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서

다니엘서7강-손가락 계시121101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3. 6. 8. 15:38

 

2012-11-02 09:52:00 조회 : 428         
손가락 계시 121101 이름 : 이근호 (IP:117.55.14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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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교회-다니엘5장1절(손가락 계시)121101-7강a -이 근호 목사

제 7강a

오늘은 다니엘 5장부터 할 차례입니다. 제가 계속 다니엘을 해나가면서 다니엘 9장에 보면 70이레가 나오거든요. 70이레 나올 때는 제가 전에 썼던 논문 ‘다니엘 70이레에 대한 비역사적 해석’ 그것을 복사해 와서 하려고 하는데, 복사할 것 없죠? 책 있잖아요. 복음이냐, 교회냐, 책 뒤에 있으니까 그걸 중심적으로 할 예정입니다. 그 논문이 무척 어려워서 어떻게 성경을 해석하느냐, 그걸 할 예정입니다.

그래서 오늘 다니엘 5장을 하는데 다니엘 5장 내용은 5장 2절에 “벨사살 왕이 술을 마실 때”라고 돼 있죠? 그럼 느부갓네살 왕은 어디 갔죠? 느부갓네살 왕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 다음 왕이 나보니두스고 벨사살 왕이 BC562년에 죽고 나보니두스라는 왕이 있는데 이 사람은 마르둑 신을 믿어야 되는데 이 사람은 뭣에 빠졌느냐 하면 달의 신, 영어로 Sin, Sin이라는 신을 믿은 거예요. 이걸 믿으니까 백성들이 불교 신자인데 혼자 기독교 신자 되면 밉상 받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밉상 받아서 일종의 도피생활을 했어요.

그래서 대신 등장한 사람이 벨사살이란 사람이 등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게 끝 이예요. 느부갓네살 그 다음에 나보니두스 그 다음에 벨사살이라는 오늘 성경에 나오는 이 사람이 BC522년에 등장하고 BC 562년에 이 사람이 죽고 나보니두스는 BC 556~549년 이라고 하는데 정확하지 않아요.

이들이 죽고 난 뒤에 등장한 나라가 바벨론은 아니고 페르시아, 지금의 이란으로 보면 돼요. 페르시아 나오면 전부 다 이란 쪽 아닙니까? 페르시아만, 페르시아 그쪽에 보통 역사에서는 키루스라 돼 있는데, 성경에서는 고레스, 이 사람이 상당히 어진 왕 이예요. 그 당시 그들 나라에서도 그 당시에는 페르시아인데, 성경에서는 바사, 메디아는 메대, 메대 나라 따로 있고 바사 나라 따로 있는데 연합해서 바벨론을 조져버리고 고레스라는 바사 나라가 그 땅을 인수인계 받아서 이제 바사 시대가 시작되는 겁니다.

이 고레스 왕이 오게 되면 이 사람은 이사야에 예언된 대로 포로를 각 나라 종교 따라서  각기 고향으로 돌려보냅니다. 이스라엘만 돌려보낸 게 아니고 여러 민족들도 돌려보내는 그러한 왕이 등장하죠. 그 고레스 왕이 무슨 신을 섬겼느냐 하면 바로 마르둑 또는 마르두크라는 신을 섬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그 당시에 백성들이 섬기는 신을 왕이 같이 섬기지 아니하면 그 왕은 왕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추방됩니다.

그래서 항상 왕이 되었으면 백성들이 믿는 신에게 제사 드리고 신전에다 예배들 드려야 돼요. 그런데 일본의 신이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라는 태양신이 있어요. 그 태양신의 아들이 천황 이예요. 천황이라서 일본의 군국주의나 모든 것은 신도, 일본의 종교가 신도거든요. 신도의 최고 제사장이 천황입니다. 천황이기 때문에 일본에서 왕 제도가 없으면 안 돼요. 왜, 태양신과 관련돼 있기 때문에. 태양신이 숨어있는 것을 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라는 신이 불러내서 비로소 빛을 대지에 죽 펼치는 거예요. 일본 국기 보세요. 이렇게 태양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 일본 군국주의 국기에 뭐로 돼 있습니까? 태양이 온 천지에 넓게 퍼지는 이 국기라 말이죠. 그러니 이건 신도 제사장을 믿는 나라기 때문에 상징적 의미로서 천황이 없으면 일본 인, ‘나는 일본인이다. 일본인인 나는 누구지? 나는 일본인’ 라는 그것이 밑바탕이 날라 가 버려요. 역사와 전통이 다 깨져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옛날 고대국가라든지 현재 왕 제도가 있는 모든 곳에 항상 제일 염두 해 둘 것은 이거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이 상징화, 상징으로 돼 있다는 겁니다. 상징, 더 쉽게 이야기하면 문양, 모양, 디자인, 이미지. 이것은 인간은 눈에 보이는 현재 자기 육신과 혈육, 하여튼 눈에 보이는 것이 그게 전부예요. 그리고 보이는 것을 봤다는 그 경험 바깥으로 인간은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느끼고 본 것, 그 바깥으로 다른 세계가 없어요. 인간이 생각하는 세상이라는 것은 일종의 망상인데요. 세상이라는 것은 자기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 안에서만 세상을 규정하게 돼 있습니다.

마르둑 신, 마르둑 신을 믿기 때문에 태양신이나 달의 여신은 절대로 그 페르시아나 바벨론에서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 현대인이 보기는 ‘저 인간들, 신을 믿으면 돈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 저걸 왜 믿나?’ 하지만 그 사람들은 그걸 왜 믿느냐 하면, 그 신이 없으면 자기가 없어요. 신 앞에 설 때 비로소 나는 그 신에 복속된, 종속된 신의 백성, 우리 일신의 나라의 백성으로서 신의 축복을 받습니다.‘라고 할 때 나는 이런 인간입니다. 비로소 자기 자아정립이 되는 거예요.

목사 집안의 아들이 만약에 스님이 된다. 이건 부모로서는 단순히 직업 하나 갖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고 완전히 우리 집안사람이 아닌 거예요. 그래서 부모들이 자식 이름 질 때 보면 신앙적으로 지으려 하잖아요. 심지어 노래하는 밴드도 엄마가 지으면 믿음의 자녀들, 용감한 녀석들 이렇게 짓는 것이 아니고 믿음의 자녀들, ‘엄마 그러면 판 안 팔려요.’ 하니까 양보하고 그렇지, 엄마가 권사고 그럴 경우에는 이름을 그렇게 요란하게 져준다고요.

그게 뭐냐 하면 너는 항상 우리 집안의 정체성을 벗어나서는 내 자식이 아니다 하는 그런 게 있다 말이죠. 그런 상징, 그리고 옛날 유럽 쪽에서는 문양, 상징에서 단합이 돼요. 하나라는 결속을 느끼는 거죠.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유명한 말 했잖아요. 사람이라는 것은 혼자서는 사람이라고 이름을 부를 수가 없다는 거예요. 뭐냐, 사람이라 하는 것은 어느 사회에 속했느냐를 가지고 사람이냐, 아니냐. 어느 쪽 사람이냐 할 때 사람이 되지,  나 혼자 사람이다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에요. 그건 사람이 아니무니이다. 단독적으로 사람이라 하는 것은 이건 과학시대 갈릴레이 이후에 주체의식이 있을 때는 사람 혼자서도 사람이지만, 옛날에는 혼자서 사람은 아니에요.

‘저 어느 집안입니까?’ 이렇게 묻죠. ‘어느 집안이냐? 양반 집안이냐, 쌍놈 집안입니까?‘라고 묻잖아요. 어느 집안이냐고 묻지, 니 누구지?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니 누고?‘이렇게 묻는 것은 ’저 아무개입니다.‘라고 답변하라는 말이 아니고, ’저 경주이씨 산수공파 몇 대 몇 대‘ 이렇게 이야기하라는 거예요.

이렇게 보니까 성경에 나온 이 모든 것이 단순히 여기 벨사살 왕과 다니엘의 대결이 아니죠. 어느 집단과 집단의 대결이라는 거죠. 항상 그걸 염두에 두어야 돼요. 어느 집단과 어느 집단의 대결입니다. ‘아휴, 교회 가고 싶은데 우리 집안이 다 불교 집안이라서’ 이 말은 뭔 뜻 이예요? 나의 이미 정체성은 절대로 기독교 신자는 돼서는 안 된다는 그런 정체성을 갖고 있는데, 우리 생각에는 나 혼자 바꾸면 되는데, 나 혼자 바꾸는 것이 아니고 바로 우리 집안이 있는 겁니다.

결혼이 뭡니까? 젊은 애들은 사랑하는 사람끼리 한 집에 동거생활하면 결혼인데, 절대로 그런 게 아니라는 게 어른들의 생각입니다. 그 어른 중에 나도 포함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결혼이라 하는 것은 집안 대 집안의 만남입니다. 안 그런 분도 있죠. 안 그런 분도 있어서  그것 때문에 말썽이 나고 그래요. ‘지 좋아서 지가 결혼하는데 내가 뭐’ 이런 사람도 있긴 있어요. 있는데 그게 너무 쌍놈 같다 이 말이죠. 사회적인 통념에 너무 위반되잖아요. 그래서 어떤 분은 딸이 ‘아빠 남자친구 데려갈게.’ 하니까 아빠가 전화로 하는 말이 ‘데려오지 마. 우리 집안은 니가 그렇게 사귄다고 데려오는 게 아니고 사귀기 전에 아빠 이 남자하고 사귀어도 좋아? 나한테 물어야 그동안 내가 너를 키우고 우리 집안은 어떻게 흩어지지 않고 한 집안이라는 정체성이 있는데 니가 건방지게 그걸 무시하고 내가 좋아하는 남자친구다 하면 아버지로서는 그런 건 안 봐주겠다.’고 단호하게 거부한 사례도 있어요. 누구라고 말은 안 합니다. 광주에 김 집사님이라고 말은 안 하는데.ㅎ

이처럼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자꾸 오늘날 현대인의 사고방식으로 성경을 보시면 성경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아요. 그렇다면 이 벨사살은 뭐다? 왕이다 이 말이죠. 왕이라 하는 것은 그 국가의 정체성을 책임지고 제사를 드려야 될 제사장입니다. 항상 그걸 생각해 주세요. 왕이 하나의 어떤 몸짓, 왕의 어떤 행동, 생각, 이 모든 것은 개인의 취향에 따라서 움직이는 게 아닙니다. 백성들과 결속을 이루는데 왕이 어떻게 도울 수 있느냐를 고려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벨사살 왕이 뭐를 마셨다? 술잔이 어떤 술잔이냐? 바로 예루살렘에서 탈취해 온 술잔이고 그 술잔과 모든 기구, 제구들은, 제사 지낼 때 기구들은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쓰여 졌던 기구거든요.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뭐냐 하면, 누가 살아있다는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은 살아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동원된 기구들이었잖아요. 제사 지낼 때.

여기 초반부터 어려운 게 나오는데 할 수 없어요. 신이 있다. 안 보이잖아요? 신이 있는 걸 어떻게 압니까? 여기서 신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만 있을 뿐이죠. 실제로 ‘우리 신 여호와는 있다.’고 말을 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말은 누가 못합니까? 나도 하겠다. ‘집에 금송아지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다 말이죠. ‘신이 있다’고 누구나 할 수 있는데 니가 믿는 신이 진짜로 있는지 없는지를 어떻게 판정 내리느냐 말이죠.

옛날에 마르둑 신이 있다. 여러 가지 이스타록 신이 있다. 신이 있다 할 때 아까 일본의 신도,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신이 있는 걸 어떻게 아느냐 말이죠. 태양신 있는 걸 어떻게 알아요? 어떤 식으로? 있다고 이야기해줘야 그게 결속이 될 게 아닙니까? ‘있는 거 맞구나, 있는 거 맞구나, 맞아, 인간보다 신이 우선이야.’ 이러려면 추월적인 그 권위적인 힘에 의해서 연약한 우리 인간은 쪼그라들면 그걸로 전부 하나의 나라로 단단히 결속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가미가제라는 게 뭐냐 하면 바람입니다. 몽고가 올 때 우연히 태풍이 불어서, 지금은 기상청이 있어서 다 알지만, 그때는 없어서 몰랐으니까 바람이 불어서 몽고 군인이 일본을 못 죽이고 막강한 5만 명인가 엄청난 대군이 몰살했거든요. 그때 가미가제, 바람의 신이 우리 일본을 도와서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신이 그만큼 도와준 거예요.

그래서 지금 진짜 신이 있다, 없다, 를 뭐로 아느냐 하면 바로 왕이 잘 되는지, 왕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가지고 사람들은 주시하는 겁니다. 지금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그 당시 사람들 바보들 아니에요? 왕이나 내나 똑같은 인간인데 같은 인간이 신 있다 하는 걸 어떻게 믿습니까?’ 라고 하겠지만 왕이 ‘나는 인간이다.’ 하면 그 왕은 죽어요. 이건 어떤 지도자라는 것은 지도자 되겠다고 해서 지도자 되는 게 아니고 시켜줄 때 어쩔 수 없이 돼야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인간 사회의 아주 정말 신기한 일입니다.

집안에 아버지가 있잖아요. 아버지가 있어버리면 본인이 ‘아버지 안 할래’ 해도 그건 자식들은 그걸 용납 안 해요. 아버지는 반드시 아버지 값을 해야 돼요. 본인이 안 하겠다 해도 억지로라도 아버지 값을 해야 되고, 형수는 형수 값을 해야 되고, 그 포지션, 위치, 그런 값을 해줘야 돼요. 엄마는 ‘엄마 안 할래‘ 해도 엄마 값을 해야 되고, 나 이제부터 ’엄마 자식 안 할래’ 해도 자식으로 계속 봐주고 그게 있을 때 인간은 어떤 구조 속에서 자기를 재발견하는 식으로 자기 존재를 정립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버지가 아버지 값을 못하면 내가 어느 집안 자식이라는 내가 지금 깨지니까 아버지를 위해서 아버지 일 하는 게 아니고 나를 위해서 아버지는 아버지 자리에 가 계시라 이 말입니다. 아버지 노릇을 해 달라 이 말이죠. 딸이 결혼하는데 아빠는 헤어져 있을 때 딸이 헤어진 아빠한테 가서 ‘아빠, 비록 이혼해서 다른 여자하고 살지만 그날만 와서 아버지가 팔 끼고 가주소.’ 왜 그러는데? 그럴 때 내 결혼식이 빛나니까. 뒤에서 수군수군 안 하니까.

사람들은 누구나 다 요구하는데 그 요구는 그 사람을 위해서 요구하는 게 아니고 누굴 위해서? 나의 정체성, 내가 누군지 정체를 밝히기 내가 생각한 그 위치에 배치를 해 달라, 배당을 좀 해 달라. 안정되게 해달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에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신이 있을 때는 천황을 무조건 갖다 세워요. 이게 일본에서는 BC6세기부터 12세기까지 천황 제도가 있다가 BC34년부터는 소위 쇼군이라 해서 우리 말로하면 장군입니다. 사무라이 군인들이 정치하지만 교토에 있던 왕궁을 도쿄로 옮길 정도로 수모를 당하더라도 여전히 민중들 속에는 우리는 일본인이라면, 태양신의 후예라는 것은 이건 아무리 장군들이 설쳐도 항상 있어야 돼요. 그게 바로 태양신.

그래서 일본의 신은 우리가 인간사회 (이거 참 중요합니다.) 바깥에 옛날에 사람들이 살면 보통 넓은 농토가 될 만한 곳에 가잖아요. 그리고 바깥에는 뭐로 둘러싸여 있습니까? 산으로 둘러싸여 있죠. 인간사회는 신이 사는 세계와 분리된 우리들만의 세계일 때, 인간사회는 신과 더불어서 신은 신에게 대우하고 그 대신 신은 인간을 괴롭히지 말고 요렇게 해서 인간이라는 것은 자연과 더불어 사는 그 정체성이 정립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오늘날에는 신이 없다고 하지만 이 신을 아직도 왕이란 이름으로, 신과 경계선에 누가 있습니까? 왕이라는 것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왕을 섬기는 것이 아니고 누굴 섬기는 거예요? 신을 섬기는 거예요. 왜, 신은 안 보이니까. 그래서 어느 나라 왕은 항상 누구 아들입니까? 신의 아들 이예요.

문킬이라는 구약 학자는 시편에 나오는 모든 시편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던 가나안 종교인데 매년 1월이 되면 왕을 신의 아들이라고 제사지내는데서 비롯됐다는 거예요. 그러면 시편에 나오는 다윗의 아들은 뭐예요? 매년 제사 지낼 때, 성전에 올라갈 때 부르던 그 가나안 종교에서 본 따서 여호와 종교라고 따로 만든 이스라엘 민족의 자기 정체성을 위해서 신을 섬기면서 그때 불렀던 찬송가들이 시편이다. 그걸 달리 말해서 여호와 신은 이스라엘 민족들이 자기 정체성을 위해서 고안해 낸 것이고, 만들어 낸 것이지 보편적인 신은 이다? 아니다? 신은 아니다 이 말이죠.

하나님의 아들이, 사무엘하 7장 14절 “너는 다윗의 자손 내 아들이 되리라“ 했거든요. 하나님의 신의 아들이 있다는 것은 이건 이스라엘뿐만 아니고 모든 민족도 다들 그러니까 따라서 이 구약이라는 이 말씀도 하나님께 계시 받은 것이 아니고 저희들이 그동안 흘러나온 전설 가운데서 우리 이스라엘이 단합하는데 뭐가 보탬이 될까 정치적인 어떤 책략에 의해서 도움이 될까 싶어서 후대에 와서 재편집한 것이 바로 구약성경이라는 거예요.

그럼 결국 뭐예요? 누가 신이라는 말입니까? 신은 없고 인간 자신이 누구냐를 확립하기 위해서 신을 그냥 만들어내서 배치한 것뿐이죠. 군케란 신학자로부터 많은 로빈켈 구약학자들이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고, 거기 따라서 신약학자들도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처음에 기도원에 가서 목사 되라고 응답받고 신학교 온 학생들한테 그런 식으로 공부해서 신학 박사 받은 교수들이 그 이야기를 폭로해버리니까 그 신학생들이 얼마나 충격을 받겠습니까? 왜냐 하면 자기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은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인줄 알았는데 교수들 이야기에 의하면 그런 신은 한 트럭도 넘고 그건 인간이 만들어 내면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래서 그 교수들의 주장은 뭐냐 하면 신을 믿으라고 하는 것은 광신도가 하는 짓이고, 신이 존재하는 이유는 이웃과 이웃 사이에 사랑으로 결속을 맺기 위한, 이웃 사랑을 통한 행복하고 이상적인 공동체를 생성하기 위해서 종교라는 것이 동원됐다고 하는 거예요. 신학생들이 이거 받아들이겠습니까? 안 받아들이겠습니까? 안 받아들이죠. 그저 학점만 따서 졸업하면 목사 되려고 억지로 하지만 그 딴 거 안 하죠. 그 딴 거 안 믿고 아이쿠, 공부해서 신앙 다 버렸다고 욕들을 하시잖아요?

그들이 졸업하고 막상 목회에 나가면 ‘아하! 그렇구나. 야, 사람들이 오늘날 신을 안 믿는구나.’ 신을 안 믿고 신을 믿고 예수 믿는다고 해야 교회에서 사랑받는구나. 결국 교회라는 게 뭡니까? 서로 사랑 주고받는 위로 주고받는 정주고 정 받는 단체, 그래서 덜 외롭고 인간은 아리스토텔레스 말처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인간은 혼자는 못 살고 더불어 사는 계모임, 거기서 따뜻한 그것을 하면서 죽어서 성경대로 좋은 데 가기를 희망하는 그냥 하나의 소망으로 하는, 그렇게 이야기할 때 교회는 무럭무럭 부흥이 되는 거죠. 너도 안 믿고 나도 안 믿고 누구든지 예수 믿는다는 이야기를 아무도 안 하는 그 편리함, 여러분 돈 내서 어려운 사람 도와주시고 그러면 여러분도 도움 받습니다. 이건 완전히 두레 마을 아닙니까? 그런 식으로 공동체 생활하는 그게 나이 많고 한 사람들 낙원으로서 살 수 있어 가는 곳, 그게 바로 교회, 진짜 신이 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신이 있다면 정성 모아 세운 예배당, 그걸 주께서 교회라고 하니까 그러면 그 교회 등록하면 죽어서는 좋은데 가겠죠. 또 실제로 눈으로 공동묘지도 돈 내서 만들어 놨으니까. 그것도 앞에서 십자가 탁, 탁, 탁 붙여 놨으니까.

그러니 아무도 하나님을 안 믿는다는 데서 오는 행복감. 나만 안 믿는 것이 아니고 다 안 믿거든요. 다 안 믿으니까 얼마나 느긋해요? 그것이 바로 벨사살 왕이 하는 행동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라는 집단, 공동체가 중요한 거죠. 그 공동체 어떻게 됐습니까? 그 결속이 된 공동체 파티에 누가 나타났습니까? 초청받지 않은 문양 되지 않고 상징화되지 않고 우리들의 공동체 결속에 도움도 안 되는 웬 난데없는 손가락이 나타났죠. 5절 봅시다.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라고 돼 있죠?

여기서 무슨 손가락입니까? 늑대 손가락 이예요? 무슨 손가락입니까? 사람의 손가락이죠. 그리고 또 다니엘 3장에 보면 불 속에 들어갔을 때 등장한 네 번째 사람은 어떤 사람 이예요? 신의 아들의 모습과 같다 했죠?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이런 것이 설명하기 어려운데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좀 정리해 봅시다.

사람이란 자신이 체험한 것만 안다. 그러면 사람들이 체험한 것은 공동체에 있을 때 내가 누군가 확립되니까 인간은 홀로 살 수 없으니까, 공동체 속에 더불어 살 때, ‘당신 누구요?’ ‘나 누구 집안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야 된다 이 말이죠. ‘보면 몰라요?’ 이러면 안 돼요. ‘니 집안이 뭐고 어느 대학교 나왔느냐’ 하는 공동체에 묻는 게 있어요. 이것을 그들이 보고 있는데 다니엘 3장에서는 네 번째 사람이 등장했죠? 오늘 5장에서는 사람의 손가락이 등장했죠? 그러면 사람이 손가락 등장한 것을 벨사살 왕이 아무리 술 취했어도 봤죠. 손가락이 나타난 게 너무 신기하니까, 그리고 팔은 안 나타나고 손가락만 나타났으니까 환장할 지경이죠. 손가락이 떠다닌다고 생각을 해보세요. 손가락이 떠다니면서 벽에다 후벼 파서 글을 쓰는 거예요.

이거는 초대장 없는 손가락 아닙니까? 그러면 이쪽의 파티는 왕이 주도한다는 공동체를 결속한다는 거 아닙니까? 우리는 뭐라고 해도 마르둑 신의 자녀라고 결속했는데 왕은 제사장이니까, 신과 통하는 왕의 유일한 아들이니까, 그런데 손가락이 나타나 버리면 이건 뭣이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손가락을 풀을 수 없는 이쪽은 몽땅 ‘내가 생각한 나는 내가 아니다.’는 뜻 이예요. 오늘 강의제일 중요한 겁니다. ‘나는 이렇다.’하는 그것이 이게 오류다 이 말입니다. ‘니 누구지?’ ‘저 이렇습니다.’라는 자체가 오류인 거예요. 왜 오류냐 하면 내가 기껏 알고 있는 공동체 내에서의 나는 이정도의 왕이거든요. 그런데 내가 미처 알지 못하고 풀지 못하는 다른 초대받지 않은 손가락이 나타나 버리면, 그동안 내가 나라고 여겼던 이것이 이게 엉터리일 수가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나타났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동안 내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 내가 알았던 나는 진정 ‘나’가 아니었다는 거예요. 내가 지금 뭔가 공동체 속에서 남들이 이야기하니까 그런 줄로 알지만 정작 나는 내가 누군 줄 내가 몰랐던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 십자가는 뭐하는 십자가예요? 나무에 달린 자마다 뭐다? 저주 받죠. 우리가 저주 받을 자라는 것을 그 전에는 생각도 못했죠. 내가 왜 저주 받아요? 이 근호 내가 왜 십자가에 저주 받는데요? 나는 태어나면서 ‘여러분, 나 저주 받아야 됩니다.’라는 식으로 살아오지를 않았어요. 성적이 어떻게 해서 40점에서 50점, 60점, 이렇게 생각하지, ‘나는 저주 받아야 돼, 저주 받아야 돼.’ 이런 식으로 시험 친 적이 없다 이 말이죠.

수요일 날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망신도 그런 망신이 아니고 무슨 망신? 개망신! 내가 개망신 당해야 된다는 생각보다 개망신 안 당하기 위해서 살잖아요? 개망신 당해도 싸다는 생각을 누가 하겠습니까? 개망신은 어떤 경우에 개망신이냐 하면, 공동체에서 쫓겨났을 때 개망신 이예요. 또는 공동체에서 쫓겨나서 가둬져 있을 때 개망신 당하는 겁니다. 교도소가 개망신 당한 곳 아닙니까? 누굽니까? 이명박 대통령 형 이시형씨 올 때 카메라로 찰칵찰칵 찍잖아요. 지금 개망신 당하고 있는 겁니다. ‘왜 돈 6억을 현찰로 줬습니까?‘ 이런 식으로 찍는 이유가 공개적으로 개망신 당하는 겁니다. 이 말은 ’우리 공동체 내에서 니는 나쁜 놈이다.’ 이 말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돼요? ‘나쁜 놈 될래.’ 이러면 안 되잖아요. ‘아휴, 그것은 내가 나쁜 것이 아니고 어떻게 투자 했고 어떻게 조카 줬고…’ 기어이 공동체 속에 머리 내밀고 좀 넣어달라고 하잖아요. 조기 사면해 달라고. 그게 우리 모습인데.

거기에 난데없는 날라 다니는 손가락이 나타나 버리니까 결국 그동안 나를 지켜주고 나를 다답게 했던 공동체가 전부 다 오류다 말이죠. 이건 엄청난 실수다 이 말이죠. 그래서 벨사살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저 손가락이 썼던 글자를 해석하라’ 왜 해석을 합니까? 해석이 돼 버리면 그 해석된 글은 이 공동체 속에 다시 편입이 되니까 더 이산 추가적인 정보가 들어올 수 있으니까 우리 이 모임이 확장될 뿐이지, 깨진다든지 오류가 될 일은 없잖아요.

저 손가락이 쓴 글자를 해석하라. 해석이 안 되면 우리는 일괄적으로 망하는 것이고, 해석이 되면 우리는 일괄적으로 더 발전 하는 것이고, 이게 결국은 오늘 이렇게 제가 강의하지만 다니엘 5장 이야기는 매일같이 손가락이 우리 가정에 우리 사회에 우리 직장에 주께서 매일 들쑥날쑥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때는 손가락이지만 지금은 십자가죠. 십자가를 늘 우리 가정에 우리 직장에 우리 사회에 우리 교회에다 계속해서 십자가로 하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누군가 저걸 해석해 달라’ 이야기를 해야 돼요. ‘저 십자가를 치워라’ 이러면 안 되고, ‘저 십자가에 왜 저주 받아야 됐는가, 누가 해석을 해 달라.’ 해석을 해서 전에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적으로 우리끼리, 우리교회, 또 무슨 교회기리 하다가 이제는 우리끼리, 우리교회 다 때려치우고, 오직 십자가! 난데없이 날라 온 손가락, 그리고 십자가는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그 십자가를 우리가 해석을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십자가는 원래 해석이 안 되게 돼 있습니다. 마치 여기 손가락 같아요.

해석이 안 돼요. 왜 해석이 안 되느냐 하면 요것도 설명을 해드릴게요. 이런 설명이 어려운데  현대 기원 언어학에서 밝혀낸 건데 하이데거가 그런 이야기한 거예요. 인간이 이렇게 있는데 인간은 주체가 자기가 누군지 몰라요. 그런데 인간 바깥에 대자연이 있습니다. 대자연에 인간은 기하학적 형상을 보내요. 기하학이라는 것은 규격 진 것, 모든 인류의 학문을 조사해 보면 전부 다 기하학적 이예요. 숫자가 1,2,3,4…,로 돼 있잖아요. 그러면 1과 2 사이에 뭐가 있습니까? 소수점은 발달된 것이고, 결국 1과 2사이에는 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규격진 거예요. 분류를 시킨 거예요. 딱딱 곽을 진다니까요. 언젠가 이야기했잖아요. 별이 원으로 도는 줄 알았는데 타원으로 돈다고. 원이 더 완전한테 실제로는 원이 아니고 캐플린에 의하면 타원으로 도는 거예요. 참, 하나님도 미쳤어. 왜 원으로 안돌고 원이 타원보다 완벽해 보이는데 왜 원이 타원보다 완벽할까요? 무슨 선입관 때문에? 기하학적 선입관 때문에.

피타고라스에 보면 1,2,3,4는 용납을 해도 루트2 ()는 용납을 안 했습니다. 그런 숫자 발설하면 그 단체에서 죽여 버렸습니다. 모든 것은 정확해야 되고 숫자로 하는 거예요. 인간은 대자연에다 기하학적으로 해놓고 그걸 다시 회수를 해서 자기를 완벽한 기하학적으로 규격에 맞춰서 그것을 자기의 세계로 다시 수용하는 거예요. 안정되게 이렇게 규격에 맞춰서 혼선이나 혼란이 없게 딱딱 곽에 짜서. 여러분들이 채석장에 가면 돌을 어떻게 깹니까? 중구남방 깹니까? 아니면 딱딱 네모지게 각 지게 깨는 게 맞습니까? 이태리 대리석 보면? 딱딱 각 지게 떼 내죠. 그래서 상품으로 팔잖아요. 마찬가지로 우리자신이 뭔가 볼 때는 딱딱 규격을 맞춰서 본다 이 말이죠. 장부 회계할 때도 딱딱 규격에 맞춰 하잖아요. 옛날 할머니들은 주머니에서 돈이 얼마 들어가는지 모르고 이러지는 않잖아요. 딱딱 규격에 맞춰할 때는 인간은 정돈된 마음으로 할 때 그게 자기한테 정돈이 되는 겁니다. 그걸 수련회 때 뭐라 했어요? 로고스라 했고 혼돈스러운 것은 뮈토스라 했죠. 뮈토스는 신화 아닙니까? 신화라 하는 것은 돌발적이고 우발적인 것을 모아놓고 어설픈 걸 짜깁기 한 것이 신화고, 신화의 시대가 지나면 모든 게 규격화 되는 겁니다.

신화의 시대에서는 왜 어설픈 걸 끌어 모으느냐 하면 해명이 안 되니까. 왜 번개가 치는지, 해석이 안 되니까 그냥 쭈그리고 앉아서 우리는 신이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나오는 거예요. 그러다가 신화의 시대도 그냥 혼돈이 아니고 신화의 시대에도 신을 섬기는데 있어서 종교적 상징을 줘서 ‘신이시여, 딴 데 가지 마시고 요 제사 받으시고 딴 데 가지 마시고 요 시간대에 제사 받으시고 그리고 요 장소에서 복 주시고 딴 데는 주지 마시고 꼭 장소나 시간이나 정해놨어요.

옛날 제사 지낼 때 낮에 지냅니까? 그냥 안 드리죠. 댕~댕~ 열두시에, 댕~댕~치면 그게 제사 지내는 시간 같아요. 안 입던 한복 두루마기 입고 버선 신고 딱 앉아 있고, 좀 전까지만 해도 까불다가 그때만 되면 남편 값 한다고 ‘여자는 저리가.’ 해서 부엌으로 보내고, 물, 술, 가져다 올리고 ‘딸은 저리 가고 아들 이리 와.’ 하면서 폼 내잖아요. 그리고 그날 술 한 잔 먹으면 다시 원상복귀 개 되지만. 그럴 때 뭐냐 하면 이게 조상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정형 화 시키고 기하학 화 시켜서 좌청룡 우백호 대추 놓고 하는 것을 정형시킬 때 내 마음이 나는 이걸 정형시킬 때 비로소 나는 나라고 정립할 수 있다 이 말이죠. 그게 인간이거든요.

이게 상징인데 그래서 종교라는 게 있고 십자가라는 게 있잖아요. 십자가 믿어서 구원 못 받는다니까요. 십자가는 내가 상징화 시켰는데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십자가는 누가 알아요? 상징으로는 안 돼요. 아무도 못 믿어요. 십자가는 기도해도 안 돼, 헌금해도 안 돼, 전도해도 안 돼,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십자가는 못 믿어요. 그리고 사랑을 하고 구제를 해도 자기도 십자가 못 믿어요. 법정 스님이 되고 머리 홀라당 깎아도 십자가는 안 믿어져요. 왜냐, 십자가는 인간의 상징 그 밖에 있기 때문에. 그게 바로 오늘 나타난 손가락입니다.

우리의 상징으로도 포착이 안 되고 접선이 안 된다는 말은, 저쪽에서 이쪽을 깨겠다는 이야기예요. 결국은 박살내겠다는 거예요. 저주하겠다고 진노하겠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그 십자가를 몰라요. 예수님 십자가 죽을 때 저주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니까 어떤 사람은 처음 들었다고 해요. 세상에. 갈라디아서에 나오거든요. 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너무 사랑의 하나님, 우리는 사랑 받기 위해서, 라는 만날 그 노래를 부르니까 설마 하나님이 저주를 앞장세울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한 겁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는 이제 십자가 이야기 그만한다는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대요. 십자가 이야기 하지 말라는 그런 사람도 있답니다. 실컷 십자가 이야기해놓고 밑천이 다 떨어진 모양이라.

그만큼 십자가는 사람들이 기하학적으로 자기 규정하겠다, 자기 정체를 규정했던 사람들은 포착이 안 됩니다. 이 말은 반대로 십자가로 만약에 접선이 되고 포착이 된 사람 같으면 어떻게 될까요? 뭐를 포기하고 뭐가 깨야 됩니까? 나는 이런 인간이라고 딱 정립하고자 하는 서랍 정리, 방 청소, 하여튼 딱딱 정리하는 사람 있어요. 깔끔하게 제 자리 딱딱 있어야 돼요. 그런데 그게 십자가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 그게 십자가와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요즘 아가씨 방에 들어가 보면 개판이랍니다. 어떤 사람이 하숙치는데 여자는 안 받겠다는 거예요. 너무 어질러놔서. 우리 생각에는 정 반대로 여자 화장실이 남자 화장실보다 더럽다는 거예요. 남자 화장실은 볼일 보고 물만 누르면 되는데, 여자 화장실은 안 그렇다는 겁니다. 발을 올려서 스위치를 누른다는 거예요. 그때는 발이 잘 올라가는 모양이라. 깔끔 떤다고 발가지고. 나는 절대로 허접스러운 존재가 아니고 나는 이렇게 깔끔하고 이렇게 착하고 선하고. ‘선한 선생이여, 내가 영생을 어떻게 얻습니까?’라는 부자 청년. 결국은 근심하고 예수님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대신 세리와 창녀, 그리고 거지, 강도, 이들이 하늘나라 가보면 그들이 먼저 와 있을 거다. 가야 말이지만 가지도 못하죠. 가보면 그들이 먼저 와 있어요. 강도도 보이고 창녀 막달라 마리아도 보이고, 먼저 가 있어요. ‘어, 거기 어떻게 갔습니까? 물어 봅시다.’ 물어보면 ‘사랑 많이 받았어요.’ 한다고요. 경상도 말로 ‘사랑 억수로 받았어요.’ 이렇게 이야기한다 말이죠.

그 사랑의 극치가 뭡니까? 가장 많은 사랑, 최고로 많은 사랑이 뭐예요? 바로 십자가죠. 십자가 때문에 거기 가 있는 거예요. 아브라함도 가 있고 모세도 가 있고 엘리야도 가 있고 천사와 같이 돼서 하늘의 형상을 입고 오직 십자가뿐이죠.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고. 그 많이 용서했다는 것이 사랑으로 전환되어서 지금 천국을 이루고 있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거기에 끼어들려고 하면 우리는 어떻게 돼요? 정형화 되고 나는 이렇다고 따로 자기 자아상을 고집하면 안 되고, 우리는 혼돈스러워야 되고 혼란스러워야 되고 십자가 앞에 설 때까지 나는 내가 누군지를 몰랐고 사실 십자가 저주에 내가 같이 풍덩하고 뛰어들어야 돼요.

다니엘 세 친구가 불 속에 뛰어들듯이 사실은 그들은 멋도 모르고 뛰어들었는데 예수님 만났지만, 우리는 이미 예수님 있는 줄 알고 뛰어들면 돼요. 우리는 깊은 산속의 연못이라 생각하고 거기에 예수님께서 먼저 옷을 벗고 목욕하고 계시면 우리도 되도 않은 선녀 옷 벗어버리고 같이 벌거벗고 풍덩 뛰어들어야 된다 말이죠. 거기서 뛰어들어서 하나가 될 때 로마서 6장에서는 그걸 세례, 다른 말로 하면 연합이라 합니다. 롬6:3~4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같이 죽으면 같이 산다. 이 얼마나 신비로운 이야기예요?

어쨌든 저쨌든 간에 벨사살이라는 공동체에, 공동체라는 말을 하는 것은 기존의 해석이 벨사살 왕만 자꾸 놀랐다고 생각하는데 그 당시 왕이라는 위상을 몰라서 그래요. 왕도 신을 바꾸면 백성들한테 추방당한다고요. 그러니까 왕에게 이렇게 등장한 것은
 왕뿐만 아니고 너희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저주 받아야 합당하다 그런 겁니다. 왕만 잘못했으면 왕만 바뀌면 되는데 왕이 바뀌는 게 아니고 나중에 뭐가 바뀌어요? 나라 전체가 다른 나라가 되고 맙니다.

자, 그러면 해석을 해야 된다 이 말이죠. 여기 10절에 보면 “태후가 왕과 그 귀인들의 말로 인하여 잔치하는 궁에 들어 왔더니 이에 말하여 가로되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왕의 생각을 번민케 말며 낯빛을 변할 것이 아니니이다 왕의 나라에 신들의 영이 있는 사람이 있으니”라고 추천을 하죠. 누굴 추천합니까? 다니엘을 추천합니다. 그렇다면 다니엘만이 손가락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란 이 말은 오늘날 성도가 이 대한민국에 산다는 것은 곧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다니엘 같은 위상을 가지고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박아 놓은 거예요. 성도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성령이 거기 있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왜, 성도의 몸은 곧 성령이 계시는 하나님의 전이기 때문에, 성령이 있다는 말은 그냥 놀면서 있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죠. 있음 자체가 기능이요, 있음 자체가 작용이요, 있음 자체가 적용이요, 있음 자체가 하나님 일의 계획의 파견 근무하는 거예요.

자, 한번 물어 봅시다. 사도들이 무슨 일 했습니까? 사도들은 분명히 이야기했어요.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했는데 그렇게 말하는 본인들은 무슨 일 했어요? 사도들이 일한 것이 어떤 정치를 했습니까? 아니면 노가다 했습니까? 국가 경제에 이바지 한 게 있어요? 안 그러면 철책 선에 총 들고 나라를 지킨다든지, 무슨 일 했습니까? 사도들은 복음 전하는 일을 했죠. 그것은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말씀과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내가 너희들을 데려가지 않는 이유는 나의 거룩함이 나의 뜻이 이 세상에 여전히 있게 하려 함이라. 내가 지금 떠나가는데 너희들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지만 데려가지는 않겠다. 어떻게? 현재 이 세상에 같이 있으면서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그 기능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 기능은 사도가 하는 게 아닙니다. 사도를 가지고 예수님이 하시고 성령님이 하셔요. 우리가 주의 일을 한다고 너무 걱정하거나 나대거나 설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여기 그냥 밥 먹고 있는 것조차도 이게 성령이 하는 일이예요. 발걸음을 세시고 백합 한 송이 피어 있는 것, 참새가 날아다니는 것, 다 주의 일이듯이, 우리가 여기 있는 것도 그 나라 의를 증거 하라고 그냥 있는 거예요. 아무것도 안 해도 그게 하나님의 일이 된다니까요. 또 이 소리 듣고 백수들 좋다 하겠다. 복음 믿고 나 아무것도 안 할래. 아무것도 안 해도 지 맘대로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아니고, 아무것도 안 해도 하게 돼 있어요. 이빨 아프다든지 일이 있다니까요. 장례식이 있다고 참석도 못하든지 일이 있어요.

세상의 모든 것이 어떻게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에요. 왜, 공동체가 새로운 공동체에 가입돼 있기 때문에. 새로운 공동체, 하늘나라죠. 사람은 혼자서는 존재하는 법이 없어요. 이쪽 나라 아니면 저쪽 나라, 저쪽 나라 아니면 이쪽 나라예요. 둘 중에 한 나라지, 이쪽도 저쪽도 아닌 나라는 없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이 해석하는 해석은 새로운 나라의 입지와 속성과 본질에서 이야기하는 건데 그건 10분 쉬고 합시다.
 이한례 (IP:203.♡.41.16) 12-11-14 13:28 
가락교회-다니엘5장1절(손가락 계시)121101-7강b -이 근호 목사

제 7강b

첫 번째 시간에 개인으로 보지 말고 하나의 공동체 집단으로 이것을 이해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집단에 소속된 모습으로 자기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는 겁니다. 이건 예수 믿는 사람도 자기 혼자서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하늘나라 공동체에 소속됨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이걸 중세나 그때 종교지도자들은 이걸 오해해서 루터나 칼빈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교회 없이는 구원은 없다. 이런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그 교회가 만약에 눈에 보이는 교회라면 아까 첫째 시간에 그걸 뭐라 했어요? 전부 다 이게 뭐예요? 상징이고 상징은 항상 기하학적, 정립 화, 정돈, 규격화된, 규격화 됐다는 말은 여기에 뭐가 들어간다? 법이 들어간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구원은 법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법은 오히려 죽이는 것이고 뭐로 합니까? 법 말고 뭐예요? 그냥 사랑이라 하면 안 되고 뭐는 아니고 이거다 했거든요. 사랑은 뭐의 저촉은 안 받는다? 법의 저촉은 안 받고 사랑으로 구원받죠. 요한복음 8장에서 현장에서 간음하다 걸린 여자는 율법으로서는 죽임을 당해야 되고, 돌에 맞아 죽어야 되는데 뭐로 구원받습니까? 용서로, 사랑으로 예수님에서 나온, 예수님의 공로에 근거한 데서 나온 사랑, 주님이 ‘그냥 봐줄게’ 이런 사랑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의 죽으심이 넘쳐흐르는 것, 자신의 죽으심의 효과가 그릇을 넘쳐서 흐를 때 그 죽으심에 근거해서 그런 사랑이란 말, 또 자유라는 말을 할 수가 있고 받아 챙긴 게 되는 거죠.

그래서 항상 주님의 사랑을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사전에 뭐를 집어넣습니까? 법을 집어넣어야 되고 법으로서 이런 상징과 기하학적인 이 모든 것이 다 인간으로서는 허물어져야 돼요. 그 인간이 생각했던 그 질서라는 것이 진짜 하늘나라 그 질서 앞에서는 그게 전부 다 저주 꺼리죠. 나는 깨끗하다. 나는 선하다. 착하다. 이 말 한마디가 뭐냐 하면, ‘나는 요런 법 안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나는 착할 수밖에 없어.‘라는 그것이 저주 받아야 될 짓이 된다 이 말이죠. 그 경계선이 허물어져야 돼요.

그래서 제가 첫째 시간에 공동체가 전체로 공격 받는다 이야기했죠. 그리고 두 번째 시간에서는 새로운 공동체의 속성이 이 손가락이 썼던 그 안에 담겨있다 말이죠. 손가락이 그냥 나타났습니까? 뭐를 썼습니까? 썼죠. 그렇다면 현재 이 공동체가 왕궁에서 파티를 열고 있잖아요. 자기 마르둑 신을 찬양하면서 뭐를 깔봅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바쳤던 제구들과 제사 기구들에다 술을 마시면서 우리 마르둑 신이 여호와를 꺾었습니다. 라는 거기에 여러분 다들 동의하시죠? 라고 새로운 공동체를 규격화해서 만든 거예요.

여기 초대받지 않은 손가락이 나타났죠. 나타난 것도 기겁할 문젠데 글씨를 썼으니까 글씨를 만약에 해석을 못한다면 그들은 공격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 다니엘을 부릅니다. 불러서 왕이 아주 아부를 하죠. 다니엘에게 아부와 칭송이 대단합니다. 15절에 보면 “지금 여러 박사와 술객을 내 앞에 불러다가 그들로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라 하였으나 그들이 다 능히 그 해석을 내게 보이지 못하였느니라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너는 해석을 잘하고 의문을 파한다 하도다 그런즉 이제 네가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면 네게 자주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네 목에 드리우고 너로 나라의 세째 치리자를 삼으리라” 이렇게 상을 이렇게 제시했죠?

그런데 원래 상이라 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고 좋은 것이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제안한  그 상이라는 건 누구한테 좋은 거예요? 기존의 그들 공동체들끼리는 그렇게 좋고 부러워할 만하고 흠모할 만한 상이 되는 겁니다. 그 이야기 듣고 17절에 다니엘이 뭐라 합니까? ‘저런 것은 나한테는 그딴 것 주지 마라. 당신들한테 그쪽 세계에서는 그게 아주 멋들어진 최고의 상이 되지만, 내 나라, 내가 속해 있는 나라에서는 그건 상 같지도 않은 것이고 그건 괜히 생색내는 것밖에 안 되니까 저한테는 주지 마시고 왕이 주고 싶은 사람한테 그냥 주세요.’ 했다 말이죠.

그러니까 지금 해석하기 전에 먼저 사전 준비단계가 많죠? 해석도 하기 전에 벌써 상 줄게, 상 안 받는다. 하는 그런 이야기를 했다 이 말이죠. 결국 이건 뭐냐 하면 이 벨사살 왕이 기어이 자기 나라는 손가락이 왔던 누가 왔든 자기나라는 건재하고 싶은 겁니다. 우리가 교회 나가고 싶어 나간다. 하나님 믿는다. 그런 마음 심보 가운데 뭐냐 교회 나오고 예수 믿는 것도 기어이 기존의 자기 세계는 안 다치고 싶고 그냥 든든하게 유지하고 싶은 그런 마음이 있기 때문에 가는 거예요.

신을 내편으로 끌어당김으로 말미암아 내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 안 다치게 할 수 있는 어떤 대비책을 마련하고자 교회 나오고 예수 믿고 그렇게 하는 거예요. 오늘 유튜브 녹화하면서 했잖아요.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을 어떻게 다루었다 했습니까? 강하게 다뤘습니까? 약하게 다뤘습니까? 약하게 다룬 거예요. 그것이 아버지가 진짜 아들에게 이 땅에서 아들에게 했던 최후는 진짜 아버지 능력만 의지하도록 약하게 만들었습니다. 절대로 자기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도록 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어디까지 약했습니까? 죽을 때까지 약했죠.

사람은 공동체에서 사는 법인데 예수님 곁에 누가 있었습니까? 다 가버렸어요. 부르투스나 뽀빠이건 다 가버렸어요. 예수님이 삼일 동안 그렇게 고생하고 그렇게 기적 일으키고 사랑을 베풀고 자비를 베푼 그 결과가 뭐냐, 다 가버린 거예요. 다 갈 때 뭐만 보이겠습니까? 오직 아버지의 능력만 보이죠. 그럴 때 아버지가 가장 아버지다운 거예요.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다 보낸 후에 ‘지금 니 고소한 자가 어디 있느냐?’ ‘아무도 없나이다.’ 그런데 여기에 죽었지만 느부갓네살과 벨사살은 끝장났습니다. 18절 봅시다. “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고
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이 그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였으며 그는 임의로 죽이며 임의로 살리며 임의로 높이며 임의로 낮추었더니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이거 보세요. 방향이 뭡니까? 예수님은 갈수록 십자가에 죽기까지 마음을 낮추었는데 느부갓네살은 갈수록 마음이 높아지는 거예요. 어떤 의미에서 사업이 망하는 것도 마음이 높아질 때, 뭔가 교만할 때, 뭔가 일이 잘 풀릴 때, 이건 저주받는 것과는 정 반대상황으로 갈 때, ‘나한테 저주가 끝난 모양이다.’ 이렇게 안심할 때 주의하소서.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를 다룰 때는 마음을 낮추게 다뤘는데 우리가 한껏 마음이 높아졌다는 것은 지금 성령이 다루는 게 아니고 지금 마귀가 그렇게 만든 겁니다. 더 이상 십자가가 눈에 안 보이게, 이제 니가 챙긴 것에만 보면서 흐뭇해하기를 우리를 독촉하죠.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돌이 떡 되게 해서 먹을 게 생겼다면 모든 돌이 다 떡으로 변했다면 그것은 뭐에 말려든 겁니까? 마귀한테 말려들었죠. 옛날 서양의 동화에 그런 게 있잖아요. 마이더스의 손이라 해서 만졌다 하면 금으로 변하는 거예요. 금을 그렇게 좋아했지만 막상 밥을 먹으려고 손을 대니까 그것도 뭡니까? 금이 됐을 때, 야, 금보다 더 귀한 게 있구나. 그게 밥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평소에 밥 먹을 때 금보다 못하다고 우린 생각하잖아요.

사람이 느부갓네살에게 주신 하나님의 지혜는 이렇습니다. 저것과 이것이 내게 소중하고 내게 중요하다. 라고 말하는 것은 실은 내가 내게 중요한 거예요. 그런데 느부갓네살에게 알려주기를 여기 21절에 보면 “인생 중에서 쫓겨나서 그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느부갓네살이 마음이 높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출발선이 뭡니까? 나는 무엇보다도 ‘나는 소중하다.’를 출발점으로 하니까 이게 사람들이 자기한테 복종하고 지가 ‘저 사람 죽여. 저 사람 살려.’ 로마 황제처럼 손가락을 내리면 죽이고 손가락을 올리면 살리고, 지 손가락 따라서 살리고 죽이고, 지가 모세 지팡이도 아니고 말이죠. 얼마나 재밌어요. 손가락 따라서 하니까 장난삼아 얼마나 재미있겠어요. ‘시상이 떠오른다. 여봐라, 저쪽에 로마에 불을 질러라. 오! 아름다운 시상이 떠오르는구나.’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정신병자지. 그래서 본에프가 히틀러를 죽이려고 안 합니까? 정신병자를 지도자로 앉혀놨다고.

하나님께서는 니가 너를 소중하다고 하는 이 사실 자체가 이건 하나님을 만나보기 전에 다른 사람들, 지보다 낮은 사람들, 지보다 못한 사람들 끼리에서 보니까 지가 우수하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높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막상 하나님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인생 중에서 쫓겨나서 그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들나귀와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실제로 느부갓네살이 풀을 먹었어요. 손톱이 자라나서 늑대처럼 되었고.

이럴 때 도대체 뭐가 소중한 겁니까? 뭐가 귀한 거예요? 세상이 누구 중심입니까? 그 전까지는 세상 모든 것이 자기한테 절하고 자기가 이러면 살고 이러면 죽이는 그런 자기를 보고 ‘역시 나는 나를 귀하게 여길만한 가치가 있어.’라고 여겼는데 하나님께서 등장하셔서 다니엘과 연관되어  등장하셔서 짐승이 돼 버리니까 정작 자기는 짐승만도 못한 존재죠. 짐승만도 못한 존재라는 것은 그야말로 있으나마나한 존재, 그래서 다니엘은 말합니다. 있으나마나한 존재를 왜 왕으로 세웠느냐, 그렇게 생각을 해야지, ‘나는 왕이다. 짐승 되면 안 돼.’ 방향을 그렇게 반대로 몰아가면 안 된다는 것이 다니엘의 이야깁니다. 뒤에 나오는 해석과 앞이 관련 있어요. 뒤에 나오는 손가락도 글씨 해석과 앞의 것이 의미가 있다고요.

출발점을 ‘나는 짐승인데 오늘도 왜 밥을 주십니까?’ 이렇게 돼야지, ‘나는 왕인데 반찬이 이게 뭐야?’ 이렇게 나오면 안 된다는 겁니다. 남편들 잘 들어놓으세요. ‘반찬이 이게 뭐냐, 주는 대로 먹어라.’ 풀이나 먹고 있어도 합당하다. 이렇게 생각을 하라 이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21절에 보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나라를 다스리며” 이렇게 돼 있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나라를 다스리게 된다면, 그러면 느부갓네살 왕이 이미 죽었지만 느부갓네살 왕이 하나님이 다스릴 때 가장 하나님이 다스림을 많이 느낄 때가 언제겠습니까? 바로 자기가 왕으로 있을 때가 아니라 짐승처럼 있을 때 가장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짐승인데 왕 되게 하면, 그때부터는 지 맘대로 죽여라, 살려라, 안 할 것이고, ‘하나님이여, 저 분 어떻게 할까요? 하나님이여, 저 백성 어떻게 할까요?’ 누구한테 묻겠습니까? 꼭 하나님한테 물어서 한다 말이죠.

그럼 누가 하나님 이예요? 진짜 하나님이 하나님이고, 자기는 하나님이 시킬 때만 의미가 있는 존재가 되죠. 그래서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예를 들면서 벨사살한테 하는 이야기가 지금 손가락이 나타난 것은 새로운 공동체에서 날라 온 손가락 이예요. 그 손가락에 의해서 벨사살 왕이나 느부갓네살 왕이나 뭘 배워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아야 됩니다. 그 해석을 드디어 24절에서 해석을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제가 그 정답을 말씀드릴게요. 하나님은 ‘바꾸시는 분’ 이예요.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바꾸어 주시는 분이다. 그러면 뭘 바꾼다는 말이냐, 어떤 포지션(position), 위치, 자리, 요 자리가 하나님이 하나님대로 나타나는 유일한 자리입니다. 이 자리에 느부갓네살 던졌다가 짐승 되게 해버리고, 이번에는 벨사살 던졌다가 손가락 나타나고, 그러니까 여기에 어떤 인간이 등장하게 되면 사람들은 이 자리하고 하나님하고 연결됐다는 걸 모르고, 이 자리가 내가 세상을 통치하는 자리라고 한 거예요.

쉽게 말씀 드려서 이 자리에 벨사살 왕이나 느부갓네살이 설 때에 여기 많은 사람이 복종하잖아요. ‘우리 왕이시여, 위대하십니다.’ 할 때 이 백성들은 요 자리를 위해서 필요한 백성들인데, 왕들은 오해하기를 이게 자기한테 복종하는 백성들이라고 오해하는 거예요. 자리가 중요한데,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자리를 짐승 자리로 만들 때 이 원래 자리는 하나님이 앉을 자리인데, 하나님 앉을 자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느부갓네살, 벨사살 왕을 이렇게 앉혔는데 이들은 전부 다 탈락하고 만 거예요.

그러면 이 자리가 하늘나라와 지상의 접촉 자리인데, 이 자리가 어떻게 하는가, 바로 말씀, 손가락으로 뭘 썼잖아요. 손가락으로 말씀을 쓸 때, 그 말씀의 자리라. 그래서 말씀에 합당한 사람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거예요. 그 손가락이 쓴 글 내용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신구약 성경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꼭 손가락이 나타나서 벽에 써야 압니까? 써 봤자 빌립보서 2장이야기고, 써 봤자 에베소서 3장 내용이고, 지금 손가락이 나타나서 써 봤자 시편이고, 하나님이 쓰신 그 모든 성경 해석은 요한복음 5장  39절에 의하면 모든 성경 해석은 누굴 이야기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벨사살 왕이 몰랐던 다니엘이 해석한 이 해석도 누굴 보여주는 해석입니까? 결국은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내용의 글이 쓰여 있는 겁니다. 왜 예수님입니까? 바로 뭡니까? 하나님과 유일하게 접선이 되는 이 자리는 실제로 나중에 결국은 누가 통치해야 돼요? 이 자리에 예수님이 앉아야 돼요. 왜, 예수님만이 말씀대로 합한 분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분은 왕이시기 때문에. 진짜 왕이 오기 전에 가짜 왕들을 많이 여기다가 주는 겁니다.

그럼 바꾼다 했는데 바꾸는 내용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수요일 날 이야기했던가요? 그런 이야기했죠. 홍해가 있다는 말은 홍해 안에 길이 있다는 말이 아니고 홍해로 인하여 길이 더 이상 하늘나라 약속의 땅과 지상의 땅과 통하는 길은 없다는 뜻 이예요. 그럼 길은 어디 있느냐, 만들어 줄 때 길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수요일 날 이야기했죠. ‘예수님은 나의 길이요.’ 한다고 안다고 해서 길이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라는 것은 예수님 쪽에서 길을 열어줘야 길이 되지, 우리가 길이라고 이해하고 믿고 해도 그건 길이 아닌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도를 길이 아닌 곳에다가 데리고 다닙니다. 그러니 환장합니다. 꼭 겨울철에 밭에 눈이 온 것 같아요. 평소에 밭은 길이 있잖아요. 길로 가면 되는데 눈이 덮여 버리면 길이 없잖아요. 전에는 요리요리 갔는데 이제는 어떻게 가느냐. 막 가로질러 가요. 가게 되면 간 그것이 뭐가 됩니까? 그게 자기 길이 되는 거죠.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앞장 세워서 무조건 밀어대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로마에 갈 때 길은 어떤 길이 있어야 됩니까? 풍랑이 일어줘야 돼요. 풍랑이 일어줘야 그 섬에 있는 토인이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 같으면 풍랑까지 일으키게 하면 너무 심하다. 로마에 무슨 일을 하러 가요? 주의 일을 하러 가잖아요. 그러면 특별 대우해서 주의 일을 하러 편하게 가면 되는데, 특별 대우한 것이 풍랑 일어나서 아슬아슬하게 거의 초죽음 되게 만들고 배도 다 깨지게 만들고 그게 특별대우입니다.

없던 길을 우리가 생각하는 길은 없애버리고 우리가 길 없다고 여기는 현장에 길이 새로 생겨나는 방식으로 우리를 데려가요. 그야말로 우리는 환장하죠. 그래서 작년에 믿었다고 그 믿음 우려먹을 수가 없어요. 그건 그때 뿐 이예요. 요단강 건널 때 홍해 가는 것처럼 백날 기다려봐야 길이 안 열립니다. 요단강은 요단강 방식으로, 홍해는 홍해 방식으로, 여리고성은 여리고 방식으로, 또 여리고 방식으로 법궤 들고 돌았다고 해서 아이 성 갈 때도 돌아봐야 열리지도 무너지지도 않아요.

왜 그러냐. 그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일회용이냐. 왜 한번만 사용하느냐? 그것은 우리의 미처 알지 못하는 죄가 새롭게 생산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새롭게 발생되고 생산되는 죄는 기존의 죄 사함 방식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공식 이예요. 5년 전에 감기 들어서 기도했더니만 감기 나았다. 5년 후에 그 방법 사용하면 쓸데없습니다. 마귀가 그 방법 하는데 안 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자기중심으로 기하학적 질서를 만들기 때문에.

그 질서에 동원되는 것이 뭐냐, 두 가지 요소가 있어요. 시간과 공간, 시간 의식과 공간 의식을 동원해서 내가 어느 장소에 갔더니만 은혜가 되더라. 어떤 때 기도했더니 기도가 잘 되더라. 딱딱 공식이 돼서 그것을 규격화해서 기하학적으로 상징화 시키죠. 그걸 하나님께서는 죄라고 보는 겁니다. 더 이상 하나님이 필요치 않게 만드는 그러한 요소가 우리 속에서 마귀로부터 올라온 거예요. ‘그만하면 잘 믿어, 이제부터 하나님께 꼭 할 거 없어. 이제 니가 갖고 있는 실력으로 니가 잘 믿으면 천당 갈 수 있어.’라고 지금도 마귀가 그렇게 목사들을 동원해서 그렇게 심화교육을 학습을 시킵니다.

하나님의 구원방식은 그런 게 아니에요. 항상 길은 없어요. 어제까지 알았던 길은 오늘로서는 무효입니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 아닙니까? 어제 양식은 어제까지만, 오늘 양식은 오늘까지만, 뭐 집에 쌀 있고 감자 있으면, 어제도 감자 깎아 먹었으니까 감자 먹고, 오늘도 감자 깎아 먹으면 그 양식이지, 아닙니다. 어제 감자 깎을 때 느꼈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오늘 감자 깎을 때 주님의 사랑이 달라요. 다릅니다. 새롭게, 새롭게 다른 사랑이 나와요. 사랑의 깊이와 높이가 날마다 다양하게 나와야 됩니다.

어떻게 사랑을 느끼느냐, 아까 배웠죠? 사랑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뭐를 전제로 한다 했습니까? 다 잊어버렸죠? 율법을 가지고 죄를 정죄하면서 그것을 용서해 줄때만 사랑이라 했죠. 사랑에서 사랑으로 이어지질 않습니다. 율법을 앞장세워서 하는 거예요. 율법은 뭐를 깨기 위함입니까? 우리가 정돈된 자기 의를 깨기 위해서 율법이 주어졌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돌아서면 자기 의 만들고, 그것도 율법으로 또 깨지고, 율법 또는 말씀, 또는 사도의 권면, 사도의 명령 같은 겁니다. 그래서 성경의 사도의 명령과 말씀이 있어야 돼요. 지시가 있어야 돼요. “무시로 기도하라” 이렇게 한 소리 해야 우리가 평소에 기도 좀 한 것 가지고 그것도 기도 했다고 우기지 않는 거예요. 무시로, 뭔 뜻입니까?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거죠. 기뻐하라, 어떻게? 항상 기뻐하라. 그냥 기뻐하지 말고 너~무 기뻐하라. 많이 기뻐하라. 안 그러면 브라우니한테 물려요.

오늘 아침에 이진이란 분이 우리교회 질문을 했어요. ‘목사님, 확신이 있는가, 시험해 보라 했는데 믿음의 확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질문을 그렇게 던졌어요. 고린도후서에 나오는 말씀처럼. 그래서 답변을 이렇게 했어요. 내 확신을 내가 가지려면 그 확신이 진짜 확신인지를 또 확신을 또 가져야 돼요. 어제 확신했는데 진짜 확신인지를 무엇을 담보로 해서 그걸 확신이라고 우길 수 있지? 확신을 보여주는 또 확신이 있어야 돼요. 그 확신을 보여주는 또 확신이 있어야 돼요. 어떤 때 확신이 될 때는 내일 그 확신을 뒷받침 할 확신을 준비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이건 백날해도 앞의 것 하나 깨지면 와장창 성냥개비로 탑 쌓은 것같이 앞의 성냥개비 빼버리면 위에 있는 확신 다 무너집니다. 그 말은 우리가 주의 일에 말려들었다는 겁니다.

이 확신 있으라는 이 말씀 작업을 주께서 하시는데 우리가 그 말씀 작업에 우리가 말려들었기 때문에 우리는 확신 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언제? 어제까지? 아니,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로서 새로운 그 말씀을 보여주는 겁니다. 내일되면 또 보여주는데 그걸 내가 어제 나에서 오늘 나까지 내 쪽에서 그걸 지속시키고 동일성을 유지하려고 할 때 우리는 뭐를 동원하느냐, 나름대로의 어떤 신앙적인 법칙과 법을 동원한다 이 말이죠. 그 법은 새로운 율법에 의해서 늘 깨어줘야 되죠. 깨어주게 되면 우리는 저주받아서 날마다 짐승이 되는 겁니다. 김 짐승, 박 짐승, 이 짐승, 짐승이 되는 거죠.

짐승 되니까 뭐만 먹어야 돼요? 고기 먹으면 안 되고 뭐 먹어야 돼요? 풀 먹고 손톱 깎으면 안 되고 손톱도 들 나귀처럼 길어야 되죠. 여기 나오잖아요. 성경에. 마음이 들짐승 마음 같아서, 우~ 늑대처럼 울부짖고 이건 우리는 돌아서면 우울하고 돌아서면 허무를 느끼고, 왜요? 괜히 가을에 석양이 지게 되면 쓸쓸해서 ‘죽어버릴까’ 그러고 그야말로 들짐승. ‘내가 이런 식으로 사느니 죽는 게 낫지.’ 하는 것은 내 운명을 누가 판단한다? 내가 판단할 자격이 나에게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로 사랑이 오게 되면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우~ 하고 들짐승이 의도적으로 매일같이 들짐승이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주의 일에 말려들었어요. 주의 말씀 구조에 말려들은 겁니다. 그게 새로운 공동체예요.

그래서 느부갓네살을 바꾼다는 말은 인간세계는 아무리 해봐야 이건 주님의 손에서 인사이동이 계속 일어나야 된다 이 말이죠. 그리고 이야기합니다. 25절에 “기록한 글자는 이것이니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여기서 참 신기한 게 뭐냐 하면 15절 봅시다. “지금 여러 박사와 술객을 내 앞에 불러다가 그들로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라 하였으나” 이렇게 돼 있죠? 지금 다니엘이 서울대학 나왔습니까? 서울법대 나왔어요? 지금 손가락으로 글씨를 후벼 파서 글씨가 여기 존재합니다. 글씨가 존재하는데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아 글씨를 해석하게 되면, 글씨가 해석된 새로운 공동체기 때문에 우리공동체 안에 신이 있는 거고, 해석을 못한다는 것은 기껏 우리공동체는 문제가 있는 공동체고, 글자가 나타난 공동체로부터 공격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아주 자멸해야 될 공동체다 말이죠.

그래서 벨사살 왕이 그 해석을 요구했을 때 문제는 박사들이 많고 똑똑한 사람이 많은데 이 글씨조차 해석은 고사하고 그 글씨가 무슨 글인지 읽지도 못했다는 겁니다. 그럼 다니엘은 똑똑합니까? 여러분, 다니엘은 똑똑하지 않습니다. 그럼 왜 다니엘은 그걸 보고 왜 해석을 했습니까? 오늘 강의 하이라이트입니다. 다니엘이 해석한 그게 해석 이예요. 다니엘이 어떤 참고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다니엘이 붙이면 그게 글이고, 다니엘이 해석하면 그게 해석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너무나 독선적 이예요.

예수님은요 너무나 독선적 그냥 독선적이 아니고 너~~무 독선적이다. 예수님이 선택했다 하면 끝난 문제고, 아무리 마귀가 달려들어서 잡아당겨도 지 힘만 부칠 뿐이고 절대로 그 영혼이 지옥으로 뺏기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선택하면 그걸로 ‘딩동댕~♬’ 전국노래자랑 이예요. 합격 이예요. 합격! 이미 합격이라. 송해가 뭐라 해도 ‘딩동댕~♬’ 하면 합격 이예요. 합격. 그게 합격이라니까요.

왜 사람들이 이걸 안 믿는지 몰라. 못 믿죠. 자꾸 헌금하고 전도하고 뭔가 착한 일하고 구제하고 봉사하고 자꾸 좋은 인상 받기 위해서 노력하는데 그건 자기가 자기관리구요. 자기가 자기관리 한다는 것은 지가 짐승 되기 싫다는 거예요. 율법이고 뭐고 나는 무조건 율법 통과하지 않고 무조건 사랑만 받으면 받아 챙길 그런 행세로만 하겠다는 거예요. 사랑은 율법을 앞장세워서 사랑하지 율법 없는 사랑은 없어요. 저주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왜, 우리 흙에 속한 몸을 어떻게 바꿔치기 해야 돼요. 말씀은 모든 것을 바꾸어주는 거예요. 바꿀 때 ‘나는 바뀌어졌다.’ 까불지 마시고 이 자리에 합당해야 돼요. 이 자리가 누구자리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진 합당한 사람으로 바꿔진 거예요. ‘나는 예수 믿었으니까 내 맘대로 산다.’ 이렇게 바뀌는 게 아닙니다. ‘오! 자리가 없었는데 오! 이 자리는 주님이 만든 자린데 이 자리가 십자가 자리구나.’ 십자가 증인 노릇하라고 바뀐 자리지, 지 맘대로 까불라고 바뀐 자리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다시 이야기합니다. 막 사세요. 그러니까 막 살란 말이죠. 어떤 자리에서? 바뀐 자리에서 막 살라는 거죠. 왜 막 살라는 말을 합니까? 막 사는 법을, 막 살도록 그 자리에서 주님의 능력이, 예수 안의 능력이 우리를 가만두지 않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가 막 안 살게 되면 우리는 관심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조심스럽게 막 안 산 나에게 관심이 가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 잘 믿고 끈질기게 믿고 있는 집요하게 믿고 있는 나 자신을 그토록 사람은 사랑하게 되니까, 이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자리에서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는 자리가 돼요. 그 자리는 지옥 갈 자리죠. 사람들이 이 말을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여, 저 어떤 인간입니까?’라고 물으면 ‘내가 그 자리에 있게 한 니 그것이 바로 니 모습이다.’ 예수님이 이야기한 그것이 정답 이예요. 예수님이 길 알려주면 우리가 그 길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 자신이 길이예요. 주님과 함께 있는 우리 자신이 길이 되게 하시는 거예요. 우리 자신이 작품이고.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믿으면 안 되고, 우리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보니까 우리 안에 누가 있어요? 나를 껍데기로 사용하시고 실제로 안쪽에는 주님의 영이 있어서 나라는 인간, 이 볼품없는 나라는 인간을 지금 가지고 일하시는 그 주님이 느껴질 때, 그 자체가 곧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 되는 겁니다. 왜, 그리스도만 증거 하기 때문에.

내가 만약에 내 자신만 관심 있다면, ‘주님만 길입니까? 나도 길이다.‘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주님만 진리입니까? 예수 잘 믿는 나도 진리다.‘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어디 사도들이, 사도 바울이나 사도 베드로가 언제 지 자랑 했습니까?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라 했죠. 항상 그리스도만 증거 했지 언제 자기 자랑 안 했잖아요. 안 했죠?

여기서 공식 하나 해봅시다. 성령이 임하면 시간과 공간도 떨어진다. 주머니나 훈장도 다 떨어져요. ‘내가 내일 그거하고 난 뒤에 다음에 뭘 하지?’ 그러나 성령 받아버리면 그런 미래 ‘뭘 하지?’ 이것이 의미가 없이 어디 가더라도 그리스도 사람으로 그냥 존재함 그 자체가 그리스도께서 만들어 낸 그 작품으로서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일 내가 이런 일 당하면 낭패인데.’ 낭패를 하던 니가 판단하고 니가 계산할 자격 자체가 우리한테는 없다니까요. ‘너구리라면 먹으면 암 걸리고 암 걸리면 내가 죽고 머리 빠지고 하는데.‘ 그런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자격이 우리한테는 없는 겁니다. ’내가 저 여자를 사귀면 내가 얼마나 행복할까‘ 라고 할 자격이 없어요. 그럼 저 여자하고 사귀지 말란 말인가? 아니에요. 사귀게 되면 사귀게 하시기 때문에 사귄 거예요. 부부가 원래 그런 거예요. 주께서 주선했기 때문에 만난 거지, 저 사람을 왜 만났지? 이유 없어요. 그때는 눈이 삐어서 만났지, 술김에 만났지 뭐. 술김에 만난 거예요. 뭐가 눈에 잘못 보여서. 앞은 안 보고 뒤만 보다가 앞보고 난 뒤에 실망이 반은 날라 가고 하죠.

시간과 공간이 자꾸 날라 가 버린 거예요. 다니엘이 소개했던 그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의 해석은 시간과 공간이 없어져 버려요. 그게 허용이 안 됩니다. 우리가 고민한다. 걱정한다. 하는 것은 항상 시간요소를 거기에 가미하고 공간요소를 가미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특히 우리교인들이 그런 게 많아요. 오후설교 기도하라 하면 ‘기도 못하는데, 그것도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데 거기다 기도 잘못하면 온 천지에 대대로 자자손손 우사데’ 하는 그게 뭡니까? 시간과 공간감이 갑자기 둘둘 말아버렸어요. 그래서 용감하게 기도하는 사람은 아주 용감하게 기도를 '예수 이름으로 주여 감사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내가 저 사람 앞에 서면 내가 무슨 말을 하지?‘라는 생각을 하지 마세요. 마태복음 10장에 나오는 이야깁니다. 그때 성령께서 너희에게 말할 것을 주실 것이다.“ 그런데 이 해석을 이렇게 잘못하면 안 됩니다. ’내가 저 사람 앞에 서야지. 왜, 성령께서 할 말을 주기 때문에.‘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그것도 지금 시간을 또 성경 용어로 뒤집어 쓴 거예요. 그냥 그 사람 앞에 가기 전에 그것까지 고민하고 있는 이 자체도 주님 보시기에 완벽한 주님의 자녀입니다. 그런 걱정을 하고 있는 모습 앞에도, 임금한테 붙잡혀 가기 이전에, 잡혀가서 어떻게 그것까지 걱정하는 나의 모습도 주님 보시기는 완벽해요. 항상 주님은 완벽해요. 우리 성도 보기에는 완벽해요.

바꿔치기 하는 장소, 항상 우리는 율법에서 나름대로 기하학적으로 정돈된 걸로 해서 뭘 바꾼다? 말씀의 자리에서는 ‘어디서 또 니 의야? 주님의 의지.’하고 십자가로 바꾸어주는 그 기능을 말씀이 그렇게 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의 명령과 지시들이 날마다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 우리가 잊어버렸지만 어려움을 당했을 때 다시 우리는 그 말씀이 ‘먹는 거 입는 걸 족한 줄 알라’는 거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다시 바꾸어주는 능력이 말씀 자체에서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고 했고, 해석을 한 거예요. 이건 어디 참고서보고 한 게 아닙니다. 구글 찾고 인터넷 찾아서 한 게 아니고 다니엘이 내뱉는 그게 진리가 되는 거예요. 이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아, 참 어려운 대목 나왔다. 끝도 되지 않았는데 이미 끝나버렸다. 이것은 수평적인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수직돼 있는 필름 통, 여기 바깥에 있는 시간에서 이건 극장의 하얀 스크린, 필름 통에서 광선을 보내서 필름 통을 틀어버리면 이 안에 뭐가 깔립니까? 필름 안의 내용대로 될 뿐이죠. 요걸 우리가 필름 통을 모른다 치면, 세상에 있던 모든 사건들이 주워, 주워서 집합을 시키면 결국 하나의 필름 통 안에 담긴다는 이야기예요. 그게 뭐냐 에베소서 1장 10절에 “세상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심이라“

당신의 나라가 바뀌는데 사람들은 바뀐 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아이구, 이 나라 소용없어. 이 나라 망했어. 이 나라 망했어. 하나님께서 다른 나라 준대.’ 이것만 걱정하지 말고 ‘누구십니까? 이 나라를 바뀌게 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그걸 물을 때 다시 필름 통으로 하나 되는데, 벨사살 왕은 그걸 믿을 수가 없죠. 그냥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더 나아가서 ‘다니엘 니한테 그런 지시를 시키신 하나님.’ 그럼 다니엘만 통하고 벨사살 왕은 통할 리가 없죠.

한번 정리해 봅시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어떤 흔적이 있습니까? 야, 이 질문은 목사 고시에나 낼 질문이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당신은 뭐로 압니까? 이 세상에 있는 흔적. 성령 말고, 성령이란 추상적인 개념 말고 지상에 있는 역사적 단어를 동원해서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납득이 되는 단어를 동원해서 그런 사물이나 사건을 동원해서 이래서 하나님이 계시다. 라는 것을 뭐로 어떻게 표현하겠습니까? 라는 질문을 던지면 뭐라고 답변하시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내가 여기 있습니다.’ 이걸로 하죠. ‘내가 여기 있다.’ 하면, 이건 로고스예요. 이건 헬라철학, 모든 철학은 존재로부터 신의 존재를 추적해 들어가요. 중세철학은.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내가 여기 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뭐로 바뀌어야 돼요? 내가 죄인, 여기서는 짐승이죠. 자기 선조 자기 할아버지 느부갓네살은 짐승 됐잖아요.‘ 그 짐승 됐는데 그 짐승 된 것도 모르고 벨사살 손자 당신도 또 짐승 될 수밖에 없는 짓을 했습니다.‘라고 지금 다니엘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고 해서 바뀌는 거예요. 여기 해석을 보면 26절에 보면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함이요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메네란 뜻은 끝났다, 끝났다. 데겔은 부족하다. 우바르신 그리고 베레스 바사 나라로 바뀝니다.

15절에 나온 사람들, 여러 박사들과 여러 똑똑한 사람들이 다니엘이 이렇게 해석하고 난 뒤에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하, 그 해석 내가 해석했으면, 내가 나라의 세 번째 자리 차지하고 아, 이 모든 보화와 땅을 내가 차지할 건데 나는 왜 보면서도 그 해석이 안 나오네.’ 원래 그런 거예요. 이게 축구도 그렇고 야구도 그렇고 모든 시합도 그렇고 원래 축구에서 한 골 넣고 난 뒤에는 그렇게 들어갔어야 된다는 것을 넣고 난 뒤에 알아요. 그런데 그걸 들어가기 전에는 ‘들어가야 될 건데, 들어가야 될 건데.’ 그냥 들어가면 ‘응, 원래 들어갔어야 했었어. 안 들어간 게 바보지.’ 이렇게 된다 말이죠.
그래서 축구 시합은 결론 보면 재미없다는 거예요. 재미가 없다는 것은 미리 예측을 못하기 때문에 저게 골인 될 수도 있고 노골 될 수도 있고, 그렇거든요. 홈런 될 수도 있고 홈런 안 될 수도 있고.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그래서 재밌는 거예요. 모르니까. 그런데 성도는 재미가 없는 이유가 뭐가 되던 그럴 수밖에 없게 돼 있어요. 모든 게. 그럴 수밖에 없다 하면 스토아학파, 운명 철학이 되니까 곤란하지만, 성경적으로 하면 우리는 뭐 할 수밖에 없다? 죄인일 수밖에 없고, 그 다음에 용서받을 수밖에 없다. 왜, 뭘 보고? 이게 중요한 거예요. 뭘 보고? 바로 자가!! 바로 이 십자가가 다니엘은 해석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해석이 되고 다른 왕들, 벨사살 다른 박사들은 백날 해봤자 다시 그 사람들은 이미 영화 끝나고 드라마 끝나고 축구 게임 끝나고 난 뒤에 뒤 늦게 와서 ‘아, 나도 그런 해석 할 수 있다.’ 이러는 거예요.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에스더에게 자기 사촌 오빠가 와서 뭐라 합니까? ‘니도 왕궁에 있다고 난을 피할 수 있는 게 아니고 너도 유대인이니까 당한다.’ 할 때 에스더가 뭐라 했습니까? 중요한 말 했죠. “죽으면 죽으리라“했죠? 우리가 그 시점에서 그걸 생각해야 될 건데, 에스더 다 보고 난 뒤에 ‘나도, 나도 죽으면 죽으리라. 했을 거다. 어차피 살 건데.’ 그게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그게 안 됩니다. 왜냐 하면 ‘죽으면 죽으리라’ 하면 진짜 죽을 수 있고, ‘살려주세요.’ 했더니만 더 살 수도 있고, 그건 아무도 모르죠.

아무도 모르는 것을 성도는 이미 다 알았어요.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결과가 되도 우리는 뭐가 되고? 우리가 죄인 되고, 우리가 어떤 죄를 져도 우리는 천국 가는데, 뭣 때문에? 바로 강도 옆에 있는 십자가. 그래서 강도가 신앙이 대단한 거예요. 강도도 지가 십자가 질 때 ‘어떤 일이 있더라도 당신은 나를 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여, 죽기 전에 저 좀 생각해 주세요.’ 이렇게 하니까 “니가 오늘 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강도가 훌륭하다는 말이 아니고 강도하고 자기하고 예수님하고 한 세트가 돼서 예수님은 어떤 자를 구원하느냐를 보여주는 연기자로서 강도를 그동안 강도 짓 해서 이 자리, 예수님 옆자리까지 오게 만드신 거예요. 그 강도가 바로 우리 모습입니다.

우리는 백날 살아도 뭐가 됩니까? 강도입니다. 강도인데 우리가 입에서 놀라운 말이 나와요. ‘주여, 오늘밤이라도 주께서 나를 생각해 달라,’는 이상한 고백을, 이건 학교서 배워 주지 않은 이상한 고백, MT가도 안 가르쳐주는 고백, 결혼생활 오래한다고 나오지 않는 고백, ‘여보 당신 나 버리면 안 돼’ 이런 소리는 나오지만, ‘주님, 주님이여, 저 버리지 마옵소서.’ 이런 고백은 이건 성령이 아니고서야 나올 수 없는 고백을 내뱉을 수 있도록 주께서 그렇게 우리에게 말씀으로 역사해 주시는 겁니다.

29절 “이에 벨사살이 명하여 무리로 다니엘에게 자주옷을 입히게 하며 금 사슬로 그의 목에 드리우게 하고 그를 위하여 조서를 내려 나라의 세째 치리자를 삼으니라 그날 밤에 갈대아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여기 죽는 이유는 역사학자의 주장에 의하면 벨사살과 그리고 나보니두스 두 사람은 마르둑 신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이렇게 마르둑 제사장에 의해서 살해당했다고 돼 있어요. 지금 일본천황은 누구한테 감시를 받느냐 하면 정부가 파견한 궁을 관리하는 그런 행정기관이 있어요. 거기서 감시를 받고 있는데 어떤 감시를 받느냐 하면, 일본천황의 법에 의하면 딸 낳으면 안 돼요. 딸을 낳으면 천황 제도를 멈춰야 돼요. 그런데 남자만 반드시 일본 천황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외교관 출신의 며느리가 현재 천황의 부인으로 들어갔는데 그런데 아들 안 낳는다고, 너무 압력이 심해서 딸 밖에 없어요. 이게 맘대로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우울증 걸렸어요. 그래서 지금 문제예요.

헤로도토스란 역사서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살해당했어요. 마르둑 신에 충실하지 않다고. 그러니까 천황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천황 제도가 더 중요한 거예요. 천황은 들러리예요. 왜, 일본인이란 정체성은 태양신의 자녀여야 되기 때문에. 이게 일본이고 우리한국도 단군의 자손, 뭔가, 뭔가 소속감 이런 게 있어요. 그것이 예수님의 성령을 받게 되면, 우리는 새로운 소속으로, 이 십자가의 혜택을 입는 새로운 소속으로 우리는 다니엘 같은 파견 근무를 하게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도 주께서 살아계셔서 저희들로 하여금 십자가를 고백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니 감사합니다. 그 십자가가 죽었다가 살은 게 무슨 큰 의미가 되느냐고 놀림 받는 이러한 시대에서 이런 고백이 늘 상 나올 수 있도록 매일같이 저희들을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