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강의20190919b 베드로전서3장 6절(놀라지 않기)-이 근호 목사
자, 죄의식이라는 것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내가 완전함을 추구할 때 죄의식이 발생되요. 겸손하게 되면 죄라는 것이 없어요, 겸손한 자에게는.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겸손한 자에게 죄가 있을 리가 있어요? 왜냐면 겸손은 죄지은 자의 결과이기 때문에.
망가졌는데 뭐. 망가졌는데 무슨 죄를 무서워합니까? 죄는 언제 무섭고 죄책감은 언제 강해가 프레스하는가 하면, 죄 안 짓고 싶을 때 그리고 죄를 적게 지어서 내가 생각하는 그 괜찮은 위치에 도달하고자 시도할 때 죄가 그렇게 무서운 겁니다. 죄가 무섭고 죄 붙은 데를 떼어 낼려고 몸부림치죠.
털 있는 개한테 물 뿌려 보세요. 개가 어떻습니까? 막 그 털을 앞뒤로 흔들어 대면서 물을 털어내려고 하죠. 꼭 그 모습이 인간들 모습 아닙니까? 그 얼마나 가련하고 불쌍해요. 그거 털어내면 나머지는 괜찮은 겁니까? 거룩한 거예요? 순결한 겁니까, 그거 털어내면? 아무리 털어내 보세요. 인간이 온전해 질 수 있는가. 안되거든요.
야고보서 2장에 보면 (약 2장 10절,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사람이 율법을 지키고 온 율법을 다 지켰다 할지라도 하나를 어기면 다 소용없는 게 되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아, 네가 누군지 제대로 알아라. 네가 누군지를. 여기에 본문 7절에 보게 되면 기도가 막히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하나님의 창조성과 연결되지 못하는 것이 기도가 막히는 겁니다.
본래 내 모습이 뭔가 막히고 또 진짜 내 모습을 내 자신이 막아 버려요. 지난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합판, 베니아 합판. 실컷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충성을 하는데 해보니까 이게 꼭 트루먼쇼같아. 전부다 세트장이었어요. 세트장에 머리박고 도로 튀어나오는 거예요. 열심히 기도하고 해가지고 이쯤 왔으면 천사가 막 보이고 이쯤 왔으면 주님이 와있겠지 했는데 박아보니까 이게 전부 다 세트장이에요. 갇혀 있어요, 세상에. 실컷 했는데, 온갖 노력을 다 했는데 그 안에서 뺑뺑 돌았던 겁니다. 자기 딴에 갔는데.
트루먼쇼라는 그 영화에서 트루먼 그 주인공이 헤엄쳐서 카메라 있는데서 탈출을 했는데 가보니까 그게 바다가 아니고, 세트장의 푸른 하늘인 줄 알았더니만 페인트칠해놨어요. 갇혀 있어요. 베니아 합판. 무대 장치에요, 무대 장치.
얼마나 허망한 일이에요, 이 종교라는 게. 그래놓고 얼굴은 피폐해가지고 얼굴색이 뭐 엉망진창이죠. 왜? 완벽을 계속 추구하다 보니까 완벽의 완벽. 산 넘었다고 했는데 산 넘으니까 아직까지 정복되지 않고 또 산이 비로소 보이네요. 저 산 넘으면 되겠지 해서 저 산 넘으니까 아직 정복되지 않은 산이 154,656개 있는데요.
방향을 잘못 잡은 거예요. 완전을 향하여 가면 그것은 세트장 돼요. 바로 우리의 방향은 죄가 나오는 그 쪽으로 쏠려야 되요, 죄가 나오는 그 쪽으로. 우리가 죄를 짓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죄 지을 수가 없어요. 죄가 우리를 갖고 놀죠. 왜냐하면 주인이 주인되기 위해서 우리가 죄인 되어야 되거든요.
우리가 죄인 된다는 것이 주님의 주인됨의 컨셉이라면 받아들입시다. 우리 주인만 좋으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 만족 아니에요? 왜 따로이 독자적으로 내가 괜찮은 존재가 되어야 됩니까? 되지도 않을뿐더러 그 얼마나 악마의 속임수에 그동안 얼마나 시달려 온 거예요. 난 독자적으로 이 정도다, 독자적으로.
‘나는 무엇이다’가 없어요. 그런 건 성경에 용납이 안됩니다. 이 사라를 배우세요. 사라가 6절 끝에 보면 ‘놀라지 아니함으로’. 놀랄 일이 없죠. 독자적으로 살지 않으니까 자기가 독자적으로 놀랄 일이 없다니까요. 내 인생은 저 혼자 있는 게 아니니까요. 신랑과 같이 있으니까 난 신랑의 아내지 독자적으로 여자가 아니거든요, 사라가.
언약의 아내라는 말은 아까도 얘기했지만, 여자도 아니고요, 사람도 아니에요. 그냥 ‘없다’에요. ‘없다’인데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잉태치 못한 자’. 무능력자로서 언약과 결합이 되어 있어요, 사라가. 무능력자니까 독자적으로 아무 일도 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해놓고 자식이 태어났다면 그 자식은 자기 자식이겠어요, 아니면 누구의 자식이겠습니까? 남편에게 주어진 언약의 자식이 되겠죠.
그래서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언약의 딸’이라고 하는 거예요. 언약의 딸을 6절 끝에 보면 ‘그의 딸이 되었다’. 아브라함의 딸. 아브라함이 누구겠습니까? 주님이죠. 아브라함 속에 있는 주님의 딸. 딸이라는 말은 같은 가족이다. 같은 패밀리가 되었다. 이런 뜻이에요.
주인의 상에 떨어지는 그것을 먹더니만 개는 개 맞는데 그 집 개에요. 그 주인집 개이니까 세상에 그런 다행스러운 게 없고 그런 겸손이 어딨습니까? 나 개라고 자랑하지 말란 말이에요. 난 주인집 개라고 이야기 하세요, 멍멍. 난 주인집 개, 주님의 개에요. 겸손이라는 것은 따로이 내 것 내세울 것이 처음부터 박탈당한 그 가벼움이거든요. 내 것이 없으니까. 없으니까 내가 천국가는 내 길을 내 것이 없으니까 막을 게 없죠, 투명하니까. 그러나 내 것이 있으면 내 것을 키우기 위해서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얼쩡거리게 되는 거예요. 능력주신 주님이여, 저 키워주세요. 내가 쑥쑥 소나무 크듯이, 콩나물 크듯이 키워 주세요.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겸손할 수가 있습니까?
얼굴색이 벌써 맛이 가버렸죠. 왜? 내 원대로, 뜻대로, 내 소원대로 안 크니까 나 신앙 없는 건가, 버림받은 건가, 기도가 모자란 건가, 헌금을 적게 했는가. 얼굴색이 벌써...애가 다쳤다고 하면 엄마가 ‘아이고 깜짝 놀라라’ 이렇게 하거든요. 여기 본문에는 놀라지 아니한데 우리는 왜 놀랄 걸 기다려. 그리고 또 아침 되면 걱정돼요. 얼마나 날 놀래킬 일이 몇 가지나 또 주어질지.
개인데 놀랄 일이 있어요, 개인데. 개한테 가가지고 조국이 법무부장관 된다고 하면 놀랍니까? 안놀라요. 개가 무슨 관계 있다고요. 개한테 가서 ‘화성 연쇄범 잡혔대, 그 37년 전 일의 범인이 감옥에 있대’ 해도 개가 ‘깜짝이야’ 안하죠. 멍 짖어버리죠. 그 무슨 관계 있어요?
자꾸 인터넷하고 게임하고 뉴스보는 이유는 놀란 가슴을 좀 좋은 소식으로 달래 달라고 그거 보는 거예요. 좋은 소식이 다른 게 아니죠. 좋은 소식이 뭐가 있겠어요. 뭐 고 아무개 이혼했다. 누가 못해야 기뻐해, 누가 못해야. 누구 망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 정유소 파괴됐다. 이슬람 잘됐다. 우상 믿다가. 더 터져라. 이런 거. 꼭 남이 못돼야 반대급부로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우리는 이렇게 교만합니다. 겸손하지를 못해요.
그러니까 이거는 왜 그러냐 하면 없는 채로 주님과 함께 있어야 되는데 주님 따로 있고 주님 따로 있는 거는 즐겁지도 않고 내 것이 따로 있을 때 나는 즐겁고 사람 살 보람을 느끼겠다고 주장을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요구르트가 여기 있잖아요. 이거 주면서 ‘드세요’ 하게 되면 별로 기쁘지 아니한 거예요. 그런데 와가지고 ‘목사님 우리 집에 요구르트 한 개 있는데 잡숫고 싶으면, 찾으려면 찾아봐.’ 그러면 기어이 그걸 찾는 기쁨, 갖는 기쁨. 왜? 완전케 하려는, 내가 완전하기 위해서 내가 완벽하기 위해서. 이거 찾을 때 그래 난 가치있는 존재야.
바로 이런 식으로 사니까 만일 이것도 못찾으면 우리 얼굴이 얼마나 피폐하겠습니까? 도대체 겸손을 몰라, 겸손을. ‘저 같은 거 안 먹어도 되요’ 그러면 될걸 가지고 기어이 그것도 게임이라고, 찾아낸다고 무슨 상 줄 것도 아니고.
그래서 이 사라의 특징은 ‘받을 것 다 받았다’. 받을 것 다 받은 거예요. 왜? 자기는 애초부터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따라서 받을 걸 다 받았으니까 사라의 모습은 받은 것에 감사하겠죠. 이게 겸손으로 나오죠. 받은 것에 대한 감사가 나오겠죠.
그러면 어디서 줬는가? 그 준 곳이 뭐냐 하면, 기도가 지향해야 될 그 곳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막히지 않아야 됩니다. 기도란 뭐냐? ‘거기서 솔솔 나왔습니다’고 고백하는 게 기도에요. 나는 껍데기다. 껍데기인데 이 껍데기를 계속 뭔가 채우는 것이 나왔을 때, ‘주님이 주셨잖아요’ 하는 것이 기도의 내용이죠.
오늘 본문 같으면 ‘언약이 주셨잖아요. 언약이 언약되기 위해서 언약으로 채워 주셨잖아요.’하는 거예요. 자, 언약은 뭐냐 하면 없는 데서 있게 하죠. 따라서 나는 아기를 못 낳아요, 사라는. 잉태치 못한 여자에요.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어떤 많은 불신자들이 말하기를 성경은 구라이고 교훈집이고 뭐 인간의 지혜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성경의 핵심은 뭐냐? 잉태치 못한 자가 자식 낳은 거예요. 이거는 인간이 따라오려면 따라와. 못 따라온다는 겁니다. 인간의 지혜, 솜씨, 능력, 재주, 축적된 그러한 모든 지식으로 총동원해도 따라올 수 없는 다른 세계 이야기에요, 이 성경이. 다른 세계 이야기라고요.
그러니까 사라는 뭐냐? 그 다른 세계에 이미 들어와 버렸어요. 받을 거 다 받은 거예요. 받을 거 다 받았으니까 내가 죄지었다는 것도 그다지 부담이 안돼요. 죄 지은 거 맞는데 이 육신이 있으니까 죄 지은 거 맞죠. 육신의 본능대로 하니까. 그런데 그게 그렇게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니까요. 원래 죄가 들어오라고 되어 있는데요. 죄가 들어와야 되거든요. 앞으로 이걸 남은 시간에 이야기할건데.
원래 들어와야 될 죄가 들어온 것 뿐인데 내가 죄지었냐 말이죠. 나는 가만히 있는데 죄가 빈 통에 그냥 물이 들어오듯이 들어 왔거든요. ‘너 죄지었구나’ ‘그래, 죄 지었다. 뭐 또 할 말 있나? 없제? 빠이빠이’ 끝나버리죠. ‘너 못됐구나’ ‘그래, 못됐어. 또 뭐 할 말 있나? 없지?’
‘근데 너는 왜 내가 이야기하는데 화를 안 내?’ 왜 화를 내야 됩니까? 내가 했습니까? 내가 계획 잡아서 죄 지었습니까? 아니거든요. 가만히 있는데 죄가 들어왔잖아요, 가만히 있는데. 로마서 5장처럼. 가만히 있는데 죄가 들어 왔다고, 가만히 있는데.
욕심이라는 것이 뭐 마음먹고 하는 것이 욕심이 아니잖아요. 욕심은 보기만 해도 욕심이 생긴다, 보기만 해도. 만날 간식, 이 빵만 주고 어떻게 한우는 안주나? 아무것도 없을 때는 빵도 감사하다가 갑자기 빵 주니까 우리 의존교회도 한우 먹으러 가자 이런단 말이죠. 그러면 한우 먹고 난 뒤에 또 어디 가려고? 이번엔 어디 또 뷔페 가려고?
누구 잘못이 아니라니까요. 야, 이거 너무 심한 베짱이라서 이거 아무나 가르쳐 주는 게 아닌데. 누구 잘못이 아니에요. 누구 잘못이 아니라니까, 이게. 왜 자꾸 잘못한 것에 대해서 용서를 구합니까, 남한테? 그게 자기가 겸손하지 않기 때문에 남한테 용서를 구하는 거예요.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그러지 마세요! 어떻게 하느냐? ‘잘못되었습니다’ 하세요. 웃으면서 ‘내가 잘못했네요.’ ‘용서해 줄까요?’ ‘해주든 말든 난 관계 없어요. 나 잘못된 거 아니까.’ 싱글싱글 ‘안녕히 계세요’. 용서 안하면 난 안갈거야. 이렇게 빌까 이렇게 빌까.
이건 뭐냐? 완전해야 되는데 삐끗해가지고 죄를 지었으니까 그 죄지은 것을 뭘로 바꿔서 완전에다가 제대로 완전의 틀을 맞추려고 시도하는 거예요. 그게 뭡니까? 용서 받게 되면 나는 보다 완전해진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한테 왜 용서를 구해요? 마귀지요, 마귀. 주님한테 왜 용서를 구합니까? 누구 좋으라고 용서를 구해요? 본인 좋으라고 용서를 구하지, 본인 좋으라고. 지난 수요일 이야기했지요. 도대체 인간은 브레이크가 없어. 자꾸 미끄러져요. 예수님께 기뻐하면 끝나야 되는데 자꾸 예수님 좋으면 결국은 그게 나한테 유리하게 작용하기 때문에...이게 계속 가. 브레이크 없는 벨트라고 누가 이야기했더라, 홍준표가 이야기했는가. 자꾸 스톱할 줄을 몰라. 브레이크가 고장난 모양이라.
주님께 영광. 끝났잖아요. 내가 주께 영광이면 나한테 떨어지는 콩고물은...또 벌써 미끄러졌어! 왜 또 그 유리함을 챙깁니까? 그게 뭐냐면 겸손하지 않아서. 저 높은 곳을 향한 미련과 애착이 아직 남아 있어서 높아지려고 하는 거예요. 높아지니까 얼굴이 어둡잖아요. 오늘 강의가 얼굴 어둡다는 걸 왜 그리 강조해가지고 오늘 화장 안했는데 또 나보고 이야기하는가...화장하고 관계 없고요.
정신 좀 차리자 이 말입니다. 용서 받아서 씻어지는 죄는 없어요! 주께서, 용서해달라고 해서 용서해서 구원 받는 게 아닙니다. 이미 용서받은 자가 죄를 아는 거예요. 그리고 그 죄에 대한 용서는 내 몫이 아니고 누가 했다? 개가 할 몫이 아니에요. 개가 용서 어떻게 빕니까? 이렇게 빌다가 주인님, 이렇게 빕니까? 아니에요.
용서차원은 주인이 할 그것이지... 용서했으면 내 개고 용서 안 받았으면 남의 개 되는 거예요. 개로 들어갔다는 것은 이미 용서가 끝난 거예요. 용서가 끝났는데 왜 우리가 자꾸 그걸 문제 삼고 제2, 제3 자꾸 끄집어냅니까?
꼭 부부싸움이 그걸로 시작되잖아요. 지금 일어난 일만 하면 부부싸움이 안 일어나요. 그것부터 시작해가지고 원래부터 이러했다 해가지고 싸우다가...벌써 지나갔잖아요. 1년 전에, 2년 전에 지나간 이야기인데 그걸 또 끄집어내서 부부싸움을 한다. 부부싸움을 하면 그냥 부부싸움만 하면 괜찮은데 또 하필 그때 장모님이 오거든. 그러니까 얼마나 평소에 내 딸을 구박했는지 막...처음으로 했는데 맨날 싸우는 셈이 되가지고...‘자네 그렇게 안봤는데 실망이야, 흥’ 가져온 총각김치통 들어서 도로 가져가 버리고...다시는 애 봐주나 봐. 이러면서.
갑자기 그러다가, ‘엄마, 우리 이서방 그런 사람 아니야’ 갑자기 싸움하다가 적의 적은 나의 동지인가. 남편하고 싸우다가 자기 엄마가 남편 욕하니까 이번에는 또 갑자기 엄마보고 ‘엄마 그러려면 가. 여기 내 영역이야. 엄마도 내 말들어.’ 그 엄마 가면서, ‘아유 딸 키워도 소용없다.’
왜 딸 키워서 소용있기를 원하십니까? 엄마가 교만해서 그래요. 결국 오늘 결론은 엄마는 교만했다. 엄마는 교만했네. 내 딸은 그래서는 안된다. 왜 자기 딸은 그래서는 안되는데요? 교만해서 그렇고 얼굴이 편치 못해요. 걱정 근심을 달고 다닙니다.
자, 그러면 죄가 어디서 나오는가? 죄는 창조성에서 나오죠, 창조성. 창조성에서 죄가 유발되죠. 죄가 유발되는 거예요. 딱 엎드렸다가...죄가 있는데, 에덴 동산에 인간이 여기 있어요. 그러면 인간이 무슨 일을 했을 때 바깥에 있는 죄가 여기에 확 들어와 버리죠. 확 들어와 버리는 거예요. 인간은 죄가 들어온 것을 촉발한 겁니다.
그래서 만약에 인간이 죄를 지었으면 죄를 지은 당사자가 용서를 받거나 자기가 착한 일을 해서 만회하면 되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죄라는 것은 인간이 만든 게 아니고 원래 창조성 안에 하나님에 의해서 죄가 만들어 진거에요. 죄를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하면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지금 놀라 자빠집니다. 선한 하나님이 죄를 지을 리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사야 45장 어떻게 되는데? 하나님은 빛도 만들었을 뿐 아니라 뭐도 만들었다? 어두움도 만들었잖아요. 개혁주의 신학은 자기 신학 깨질까봐 벌벌 떨어요. 그러니 벌벌 떠니까 교만한 거예요. 완전한 신학, 완전 진리를 추구하니까 교만한 거죠. 여기 보세요. 이사야 45장 7절 보세요.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어둠이죠.
어둠이 캄캄하다는 뜻이 아니에요. 무엇의 반대말이에요? 빛의 반대말이 어둠이잖아요. 그러면 빛이 인격이 된다면 어둠도 덩달아서 인격으로 등장해야 되죠. 그러면 그건 누구에요? 나쁜 악마죠. 그게 어둠이에요. 빛은 누가 되고? 예수님이 되고. 예수님의 원수이죠.
그 다음에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환난도 짓죠. 환난을 창조한 거예요. 환난을 창조했단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천지창조하고 나서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에 보면 ‘참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했기 때문에 (창세기 1장 31절,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좋은 것만 있어 보이죠. 물론 좋은 것만 있어요. 하지만 그 테두리에, 그 변두리에, 주변에 뭐가 깔려 있어요? 이미 환난이 준비되어 있는 거예요.
창조가 마감이 아닙니다. 알파가, 시작이 마감이 아니고 시작은 무엇을 내다보고 있느냐 하면, 무엇을 짝표로 들고 가냐 하면 마지막을 짝표로 해야 하죠. 그러면 시작이 있다는 말은 끝이 있다는 말이죠. 마지막이 있잖아요. 그러니 이 중간은 뭡니까?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가는 거라 이 말이죠. 그러면 시작의 요소와 마지막의 요소가 이 중간 요소의 토대로서 그 밑을 떠받치고 있겠죠.
그러면 여기 시작에서 마지막까지 이중성이 나올 겁니다. 어떤 이중성? 왜 마지막이 종말로 끝나는지, 망함으로 끝나는지 나오겠죠? 그러니까 여기 빛도 있어야 하겠고 당연히 어둠이 있어야지, 이중성이 있어야죠. 그 다음에 평안도 있으면 환난도 있어야죠. 우리는 지금 중간에 끼어 있잖아요, 중간에.
처음에 하나님께서는 어떤 하나님? 창조의 하나님이죠. 마지막에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심판의 하나님이죠. 지금 제 말 틀렸습니까? 주님 심판 없어요? 처음의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라 마지막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 이러면 안돼죠. 같은 하나님 맞는데 하실 일이 나타나지 않잖아요, 하실 일이.
그러면 처음 하나님은 만드신 하나님, 마지막 하나님은 심판하시고 새로운 창조하시고 이래야 내용이 나오잖아요, 내용이. 물론 다른 하나님하고 같은 하나님 맞는데요. 그냥 같다 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실 내용들이 나와야 되잖아요, 내용들이. 그 내용들이 중간을 차지하는 거예요.
만들었는데 그 만들어진 것을 어떻게 합니까? 부수잖아요. 창조한 것을 부순다고요. 멸망시킨다고요. 여러분 다 아시는데 새삼스럽게 성경 보려고 하니까 약간 지루하기도 하지만 이걸 모르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감안해서 지루하더라도 참으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1장 10절에 보면 태초에 하나님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고 하늘도 손으로 만드셨죠. 그것들은 다 주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건데,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란 말이죠. 자, 지으신 바니까 이 뒤쪽을 모르고 그냥 지었다고 하면 그 지으신 것이 어떻게 됩니까? ‘끝까지 그대로 가요. 그래야 하나님 답죠.’라는 말을 할 수도 있어요, 인간이. 잘 모를 때.
‘하나님 만드신 것은 끝까지 갈 수도 있습니다.’라고 해버리면 뭐가 누락됐습니까? 뭐가 빠졌어요? 그 뒤의 말씀, 그것들이 멸망한다는 것이 빠졌죠? (히브리서 1장 10절,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11절,“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자, 제 말의 취지를 잘 들어보세요. ‘예수님은 구세주입니다. 믿으세요.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예, 믿어요. 저 주님 믿습니다,’ 자, 뭐가 빠졌습니까? 히브리서 1장 10절과 비교해서 뭐가 빠졌어요? 나의 멸망이 빠졌잖아요, 나의 멸망이.
다시 이야기해볼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만들었습니다. 어떤 분입니까?’ ‘참 좋으신 하나님이에요. 믿을랍니다.’ 이게 제대로 주님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어요? 아니죠? 뭘 반영해야 돼요? 주께서 나를 만드셨는데 주님께서 나를 어떻게 한다? 멸망시킨다 해야 주님이 주님답게 되는 거예요.
‘나 인간으로 태어났는데, 나 개다.’ 이래야 된다니까요, 이래야. 생각해보면 굉장히 어려운 문제죠. 왜 이게 어려운 문제냐 하면은 내가 도무지 나를 안다치려고 해요. 하나님 믿는 이유는 현상 유지에다가 더 추가적으로 플러스 되가지고 더 괜찮음으로 계속 축적해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어요. 문제는 그게 바로 멸망의 이유가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 높이는 것 같아 보이죠? 아닙니다. 만들어진 나에 대해서 하나님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 저를 만들었죠?’ ‘그래’ ‘그러니까 손대지 마세요’ 그게 바로 어둠이에요. 어둠을 멀리 찾지 마세요. 모든 인간들이 어둠이에요. 차라리 어둠이라고 하고 그 어둠의 요소 있음을, 그걸 인정해가지고 겸손하면 되는 거예요.
‘그래, 어둠이다. 너 망한대.’ ‘그래, 주께서 망하게 하셨지.’ ‘네 죄 때문에 망한거야.’ ‘아니야, 주께서 망하게 하시면서 죄라고 나한테 덮어씌웠어.’ 갑자기 말이 어려워지죠. ‘목사님 그 말이 그 말 아닙니까?’ 그 말이 그 말 아닙니다.
내가 죄를 지어서 망해버리면 내가 죄 안지어 버리면 애초부터 안 망해야 될 사람인 것처럼 우리가 오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애초부터 모든 것이 지어졌다는 말은 모든 것은 망해야 된다는 하나님의 원칙을 만약에 여러분들이 유지하신다면, 만드신 인간을 하나님께서 흙으로 돌려 보내신 그것이 주님의 일관된 스케쥴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있다’를 좋아하지 말고, ‘있다’를 기뻐하지 마시고요. 오히려 반대로 내가 죽어 없어지는 것을 기뻐해야 돼요. 왜? 그게 주님의 일하심의 일관성과 충실하심을 지금 미리, 죽기 전에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뭐 겸손이 다른 거 있나. 그게 겸손이죠.
‘아유, 아줌마 이번에 주식 대박 났다면서?’ ‘대박나면 뭐하나? 죽는데’ 이런 거. ‘이번에 애가 서울대학교 법대를 들어갔다면서? 수시합격 했다면서?’ ‘들어가면 뭐하나? 걔도 죽고 나도 죽는데’ ‘언제요?’ ‘한 60년 살다가’ 어차피 60년 살아도 지나간 것이 어제 일 같아요. 이틀만 살았어. 60년 살아도, 80년 살아도 이틀만 산거에요.
돌아보면, 함축해 보면 지난 살아온 모든 것이 단 하루로 응축이 됩니다. 어제. ‘어제’란 말로. 그리고 지금은 어제가 아닌 ‘오늘’. 달랑 이틀 산거에요. 수명이 이틀이에요. 어제는 살았고 오늘은 죽는 날이고. 그런데 그것이 감사하게도 주의 일관된 계획이고, 그 계획을 내가 눈치챘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하죠.
주여, 주의 종이 뭐기에 주의 일관됨을 제게 알려 주시나이까. 인간은 나면서 죽게 되어 있는 것이 마땅하고 인간은 풀인 것이 마땅하고 오직 말씀만 영원하면 저는 여한이 없습니다. 이게 바로 겸손입니다. 이게 왜냐하면 혼자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고백이 나오는 거예요. 홀로 살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 한 달간 홀로 살아봤어요? 한 달간? 제가 한 달 혼자 살아보니까 혼자 사는 게 이렇게 좋을 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 반찬 안해도 그만이고 밥 안해도 그만이고. 내 할일에 몰두할 수 있었어요. 반찬이 뭐냐 밥을 어떻게 하느냐가 시시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문제에요. 빨래를 몇 번, 청소를 몇 번하냐 그게 안 중요한 문제거든요. 그게 이미 영생받은 것을 취소할 문제가 아니잖아요.
물론 그 한 달은 후딱 지나갔지만...며칠 전까지 끝났지만...홈쇼핑해가지고 육개장 시키면 12인분을 그냥 사고요. 마트에 가면 볶음밥 사가지고 먹을 수 있어요. 가장 신경 쓰이는 게 뭐냐. 음식 쓰레기 남기지 않는 거. 무조건 쓰레기 남기지 않는 거. 다 그냥 먹어치우는 거. 설거지할 필요 없는 거. 그게 혼자 사는 하나의 재미? 비법이었어요. 아, 역시 여자가 혼자 살게 되면 두 번 다시 어지간하면 같이 안살려고 하는 이유가 여기 있었구나. 예전엔 미처 몰랐네.
이제부턴 내가 그걸 깨달아 가지고 누가 혼자 살면 다시 결혼하세요. 다시 합치세요. 이제 그런 소리 안할랍니다. 혼자 사는 게 최고에요. 그래서 지난 주일날 그런 말 했잖아요. 이별보다 결혼이 더 힘들다고. 오랜만에 바른 소리 했습니다. 이별보다 결혼이 더 힘들어요. 혼자 사는 것보다 둘이 사는 게 더 힘들어. 이거 무를 수도 없고. 그래도 애 결혼식 때 손잡고 가야 되거든.
자, 그러면 창조는 뭐냐? 비창조를 위해서 창조가 있다고 보면 되요. 왜냐면 창조는 반드시 없는 데서 나왔기 때문에. 비창조. 비창조는 창조의 원형입니다. 아무것도 없는데서 창조가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비창조는 무엇이냐? 이게 바로 두자로 언약이고 이 언약을 보여준 사람이 누구냐면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입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의 딸이 되었느니라.’ 곧 이 말은 뭐냐? 주님과 한 가족이 되었느니라.
그러면 아브라함이 대단합니까? 아니. 아브라함이 배워야지. 누구한테? 아내한테 배워야죠. 아브라함은 자식 놓을 능력 있잖아요. 능력 있다는 말은, 그것은 무엇과 멀어져 있다, 아내보다는? 없음과 더 멀어지는 거예요. 왜? 있으니까. 여자가 잉태치 못한다는 것은 여자의 용도로서 폐기처분 된 거예요. 왜? 여자가 있는 이유는 자식을 놓기 위해서 있는데 자식 못놓는 여자, 그것은 있으나 마나죠. 그런데 있으나 마나한테 배워야 돼요. 왜? 있으나 마나를 아는 그것이 겸손이기 때문에.
왜 그러냐하면 있으나 마나는 비창조거든요. 창조보다 뭐가 우선이냐 하면 비창조가 우선이에요. 비창조는 뭐가 없느냐 하면 아직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고 없기 때문에 아직까지 죄가 성립이 안돼요, 죄가. 죄가 없다니까요. 뭐 있어야 죄가 되지 뭐 없는데. 아니 애기 못낳는 것이 죕니까? 지 잘못이에요? 아니잖아요.
사람이 뭔가 있으니까, 이미 태어났으니까 자꾸 골라 잡으려고 하는 겁니다. 아유, 나 남자로 태어나지 말고 여자로 태어날 걸. 난 여자말고 남자로 태어날 걸. 이미 자기가 남자기 때문에 혹 여자기 때문에 다른 경우에 매력을 느끼고 욕심을 내는 거예요.
그것이 이미 있다는 거고 그 있음이 나로 하여금 없음으로 가는 게 아니고 더 완벽하게 있음으로 가기 때문에 점점 더 교만해지고 교만해지는 만큼 내 얼굴은 어두워지는 거예요. 악마한테 계속해서 부추김을 당하고 쫓김을 당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대로 하면 놀랄 일이 많은 겁니다. 깜짝깜짝 경기날 일이 많은 거예요.
‘너 그런 짓 했지? 너 이제 망했어’ ‘아이고 놀라라. 가슴이 덜컹 내려앉네’ ‘지난 여름에 네가 한 짓을 안다’ ‘돈 얼마면 돼? 얼마면 돼? 아무데도 이야기하지 마. 이거 가지고 입 다물어. 돈 먹고 나불대면 사람 사서 죽여버린다’ 이런 식으로. 그러니 남한테 복수하는 이유가 뭡니까? 분노하고 복수하고 남탓을 하는 이유가 뭐에요? 내 것 안 없어지려는 발악을 하기 때문에 그 짓하고 있는 거예요.
제가 그 강남 강의에서 했던 정신병의 3종세트 기억납니까? 다시 할까요? 정신병의 3종세트. 첫째는 상처. 두 번째는 불안. 세 번째는 중요해요. 복수. 복수에요. ‘목사님 그런 소리 하지마세요. 나 목사님 말에 상처받았어요.’ 내가 보기에 이거 뭐냐면 ‘니가 뭔데 나 건드리냐’ 이거라고요. 그러면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너는 네가 있네? 너한테 계획이라는 게 다 있구나.’ 기생충 영화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죠. 아버지가 ‘아들아, 너한테 계획이라는 게 다 있구나.’ 아버지한테 계획이라는 게 아무 계획이 없어요.
내가 내 것 지키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시도는 뭐를 향합니까? 겸손을 향합니까, 완벽을 향합니까? 완벽을 향하죠. 이게 성경에서 그렇게 무서운 자기 의가 되는 거예요. 자기 정당성이 되는 겁니다. 이게 다른 말로 정신병이죠. 내가 상처입었다는 것은, 내가 지키는 것은 외부의 공격받아서 나 지키는 것이 실패로 끝났고 이게 공격을 받아서 도저히 못견디겠다는 거예요.
못견디겠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겸손한 사람은 이게 무슨 뜻인지 몰라요. 겸손한 사람한테 ‘내가 네 말하니까 못견디겠지?’ ‘그게 무슨 말이지? 난 느낌이 잘 안오는데. 못견디겠다는 게 뭐야? 아니 꼭 견뎌야 돼? 왜 견뎌야 되지, 내가?’ 그런데 한참 완벽에다가 잘하려고 한다면 그 다음부터는 못견디는 거예요.
대화를 닫고 그냥 유튜브해서 그것만 계속해서 SNS하면서. 나는 잠시 휴직합니다, 동양대학교를 뭐 이런 거. 자기 것 지키려고 하니까 못견디는 거예요. 주변에서, 언론에서 떠드니까 못견디는 거예요. 왜? 자기 것 지키고 싶어서. 나는 당신들로부터, 언론으로부터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상처가 뭐에요? 아내가 죽는 그 상처 아니죠? 상처가 뭐에요? 왜 상처가 있죠? 손톱, 흠집이 있죠? 뭔가 있으니까.
만약에 겸손한 사람 같으면 이건 상처가 아니고 그건 등 긁어주는 거예요. 아이고, 여기 여기 여기. 여기 간지러운데 긁어줘. 그러니까 상처 오기 전에 이미 상처받을 자아를 본인이 구축하고 있습니다, 본인이. 상처 내놔라 하는 식으로 돌아다니는 거예요. 교만해가지고.
자, 상처받았으니까 불안하죠. 원상회복이 안되니까. 회복할 마음이 없으니까. 내 자존심을 누가 건드렸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자존감 본인이 만들어 놓고 남탓하는 거예요. 불안하니까 불안을 메꾸는 것은 뭡니까? 복수를 하는 거예요.
복수는 두 종류에요. 내가 나에게 복수하는 것과 타인이 나에게 복수하는 것. 타인을 공격하는 것과 나를 공격하는 것. 내가 나를 공격하는 것은 출세하고 부자되는 거예요. 보란 듯이. 맨날 아버지가 잔소리하니까 아버지 죽고 난 뒤에 너는 반드시 판사가 되야 돼. 판사가 되야 돼. 그렇게 잔소리하고 난 뒤에 나중에 여덟 번 떨어지고 누구처럼 아홉 번째 되고 난뒤에 ‘아버지, 저 3차까지 합격했어요.’했는데 아버지 죽어버렸어. 아버지 묘소에 가가지고 건어물 있잖아요, 오징어, 소주 가져가가지고. ‘아버지, 아들이 왔나이다. 이런 낙을 봐야 되는데. 아버지 그동안 사법 공부한다고 찾아오지도 못하고 미안합니다. 이게 바로 합격증입니다.’ 묘소에 딱 놨는데 그 때 바람 불어서 휘날라가 버리고. 막 주워서 놓고. 이게 무슨 짓이에요, 이게?
결국 그 아들은 뭐냐 하면 그런 식으로 아버지한테 복수하는 거예요. 내가 아버지의 요구사항을 다 들어줌으로써 두 번 다시 아버지가 내 흠집을 못찾을 때 아버지를 이기는 거예요. 아버지가 율법을 주면 그 율법을 다 지킴으로써 ‘진짜 아들아, 나 너한테 졌다’ 이런 소리 듣고 아버지를 기어이 밟으므로써 라이벌을 이기는 식으로써 내가 최고가 되는 거예요. 세상에, 그런 교만이 어디 있습니까. 그게 극단적인 악마의 모습이죠.
다시 이야기 할께요. 우리는 죄 없습니다. 죄 없어요. 왜냐하면 죄는 창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비창조에서 논의되어야 되고 언급되어야 되요. 이건 참 어려운 이야기인데, 주님께서 아브라함을 보냈잖아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직업이 뭐에요? 아브라함 직업이 뭡니까? 1번, 양치는 사람. 2번, 목축하는 사람. 3번, 전쟁하는 사람. 몇 번입니까?
아브라함의 직업은? 전쟁이죠. 애굽과의 전쟁을 이겼잖아요. 죽음과의 전쟁을 이겨냈잖아요. 탈출했잖아요. 죽음과 싸워야 되고 마귀와 싸워야 되고 비언약과 싸워야 되고 이방민족과 싸워야 되고 저주와 싸워야 될, 전쟁하는 사람, 군인이죠. 싸움이죠. 아브라함이 실제로 자기 일꾼, 자기 종들 318명 해가지고 그 때 소돔과 고모라의 연합군하고 이겼잖아요. 그게 아브라함의 직업이에요.
아브라함이 이겼을 때 본인이 잘해서 이겼습니까? 아니면 언약의 하나님이 이기게 했습니까? 언약의 하나님이 이기게 하신 거죠. 그러니까 멜기세덱이 왔을 때 십일조를, 그 전리품을 누구한테 바쳐요? 십분의 일을? 바로 멜기세덱한테 바치잖아요. 그럼 멜기세덱이 전쟁했다는 거예요. 그 멜기세덱의 반열을 따라 오신 분이 누구입니까? 히브리서 6장, 7장에서. 예수님이잖아요. 이게 그냥 젖만 먹는 교인들은 모르는 이야기에요. 단단한 걸 먹어야 멜기세덱에서 나간다는 거예요. 그럼 멜기세덱은 뭐냐? 멜기세덱은, 나는 따로 전쟁하는 것이 아니고 전쟁하는 분을 남편으로 모신 거예요.
그러니까 불안하지도 않고 아까같이 놀랄 일도 없는 거예요. 우리 남편 싸움 잘하거든요. 아니 싸움 잘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미 싸움을 이겼어요. 그래서 성도는 뭐만 자랑합니까? 우리 남편이 이겼던 유일한 무기, 세 자로. 십자가만 자랑하는 거예요. 세 자로 하면 십자가. 한 자로 하면 피. 피만 자랑하고 십자가만 자랑하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는 겸손할 수밖에 없죠. 왜? 내 무기를 따로 만들 이유가 없기 때문에. 내 무기에 마귀가 무서워하지 않거든요. 내가 만든 나의 의와 거룩 때문에 ‘어머나, 무서워라’ 하고 도망치지 않는다는 말이죠. ‘상투스, 상투스’ 백 날 해도. 그런데 안성기나 겁내고 있지, 영화보는 관객들이나 겁내고 있지 마귀는 지금 웃고 있다니까요. ‘사탄아 물러나라’ 막 게거품물고 간질 낫죠.
겸손한 것 같으면요, 나도 그런 거품 한번 물고 싶다. 이렇게 되어야지. 이렇게 되어야 돼요. 왜냐하면 내 인생을 내가 처리하지 않거든요. 사라 같으면 남편이 있잖아요. 남편이 알아서 하는데 구태여 내가 하겠다는 것은 남편과 독립하겠다는 거예요. 그것보다 더 교만한 게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강의해도 취지를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자, 취지가 뭐냐 하면, 빛과 어둠, 그리고 평안과 환난. 이것을 하나의 수조로, 애들 목욕시킬 때 물 받는, 수조로 볼 때 아브라함이 나오고 사라가 나왔잖아요. 아브라함과 사라는 빈 껍데기에요. 내용은 무슨 내용입니까? 이 빛과 어둠의 전투와 환난과 평안의 전투의 내용이 그대로 담기는 거예요.
이 껍데기가 왜 놀랍니까? 놀랄 필요 없죠. 지가 왜 싸워요? 안에 내용물이 들어오는데. 수조에다가 뭔가 이 어떤 빨대 따라 쑥 올라오잖아요, 이게. 이게 바로 뭐냐? 언약의 백성 아닙니까? 쑥 올라 온다고요. 아브라함도 몰랐죠. 사라가 먼저 빛과 어둠, 환난과 평안의 내용이 사라를 통해서 쭉 올라오잖아요. 잉태치 못한다? 이게 비창조다.
분명히 잉태치 못하는데 어떻게 됐어요? 잉태됐죠. 지 솜씨입니까? 자기 믿음의 솜씨 아니죠. 이미 창조 이전의 내용이 그냥 사라를 빨대로 사용해가지고 빈 투명한 관으로 사용해서 그냥 그걸 빨아 당긴 거예요. 갑자기 제목을 빨대로...겸손보다 빨대가 낫네. 쑥 올라오잖아요. 바나나우유, 초코우유 막 올라오잖아요. 우리는 빨대에 불과하다 이 말입니다. 나를 지키기 위한 내 무기가 필요치 않아요. 사람이 교만하다는 것은 내 것이기 때문에 교만합니다. 남한테 지기 싫어하는 내 것, 니한테 꿀리기 않는다는 내 것. 이것은 내가 투자한, 평생을 투자한 나만의 것. 그게 있기 때문에 우리는 교만할 수밖에 없어요.
사람이 아무리 겸손해도 손녀하고 같이 가는데. ‘아이고 손녀입니까, 딸래미. 이쁘기도 하여라’ 하면 갑자기 기분이 확 좋은 거예요. ‘우리 손녀가요, 영어도 좀 해요.’ 이런 식으로. 그런데 반대로 ‘아이고 손녀. 할매나 손녀 꼬라지 보니까 둘다 못 생겨가지고.’ 이렇게 나오면 ‘이씨, 내 거 왜 건드려!’ 이거죠. 겸손하면 못 생겨도 내 거가, 주님 것이지. 이게 빨대의 기능이지.
이게 사라라니까요. 성경은 착하게 살아라, 바르게 살아라, 훌륭한 사람 되세요. 그게 아니에요. 빨대 기능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이 흉내낼 수도 없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어도 걱정이 없다는 게 이게 인력으로 가당치 않죠. ‘그래 나 애 못낳는다. 주께서 못낳게 하셨어’ 그게 사라잖아요. 그러면 애낳다. ‘내 애가, 주님 애지.’ 뭐 좋아하기는 좋아하지만. ‘아브라함아 바쳐라.’ ‘예, 바치겠습니다.’
이게 뭐 어떻게 대단한 윤리와 도덕입니까, 이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선함입니까? 아니에요. 주께서 그냥 쓰시는 거예요. 주께서 쓰신다고 하니까 아까 안양 강의에서 했던 게 생각나네. 내가 주의 것입니까? 아니면 주께서 쓰시는 겁니까? 어느 쪽입니까? 주께서 쓰시는 거예요.
내가 주의 것이 되면, ‘주의 것이니까 꼭 간직해서 내가 착하고 바르게 살아야지’ 하면 이제 인수인계해가지고 벌써 주님하고 따로 놀고 독자적으로 자기가 생각하는 완벽과 완전을 추구하는 극히 악마적인 행세를 그 다음부터 시도하고, 악마한테 시달리고 또 시달리고 평생을 시달릴 거예요. 이렇게 얘기했는데도 불구하고 얼굴 어둡게 하고 돌아다니기만 해봐라.
자꾸 주의 몸이니까 남하고 달라야 돼.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과 달라야 돼. 왜 니가 해? 개로 살면 되지. 개가 좋은 옷 입으면 좋은 개 됩니까? 주인이 뭐해요? 주인이 놀아요, 지금? 왜 주인을 믿을 줄을 몰라요? 주인에게 뭐가 있습니까? 빛도 있고 어둠이 있는 거예요. 의도 있고 뭐도 있고? 죄가 있는 거예요. 그 죄를 주께서 우리한테 집어넣은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욕심쟁이 우후훗, 우리는 욕심쟁이라니까요. 그래서 뭐? 욕심쟁이라서 지옥갑니까? 에이, 용서받았으니까 들어가지. 내가 용서해달라고 했습니까? 용서받았으니까 우리가 죄를 알아요? 우리가 모르는 죄가 더 많은데. 그러면 아는 죄만 용서 받으면 모르는 죄는 그냥 그대로 지옥갑니다.
우리 죄는 누가 아느냐. 나는 몰라요. 그러면 누가 아느냐? 우리 주인이 알지요. 우리 주님이 알죠. 그러니 사라가 자기 남편을 뭐라고 합니까? 자기 주님이라고 했잖아요. 이 언약 관계가 오늘날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라 이 말입니다. 결혼생활 제대로 하라 지금 그런 내용이 아니에요. 뭐 결혼 못해서 환장할 일 있습니까.
7절 봅시다. 마지막으로. “더 연약한 그릇이요”. 아내를 보고 뭐라고 합니까? 더 연약한 그릇. 그 연약이,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고 네가 네 아내처럼 연약의 자리에서 살아라 이 말입니다. 이 아브라함아. 하나님 보시기에 너도 못지 않게 연약해야 돼. 연약이 바로 복이야.
연약하다고 연약하겠어요? 하지만 아무리 강해도 ‘주여, 저는 맹탕이고 연약합니다.’ 그러한 자유와 평안함. 이게 주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준 주님의 품성입니다. 주님 되게 연약해요. 뺨 때리고 해도 그냥 맞았어요. 하지만 맞는다고 하나님이 아닌 게 아니잖아요. 하늘나라 사람 아닌 게 아니죠.
주님께서는 이것조차 주께서 그냥 쓰시는 거예요. 우리도 하나님께서 언약의 그릇으로 쓰시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에 죽는 날까지 그저 주신 것만 해도 감사하는, 그런 겸손을, 주님의 겸손을 보여주는 성도 됩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을 몇 독을 하고 신학을 하고 얼마나 지식이 많은 것이 오히려 우리에게 슬픔을 주고 그게 압력이 되었습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닌데, 겸손이 중요한데 우리는 완벽이 더 중요한 것처럼 착오를 일으켰습니다. 이제는 완벽 쪽으로 달려가지 말고 겸손 쪽으로 달려가는 그러한 즐거움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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