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다니엘4장10절(무너진 공간)121018-6강b-이 근호 목사
제 6강b
아까 제가 첫째 시간에 우리가 죽으면 구원 못 받고, 주께서 죽여주시는 그 원리에 같이 있어 줄 때 우리는 구원받는다 했잖아요. 그 원리가 뭐냐, 주께서 우리를 죽이시는 방법이 뭐냐, 이걸 다니엘에서는 이렇게 합니다. 바다를 땅으로 끌어당기는 원리! 이 원리예요. 처음에 땅이 생길 때 땅부터 있었던 게 아니고 바다부터 먼저 있었고 땅은 바다가 갈라지면서 틈이 땅이 되었어요.
노아 홍수 이야기를 제가 언젠가 했죠? 노아 홍수가 사실은 물의 세계로 환원되는 겁니다. 땅이 없다. 땅이 없던 그 시절로 돌아가는 거예요. 전부 다 물에 덮이고 말죠. 그리고 그것에서 땅이 나올 때는 그냥 땅이 나오지 않습니다. 뭘 머금고? 피를 머금을 때만 땅이 나오는 겁니다. 희생제물의 피를 머금고 새 땅이 거기서 나와요. 노아 홍수 끝나고 난 뒤에. 그때 하늘에서 뭐가 피었다 했습니까? 무지개가 피었다는 것은 그만큼 이 땅의 사정이 긴박하고 절박하다는 뜻 이예요. 처참하다는 겁니다.
이 무지개가 아니면 이건 도저히 물에 도로 잠길 수밖에 없는 세상이다. 이걸 성경에서는 뭐냐, 너는 날 때부터 악한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에, 무지개가 나서서 지켜주지 아니하면, 내가 지켜주지 아니하면 이 세상은 그야말로 물의 바다가 된다. 하지만 다시는 물로서는 심판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심판받아도 마땅한데, 다른 식으로 심판하기 위해서 내가 너를 지금까지 유보시키겠다 이 말이거든요. 이걸 어떤 강의에서 했어요.
바다를 끌어당겨서 땅을 점령시켜 버립니다. 이건 하나님의 죽이시는 죽음에 동참이 되는 겁니다. 그 죽음이 무슨 죽음이냐 하면 언약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언약의 죽음 속에 들어갈 때 우리는 비로소 언약으로 부활될 수 있는 노선에 놓이게 하는 겁니다. 총 쏠 때 총알이 있잖아요. 총 놔두고 총알을 던지면 이게 총 쏘는 게 아니잖아요? 총알은 어디 속에 들어가야 돼요? 총알을 그냥 던져봐야 맞으면 ‘아야’할 뿐이지 죽지는 않잖아요. 어디 속에 들어가야 돼요? 총신 속에 총알을 넣어서 격발해야 제대로 총알다운 총알이 나오잖아요?
하나님은 우리를 총알로 삼는 거예요. 우리 혼자 놔두고 ‘신이시여, 제가 순교하겠습니다.’ 백날 해봐도 이건 혼자 쇼하는 것밖에 안 되고, 이걸 총신에다 집어넣어서 튕겨줘야 주의 증인으로서 노릇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사도들이 아무리 12명이나 되고 많지만 그들을 사도되게 한 것은 성령이 와야 되는 겁니다.
성령은 바로 십자가 영입니다. 십자가라 하는 것은 새 언약인데 ‘다 이 루 었 다’ 다 이룬 거예요. 다 이루었으니까 그동안 내가 내 꿈을 이루기 위해서 남겨 놓은 꿈들은 이제는 필요치 않은 거예요. 다~ 그건 필요 없는 거예요. 이제는 내가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은 이건 다 헛수고가 되는 겁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고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지, 나의 영광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은 다 쓸데없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내가 나를 위하지 않겠다는 말 자체는 이건 모순되고 이건 거짓말입니다. 이건 위선입니다. ‘내가 나를 위해서는 안 살아야지.’ 그건 말이 안 되죠. 나를 위해서 안 살겠다는 그것도 결국은 누굴 위해서? 자기를 위해서 살기 때문에 총알을 던지는 것과 똑같은 소리, 그건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따라서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은 바다, 짐승의 세계에 우리를 푹~ 잠기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돼지비계를 가마솥에다 집어넣어서 푹~ 고는데, 처음에 들어갈 때는 살아서 흔들리겠지만, 마치 살아있는 생선이나 산 낙지가 뜨거워서 몸을 비비꼬고 하지만, 나중에 푹~ 삶아버리면 제사지낼 만큼 푹~ 쳐져서 나오잖아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 하느냐 하면 이단이 필요해요. 짐승이 필요한 거예요. 짐승의 세계가 꼭 필요한 거예요.
이 원리가 뭐냐, 이스라엘을, 유다 나라를 어디다 집어넣습니까? 이스라엘을 바벨론에다 집어넣어 버립니다. 가마솥에 푹~ 삶겨버립니다. 그 한 예를 다니엘 5장에 봅시다. 진도를 뛰어서 5장에 벨사살 왕, 벨사살 왕 역시 바벨론 나라의 마지막 왕입니다. 느부갓네살 손자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2절에 술을 마십니다. 술을 마시는데 그 술잔이 금, 은 기명, 예루살렘에서 가져 온 걸로 마셨죠. 이 벨사살 왕이 실수한 거예요. 왜냐 하면 그 술잔이 뒤에 고무줄이 있어서 어디와 연결돼 있느냐 하면 예루살렘하고 연결돼 있어요. 그런데 벨사살 왕은 예루살렘이 망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어제 수요일에 이야기했죠? 예루살렘이 망해야 뭐가 보이느냐 하면 예루살렘이 보여요. 이게 이중으로 돼 있거든요. 가짜가 가짜로 드러나야 진짜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게 돼 있습니다. 이게 가짜가 무너졌는데 이게 진짜가 무너진 줄 알고 오해를 해서 ‘이게 예루살렘에서 가져 온 기명이니까 그 여호와 신을 맘껏 술이나 마시고 모독하자.’고 나선 겁니다.
바로 그때가 이 유다나라 입장에서는,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완벽하게 모독 받는 순간 이예요. 더 이상 자기가 믿는 신이 노리개 감 되었으니까 더 이상 실체가 없잖아요. 그런데 여기에 5절에 봅시다.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이렇게 돼 있죠?
이 손가락은 어디서 나온 손가락입니까? 벨사살 왕이 잔치 하는데 손가락이 초대 받았습니까? 이건 초대받지 않은 손가락이죠? 이건 허락 없는 손가락이죠.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모스에서 보면 ‘피하지 못하리라’ 아모스 7장 4절에 보면 “불이 큰 바다를 삼키고 육지까지 먹으려 하는지라” 이런 대목이 나와요. 하나님의 심판이 바다에서 해서 육지까지 넘실거려요. 그리고 아모스 9장에 보면 “너희가 음부에 내려갈지라도 내가 거기서 파내버린다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내가 취하여 내리고” 3절에 보면 “갈멜산 꼭대기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서 찾아낼 것이요 내 눈을 피하여 바다 밑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서 뱀을 명하여 물게 할 것이요”
자, 그렇다면 지금 공간 이야기했죠. 벨사살이 자기들끼리 초청장 준 자기들끼리의 파티 아닙니까? 자기들끼리만 있는데 다른 사람은 못 들어오죠? 못 들어오는데 여기에 뭐가 등장했습니까? 손가락이 등장했고 글씨를 썼잖아요? 그러면 이걸 보고 벨사살이 여기 성경대로 할게요. 넓적다리가 녹아내리고, 아마 아이스크림을 먹었나, 무릎이 서로 부딪혀서, 이거 아마 연골 나갔지 싶어요. 떠는 거예요. 그리고 벨사살 왕 낯빛이 9절에 보면 파랗게 변했다 했습니다.
사람이 손가락 처음 봅니까? 왜 손가락 보고 놀랐느냐 하면, 초대받지 않은 손가락이기 때문에. 초대받지 않은 손가락이 내 허락도 없이 내 공간에 자리를 점유해 버리면,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니가 어디 가도 내 낯을 피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아까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느냐 했는데, 주님이 죽으신 죽음에 참여해야 된다는데 그걸 어떻게 주께서 만들어 내는가, 가마솥이 있고 아궁이에서 불을 지피면 가마솥 뚜껑 사이로 김이 피식~ 피식~ 올라오는데 이 가마솥은 분명히 닫아놓은 거예요. 가마솥 안에서 손가락 등장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야말로 기절초풍하겠죠. 그러면 벨사살이 뭐를 느끼겠습니까? 우리가 뭔가 갇혀있다는 느낌, 우리가 누구로부터 이용당하고 있고 뭔가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왜, 그 손가락이 쓴 글씨를 아무도 해석하지 못하기 때문에.
언어라 하는 것은 그 세계의 의사소통의 하나의 수단입니다. 그런데 그 수단을 해석을 못한다는 말은 그 세계가 또 해석이 되는 다른 세계에 눌려있고 갇혀있다는 그걸 의미하는 거예요. 여기에 뭐가 있는가, 바로 누가 있습니까? 또 다니엘! 다니엘 아니면 나라의 일이 안 되는 모양이라. 그럼 다니엘이 이걸 해석한다는 말은 벨사살 왕은 솥뚜껑에 닫혀 있는데 다니엘을 닫혀 있어도 닫힌 게 아니고 통한다는 이야기거든요. 무슨 이런 인간이 다 있어요? 문을 닫아놨는데 주께서 들어왔잖아요? 문 닫아 놓고 열한 제자가, 한 제자는 자살하고 죽어버리고, 열한 제자가 벌벌 떨고 있는데 문 닫아놨는데 ‘잘 있었나?’ 편안 하뇨? 잘들 있었지?‘하고 들어오시는 거예요. ’누구십니까?‘ ’나 예수‘이렇게 된다 말이죠.
그걸 오늘(10월18일) 이 자리에 여기 적용시켜 버리자 말이죠. 주께서 왜 오셨습니까? 월급 더 올려주고 사업 잘되게 하려고 오신 게 아니고, ‘같이 죽자’고 나는 죽이러 왔다는 겁니다. 제가 주일 낮에 이런 설교 했잖아요. 사도바울은 사람 못 죽여서 안달난다고. 왜, 죽어야 사니까. 탕자가 되어야 아버지가 보이죠. 탕자 아니면, 탕자 되기 전까지 재산 거덜 날 때까지는 아버지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아버지 생각 안 했습니다. 재산 다 날라 가니까 그때서야 아버지 생각나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지 아들 죽이니까 비로소 아들 없는 상태에서 누굴 바라봅니까? 아버지의 말씀이 내가 사랑했던 아들보다 더 우선된다는 사실을 아는 겁니다. 우리는 언제쯤 주의 말씀을 내 자신보다 우선으로 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은 주님과 연관돼 있는 예수님의 죽음만이 연결돼 있거든요. 다른 죽음은 연결이 안 돼요. 예수님의 죽음에 이렇게 모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건 청소기인데 그냥 청소기가 아니고 진공청소기예요. 문 닫아놨는데 청소기 들고 오셨어요. 휙~ 빨아들이는 거예요. 고스트바스트 영화 보면 나와요. 유령 처리하는데 청소기 들고 가서 처치하잖아요. 그런 만화도 있고 옛날에 그런 영화도 있었어요. 빌보드 1등한 노래 고스트바스트란 노래도 있어요. 만화인데 유령퇴치 용역업체예요. 뭐가 나오느냐, 청소기 들고 빨아들이면 들어가는 거예요.
주께서는 청소기 들고 오셔서 자기 십자가로 빨아들여버리면 우리는 어디 속으로 들어갑니까? 십자가 안에 들어가 있는 겁니다. 십자가 안에 들어가는데 여기서 좀 어려워요. 왜 어려우냐 하면 만약에 한번 빨아들였으면 우리는 계속 주 안에 있잖아요. 그리스도 십자가 안에 있죠.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우리는 더 이상 주께서는 안 오셔도 되잖아요. 그렇죠? 여기서 어렵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내 구원중심으로 본다면,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넣어주시고 받은 성령 가지고 우리는 잘 활용하고 잘 살면 돼요. 성령을 소멸치 말고 늘 범사에 감사하고 이렇게 살면 아무 문제없는 겁니다. 저 개혁주의처럼 그렇게 살면 되는데, 성경은 그게 아니고 성경은 내 구원중심이 아니고 아까 뭐라 했습니까? 언약 중심(中(덧말:중)心(덧말:심))이죠. 이스라엘이라는 기능을 해야 돼요. 기능 중심!
다니엘이 구원받았습니까? 구원 안 받았습니까? 지금 다니엘은 다니엘에서는 다니엘 구원에 관한 언급은 없어요. 다니엘 가지고 일을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그 일은 다니엘 본인도 몰라요. 그러니까 다니엘이 미치는 거예요. 느부갓네살 꿈 꿨죠. 그 꿈 꿀 줄을 다니엘이 예상했습니까? 예상 못했습니까? 예상도 못한 거예요. 다니엘도 우리와 똑같은 입장 이예요. 다니엘도 주의 하는 변덕스러운 일을 종잡을 수 없는 일을 다니엘도 무슨 수로 그걸 잡습니까? 주님께서 변덕스러운데. 지가 하나님입니까? 지도 몰라요.
제 말은 다니엘도 그때그때마다 주께서 은혜를 주셔야 다니엘이 다니엘 일을 한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입장이라면 ‘주여, 저는 5년 전에 예수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나한테 찾아오지 마시고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러면 되는 문젠데, 이건 우리 구원문제가 아니고, 우리를 데리고 일을 하시는 것 같으면 매일같이 우리로 하여금 교만케 하고, 우리로 하여금 주님 잊어버리게 하고, 하나님 잊어버리게 만들고, 그리고 세상 사람처럼 성공하고 싶게 만들고, 그런 마음이 매일같이 들게 해놓고 그것도 또 우리 속에서 조져버리고, 들게 해놓고 조져버리고, 이렇게 하시는 것은 바로 매일같이 주님만 의지하게 하기 위해서. 교만치 않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사도바울은 ‘날마다 죽노라’ 했고, 나를 죽음에 넘기움은 주의 생명이 너희들 속에 역사하기 위해서 내가 날마다 죽고 너희는 날마다 살고, 나도 살고 이렇게 산다는 거예요. 산다는 말 할 때는 내가 다른 말로 하면 날마다 하나님께서 나를 초죽음에 계속 집어넣는다는 거예요. 그럼 죽음에 집어넣는다는 말은 뭔 뜻이냐, 여기 숨 막히고 사업 망하고 그게 아니고 이겁니다. 딱 하나예요. ‘예상 못할 사태‘ 매일같이 계속 일이 벌어져요. 매일같이 예상 못합니다. 항상 비껴가요. 이렇게 되리라 생각하면 ’오, 이러면 안 돼.‘ 또 당황스러워. ’‘주여‘ ’왜, 왜, 왜?‘ ’ 주님, 믿습니다.‘ ’뭐, 어쩌라고?‘ ’그런데 왜 당황스럽게 합니까?‘ ’그게 내 일이야. 니는 계속 당황해야 돼.‘ 안절부절 해야 돼요. 왜? 그래야 니가 ’주여, 이번 일도 또 주께 맡깁니다.‘ ’진작 그래야지.‘ 항상 내가 일처리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 맡기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 다니엘 주변에 자꾸 일을 만들어요. 손가락도 벨사살 왕 지적하기 위한 손가락도 되지만 다니엘의 존재 의미를 그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 안 죽었다.’ 이 말이거든요. 다니엘을 통해서 하는 거예요. 다니엘은 괜히 중간에 끼어서 자기도 해석 못해요. 그 점을 다시 4장 돌아가서 봅시다.만만치 않습니다.
4장 18절 봅시다. “나 느부갓네살왕이 이 꿈을 꾸었나니 너 벨드사살아 그 해석을 밝히 말하라” 이게 어려워요. 왜냐 하면 해석할 게 없기 때문에. 해석을 지금 누가 다 했느냐 하면, 느부갓네살 지가 해석 다 했어요. 꿈 자체가 해석 이예요.
이 말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꿈은 해석돼서는 된다? 안 된다? 꿈은 해석되지 말아야 돼요. 뒤에 다니엘이 꿈을 해석을 해주는데 그 해석은 앞에서 느부갓네살이 해석한 거와 똑같이 이야기합니다. 해석할 게 없어요. 전에 금 신상 있잖아요? 금 신상은 꿈조차도 몰랐잖아요? 꿈조차도 다니엘이 끄집어냈고 해석도 누가 했다? 다니엘이 한 거예요. 그러면 느부갓네살은 멍청하게 지가 한 몫은 아무것도 없어요. ‘내가 뭐 꿨더라. 어이, 다니엘아, 내가 어떤 꿈 꿨지?’ ‘이 꿈 꿨습니다.’ ‘맞아. 맞아. 맞아. 해석은? ’그래, 그래.‘
없음에서 있음으로 나올 때 느부갓네살은 그냥 이용당할 뿐 이예요. 여기 지가 개입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꿈은 이미 느부갓네살이 뭘 했습니까? 이미 금 신상을 만들었잖아요. 이걸 만든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금 신상대로 너는 멸망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입장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뭐냐 하면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홍해가 두 번 갈라졌습니까? 딱 한번이죠. 만약에 두 번째 홍해가 갈라졌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의지할 필요 없습니다. ‘안다. 안다. 내가 다 안다. 아이고, 모세여, 지팡이, 에이고, 다 아는데. 뭐. 빨리빨리 물에 대라고.’라고 할 거예요. 여리고성 어떻게 무너졌습니까? 돌아서 무너졌잖아요. 다음에는 여리고성 어떻게 무너집니까? 그 다음에는 없어요. 똑같은 일을 두 번 다시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향하여 나갈 때는 뭐가 깊어야 되느냐 하면 죄가 깊어야 돼요. 죄가 깊은 곳에 용서도 깊게 돼요.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가 깊으면 깊을수록, 예수님 공로로만 구원받지, 우리의 행위로 구원받지 않는 것이 드러나게 돼 있어요. 따라서 우리는 점점 더 우리가 담고 있는 죄의 깊이의 바닥까지, 밑바닥까지 내려가 줘야 되고, 그리고 이 바닥까지 내려가는데 있어서 우리는 이걸 그걸 유도하기 위해서 이단들이나 불신자들이 이걸 같이 도와줘야 돼요. 이단들이 도와줘서 우리의 죄가 어느 바닥까지 지금 있는가 알아야 돼요.
오늘 아프리카 모로코 거기에 걸어서 세상에 이르기에 보니까 모로코 계곡에 우물이 있는데 얼마나 깊은지 밖에서 물을 세 번 부니까 한참 있다가 속에서 틱틱틱 튀어요. 아주 우물이 굉장히 깊어요. 우리의 죄는 계속 깊숙이 내려가야 돼요. 계속 내려가서 예수 그리스도까지 계속 가야 되는데 이 역할을 유대인들이 해줘야 됩니다. 유대인들은 무슨 역할 합니까? 예수님을 자기 사적으로 죄짓는 정도가 아니고, 메시아 하나님을, 자기가 섬기는 하나님을 죽이는 죄까지 져줘야 돼요. 그래서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베드로가 뭐라 합니까? 그런 예수를, 메시아를 너희가 죽였다 할 때 그때 유대인이 뭐라 합니까? ‘어찌 할꼬’ 그때 베드로가 ‘주 예수를 믿으라. 너희가 죽인 자를 ’내가 죽였습니다.‘라고 믿어버리면 그것이 구원이 된다는 거예요. 그럼 내가 예수를 안 죽였는데 ’죽였다‘하면, 이건 구라로 하니까 이건 안 쳐줘요. 구원이 안 돼요.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십자가만을 어떻게든 우주의 중심으로 남기 위해서는 제발 좀 죽여주는 일들이 일어나줘야 돼요. 이 깊이를 알기 위해서는 이 느부갓네살로 하여금 이미 자기는 꿈의 실현단계에 들어가 있어야 돼요. 야, 이 말이 어렵다. 이미 우상은 만들었잖아요. 이미 그건 죄이잖아요. 그러면 전에는 죄지을 때만 죄지었는데, 그때부터 느부갓네살은 하는 모든 것이 죄고 죄라고 그냥 죄가 아니고 너~무 죄,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그 자체가 죄가 되고 매일같이 꿈꾸면 꿈 자체가 꿈이고 해석이고 다 죄가 돼요. 전부 다 죄가 돼야 돼요.
처음에 예수 믿을 때 술 먹는 것이 죄인 줄 알고, 술 먹는 것이 죄이면 술 안 먹는 것이 죄가 아니게 되죠. 처음에 예수 믿으면 그렇게 믿어요. 나중에 예수 믿으면 술 먹으나 안 먹으나 십일조 하나 안 하나 헌금 하나 안 하나 사는 것 자체가 죽어 마땅한 죄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말이죠.
여러분들이 인생 살면서 애들 노는데 어른들이 같이 끼어들지 마세요. 애들이 재미가 없어요. 제 아내 이야기 들어보니까 애들이 나뭇잎을 돌멩이에 넣고 이건 반찬이라 하는 거예요. 그때 지나가던 어른이 ‘야, 그게 나뭇잎이지 그게 무슨 반찬이야?’ 이러면 재미없잖아요. 애들이 노는데 어른이 끼어들면 재미가 없는 거예요. 지금 한국교회가 완전히 애들 소꿉놀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남을 미워하면 죄입니다.’ 이러고 있다고요. 니가 죄야, 니가, 니는 뭘 해도 죈데.
느부갓네살이 처음에는 꿈을 꿀 때 그 꿈이 바로 자기 실체를 밝히고 죄고 잘못이라고 밝혀냈지만, 나중에는 그냥 사는 것 전체가 그 꿈을 안다고 해서 회개하고 개과천선할 것도 아니고 그냥 인생 끝장날 때까지 죄만 계속 나오는 거예요.
그것을 이 땅에서 일어나는 땅의 중심인 느부갓네살을 어디까지 잇느냐 하면 지하 터널로 해서(시화호 아시죠? 안산에 있는) 바다로 연결시키는, 바다짐승으로 연결시켜요. 이 짐승과 연결시키려고 여기 터널을 파서 이 느부갓네살을 그냥 꿈이나 꾸는 느부갓네살을 짐승의 요소를 터널을 뚫어서 바다의 짐승을 여기로 올라오게 만들어버렸어요. 해석 별거 있어요? 지 꿈 이야기가 해석이었어요. 꿈 이야기가 해석이라니까요. 나중에 더 나가면 밤에 꾸는 걸 꿈이라 하잖아요? 이젠 낮에 꿈꿉니다. 술 먹고 ‘이것이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술잔이다. 부어라 마시자.’ ‘야야, 그게 꿈이다.’ 그게 죄의 세상에서 일어날 꿈같은 일이예요.
그럼 현실은 뭐냐, 손가락 이예요. 현실이 손가락이고 나머지는 술 먹고 취하는 것들, 취해서 남의 연예인 전 부인 칼로 찌르고, 그 자체가 전부 다 가상의 세계입니다. 사람은 가상의 세계서 못 벗어나기 때문에 가상의 세계가 현실인 줄 알고, 계속 꿈을 꾸고 있는 거예요. 술집에 왜 갑니까? 기분 좋아서 술집에 가는 경우는 별로 없어요. 전부 다 뭔가 터트리기 위해서 가거든요. ‘건드리기만 해봐라.’ 이래서 전부 다 술집에 가는 이유가. 그렇게 가는 자체가 잘못이죠. 왜, 거기 왜 갑니까? 꿈인데, 현재 사는 게 꿈인데 그래도 현실을 잊기 위해서 멋들어진 꿈을 꾸기 위해서, 술 먹으면 꿈을 꾸잖아요? 환상세계를 보잖아요. 유토피아 세계, 그걸 갖기 위해서 술집에 가서 죽고, 다치고, 그런 게 나온다고요.
싸이가 4주째 빌보드 2등을 한다 하잖아요. 싸이는 지금 준비해야 돼요. 그게 꿈에 불과하다는 현실을. 그럼 현실은 뭐냐, 그게 꿈이라고 지적해주는 손가락이 그게 현실 이예요. 교인들도 정신 차려야 돼요. ‘당신들 교회 와서 한 짓들 다 헛수고다. 예배당 짓고 헌금하고 헛수고야. 진짜 구원은 예수의 피만 믿으면 돼.’라고 지적해 주는 그 손가락이 그게 진짜 현실 이예요. 나머지는 전부 다 가상이라니까요.
그런데 사람들이 세상 살기 힘드니까 행여나 복줄까 싶어서 교회 와서 십일조하면 복 30배, 60배, 100배 준다는 사기꾼에게 속아서 더 따내려고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세상도 가상이고 교회도 그 세상 가상현실의 일부로서 가상 세계예요.
미국에 있는 어떤 목사님이 저한테 책 잘 받았다고 메일을 보내왔어요. 제가 답장을 했어요. 그분이 복음을 아시는 분이기 때문에 용기를 주려고 했어요. ‘목사님, 아닌 것은 아니고, 바른 것은 어떤 경우라도 바른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 눈치 보지 말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하고 예는 예, 아니요는 아니요, 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그것만 하면 됩니다.’ 이거하면 몇 사람 더 들어오고 이 소리하면 나갈 것이고, 자꾸 그런 것 생각하지 말고, 그게 자기가 꿈을 꾸고 있는 거예요. 그게 느부갓네살이고 그게 벨사살 이예요.
‘나는 세상의 중심이다.’ 순찰 자 오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죠. 와보니까 짐승 됐다고요. 짐승이 어디서 왔다고요? 바다에 있던 짐승인데 이게 시화호, 터널을 뚫어서 땅에 뭐가 스며들었다? 바다 요소가, 짐승이 땅에 스며들어서 들어와 버린 겁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다니엘 4장 25절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이것은 15절에서 느부갓네살 지가 이야기한 거예요. 추가될 해석도 없어요. 그 다음에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일곱 때 지내는 것도 어디 나옵니까? 16절에 나오잖아요. 느부갓네살 한 것을 지금 되풀이하고 있는 거예요.
일곱 때가 지나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한번 봅시다. 과연 되는지, 3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32절에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니 33그 동시에 이 일이 나 느부갓네살에게 응하므로 내가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았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았었느니라 34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요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잠시 느부갓네살이 짐승 됐죠. 자, 여기서 해석해 봅시다. 잠시 꿈꿨다. 이 해석을 어떻게 했습니까? 잠시 꿈꿨다는 것은 앞으로 니 인생도 전부 다 꿈이고 가상세계다. 이 말이거든요. 잠시 짐승 되었다. 이 말은 짐승 됐다가 인간 된 게 아니고 전부 다 니는 짐승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총명이 돌아왔다는 것은 어떻게 보는가, 하나님께서 쓰실 구석이 있기 때문에 총명을 준 거예요. 아직까지 짐승으로 끝날 게 아니고 7년만 짐승 되게 하신 이유는 그 뒤에 짐승은 맞는데 짐승 아닌 걸 해야 그 다음 일이 또 진행이 돼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가 사는 것이 살고 싶어 사는 것이 아니고 필요에 따라서 산다는 겁니다. 필요에 따라서! 우리가 죽을 때가 되면 죽는 거예요. 참새도 주의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는다 했잖아요. 팔리는 것도, 떨어지는 것도 주의 뜻이 아니면 팔리지 않고 떨어지지 않는다 했잖아요.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그런 말씀 했잖아요. 하물며 자기 백성이 살고 죽는 것을 주께서 주관하신다 이 말입니다.
얼마 전에 장례식이 있었는데 거기서 제가 설교를 했어요. 제가 무슨 설교 했느냐 하면 하무엘 상 2장 6절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신다.” 그런데 왜 살리시기도 하고 죽이시기도 하는데 왜 죽이시는가, 그동안 살아온 것이 니가 살만해서 살아온 것이 아니고 죽음이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살려준 거예요. 살만한 자격이 있어서 살아온 것이 아니고, 죽음이 우선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살아온 거예요. 그러니 죽음이 기본이고 사는 것은 이건 그냥 행운 이예요.
그래서 제가 글에 이렇게 썼잖아요. 사람은 죽음에서 만든 거예요. 흙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어디로 돌아간다?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러면 왜 아담은 만들었는가, 선악과 따먹으라고 잠시 만들어 놓은 거예요. 선악과 따먹으라고! ‘따먹었나? 다시 흙으로 돌아가라’ 그러면 괜히 만들었어. 인간은 괜히 만들었죠? 아닙니다. 생명, 여자를 끄집어내요. 여자 이름이 뭡니까? 여자 이름이 생명. 여자의 후손에서 메시아 나오기 위해서 여자로 하여금 여자 되게 한 거예요. 그러면 아담은 땡 잡았죠. 왜, 마누라 잘 만나서. 자기는 죽음이지만 아내는 뭡니까? 생명이잖아요. 아~! 내가 죽는 것도 그냥 아예 없이하는 게 아니고 태어나게 해서 보고 죽게 하는 것도 생명이 주님의 손에 의해서 탄생된다는 사실, 우리 손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고 내가 생명 따먹는다고 생명 얻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생명을 줄 때만 생명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죽게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여자 이름 하와는 생명이고, 그 여자의 후손에서 생명이 나온다는 거예요. 생명이 없는 게 아니에요. 있어요. 있는데 그 생명 노선을 우리가 가질 수가 없어요. 왜, 우리는 주께서 거저 주셔야 하는데 어떻게 주느냐, 우리로 하여금 죽어야 된다. 죽음이 너를 만들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서 생명을 우리에게 집어넣어 버린다 말이죠. 생명이 들어와야 ‘나는 흙이구나.’하는 걸 알고, 자기가 흙인 것을 모르는 사람은 생명이 안 들어온 사람 이예요.
느부갓네살을 통해서 짐승 되게 한 것은 우리 모두가 다 짐승에 불과하고, 원래 땅이라 하는 것은 없는 건데 바다가 잠시 갈라져서 땅이 된 거예요. 그걸 노아 홍수에서 보여줬다고요. 그 무지개 폈잖아요. 그 무지개 언약이 이제는 예수님을 통해서 새 언약되는 겁니다. 에스겔 1장에 보면 그 하나님의 보좌에 뭐가 핍니까? 하나님의 영광스런 보좌에 무지개 폈잖아요. 뭐냐, 전에부터 있던 노아언약도 보좌에서 나 하나님이 다 임의로, 시나리오대로 준 거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장차 예수님 오시는 보좌도 무지개 폈다는 것은 요한계시록 주님의 언약의 보좌에 무지개 있잖아요. 그것도 바로 그 모든 언약은 예수님을 겨냥해서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유발시킨 사건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그 유발시킨 사건 속에 놓여있는 겁니다.
어떻게 놓여있는가, 실컷 짐승도 돼 보고 실컷 죽음도 맛보고 우리의 죄가 어느 정도라는 것을 실컷 맛보고, 우리 조상 아담이 선악과가 얼마나 나의 자존심을 유지시켜 주고 있다는 것을 철저하게 느껴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나는 나밖에 모르고 나는 신이고 나는 나 혼자 있는 것이 최고고, 누워있으면 귀찮고 나한테 잘해주는 놈 있으면 그건 약간 일시적으로 봐줄 수 있고, 하여튼 나는 나보다 이 세상에 더 귀한 건 없다는 것을 살면서 우리는 철저하게 그걸 깨달아야 됩니다. ‘깨달으세요.‘ 할 것도 없어요. 그렇게 살면 돼요. 우리는 철저하게 느껴야 돼요.
언제 때? 사람은 아까 이야기했죠. 사람은 위기 때 본성이 튀어나온다고. 예수고 하나님이고 급할 때보면 예수고 하나님이고 없어요. ‘살려만 주이소. 부처도 좋으니 살려만 주이소.’
우리 인간은 내 몸이 내 것이 아니고 아담 것입니다. 아담이 있기 때문에 내 몸을 내 맘대로 못하고 아담의 욕망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어요. 그 점을 이해 좀 합시다. 내 몸이 내 맘대로 안 되는 것에 대해서, 내 욕망이 내 맘대로 자제가 안 되는 것에 대해서, 내가 이해해줘야 돼요. 우리 자신들이. 서로. 시작 3번. ‘이해하자. 이해하자. 이해하자.’ 이해 다 했죠?ㅎ 우리가 그동안 너무 우리한테 검열을 너무 많이 했어요. 너무 책망하고 너무 채찍질해서 자기를 너무 때렸어요. 때려서 인간된다면 실컷 때리죠. 때려서 인간될 인간이 아닙니다. 때리면 때릴수록 바리새인처럼 ‘주여, 나는 스스로 죄인인 걸 깨달았습니다. 어때요? 저 괜찮은 존재죠?’ 이러는 게 인간이라.
이건 때려도 말 안 듣고, 우리 조상 아담이 내 말 듣습니까? 내 속에 아담 들었는데 어떻게 아담이 내 말 듣습니까? 선악과 따먹고 나밖에 모르는데. 하나님, 예수님이 좋은 게 아니고 내가 좋은 거예요. 예수님이 나를 공격하면 예수 안 믿을 가능성이 많아요. 그런 인간들을 깨닫게 하시는 것은, 성령이 아니고서야 이런 말을 고개를 끄덕이면서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아니고서야.
지난주일 아침에 설교 듣다가 두 사람 뛰어나갔어요. 설교 하면서 ‘이 사람 뛰어나가야 되는데, 이래도 안 뛰어나가 설교 더 세게 해야 되는데’ 그러는데 뛰어나갔어요. 왜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뭔가 꿈을 열 겹 두껍게 칭칭 감고 있어요. 꿈 깨보면 백설 공주, 신데렐라, 좋은 건 다 붕대에 들어있어요. 깁스한 꿈에 보면 인어공주도 들어있고, 좋은 거 다 들어있어요. 재벌 3세도 들어있고, 온갖 것 다 들어있다고요. 그러나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뭐냐, 이미 죽어있어요. 아담 시체가 들어있는데.
27절 봅시다. 그래서 마지막에 다니엘이 꿈 해석 다 끝내면서, 꿈 해석 할 것도 없이 앞에서 다 했는데요. 다니엘이 하는 말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 그런즉 왕이여 나의 간하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속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속하소서” 자, 다니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니까 왕은 어떤 왕이 되느냐, 여러 가지 이야기했지만 결론은 한 가지입니다. ‘왕이여 지시에 따르소서.’ 당신이 왕이 아닙니다. 당신은 다니엘 내 말을 들어야 됩니다. 다니엘은 다윗언약에 속하는 유대인입니다. 유다지파에 속한 다니엘이 누구보고 지시합니까? 최고의 유일한 하나밖에 없는 나무한테 지시를 하죠. ‘왕이여, 내 말 들으소서.’ 누가 왕 이예요? 도대체. 누가 높은 사람 이예요? 어느 나라가 어느 나라를 지금 다스리고 있는 겁니까? 바벨론이 분명히 유다나라를 지배했는데 오히려 지금은 거꾸로 됐죠. 바벨론이 지금 누구 지시를 받습니까? 유다나라의 지시를 받고 있는 겁니다. 포로 잡혀 왔던 것이 도리어 그들을 지시를 하고 있죠.
그 지시 내용이 뭐냐 하면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속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속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그러면 왕의 목숨은 어디에 달려있습니까? 가난한 자들에게 달린 거예요. 왕의 목숨이. 쉽게 하면 ‘왕이여, 니 누고?’ ‘저 가난한 사람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왜 왔는데?’ ‘나 가난한 사람인데 나 어떻게 해줄 거요?’ ‘에라이. 시, 어디 거지가 와서’ 이러면 당신이 죽고 ‘어이쿠, 가난한 사람!’ 다니엘 말이 생각나서 ‘그래, 억울한 돈 어디서 뺏겼는데? 어디서 당했는데? 내가 갚아줄게.’ 이렇게 공의를 베풀면 누가 살아요? 느부갓네살 본인이 사는 거예요.
그럼 느부갓네살 앞에 뭐가 포진돼 있습니까? 결국 가난한 자, 억울한 자, 희생당한 자들이 포진돼 있죠. 결국 이 모습이 가난한 자, 억울한 자, 과부된 자, 고아, 이게 결국 뭐냐 하면 이 땅에 장차 오실 메시아의 모양새다 말이죠. 메시아의 모양새! 그러면 죄 용서하는 상황이라는 것은 본인들이 뭘 해야 된다? 왕이여, 그러면 죄가 용서된다 이 말은 왕은 죄인이라는 기정사실 이예요? 기정사실이 아니에요? 기정사실 이예요.
지금 우리가 부자도 아니지만 만약에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이 내 곁에 있다면, 나는 졸지에 어떻게 돼요? 그 사람의 재산을 약탈한 사람으로 돼버리는 겁니다. 왜, 예수님은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 옆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면, 그 가난한 사람은 도움 받아서 구원받습니까? 아니면 자기 죄를 드러내야 구원받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돈도 없는 나에게 돈까지 갚아주는 거지가 있다면 그 거지가 구원받는 방법은 나한테 돈을 얻어먹는 겁니까? 아니면 자기보다 더 가난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기 죄를 인정하는 거예요? 어느 쪽 이예요? 죄를 인정하는 거죠. 그러니까 교회는 오직 뭐만 전해야 돼요? 예수님의 십자가만 전해야죠. 제 논리가 이상합니까? 맞잖아요.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면 죄용서 받는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거죠. 항상 내 곁에는 나를 죄인 되게 드러내는, 도드라지게 만드는 그런 요소가 있다 이 말이죠. ‘목사님, 제 집 주위에는 다 골프나 치고 전부 다 차가 3대고, 전부 다 외제차만 있고 다 잘 삽니다. 이휴,도와 줄 것도 없고 나보다 다 잘 살아.’ 이러면 안 되고,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가 항상 우리 곁에 있을 때, 주님한테 동냥 주고 주님한테 월급 주라는 말이 아니고, 나는 무슨 짓을 해도 다른 사람에게 구제해도 뭐다? 죄인이고 헌금해도 죄인이고 십일조 해도 죄인이다. 그 말입니다.
기정사실! 죄 있는 기정사실을 알아야 돼요. 이게 바로 뭐냐 하면 꿈을 꼭 해석할 필요 없어요. 우리가 살아가는 그 자체가 주께서 꾸게 하시는 꿈이고 그 꿈속에서 우리는 죄인임이 드러나고, 진짜 현실은 난데없이 피 흘려 죽으신 십자가만이 진짜 말씀에 입각한 유일한 현실입니다. 현실도 그냥 현실이 아니고 너~무 현실! ‘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이 자체가 해석 이예요.
그런데 이제부터 진짜 어려운 거 하겠습니다. 이왕 어려운 거 하는 거 나도 모르겠습니다. 십자가는 해석 자체가 안 됩니다. ‘내가 쉬운 말로 해줄게.‘ 이건 쉬운 말로 해도 안 되고 이건 은유로 해도 안 되고 비유로 해도 안 되고 뭐로 해도 안 돼요. 왜, 들을 귀 있는 자는 따로 있기 때문에. 들을 귀 없는 자가 쉽게 해서 알아듣고 하는 그런 십자가는 없어요. 십자가를 제가 주일날 이렇게 이야기했거든요. 물그릇을 쏟아버리면 물이 주위로 확산되잖아요? ’복음에 빚진 자‘ 설명하면서 그거 설명했잖아요. 이거 말릴 수 없어요. 엎질러버렸으니까.
십자가라는 것은 2000년 전 사건 하나입니다. 한 사건이 그 다음부터 성령을 통해서 퍼져 버려요. 그러면 성령이 내리는 그 테두리, 가장자리에 무슨 사건이 일어납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희생사건이 벌어집니다. ‘이상하다. 내 행함대로 하면 이정도 보상은 받아야 되는데, 왜 내 행위는 이런데 왜 보상은 안 돌아오지?’ 라고 여기는 그 희생적인 것, 아벨처럼 제사는 받아들였으니까 이제는 난 형보다 더 부자 될 것이다.‘라고 했는데 형이 와서 짱돌로 뒤통수 쳐서 죽어버리고, 이게 하나님께서 제사 받은 보상이 이겁니까? 이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매일같이 내가 이정도 착했으면 이정도 기대치가 이만큼 될 거다.’라고 여기는 모든 것이 무참하게 깨지게 하는 그것이 성령께서 물 잔을 엎질러버리는 거예요. 이게 퍼지니까 가만히 있지 못하고 밀리는 거예요.
여기 컵이 엎질러져서 물이 나오면 여기 물에 종잇조각이 있으면 종잇조각은 가만히 있어도 물에 쓸려서 자꾸 바깥으로 자꾸 떠내려가는 거예요. 떠내려가다 보면 ‘ 자꾸 이상하다. 내가 원하는 인생은 이게 아닌데, 왜 자꾸 이리 가지?’ 하는 그런 것이 바로 십자가의 확산으로서 온 천하에 복음을 전하게 만들었어요. 12제자가 다 그랬어요. 본인이 원하는 길이 아니고 원치 않는 길, 본인이 원치 않는 길로 띠 띠고 갈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한 현장을 그 장소를 우리 같으면 시대적으로 나눌 수 있는데, 요한계시록은 기간을 잘라버리고 뭐라 하느냐 하면, 두 증인이 있던 곳을 애굽이고 소돔이고 십자가 죽으신 곳이라. 완전히 시간 간격을 허물어 버리고 어디 있든지 그게 바로 애굽이고 그게 십자가 죽으신 곳이고 그곳이 소돔과 고모라고 그 자체를 규정을 그렇게 해버려요. 묵시적 규정이기 때문에 이런 시간의 흐름 같은 것은 인정 안 해요. 하여튼 주께서 우리를 사용하시는데 성령의 십자가 영에 휩쓸려서 사용하게 되면 우리는 어떤 걸해도 억울할 필요 없이 주께서 사용한다는 걸 느끼라 말이죠.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는 자꾸 주님한테 대들고 ‘주여, 이렇게 나오면 나도 섭섭합니다. 이렇게 나올 것 같으면 더 이상 예수 못 믿겠습니다.’하고 뭔가 숨어있는 반발심이 튀어나오도록 함으로서 ‘하아, 드디어 주께서는 찾아낼 걸 찾아내고 뽑아낼 걸 뽑아내고 지적할 걸 지적하게 되죠.
병원에 가면 치과에도 엑스레이 찍죠?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개성을 무산시킬 능력이 있어요. 엑스레이라는 뼈 사진 앞에서는 김 태희도 없고 장 동건이도 거기 없어요. 왜냐 하면 단층촬영 같은 경우에, CT 촬영 같은 경우에 잘라버리거든요. 1741개로 단층을 정육점의 고기 자르듯이 쇠톱으로 잘라놓아서 합쳐 놓으니까 이건 완전히 모양새도 없고 기껏 나오는 것은 쌍꺼풀 수술 한 거나 튀어나오고 여기 뼈 심어놓은 거 그런 거나 나오지, 인물 찍어 바른 화장발 그런 건 전혀 안 나온다 이 말이죠.
우리 모습이 십자가 앞에 가면 어떤 인간이라도 용서받을 수 있고, 어떤 인간이라도 죄인으로 다 드러납니다. 공평해요. 다 아담입니다. 다만 촬영을 당했다는 사실, 엑스레이 촬영을 당했다는 사실이 뭐냐, 성령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내가 참 꿈속에 사는데, 이걸 꿈을 꿈이라고 이야기해주니까 이게 바로 현실이구나!’
중국의 장자는 그걸 깨닫지 못했어요. 성령이 오지 않으니까. 내가 나비의 꿈을 꿨으니까 나비가 난지,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분간이 안 된다. 꿈 깨도 마찬가지예요. 꿈 깨고 있는 것이 꿈을 깬 것인지 꿈 중에 있는지 꿈 깨고 있는지 진짜 꿈을 꿔서 꿈에서 깨는 건지, 도대체 뭘 측정할 기준이 없다는 거예요. 아이쿠, 짐승아. 십자가가 없으니까. 내 대신 저주받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게 없으니까 모든 게 희망과 비전과 꿈속에서도 꿈을 꾸고 꿈을 깨도 꿈이고 죽어도 꿈이고 살아도 꿈이고. 사나 죽으나 꿈이다. 마지막 날에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산 자나 죽은 자나 주님 음성 들을 때가옵니다.
결국은 성경 말씀대로 세상은 예수님으로 통일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그건 우연한 사건이 아니고 전 세계를 하나의 진리로 통일되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 맞다는 거예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그 말 맞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이 성령에 의해서 믿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세전의 뜻이고 내가 믿었으면 이건 취미생활이고, 주여 항상 우리가 주의 십자가만 바라보면 죄인으로 깨닫는 것은 성령의 역사인 줄 알게 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우리 공로 자랑하지 말고, 십자가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것을 자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