서 이스라엘이 나와야 됩니다. 왜, 이미 기존의 이스라엘은 이미 애굽화 되었기 때문에, 그런데 기존의 이스라엘이 애굽화 되는 것도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지는 거예요. 언약이란 말이 어렵지만 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이렇게 자꾸 주어지는 것은, 기존의 언약을 지켰다고 해서 사람들이 자부심을 갖게 돼요. 그러면 ‘기존의 법대로 내가 안식일 지켰으니까 난 죄 없다.’라고 하면서 마음은 뭐냐. ‘이 정도 말씀 지켰으니까 세상 것도 좀 주셔야죠.’라고 마음이 말씀 지켰다는 걸 근거로 해서 정작 내가 진짜 음흉하게 기대하는 것, 희망하고 소망하는 것, 그것 달라고 손을 내밀 때 손을 치기 위해서 새로운 언약이 집어 들어갑니다. 집어 들어가면 ‘하아, 고것도 죄였구나.’가 되는 거예요.
이 새로운 언약이 들어갈 때 등장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희생당해야 될 사사들과 그리고 선지자, 사무엘, 다윗, 사사들, 그리고 다말, 룻,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우리아 장군, 다윗은 자기가 다윗언약에 의해서 하나님의 아들이고 이제는 왕이니까 ‘으흠’ 하고 암몬나라, 암몬나라는 어디쯤 된다고요? 바로 시리아 밑에, 아람나라 밑에 암몬이고 그 밑에 모압이고 그 밑에 에돔이라 했죠. 자꾸 되풀이 돼야 돼요.
암몬 나라하고 우리아 장군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전쟁하고 있는데, 다윗은 할 일이 없어서 위에서 내다보니까 자기 밑에 어떤 여인이 뒤태가 장난이 아니죠. 잘 빠진 여자가 옷을 벗고 목욕을 하더라 말이죠. 그러니까 다윗의 관심사는 이스라엘을 어떻게 하나님 뜻으로 하느냐 하는 것은 날라 가 버렸어요. 왜, 남자니까. 나는 이스라엘의 왕이다. 나는 cia국장이다. 나는 아프가니스탄의 총사령이다. 백날 해도 남자니까, 남자니까 하나님께서는 총 사령관 cia국장을 부르는 게 아니고 ‘너는 남자였었어.’ 그걸 지적하는 겁니다. 나는 목사니까, 장로니까, 하나님께서는 ‘웃기지 마라. 나는 그런 거 안 통한다. 너의 타고난 죄 성,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죄를 겨냥해서 할 때, 그 죄는 율법을 지킨다고 죄가 없어지는 게 아니고, 오히려 율법이라는 것이 핑계로 덧대기, 위장용으로 율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우리의 근본적인 죄, ’말씀을 지켰습니다. 뭐 했습니다.‘를 가지고 사실은 그런 걸 잡아당겨서 자기 속에 은근히 노리고 있는 바를 그냥 억지로 억누르는 용도로 그동안 하나님 말씀을 인간들이 사용한 거예요.
그런데 고맙게도 그 껍질을 요렇게 양파껍질처럼 벗겨주시는 이 고마움! 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이발소나 미장원에 가보세요. 내 것을 깎잖아요. 얼마나 나쁜 사람입니까? 하지만 이발소 앉아 있으면 얼마나 고맙습니까? 내가 못 깎는 이 머리를, 내 털인데, 내 털을 왜 지가 깎아요? 깎아 놓고 돈까지 내라 하니. 우리가 스스로 우리는 감추기 급급한데 바깥에서 들어온 게 더러운 게 아니고 속이 더럽잖아요. 그걸 말씀을 통해서 그야말로 골수를 쪼개듯이 다 쪼개서 너는 뭘 행해도 죄가 된다는 것을 노출시켜 주는 그 고마움, 그게 직접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면 그런 혜택이 없습니다.
목사입네, 장로입네,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어디 하늘나라가 그런 데가 어디 있어요? 성령이 기름을 부었니, 받았니 발랐니, 다~ 아무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그건 남 속이기 위한 용도예요. 그걸 제가 뭐라 했느냐, 경건한 사기꾼! 경건을 상품으로 해서 사기를 치는 거예요. 경건함, 다윗이 그런 사람입니다. 다윗언약이 주어짐으로 말미암아 암몬과의 전쟁은 전쟁도 아니에요. 진짜 장차 오실 메시아 전쟁은 바로 외부 전쟁이 아니고 무슨 전쟁? 바로 내 안에 애굽이 있는 거예요. 애굽에서 나와서 애굽이 아니고, 내 안에 애굽을 하나님께서 일부러 만들어 내요. 내 안에 애굽을 계속 만들어 내요.
그래서 구원이라 하는 것은 내 힘으로 나를 끄집어 낼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께서 원하는 것은 율법도 아니고 제사도, 번제도 아니라 상한 심령이 되기를 원해요. 상한 심령! 상한 심령을 잘 모르시겠거든 한번 실험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고기 같은 거나 고등어나 물고기 같은 걸 가지고 쓰레기통에 한 5일간만 놔둬 보세요. 그거 들춰보세요. 그게 먹을만 합니까? 상했죠? 더러워서 못 먹어요. 냄새가 지독하죠. 그게 우리 모습입니다. 그렇게 푹~ 익어줘야 돼요. 썩어줘야 그때 주께서 원하는 상한 심령 이예요.
십일조 다림질해서 드리면 받는 게 아니고 소프라노, 알토, 베이스, 테너 그런 찬양과 비파소리, 다윗의 노래 가락, 찬송가 몇 장 그런 찬양을 받는 게 아니고, 경건한 우리 예배, 파이프 오르간 그 소리 듣는 게 아니고 푹~ 익어서 이제는 내가 봐도 내가 꼴 보기 싫어, 내가 봐도 ‘인간아, 왜 사냐.’ 싶을 정도 일 때 그럴 경우에 가지고 나오세요. 고거 주님 앞에 가지고 나오시면 주께서 ‘오~ 잘 익었네.’ 하고 받으십니다.
왜 이게 중요하냐 하면 우리아 장군이 죽었잖아요. 왜 죽었습니까? 누가 죽인 거예요? 다윗이 죽였죠? 그러면 우리아 장군은 피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누굽니까? 다윗이죠. 평소에 다윗이 우리아 장군한테 감정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일체 없어요. 일체 죽일 마음도 없는데 그놈의 여편네 때문에 그것도 바로 사택이 바로 자기 앞에 있어서 목욕하는 바람에, 그걸 주님께서 주선을 한 겁니다. 가해자 될 마음도 없는 인간을 가해자로 만들어 버리고, 피해 입지도 않을 인간을 나 때문에 피해 입은 자로 만들어 버릴 때, 그게 바로 주님의 언약이 완성이 되는 거예요.
나는 태어나기도 전에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누군지 몰라요. 초등학교 때 교과서에 예수님이 안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미 십자가 지심으로서 이미 피해자가 먼저 등장하고 ‘누구야? 저분을 저렇게 죽이신 분이.’ 나중에 성령께서 주선해주시니까 가해자 속에 제가 가해자로서 엮여 있더라 말이죠. 그걸 저는 이렇게 이야기했죠. 그걸 주일 낮에 ‘조합‘이라 했죠. 둘이 죄인과 의인의 조합, 이걸 영어로 하면 SET,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딱 세트가 될 때 요 세트가 될 때, 바로 언약이 구성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장난감으로 사용하는 겁니다. ‘자, 한번 보자, 요 다리는 어디 몸통하고 맞는가 보자, 머리 되시는 것은 예수님이고, 요 예수님하고 맞는 팔 다리는 오! 철컥, 맞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 머리 되시고, 우리는 주님의 몸에 지체가 되고, 딱 딱 끼어 맞춰져요. 그런데 나만 지체가 된 줄 알고 으스대는데 보니까 오! 여기도, 오! 저기도, 같이 눈으로, 어떤 이는 발로, 다리로, 손가락으로 다양성 있게 똑같은 일을 하는 건 아닌데, 그 일을 하면서 ’나는 상한 심령일 뿐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십자가 앞에서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그런 사람들이 모였다면, 그것이 공간과 지리적인 모든 것의 한계를 넘어서서, 그것은 바로 하늘나라 총회! 그게 바로 교회! 하나 밖에 없는 교회! 몸도 하나요. 교회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그게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니까 변화 산에서 제자들이 누굴 만났습니까? 거기서 엘리야 만났잖아요. 거기서 또 모세 만났죠. 멀리 가지도 않았어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같이 예수님 앞에 서니까 먼저 죽었던 사람들도 그 자리에 다 있네. 이것을 예수님이 뭐라 하셨느냐, “너희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볼 자가 있느니라“ 10분 쉽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