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강의20191010a 베드로전서3장 8절(적체와 총체)-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3장 8절
8절,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9절,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마지막으로 말한다는 것은 결론적으로 말한다는 그런 얘기이고, 결론이 나오려면 그 원칙이 계속 살아있어야 되겠죠. 앞에 있는 원칙 이야기하고 결론은 다른 이야기하면 앞뒤가 안맞죠. 일관성이 있으려면 앞에 있는 원칙이 계속 이어져 나간다. 그것이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결론적으로 말하노니’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럼 앞에 있는 원칙이 하나의 이론이라면 마지막으로 하는 것은 하나의 실천이 되겠죠. 구체화된다는 거죠. 하나님의 복음이 구체화되는 거죠. 베드로전서 1장에 보게 되면 1장 2절에,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이렇게 되어 있죠. 그러면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 우선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 뿌림이 우선 되겠죠.
이 말은 뭐냐 하면 성도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피 뿌림을 증거하기 위해서 피 뿌림의 효과,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의 실천, 그것을 나타내는 재료로써 피 뿌림을 본의 아니게 받아야 되는 겁니다. 보통 세상에서는 본인이 결정하고 본인이 선택해서 본인이 행동에 나설 때 어떤 자긍심을 갖고 있어요. 자긍심이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나는 가치있다’ 이거예요.
‘나는 가치있다’. 자부심 또는 자긍심, 다른 말로 하면 자존감, 다른 말로 하면 독자성. 나는 홀로 존재해도 괜찮다는 이 독자성. 근본적으로 하여튼 나는 가치있다. 나는 내 스스로 가치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그 사람 이전의 것은 존재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사람이 스스로 가치가 있다면 그 사람한테는 그게 출발점이 되고 그 전에 만약에 하나님이 계시든 다른 분이 계셔 버리면 본인은 가치있는 것이 아니고 먼저 계신 분의 가치를 증거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자기에게 돌아올 가치가 없는 거예요.
만약에 어떤 재벌 2세, 3세가 돈 있는 척하면서, 돈은 있지만, 돈 씀씀이가 헤프면서 강남의 나이트클럽에 가서 돈 막 뿌리면 사람들이 ‘아이고 신난다, 고맙다’하지만 ‘당신은 재벌이야’라고는 얘기 안하죠. 본인은 재벌이 아니고 자기 할아버지가 재벌이고 아버지가 재벌이지 자기는 재벌이 아니잖아요. 철딱서니 없는 인간이란 말이죠, 마약이나 하고. 그럼 돈은 손자가 쓰는데 본인에게 가치가 돌아옵니까? ‘너네 집안 잘 산다’고 자기 윗대 어른들에게 가치있지 본인보고 가치있다고 하지 않죠. 그렇잖아요.
진짜 나에게 가치가 있으려면 내 이전에 아무도 없어야 돼요. 내가 시작이고 내가 모든 종결이 되어야 돼요. 그래야 나한테 가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전서 1장에 보게 되면 “피 뿌림을 얻기 위해서”라고 되어 있다고요. 우리 스스로 목적이 될 수 있다, 없다? 우리 자체가, 내 가치가 내 존재의 목적입니까? 아니죠. “피 뿌림을 얻기 위해서” 되어 있죠. 예수님의 피 뿌림을 증거하기 위해서 누가 필요했다? 택하심이 필요한 거예요.
내가 예수님을 택한 게 아니다 이 말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택해버리면 내가 가치가 있죠. 왜? 내가 택할 수도 있고 예수님을 안택할 수도 있기 때문에. 내가 최종가치가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예수님 믿을 때 여러분이 예수님을 선택했습니까?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선택했어요? 아니면 어떻게 해서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까? 본인이 결정한 겁니까? 본인이 선택한 거예요?
여러분들 아니라고 얘기하죠. 그러면 그게 아니면 어떻게 예수 믿게 되었느냐 이 말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거기에 대한 또 답변이 있어야 되죠. 내가 선택해서 예수 믿은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 믿었습니까? 제가 시비거는 것은 뭐냐 하면 세상 사는 모든 사람이 최종적으로 사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내게 가치있다’로 환원되기 때문에 제가 시비 거는 거예요.
그런데 베드로 전서에서 오늘 3장이 실천이라면 그 원리는 1장에 나온다 했지요. 그러면 1장 2절에 인간이라는 것을 어떻게 규정합니까? 세상 모든 사람을 인간으로 규정합니까? 아니죠. 예수님의 피 뿌림이 우선 있고 그 피 뿌림이라는 것이, 이것이 실제라는 사실. 그냥 이론이 아니고 상상이 아니고 실제라는 사실을 알려줄, 그걸 보여줄 인물들이 필요한 거예요. 그게 누구냐면 피 뿌림을 얻기 위해서 택하심을 받은 거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잖아요. 십자가 지신 그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여기 일단의 사람들이 택하심을 입은 거예요. 그러면 이 택함을 입은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들이 묻기를, ‘당신은 어떻게 구원되었습니까? 당신이 결정, 선택했습니까?’할 때 ‘아니오’라고 하잖아요. ‘아니오’라고 이야기하면서 이 사람들은 그 순간 뭐가 날라가 버리느냐 하면 내 나름대로의 가치가 날라가는 겁니다, 내 나름대로의 가치가. 내가 쥘 수 있는 가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요.
‘나는 가치있다’가 아니라 ‘가치없다’가 되는 겁니다. ‘가치없다’가 되면 나는 가치를 지워 버리잖아요. 그러면 뭐만 남아요? 나는 없는 거예요. 주께서 피 뿌림이 있기 전까지는 나는 없는 거예요. 예수님의 피 뿌림이 있으면서 동시에 내가 생긴 거예요. 자식이 있다는 말은 그 전제가 부모가 계시다는 거죠. 부모 없이는 자식 없잖아요. 내가 지금 바른 소리 하고 있습니다. 부모 없이는 자식 없죠.
그럼 피 뿌림 없이는 누가 없어요? 성도라는 사람이 없죠, 피 뿌림이 없이는. 그러면 모든 가치는 누가 가져갑니까? 피 뿌림으로 쏠리겠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쏠린다 이 말이죠. 그럴 때 결국 세상과의 싸움은 뭡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이, 그게 사실이야? 진짜야?’ 라고 할 때 그걸 진짜라고 여기는 사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했다는 것에다가 모든 최종적인 의미와 가치를 다 두고 사는 사람은 성도가 되겠습니다. 왜? 그 전제를, 피 뿌림을 증거하기 위해서 택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그러면 어떤 사람이 성도가 아니냐 하면 자기 구원 받기 위해서 예수님의 피 뿌림을 믿는 사람은 성도에요, 아니에요? 다시 말씀드릴까요? 예수님의 피 뿌림을 증거하기 위해서 나타난 사람은 성도입니다. 그러나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의 피 뿌림을 믿는 사람은 성도입니까, 아닙니까? 성도 아니죠. 그건 성도가 아닌 거예요.
왜냐하면 결국 최종적인 가치는 내가 최종적인 가치고 예수님은 나를 위해서 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은 항상 예수님이 뭐라고 하면 신경 안써요. 그러나 남이 나한테 욕을 한다든지 뭐라고 하면 갑자기 불퉁한 성질을 내는 거예요. 왜냐하면 본인한테 최종적인 가치가 있으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욕하는 것과 자기 욕하는 것을 한 번 비교해보자 이 말입니다.
다시 이야기할께요. ‘나는 가치있다’에서 ‘나는 가치’를 지워버리면 남는 게 뭐에요? ‘없다’가 되죠. 그 없는 인간 욕 좀 하면 어때요?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여기 없는데 있음은, 내 가치있음, 내 구원 받게 됨, 그걸 위해서 내가 있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피 뿌림을 입기 위해서 내가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피 뿌리지 않는다면 내가 이 세상에 있을 이유도 없고, 있을 필요도 없고 나타나지도 않았다. 존재할 필요도 없는 존재에요. 있지도 않은 존재에요. 예수님의 피 뿌림 때문에 몇 월 몇 일, 천구백 몇 년도에 태어나신 거예요, 여러분들이.
이 말이 어려워요? 저는 전혀 안 어려운데 이게 어렵습니까? 이게 왜 어려우냐 하면 성경에서 출발하지 않고 평소에 내 욕구대로, 욕정대로 출발하다 보니까 괜찮은 나를 죽어서도 좋은 데 보내야 될텐데 뭘 어떻게 하지? 예수님의 피 뿌림을 믿어야지. 지금 이것이 아주 강력하게 우리 마음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누가 ‘예수 믿으세요’하면 ‘나 예수 믿기로 선택했어’라고 본인이 예수 믿겠다고 선택했다고 막 은연중에 자기 본심이 톡 튀어 나와 버렸어요. ‘없다’에 대해서 성경에 보면 좀 신랄하게 보여주는 대목이 나옵니다. 자, 성경 한 번 찾아볼까요? 사사기 4장 21절, “그가 깊이 잠드니 헤벨의 아내 야엘이 장막 말뚝을 가지고 손에 방망이를 들고 그에게로 가만히 가서 말뚝을 그의 관자놀이에 박으매 말뚝이 꿰뚫고 땅에 박히니 그가 기절하여 죽으니라”
시스라가 죽는 장면에 헤벨의 아내 야엘이 장막 말뚝을 취해서 그냥 꽂아 버리죠. 그 육신에다가 말뚝을 가지고 꽂아 버린다는 말이죠, 말뚝을. 과격하지 않습니까? 지난 수요일부터 굉장히 과격해져버렸는데...말뚝을 박아 버린다고요. 말뚝을 박으니 기절하여 죽었죠? 그 다음에 뭡니까? 죽으면 나중에 시신됐죠? 없어지죠.
결국 하나님의 모든 일은 있는 것들을 뭐한다? 없애버리는 거예요. 있는 것들을 없애면서, 신자도 마찬가지고 늙어 죽어요. 없애면서 그 과정 속에서 드러나는 게 있죠. 저 인간은 왜 죽었지? 저 인간은 자기 가치 챙기다가 늙어 죽었구나. 그럼 저 인간은 왜 죽었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뿌림을 위해서 죽었구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죽음은 본인의 의사에 의해서 죽은 게 아니고 예수님의 피 뿌림의 기능을 보여주기 위해서 죽어야 된다 이 말이죠. 죽을 때 끝까지 본인의 가치는 전혀 챙기지 않고 예수님의 피 뿌림의 가치만 드러내는, 그게 바로 성도잖아요, 성도다 이 말이죠.
그래서 성도를 이야기 할 때 간단히 말해서 성도는 없다. 없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이 말하기를, ‘없긴 왜 없어? 내가 여기 있잖아. 이 몸이 여기 있잖아. 이거 있는 거 있잖아’하는 그것은 뭐냐? 내가 있음을 최종적인 가치로 볼 때 그게 있음이 보이는 거예요. ‘나 여기 있다’부터 출발해서 그 다음부터 모든 가치를 거기다가 실어서 적체, 계속 누적시키는 거예요. 좋은 건 다 자기 것 만들어가지고 ‘나 이정도로 가치 있는 존재야’라는 그 집을 짓고 세상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니 그런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없어질까봐 겁을 내고 있죠. 다른 말로 하면 죽기를 무서워 종노릇 하는거라 이 말입니다, 없어질까봐. 이미 없는 것을 있게 했다면 그 솜씨는 누구 솜씨냐? 예수님의 피 뿌림 때문에 없다가 있었으면 살아있는 우리가 없어지는 것도 주의 피 뿌림의 연장적인 기능의 일부이다 이 말입니다. 죽는 것도 영광이에요.
어떤 것이 성도의 삶입니까?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해달라고 하면 간단하게 얘기해 줄 수 있어요. 살고자 하면 지옥가고 죽고자 하면 천국가고. 이보다 더 간단한 게 어디 있습니까? 왜 죽고자 하는 게 겁이 나느냐 하면 평소에 살고자 하는 것이 내 의지로 살고자 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성도가 죽고자 하는 게 겁이 안나는 이유는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내 의지대로 살아온 게 아니고 예수님의 가치를 계속해서 더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해서 생명이 연장되는 겁니다. 하루치. 10월 9일, 10월 10일...조금씩 조금씩 연장되는 겁니다.
계약 연장되는 거예요. 내일 계약은 어떻게 되는지 그건 우리는 모르죠. 주께서 더 살리고 싶으면 살 거고 오늘로 계약 끝나면 “수고했다”하고 어깨 툭툭 쳐주죠. 야구에서 투수가 공을 던지는데 공을 던지다가 힘이 빠져서 못 던지잖아요. 그러면 감독이 올라오고 코치가 올라와서 뭐 해줍니까? 어깨를 탁 쳐주죠. “그래, 수고했어. 5회까지만 던지면 되는 거야, 너는. 원래 계획이었어.” 그러면 투수가 “감독님, 저 살고 싶어요!” 이렇게 발악할 필요가 뭐 있어요? 수고했다는데. 수고 그만 하라는데. 이제 쉼이 있으리라. 저 락카에 들어가서 좀 쉬라 이 말이죠. 여기다가 얼음 해가지고, 류현진이 보면 얼음 퉁퉁 감아가지고 근육 풀기 위해서 얼음찜질 해가면서 구경하면 되는 거예요. 5회까지 2:0으로 해서 승리투수 요건을 갖췄기 때문에 하면 된다 이 말이죠.
주님께서 우리를, 내가 선택하지 않고 주님께서 선택한 그 자체가 주님의 승리투수 아닙니까? 주님이 이미 승리요건을 갖춰 줬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잘살든 못살든 우리 자신은 뭡니까? 예수님의 승리요건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인으로써 이 땅에 지금 짧은 기간이지만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승리투수라고. 여자분들 야구 잘 모르죠? 저도 잘 몰라요.
항상 성경을 볼 때 이걸 생각하세요. ‘현재 나는 가치 있는데 내가 어떤 말씀을 더 지키면 가치 있느냐’ 이렇게 생각하면 안되고요. ‘없는데 무엇이 나오느냐’ 이렇게 생각해야 되요. 없는데 무엇이 나오느냐 하면 말씀이 나오죠. 주님의 가치가 말씀에 담겨 나오는 겁니다. 내가 없는데. 없는데 말씀이 먼저 있기 때문에 나는 가차없이 어떻게 하든 말씀이 있음으로 인하여 나는 이 땅에 아직은 있어줘야 되는 거예요.
‘좀 살려 주세요’가 아니라 ‘아, 더 있어야 되네. 아... 이거 있어주자.’ 이런 식으로. 뭐 베짱 탕탕 튀기면서 ‘아, 죽을라 했는데 또 살게 해주시네. 아, 있어줘야지 뭐.’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이끌어 가는 게 아니고, 내가 예수님의 피 뿌림을 받는 것도 성경에 보니까 주님의 선택이라는데 그 선택을 존중해 줘야죠. 주님의 선택을 모독하는 게 뭐냐? 나의 선택이잖아요.
어제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 우리가 뭔데 주님을 대신합니까? 우리가 뭔데 주님을 대신해서 울고 주님을 대신해서 웃고 주님을 대신해서 까불고 주님을 대신해서 좌절하고. 지금 우리는 누구 장단에 춤을 추고 있는지 분간 안되는 겁니까? 주님은 네가 무슨 짓을 하든지 그대로 됐다는 거예요.
좀 과격하게 이야기해볼까요? 어떤 행동을 할 때 그 행동에 대해서 내가 잘했다, 못했다 내가 따질 입장이 안됩니다. 그 행위를 판정내릴 때 기준은 뭐냐 하면 복음이 나오면 그건 잘한 거예요. 왜? 복음이 나오니까.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나오니까 잘한 거예요.
사도행전에 있는 사도들이 음식할 때 손 씻고 먹겠어요, 안 씻고 먹겠어요? 뭐 밥 먹을 때 옛날에 손 씻고 먹겠죠, 그쵸? 세 번 반 씻었을까요, 네 번 씻었을까요? 자칫하면요, 두 번 씻은 사람은 네 번 씻은 사람 앞에 죄짓는 게 돼요. 왜 철저하지 못하냐? 왜 완벽하지 못하냐? 가만보자. 세균이 265645개 있네, 나는 706개밖에 없는데. 이 더러운 것.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지금 사도가 손을 제대로 씻었나 못 씻었나 그게 문제가 되는 게 아니고 사도가 하는 행동과 말을 통해서 뭐가 나와요? 예수님의 확정된 것. 이 땅에서 어떤 것도 증명할 필요도 없는 것. 예수님의 죽으심과 사흘 만에 부활한 게 나오면 그게 손을 한 번 씻든 두 번 씻든 손을 안씻든, 흙하고 그대로 밥을 먹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가치가 여과없이 나온 게 되요.
그러니까 이 말을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평소에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스스로 자기 가치를 측정하거나 결정내리지 마시라 그 말입니다. 나는 이런 행동했으니까 나는 가치있다. 본인이 이렇게 판단을 해버리면 최종 가치가 주님께 가는 게 아니고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에 가는 게 아니고 누구한테 마지막에 도착됩니까? 역시 나는 잘났어. 그렇게 돌아서는 거예요.
교회에서 장로님이 “집사님, 이번에 애 또 그리 성적 잘 나왔다면서요? 세상에 서울법대를 다 가시고.”, “아유, 내가 자식하나는 잘 키우잖아요, 다른 건 못해도 자식 하나는 잘 키웁니다.” 자식 잘 키운 게, 자식이 좋은 대학 갔다는 것은 팩트고 사실이죠. 거짓말한 게 아니잖아요. 누구처럼 가지도 않았는데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그게 성도의 삶입니까? 아니죠.
“아이고, 자식 뭐 서울대학 가면 뭐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더 중요하죠.” 이상하게, 정답 같은데 왜 기분이 나쁘죠? 정답은 맞는데 썩 기분이 좋지 않아. “걔가 서울대학 떨어져도, 재수해도 난 신경 안쓰고... 사람 그것 때문에 사는 건 아니죠, 뭐.” 가만히 들어보니 복음 같은데 듣는 사람은 기분 되게 나쁘네요. 기분 나쁜 이유가 우리가 그 사람한테 ‘그렇게 자식을 칭찬해주는 나 가치있죠?’라고 은근히 기대했는데 그 기대에 부응하지 않은 게 속상한 거예요.
사람이 상대방을 만나면서 화가 나는 이유는요. 자기 해석 안에 다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 분노를 유발합니다. 부부싸움의 원인. 상대방 말과 행동에 내가 해석이 안되는 게 왜 튀어 나오느냐. 그게 분노의 요인이 돼요. 너에 대해서 내가 모든 걸 알아야 되는데 너는 왜 내가 모르고 내가 감당 안되는 행동을 왜 하느냐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기분 나빠서 그 다음부터 강압적인 행동이 나오는 거예요. 그 입 다물라. 왜냐하면 그 입 다물어야 그 다음에 내가 이해되는 말만 해서 너는 내게 종속이 되어야 돼. 그것 때문에 부부싸움 하는 거예요. 남편이 오랜만에 와서 아들 공부 좀 하나, 늦게 와서 들여다 보면 “당신이 애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애 들여다보고. 평소대로 잠이나 자소. 애는 내가 키울 테니까.”, “뭐, 애 공부하는 거 보지도 못해?”, “공부에 관심 있는 게 술 먹고 들어오나?” 갑자기 이게 연관이 안되는 것 같은데...그게 뭐냐? 애에 대해서 주도권은 내가 가지고 있으니까 당신은 내 주도권에 침범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그러면 주도권 침범하면 왜 기분 나쁩니까? 모든 것이 내 해석 하에 있어야 가치가 최종적으로 누구한테 돌아오죠? 내 가치한테 돌아옵니다. 왜? 나는 있으니까. 내가 없는 게 아니고 내가 있으니까. 그냥 있는 게 아니에요. 그냥 있으려면 맹숭맹숭하잖아요. 이왕 있는 거 가치있게 있으니까. 그게 바로 주님의 복음을 훼방하는 짓이죠. 가리는 짓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겠습니다. 성경은 뭐라고요? ‘없는데서 뭐가 나오지’. 우리는 뭡니까? ‘있는 나를 얼마나 괜찮은 존재로 변화시킬까, 주님께서? 죽어서 나를 좋은 데 보내는데 성경이 어떤 보탬이 될까?’ 이게 바로 우리가 잘못되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최종가치는 누구한테 있다? 천국 가는 나한테. 나는 성공했어. 구원받는데 성공했어. 이게 구원파고 모든 교회가 다 그렇게 하니까.
이름 자체가 행복한 교회 아닙니까?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에요? 여러분, 복은 없는 거예요. 복은 없어요. 내 가치를 인정해 주는 복은 없습니다. 그럼 이 말은 뭐냐? 복이 나타났다는 말은 그냥 사는 것이 아니고 묵사발을 만들 걸 묵사발을 만들고 나타나야죠. 그 묵사발의 대상이 뭡니까? 도토리입니까? 그 묵사발의 대상이 뭐예요? 나의 가치 아닙니까. 내 가치를 짓밟을 때 그게 복 받으신 거예요. 왜? 내 가치가 그동안 주님의 가치를 가려왔기 때문에. 내 살고자 하는 의지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위장해서 왔잖아요. 그러니 복받은 것은 작살내는 게 복받은 거예요, 내 가치가. 그러니 내 가치가 없는 거예요.
내 가치가 없다. 내 가치라는 말을 지워버리면 나머지 뭐가 남는다고 했지요? 그냥 없는 거예요. 항상 과거라고 하는 것은 없는 거예요. 현재만 있고. 이 말은 현재 주께서 살려줬기 때문에 있는 것이지 과거에 내가 버텼기 때문에 오늘이 있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과거가 아무리 길어도 오늘 없으면 없어진 겁니다. 오늘 죽으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존재의 주도권은 내가 쥐는 게 아닙니다. 주님의 피 뿌림이 있어요. 이 피 뿌림을 지금 몇 번 강조하나 몰라요. 내가 오늘 3장을 더 진도 나가기 위해서는 이걸 강조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냥 나가버리면요, 이건 엉뚱한 해석 나와요.
베드로전서 1장에 피 뿌림을 얻기 위해서 선택되었다면, 결국 우리는 없고 피 뿌림은 있다. 이게 딱 정돈이 되어야 돼요. 피 뿌림이 있고 그 있음을 있음 되게 하는 용도로써 잠시 70, 80이고 잠시동안 있다가 사라질 역할만 하면 된다 이 말입니다. 그게 사도였고 사도행전의 사도들이 그걸 아주 충실하게 지켜 왔던 겁니다.
그러면 복이 뭐냐? 여기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베드로전서 3장 9절에 보면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복을? 유업이죠, 상속. 나를 보고 추가적인 복을 주는 게 아니죠. 나의 가치를 보고, “아유, 너 가치 있구나. 복 줄게.” 이런 게 없어요. 이미 누구의 복을 계속 물려받는 거예요.
형제가 5명이다. 제일 큰 애가 고3이고 둘째가 고2고 그 다음에 고1이고 그 다음에 중3이고 그 다음에 중2다. 하여튼 엄마 애 먹었겠다. 연달아 낳는다고. 연발, 연발, 연발총처럼. 자 그렇게 했을 때 고3이 대학 들어가면 교복 누구한테 물려 줍니까? 고2 동생한테. 동생은 누구한테? 고1. 키 성장이 골고루, 똑같은 비율로 자란다는 조건 하에 교복을 그대로 물려 받겠죠. 그럼 결국 제일 막내는 처음에 이 교복은 진정 누구의 것이었단 말인가. 자기 것이 아니고 누구 겁니까? 형님 거죠. 그게 성경에서 뭐냐? 맏아들이죠.
그러면 맏아들 없으면 물려받을 복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로마서 8장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한다 했죠. (로마서 8장 29-30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맏아들의 형상이 있어요. 모델이 있어요, 표준 모델이 누구다? 인간에 대한 표준 모델, 천국가는 표준 모델은 ‘여기 있어요, 저 가치있어요’ 내가 모델이 아니에요. 내가 내 인생의 표준이 아니라 이 말이죠.
세상에 보게 되면 사람들이 진지하고 심각한 게 뭐냐 하면 성경에 나오는 내용, 복음, 피 뿌림, 부활, 십자가 이걸 진지하게 보는 사람은 거의 없고 자기의 신체가 장애라든지 불편하든지 몸이 아픈 걸 가장 진지하게 생각해요. 나이 많은 사람들, “어어어” 이렇게 하잖아요. 자식 없을 때는 혼자 잘 먹고 있다가 자식 오면 “어어어어, 야야 손이 안펴진다. 아버지가 전에는 쥐었다폈다 했거든. 지금은 손이 안 펴진다. 아 아파.” “전에는 어떻게 했다고?” “전에는 쥐었다폈다 했지.”
인간이 가장 심각한 문제는 자기 몸 아픈 거예요. 육신과 신체 아픈 거예요. 아프면 죽을 거 같기 때문에. 죽으면 되잖아요. 죽으면 그동안 쌓아놓은 내 가치는 어디서 찾습니까? 하나은행에서 찾습니까? 내 가치는 어디서 찾아요? 국민은행에서 찾아요? 인간이 사는 이유는 남들이 자기 알아주는 보람으로 살잖아요. 자식 잘 키웠다. 착실히 집 샀어. 복음 잘 들으니 집 사는 거 보세요, 복 받았잖아. 이런 식으로.
전부 다, 괜찮은 집이 남들한테 나를 인정받게 하고 괜찮은 차를 타는 것이 내가 사람으로서, 사람이라는 그룹의 일원으로서 받아들여지는 요건이 된다 이 말이죠. 주일 오후에 그런 이야기했죠. 혼자 사는 여자보다 더 무서운 여자가 집 없는 여자라고요. 그보다 더 무서운 여자는 집 있어도 집에 안들어가는 여자.
모든 가치를 자기한테 두다 보니까. 이 자기라는 게 허풍이거든요. 그러면 진정한 자기는 어디서 나왔나 보니까 지 육신에서 나왔다는 말이죠. 아무리 행복하고 싶어도 이가 아프다던지 관절이 안좋으면 행복이고 뭐고 누가 나보고 복이라 해? 관절 아픈데.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요? 그러면 내 관절이나 낫게 해주세요. 관절 낫게 해주면 내가 십일조 드릴께요, 앞으로. 주님은 의사라면서요, 고쳐 주세요. 나 병들었으니까. 이게 바알을 믿는 건지 여호와를 믿는 건지 구분도 안돼요.
교회라는 것이 그것 때문에 생겨난 거예요. 오늘 안양 강의에 어떤 분이 이야기하기를, 부천 자기 집 주변에 교회가 천 군데라는 거예요. 천 개의 교회가 있답니다. 부천, 부평에. 그게 왜 그리 많아요? 전부 주님을 사랑해서 그렇습니까? 다 주님을 사랑해서 그렇게 많은 거예요?
아니 세상만사가 주의 뜻대로 된다는데 왜 광화문에 기독교 연합회가 등장하는지 모르겠어요, 도대체. 아이고, 참. 나라가 잘 돼야 내 가치를 살려 주니까 나라 못되면 내가 군인 되어서 연금 부은 거 반토막 나니까, 다 퍼주고. 그러니까 나라가 빨리 잘 돼야 내 연금이 산다는 거예요. 결국 이건 기도 목적이 뭐에요? 연금 유지되게 하옵소서 아닙니까, 연금 유지되게 하옵소서. 역전의 용사 연금, 월남 갔다가 받은 연금 지켜 주옵소서. 그거 하잖아요, 그거. 그 기도 누구 가치에요? 본인의 가치죠, 본인의 가치.
아브라함이 복 받았다 하잖아요. 여러분, 아브라함 인생 한 번 살아볼랍니까? 끔찍합니다, 아브라함 인생. 아브라함의 주특기가 안 믿는 거예요. 주님 안 믿는 게 주특기에요. 자기 할 도리는 다 해요. 네가 자손이 많을 것이다. 자손이 많다...자손이 있으려면 여자가 있어야 되고, 여자가 임신할 가능성이 있어야 되고...보자, 아내는 이미 늙어서 태가 죽었으니까 임신이 안되고 보자...아내 여종 하갈은 오, 되겠네. 그러면 아, 그 방식이구나.
이게 아브라함의 한계입니다. 아브라함의 한계에요. 이름은 아브라함이에요. 많은 자손의 조상이라고 해놓고 자식은 한 명도 없는 거예요. 결국 이것은 단절이죠. 복은 있는데 복으로 나아가는 인간의 모든 방법은 주께서 의도적으로 끊어놓는 겁니다. 너의 가치를 유지한 채 복은 받을 수 있다, 없다? 복은 못 받아요. 내 가치를 가지고. 내 가치를 가지고 천국을 못간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천국은 왜 못가냐 하면 원래 인간은 선악과 따먹고 쫓겨난 입장이기 때문에 못가는 거예요. 도로 들어가면 될 것 아니냐. 들어가게 놔둡니까? 천사가 지키는데. 천사가 지키기 때문에 못 들어가잖아요, 그렇죠? 어느 낮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어요. 예수님 무덤에 지키는 쪽이 두 그룹 있죠. 하나는 군인이 지키고 또 하나는 천사가 지키고. 천사가 왜 지킵니까? 오지 마라 이 말이죠.
천사의 특징은 뭐냐? 시키는 대로 해요. 들어올 사람은 들여보내고 못들어갈 사람은 절대로 안보내주는 게 천사 역할이에요. 왜냐하면 본인이 결정권이 없고 천사를 보내신 분의 결정권이, 택한 백성은 집어넣고 택하지 않은 사람은 들어오지 말라고 말리는 거예요. 이것은 곧 단절입니다, 단절. 끊어짐을 의미하는 거예요.
끊어짐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 땅에서는 복이 있습니까? 저주만 있습니까? 복은 없고 뭐만 있다? 저주만 있는 거예요, 저주만. 이것이 창세기 3장의 상황이고 그리고 그 저주는 그냥 가만히 있는 고정된 저주가 아니고 계속 저주가 스스로 저주의 거품을 만들어 내요. 저주가 더욱더 더 큰 저주로 활성화된다고요, 이 저주가. 그래서 뭐 50년 믿었니 60년 믿었니 해봐도 결국 그 저주를 못 이겨요. 쉽게 말해서 세상 자기 가치를 포기한다, 포기한다 해도 어느 날 되면 자기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그걸 쥐고 있는 자기가 발견되는 겁니다.
그러면 한 번 물어봅시다. 죄가 뭐냐? 자기 가치를 갖고 있는 게 죄죠. 내 가치를 갖고 있는 게 죄가 되는 겁니다. 왜? 자기 가치가 복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로마서 3장에 보면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것이 단절이에요, 단절.
그리고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율법을 주신 것은 모든 인간이 죄 바깥으로 새어 나가지 못함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율법을 준 거예요. 율법을 지킬 수가 없다는 말은 그냥 죄 속에 살다가 그냥 저주 받으라 이 말이에요. 율법이 두꺼운 납으로 만든 뚜껑 같아서 그걸 들썩들썩 열고 제칠 위인이 없습니다. 율법을 지킬 위인이 없어요. 주님만 율법 열고 나왔죠. 다른 사람은 되질 않는 거예요.
주님 열 때 그 빈틈에 쏙 머리 밀고 같이 나오면 안됩니까? 천사가 그 새치기 못하도록 딱 막아 버려요, 천사가. 천사가 그렇게 해요. 그래서 천사는 천국으로 보내는 분이 아니고 하나님의 작업을, 하나님의 뜻을 인간에게 도달시키는 게 천사죠. 그 기쁜 소식을 전하는 천사의 이름이 뭐냐 하면 가브리엘. 마리아가 임신했을 때 나타난 천사. 가브리엘 천사죠. “이 여자야, 네가 복된 자로다.”하죠.
자, 이제 묻습니다. 복이 뭡니까? 단절되었는데, 없어야 될 복이 난데없이 이질성을 가지고 이 땅에 찾아볼 수 없는 낯선 것이 등장했을 때, 예상 못한 낯선 것이 등장했을 때 그게 복입니다. 그래서 복은 항상 예상 못하게 와줘야 돼요. 왜냐하면 복을 얻기 위해서 하는 모든 수작을 주께서 안받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해서 복을 받는 것을 차단시켜 놨기 때문에. 복은 내가 행하지도 않는데 다른 분께서 나한테 보너스를 주는 게 복이에요.
마리아가 임신하려고 처녀인 마리아가 임신해보려고 그렇게 애를 썼습니까? “아줌마, 나 처녀인데 나 아이 갖고 싶어서 열심히 기도하고 있어요.” 그러면 다른 여자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게 동백이도 아니고...뭐야 이게? 네가 포항 구룡포 출신이야? 네가 동백이야, 응? 가브엘인가 아브엘인가 술집 해?” 이런 식으로. 드라마 이야깁니다. 처녀가 애를 갖고 있으니까 사람들이 수근대죠. 큰 수모 아닙니까? 그런데 천사는 달리 보죠. 그게 뭐냐? 처녀가 아이를 낳음으로써 마리아는 본인의 가치는 이제 끝났어요. 본인의 가치가 끝났다고요. 왜? 자기 중심부에 복의 가치가 있으니까.
자,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복이 오는데 그 복은 누가 주느냐 하면 천사가, 약속이 와서 복을 받죠. 그 복을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형님이 입었던 교복이 동생한테 내려가듯이, 그걸 유업으로 주는 거예요. 그 복이 아브라함에게는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의를 줘요, 하나님의 의. 우리는 죄밖에 없다는 뜻이에요. 두 번째는 뭐냐? 하나님의 씨, 자손을 줍니다, 자손. 세 번째가 뭐냐 하면 땅을 줘요, 땅.
그런데 아까 제가 말했습니다. 인간이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은 뭐라고 했습니까? 여러분 안 잊어버렸죠? 인간이 가장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 아브라함의 복에는 관심 없고 내가 좀 건강했으면, 안아파 봤으면. 왜냐하면 고통이 오게 되면 이건 죽음의 흔적으로 봐가지고 기분 되게 나쁜 거예요. 이러다 죽을 수 있겠다... “하하하, 이러다 죽을 수 있구나” 좋아하는 사람 봤습니까? “여보, 이러다 내가 죽을 수 있게 되었어. 아, 정말 내 이런 행운이” 이런 거 봤어요? 온갖 짜증을 다 내가지고 자식들 소집하면 “아야야야야, 이러다 죽겠다~”하죠. “아버님, 죽으세요.”하면 이런 호로자식이 있나 하고 화를 벌컥 내죠.
이거 자기 가치 아닙니까? 하나님께 끊어지고 단절되었다 소리 들어도 귀에 안들어 옵니다. 아주 고집이 대단해요, 모든 인간은. 복을 안받고 유업을 안받고 인간은 원래부터 악마로부터 저주를 유업으로 받은 거예요. 오늘 제목 나왔다. 저주의 유업. 저주를 유업으로 받은 거예요. 얼마나 받았기에 주님께서 여기에 합세하자마자 주님조차 이 땅의 저주를 같이 받아 버렸어요. 따라서 죄라고 하는 것은 합체가 아니고 총체입니다.
죄란 합체가 아니고 총체다 이 말이죠. 덩어리다 이 말이에요, 덩어리. 구분될 수 있는, 조금씩 조금씩 보태서 합체가 되는 게 죄가 아니고, 이런 죄, 저런 죄, a, b, c 모아서 죄가 되는 게 아니고, 인간 자체가 총체적으로 인간은 죄다 이 말입니다. 남 구제도 죄고, 기도해도 죄고. 이 덩어리, 덩치 자체가 저주를 보여주는 죄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그걸 알게 된 것이 복이에요. 시편 51편에 다윗이 죄의 모체에서 태어났음을 알게 된 것이 이게 바로 성신을 받은 사람의 받은 복이에요. 왜그러냐 하면 본인에 대해서 본인이 갖고 있는, 본인 눈으로 본인을 보는 그런 눈만 있었는데 이것은 자기 가치죠. 자기 가치가 자기만 쳐다보고 만날 자기 방어하고 자기 변명하고 핑계대면서, ‘난 그래도 이런 착한 일 했잖아, 예수 믿잖아’ 이러다가 자기를 떠난 다른 눈알, 다른 시선이 따로 확보된 거예요. 성신의 눈으로, 주님의 눈으로 자기를 다시 볼 수 있는 그러한 영역을 보장받고 그 안에 들어갔을 때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제대로 보는 겁니다. 아, 내가 그 때 죄를 지은 것은 주께서 나로 하여금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나로 하여금 그 일을 벌이게 했구나.
그러면 여기서 경쟁되는 것이 뭐냐 하면은, 내가 존재로서, 존재에서 반드시 선택이 나오고 결정이 나오고 의지가 나오고 행동이 나오니까, 내 존재가 나를 관리할 것인가? 아니면 외부에서 주어진 사건인가? 이렇게 되죠. 사건으로 존재를 보게 되면 비로소 존재가 제대로 보여요. 그런데 사건이 없이 자기 자신을 아무리 관리해 봐도 그 안목 자체가 자기 존재 가치를 정당화하고 자꾸 변명하는 쪽으로밖에 안돼요. 내가 총체적으로 안보인다고요. 합체적으로 보이죠. 이럴 때는 내가 착했고 이럴 때는 나빴고 앞으로는 나쁜 것은 줄이고 착한 것은 키워야지. 이렇게 자꾸 뭔가 합체한 것처럼 그렇게 되는 겁니다.
가짜로 만든 바위들, 뭐 조형물들 있죠. 가짜로 만든 조형물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인공으로 만든 그 바위들, 시멘트로 만들어서 억지로 갖다 붙이잖아요. 정원 꾸미기 할 때 진짜 대리석, 진짜 돌멩이 들어오는 것하고 가짜로 시멘트 발라가지고 색깔만 돌처럼 한 것은 차이 나듯이 그것은 전부다 합체라고요, 합체된 거예요. 진짜는 합체할 것도 없이 그 자체로 이미 그 기능들이, 속성들이 계속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이가 들든, 내가 몇 살이든 관계없이 전체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와야 비로소 우리는 존재가 아니고 하나의 사건으로서 여기에 살아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거예요. 자, 다시 아브라함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지금 복의 유업을 이야기 하니까.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 뭐냐? 세 가지라고 했죠? 하나는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의, 또 하나는 자기의 자손, 그 다음에 또 하나는 땅. 세 가지의 특징은 모두가 없다는 거예요. 주지 않으면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세 가지를 줄 때, 전부다 아브라함이 예상 못하고 오히려 아브라함은 그 세 가지를 받을 어떤 행동도 사전에 한 적이 없어요. 오히려 반대로 행동했죠. 사라에게 자식이 태어나는데 아브라함은 누구의 자식을 생기게 했습니까? 하갈이죠. 그 자식 이름이 이스마엘이죠.
하나님께서 복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이 할 수 있는, 복이 아닌 것이 충분하게 반영되도록 아브라함에게 그런 기회를 자꾸 줘버려요. 마치 오늘날 우리 성도의 삶 같습니다. 성도의 삶이 주님의 가치도 아니고 복도 아닌 것을 평생토록 하고 있는 거예요. 일부러 그런 기회를 줘요. 네 성질대로 마음대로 해봐라. 해보면 이게 자꾸 좀 더 잘할 걸. 결핍을 느껴요. 미흡을 느끼고 만족함이 없고 기쁨이 없는 겁니다.
항상 생각하는 것은 좀더 그 때 잘했으면 내 가치가 높아질 건데...자꾸 자기 쪽으로 돌아온다 이 말이죠. ‘고맙습니다’가 안나온다니까요, ‘고맙습니다’가. ‘나를 박살내고 나를 없애주시고 나를 없는 존재로 인식해주니 고맙습니다’가 아니고 일단은 주면 고맙지만 좀 더 주실걸. 그 때는 이것만 주시면 좋겠습니다 해놓고는 아이고, 그 때는 참 주님 내 말 잘 듣는다. 왜 그것만 주노? 주여, 참기름만 있으면 좋겠는데. 세상에 참기름만 있으면, 삼겹살도 있어야지. 참기름만 주면 삼겹살은 언제 찍어먹노.
이러니 씨와 의와 땅은 인간의 소원이 아닙니다.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은 뭐냐하면 지니에요, 지니. 알라딘에 나오는 램프 안에서 튀어나오는 것 있잖아요. 얼마나 갑갑하겠어요, 산만한 덩치가 알라딘 램프 안에 있으니까. 그게 와가지고 “주인님” 목소리도 크죠, 울림통이 크니까. “주인님, 세 가지는 들어줄 수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가 왕자가 되게 해달라는 그런 거 있잖아요. 요술램프. 그런 것 원하십니까?
그 소원이 세 가지가 아니라 천 가지, 만 가지가 되더라도. 오늘날 교회는 소원이 세 가지뿐만 아니잖아요. ‘전능하신 하나님’ 부르면 다 주잖아요. 보편적 지니가 있잖아요, 교회가. 교회를 알라딘 램프처럼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요. 천 가지, 만 가지 주면 뭐합니까? 모든 가치는 여기 있는 나의 가치를 높이는 이상은 전부 다 그것은 가짜입니다.
그것을 코스프레라고 하죠. 만화 캐릭터를 흉내내고 일본 만화 형태로 해가지고 아가씨들이 옷 이상하게 화려하게 입는 것 있잖아요. 교회 가면서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것 코스프레하고 있는 거예요. 경건하고 거룩한 코스프레. 사실은 자기 가치를 포기 못하면서. 내가 있고 난 뒤에 하나님이다. 이 원칙을 우리가 포기 안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복이란 뭐냐 하면, 여기에
의라는 것은 일단 우리가 죄라는 것을 인식할 때 의가 생기고, 죄가 집체적이 아니고 총체적 죄도 같이 드러나고,
주님께서 자손이라고 할 때 내가 주의 자손이 아님을 같이 드러내고 주님만이, 아브라함 후손이 여럿이 아니고 하나, 예수님 자신으로 드러날 때 ‘우리는 마귀 자손이었구나’가 같이 인식되고.
그 다음에 주님의 땅이라 했을 때는 그 자손이 사는 곳이 땅이에요. 그러니 주님은 어디 가 있습니까? 하늘에 가 있죠. 그러면 하늘이 하늘나라지 지상에 있는 어떤 땅도 천국이 아닙니다. 약속의 땅이 아니에요. 개간한다고 약속의 땅 되는 건 아닙니다.
어쨌든 간에 첫째 시간에 얘기한 것은 바로 복이라는 것은 무엇을 공격한다? 나의 가치를 공격하는 식으로 찾아오게 되면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 이야기해드렸습니다.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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