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놀라지 않기 19091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9. 23. 07:12
2019-09-20 00:30:32조회 : 130         
놀라지 않기 190919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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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림 (IP:61.♡.247.43)19-09-22 06:28 
서울의존강의20190919a 베드로전서3장 6절(놀라지 않기)-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3장 6절

6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
7절,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아내가 남편의 스승이다’ 이런 뜻입니다. ‘남편은 아내한테 배워라’ 이 말이에요. 그럼 뭘 배우느냐? 연약함을 보여주는 그 아내의 모습을 보고, 네 자신의 토대를 이루는 하나님의 창조성이 연약함에 있다는 것을 배워야 된다.

연약한 데에서 우리 인간이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여기에 악마와 결탁이 되게 되면 무엇에서 벗어나려고 하느냐 하면 연약함에서 벗어나려고 해요. 연약함에서 벗어나면 그것은 완전함이고 완벽함이죠. 완전함, 완벽함이 되게 좋아 보인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럴수록 하나님이 창조했던 그 바탕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길을 가며 마주 오는데 얼굴이 어둡고 공포에 질리고 두려워하고 안절부절 못한다. 그 사람은 장담컨대 100% 완전과 완벽을 추구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완전과 완벽을. 사람이 대할 때, 눈을 볼 때, 표정을 볼 때 불안하거나 뭔가 공포에 서려 있는 것은 완전하지 못할까봐 벌벌 떨기 때문에 나오는 얼굴이에요.

하나님의 창조성을 가까이 보여 주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이거에요. 크게 쓰겠습니다. “겸손”. 겸손하면 마귀도 떠납니다. 겸손하면 마귀도 떠나요. 마귀 떠나면 무서울 게 아무것도 없죠. 두려울 게 없는 거예요. 겸손하겠다는데 뭐. 내가 겸손하겠다는데.

겸손한 사람에게 죄도 고마워요. 죄도 고맙다고. 죄를 아니까 점점 겸비해지고 겸손해지는 겁니다. 죄를 아니까. ‘그래, 내가 죄인이 바탕이지. 당연한 거지. 죄인이 뭐 잘난 체 해.’

죄인인데 겁나는 게 있어요? 죄인은 아무것도 두렵거나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왜? 못된 죄인이기 때문에. 베짱도 그런 베짱이 없어요. 대단한 베짱이죠. 못돼 처먹은 인간인 것을 내가 기꺼이, 당연히 내 진모습으로 받아 들이겠다는데 어떻게 해요, 받아 들이겠다는데. 마귀가 재미가 하나도 없어요.

‘너 잘난 존재야’ 하면 오히려 마귀를 나무랍니다. ‘니 자꾸 나한테 구라칠래?’, ‘너 훌륭하게 될 수 있어’ ‘자꾸 거짓말 할래?’, ‘너 지금보다 더 향상될 수 있고 높아질 수 있고 거룩하게 될 수 있고 하나님처럼 될 수 있어’ ‘너나 많이 해’

완전을 추구하는 순간부터 공포에 질립니다. 얼굴이 파래져버려요. 날씨도 별로 춥지도 않은데 얼굴이 파래집니다. 바들바들 떤다. 그리고 특히 남 앞에 연설할 때나 사람들 있는데서 이야기 할 때, 자기 의사를 분명하게 밝히고 내 뜻을 이야기 할 때 남들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벌벌 떤다는 것은 얼마나 평소에 우리는 겸손을 모르고 살아왔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얼마나 평소에 마귀에 농락당하고 살아 왔는가가 아주 티가 나는 거예요. 내가 할 말을 미리 준비하겠다는 것은 완전하고 완벽해서 남한테 지지 않겠다는 그 악마적 심리가 내 안에서 지금 자극받아 발동하고 있는 중입니다. 

망가지면 안된다는 거예요. 망하면 안된다는 거예요. 이런 건방짐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 주제파악도 안하고요. 성경에서 자기를 죄인이라고 한다면 죄인값으로, 죄인으로 살아야죠. 겸손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습니까?

뭔가 가졌는데 겸손하면 어려워요. 나는 겸손 안해도 되는데 또 목사님이 겸손하라고 하니까 겸손할께요. 이것은 겸손한 것을 빌미로 해서 겸손마저 장착한 완전추구를 이야기 하는 겁니다. 이것은 아주 교만하기 짝이 없어요. 겸손을 앞장세운 교만의 극치. 극치의 교만입니다. 교만의 종결자. 이게 겸손이에요. 일반 사람들이 말하는 겸손은. 교만의 종결자가 겸손이에요.

겸손하면 얼굴이 편해야죠. 두려움이 없어야죠. 내일 일을 걱정 안해야죠. 겸손한테는 이미 겸손 자체가 망했기 때문에 새로이 망한다는 건덕지가 추가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지금 망해져 있기 때문에요. 지금 걸레거든요, 쓰레기고. 걸레인데 더 찢을 일 있어요?

성경을 보기 전에, 그리고 세상을 우리가 살면서... “목사님, 세상을 인간은 어떻게 삽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공포에 쫓기며 살아 갑니다. 무서움에 쫒기며, 무서움에 휘둘리면서 살아가요. 벌벌 떨면서 살아가요. 아무도 비난하지 않고 아무도 쫓아오는 사람도 없고 아무도 누가 뭐라 하는 사람 없어도 본인이 바이브레이션이야. 벌벌 떨어, 늘. 뭔가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살아 갑니다.

한 자 한 자 글 쓸 때마다, 누구한테 전화하고 수다 떨 때마다 그게 전부 다 두려움에 진동한 대화, 그리고 발언, 단어들이 튀어 나옵니다. 목사가 설교할 때도 마찬가지고, 교인들이 설교 들을 때도 마찬가지고. “목사님 오늘 너무 심하게 다그치면 안됩니다.” 막 벌써 벌벌 떨어요.

마귀가 그처럼 인간을 너무 높여 놔가지고...너무 높여 놨어요. 그리고 모든 세상의 남자들이 다 그래요. 남자들이 하는 것은 낮아지기 시합이 아니고 누가 더 높으냐의 경쟁에 남자들은 내몰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낮아짐의 전쟁터가 아니라 누가 높아질 수 있느냐의 전쟁터에요.

뭐 여자들이야 가정에서 살림만 사니까 남자들이 어떤 세계 속에서 정신적으로 힘드냐를 옛날에는 몰랐었었죠, 옛날에는. 그런데 지금은 여성들도 교육을 받아 가지고 배운 지식과 기술을 돈으로 바꾸기 위해서 세상에 뛰어들거든요. 할 수만 있거든 돈 벌어라, 할 수만 있거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돈 벌어라. 왜요? 돈이 있어야 높아지니까.

바보에요. 겸손 쪽으로 내려가야 되는데, 이게 우리의 창조의 원형인데, 겸손 쪽으로 내려가야 되는데 악마가 자꾸 부추겨서 내 마음이 행복하고 감사한 마음이 있는 쪽이 아니고 그것과는 대치가 되는, 반대쪽으로 자꾸 몰아세우는 거예요. 자꾸 몰아세워요.

꼭 천사가 롯의 가정한테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뒤돌아보지 마라.” 뒤돌아보지 말라고 주님께서 소돔과 고모라 멸하실 때 뒤돌아보지 말라고 했는데 그것을 마귀가 그대로 써먹죠.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저 최고의 자리를 향하여 앞면만 보이고 뒷면은 보이지 마라. 뒤돌아보지 마라. 계속해서 달려가고 달려가고 추구하고 추구하는 거예요.

다시 합시다. 사람이 성경을 얼마나 알고 기도를 얼마나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거울을 보라. 사람을 단독적으로 놓고 볼 때에 그 사람의 얼굴에서 편안함이 없다는 것은 뭐냐 하면 그만큼 겸손하지 않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어디에도 겸손 배울 데가 없어요. 왜? 모든 자가 원없도록 교만하지 못해서 환장을 한 세상이기 때문에. 높아지는 것을 참이고 선이고 진리로 아는 그 시대에서 어느 누구에게 겸손이 주는 편안함과 감사와 고마움과 행복을 아무도 가르치거나 얼굴로 내비춰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요. 전부 다 잘난 맛에 살아가거든요.

죄는 죄대로 지으면서 죄 아닌 척하면서, 나 죄 안 지었다. 이렇게 하고 있다는 말이죠. 아내가 한 것 나 모른다. 어디서 많이 듣던 명언 아니겠습니까? 난 모른다 이래요. 안다 했으면 그 사람 얼굴이 참 편할 건데요. 아내 한 것 저도 알아요. 나도 한 통속이고. 하면 얼굴이 굉장히 해같이 빛날 건데. 아내 한 것을 난 모른다고 하니까 햇빛이 핏빛이 되고 말았어요. 우리는 안그렇습니까? 뭐 누구 탓할 것도 없지요.

‘겸손하라’로 가야 되요. ‘높아지라’가 아닙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겸손의 반대말은 뭐라고 했어요? 겸손의 반대말은 완전함 또는 완벽함. 흠이 있으면 자기가 돌아 버리고 미쳐 버려요. 내가 그런 실수를 하다니. 내가 칫솔을 잃어버리다니, 세상에 이런 일이. 겸손하라고 잃어버린 거예요, 겸손하라고.

‘너는 덜렁대도 괜찮아’ 이거에요. ‘너는 덜렁대면 안된다’가 아니라. 우리는 항상 세상에서 반대로 배웁니다. 그러나 세상은 악마가 있으니까 악마가 우리의 진짜 하나님의 창조의 모습과는 다른 길로, 계속 ‘보지 마, 뒤돌아보지 마.’ 계속 그 쪽으로 몰아 넣어요. ‘너는 실수 안할 수 있어. 너는 지금보다 더 향상될 수 있어. 너 지금부터 우수할 수 있다고. 그럼 넌 성공할 수 있어.’

일단 들으면 기분은 좋은데 얼굴은 벌써 시커멓게 되어 가요. 본인도 불편하고 보는 사람도 불편하고. 얼굴에 편안이 없고 안절부절하고 불안불안하고. 말을 해도 막 더듬고. 혹시 내 말의 진위가 상대방에게 들통날까봐 바들바들 떨고. 내 말하는 본색이 노출될까봐. 그 뜻이 누출될까봐 어쩔 줄을 모르고.

그래서 겸손하지 않은 인간들은 자꾸 사과해요. 용서를 바라고 있습니다. 희한하죠. 왜 자꾸 타인에게 용서를 구하고 사과합니까? 완벽에 완벽을 기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렇게 될 때 그 사람이 행복하던가요? 살림살이 나아지던가요, 그래서?

이 세상에 어디에도 겸손을 가르쳐주는 데가 없어요. 혹시 신정네거리에 겸손학원 이런 거 있던가요? 그런 거 없죠. 모든 학원들은 앞에 교만이 다 붙어 있어요. 대입학원. 뭡니까? 대학에 들어가면 인간답고 떨어지면 인간답지 않다는 걸 벌써 앞에 뉘앙스를 걸치고 있잖아요. 또 피트니스, 아름다운 몸매를 원하십니까? 학원. 아름다운 몸매가 높아지는 거잖아요. 내 몸이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사람은 자기 몸이 뚱뚱하면 자기가 용서가 안 돼.

그래서 인간의 삶은 늘 불안한데 왜 불안하느냐 하면 이겁니다. ‘이래서는 안된다’ 하고 자기를 자책해요. 채찍질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같잖치도 않아요. 같잖치도 않죠. 웃기죠. 맹탕이라도 너 괜찮아, 맹탕이 너한테 딱 맞아. 개코도 아무 것도 없는 게 너한테 딱 맞다고, 지금 네 모습에.

그런데 ‘아니야, 이러면 안돼’라고 누가 이야기 해주더냐. 그게 악마가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악마가. 이 세상이 그렇게 가르친 거예요. 겸손 자리를 확 빼버리고 겸손 자리에 나의 완벽함과 잘남으로 인테리어를 새로 했어요. 인테리어를 새로 해버린 거예요. ‘나는 낮아져도 마땅하고 죽어도 마땅하고 없어져도 마땅하고 아무 것도 아니라도 그게 마땅하고 그 마땅함이 나는 너무 행복해’라는 그런 책도 없을뿐더러 그런 책이 있다면 그런 책 읽다가 갑자기 치워 버리고 ‘돈 버는 비법’ 이런 거 있잖아요. 그런 책과 바꿔서 독서하는 것과 똑같은 사고방식이에요.

나는 겸손하다는 게 이것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행운이 찾아온 거예요. 집 안에 돈이 몇 억 있든 몇천 있든 그건 관계없어요. 사람이 겸손이 좋다는 그런 인식은 정말 이건 성령 아니면 누가 가져다 주겠습니까? 하나님의, 예수님의 마음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집어넣지 아니하면 난 겸손보다 더 좋은 게 없어, 최고야 최고. 정말 이것은 천만, 억만금보다 더 귀한 걸 받아서 감사합니다. 감사가 절로 나오게 되어 있죠.

지금부터 좀 어렵게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있느냐, 성도는 왜 있느냐. 인간은 살아 있으면서, 말씀의 내용이 어떠냐를 살아 있으면서 보여 주는 기회를 갖고자 우리가 이 땅에 살아 있는 겁니다. 나의 우수함이 아니고 말씀이 어떠하냐를 나타내기 위해서 살아 있는 거예요.

내가 죽어서 없어지기 전까지는 살아 있으면서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 나를 통해서 나타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성도가 죽으면 그것은 뭘로 교체되느냐 하면 온전히 말씀과 교체되겠죠.

성도는 교체되기 전에 이미 말씀이 내장되어 있고 그 내장된 말씀이 성도를 통해서 표출되고 있고, 죽으면 인간은 풀이기 때문에 죽기 마련인데 죽으면 영원한 것은 뭡니까, 영원한 것이? ‘아 역시 말씀은, 하나님 뜻은 이거였구나’ 하는 것이 그 죽음을 통해서 바깥으로 드러나죠. 살아 있을 때도 드러나고요.

그래서 살아가는 이유는 죽어서 주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으면서 주와 함께 있는 그러한 증거들 또는 흔적들을 보여주기 위해서 성도가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에서 여기 성도가 몇 명 나옵니까? 3장 6절~7절에 성도 두 사람 나오죠? 누구하고 누구죠?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오죠.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6절 뒷부분에 보면, ‘아무 두려움 없이’ 그다음 뭐죠? ‘놀라지도 아니함’이죠. 놀라지도 아니함이 아브라함이 보여주는 속성이란 말입니까, 사라가 보여주는 속성이란 말입니까? 사라가 보여주는 속성이죠. 놀라지도 아니함. 뭐 놀랄 게 있어야 놀라죠. 왜? 겸손하니까.

사람이 교만하게 되면 내 가진 것 다 거덜날까봐 벌벌 떨거든요. 그런데 겸손한 사람 같으면 이 세상에 귀신을 만나도 안 무서워요. “안녕 귀신, 잘 있었어? 내가 존재하는 것처럼 너도 존재하는구나. 성경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다 그리스도를 위해서라고 하는데 네가 보이지 않는 거구나. 아우 참 신기하여라. 보이는 나도 주를 위해서 살지만 보이지 않는 악마 너도 주를 위해서 만들어졌구나, 아이 참 신기하여라.”

그렇게 되지 갑자기 십자가 찾아 목걸이 해가지고 ‘사탄아, 물러가거라.’ 말도 안되가지고 말도 막 더듬거리면서 마늘 가져오라고 해서, 요새 마늘 얼마나 비싼데, 마늘 사가지고 던지고 십자가하고 어디 신부 퇴마사 없나, 영화배우 안성기 막 모셔 와가지고... 세상에 라틴어에 맥 못추는 그런 마귀가 어디 있어요? 마귀가 싱긋이 웃으면서 “교만한 네가 내 부류야.” “하나님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그러면 “네나 내나 마찬가지야, 마귀의 종이면서.”

아니 귀신을 왜 쫓아야 됩니까? 가만히 놔두지. 아까 그랬죠? 겸손이라는 것은 뭐도 좋아한다? 뭐도 기뻐한다? 죄도 기뻐하죠. 죄가 있으매 겸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죄가 있으매. 내가 전환하는 순간, 그렇게 안되던 겸손이 내 죄를 아는 순간 한꺼번에 고개가 팍 숙여지네요.

고개 숙어지고 깨지는 그 행복, 그 편안함. 무게중심이 높은 데에 있지 않고 낮은 데에 있으니까 마귀가 와도 무섭지 않아요. 여기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놀라지도 않아. 남편된 아브라함이 누구한테 배워야 되느냐면 사라한테 배워야 되요, 사라한테. 놀라지도 않아.

목사님, 성경을 몇 독해야 은혜 받습니까? 기도를 며칠 해야 되고 금식을 얼마나 해야 되고 헌금을 얼마나 해야 되고 목사님 섬겨야 되고 교회를 몇 년간 다녀야 은혜 받습니까? 하는데, 은혜란 그냥 내가 아무것도 아닌 죄인인 것을 아는 순간 그 은혜라는 목표 자체도 날아가 버려야 겸손이에요. 내가 가져야 되고 도달할 목표 자체도 없어져야 되요.

그래야 겸손이죠. 어떤 목표가 있으면 그게 겸손입니까? 도달할 어떤 실적을, 가져야 될 실적을 자꾸 얼쩡거린다면 그게 겸손이겠어요? 미흡함이고 미흡함은 바로 교만이죠. 자책하게 되니까.

아, 딸 하나 낳아야 되는데. 딸 낳았으니까 이번엔 아들 낳아야 되는데. 그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임신해보니 아들인데요. 처음에는 딸, 이번에는 아들. 내가 그랬죠. “고만 낳으래이. 됐다.” 예상해서 아들이 와버리면 교만입니다. ‘역시 나는 하나님 보시기에 괜찮은 존재임이 증명되었어, 확인되었어.’ 이렇게 되잖아요.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증명했습니다. 너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러니 겸손하라. 그걸로 이미 증명이 되어 있어요.

제가 오늘 강의 처음부터 계속 겸손이야기 했고 그 겸손이라는 것은 지식이 아니고 얼굴 딱 보면 안다고요. 불안에 떠는지 눈빛이 뭔가 이상한지. 알 수 없는 정신적 프레스에 의해서 늘 눈알이 피곤한지. 눈빛이 피곤한지. 얼마나 교만했으면 피곤해할까요.

마귀가 우리의 방향을 반대방향으로 잡아줬어요. 너는 하면 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자꾸 그쪽으로 겸손이 없는 쪽으로 우리 인생을 몰아갔습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마귀적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마귀적 세상은 무슨 세상이냐 하면 남자의 세계에요. 이제부터 슬슬 어려워지는데 또 어려워지고 해서 교만하면 안되는데...

남성의 세계에요, 이 세상은. 이 세상에서 가장 평범하면서도 신기한 게 뭐냐 하면 인간이 남자 아니면 여자로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남자/ 여자, 여자/ 남자를 우리가 나는 남자고 나는 여자고 뭐 이렇게 하겠죠. 그러나 말씀은 남자, 여자를 만들어 놓고 남자 없애고 여자 없애 버립니다. 원형으로 돌아가요, 원형으로. 원형으로 돌아간다고요.

나는 남자라는 이유로라든지 또는 여자라는 이유는 용납이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 남자 따로 있고 여자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왜냐면 어차피 말씀에 의해서 이것은 삭제되어야 되고 날라가 버려야 될 개념입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마태복음 15장 21절에 보면 거기부터 나오거든요.

마태복음 15장 21절에 보면,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여자 하나가 나왔죠. 그 당시는 남성의 세계이기 때문에 여자 하나가 나왔다는 것은 일단은 여자에 대해서 남자들이 여자를 볼 때 제일 먼저 여성다움의 잣대는 나대는지 안나대는지를 보는 거예요. 얼마나 여자가 똑똑하냐, 훌륭하냐 그런 잣대로 보는 게 아니고. 집안에서 밥이나 하고 아이나 보지 뭐하려고 운전하고 차몰고 나오냐 이런 잣대거든요, 남자들은. 남성의 세계. 너 때문에 개인택시 영업 수입 오르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그러죠. 요새는 안그렇지만 옛날엔 그랬다 이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남성을 내세우는 게 아니고 여성을 딱 내세워서 여성과 직접 주님을 만나게 합니다. 여성과 직접. 그리고 하는 말이 마태복음 15장 22절,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라고 할 때 예수께서 한 말씀도 하지 않았거든요. (마태복음 15장 23절,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그런데 2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 여기서 그 유명한 말씀이 있지요. 25절,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절,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절,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자, 개라는 것은 일단 사람은 아니에요. 사람 부류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사람보다 천하고 사람보다 못하고. 개한테는 은혜 줄 건덕지가 없어요. 그래서 이방여인을 뭐로 보느냐 하면 개로 취급해가지고 ‘인간도 아니다’라고 제껴 놨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뭐를 붙들었냐 하면 주님께서 던져버린, 인간만 남기고 ‘개는 저리가’ 하고 개를 인간부류에서 집어서 인간 세상 자체에서 던져 버렸는데 그 던져진 개의 자리에서 그 여자가 이야기합니다. 그래도 ‘혹시 주인, 사람들 있던 그 음식상에서 떨어지는 그 음식이 개의 영역에도 혹시 주어질 수도 있는 문제잖아요’ 라고 이야기해요.

다시 말해서 이것은 ‘개라고 여기는 것이 주의 뜻이라면, 제가 바로 개 맞습니다’ 하는 거예요. ‘사람을 보고 개라고 하는 것이 그게 주님의 규정이라면, 그 규정은 흔쾌히 제가 받아 들이겠습니다’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규정했다는 것은 내가 뭐를 요구하고 내가 뭐를 좋아한다는 그것을 깡그리 나는 버리겠다는 거예요.

‘주님이 나를 규정하는 그 규정으로 저는 살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만 해도 저는 감지덕지합니다.’ 하는 뜻이에요. 주님의 규정. 그러면 주님이 하시는 일은 뭡니까? 인간만 살리고 개는 살리지 않는다는 게 주께서 오신 일이거든요. 그렇죠?

그런데 그 개가 떨어져 나가도 행여나 개도 무엇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건데 그것은 주인 상에서 떨어진 음식이 개한테 올 때, 비로소 개지만 주인의 상에서 인간이 먹던 떡을 먹는다는 점에서 그 음식을 통해서 그 집안의 개로 엮일 수 있는 기회는 부여받을 수 있잖아요. 그런 찬스는 올 게 아니겠습니까? 그 찬스 쓰시면 안됩니까?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 이유는 뭡니까? 주님이 하신 일을 100% 인정하는 거예요, 주님이 하신 일을. 인정하고 그 주님이 하신 일, 주님이 하신 일을 인정하는 속에서 개라는 것이 따로 영역이 되어 있으니까 제가 그 개 자리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기다리면 주께서 개라고 지칭하는 그러한 본질이 이 ‘개’인 나에게로 덮치게 되면 비로소 나는 주님이 하는 규정에 합류가 될 수가 있죠. 인간이 아니고 개로서 합류가 되죠, 개로서.

그렇다면 자기가 개라고 인정하는 이 규정은 무슨 규정을 완전히 포기한 거예요? 내가 뭐 되야 되겠다는 거. 나는 이래야 만족하겠다는 그 자기 생각이 어떻게 됩니까? 완전히 그걸 빼버렸죠? 그걸 제껴 버렸잖아요. 그걸 포기해버렸잖아요. 그럼 그 빈자리에 뭐가 들어오겠습니까? 주님의 규정만 흘러 들어오겠죠?

그렇게 해놓고 오늘 본문 베드로전서 봅시다. 3장 6절. 그렇게 되면 주님께서 개라 지칭하는 것은 앞에 뭐가 있다? 주인과 개죠. 마태복음 15장에서 개 맞은 편에 뭐가 있었습니까? 주인이죠. 주인의 상 부스러기니까 주인이 있잖아요.

그런데 베드로전서 3장 6절에서 사라가 남편보고 뭐라고 합니까? 주인이라고 하죠, 주인. 이렇게 겸손할 수가 있습니까? 주인이라니. ‘나에게 주인이 있는 즐거움을 허락해주옵소서’ 이런 뜻이죠. 이 말은 내가 단독적으로 나의 주인이 되고 싶지를 않습니다. 남들이 나를 평가할 때 잘했다, 못했다, 수능 몇점 나왔느냐, 아이큐가 얼마냐, 집은 몇평짜리 사냐? 라는 모든 규정을 저는 안들은 걸로 할래요. 키는 얼마고, 결혼 했고 안했고 하는 이 모든 규정을 나는 일체 안들은 걸로 해요. 왜냐하면 그들은 나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저는 주인이 하는 규정만 흔쾌히 내 규정으로 받아 들이겠습니다. ‘주인이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겠나이다’ 하는 마음이죠. 이게 뭐냐 하면 겸손이죠. 그러니 겸손은 자기 방어책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자기 방어책이 없죠. 남들이 뭐라 해도 자기하고 상관없는 이야기니까. 잘생겼다 해도 못생겼다 해도 조금만 노래 하나 잘 지었다 해도 모든 이런 평가도 관심이 없죠. 자기에게 해당 사항이 없죠.

주인이 뭐라고 하는 게 중요하지 주인이 아닌 자가 뭐라고 하는 것에 신경 쓸 필요 없잖아요. 그러니까 사라는 놀랄 필요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놀라지 아니함이에요, 놀라지 아니함. 놀라지 아니함이고 그 앞에 있는 건 뭡니까? 두려움 없고 놀라지 아니함이고. 이 마음이 어떤 마음이에요? 겸손. 이게 겸손이죠.

이게 겸손인 거예요. 겸손은 내가 있다, 없다? 내가 없는 거예요. 따라서 여자지만 결국 여자를 통해서 예수님과 직접 만나서 보여주는 것은, 주인과 개의 모습을, 주님은 이방여자를 통해서 주인과 개의 관계성을 드러낸 거죠. 그렇다면 원래 이스라엘이 이 관계여야 한다 이 말이죠, 원래부터.

주인과 종의 관계가 되어야 되는데 정작 유대인들은 그런 관계를 못 내놓고 귀신들린 여자가 주인과 개라는, 주님이 원하는 관계성을 드러내잖아요. 그러니까 그 여자에게 귀신들린 딸이 있다는 것은 어떤 겁니까? 고마운 일이죠. 왜? 겸손케 했으니까. 자기 자신의 주제파악을 했으니까 얼마나 고마운 일이에요. 딸이 귀신들린 것 때문에 내가 더 높아진다던지 완전해진다던지 우수한 그러한 생각 자체를 애초부터 나는 그 쪽으로 가서는 안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어느 쪽으로 가느냐? 남자, 여자 날라가고 인간 쪽으로 가서 인간도 날라가 버리죠. 인간도 아닌 거예요. 인간이 아니면 제로가 되겠죠. 그러면 제로는 무슨 존재냐? 나는 무슨 존재냐? 없는 존재에요. 나는 없는 존재.

단독적으로 나는 없는 존재고 ‘내가 있다’하는 것은 그냥 ‘내가 있다’고 하면 안돼요. 누구의 개로 있는 거죠. 주인님의 개로 있지 단독적으로 내가 개라고 하면 안돼요. 또 사라 같으면 남편, 언약의 사람의 아내지 ‘나는 여자로서 있다’하면 안돼요. 여자, 남자 규정이 다 날라가 버려야 되요. 인간이라는 규정도 날라가 버려야 되요.

새로운 관계는 뭐냐 하면 있음 vs 없음으로 묶어지는 관계, 이 관계를 지금 사라가 남편 옆에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관계를 사라가 보여주지만, 사실은 사라한테 누가 배워야 된다고 했습니까, 제가? 강의 처음에서. 아브라함이 배워야 되죠.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계시고 나는 그 앞에서 없는 존재로도 충분해요. 아니 없는 걸로 충분한 게 아니라 없는 게 맞아요. 없는 식으로 주님과 관계 지어지는 겁니다, 없는 채로. 어차피 인간은 있다가도 없어져야 되니까.

아까 그랬죠? 죽기 전에 뭔가 보여준다고 했죠? 이제 여러분 아시죠? 우리가 죽기 전에 뭘 보여 줍니까? 우리 주인님을 보여줘야 되요. 아브라함한테는 주님을 보여 주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주님을 보기를 원했으니까.

어렵다 하지 마세요, 겸손한 사람은 다 되요, 이거. 뭐 새롭게 시도할 필요 자체가 없어요. 겸손 자체가 이 관계를 발생하고 있는 중입니다, 겸손 자체가. 전혀 어렵지 않아요. 아무것도 아닌 걸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데 그게 뭘 어려워요.

수학 문제 100문제 내놓고 푸세요. 다른 사람은 시간 모자란다고 하는데, 이름만 쓰고 뭐 10초도 안되서 내버려요. 너 100문제 수학문제 왜 안 푸나? 나 아무것도 아닌데요. 그런데 그 담임 선생님이 예수님이라면? 참 겸손하구나! 참으로 겸손하구나, 이게 100점이야.

왜? 만약에 시험 문제 풀어서 50점 된다면 미흡하잖아요? 미흡하게 되면 마귀에 쫓기고 얼굴이 어두워지면서 버들버들 공포에 휘둘리게 되요. 무서워하고. 놀라버려요. 남들 70점 받았다 하면 그동안 난 뭐했어? 50점 밖에 안됐어. 스스로 자기를 자책하고 채찍질하고 다음에는 네가 70점 따라 붙여야 돼.

내가 나한테 벌주고 강박하고 겁박하고. 내가 나를 협박하고 그래요. 너 똑바로 안하면 벌받아. 너 쌓은 것, 네 가진 것, 네 위신, 명예 다 하루 아침에 훅 간다. 다 무너진다. 똑바로 살아! 이게 겸손입니까, 이게? 이게 행복이에요, 아니면 지옥의 늪입니까? 지옥의 늪에 빠진거야, 이거.

사람이 늘 이렇게 지옥의 늪에 빠져가지고 잘돼야 될텐데, 살아 남아야 될텐데, 더 우수해야 될텐데, 높아져야 될텐데. 그렇게 사람들이 바짝 벌벌 떨죠? 얼굴 들죠? 그걸 어느 목사님이 한 유명한, 잘 표현된 세 자의 단어가 있습니다. 건어물. 바짝 마른 건어물. 건어물이 뭐에요? 바짝 말랐잖아요. 두께가 없어, 핏기도 없어. 아무것도 없어요. 모든 거리에 있는 남녀노소가 전부 다 건어물이에요, 핏기가 없어. 팽팽하지를 않아.

잘돼야 될텐데. 내가 살아야 자식들이 사는데. 자식들 공부 못하면 안되는데. 겸손할 줄을 몰라 도대체. 겸손할 줄을 몰라. 교만 못해서 아예 환장을 했어. 그래서 또 교회에서 겸손하라고 하니까 이거는 또 아까 그랬죠? 자기 자신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 겸손한 것이 바로 교만의 극치라고요. 아예 겸손하지 마, 그러려면 겸손하지도 마.

그래서 이 아브라함과 사라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배우는 게 아니고 누구한테 배워야 합니까? 오히려 옆에 있는 아내한테 배우는 것이 하나님께 배우는 거예요. 왜? 사라 안에 하나님의 인간의 창조성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까? 사라의 자손입니까? 야, 이거 어려운 문제죠. 창세기 3장 15절에서 아브라함은 여자의 후손이죠. 그러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고 사라의 자손이 되어야 되겠죠. 그런데 이 세상은 사람의 자손을 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을 봅니다.

실제로는 아브라함이 낳은 게 아니고 사라가 낳은 거예요. 왜냐면 사라는 어떤 여자이기 때문에? 잉태치 못한 여자이기 때문에. 잉태치 못한 여자에요. 갈라디아서 4장에도 나오고 (갈 4장 27절,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이사야(사 54장 1절)에도 나오죠.

잉태치 못한 자. 오늘 강의대로 하면, 다른 말로 하면 겸손한 자죠, 겸손한 자. 겸손한 자여 뭐하라? 기뻐하라. 이 겸손한 자의 복제물이 많음이라. 겸손한 자의 복제물. 사라같은 위상을 가진 자가 복되도다. 잉태치 못한 자에게 이삭이 태어나잖아요. 이삭이 태어났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약속이 태어난 거예요.

약속은 한쪽이 제로가 되어줘야 온전한 약속이 약속대로 바깥으로 튀어 나오게 됩니다. 이거 제가 안했어요. 제가 할 재주도 없고 능력도 없어요. 싱글싱글 웃으면서. 제가 하지도 않았는데 지금 인생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거 제가 한 게 아니에요. 그게 바로 겸손이죠.

강남강의에서 했죠?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는 결과물이라고요, 결과물. 그래서 강남강의에서 제가 두 문장을 서로 비교했는데요.

나는 이렇게 살고 싶다, 1번.
2번, 나는 이렇게 살고 있다.
어느 게 정답입니까, 결과물이라면?
‘나는 이렇게 살고 있다’가 겸손이고 결과물이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않고 뭘로 삽니까? ‘나는 이렇게 살고 싶어라’ 나오죠. 나도 골프치고 싶고. 우리 아들 19살인데 벤츠 타다가 음주운전 해가지고...하고 싶고. 스무살 먹은 애가 벤츠 타고 다니고 싶고, 내 아들. 자꾸 싶다, 싶다, 싶다가 나오고 있어요.

그냥 살면 되는데. 왜? 그게 내 위상에 맞아요, 그게. 하나님의 창조성은 없는 데서 나오는 거거든요. 그러면 있는 것이 창조성이 아니고 자꾸 없음이 어느 쪽 방향을 향하여 달려가야 됩니까? 없는 쪽이 나에게 맞는 거예요. 없는 쪽이 맞거든요. 없는 쪽이 맞다는 말은 그러면 잠시 무대 있다가 없어지면서 뭔가 나와야 된다는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 내비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성, 주님의 말씀의 완성과 다 같은 말이에요. 언약의 완성, 언약. 이런 것들이 내비쳐야 된다 이 말이죠.

바로 그 역할, 기능을 누가 했느냐 하면 사라가 했지 아브라함이 안했어요. 아브라함은 지금 자식을 놓을 수 있는 정력이 있어요, 남성 호르몬이 있다는 말이죠. 청춘 팔팔 있잖아요. 그런 약 안먹어도 되요. 아브라함은 아이 계속 낳았어요. 사라 죽고 난 뒤에 자식을 낳았잖아요. 그러니 잉태할 능력이 있잖아요. 그게 창조성의 겸손과 부합되지 않아요. 어울리지 않는다고요. 뭔가 있으니까 잘해 볼려고 하는 거예요. ‘이렇게 살면 되지’가 아니라 ‘이렇게 되고 싶다’가 되는 거예요. 이거 되고 싶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만날 어디가도 자기 아내보고 지 동생이라고 자꾸 속이고 하잖아요. 왜? 안 죽으려고. 사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실력을 알고, 수준을 알고 그렇게 시켰겠지만. 너 어디가도 정 위험하다 싶으면 네 아내라고 하지 말고 네 동생이라고 해라. 뭐 이런 식으로.

미인을 탐내는 남자야 뭐 모든 남성들의 공통점이니까. 이쁜 것은 용납을 안하잖아요. 가만 두지를 않죠. 이쁜 사람은. 이쁜 사람도 참 힘들죠. 정말 남자는 여자를 왜 그렇게 귀찮게 하는지. 남자가 여자한테 꽂혀버리면 그 예쁜 것 차지하기 위해서 남자는 갑자기 목표가 생겨가지고 지구 끝까지 따라와요.

마을에서 남자가 혼자 짝사랑하는 여자가 있었거든요. 그 짝사랑하는 여자가 어느 날, 짝사랑이니까 어디 간다고 말할 필요 없잖아요. 그 여자가 혼자 서울 취직해가지고 올라갔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남자가 그 여자를 못잊어서 서울역에 나와 가지고 온 사람을 붙들고 묻는 거예요. 혹시 이런 여자 봤습니까? 갈 때는 살구꽃 피면 온다고 했는데 살구꽃 펴도 안돌아오고 있으니까 내가 기다리다 갑니다. 나이는 18세이고 이름은 순입니다. 살구꽃이 필 때는 돌아온다던, 바람은 불고 꽃냄새는 나는데 오지를 않네. 혼자 가야 해, 가야 해. 순이 찾아 가야한다는 거예요. 이거 나훈아 노래입니다. 혹시 이런 사람 못봤습니까? 온데 다 돌아다니면서 몽타주 들고 다 돌아다니는 거예요.

집착이죠. 얼굴이 벌써 공포에 질린 겁니다. 못 찾으면 난 죽겠다고. 이 얼마나 교만입니까? 얼마나 교만이에요. 사람들은 그 교만에다가 더 불길을 질러요. 아이고 세상 반이 여자라. 여자가 뭐 순이밖에 없나. 그런 소리는... 차라리 죽으라고 해요. 순이밖에 없어, 순이밖에 없어. 순이한테 싫증날 때까지는 순이밖에 없어요.

인간은 정말 주의 은혜가 오지 않으면, 언약이 오지 않으면 인간은 항상 얼굴이 어둡습니다. 밝지 못해요. 겸손할 줄 모르고. 더더더 계속해서 완전과 완벽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 10분 쉽시다.

 이하림 (IP:61.♡.247.43)19-09-22 08:50 
서울의존강의20190919b 베드로전서3장 6절(놀라지 않기)-이 근호 목사

자, 죄의식이라는 것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내가 완전함을 추구할 때 죄의식이 발생되요. 겸손하게 되면 죄라는 것이 없어요, 겸손한 자에게는.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겸손한 자에게 죄가 있을 리가 있어요? 왜냐면 겸손은 죄지은 자의 결과이기 때문에.

망가졌는데 뭐. 망가졌는데 무슨 죄를 무서워합니까? 죄는 언제 무섭고 죄책감은 언제 강해가 프레스하는가 하면, 죄 안 짓고 싶을 때 그리고 죄를 적게 지어서 내가 생각하는 그 괜찮은 위치에 도달하고자 시도할 때 죄가 그렇게 무서운 겁니다. 죄가 무섭고 죄 붙은 데를 떼어 낼려고 몸부림치죠.

털 있는 개한테 물 뿌려 보세요. 개가 어떻습니까? 막 그 털을 앞뒤로 흔들어 대면서 물을 털어내려고 하죠. 꼭 그 모습이 인간들 모습 아닙니까? 그 얼마나 가련하고 불쌍해요. 그거 털어내면 나머지는 괜찮은 겁니까? 거룩한 거예요? 순결한 겁니까, 그거 털어내면? 아무리 털어내 보세요. 인간이 온전해 질 수 있는가. 안되거든요.

야고보서 2장에 보면 (약 2장 10절,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사람이 율법을 지키고 온 율법을 다 지켰다 할지라도 하나를 어기면 다 소용없는 게 되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아, 네가 누군지 제대로 알아라. 네가 누군지를. 여기에 본문 7절에 보게 되면 기도가 막히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하나님의 창조성과 연결되지 못하는 것이 기도가 막히는 겁니다.

본래 내 모습이 뭔가 막히고 또 진짜 내 모습을 내 자신이 막아 버려요. 지난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합판, 베니아 합판. 실컷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충성을 하는데 해보니까 이게 꼭 트루먼쇼같아. 전부다 세트장이었어요. 세트장에 머리박고 도로 튀어나오는 거예요. 열심히 기도하고 해가지고 이쯤 왔으면 천사가 막 보이고 이쯤 왔으면 주님이 와있겠지 했는데 박아보니까 이게 전부 다 세트장이에요. 갇혀 있어요, 세상에. 실컷 했는데, 온갖 노력을 다 했는데 그 안에서 뺑뺑 돌았던 겁니다. 자기 딴에 갔는데.

트루먼쇼라는 그 영화에서 트루먼 그 주인공이 헤엄쳐서 카메라 있는데서 탈출을 했는데 가보니까 그게 바다가 아니고, 세트장의 푸른 하늘인 줄 알았더니만 페인트칠해놨어요. 갇혀 있어요. 베니아 합판. 무대 장치에요, 무대 장치.

얼마나 허망한 일이에요, 이 종교라는 게. 그래놓고 얼굴은 피폐해가지고 얼굴색이 뭐 엉망진창이죠. 왜? 완벽을 계속 추구하다 보니까 완벽의 완벽. 산 넘었다고 했는데 산 넘으니까 아직까지 정복되지 않고 또 산이 비로소 보이네요. 저 산 넘으면 되겠지 해서 저 산 넘으니까 아직 정복되지 않은 산이 154,656개 있는데요.

방향을 잘못 잡은 거예요. 완전을 향하여 가면 그것은 세트장 돼요. 바로 우리의 방향은 죄가 나오는 그 쪽으로 쏠려야 되요, 죄가 나오는 그 쪽으로. 우리가 죄를 짓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죄 지을 수가 없어요. 죄가 우리를 갖고 놀죠. 왜냐하면 주인이 주인되기 위해서 우리가 죄인 되어야 되거든요.

우리가 죄인 된다는 것이 주님의 주인됨의 컨셉이라면 받아들입시다. 우리 주인만 좋으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 만족 아니에요? 왜 따로이 독자적으로 내가 괜찮은 존재가 되어야 됩니까? 되지도 않을뿐더러 그 얼마나 악마의 속임수에 그동안 얼마나 시달려 온 거예요. 난 독자적으로 이 정도다, 독자적으로.

‘나는 무엇이다’가 없어요. 그런 건 성경에 용납이 안됩니다. 이 사라를 배우세요. 사라가 6절 끝에 보면 ‘놀라지 아니함으로’. 놀랄 일이 없죠. 독자적으로 살지 않으니까 자기가 독자적으로 놀랄 일이 없다니까요. 내 인생은 저 혼자 있는 게 아니니까요. 신랑과 같이 있으니까 난 신랑의 아내지 독자적으로 여자가 아니거든요, 사라가.

언약의 아내라는 말은 아까도 얘기했지만, 여자도 아니고요, 사람도 아니에요. 그냥 ‘없다’에요. ‘없다’인데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잉태치 못한 자’. 무능력자로서 언약과 결합이 되어 있어요, 사라가. 무능력자니까 독자적으로 아무 일도 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해놓고 자식이 태어났다면 그 자식은 자기 자식이겠어요, 아니면 누구의 자식이겠습니까? 남편에게 주어진 언약의 자식이 되겠죠.

그래서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언약의 딸’이라고 하는 거예요. 언약의 딸을 6절 끝에 보면 ‘그의 딸이 되었다’. 아브라함의 딸. 아브라함이 누구겠습니까? 주님이죠. 아브라함 속에 있는 주님의 딸. 딸이라는 말은 같은 가족이다. 같은 패밀리가 되었다. 이런 뜻이에요.

주인의 상에 떨어지는 그것을 먹더니만 개는 개 맞는데 그 집 개에요. 그 주인집 개이니까 세상에 그런 다행스러운 게 없고 그런 겸손이 어딨습니까? 나 개라고 자랑하지 말란 말이에요. 난 주인집 개라고 이야기 하세요, 멍멍. 난 주인집 개, 주님의 개에요.   
       
겸손이라는 것은 따로이 내 것 내세울 것이 처음부터 박탈당한 그 가벼움이거든요. 내 것이 없으니까. 없으니까 내가 천국가는 내 길을 내 것이 없으니까 막을 게 없죠, 투명하니까. 그러나 내 것이 있으면 내 것을 키우기 위해서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얼쩡거리게 되는 거예요. 능력주신 주님이여, 저 키워주세요. 내가 쑥쑥 소나무 크듯이, 콩나물 크듯이 키워 주세요.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겸손할 수가 있습니까?

얼굴색이 벌써 맛이 가버렸죠. 왜? 내 원대로, 뜻대로, 내 소원대로 안 크니까 나 신앙 없는 건가, 버림받은 건가, 기도가 모자란 건가, 헌금을 적게 했는가. 얼굴색이 벌써...애가 다쳤다고 하면 엄마가 ‘아이고 깜짝 놀라라’ 이렇게 하거든요. 여기 본문에는 놀라지 아니한데 우리는 왜 놀랄 걸 기다려. 그리고 또 아침 되면 걱정돼요. 얼마나 날 놀래킬 일이 몇 가지나 또 주어질지.

개인데 놀랄 일이 있어요, 개인데. 개한테 가가지고 조국이 법무부장관 된다고 하면 놀랍니까? 안놀라요. 개가 무슨 관계 있다고요. 개한테 가서 ‘화성 연쇄범 잡혔대, 그 37년 전 일의 범인이 감옥에 있대’ 해도 개가 ‘깜짝이야’ 안하죠. 멍 짖어버리죠. 그 무슨 관계 있어요?

자꾸 인터넷하고 게임하고 뉴스보는 이유는 놀란 가슴을 좀 좋은 소식으로 달래 달라고 그거 보는 거예요. 좋은 소식이 다른 게 아니죠. 좋은 소식이 뭐가 있겠어요. 뭐 고 아무개 이혼했다. 누가 못해야 기뻐해, 누가 못해야. 누구 망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 정유소 파괴됐다. 이슬람 잘됐다. 우상 믿다가. 더 터져라. 이런 거. 꼭 남이 못돼야 반대급부로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우리는 이렇게 교만합니다. 겸손하지를 못해요.

그러니까 이거는 왜 그러냐 하면 없는 채로 주님과 함께 있어야 되는데 주님 따로 있고 주님 따로 있는 거는 즐겁지도 않고 내 것이 따로 있을 때 나는 즐겁고 사람 살 보람을 느끼겠다고 주장을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요구르트가 여기 있잖아요. 이거 주면서 ‘드세요’ 하게 되면 별로 기쁘지 아니한 거예요. 그런데 와가지고 ‘목사님 우리 집에 요구르트 한 개 있는데 잡숫고 싶으면, 찾으려면 찾아봐.’ 그러면 기어이 그걸 찾는 기쁨, 갖는 기쁨. 왜? 완전케 하려는, 내가 완전하기 위해서 내가 완벽하기 위해서. 이거 찾을 때 그래 난 가치있는 존재야.

바로 이런 식으로 사니까 만일 이것도 못찾으면 우리 얼굴이 얼마나 피폐하겠습니까? 도대체 겸손을 몰라, 겸손을. ‘저 같은 거 안 먹어도 되요’ 그러면 될걸 가지고 기어이 그것도 게임이라고, 찾아낸다고 무슨 상 줄 것도 아니고.

그래서 이 사라의 특징은 ‘받을 것 다 받았다’. 받을 것 다 받은 거예요. 왜? 자기는 애초부터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따라서 받을 걸 다 받았으니까 사라의 모습은 받은 것에 감사하겠죠. 이게 겸손으로 나오죠. 받은 것에 대한 감사가 나오겠죠.

그러면 어디서 줬는가? 그 준 곳이 뭐냐 하면, 기도가 지향해야 될 그 곳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막히지 않아야 됩니다. 기도란 뭐냐? ‘거기서 솔솔 나왔습니다’고 고백하는 게 기도에요. 나는 껍데기다. 껍데기인데 이 껍데기를 계속 뭔가 채우는 것이 나왔을 때, ‘주님이 주셨잖아요’ 하는 것이 기도의 내용이죠.

오늘 본문 같으면 ‘언약이 주셨잖아요. 언약이 언약되기 위해서 언약으로 채워 주셨잖아요.’하는 거예요. 자, 언약은 뭐냐 하면 없는 데서 있게 하죠. 따라서 나는 아기를 못 낳아요, 사라는. 잉태치 못한 여자에요.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어떤 많은 불신자들이 말하기를 성경은 구라이고 교훈집이고 뭐 인간의 지혜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성경의 핵심은 뭐냐? 잉태치 못한 자가 자식 낳은 거예요. 이거는 인간이 따라오려면 따라와. 못 따라온다는 겁니다. 인간의 지혜, 솜씨, 능력, 재주, 축적된 그러한 모든 지식으로 총동원해도 따라올 수 없는 다른 세계 이야기에요, 이 성경이. 다른 세계 이야기라고요.

그러니까 사라는 뭐냐? 그 다른 세계에 이미 들어와 버렸어요. 받을 거 다 받은 거예요. 받을 거 다 받았으니까 내가 죄지었다는 것도 그다지 부담이 안돼요. 죄 지은 거 맞는데 이 육신이 있으니까 죄 지은 거 맞죠. 육신의 본능대로 하니까. 그런데 그게 그렇게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니까요. 원래 죄가 들어오라고 되어 있는데요. 죄가 들어와야 되거든요. 앞으로 이걸 남은 시간에 이야기할건데.

원래 들어와야 될 죄가 들어온 것 뿐인데 내가 죄지었냐 말이죠. 나는 가만히 있는데 죄가 빈 통에 그냥 물이 들어오듯이 들어 왔거든요. ‘너 죄지었구나’ ‘그래, 죄 지었다. 뭐 또 할 말 있나? 없제? 빠이빠이’ 끝나버리죠. ‘너 못됐구나’ ‘그래, 못됐어. 또 뭐 할 말 있나? 없지?’

‘근데 너는 왜 내가 이야기하는데 화를 안 내?’ 왜 화를 내야 됩니까? 내가 했습니까? 내가 계획 잡아서 죄 지었습니까? 아니거든요. 가만히 있는데 죄가 들어왔잖아요, 가만히 있는데. 로마서 5장처럼. 가만히 있는데 죄가 들어 왔다고, 가만히 있는데.

욕심이라는 것이 뭐 마음먹고 하는 것이 욕심이 아니잖아요. 욕심은 보기만 해도 욕심이 생긴다, 보기만 해도. 만날 간식, 이 빵만 주고 어떻게 한우는 안주나? 아무것도 없을 때는 빵도 감사하다가 갑자기 빵 주니까 우리 의존교회도 한우 먹으러 가자 이런단 말이죠. 그러면 한우 먹고 난 뒤에 또 어디 가려고? 이번엔 어디 또 뷔페 가려고?

누구 잘못이 아니라니까요. 야, 이거 너무 심한 베짱이라서 이거 아무나 가르쳐 주는 게 아닌데. 누구 잘못이 아니에요. 누구 잘못이 아니라니까, 이게. 왜 자꾸 잘못한 것에 대해서 용서를 구합니까, 남한테? 그게 자기가 겸손하지 않기 때문에 남한테 용서를 구하는 거예요.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그러지 마세요! 어떻게 하느냐? ‘잘못되었습니다’ 하세요. 웃으면서 ‘내가 잘못했네요.’ ‘용서해 줄까요?’ ‘해주든 말든 난 관계 없어요. 나 잘못된 거 아니까.’ 싱글싱글 ‘안녕히 계세요’. 용서 안하면 난 안갈거야. 이렇게 빌까 이렇게 빌까.

이건 뭐냐? 완전해야 되는데 삐끗해가지고 죄를 지었으니까 그 죄지은 것을 뭘로 바꿔서 완전에다가 제대로 완전의 틀을 맞추려고 시도하는 거예요. 그게 뭡니까? 용서 받게 되면 나는 보다 완전해진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한테 왜 용서를 구해요? 마귀지요, 마귀. 주님한테 왜 용서를 구합니까? 누구 좋으라고 용서를 구해요? 본인 좋으라고 용서를 구하지, 본인 좋으라고. 지난 수요일 이야기했지요. 도대체 인간은 브레이크가 없어. 자꾸 미끄러져요. 예수님께 기뻐하면 끝나야 되는데 자꾸 예수님 좋으면 결국은 그게 나한테 유리하게 작용하기 때문에...이게 계속 가. 브레이크 없는 벨트라고 누가 이야기했더라, 홍준표가 이야기했는가. 자꾸 스톱할 줄을 몰라. 브레이크가 고장난 모양이라.

주님께 영광. 끝났잖아요. 내가 주께 영광이면 나한테 떨어지는 콩고물은...또 벌써 미끄러졌어! 왜 또 그 유리함을 챙깁니까? 그게 뭐냐면 겸손하지 않아서. 저 높은 곳을 향한 미련과 애착이 아직 남아 있어서 높아지려고 하는 거예요. 높아지니까 얼굴이 어둡잖아요. 오늘 강의가 얼굴 어둡다는 걸 왜 그리 강조해가지고 오늘 화장 안했는데 또 나보고 이야기하는가...화장하고 관계 없고요.

정신 좀 차리자 이 말입니다. 용서 받아서 씻어지는 죄는 없어요! 주께서, 용서해달라고 해서 용서해서 구원 받는 게 아닙니다. 이미 용서받은 자가 죄를 아는 거예요. 그리고 그 죄에 대한 용서는 내 몫이 아니고 누가 했다? 개가 할 몫이 아니에요. 개가 용서 어떻게 빕니까? 이렇게 빌다가 주인님, 이렇게 빕니까? 아니에요.

용서차원은 주인이 할 그것이지... 용서했으면 내 개고 용서 안 받았으면 남의 개 되는 거예요. 개로 들어갔다는 것은 이미 용서가 끝난 거예요. 용서가 끝났는데 왜 우리가 자꾸 그걸 문제 삼고 제2, 제3 자꾸 끄집어냅니까?

꼭 부부싸움이 그걸로 시작되잖아요. 지금 일어난 일만 하면 부부싸움이 안 일어나요. 그것부터 시작해가지고 원래부터 이러했다 해가지고 싸우다가...벌써 지나갔잖아요. 1년 전에, 2년 전에 지나간 이야기인데 그걸 또 끄집어내서 부부싸움을 한다. 부부싸움을 하면 그냥 부부싸움만 하면 괜찮은데 또 하필 그때 장모님이 오거든. 그러니까 얼마나 평소에 내 딸을 구박했는지 막...처음으로 했는데 맨날 싸우는 셈이 되가지고...‘자네 그렇게 안봤는데 실망이야, 흥’ 가져온 총각김치통 들어서 도로 가져가 버리고...다시는 애 봐주나 봐. 이러면서.

갑자기 그러다가, ‘엄마, 우리 이서방 그런 사람 아니야’ 갑자기 싸움하다가 적의 적은 나의 동지인가. 남편하고 싸우다가 자기 엄마가 남편 욕하니까 이번에는 또 갑자기 엄마보고 ‘엄마 그러려면 가. 여기 내 영역이야. 엄마도 내 말들어.’ 그 엄마 가면서, ‘아유 딸 키워도 소용없다.’

왜 딸 키워서 소용있기를 원하십니까? 엄마가 교만해서 그래요. 결국 오늘 결론은 엄마는 교만했다. 엄마는 교만했네. 내 딸은 그래서는 안된다. 왜 자기 딸은 그래서는 안되는데요? 교만해서 그렇고 얼굴이 편치 못해요. 걱정 근심을 달고 다닙니다.

자, 그러면 죄가 어디서 나오는가? 죄는 창조성에서 나오죠, 창조성. 창조성에서 죄가 유발되죠. 죄가 유발되는 거예요. 딱 엎드렸다가...죄가 있는데, 에덴 동산에 인간이 여기 있어요. 그러면 인간이 무슨 일을 했을 때 바깥에 있는 죄가 여기에 확 들어와 버리죠. 확 들어와 버리는 거예요. 인간은 죄가 들어온 것을 촉발한 겁니다.

그래서 만약에 인간이 죄를 지었으면 죄를 지은 당사자가 용서를 받거나 자기가 착한 일을 해서 만회하면 되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죄라는 것은 인간이 만든 게 아니고 원래 창조성 안에 하나님에 의해서 죄가 만들어 진거에요. 죄를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하면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지금 놀라 자빠집니다. 선한 하나님이 죄를 지을 리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사야 45장 어떻게 되는데? 하나님은 빛도 만들었을 뿐 아니라 뭐도 만들었다? 어두움도 만들었잖아요. 개혁주의 신학은 자기 신학 깨질까봐 벌벌 떨어요. 그러니 벌벌 떠니까 교만한 거예요. 완전한 신학, 완전 진리를 추구하니까 교만한 거죠. 여기 보세요. 이사야 45장 7절 보세요.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어둠이죠.

어둠이 캄캄하다는 뜻이 아니에요. 무엇의 반대말이에요? 빛의 반대말이 어둠이잖아요. 그러면 빛이 인격이 된다면 어둠도 덩달아서 인격으로 등장해야 되죠. 그러면 그건 누구에요? 나쁜 악마죠. 그게 어둠이에요. 빛은 누가 되고? 예수님이 되고. 예수님의 원수이죠.

그 다음에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환난도 짓죠. 환난을 창조한 거예요. 환난을 창조했단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천지창조하고 나서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에 보면 ‘참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했기 때문에 (창세기 1장 31절,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좋은 것만 있어 보이죠. 물론 좋은 것만 있어요. 하지만 그 테두리에, 그 변두리에, 주변에 뭐가 깔려 있어요? 이미 환난이 준비되어 있는 거예요.

창조가 마감이 아닙니다. 알파가, 시작이 마감이 아니고 시작은 무엇을 내다보고 있느냐 하면, 무엇을 짝표로 들고 가냐 하면 마지막을 짝표로 해야 하죠. 그러면 시작이 있다는 말은 끝이 있다는 말이죠. 마지막이 있잖아요. 그러니 이 중간은 뭡니까?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가는 거라 이 말이죠. 그러면 시작의 요소와 마지막의 요소가 이 중간 요소의 토대로서 그 밑을 떠받치고 있겠죠.

그러면 여기 시작에서 마지막까지 이중성이 나올 겁니다. 어떤 이중성? 왜 마지막이 종말로 끝나는지, 망함으로 끝나는지 나오겠죠? 그러니까 여기 빛도 있어야 하겠고 당연히 어둠이 있어야지, 이중성이 있어야죠. 그 다음에 평안도 있으면 환난도 있어야죠. 우리는 지금 중간에 끼어 있잖아요, 중간에.

처음에 하나님께서는 어떤 하나님? 창조의 하나님이죠. 마지막에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심판의 하나님이죠. 지금 제 말 틀렸습니까? 주님 심판 없어요? 처음의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라 마지막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 이러면 안돼죠. 같은 하나님 맞는데 하실 일이 나타나지 않잖아요, 하실 일이.

그러면 처음 하나님은 만드신 하나님, 마지막 하나님은 심판하시고 새로운 창조하시고 이래야 내용이 나오잖아요, 내용이. 물론 다른 하나님하고 같은 하나님 맞는데요. 그냥 같다 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실 내용들이 나와야 되잖아요, 내용들이. 그 내용들이 중간을 차지하는 거예요.

만들었는데 그 만들어진 것을 어떻게 합니까? 부수잖아요. 창조한 것을 부순다고요. 멸망시킨다고요. 여러분 다 아시는데 새삼스럽게 성경 보려고 하니까 약간 지루하기도 하지만 이걸 모르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감안해서 지루하더라도 참으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1장 10절에 보면 태초에 하나님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고 하늘도 손으로 만드셨죠. 그것들은 다 주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건데,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란 말이죠. 자, 지으신 바니까 이 뒤쪽을 모르고 그냥 지었다고 하면 그 지으신 것이 어떻게 됩니까? ‘끝까지 그대로 가요. 그래야 하나님 답죠.’라는 말을 할 수도 있어요, 인간이. 잘 모를 때.

‘하나님 만드신 것은 끝까지 갈 수도 있습니다.’라고 해버리면 뭐가 누락됐습니까? 뭐가 빠졌어요? 그 뒤의 말씀, 그것들이 멸망한다는 것이 빠졌죠? (히브리서 1장 10절,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11절,“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자, 제 말의 취지를 잘 들어보세요. ‘예수님은 구세주입니다. 믿으세요.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예, 믿어요. 저 주님 믿습니다,’ 자, 뭐가 빠졌습니까? 히브리서 1장 10절과 비교해서 뭐가 빠졌어요? 나의 멸망이 빠졌잖아요, 나의 멸망이.

다시 이야기해볼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만들었습니다. 어떤 분입니까?’ ‘참 좋으신 하나님이에요. 믿을랍니다.’ 이게 제대로 주님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어요? 아니죠? 뭘 반영해야 돼요? 주께서 나를 만드셨는데 주님께서 나를 어떻게 한다? 멸망시킨다 해야 주님이 주님답게 되는 거예요.

‘나 인간으로 태어났는데, 나 개다.’ 이래야 된다니까요, 이래야. 생각해보면 굉장히 어려운 문제죠. 왜 이게 어려운 문제냐 하면은 내가 도무지 나를 안다치려고 해요. 하나님 믿는 이유는 현상 유지에다가 더 추가적으로 플러스 되가지고 더 괜찮음으로 계속 축적해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어요. 문제는 그게 바로 멸망의 이유가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 높이는 것 같아 보이죠? 아닙니다. 만들어진 나에 대해서 하나님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 저를 만들었죠?’ ‘그래’ ‘그러니까 손대지 마세요’ 그게 바로 어둠이에요. 어둠을 멀리 찾지 마세요. 모든 인간들이 어둠이에요. 차라리 어둠이라고 하고 그 어둠의 요소 있음을, 그걸 인정해가지고 겸손하면 되는 거예요.

‘그래, 어둠이다. 너 망한대.’ ‘그래, 주께서 망하게 하셨지.’ ‘네 죄 때문에 망한거야.’ ‘아니야, 주께서 망하게 하시면서 죄라고 나한테 덮어씌웠어.’ 갑자기 말이 어려워지죠. ‘목사님 그 말이 그 말 아닙니까?’ 그 말이 그 말 아닙니다.

내가 죄를 지어서 망해버리면 내가 죄 안지어 버리면 애초부터 안 망해야 될 사람인 것처럼 우리가 오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애초부터 모든 것이 지어졌다는 말은 모든 것은 망해야 된다는 하나님의 원칙을 만약에 여러분들이 유지하신다면, 만드신 인간을 하나님께서 흙으로 돌려 보내신 그것이 주님의 일관된 스케쥴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있다’를 좋아하지 말고, ‘있다’를 기뻐하지 마시고요. 오히려 반대로 내가 죽어 없어지는 것을 기뻐해야 돼요. 왜? 그게 주님의 일하심의 일관성과 충실하심을 지금 미리, 죽기 전에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뭐 겸손이 다른 거 있나. 그게 겸손이죠.

‘아유, 아줌마 이번에 주식 대박 났다면서?’ ‘대박나면 뭐하나? 죽는데’ 이런 거. ‘이번에 애가 서울대학교 법대를 들어갔다면서? 수시합격 했다면서?’ ‘들어가면 뭐하나? 걔도 죽고 나도 죽는데’ ‘언제요?’ ‘한 60년 살다가’ 어차피 60년 살아도 지나간 것이 어제 일 같아요. 이틀만 살았어. 60년 살아도, 80년 살아도 이틀만 산거에요.

돌아보면, 함축해 보면 지난 살아온 모든 것이 단 하루로 응축이 됩니다. 어제. ‘어제’란 말로. 그리고 지금은 어제가 아닌 ‘오늘’. 달랑 이틀 산거에요. 수명이 이틀이에요. 어제는 살았고 오늘은 죽는 날이고. 그런데 그것이 감사하게도 주의 일관된 계획이고, 그 계획을 내가 눈치챘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하죠.

주여, 주의 종이 뭐기에 주의 일관됨을 제게 알려 주시나이까. 인간은 나면서 죽게 되어 있는 것이 마땅하고 인간은 풀인 것이 마땅하고 오직 말씀만 영원하면 저는 여한이 없습니다. 이게 바로 겸손입니다. 이게 왜냐하면 혼자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고백이 나오는 거예요. 홀로 살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 한 달간 홀로 살아봤어요? 한 달간? 제가 한 달 혼자 살아보니까 혼자 사는 게 이렇게 좋을 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 반찬 안해도 그만이고 밥 안해도 그만이고. 내 할일에 몰두할 수 있었어요. 반찬이 뭐냐 밥을 어떻게 하느냐가 시시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문제에요. 빨래를 몇 번, 청소를 몇 번하냐 그게 안 중요한 문제거든요. 그게 이미 영생받은 것을 취소할 문제가 아니잖아요.

물론 그 한 달은 후딱 지나갔지만...며칠 전까지 끝났지만...홈쇼핑해가지고 육개장 시키면 12인분을 그냥 사고요. 마트에 가면 볶음밥 사가지고 먹을 수 있어요. 가장 신경 쓰이는 게 뭐냐. 음식 쓰레기 남기지 않는 거. 무조건 쓰레기 남기지 않는 거. 다 그냥 먹어치우는 거. 설거지할 필요 없는 거. 그게 혼자 사는 하나의 재미? 비법이었어요. 아, 역시 여자가 혼자 살게 되면 두 번 다시 어지간하면 같이 안살려고 하는 이유가 여기 있었구나. 예전엔 미처 몰랐네.

이제부턴 내가 그걸 깨달아 가지고 누가 혼자 살면 다시 결혼하세요. 다시 합치세요. 이제 그런 소리 안할랍니다. 혼자 사는 게 최고에요. 그래서 지난 주일날 그런 말 했잖아요. 이별보다 결혼이 더 힘들다고. 오랜만에 바른 소리 했습니다. 이별보다 결혼이 더 힘들어요. 혼자 사는 것보다 둘이 사는 게 더 힘들어. 이거 무를 수도 없고. 그래도 애 결혼식 때 손잡고 가야 되거든.

자, 그러면 창조는 뭐냐? 비창조를 위해서 창조가 있다고 보면 되요. 왜냐면 창조는 반드시 없는 데서 나왔기 때문에. 비창조. 비창조는 창조의 원형입니다. 아무것도 없는데서 창조가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비창조는 무엇이냐? 이게 바로 두자로 언약이고 이 언약을 보여준 사람이 누구냐면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입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의 딸이 되었느니라.’ 곧 이 말은 뭐냐? 주님과 한 가족이 되었느니라.

그러면 아브라함이 대단합니까? 아니. 아브라함이 배워야지. 누구한테? 아내한테 배워야죠. 아브라함은 자식 놓을 능력 있잖아요. 능력 있다는 말은, 그것은 무엇과 멀어져 있다, 아내보다는? 없음과 더 멀어지는 거예요. 왜? 있으니까. 여자가 잉태치 못한다는 것은 여자의 용도로서 폐기처분 된 거예요. 왜? 여자가 있는 이유는 자식을 놓기 위해서 있는데 자식 못놓는 여자, 그것은 있으나 마나죠. 그런데 있으나 마나한테 배워야 돼요. 왜? 있으나 마나를 아는 그것이 겸손이기 때문에.

왜 그러냐하면 있으나 마나는 비창조거든요. 창조보다 뭐가 우선이냐 하면 비창조가 우선이에요. 비창조는 뭐가 없느냐 하면 아직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고 없기 때문에 아직까지 죄가 성립이 안돼요, 죄가. 죄가 없다니까요. 뭐 있어야 죄가 되지 뭐 없는데. 아니 애기 못낳는 것이 죕니까? 지 잘못이에요? 아니잖아요.

사람이 뭔가 있으니까, 이미 태어났으니까 자꾸 골라 잡으려고 하는 겁니다. 아유, 나 남자로 태어나지 말고 여자로 태어날 걸. 난 여자말고 남자로 태어날 걸. 이미 자기가 남자기 때문에 혹 여자기 때문에 다른 경우에 매력을 느끼고 욕심을 내는 거예요.

그것이 이미 있다는 거고 그 있음이 나로 하여금 없음으로 가는 게 아니고 더 완벽하게 있음으로 가기 때문에 점점 더 교만해지고 교만해지는 만큼 내 얼굴은 어두워지는 거예요. 악마한테 계속해서 부추김을 당하고 쫓김을 당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대로 하면 놀랄 일이 많은 겁니다. 깜짝깜짝 경기날 일이 많은 거예요.

‘너 그런 짓 했지? 너 이제 망했어’ ‘아이고 놀라라. 가슴이 덜컹 내려앉네’ ‘지난 여름에 네가 한 짓을 안다’ ‘돈 얼마면 돼? 얼마면 돼? 아무데도 이야기하지 마. 이거 가지고 입 다물어. 돈 먹고 나불대면 사람 사서 죽여버린다’ 이런 식으로. 그러니 남한테 복수하는 이유가 뭡니까? 분노하고 복수하고 남탓을 하는 이유가 뭐에요? 내 것 안 없어지려는 발악을 하기 때문에 그 짓하고 있는 거예요.

제가 그 강남 강의에서 했던 정신병의 3종세트 기억납니까? 다시 할까요? 정신병의 3종세트. 첫째는 상처. 두 번째는 불안. 세 번째는 중요해요. 복수. 복수에요. ‘목사님 그런 소리 하지마세요. 나 목사님 말에 상처받았어요.’ 내가 보기에 이거 뭐냐면 ‘니가 뭔데 나 건드리냐’ 이거라고요. 그러면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너는 네가 있네? 너한테 계획이라는 게 다 있구나.’ 기생충 영화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죠. 아버지가 ‘아들아, 너한테 계획이라는 게 다 있구나.’ 아버지한테 계획이라는 게 아무 계획이 없어요.

내가 내 것 지키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시도는 뭐를 향합니까? 겸손을 향합니까, 완벽을 향합니까? 완벽을 향하죠. 이게 성경에서 그렇게 무서운 자기 의가 되는 거예요. 자기 정당성이 되는 겁니다. 이게 다른 말로 정신병이죠. 내가 상처입었다는 것은, 내가 지키는 것은 외부의 공격받아서 나 지키는 것이 실패로 끝났고 이게 공격을 받아서 도저히 못견디겠다는 거예요.

못견디겠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겸손한 사람은 이게 무슨 뜻인지 몰라요. 겸손한 사람한테 ‘내가 네 말하니까 못견디겠지?’ ‘그게 무슨 말이지? 난 느낌이 잘 안오는데. 못견디겠다는 게 뭐야? 아니 꼭 견뎌야 돼? 왜 견뎌야 되지, 내가?’ 그런데 한참 완벽에다가 잘하려고 한다면 그 다음부터는 못견디는 거예요.

대화를 닫고 그냥 유튜브해서 그것만 계속해서 SNS하면서. 나는 잠시 휴직합니다, 동양대학교를 뭐 이런 거. 자기 것 지키려고 하니까 못견디는 거예요. 주변에서, 언론에서 떠드니까 못견디는 거예요. 왜? 자기 것 지키고 싶어서. 나는 당신들로부터, 언론으로부터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상처가 뭐에요? 아내가 죽는 그 상처 아니죠? 상처가 뭐에요? 왜 상처가 있죠? 손톱, 흠집이 있죠? 뭔가 있으니까.

만약에 겸손한 사람 같으면 이건 상처가 아니고 그건 등 긁어주는 거예요. 아이고, 여기 여기 여기. 여기 간지러운데 긁어줘. 그러니까 상처 오기 전에 이미 상처받을 자아를 본인이 구축하고 있습니다, 본인이. 상처 내놔라 하는 식으로 돌아다니는 거예요. 교만해가지고.

자, 상처받았으니까 불안하죠. 원상회복이 안되니까. 회복할 마음이 없으니까. 내 자존심을 누가 건드렸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자존감 본인이 만들어 놓고 남탓하는 거예요. 불안하니까 불안을 메꾸는 것은 뭡니까? 복수를 하는 거예요.

복수는 두 종류에요. 내가 나에게 복수하는 것과 타인이 나에게 복수하는 것. 타인을 공격하는 것과 나를 공격하는 것. 내가 나를 공격하는 것은 출세하고 부자되는 거예요. 보란 듯이. 맨날 아버지가 잔소리하니까 아버지 죽고 난 뒤에 너는 반드시 판사가 되야 돼. 판사가 되야 돼. 그렇게 잔소리하고 난 뒤에 나중에 여덟 번 떨어지고 누구처럼 아홉 번째 되고 난뒤에 ‘아버지, 저 3차까지 합격했어요.’했는데 아버지 죽어버렸어. 아버지 묘소에 가가지고 건어물 있잖아요, 오징어, 소주 가져가가지고. ‘아버지, 아들이 왔나이다. 이런 낙을 봐야 되는데. 아버지 그동안 사법 공부한다고 찾아오지도 못하고 미안합니다. 이게 바로 합격증입니다.’ 묘소에 딱 놨는데 그 때 바람 불어서 휘날라가 버리고. 막 주워서 놓고. 이게 무슨 짓이에요, 이게?

결국 그 아들은 뭐냐 하면 그런 식으로 아버지한테 복수하는 거예요. 내가 아버지의 요구사항을 다 들어줌으로써 두 번 다시 아버지가 내 흠집을 못찾을 때 아버지를 이기는 거예요. 아버지가 율법을 주면 그 율법을 다 지킴으로써 ‘진짜 아들아, 나 너한테 졌다’ 이런 소리 듣고 아버지를 기어이 밟으므로써 라이벌을 이기는 식으로써 내가 최고가 되는 거예요. 세상에, 그런 교만이 어디 있습니까. 그게 극단적인 악마의 모습이죠.                 

다시 이야기 할께요. 우리는 죄 없습니다. 죄 없어요. 왜냐하면 죄는 창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비창조에서 논의되어야 되고 언급되어야 되요. 이건 참 어려운 이야기인데, 주님께서 아브라함을 보냈잖아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직업이 뭐에요? 아브라함 직업이 뭡니까? 1번, 양치는 사람. 2번, 목축하는 사람. 3번, 전쟁하는 사람. 몇 번입니까?

아브라함의 직업은? 전쟁이죠. 애굽과의 전쟁을 이겼잖아요. 죽음과의 전쟁을 이겨냈잖아요. 탈출했잖아요. 죽음과 싸워야 되고 마귀와 싸워야 되고 비언약과 싸워야 되고 이방민족과 싸워야 되고 저주와 싸워야 될, 전쟁하는 사람, 군인이죠. 싸움이죠. 아브라함이 실제로 자기 일꾼, 자기 종들 318명 해가지고 그 때 소돔과 고모라의 연합군하고 이겼잖아요. 그게 아브라함의 직업이에요.

아브라함이 이겼을 때 본인이 잘해서 이겼습니까? 아니면 언약의 하나님이 이기게 했습니까? 언약의 하나님이 이기게 하신 거죠. 그러니까 멜기세덱이 왔을 때 십일조를, 그 전리품을 누구한테 바쳐요? 십분의 일을? 바로 멜기세덱한테 바치잖아요. 그럼 멜기세덱이 전쟁했다는 거예요.
 
그 멜기세덱의 반열을 따라 오신 분이 누구입니까? 히브리서 6장, 7장에서. 예수님이잖아요. 이게 그냥 젖만 먹는 교인들은 모르는 이야기에요. 단단한 걸 먹어야 멜기세덱에서 나간다는 거예요. 그럼 멜기세덱은 뭐냐? 멜기세덱은, 나는 따로 전쟁하는 것이 아니고 전쟁하는 분을 남편으로 모신 거예요.

그러니까 불안하지도 않고 아까같이 놀랄 일도 없는 거예요. 우리 남편 싸움 잘하거든요. 아니 싸움 잘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미 싸움을 이겼어요. 그래서 성도는 뭐만 자랑합니까? 우리 남편이 이겼던 유일한 무기, 세 자로. 십자가만 자랑하는 거예요. 세 자로 하면 십자가. 한 자로 하면 피. 피만 자랑하고 십자가만 자랑하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는 겸손할 수밖에 없죠. 왜? 내 무기를 따로 만들 이유가 없기 때문에. 내 무기에 마귀가 무서워하지 않거든요. 내가 만든 나의 의와 거룩 때문에 ‘어머나, 무서워라’ 하고 도망치지 않는다는 말이죠. ‘상투스, 상투스’ 백 날 해도. 그런데 안성기나 겁내고 있지, 영화보는 관객들이나 겁내고 있지 마귀는 지금 웃고 있다니까요. ‘사탄아 물러나라’ 막 게거품물고 간질 낫죠.

겸손한 것 같으면요, 나도 그런 거품 한번 물고 싶다. 이렇게 되어야지. 이렇게 되어야 돼요. 왜냐하면 내 인생을 내가 처리하지 않거든요. 사라 같으면 남편이 있잖아요. 남편이 알아서 하는데 구태여 내가 하겠다는 것은 남편과 독립하겠다는 거예요. 그것보다 더 교만한 게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강의해도 취지를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자, 취지가 뭐냐 하면, 빛과 어둠, 그리고 평안과 환난. 이것을 하나의 수조로, 애들 목욕시킬 때 물 받는, 수조로 볼 때 아브라함이 나오고 사라가 나왔잖아요. 아브라함과 사라는 빈 껍데기에요. 내용은 무슨 내용입니까? 이 빛과 어둠의 전투와 환난과 평안의 전투의 내용이 그대로 담기는 거예요.

이 껍데기가 왜 놀랍니까? 놀랄 필요 없죠. 지가 왜 싸워요? 안에 내용물이 들어오는데. 수조에다가 뭔가 이 어떤 빨대 따라 쑥 올라오잖아요, 이게. 이게 바로 뭐냐? 언약의 백성 아닙니까? 쑥 올라 온다고요. 아브라함도 몰랐죠. 사라가 먼저 빛과 어둠, 환난과 평안의 내용이 사라를 통해서 쭉 올라오잖아요. 잉태치 못한다? 이게 비창조다.

분명히 잉태치 못하는데 어떻게 됐어요? 잉태됐죠. 지 솜씨입니까? 자기 믿음의 솜씨 아니죠. 이미 창조 이전의 내용이 그냥 사라를 빨대로 사용해가지고 빈 투명한 관으로 사용해서 그냥 그걸 빨아 당긴 거예요. 갑자기 제목을 빨대로...겸손보다 빨대가 낫네. 쑥 올라오잖아요. 바나나우유, 초코우유 막 올라오잖아요. 우리는 빨대에 불과하다 이 말입니다.
 
나를 지키기 위한 내 무기가 필요치 않아요. 사람이 교만하다는 것은 내 것이기 때문에 교만합니다. 남한테 지기 싫어하는 내 것, 니한테 꿀리기 않는다는 내 것. 이것은 내가 투자한, 평생을 투자한 나만의 것. 그게 있기 때문에 우리는 교만할 수밖에 없어요.

사람이 아무리 겸손해도 손녀하고 같이 가는데. ‘아이고 손녀입니까, 딸래미. 이쁘기도 하여라’ 하면 갑자기 기분이 확 좋은 거예요. ‘우리 손녀가요, 영어도 좀 해요.’ 이런 식으로. 그런데 반대로 ‘아이고 손녀. 할매나 손녀 꼬라지 보니까 둘다 못 생겨가지고.’ 이렇게 나오면 ‘이씨, 내 거 왜 건드려!’ 이거죠. 겸손하면 못 생겨도 내 거가, 주님 것이지. 이게 빨대의 기능이지.

이게 사라라니까요. 성경은 착하게 살아라, 바르게 살아라, 훌륭한 사람 되세요. 그게 아니에요. 빨대 기능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이 흉내낼 수도 없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어도 걱정이 없다는 게 이게 인력으로 가당치 않죠. ‘그래 나 애 못낳는다. 주께서 못낳게 하셨어’ 그게 사라잖아요. 그러면 애낳다. ‘내 애가, 주님 애지.’ 뭐 좋아하기는 좋아하지만. ‘아브라함아 바쳐라.’ ‘예, 바치겠습니다.’

이게 뭐 어떻게 대단한 윤리와 도덕입니까, 이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선함입니까? 아니에요. 주께서 그냥 쓰시는 거예요. 주께서 쓰신다고 하니까 아까 안양 강의에서 했던 게 생각나네. 내가 주의 것입니까? 아니면 주께서 쓰시는 겁니까? 어느 쪽입니까? 주께서 쓰시는 거예요.

내가 주의 것이 되면, ‘주의 것이니까 꼭 간직해서 내가 착하고 바르게 살아야지’ 하면 이제 인수인계해가지고 벌써 주님하고 따로 놀고 독자적으로 자기가 생각하는 완벽과 완전을 추구하는 극히 악마적인 행세를 그 다음부터 시도하고, 악마한테 시달리고 또 시달리고 평생을 시달릴 거예요. 이렇게 얘기했는데도 불구하고 얼굴 어둡게 하고 돌아다니기만 해봐라.

자꾸 주의 몸이니까 남하고 달라야 돼.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과 달라야 돼. 왜 니가 해? 개로 살면 되지. 개가 좋은 옷 입으면 좋은 개 됩니까? 주인이 뭐해요? 주인이 놀아요, 지금? 왜 주인을 믿을 줄을 몰라요? 주인에게 뭐가 있습니까? 빛도 있고 어둠이 있는 거예요.
 
의도 있고 뭐도 있고? 죄가 있는 거예요. 그 죄를 주께서 우리한테 집어넣은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욕심쟁이 우후훗, 우리는 욕심쟁이라니까요. 그래서 뭐? 욕심쟁이라서 지옥갑니까? 에이, 용서받았으니까 들어가지. 내가 용서해달라고 했습니까? 용서받았으니까 우리가 죄를 알아요? 우리가 모르는 죄가 더 많은데. 그러면 아는 죄만 용서 받으면 모르는 죄는 그냥 그대로 지옥갑니다.

우리 죄는 누가 아느냐. 나는 몰라요. 그러면 누가 아느냐? 우리 주인이 알지요. 우리 주님이 알죠. 그러니 사라가 자기 남편을 뭐라고 합니까? 자기 주님이라고 했잖아요. 이 언약 관계가 오늘날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라 이 말입니다. 결혼생활 제대로 하라 지금 그런 내용이 아니에요. 뭐 결혼 못해서 환장할 일 있습니까.

7절 봅시다. 마지막으로. “더 연약한 그릇이요”. 아내를 보고 뭐라고 합니까? 더 연약한 그릇. 그 연약이,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고 네가 네 아내처럼 연약의 자리에서 살아라 이 말입니다. 이 아브라함아. 하나님 보시기에 너도 못지 않게 연약해야 돼. 연약이 바로 복이야.

연약하다고 연약하겠어요? 하지만 아무리 강해도 ‘주여, 저는 맹탕이고 연약합니다.’ 그러한 자유와 평안함. 이게 주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준 주님의 품성입니다. 주님 되게 연약해요. 뺨 때리고 해도 그냥 맞았어요. 하지만 맞는다고 하나님이 아닌 게 아니잖아요. 하늘나라 사람 아닌 게 아니죠.

주님께서는 이것조차 주께서 그냥 쓰시는 거예요. 우리도 하나님께서 언약의 그릇으로 쓰시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에 죽는 날까지 그저 주신 것만 해도 감사하는, 그런 겸손을, 주님의 겸손을 보여주는 성도 됩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을 몇 독을 하고 신학을 하고 얼마나 지식이 많은 것이 오히려 우리에게 슬픔을 주고 그게 압력이 되었습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닌데, 겸손이 중요한데 우리는 완벽이 더 중요한 것처럼 착오를 일으켰습니다. 이제는 완벽 쪽으로 달려가지 말고 겸손 쪽으로 달려가는 그러한 즐거움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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