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서

다니엘서6강-무너진 공간121018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3. 6. 6. 20:40

2012-10-19 01:20:18 조회 : 433         
무너진 공간 121018 이름 : 이근호 (IP:117.55.14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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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교회-다니엘4장10절(무너진 공간)121018-6강a -이 근호 목사

제 6강a

다니엘 4장 13절 읽습니다. “내가 침상에서 뇌 속으로 받은 이상 가운데 또 본즉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왔는데”라고 돼 있죠? 순찰 자가 있다는 거죠. 여기 보면 느부갓네살이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꿈에 순찰 자가 내려오는 걸 봤다는 말은 평소에 뭐가 빠진 채 살아왔다는 말입니까? 순찰 자가 빠진 채 살아왔죠. 순찰차가 아니고 순찰 자! 평소에 느부갓네살이 자기가 왕으로 살면서 뭐가 빠진 인생을 살았느냐 하면 순찰 자가 여기에 들어오지 않는 채로 세상을 본 거예요.

순찰 자라는 것은 감사예요. 관찰 자, 정찰하는 그런 자신의 모든 것을 정찰하시는 분. 그런 분이 빠진 채로 그동안 살아온 겁니다. 그런데 여기 하나님께서 꿈을 준 것은 뭐냐, 순찰 자가 있다는 것에 화들짝 놀란 거죠. 그러면 순찰 자를 집어넣고 생각한다면, 자기가 왕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감시받는 왕, 순찰 당하는 왕이 되겠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결국 느부갓네살이 ‘나는 누구다.’에서 ‘이 세상은 내 세상이다.‘가 되거든요. ’나는 누구다‘에 대해서 뭔가 오해했고 곡해했다는 것이 들통 나는 겁니다. 평소에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자부했는데 그건 뭐가 빠졌다? 순찰 자가 빠진 입장에서 ’나는 이렇다.‘고 주장한 겁니다.

이러한 모습은 결국은 여기 16절에 보면 짐승이 되죠. “또 그 마음은 변하여 인생이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나리라” 이러한 지시를 받았죠. 순찰 자가 없을 경우에는 자기는 사람이었는데 순찰 자가 등장하고 난 뒤에 ‘너는 짐승이 되어라’고 한다면 진정 느부갓네살은 인간입니까? 짐승입니까? 어느 쪽 이예요? 짐승에 불과했다.

어제 수요설교에서는 이걸 짐승이라고 하지 않고 뭐라 했느냐 하면 이걸 가상의 세계라 했죠. 인간은 자기가 뭔가 자기에 대해서 안다고 여기고 자기 위주로 세상을 만들어 보니까, 실제 세상하고 다른 가상의 세계 속에 둘러싸여 자기가 살아온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어려운 거 해봅시다. 둘 중에 하나 묻겠습니다. ①번, 공간이라는 것은 비어있다. ②번, 공간은 내가 만든다. 몇 번입니까? 공간이 비어있다는 이것은 물리적 공간이라 합니다. 자연세계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순찰 자를 집어넣으니까 그동안 이 자연세계에서 ‘내가 임금이다.’라고 여겼던 그것이 가상의 세계, 잘못된 사고방식이었습니다. 공간은 내가 여기 있으매 내 위주로 어떤 세계가 형성된 거예요. 이걸 우리는 공간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요새 공간이란 개념 앞에 많이 붙어요. 세면 공간, 국회의원들의 공간, 공간이라는 것이 하나가 아니고 다수가 돼 버렸어요. 그걸 흔히 사회적 공간이라 하는데 그런데서 사람들은 물리적 공간은 사회적 공간이 아무리 많더라도 북한도 있고 현재 유엔 가입국이 193개국이거든요. 193개 나라가 각자 자기국가란 공간을 점유하잖아요. 하지만 그 모든 나라가 이구동성으로 주장하는 것은 뭐냐, 이러한 사회적 공간 말고 국가적 공간 말고 우리들끼리 공간 말고 자연세계는 두 개다? 하나다?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잘못 이예요. 그게 가상의 세계라.

왜냐하면 과학에서 20세기 천문학 중에서 제일 충격적인 사실 하나가 (물리학에서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지만) 뭐냐 하면, 우주에 중심이 있다는 사고방식 이예요. 여러분, 우주에 중심이 있습니까? 이거 듣고 정상상태를 주장하는 천문학자가 화를 냈어요. 우주에 중심이 있다는 말은 이게 말이 안 되는 게 우주에 중심이 있으면 우주는 한 중심에서 전부 다 퍼져나갔다는 것밖에 안 되거든요. 이건 인간의 상식에 어긋난 거예요.

여기 중심이 어디 있습니까? 그냥 비어있는데, 우주는 비어있고 중심이라는 게 없잖아요. 우주는 중심이 없다니까요. 우주가 왜 중심이 있어요? 중심이라 하는 것은 인간들이 사는 그 동네에 중심이 있지, 내 중심, 니 중심. 중심이란 말은 인간들이 납득이 될 때 중심이지 우주에 중심이 있어야 중심을 잡지, 우주는 중심이 없다고 본 거예요.

그런데 빅뱅이론이 나오고 난 뒤에는 우주에 중심이 있다는 이야기 듣고 천문학이 충격 받아버렸어요. 우주에 중심이 있다는 말은 모든 우주가 한 지점으로 모인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하늘이 중심이 있습니까? 이게 우리의 그냥 상식의 인식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잖아요. 무슨 이야기냐, 중심이라 하는 것은 인간사회에서 국가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야, 성도 나와라, 중심이 여기 있다. 중심 잡아라.’하는 이야기는 인간들이 있을 때나 인간들이 결집하고 단결할 때 하는 거예요. 가정을 아버지 중심으로 모여야 된다. 이럴 때 중심이지, ‘어, 별아, 중심에 모여라.’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별에 중심이 없는데. 별은 그냥 물질 덩어리인데. 중심이란 인간이 논할 때 중심이다 말이죠.

그런데 우주에 중심이 있어버리게 되면 결국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 중심을 이 지점도 아니고 이 지점도 아니고 어떤 특정 지점을 중심이라고 한다면 이 특정 지점을 중심이라고 잡았던 어떤 분이 있다는 이야기가 되거든요. 그렇게 되면 과학에서 멀리 쫒아 보냈던 그 신을 다시 호출해서 불러올 판 이예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중심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지정해줄 때만 중심이 있는 거예요. 중심이란 의미가 있는 거예요.

‘우리 5명 중에서 누가 중심이 될까? 대장은 누가 될까?’ 인간들이 그럴 때 중심과 관계있을 때만 중심이 되는데, 우주라 하는 것은 우주 한복판에 어떻게 인간이 있습니까? 인간도 없는데 왜 중심이 등장하느냐 이 말이죠.

그렇다면 성경에 뭐라 돼 있느냐, 성경에는 모든 것이 누구 중심으로 돼 있습니까?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면 모든 만물은 예수님 중심이잖아요. 예수님 중심이 돼 버리면, 그 말은 뭐냐 하면, 그동안 인간들끼리 ‘중심 잡자’ 이 말이 전부 다 헛수고가 되는 겁니다. 주님한테 허락도 안 받고 자기들끼리 우긴 게 돼요. ‘우리들끼리 중심이다. 우리 대통령이십니다. 임금이십니다.’해도 진짜 임금이 오셔서, 예수님이 오셔서 ‘내가 임금이다.’ 해버리면 자기들끼리 투표해서 임금된 것은 무용지물이 되잖아요. 아무짝도 소용없잖아요. 아무짝도 소용없다는 말은 인간이 무슨 짓을 해도 그건 하나마나한 짓을 해온 거예요. 평생 90평생 동안 계속해서 하나마나한 짓을 해온 거예요.

그래서 주님이 요구하는 것은 ‘바로 그거야.’ 하나마나한 존재라는 거예요. 있으나마나한 존재라는 겁니다. 교회를 세우거나 절에 가든지 뭐를 하든지 그건 다 씨잘 데 없는 짓, 헛짓한 거예요. 교회는 왜 세우는데요? 교회를 세우면 교회를 세운 사람이 그 교회에 중심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중심이 인정받습니까? 인정 못 받습니까? 인정을 못 받거든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중심이라 하는 것은 나한테 의미가 있을 때 우리는 중심을 찾게 돼 있습니다. 가정이 흔들릴 때 ‘가장이 돼서 흔들리면 안 되지.’라고 할 때는 그 가족의 아내가 되든지 자식이든지 연관된 사람일 경우에 그런 거예요. 남의 집 가정이 흔들리는 것하고 우리하고 무슨 관계있습니까? 내 가정이 흔들릴 때 ‘중심 잡아야지’ 이런 말 나오듯이, 회사가 흔들릴 때는 ‘사장님 중심 잡아야 됩니다.’라고 나오듯이 남의 회사는 망해도 관계없는 거예요.

다 나하고 연관돼 있는데 그동안 느부갓네살이 순찰 자가 오기 전에는 누가 중심이었습니까? 자기가 중심이었다고요. 그런데 순찰 자가 와 버리니까 자기는 중심이 아니고 짐승이야 짐승!

이 말은 니가 생각하는 공간은 니가 자연세계에서 느부갓네살 니가 제일 우두머리니까 국가질서 차원에서 니가 중심이라고 여기는 모양인데, 그래서 11절에 보면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고는 하늘에 닿았으니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해서 분명히 느부갓네살이 그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중심 국가라는 것이 분명하죠. 중심 국가에서 중심 자는 누구냐, 느부갓네살로 돼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한 게 어렵지만 다시 한 번 약간 어려운 부분을 해보면 분명히 우리는 국가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한테 이야기하죠. 국가한테 이야기 안하죠? 느부갓네살한테 이야기하죠. 이건 뭐냐 하면 이 국가라는 이 추상적인 개념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국가를 뭐로 번역해 버린다? 국가를 하나의 인물화 시키는 겁니다. 이걸 뭐라 하느냐, 국가를 인물화 시킨다는 말은 그 국가를 교체할 때 교체하고 그 국가를 없애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어떤 국가라는 개념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은 인물로 나타나요. 인물이 누구죠? 예수님 아닙니까?

다윗언약이 뭐냐 하면 국가 이전에 인물이라는 거예요. 다윗의 자손. 이스라엘은 국가로 알고 있잖아요? 출애굽기 4장에 보세요. 아들입니다. 이 대목 해결하는데 제가 옛날 신학교 다닐 때 고민 많았어요. 4장 22절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이게 도대체 풀리지 않는 거예요.

어떻게 나라가 아들이 됩니까? 아들은 사람이고 나라는 추상적 질서체제인데, 나라라는 것은 여러 사람이 모인 결과로 이야기하잖아요. 여러분, 나라는 없어요. 나라는 없고 그 안에 구성원들이 있을 뿐이죠. ‘여기 나라 하나 주세요.’ 하면 나라 줍니까? 나라 자체가 없잖아요. 학교라는 게 없어요. 왜냐 하면 학교 가면 교수 있고 학생 있고 캠퍼스 있고 행정직원 있지, 학교가 어디 있어요? 그런 게 결과적으로 모여서 학교라 하잖아요. 회사라는 게 없잖아요. 회사 건물 있고 직원들이 있잖아요. 회사 사장님 보고 ‘아이고, 회사 나오십니까?’ 이건 바보 같은 소리인데.

이 출애굽기 4장 22절에 보니까 이스라엘을 뭐라? 내 아들이라. 도대체 이걸 어떻게, 주석 봐도 나올 리가 없고, 이걸 해결할 신학자도 없고, 혼자 끙끙 앓는 거예요. 성경 보고 혼자 끙끙 앓던 구절 많습니다. 굉장히 나름대로 고민했던 구절들이 논문 쓰면서 많았어요. 어떻게 이게 아들이냐? 아들하면 얼마나 구체적입니까? 그래서 그 당시는 해결이 안 되고 해결이 안 되니까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몇 십 년 전에 그걸 알았죠. 아! 바보같이 언약을 빼놓으니까 해결이 안 되지.

언약이 뭐냐 하면 아들이란 말은 아버지가 있다는 거예요. 아버지는 숨어있는 거죠. 숨어있는 아버지가 일을 하면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들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자식이 있을 때 아들이죠. 딸이나 아들이나. 인간이 모여서 국가를 이루잖아요. 이스라엘. 이스라엘 백성도 마찬가지예요. 이스라엘도 아들로 보지 않고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로 이렇게 본다는 거죠. 자기들이 하나님의 아들인 줄 알았죠. 자기들. 인물이니까. 우리가 모인 국가라는 건 인물이 아니고 자기가 아들이니까 ‘하나님, 아들 여기 있습니다.’ 이런다 말이죠. 오늘날 교인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런데 이 문제가 언약을 통해서 풀렸어요. 뭐냐 하면 언약이 없는 우리 인간이 보기에는, 언약이 없다는 것은 아버지의 관계가 끊어진 걸 말합니다. 그래서 언약이 없이 봐버리면 본인도 누군지 몰라요. 내가 있고 하나님 섬겨버리면 이건 언약이 아니고 이건 비 언약, 로마서 첫 번째 설교 때 했지만 비 약속, 약속이 아닌 상태에서는 항상 출발점이 누구다? 나부터 출발해요. 내가 있고 ‘하나님, 저 어떻게 아들 됩니까?’ 지가 아들 되기를 원하는 거예요. 아들은 없어요. 아들은 없고 아들이 아들로서 기능을 다할 때 아들로서 등장하는 겁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아버지 역할을 다할 때 결과적으로 나오는 것이 뭐냐,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구약은 이 결론부터 이야기한 거예요.

진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게 하는 것은 아들(예수님)은 숨어계시는 거예요. 어떻게 숨어계시는가? 이걸 가지고 주의 이름, 하나님 이름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누굴 부릅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이스라엘은 그냥 국가적인 개념체가 아니고 아들이 되는 거예요. 어떻게? 언약에 의해서. 언약에 준해서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와 똑같은 법칙이 뭐냐,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신약에 교회라는 게 있죠? 그런데 신약의 교회라는 것은 개념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예배당 있고 사람 있고 그거 교회 아닙니다. 역시 새 언약에 의해서 예수님을 부르는 그 사람들이 바로 교회가 되는 겁니다. 이제 이해가 쉽죠? 주의 이름(예수님)을 부르는 자들이 교회예요. 요걸 구약에 의하면 그 당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그 당시에 이스라엘이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거예요. 아들이라 하는 것은 내가 불러서 아들이란 말이 아니고, 아들이란 말은 언약에 의해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그 집단을 아들로 규정한 겁니다. 왜냐 하면 그 안에 진짜 아들이 들어있기 때문에. 설명해도 설명이 더 어렵네.

지금 설명이 더 어려운 이유가 우리가 언약에서 출발하지 않고 ‘나 여기 있는데 신이시여 나 어떻게 행복하게 나 죽고 난 뒤에 천당 보내줘서 행복해 줄 거요?’ 이렇게 나오니까 모든 성경이 다 뒤돌아 물러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가짜들만 죽 모여오는 거예요. 성경 이렇게 껴 맞추고 이러하면 당신은 구원받습니다. 이러하면 복 받습니다. 전부 다 이런 가짜들만 우르르~ 몰려와서 ‘그래, 그래 납득돼. 그래.’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나부터 출발하지 않고 나는 이미 죽은 몸이고, 왜 누가 나를 죽였느냐, 왜 죽였느냐, 언약에 의해서 죽었다고 한다면 내 죽은 자리에 누가 우뚝 서있습니까? 예수님이 딱 서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이 서 있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죽은 뒤에는 내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 되시는 예수님과 두 분 사이에 의논할 문제지, 내가 거기 끼어들 수가 없어요. 바로 이것을 고백하는 것이 새 언약을 고백하는 거예요. 그게 교회고 그게 구약에는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4장에서는 ‘내가 아들 되게 하겠다.’는 말 이예요. 정답은. 내가 이스라엘을 아들 되게 하겠다. 하지만 너희들이 이스라엘이라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도 아니고 아들도 아니고 그냥 이방나라와 마찬가지예요. 그러니까 나중에 멸망당하잖아요.

이야기를 계속 이어봅시다. 여기에 순찰 자가 들어왔습니다. 순찰 자가 들어옴으로서 이 세상은 느부갓네살이 세상 중심이었죠. 세상에 큰 나무가 자라서 하늘에 닿는다 했으니까, 느부갓네살이 세상의 중심인데 그 중심에 순찰 자가 옴으로서 이 느부갓네살 세상에 순찰 자가 온 게 아니고, 이 자체 중심성이 날라 가 버린 거예요. 순찰 자가 보내신 그 분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공간이 열리는데 그 공간이 천국입니다.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대 자연이 비어있다고 그게 공간이 아니고, 그곳에 예수님이라는 인물의 모든 영향이 그 공간을 꽉 차고 있다고 믿을 때 그 공간은 천국이 되는 겁니다. 변화 산 같은데 올라가 보세요. 전 안 올라갔습니다만 지금 변화 산 올라가 보면 나무 있고 자갈 있고 똑같아요. 여기 있는 관악산이나 대구 팔공산이나 전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데 변화 산이 졸지에 뭐로 바뀌었습니까? 천국으로 바뀌었죠. 왜 바뀌었습니까? 그 변화 산에 누가 계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에 그 변화 산이라는 공간은 인간이 아는 그 흔해빠진 그 공간의 일부를 차지하는 그 여러 산 중에 산이 아니라 예수님이 있다 해서 그 공간은 예수님을 보여주는 공간이기 때문에 그건 천국이 되고 엘리아 등장하고 모세 등장한 겁니다.

그래서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어디든지 하나님의 나라’예요. 하늘나라가 오기 전에 하늘나라를 다니엘에서는 뭐로 표현하느냐, 공간 중심 성 가지고 이렇게 표현하는 대목에 우리가 여기에 놓여 있는 겁니다. 하늘나라를 공간으로 설명할 때는 중심 성의 변경이 일어난다. 그러면 아까 일본 주소가 어떻게 된다고요? (김 권사님이 어렸을 때 일본 살았던 주소) 도쿄또 하찌까와시 아끼모노쬬 이쪼매 하지쥬 3번지, 그 번지는 일본 천왕이 정한 거예요. 일본의 공간 이예요. 일본의 공간인 동시에 우리나라에서는 그 일본의 공간을 인정을 해줍니다. 왜, 인간과 인간들끼리는 그러할 권리가 있다고 보고, 각기 민족은 자기 국가를 세울 권리가 있다고 보는 거예요.

여기에 만약 순찰 자가 떠버리면 그 주소는 의미 없는 주소가 돼 버립니다. 그곳은 하늘나라가 될 수 있고, 지옥이 될 수 있고, 그것은 왜냐 하면 우리가 누구의 지시를 받고 살아가고 있느냐가 비로소 밝혀지거든요. 사람 사는 것이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게 아닙니다. 뭔가 보이지 않는 이 공간 중심 성에서 오는 은혜와 배려와 혜택으로 우리가 살거든요. 머리카락 세는 것도 그리고 발걸음도 세는 것도 이건 그분께서 다 주신 건데,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고만고만한 인간들의 교육을 받아놓으니까 각자 자기 몫의 공간을 차지하면서 ‘여기서 여기까지는 내꺼. 여기서 여기까지는 니꺼 인정해 줄게. 그러니까 손 떼고 여기는 내꺼야.’라고 자기 공간만을 삼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느부갓네살 짐승 같은 인간의 재탕 이예요. 이게 짐승의 본성입니다. 요 공간에서는 내가 최고가 되고 싶은 거예요. 왜, 뭘 따먹었기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여기 선악과, 생명나무 이야기를 해봅시다. 선악과, 생명나무가 인간하고 차이점은 선악과, 생명나무의 존재는 이게 상당히 당당합니다. 굉장히 당당해요. 그런데 우리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당당하지를 못하고 숨어버리죠. 그러니 우리는 사실은 중심이 될 수 없었던 거예요. 중심되려면 당당히 나서야 되는데 ‘아담아 어디 있느냐’ 하니까 숲 속에 숨었죠. 그것도 그냥 숨지 않고 무화과로 치마 만들어 입고 숨었다 말이죠.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숨어버리는 아담과 하와, 그것을 원래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는 생명나무와 선악과의 취지를 담아내는 공간의 일부로 채택이 돼서 여자의 후손과 그 다음에 뱀의 후손이라는 새로운 시나리오를 집어넣어 버려요. 새로운 계획을 여기다 쏘옥 집어넣어버리면 그 공간에 있던 모든 피조물들은 요 두 노선에 의해서 한쪽은 S극, S극, N극 붙듯이 각각 자기 성질대로 달라붙게 돼 있습니다. 그 일을 누가 도와주느냐, 땅이 도와줘요.

땅이 도와줘서 땅에서 뭐가 솟구쳐 올라오느냐 하면 엉겅퀴와 가시가 올라옵니다. 그러면  아담은 이마의 땀을 훔치죠(닦죠). ‘에이, 왜 이리 땀이 나는 거야? 왜 잡초는 뽑아도 또 나는 거야? 아유, 힘들어 죽겠다.’ 힘들어 죽겠다. 여러분, 제가 어제 ‘쌍용자동차와 하버마스의 철학과 복음‘이란 글을 올렸어요. 쌍용자동차의 사태와 복음과의 관계는? 고 중간에다 하버마스의 철학을 집어넣었습니다.

하버마스의 철학은 뭐냐 하면 소통의 철학, 대화의 철학입니다. 인간이 대화로 해서 해결 안 되는 것 없다. 협상하고 타협하고 서로 양보하되 서로 자기의 존재를 준중해 주면 모든 문제는 긍정적으로 풀리게 돼 있다는 게 하버마스의 철학입니다. 대화! 누가 특정 진리를 주장하면 안 되게 돼 있어요. 진리를 주장해 버리면 이건 동일성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동일성을 없애버리고 비 동일성이지만 항상 서로의 대화가 이끌어내면 임시적으로 동일성이 되고, 다시 어떤 사태가 일어나면 ‘비 동일성으로 돌아가자‘ 하는 헤겔의 상호 인정의 정신에 입각해서 하버마스의 철학을 했습니다.

여러분, 쌍용자동차 사태 아시죠? 장부조작해서 부채비율을 168%에서 561%로 돌려서 2046명의 해고자를 재무구조 악화됐다고 잘라버리고 그 다음에 상하이 자동차 기술, 하이브리드 기술, 국가에서 돈 주고 한 기술을 중국으로 빼돌리고 기업합병(M&A)해서 팔아넘기고 투자자는 이익보고 그리고 노동자와 그 가족들은 다 쫓겨나오고 심지어 쌍용자동차 2046명만 쫓겨난 게 아니고 거기에 하청업자까지 숫자까지 계산하면 수만 명이 다 해고가 된 거예요. 그 해고할 때 77일 동안 파업할 때 그때 조 현호 검찰총장이 나서서 강제로 했고 검찰총장이 됐고 거기에 엉터리 재무구조에 의해서 해고를 인정해줬던 그 법관은 대법관이 돼 버리고 전부 다 주체해버리고, 해고해버렸는데.

하버마스 철학에서 복음을 이야기하면서 거기는 결국은 이 공간이라 하는 것은 순찰 자가 없이 결국 인간들만 있는 공간이다. 이것만큼은 우리가 인정하고 들어가자. 하면서 시작되는 거예요. 인간보다 더 지혜롭고 지성적인 그런 것은 없다고 본다 이 말이죠.

하지만 여기서 뭐가 일어났습니까? 22명 죽었죠? 22명 화병으로 자살해서 죽었잖아요. 죽음이 있더란 말이죠. 결국 하나님께서는 뭐냐 하면 아담과 하와가 죄 짓고 난 뒤에 그것을 한약 짜는 것, 천을 이렇게 막대기로 싸서 비틀어 짜는 것, 한약을 짤 때 짜야 나오잖아요? 하나님은 죽음을 짜내는 거예요. 죽음을!! 그 뒤에 창세기 4장에 보면 누구 피를 짜냈습니까? 아벨의 구원 피를 짜내는 거예요. 짜내고 주님께서 ‘짝짝짝’ 잘했다 하시죠. 짜내는 거예요.

마태복음 5장, 아까 유튜브 두 번째 했죠? 마태복음 5장 12절 보면 복이 뭐예요? 만약 내 공간 내 영역이 있다면 챙기는 게 복입니다. ‘요기까지는 니꺼, 여기까지는 손대지 마. 내꺼.’ 그럼 축복이라 하는 것은 그 내꺼 가진 것으로 내가 생존하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더 끌어 모아야 되고, 더 확장해야 되고, 더 쟁여야 되잖아요. 그런데 마태복음 5장 12절에 보면 복은 뭐던가요? 복음과 그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그것이 뭐다? 복이다. 복 나왔잖아요. 스데반 집사가 복이다. 스데반 집사가 성령이 충만해서 설교하고 돌멩이 날아와서 돌멩이가 스티로폴 같으면 맞아도 튕기고 괜찮은데 진짜 돌멩이예요. 하나님은 봐주는 것도 없어요. 뭐 대역 쓰는 것도 없고 엑스트라 대역도 안 쓰고 이건 진짜 때리니까 진짜 주연급 배우가 죽어버렸어요. 그걸 보고 주님께서 일어나서 ‘짝짝짝’ 꼭 김일성 박수치듯이 ‘짝짝짝 잘했어, 잘했어. 잘했어. 굿! 잘했어. 어서 오너라.’ 하고 스데반 집사는 ‘저들을 용서해 주소서.’ ‘알았어. 용서해 줄게.’

이게 뭐냐 하면 가상의 세계에 가려져 있던 진짜 현실은 뭐를 짜내야 갈 수 있다? 피를 짝짝 짜낼 때 피를 매개체로 해서 가상의 세계와 현실 세계는 구분 되는 겁니다. 이게 언약입니다. 제가 지난주일 오후에 이야기했잖아요. 우리 상식 같으면 교회 가서 ‘주여,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면 ‘야, 믿음 좋다. 정말 너 잘 믿는구나.’ 하는데, 믿음이냐, 아니냐의 그 설비 장치를 누가 정해줍니까? 우리가 ‘믿습니다.’ 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믿음의 장치를 만들죠. 그 만든 장치가 뭐냐 하면 ‘니가 제일 사랑하는 아들 데리고 오고, 칼 준비하고, 그 다음에 바치는 거 준비하고 니 제일 사랑하는 아들 데리고 불쏘시개 가지고 모리아 산에 오너라.’ ‘왜요?’ 내가 믿음이란 이런 거라고 내가 정해 놓은 장치에 의해서 합당해야 그게 믿음이 되기 때문에. 우리 같으면 그거 안 하고 그 아들 죽이는 대신 교회 가서 철야 하면서 ‘믿습니다.’ 1000번 하면 그걸로 대충 때워주면 참 좋겠는데 그게 아니고 니가 가장 사랑하는 것, 정말 걔 없으면 니가 자살하고 싶은 것, 고거, 그거 없으면 자살하고 싶은 그게 뭘까요?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이었습니다. 그건 더 천명하죠. 인간은 누구나 죽지만 자식은 나보다 더 소중하잖아요. 자식의 DNA에 내 DNA 50%가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 엄마한테 받았지만 50%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기적인 유전 법 보면 거기 계산법이 나와 있는데. 최소한 25%라고 보게 되면 난 안 죽었어요. 자식이 살아있다면 나는 살아있는 거예요. 만약에 자식이 죽어버리면 아휴, 나는 DNA가 죽어버리고 그러면 나는 뭐냐, 대가 끊어지죠. 그 대가 끊어지는 것이 한약 짜서 피, 단절을 보여주는 것, 너는 어떤 경우라도 너의 공간에서 못 벗어나고 죽어야 벗어나요. 그렇다고 자살하면 안 돼요. 자살하지 말고 주께서 죽으라는 자리가 있어요. 고 자리에 엮어져서 죽어버리면 너는 너의 생명 말고 흙에 속한 생명 말고 하늘에 속한 생명을 받기 때문에 영생을 받게 됩니다.

그거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게 뭐냐, 고마운 하나님께서 뭘 주셨느냐 하면 율법을 주셨어요. 율법은 율법이 없이 죽은 것은 그냥 헐떡거리는 숨이 약해서 죽은 거지만, 율법이 있어서 죽어버리면 죽는 이유 알고 죽게 돼요. 아, 그게 또 율법의 좋은 점이라. 율법을 주니까 뭐한다? 입을 막고 율법이 우리를 저주케 하죠. 율법을 지킬 인간 없으니까. 그러니까 죽으면서도 죽는 이유를 알고 죽으면 그게 영생이라. 그게 바로 믿음 이예요. 율법에 의하면 ‘내가 저주받아 마땅합니다.’ 그걸 아는 게 영생 이예요. 그게 이미 구원은 개시됐습니다.

이미 그 작업이 우리 속에 일어났다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언약 적으로 아들로서 대우받고 있다는 거예요. 언약이 오게 되면, 아들이 아들로서 대우받게 됩니다. 그러면 진짜 아들 예수님이 이루었던 것이 언약을 통해서, 파이프를 통해서 우리한테 전부 다 주어져서 우리가 아들도 될 수 없는 것이 아버지라 부르는 양자 영을 받아서 양자의 역할로서, 자격으로서 아들 영광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걸 가지고 뭐냐 하면 구약에서 이런 용어가 어려워요. 상급 또는 기업이라고 해요. 이게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상속, 유산이라 하는데 그냥 유산, 상속이 아니고 이건 뭐냐 하면 말을 이렇게 어렵게 해야 돼요. 뭐냐 하면 아들에게 상속하는 게 아니고, 아버지가 아들 만드는 자에게만 상속하는 거예요. ‘나 아들입니다.’해서 주는 게 아니고 ‘까불지 마, 니는 내 아들 아니야.’ 아들은 제치고 아들 되게 만드는 작업에 말려든 사람에게만 상속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은 한 푼도 못 가져가고 에서도 한 푼도 못 가져가죠. 그럼 몽땅 누가 다 가져갑니까? 둘째 아들 야곱이 다 가져가죠. 왜, 야곱은 누가 만들었기 때문에? 에서는 지가 태어났다는 그것을 자기 공간이라고 여겼지만, 야곱의 맏이 되는 공간은 자기한테 없어요. 자기는 항상 2인자고, 항상 둘째예요. 둘째가 차지하는 복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야곱을 죽여서 이스라엘 만들어서 이스라엘이 에서를 제치고 맏이 되면 되겠죠. 이스라엘이 누구냐? 예수님이 이스라엘 이예요. 예수님이 이스라엘이고 야곱은 예수 안에서 죽은 사람이라서 예수님이 가졌던 그 아브라함의 복을 공유하게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축복이라는 겁니다. 그게 스데반 집사가 갔던 축복.

성경은 모든 전체 내용이 나 여기 있는데 뭐 챙기느냐, 이런 식으로 하게 되면 자기 공간이 확보돼 있기 때문에 이것은 저주가 주어져요. 내 공간이 확보돼 있으면 안 됩니다. 내 공간의 경계선은 허물어져야 돼요.

이 어려운 이야기를 제 나름대로 쉽게 하려고 쓴 글이 아까 쌍용자동차와 하버마스 철학에서 세 번째 복음 글에 나와요. 뭐냐 하면 성경 세계 속에는 죽어야 들어간다. 죽어야 갈 수 있지, 산 채로 가버리면 성경을 기웃거리고 있는 거예요. 성경 본문에 어디 있더라. 기웃거리기만 하지, 성경 세계 속에 풍덩 뛰어드는 것은 죽어야 되는데 자살해도 되지 않아요. 그것도 써놨어요. 베드로가 자살한다 할 때 ‘아서라 말아라.’ 했잖아요. 자살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죽여주는 출구가 있어요. 고 방식에 따라서 죽었을 때만 비로소 그 사람은 말씀의 세계 속에 들어가 있는 겁니다.

전에 그런 예를 들었잖아요? 요한계시록 할 때 플라스틱 장식품에 보면 여기 조그만 물고기도 있고 상어초도 있고 플라스틱으로 딱 굳어져서 장식품 있죠. 쉽게 하면 거울 속이라 하죠. 거울 속에 무슨 수로 들어갑니까? 우리가 거울 속에 못 들어가죠. 들어갈 수가 없죠. 육으로 난 것은 거울 속에 못 들어갑니다. 거울 속에 들어갔다가 튀어 나왔다가 이건 말도 안 되는 거죠.

그게 안 되는 이유를 아는 자만이 그가 이미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 이예요. 천국은 예수님이 계시는 나라기 때문에 말씀이 완성되지 않은 사람은 그 속에 못 들어갑니다. 완벽한 의인이 아니면, 예수님 같이 완벽한 의인이 아니면 아무도 못 들어가요. 그런데 아무도 예수님처럼 완벽한 의인이 될 수가 없고 오히려 완벽한 죄인들만 있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 피를 주셔서 자기 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는 겁니다.

그 말은 결국은 주께서 우리를 이 안의 세계로 이미 신분상 고정시켜 놔버렸다. 이제는 여기서 들어가는 것도 내 맘대로 못 들어갔지만, 이건 나오는 것도 빼도 박도 못해. 조져놨어요. 우리는 구차 없이 천국에 가야 돼요. 가기 싫은데 가야 돼요. 가면 심심할 텐데, 그래도 가야 돼요. 지루할 텐데 그래도 가야 돼요.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 보고, ‘아브라함님’ ‘왜요?’ ‘저 면회 갔다 오겠습니다.’ ‘어디?’ ‘지옥에’ 지옥에는 면회 안 됩니다. 군대는 돼요. 교도소도 가끔 되는데 지옥은 면회도 안 돼요. 면회하면 몰래 손수건에 물 적시어서 갖다 주니까, 사회 인정이라는 게 있잖아요. 사람이 자기한테 구박한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면 그때 자기 의는 업 되죠. 미워하는 남편을 오히려 더 석고대죄하면 아! 하는 의로운 게 있잖아요. 얼마나 멋있습니까? 권사님 말씀 잘해줘서 주일날 잘 써먹었습니다.

지옥에는 면회가 안 된다니까요. 그러니 지금 친하게 잘 지내세요. 마지막 얼굴이라. 이제 헤어지면 못 만나요. 왜냐하면 마이클 잭슨이 죽기 전에 췄던 춤이 뭐냐 하면 이런 춤 이예요. 특수 신발 신고 처음에는 뒤로 걷는 것부터 하지만 앞으로 넘어질 듯해도 분명히 넘어져야 되는데도 특수한 신발을 신어서 안 넘어지고, 춤 봤습니까? 마이클 잭슨 춤추는데 요렇게 기울어지는 거예요. 기울어져도 너~무 기울어졌어. 엄청 기울어졌는데 안 넘어가요.

우리 성도가 그래요. 분명히 이건 죄짓고 지옥에 가야 되는데 이게 안 넘어가는 거예요. 왜, 뿌리가 하늘에 있기 때문에 뽑히질 않아요. 우리 맘대로 양말 벗고 신발 벗고 그럴 수는 없는 겁니다. 아~무리 죄를 져도 지옥에 갈 수가 없어요. 이게 언약 적 사고방식 이예요.

언약이 빠져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예수 믿어도 혹시 안 믿게 되면 지옥 갈 거야.’ 이게 바로 악마가 마지막 노리는 마지막 함정입니다. ‘니가 과거에 예수 믿었어도 지금 벌써 예수 안 믿잖아. 그러니까 니는 지옥 가는 거야.’ 이게 악마의 마지막 함정 이예요. 악마는 언약을 빼고 이야기합니다. 언약을 빼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언약을 빼고 이야기하다 보니까 모든 행위의 주체는 나 이외는 달리 행위 주체는 없어요.

그런데 언약이 돼 버리면 우리는 말려든 거예요. 행위 주체가 누굽니까? 나를 나 되게 하시는 행위가 있잖아요. 주님에 의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우린 ‘내가 어떻게 만들어졌지? 그거만 감사하면 되는 겁니다. 인생사는 거 편하죠? 얼마나 편합니까? 도대체 하나님이 날 왜 이렇게 만들었느냐 말이죠.

여기서 뭐냐 하면 다양성인데, 많은 다양성을 유발해도 결국은 그것이 중심이 되는 예수님 중심으로 가게 돼 있다 이 말이죠. 모세가 엘리아가 아니고 엘리아가 모세가 아니죠? 하지만 구세주는 누구다? 둘 다 이구동성으로 ‘예수님 언제 돌아가십니까?‘ 라고 예수님 죽으심에 대해서 변화 산에서 이야기했잖아요. 모세가 엘리아가 아니고 엘리아가 모세가 아닙니다. 따로 있지만 그들의 중심은 뭐였다? 예수님이었죠.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발, 손 뭐라 하지만 우리는 손 있고 발 있고 다 다르지만 한 성령을 마시고 오직 주님만 고백하게 된다고 고린도전서 12장에. ’성령이 아니고서야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하고 그 뒤에 나온 이야기가 한 성령을 마셨기 때문에, 누가 ‘저 사람이 나보다 못하다. 잘났다.’라는 자체가 이게 성사가 안 돼요.

왜냐 하면 인간 대 인간으로 가는 게 아니고, 인간이 어디 거쳐서 가다 보면 이미 예수님을 거쳐서 이미 나는 죄인으로 가기 때문에 ‘어! 나는 죄인인데, 어, 당신도 죄인이야? 우리 둘 다 예수님 아니면 희망 없겠네.’ 이럴 때 이게 교회가 되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느부갓네살 같은 짐승을 벗어난 거예요. 짐승은 세계에 중심에 있지만 그게 짐승으로서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으로 있는 거죠. 짐승은 이게 관계가 끊어져 있고 우리는 주님을 거쳐서 가는 겁니다.

그러면 세상의 원리는 어떠냐. 세상의 공간원리를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기리고차‘라는 게 있어요. 발명품인데 발명품 년도는 지금부터 600년 전 1400년 경 장영실이라는 사람이 기리고차라는 걸 발명했어요. 기리고차는 뭐를 하느냐 하면 말 그대로 하면 쉬워요. 길이를 재는 차. 태코미터라는 게 택시마다 있어서 특히 밤에 타면 말 잘~ 달리죠. 미터기 올라가는. 태코미터의 원리가 600년 전에 장영실에 의해서 이미 실제로 만들어졌어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수레가 있고 여기 종이 있고 북이 있고 거기에 두 개의 톱니바퀴가 있어요. 수레가 1800회전을 하게 되면 연결된 톱니바퀴 하나가 150회 회전되고 뒤에도 또 150회 회전되면 뒤에는 1회 회전이 되고, 이 원리가 뭐냐 하면 수레가 1800회 회전하면 2킬로미터인가 돼요. 이게 한번 돌 때마다 종이 한번 땡 쳐서 이건 수레 달리면서 거리 측정하는 걸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택시 탈 때 바퀴가 큰 걸 타야 요금이 적게 나와요. 회전수와 관계되기 때문에. 작은 차타지 말고 바퀴 큰 걸 타는 게 요금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지금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보세요. 1회가 여러 개 모이면 북을 한 번 쳐서 전체 숫자를 아는데 장영실 이 사람 똑똑한 사람 이예요. 이 사람이 물시계를 세계 최초로 만든 사람인데. 이게 숫자 1이 여기 1800회전하잖아요. 그럼 뭐만 하면 됩니까? 1800에다 톱니바퀴 2개지만 여기다가 열댓 개를 놔버리면 이건 바로 공간분할이 되겠죠. 세분화 되겠죠. 이게 과학이고 합리화 아닙니까?

그렇다면 지상에서 천국까지 어떻게 올라가죠? 계속해서 천국은 1이니까, 유일자이니까, 하나밖에 없으니까 이게 다양성 아닙니까? 다양성을 계속 서열화 시키고 계급화 시키는 거예요. 대표 뽑아요. 대표는 성직자, 성직자의 대표를 또 뽑는 거예요. 또 뽑고 또 뽑고, 제일 마지막에 있는 사람이 땡~ 하고 하나님의 천국에 있는 종을 치면 되겠죠? 이것이 바로 인간세계, 인간들이 만든 우리들끼리의 인간 공간의 원리고 법칙입니다. 과학입니다. 합리화입니다. 모든 학문이고 이게 또 사업이 되겠죠. 고객들에게 회사가 더 세밀하고 친절하고 에프터 서비스가 더 완벽하게 갖춰지게 되면 나중에 종을 땡 치게 되죠. 그래서 진리라 하는 것은 아무리 진리가 있다 할지라도 인간 쪽에서 다가서면 아무리 태산이 높다 하되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다는 그 정신, 세 글자로 바 벨 탑! 이것이 바벨탑과 그리고 다니엘의 만남.

공간이라 하는 것은 하늘의 인물이 만들지, 너희들이라는 인물이라는 집합체로서 이 세상은 내가 도저히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느부갓네살 안에 누가 포로 잡혀 있습니까? 이스라엘이죠.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이게 얼마나 재밌는 일입니까? 옛날 이스라엘은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다. 언약을 받았다. 율법을 받았다. 우리의 모세는 직접 하나님께 십계명 받았다. 이걸 하나님 여기 계시고 여기 시내 산 있다면 여기의 대표자가 누굽니까? 모세가 올라가서 종을 땡! 친다고 본 거죠. 그러니까 백성들이 어려움만 있으면 누구한테 달려옵니까? ‘모세야,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라. 모세야 우리를 위해서 기도  해라.’ 만날 이렇게 기도했다 이 말이죠. 심지어 예레미야도 에스겔도 마찬가지고 사람들은 자꾸 예레미야한테 가서 ‘예레미야야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라. 예레미야야 하나님의 계시가 뭐냐.’ 그들은 이러한 모든 바벨탑에서 출발했던 이 자체가 자기 자신이 그런 권리가 없다는 것을 몰랐던 겁니다.

하늘나라는 하나님한테서 내려오는 것이고 그것도 어떤 모습으로? 핍박받는 모습, 아벨처럼 피를 짜는, 피 흘리는 모습으로 왔는데 이걸 모르고 사람들은 어떤 하나의 체계를 갖추어서 오르고, 오르고, 오르고, 오르고, 경건하고, 경건하고, 훌륭하고, 훌륭하고, 계시 받은 사람이 올라가서 결국 하나님 나라의 종을 땡! 하고 종을 칠 수 있다는 이 의식, 지금도 교회가 그 짓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말씀 드리는 것은 이제는 그것은 무너져야 되고 부서져야 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짐승 적 사고방식이고 이런 사고방식 가지고 느부갓네살은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본 겁니다.

결국은 느부갓네살을 여기다 세움으로서 이것이 여러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결국은 한 인물(人物(덧말:인물)) 이라는 것, 인물이고 여기에 마중 나오셔서 ‘에라이’ 하고 ‘전부 다 짐승이야’ 하고 심판하는 것도 한 인물이고. 그래서 숨어있는 순찰 자, 숨어있는 인물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로 꿈을 꾸게 하셨고 꿈의 해석을 바벨론에 포로 잡힌 다니엘로 하여금 이 꿈을 풀게 함으로 말미암아 다니엘의 노선이 이쪽 올라가는 노선이 아니고, 다니엘은 내려오는 노선, 다른 노선이 이미 여기에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다니엘이 진짜 현실을 아는 사람이고, 그리고 느부갓네살은 그냥 가상세계의 꿈꾸는 그런 존재에 불과한 겁니다. 합리적이고 과학적이고, 이 세상에서는 유용하게 보이지만 어느새 그것으로 하여금 우리 쪽으로 내려오시는 분을 잊게 만들고, 잊어버리게 만드는 그러한 훼방의 역할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염두에 둬야 돼요. 뭐가 잘 될 때 혹시 내가 교만하지 않은가, 생각해 봐야 됩니다.

10분 쉽시다.

**조선시대의 거리측정장치 기리고차**

기리고차는 일정한 거리를 가면 북 또는 징을 쳐서 거리를 알려주는 조선시대의 반자동 거리측정 수레이다. 장영실(蔣英實)은 왕명을 받아 중국에 유학하며 기술을 배워서 기리고차를 더욱 발전된 모습으로 개량하였다. 세종 때 각도 각읍 간의 거리를 조사하여 지도를 작성하는데 기리고차가 사용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문종 1년 지금의 서울 강남구 지역의 제방공사를 시작함에 앞서 그 거리를 기리고차를 이용하여 재었다는 기록이 있어 토목공사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측량 및 지도 작성 시 가장 중요한 것은 거리 측정이다. 조선시대 초기까지만 해도 원시적인 방법으로 자나 막대기를 가지고 재는 척측법이나 발자국으로 재는 보측법을 이용하였다. 이후에는 약간 더 발전된 승량지법을 사용하였는데 초기에는 새끼줄로 측량을 했고 후기에는 새끼줄이 신축성이 많아서 노끈이나 먹줄 등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은 오차가 많아 거리를 나타내는 단위로 척(尺), 보(步), 리(里)를 주로 사용하였다. 흔히 쓰는 자는 일반적으로 주척(周尺)을 썼다. 주척의 단위는 ‘6척을 1보, 360보를 1리’라 하여 3,600보를 10리(약 4㎞)로 나타냈다.

조선시대에 거리를 측정하던 장치. 반자동이며 수레의 형태를 띠고 있다.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중국으로 유학을 간 장영실이 이전의 중국에 있었던 거리 측정장치를 조선에 들여와 개량하여 만든 것이라고 전해진다. 수레가 1/2리를 가면 종을 1번 치게 하고 수레가 1리를 갔을 때에는 종이 여러 번 울리게 하였으며, 수레가 5리를 가면 북을 올리게 하고 10리를 갔을 때는 북이 여러 번 울리게 하였다. 마차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은 이렇게 들리는 종과 북소리의 횟수를 기록하여 거리를 측정하였다. 국립과천과학관에 옛 문헌을 토대로 복원된 기리고차가 전시되어 있다.
 이한례 (IP:203.♡.41.16) 12-10-26 18:35 
가락교회-다니엘4장10절(무너진 공간)121018-6강b-이 근호 목사

제 6강b

아까 제가 첫째 시간에 우리가 죽으면 구원 못 받고, 주께서 죽여주시는 그 원리에 같이 있어 줄 때 우리는 구원받는다 했잖아요. 그 원리가 뭐냐, 주께서 우리를 죽이시는 방법이 뭐냐, 이걸 다니엘에서는 이렇게 합니다. 바다를 땅으로 끌어당기는 원리! 이 원리예요. 처음에 땅이 생길 때 땅부터 있었던 게 아니고 바다부터 먼저 있었고 땅은 바다가 갈라지면서 틈이 땅이 되었어요.

노아 홍수 이야기를 제가 언젠가 했죠? 노아 홍수가 사실은 물의 세계로 환원되는 겁니다. 땅이 없다. 땅이 없던 그 시절로 돌아가는 거예요. 전부 다 물에 덮이고 말죠. 그리고 그것에서 땅이 나올 때는 그냥 땅이 나오지 않습니다. 뭘 머금고? 피를 머금을 때만 땅이 나오는 겁니다. 희생제물의 피를 머금고 새 땅이 거기서 나와요. 노아 홍수 끝나고 난 뒤에. 그때 하늘에서 뭐가 피었다 했습니까? 무지개가 피었다는 것은 그만큼 이 땅의 사정이 긴박하고 절박하다는 뜻 이예요. 처참하다는 겁니다.

이 무지개가 아니면 이건 도저히 물에 도로 잠길 수밖에 없는 세상이다. 이걸 성경에서는 뭐냐, 너는 날 때부터 악한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에, 무지개가 나서서 지켜주지 아니하면, 내가 지켜주지 아니하면 이 세상은 그야말로 물의 바다가 된다. 하지만 다시는 물로서는 심판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심판받아도 마땅한데, 다른 식으로 심판하기 위해서 내가 너를 지금까지 유보시키겠다 이 말이거든요. 이걸 어떤 강의에서 했어요.

바다를 끌어당겨서 땅을 점령시켜 버립니다. 이건 하나님의 죽이시는 죽음에 동참이 되는 겁니다. 그 죽음이 무슨 죽음이냐 하면 언약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언약의 죽음 속에 들어갈 때 우리는 비로소 언약으로 부활될 수 있는 노선에 놓이게 하는 겁니다. 총 쏠 때 총알이 있잖아요. 총 놔두고 총알을 던지면 이게 총 쏘는 게 아니잖아요? 총알은 어디 속에 들어가야 돼요? 총알을 그냥 던져봐야 맞으면 ‘아야’할 뿐이지 죽지는 않잖아요. 어디 속에 들어가야 돼요? 총신 속에 총알을 넣어서 격발해야 제대로 총알다운 총알이 나오잖아요?

하나님은 우리를 총알로 삼는 거예요. 우리 혼자 놔두고 ‘신이시여, 제가 순교하겠습니다.’ 백날 해봐도 이건 혼자 쇼하는 것밖에 안 되고, 이걸 총신에다 집어넣어서 튕겨줘야 주의 증인으로서 노릇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사도들이 아무리 12명이나 되고 많지만 그들을 사도되게 한 것은 성령이 와야 되는 겁니다.

성령은 바로 십자가 영입니다. 십자가라 하는 것은 새 언약인데 ‘다 이 루 었 다’ 다 이룬 거예요. 다 이루었으니까 그동안 내가 내 꿈을 이루기 위해서 남겨 놓은 꿈들은 이제는 필요치 않은 거예요. 다~ 그건 필요 없는 거예요. 이제는 내가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은 이건 다 헛수고가 되는 겁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고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지, 나의 영광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은 다 쓸데없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내가 나를 위하지 않겠다는 말 자체는 이건 모순되고 이건 거짓말입니다. 이건 위선입니다. ‘내가 나를 위해서는 안 살아야지.’ 그건 말이 안 되죠. 나를 위해서 안 살겠다는 그것도 결국은 누굴 위해서? 자기를 위해서 살기 때문에 총알을 던지는 것과 똑같은 소리, 그건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따라서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은 바다, 짐승의 세계에 우리를 푹~ 잠기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돼지비계를 가마솥에다 집어넣어서 푹~ 고는데, 처음에 들어갈 때는 살아서 흔들리겠지만, 마치 살아있는 생선이나 산 낙지가 뜨거워서 몸을 비비꼬고 하지만, 나중에 푹~ 삶아버리면 제사지낼 만큼 푹~ 쳐져서 나오잖아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 하느냐 하면 이단이 필요해요. 짐승이 필요한 거예요. 짐승의 세계가 꼭 필요한 거예요.

이 원리가 뭐냐, 이스라엘을, 유다 나라를 어디다 집어넣습니까? 이스라엘을 바벨론에다 집어넣어 버립니다. 가마솥에 푹~ 삶겨버립니다. 그 한 예를 다니엘 5장에 봅시다. 진도를 뛰어서 5장에 벨사살 왕, 벨사살 왕 역시 바벨론 나라의 마지막 왕입니다. 느부갓네살 손자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2절에 술을 마십니다. 술을 마시는데 그 술잔이 금, 은 기명, 예루살렘에서 가져 온 걸로 마셨죠. 이 벨사살 왕이 실수한 거예요. 왜냐 하면 그 술잔이 뒤에 고무줄이 있어서 어디와 연결돼 있느냐 하면 예루살렘하고 연결돼 있어요. 그런데 벨사살 왕은 예루살렘이 망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어제 수요일에 이야기했죠? 예루살렘이 망해야 뭐가 보이느냐 하면 예루살렘이 보여요. 이게 이중으로 돼 있거든요. 가짜가 가짜로 드러나야 진짜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게 돼 있습니다. 이게 가짜가 무너졌는데 이게 진짜가 무너진 줄 알고 오해를 해서 ‘이게 예루살렘에서 가져 온 기명이니까 그 여호와 신을 맘껏 술이나 마시고 모독하자.’고 나선 겁니다.

바로 그때가 이 유다나라 입장에서는,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완벽하게 모독 받는 순간 이예요. 더 이상 자기가 믿는 신이 노리개 감 되었으니까 더 이상 실체가 없잖아요. 그런데 여기에 5절에 봅시다.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이렇게 돼 있죠?

이 손가락은 어디서 나온 손가락입니까? 벨사살 왕이 잔치 하는데 손가락이 초대 받았습니까? 이건 초대받지 않은 손가락이죠? 이건 허락 없는 손가락이죠.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모스에서 보면 ‘피하지 못하리라’ 아모스 7장 4절에 보면 “불이 큰 바다를 삼키고 육지까지 먹으려 하는지라” 이런 대목이 나와요. 하나님의 심판이 바다에서 해서 육지까지 넘실거려요. 그리고 아모스 9장에 보면 “너희가 음부에 내려갈지라도 내가 거기서 파내버린다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내가 취하여 내리고” 3절에 보면 “갈멜산 꼭대기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서 찾아낼 것이요 내 눈을 피하여 바다 밑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서 뱀을 명하여 물게 할 것이요”

자, 그렇다면 지금 공간 이야기했죠. 벨사살이 자기들끼리 초청장 준 자기들끼리의 파티 아닙니까? 자기들끼리만 있는데 다른 사람은 못 들어오죠? 못 들어오는데 여기에 뭐가 등장했습니까? 손가락이 등장했고 글씨를 썼잖아요? 그러면 이걸 보고 벨사살이 여기 성경대로 할게요. 넓적다리가 녹아내리고, 아마 아이스크림을 먹었나, 무릎이 서로 부딪혀서, 이거 아마 연골 나갔지 싶어요. 떠는 거예요. 그리고 벨사살 왕 낯빛이 9절에 보면 파랗게 변했다 했습니다.

사람이 손가락 처음 봅니까? 왜 손가락 보고 놀랐느냐 하면, 초대받지 않은 손가락이기 때문에. 초대받지 않은 손가락이 내 허락도 없이 내 공간에 자리를 점유해 버리면,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니가 어디 가도 내 낯을 피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아까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느냐 했는데, 주님이 죽으신 죽음에 참여해야 된다는데 그걸 어떻게 주께서 만들어 내는가, 가마솥이 있고 아궁이에서 불을 지피면 가마솥 뚜껑 사이로 김이 피식~ 피식~ 올라오는데 이 가마솥은 분명히 닫아놓은 거예요. 가마솥 안에서 손가락 등장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야말로 기절초풍하겠죠. 그러면 벨사살이 뭐를 느끼겠습니까? 우리가 뭔가 갇혀있다는 느낌, 우리가 누구로부터 이용당하고 있고 뭔가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왜, 그 손가락이 쓴 글씨를 아무도 해석하지 못하기 때문에.

언어라 하는 것은 그 세계의 의사소통의 하나의 수단입니다. 그런데 그 수단을 해석을 못한다는 말은 그 세계가 또 해석이 되는 다른 세계에 눌려있고 갇혀있다는 그걸 의미하는 거예요. 여기에 뭐가 있는가, 바로 누가 있습니까? 또 다니엘! 다니엘 아니면 나라의 일이 안 되는 모양이라. 그럼 다니엘이 이걸 해석한다는 말은 벨사살 왕은 솥뚜껑에 닫혀 있는데 다니엘을 닫혀 있어도 닫힌 게 아니고 통한다는 이야기거든요. 무슨 이런 인간이 다 있어요? 문을 닫아놨는데 주께서 들어왔잖아요? 문 닫아 놓고 열한 제자가, 한 제자는 자살하고 죽어버리고, 열한 제자가 벌벌 떨고 있는데 문 닫아놨는데 ‘잘 있었나?’ 편안 하뇨? 잘들 있었지?‘하고 들어오시는 거예요. ’누구십니까?‘ ’나 예수‘이렇게 된다 말이죠.

그걸 오늘(10월18일) 이 자리에 여기 적용시켜 버리자 말이죠. 주께서 왜 오셨습니까? 월급 더 올려주고 사업 잘되게 하려고 오신 게 아니고, ‘같이 죽자’고 나는 죽이러 왔다는 겁니다. 제가 주일 낮에 이런 설교 했잖아요. 사도바울은 사람 못 죽여서 안달난다고. 왜, 죽어야 사니까. 탕자가 되어야 아버지가 보이죠. 탕자 아니면, 탕자 되기 전까지 재산 거덜 날 때까지는 아버지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아버지 생각 안 했습니다. 재산 다 날라 가니까 그때서야 아버지 생각나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지 아들 죽이니까 비로소 아들 없는 상태에서 누굴 바라봅니까? 아버지의 말씀이 내가 사랑했던 아들보다 더 우선된다는 사실을 아는 겁니다. 우리는 언제쯤 주의 말씀을 내 자신보다 우선으로 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은 주님과 연관돼 있는 예수님의 죽음만이 연결돼 있거든요. 다른 죽음은 연결이 안 돼요. 예수님의 죽음에 이렇게 모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건 청소기인데 그냥 청소기가 아니고 진공청소기예요. 문 닫아놨는데 청소기 들고 오셨어요. 휙~ 빨아들이는 거예요. 고스트바스트 영화 보면 나와요. 유령 처리하는데 청소기 들고 가서 처치하잖아요. 그런 만화도 있고 옛날에 그런 영화도 있었어요. 빌보드 1등한 노래 고스트바스트란 노래도 있어요. 만화인데 유령퇴치 용역업체예요. 뭐가 나오느냐, 청소기 들고 빨아들이면 들어가는 거예요.

주께서는 청소기 들고 오셔서 자기 십자가로 빨아들여버리면 우리는 어디 속으로 들어갑니까? 십자가 안에 들어가 있는 겁니다. 십자가 안에 들어가는데 여기서 좀 어려워요. 왜 어려우냐 하면 만약에 한번 빨아들였으면 우리는 계속 주 안에 있잖아요. 그리스도 십자가 안에 있죠.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우리는 더 이상 주께서는 안 오셔도 되잖아요. 그렇죠? 여기서 어렵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내 구원중심으로 본다면,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넣어주시고 받은 성령 가지고 우리는 잘 활용하고 잘 살면 돼요. 성령을 소멸치 말고 늘 범사에 감사하고 이렇게 살면 아무 문제없는 겁니다. 저 개혁주의처럼 그렇게 살면 되는데, 성경은 그게 아니고 성경은 내 구원중심이 아니고 아까 뭐라 했습니까? 언약 중심(中(덧말:중)心(덧말:심))이죠. 이스라엘이라는 기능을 해야 돼요. 기능 중심!

다니엘이 구원받았습니까? 구원 안 받았습니까? 지금 다니엘은 다니엘에서는 다니엘 구원에 관한 언급은 없어요. 다니엘 가지고 일을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그 일은 다니엘 본인도 몰라요. 그러니까 다니엘이 미치는 거예요. 느부갓네살 꿈 꿨죠. 그 꿈 꿀 줄을 다니엘이 예상했습니까? 예상 못했습니까? 예상도 못한 거예요. 다니엘도 우리와 똑같은 입장 이예요. 다니엘도 주의 하는 변덕스러운 일을 종잡을 수 없는 일을 다니엘도 무슨 수로 그걸 잡습니까? 주님께서 변덕스러운데. 지가 하나님입니까? 지도 몰라요.

제 말은 다니엘도 그때그때마다 주께서 은혜를 주셔야 다니엘이 다니엘 일을 한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입장이라면 ‘주여, 저는 5년 전에 예수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나한테 찾아오지 마시고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러면 되는 문젠데, 이건 우리 구원문제가 아니고, 우리를 데리고 일을 하시는 것 같으면 매일같이 우리로 하여금 교만케 하고, 우리로 하여금 주님 잊어버리게 하고, 하나님 잊어버리게 만들고, 그리고 세상 사람처럼 성공하고 싶게 만들고, 그런 마음이 매일같이 들게 해놓고 그것도 또 우리 속에서 조져버리고, 들게 해놓고 조져버리고, 이렇게 하시는 것은 바로 매일같이 주님만 의지하게 하기 위해서. 교만치 않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사도바울은 ‘날마다 죽노라’ 했고, 나를 죽음에 넘기움은 주의 생명이 너희들 속에 역사하기 위해서 내가 날마다 죽고 너희는 날마다 살고, 나도 살고 이렇게 산다는 거예요. 산다는 말 할 때는 내가 다른 말로 하면 날마다 하나님께서 나를 초죽음에 계속 집어넣는다는 거예요. 그럼 죽음에 집어넣는다는 말은 뭔 뜻이냐, 여기 숨 막히고 사업 망하고 그게 아니고 이겁니다. 딱 하나예요. ‘예상 못할 사태‘ 매일같이 계속 일이 벌어져요. 매일같이 예상 못합니다. 항상 비껴가요. 이렇게 되리라 생각하면 ’오, 이러면 안 돼.‘ 또 당황스러워. ’‘주여‘ ’왜, 왜, 왜?‘ ’ 주님, 믿습니다.‘ ’뭐, 어쩌라고?‘ ’그런데 왜 당황스럽게 합니까?‘ ’그게 내 일이야. 니는 계속 당황해야 돼.‘ 안절부절 해야 돼요. 왜? 그래야 니가 ’주여, 이번 일도 또 주께 맡깁니다.‘ ’진작 그래야지.‘ 항상 내가 일처리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 맡기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 다니엘 주변에 자꾸 일을 만들어요. 손가락도 벨사살 왕 지적하기 위한 손가락도 되지만 다니엘의 존재 의미를 그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 안 죽었다.’ 이 말이거든요. 다니엘을 통해서 하는 거예요. 다니엘은 괜히 중간에 끼어서 자기도 해석 못해요. 그 점을 다시 4장 돌아가서 봅시다.만만치 않습니다.

4장 18절 봅시다. “나 느부갓네살왕이 이 꿈을 꾸었나니 너 벨드사살아 그 해석을 밝히 말하라” 이게 어려워요. 왜냐 하면 해석할 게 없기 때문에. 해석을 지금 누가 다 했느냐 하면, 느부갓네살 지가 해석 다 했어요. 꿈 자체가 해석 이예요.

이 말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꿈은 해석돼서는 된다? 안 된다? 꿈은 해석되지 말아야 돼요. 뒤에 다니엘이 꿈을 해석을 해주는데 그 해석은 앞에서 느부갓네살이 해석한 거와 똑같이 이야기합니다. 해석할 게 없어요. 전에 금 신상 있잖아요? 금 신상은 꿈조차도 몰랐잖아요? 꿈조차도 다니엘이 끄집어냈고 해석도 누가 했다? 다니엘이 한 거예요. 그러면 느부갓네살은 멍청하게 지가 한 몫은 아무것도 없어요. ‘내가 뭐 꿨더라. 어이, 다니엘아, 내가 어떤 꿈 꿨지?’ ‘이 꿈 꿨습니다.’ ‘맞아. 맞아. 맞아. 해석은? ’그래, 그래.‘

없음에서 있음으로 나올 때 느부갓네살은 그냥 이용당할 뿐 이예요. 여기 지가 개입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꿈은 이미 느부갓네살이 뭘 했습니까? 이미 금 신상을 만들었잖아요. 이걸 만든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금 신상대로 너는 멸망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입장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뭐냐 하면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홍해가 두 번 갈라졌습니까? 딱 한번이죠. 만약에 두 번째 홍해가 갈라졌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의지할 필요 없습니다. ‘안다. 안다. 내가 다 안다. 아이고, 모세여, 지팡이, 에이고, 다 아는데. 뭐. 빨리빨리 물에 대라고.’라고 할 거예요. 여리고성 어떻게 무너졌습니까? 돌아서 무너졌잖아요. 다음에는 여리고성 어떻게 무너집니까? 그 다음에는 없어요. 똑같은 일을 두 번 다시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향하여 나갈 때는 뭐가 깊어야 되느냐 하면 죄가 깊어야 돼요. 죄가 깊은 곳에 용서도 깊게 돼요.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가 깊으면 깊을수록, 예수님 공로로만 구원받지, 우리의 행위로 구원받지 않는 것이 드러나게 돼 있어요. 따라서 우리는 점점 더 우리가 담고 있는 죄의 깊이의 바닥까지, 밑바닥까지 내려가 줘야 되고, 그리고 이 바닥까지 내려가는데 있어서 우리는 이걸 그걸 유도하기 위해서 이단들이나 불신자들이 이걸 같이 도와줘야 돼요. 이단들이 도와줘서 우리의 죄가 어느 바닥까지 지금 있는가 알아야 돼요.

오늘 아프리카 모로코 거기에 걸어서 세상에 이르기에 보니까 모로코 계곡에 우물이 있는데 얼마나 깊은지 밖에서 물을 세 번 부니까 한참 있다가 속에서 틱틱틱 튀어요. 아주 우물이 굉장히 깊어요. 우리의 죄는 계속 깊숙이 내려가야 돼요. 계속 내려가서 예수 그리스도까지 계속 가야 되는데 이 역할을 유대인들이 해줘야 됩니다. 유대인들은 무슨 역할 합니까? 예수님을 자기 사적으로 죄짓는 정도가 아니고, 메시아 하나님을, 자기가 섬기는 하나님을 죽이는 죄까지 져줘야 돼요. 그래서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베드로가 뭐라 합니까? 그런 예수를, 메시아를 너희가 죽였다 할 때 그때 유대인이 뭐라 합니까? ‘어찌 할꼬’ 그때 베드로가 ‘주 예수를 믿으라. 너희가 죽인 자를 ’내가 죽였습니다.‘라고 믿어버리면 그것이 구원이 된다는 거예요. 그럼 내가 예수를 안 죽였는데 ’죽였다‘하면, 이건 구라로 하니까 이건 안 쳐줘요. 구원이 안 돼요.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십자가만을 어떻게든 우주의 중심으로 남기 위해서는 제발 좀 죽여주는 일들이 일어나줘야 돼요. 이 깊이를 알기 위해서는 이 느부갓네살로 하여금 이미 자기는 꿈의 실현단계에 들어가 있어야 돼요. 야, 이 말이 어렵다. 이미 우상은 만들었잖아요. 이미 그건 죄이잖아요. 그러면 전에는 죄지을 때만 죄지었는데, 그때부터 느부갓네살은 하는 모든 것이 죄고 죄라고 그냥 죄가 아니고 너~무 죄,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그 자체가 죄가 되고 매일같이 꿈꾸면 꿈 자체가 꿈이고 해석이고 다 죄가 돼요. 전부 다 죄가 돼야 돼요.

처음에 예수 믿을 때 술 먹는 것이 죄인 줄 알고, 술 먹는 것이 죄이면 술 안 먹는 것이 죄가 아니게 되죠. 처음에 예수 믿으면 그렇게 믿어요. 나중에 예수 믿으면 술 먹으나 안 먹으나 십일조 하나 안 하나 헌금 하나 안 하나 사는 것 자체가 죽어 마땅한 죄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말이죠.

여러분들이 인생 살면서 애들 노는데 어른들이 같이 끼어들지 마세요. 애들이 재미가 없어요. 제 아내 이야기 들어보니까 애들이 나뭇잎을 돌멩이에 넣고 이건 반찬이라 하는 거예요. 그때 지나가던 어른이 ‘야, 그게 나뭇잎이지 그게 무슨 반찬이야?’ 이러면 재미없잖아요. 애들이 노는데 어른이 끼어들면 재미가 없는 거예요. 지금 한국교회가 완전히 애들 소꿉놀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남을 미워하면 죄입니다.’ 이러고 있다고요. 니가 죄야, 니가, 니는 뭘 해도 죈데.

느부갓네살이 처음에는 꿈을 꿀 때 그 꿈이 바로 자기 실체를 밝히고 죄고 잘못이라고 밝혀냈지만, 나중에는 그냥 사는 것 전체가 그 꿈을 안다고 해서 회개하고 개과천선할 것도 아니고 그냥 인생 끝장날 때까지 죄만 계속 나오는 거예요.

그것을 이 땅에서 일어나는 땅의 중심인 느부갓네살을 어디까지 잇느냐 하면 지하 터널로 해서(시화호 아시죠? 안산에 있는) 바다로 연결시키는, 바다짐승으로 연결시켜요. 이 짐승과 연결시키려고 여기 터널을 파서 이 느부갓네살을 그냥 꿈이나 꾸는 느부갓네살을 짐승의 요소를 터널을 뚫어서 바다의 짐승을 여기로 올라오게 만들어버렸어요. 해석 별거 있어요? 지 꿈 이야기가 해석이었어요. 꿈 이야기가 해석이라니까요. 나중에 더 나가면 밤에 꾸는 걸 꿈이라 하잖아요? 이젠 낮에 꿈꿉니다. 술 먹고 ‘이것이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술잔이다. 부어라 마시자.’ ‘야야, 그게 꿈이다.’ 그게 죄의 세상에서 일어날 꿈같은 일이예요.

그럼 현실은 뭐냐, 손가락 이예요. 현실이 손가락이고 나머지는 술 먹고 취하는 것들, 취해서 남의 연예인 전 부인 칼로 찌르고, 그 자체가 전부 다 가상의 세계입니다. 사람은 가상의 세계서 못 벗어나기 때문에 가상의 세계가 현실인 줄 알고, 계속 꿈을 꾸고 있는 거예요. 술집에 왜 갑니까? 기분 좋아서 술집에 가는 경우는 별로 없어요. 전부 다 뭔가 터트리기 위해서 가거든요. ‘건드리기만 해봐라.’ 이래서 전부 다 술집에 가는 이유가. 그렇게 가는 자체가 잘못이죠. 왜, 거기 왜 갑니까? 꿈인데, 현재 사는 게 꿈인데 그래도 현실을 잊기 위해서 멋들어진 꿈을 꾸기 위해서, 술 먹으면 꿈을 꾸잖아요? 환상세계를 보잖아요. 유토피아 세계, 그걸 갖기 위해서 술집에 가서 죽고, 다치고, 그런 게 나온다고요.

싸이가 4주째 빌보드 2등을 한다 하잖아요. 싸이는 지금 준비해야 돼요. 그게 꿈에 불과하다는 현실을. 그럼 현실은 뭐냐, 그게 꿈이라고 지적해주는 손가락이 그게 현실 이예요. 교인들도 정신 차려야 돼요. ‘당신들 교회 와서 한 짓들 다 헛수고다. 예배당 짓고 헌금하고 헛수고야. 진짜 구원은 예수의 피만 믿으면 돼.’라고 지적해 주는 그 손가락이 그게 진짜 현실 이예요. 나머지는 전부 다 가상이라니까요.

그런데 사람들이 세상 살기 힘드니까 행여나 복줄까 싶어서 교회 와서 십일조하면 복 30배, 60배, 100배 준다는 사기꾼에게 속아서 더 따내려고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세상도 가상이고 교회도 그 세상 가상현실의 일부로서 가상 세계예요.

미국에 있는 어떤 목사님이 저한테 책 잘 받았다고 메일을 보내왔어요. 제가 답장을 했어요. 그분이 복음을 아시는 분이기 때문에 용기를 주려고 했어요. ‘목사님, 아닌 것은 아니고, 바른 것은 어떤 경우라도 바른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 눈치 보지 말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하고 예는 예, 아니요는 아니요, 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그것만 하면 됩니다.’ 이거하면 몇 사람 더 들어오고 이 소리하면 나갈 것이고, 자꾸 그런 것 생각하지 말고, 그게 자기가 꿈을 꾸고 있는 거예요. 그게 느부갓네살이고 그게 벨사살 이예요.

‘나는 세상의 중심이다.’ 순찰 자 오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죠. 와보니까 짐승 됐다고요. 짐승이 어디서 왔다고요? 바다에 있던 짐승인데 이게 시화호, 터널을 뚫어서 땅에 뭐가 스며들었다? 바다 요소가, 짐승이 땅에 스며들어서 들어와 버린 겁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다니엘 4장 25절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이것은 15절에서 느부갓네살 지가 이야기한 거예요. 추가될 해석도 없어요. 그 다음에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일곱 때 지내는 것도 어디 나옵니까? 16절에 나오잖아요. 느부갓네살 한 것을 지금 되풀이하고 있는 거예요.

일곱 때가 지나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한번 봅시다. 과연 되는지, 3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32절에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니 33그 동시에 이 일이 나 느부갓네살에게 응하므로 내가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았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았었느니라 34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요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잠시 느부갓네살이 짐승 됐죠. 자, 여기서 해석해 봅시다. 잠시 꿈꿨다. 이 해석을 어떻게 했습니까? 잠시 꿈꿨다는 것은 앞으로 니 인생도 전부 다 꿈이고 가상세계다. 이 말이거든요. 잠시 짐승 되었다. 이 말은 짐승 됐다가 인간 된 게 아니고 전부 다 니는 짐승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총명이 돌아왔다는 것은 어떻게 보는가, 하나님께서 쓰실 구석이 있기 때문에 총명을 준 거예요. 아직까지 짐승으로 끝날 게 아니고 7년만 짐승 되게 하신 이유는 그 뒤에 짐승은 맞는데 짐승 아닌 걸 해야 그 다음 일이 또 진행이 돼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가 사는 것이 살고 싶어 사는 것이 아니고 필요에 따라서 산다는 겁니다. 필요에 따라서! 우리가 죽을 때가 되면 죽는 거예요. 참새도 주의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는다 했잖아요. 팔리는 것도, 떨어지는 것도 주의 뜻이 아니면 팔리지 않고 떨어지지 않는다 했잖아요.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그런 말씀 했잖아요. 하물며 자기 백성이 살고 죽는 것을 주께서 주관하신다 이 말입니다.

얼마 전에 장례식이 있었는데 거기서 제가 설교를 했어요. 제가 무슨 설교 했느냐 하면 하무엘 상 2장 6절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신다.” 그런데 왜 살리시기도 하고 죽이시기도 하는데 왜 죽이시는가, 그동안 살아온 것이 니가 살만해서 살아온 것이 아니고 죽음이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살려준 거예요. 살만한 자격이 있어서 살아온 것이 아니고, 죽음이 우선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살아온 거예요. 그러니 죽음이 기본이고 사는 것은 이건 그냥 행운 이예요.

그래서 제가 글에 이렇게 썼잖아요. 사람은 죽음에서 만든 거예요. 흙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어디로 돌아간다?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러면 왜 아담은 만들었는가, 선악과 따먹으라고 잠시 만들어 놓은 거예요. 선악과 따먹으라고! ‘따먹었나? 다시 흙으로 돌아가라’ 그러면 괜히 만들었어. 인간은 괜히 만들었죠? 아닙니다. 생명, 여자를 끄집어내요. 여자 이름이 뭡니까? 여자 이름이 생명. 여자의 후손에서 메시아 나오기 위해서 여자로 하여금 여자 되게 한 거예요. 그러면 아담은 땡 잡았죠. 왜, 마누라 잘 만나서. 자기는 죽음이지만 아내는 뭡니까? 생명이잖아요. 아~! 내가 죽는 것도 그냥 아예 없이하는 게 아니고 태어나게 해서 보고 죽게 하는 것도 생명이 주님의 손에 의해서 탄생된다는 사실, 우리 손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고 내가 생명 따먹는다고 생명 얻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생명을 줄 때만 생명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죽게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여자 이름 하와는 생명이고, 그 여자의 후손에서 생명이 나온다는 거예요. 생명이 없는 게 아니에요. 있어요. 있는데 그 생명 노선을 우리가 가질 수가 없어요. 왜, 우리는 주께서 거저 주셔야 하는데 어떻게 주느냐, 우리로 하여금 죽어야 된다. 죽음이 너를 만들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서 생명을 우리에게 집어넣어 버린다 말이죠. 생명이 들어와야 ‘나는 흙이구나.’하는 걸 알고, 자기가 흙인 것을 모르는 사람은 생명이 안 들어온 사람 이예요.

느부갓네살을 통해서 짐승 되게 한 것은 우리 모두가 다 짐승에 불과하고, 원래 땅이라 하는 것은 없는 건데 바다가 잠시 갈라져서 땅이 된 거예요. 그걸 노아 홍수에서 보여줬다고요. 그 무지개 폈잖아요. 그 무지개 언약이 이제는 예수님을 통해서 새 언약되는 겁니다. 에스겔 1장에 보면 그 하나님의 보좌에 뭐가 핍니까? 하나님의 영광스런 보좌에 무지개 폈잖아요. 뭐냐, 전에부터 있던 노아언약도 보좌에서 나 하나님이 다 임의로, 시나리오대로 준 거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장차 예수님 오시는 보좌도 무지개 폈다는 것은 요한계시록 주님의 언약의 보좌에 무지개 있잖아요. 그것도 바로 그 모든 언약은 예수님을 겨냥해서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유발시킨 사건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그 유발시킨 사건 속에 놓여있는 겁니다.

어떻게 놓여있는가, 실컷 짐승도 돼 보고 실컷 죽음도 맛보고 우리의 죄가 어느 정도라는 것을 실컷 맛보고, 우리 조상 아담이 선악과가 얼마나 나의 자존심을 유지시켜 주고 있다는 것을 철저하게 느껴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나는 나밖에 모르고 나는 신이고 나는 나 혼자 있는 것이 최고고, 누워있으면 귀찮고 나한테 잘해주는 놈 있으면 그건 약간 일시적으로 봐줄 수 있고, 하여튼 나는 나보다 이 세상에 더 귀한 건 없다는 것을 살면서 우리는 철저하게 그걸 깨달아야 됩니다. ‘깨달으세요.‘ 할 것도 없어요. 그렇게 살면 돼요. 우리는 철저하게 느껴야 돼요.

언제 때? 사람은 아까 이야기했죠. 사람은 위기 때 본성이 튀어나온다고. 예수고 하나님이고 급할 때보면 예수고 하나님이고 없어요. ‘살려만 주이소. 부처도 좋으니 살려만 주이소.’

우리 인간은 내 몸이 내 것이 아니고 아담 것입니다. 아담이 있기 때문에 내 몸을 내 맘대로 못하고 아담의 욕망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어요. 그 점을 이해 좀 합시다. 내 몸이 내 맘대로 안 되는 것에 대해서, 내 욕망이 내 맘대로 자제가 안 되는 것에 대해서, 내가 이해해줘야 돼요. 우리 자신들이. 서로. 시작 3번. ‘이해하자. 이해하자. 이해하자.’ 이해 다 했죠?ㅎ 우리가 그동안 너무 우리한테 검열을 너무 많이 했어요. 너무 책망하고 너무 채찍질해서  자기를 너무 때렸어요. 때려서 인간된다면 실컷 때리죠. 때려서 인간될 인간이 아닙니다. 때리면 때릴수록 바리새인처럼 ‘주여, 나는 스스로 죄인인 걸 깨달았습니다. 어때요? 저 괜찮은 존재죠?’ 이러는 게 인간이라.

이건 때려도 말 안 듣고, 우리 조상 아담이 내 말 듣습니까? 내 속에 아담 들었는데 어떻게 아담이 내 말 듣습니까? 선악과 따먹고 나밖에 모르는데. 하나님, 예수님이 좋은 게 아니고 내가 좋은 거예요. 예수님이 나를 공격하면 예수 안 믿을 가능성이 많아요. 그런 인간들을 깨닫게 하시는 것은, 성령이 아니고서야 이런 말을 고개를 끄덕이면서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아니고서야.

지난주일 아침에 설교 듣다가 두 사람 뛰어나갔어요. 설교 하면서 ‘이 사람 뛰어나가야 되는데, 이래도 안 뛰어나가 설교 더 세게 해야 되는데’ 그러는데 뛰어나갔어요. 왜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뭔가 꿈을 열 겹 두껍게 칭칭 감고 있어요. 꿈 깨보면 백설 공주, 신데렐라, 좋은 건 다 붕대에 들어있어요. 깁스한 꿈에 보면 인어공주도 들어있고, 좋은 거 다 들어있어요. 재벌 3세도 들어있고, 온갖 것 다 들어있다고요. 그러나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뭐냐, 이미 죽어있어요. 아담 시체가 들어있는데.

27절 봅시다. 그래서 마지막에 다니엘이 꿈 해석 다 끝내면서, 꿈 해석 할 것도 없이 앞에서 다 했는데요. 다니엘이 하는 말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 그런즉 왕이여 나의 간하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속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속하소서” 자, 다니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니까 왕은 어떤 왕이 되느냐, 여러 가지 이야기했지만 결론은 한 가지입니다. ‘왕이여 지시에 따르소서.’ 당신이 왕이 아닙니다. 당신은 다니엘 내 말을 들어야 됩니다. 다니엘은 다윗언약에 속하는 유대인입니다. 유다지파에 속한 다니엘이 누구보고 지시합니까? 최고의 유일한 하나밖에 없는 나무한테 지시를 하죠. ‘왕이여, 내 말 들으소서.’ 누가 왕 이예요? 도대체. 누가 높은 사람 이예요? 어느 나라가 어느 나라를 지금 다스리고 있는 겁니까? 바벨론이 분명히 유다나라를 지배했는데 오히려 지금은 거꾸로 됐죠. 바벨론이 지금 누구 지시를 받습니까? 유다나라의 지시를 받고 있는 겁니다. 포로 잡혀 왔던 것이 도리어 그들을 지시를 하고 있죠.

그 지시 내용이 뭐냐 하면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속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속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그러면 왕의 목숨은 어디에 달려있습니까? 가난한 자들에게 달린 거예요. 왕의 목숨이. 쉽게 하면 ‘왕이여, 니 누고?’ ‘저 가난한 사람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왜 왔는데?’ ‘나 가난한 사람인데 나 어떻게 해줄 거요?’ ‘에라이. 시, 어디 거지가 와서’ 이러면 당신이 죽고 ‘어이쿠, 가난한 사람!’ 다니엘 말이 생각나서 ‘그래, 억울한 돈 어디서 뺏겼는데? 어디서 당했는데? 내가 갚아줄게.’ 이렇게 공의를 베풀면 누가 살아요? 느부갓네살 본인이 사는 거예요.

그럼 느부갓네살 앞에 뭐가 포진돼 있습니까? 결국 가난한 자, 억울한 자, 희생당한 자들이 포진돼 있죠. 결국 이 모습이 가난한 자, 억울한 자, 과부된 자, 고아, 이게 결국 뭐냐 하면  이 땅에 장차 오실 메시아의 모양새다 말이죠. 메시아의 모양새! 그러면 죄 용서하는 상황이라는 것은 본인들이 뭘 해야 된다? 왕이여, 그러면 죄가 용서된다 이 말은 왕은 죄인이라는 기정사실 이예요? 기정사실이 아니에요? 기정사실 이예요.

지금 우리가 부자도 아니지만 만약에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이 내 곁에 있다면, 나는 졸지에 어떻게 돼요? 그 사람의 재산을 약탈한 사람으로 돼버리는 겁니다. 왜, 예수님은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 옆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면, 그 가난한 사람은 도움 받아서 구원받습니까? 아니면 자기 죄를 드러내야 구원받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돈도 없는 나에게 돈까지 갚아주는 거지가 있다면 그 거지가 구원받는 방법은 나한테 돈을 얻어먹는 겁니까? 아니면 자기보다 더 가난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기 죄를 인정하는 거예요? 어느 쪽 이예요? 죄를 인정하는 거죠. 그러니까 교회는 오직 뭐만 전해야 돼요? 예수님의 십자가만 전해야죠. 제 논리가 이상합니까? 맞잖아요.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면 죄용서 받는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거죠. 항상 내 곁에는 나를 죄인 되게 드러내는, 도드라지게 만드는 그런 요소가 있다 이 말이죠. ‘목사님, 제 집 주위에는 다 골프나 치고 전부 다 차가 3대고, 전부 다 외제차만 있고 다 잘 삽니다. 이휴,도와 줄 것도 없고 나보다 다 잘 살아.’ 이러면 안 되고,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가 항상 우리 곁에 있을 때, 주님한테 동냥 주고 주님한테 월급 주라는 말이 아니고, 나는 무슨 짓을 해도 다른 사람에게 구제해도 뭐다? 죄인이고 헌금해도 죄인이고 십일조 해도 죄인이다. 그 말입니다.

기정사실! 죄 있는 기정사실을 알아야 돼요. 이게 바로 뭐냐 하면 꿈을 꼭 해석할 필요 없어요. 우리가 살아가는 그 자체가 주께서 꾸게 하시는 꿈이고 그 꿈속에서 우리는 죄인임이 드러나고, 진짜 현실은 난데없이 피 흘려 죽으신 십자가만이 진짜 말씀에 입각한 유일한 현실입니다. 현실도 그냥 현실이 아니고 너~무 현실! ‘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이 자체가 해석 이예요.

그런데 이제부터 진짜 어려운 거 하겠습니다. 이왕 어려운 거 하는 거 나도 모르겠습니다. 십자가는 해석 자체가 안 됩니다. ‘내가 쉬운 말로 해줄게.‘ 이건 쉬운 말로 해도 안 되고 이건 은유로 해도 안 되고 비유로 해도 안 되고 뭐로 해도 안 돼요. 왜, 들을 귀 있는 자는 따로 있기 때문에. 들을 귀 없는 자가 쉽게 해서 알아듣고 하는 그런 십자가는 없어요. 십자가를 제가 주일날 이렇게 이야기했거든요. 물그릇을 쏟아버리면 물이 주위로 확산되잖아요? ’복음에 빚진 자‘ 설명하면서 그거 설명했잖아요. 이거 말릴 수 없어요. 엎질러버렸으니까.

십자가라는 것은 2000년 전 사건 하나입니다. 한 사건이 그 다음부터 성령을 통해서 퍼져 버려요. 그러면 성령이 내리는 그 테두리, 가장자리에 무슨 사건이 일어납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희생사건이 벌어집니다. ‘이상하다. 내 행함대로 하면 이정도 보상은 받아야 되는데, 왜 내 행위는 이런데 왜 보상은 안 돌아오지?’ 라고 여기는 그 희생적인 것, 아벨처럼 제사는 받아들였으니까 이제는 난 형보다 더 부자 될 것이다.‘라고 했는데 형이 와서 짱돌로 뒤통수 쳐서 죽어버리고, 이게 하나님께서 제사 받은 보상이 이겁니까? 이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매일같이 내가 이정도 착했으면 이정도 기대치가 이만큼 될 거다.’라고 여기는 모든 것이 무참하게 깨지게 하는 그것이 성령께서 물 잔을 엎질러버리는 거예요. 이게 퍼지니까 가만히 있지 못하고 밀리는 거예요.



여기 컵이 엎질러져서 물이 나오면 여기 물에 종잇조각이 있으면 종잇조각은 가만히 있어도 물에 쓸려서 자꾸 바깥으로 자꾸 떠내려가는 거예요. 떠내려가다 보면 ‘ 자꾸 이상하다. 내가 원하는 인생은 이게 아닌데, 왜 자꾸 이리 가지?’ 하는 그런 것이 바로 십자가의 확산으로서 온 천하에 복음을 전하게 만들었어요. 12제자가 다 그랬어요. 본인이 원하는 길이 아니고 원치 않는 길, 본인이 원치 않는 길로 띠 띠고 갈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한 현장을 그 장소를 우리 같으면 시대적으로 나눌 수 있는데, 요한계시록은 기간을 잘라버리고 뭐라 하느냐 하면, 두 증인이 있던 곳을 애굽이고 소돔이고 십자가 죽으신 곳이라. 완전히 시간 간격을 허물어 버리고 어디 있든지 그게 바로 애굽이고 그게 십자가 죽으신 곳이고 그곳이 소돔과 고모라고 그 자체를 규정을 그렇게 해버려요. 묵시적 규정이기 때문에 이런 시간의 흐름 같은 것은 인정 안 해요. 하여튼 주께서 우리를 사용하시는데 성령의 십자가 영에 휩쓸려서 사용하게 되면 우리는 어떤 걸해도 억울할 필요 없이 주께서 사용한다는 걸 느끼라 말이죠.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는 자꾸 주님한테 대들고 ‘주여, 이렇게 나오면 나도 섭섭합니다. 이렇게 나올 것 같으면 더 이상 예수 못 믿겠습니다.’하고 뭔가 숨어있는 반발심이 튀어나오도록 함으로서 ‘하아, 드디어 주께서는 찾아낼 걸 찾아내고 뽑아낼 걸 뽑아내고 지적할 걸 지적하게 되죠.

병원에 가면 치과에도 엑스레이 찍죠?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개성을 무산시킬 능력이 있어요. 엑스레이라는 뼈 사진 앞에서는 김 태희도 없고 장 동건이도 거기 없어요. 왜냐 하면 단층촬영 같은 경우에, CT 촬영 같은 경우에 잘라버리거든요. 1741개로 단층을 정육점의 고기 자르듯이 쇠톱으로 잘라놓아서 합쳐 놓으니까 이건 완전히 모양새도 없고 기껏 나오는 것은 쌍꺼풀 수술 한 거나 튀어나오고 여기 뼈 심어놓은 거 그런 거나 나오지, 인물 찍어 바른 화장발 그런 건 전혀 안 나온다 이 말이죠.

우리 모습이 십자가 앞에 가면 어떤 인간이라도 용서받을 수 있고, 어떤 인간이라도 죄인으로 다 드러납니다. 공평해요. 다 아담입니다. 다만 촬영을 당했다는 사실, 엑스레이 촬영을 당했다는 사실이 뭐냐, 성령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내가 참 꿈속에 사는데, 이걸 꿈을 꿈이라고 이야기해주니까 이게 바로 현실이구나!’

중국의 장자는 그걸 깨닫지 못했어요. 성령이 오지 않으니까. 내가 나비의 꿈을 꿨으니까 나비가 난지,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분간이 안 된다. 꿈 깨도 마찬가지예요. 꿈 깨고 있는 것이 꿈을 깬 것인지 꿈 중에 있는지 꿈 깨고 있는지 진짜 꿈을 꿔서 꿈에서 깨는 건지, 도대체 뭘 측정할 기준이 없다는 거예요. 아이쿠, 짐승아. 십자가가 없으니까. 내 대신 저주받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게 없으니까 모든 게 희망과 비전과 꿈속에서도 꿈을 꾸고 꿈을 깨도 꿈이고 죽어도 꿈이고 살아도 꿈이고. 사나 죽으나 꿈이다. 마지막 날에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산 자나 죽은 자나 주님 음성 들을 때가옵니다.

결국은 성경 말씀대로 세상은 예수님으로 통일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그건 우연한 사건이 아니고 전 세계를 하나의 진리로 통일되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 맞다는 거예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그 말 맞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이 성령에 의해서 믿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세전의 뜻이고 내가 믿었으면 이건 취미생활이고, 주여 항상 우리가 주의 십자가만 바라보면 죄인으로 깨닫는 것은 성령의 역사인 줄 알게 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우리 공로 자랑하지 말고, 십자가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것을 자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