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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서10강-짐승에서 인간으로121220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3. 6. 11. 07:58

2012-12-21 01:29:35 조회 : 363         
짐승에서 인간으로 121220 이름 : 이근호 (IP:119.18.69.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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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교회-다니엘 7장1(짐승에서 인간으로)121220-10강a -이 근호 목사

제 10강a

오늘은 다니엘 7장에 “바벨론 왕 벨사살 원년에”라고 돼 있죠? 그런데 이 기록 연대가 뒤돌아 가요. 6장에는 “다리오‘라 돼 있는데 5장에 보면 벨사살 왕이 나오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거는 5장, 6장, 그 다음에 7장으로 세월이 그대로 흘러가야 하는데 5장, 6장 왔다가 뒤로 돌아가요. 벨사살 원년이 대략 550년으로 보거든요. ”바벨론 왕 벨사살 원년에 다니엘이 그 침상에서 꿈을 꾸며“ 야, 꿈 나오면 골치 아파요. 남 꿈꾸면 괜찮아요. 그런데 다니엘이 꿈꾸면 문제가 돼요. 남이 꿈꾸면 개꿈입니다. 일반 사람이 꿈꾸면 개꿈인데 다니엘이 꿈꾸면 이건 개꿈이 아니고 이건 청사진, 하나님의 설계도가 거기서 튀어나오는 겁니다. 그 계획도가 나오면서 여기서 우리에게 인간의 자유의지와 이 계획도 사이에 크나 큰 문제점을 야기 시키는 겁니다.

제가 예를 들어볼게요. ‘투표했습니까?’라고 어떤 사람이 물어보면 ‘나는 내가 투표한 자가 당첨된다는 것을 확인하고 난 뒤에 투표하겠습니다.’ 이렇게 답변했다면 어떻게 됩니까? 뭔가 문제 있죠? ‘내가 투표해서 당첨된다면 내가 눈으로 분명히 확인하고, 그 다음에 내가 투표를 하겠습니다. 그러면 내 투표가 사표가 되지 않고 효과 있는 표가 되겠습니다.‘라고 한다면 듣는 사람이 ’이 사람은 시간 흐름 자체를 지금 무시하는 바가 된다.‘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럴 때 ’당신은 그런 답변을 잘못된 답변입니다.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기 때문에 그건 말이 안 됩니다.‘라고 하죠. 그러면 상대방이 ’그 말이 안 되는 식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지금 알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예요. 분명히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이 우리의 선택과 의지가 개입이 안 되는데, 분명히 투표하는 것은 개입이 안 되잖아요. 투표하고 난 뒤에 개표를 해야 누가 되든 되는데, 투표하고 난 뒤에 결과보고 내가 투표하겠다는 이것은 말도 안 되듯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도 이미 우리가 손대기 전에 이미 결정이 난 것인데,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알고 아! 저리 가야 구원받는구나. 나는 구원받는 쪽으로 움직여야지.‘ 이게 말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한국 교회 전체가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기독교 역사 2천년이.

성경에 이렇게 돼 있어요. 이미 당첨되고 대통령 대선에 누가 될 것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서 이미 결정됐다 이 말이죠. 결정됐기에 내가 어떻게 투표하든 상관없이 결정될 자는 돼 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세상 역사에는 그게 안 통합니다. 우리가 젊은 사람이 투표해야 우리가 믿어주는 사람이 당첨이 된다는 것이 우리의 역사 속의 논리입니다.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정말 어렵다. 정말. 이걸 역사의 주체라 합니다. 역사는 그냥 있는 게 아니에요. 역사라 하는 것은 반드시 역사의 주체를 같이 연결시켜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나의 역사의 주체는 나다. 회사 역사 주체는 사장님이고, 항상 뭔가 역사가 있으면 교회에 역사가 있으면 교회의 주체가 있기 마련 이예요. 경찰서에 가보세요. 경찰서에 가보면 역대 경찰서장이 죽 나오죠. 소방서에도 마찬가지고, 회사에도 역대 회장님이 나오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그 회장님의 사진과 사진의 연결고리가 그게 뭐냐 하면 역사를 이루고 주체는 누구다? 사진에 박힌 사람들이 그동안 회사를 이끌어 온 주체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의 역사는 반드시 그냥 역사라 하지 않고, ‘누구야? 주인공이 누구야? 역사를 이끌어 온 영웅이 누구야?’고 반드시 묻게 돼 있습니다.

그 영웅이 누구냐에 대해서 우리가 만약에 표를 한 표 던진다면, 그건 이 대한민국의 역사의 주체에 누가 가담하게 된 거예요? 우리가 가담한 셈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대통령 잘 뽑아서 일이 잘 되면, 그건 다 누구 탓이다? ‘역시 표를 잘 던졌구먼.’ 만약 일이 잘못되면 ‘그때 국민의 선택은 잘못이었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다니엘이 꿈을 꿨다. 다니엘이 열심히 일했더니만 꿈을 꾼 게 아니고, 그냥 다니엘은 잠만 잤을 뿐이고 잠 잔 그 시간에 꿈이 일어난 건데 그 꿈은 다니엘이 주체가 돼서 꿀 수 있는 꿈이 아니고 다니엘을 사용하사 하나님이 역사의 주체임을 알려주는 하나의 agent,중개인으로서 다니엘을 이용한 거죠. 참, 여러분들이 다니엘이 아닌 걸 천만 다행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밤마다 꿈 꾼 게 agent라면, 계시 꿈이라면 여러분들은 몸살 날 거예요. 꿈을 어떻게 처리할 수도 없고, 그러니까 우리가 마리아가 아닌 걸 다행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마리아처럼 배가 불룩해서 결혼도 안 했는데 임신해 보세요. 이러면 agent 아닙니까? 마리아는 그냥 agent 라고요. 아기 예수가 태어나는 도구로 쓰여 지는 거거든요.

어제 수요일 날 기도할 때 기도 제목이 뭐냐 하면 이거였어요. 보내심을 받은 자는 인간의 평가에 주눅 들지 않는다. 보내심을 받은 자는 보내심의 지시가 너무 강렬하기에 주변에 엮어져 있는 부부관계, 가족관계, 이런 것에 대해서 구애받지 않는 거예요. '당신이 이렇게 나오면 나는 이렇게 나오겠다.‘ 이게 없어요. ’당신이 이래 나오면 이래 나오겠다. 이렇게 되지. 당신이 이렇게 나오면, 그게 하나의 동기가 되면 나 이렇게 반응하겠다. 그런 게 없어요. 이래 나오든 저래 나오든 나는 이 길로 갈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 좁은 길로! 당신은 넓은 길로 가든 좁은 길로 가든 하는데 나는 내 맘대로 안 되는 거예요. 왜, 이미 당첨됐으니까. 박 근혜. 이제는 자기 집에 살지도 못해. 삼성동에 살지도 못해요. 질질 끌려서 청와대에 살아야 돼요. 자기 혼자 못 살고 경호원한테 죽 둘러 싸여서 살아야 돼요. 이게 왜? 국민이 그렇게 선택했으니까. 자기가 안 나오면 그만인데 괜히 자기가 선택해줄까 싶어서 나왔으니까.

그래서 다니엘이 꿈을 꾼다는 자체가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것이 바로 역사의 위기가 되는 거예요. 역사에는 누가 있다 했습니까? 주체가 있죠. 이 역사의 주체가 여기서 누가 공격한다? 묵시의 주체가 다니엘을 통해서 나타나면 묵시의 주체가 누굴 공격하겠어요? 역사의 주체를 공격하죠. 그러니까 위기가 되는 겁니다.

어제 수요일 날 설교에서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불 떨어졌다 했죠? 노아 홍수 때 물 떨어지죠. 왜 지금은 죄가 관영한데 물이 안 떨어지고 불이 안 떨어집니까? 누가 기둥처럼 받치고 있다 했죠? 누가 받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걸 받치고 있으니까 우리가 지금은 경악스러운 이러한 대자연의 변화 속에 있지 않고 있는 거예요. 나중에 십자가가 뜻을 다 해버리면 무너지면 하늘에서 그냥 유황불 떨어지게 돼 있습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이 우리가 노력해서 사는 게 아니고 주의 십자가 은혜로 사는 거예요. 이걸 빼버리고 도대체 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어요. 이걸 빼버리면 맨날 본인이 역사의 주체라고 기대하기 때문에 불평, 불만 이외에는 아무것도 나오질 않습니다. 우리는 역사의 주체가 아니거든요.

그래서 묵시와 역사의 만남에서 위기가 오는데 위기가 어떻게 오느냐 하면 2절에 보면 “내가 밤에 이상을 보았는데 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더니” 라고 돼 있습니다. 이게 저도 긴장돼요. 조금 있으면 어려워지니까, 잔뜩 제가 긴장되는데요. calm down, calm down, 침착해야 되거든요. 여기 바람이 분다는 것은 여기서부터 심판의 조짐이 일어나는 거예요. 바람 부는 것은 그냥 부는 것이 아니고 뭔가 노림수를 가지고 어떤 변화를 야기 시키는 공기에너지가 집중하는 겁니다. 바람이 부는데 숨어있는 실체를 드러내는데 그게 3절에 보면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죠? 그러니까 이들이 바다 속에 바람이 안 불면 어디에 있었습니까? 바다 속에 잠수함처럼 잠겨있겠죠.

그러면 땅의 역사에서 볼 때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그 정체가 보이지 않다가 드디어 심판의 바람, 특히 심판의 바람이 네 바람이니까 넷이라는 것은 동, 서, 남, 북, 전체를 하나 빠짐없이 통째로 지상의 모두를 관할하고 지배하는 그 심판의 지배로 인하여 드디어 심판받기 위해서 수면의 실체를 불러냅니다. 불러내는데 오니까 짐승이라.

그렇지 않아도 우리나라 법원에 하도 죄인이 많아서 법관이 재판하는데 바쁜데 언제 짐승까지 불러내서 재판할 수 있겠어요? 사람 재판하는 것도 힘든데. 짐승을 심판한다는 거예요. 적었죠? 제가 이 앞의 걸 지우겠습니다. 그러면 (  )을 심판. 이것만 남겠죠? 자, 심판합니다. 앞의 (   )를 채워보세요. 뭐로 채우겠습니까? ➀번 나쁜 놈 ➁번 배신자 ➂번 불신자 ➃번 하나님을 훼방하는 인간. 어쨌든 우리가 생각하는 심판은 ~~하는 인간, ~~인간, ~~인간, 우리의 심판은 인간만 심판하는 것이 고정관념입니다. 역사에서.

세상에 아무리 북한의 판사가 무섭고 중국의 공산주의 판결이 무섭다 할지라도 ‘여봐라, 귀신을 대령하라.’ 이런 일이 있습니까? ‘귀신을 수갑 채워서 데려오라.’ 이런 거 없잖아요. ‘귀신은 이 앞에 와라. 귀신은 무릎을 꿇고 네 죄를 알렸다.’ 이런 건 없다 이 말이죠. ‘귀신은 곤장 30대를 맞아라.’ 이런 게 안 된다 말이죠. 귀신인데? 안 되잖아요. 뭔가 팬다, 벌  준다. 할 때는 누구에게만 해당되는 겁니까? 인간에게만 해당되죠.

역사라 하는 것은 정의를 바로세우기 위해서 악한 것을 제거하는 작업을 병행하게 됩니다. 나쁜 것을 제거해서 자꾸 좋은 것만, 좋은 것만 남겨서 점점 더 그것이 선행 작업이 되고 그 선행 작업이 시간이 지나면서 좋은 것만, 좋은 것만 모아서 후대에 가면 그 좋은 것만 역사가 질적으로 좋은 것만 된다. 라는 것이 역사의 법칙입니다. 마르크스의 역사 발전법칙. 변증법적 유물론. 이런 게 있어요. 사적 유물 역사론 이런데 보면 나와요. 헤겔의 정반합을 위해서 자꾸 좋은 쪽으로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역사는 갈수록, 갈수록 질이 더 나아지겠죠. 그렇게 해서 심판이라 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이 말이죠. 심판은 필수적 이예요.

그런데 ~~는 심판한다. 하는 이것이 역사에 있어서는 이게 상식인데 여기에 갑자기 뭐가 나옵니까? 짐승이 나와 버린다 말이죠. 그럼 짐승을 심판한다는 것은 이건 있을 수 없는 거예요. 그럼 여기 (  )에 (미지 X), 다른 말로 하면 (없는 것), 그럼 없는 것을 심판한다는 말은 이 뒤의 심판은 기존에 행했던 심판이다? 아니다? 심판이 아닌 거예요. 인간이 행할 수 없고 인간의 판사, 검사가 할 수 없는 심판을 친히 누가 하신다? 다니엘에게 계시내린 하나님이 친히 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심판이라 하는 것은 지상에서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는 것과 질적으로 다르다 이런 뜻입니다.

그럼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어느 심판에서 벗어나는 걸 의미합니까? 인간이 하는 심판에서 벗어나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죠. 어디서 심판입니까? 하나님이 뭘 심판하는 것? 하나님이 짐승을 심판하는 그 기준에서부터 우리는 해방되고 자유를 얻은 겁니다. 예수님 옆에 있는 강도는 강도짓해서 심판받았죠? 심판받았잖아요. 그러면 십자가 졌으니까 그 사람 지옥 가겠네? 인간의 심판을 받았으니까. 그 강도는 비록 인간의 심판은 받았지만 누구의 심판은 안 받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은 안 받죠. 여러분, 어느 쪽이 좋습니까? 예수님 대신 풀려난 강도가 바라바죠. 민란을 일으켰다. 어떤 사람은 촛불집회하다 잡혔다 이런 이야기하는데 그건 모르겠고 질이 나쁜 사람 이예요. 그 사람은 예수님대신 풀려났는데 거기서 풀려나고 만약에 하나님 심판에 걸려들면 어떻게 돼요? 그건 풀려난 게 아무 의미 없죠. 의미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사형제도가 있느냐 없느냐 그 문제는 의미 없는 거예요. 왜 어디까지나 역사의 주체는 인간이 하는 심판이기 때문에 의미 없는 겁니다.

안식일 안 지켰다고 돌로 쳐 죽여라. 민수기에 나오죠?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걸 어떻게 합니까? 안식일 안 지킨 사람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 심판 옳은 심판입니까? 안 좋은 심판 이예요. 하나님이 묵시적으로 하신 말씀을 인간들은 자기가 행할 수 있는 역사적 심판으로 감행해서 ‘아이구, 하나님 뜻대로 했다.’고 하는 거예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을 것이다. 예수님이 나무에 달렸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죽었다가 나무에 달려서 저주받았다가 살아났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건져주겠다는 해방의 코스, 구원이라는 게 뭡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교도소 안 간다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심판에서부터 우리가 구원받는 것, 그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은 것이 남들 보기에는 역사 속에서 재판받아 죽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안에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아버지한테 받는 형벌로 본 거예요. 다른 사람은 그렇게 안 봤는데 예수님은 그렇게 해석한 거예요. 이건 아버지께서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아버지께서 죄 없는 자가 흠 없는 어린양으로서 세상 죄를 지는 어린양으로서 아버지의 형벌을 받은 겁니다.

이 묵시적인 사건에 같이 초청받아서 같이 합류된 자만이 천국 갑니다. 그 외는 못 갑니다.  천국 못 간다는 것을 실실 웃으면서 내가 이야기하는 것도 드물다. 십자가를 모르면 못 갑니다. 십자가라 하는 것은 기도해서 교도소에서 빼 달라. 그런 기도가 십자가와 관계없어요. 몸 아픈데 건강하게 해 달라. 십자가와 관계없습니다. 사업 안 되는데 잘되게 해 달라. 십자가와 관계없습니다. 교회 망했는데 사람 모아 달라. 십자가와 관계없습니다.

십자가는 내가 사람 앞에 죄진 게 아니고 누구한테 죄졌다? 시편 51편에. 사람한테 죄진 게 아니고 누구한테 죄졌다? 나는 하나님께 죄졌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나는 아버지께 죄지은 자다. 탕자가 그런 소리하죠. 그 아버지, 그 아버지는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아버지를 알 자가 없어요. 그러니까 예수님 오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 심판 안에 서게 하는 거예요. 아버지 앞에. 남들한테 숨겨진 그 아버지 앞에. 우리는 예수님 이름을 통해서 비로소 아버지 앞에 서보면 내가 바로 진작 처음부터 저주받아야 합당한 자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겁니다.

짐승을 심판하기 위해서는 네 개의 바람이 불어야 된다는 말은 이제는 그 짐승은 하나님이 심판에서 이 세상의 어느 구석에 숨어도 이제는 소용없게 되었어요. 어느 구석에 숨어도! 하나님께서 ‘아이쿠, 네가 거기 숨은 줄 몰랐다.’ 그런 거 없어요. 벌써 회오리바람이 불어서 한쪽으로 심판받기 위해서 짐승이 나오도록 모았다 이 말은 더 이상 남겨놓은 악마는 없어요. 남겨놓은 귀신은 없습니다. 짐승이란 짐승은 죄다 모았어요. 그 짐승이 회오리바람 속에서 드디어 실체를 드러내는데, 그 짐승이 짐승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바다의 짐승이 땅에 오니까 이게 뭐가 되느냐 이게 한 국가의 왕이 되는 겁니다. 국가의 왕을 바다에 집어넣으면 짐승이 되고, 그 짐승을 바다에서 바람으로 뽑아내면 국가의 왕이 되고, 우리는 그 왕의 초월적인 권력에 우리는 아무소리 못하고 ‘살려주세요.’ 하면서 그 앞에 고개 숙이죠. 지난주일 낮에 그런 이야기했고 서울강의에서도 했는데, 모든 인간의 자아에는 ‘살려주세요.’라는 게 있어요. 주일 낮에도 숟가락 들 때마다 ‘살려주세요.’가 다 담겨있어요. 그냥 행동하는 법이 없어요. 요거 할 테니까 살려주세요. 요거 할 테니 살려주세요. 엄마가 ‘야, 공부해.’ 공부하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엄마, 나 공부하고 있는 거야.’ 여기에 생략된 말이 있어요. ‘엄마, 공부하고 있으니까 날 살려주세요.’ 이게 포함돼 있어요.

그래서 인간은 살기 위해서 누군가를 의지하게 돼 있는데, 그것이 이 지상에서는 최고의 권력을 사모하게 돼 있고, 그 권력은 왕이 쥐게 돼 있습니다. 그 왕의 배후를 바람 불어서 캐내고 보니까 왕의 배후는 어디와 연결돼 있다? 바다와 연결돼 있고 실은 바다의 짐승이었다. 이렇게 묵시적인 주체는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할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뭐로 만들려 했습니까? ➀번 빵 주는 자 ➁번 고기 주는 자 ➂번 임금 몇 번입니까? 임금이잖아요. 임금 삼고자 한 거예요. 바로 저런 타입의 메시아를 왕을 선호한 거예요.

그러면 바다의 짐승은 지상의 인간들의 고대하고 그리워하던 그 영웅의 모습으로 나와서 사람들에게 대환영을 받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구체적으로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하면 이 짐승을 사람들에게 짐승이라고 훌륭한 분이라고 소개하는 역할을 땅에 있는 짐승이 해요. 이게 바로 거짓선지자! 거짓선지자 논리는 간단해요. ‘여러분들이 원하는 것 있죠? 여러분들이 원하는 게 현재 눈에 보이지 않지 않습니까? 하지만 제가 소개하는 분은 짠! 여러분들이 그동안 학수고대했던 그분이 등장할 겁니다. 자, 나오세요. 우리의 임금이시여.’ 요 소리 하는 거예요. 바다의 짐승이 땅에 있는 그에게 권력을 줘서 했다 이 말이죠.

3절에 봅시다.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왜 넷인가? 왜 다섯은 안 되고 여섯은 안 되고 일곱은 안 되고 왜 넷인가 하는 문제예요. 그것은 다니엘 2장에서 느부갓네살이 꿈을 꿨잖아요. 이건 누가 꿨어요? 다니엘이 꿨잖아요. 느부갓네살이 꿈을 꿨는데 그 꿈은 느부갓네살 다운 꿈 이예요. 왜, 그 꿈 꾼 당사자가 지상의 짐승이기 때문에. 짐승이 꿈을 꿀 때 어떤 꿈을 꿀까요? 강아지가 꿈꾸면 강아지 꿈꾸고 원숭이가 꿈꾸면 원숭이 꿈을 꾼다는 이야기를 누가 한 적이 있어요. 원숭이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제가 지어서 한 이야긴데, 원숭이의 하나님은 원숭이 모습이고 강아지 하나님은 강아지 모습이고, 따라서 인간의 하나님은 인간의 모습이고, 왜 모든 하나님은 자기를 투사한 거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포이에르바하 라는 철학자가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짐승이 꿈을 꿨을 때 짐승이 꿈을 꿨으니까 그리고 그 꿈은 짐승 속에 포함된 게 아니고 꿈이 짐승을 지배하게 돼 있어요. 꿈이 뭐였습니까? 금 신상이었잖아요. 금 신상이 바로 4개로 구분돼 있습니다. 금, 은, 놋, 그 다음에 철과 철 +흙, 이렇게 돼 있거든요. 이걸 하나로 보자 이 말이죠. 왜 하나로 보느냐, 이것을 해석한 자가 누구냐, 다니엘이거든요. 다니엘이 또 꿈을 꿨잖아요. 다니엘이 꾼 꿈은 뭐를 대상으로 하고 있어요. 뭔가 기존의 무슨 대상을 놓고 거기에 대한 해석용으로 꿈을 꾼 거예요. 여기 수직적으로 고정돼 있는 이 우상, 수직적으로 고정돼 있기 때문에 이 우상은 흔들림이 없이 그냥 있는 겁니다. 이게 나중에 엎어지게 되면 지평에 나란히 뉘어지면 이것이 토막지어지면 그 토막, 토막 하나가 새끼 짐승으로 나오는 거예요. 큰 짐승 안에 새끼 짐승들이 나란히 출현되게 돼 있는 그 사실을 이것을 해명하는 다니엘이 꾼 꿈이 느부갓네살 꿈을 해석을 해버린 겁니다.

주도권은 역사의 주체에게 있는 게 아니고 역사의 주체를 꿈꾸게 한 묵시의 주체가 꾼 꿈이 역사의 주체보다 더 우월한 거예요. 예수님의 모든 해석이 지상의 인간들이 율법을 해석하는 것보다 더 우월한 겁니다. 모세가 어떤 내용이냐,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모세 해석을 다시 해버립니다. 모세, 율법은 그런 뜻이 아니야, 이런 뜻이야, 라고 해석해 버립니다. 그러니까 백성들도 ‘야, 이런 권세는 도대체 어디서 온 권세냐?’ 이럽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공격할 때 ‘세례요한의 권세가 누구한테 왔느냐’ 묻죠. ‘하늘에서 왔느냐 사람에게서 왔느냐.’라고 묻죠. 그래서 하늘에서 온 권세가 사람의 권세를 재해석할 수 있는 유일한 표준권한이 있기 때문에, 해석 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금 신상) 눕혀져 보니까 이 신상이 분명히 하나인데 이것이 4개로 분류될 수 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이건 하나의 마징거z처럼 조립용, 하나, 하나 분절될 수도 있고 해체될 수도 있고, 마징거z 합체, 독수리 오형제 합체, 하면 하나로 모이는 것처럼 모든 게 하나처럼 움직이는 겁니다. 하나처럼 움직이는 원리가 요한계시록 17장에 보면 큰 성 바벨론이라 해서 바벨론으로 하나로 합체돼 있죠. 짐승 속의 짐승의 사슬, 연쇄 고리,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짐승의 연쇄 고리를 또 잘라보면 분산된 짐승 새끼들, 그게 바로 우리 자신들 이예요. 우리 안에 짐승을 키우고 있었고 우리 안에 있는 짐승이 바다에서 온 짐승을 흔쾌히 마중 나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던 겁니다. 내 뜻대로 제발 해줄 수 있는 어떤 영웅이 없을까, 나는 이런 뜻이 있는데 이걸 속히 이루어질 그 뜻이 없을까.

바다에서 짐승이 나오는데 기어 나오죠. 바다에서 나오는 물체 X인데 다시 말해서 짐승이 된 거죠. 짐승이니까 뭐는 아니다? 사람은 아니다 이 말이죠. 아까 했죠? 묵시에서 심판은 심판하는데 사람을 심판하는 게 아니라 했죠. 사람을 다 뭐로 바꿉니까? 짐승으로 다 바꾸는 거예요. 이러한 안목은 묵시적 안목에서만 가능하다 말이죠.

그래서 다니엘을 해석하면서 국가 최고주의를 지향 하는 국가에서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책입니다. 국가가 곧 짐승의 나라니까. 심판받기 위해서. 국가가 국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짐승으로 변해서 이해된다는 것은 뭐를 전제로 하느냐 하면,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면서 국가나 왕은 짐승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거예요. ‘느부갓네살 이리 오너라’ 이렇게 하지 말고 ‘짐승아 이 앞에 와. 니 죄를 알렸다.’ 이게 뭐냐 하면 이미 피고는, 이 죄인은, 이렇게 묻는 거와 동일하다 이렇게 보면 돼요.

첫 번째 피고, 첫 번째 피고는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더니” 이것은 바로 바벨론 나라인데 독수리 날개는 느부갓네살 왕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첫째는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더니 내가 볼 사이에 그 날개가 뽑혔고 또 땅에서 들려서 사람처럼 두 발로 서게 함을 입었으며 도 사람의 마음을 받았으며” 이렇게 돼 있습니다.

상당히 재밌는 말이죠? 원래는 느부갓네살이 사람이 아닙니까? 짐승인데 그동안 무슨 행세했다? 사람처럼 행세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건 거꾸로예요. 사람인데 마음이 고약해서 짐승이 됐다는 게 아니고, ‘원래 짐승인데 지금 사람인체 하고 있구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박ㅇㅇ 너 짐승이지? 아이, 사람인체 하는구나.’ 이런 거예요. ‘저 사람 봐라, 서강대학교 나오고 영국, 프랑스 유학 갔다가 거기서 엄마 사고소식 듣고 그때부터 정수회 들어와서 그거로 관리하면서 정치 배워서 사람행세 하는구나, 신기해 죽겠다. 사람행세도 다하고.’ 이러고 있다 말이죠.

박ㅇㅇ는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얼마나 훌륭한 짐승이냐가 중요한 겁니다. 얼마나 짐승노릇을 잘 해서 모든 국민을 기쁘게 할 것이냐, 이게 앞으로 5년 남은 중임하면 10년의 과제입니다. 그래서 북한 김정은 짐승하고 싸워야 돼요. 그런데 이번 짐승은 여자 짐승이라.

그 다음에 5절에 보면 “다른 짐승 곧 둘째는 곰과 같은데” 곰이라는 것은 미련 곰탱이라는 뜻이 아니고 그만큼 덩치가 큰데 “몸 한편을 들었고 그 입의 잇사이에는 세 갈빗대가 물렸는데” 이게 곰인데 메대, 바사거든요. 한편이라니까 이 곰(짐승)은 두 편으로 나눠서 이해하라 이 뜻입니다. 원래 메대 나라와 바사나라가 같은 나라가 아닙니다. 바사는 페르샤인데 메대와 같은 나라가 아니에요. 아닌데 메대 바사 두 나라가 다 바벨론을 멸망시켰지만 어느 쪽이 우세하냐 하면 바사나라가 한쪽이 다리를 들었다. 일본의 스모하듯이 한쪽 다리를 들잖아요. 한쪽을 드는 것이 메대보다 바사가 우월하다는 겁니다. “그 입의 잇사이에는 세 갈빗대가 물렸는데” 세 개의 갈빗대가 뭐냐 하면 거기 차지했던 페르샤 나라가 점령해야 될 3개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게 바벨론, 애굽, 리디아를 바사나라가 완전히 다 점령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건 페르샤 나라, 이렇게 두 번째가 됩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는 6절에 보면 “그 후에 내가 또 본즉 다른 짐승 곧 표범과 같은 것이 있는데 그 등에는 새의 날개 넷이 있고” 그러니까 앞의 첫 번째 보면 사자 같은데 독수리 날개 있죠? 이 짐승은 훨씬 더 빨라요. 표범이 사자보다 더 빠르잖아요. 빠른데 날개까지 있으니까 얼마나 빠릅니까? 그러니까 바사나라 다음에 나오는 나라는 재빠르게 그 넓은 영토를 바벨론이 있던 느부갓네살이 있던 그 영토를 통째로 잡는 거예요. 그러니까 항상 영토는 얼추 제한돼 있어요.

처음의 짐승이 무슨 짐승입니까? 바벨론이죠. 바벨론 그 영토 중심으로 계속 그 다음에 그 영토를 누가 차지하고 또 누가 차지하고 이런 식으로 나가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첫 번째 금 신상의 위치는 별로 바뀌지는 않죠. 거기서 맨 새끼 까는 것처럼. 금, 은, 놋, 철, 그 다음에 철 + 진흙, 그 영토에서 그대로 움직이는 겁니다.

빠르게 점령했는데 그 다음에 보면 “그 등에는 새의 날개 넷이 있고” 넷이 있다는 말은 이게 BC 320년경에 알랙산더가 일찍 죽고 난 뒤에 자기는 점령하는 것만 하고, 그 뒤에 네 명의 장군이 있어요. 4명의 장군이 영토를 분할해서 통치하게 돼 있습니다. 그게 헬라나라예요. AD 320년 경에. AD331년에 망하고 301년에 입수스 전쟁이 있는데 거기서 확연하게 마지막 4개의 왕으로 갈라집니다.

4개의 왕으로 갈라졌는데 이게 이태리가 있고 그리스, 아가야, 마게도니아, 그 다음에 터키, 지중해가 있고 이렇게 사해바다가 있고 여기 사우디아라비아가 있고 여기 이렇게 이란, 이라크가 있고 이렇게 돼 있거든요. 제일 먼저 로마 이태리 이쪽을 차지하는 카산더(Cassander)라는 장군이 이걸 지배했어요. 터키를 지배하는 리시마쿠스(Lysimachus)란 장군이 이 지역을 차지했어요. 그 다음에 이 밑에 시리아, 페르샤, 바벨론 이 지역을 점령한 사람은 유명하고 중요한데요. 나중에 요한계시록 17장에 나와요. 셀류쿠스(Seleucus)라는 장군이 여기를 차지했어요. 이게 이쪽의 예루살렘이 왜 중요하냐 하면 이 셀류쿠스하고 애굽을 점령한 프톨미(Ptolmy)라고 라틴어로 하는데 이 프톨미(남쪽 왕)하고 셀류쿠스(북쪽 왕)하고 다니엘 11장에 보면 그 내막이 죽 전개돼 있어요. 이것들이 저희끼리 싸우다가 발길질하고 발길질하다가 지난번에 이야기했죠? 할 때마다 예루살렘은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그런 식이 돼 버린 거예요.

그리고 이들의 전쟁은 바로 바람을 불어서 바다에서 올라와서 한 거예요. 바다가 뭘 점령했다? 땅을 점령한 거예요. 원래는 땅은 바다가 점령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동안 지켜줬는데 이제는 유대나라 망하고 난 뒤에 볼 짱 다 봤으니까 끝나버렸어. ‘자, 마지막 장면, 자, 드라마 마지막 회 들어갑니다.’ 이렇게 된 거예요. 원래 막장 드라마의 마지막 회는 바빠요. 빨리 결혼도 시켜야 되지, 원수도 갚아야지, 또 회개할 건 회개도 시켜야지, 굉장히 바빠요. 속도가 되게 빨라요. 그때는 잔소리나 감격은 일단 천천히 하고, 복수 할 건 빨리 복수해야 되잖아요. 마지막 때가 되니까 바다가 그동안 숨어있던 바다의 짐승이 위를 다 도배를 하는 거예요.

자, 예를 들면 여기에 있는 백성들은 그 당시 심정이 어떻겠어요? 지금하고 똑같은 거예요. 지금도 소스로 범벅됐으니까. 케이크에 원래 하얗게 덮였잖아요. 눈이 오면 눈에 덮이잖아요. 지금이 짐승의 세계로 몸과 마음, 영혼을 완전히 덮고 있으니까 그때 살아가는 사람이나 지금 살아가는 사람이나 똑같아요. 어떻게? ‘도와주세요. 어디 힘센 사람 없습니까?’ 권력이 모이는 곳은 어디죠? 돈의 흐름이 모이는 곳은 어디입니까? 그야 시장이죠. 경제.

이번 대전 수련회 때 할 겁니다만 사람이 자기 자신을 이렇게 딱 놓고 보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여러 가지가 관점이 서로 구분되는 서로 섞이지 않는 관점이 나옵니다. 뭐냐 경제적인 관점, 과학적 관점, 예술적 관점, 종교적인 관점, 정치적 관점, 전부 다 관점이 달라서 어느 관점을 추구하느냐에 따라서 인생관이 달라집니다. 똑같은 일이 벌어져도 어떤 사람은 그걸 예술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정치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고, 주로 정치적으로 보는 사람은 어떠냐 하면 정치인 보좌관들, 월급도 별로 없고 수입도 거의 없지만 언젠가는 한방, 국회의원 보좌관 되면 나도 보상해 줄게. 보좌관 하고 보좌관 몇 년 하다가 국회의원 출마하면 된다. 그렇게 정치적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

또는 개뿔 돈도 없고 아무것도 없으면서 언젠가는 김기덕처럼 된다 하고 조연출이나 조명 들고 따라다니는 사람 있잖아요. 젊은 청춘을 영화에 바치는 사람들. 김기덕도 마찬가지고 홍ㅇㅇ감독도 그렇고 옛날부터 비리비리했어요. 돈도 써주는 사람도 없고 어떤 시나리오 작가는 굶어죽었다는 소문 있잖아요. 하도 수입이 없어서 여자하고 있는데 굶어죽었어요. 그래도 이 작품 하나 언젠가 뜰 거라 하는, 세상에서 볼 때 예술적 관점은 ‘야야, 너 공장에나 다녀라’ 그런 관점은 경제적 관점이고 자기는 예술적 관점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그런 것보다 예술적 관점으로 보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은 짐승 안에서 어떻게 처신하는가, 본인이 원하는 관점을 골라서 처신하는 거예요. 또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한테 버림받고 난 뒤에 보란 듯이 악착같이 돈을 모아서 그 돈으로 이미 남의 아내가 된 여자를 내 것으로 다시 뺏어 오려는 막장 드라마 같은 이야기, 그건 돈 가진 자가 이 세상에서 성공한다는 것, 이런 관점, 그 모든 어떤 관점이라도 그것은 바로 악마입니다. 악마의 속성 이예요. 심지어 종교적 관점, 내가 교회 목사 되어서 성공해서 내가 세상에서 주의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겠다는 것 있잖아요. 그것도 세상에서 하나의 관점이 되고, 전부 다 그게 짐승이 분배해 준 속성들입니다.

그 어느 관점도 바로 ‘이런 내가 십자가 앞에서 심판받아 마땅해.’ 하는 것은 이건 성령이 아니면,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을 살려내는 방식으로 살기 때문에 이게 육에서 나온 것은 육에 불과한 겁니다. 성경에서는 육에서 난 건 육이고 영에서 난 건 영이다. 네가 성령으로 거듭 나지 않으면 하늘나라 못 간다고 하지만 이 세상에서는 그런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교회 등록하시면 죽어서 천국 갑니다. 그런 것만 사람들은 원하는 거예요. 말씀을 원하는 게 아니고 종교단체라는 아주 편리한 구원단체가 인간사회에서는 필요한 거예요. 주의 복이 온다는 그 에이전트(agent), 복을 준다는 중개인이 필요한 거예요. 무당 같은 인간들이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이게 옛날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제가 아까 질문을 뭐라 했던가요? 이러한 왕들이 치대는 이런 상태에서 그때 우리가 태어났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처신할 것이냐, 이 말입니다. 어떻게 처신하기는 뭐 종교적인 순교자 나올 것이고, 어떤 사람은 빌붙어서 ‘내가 헬라로 다 바꿀게요. 예, 내가 유대인 포기하고 헬라할게요. 할례도 안 할게요.’ 해서 고위 관직으로 잘 먹고 잘 살 사람도 있을 거고, 또 어떤 사람은 다른 나라로 이민 가는 사람도 있을 거고, 어떻게 돼도 그건 바로 캄캄한 먹구름 밑에서 노는 사람에 불과한 거예요.

깜깜한 먹구름! 이만큼 두께가 두꺼운 먹구름이어서 어떤 것으로도 뚫고 하늘의 주의 영광을 바라볼 수 없는 그런 입장에서 ‘내가 오늘도 어디 가서 사느냐.’ 그저 눈만 뜨면 ‘어떻게 살지?’ 만 생각하는 그런 자들의 세계, 그것이 인간의 현실 전부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눈만 뜨면 ‘뭐 먹고 사느냐? 이 짓 안 하고 살 수 있는 방법 있으면 나 그 짓 하겠다.’ 돈 모아서 주식 투자해서 이 고생 안 하고 주식 투자해서 그걸로 먹고 살까, 이런 경제적 관점, 투자 적 관점, 포트폴리오 깔아서 펀드 해서 이거 안 되면 이거 되고 해서 살까, 모든 것을 그런 관점에서 한다는 것은 먹구름이 잔~뜩 끼었어요. 일기예보 볼 것도 없어요. 매일같이 흐려요. 흐려도 너~~무 흐려.

그런데 요한복음 9장에서 세상에 눈먼 장님이 그 눈을 떴다 아닙니까? 예수님을 본 거예요. 이건 오늘 유튜브 동영상에도 했지만 제자들도 불신자거든요. 제자들도 불신자인데 세상에 제자들도 모르는 예수님에 대해서 눈먼 소경이 예수님을 알게 된 거예요. 실로암 물가에서. 원래 실로암 물이라는 것은 어디냐, 옛날 예루살렘 경내에 있어요. 옛날 예루살렘 성지에 기혼 샘이라고 샘물이 있어요. 그 샘을 지하로 물을 뚫어서 히스기야 때 뚫어서 안에 연못을 만들었는데 그게 실로암 이예요. 여기 성전 있고 여기 성전 돔은 아랍인이 가지고 있어서 가도 못가요. 성전 있고 헤롯 왕궁도 있고. 진흙을 이겨서 발랐는데 이 실로암 물에 씻었더니 눈이 떴습니다.

그렇다면 이 물의 효과입니까? 아니면 진흙 때문에 그럽니까, 뭣 때문에 눈이 떴죠? 예수님께서 뜨게 하셨죠. 결국은 자기가 진흙을 바르고 물을 바른다는 것은 이것은 내가 이런 행동을 하는 이것이 옛날에는 진흙 바르고 눈 뜨면 나의 행동이 나를 살리고 이 행동에 의해서 어떤 결과가 주어질 것이라고 여겼던 그런 먹구름 속의 육의 세계 속에 살던 사람이 지금 일어난 이 행동은 내가 예상도 못한 행동이거든요. 내가 미처 이해 안 되는 행동은, 지금 자기가 미친놈이라. 내가 이 짓해서 구원받는다는 것이 내 예상 속에 없는 거예요.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 들어갈 때 요단강 들어가려고 온 게 아닙니다. 수영복 준비하고 온 게 아니거든요. 그냥 엘리사 만나서 침이나 맞고 병이나 고칠까 싶어서 왔는데 만나주지도 않고 요단강 가라 하니까 요단강 보니까 깨끗해요? 깨끗 안 해요? 너무 더러워요. 그래서 이런 물 같으면 우리 동네에도 많다 했잖아요.

우리가 예상 못한 방식을 할 때 그 방식을 하더라도 이건 이 방법으로 내가 구원받았다는 소리를 못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자, 예수를 믿습니다.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예수님으로 구원받는다는 걸 이야기하는 그것이 예수 진짜 믿는 거고, 내가 악착같이 예수 믿겠다 하는 것은 그건 행함 이예요. 그건 믿는 게 아니고.

소경이 눈을 떴다는 말은 눈 뜨고 다닌다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을 봤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저가 본다고 하니까 소경이요. 예수님 보죠. 키도 보고 몸무게도 보고, 예수님을 보고 있잖아요.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네가 나를 보느냐?’ ‘봅니다.’ ‘소경이야’ 보고 있는데 소경 이예요. 봐도 못 봐. 봐도 볼 수가 없어요.

이쪽이 썩어서 썩은 데서 나오는 것은 먹구름 속에서의 세상이기 때문에 예수님도 자기가 썩어빠진 사고방식으로 보니까 예수님이 해석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에 의해서 새롭게 변화된 소경은 눈을 감아도 떠도 이제는 소경이 아니무니다. 소경이 아닌 거예요. 그래서 아까 했죠.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 우리의 눈은, 과학에는 소용 있고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별을 관찰하고 과학을 전개 하는 데는 충분히 하는데 돈 셀 때 돈 잘 세는가 보는데 충분한데, 예수님 보는데 우리 눈이 필요 있어요? 필요 없어요? 아무 쓸데없는 눈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럼 왜 우리가 눈 뜨고 있는가? 죄 지으라고 눈 뜨고 있는 거예요. 봐도 깨닫지 못하는 눈을 뜨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자꾸 예수님을 안다고 하니까 그것이 죄라고 깨닫게 하기 위해서 눈이 있는 거예요. 달린 게 문제라. 눈 달리고 코 달린 이게 문제라. 차라리 관 속에 누워서 예수 믿으면 오늘 믿든 내일 믿든 믿을 것 같은데, 펄펄 살았기 때문에 문제라.

이렇게 해서 4마리의 짐승이 있습니다. 또 “네 번째 짐승은 무섭고 놀라우며 또 극히 강하며 또 큰 철 이가 있어서 먹고 부숴뜨리고” 이 네 번째 짐승은 어떤 짐승이 있다. 이걸 강조하는 것이 아니고 뭘 보여주느냐 하면 그 짐승이 그냥 있는 게 아니고 뭔가 활동력을 보여주는 그 과정자체에 카메라를 들이대면서 과정자체를 보여주는데 상당히 움직임이 활발하죠? “이 짐승은 전의 다른 짐승과 다르고 또 열 뿔이 있으므로 내가 그 뿔을 유심히 보는 중”

열 뿔이 있다는 열 뿔! 이 열 뿔이 바로 로마가 망하면서, 로마가 망한 것은 위에서 게르만족이 와서 그래요. 게르만족은 훈족에서 쫓겨 와서 망한 거예요. 그 로마가 와서 로마제국을 부숴버립니다. 부숴 지면서 나라가 동로마 서로마로 쪼개지거든요. 395년부터 갈라져서 서로마는 476년에 망하고 동로마는 1453년에 망합니다. 동로마는 1000년 동안 버티죠. 로마는 원래 BC168년에 세워져서 서로마는 476년에 망합니다. 168년에 로마가 시작됐다는 그 전의 헬라는 기원전 330년에 시작해서 168년에 망하는데, 헬라가 망하고 난 뒤에 종족이 10개로 드디어 갈라집니다. 10개로 갈라지는데 독일, 프랑스, 스위스, 포르투갈, 북 아프리카, 스페인 영국, 이태리, 이태리, 이태리, 3개 나라, 이렇게 10개로 갈라져요. 그런데 그전까지는 이태리 프랑스가 아니겠죠. 그전의 지명을 10분 쉬고 다음 시간에 이어서 하겠습니다.
 이한례 (IP:203.♡.45.137) 12-12-31 15:10 
가락교회-다니엘 7장1(짐승에서 인간으로)121220-10강b -이 근호 목사

제 10강b

첫 번째 시간에 네 번째 짐승은 과정에 집중해서 한다는데 여기 열 뿔이 나오고 여기 8절에 보니까 “내가 그 뿔을 유심히 보는 중 다른 작은 뿔이 그 사이에서 나더니 먼저 뿔 중에 셋이 그 앞에 뿌리까지 뽑혔으며” 열중에서 세 개 뽑혔으니까 결국 남는 것은 몇 개 남는가요? 10-3=7, 일곱 개 남죠. “이 작은 뿔에는 사람이 눈 같은 눈이 있고 또 입이 있어 큰 말을 하였느니라”

그러니 이건 자꾸 짐승이 ‘분명히 너는 짐승이야’ 짐승인데 자꾸 무슨 행세를 하는겁니까? 사람 행세를 하는데 그 와중에서 엮여지면서 세 개가 빠짐으로서 ‘아, 진정 당신은 진정한 사람 중에 사람이로소이다.’라고 추앙받는 식으로 이 역사는 흘러가는 거예요. 결국 이 짐승들이 바다에서 올라온 것은 이 역사라는 그 도배를 그전까지는 누구중심이었다? 유대나라 중심이었고 이스라엘 중심으로 하나님이 일하다가 이제는 유대나라가 뭔가 바벨론에 삼켰거든요. 삼켰는데 ‘아, 우리 유대나라는 바벨론에게 삼켰습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인 안목에서 봐야 하는데, 다니엘의 에이전트(agent), 하나님의 다니엘의 에이전트의 눈으로 보면 이건 진짜 인간인 이스라엘이 짐승한테 사로잡힌 게 되고 그 짐승이 새끼를 까고 짐승이 마치 우리를 대신한 이 유대나라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사람 흉내 내면서 사람 행세를 하는 그러한 역사가 전개되는 것, 이것이 역사의 마지막에 전개될 청사진이다 이 말입니다. 굉장히 이해하기 쉽죠?

다시 할까요? 그전까지는 하나님이 누구한테만 이야기했다? 유다, 이스라엘에만 이야기했다. 뭐로 이야기한 거냐 하면 바로 언약으로 이야기하는 거죠. 그런데 이스라엘이 망하면서 언약이 깨졌잖아요? 언약이 깨지면 진정 언약이 깨졌겠는가? 과연 하나님의 언약께서 ‘아이쿠, 언약 깨졌구나. 나 더 이상 손도 못 대겠다. 나 졌다.’ 라고 물러설 것이냐, 아니면 어떻게 할 것이냐, 언약이 깨졌으면 이제는 남은 것은 심판이다 말이죠.

그런데 심판이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사람을 심판하고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것이 심판의 전부거든요. 그런데 심판 앞에  (  )가 있어서 무슨 심판입니까? 이게 짐승에 대한 심판이다 말이죠. 이상하다? 왜 짐승을 심판하지? 짐승을 심판하는데 바다에서 올라 온 짐승을 심판했다는 말은 이건 그동안 이스라엘이 땅의 중심이었는데, 이 땅의 중심이 뭐로 전환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까? 바다에서 올라 온 짐승이 땅의 어른 행세하는 식으로 바뀌는 거예요. 그러면 그들이 바뀌면서 구원을 하시는 하나님이 심판을 함으로 말미암아 구원 중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라가 아니라 이제는 오히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어떻게 심판하는 걸 통해서 하나님이 아, 이런 분이구나. 라는 걸 알 수 있는 기회를 너희들이 가졌다 이 말입니다.

‘이스라엘 유다 나라야, 언약의 백성들아, 세상을 심판 받는 중이라고 보게 되면 비로소 너는 하나님을 제대로 볼 것이다.’는 거예요. 세상을 심판하는데 이것이 분명이 짐승인데 이것이 마치 사람행세를 해서 하나님이 만든 그 사람이 아닌데 이건 마치 사람으로 행세해서 진짜 사람, 사람한테 우대받는 사람, 사람한테 존경받는 사람, 사람한테 추앙받는 사람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그런 육의 세계가 전개되는 겁니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 편성되는지 그 열 개의 뿔부터 먼저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날라 간 3개의 뿔을 언급을 하겠습니다. 열 개의 뿔을 제가 알기 쉽게 독일, 포르투칼, 스페인, 이태리, 이태리, 이태리, 스위스, 영국, 프랑스, 북 아프리카, 이들은 근대국가에서 이런 이름으로 있지만, 그 뿌리를 캐보면 이건 전부 다 네 번째 짐승, 한 짐승에서 나온 거예요. 이게 뭐냐 로마에서 나온 겁니다. 이 뿌리를 캐보는 거예요. 전부 다 로마의 파생아입니다. 로마의 오징어 다리다. 그러니 로마는 죽었다? 안 죽었다? 로마는 영원하다. 마지막 멸망할 때까지 로마는 계속 가는 거예요. 로마의 속성, 로마의 성격 그대로 가는 겁니다.

로마가 결국 다니엘 당시, 유대 당시, 예수님 당시에, 이게 참 어려워요.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모델로 삼기 때문에 예수님 당시에 최고의 나라는 뭐냐, 로마입니다. 로마가 예수님한테 끝 이예요. 그 로마의 속성과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유대인의 왕 예수님과 이 세상의 왕 로마와 최후의 전쟁, 충돌로서 모든 시나리오가 짜여 지게 되는 겁니다. 그 뒤의 나라 백날 해봐야 로마에 한 통속이니까.

예수님이 참된 인간이냐, 로마가 참된 인간이냐, 이 말입니다. 그러나 로마는 그 배후에 짐승이 조정 하고 있고, 예수님도 본디오 빌라도에게 살해당했잖아요. 빌라도가 재판할 때 예수님한테 뭐라 했습니까? ‘니가 왕이라면서? 그런데 니가 왕인데 니 백성은 어디 있느냐?’ 그러니까 예수님이 답변하기를 ‘하늘에 있다. 너는 땅의 왕이고, 나는 하늘의 왕이다. 한번 붙어볼까? 지금도 허락하면 천군 천사가 와서 나를 구원할 수 있다. 그런데 진정 너를,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너희들에게 심판당해야 된다. 심판 당했던 것을 근거로 해서 너희들을 심판할 거야. 조금만 기다려줘. 너희들이 나를 1차 심판하고, 심판했다는 그걸 근거로 해서 너희들을 내가 심판해 줄게.’

그러니까 유대나라는 의도적으로 누구에 복속돼야 되고 누구에 종속돼야 됩니까? 로마라는 최후의 바벨론에 항상 종속되어서 유대 나라는 어떤 의미에서 빠지고 진짜 배후에 있는 짐승의 나라와 마지막 일전을 벌이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로마가 짐승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해도 우리가 실감나지 않죠. 그걸 이제부터 설명해서 실감나게 해드리겠습니다. 될지 안 될지 모르겠지만….

로마에서 파생된 나라를, 이걸 꼭 알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독일은 Alamanni라는 족속이고, 포르투칼은 Suevi, 영국은 Anglo-Saxons, 스페인은 서고트, 프랑스는  Franks, 프랑크 왕족, 나중에 로마 이후에 신성 로마의 후예들이예요. 스위스 Burguridoar,  북 아프리카 반달족 Vandals, 그 다음에 이태리 3개 있죠. 그 다음에 이태리 3개가 있는데 또 하나는 롬 바르트 Lombards, 동고트,  또 마지막으로 헤롤라이 Herali,

여기서 3가지 족속이 망합니다. 뭐가 망하느냐 하면 동고트(538), 헤롤라이(493), 반달(534)이 망합니다. 이 나라가 없어져요. 지금 제가 한 이것은 중요한 게 아닌데 뭐가 중요하냐 하면 3개의 뿔이 드디어 멸망을 할 때 어떻게 멸망 하는가 중요합니다. 여기 8절에 봅시다. “내가 그 뿔을 보는 중 다른 작은 뿔이 그 사이에서 나더니 먼저 뿔 중에 셋이 그 앞에 뿌리까지 뽑혔으며” 뿌리까지 뽑혔다는 것은 종족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지, 뿌리까지 뽑으니까, 콩나물을 몽땅 뽑듯이 뽑히는 거예요. “그 작은 뿔에는 사람의 눈 같은 눈이 있고 또 입이 있어 큰 말을 하였느니라” 이게 뭐냐 하는 겁니다. 어떻게 열 가지 종족 가운데서 어떻게 3개가 이렇게 뽑히는 것이 다니엘의 계시 가운데 이렇게 미리 예언이 돼 있느냐 하는 겁니다. 375년에 훈족이라 해서 헝가리 쪽에서 온 와서 게르만족이 놀래서 겨울에 라인강인가 물이 얼은 것을 틈타서 밑으로 내려와서 이쪽이 치니까 아래쪽을 치게 된 거예요.

 훈족이 375년에 내려와서 395년에 드디어 동서로 게르만족이 분리됩니다. 그 게르만족의 한 족이 뭐냐 프랑크 족 이예요. 복잡해요. 그래서 395년부터 1453년 나중에 아랍의 투르크족한테 멸망하기 까지 동로마 제국이 되고 395년-476년까지 서로마 제국이 완전히 망하는데, 서로마 제국이 망하는 게 아니고 이게 뭐로 바뀌느냐 하면 프랑크 왕국으로 전환됩니다. 전환되면서 여기에 중요한 이 세 민족이 뽑히는데 그 민족이 뽑힐 때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바로 교황입니다. 교황!

이런 것을 이렇게 표현하겠죠. 종교가 국가의 형태를 띠고 국가처럼 그렇게 행세한 거예요. 그냥 국가 중에 하나가 아니고 여러 국가 중에 하나, 종교가 아니고 국가 위에 국가, 국가의 정신적인 지주, 그것이 바로 천주교예요. 천주교가 민족의 10개 가운데 3개를 없애버렸습니다. 전부 다 흩어버렸어요. 조건이 있어요. 종교를 카톨릭으로 바꾸는 조건하에 민족 3개를 없애서 각 민족 중에 흩어버렸어요. 이제는 민족이 날아가 버립니다. 그러면 나머지 7개는 뭡니까? 자기 민족성을 갖고 있어요. 서고트 같은 경우에 얼마 안 가서 아라비아한테 망합니다.

종교라는 것이 교황이 어떻게 그렇게 하겠는가,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이렇습니다. 피핀라는 프랑크의 왕이 있는데 여기 독일 Alamanni라는 독일 종족이 로마 이태리를 공격 했을 때 교황이 프랑크 왕(피핀)한테 ‘살려주세요’ 했어요. 그 피피 왕이 계산을 해보더니만 교황을 살려주고 독일 Alamanni의 점령지를 영원히 교황 땅으로 만들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지금의 바티칸 이예요. 그렇게 해주고 조건이 앞으로 유럽 전체 제국의 왕은 한 사람을 딱 줬어요. 두 사람도 안 되고 한 사람, 그게 뭐냐, 피핀의 자식들만 왕이 되는 조건하에 그렇게 된 겁니다. 물론 그 왕이 되면 왕이 황제가 왕을 임명하게 되면 왕은 정치적으로 장악했고 정신적으로는 전체를 카톨릭으로 장악하는 협상체계로서 그렇게 장악된 거예요. 정신이든 육체든 전부 다 하나의 거대한 제국을 이룬 겁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제국을 이뤘다는 말은 거기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태어난 출생 자체가 그 나라의 종교며 출생 자체가 그 나라에 복종하는 그러한 것을 양육 받으면서 살아오고 있는 겁니다.

나중에 프랑크 왕국이 이렇게 갈라지고 죽죽 나눠지고 하지만 어쨌든 간에 처음의 취지는 그런 취지로서 된 겁니다. 자, 여기서 그 교황 이름이 자카리아스라는 교황인데 그것까지는 알 필요 없지만 그 교황이 처음으로 롬바르디아 공격에 대해서 해방자로서 세속의 왕이 등장했고 교황은 정신적인 왕으로서 이렇게 마중을 나온 거죠. 그러니까 바티칸 나라가 구체적으로 된 것은 최근 현대에 들어와서 그랬지만 이미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는 근거는 이때 741년 쯤 돼요. 바티칸은 최근에는 이태리 독립 전쟁에서 그때 규격 됐지만 그전에는 그런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영토권이 있었던 거죠.

이렇게 되게 되면 한번 생각해 봅시다. 성경에서 이렇게 어렵게 이야기하지 말고 그냥 몇 년도에 이태리가 멸망하고 이렇게 하면 우리가 참 쉬울 게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게 복음이 아니에요. 로마의 열 뿔이 이런 나라고, 헬라 나라의 4명의 장군이 누구누구입니다. 라고 해버리면 이건 지식으로 알면 천당 가는 수가 돼 버려요. 이건 복음이 아니라. 이것을 알려줘서 사람들 꼬시는 그런 단체들이 이단 단체들이 등장하는 거예요. ‘세상 역사의 비밀을 모르지? 내가 풀어줄게.’ 이래서 사람들을 꼬셔서 그거 안다고 구원받았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왜 이렇게 우리가 납득이 되고 쉽게 되는 이것을 왜 다니엘에게 어렵게 짐승이란 표현을 해서 우리가 집에서 키우는 가축과 구분도 안 되게 만드느냐 이 말이죠. 이것은 이것을 해석하고자 하는 인간 자체가 이미 짐승이 되었다 이 말 이예요. 짐승은 짐승을 해석할 수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아무리 이것이 어떤 의미라 할지라도 그 해석으로서 그 사람이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거기에 어떤 의미가 담겨야 돼요. 복음적 의미, 다니엘적인 안목이 담겨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짐승 이야기한 것은 축구의 전반전이고, 후반전이 있어요. 그게 바로 9절에 나옵니다. “내가 보았는데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이가 좌정하셨는데” 이게 인자입니다. 영원히 함께 계심이라. 그러니까 이 땅은 마지막 때에 땅의 주도권을 두고 2개의 실체가 결국은 충돌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현재 이 세상에 유엔에 가입한 나라가 2백 개가 넘는다 하는데 2백 개 나라의 왕이 누굽니까 물으면 각 나라마다 화를 내요. 왜, 각 나라마다 대통령이 있고 왕이 있지만 2백 개를 통활 해서 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라는 것이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오늘날의 현대적인 현대 역사 주체가 그겁니다. 그럼 이렇게 물어야 돼요.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이 누굽니까? 이렇게 물으면 예수님 빼놓고 다 반대하죠.

다니엘 자체가 호칭이 뭡니까? 인자 아닙니까? 이미 인자의 에이전트, 인자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왔다는 말은 이건 이렇게 짐승을 보는 안목은 누구만 볼 수 있는 안목이냐 하면 이들을 심판하기 위한 바다에서 올라왔다고 이야기하고, 짐승이라고 이야기하고 짐승이 인간행세하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그것은 오직 장차 오실 예수님의 안목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준 겁니다.

이걸 저는 이렇게 하거든요. 깜깜한 집구석에 문이 있다 이 말 이예요.  지금 깜깜해요. 온 천지가 다 깜깜한데 갑자기 출입구에 틈에서 갑자기 전등 불빛이 보이더라 말이죠. 그럼 바깥에서 누가 전등 불빛을 물을 열려고 비추고 있다는 증거잖아요. 이게 바로 다니엘이에요. 바깥에 누가 비추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전등을 비추고 있는 거예요. 문을 열면 등장하는 거예요. 깜깜한 어두운데서 밑바닥에서 빛이 나오듯이, 지금 요 부분을 보면서 이 전등불이 있음으로서 이 바깥은 짐승이 지배하는 세계로서 전환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전등 불빛을 안 갖고 있다 보니까 짐승과 같이 어둠에 있어요. 어둠에 있으니까 뭔가 불빛이 ‘이쪽은 짐승이니라’ 할 때 우리는 납득이 안 돼요. 납득이. 왜 우리나라 임금님이 짐승이냐 이 말이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 말이죠. 그럼 우리는 짐승 찍으려고 투표했느냐 이 말이죠. 박ㅇㅇ는 짐승이냐, 문ㅇㅇ은 짐승이냐, 안ㅇㅇ는 도망간 짐승이냐, 그거 하려고 찍었어요? 이 그림자가 비칠 때 이 바깥은 묵시세계고 이 안은 역사세계거든요. 역사세계에서 이쪽에서는 1,2,3,4,5,6,7,8,9.10이라는 1년, 2년, 3년, 1년으로 끊는 그런 식의 시간개념이나, 여기서는 70이레라는 이레가 등장해요.

이 이레라는 것은 아까 처음에 집사님이 질문했는데 이레라는 것은 7을 하나의 묶음으로 간주하는 계산법 이예요. 왜 6으로 묶지 않고 9로 묶지 않고 7로 묶습니까? 그것은 이 논문에 나와요. 그것은 최초의 창조 규칙을 나는 포기 안했다는 뜻 이예요. 자, 창조된 대로 인간이 맞는가 보자, 심판해봐, 하고 소매를 걷어붙이는 그 모습이 이쪽의 인간들은 올해는 2012, 내년에는 2013년, 이러는데 그 딴 식의 계산법은 너희들에게나 통하지, 그런 계산법은 짐승한테나 배워라, 나는 그런 계산법 안 한다. 나는 지금이 어느 이레에 속하느냐, 그 계산법이다.

이 문 틈으로 예수님이 손전등으로 비췄던 이 그림자, 70이레라는 그림자를 이것을 분석을 해보니 이게 우리처럼 시간이 끊어지는 시간이 아니고 이게 하나의 질적으로 다른 시간이 같이 흘러요. 1이레 층이 있고, 62이레 층이 있고 7이레 층이 나란히 같이 가고 있습니다. 층이 같이 가서 이게 그냥 7년 묶음도 되지만 층의 묶음도 나란히 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이 모든 것이 나란히 가게 되면 마지막은 뭐냐 이게 시간이니까 끝에도 시간이겠지 생각하는 거예요. 이건 잘못이고, 시간이 아닙니다. 이건 하나의 인물(人物)이예요. 시간이 인물에 흡수돼요. 모든 시간은 하나의 인물에서 쏟아져 나온 거예요. 제가 말하는 게 진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시간이 인물에서 쏟아져 나오는데 시간이 인물에서 쏟아져 나오는 그거나, 임금들이 하나의 짐승에서 나오는 그거나 둘 다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돼 버렸어요.

숨어있는 인물을 위해서 역사나 묵시가 서로의 시간을 계속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이 다니엘을 덮어버리고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세상에는 이런 관점이 없고 지나 개나 2012, 며칠 지나면 2013년, 그리고 이게 질서정연한 조금도 이음새가 끊어지지 않는 이렇게 시간의 도약이 없는 그저 어제 태양이나 오늘 태양이나 마찬가지죠. 갑자기 해가 조그맣다가 크게 되지는 않잖아요. 오늘 그 해가 내일되면 그 해가 뜨잖아요. 변함이 없는 거예요. 동일한 하나의 역사 속에 전부 다 이거는 흠 없이 매끈한 CD같이 깨끗하게 시간은 흘러가고 있습니다.

거기에 깨끗한 벽지에다 점을 어떻게 찍느냐 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죠. 2012년 12월 19일 대선, 점찍는 거예요. 하지만 그 점을 찍는 순간 그거는 과거입니다. 과거기 때문에 지금 중요한 것은 오지 않은 미래도 중요하지 않고, 지나간 과거도 중요하지 않고, 지금 중요한 것은 오늘 박ㅇㅇ짐승은 또 뭐하고 있나가 중요한 거예요. 작년에는 내가 나이 50이고 올해는 51이고, 내년에는 52가 되겠지. 50이나 52이나 중요하지 않고 지금 내가 몇 살이냐가 중요하다. 항상 결국은 시간에 보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의 인물, 그 인물은 바로 이 시간은 내가 쏟아내는 시간의식에 불과한 것이 역사 속에 지나는 시간의식 이예요. 사람마다 다 다르지만 사람마다 다르듯이 사람마다 역사가 다르지만 공통된 점은 전부 다 각자, 각자 시간을 쏟아내고 있다는 겁니다.

광주사태라는 것이 전라도 사람과 강원도 사람과 경상도 사람이 의미가 다 달라요. 거기서 희생된 사람과 거기서 방관하는 사람과 지금도 전ㅇㅇ대통령 된 그 사람, 26년 된 그 사람, 전ㅇㅇ대통령의 조카가 생각하는 광주사태는 달라요. 지금 전ㅇㅇ대통령이 생각하는 광주사태라 하는 그것은 폭도들이고 빨갱이 사상 비슷한 사람들이고 김대중이 똘마니들이고. 그런 정치꾼들이 그런 사람 이예요.

사람마다 왜 그럼 다른가, 그건 자기 인물로부터 쏟아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역사도 할배요, 하고 엎드리는 분이 와요. 그는 누구냐, 모든 대중의 역사를 추월하는 더 위대한 역사, 그는 바로 대통령의 역사, 또는 왕의 역사, 바로 짐승의 역사, 그 짐승의 역사에 우리는 새끼 역사는 역사 취급도 안 됩니다.

하나 예를 들면 지금 안양의 인덕원에서 지금 병든 어떤 할머니가 있다. 박ㅇㅇ대통령이 됐으니까 내년에는 최저 생계비를 얼마나 더 쳐줄 것인가, 이게 문제거든요. 그걸 왜 본인의 생계비 같으면 84세 살 때까지 본인이 생각 안하고 왜 자꾸 얻어먹을 생각을 하느냐, 왕이거든요. 박ㅇㅇ는 여왕이잖아요.

인간의 모든 행동은 스스로 결정 것이 아니고 핼프미, 살려주세요. 누굴 향하여? 자기보다 더 센 역사를 갖고 있는 더 안정된 역사를 갖고 있는 자에게 살려주세요,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느 짐승의 통치에는 허점이 없고 빠진 점이 없어요. 전부 다 꽉꽉 짐승으로 차 있습니다. 영국이면 영국, 독일이면 독일, 이태리면 이태리, 그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교황 이예요. 교황이 빈틈없이 모든 면에서 꽉꽉 채워주는 거예요. 성당 와서 영세 받으시면 오늘 죽어도 어디 간다? 천국 간다. 얼~마나 이것이 율법적이고 확실한 겁니까? 눈에 신부가 보이잖아요. 신부한테 고해성사 받으면 어떤 죄를 지어도 삐딱하게 앉아서 ‘뭐 때문에 오셨습니까?’ 해서 몇 마디 처방전 때려주면 죄가 용서되거든요. 성경에 어디 있느냐, 너희들의 죄를 사하면 하늘에서도 사할 것이요, 너희가 풀면 풀리리라. 그 본문 가지고 그렇게 하는 거예요. 앞으로 개신교도 할 거예요. 손님도 오지도 않는데 뭐.

뭔가 내 죄는 나보다 우월한 짐승에게 부탁하는 거예요. 왜 나는 새끼 짐승이니까. 짐승은 짐승을 원하는 거예요. 육은 육을 원하듯이, 내가 납득이 되고 내가 눈에 볼 수 있고 실적이 있도록 하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은 뭐라 했습니까?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 제가 아까 했죠? 묵시적인 안목, 이건 의도적으로 보는 것을 미리 일부러 치워버리는 거예요.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에 보는 것을 의도적으로 믿음이 아니라고 치워버릴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라 이 말입니다.

기도해서 병 낫다. ‘미쳤어, 내가 왜 병이 나, 이건 말이 안 돼, 분명히 마귀 역사야.‘ 이렇게 치워버리라 말이죠. 내가 기도했더니 애가 성적이 올랐다. ’미쳤어, 미쳤어, 그럴 리가 없는데 마귀의 조작이야. 애 그 성적 가지고는 완전히 따라지 가야해.‘ 이렇게 돼야 돼요.

어떤 실적과 복을 주의 축복이라고 간주하고자 하는 그 품성을 누구한테 받았다? 이미 그걸 누가 노리고 있다? 악마가 그걸 노리고 있는 거예요. 세상 적으로서는 세상 왕이 그걸 갖고 있고, 영적인 적그리스도는 우리 맘까지 그걸 장악하고 있다고요. 네가 하는 모든 기도는 너를 위해서 찬란한 너의 역사를 악마 너희 고유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너의 역사에서 누가 영광을 받습니까? 나란 인물이 영광을 받죠. 왜, 내 역사니까. 내 역사 잘해서 남에게 죽 쒀서 개줄 일 있습니까? 내가 잘해서 내 역사 이루는 거예요. 그래서 손주들 불러놓고 ‘이봐라, 할아버지가 옛날에 이렇게 잘 나갔다.’ 그렇게 자랑할 수가 있는 거예요. 신ㅇㅇ 한번 보세요. 나이 70넘어서 뭐라 합니까? ‘내가 옛날에 사랑한 여자가 있었다.’ 얼마나 자랑스러워요. 맨발의 청춘, 영원한 청춘.

아무리 내가 실수를 하고 잘못을 해도 내 역사를 내가 안 끌어안아주면 누가 사랑해주느냐, 못난 과거라도 내가 다독거려주고 내가 아름답게 치장 안 하면 누가 내 역사를 누가 사랑해 줄 수 있느냐, 긴 개코 원숭이 꼬리처럼. 긴~ 꼬리처럼 못난 꼬리라고 질질 끌고 가는 거예요. 잘 나고 못 나고 전부 다 나의 역사의 재료들이니까.

그러니까 다시 해봅시다. 시간이라 하는 것은 뭐 한다고요? 인물에서 나오죠. 그럼 묵시는 어디서 나옵니까? 역시 한 인물에서 나오죠. 그러니까 여기서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뭐냐 하면 주님 인물 앞에 ‘나는 짐승이었습니다. 어둠에 속한 짐승이었습니다.’ 고백하는 거예요. ‘나는 원래 하나님이 만든 그 인간이 아닙니다. 뱀에 묶인 인간입니다. 뱀이 시키는대로 할 뿐이고 우리는 우리 힘으로 그 먹구름을 훅 분다고 먹구름이 뚫리고 그런 것 없습니다. 뭔가 주님께서 오셔서 눈에다 진흙을 바르고 실로암 물에 뭘 하든 간에 주께서 하시는 그 작업만이 우리로 하여금 먹구름을 뚫고 주의 묵시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겁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사도바울이 율법을 지켰잖아요. 흠이 없죠. 잘 나갔습니다. 그런데 언제 사울이란 사람이 묵시의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까? 누가 찾아왔습니까? 주님이 찾아오니까 된 거예요. 그래서 주님이 찾아오는 그 체험의 말씀이 될 때 그때 비로소 말씀이 체험 있는 말씀이 되는 거예요. ‘아! 짐승 맞구나. 이 세상 돌아가는 것이 따지고 보니까 여기는 짐승, 짐승으로 돼 있지만 사실 세상에서는 뭐냐, 종교, 교회, 역사적 관점, 경제적 관점, 종교적 관점, 예술적 관점, 주로 그런 관점이다 말이죠. 그런 관점을 우리 힘으로 끌어 모을 수가 없어요. 왜 우리는 인자가 아니니까. ’아, 저 사람은 예술가네. 예술가라 밥 먹고 살고, 나는 목사라 먹고 살고, 각자 먹고 살면 아무 일 없네. 너도 음악 한다. 아이쿠, 훌륭한 음악 하는 사람. 백 ㅇㅇ처럼 피아노 친다. 대단한 사람, 차 범근이 처럼 축구한다. 이 대호처럼 야구한다. 그 나름대로 훌륭한 사람. 이 모든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 돼요. 여기 짐승이 어디 있습니까? 짐승은 성폭행하는 그놈만 짐승이지 나머지는 짐승이 아닌 게 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딱 떴습니다. 드디어 9절에 “내가 보았는데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이가 좌정하셨는데 그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 보좌는 불꽃이요 그 바퀴는 붙는 불이며” 여기에 계셨던 그분이 지상에 내려오게 되면 그것은 무슨 분위기를 안고 오느냐 하면 바로 보좌에 앉으신 그 분위기, 그 무게감을 가지고 그대로 이 땅에 오잖아요. 오게 되면 비로소 짐승이 드디어 발작을 시작합니다. 마귀가 먼저 알아봐요. ‘예수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주님께서 전도하니까 귀신이 나와서 하는 말이 ‘나는 당신 알지요. 당신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 입 다물라.’ ‘나 입 안 다물지, 다 광고할 거야.’ ‘그 입 다물라. 쉿, 함부로 말하지 마. 입 놀리지 마. 내가 허락할 때까지.’ 제자들이 저게 둘 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몰라요.

사울이란 사람이 보통 우리하고 똑같은 사람 이예요. 성질 똑같고 하루 세 끼 먹고 안질이 안 좋다는 것이고 나머지는 똑같은 사람인데 그 사람이 예수님 만났으면 우리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 인간도 예수님 만났으면 우리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 만나고 난 뒤에 아는 것은 뭐냐 나는 죄인 중에 괴수고 십자가를 알게 된 거예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성령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이 진짜 감춰 놓은 것은 성령이 아니면 그걸 알 수가 없게 돼 있어요.

그게 뭐냐, 진짜 감춰놓은 게 뭘까요. 십자가! 그게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가 공개되고 천기가 누설되는 순간 우리는 짐승에게 예속된 존재라는 것이 밝혀지고, 십자가가 안 밝혀지면 우리는 당당한 인간이며 사람이며 우리는 정상이며 세상 모든 역사는 정상적으로 흘러가는 걸로 돼 있어요. 심판도 없을뿐더러 종말도 없을뿐더러 예수의 이야기는 과거의 한때의 에피소드로 끝나버리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예수 믿는다는 것은 그런 안목에서 보면 우리 인간이 정상적인 인간이라 보면 예수 믿는 것은 그건 하나의 취미고 오락인데 너무 빠지지는 말아라. 이렇게 되죠. 교회에서 놀고 설악산 놀러가고 노는 건 좋은데 낚시 하는 것도 좋은데 그래서 정수기 팔고 보험 판매하는 것은 좋은데, 그 예수라는 거, 하나님이라는 거, 있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그것한테는 제발 빠지지 마라.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은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이지, 예수님하고는 무관한 것이다. 그걸 잘 실천해 가는 교회가 오늘날 교회입니다. 아주 말은 안하지만 서로 통하는 게 있어요. 그래서 교회에서는 예수님 복음 이야기 안 하기, 짐승 이야기 안 하기.

다시 해봅시다. 시간이라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시간이 있지만 내가 측정하는 내 중심으로 보는 시간 이예요.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 그건 내 중심으로 보는 사건 이예요. 저 사건도 내가 좋아서 끝나버렸다. 항상 자기에게로 돌아오는 시간. 이 시간을 코로노스, 부산강의 할 때 했어요. 나한테 연대기. 나한테 중요한 사건, 남들은 관계없어요. 그리고 거기서 어떤 시간의 의미를 주는 것은 카이로스, 이걸 우리말로 하면 때, 이것은 신약성경에 이렇게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시간이 온 게 아니고 때가 왔다. 내 때가 되었느니라. 내 때가 되지 않았다.

이 주님의 시간이 인간의 자기중심의 시간을 완전히 묵사발 만들어 버립니다. 묵사발 만들면서 인자가 주는 시간은 무슨 스케줄이냐 70이레에 맞추어서 시간이 드디어 개시가 됩니다. 70이레는 9장에 나오죠? 9장에 나오는데 그때는 자세히 하고 어쨌든 간에 예수님의 이레는 70이레에 맞춰서 하는 겁니다.

그럼 70이레라 하는 것은 아까 언급했지만 또 잊어버렸을 테니까 다시 하면 70이레라 하는 것은 어디에 집중된다? 70이레라 하는 것은 어떤 시간이라고 말 못하고 70이레라 하는 것은 뭘 보여준다? 예수라는 인물, 예수님의 행하심이예요. 예수님이 태어났다가 어디서 행했다가 어떻게 십자가 죽었다가 부활한 그것이 모여지면 그것이 뭐가 된다? 70이레의 3가지 단절된 층이 그 안에 하나의 단절된 것이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해서 스펙트럼처럼 구분해서 보여 지는 겁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시간이 그런 식으로 흡수한다는 말은 평소의 우리의 시간도 바로 나의 역사를 찬란히 빛내기 위해서 우리는 세상의 모든 역사들을 그런 식으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들의 그런 시간보다 우리가 양보할 수밖에 없는 더 센 역사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더 센 역사 앞에 우리는 살기 위해서 때로는 우리 가족을 살리고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 가족을 살리기 위해서, 또는 내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서, 내 역사를 아낌없이 큰 역사 속에 집어넣어 버려요. 대표적인 사람이 안 중 근, 그리고 조선시대 때나 이런 때는 하나의 가문의 역사를 위해서 청상과부가 결혼도 안 하고 행여나 가문을 더럽히면 단도, 하얀 은장도 가지고 자기의 허벅지를 찌르면서 이겨야 하느니라, 이겨야 하느니라, 이러면 열녀문 하나 세워주고, 그렇게 해서 가문의 역사에서 자기의 역사를 과감하게 포기하는 겁니다. 또 교회를 보면 주 기 철, 이런 사람들, 기록된 역사를 위해서 자기 한 몸 논개처럼 바치리라. 몸 바쳐서 몸 바쳐서. 손 양원, 주 기철, 이런 사람들. 그게 전부 다 짐승들이 그런 짓으로 대중들을 속박했고 지배한 겁니다.

이제 강의를 마무리하면서 더 중요한 사실을 먼저 당겨서 이야기합니다. 그 짐승들의 습성을 고스란히 다 받은 나라가 있어요. 그게 뭐냐 짐승이 배태한 진짜 유사나라가 있어요. 짐승이 아닌 것 같지만 극단의 최고의 짐승의 나라, 그게 예수님을 죽였던 유대나라예요. 로마 안에 유대나라에서 메시아는 탄생했습니다. 별의 호위를 받아 가면서 동방박사가 쫓아와서 선물을 주면서 유대나라에 별이 떴어요. 드디어 그 가까이 있는 유대나라에서 헤롯은 악마의 지시를 받고 누굴 죽여야 돼요? 베들레헴에 태어났던 2살 아래의 애들을 죽이는 작업을 하고 동방박사도 살려둬서는 안 되겠죠. 그러니까 여기 동방박사가 살게 된 것은 누가 개입했습니까? 예수님의 가족과 아기예수와 동방박사도 다 죽여야 되는데, 여기에 누가 개입했습니까? 천사가 개입했죠. 드디어 역사에서 인간은 그냥 손을 다 떼고, 악마냐, 주님의 지시를 받는 천사냐, 이 두 개의 싸움이 요한계시록의 주제로서 흘러온 겁니다.

요한계시록 모든 주체가 인간은 손을 떼야 돼요. 왜 인간은 손을 뗄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이 해석하게 되면 누구의 역사가 가미됩니까? 바로 나의 역사가 가미가 되고, 나의 공동체 역사가 가미되고, 나의 교회 역사, 우리나라 역사, 박ㅇㅇ 역사가 가미돼서 해석이 전혀 안 돼요. 요한계시록은 우리 인간의 역사를 개입하면 안 되는데 ‘내가 어떻게 해서 구원받아 볼까?’ 자기 역사를 살리기 위해서 개입해버리면 요한계시록 전부가 안 돼요.

예수님이 이미 이뤘던 그 역사에 대해서 악바리처럼 인간들이 거기서 어떻게 대항하는가, 그 대항하는 몸짓들이 계시적이고 묵시적인 다니엘의 꿈적인 용어들을 사용해서 그렇게 했고, 다니엘, 에스겔, 스가랴에 나오는 그걸 가지고 죽 쓴 거예요. 그런 용어들을 우리가 했기 때문에 아시지만 묵시와 역사의 충돌 속에서 예수님의 피의 가치만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그런 의미가 있는 겁니다.

11절에 보면 방금 이야기가 나오죠. “그 때에 내가 그 큰 말하는 작은 뿔의 목소리로 인하여 주목하여 보는 사이에 짐승이 죽임을 당하고 그 시체가 상한바 되어 붙는 불에 던진바 되었으며” 과거죠? 야, 오늘 첫 번째 강의 한 거 다시 한 번 해보겠습니다. 투표를 내가 하고 난 뒤에 누가 된 걸 보고 그 사람 위해서 내가 확인하고 난 뒤에 내가 투표하겠습니다. 말이 안 되죠. 그 말이 안 되는 이야기가 다니엘 7장에 나온다니까요.

이미 그 짐승들은 이미 유황불에, 지옥 불에 이미 들어간 걸로 나와 있잖아요? 이미 박ㅇㅇ는 당첨된 걸로 나와 있다고요. 그런데 개표 전까지는 내 투표가 박ㅇㅇ가 될지, 문ㅇㅇ가 될지, 모른 상태에서 투표하는데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게 합니까? 이번에 박ㅇㅇ 될 줄 알고 문ㅇㅇ 떨어질 줄 알고 우리로 하여금 문ㅇㅇ한테 찍게 만들었고, 또 누구는 박ㅇㅇ한테 찍게 만들었잖아요. 우리가 투표하기 전에 먼저 박ㅇㅇ 당첨, 이 이야기를 먼저 해버리는 거예요. 그러니 사람들이 이걸 믿겠어요? 안 믿겠어요? 안 믿죠. 왜 안 믿느냐, 나의 역사는 아직 미래니까. 사람의 모든 것은 자기의 선택이 자존심과 나의 권위를 해치는 것은 어떤 것도 믿지 않습니다. 왜, 내가 행동한 결과만 믿으니까.

그런데 성경은 뭡니까? 내 행동이 개입하지 못한 주님의 행동이 개입해서 얻어진 결과만 턱 내미니까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선택이 의미가 없는 게 돼 버려요. 사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도 주님의 하신 일을 취소할 수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어떤 나쁜 짓을 해도 우리는 지옥 갈 수 없습니다.

제가 지난주일 날 오후에 설교하면서 제가 은혜 받은 게 뭐냐, 사람을 죽여도 우리는 지옥 갈 수 없다고 했어요. 사람 죽인 거 가지고 지옥 못 갑니다. 사람 두 명 죽였다고, 인디언 1, 인디언 2, 투 리틀, 인디언 100명 죽여도 지옥을 못 가요. 지옥은 우리가 가는 곳이 아닙니다. 가만히 있으면 뽑혀서 지옥 가고 가만히 있으면 뽑혀서 천당 가는 거예요. 우리가 행동 때문에, 행동이 나를, 행동이 나의 위치를 옮겨주는 수준이 우리는 그런 입장이 못 돼요. 왜, 역사적 존재고, 우리를 구원하는 힘은 예수님의 피, 묵시적 차원에서 노시는 분의 피가 역사적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결과에 예속돼 있는 존재를 그 결과의 예속에 매달리게 연결시키는, 이렇게 기관차, 열차가 연결하듯이 연결시키는 예수님한테 연결되면 천당이고, 연결 안 되면 지옥이고 그런 겁니다.

복음!! 아~주 간단해요. 굉장히 간단한 거예요. 하나님이 미리 아시는 그거로 우리의 선택이나 결심이전에 먼저 연결시켜 놓고 그 다음에 우리의 행동의 어설픔과 주님의 완벽성을 비교해가면서 ‘네 행동은 결국 네 운명을 결정하는 바가 아니었다.’는 것을 통보하는 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주님만 쳐다보게 만드는 거예요. 이게 복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투표하고 있습니다. 혹시 나의 투표가 나로 하여금 나의 시간, 나의 역사를 좋게 만들까 싶어서 좀 그러고 싶어서 그게 아직도 그래서 우리는 나보다 더 힘센 사람을 기대고 싶고, 나는 예수보다 돈 많은 사람이 더 좋고, 나는 예수보다 나 사랑해주는 사람이 좋고 심지어 나 못 난 것까지 다 용서해 줄 그런 가족이 그립고, 가족 역사, 나의 역사, 그리고 남의 나라보다 우리나라가 좋고, 우리 역사의 나라, 일본한테 축구지면 기분 나쁘고, 이기면 기분 좋고, 내가 문ㅇㅇ 찍었는데 문ㅇㅇ 떨어지면 기분 나쁘고 내가 문ㅇㅇ 찍었는데 당첨되면 내가 왠지 기분 좋고, 뭔가 우리가 편성하고 우리가 짜는 내 자존심, 내 선택의 가치를 높이는 쪽으로 우리는 이미 우리 육이 그렇게 보이지 않는 X한테 다루어지고 있다는 사실, 우리를 그냥 놔두면 우리는 구원 못 받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개입해서 질~질~질 끌고 가면서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것을 통보해주는 그러한 혜택, 축복이 바로 이것이 축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매일같이 주의 개입을 우리는 놓치고 있습니다. 내가 내 행동을 내가 앞에서 당기고 뒤에서 밀고 하는 식으로 지금까지 나의 역사가 아름답다고 자부했는데, 그것이 바로 짐승을 쳐다보는 일들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바라보게 해서 개입하셔서 개입된 십자가가 이미 다 이루었다.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셨다는 그 결정이 저희들의 행복과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