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적체와 총체 191010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10. 13. 05:01
2019-10-11 00:50:57조회 : 122         
적체와 총체 191010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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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림 (IP:61.♡.247.43)19-10-13 02:27 
서울의존강의20191010a 베드로전서3장 8절(적체와 총체)-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3장 8절

8절,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9절,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마지막으로 말한다는 것은 결론적으로 말한다는 그런 얘기이고, 결론이 나오려면 그 원칙이 계속 살아있어야 되겠죠. 앞에 있는 원칙 이야기하고 결론은 다른 이야기하면 앞뒤가 안맞죠. 일관성이 있으려면 앞에 있는 원칙이 계속 이어져 나간다. 그것이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결론적으로 말하노니’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럼 앞에 있는 원칙이 하나의 이론이라면 마지막으로 하는 것은 하나의 실천이 되겠죠. 구체화된다는 거죠. 하나님의 복음이 구체화되는 거죠. 베드로전서 1장에 보게 되면 1장 2절에,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이렇게 되어 있죠. 그러면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 우선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 뿌림이 우선 되겠죠.

이 말은 뭐냐 하면 성도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피 뿌림을 증거하기 위해서 피 뿌림의 효과,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의 실천, 그것을 나타내는 재료로써 피 뿌림을 본의 아니게 받아야 되는 겁니다. 보통 세상에서는 본인이 결정하고 본인이 선택해서 본인이 행동에 나설 때 어떤 자긍심을 갖고 있어요. 자긍심이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나는 가치있다’ 이거예요.

‘나는 가치있다’. 자부심 또는 자긍심, 다른 말로 하면 자존감, 다른 말로 하면 독자성. 나는 홀로 존재해도 괜찮다는 이 독자성. 근본적으로 하여튼 나는 가치있다. 나는 내 스스로 가치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그 사람 이전의 것은 존재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사람이 스스로 가치가 있다면 그 사람한테는 그게 출발점이 되고 그 전에 만약에 하나님이 계시든 다른 분이 계셔 버리면 본인은 가치있는 것이 아니고 먼저 계신 분의 가치를 증거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자기에게 돌아올 가치가 없는 거예요.

만약에 어떤 재벌 2세, 3세가 돈 있는 척하면서, 돈은 있지만, 돈 씀씀이가 헤프면서 강남의 나이트클럽에 가서 돈 막 뿌리면 사람들이 ‘아이고 신난다, 고맙다’하지만 ‘당신은 재벌이야’라고는 얘기 안하죠. 본인은 재벌이 아니고 자기 할아버지가 재벌이고 아버지가 재벌이지 자기는 재벌이 아니잖아요. 철딱서니 없는 인간이란 말이죠, 마약이나 하고. 그럼 돈은 손자가 쓰는데 본인에게 가치가 돌아옵니까? ‘너네 집안 잘 산다’고 자기 윗대 어른들에게 가치있지 본인보고 가치있다고 하지 않죠. 그렇잖아요.

진짜 나에게 가치가 있으려면 내 이전에 아무도 없어야 돼요. 내가 시작이고 내가 모든 종결이 되어야 돼요. 그래야 나한테 가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전서 1장에 보게 되면 “피 뿌림을 얻기 위해서”라고 되어 있다고요. 우리 스스로 목적이 될 수 있다, 없다? 우리 자체가, 내 가치가 내 존재의 목적입니까? 아니죠. “피 뿌림을 얻기 위해서” 되어 있죠. 예수님의 피 뿌림을 증거하기 위해서 누가 필요했다? 택하심이 필요한 거예요.

내가 예수님을 택한 게 아니다 이 말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택해버리면 내가 가치가 있죠. 왜? 내가 택할 수도 있고 예수님을 안택할 수도 있기 때문에. 내가 최종가치가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예수님 믿을 때 여러분이 예수님을 선택했습니까?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선택했어요? 아니면 어떻게 해서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까? 본인이 결정한 겁니까? 본인이 선택한 거예요?

여러분들 아니라고 얘기하죠. 그러면 그게 아니면 어떻게 예수 믿게 되었느냐 이 말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거기에 대한 또 답변이 있어야 되죠. 내가 선택해서 예수 믿은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 믿었습니까? 제가 시비거는 것은 뭐냐 하면 세상 사는 모든 사람이 최종적으로 사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내게 가치있다’로 환원되기 때문에 제가 시비 거는 거예요.

그런데 베드로 전서에서 오늘 3장이 실천이라면 그 원리는 1장에 나온다 했지요. 그러면 1장 2절에 인간이라는 것을 어떻게 규정합니까? 세상 모든 사람을 인간으로 규정합니까? 아니죠. 예수님의 피 뿌림이 우선 있고 그 피 뿌림이라는 것이, 이것이 실제라는 사실. 그냥 이론이 아니고 상상이 아니고 실제라는 사실을 알려줄, 그걸 보여줄 인물들이 필요한 거예요. 그게 누구냐면 피 뿌림을 얻기 위해서 택하심을 받은 거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잖아요. 십자가 지신 그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여기 일단의 사람들이 택하심을 입은 거예요. 그러면 이 택함을 입은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들이 묻기를, ‘당신은 어떻게 구원되었습니까? 당신이 결정, 선택했습니까?’할 때 ‘아니오’라고 하잖아요. ‘아니오’라고 이야기하면서 이 사람들은 그 순간 뭐가 날라가 버리느냐 하면 내 나름대로의 가치가 날라가는 겁니다, 내 나름대로의 가치가. 내가 쥘 수 있는 가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요.

‘나는 가치있다’가 아니라 ‘가치없다’가 되는 겁니다. ‘가치없다’가 되면 나는 가치를 지워 버리잖아요. 그러면 뭐만 남아요? 나는 없는 거예요. 주께서 피 뿌림이 있기 전까지는 나는 없는 거예요. 예수님의 피 뿌림이 있으면서 동시에 내가 생긴 거예요. 자식이 있다는 말은 그 전제가 부모가 계시다는 거죠. 부모 없이는 자식 없잖아요. 내가 지금 바른 소리 하고 있습니다. 부모 없이는 자식 없죠.

그럼 피 뿌림 없이는 누가 없어요? 성도라는 사람이 없죠, 피 뿌림이 없이는. 그러면 모든 가치는 누가 가져갑니까? 피 뿌림으로 쏠리겠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쏠린다 이 말이죠. 그럴 때 결국 세상과의 싸움은 뭡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이, 그게 사실이야? 진짜야?’ 라고 할 때 그걸 진짜라고 여기는 사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했다는 것에다가 모든 최종적인 의미와 가치를 다 두고 사는 사람은 성도가 되겠습니다. 왜? 그 전제를, 피 뿌림을 증거하기 위해서 택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그러면 어떤 사람이 성도가 아니냐 하면 자기 구원 받기 위해서 예수님의 피 뿌림을 믿는 사람은 성도에요, 아니에요? 다시 말씀드릴까요? 예수님의 피 뿌림을 증거하기 위해서 나타난 사람은 성도입니다. 그러나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의 피 뿌림을 믿는 사람은 성도입니까, 아닙니까? 성도 아니죠. 그건 성도가 아닌 거예요.

왜냐하면 결국 최종적인 가치는 내가 최종적인 가치고 예수님은 나를 위해서 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은 항상 예수님이 뭐라고 하면 신경 안써요. 그러나 남이 나한테 욕을 한다든지 뭐라고 하면 갑자기 불퉁한 성질을 내는 거예요. 왜냐하면 본인한테 최종적인 가치가 있으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욕하는 것과 자기 욕하는 것을 한 번 비교해보자 이 말입니다.

다시 이야기할께요. ‘나는 가치있다’에서 ‘나는 가치’를 지워버리면 남는 게 뭐에요? ‘없다’가 되죠. 그 없는 인간 욕 좀 하면 어때요?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여기 없는데 있음은, 내 가치있음, 내 구원 받게 됨, 그걸 위해서 내가 있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피 뿌림을 입기 위해서 내가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피 뿌리지 않는다면 내가 이 세상에 있을 이유도 없고, 있을 필요도 없고 나타나지도 않았다. 존재할 필요도 없는 존재에요. 있지도 않은 존재에요. 예수님의 피 뿌림 때문에 몇 월 몇 일, 천구백 몇 년도에 태어나신 거예요, 여러분들이.

이 말이 어려워요? 저는 전혀 안 어려운데 이게 어렵습니까? 이게 왜 어려우냐 하면 성경에서 출발하지 않고 평소에 내 욕구대로, 욕정대로 출발하다 보니까 괜찮은 나를 죽어서도 좋은 데 보내야 될텐데 뭘 어떻게 하지? 예수님의 피 뿌림을 믿어야지. 지금 이것이 아주 강력하게 우리 마음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누가 ‘예수 믿으세요’하면 ‘나 예수 믿기로 선택했어’라고 본인이 예수 믿겠다고 선택했다고 막 은연중에 자기 본심이 톡 튀어 나와 버렸어요. ‘없다’에 대해서 성경에 보면 좀 신랄하게 보여주는 대목이 나옵니다. 자, 성경 한 번 찾아볼까요? 사사기 4장 21절, “그가 깊이 잠드니 헤벨의 아내 야엘이 장막 말뚝을 가지고 손에 방망이를 들고 그에게로 가만히 가서 말뚝을 그의 관자놀이에 박으매 말뚝이 꿰뚫고 땅에 박히니 그가 기절하여 죽으니라”

시스라가 죽는 장면에 헤벨의 아내 야엘이 장막 말뚝을 취해서 그냥 꽂아 버리죠. 그 육신에다가 말뚝을 가지고 꽂아 버린다는 말이죠, 말뚝을. 과격하지 않습니까? 지난 수요일부터 굉장히 과격해져버렸는데...말뚝을 박아 버린다고요. 말뚝을 박으니 기절하여 죽었죠? 그 다음에 뭡니까? 죽으면 나중에 시신됐죠? 없어지죠.

결국 하나님의 모든 일은 있는 것들을 뭐한다? 없애버리는 거예요. 있는 것들을 없애면서, 신자도 마찬가지고 늙어 죽어요. 없애면서 그 과정 속에서 드러나는 게 있죠. 저 인간은 왜 죽었지? 저 인간은 자기 가치 챙기다가 늙어 죽었구나. 그럼 저 인간은 왜 죽었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뿌림을 위해서 죽었구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죽음은 본인의 의사에 의해서 죽은 게 아니고 예수님의 피 뿌림의 기능을 보여주기 위해서 죽어야 된다 이 말이죠. 죽을 때 끝까지 본인의 가치는 전혀 챙기지 않고 예수님의 피 뿌림의 가치만 드러내는, 그게 바로 성도잖아요, 성도다 이 말이죠.

그래서 성도를 이야기 할 때 간단히 말해서 성도는 없다. 없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이 말하기를, ‘없긴 왜 없어? 내가 여기 있잖아. 이 몸이 여기 있잖아. 이거 있는 거 있잖아’하는 그것은 뭐냐? 내가 있음을 최종적인 가치로 볼 때 그게 있음이 보이는 거예요. ‘나 여기 있다’부터 출발해서 그 다음부터 모든 가치를 거기다가 실어서 적체, 계속 누적시키는 거예요. 좋은 건 다 자기 것 만들어가지고 ‘나 이정도로 가치 있는 존재야’라는 그 집을 짓고 세상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니 그런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없어질까봐 겁을 내고 있죠. 다른 말로 하면 죽기를 무서워 종노릇 하는거라 이 말입니다, 없어질까봐. 이미 없는 것을 있게 했다면 그 솜씨는 누구 솜씨냐? 예수님의 피 뿌림 때문에 없다가 있었으면 살아있는 우리가 없어지는 것도 주의 피 뿌림의 연장적인 기능의 일부이다 이 말입니다. 죽는 것도 영광이에요.

어떤 것이 성도의 삶입니까?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해달라고 하면 간단하게 얘기해 줄 수 있어요. 살고자 하면 지옥가고 죽고자 하면 천국가고. 이보다 더 간단한 게 어디 있습니까? 왜 죽고자 하는 게 겁이 나느냐 하면 평소에 살고자 하는 것이 내 의지로 살고자 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성도가 죽고자 하는 게 겁이 안나는 이유는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내 의지대로 살아온 게 아니고 예수님의 가치를 계속해서 더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해서 생명이 연장되는 겁니다. 하루치. 10월 9일, 10월 10일...조금씩 조금씩 연장되는 겁니다.

계약 연장되는 거예요. 내일 계약은 어떻게 되는지 그건 우리는 모르죠. 주께서 더 살리고 싶으면 살 거고 오늘로 계약 끝나면 “수고했다”하고 어깨 툭툭 쳐주죠. 야구에서 투수가 공을 던지는데 공을 던지다가 힘이 빠져서 못 던지잖아요. 그러면 감독이 올라오고 코치가 올라와서 뭐 해줍니까? 어깨를 탁 쳐주죠. “그래, 수고했어. 5회까지만 던지면 되는 거야, 너는. 원래 계획이었어.” 그러면 투수가 “감독님, 저 살고 싶어요!” 이렇게 발악할 필요가 뭐 있어요? 수고했다는데. 수고 그만 하라는데. 이제 쉼이 있으리라. 저 락카에 들어가서 좀 쉬라 이 말이죠. 여기다가 얼음 해가지고, 류현진이 보면 얼음 퉁퉁 감아가지고 근육 풀기 위해서 얼음찜질 해가면서 구경하면 되는 거예요. 5회까지 2:0으로 해서 승리투수 요건을 갖췄기 때문에 하면 된다 이 말이죠.

주님께서 우리를, 내가 선택하지 않고 주님께서 선택한 그 자체가 주님의 승리투수 아닙니까? 주님이 이미 승리요건을 갖춰 줬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잘살든 못살든 우리 자신은 뭡니까? 예수님의 승리요건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인으로써 이 땅에 지금 짧은 기간이지만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승리투수라고. 여자분들 야구 잘 모르죠? 저도 잘 몰라요.

항상 성경을 볼 때 이걸 생각하세요. ‘현재 나는 가치 있는데 내가 어떤 말씀을 더 지키면 가치 있느냐’ 이렇게 생각하면 안되고요. ‘없는데 무엇이 나오느냐’ 이렇게 생각해야 되요. 없는데 무엇이 나오느냐 하면 말씀이 나오죠. 주님의 가치가 말씀에 담겨 나오는 겁니다. 내가 없는데. 없는데 말씀이 먼저 있기 때문에 나는 가차없이 어떻게 하든 말씀이 있음으로 인하여 나는 이 땅에 아직은 있어줘야 되는 거예요.

‘좀 살려 주세요’가 아니라 ‘아, 더 있어야 되네. 아... 이거 있어주자.’ 이런 식으로. 뭐 베짱 탕탕 튀기면서 ‘아, 죽을라 했는데 또 살게 해주시네. 아, 있어줘야지 뭐.’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이끌어 가는 게 아니고, 내가 예수님의 피 뿌림을 받는 것도 성경에 보니까 주님의 선택이라는데 그 선택을 존중해 줘야죠. 주님의 선택을 모독하는 게 뭐냐? 나의 선택이잖아요.

어제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 우리가 뭔데 주님을 대신합니까? 우리가 뭔데 주님을 대신해서 울고 주님을 대신해서 웃고 주님을 대신해서 까불고 주님을 대신해서 좌절하고. 지금 우리는 누구 장단에 춤을 추고 있는지 분간 안되는 겁니까? 주님은 네가 무슨 짓을 하든지 그대로 됐다는 거예요.

좀 과격하게 이야기해볼까요? 어떤 행동을 할 때 그 행동에 대해서 내가 잘했다, 못했다 내가 따질 입장이 안됩니다. 그 행위를 판정내릴 때 기준은 뭐냐 하면 복음이 나오면 그건 잘한 거예요. 왜? 복음이 나오니까.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나오니까 잘한 거예요.

사도행전에 있는 사도들이 음식할 때 손 씻고 먹겠어요, 안 씻고 먹겠어요? 뭐 밥 먹을 때 옛날에 손 씻고 먹겠죠, 그쵸? 세 번 반 씻었을까요, 네 번 씻었을까요? 자칫하면요, 두 번 씻은 사람은 네 번 씻은 사람 앞에 죄짓는 게 돼요. 왜 철저하지 못하냐? 왜 완벽하지 못하냐? 가만보자. 세균이 265645개 있네, 나는 706개밖에 없는데. 이 더러운 것.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지금 사도가 손을 제대로 씻었나 못 씻었나 그게 문제가 되는 게 아니고 사도가 하는 행동과 말을 통해서 뭐가 나와요? 예수님의 확정된 것. 이 땅에서 어떤 것도 증명할 필요도 없는 것. 예수님의 죽으심과 사흘 만에 부활한 게 나오면 그게 손을 한 번 씻든 두 번 씻든 손을 안씻든, 흙하고 그대로 밥을 먹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가치가 여과없이 나온 게 되요.

그러니까 이 말을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평소에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스스로 자기 가치를 측정하거나 결정내리지 마시라 그 말입니다. 나는 이런 행동했으니까 나는 가치있다. 본인이 이렇게 판단을 해버리면 최종 가치가 주님께 가는 게 아니고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에 가는 게 아니고 누구한테 마지막에 도착됩니까? 역시 나는 잘났어. 그렇게 돌아서는 거예요.

교회에서 장로님이 “집사님, 이번에 애 또 그리 성적 잘 나왔다면서요? 세상에 서울법대를 다 가시고.”, “아유, 내가 자식하나는 잘 키우잖아요, 다른 건 못해도 자식 하나는 잘 키웁니다.” 자식 잘 키운 게, 자식이 좋은 대학 갔다는 것은 팩트고 사실이죠. 거짓말한 게 아니잖아요. 누구처럼 가지도 않았는데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그게 성도의 삶입니까? 아니죠.

“아이고, 자식 뭐 서울대학 가면 뭐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더 중요하죠.” 이상하게, 정답 같은데 왜 기분이 나쁘죠? 정답은 맞는데 썩 기분이 좋지 않아. “걔가 서울대학 떨어져도, 재수해도 난 신경 안쓰고... 사람 그것 때문에 사는 건 아니죠, 뭐.” 가만히 들어보니 복음 같은데 듣는 사람은 기분 되게 나쁘네요. 기분 나쁜 이유가 우리가 그 사람한테 ‘그렇게 자식을 칭찬해주는 나 가치있죠?’라고 은근히 기대했는데 그 기대에 부응하지 않은 게 속상한 거예요.

사람이 상대방을 만나면서 화가 나는 이유는요. 자기 해석 안에 다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 분노를 유발합니다. 부부싸움의 원인. 상대방 말과 행동에 내가 해석이 안되는 게 왜 튀어 나오느냐. 그게 분노의 요인이 돼요. 너에 대해서 내가 모든 걸 알아야 되는데 너는 왜 내가 모르고 내가 감당 안되는 행동을 왜 하느냐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기분 나빠서 그 다음부터 강압적인 행동이 나오는 거예요. 그 입 다물라. 왜냐하면 그 입 다물어야 그 다음에 내가 이해되는 말만 해서 너는 내게 종속이 되어야 돼. 그것 때문에 부부싸움 하는 거예요. 남편이 오랜만에 와서 아들 공부 좀 하나, 늦게 와서 들여다 보면 “당신이 애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애 들여다보고. 평소대로 잠이나 자소. 애는 내가 키울 테니까.”, “뭐, 애 공부하는 거 보지도 못해?”, “공부에 관심 있는 게 술 먹고 들어오나?” 갑자기 이게 연관이 안되는 것 같은데...그게 뭐냐? 애에 대해서 주도권은 내가 가지고 있으니까 당신은 내 주도권에 침범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그러면 주도권 침범하면 왜 기분 나쁩니까? 모든 것이 내 해석 하에 있어야 가치가 최종적으로 누구한테 돌아오죠? 내 가치한테 돌아옵니다. 왜? 나는 있으니까. 내가 없는 게 아니고 내가 있으니까. 그냥 있는 게 아니에요. 그냥 있으려면 맹숭맹숭하잖아요. 이왕 있는 거 가치있게 있으니까. 그게 바로 주님의 복음을 훼방하는 짓이죠. 가리는 짓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겠습니다. 성경은 뭐라고요? ‘없는데서 뭐가 나오지’. 우리는 뭡니까? ‘있는 나를 얼마나 괜찮은 존재로 변화시킬까, 주님께서? 죽어서 나를 좋은 데 보내는데 성경이 어떤 보탬이 될까?’ 이게 바로 우리가 잘못되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최종가치는 누구한테 있다? 천국 가는 나한테. 나는 성공했어. 구원받는데 성공했어. 이게 구원파고 모든 교회가 다 그렇게 하니까.

이름 자체가 행복한 교회 아닙니까?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에요? 여러분, 복은 없는 거예요. 복은 없어요. 내 가치를 인정해 주는 복은 없습니다. 그럼 이 말은 뭐냐? 복이 나타났다는 말은 그냥 사는 것이 아니고 묵사발을 만들 걸 묵사발을 만들고 나타나야죠. 그 묵사발의 대상이 뭡니까? 도토리입니까? 그 묵사발의 대상이 뭐예요? 나의 가치 아닙니까. 내 가치를 짓밟을 때 그게 복 받으신 거예요. 왜? 내 가치가 그동안 주님의 가치를 가려왔기 때문에. 내 살고자 하는 의지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위장해서 왔잖아요. 그러니 복받은 것은 작살내는 게 복받은 거예요, 내 가치가. 그러니 내 가치가 없는 거예요.

내 가치가 없다. 내 가치라는 말을 지워버리면 나머지 뭐가 남는다고 했지요? 그냥 없는 거예요. 항상 과거라고 하는 것은 없는 거예요. 현재만 있고. 이 말은 현재 주께서 살려줬기 때문에 있는 것이지 과거에 내가 버텼기 때문에 오늘이 있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과거가 아무리 길어도 오늘 없으면 없어진 겁니다. 오늘 죽으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존재의 주도권은 내가 쥐는 게 아닙니다. 주님의 피 뿌림이 있어요. 이 피 뿌림을 지금 몇 번 강조하나 몰라요. 내가 오늘 3장을 더 진도 나가기 위해서는 이걸 강조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냥 나가버리면요, 이건 엉뚱한 해석 나와요.

베드로전서 1장에 피 뿌림을 얻기 위해서 선택되었다면, 결국 우리는 없고 피 뿌림은 있다. 이게 딱 정돈이 되어야 돼요. 피 뿌림이 있고 그 있음을 있음 되게 하는 용도로써 잠시 70, 80이고 잠시동안 있다가 사라질 역할만 하면 된다 이 말입니다. 그게 사도였고 사도행전의 사도들이 그걸 아주 충실하게 지켜 왔던 겁니다.

그러면 복이 뭐냐? 여기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베드로전서 3장 9절에 보면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복을? 유업이죠, 상속. 나를 보고 추가적인 복을 주는 게 아니죠. 나의 가치를 보고, “아유, 너 가치 있구나. 복 줄게.” 이런 게 없어요. 이미 누구의 복을 계속 물려받는 거예요.

형제가 5명이다. 제일 큰 애가 고3이고 둘째가 고2고 그 다음에 고1이고 그 다음에 중3이고 그 다음에 중2다. 하여튼 엄마 애 먹었겠다. 연달아 낳는다고. 연발, 연발, 연발총처럼. 자 그렇게 했을 때 고3이 대학 들어가면 교복 누구한테 물려 줍니까? 고2 동생한테. 동생은 누구한테? 고1. 키 성장이 골고루, 똑같은 비율로 자란다는 조건 하에 교복을 그대로 물려 받겠죠. 그럼 결국 제일 막내는 처음에 이 교복은 진정 누구의 것이었단 말인가. 자기 것이 아니고 누구 겁니까? 형님 거죠. 그게 성경에서 뭐냐? 맏아들이죠.

그러면 맏아들 없으면 물려받을 복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로마서 8장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한다 했죠. (로마서 8장 29-30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맏아들의 형상이 있어요. 모델이 있어요, 표준 모델이 누구다? 인간에 대한 표준 모델, 천국가는 표준 모델은 ‘여기 있어요, 저 가치있어요’ 내가 모델이 아니에요. 내가 내 인생의 표준이 아니라 이 말이죠.

세상에 보게 되면 사람들이 진지하고 심각한 게 뭐냐 하면 성경에 나오는 내용, 복음, 피 뿌림, 부활, 십자가 이걸 진지하게 보는 사람은 거의 없고 자기의 신체가 장애라든지 불편하든지 몸이 아픈 걸 가장 진지하게 생각해요. 나이 많은 사람들, “어어어” 이렇게 하잖아요. 자식 없을 때는 혼자 잘 먹고 있다가 자식 오면 “어어어어, 야야 손이 안펴진다. 아버지가 전에는 쥐었다폈다 했거든. 지금은 손이 안 펴진다. 아 아파.” “전에는 어떻게 했다고?” “전에는 쥐었다폈다 했지.”

인간이 가장 심각한 문제는 자기 몸 아픈 거예요. 육신과 신체 아픈 거예요. 아프면 죽을 거 같기 때문에. 죽으면 되잖아요. 죽으면 그동안 쌓아놓은 내 가치는 어디서 찾습니까? 하나은행에서 찾습니까? 내 가치는 어디서 찾아요? 국민은행에서 찾아요? 인간이 사는 이유는 남들이 자기 알아주는 보람으로 살잖아요. 자식 잘 키웠다. 착실히 집 샀어. 복음 잘 들으니 집 사는 거 보세요, 복 받았잖아. 이런 식으로.

전부 다, 괜찮은 집이 남들한테 나를 인정받게 하고 괜찮은 차를 타는 것이 내가 사람으로서, 사람이라는 그룹의 일원으로서 받아들여지는 요건이 된다 이 말이죠. 주일 오후에 그런 이야기했죠. 혼자 사는 여자보다 더 무서운 여자가 집 없는 여자라고요. 그보다 더 무서운 여자는 집 있어도 집에 안들어가는 여자.

모든 가치를 자기한테 두다 보니까. 이 자기라는 게 허풍이거든요. 그러면 진정한 자기는 어디서 나왔나 보니까 지 육신에서 나왔다는 말이죠. 아무리 행복하고 싶어도 이가 아프다던지 관절이 안좋으면 행복이고 뭐고 누가 나보고 복이라 해? 관절 아픈데.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요? 그러면 내 관절이나 낫게 해주세요. 관절 낫게 해주면 내가 십일조 드릴께요, 앞으로. 주님은 의사라면서요, 고쳐 주세요. 나 병들었으니까. 이게 바알을 믿는 건지 여호와를 믿는 건지 구분도 안돼요.

교회라는 것이 그것 때문에 생겨난 거예요. 오늘 안양 강의에 어떤 분이 이야기하기를, 부천 자기 집 주변에 교회가 천 군데라는 거예요. 천 개의 교회가 있답니다. 부천, 부평에. 그게 왜 그리 많아요? 전부 주님을 사랑해서 그렇습니까? 다 주님을 사랑해서 그렇게 많은 거예요?

아니 세상만사가 주의 뜻대로 된다는데 왜 광화문에 기독교 연합회가 등장하는지 모르겠어요, 도대체. 아이고, 참. 나라가 잘 돼야 내 가치를 살려 주니까 나라 못되면 내가 군인 되어서 연금 부은 거 반토막 나니까, 다 퍼주고. 그러니까 나라가 빨리 잘 돼야 내 연금이 산다는 거예요. 결국 이건 기도 목적이 뭐에요? 연금 유지되게 하옵소서 아닙니까, 연금 유지되게 하옵소서. 역전의 용사 연금, 월남 갔다가 받은 연금 지켜 주옵소서. 그거 하잖아요, 그거. 그 기도 누구 가치에요? 본인의 가치죠, 본인의 가치.

아브라함이 복 받았다 하잖아요. 여러분, 아브라함 인생 한 번 살아볼랍니까? 끔찍합니다, 아브라함 인생. 아브라함의 주특기가 안 믿는 거예요. 주님 안 믿는 게 주특기에요. 자기 할 도리는 다 해요. 네가 자손이 많을 것이다. 자손이 많다...자손이 있으려면 여자가 있어야 되고, 여자가 임신할 가능성이 있어야 되고...보자, 아내는 이미 늙어서 태가 죽었으니까 임신이 안되고 보자...아내 여종 하갈은 오, 되겠네. 그러면 아, 그 방식이구나.

이게 아브라함의 한계입니다. 아브라함의 한계에요. 이름은 아브라함이에요. 많은 자손의 조상이라고 해놓고 자식은 한 명도 없는 거예요. 결국 이것은 단절이죠. 복은 있는데 복으로 나아가는 인간의 모든 방법은 주께서 의도적으로 끊어놓는 겁니다. 너의 가치를 유지한 채 복은 받을 수 있다, 없다? 복은 못 받아요. 내 가치를 가지고. 내 가치를 가지고 천국을 못간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천국은 왜 못가냐 하면 원래 인간은 선악과 따먹고 쫓겨난 입장이기 때문에 못가는 거예요. 도로 들어가면 될 것 아니냐. 들어가게 놔둡니까? 천사가 지키는데. 천사가 지키기 때문에 못 들어가잖아요, 그렇죠? 어느 낮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어요. 예수님 무덤에 지키는 쪽이 두 그룹 있죠. 하나는 군인이 지키고 또 하나는 천사가 지키고. 천사가 왜 지킵니까? 오지 마라 이 말이죠.

천사의 특징은 뭐냐? 시키는 대로 해요. 들어올 사람은 들여보내고 못들어갈 사람은 절대로 안보내주는 게 천사 역할이에요. 왜냐하면 본인이 결정권이 없고 천사를 보내신 분의 결정권이, 택한 백성은 집어넣고 택하지 않은 사람은 들어오지 말라고 말리는 거예요. 이것은 곧 단절입니다, 단절. 끊어짐을 의미하는 거예요.

끊어짐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 땅에서는 복이 있습니까? 저주만 있습니까? 복은 없고 뭐만 있다? 저주만 있는 거예요, 저주만. 이것이 창세기 3장의 상황이고 그리고 그 저주는 그냥 가만히 있는 고정된 저주가 아니고 계속 저주가 스스로 저주의 거품을 만들어 내요. 저주가 더욱더 더 큰 저주로 활성화된다고요, 이 저주가. 그래서 뭐 50년 믿었니 60년 믿었니 해봐도 결국 그 저주를 못 이겨요. 쉽게 말해서 세상 자기 가치를 포기한다, 포기한다 해도 어느 날 되면 자기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그걸 쥐고 있는 자기가 발견되는 겁니다.

그러면 한 번 물어봅시다. 죄가 뭐냐? 자기 가치를 갖고 있는 게 죄죠. 내 가치를 갖고 있는 게 죄가 되는 겁니다. 왜? 자기 가치가 복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로마서 3장에 보면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것이 단절이에요, 단절.

그리고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율법을 주신 것은 모든 인간이 죄 바깥으로 새어 나가지 못함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율법을 준 거예요. 율법을 지킬 수가 없다는 말은 그냥 죄 속에 살다가 그냥 저주 받으라 이 말이에요. 율법이 두꺼운 납으로 만든 뚜껑 같아서 그걸 들썩들썩 열고 제칠 위인이 없습니다. 율법을 지킬 위인이 없어요. 주님만 율법 열고 나왔죠. 다른 사람은 되질 않는 거예요.

주님 열 때 그 빈틈에 쏙 머리 밀고 같이 나오면 안됩니까? 천사가 그 새치기 못하도록 딱 막아 버려요, 천사가. 천사가 그렇게 해요. 그래서 천사는 천국으로 보내는 분이 아니고 하나님의 작업을, 하나님의 뜻을 인간에게 도달시키는 게 천사죠. 그 기쁜 소식을 전하는 천사의 이름이 뭐냐 하면 가브리엘. 마리아가 임신했을 때 나타난 천사. 가브리엘 천사죠. “이 여자야, 네가 복된 자로다.”하죠.

자, 이제 묻습니다. 복이 뭡니까? 단절되었는데, 없어야 될 복이 난데없이 이질성을 가지고 이 땅에 찾아볼 수 없는 낯선 것이 등장했을 때, 예상 못한 낯선 것이 등장했을 때 그게 복입니다. 그래서 복은 항상 예상 못하게 와줘야 돼요. 왜냐하면 복을 얻기 위해서 하는 모든 수작을 주께서 안받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해서 복을 받는 것을 차단시켜 놨기 때문에. 복은 내가 행하지도 않는데 다른 분께서 나한테 보너스를 주는 게 복이에요.

마리아가 임신하려고 처녀인 마리아가 임신해보려고 그렇게 애를 썼습니까? “아줌마, 나 처녀인데 나 아이 갖고 싶어서 열심히 기도하고 있어요.” 그러면 다른 여자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게 동백이도 아니고...뭐야 이게? 네가 포항 구룡포 출신이야? 네가 동백이야, 응? 가브엘인가 아브엘인가 술집 해?” 이런 식으로. 드라마 이야깁니다. 처녀가 애를 갖고 있으니까 사람들이 수근대죠. 큰 수모 아닙니까? 그런데 천사는 달리 보죠. 그게 뭐냐? 처녀가 아이를 낳음으로써 마리아는 본인의 가치는 이제 끝났어요. 본인의 가치가 끝났다고요. 왜? 자기 중심부에 복의 가치가 있으니까.

자,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복이 오는데 그 복은 누가 주느냐 하면 천사가, 약속이 와서 복을 받죠. 그 복을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형님이 입었던 교복이 동생한테 내려가듯이, 그걸 유업으로 주는 거예요. 그 복이 아브라함에게는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의를 줘요, 하나님의 의. 우리는 죄밖에 없다는 뜻이에요. 두 번째는 뭐냐? 하나님의 씨, 자손을 줍니다, 자손. 세 번째가 뭐냐 하면 땅을 줘요, 땅.

그런데 아까 제가 말했습니다. 인간이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은 뭐라고 했습니까? 여러분 안 잊어버렸죠? 인간이 가장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 아브라함의 복에는 관심 없고 내가 좀 건강했으면, 안아파 봤으면. 왜냐하면 고통이 오게 되면 이건 죽음의 흔적으로 봐가지고 기분 되게 나쁜 거예요. 이러다 죽을 수 있겠다... “하하하, 이러다 죽을 수 있구나” 좋아하는 사람 봤습니까? “여보, 이러다 내가 죽을 수 있게 되었어. 아, 정말 내 이런 행운이” 이런 거 봤어요? 온갖 짜증을 다 내가지고 자식들 소집하면 “아야야야야, 이러다 죽겠다~”하죠. “아버님, 죽으세요.”하면 이런 호로자식이 있나 하고 화를 벌컥 내죠.

이거 자기 가치 아닙니까? 하나님께 끊어지고 단절되었다 소리 들어도 귀에 안들어 옵니다. 아주 고집이 대단해요, 모든 인간은. 복을 안받고 유업을 안받고 인간은 원래부터 악마로부터 저주를 유업으로 받은 거예요. 오늘 제목 나왔다. 저주의 유업. 저주를 유업으로 받은 거예요. 얼마나 받았기에 주님께서 여기에 합세하자마자 주님조차 이 땅의 저주를 같이 받아 버렸어요. 따라서 죄라고 하는 것은 합체가 아니고 총체입니다.

죄란 합체가 아니고 총체다 이 말이죠. 덩어리다 이 말이에요, 덩어리. 구분될 수 있는, 조금씩 조금씩 보태서 합체가 되는 게 죄가 아니고, 이런 죄, 저런 죄, a, b, c 모아서 죄가 되는 게 아니고, 인간 자체가 총체적으로 인간은 죄다 이 말입니다. 남 구제도 죄고, 기도해도 죄고. 이 덩어리, 덩치 자체가 저주를 보여주는 죄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그걸 알게 된 것이 복이에요. 시편 51편에 다윗이 죄의 모체에서 태어났음을 알게 된 것이 이게 바로 성신을 받은 사람의 받은 복이에요. 왜그러냐 하면 본인에 대해서 본인이 갖고 있는, 본인 눈으로 본인을 보는 그런 눈만 있었는데 이것은 자기 가치죠. 자기 가치가 자기만 쳐다보고 만날 자기 방어하고 자기 변명하고 핑계대면서, ‘난 그래도 이런 착한 일 했잖아, 예수 믿잖아’ 이러다가 자기를 떠난 다른 눈알, 다른 시선이 따로 확보된 거예요. 성신의 눈으로, 주님의 눈으로 자기를 다시 볼 수 있는 그러한 영역을 보장받고 그 안에 들어갔을 때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제대로 보는 겁니다. 아, 내가 그 때 죄를 지은 것은 주께서 나로 하여금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나로 하여금 그 일을 벌이게 했구나.

그러면 여기서 경쟁되는 것이 뭐냐 하면은, 내가 존재로서, 존재에서 반드시 선택이 나오고 결정이 나오고 의지가 나오고 행동이 나오니까, 내 존재가 나를 관리할 것인가? 아니면 외부에서 주어진 사건인가? 이렇게 되죠. 사건으로 존재를 보게 되면 비로소 존재가 제대로 보여요. 그런데 사건이 없이 자기 자신을 아무리 관리해 봐도 그 안목 자체가 자기 존재 가치를 정당화하고 자꾸 변명하는 쪽으로밖에 안돼요. 내가 총체적으로 안보인다고요. 합체적으로 보이죠. 이럴 때는 내가 착했고 이럴 때는 나빴고 앞으로는 나쁜 것은 줄이고 착한 것은 키워야지. 이렇게 자꾸 뭔가 합체한 것처럼 그렇게 되는 겁니다.

가짜로 만든 바위들, 뭐 조형물들 있죠. 가짜로 만든 조형물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인공으로 만든 그 바위들, 시멘트로 만들어서 억지로 갖다 붙이잖아요. 정원 꾸미기 할 때 진짜 대리석, 진짜 돌멩이 들어오는 것하고 가짜로 시멘트 발라가지고 색깔만 돌처럼 한 것은 차이 나듯이 그것은 전부다 합체라고요, 합체된 거예요. 진짜는 합체할 것도 없이 그 자체로 이미 그 기능들이, 속성들이 계속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이가 들든, 내가 몇 살이든 관계없이 전체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와야 비로소 우리는 존재가 아니고 하나의 사건으로서 여기에 살아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거예요.
                    
자, 다시 아브라함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지금 복의 유업을 이야기 하니까.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 뭐냐? 세 가지라고 했죠? 하나는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의, 또 하나는 자기의 자손, 그 다음에 또 하나는 땅. 세 가지의 특징은 모두가 없다는 거예요. 주지 않으면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세 가지를 줄 때, 전부다 아브라함이 예상 못하고 오히려 아브라함은 그 세 가지를 받을 어떤 행동도 사전에 한 적이 없어요. 오히려 반대로 행동했죠. 사라에게 자식이 태어나는데 아브라함은 누구의 자식을 생기게 했습니까? 하갈이죠. 그 자식 이름이 이스마엘이죠.

하나님께서 복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이 할 수 있는, 복이 아닌 것이 충분하게 반영되도록 아브라함에게 그런 기회를 자꾸 줘버려요. 마치 오늘날 우리 성도의 삶 같습니다. 성도의 삶이 주님의 가치도 아니고 복도 아닌 것을 평생토록 하고 있는 거예요. 일부러 그런 기회를 줘요. 네 성질대로 마음대로 해봐라. 해보면 이게 자꾸 좀 더 잘할 걸. 결핍을 느껴요. 미흡을 느끼고 만족함이 없고 기쁨이 없는 겁니다.

항상 생각하는 것은 좀더 그 때 잘했으면 내 가치가 높아질 건데...자꾸 자기 쪽으로 돌아온다 이 말이죠. ‘고맙습니다’가 안나온다니까요, ‘고맙습니다’가. ‘나를 박살내고 나를 없애주시고 나를 없는 존재로 인식해주니 고맙습니다’가 아니고 일단은 주면 고맙지만 좀 더 주실걸. 그 때는 이것만 주시면 좋겠습니다 해놓고는 아이고, 그 때는 참 주님 내 말 잘 듣는다. 왜 그것만 주노? 주여, 참기름만 있으면 좋겠는데. 세상에 참기름만 있으면, 삼겹살도 있어야지. 참기름만 주면 삼겹살은 언제 찍어먹노.

이러니 씨와 의와 땅은 인간의 소원이 아닙니다.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은 뭐냐하면 지니에요, 지니. 알라딘에 나오는 램프 안에서 튀어나오는 것 있잖아요. 얼마나 갑갑하겠어요, 산만한 덩치가 알라딘 램프 안에 있으니까. 그게 와가지고 “주인님” 목소리도 크죠, 울림통이 크니까. “주인님, 세 가지는 들어줄 수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가 왕자가 되게 해달라는 그런 거 있잖아요. 요술램프. 그런 것 원하십니까?

그 소원이 세 가지가 아니라 천 가지, 만 가지가 되더라도. 오늘날 교회는 소원이 세 가지뿐만 아니잖아요. ‘전능하신 하나님’ 부르면 다 주잖아요. 보편적 지니가 있잖아요, 교회가. 교회를 알라딘 램프처럼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요. 천 가지, 만 가지 주면 뭐합니까? 모든 가치는 여기 있는 나의 가치를 높이는 이상은 전부 다 그것은 가짜입니다.

그것을 코스프레라고 하죠. 만화 캐릭터를 흉내내고 일본 만화 형태로 해가지고 아가씨들이 옷 이상하게 화려하게 입는 것 있잖아요. 교회 가면서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것 코스프레하고 있는 거예요. 경건하고 거룩한 코스프레. 사실은 자기 가치를 포기 못하면서. 내가 있고 난 뒤에 하나님이다. 이 원칙을 우리가 포기 안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복이란 뭐냐 하면, 여기에

라는 것은 일단 우리가 죄라는 것을 인식할 때 의가 생기고,
죄가 집체적이 아니고 총체적 죄도 같이 드러나고,

주님께서 자손이라고 할 때 내가 주의 자손이 아님을 같이 드러내고
주님만이, 아브라함 후손이 여럿이 아니고 하나, 예수님 자신으로 드러날 때
‘우리는 마귀 자손이었구나’가 같이 인식되고.

그 다음에 주님의 이라 했을 때는 그 자손이 사는 곳이 땅이에요.
그러니 주님은 어디 가 있습니까? 하늘에 가 있죠.
그러면 하늘이 하늘나라지 지상에 있는 어떤 땅도 천국이 아닙니다.
약속의 땅이 아니에요. 개간한다고 약속의 땅 되는 건 아닙니다.


어쨌든 간에 첫째 시간에 얘기한 것은 바로 복이라는 것은 무엇을 공격한다? 나의 가치를 공격하는 식으로 찾아오게 되면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 이야기해드렸습니다.

10분 쉽시다.

 이하림 (IP:61.♡.247.43)19-10-13 02:28 
서울의존강의20191010b 베드로전서3장 8절(적체와 총체)-이 근호 목사

존재가 되면 그 존재를 존재가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자기 가치를 부여하게 되고 그걸 사수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존재가 되려면 사건으로 전환되어야 되죠. 그러면 복은 뭐냐? 복이란 존재를 뭐로 바꾸는 거예요? 사건으로. 그걸 이제 언약 사건. 아브라함의 언약이라고 하죠. 이삭 언약, 야곱 언약이죠.

이삭 언약 같은 경우에는 자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자식이 없어요.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지만 자식이 없는데 하나님이 계시를 해서 자식이 나오죠. 그것도 쌍둥이로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쌍둥이로 나온다면, 자식이 있고자 하는 이삭의 의도를 이삭의 자손이 박살내 버립니다. 쌍둥이를 언제 원했습니까? 하나를 원했지, 갑자기 1+1로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잖아요. 그러니까 주도권이 누구한테 있는 거예요? 존재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언약 사건에 있음으로써 무엇을 공격하고 박살낸다? 내 존재가 자식이 있음으로써 가치가 있을 것이다는 그 의도를 미리 아시고 그 존재의 가치를 박살내고 사건이 덮쳐 버리는 겁니다.

그냥 사건하니까 어렵죠. 그러면 수학에서 하는 점을 봅시다. 위치는 있는데 크기는 없는 것. 이게 점이라는 겁니다. 왜 크기가 없어요? 여기 있는데. 그런데 상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수학이 어디부터 출발하는가? 억지부터 출발해요. 이게 공리이기 때문에. 점이라는 것은 위치는 있지만 크기는 없는 것. 그리고 수학에서 0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1,2,3,4 이것은 다 대응이 되지만 없는 것이 대응되는 게 없잖아요. 그러면 숫자가 없어야 되잖아요. 0이 없어야 되는데 0을 만들어놓고 없다는 거예요, 수학에서. 그래서 0이라는 것은 1,2,3,4와 나온 게 아니고 후대에 나타났어요. 인도에서 0이 나타났다. 0이라는 것은 1,2,3,4,5,6,7,8,9에서 또 10까지 올라가는데 0을 집어넣어가지고 9다음이라고 치자. 이렇게 해서 0이 만들어졌거든요.

이런 수학적 논리라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이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보이지 않는 것까지 다 생각하고 사색하고 그것을 탐구하기 위해서 단절된 것을, 없는 것을 자꾸 만들어 내는 거예요. 점이라는 것도. 어떤 사람이 있다. 그걸 축소해 봅시다. 축소하면 작게 되겠죠. 더 축소해 봐요. 더 작게 되겠죠. 그러면 나중에 뭐가 됩니까? 하나의 점이 되죠. 그럼 이 쪽 사람들도 축소해보면 점이 되겠죠. 그러면 남는 것은 뭐냐? 이 사람과 저 사람의 관계라는 것은 결국 점과 점과의 만남이고 점은 위치는 있지 크기는 없기 때문에, 어떤 용량이 없기 때문에 여기 나의 가치도 없어진 거예요. 있는 것은 뭐냐? 너와 나 사이에 길다란 관계성. 이게 바로 뭐냐 하면 언약이에요.

하나님은 점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은 계시지요.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은 없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할까요? 강의를 처음부터 할까요? 피 뿌림을 위해서 인간이 만들어진 거예요. 그러면 피 뿌리는 사람만 있으면 되죠? 그렇죠? 우리가 따로 있을 필요 없지 않습니까? 점 같은 존재만 되면 되는 거예요. 왜? 점은 자기 고유의 분량이 없기 때문에. 양이 없기 때문에 뭐만 보여줍니까? 주님과 우리 사이에 연결된 그 고리만 보여주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악마는 점에 불과한 인간을 부풀려 놓는 거예요. 네 고유의 것을 가져야 돼. 인간은 점이기 때문에 선악을 알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선악을 알 필요가 없잖아요. 말씀이 있고 말씀으로 사는 점으로 충분한데,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게 말씀이잖아요. 그러면 말씀은 그냥 점으로써 보여주면 되는데 점이라는 것은 고유의 것이 없다 이 말이죠. 내 것이 없으니까 주어진 것만 도로 100% 반사하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내 고유의 지식이 있고 내 고유의 안목이 있고 내 분량이 있다면, 들어온 것에다가 그대로 내 것 보태서 보내잖아요. 그러면 보내준 분이 그것은 인간 피조물로써 할, 본래의 일을 훼손하기 때문에 그 인간 받아주겠어요, 안받아주겠어요? 안받아주죠. 아브라함의 언약에 첫 번째 의가 나온다 했죠. 그러면 의에 적합한 사람은, 상대방은 뭐해야 됩니까? 의를 훼손하지 않을 조건이 갖춰져야 되죠. 그러면 그 사람은 뭐에요? 제공될 자기만의 의가 없어야 돼요,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죠. 그게 죄 아닙니까?

그래서 다윗은 죄 중에 태어난 거예요. 하나님의 의의 관점으로 볼 때에. 다윗은 신난 거예요. 다윗은 밧세바하고 간음해서 신났고 남편 죽여서 신이 났어. 물론 그것을 취미로 하지는 않았지만. 왜? 그것은 자기가 의도한 게 아니니까. 사건이니까.

세상 만사가, 저 인간 죽어라, 죽어라 해서 번개 맞아 죽어버리면 내가 죽으라 해서 죽은 겁니까, 내가 말한 것과 관계없이 주께서 죽이신 거예요? 어떤 사람이 옆집에 담배 피워서 저 담배 피는 인간 안죽나? 이렇게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보니까 심장마비로 죽었대요. 그러면 내가 저주해서 죽은 거예요, 주께서 죽인 것입니까? 주께서 죽이신 거예요. 그렇죠? 그러면 내가 저주한 것은 소용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등 소용이 없어요. 그렇죠? 저 사람 복 받아라 복 받아라 했는데 부자 되었어요. 그러면 내가 복 받으라고 해서 부자 된 거예요, 아니면 주께서 부자되게 한 겁니까? 주께서 부자 되게 한 거잖아요. 내가 복 받으라고 해서 복이 온 게 아니다 이 말이죠.

세상에 자식 보고 저주받으라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이름도 복동이, 복만이. 전부 다 ‘복’자를 붙여가지고 간절함이 그 안에 녹아져 있다 이 말이죠, 간절함이. 그러면 ‘복’자 들어간 복만이부터 복동이 전부 다 복 받았습니까? 부모의 저주를 유업으로 받았지. 저주를 유업으로 받은 거예요, 저주를.

아브라함의 언약이, 약속이 오지 않았다면 인간이 자기 것 지키고 그냥 밥 먹고 건강히 잘 살면 그게 인간의 복이다 라고 다들 그렇게 생각해서 거기에 이의를 걸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언약을 복이라고 친 동시에 그 전에 복 없이, 약속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졸지에 전부 다 복이 아니고 그 자체가 저주가 되는 거예요. 지금 이런 상황이에요.

그래서 사도들이 복음을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큰소리치면서 외친 거예요. 이 저주받을 인간들아. 누가 너희를 보고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하더냐. 세례요한이 그런 이야기했죠? 너희들이 구원을 받아? 참, 돌멩이가 구원을 받겠다. 이 돌멩이보다 못한 인간들아. 왜 그렇게 세례요한이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합니까? 이게 총체적이기 때문에. 집체가 아니고. 나쁜 사람 모아서 나쁜 사람 하는 게 아니고 나쁜 사람, 좋은 사람 합해서 다 나쁜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서 복의 유업이라는 것은 인간을 하나의 관계성, 주께서 주신 약속의 관계성을 드러내는 끝자락에 복이 온다, 끝자락에. 볼펜이 있으면 볼펜은 두껍지만 글씨 쓰는 이 끝은 점이죠. 점이 모이니까 선이 되잖아요. 그것처럼 아브라함은 이 끝에 있죠. 위에는 뭐가 있고? 위에는 하나님의 창세 전의 약속이 있고. 그 약속이 아브라함 안에 집약된 거예요.

그런데 아브라함의 육신은 어디서 왔다? 저주를 유업으로 받았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뭐를 이긴다? 저주를 복이 이기는 겁니다. 저주를 복으로 바꾸는 거예요. 대단한 복을 받은 거죠, 정말. 죄 밖에 없는데 거기서 뭐가 나왔다? 의가 나온 거예요. 아브라함의 믿음이 하나님이 의로 여기심을 받았잖아요. 아브라함은 아기 없는데 그 아브라함의 씨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고,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아브라함은 갈 바를 몰라요 (히 11장 8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그런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는 돌아갈 본향이 있다고 나오죠. 히브리서 11장 14-16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분명히 나온다고요. 그들이 이 땅에서 나그네였다.

그냥 남들 보기에는 보통 사람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하나의 약속이 따로 움직이는 점 같은 존재에요. 이제 점과 존재, 본체, 맏아들,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는댔잖아요. 유업을 주신 그 처음 맏이하고 아브라함하고 연결된 연결통이 믿음이란 말이에요, 관계가. 믿음이 있으니까 믿음 이만큼 갖고 있으라는 뜻이 아니고 당신 등짝에 하늘나라와 이렇게 연결된 고무줄이 있느냐 묻는 거예요.

그 파이프를 통해서 하나님의 죽으심과 부활, 피 뿌림이 계속 여러분의 행동과 말씨를 통해서 흘러나오십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은 파이프 같은 기능으로 끝자락에 있는 모니터 같은 기능이라 이 말이죠. 모니터 아무리 해부해봐야 거기에 가수 안들어있고 그 안에 김완선 없고 그 안에 영화배우 안나와요. 모니터라고 하는 것은 단말기로, 방송국 따로 있고 모니터 따로 있고 거기에 케이블로 연결되어 있잖아요. 유선이든 무선이든 연결되어 있다 이 말이죠.

하늘나라와 연결되어 있는 게 성령받은 사람 아닙니까? 그게 선지자 아닙니까? 이 땅에 마지막 선지자가 성도거든요. 성도는 뭐냐? 성도의 가치는 본인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 아니고 난 못났는데 주님은 이렇게 잘났다. 그거 하면 되는데 그거 못합니까? 그게 잘 안돼요? 그게 그렇게 우사스러운 일이에요? 그게 부끄러운 일입니까, 아니면 자랑스러운 일이에요?

제가 첫째 강의에 얘기했죠. “수고했다. 공 잘 던졌으니까 쉬라”고. 이미 우리는 승리투수가 된 겁니다. 매일 승리투수죠. 도대체 몇 승이에요? 1일만 해도 365번째 승리투수에요. 류현진이처럼 14승한 게 아니고 365승한 겁니다. 승리투수가 다른 게 아니고, 성도의 승리가 다른 게 아니고 나는 점이라는 겁니다, 나는 점! 위치로만 이야기할 뿐이지 내 고유의 나는 이만큼 훌륭하다, 나는 못났다, 잘났다, 못났다. 이걸 따질 필요가 없는 거예요.

왜? 우리에게 흘러들어오는 것은 내가 행한 성과가 아니라 주께서 나한테 불어넣어준 성과거든요. 오늘 강의 제목을 자꾸 ‘깔때기’로 하고 싶은 유혹을 자꾸 느끼는데. 아까 제목이 뭐라고 했습니까? ‘저주의 유업’. 이것도 괜찮은데...깔때기 있고 여기 병이 있고 병을 여기다가 딱 부어버리면 콸콸콸콸 하면서 잘 들어가잖아요, 여기. 잘 들어간다고요. 우리는 단말기다, 모니터란 말이죠. 하나의 점 같은 존재. 내 고유의 분량 같은 건 필요 없어요. 나는 이렇게 착실했습니다. 이렇게 착했습니다. 그런 소리 하지 말라 이 말이죠.

죄라고 하는 것은 총체지, 집체가 아니거든요. 모아놓은 게 아니에요. 죄라는 것은 죄다 모아 놓은 게 아니고 우리 자체가 죄에요, 우리 자체가. 죄에 무엇이 들어간다? 의가 들어간다. 나는 죄인데 내 속에 의 있다. 그러면 되잖아요. 그 의가 누군데? 주님인데, 아브라함 자손이고. 그 분이 있는 곳이 바로 약속의 땅, 천국이고. 이게 어려운 거예요, 이게?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그 의와 씨와 메시아와 약속의 땅이 어디 있습니까?’ 그건 나한테 물어보면 안되죠. ‘당신은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이야기해도 몰라요.’이럴 수밖에 없죠. 이것은 받은 사람만 아는 거죠. 받을 자만 받았기 때문에 고개 끄떡이는 겁니다. ‘아, 그렇구나. 그런데 그간 왜 그런 기쁨을 못 느꼈을까? 아, 나의 덩치가, 나의 가치가 완전히 골키퍼도 아니고 핸드볼하는 것처럼 다 막아놨어’ 다 막아 놔가지고 나 혼자 울고불고. 나 혼자 춤을 추고 나 혼자 밥을 먹고. 지 혼자 울고불고 평생을.

자식 망한 사람은 자식 붙들고 ‘니 내하고 같이 죽자’해가지고 지는 소화제 먹고. 니 이렇게 공부 못하면 나 죽을란다, 너하고. 엄마 다시는 안그럴게. 같이 울자. 흐흑...기도... 주여. 주님께서 이게 뭔...둘 다 쇼하고 있네. 이 코스프레, 뭐하고 있냐 이 말이죠. 도대체 뭘 증거하겠다는 거예요, 도대체? 애 공부 잘 시켰다 그거 증거할 거예요? 복의 유업을 증거합니다.

자, 진도 한 번 나가봅시다. 다시 베드로전서 들어가 봅시다. 3장 8절에,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나와 있죠. 여러분, 형제가 없습니다. 누굴 형제라고 해요? 아래층에 산다고 형제에요? 형제가 없어요, 형제가. 3층에 언니 살고 아래층에 동생살고, 형제입니까? 뭘 보고 형제에요? 같은 덩치끼리 형제 성립 안됩니다. 형제란 예수님의 형제를 말합니다. 이제 감 오죠? 아, 점과 점의 만남이구나. 자기 분량의 덩치를 가지고 형제라는 말을 해서는 안되는구나.

자기 분량을 점으로 바꾸기 위해서 다 내놓은 사람이 있어요. 그게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이에요. 선한 사마리아인은 자기 걸 내놔요, 강도맞은 사람에게. 자기 걸 내놓으면 자기 고유의 분량이 있어요, 없어요? 점점 더 점이 되지요. 더 필요하거든 달라고 하세요, 다 줄게. 이 모습이 누구 모습이냐 하면 예수님의 모습이잖아요.

예수님이 존재이면서도 돌아가실 때는 하나의 사건으로 돌아가셨어요, 사건으로. 어떤 강도가 말하기를, 네가 그렇게 잘났으면 우리를 구원하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구원받은 강도는 이 사건 자체가 하나님이 일으킨 사건으로 보기 때문에 “네가 오늘 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했다는 말이죠. 그 사건에서는 내가 강도냐 내가 도둑놈이냐 경찰이냐 묻지도 않아요. 다만 예수님과 저 죽으심과 나와 관련성이 있으면 내가 가는 그 곳이 바로 주와 관련성이 있으니까, 같은 패니까, 같은 동네 사람이라고요. 같은 패밀리거든요. 그러니까 사나 죽으나 주와 함께 있지요. 그러니까 낙원 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다른 강도는 자기가 존재로 보는 거예요. 주님의 단말기로 보는 게 아니고 자기 존재로 보기 때문에 너란 존재가 나란 존재를 건져 내버리면 나중에 누가 영광 받겠어요? 나 예수한테 잘 보여 가지고 나 구원받았다고 자기 자랑 할 거다 이 말이죠. 오늘날 교회처럼. 그건 뭐 지옥가지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복이라는 것은 그냥 오는 게 아니고 뭉개버리는 거예요. 빈 깡통 밟으면 어떻게 돼요? 찌그러지죠? 우리가 찌그러져야 돼요. 주님은 군화가 되어 밟아버려야 돼요. 지난 수요일부터 왜그리 과격해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냥 밟아버려야 돼요. 찌그러지면 존재가 뭐가 된다? 점이 되는 거예요. 점이 되면 그것은 사건이 되는 거예요. 위치만 있을 뿐이고 내 분량의, 내가 이건 아끼고 싶고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은 없는 거예요. 지키고 싶은 것도 박살내놨으니까.

‘아이고, 아까워라’ 하지 말고 내가 지킬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내 거 내가 지키면 나만 피곤해지죠. 아니 남자들이 담배를 왜 핍니까? 지킬 게 있기 때문에 담배 피우는 거예요. 아이고, 속 터져 속 터져. 담배 끊었는데 또 피워야 되겠다. 애들이 담배 피우는 건 어른 되고 싶어하는 거고. 그 어른 되서는 담배가 습관이 되어서 담배 계속 피우는 거예요. 자기 거 깨질 때, 미리 예상하면서 속상한 거. 깨지고 난 뒤에 담배 피우고. 술 먹고 담배 피우고. 왜 그렇습니까? 자기 가치 손상 났다고 그렇게 난리를 치는 거예요. 자기가 남한테 웃음거리 됐다고요.

그러나 없어진다는 말은 뭐도 없어져요? 선도 없어지고 악도 없어지고 웃음거리 될 것도 남아있지 않아요. 남이 나한테 지적하더라도 뭐 덩치가 있어야 지적하지, 점인데. 사건인데 뭘 지적해요? 없는 존재를 가지고 뭘 지적해요? 내가 자꾸 나의 가치가 아까워서, 가치를 위장하기 위해서 나의 역사를 동원시키니까, 갑자기 내가 덩치가 커지니까. 덩치가 커진다는 말은 남들이 공격할 수 있는 표적이 커졌다는 뜻이거든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민감하고 예민해버리면 그 사람 잘 사는 게 아니라 자살합니다. 아유, 남들이 나보고 뭐라고 하면 난 못살아, 못살아. 난 욕얻어먹고는 못살아. 지가 자기를 자해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를 협박하고 있는 거예요.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 있잖아요. 본인을 너무 크게 키워놨어. 남들이 나에게 화살을 쏘는데 표적지 크기가 이만해요(작은 원). 100m에서 한 번 쏘아 보라고 해요. 맞출 리가 없지요. 100m아니고 1m에서도 못 맞춰요, 화살로. 그런데 인간은 지 잘난 맛에 살다 보니까 자꾸 표적지를 이만하게 만들어놨어요(큰 원). 여기서 아무나 쏴도 다 맞아요. 이거는 멀쩡한데 이거 맞으니까 아프고.

자식이 10명이다. 9자식 잘 돼도 한 자식 아프니까 엄마는 고민에 빠지는 거예요. 가지가 많아. 가지 많을 때는 바람 잘 날 없다. 이쪽 가지가 아니면 이쪽 가지가 바람 부니까 ‘아이고, 너무 서늘해’ 이러고 있다는 말이죠. 원래 가진 게 많은 재벌들은 고민도 많은 법이에요. 여러분들은 다행스럽게 여기세요. 가진 게 없어가지고 천만다행입니다. 

존재가 점으로 되게 되면 관계만 남죠. 그 관계가 복입니다. 복이 복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원래 덩치, 덩어리가 있었는데 다윗처럼 자기 잘난 맛에 있었는데 나단 선지자가 와가지고 아주 점으로 만들어버렸어요. 너는 너의 가치를 위함이 아니고 총체적으로 죄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대표자로서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었다는 겁니다.

따라서 네가 밧세바를 보고 아름답게 느끼는 것은 이 이스라엘이라는 죄인을 대표해서 인간은 누구든지 아름다움을 보고 거기에 혹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다윗 네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왕이니까 대표해서 시범조로 보여준 거예요. 간음을 했고 시범조로 살인을 한 거예요. 인간은 자기중심이라는 것을 다윗을 통해서 이스라엘 왕의 자리에서 보여준 겁니다. 왜? 다윗은 다윗언약으로서의 왕 위치에 있으니까. 오늘 제목 다시 수정합니다, ‘점’.

그러면 예수님이 오시고 언약이 오게 되면 이 점을 더 확대시켜 나가게 되는 거예요. 복이 왔다는 것은 그 복이 옴으로써 그 주변에 없었던 죄가 새롭게 발생된다는 점입니다. 형제는 없어요. 형제는 없는데 내가 죄인이라고 여기는 순간 형제가 비로소 그 때 보입니다.

‘내가 십자가 앞에서 죄인입니다.’ 죄인이라고 할 때는 반드시 의 앞에서, 아브라함 언약이니까 하나님의 의, 우리는 죄. 그 분 앞에서 우리는 죄밖에 없다는, 죄만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그런 동기로 나타난 사건으로서의 의. 의 앞에서 내가 죄인 것을 알 때 나만 죄를 아는 게 아니고 같이 다른 사람도 죄인임을 알 때 그 둘 사이에는 뭐가 성립됐습니까? 형제죠. 형제라 할 때는 반드시 복음이 나와야 되죠.

두 사람이 이렇게 있을 때 두 사람 전부다 시커먼 죄인 되었다는 말이죠, 십자가 앞에서. 그러면 이쪽이 이쪽을 사랑할 때는 그냥 사랑할 수 있는 자격이 못돼요. 왜? 죄인에게서 나오는 것은 모두다 죄가 되기 때문에, 사랑하면 그게 죄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누구를 몹시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보고싶고 잠도 못잘 정도로 사랑할 때 주의해야 될 것은 그쪽이 나만큼, 내가 사랑하는 만큼 사랑하는가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나는 그쪽을 사랑하는 것이 감사하고 고맙다 할지라도 상대는 나에게 내가 아는 감사와 고마움만큼 전혀 고맙고 감사하지 않을 때는 이것은 아직까지 사랑으로 주께서 연결시키지 않았다는 신호입니다. 자칫하면 데이트폭력 나올 수 있어요. 내가 너 사랑해서 모든 걸 줬는데 너는 나한테 뭘 해줬는데? 이렇게 된단 말이죠.

어떤 사람이 저를 보고 목사님은 페미니즘 같다고 하거든요. 자꾸 여자 편만 들고 남자 편 안들고 여자 편든다는데. 지난 오후 설교 때 그게 깨졌죠. 빚 갚아달라고 결혼해달라고 하는, 세상에 여자가 그렇게 악할 수 없다. 남자의 순정을 돈으로 바꾸려하는 여자들. 그 때부터 여자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면서, 여자가 남자를 이용할 때 지 빚 갚기 위해서 이용하는구나. 아 이거 독한 여자들... 형제가 아니죠, 핑계대면서. 교회에서 주의하세요. 돈관계 성립될 수 있습니다. 돈 있는데 무슨 형제겠어요? 자기 가치를 위해서 상대방을 이용한 거죠.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감사하고 고마운만큼 상대방이 감사하고 고맙지 않을 때는 이것은 주께서 허락하지 않는 관계에요. 그 감사하고 고맙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먼저 주님 앞에서 내가 감사하고 고맙다 한다면 내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내가 나서면 안되죠. 그러면 내가 먼저 있고 주님은 내 짝사랑을 키우기 위해서 완성하시는, 나보다 후행조치가 되는 거예요. 선행조치가 있고 후행조치가 있거든요. 첫 번째 행동이 있고 두 번째 행동이 있는데 나중 것이 앞에 것을 지키기 위해서 동원된 셈이 되니까 내가 우선이고 하나님은 내 소원 들어주는 것밖에 안돼요. 내 사랑을 만족시켜주시옵소서, 주여. 소원들어달라고 하면 이건 주님을 이용한 것밖에 안돼요. 이건 바알종교에요.

얼마든지 둘이, ‘사랑합니다’하면 예의상 ‘사랑합니다’할 수 있어요. ‘사랑합니다’해서 사랑이 아니고 고마워하고 감사하는 걸 봐야 돼요. 내가 전에 얘기했잖아요. 고마워하고 감사하게 되면 성령의 일이고 억지로 하게 되면 악령의 일이고. 고맙고 감사한다는 말은 그 사람 앞에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끝까지 아무것도 아니어야 되지 ‘왜 내 사랑 안받아줘?’ 이렇게 되면 이게 뭐에요? 거래하자는 이야기밖에 안되잖아요.

남편이 아내보고 ‘난 당신을 사랑해’ 그 말을 뭐라고 이해한다고 했게요? ‘난 당신 앞에 있으면 난 아무것도 아니야. 당신 앞에 서면 난 왜이리 작아지는지. 등 뒤에 있으면 왜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어.’ 이렇게 한단 말이죠. 그러면 작아지면 계속 쭈그려있으란 말이죠. 깡통 되어 있으란 말이죠. 그런데 어느새 ‘내가 이렇게 사랑하는데 너는 왜 사랑안하나?’ 이건 뭐냐? 너 요새 많이 컸네. 갑자기 사랑할 때는 작아지다가 자꾸 뭔가 내가 사랑한다고 하면 저쪽에서 사랑한다고 하겠지, 뭔가 지가 바둑두는 것도 아니고 한 수놓으면 저쪽에서 한 수 두고. 지금 어떤 전략적인 시늉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백날 사랑한다 신호를 보내도 꿈쩍도 안해. 그런데 갑자기 화가 막 치밀면서... 데이트 폭력이죠. ‘니는 왜 나 사랑 안하는데?’ 돈 준 거, 시계 사준 거, 가방 사준 거 다 뺏어버리고. ‘남자가 쫀쫀하기는. 준 걸 뺏나?’ 이러면 ‘그래, 나 남자아니다. 치사한 건 치사한 거고 돈은 돈이다. 돌려줘.’ 못주겠다고 하면 패버리고. 쭈그려졌으면 계속 쭈그려져야죠. ‘당신이 나 말고 다른 사람과 만나 행복하다면 나도 그걸 감사하겠어.’ 이렇게 되야 될거 아닙니까? 나 놔두고 다른 남자한테 가면 죽여버린다. 이게 무슨 사랑입니까, 이게?

사랑의 뒷면은 사랑이 아니에요. 사랑의 뒷면은 증오에요, 증오. 이 말은 증오인데 사실은 사랑이라고 티를 내는 거예요. 위장하는 거예요. 인간의 모든 사랑은 증오에서 나왔습니다. 왜? 인간은 죄의 총체이기 때문에. 그래서 어떤 남자는 그 여자를 미워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도 있어요. 너 내 밑에서 불행한 삶을, 비극적 삶을 살아보라고. 뭐 이거 복수하는 것도 아니고. ‘사랑하기 때문에 이혼 못해준다’ 이런 거요. ‘니 행복한 꼴 나 못보겠다.’ 뭐 태양의 계절인가. 갑자기 드라마 얘기 또. 아침 드라마 7시50분. KBS2.

다시 정리합시다. 세상의 모든 것은, 고마움과 감사는 성령의 일입니다. 따라서 형제에게 나는 뭘 요구할 수 있느냐. 요구할 수 없어요. 고맙다, 감사하다는 말은 주님이 우리에게 준 고마움과 감사를 이렇게 나눌 수 있는 형제에 대해서 고맙고 감사하죠. 여기 형제라는 것도 없는데 예수님 때문에 형제가 발생된 거고. 그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다는 말은 뭐냐? 내가 개뿔도 아무것도 아니며 내가 형제를 사랑하든 뭘 해도 그 대가를 받을 만큼 나는 그렇게 내 가치를 가질 이유가 없다는 것을 언급하는 겁니다. 이게 뭐라고요? 이 세상에 없는 거죠. 없는데 복이 먼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선택되었다면 이것이 바로 복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할 수 있는 게. 사랑받는 게 복이 아니고 사랑하는 게 복이 되죠. 내가 잘되는 것이 복이 아니고 상대방이 잘되는 것이 나한테 기쁨이 되고 감사가 되는 게 복이에요. 이것은 자기부인이 되지 않으면 성립될 수 없는 겁니다. 자,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여기 베드로전서 3장 10절에 봅시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줄줄 많이 나오죠?

이걸 집체로 보자고 했습니까, 총체로 보자고 했습니까? 이것은 집체로 보지 말고 총체로 봐야 되죠. 그러면 이런 사랑을 하는 것도 어떨 때는 사랑하고 어떨 때는 사랑 안하고 집체적인 사랑이 아니고, 인간 자체가 자기부인이 될 경우에는 이게 한꺼번에 다 터져 나오는 거예요. 한 쪽면이 사랑스러운 게 아니고 춘향전에 나온 말대로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아장아장 걸어라’ 이렇게 하거든요. 이리 봐도 내 사랑 저리 봐도 내 사랑. 코푸는 것도 이뻐. 기침하는 것도, 하품하는 것도 이쁘기 짝이 없어요. 밥을 허겁지겁 먹어도 그렇게 이쁠 수가 없어. 코 후벼도 그렇게 이뻐. 발톱만 파도 이뻐. 한 번 이쁘니까 모든 게 이뻐요. 손자 갓 태어나가지고 ‘똥싸는 것 봐. 이 얼마나 이뻐’ 하거든요. 시어머니, 시아버지한테 그렇게 해봐요. 시아버지 요양하면서 똥싸는 게 그렇게 이쁜가요? 아니죠. 내 자식이니까. 내가 얻어온 자식 아니잖아요. 내가 죽을 뻔해서 낳은 자식 아닙니까? 그 자식이 내가 죽을 뻔해서 낳았다면 ‘자식을 살려, 내가 살려’ 하면 쉽게 금방 나와요. 자식 살리고 어미 나는 죽겠다. 이게 자기부인이잖아요. 나는 없어도 되고 너는 살아야 돼.

예수님의 마음이 이 어머니의 마음이에요. 나 죽을 테니까 너 살아라. 이 죽을 인간아. 이 지옥갈 인간아. 니 천국가고 나 저주 받을께. 그게 주님의 사랑이고 그 사랑이 로마서 9장3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우리 백성이 구원받는다면 내가 그리스도에서 끊어진다 할지라도 나는 그걸 용납하겠다. (로마서 9장 3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철저하게 사도바울은 단말기에요. 본인이 자기 가치를 발산하지 않습니다. 성질이 좋아서가 아니라, 집체적이 아니고, 몸의 컨디션 괜찮아서가 아니라 총체적으로 성령께서 임하게 되면 인간은 구원받은 것 자체가 감사하기 때문에 그 감사가 주체할 수 없이 폭발하면서 터져 나오게 되어 있어요, 터져 나온다고요.

다시 이야기하지만, 내가 저 사람을 좋아한다, 사랑한다 하더라도 내가 사랑하는 만큼 사랑안하거든 기다리세요. 왜냐하면 ‘사랑한다, 감사한다’ 이것이 인력으로 윽박지른다고 나올 일이 아니거든요. 사람이 사랑하게 되면 욕심도 같이 따라 나오게 되어 있어요, 욕심도. 그 말은 뭐냐? 주님이 그 사람을 사랑해야 될텐데 성질이 급해가지고 내가 사랑해버리는 거예요. 내가 사랑하니까 나는 내 사랑에 대해서 그만한 가치를 내 쪽으로 소환시키고 싶은 거예요. 내가 손해 보는 장사 안하고 싶은 거예요. 그만큼 내가 저 생각하고 밤새도록 생각했는데 돌아오는 내용은 밋밋해. 자꾸 밀어내는 것 같아. 나하고 엮이지 않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인간적으로 억압한다고 해서, 강요한다고 해서 ‘그래, 예의상 만나줄게’ 이건 되지만 그게 내가 그 사람에 대한 진심과 동일한 레벨의 진심입니까? 아니죠. 그러니까 인간은 평생을 자기가 내뱉은 자기감정과 자기행동에 스스로 지금 올무가 되어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인간은. 주님이 허락하지도 않고 자기 가치, 자기 잘남을 위해서 스스로 자기가 쇠사슬을 만들어가지고 자기 자신을 꽁꽁 묶어가지고 필히 이렇게 되어야 나는 만족하겠다는 식으로 억지 일변도로 평생을 살아갑니다. 아이고, 불쌍한 존재...이게 인간 아닙니까? 불쌍한 존재에요, 인간은. 하나의 점이 되면 되는데 점이 되는 게 아니고 자꾸 존재로서 자기 가치를 자꾸 유지하려고, 그걸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시편 34편 한번 봅시다. 방금 읽었던 베드로전서의 내용이 시편 34편의 완성이라고 베드로가 지금 그렇게 생각하고 여기다 인용한 거거든요. 그러면 베드로 사도 입장에서 시편은 이렇게 생각하는 게 옳다라는 그러한 모델적인 해석이 나올 수 있겠죠. 왜냐하면 베드로가 시편34편을 인용했기 때문에. 인용한 것이 시편 34편 13절부터 나오죠.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똑같죠? 그대로 인용했으니까, 그쵸? 베드로전서 3장에서 똑같이 인용했죠?

그러면 사도가 구약을 해석할 때 어떤 기준에 의해서, 원리에 의해서 해석했는가를 찾아봐야겠죠. 시편 34편 8절에 봅시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뿐 아니라 모든 성경해석은 나한테 착한 사람되라고 하는 게 아니고 누구를 증거하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거예요.

미국 우주정거장, NASA죠, 휴스턴 본부에서 커다란 덩치가 우주로 가잖아요. 이 덩치가 그대로 궤도에 올라갑니까? 무거워서 안되죠. 가면서 옷을 벗듯이 뭔가 한꺼풀씩 툭툭 떨어지죠. 마지막 올라가는 것은 캡슐만 올라가고 밑에 있는 것은 새턴이라고 하거든요. 로켓이라 해서 캡슐이 올라가도록 밑에 화력을 충전하고 1단, 2단해서 추진력을 발동시키는 그러한 기관들이 밑에 있고 마지막에는 그 궤도에 중력과 원심력과 구심력이 평행을 이루는 그 지점에서 뱅뱅 돌도록 한다 이 말이죠. 구약도 마찬가지에요. 구약에 하나님께서 무엇과 동행하느냐 하면 이스라엘과 동행한단 말이죠.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 새턴 로켓 같은 기능이에요. 이스라엘이 천국 가는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올려놓는 사람이 있어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약속, 언약을 주니까 그 언약의 내용은 뭐냐? 메시아에 관한 겁니다,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를 주님 되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 되게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택한 백성이라고 규정을 해놔요. 교복을 입혀놓게 되면 얼른 보면 다 같은 학생이지만 같은 학교 학생이라고 지문이 똑같고 얼굴이 똑같습니까? 다 다르죠. 다 다른데 교복 입혀놓으니까 똑같은 학교라고 한 그룹이 되잖아요. 이스라엘이라고 이스라엘과 하나님하고 동행하니까 하나님도 이스라엘 되고 이스라엘도 이스라엘이고 똑같아 보이죠.

그런데 갈수록 이스라엘에서 분리가 일어나죠. 분리가 일어나는 방법은 하나님의 언약을 주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주게 되면 언약하나 줄 때마다 툭툭 떨어져 나가요. 뭐가? 이스라엘이. 우상숭배했다는 그러한 것을 지적하면서 뚝뚝 떨어져 나가요. 이거 자세히 들으시려면 겨울 수련회 참석해야 돼요. 에스더할 거에요. 뚝뚝 떨어져 나간다고요. 나가면서 뭐가 나와요? 언약을 듬뿍 담은 자들이 등장하죠. 그들이 누구냐 하면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선지자의 특징을 가만 보세요. 이스라엘 내부에서 선지자가 등장할 때 이스라엘 자백성에게 환영을 받아요, 밉상을 받습니까? 밉상 받아야 고난을 받잖아요. 그러니 선지자의 특징은 뭐냐 하면 미움 받아요. 계속 캡슐이 새턴 로켓한테 미움을 받는 거예요. 그런데 선지자는 본인 뜻이 아니고 천상회의를 보고 온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천상회의 그런 게 있는 줄 몰라요. 무슨 이야기인지를 몰라요.

미가야 선지자가 몇 명과 붙었습니까? 미가야 선지자는 천상회의를 참석했고 나머지는 400명이죠 (역대하 18장). 그 많은 사람이 전부다 ‘왕이여, 승리합니다’ 했지요. 그런데 단 한사람, 미가야 선지자가 한 말이 ‘이번 전쟁은 왕을 죽이기 위한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그런데 죽일 때 그냥 죽이지 않고 선지자들을 동원시켜서 허황된 꿈에 휘말려서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선지자는 누구를 대표해요?

그 당시에 이스라엘의 정신적, 종교적 사상을 대변해주는 사람이 선지자 집단이지요. 옛날에 선지자들이 있어줘야 백성들에게 말씀 전한다고 일부러 선지자 학교 만들어서 양산을 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진짜 그 많은 목사들 중에서 천상회의에 초청받은 사람은 누구밖에 없었습니까? 미가야 선지자 한 사람밖에 없는 거예요. 주님의 추가적인 계획서를 아는 사람은 미가야밖에 없어요. 그러면 나머지는 뭐냐? 천상회의 말고 그 나라 백성들한테 좋은 소리해서, 복이야기 해가지고 돈이나 빼먹을려고 과거에 출애굽이나 율법 들먹여가면서 지금 현재 주께서 어떻게 일하는가는 모르고 써먹을대로 다 써먹어진 한 물간 어떤 복음 같은 거 있잖아요.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의 집합체, 그런 것들을 가지고 나 선지자니까 돈 내놓으라고 하는 그런 식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자들이 누구를 미워한단 말입니까? 미가야 선지자를 미워하는 거예요. 왜 미워하느냐 하면 그들은 아는 지식으로 선지자 생활을 하는데, 좀 유리하게 하는 거예요.

제가 하는 말의 취지가 뭐냐 하면 추가적인 정보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은 살아있죠. 캡슐은 마지막 때 신약까지 올려야 되지 않습니까? 그 과정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 과정에서 주께서 떨어질 것을 떨어지게 하는 거예요. 떨어지는데 장차 올 정보를 천상회의를 통해서 미리 아는 사람이 누구라고요? 그 당시에 미가야 선지자거든요. 미가야 선지자를 다른 선지자가 좋아하냐 미워하냐 그걸 제가 물은 겁니다. 좋아합니까, 미워합니까? 미워하죠. 미워하니까 그들은 그대로 떨어져 나가는 거예요. 미워하니까.

오늘날 사람들이 복음 전하면 좋아해요, 미워해요? 미워하니까 그들은 지옥불 들어가는 거예요. 지옥불 들어가기 위해서, 저주의 유업을 받기 위해서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되는 거예요. 십자가 부활로 끝났다. 피 뿌림이 우선이지 내 구원받는 게 우선이 아니라는 소리를 해야 된다니까요. 우리는 피 뿌림을 위해서 구원 안받으려고 발버둥쳐도, 내빼도 안돼요. 피 뿌림이 너를 지정했으면 우리는 지구 끝까지 따라와서 피 뿌림으로 입을 거예요. 구원 받을 거예요. 방금 이야기했던 이 사실을 전하는 거예요.

피 뿌림이기 때문에 내가 뭘 착했느냐 악했느냐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니까요. 그것 때문에 구원받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 피 뿌림 안에서 나는 작아지는 것. 작아지는 게 뭐냐? 그게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고 혀를 악에서 금하고 입술을 악에서 떠나고 선에서 거하고 이 모든 것이 뭐냐? 자기부인이 된 상태가 되어야 이게 가능하다. 왜냐면 내가 부인되어야 내 가치가 없잖아요. 내 가치가 없으면 주님 십자가 앞에서 골키퍼 노릇할 이유가 없다니까요. 조그만 바퀴벌레가 이렇게 해봐야 가리워집니까? 아무것도 아닌데. 깡통인데. 훤하게 다 보이잖아요, 십자가가.

그런데 성령을 안받은 사람은 자기 가치를 위해서 예수가 있고 삼위일체가 있는 거예요. 항상 최종 가치는 자기 가치가 훌륭하다고 두니까 이들은 아무리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고 형제를 사랑하자 백날 해도 최종가치가 어디에 모입니까? 자기를 부인하기는커녕 자기를 높이는데 거기다가 다 모아지는 거예요. 그러면 피 뿌림의 선택은 애초부터 날라가 버린거죠.

그리고 자기가치가 있으면 그 다음부터는 뭐냐 하면 ‘내가 이만큼 너 사랑했잖아, 악을 떠나서 선을 행했잖아. 왜 너는 나한테 선을 안 행하는데?’ 또 반대급부를 원하고. 하나님한테 ‘하나님이여, 내가 이렇게 시키는 대로 의인을 향하고 선을 행하고 거짓말하지 않았잖아요.  그러니까 나에게 복을 달라 이 말입니다, 주님이여’ 하고 막 주님 앞에서 땡깡 부리고. 새벽 제단을 친다 이 말이죠. 새벽잠에서 깨서 이렇게 왔는데, 새벽기도 40일했는데 왜 내가 원하는 애 성적은 안오르고 복 안줍니까? 왜 부도가 납니까? 하고 때려 치는 거예요. 주님 앞에서 땡깡을 부리는 거죠. 주님께서 ‘니 다이어트하려고 일찍 나왔지, 뭐 나 좋으라고 일찍 나왔나? 아침운동 겸사겸사해서 나왔잖아. 아침운동 하니까 아침 밥맛 돌라고 니 나왔잖아. 그리고 니 가치, 자식 공부 잘하고 뭐 잘된다고? 건강하다고? 그래서 그게 누구 가치인데?’

형제라 하는 것은 감사함이 나와야 되는데, 감사함이 자기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감사해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점점 더 내 가치가 땅땅해지고 점점 다치기 싫어하겠죠.  주님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겠죠. 내가 돈을 얼마주고 딴 장로인데. 이런 거 있잖아요. 내가 목사되기 위해서 얼마나 했는데, 내가 교인 이만큼 모으기 위해서, 내가 이 예배당 짓기 위해서 얼마나 새벽제단 기도했는데. 이게 뭐에요? 이게 바로 지 자존심 아닙니까? 그게 무슨 피 뿌림이에요? 피는 옆으로 다 샜는데. 없어요. 피가 내부까지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
 
애가 아프다. 그 아픈 거. 우연 아닙니다. 다 이 세상에는 필요 없는 일 없고 소용없는 일 없고 다 필요에 의해서 주어진 거예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우리 성도가 이 땅에 사는 것은 이 세상이 지옥이고 악하다는 것을 까발리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다윗처럼. 다윗이 세상이 악하다고 해서 자기가 잘났다 합니까? 아니죠. 나도 그 중에 한통속, 같은 통속이었다. 그걸 안다는 것은 다윗이 다윗을 존재에서 보는 게 아니고, 존재에서 나와서 다른 눈, 다른 눈이 다윗을 비춰보는 사실을, 다윗은 이제 그 사실을 관계에 의해서 알게 된 거예요. ‘다른 눈이 볼 때 나는 이렇게 보인다. 나는 날 때부터 총체적으로 죄인이었다.’ 라고 주님의 안목을 자기가 눈치 챈 거예요. 그게 복 아닙니까?

내가 나를 보고 나를 정당화하는 거 말고 주님 보시기에 나는 개코도 아무것도 아닌 걸 아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면 그 다음에 나올 게 뭡니까? 감사와 고마움만 나오는 거예요. 착하게 살아야지. 이게 뭐에요? 이건 감사와 고마움 아니에요. 자기가치 단도리 하는 거예요, 챙기는 겁니다. 나쁜 짓하면 회개 해야지. 이거 뭐에요? 자기 챙기는 거예요. 그게 아니고 모든 게 감사가 나오고 복음이 안나오면 어떤 착함도 다 악한 일이 되는 거예요. 마귀 일이 되요, 어떤 착함도. 그리고 어떤 악해 보이는 것도 감사가 나오고 고마움이 나오고, 자기변명이 아니고 이것은 주께서 일으킨 사건으로 인식되고 나는 그 사건 앞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인식된다면 그 자체가 복음 증거에요, 그 자체가.

만약에 조국이라는 사람이 교회 다니는 정도가 아니라 복음을 알았다. 그런데 법무부장관 못내어 놓는다. 그러면 그 자체가 선한 일이죠. 난 나오고 싶어도 못나가. 왜? 우리 주님이 끝까지 박혀 있어가지고 돌 맞아 죽으라고 시켜서. 그러면 주의 일이죠. 그러나 그 사람이 복음을 알 리가 없지요. 집에 제사 드리는데 무슨 복음을 알아요. 복음과 관계없죠. 관계없으면 누구 가치입니까? 본인 가치죠. 욕하지 마세요.

내가 만일 권력자, 법무부장관이었으면 데모한다고 물러나겠어요, 주의 뜻인데? 내 아내는 잡혀가도, 내 사촌동생, 오촌조카는 가도 나는 안 물러난다. 이럴 수 있겠죠. 그러나 그것이 나의 가치를 지키기 위함이라면 그것은 신자가 아니고 내가 이럴 정도로 나는 악한 인간이라는 것을 법무부장관 되면서 그걸 보여줬다면 그 위치거든요. 그 위치가 나의 죄를 알려주고 주님의 의를 보여주는 자리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 자리가 법무부장관이고 조국의 자리에요,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이 있는 자리가 내 죄를 폭로시키고 그래서 내 죄를 더불어서 아까 이야기한 생명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주님의 능력으로, 주님의 복의 유업으로서 아무것도 아닌 나를 통해서 이게 전달되는 거예요. 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나는 감사와 고마움밖에 안나오니까. 이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과 용서하심을 그대로 내비쳐 보이는 성도의 모습이니까. 우리는 말씀이 죄를 통해서 말씀이 드디어 구현되는 운반체로서 우리 역할을 말씀에 의해서 하게 되는 겁니다. 말씀이 우선이고 십자가 피 뿌림이 우선이고 우리는 나중이에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가치보다 우선되는 그 가치가 있었음을 왜 진작 몰랐습니까? 피 뿌림을 위해서 살아가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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