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다니엘5장1절(손가락 계시)121101-7강b -이 근호 목사
제 7강b
첫 번째 시간에 개인으로 보지 말고 하나의 공동체 집단으로 이것을 이해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집단에 소속된 모습으로 자기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는 겁니다. 이건 예수 믿는 사람도 자기 혼자서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하늘나라 공동체에 소속됨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이걸 중세나 그때 종교지도자들은 이걸 오해해서 루터나 칼빈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교회 없이는 구원은 없다. 이런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그 교회가 만약에 눈에 보이는 교회라면 아까 첫째 시간에 그걸 뭐라 했어요? 전부 다 이게 뭐예요? 상징이고 상징은 항상 기하학적, 정립 화, 정돈, 규격화된, 규격화 됐다는 말은 여기에 뭐가 들어간다? 법이 들어간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구원은 법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법은 오히려 죽이는 것이고 뭐로 합니까? 법 말고 뭐예요? 그냥 사랑이라 하면 안 되고 뭐는 아니고 이거다 했거든요. 사랑은 뭐의 저촉은 안 받는다? 법의 저촉은 안 받고 사랑으로 구원받죠. 요한복음 8장에서 현장에서 간음하다 걸린 여자는 율법으로서는 죽임을 당해야 되고, 돌에 맞아 죽어야 되는데 뭐로 구원받습니까? 용서로, 사랑으로 예수님에서 나온, 예수님의 공로에 근거한 데서 나온 사랑, 주님이 ‘그냥 봐줄게’ 이런 사랑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의 죽으심이 넘쳐흐르는 것, 자신의 죽으심의 효과가 그릇을 넘쳐서 흐를 때 그 죽으심에 근거해서 그런 사랑이란 말, 또 자유라는 말을 할 수가 있고 받아 챙긴 게 되는 거죠.
그래서 항상 주님의 사랑을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사전에 뭐를 집어넣습니까? 법을 집어넣어야 되고 법으로서 이런 상징과 기하학적인 이 모든 것이 다 인간으로서는 허물어져야 돼요. 그 인간이 생각했던 그 질서라는 것이 진짜 하늘나라 그 질서 앞에서는 그게 전부 다 저주 꺼리죠. 나는 깨끗하다. 나는 선하다. 착하다. 이 말 한마디가 뭐냐 하면, ‘나는 요런 법 안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나는 착할 수밖에 없어.‘라는 그것이 저주 받아야 될 짓이 된다 이 말이죠. 그 경계선이 허물어져야 돼요.
그래서 제가 첫째 시간에 공동체가 전체로 공격 받는다 이야기했죠. 그리고 두 번째 시간에서는 새로운 공동체의 속성이 이 손가락이 썼던 그 안에 담겨있다 말이죠. 손가락이 그냥 나타났습니까? 뭐를 썼습니까? 썼죠. 그렇다면 현재 이 공동체가 왕궁에서 파티를 열고 있잖아요. 자기 마르둑 신을 찬양하면서 뭐를 깔봅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바쳤던 제구들과 제사 기구들에다 술을 마시면서 우리 마르둑 신이 여호와를 꺾었습니다. 라는 거기에 여러분 다들 동의하시죠? 라고 새로운 공동체를 규격화해서 만든 거예요.
여기 초대받지 않은 손가락이 나타났죠. 나타난 것도 기겁할 문젠데 글씨를 썼으니까 글씨를 만약에 해석을 못한다면 그들은 공격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 다니엘을 부릅니다. 불러서 왕이 아주 아부를 하죠. 다니엘에게 아부와 칭송이 대단합니다. 15절에 보면 “지금 여러 박사와 술객을 내 앞에 불러다가 그들로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라 하였으나 그들이 다 능히 그 해석을 내게 보이지 못하였느니라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너는 해석을 잘하고 의문을 파한다 하도다 그런즉 이제 네가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면 네게 자주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네 목에 드리우고 너로 나라의 세째 치리자를 삼으리라” 이렇게 상을 이렇게 제시했죠?
그런데 원래 상이라 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고 좋은 것이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제안한 그 상이라는 건 누구한테 좋은 거예요? 기존의 그들 공동체들끼리는 그렇게 좋고 부러워할 만하고 흠모할 만한 상이 되는 겁니다. 그 이야기 듣고 17절에 다니엘이 뭐라 합니까? ‘저런 것은 나한테는 그딴 것 주지 마라. 당신들한테 그쪽 세계에서는 그게 아주 멋들어진 최고의 상이 되지만, 내 나라, 내가 속해 있는 나라에서는 그건 상 같지도 않은 것이고 그건 괜히 생색내는 것밖에 안 되니까 저한테는 주지 마시고 왕이 주고 싶은 사람한테 그냥 주세요.’ 했다 말이죠.
그러니까 지금 해석하기 전에 먼저 사전 준비단계가 많죠? 해석도 하기 전에 벌써 상 줄게, 상 안 받는다. 하는 그런 이야기를 했다 이 말이죠. 결국 이건 뭐냐 하면 이 벨사살 왕이 기어이 자기 나라는 손가락이 왔던 누가 왔든 자기나라는 건재하고 싶은 겁니다. 우리가 교회 나가고 싶어 나간다. 하나님 믿는다. 그런 마음 심보 가운데 뭐냐 교회 나오고 예수 믿는 것도 기어이 기존의 자기 세계는 안 다치고 싶고 그냥 든든하게 유지하고 싶은 그런 마음이 있기 때문에 가는 거예요.
신을 내편으로 끌어당김으로 말미암아 내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 안 다치게 할 수 있는 어떤 대비책을 마련하고자 교회 나오고 예수 믿고 그렇게 하는 거예요. 오늘 유튜브 녹화하면서 했잖아요.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을 어떻게 다루었다 했습니까? 강하게 다뤘습니까? 약하게 다뤘습니까? 약하게 다룬 거예요. 그것이 아버지가 진짜 아들에게 이 땅에서 아들에게 했던 최후는 진짜 아버지 능력만 의지하도록 약하게 만들었습니다. 절대로 자기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도록 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어디까지 약했습니까? 죽을 때까지 약했죠.
사람은 공동체에서 사는 법인데 예수님 곁에 누가 있었습니까? 다 가버렸어요. 부르투스나 뽀빠이건 다 가버렸어요. 예수님이 삼일 동안 그렇게 고생하고 그렇게 기적 일으키고 사랑을 베풀고 자비를 베푼 그 결과가 뭐냐, 다 가버린 거예요. 다 갈 때 뭐만 보이겠습니까? 오직 아버지의 능력만 보이죠. 그럴 때 아버지가 가장 아버지다운 거예요.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다 보낸 후에 ‘지금 니 고소한 자가 어디 있느냐?’ ‘아무도 없나이다.’ 그런데 여기에 죽었지만 느부갓네살과 벨사살은 끝장났습니다. 18절 봅시다. “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고 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이 그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였으며 그는 임의로 죽이며 임의로 살리며 임의로 높이며 임의로 낮추었더니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이거 보세요. 방향이 뭡니까? 예수님은 갈수록 십자가에 죽기까지 마음을 낮추었는데 느부갓네살은 갈수록 마음이 높아지는 거예요. 어떤 의미에서 사업이 망하는 것도 마음이 높아질 때, 뭔가 교만할 때, 뭔가 일이 잘 풀릴 때, 이건 저주받는 것과는 정 반대상황으로 갈 때, ‘나한테 저주가 끝난 모양이다.’ 이렇게 안심할 때 주의하소서.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를 다룰 때는 마음을 낮추게 다뤘는데 우리가 한껏 마음이 높아졌다는 것은 지금 성령이 다루는 게 아니고 지금 마귀가 그렇게 만든 겁니다. 더 이상 십자가가 눈에 안 보이게, 이제 니가 챙긴 것에만 보면서 흐뭇해하기를 우리를 독촉하죠.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돌이 떡 되게 해서 먹을 게 생겼다면 모든 돌이 다 떡으로 변했다면 그것은 뭐에 말려든 겁니까? 마귀한테 말려들었죠. 옛날 서양의 동화에 그런 게 있잖아요. 마이더스의 손이라 해서 만졌다 하면 금으로 변하는 거예요. 금을 그렇게 좋아했지만 막상 밥을 먹으려고 손을 대니까 그것도 뭡니까? 금이 됐을 때, 야, 금보다 더 귀한 게 있구나. 그게 밥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평소에 밥 먹을 때 금보다 못하다고 우린 생각하잖아요.
사람이 느부갓네살에게 주신 하나님의 지혜는 이렇습니다. 저것과 이것이 내게 소중하고 내게 중요하다. 라고 말하는 것은 실은 내가 내게 중요한 거예요. 그런데 느부갓네살에게 알려주기를 여기 21절에 보면 “인생 중에서 쫓겨나서 그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느부갓네살이 마음이 높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출발선이 뭡니까? 나는 무엇보다도 ‘나는 소중하다.’를 출발점으로 하니까 이게 사람들이 자기한테 복종하고 지가 ‘저 사람 죽여. 저 사람 살려.’ 로마 황제처럼 손가락을 내리면 죽이고 손가락을 올리면 살리고, 지 손가락 따라서 살리고 죽이고, 지가 모세 지팡이도 아니고 말이죠. 얼마나 재밌어요. 손가락 따라서 하니까 장난삼아 얼마나 재미있겠어요. ‘시상이 떠오른다. 여봐라, 저쪽에 로마에 불을 질러라. 오! 아름다운 시상이 떠오르는구나.’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정신병자지. 그래서 본에프가 히틀러를 죽이려고 안 합니까? 정신병자를 지도자로 앉혀놨다고.
하나님께서는 니가 너를 소중하다고 하는 이 사실 자체가 이건 하나님을 만나보기 전에 다른 사람들, 지보다 낮은 사람들, 지보다 못한 사람들 끼리에서 보니까 지가 우수하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높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막상 하나님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인생 중에서 쫓겨나서 그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들나귀와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실제로 느부갓네살이 풀을 먹었어요. 손톱이 자라나서 늑대처럼 되었고.
이럴 때 도대체 뭐가 소중한 겁니까? 뭐가 귀한 거예요? 세상이 누구 중심입니까? 그 전까지는 세상 모든 것이 자기한테 절하고 자기가 이러면 살고 이러면 죽이는 그런 자기를 보고 ‘역시 나는 나를 귀하게 여길만한 가치가 있어.’라고 여겼는데 하나님께서 등장하셔서 다니엘과 연관되어 등장하셔서 짐승이 돼 버리니까 정작 자기는 짐승만도 못한 존재죠. 짐승만도 못한 존재라는 것은 그야말로 있으나마나한 존재, 그래서 다니엘은 말합니다. 있으나마나한 존재를 왜 왕으로 세웠느냐, 그렇게 생각을 해야지, ‘나는 왕이다. 짐승 되면 안 돼.’ 방향을 그렇게 반대로 몰아가면 안 된다는 것이 다니엘의 이야깁니다. 뒤에 나오는 해석과 앞이 관련 있어요. 뒤에 나오는 손가락도 글씨 해석과 앞의 것이 의미가 있다고요.
출발점을 ‘나는 짐승인데 오늘도 왜 밥을 주십니까?’ 이렇게 돼야지, ‘나는 왕인데 반찬이 이게 뭐야?’ 이렇게 나오면 안 된다는 겁니다. 남편들 잘 들어놓으세요. ‘반찬이 이게 뭐냐, 주는 대로 먹어라.’ 풀이나 먹고 있어도 합당하다. 이렇게 생각을 하라 이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21절에 보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나라를 다스리며” 이렇게 돼 있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나라를 다스리게 된다면, 그러면 느부갓네살 왕이 이미 죽었지만 느부갓네살 왕이 하나님이 다스릴 때 가장 하나님이 다스림을 많이 느낄 때가 언제겠습니까? 바로 자기가 왕으로 있을 때가 아니라 짐승처럼 있을 때 가장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짐승인데 왕 되게 하면, 그때부터는 지 맘대로 죽여라, 살려라, 안 할 것이고, ‘하나님이여, 저 분 어떻게 할까요? 하나님이여, 저 백성 어떻게 할까요?’ 누구한테 묻겠습니까? 꼭 하나님한테 물어서 한다 말이죠.
그럼 누가 하나님 이예요? 진짜 하나님이 하나님이고, 자기는 하나님이 시킬 때만 의미가 있는 존재가 되죠. 그래서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예를 들면서 벨사살한테 하는 이야기가 지금 손가락이 나타난 것은 새로운 공동체에서 날라 온 손가락 이예요. 그 손가락에 의해서 벨사살 왕이나 느부갓네살 왕이나 뭘 배워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아야 됩니다. 그 해석을 드디어 24절에서 해석을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제가 그 정답을 말씀드릴게요. 하나님은 ‘바꾸시는 분’ 이예요.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바꾸어 주시는 분이다. 그러면 뭘 바꾼다는 말이냐, 어떤 포지션(position), 위치, 자리, 요 자리가 하나님이 하나님대로 나타나는 유일한 자리입니다. 이 자리에 느부갓네살 던졌다가 짐승 되게 해버리고, 이번에는 벨사살 던졌다가 손가락 나타나고, 그러니까 여기에 어떤 인간이 등장하게 되면 사람들은 이 자리하고 하나님하고 연결됐다는 걸 모르고, 이 자리가 내가 세상을 통치하는 자리라고 한 거예요.
쉽게 말씀 드려서 이 자리에 벨사살 왕이나 느부갓네살이 설 때에 여기 많은 사람이 복종하잖아요. ‘우리 왕이시여, 위대하십니다.’ 할 때 이 백성들은 요 자리를 위해서 필요한 백성들인데, 왕들은 오해하기를 이게 자기한테 복종하는 백성들이라고 오해하는 거예요. 자리가 중요한데,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자리를 짐승 자리로 만들 때 이 원래 자리는 하나님이 앉을 자리인데, 하나님 앉을 자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느부갓네살, 벨사살 왕을 이렇게 앉혔는데 이들은 전부 다 탈락하고 만 거예요.
그러면 이 자리가 하늘나라와 지상의 접촉 자리인데, 이 자리가 어떻게 하는가, 바로 말씀, 손가락으로 뭘 썼잖아요. 손가락으로 말씀을 쓸 때, 그 말씀의 자리라. 그래서 말씀에 합당한 사람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거예요. 그 손가락이 쓴 글 내용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신구약 성경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꼭 손가락이 나타나서 벽에 써야 압니까? 써 봤자 빌립보서 2장이야기고, 써 봤자 에베소서 3장 내용이고, 지금 손가락이 나타나서 써 봤자 시편이고, 하나님이 쓰신 그 모든 성경 해석은 요한복음 5장 39절에 의하면 모든 성경 해석은 누굴 이야기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벨사살 왕이 몰랐던 다니엘이 해석한 이 해석도 누굴 보여주는 해석입니까? 결국은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내용의 글이 쓰여 있는 겁니다. 왜 예수님입니까? 바로 뭡니까? 하나님과 유일하게 접선이 되는 이 자리는 실제로 나중에 결국은 누가 통치해야 돼요? 이 자리에 예수님이 앉아야 돼요. 왜, 예수님만이 말씀대로 합한 분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분은 왕이시기 때문에. 진짜 왕이 오기 전에 가짜 왕들을 많이 여기다가 주는 겁니다.
그럼 바꾼다 했는데 바꾸는 내용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수요일 날 이야기했던가요? 그런 이야기했죠. 홍해가 있다는 말은 홍해 안에 길이 있다는 말이 아니고 홍해로 인하여 길이 더 이상 하늘나라 약속의 땅과 지상의 땅과 통하는 길은 없다는 뜻 이예요. 그럼 길은 어디 있느냐, 만들어 줄 때 길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수요일 날 이야기했죠. ‘예수님은 나의 길이요.’ 한다고 안다고 해서 길이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라는 것은 예수님 쪽에서 길을 열어줘야 길이 되지, 우리가 길이라고 이해하고 믿고 해도 그건 길이 아닌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도를 길이 아닌 곳에다가 데리고 다닙니다. 그러니 환장합니다. 꼭 겨울철에 밭에 눈이 온 것 같아요. 평소에 밭은 길이 있잖아요. 길로 가면 되는데 눈이 덮여 버리면 길이 없잖아요. 전에는 요리요리 갔는데 이제는 어떻게 가느냐. 막 가로질러 가요. 가게 되면 간 그것이 뭐가 됩니까? 그게 자기 길이 되는 거죠.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앞장 세워서 무조건 밀어대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로마에 갈 때 길은 어떤 길이 있어야 됩니까? 풍랑이 일어줘야 돼요. 풍랑이 일어줘야 그 섬에 있는 토인이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 같으면 풍랑까지 일으키게 하면 너무 심하다. 로마에 무슨 일을 하러 가요? 주의 일을 하러 가잖아요. 그러면 특별 대우해서 주의 일을 하러 편하게 가면 되는데, 특별 대우한 것이 풍랑 일어나서 아슬아슬하게 거의 초죽음 되게 만들고 배도 다 깨지게 만들고 그게 특별대우입니다.
없던 길을 우리가 생각하는 길은 없애버리고 우리가 길 없다고 여기는 현장에 길이 새로 생겨나는 방식으로 우리를 데려가요. 그야말로 우리는 환장하죠. 그래서 작년에 믿었다고 그 믿음 우려먹을 수가 없어요. 그건 그때 뿐 이예요. 요단강 건널 때 홍해 가는 것처럼 백날 기다려봐야 길이 안 열립니다. 요단강은 요단강 방식으로, 홍해는 홍해 방식으로, 여리고성은 여리고 방식으로, 또 여리고 방식으로 법궤 들고 돌았다고 해서 아이 성 갈 때도 돌아봐야 열리지도 무너지지도 않아요.
왜 그러냐. 그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일회용이냐. 왜 한번만 사용하느냐? 그것은 우리의 미처 알지 못하는 죄가 새롭게 생산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새롭게 발생되고 생산되는 죄는 기존의 죄 사함 방식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공식 이예요. 5년 전에 감기 들어서 기도했더니만 감기 나았다. 5년 후에 그 방법 사용하면 쓸데없습니다. 마귀가 그 방법 하는데 안 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자기중심으로 기하학적 질서를 만들기 때문에.
그 질서에 동원되는 것이 뭐냐, 두 가지 요소가 있어요. 시간과 공간, 시간 의식과 공간 의식을 동원해서 내가 어느 장소에 갔더니만 은혜가 되더라. 어떤 때 기도했더니 기도가 잘 되더라. 딱딱 공식이 돼서 그것을 규격화해서 기하학적으로 상징화 시키죠. 그걸 하나님께서는 죄라고 보는 겁니다. 더 이상 하나님이 필요치 않게 만드는 그러한 요소가 우리 속에서 마귀로부터 올라온 거예요. ‘그만하면 잘 믿어, 이제부터 하나님께 꼭 할 거 없어. 이제 니가 갖고 있는 실력으로 니가 잘 믿으면 천당 갈 수 있어.’라고 지금도 마귀가 그렇게 목사들을 동원해서 그렇게 심화교육을 학습을 시킵니다.
하나님의 구원방식은 그런 게 아니에요. 항상 길은 없어요. 어제까지 알았던 길은 오늘로서는 무효입니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 아닙니까? 어제 양식은 어제까지만, 오늘 양식은 오늘까지만, 뭐 집에 쌀 있고 감자 있으면, 어제도 감자 깎아 먹었으니까 감자 먹고, 오늘도 감자 깎아 먹으면 그 양식이지, 아닙니다. 어제 감자 깎을 때 느꼈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오늘 감자 깎을 때 주님의 사랑이 달라요. 다릅니다. 새롭게, 새롭게 다른 사랑이 나와요. 사랑의 깊이와 높이가 날마다 다양하게 나와야 됩니다.
어떻게 사랑을 느끼느냐, 아까 배웠죠? 사랑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뭐를 전제로 한다 했습니까? 다 잊어버렸죠? 율법을 가지고 죄를 정죄하면서 그것을 용서해 줄때만 사랑이라 했죠. 사랑에서 사랑으로 이어지질 않습니다. 율법을 앞장세워서 하는 거예요. 율법은 뭐를 깨기 위함입니까? 우리가 정돈된 자기 의를 깨기 위해서 율법이 주어졌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돌아서면 자기 의 만들고, 그것도 율법으로 또 깨지고, 율법 또는 말씀, 또는 사도의 권면, 사도의 명령 같은 겁니다. 그래서 성경의 사도의 명령과 말씀이 있어야 돼요. 지시가 있어야 돼요. “무시로 기도하라” 이렇게 한 소리 해야 우리가 평소에 기도 좀 한 것 가지고 그것도 기도 했다고 우기지 않는 거예요. 무시로, 뭔 뜻입니까?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거죠. 기뻐하라, 어떻게? 항상 기뻐하라. 그냥 기뻐하지 말고 너~무 기뻐하라. 많이 기뻐하라. 안 그러면 브라우니한테 물려요.
오늘 아침에 이진이란 분이 우리교회 질문을 했어요. ‘목사님, 확신이 있는가, 시험해 보라 했는데 믿음의 확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질문을 그렇게 던졌어요. 고린도후서에 나오는 말씀처럼. 그래서 답변을 이렇게 했어요. 내 확신을 내가 가지려면 그 확신이 진짜 확신인지를 또 확신을 또 가져야 돼요. 어제 확신했는데 진짜 확신인지를 무엇을 담보로 해서 그걸 확신이라고 우길 수 있지? 확신을 보여주는 또 확신이 있어야 돼요. 그 확신을 보여주는 또 확신이 있어야 돼요. 어떤 때 확신이 될 때는 내일 그 확신을 뒷받침 할 확신을 준비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이건 백날해도 앞의 것 하나 깨지면 와장창 성냥개비로 탑 쌓은 것같이 앞의 성냥개비 빼버리면 위에 있는 확신 다 무너집니다. 그 말은 우리가 주의 일에 말려들었다는 겁니다.
이 확신 있으라는 이 말씀 작업을 주께서 하시는데 우리가 그 말씀 작업에 우리가 말려들었기 때문에 우리는 확신 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언제? 어제까지? 아니,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로서 새로운 그 말씀을 보여주는 겁니다. 내일되면 또 보여주는데 그걸 내가 어제 나에서 오늘 나까지 내 쪽에서 그걸 지속시키고 동일성을 유지하려고 할 때 우리는 뭐를 동원하느냐, 나름대로의 어떤 신앙적인 법칙과 법을 동원한다 이 말이죠. 그 법은 새로운 율법에 의해서 늘 깨어줘야 되죠. 깨어주게 되면 우리는 저주받아서 날마다 짐승이 되는 겁니다. 김 짐승, 박 짐승, 이 짐승, 짐승이 되는 거죠.
짐승 되니까 뭐만 먹어야 돼요? 고기 먹으면 안 되고 뭐 먹어야 돼요? 풀 먹고 손톱 깎으면 안 되고 손톱도 들 나귀처럼 길어야 되죠. 여기 나오잖아요. 성경에. 마음이 들짐승 마음 같아서, 우~ 늑대처럼 울부짖고 이건 우리는 돌아서면 우울하고 돌아서면 허무를 느끼고, 왜요? 괜히 가을에 석양이 지게 되면 쓸쓸해서 ‘죽어버릴까’ 그러고 그야말로 들짐승. ‘내가 이런 식으로 사느니 죽는 게 낫지.’ 하는 것은 내 운명을 누가 판단한다? 내가 판단할 자격이 나에게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로 사랑이 오게 되면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우~ 하고 들짐승이 의도적으로 매일같이 들짐승이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주의 일에 말려들었어요. 주의 말씀 구조에 말려들은 겁니다. 그게 새로운 공동체예요.
그래서 느부갓네살을 바꾼다는 말은 인간세계는 아무리 해봐야 이건 주님의 손에서 인사이동이 계속 일어나야 된다 이 말이죠. 그리고 이야기합니다. 25절에 “기록한 글자는 이것이니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여기서 참 신기한 게 뭐냐 하면 15절 봅시다. “지금 여러 박사와 술객을 내 앞에 불러다가 그들로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라 하였으나” 이렇게 돼 있죠? 지금 다니엘이 서울대학 나왔습니까? 서울법대 나왔어요? 지금 손가락으로 글씨를 후벼 파서 글씨가 여기 존재합니다. 글씨가 존재하는데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아 글씨를 해석하게 되면, 글씨가 해석된 새로운 공동체기 때문에 우리공동체 안에 신이 있는 거고, 해석을 못한다는 것은 기껏 우리공동체는 문제가 있는 공동체고, 글자가 나타난 공동체로부터 공격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아주 자멸해야 될 공동체다 말이죠.
그래서 벨사살 왕이 그 해석을 요구했을 때 문제는 박사들이 많고 똑똑한 사람이 많은데 이 글씨조차 해석은 고사하고 그 글씨가 무슨 글인지 읽지도 못했다는 겁니다. 그럼 다니엘은 똑똑합니까? 여러분, 다니엘은 똑똑하지 않습니다. 그럼 왜 다니엘은 그걸 보고 왜 해석을 했습니까? 오늘 강의 하이라이트입니다. 다니엘이 해석한 그게 해석 이예요. 다니엘이 어떤 참고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다니엘이 붙이면 그게 글이고, 다니엘이 해석하면 그게 해석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너무나 독선적 이예요.
예수님은요 너무나 독선적 그냥 독선적이 아니고 너~~무 독선적이다. 예수님이 선택했다 하면 끝난 문제고, 아무리 마귀가 달려들어서 잡아당겨도 지 힘만 부칠 뿐이고 절대로 그 영혼이 지옥으로 뺏기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선택하면 그걸로 ‘딩동댕~♬’ 전국노래자랑 이예요. 합격 이예요. 합격! 이미 합격이라. 송해가 뭐라 해도 ‘딩동댕~♬’ 하면 합격 이예요. 합격. 그게 합격이라니까요.
왜 사람들이 이걸 안 믿는지 몰라. 못 믿죠. 자꾸 헌금하고 전도하고 뭔가 착한 일하고 구제하고 봉사하고 자꾸 좋은 인상 받기 위해서 노력하는데 그건 자기가 자기관리구요. 자기가 자기관리 한다는 것은 지가 짐승 되기 싫다는 거예요. 율법이고 뭐고 나는 무조건 율법 통과하지 않고 무조건 사랑만 받으면 받아 챙길 그런 행세로만 하겠다는 거예요. 사랑은 율법을 앞장세워서 사랑하지 율법 없는 사랑은 없어요. 저주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왜, 우리 흙에 속한 몸을 어떻게 바꿔치기 해야 돼요. 말씀은 모든 것을 바꾸어주는 거예요. 바꿀 때 ‘나는 바뀌어졌다.’ 까불지 마시고 이 자리에 합당해야 돼요. 이 자리가 누구자리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진 합당한 사람으로 바꿔진 거예요. ‘나는 예수 믿었으니까 내 맘대로 산다.’ 이렇게 바뀌는 게 아닙니다. ‘오! 자리가 없었는데 오! 이 자리는 주님이 만든 자린데 이 자리가 십자가 자리구나.’ 십자가 증인 노릇하라고 바뀐 자리지, 지 맘대로 까불라고 바뀐 자리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다시 이야기합니다. 막 사세요. 그러니까 막 살란 말이죠. 어떤 자리에서? 바뀐 자리에서 막 살라는 거죠. 왜 막 살라는 말을 합니까? 막 사는 법을, 막 살도록 그 자리에서 주님의 능력이, 예수 안의 능력이 우리를 가만두지 않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가 막 안 살게 되면 우리는 관심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조심스럽게 막 안 산 나에게 관심이 가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 잘 믿고 끈질기게 믿고 있는 집요하게 믿고 있는 나 자신을 그토록 사람은 사랑하게 되니까, 이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자리에서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는 자리가 돼요. 그 자리는 지옥 갈 자리죠. 사람들이 이 말을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여, 저 어떤 인간입니까?’라고 물으면 ‘내가 그 자리에 있게 한 니 그것이 바로 니 모습이다.’ 예수님이 이야기한 그것이 정답 이예요. 예수님이 길 알려주면 우리가 그 길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 자신이 길이예요. 주님과 함께 있는 우리 자신이 길이 되게 하시는 거예요. 우리 자신이 작품이고.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믿으면 안 되고, 우리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보니까 우리 안에 누가 있어요? 나를 껍데기로 사용하시고 실제로 안쪽에는 주님의 영이 있어서 나라는 인간, 이 볼품없는 나라는 인간을 지금 가지고 일하시는 그 주님이 느껴질 때, 그 자체가 곧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 되는 겁니다. 왜, 그리스도만 증거 하기 때문에.
내가 만약에 내 자신만 관심 있다면, ‘주님만 길입니까? 나도 길이다.‘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주님만 진리입니까? 예수 잘 믿는 나도 진리다.‘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어디 사도들이, 사도 바울이나 사도 베드로가 언제 지 자랑 했습니까?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라 했죠. 항상 그리스도만 증거 했지 언제 자기 자랑 안 했잖아요. 안 했죠?
여기서 공식 하나 해봅시다. 성령이 임하면 시간과 공간도 떨어진다. 주머니나 훈장도 다 떨어져요. ‘내가 내일 그거하고 난 뒤에 다음에 뭘 하지?’ 그러나 성령 받아버리면 그런 미래 ‘뭘 하지?’ 이것이 의미가 없이 어디 가더라도 그리스도 사람으로 그냥 존재함 그 자체가 그리스도께서 만들어 낸 그 작품으로서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일 내가 이런 일 당하면 낭패인데.’ 낭패를 하던 니가 판단하고 니가 계산할 자격 자체가 우리한테는 없다니까요. ‘너구리라면 먹으면 암 걸리고 암 걸리면 내가 죽고 머리 빠지고 하는데.‘ 그런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자격이 우리한테는 없는 겁니다. ’내가 저 여자를 사귀면 내가 얼마나 행복할까‘ 라고 할 자격이 없어요. 그럼 저 여자하고 사귀지 말란 말인가? 아니에요. 사귀게 되면 사귀게 하시기 때문에 사귄 거예요. 부부가 원래 그런 거예요. 주께서 주선했기 때문에 만난 거지, 저 사람을 왜 만났지? 이유 없어요. 그때는 눈이 삐어서 만났지, 술김에 만났지 뭐. 술김에 만난 거예요. 뭐가 눈에 잘못 보여서. 앞은 안 보고 뒤만 보다가 앞보고 난 뒤에 실망이 반은 날라 가고 하죠.
시간과 공간이 자꾸 날라 가 버린 거예요. 다니엘이 소개했던 그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의 해석은 시간과 공간이 없어져 버려요. 그게 허용이 안 됩니다. 우리가 고민한다. 걱정한다. 하는 것은 항상 시간요소를 거기에 가미하고 공간요소를 가미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특히 우리교인들이 그런 게 많아요. 오후설교 기도하라 하면 ‘기도 못하는데, 그것도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데 거기다 기도 잘못하면 온 천지에 대대로 자자손손 우사데’ 하는 그게 뭡니까? 시간과 공간감이 갑자기 둘둘 말아버렸어요. 그래서 용감하게 기도하는 사람은 아주 용감하게 기도를 '예수 이름으로 주여 감사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내가 저 사람 앞에 서면 내가 무슨 말을 하지?‘라는 생각을 하지 마세요. 마태복음 10장에 나오는 이야깁니다. 그때 성령께서 너희에게 말할 것을 주실 것이다.“ 그런데 이 해석을 이렇게 잘못하면 안 됩니다. ’내가 저 사람 앞에 서야지. 왜, 성령께서 할 말을 주기 때문에.‘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그것도 지금 시간을 또 성경 용어로 뒤집어 쓴 거예요. 그냥 그 사람 앞에 가기 전에 그것까지 고민하고 있는 이 자체도 주님 보시기에 완벽한 주님의 자녀입니다. 그런 걱정을 하고 있는 모습 앞에도, 임금한테 붙잡혀 가기 이전에, 잡혀가서 어떻게 그것까지 걱정하는 나의 모습도 주님 보시기는 완벽해요. 항상 주님은 완벽해요. 우리 성도 보기에는 완벽해요.
바꿔치기 하는 장소, 항상 우리는 율법에서 나름대로 기하학적으로 정돈된 걸로 해서 뭘 바꾼다? 말씀의 자리에서는 ‘어디서 또 니 의야? 주님의 의지.’하고 십자가로 바꾸어주는 그 기능을 말씀이 그렇게 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의 명령과 지시들이 날마다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 우리가 잊어버렸지만 어려움을 당했을 때 다시 우리는 그 말씀이 ‘먹는 거 입는 걸 족한 줄 알라’는 거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다시 바꾸어주는 능력이 말씀 자체에서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고 했고, 해석을 한 거예요. 이건 어디 참고서보고 한 게 아닙니다. 구글 찾고 인터넷 찾아서 한 게 아니고 다니엘이 내뱉는 그게 진리가 되는 거예요. 이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아, 참 어려운 대목 나왔다. 끝도 되지 않았는데 이미 끝나버렸다. 이것은 수평적인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수직돼 있는 필름 통, 여기 바깥에 있는 시간에서 이건 극장의 하얀 스크린, 필름 통에서 광선을 보내서 필름 통을 틀어버리면 이 안에 뭐가 깔립니까? 필름 안의 내용대로 될 뿐이죠. 요걸 우리가 필름 통을 모른다 치면, 세상에 있던 모든 사건들이 주워, 주워서 집합을 시키면 결국 하나의 필름 통 안에 담긴다는 이야기예요. 그게 뭐냐 에베소서 1장 10절에 “세상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심이라“
당신의 나라가 바뀌는데 사람들은 바뀐 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아이구, 이 나라 소용없어. 이 나라 망했어. 이 나라 망했어. 하나님께서 다른 나라 준대.’ 이것만 걱정하지 말고 ‘누구십니까? 이 나라를 바뀌게 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그걸 물을 때 다시 필름 통으로 하나 되는데, 벨사살 왕은 그걸 믿을 수가 없죠. 그냥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더 나아가서 ‘다니엘 니한테 그런 지시를 시키신 하나님.’ 그럼 다니엘만 통하고 벨사살 왕은 통할 리가 없죠.
한번 정리해 봅시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어떤 흔적이 있습니까? 야, 이 질문은 목사 고시에나 낼 질문이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당신은 뭐로 압니까? 이 세상에 있는 흔적. 성령 말고, 성령이란 추상적인 개념 말고 지상에 있는 역사적 단어를 동원해서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납득이 되는 단어를 동원해서 그런 사물이나 사건을 동원해서 이래서 하나님이 계시다. 라는 것을 뭐로 어떻게 표현하겠습니까? 라는 질문을 던지면 뭐라고 답변하시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내가 여기 있습니다.’ 이걸로 하죠. ‘내가 여기 있다.’ 하면, 이건 로고스예요. 이건 헬라철학, 모든 철학은 존재로부터 신의 존재를 추적해 들어가요. 중세철학은.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내가 여기 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뭐로 바뀌어야 돼요? 내가 죄인, 여기서는 짐승이죠. 자기 선조 자기 할아버지 느부갓네살은 짐승 됐잖아요.‘ 그 짐승 됐는데 그 짐승 된 것도 모르고 벨사살 손자 당신도 또 짐승 될 수밖에 없는 짓을 했습니다.‘라고 지금 다니엘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고 해서 바뀌는 거예요. 여기 해석을 보면 26절에 보면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함이요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메네란 뜻은 끝났다, 끝났다. 데겔은 부족하다. 우바르신 그리고 베레스 바사 나라로 바뀝니다.
15절에 나온 사람들, 여러 박사들과 여러 똑똑한 사람들이 다니엘이 이렇게 해석하고 난 뒤에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하, 그 해석 내가 해석했으면, 내가 나라의 세 번째 자리 차지하고 아, 이 모든 보화와 땅을 내가 차지할 건데 나는 왜 보면서도 그 해석이 안 나오네.’ 원래 그런 거예요. 이게 축구도 그렇고 야구도 그렇고 모든 시합도 그렇고 원래 축구에서 한 골 넣고 난 뒤에는 그렇게 들어갔어야 된다는 것을 넣고 난 뒤에 알아요. 그런데 그걸 들어가기 전에는 ‘들어가야 될 건데, 들어가야 될 건데.’ 그냥 들어가면 ‘응, 원래 들어갔어야 했었어. 안 들어간 게 바보지.’ 이렇게 된다 말이죠. 그래서 축구 시합은 결론 보면 재미없다는 거예요. 재미가 없다는 것은 미리 예측을 못하기 때문에 저게 골인 될 수도 있고 노골 될 수도 있고, 그렇거든요. 홈런 될 수도 있고 홈런 안 될 수도 있고.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그래서 재밌는 거예요. 모르니까. 그런데 성도는 재미가 없는 이유가 뭐가 되던 그럴 수밖에 없게 돼 있어요. 모든 게. 그럴 수밖에 없다 하면 스토아학파, 운명 철학이 되니까 곤란하지만, 성경적으로 하면 우리는 뭐 할 수밖에 없다? 죄인일 수밖에 없고, 그 다음에 용서받을 수밖에 없다. 왜, 뭘 보고? 이게 중요한 거예요. 뭘 보고? 바로 십자가!! 바로 이 십자가가 다니엘은 해석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해석이 되고 다른 왕들, 벨사살 다른 박사들은 백날 해봤자 다시 그 사람들은 이미 영화 끝나고 드라마 끝나고 축구 게임 끝나고 난 뒤에 뒤 늦게 와서 ‘아, 나도 그런 해석 할 수 있다.’ 이러는 거예요.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에스더에게 자기 사촌 오빠가 와서 뭐라 합니까? ‘니도 왕궁에 있다고 난을 피할 수 있는 게 아니고 너도 유대인이니까 당한다.’ 할 때 에스더가 뭐라 했습니까? 중요한 말 했죠. “죽으면 죽으리라“했죠? 우리가 그 시점에서 그걸 생각해야 될 건데, 에스더 다 보고 난 뒤에 ‘나도, 나도 죽으면 죽으리라. 했을 거다. 어차피 살 건데.’ 그게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그게 안 됩니다. 왜냐 하면 ‘죽으면 죽으리라’ 하면 진짜 죽을 수 있고, ‘살려주세요.’ 했더니만 더 살 수도 있고, 그건 아무도 모르죠.
아무도 모르는 것을 성도는 이미 다 알았어요.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결과가 되도 우리는 뭐가 되고? 우리가 죄인 되고, 우리가 어떤 죄를 져도 우리는 천국 가는데, 뭣 때문에? 바로 강도 옆에 있는 십자가. 그래서 강도가 신앙이 대단한 거예요. 강도도 지가 십자가 질 때 ‘어떤 일이 있더라도 당신은 나를 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여, 죽기 전에 저 좀 생각해 주세요.’ 이렇게 하니까 “니가 오늘 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강도가 훌륭하다는 말이 아니고 강도하고 자기하고 예수님하고 한 세트가 돼서 예수님은 어떤 자를 구원하느냐를 보여주는 연기자로서 강도를 그동안 강도 짓 해서 이 자리, 예수님 옆자리까지 오게 만드신 거예요. 그 강도가 바로 우리 모습입니다.
우리는 백날 살아도 뭐가 됩니까? 강도입니다. 강도인데 우리가 입에서 놀라운 말이 나와요. ‘주여, 오늘밤이라도 주께서 나를 생각해 달라,’는 이상한 고백을, 이건 학교서 배워 주지 않은 이상한 고백, MT가도 안 가르쳐주는 고백, 결혼생활 오래한다고 나오지 않는 고백, ‘여보 당신 나 버리면 안 돼’ 이런 소리는 나오지만, ‘주님, 주님이여, 저 버리지 마옵소서.’ 이런 고백은 이건 성령이 아니고서야 나올 수 없는 고백을 내뱉을 수 있도록 주께서 그렇게 우리에게 말씀으로 역사해 주시는 겁니다.
29절 “이에 벨사살이 명하여 무리로 다니엘에게 자주옷을 입히게 하며 금 사슬로 그의 목에 드리우게 하고 그를 위하여 조서를 내려 나라의 세째 치리자를 삼으니라 그날 밤에 갈대아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여기 죽는 이유는 역사학자의 주장에 의하면 벨사살과 그리고 나보니두스 두 사람은 마르둑 신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이렇게 마르둑 제사장에 의해서 살해당했다고 돼 있어요. 지금 일본천황은 누구한테 감시를 받느냐 하면 정부가 파견한 궁을 관리하는 그런 행정기관이 있어요. 거기서 감시를 받고 있는데 어떤 감시를 받느냐 하면, 일본천황의 법에 의하면 딸 낳으면 안 돼요. 딸을 낳으면 천황 제도를 멈춰야 돼요. 그런데 남자만 반드시 일본 천황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외교관 출신의 며느리가 현재 천황의 부인으로 들어갔는데 그런데 아들 안 낳는다고, 너무 압력이 심해서 딸 밖에 없어요. 이게 맘대로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우울증 걸렸어요. 그래서 지금 문제예요.
헤로도토스란 역사서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살해당했어요. 마르둑 신에 충실하지 않다고. 그러니까 천황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천황 제도가 더 중요한 거예요. 천황은 들러리예요. 왜, 일본인이란 정체성은 태양신의 자녀여야 되기 때문에. 이게 일본이고 우리한국도 단군의 자손, 뭔가, 뭔가 소속감 이런 게 있어요. 그것이 예수님의 성령을 받게 되면, 우리는 새로운 소속으로, 이 십자가의 혜택을 입는 새로운 소속으로 우리는 다니엘 같은 파견 근무를 하게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도 주께서 살아계셔서 저희들로 하여금 십자가를 고백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니 감사합니다. 그 십자가가 죽었다가 살은 게 무슨 큰 의미가 되느냐고 놀림 받는 이러한 시대에서 이런 고백이 늘 상 나올 수 있도록 매일같이 저희들을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