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서

다니엘서9강-일그러진 지면121215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3. 6. 11. 07:56

 

2012-12-15 02:09:51 조회 : 318         
일그러진 지반 121213 이름 : 이근호 (IP:119.18.69.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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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IP:119.♡.69.144) 12-12-15 02:57 
가락교회 두번째 동영상은 화면이 깨어져서 올리지 못합니다.
 이한례 (IP:203.♡.41.16) 12-12-21 22:04 
가락교회-다니엘 6장19(일그러진 지면)121213-9강a -이 근호 목사

제 9강a

오늘 다니엘 6장 19절 그쪽 이야기할 차례입니다. 너무 텀이 길어서 지난번하고 기간이 길어서 요 대목을 다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임금이 진짜 다니엘을 만나는 지점은, 우리가 사람 만날 때 그냥 집사님도 만나고 만날 수 있잖아요. 그런데 다니엘을 만날 때는 그냥 만나버리면 보통 사람 만나는 거와 똑같이 돼요. 아무 의미가 없어요. 예수님이 키가 몇 센티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몸무게는 몇 킬로그램이고 예수님이 다이어트는 하셨는가, 예수님의 동생은 몇 명이지? 예수님의 어머니는 미인일까? 그거 아무 의미 없잖아요? 예수님의 출생지가 베들레헴이냐 나사렛이냐, 그것도 의미 없어요.

다리오 왕이 다니엘을 만날 때는 그냥 만나버리면 그냥 자기 신하 만나는 것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서로 이질적인 것이 만날 때는 그 만나는 장소가 중요합니다. 그 장소가 무슨 장소냐에 따라서 다니엘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됐냐 하면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갔을 때, 들어가기 직전에도 다니엘을 몰랐죠. ‘저 가자마자 죽을 거야. 아이쿠, 인생 저래 살다 끝나는구나, 내가 생각해도 안 됐다.’고 했는데 그 사자들이 결국 뭘 보여줬느냐 하면, 다니엘은 사람이 아니무니이다. 보통 사람이 아니무니이다. 다니엘은 이건 우리가 흔히 만나던 시장 통에서 만나는 그런 류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에 누굴 만난다? 다니엘과 다리오 왕이 만납니다. 그럴 때 다리오 왕은 단순히 다니엘을 만나는 것이 아니고 평소에 다니엘이 믿었던 그 숨어있던 하나님을 만나는 계기가 되는 거죠.

오늘날 성도라는 게 그런 거예요. 성도가 세상 적인 것 내놓고 누가, 누가 똑똑하고 누가, 누가 잘났나, 그거 시험하라고 우리 성도 만든 게 아닙니다. ‘너는 한 달 수입이 얼마고 나는 이거고.’ 이런 거, 학력, 어느 대학 나오고 이런 거 따지라고 성도된 것이 아니고 특수한 존재예요. 특수한 존재인데 그 특수한 존재를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없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특수한 상황과 사건을 이렇게 구성을 합니다. 구성을 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를 통해서 숨어있던 주님의 활동을 그들이 새롭게 접선할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를 도구로 사용을 하는 거죠.

쉬운 예를 들면 간단하죠. 예수님의 12제자의 갔던 길, 스데반 집사, 사도바울, 그게 보통 사람이 자기가 가고자 해서 갈 길이 아닙니다. 이는 본인이 갈 수가 없어요. 12제자 말고 사도바울 같은 경우에 그 사람은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잖아요. 그리고 그 사람은 불교 신자 아닙니다. 누굴 믿었어요?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잖아요.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는데 빌립보서 3장에 보면 나오죠. 내가 지금까지 했던 모든 의로움과 모든 것을 나는 배설물로 여긴다.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어요. 율법에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에 누가 흠이 없나 시합해봐? 하면 누구한테 기죽지 않고 누구한테 밑지지 않는 대단한 사람 이예요.

요새 개혁주의 같으면 뭐에 탁월한 사람 이예요? 성화 되는데, 거룩한 생활하는데 누구한테 뒤지지 않는, 도 닦는 것, 교회 와서 도 닦는 것이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고, 기도면 기도, 헌금이면 헌금, 열성이면 열성, 얼마나 열성이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였겠습니까? 그 모든 것에 대해서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았는데 그 모든 것이 뭐였다? 배설물! 똥, 오줌이었다. 원래 배설물은 어디서 생산됩니까? 누가 생산한 거예요? 바로 자기가 생산한 거예요.

그러면 나에 의해서 나왔던 것이 똥, 오줌이라면 그럼 나는 도대체 뭐예요? 그거 만들어 내는 공장이죠. 잘난 체 하는 공장, 자기 의 생산하는 공장, 남한테 기죽지 않고 남 앞에 당당하고 싶어서 인생을 살아가는 그러한 식으로 살아갔던 그 자신이 우리 대신 사도바울이 미리 가놓고 예수님을 만났을 때 배설물로 여겼다는 거예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그 상대방이 예수님이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도대체 누구야? 누구로 하여금 저 사람이 갑자기 자기가 했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해? 누구 계세요?’ 봐도 안 보이죠.

예수님은 지금도 안 보이시는 거예요. 안 보이지만 예수님이 다루고 예수님이 관리하고 예수님이 인도하는 사람들의 완전히 독특한 면을 통해서 그들이 자신과 살아가는 인생과 대조하게 만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방금 제가 대조라는 말을 썼죠? 이걸 다른 말로 대립이라 합시다. 하나님이 어디 나타나느냐, 대립되는 두 개의 지층이 만남으로서, 마주침! 대립해서 마주치는 거예요. 마주치면 똑같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마주쳐서 대화해 보니까 한쪽은 복음이고 한쪽은 비 복음이고, 마주쳐야 자기 색깔이 딱 나타나요. 아직까지는 문재인과 안철수 두 사람이 같이 다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계속 만나고 있다 하지만 만나긴 만나지만 마주침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둘이 마주칠 때, 물론 한 때 마주쳐서 튕겨나갔지만, 마주쳐야 내 노선과 저쪽 노선이 서로 다른 철로, 다른 기차노선이라는 것이 밝혀질 게 아닙니까? 바로 그 틈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주님의 활동이 그 사이에서 튀어나오는 겁니다.

빌립 집사가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났다. 이거는 마주침 이예요. 마주침인데 에디오피아 내시는 고관인데 빌립집사는 아무것도 아니죠. 그런데 누가 누구한테 배웁니까? ‘아저씨, 이사야 53장에 여호와 증인이라는 사람이 누굽니까?’ 이사야 53장 펴놓고 묻는 거예요. 그럴 때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이야기할 때 이것이 주님께서 분명히 이거는 반대, 이질적이라고 여겼는데 복음을 만나니까 같은 형제가 돼 버린 거예요. 누가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바로 보이지 않는 분이 그렇게 한 거예요. 보이지 않는다 뿐이지 활동은 하시는데 그 활동하는 모든 특징과 모습은 이건 얼토당토한 사람, 저 멀리 있는 사람, 이건 도저히 서로 의견이 일치될 수가 없다고 여겼던 그 모든 사회적인 장벽과 계급적인 장벽을 그걸 뛰어넘고 허물어 버리고 복음에서 형제로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빌립집사가 내시를 이용해 먹었습니까? 없죠. 그냥 성령께서 만나고, ‘형제 우리 집에 가서 삽시다.’ 이런 것도 없어요. 그냥 너는 너 갈길 가고, 나는 내 갈길 가는 거예요.

교회가 모였다고 해서 교회가 아니고, 성도가 있는 곳이 곧 교회입니다. 성도 모여서 교회 만드는 게 아니고, 성도가 있는 곳이 교회가 되는 거예요. 주님이 함께 있으니까 교회가 되는 겁니다.

다니엘 같은 경우에 어려운 이유가 그냥 다니엘을 해석하면 해석이 안 돼요.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남들이 따라오지 못할 자리에다 집어넣어버립니다. 여기서 먼저 질문하나 던질게요. 다니엘로 하여금 다니엘 된 것이 다니엘의 신앙입니까? 아니면 다니엘로 그렇게 만든 그 자리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그 자리죠. 그런데 더 질문합니다. 그 자리는 다니엘이 미리 예상 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우발적으로 만드신 거예요? 그 자리는 우발적으로 만든 겁니다. 평소에 다니엘이 사자 굴에 못 들어가서 환장한 분이 아니거든요. ‘아, 동물원에 가서 사자한테 먹혀서 죽어버릴까?’ 이렇게 손꼽아 간절히 기도하고 그런 거 없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자리는 이렇게 생각하세요. 내가 예상한 자리가 아니고 주님께서 이렇게 깔아놓으신 자리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발자국 하나 떼면 기존의 발판 날아가고 새로운 발판이 와서 발이 딱 닿게 만들고 또 떼게 되면 어디서 날아와서 닿게 만들고, 항상 우리로 하여금 좁은 길, 영생이 있는 길, 사람들이 찾지 않는 길로 주께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우리가 ‘저쪽이 좁은 길 같아, 좁은 길로 내가 선택해서 가겠어.’ 이렇게 가게 되면 그 좁은 길이 어느새 좁은 길이 아니고, 자기 배설물을 옹호하는 자기 잘남을 자랑하는 그것은 자기가 신이 되는 자리가 돼 버려요. 그건 천국이 아니고 그건 엉뚱한 길로 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주께서 인도해야 돼요.

제가 어제 수요일 날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예수님만 보이도록 예수님께서 이끄셔야 구원받는 거예요. 예수님만 보여요. 누가 이끈다? 우리가 가는 게 아니고 주께서 이렇게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거예요. 그게 바로 지금 다니엘이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다니엘은 그냥 당했을 뿐 이예요. 사자 굴에 들어가라 해서 들어갔었고, 그래서 살려고 ‘살려주세요.’ 빌지도 안 했는데 사자들이 알아서 입을 다물었어요. 여기에 보면 누가 왔느냐 하면 여기 22절에 보면 누가 사자의 입을 다물게 했습니까? 천사죠.

그럼 한번 정리해 봅시다. 이 자리, 다니엘의 자리는 누가 관리한다? 다니엘이 관리한다? 천사가 관리한다? 천사가 관리한다. 이 이야기를 좀 더 이어봅시다. 우리 성도가 가는 길은 우리가 관리한다? 천사가 관리한다? 천사 +성령님이 관리하십니다. 우리 신약 성경에는.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에 베드로가 옥에서 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한 적 없어요. 베드로는 그냥 잠만 잤을 뿐 이예요. 그런데 잠 잘 자고 있는 사람 깨우면 기분 나쁘잖아요. 천사가 와서 깨웠습니다. 착고는 ‘내가 풀어 줄게.’ 해서 풀어줬고 ‘저 간수하는 사람은 어떻게?’ ‘내가 다 잠재워 줄게.’ 옆에 간수들 잠재워줬거든요. ‘복도에 있는 사람들은?’ ‘내가 알아서 할게.’ 복도에 나가니까 다 자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그 대목을 보면서 다시 시편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 세상에 잠자는 것도 불면증 환자들한테 물어보세요. 잠자는 것도 인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하다가 밤 다 새 버리고 안 된다니까요. 평소에 우리가 잠 잘 때는 은혜인 줄 모르고 꼭 잠 안 올 때만 ‘은혜를 주옵소서.’ 이러고 있잖아요.

평소에 우리 자리를 우리보다 더 신경 쓰는 사람이 있어요. 그걸 천사라 할 때는 항상 머리  속에 여러분들이 이걸 생각해야 돼요. 스가랴를 생각해야 됩니다. 이 천사가 하나님의 구약역사에 따라서 언약의 발전에 따라서 천사가 하는 기능이 질이 변신됩니다. 이 이야기를 이번에 1월 13일 날 대전 수련회 하거든요. 그때 이 이야기가 들어갈 수 있는지 장담 못하겠습니다만 스가랴에서의 천사의 기능이 뭐냐, 한 마디로 간단히 해서 천사의 기능은 사람을 도와주는 기능이 아니고, 사람을 배제하고 전적으로 담당하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스가랴의 천사는 이 세상을 네모진 것으로 도형을 그려놓고 그 도형의 동 서 남 북, 사람의 발이 미치지 않고 사람의 의식이 미치지 않는 끝까지에 먼저 가 있어요. 누가? 천사가. 천사가 먼저 가 있다고요. 시편에 나온 말씀대로 한다면 “바다 끝에 가도 거기 계시고 하늘 끝에 가도 거기 계시고.” ‘설마 이곳에도 주님께서 역사하겠나.’ 라고 우리가 그렇게 조마조마 하는 그 속에도 이미 거기에 천사가 와 있어요. 꼭 하이 카 같아. 하이 카 아시죠? 차 고장 났을 때 불러주면 산꼭대기라도 가고.

옛날에 김 창민인가 개그맨 있었잖아요. 그 사람이 찍었던 광고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자장면 시키신 분, 어디서? 독도에서. 독도서 자장면 시켜서 배달해 주고. 어느 영화에 보니까 그걸 패러디해서 산 정상인데 자장면 배달시켜서 거기까지 자장면 배달 올라온 사람이 있어요. 영화라는 걸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나 혼자 있다는 것, 분명히 ‘나는 모든 결정을 내가 해야 되고 이 세상은 나밖에 없어.‘라고 생각했던 그 외로운 현장에 주께서 그 외로움을 만들어 놓으시고 그동안 미처 체험하지 못했던 뭔가 후견자, 도와주는 분이 너보다 앞서서 너의 인생길을 이끌고, 깔아놓고 포장공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렇게 보여줄 때 우리는 뭐만 이야기하느냐 하면, 고 짧은 순간 예수님의 공로만 감사할 뿐입니다. 주님의 공로만 감사할 뿐이죠.

그러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 배려해 주는 것이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영광받기 위한 방법은 그 방법밖에 없어요.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어서 우리 잘난 걸 전부 다 벗겨내요. 목욕탕에서 등의 때 벗겨내듯이, 우리를 아주 갈아버려요. 우리에게 묻어 있는 모든 것, 우리 자랑, 우리 배설물을 다 떨어내 버리고, ‘야, 어찌 할꼬, 나 끝났어. 끝났어. 끝났어, 나 죽었어.’라고 하면서 뭘 하느냐, 거기서 주님께만 영광만을 돌리는 겁니다.

그래서 지난 부산강의에도 했지만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세상의 모든 일이 주님 보시기에 잘 풀리고 있습니다. 정말 만사가 너무너무 잘 풀리고 있어요. 모든 일이,  눈이 와서 차가 굴러가는 것도 잘 풀렸고, 모든 게 잘 풀렸어요. 화장지만 잘 풀리는 집 사들고 이사 갈 게 아니라 모든 게 지금 잘 풀리고 있는 거예요. 그 잘 풀리는 것을 우리가 제대로 감사하지 못하고 고마워하지 못하는 그게 문제라. 성경에 뭐라고 합니까? 범사에 감사하라 했죠.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을 매일같이 이걸 지킬 위인은 없습니다. 아무도 모든 일에 감사할 만한 일에 감사하는 게 아니고 모든 일에 감사하다를 24시간 어디서든지 늘 지키는 사람, 마음가짐이 늘 감사한 사람, 아이큐가 50되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사람 없습니다. 이 말은 항상 우리는 그 “범사에 감사하라“는 그 말씀 한 마디 앞에서 늘 죄짓고 있다는 겁니다. 항상 짜증낼 만반의 준비를 하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까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모든 일은 지금 잘 풀리고 있는 거예요. 어떤 세상 돌아가는 일이, 이번에 대통령이 누가 되든지 관계없어요. 모든 일은 잘 풀리고 있어요. 북한이 쏘아올린 위성도 괘도에 올라가고, 모든 것이 다 잘 풀리고 있는 거예요. 주님 보시기에 잘 풀리고 있는데 우리가 그걸 짜증을 낸다는 것은 아직도 배설물 같은 것들이 더덕더덕 우리 몸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기 때문에, 아직도 자기의 꿈, 자기의 희망, 자기의 기대하는 것 때문에 그래요.

충돌, 마주침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모든 마주침은 주님의 고대하심과 기대하심과, 우리의 고대한 바, 이것이 불꽃을 튀면서 충동해서 그래요. 그래서 제가 어느 설교에선가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우리는 뭐든지 고대하지 맙시다. 아예 기대하지 맙시다. 기대하면 이게 말썽을 일으켰어요. ‘하나님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면 반드시 그게 결국은 우리에게 실망과 분노와 주의 대한 욕설과 짜증으로 이게 나중에 결과물로 나와 버리죠. 아예 기대 안 하고 살면 참 좋겠는데, 그럼 기대 안 하고 살면 뭐하고 사느냐, 아까 했잖아요? 범사에 감사하며 살면 되죠. 그러면 범사에 감사하면 우리는 감사할 이유가 있을 경우에만 감사하거든요.

그러면 범사에 감사하라 하면 되도 않는 방법으로 그 말씀 지킨다고 감사할 것을 한번 찾아보세요. 없습니다. 감사할 게 있어야 감사하죠. 꼭 부흥회 때 죄 지은 것 회개하라 하면 죄 지은 것 아무것도 없는데 끄집어내서 뽑듯이 감사할 게 없다 이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감사할 게 없는 인간을 감사하게끔 뭐를 만든다? 만드는 자리, 그 자리가 감사 안 하는 인간이 짧은 순간이나마 1초 2초 순간이나마 ‘감사합니다.’라는 소리가 나오도록 그렇게 주님께서 도로포장 해가면서 우리를 영생의 길로 인도해서 그 마지막 길에 가면 주님께서 마중하고 있는데 마지막 들어간 세계 보면 이건 범사가 아니라 범사에 영원토록 감사해요. 그 천국은!! 영원토록 감사하는 거예요.

그래서 천국에서 감사할 것을 미리 당겨서 감사하겠다고 한다면 그건 우리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 하면 만약에 천국이 황금보석이 있어 감사하다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황금보석이 처음에는 좋죠. 집에 황금보석이 너무 많아도 별로 감사가 안 되죠. 나중에 지루해. 그걸 경제에선 욕망 체감의 법칙이라 하죠. 처음에 맛있다 하던 것도 두 번째 먹으면 맛있습니까? 맛없어요. 그래서 부부간에 인물 보고 결혼하지 말라 하지 않습니까? 인물 보고 결혼해도 인물이 자꾸 보면 한 3개월, 6개월 가면 그 낯짝이 그 낯짝이고 인물해도 방귀나 픽픽 뀌고 발에 냄새나고 매력이 없어지잖아요.

진짜 부부사이 좋은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창조됩니다. 뭔가 저 양반이 저런 구석도 있었나? 이런 소리해서 죄송한데 그렇지 않은 부부한테는 지금 욕을 부르는 것 같아 죄송한데 진짜 사이좋은 부부는 자꾸 나와요. 뭔가 신선한 게 계속해서 자꾸 나와요. 그런데 남들보고 신선하다 하면 남들이 비웃어요. ‘너 한 달 전에 그 이야기 했어.’ 한 달 전에 했어도 한 달 후에 또 해도 다시 신선해. 어떤 조건을 보고 하는 게 아닙니다. 어떤 조건이 신선한 조건이고 참신한 조건이 있어서 그걸 보고 느끼는 게 아니고 계속 신선한 것은 상대방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을 바라보는 나 자신이 마음이 낮아져서 그런 거예요. 상대방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낮아져서 그런 겁니다. 물론 불신자 남편보고 이려라고 절대로 이런 소리 안 합니다. 불신자하고 하지 마세요. 이런 소리 하면 이용당합니다. 같은 복음을 바라보는 신자한테만.

신자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가 원하는 자리를 뭐로 바꿔줍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가까이, 가까이 자리를 늘 방석을 바꿔주니까 십자가 가까이 가보니까 주변에 있는 것이 범사에 감사할 것밖에 없는 요소가 되는 거예요. 전에는 놓쳐버린 감사거리가 지금은 새롭게 감격스러움으로 다가온다 이 말이죠. 이렇게들 사십니까?ㅎ

원인은 남한테 있는 게 아니에요. ‘사자야, 제발 나 성도니까 물지 마라.’ 사자한테 부탁해도 소용없어요. 천사가 사자의 입을 다물게 하는 그건 하나님이 하신 것이지, 사자한테 부탁해서 사자가 ‘고기 나 안 먹을게.’ 이렇게는 흥정은 안 되잖아요. 우리 자신이 사자 굴에 갔다. ‘아이구, 이제 그만 살라는가 보다. 그래 살고자 하는 게 문제였었어.’ 이렇게 생각하면, 지금 관 속에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지금 관속에 들어가면 관 속을 들여다보는 아내 얼굴이 아름답게 보인다 이 말이죠. 왜 내 자신이 지금 죽어도 마땅하다는 걸 느끼니까. 그러한 십자가의 죽는 자리를 자꾸 방석을 바꿔주니까 범사에 감사하고 감사하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밖에 없는 거죠.

이제부터 어려운 거 해봅시다. 에스겔 38장~39장에 곡과 마곡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곡과 마곡이라 해서 지금 그 동네 가봐야 별 볼일 없어요. 그런데 유대인이나 미국의 복음주의 계통의 순 복음이나 침례교회 그쪽에서는 현재 이 장소를 유념합니다. 왜, 마지막 아마겟돈 전쟁이 여기서 벌어져요. 아마겟돈 전쟁이 벌어지고 승리하시게 되면 감람산에 예수님 재림하시고, 그 지명을 그대로 이야기하니까 교인들이 ‘야, 그 성경해석 되게 쉽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왜, 자기가 봉화나 울진이나 독도나 가면 되잖아요. 왜 지금도 독도가 있으니까. 서울이나 부산으로 가면 된다고요.

그러면 마지막 때 구원받기 위해서 준비하기가 굉장히 쉽죠? 제가 오늘 일찍 와서 동영상 첫 번째 한 내용을 이야기해 볼게요. 사람들이 예수님께 “어떻게 해야 영생하는 양식을 줍니까?‘ 할 때 사람들은 먹기만 하면 영생을 얻는 것, 얼마나 좋아요? 예수님이 그걸 제안했으니까. ’내가 어떻게 하면, 먹기만 하면 영생을 얻는 그 양식을 먹을 수 있습니까? 무엇을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까?’ 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하는 게 아니고 아버지가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했잖아요. 자, 그렇게 했으면 그 다음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 하면 곤란해요. 어떤 이야기냐 하면 우리 같으면 그 뒤 44절 말씀 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오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예수님이 구태여 할 필요가 있을까요? 만약 그 이야기를 안 하면 예수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 한다면 사람들이 누구라도 ‘저 믿을게요. 믿을게요.’ 다 손들고 이렇게 나올 게 아닙니까?

그러면 믿음이 뭐에 포함됩니까? 내가 행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일의 일부로 포함이 될 수 있잖아요. 그러면 이건 쉽다 이 말이죠. 예수 믿으면 영생 얻는 양식을 얻으니까 이건 쉽잖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쉬워서 기뻐하는 그 분위기기 그대로 가주는 것이 예수님도 좋고 우리도 좋다고 하는데, 그 뒤에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는 말을 구태여 집어넣어버려요. 집어넣으니까 그 다음에 가버린 겁니다. 왜 전도 분위기 다 버려놓아요? 주님이 알아서. 그 이야기만 안 했으면 계속 따라온다 이 말이죠. ’나 예수 또 믿어야지, 또 믿어야지.‘ 하고 계속 올 텐데,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고 했다 이 말이죠.

그럼 여기서 뭐가 문제냐 하면 중요한데 믿음이라 하는 것은 체험이 될 때만 의미 있게 진정성 있게 나한테 저장이 됩니다. 그런데 내가 예수 믿는다 하는 것은 거울 한번 보세요. 거울보고 ‘나는 예수 믿는다.’ 내가 예수 믿는다 하는 게 보이니까 내가 믿는 거 맞거든요. 이건 체험이 되거든요. 내가 예수 믿는다. 내가 교회 갔다. 이것도 믿음의 일종이고, 내가 기도했다. 기도하는 것도 믿음의 일종, 전도, 기도, 헌금, 다 나한테 믿음의 일종으로 나한테 수집이 되고 저장이 되니까 이건 체험될 수 있는 믿음이라고 우리가 인정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는 것은 아버지 입장을 우리가 체험될 수 있어요? 없어요? 체험될 수 없으니까 그건 믿을 수가 없는 내용 이예요. 그러면 예수님 말씀 가운데 믿을 것만 골라 하고 안 믿는 것은 보류하고 이렇게 할까요?

미더덕 찜을 먹을 때 어떤 사람은 떡 볶기 골라먹는 사람이 있고 믿음만 골라먹듯이 콩나물 골라먹는 사람이 있어요. 우리가 세상에서 음식 먹을 때는 어떤 일부를 만져도 전부를 만진 것이고, 일부를 맛봐도 전부를 맛본 게 되잖아요. 그런데 야고보서에 보면 율법을 하나 지키면 덩달아 다 지킨 게 됩니까? 제가 너무 어려운 질문했죠? 반대로 이야기해볼게요. 모든 걸 지키다가 하나를 어겨도 다 못 지킨 게 되죠. 왜 야고보가 왜 구태여 그렇게 부정적인 언사를 써가면서 그렇게 이야기하는가요? 사람들이 평소에 성경을 지킬 때 하나만 지켜도 나머지는 보류해 놓으면 언젠가는 지킬 수 있겠지? 라고 양적 개념으로 성경말씀의 영토를 점령해나가는 식으로 1년 믿었으면 요만큼 지키고 2년 있으면 2학년이니까 더 지키고, 3년 하면 더 지키고 그게 성화되어서 거룩에 거룩으로 점점 더 주의 말씀에 가깝고 주님을 본받아 가는 모습이라고 그렇게 생각들을 하고 싶은 거예요. 왜, 무엇을 포기 못하기 때문에? 그동안 지킨 것이 아까워서. 이건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죠? 사도바울은 뭐라 했죠? 이게 똥, 오줌이라는 겁니다.

분명이 이 자리에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우리가 못 한 것 다 하셨다는 그 사실을 믿은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그 외는 없어요. 그 외 구원방법 없습니다. 주님하고 우리가 흥정할 대상이 아니에요. 주님, 이만큼 지켰으니까 요만큼 못 지켜도 이만큼 지켰으니까 보너스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식으로 보상을 기대하고 상급을 기대할 수는 없어요. 그건 인간과 인간들이나 우상을 상대할 때는 그렇게 상대하세요. 이렇게 성립이 안 된다고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너희들이 ‘나를 믿으려고 하지 마.‘ 그것도 일종의 행함이니까 진짜 믿음은 나중에 성령이 와서 줄 건데, 그 성령이 와서 주는 믿음에는 뭐가 포함돼 있느냐 하면 ’내가 주를 믿은 게 아니고, 주께서 나를 예수님한테 붙여줘서 그 관계가 믿음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그 열매까지 주님께서 손수 나서서 그런 자리를 마련해 주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앞장세우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자체가 하나님의 의가 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해하기를 우리가 죄인인데 우리가 의인 되어야 하나님께 의롭다고 이렇게 우리 쪽에서 출발해서 그렇게 오해를 해요. 그러나 죄인을 의인되게 하신 그 하나님의 자기 행위, 자기 행위가 의롭기 때문, 우리는 죄인으로서 거기에 가담돼야 되는 겁니다. 로마서에 나오죠?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함으로써 자기도 의롭고 믿는 자도 뭐한다? 의롭게 된다. 이러한 의는 사도바울이 옛날에 여호와 믿을 때 생각했던 규칙과 법칙은 완전히 그것과 다른 노선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성령 안 받으면 상상도 못한 거예요. 성령을 안 받고 교회 오게 되면 주님하고 자꾸 타협을 하고 흥정을 하는 방법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비나리‘라는 옛날에 전해 내려오는 판소리 있죠? 이 비나리의 명인이 누구냐면 이 광수라는 사람입니다. 우리나라 김덕수 사물놀이 패하고 처음에 사물놀이를 만들었는데 이 사람은 자살했는데 그때 멤버입니다. 그 사람이 그때 비나리라는 굿 장단을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 하는데 그 가사에 보면 ’염불 말씀 따로 없소. 착한 마음이 염불 말씀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착한 마음, 불교에서는 염불, 염불하지만 진짜 염불은 착한 마음 이게 부처마음이라는 뜻입니다. 이게 우리나라 몽골리안의 민속신앙입니다. 이건 모두 갖고 있어요. 이게 한민족이 갖고 있던 민족 신앙이 그거예요. 예수고 하나님이고 맘 착하면 복 받는 거예요. 제발 이것이 교회 와서 뒤집어져야 되는데 교회는 이걸 뒤집는 게 아니고 거기에다 소스만 살짝 발라놨어요. 돈 문제 터지면 다 날라 가 버리죠.

사람은 그 시대 사람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그 시대 사람입니다. 미래 살 수도 없고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어요. 우리가 세종대왕 시대로 돌아갈 수 없고 이순신 시대로 돌아갈 수 없고 그 시대가 만들어준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시대가 만들어 준다는 우리의 자리는 이미 그 시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자리에 우리는 그냥 숟가락만 그 식탁에 하나 걸쳐놓았을 뿐이다 말이죠. 똑같은 인간 이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오시든 천사가 오든 성령이 오든지 간에 우리로 하여금 이질적인 존재로 바꾸어줘야 되는데 그 이질적인 존재가 뭐냐, 바로 믿음이라는 거예요. 우리가 평소에 생각했던 믿음과 전혀 같은 내용이 아닌 믿음이 들어가야 돼요.

성경 공관복음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이런 말씀 있어요. 예수님께서 “너희 믿음이 겨자 씨   만한 믿음이 있어도 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빠질 것이다” 했습니다. 겨자 씨 만한 믿음, 그러니까 그보다 작은 것은 믿음이 아니다 하는 그 경계선에 있는 믿음, 그 경계선 밑에 내려가면 믿음이 아니라 제일 밑바닥에 있는 믿음의 수준이 어떤 것이냐 하면 산보고 들려서 동해바다에 빠져라, 해서 바다에 빠지는 그 정도의 믿음이 제일 작은 믿음이 그 정도예요.

자, 그러면 어떤 사람이 겨자 씨 만한 믿음으로 산을 바다에 빠뜨렸습니다. 이제 중요합니다. 빠뜨렸으면 그 사람은 그 다음에 어떻게 돼요? 또 다음날에 시험 또 해봐야 돼요. 왜, 분명히 어제 했는데 오늘 ‘나무야 뽑혀라. 바다에 빠져라.’ 해서 오늘 안 되면 어떻게 돼요? 마지막 남은 그 기대치마저 날라 간 게 돼요.

예수님께서 왜 믿음을 그렇게 정리하시냐 하면 믿음은 우리가 생산하거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지거나 할 성질의 그런 사물이나 물건이나 상품적인 그런 게 아니라는 거죠. 그러면 뭐냐 하면 산이 들려서 바다에 빠지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을 품고 있는 믿음을 우리에게 주는 겁니다. 그게 뭐냐 내가 컵을 바다에 빠지라 해서 빠질 때 사람들이 박수치며 ‘야, 이 목사님 성령 받았다. 놀랍다.’ 하잖아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방금 그렇게 하신 당신 죽인다.’ 하면 겁내잖아요.

그러니까 진짜 기적은 뭐냐, 죽었다가 부활을 해버리면 이건 그 딴 거 살아서 콩나물 뽑듯이 바다에 빠지는 것보다 그것보다 더 큰 결과물을 우리한테 뒤집어씌운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죽었다가 부활인데, 부활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내가 죽었다가 내가 사는 게 부활이 아니에요. 이거 아는 사람 내가 별로 못 봤어요. 분명히 성경에는 이게 아닌데, 성경에는 예수님이 죽었다가 나온 게 부활 이예요. 우리는 주님에서 나와야 부활이지, 나에서 나오면 그건 소생입니다. 베드로 장모가 부활했습니까? 소생했습니까? 소생했거든요. 부활의 첫 열매는 예수님이 첫 번째가 돼야 되지, 베드로 장모가 부활되면 안 돼요. 에녹이 부활되면 안 되고 엘리야가 부활의 첫 열매되면 안 됩니다.

예수님 속에 들어갔다가 기어 나와야 부활이라니까요. 나이 칠십까지 살다가 죽었다가 나흘 만에 나사로처럼 살아도 그거 부활이 아니에요. 소생은 장차 올 부활을 보여주기 위해서 소생사건을 유발시킨 겁니다. 마치 물 여섯 동이가 포도주에서 변한 것처럼, 포도주가 좋다고 ‘부활됐다.’ 이러겠네요. 포도주들이 ‘야, 우리 부활됐다.’ 그건 포도주 된 거지 부활된 게 아니잖아요. 하지만 부활은 그런 거예요. 물이 뭐로 변한다? 포도주로 변한다. 이건 질이 다릅니다. 그 질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기대하는 부활은 우리가 생각하는 부활과 달라요.

주의 말씀의 약속에 의해서 부활되기 때문에 내가 기대하는 내 약속은 주님의 약속의 내용 앞에서 좀 포기해야 됩니다. 내 약속, 어떤 약속? 보름달 보고 비는 약속 있잖아요. 우리 남편 사업 잘되고 애들 건강하고 하루 종일 비는, 연말 되면 걱정된다. 교회마다 헌금내고 주머니에서 말씀 뽑아서 올해 주시는 말씀이라고 해서, 아, 그게 보름달 비는 거와 똑같아요. 다를 게 없어요. 쥐불놀이 하는 것.

그런데 사람들은 주님의 약속에 관심 없고 자기 약속에 관심 있는데 자기 약속은 어디서 가져오는가, 자기 과거의 한 맺힌 데서 가져왔거든요. 자기 역사의 노선, 행함의 노선들. 어릴 때 누구한테 버림받은 거, 그 한은 뭘 낳는가? 복수를 낳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볼 때 복수심으로 보는 사람이 거의 90%가 넘어요. ‘돈 없다고 무시했지? 내가 하나님 백성 돼서 너 지옥 보낼 거야.’ 이게 한 맺혀서 하는데 그건 자기가 부활되지도 않을뿐더러 자기가 죽지를 안했어요. 자기가 안 죽었으니까 자기가 부활에 세계에다 덧붙이는 것은 뭐냐, 그건 자기만을 위한 천국, 가짜 천국을 자기가 피우고 있는 겁니다.

약속대로 무화과나무가 저주받았다는 이야기를 어제 수요일 날 했죠? 무화과나무가 잘못한 게 없어요. 때가 안 돼서 열매가 없었던 것이지, 뭐 때가 됐는데 ‘삐져서 안 줍니다.’ 이게 아니거든요. 돼가 안 됐는데 열매가 없어서 주님께서 저주하셨잖아요. 그러니까 무화과나무는 저주받기 위해서 무화과나무가 돼야 되듯이 어떤 사람은 저주받기 위해서 태어나야 되는 거예요. 그 사람이 죄 짓고 이런 것 묻지 마세요. 죄 져서 지옥 가는 게 아니고 저주받기 위해서 죄 지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착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구원받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서 태어나야 되는 거예요.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약속이 아니고 주님이 알고 있는 주님의 약속입니다.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만 이것을 이해해요. 이건 내 쪽에서 주님께 다가서면 내가 그대로 살아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나의 역사 속에 편입을 시켜버립니다. 자기 역사는 양보 안 하고 ‘주님까지 믿었으니 주님이 내 하는 일에 좀 보태줘야죠? 그 대신 십일조는 섭섭잖게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나온다니까. 자기역사는 그대로 살아있어요. 우리 모든 인간이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을 어디 집어넣는다? 사자 굴에 집어넣은 거예요. 사자 굴에 집어넣었으니까 다니엘의 역사 속에 사자가 세나, 내가 세나, 누가 셉니까? 6장 24절 읽어보세요. “왕이 명을 내려 다니엘을 참소한 사람들을 끌어오게 하고 그들을 그 처자들과 함께 사자 굴에 던져 넣게 하였더니 그들이 굴 밑에 닿기 전에 사자가 곧 그들을 움켜서 그 뼈까지도 부숴뜨렸더라” 사자가 배가 고프기도 어지간히 고팠나 봅니다. 뼈까지 다 갉아먹고.

지난번에 다리오 왕 말고 느부갓네살 할 때 풀무 불에 다니엘 3친구를 집어넣을 때 자기들은 안 타죽으려고 온갖 무장을 했는데 다 타죽었죠. 이건 방금 읽었던 24절에 처자는 왜 죽입니까? 공무원 잘못했다가 소방공무원 처자까지 다 사자 밥이 될 뻔했어요. 그래서 다니엘을 고소하고 다니엘을 험담했던 사람들 집안 일족을 완전히 사자 굴에 집어넣죠.

그러면 여기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사자가 정상적인 사자입니까? 비정상적인 사자였습니까? 정상적이죠. 사자가 브라우니처럼 말도 못하고 그런 건 아니죠. 사자가 극히 정상적이죠? 그럼 누가 비정상이냐? 정상적인 물리적인 법칙, 자연세계, 물리학으로 정상적으로 따질 수 있는 이 법칙은 아무 하자 없는데 이걸 어려운 말로 ‘초과’라 합니다. 이런 말이 어려워요. 이게 비정상이라 하면 말 표현이 안 돼서 ‘초과했다.’ 초과했다 하는 것은 현대적인 과학적 법칙으로 뭔가 잡으려 하는데 이게 잡히지 않는 거예요.

바다와 바람보고 꾸짖었다고 했잖아요? 바람과 바다가 ‘아이쿠’ 머리 긁는 것도 아니고 물 분자 아닙니까? 물 분자인데 왜 꾸짖어요? 수소 결합된 물 분자인데. 그게 무슨 죄가 있어요? 에너지에 의해서 풍랑 쳤는데, 에너지보고 탓하면 되잖아요. 꾸짖으니까 순종하죠. 이게 바다가 뭐 같아요? 괴물 같아요.

오늘 이 이야기를 준비했는데 이 이야기를 어떻게 설명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되거든요. 짐승과 비 짐승이 만날 때는 숨어있는 자리가 필요하다. 이런 법칙이 있어요. 지금 짐승이라 하는 것은 뭐냐 나중에 짐승을 표현할 때 사자, 독수리, 이렇게 표현하지 않고 몸통은 사자인데 날개는 독수리 날개 아닙니까? 그런 이질적인 것이 섞일 때는 평범한 이런 물리적 상황에서는 이게 섞인 것을 몰라요. 특수한 상황에서는 이게 섞이지 않을 것들이 결합을 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그렇게 구조자체를 바꿔주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지금 종이에 글자가 써 있는데 글자가 정상으로 써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이 종이를 구겨버리면 글자가 어떻게 됩니까? 글자가 구겨지겠죠. 그러면 글자는 아무 일 없는데 바탕의 종이가 문제죠. 거울이 잘 서있는데 누가 와서 거울을 깼는데 보니까 좀 못생겼어. 못생겨도 너무 못생겼어. 보니까 거울이 깨졌어요. 바탕 자체를 뒤틀리게 함으로서 그 위에 정상이라고 장담하는 인간들을 뒤틀리게 만드는 겁니다.

이게 오늘날 교회도 뭐라 합니까? 그렇게 ‘예수님을 본받고 겸손 합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야 합니다.‘하던 그 목사가 퇴직금, 돈 문제가 섞이니까 갑자기 뭡니까? 딴 소리 해가면서 내가 와서 얼마 키웠는데 현금이 얼만데 이것만 주느냐, 밑바탕이 들리니까 그 인간은 계속 점잖은데 밑바닥이 같이 협곡이 되니까 같이 이게 뒤틀려버린 겁니다. 밑이 구겨지니까 위의 그림도 같이 구겨지는 거예요. 그걸 다니엘은 팔짱 끼고 보는 거예요. 이게 축복 이예요.

세상을 볼 때 영적인 안목에서, 주님의 계시적 안목, 이러면 추상적이니까 구체적으로 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지셨던 그 시선을 가지고 세상을 미리 보는 것이 다니엘 이예요. 왜,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구약의 선지자는 성령을 미리 받았다 했습니다. 미리 받은 성령 때문에 예수님을 고난 받게 하는 그 세상을 이런, 이런 이유 때문에 나한테 고난을 줄 수밖에 없던 그 이유들이 눈에 들어오는 식으로 세상을 보게 된 거예요. 성도는 이미 십자가 이후이기 때문에 ‘아!’ 세상이 이래서 우리는 이 세상이 복음을 가리는 것으로 세상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 우리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범사에 감사한 것이 아니고 감사할 것을 끄집어내서 감사하는 이런 왜곡된 것, 입는 것, 먹는 것도 족한 줄 알라 해도 그건 기본이고 딴 게 자기 원대로 안 된다고 원망하는 이 모든 왜곡된 것들이 바로 십자가를 자기 집으로, 자기 빌라로 삼아버리면, 십자가 안에 있는 성도는 예수의 흔적을 가졌고, 예수의 흔적을 가진 사람들이 바깥세상을 볼 때 그들의 뒤틀어진 모든 면들이 같이 다 드러나게 돼 있어요.

짐승까지 나왔으니까 지금 당장은 이야기를 못하죠. 아직까지 가야될 일이 많기 때문에. 왜냐 하면 뒤에 7장에도 짐승이 나옵니다. 7장 4절 봅시다. “첫째는 사자 같은데 독수리 날개가 있더니” 이게 사자 같은 독수리 날개, 원래 사자면 사자고 독수리면 독수리인데, 서로 다른 종류의 신체성이 한 몸체에 붙어있다는 것은 이건 붙어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모여 있는 것인지.

집단인가, 아니면 집합인가, 하는. 집합이라 하는 것은 버스 기다릴 때 사람들 모일 때 이건 그냥 집합 이예요. 서로 아는 사람 아닙니다. 그냥 버스만 바라보고 타는 거예요. 그럼 동창회는 어떻게 됩니까? 서로가 수다가 시작되죠. 그때는 하나의 일체성을 느끼잖아요. 가족도 그렇고 그건 집단이 됩니다. 집합은 하나도 안 무서워요. 그런데 집단은 무서워요. 왜냐, 집단은 개인의 특성을 상실해 버립니다.  고등학생 애 하나가 지나갈 때 저는 그런 거 찾아요. 고등학생이 담배 안 피우나 지적하고 싶어서. 고등학교 애 하나 있으면 ‘야, 너 어느 고등학교야?’ 하면 ‘잘못했어요.’ 하는데, 2명이나 3명 있으면 ‘아저씨가 뭔데 그러느냐?’ 고 나와요. 그거 보면 야, 신기하다. 저게 바로 짐승이 돼요. 짐승.

이질적인 것들이 본인도 모르게 동일한 목적으로 해서 자아의 갖고 있는 자아 성을 잃어버려요. 그래서 1+1이 아니고 1+2가 되고, 2+3이 5가 아니고 2+3이 8이 됩니다. 이건 더하기 법칙이 아니고 곱하기 법칙 이예요. 이건 상식인데 알아놓으세요. 수학에서 더하기라 하는 것은 이런 수직선, 수평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수학에서 곱하기라 하는 것은 항상 a a곱하기b(axb)는 한 변이 a고 이쪽이 b면 면적을 의미해요. 분명히 자기는 하나의 선상에 있지만 기대하는 것은 자기보다 이만큼 많은 면적에 공짜로 거기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더하기는 짜증나, 은행 이자 줘도 짜증나, 곱하기로 들어가요. 나는 하나지만 내가 소속된 게 크면 나는 나를 버리고 소속 전체를 마치 나의 대체물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것을 말릴 수가 없어요. 말릴 수가 없고 이건 모든 단체 이단 단체, 교회 모든 단체도 모든 단체는 이렇게 예상 밖의 초과, 잉여, 여분의 것, 이런 예상 밖의 그런 현상들을 낳아버립니다.

그게 바로 짐승들이 그걸 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정치란 짐승이 이러기까지 죽음의 구덩이를 파서 인간을 죽게 만드는 그 권력이 그 정치 바닥을 드르륵 파면 그 구멍에서 인간을 그동안 배후 조정 했던 세력을 뽑아내는 고 지점이 정치입니다. 두 번째 시간에는 정치가 뭐냐, 로 시작하겠습니다.

10분 쉽시다.
 이한례 (IP:203.♡.45.137) 12-12-25 18:12 
가락교회-다니엘 6장19(일그러진 지면)121213-9강b -이 근호 목사

제 9강b

아까 에스겔 38장, 39장에 곡과 마곡의 전쟁의 자리가 있다는데 존재하지 않는 자리예요. 존재하지 않는 자리! 존재하지 않는 자리란 말은 우리가 평소에 자기 존재를 충분히 느끼는 입장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자리예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누가복음에 나오는데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가 사는 바닥에 어디에 있습니까?’ 물었을 때 예수님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없다”는 거예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없으면 우리는 없는 거예요.

우리가 사는 바닥에 여기도 없고 저기도 없으면 없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여기 없고 저기 없어도 생긴다는 겁니다. 이것을 사건이라 하고 사건을 어떤 신학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했거든요. 역사라는 것은 이렇게 위에서 수직으로 찢어버리면 구멍이 생기겠죠. 그 구멍 생기는 지점을 ‘믿음’이라 하고 그 내려오는 이걸 ‘사건’이라 보는 겁니다. 사건이 이렇게 흔적을 남기는 이걸 ‘사실’이라 하고 요걸 사도들은 복음 전파라고 했다 이 말이죠.

쉬운 예로 깨끗한 요에 2살 먹은 애가 오줌을 쌌습니다. 분명히 어제 저녁에는 깨끗했어요. 그런데 오줌을 싸니까 거기서 뭔가 지도가 생겼죠. 그게 바로 사실이며 고 사실의 흔적은 요에 있는 지도 같은 이 지점은 특별한 지점이고, 바로 사도들이 활동한 지점, 또는 교회가 발생되는 지점, 이렇게 설명을 보통 해요. 불트만이라는 신학자는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하는데, 그래서 이게 문제가 있는 거예요. 뭐냐 하면 이 설명이 저는 만족스럽지 않아요.

구멍을 뚫어서 번졌다 이렇게 하지 말고, 구멍을 뚫어버리면 역사가 다 뚫린 게 아니고 요 밑에 새로운 세상이 지하에 구멍을 뚫고 새롭게 발생되게 되면, 위의 것은 이게 구겨지는 겁니다. 요걸 신학자들은 그걸 모르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지금 만약에 신학자들처럼 해버리면 ‘당신 누구요?’ ‘저 사도입니다.’ ‘그래요? 활동하세요.’ 그럼 우리는 우리대로 활동하고 예, 서로 좋게 활동합시다. 당신은 종교 파트에, 우리는 정치 파트에, 아무 충돌이나 어떤 서로 미워할 이유가 없죠?

그런데 요한계시록 보세요. 사도요한이 계시 받고 복음 전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정치꾼들이 가만 두지를 않잖아요? 요한복음에 보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 것은 너희를 미워한 게 아니고 내가 미워서 세상이 미워하게끔 세상은 필히 그렇게 돌아갈 수밖에 없게 만들겠다는 거예요. 누가? 예수님 자신이. 이게 적극적입니다. 소극적으로 하다 보면 고생한다, 이 말이 아니고 내가 너희들로 하여금 힘들게 만들겠다는 거예요. 조롱받도록 만들고 무시당하도록 만들고 그리고 누가복음에 있지만 ”마지막 때 너희들로 옥에 갇히고 임금들에게 잡히도록 만들 테니까 그때 네가 이야기를 끄집어내려고 하지 말고 그때 너로 하여금 말하게 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곧 하나님의 성령이시라” 이렇게 돼 있다고요.

그 이야기를 해보면 아! 성령이 오게 되면 조용하고 고요한 인생 보내는 게 아니라는 것을 감을 잡아야 돼요. “너희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 이 말을 다른 식으로 하면 ‘각오해, 각오해.’ 그런 뜻이라 이 말이죠. ‘세상 만만치 않아.’ 그런데 우리가 조용하다는 말은 분명히 그것은 복음을 생각 안 하고 뭐 한 종교파트니까 자유를 주시옵소서. 뭔가 정치적인 타협이 결부돼 있기 때문에 오, 종교? 그러면 종교는 정치가 관여 안 하는 거야, 오케이, 우리는 관여 안 할게, 뭔가 어떤 협상이 이루어졌기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죠.

이게 바로 ‘복음과 기독교의 차이‘라는 책에 보면 바로 2천년 기독교 역사가 처음에는 정치적인 타협을 모색했고 나중에는 정치적으로 모든 나라를 점령해서 국가교회를 만들었어요. 국가 전체가 교회됐다가 나중에는 어떻게 됩니까? 교회국가가 돼 버려요. 교황이 기존의 정치체제를 유지하고 그리고 자기 밑에 있는 모든 신자들은 백성으로 만들어서 하나의 국가 시스템으로 꾸려가는 거기서 생산되는 헌금은 전부 다 획득하고 그렇게 했고, 거기에 대해서 반대하는 사람이 루터, 칼빈 재세례파 이런 개혁자들이 반대하고 나갔었는데 그들이 누굴 흉내 냈다? 그들을 공경했던 천주교가 똑같이 흉내 내서 똑같은 조직으로 또 시작해서 조직을 하려면 역시 돈, 모든 게 돈, 돈을 어떻게 뽑아내느냐, 예수 이름 팔아서 돈을 어떻게 뽑아내느냐, 거기에 돈 정신을 다 팔고 있습니다. 돈을 많이 뽑아내는 목사는 능력 있는 목사고, 못 뽑아내는 목사는 무능한 목사고, 그런 식으로 천주교와 같이 가다 보니까 같이 가다 보니까 천주교와 싸울 일이 없어요. 복음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때는 천주교고 개신교고 거기다 원불교까지 다 와서 민족통일협회 만들고 이제 밥그릇 싸움 할 필요 없어요.

그리고 처음에는 순 복음이 이단이라 하다가 순 복음이 커지니까 덩치가 크니까 기독교 신자통계 낼 때 유리하니까 넣어줘서 기독교 통계가 확 올려주자 했죠. 앞으로는 신천지도 거기에 들어갈 것이고 어깨동무하면서 모두 형제라 할 겁니다. 통일교도 그랬었고, 뭐 같은 신인데요, 뭐. 산에 올라가는 길은 각자 다르나 꼭대기에 있는 소나무에 올라가는 것은 똑같다. 진리는 하나인데 올라가는 길이 다를 뿐이지, 우리는 전부 다 하나의 그리스도의 신자다 이런 개념이죠.

이게 결국은 뭐와 타협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의 적이 누구냐를 알아야 되는데 예수님은 재수 없어서 죽은 거고, 예수님이 십자가 죽을 때 적까지 밝혀내면서 죽으셨거든요. 예수님이 죽은 것은 유대교가 종교국가 아닙니까? 거기는 우두머리 왕이 없어요. 누가 왕이냐 하면 바로 성전을 모시고 하는 그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 체제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임금이라고 성전에 들어갈 수 없어요. 구약의 므낫세 왕 같은 경우 들어가다가 문둥병 걸려서 안 되죠. 무섭죠.

그걸 로마제국에서는 용납을 해준 겁니다. 각자 자기종교를 하되 로마 정치에 대해서 반항을 입히지 않는다면 우리는 용납을 하겠다. 그리고 총독은 뭐냐 하면 종교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고, 질서유지차원, 다시 말해서 질서유지차원은 세금입니다. 세금을 하기 위해서 숫자 계산, 세금을 원활하게 뽑아내면 그 나라는 자국민의 정신체계 안에서 굴러가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다 그렇게 하는 겁니다. 이게 로마만 그런 게 아니고 로마가 한 것을 그 전에 헬라-마케도니아가 이어받았고, 헬라-마케도니아는 메대 바사에게 이어받았고, 바사는 바벨론에게 이어받았고, 다 그런 거예요. 바벨론, 그 다음에 페르샤(바사) 그 다음에 헬라, 로마, 그래서 이게 7장에 4마리의 짐승 아닙니까? 짐승들이 하는 행세가 전부 다 짐승 이예요. 짐승들 속에 요한계시록 들어가면 그 짐승들을 해부해 보니까 새끼 짐승 나와요. 새끼 어린양, 그게 뭐죠? 오늘날 종교 아닙니까? 종교, 교회, 절, 전부 다 일반신자는 모르지만 예수님, 하지만 위에 올라가면 예수님 없습니다. 전부 다 정치! 이번에 총회장 얼마 썼어? 얼마 들었느냐? 정치, 정치 문제 가지고 총회 대의원들이 거기 모여서 정당정치 하고 있는 거예요. 이번에는 호남 파 밀어줘서 총회장 되자, 경상도는 양보해라. 한국의 제단의 역사입니다. 이제는 말하고 싶다. 지금도 이거 하고 있어요.

정치 문제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현재 교회가 갖고 있는 재정문제를 누가 관리할 것인가, 건물을 수리한다 하면 어느 교회, 어느 장로한테 하면 얼마 떨어지나, 얼마 헌금해라, 이러한 재정적인 문제, 어디 대학교 총장이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재산 관리하는 사람 아닙니까? 그걸 총회장들이 한다니까요. 재산이 아무것도 없으면 편할 건데 문제라.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말씀의 역사에 따라서 진척에 따라서 드디어 존재로 부각이 되면서 외부에 있던 것들이 서서히 짐승으로 일그러진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일그러진 모습을 드러낸다는 이것은 성경 말씀에서 한 이야기고, 그들의 일상은 똑같아요. 다니엘이 이야기했다고 해서 다니엘이 이야기하고 난 뒤에 짐승 되는 게 아니고, 다니엘이 있으나 없으나 그들은 똑같이 온 거예요. 왜냐 정치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공동체 정신이거든요. 질서유지거든요. 공동체가 뭐로 돼 있느냐 하면 공동체는 구성원들이 합의해서 되는 게 아니고, 관습과 관행입니다.

심지어 교회 청년회 회칙을 만들어도 ‘우리 선배들 뭐했나가 보자.’ 그거 매뉴얼 보고 하는 거예요. 회사도 마찬가지죠. 역사의 관습과 관행은 그냥 된 것이 아니고, 시행착오를 거쳐서 점점 더 진리와 그리고 합리화에 가깝게 이미 된 거예요. 이걸 잘하는 사람이 그 회사에 능력 있는 직원입니다. 능력 있는 공무원들은 바로 전임자들이 이런 일을 했을 때 어떻게 해결했고 그 해결에 대해서 법원 판결이 어떻게 나왔는가, 그것을 머릿속에 빠른 속도로 찾아서 과장한테 보고해서, 5년 전에 이런 사례가 있었는데 주민들의 이런 민원은 이렇게 해결하시면 나중에 그들이 행정소송해도 이길 수 있습니다. 이걸 딱 갖다 될 수 있는 능력 있는 행정 공무원이 되는 거예요. 초자는 그걸 하지도 못하고.

외무부에 종사하는 공무원들이 모든 세계의 국제 법을 환히 알고 있어서 우리가 이런 쪽으로 이렇게 외국인이 오시면 이렇게 하시면 결례되지 않습니다. 이건 외교에 합하는 예의가 됩니다. 그러면서 빨리 대처해서 외국나라한테 욕 안 얻어먹으면 그게 최고 외교관 이예요. 외교관이나 공무원은 항상 보수주의입니다. 이 보수주의를 뒤엎는 자가 누구냐, 이게 바로 개혁주의 자들입니다. 독제 자들 이예요. 뭘 끊습니까? 관행과 관습을 끊어버려요. 흘러온 역사를 부정해 버리고 자기가 이 나라를 새롭게 책임지겠다는 나선 거예요. 그럴 때 성경에서는 그걸 새로운 짐승 나왔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새로운 짐승 이예요.

그래서 네 가지 짐승이 뭐냐, 새로운 짐승, 역사가 끊어지고 새로운 역사를 잇는다고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점점 더 질이 나쁜 역사가 된다는 겁니다. 금 신상, 처음에는 금, 그다음에 은, 놋, 그다음에 철, 마지막에는 철과 흙이 섞여있는 겁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사람 손으로 던지지 않는 돌, 다윗이 골리앗에게 돌을 던질 때 자기가 던졌죠? 그런데 다윗이 물매 돌을 던지면서 뭐라 했습니까? 이건 나의 기술적인 싸움이 아니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서죠. 그때 여호와의 이름은 어린애 다윗이란 소년의 손에 조약돌 하나 나선 그 시대예요. 그래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사람은 시대적인 사람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어떻게 표현되느냐, 그 시대에 보편화돼 있는 용어나 개념들을 사용해서 그 시대에 부합하도록 그렇게 하는 겁니다. 웃사란 사람이 언약궤가 흔들거리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그걸 붙잡으려고 할 때 죽었죠. 뭐 들여다보지도 않고 붙잡으려고 할 때 죽었잖아요. 그런데 그 언약궤 지금 어디 있습니까? 레이더스에서 인디언존스가 가져가 버렸어요? 잃어버린 성지를 찾아서 영화에 보면. 법궤 나오잖아요. 그 법궤 지금 어디 있죠? 신문에 안 나왔나요? 성경에 나왔죠. 그게 불탔죠? 언제 불탔습니까? BC586년 바벨론이 와서 성전 불태울 때 성전 껍데기만 태운 줄 압니까? 홀라당 다 태웠어요. 심지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태웠어요. 그거 다시 만들었어요. 다시 만든 걸 AD 70년 경에 로마 군인 디도가 와서 홀라당 다 태웠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유대인은, 지금은 예루살렘 성전이 황금 돔으로 해서 분할이 됐거든요. 그걸 헤롯성전이라 하는데 사실은 황금 돔은 헤롯에서 지은 게 아니고 그건 이슬람 쪽에서 지었어요. 돈 들여서 마호메트 후손이 지은 거예요. 그런데 유대인은 손도 안 댔어요. 어쨌든 셋으로 분할됐어요.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이스라엘, 세 나라에 분할돼 있잖아요. 이것을 언젠가는 누가 먹는다? 요 이스라엘이 먹는 날에, 드디어 감람산에 누가 오신다? 다윗의 자손 메시야가 오신다. 그러니 유대인의 전쟁은 장난이 아닙니다. 이건 유엔이고 뭐고 없어요. 이건 북한보다 더합니다. 이건 유대인, 이스라엘이 구원받아야 되니까 구원문제라니까요. 정치 문제가 아니고 구원문제!

팔레스타인 있잖아요? 블레셋 사람은 저주받아 합당한 족속이기 때문에 마구 조집니다. 지금 정치학적으로……  지금 블레셋 땅에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주해 시켜버립니다. 누구 땅인지 판명되도록 지금 그런 정책을 벌써 이스라엘이 하고 있습니다. 원자 폭탄 많이 만들어 놓고 까불면 싸버리려고 하는, 왜 주의 말씀이기 때문에. 한국하고 이스라엘하고 싸우면 한국이 져요. 왜, 한국은 아! 대한민국, 하고 있을 때 저들은 여호와인데. 여호와가 이기겠습니까? 대한민국이 이기겠습니까? 김일성 김정일 북한하고 붙어도 이스라엘이 이겨요. 저들은 김일성이지만 이들은 여호와라니까요. 이게 실제예요.

그 민족에게 누가 죽었습니까? 예수님이 죽은 거예요.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아, 재수 없었다.‘ 이렇게 돌아가신 게 아니고, 충분하게 “너희 애비는 악마니라“ 유대인은 애비가 악마니까 독사의 새끼들이겠죠. 그 독사의 새끼들을 충분하게 다~ 보여주시는 거예요. 그들 속에서 주님을 심판했잖아요. 이 심판을 하십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 영은 딴 게 아니에요. 인간이 심판한 그 심판을 심판해 버리는 거예요. 한번 적어볼게요. ➀ 심판을 심판한다. ➁ 종말을 심판한다. ➂ 인간의 의를 심판한다. ➃ 인간의 자비와 인간의 사랑과 구제를 누가 심판한다? 성령이 와서 심판한다. ➄ 인간의 자아를 누가 심판한다? 성령이 와서 심판한다. 왜, 십자기 지신 내용으로 때리기 때문에. 십자가 졌다는 것은 죽음 사건이잖아요. 그러면 죽음 사건이면 분명히 누가 죽인 자가 있을 거 아닙니까? ’니가 죽였잖아.‘ 해서 그걸 품고 때리는 거예요.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배당 천장에 붙어있다고 십자가가 아니고 십자가에 성공한다는 것은 현재 교회 나오는 우리가 누굴 죽였다? ’예수님을 죽인 장본인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그 모임이 바로 예수님을 기쁘게 하는 모임 이예요.

자신이 피해자가 됨으로서 가해자를 찾아나서는 작업이 성령님의 역할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은 뭐냐 하면 구약은 정치적인 면에서 인간적인 죄를 끄집어내지만, 신약의 사도바울 편지에 보면 인간의 정치적인 외부적인 문제가 아니고 인간의 어디에서? 인간의 우리의 심령, 내부 문제로 이게 파급을 시켜놨어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네 마음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모든 인간의 마음까지 파고들어가 버렸어요. 뭐 집사입니다. 장로입니다. 목사입니다. 이거 소용없어요. ‘현재 니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 맞잖아.’ 이렇게 말씀으로 꽂아버려요. 그러니까 설교할 때는 우리 마음을 꽂아서 호소해야 돼요. 우리 이렇게 교회 크게 부흥합시다. 이따위 소리하지 말고 정치적인 발언 하지 말고 마음을 파고들어야 돼요.

그러면 그동안 우리의 잘남 가지고 어떤 삶의 보람을 느끼려 하는 사람들은 그 무거운 존재의 무게를 놔버릴 때 그게 행복 아닙니까? 그 존재의 가벼움! 챙길 필요도 없는데 내가 나를 챙겨서 나를 구원, 로켓 올라갔다고 1단, 2단, 3단 해봐야 백날 연기만 하고 올라가도 궤도 들어가지도 못하고, 내가 나한테 기름 주입해서 이거 로켓 올린다고 하는데 무거워서 뜨지를 못해요.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아니하면 아무도 올 수 없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 말씀만 믿어지면 저절로 뜨는 걸, 가스를 헬륨을 집어넣어놨어요. 풍선가스를.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니까 영의 힘으로 저절로 부활이 되는 걸 가지고. 이걸 내 힘으로 나한테 절제한다고 관리하고 온유 되지도 않는 온유 한다고 미워하는 형제를 온유 하는 척 이렇게 억지를 부리니 본인도 괴롭고 주변사람도 더욱 더 괴롭고.

다단계가 뭐냐 하면 사실은 다단계 모임의 특징은 사랑이 없다는 거예요. 사랑이 없으니까 이용할 것만 있어요. 서로가 네가 사기 당해줘야 내가 돈이나 챙기고, 내가 사기 당하면 네가 돈 챙기고, 그게 다단계거든요. 다단계 여러분 안 해봤죠? 정수기 같은 거 안 해봤죠? 우리 형이 그거해서 돈 2천만 원 날렸어요. 외상은 돈을 안 주지, 회사에서는 외상 사채 얻어서 내라 하지, 그래서 2천만 원 날렸어요. 한 4년 됐어요. 그래서 빚만 2천~ 3천 쓴 거예요. 그러니까 보세요. 세상의 형제간도 돈이 없으면 형이 아니에요. 형 값을 하려면 동생들한테 뭔가 팍팍 베푸는 게 있을 때 동생은 저절로 형을 존경합니다. 그런데 형이 짜증 소리 하면 웬수 중에 웬수가 돼요. 차라리 저 인간 빨리 안 죽나, 이런다니까요. 그게 무슨 범사에 감사하라가 돼요?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이 짐승의 마음으로 점령당하는 겁니다.

신약에서 뱀의 후손, 여자의 후손 할 때 남의 이야긴지 알았죠? 주님께서는 우리는 남의 이야기로 쳤지만 꾸준하게 그 이야기를 기어이 끈을 놓치지 않고 기어이 구약 이스라엘을 경유해서, 옛날 미국 드라마에 보면 딴따다다, 하면서 심지가 불타잖아요? 성경도 그거 같아요. 창세기부터 심지가 불타는 거예요. 딴따다다 딴따 띠딩~ 하면서 5초내에 폭발한다. 죽 와서 십자가에서 그 심지가 폭발해 버려요. 심지 타는 냄새가 막 나는 것 같잖아요. 심지에 들어가는 것이 선지자들의 고난이죠. 그래서 마태복음 5장에 보면 나와 나의 복음을 인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 선지자들도 이와 같이 핍박을 받았느니라. 그게 복 이예요. 그게 팔복 중에 제일 좋은 복이라니까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핍박을 받아줘, 그게 복이라니까요.

우리 속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타들어가야 돼요. 우리는 죄짓고 죄짓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십자가 심지가 우리한테 심지가 타들어가고 폭발하고 있고 그러면 우리는 ‘주여, 내가 이 나쁜 놈입니다. 내가 나쁜 놈입니다.‘ 할 때 우리는 배설물 날아가 버리고 우리 속에 헬륨가스가 차서 존재의 가벼움! 잠만 잘 자더라, 밥만 잘 먹더라. 가 아니라 잠만 잘 자서 뭐 구원받았는데 걱정할 게 뭐가 남아있습니까? 이상해, 구원받아서 영생 받았는데 걱정할 게 뭐가 남아있습니까?

용서를 안 받았으면 착한 일해서 용서받을 일 생각하니까 잠도 못 이루지만, 이건 착하나 안착하나 이미 용서를 받아버렸는데, 용서해주셔야 의인이지, 내가 의인 되는 게 아니고 주께서 나한테 이 죄를 용서해 주시는 그 작업이, 그 포크레인 작업소리 안 들립니까? 그 작업이 주의 의가 지금 누적된 작업인데 우리는 착한 일해서 그걸 의라고 내밀려고 하니까 되지도 않는 착함이, 착한 일도 해야지, 돈도 벌어야 되지, 남도 욕해서 사지도 쳐야 되지, 이게 무슨 꽃다발 같은 몸마다 이게 무슨 착한 일이예요? 잘만 착하더라.

이질적인 것이 모여 있을 때 그게 바로 짐승입니다. 이건 연합이 아니고 그걸 뭐라 하느냐 하면 결합이라 합니다. 어떤 나라가 질이 나쁘다는 것은 잘 쪼개지더라, 짐승은 본드가 약해, 본드가 국산인지 모르겠어, 본드가 약해서 광고와는 달리 붙여봤는데 며칠 안 가서 뚝 떨어져, 이렇게 대충 했어요. 문재인 이게 문제라 문재인하고 안철수하고 연합했는데 언제 본드가 떨어질지 몰라,…… 이렇게 정치적인 연합체제가 질이 나쁘다는 거예요.

느부갓네살은 안 그렇다는 거예요. 느부갓네살은 비록 그는 오직 자기를 믿는 것이 밑에까지 딱 돼 있거든요. 느부갓네살 위에는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누굽니까? 다니엘이 믿던 여호와만 있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부갓네살은 짐승이다? 아니다? 짐승이었잖아요. 그 정도 돼도 짐승 같으면 대충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덮쳐서 해바라기처럼 모였다 흩어지는 이런 것은 누가 픽! 하면 확 흩어질 거다 말이죠.  이렇게 섞여 있는 것, 이게 바로 힘써도 힘이 별로 나지 않아. 이렇게 해야 힘내라 해도 힘나지 않아.

그래서 곧장 누구한테 배신당하느냐 하면 그 밑에 있는 부하들한테 배신당합니다. 헬라-메케도니아 대단한 짐승입니다. 다니엘에 보면, 하지만 그 밑의 4명의 부하에 의해서 배신당합니다. 땅의 영토가 분할돼요. 분할되고 그 중에 중개 붙여서 두 명 남아요. 프톨레미우스라 해서 남쪽 이집트고, 위쪽 시리아 쪽에 셀류쿠스가 있어요. 그쪽 장군하고 이쪽 장군의 가문이 싸우는데 참 재밌죠. 한번 이렇게 싸우면서 좋~다고 예루살렘 밟아버리고 지나가고, 올라가면서 기분 나쁘다고 예루살렘 밟고 지나가고, 프톨레미 왕조도 저쪽 셀류쿠스 왕조 친다고 예루살렘 가면서 ‘돈 내라. 같은 편이니까 돈 내라.’ 하고 저쪽도 내려오면서 기분 나쁘다고 ‘돈 내라’ 하고 이건 중간에 고래싸움에 이래도 터지고 저래도 터지는 그게 바로 예루살렘의 운명으로 그렇게 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좋다고 소고기 사먹겠지, 또 좋다고 소고기 사먹겠지, 죽어나는 건 예루살렘만 죽어나니까 예루살렘에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 2가지 개념, 하나는 우리가 헬라를 대들자, 또 한쪽은 무모하다, 차라리 말 잘 듣자. 그러니까 이게 뭡니까? MBC드라마에 고려 말기에 원나라한테 편들자, 또는 안 된다. 원나라한테 이겨야 된다. 2가지 편중에서, 잠시 AD163년 경에 마캅이란 사람이 다윗 혈통이라고 우기는 그 사람에 의해서 잠시 독립전쟁에서 승리가 일어납니다. 이걸 하누파 절기라 해서 지금도 유대인 크게 즐깁니다. 잠시 승리하면서 점점 내부적인 갈등으로 나타나요. 승리하면서 드디어 바리새인의 편을 들것이냐, 이제는 외부 문제가 아닙니다. 내부적으로 사두개인 편을 드느냐, 여기서부터 드디어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 정치적인 알력이 발생되는 거예요.

보세요. 짐승이 외부 짐승을 이기기 위해서 여호와, 다윗, 하나님 말씀을 의지했잖아요? 의지했던 그들이 나중에 내부적인 갈등이 나타나고 보니까 결국 그 바깥에 있는 짐승이 무슨 짐승으로 정리됐어요? 유대나라를 이긴 짐승으로 새롭게 등극된 거예요.

하나 예를 들게요. 교회에서 원로 목사가 너무 오래된 목사가 돼서 설교를 못해. 그래서 교인들이 ‘목사 못합니다. 나가주세요.’ 하니까 목사가 머리 써서 ‘내가 원로목사 은퇴하려면 3년 남았으니까 3년간 미안해도 그 대신 설교 많은 부분을 내가 설교 잘하는 목사로 당겨서 미룰 테니 교회가 평화로워야 처음 오는 교인도 다른 교회에 안 빼앗기니까 그렇게 하자.’ 해서 했습니다.

그 교회가 조용할 것 같은데 갑자기 외부적으로 신천지나 이단 이야기할 때 그때 목사가 머리를 써서 이때다, 해서 내부적인 그런 갈등을 외부적인 사건을 빌미삼아서 내부적인 결속과 단결을 취하게 되면 교인들 입에서 ‘우리 목사 나가라’ 하는 소리가 쑥 들어가죠. 총회 법에 의해서 의회 3분의 2면 받으니까, 그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적(이단)들은 물러가고 난 뒤에 다시 자기는 평화가 왔다고 생각하는데 그 부목사가 교회 5백 명 중에서 내 편이 4백 명 되고 원로목사는 백 명인데, 원로 목사가 머리 쓰기를 자기편이 적거든요. 좋은 말로 하는 거예요. ‘야, 다른 큰 교회 소개시켜 줄까?’ 자꾸 자기보고 나가라 하는 거예요. 그건 자기를 생각해서가 아니라 자기 인기가 높아지니까.

그러니까 성경 말씀이 현실적이라니까요. 사울이 자꾸 다윗을 밀어내는 거예요.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라 했으니까. 10배예요. 문재인은 천천이고 박근혜는 만만이라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이건 용서가 안 돼. 좋은 말로 처음에는 나가라, 하죠. 나가라, 하면 부교역자가 원래 존경받는 이유가 오직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오직 복음만 생각하며 ‘여러분, 우리는 천국 가는 게 중요하지 교회는 안 중요합니다.’ 이런 이야기해서 ‘원로 목사는 못됐다. 원로 목사는 입만 열면 돈 이야기 하는데, 돈이 아니고 복음만이다. 이게 진짜다.’ 라고 했는데 부목사는 그걸 빌미로 해서 은근히 사람들에게 그런 식으로 복음을 쳐 발라서 그 교회를 자기 교회로 만들려 하는 게 있었는데, 원로 목사가 능숙해서 그걸 눈치 채서 나가라, 하니까 ‘목사님 그럼 투표 합시다.’ 이렇게 나왔다 말이죠.

예수님을 따르시오, 하다가 갑자기 자기 입에서 뭐가 나왔다? ‘투표 합시다.’ 이렇게 나오니까 그걸 눈치 채고 또 일단의 사람들이 갈라져서 ‘봐라, 투표합시다, 나오는 걸 보니까 진짜 복음 아니잖아, 복음을 빙자한 똑같은 인간 아닌가, 아니다, 이 고비만 지나면 그 사람이 와서 이 교회는 복음대로 할 거다. 그러니까 모른 척하면 한국교회는 우리교회 중심으로 해서 새롭게 부흥의 불길이 일어날 거다.’ 이렇게 또 표가 갈라지네. 이제 잘 알아들으시네. 이게 짐승 이예요.

다시 말해서 결론 내릴게요. 모든 인간은 짐승입니다. 이게 상황이 있을 때는 그쪽이 너무 악하기 때문에 마치 내가 상대적으로 되게 천사처럼 보이지만, 적들이 물러가면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내가 오야붕을 해야 돼요. 나한테 누가 간섭하고 나한테 어떤 견제하는 세력이 있으면 밤에 잠을 못잡니다. 우리 교회 다 좋아하는데 저 집사님이 내 설교 하는 걸 삐딱하게 봐, 새벽기도 빡세게 했는데 기도발도 안 먹히는 모양이라, 한 달째 하는데 변화가 없네. 뭐 어떻게 집사한테 장로가 훈수를 해볼까, 아니면 신방을 특별히 두 배나 해보나, 이렇게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이 뭐냐 하면 나의 것, 소유 욕, 이건 성령의 열매가 아니고 갈라디아서 보면 뭡니까? 육의 열매예요. 육의 열매인데 복음을 전하니까 그걸 전부 다 그냥 못 본체 그냥 넘어가 줘, 가 되는 거예요. 내가 복음 전하는데 내가 헛짓 하는 게 아니고 내가 복음 전하기 위해서는 그냥 눈 감고 넘어가 달라고 하는 거예요.

복음을 아는 목사는 그렇게 나오면 안 되고, ‘나, 내 것이 아닌데요.‘ 이렇게 나와야죠. 그래야 자기가 헬륨가스가 들은 게 돼요. 뭔가 내 것이 있으면 내 것이 내 우상이 되고, 그것이 자기를 짐승 만듭니다.

그러면 몸통은 사자인데 날개는 독수리다. 서로 결합될 수 없는 이질적인 것이 한 몸둥아리에 같이 있어버리면 이건 결국은 이게 갈라집니다. 짐승이라 하는 것은 속이 텅텅 비어 아무것도 없어요. 짐승인체 강한 체, 척, 강한 척, 협박하는, 없으면서 있는 척하면서 협박들을 해온 거예요. 모든 인간이 주님 앞에 옵니다. 올 때 주님 앞에 심판받게 되면 전부 다 헛 껍데기예요. 그 중에서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은 사람은 따로 구원되는 것이지, 누가 자기 가진 것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기름 비유 나오죠?  기름 비유할 때 열 처녀 비유 나오잖아요? 여러분들이 얼마나 잘 아는지 한번 물어볼게요. 열 처녀 가운데 안 잔 처녀는 몇 명입니까? 다 잤잖아요. 왜 그걸 몰라요? 다 잤어요. 주무세요. 밭 갈 때 구원받는 사람이 밭 안 갈고 주님 기다리면서 기도했다. 이런 게 있습니까? 두 사람이 같이 밭을 갈았어요. 같이 밭을 가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뒀잖아요. 에녹이 올라갈 때 준비했습니까? 없어요.

그러면 뭔 뜻이냐 하면 우리 모두가 탕자거든요. 탕자기 때문에 탕자 값 하는 사람은 구원받고 탕자 아닌 척하는 사람은 지옥 가고 그런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만 있으면 그것이 바로 교회고, 그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주님만 있으면 우리는 더 이상 받을 게 없어요. 용서받았으면 어떤 짓도 용서받았으면 뭐 다 받은 거예요. 더 이상 뭐, 축복은 전부 다 받은 거예요. 예수님의 피를 받아버렸으니까, 하나님의 의가 움직이는 하나의 현장이 되고 말았으니까,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면 없다는 말은 뭔 뜻이냐, 모두가 뭐가 되었다? 짐승 아래 있다. 누구도? 유대나라도. 예레미야도 그렇게 된 거예요. 다니엘도 그들 속에 있었습니다. 다만 다니엘에게 뭐가 주어졌다? 가브리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시가 전달되니까 다니엘은 70년 돼도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게 70년이 아니었어요. 70년은 기존의 옛날에 있던 역사적 지평에서의 아까 선에서 곱하기 이야기했죠? 선상에서 70년이었는데 이게 면적이 될 줄이야 상상도 못했죠. 70이레가 될 줄 상상도 못했죠. 아! 돌아가 봐야 깨지는구나.

70년은 깨지지 않잖아요? 70이레는 세 토막 납니다. 7이레, 62이레, 1이레. 이렇게 깨어져요. 깨지면 절개 면이 나오겠죠. 그 절개 면이 중요해요. 단절했을 때 두부 자르면 절개 면 나오잖아요. 절개 면에 뭐가 묻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 예수 그리스도의 한평생이 거기 담겨 있어요. 주님이 처음에 잉태하시고 성장하시고 십자가 죽으시고 부활하셨던 그 단면들이 70이레의 그 단면에 있어요. 그래서 성전 지었다. 그 성전 핍박 받아서 다 깨지는 거예요. 어떻게? 올라갈 때 밀고 내려 올 때 밀면서 다 깨지는 거예요. 깨지면서 세 번째로 십자가 죽으심으로서 드디어 그 1이레 때는 제사로 말미암아 영원히 뭐를 얻는다? 거룩함을 얻는 그 예수님의 생애가 70이레라는 그 안에 포함돼 있고, 70이레는 인류 전체 역사,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전체가 1이레라는 의미 속에 다 포함돼 있습니다.

이걸 다음 주 가락모임 할 때 본격적으로 할 거예요. 할 때 제가 쓴 ‘70이레의 비역사적 해석’이란 책을 가져오시면 좋겠는데, 그 책에 보면 70이레의 해석이 나오니까 그 책을 가지고 하겠습니다.

절개 면이 있다는 것, 인간에게 시간은 끊어진다는 게 말이 안 돼요. 절개 면이 있다는 게 말이 안 되거든요. 그런데 70이레는 단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가 칼을 갖고 이레라는 시간개념을 잘라내는가? 그건 예수님만이 할 수 있지, 인간은 못합니다. 하나 예를 들어볼게요.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을 뭐라 했습니까? 여자가 낳은 사람 중에서 크다 했죠? 그런데 그 뒤에 무슨 말씀 있습니까? 천국에서는 작은 아이라도 저보다 더 크다 했죠. 보세요. 절개 면이 있잖아요. 세례요한이 크면 그보다 더 크다가 선지자 쪽으로 와야 되는데 이 노선이 구약 노선을 어디서 멈추느냐 하면 예수님에서 끝나버려요. 예수님에서 새로 시작해야 돼요. 새로 시작하는 것은 저쪽 구약에서 흘러 온 어떤 사람보다도 더 큰 자가 돼요. 심지어 어린아이라도. 어린아이가 알긴 뭘 알겠습니까? 하지만 어린아이라도 저쪽보다 더 큰 거예요.

예수님께서 시간의 질을 주님 선에서 결정 내는 거예요. 그냥 주님 선에서 결정이라 하지 말고 주님의 행하심, 주님이 이 땅에서 이루어내심, 그것이 바로 그것을 결정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설교할 때 이런 이야기했잖아요. 우리가 여기 있고 예수님이 천국에 있다면 그냥 맨숭맨숭 십자가 보고 가는 게 아니고, 여기 통로가 있다 했죠? 통로에서 예수님이 살았던 경로를 경유하면서 우리는 간다. 예수님의 탄생과 고난과 핍박과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 이 경로! 이게 하나의 중간 통이라면 통 속으로 경유하는 거예요. 통 속으로 경유하면 우리 바깥 천장에 뭐가 보이겠습니까? 예수님의 고난 받음과 피가 보이겠죠. 우리는 그 핏 속을 통과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혈관이고 우리는 거기 하나의 적혈구 같은 입장, 그렇게 가는 거예요.

그렇게 가게 되면, 거기 미리 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12제자, 물론 가룟유다는 빠집니다. 12제자가 갔는데 12제자가 가면서 얼마나 불평들을 했습니까? 심지어 마지막 대목에서는 ‘나 저 남자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잖아요. 심지어 자기 엄마 마리아도 예수님을 이해 못했잖아요. ‘여자여, 그게 나와 무슨 상관있습니까?’ 이렇게 욕까지 얻어먹었는지는 모르지만 얻어먹고. ‘요한아, 저 여인을 부탁한다.’ 엄마를 부탁하고, 여기를 가면서 얼마나 불평들을 했는지, 주께서 교육을 시킨 게 아니고 인간이 이 정도로 가장 나를 잘 알고 너희들이 3년 동안 나를 보고 다녔을지라도 그것이 오히려 인간이 갖고 있던 본래의 죄를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완벽하게 드러내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12제자는 구원을 받았고 끝까지 너희를 사랑한다고 했고 그중에 가룟유다와 더불어서 바리새인들은 뭡니까? 내가 그들을 택하지 아니했다는 겁니다. 주께서 선택했다는 이 솜씨에 대해서 그 앞에서 어떤 우리의 행함을 자랑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랑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 속에 우리 가스, 우리 가스야 방귀 뀌는 가스만 있지만, 이 가스를 집어넣지 말고, 주님의 성령의 가스를 집어넣게 되면 우리가 모든 게 공짜가 돼요.

그런데 그 공짜는 값이 없는 공짜가 아니고 대신 값을 치렀던 공짜예요. 세상에 값없는 공짜는 없습니다. 주께서 대신 치렀다는 것들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나의 증인이 아니고, 누구의 증인이 된다? 예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해봅시다. 교회에서 그런 문제 있다. 벌써 교회 편이 갈라져서 원로 목사 추대하느냐, 기존대로 하느냐, 새 목사를 추대하느냐, 말이 많을 때 만약에 그 안에 복음을 아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어떻게 대체했으면 좋겠습니까? 이렇게 하면 돼요. ‘그거 아~무 소용없는 기라’ 이러면 돼요. ‘누가 와도 마찬가지니까 목사 바라보지 말고 우리는 복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기라. 아무 소용없는 기라. 그거 백 명이 와도 교회 키워도 소용없는 기라. 작아도 아무 일 없는 기라.’ 이렇게 살아가게 되면 주변에 있는 집사들이 핍박을 하게 됩니다. 말이 안 통한다. 말이 안 통해.

그러나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하느냐, 자존심! 내가 누구 쪽을 믿을 때 내가 믿는 쪽에서 실패했을 경우에 이거는 짐승의 속성에 의해서 엉키지도 않는데 아까 담배 피는 학생 이야기했죠? 자기가 알아서 동일성해서 국가와 민족과 하나라고 해서 자기가 같이 실패한 걸로 그렇게 말려드는 이 어리석음, 이 허술함, 이게 연약한 우리 마음입니다. 이게 우리 마음 이예요. 참, 이 마음 언제 성령 충만해서 초월했으면 좋겠는데.

4가지 짐승, 7장 본격적으로 들어갑니다. 4가지 짐승에 있는 백성들은 짐승입니까? 짐승 아닙니까? 바벨론, 메대 바사, 헬라 -마케도니아, 로마, 4가지 짐승에 속했던 사람들은 짐승입니까? 짐승 아닙니까? 짐승 이예요. 이걸 요한계시록에서는 이마에, 또는 손에 인이 없으면 너는 사지도 말고 팔지도 말고 너는 죽었어. 모든 사람이 다 복종합니다. 단 특이 현상이 있는데, 그게 뭐냐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만 짐승의 말을 안 듣죠.

그러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걸 드러내려면 필히 우리는 어느 나라에 살아야 됩니까? 짐승의 나라의 굴을 통과해야 됩니다. 예수님처럼 통과해야 돼요. 그러면 우리한테 남은 것은 하나밖에 없어요. 왜 이 나라가 짐승의 나라인지 그건 말씀을 통해서 파악하면 우리 할 일 끝나는 거예요. 이게 우리 할 일 끝나는 거예요. 왜 우리는 살면서 처나 자식이 원수가 되는지,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면서 왜 교회가 짐승의 나라인지, 그리고 그 중에 나도 거기에 편승하고 동조하는 나도 매일같이 짐승으로 살 수밖에 없는지, 이 말씀은 그때 헬라 시대 때 헬라 백성을 욕할 입장이 못 되고, 로마 시대 때 로마 사람들 욕할 입장이 못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도 그냥 방치해두면 사도바울도 짐승 돼 버려요. 성령께서 날마다 죽이시고 날마다 살려내시니까 날마다 우리를 죽음에 넘기우고 날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살아나니까 사도바울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으로 주님의 능력에 의해서 맘껏 자기의 소원대로 살다가 자기 소원대로 참수 당해서 죽었다는 전설이 있어요. 소원이 뭐겠습니까? 남의 나라 고만 살고 싶다 이 말 아닙니까? 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너희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 그럼 내가 속한 나라에 가는 것이 사도바울의 소원이었는데 그건 남은 백성들 때문에, 자기 할 일 해야 되기 때문에, 거기 함부로 공부 안 하고 좋다고 이러면 안 돼요.

우리도 우리 마음대로 지금 갈 수 없습니다. 참 위로의 말 같습니다마는 우리 마음대로 이 땅을 떠날 수가 없어요. 여러분 악착같이 살아야 됩니다. 악착같이 아프면 링거 맞고 아프면 호스 꽂든가 해서 살아서 죽을 때까지 이 세상이 짐승이며 나는 그 짐승을 너무너무 좋아했다는 것, 그 짐승에서 성공하기를 너무너무 기대했다는 것, 그 사실을, 그런데 그런 죄인을 죄인 되게 만들어 내시면서 그 죄인을 의인 되게 만드는 그 작업이 뭐라고요? 하나님의 의!

그러니까 결론 내리면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자기 영광 받기 위해서 죄인 하나를, 우리를 뽑아서 이게 실험실의 청개구리처럼 이리 째다가 저리 째다가 이리 째다가 너 판사 해, 해서 한 번 째 보고, 판사 해야 죄가 나오니까, 목사 해, 목사 해야 죄가 나오고, 너는 의사 해, 의사해야 죄 나오고, 이런 식으로 각자 자기 역할 하면서 우리를 지금도 해부하시면서 ‘요런 게 들어있으니까 내가 죽어야 했잖아.’ 하고 계속 통과하면서 일러주는 그것이 바깥사람들 보기에는 오직 예수님만 드러나는, 내 의가 하나의 똥이고 다 더러운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만 고상하고 예수 그리스도만 날 살렸다는 능력이 된다는 것을 증거 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본격적인 7장은 다음 주에 하겠습니다.

기도합시다.

『짐승을 다루면서 우리 자신부터 이 세상에 푹 젖어 산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짐승에 대해서 생각하고자 합니다. 다 같이 짐승인데 어째서 우리를 따로 뽑아내는지, 그 뽑아내는 그 근거는 뭐며, 뽑아내는 그 이유는 뭐며, 목적은 무엇인지를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