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일상의 무능함 19061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6. 20. 09:38
2019-06-15 00:40:14조회 : 175         
일상의 무능함 190614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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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림 (IP:61.♡.247.43)19-06-20 07:15 
서울의존강의20190614a 베드로전서2장 25절(일상의 무능함)-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2장 25절 

25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여기 중심성이 하나 등장하는데, 그것은 목자에게 돌아왔으니까 목자가 중심이 되겠죠. 그러면 양이라 하는 것은 각자 자기 인생을 사는 것이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양이라면 내 인생이라는 것이 따로 있으면 안 돼요. 그것은 목자에게로 돌아가는 인생뿐입니다, 용납받는 게. 그러면 우리가 누구한테 돌아간다 할 때는 늘 이 관심사가, 그 중심되는 돌아가야 될 목적지에 관심을 두겠죠.     

어린아이가 학교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다 할 때에 걔는 옆으로 새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옆으로 새는 길은 집이 아니기 때문에. 최종점은 집으로 가기 때문에 집만 관심사가 될 거에요. 그렇게 되면 그 아이가 집으로 가는 데에 방해되는 게 있잖아요. 방해되는 거. 

피노키오라는 동화에 보면 얘가 집으로 가야 되는데...목수가 나무로 만들어가지고 천사가 와서 사람 되게 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아이가 빨리 학교 마치면 집으로 가야 되는데 중간에 놀이동산 서커스로 새버리죠. 쿵짝쿵짝쿵짝 음악소리 나니까, 퍼뜩퍼뜩 거리니까 애들이 거기에 빠진 겁니다. 

그러면 피노키오가 그 쪽으로 샜다는 말은, 자기 집이라는 중심성을 잃어버린 거예요. 중심성을 잃어버리면 누가 중심성을 대체할까요? 내가 집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것을 만약에 잊어버렸다. 그러면 뭐가 중심이 되냐 하면 바로 그 당사자가, 내가 중심이 되 버립니다. 세상의 중심이 내가. 내가 가고 싶은 데 가면, 내 마음대로다, 왜? 이렇게 된다는 말이죠. 내 마음대로. 

그것을 뭐라고 하냐면, 내 인생 내 마음대로 산다. 중심성이 없는 이걸 가지고 ‘일상’이라고 합니다, 일상. 인간이라면 일상 속에 놓여 있는 인간이거든요. 오늘 본문은 바로 ‘일상 속에  있는 인간이 어떻게 목자로 모아지느냐’ 그게 핵심이에요. 

일상에서 돌아가는 것, 영어로 루틴(routine)이라고 하는데 되풀이되는 것을 말합니다. 똑같은 하루, 아침에 일어나서 직장 가고 집에 들어오고 저녁 먹고 자고. 집에 들어와서 아이는 자자, 그래가지고 또 자고. 그러면 또 아침에 일어나서 직장 가고. 직장 갔다가 또 오고 가끔 회식하고. 토요일에 직장 불려가서 축구 한다 그래서 축구 붐 일어가지고 또 이강인 때문에 축구 요란스럽게 하다가 발목 삐어가지고 퉁퉁 부어가지고 들어오고. 그게 일상이거든요. 그리고 또 산에 간다고 해서 산에 가고. 낚시 좋아하면 낚시 가고. 그 전체를 뭐라고 했습니까? 그걸 일상이라고 하죠. 

일상은 중심이 누가 중심이라고 했습니까? 본인이죠, 본인. 본인이 중심이 되어 있어요, 본인이. 가기는 어딜 가. 지금 내가 주인공이니까 내가 움직이면 그게 진리고 정답이라고 보는 겁니다. 어디 갈 곳도 없어요, 관심도 없어요. 나한테만 관심 있어요. 그렇게 되면 그 사람에게 있어서 목자가 누구입니까? 본인이 목자에요. 그러면 양은? 양은 없어요. 본인 자체가 목자요, 교주고 다 해먹는 거예요. 

이러한 일상성에서, 그냥 한 번의 일탈이 아니고 계속해서 평생을 두고 계속 일상성에 매여 있을 때 성경을 아는 사람은 ‘왜 그 일상에서 못 벗어나느냐’ 닦달을 낼 수가 있어요. 복음을 혹시 옆에 아는 사람이 있다면 이래요. ‘너는 주님한테 관심이 없고 그렇게 그냥 네 일상에 매여 사느냐’라고 한다면 그들이 이렇게 답변해요. ‘인간 사는 게 일상에 매여 사는 게 그게 다야. 그 외에는 없어.’ 그럼 너는 교회 안가냐고 물으면, ‘교회 가지.’ 교회 가도 자기가 있는 자기 집, 자기가 중심 되어 있는 그 집으로 빨리 예배 마치고 후딱 와 버려요, 후딱. 그냥 오는 것도 아니고 후딱 와 버린다니까요. 그러면 교회다님은 주님 중심이 아니고 그냥 일상 중에 하나로 보내는 그러한 프로그램이죠, 프로그램. 

이걸 일상이라고 제가 했는데, 왜 일상에서 못 벗어나느냐.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아가요. 너나 할 것 없이 다 그렇게 살아가요. 자기 나름대로의 일상 속에 다 살아가고 그 주인공들은 누구다? 본인이 주인공이다. 이것이 이미 뭐 되었느냐 하면, 일반화되었어요, 일반화. 요새 시대에서 일반화라고 하는 것은 진리를 의미합니다. 뭐가 일반화 되었다고요? 일상생활이 일반화 된 거예요, 일상생활이. 지루하면, 심심하면 약간은 새로운 것 하나 맛보다가...그러나 일상의 그 노선은 변함이 없어요. 그다지 벗어나지 않아요, 그다지.        

전 남편을 죽였다는 그 여자 분, 지금 이 시간 뭐할까요? 저녁 먹지 뭐. 저녁 먹지요. 고유정이 이런 생각 했을까요? ‘이것은 주를 위해서 내가 사람 죽였다.’ 이런 생각 할까요? 누가 죽였나. ‘내가 죽였습니다.’ 그 다음에 거기서 문제에요. ‘내가 죽였다.’ 그러면 다시 형사가 묻습니다. ‘왜 죽였습니까?’ 나오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렇게 나올까요? ‘전 남편이 있으면 현재의 남편과 사는 데에 약간 걸리적거리기 때문에 제거했습니다.’ 그러면 그 이야기가 우리 보통 다른 사람들에게 굉장히 이상하게 들립니까? 왜 저 여자는 주를 위해서 사람을 안 죽였지? 뭐 이렇게 됩니까? 아니죠. 그 여자가 독하긴 하지만 그 처신에 대해서 그럴 수 있다고 이해는 되지요. 

그러면 그 여자가 나쁜 게 아니고 그 여자가 나쁘다는 그 기준을 ‘좀 참지, 전 남편에게 애 보여주지.’ 그런 식으로 보태어 버리면, 여자가 나쁜 게 사람 죽여서 나쁜 겁니까, 일상의 굴레에서 못 벗어나서 나쁜 거예요?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고 중심이 된 게 나쁜 거예요 아니면 사람 죽인 게 나쁜 거예요? 어느 쪽이에요?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고 자기 위해서 사는 그게 나쁜 거잖아요. 그렇죠? 

그러면 사람 죽인 그 여자는 안 죽인 다른 사람이랑 똑같다 이 말이죠, 오늘 본문에 의하면. 오늘 본문에 의하면 너희는 양들이었지만 이제는 목자에게로 돌아오잖아요. 그런데 일반 사람들은 돌아올 곳이 없다니까요. 자기가 주인공이고 자기에게로 돌아가면 끝이에요. 그래놓고 자기는 평생 동안 경찰서 안 갔다는 거예요. 사람 안 죽였다는 거예요. 

그럼 이야기를 좀 더 확장시켜 봅시다. 교회에 나옵니다. 교회에 왜 나옵니까, 이제 물어보면 구원받으려고 나온다고 해요, 구원받으려고. 그렇게 되면 구원이 뭐냐. 자기의 일상적인 일이 되어 버려요. 일상 자체를 벗어나는 일이 있어야 되는데 교회를 가나 기도원을 가나 수련회를 가나 뭘 가나 항상 일상을 공고히 하고 일상은 어떤 경우라도 내가 못 벗어난다고 버티는 식으로 잠시 시간 내어서 수련회 가주고 잠시 시간 내가지고 교회 가주고 하는 거예요. 가봤자죠. 

교회가도 자기가 주인공이고, 수련회 가도 자기가 주인공이고...전부 다 자기가 주인공이잖아요. 수련회 가서 한바탕 싸우고 또 삐치고...이게 뭡니까. 전부 다 자기가 주인공이잖아요, 자기가. 자기가 자기를 이끄는 목자라니까요. 우리 교회 목사는 따로 있겠지만 자기한테 목사는 본인이 목사예요. 

개인적인 구원은 일상에 속합니다. 그래서 정말 그 사람이 성령 받은 성도냐 아니냐 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나오는 것은, 본인의 구원이 나온다면 그것은 성령 받은 사람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중심성이 나와야 됩니다. 예수님 중심성. 

사도 바울 식으로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와야 되죠. 십자가 때문에 내가 구원 받았다는 것은 십자가가 나온 게 아닙니다. 십자가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 십자가 말 거론했다고 해서 십자가가 나왔다고 쳐주면 안 돼요. 십자가 때문에 내가 구원 받으면 그건 나의 구원 위해서, 내가 역시 내 일상의 중심성이 되어 버립니다. 

다시 말씀 드리겠어요. 어떤 성경 구절을 대할 때, 진리를 대할 때 그 진리라는 것은 내 일상성 자체가 문제 있음을 까발리는 내용이 아니면 그것은 성경 해석이 지금 엉터리인 거예요. 잘못하고 있는 겁니다. 여기 앉았던 이 분은 요새 어느 일상성에 빠지셨습니까? 

일상성이 모여서 나를 구성하는 겁니다. 사람은 평생을 살면서 하고 싶은 게 뭐냐 하면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해요, 인간은. 심지어 애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내가 어느 정도냐, 내가 어느 정도로 괜찮은 존재냐 그것을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괜찮은 존재 하려면 무엇은 모으고 무엇은 감춘다? 장점은 키우고 단점은 감춘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갑자기 땅 사고 땅값 오르면 11시 예배인데 10시부터 와가지고 설쳐 대고... 자기 인생에 큰 우환이 있어 가지고 이혼을 했다든지 애가 아프다고 하면 벌써 한두 달째 교회 안 나오고...이게 뭐에요? 장점 거리 있으면 남들에게 나타내고, 나 이정도야 나타내고 단점이 있으면 남들이 나를 낮추어 볼까, 점수 깎아서 볼까 싶어서 빠지는 겁니다. 남의 눈에 안 띄는 거예요. 나중에 괜찮은 것 가지고 만회가 될 때까지는 교회를 안 와요. 

사람이 누구한테 자기를 등장시킨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일상에서나 있을 일이지...제가 여러분한테 등장시켰습니까? 아, 나 등장시키고 싶어 환장했어. 뭐 이렇습니까? 아니죠. 등장시킨다는 말 자체가 주님 나라에서는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뭐 니 꼬라지 보고 대단하다고 남한테 등장시키고 말고가 어디 있냐는 말이죠. 

돌아가신 이주일이라고, 14일, 이주일이라는 코미디언이라고 있거든요. 아저씨 개그 한 번 해봤습니다, 이주일. 그 사람이 맨날 무대에 서면 뭐라고 하냐 하면 뭔가를 보여주겠다는 거예요, 뭔가를. 기껏 보여 주는 게 수지큐 춤추는 것 외에는 별로 볼 것도 없어요. 뭔가를 자꾸 보여 주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관객들도 상당히 궁금하거든요. 뭔가를, 웃음거리를 보여주겠다고 궁금해 한단 말이죠. 그 코미디언이나 오늘 날 우리의 삶이나 다를 게 뭐에요? 

회사에서 부장이 종용히 부릅니다. 어이 김과장, 이번 달 돼서 뭔가를 보여 줘야지라고 하거든요. 뭐를 보여 주는데? 뭔가를 보여 줘야지, 월급만 축내면 되요? 회사 발전을 위해서 뭔가를 보여 줘야지. 새로운 아이템 없어, 아이템? 뭐 물로 가는 자동차 만든다든지 이런 거. 아이템 없어? 밥 대신 알약 먹는다든지 이런 거 없는가요? 

보고 듣고... 우리가 귀가 있고 듣죠. 눈이 있으니까 보죠. 코가 있으니까 냄새 맡죠. 혀가 있으니까 맛을 보죠. 피부가 있으니까 느끼죠. 이 모든 것에 우리를 완전 포위해서 날마다 우리에게 쏘아대는 것은 뭐냐 하면 일상입니다, 일상. 일상을 제가 좀 달리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오늘 제목을 일상으로 할까. 달리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일상이란 이런 경우도 있고 저런 경우도 있다. 이게 일상이에요. 살다 보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 이게 일상입니다. 뭐는 요지부동이지요? 뭐는 달라질 의사가 전혀 없죠? 나. 그냥 나라 하지 말고 나는 이러이러 하니까 남한테 무시당할 필요 없는 잘난 존재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나에게 예우를 다 갖춰라. 이것이 은연중에 계속 누구를 만나든 무의식적으로 쏘아대는 겁니다. 당신은 나에게 예의를 다 갖춰 주세요. 왜? 나는 무시당할 만큼 그런 하찮은 존재가 아닙니다. 

그 주인의 시건방짐은 뭐로 아느냐 하면 그 집에서 키운 개를 보면, 개가 시건방진 짓하면 주인도 시건방졌어요. 개보면 알죠. 인간이 시건방진 것은 누구를 닮아서 그렇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악마를 닮은 거예요. 악마는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악마가 갈 곳은 둘째 죽음, 유황불 밖에 없어요. 악마가 그것을 감추죠. 감추고 지옥에 같이 데려 갈 인간들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나처럼 죽을 때 죽더라도 일단은 시건방지자. 남한테 밀리면 안 된다. 

사람 사는 보람은 어디 있느냐. 내가 대단하다는 것을 매일같이 과시하는 그 속에서 사는 보람을 느낀다는 겁니다. 남한테 내가 우대를 받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내가 신처럼 한 번 행세해 보겠다는 깊은 욕망이 발산된 거예요. 인간의 욕구의 목표는 뭡니까? 신이 되는 겁니다. 신이 되는 거. 신이라 하는 것은 모든 의미가 어디로부터 나와서 어디로 돌아가냐. 나로부터 의미가 시작 되서 결국은 그 모든 의미가 나의 의미로 종결되고 마감되는 것, 사람들은 그 의미만 아는 겁니다. 그 점을 여러분 잘 이해하시겠지요? 

그러면 제가 여기서 간단한 그림을 그려 보겠습니다. 여기 이 사람이 있고요, 여기 이 사람이 있는데, 이렇게 두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 쪽에서 말을 합니다. 방금 말을 할 때는 의미라고 했지요. 의미가 뭐지요? 말에 의미를 싣고, 어휘나 단어에 의미를 싣고 상대방을 쏘고 다시 되받아서 나에게로 되돌아오죠. 왜? 우리는 악마를 닮았으니까. 내가 신이니까 나한테 의미가 있어야 되죠. 그러면 이 쪽 사람은 또 이야기를 해요. 이쪽도 마찬가지로 다시 되돌아오죠. 그러면 둘 사이에 의견 일치가 됐습니까 안됐습니까? 의견 일치가 될 턱이 있나. 인간은 각자 자기 말하지 의견 일치라는 것이 없습니다. 일방적인 착각에 의해서 그 사람이 내 말을 알았다고 일방적으로 이야기 해버려요. 

아까 식사하고 있는데...교회 다니는 모양이에요. 나이 많은 사람이 손자하고 여자 분 한 두 분인가 있고 남자하고 있는데 남자는 목사 같아요. 식사 기도를 하는데 시험 삼아 시간을 재 봤어요. 아...4분을 넘어가는데 나는 기도 참석도 안했는데 내가 지겹기 시작하는데 아이 건강, 손녀 문제... 불고기 하나 얻어먹는다고 불고기 값을 해야 되니까, 빨리 끝나면 목사가 너무 성의없이 참여한다고 다음부터 안 넣어 주는 수가 있어요. 자기들끼리 먹는 수가 있기 때문에 불고기 값을 하느라 이렇게 길게 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그 할아버지...할아버지도 아니죠 나보다 나이 적은, 다 들려, 큰 소리로 이야기 해가지고, 내년에 65세 전철 공짜라 해가지고...아멘을 4번을 해요. 아멘. 텀 재고 또 아멘. 애 건강하게 해 주시고, 아멘. 뭐 이렇게 해가지고 불고기는 볼볼 다 타고 있고... 

자, 한 쪽에는 기도했고 한 쪽에는 아멘했습니다. 의사 통했습니까? 너무나 일방적인 생각입니다. 목사는 기도했으니까 빨리 불고기 줘, 이런 의미를 담고 지금 기도하고 있고 주님은 기도 듣지도 않을 것이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거예요. 기도해서 나 돈값 했으니까, 기도값 했으니까 공짜로 먹어도 되죠? 이런 식으로 나오고 있고...너는 나니까 불고기 먹여 준다 해서...그저 니가 하는 것에서 부스러기나 떨어져 우리 아이, 손자 몸만 건강하면 좋겠다 해서 지 맘대로 아멘했고... 

인간은 자기밖에 모르는데 어떻게 남을 포용할 수 있습니까? 남을 어떻게 포용해요? 안돼죠, 안돼요. 오늘 본문에서 단순히 성도가 각자 목자에게로 돌아오는 그 이야기 뿐만이 아니에요. 양이 목자한테 꽂혀 가지고 돌아오는 과정 속에서 양과 양은 서로 사랑하게 되어 있어요. 런데 그 사랑하는 것이, 사랑할 때에 상대방을 사랑하면 안돼요. 왜? 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의 자리를 사랑해야 돼요. 그 사람이 속해 있는 자리. 

혹시 드라마 같은 데 보시면 돌아다니는 초밥 접시 있죠? 초밥 접시, 비싸기도 되게 비싸요. 계란말이 해놓고 3000원 인가 진짜 50원 하면 될 걸, 50원 너무 했나 100원...계란말이하고 3000원, 빨간 접시는 5000원 해 가지고 돌아다니는데, 그 음식이 어디 담깁니까? 접시 차이에 의해서 필요하면 음식 접시 들고 먹거든요. 나중에 쌓아 놓은 접시 가지고 계산을 하는데... 

인간은 일상적으로 관심이 자기한테 있잖아요. 누가 나를 데려간다는 것은 장애인인 경우에나 그렇고, 또 장애자도, 도와주세요. 할 경우에만 그렇지. 내가 지식이 모자랍니까, 기도빨이 모자랍니까, 내가 성경을 못 봐서 그렇습니까. 내가 알아서 천국이든 지옥이든, 내가 선택해서 가겠다는 것이 인간의 고집이고 그것이 분명하게 될 때 내 중심의 일상화가 되는 겁니다. 신앙생활도 나의 일상에 다 포함되는 거예요. 그런데 누가 나를 접시에 담아가지고 나를 옮긴다면 이것은 나의 무능을 전제로 한 것이잖아요. 

그러면 사랑할 때 상대방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아이고 기도 참 잘 하시대요.’ 이럴 게 아니라 상대방을 뭐로 보느냐 하면, ‘주님이 아니면 절대로 목자한테 올 수 없는 장애자이고, 등신이고, 무능한 자라-그런 관점을,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의 무능함을 사랑합니다.’ 이건 남이 들으면 기분 되게 나쁠 거예요. ‘당신 자력으로 천국 못 간다는 사실을 저는 사랑합니다.’ 

그리고 똑같이 내가 당신에게 그렇게 퍼부었으니까- 이건 잘못 들으면 저주 퍼붓는 것처럼 느껴지죠? 아이고 등신아. 이렇게 들리죠. 자, 당신이 나한테 저주를 퍼부을 차례입니다. 이 등신아, 주님 은혜 아니면 네 힘으로 못갈 이 등신아. 이렇게 되거든요. 그게 바로 교회 아닙니까? 그게 성도의 만남 아니에요? 교회 와서 기도자랑 하지 말고, 헌금자랑 하지 말고...그게 성도잖아요.             

다시 말해서 나는 일상생활 할 수 있는 사람이 못 된다. 적어 볼께요. 첫 번째 중요한 것 나왔습니다. 첫 번째 중요한 것. 나는 일상생활을 할 수 없는 자입니다. 남들 다 하는 것, 일반화에요, 남들 다 하는 것. 자기중심으로 나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 이건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어린애도 할 수 있어요. 이건 공부 안 해도 할 수 있어요.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 그런데 나는 어찌된 일인지 나는 내 일상생활 할 수 없고 초밥 접시처럼 접시에 담겨야 내가 원하지 않는 그 최종 목적지를 향하여 나는 지금 움직여가고 있습니다. 라는 고백. 

그러니까 당신은 아주 잘 생겼습니다, 당신은 멋있습니다, 당신은 힘이 셉니다, 돈이 많습니다. 그런 것 보고 부러워하면서 나를 사랑하지 말라 이 말이에요. 사람이 누가 부자됐다고 칭찬해 주는 것은 아 나도 부자 한 번 되어 봤으면...하고 자기의 숨겨진 탐욕을 노출시키는 순간입니다. ‘아 키 크네’ 이 말은 지 키 작아서 불만이라는 뜻이거든요. ‘언니 너무 이뻐요’ 이 말은 나 지금 못생겼다는 뜻이에요. ‘집사님 기도 너무 좋아요’ 뭐 이런 거요. ‘나는 어떻게 집사님 기도를 본받을 수 있을까.’ 그것도 기도 본받게 되면 그것은 일상입니까 주의 일입니까? 일상이죠. 왜냐면 자기는 주인공이니까. 또 나중에 모른다 하지 마시고 잘 들어보세요. 

일상은 내가 주인공이에요, 내가. 왜 자꾸 제가 일상이라고 하냐면 남들 다 그렇게 살아가니까, 남들. 악마의 마음을 품은 모든 인간들이 다들 그렇게 살아가니까. 그걸 흔히 일상생활이라고 하잖아요, 일상생활. 루틴, 반복되고 되풀이되는 일상생활. 하루아침 눈떴다 저녁 잘 때까지 주인공이 누굽니까? 나잖아요, 내가 주인공이잖아요, 내가. 오늘 아침 10시엔 뭐하고 11시엔 뭐하고, 그 계획을, 스케쥴을 자기가 짠다 이 말이죠. 자기가 주인공인 그걸 일상이라고 하는 거예요. 

제가 일상이라고 하는 것을 아주 죄악된 것으로 이야기하지만, 세상에 나가서 일상 같으면 아주 평범한 삶이 되어 버려요. 그러면 주님께서 매일같이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시는 그런 기적을 주죠. 기적을 줘봐야 무슨 소용 있습니까? 모든 기적들을 평범함으로 다 도배를 해놔 버리는데. 살려줘도 자기가 늘상 살아왔기 때문에, ‘뭐 이상해? 그냥 내가 살고 싶어 살았지, 하나님이 뭘 도와줘?’ 이런단 말이죠. 그러다가 다뉴브강에 한 번 빠져 봐야 아...살아 있다는 게 기적이구나... 

한 번 물어봅시다. 사는 것이 기적입니까, 죽는 것이 기적입니까? 사는 것도 기적이고 죽는 것도 기적인데요. 기적이라는 것은 주의 일인데 삶의 의미는 살아 있음에서는 절대로 안 나오게 되어 있어요. 철학자들이나 과학자들이 백날 연구해봐야 진리 모릅니다. 왜냐하면 죽음부터 출발해야 진리가 나오는데 그들은 사는 것부터 하려고 하니까 문제가 해결이 안 되는 거예요. 

‘우리는 왜 죽기 위해서 태어났지?’ 라는 질문을 해야 되는데 ‘왜 인간은 살다가 죽지?’ 이렇게 되어 버리니까 사는 것이 주류가 되어 버리고 죽는 것은 안 죽어도 되는데 죽어야 되는 것처럼, 마치 하나의 부록처럼 여기는 거예요. 그런 마음자세로서 아무리 신학을 하고 철학을 하고 공부를 하고 영화감독이 영화를 찍고 백날 해도 그건 소용없는 겁니다. 결국은 일상으로 돌아올 뿐이죠. 자기가 주인공이 되는 그 곳으로 돌아온다 이 말입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교회 다니기, 일상입니다. 기도하기, 일상이에요. 왜 일상이냐? 살기 위해서. 누가? 어디 주님 살리려고요? 자기 살기 위해서. 왜 자기가 살려고 하지요? 왜 자기가 살려고 합니까? 나 말고 나를 살려줄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여기는 거예요. 

그러니 믿는다 믿는다 하면서도 백날 성경공부하고 믿어봐야 주인공이 누구에요? 자기는 신앙생활 한 게 아니고 일상생활 한 거예요. 이미 누구를 믿고 있어요? 내가 해야 일이 된다는 걸 믿고 있는 이상은 주님 믿어봐야 믿는 게 아니고 내 보조에 지나지 않아요, 나의 보조. 내 하는 일에 보탬 되는 정도로 선을 긋자 이 말이죠. 

그런데 제가 뭐라고 했어요? 사는 것보다 뭐가 더 기적이라고 했습니까? 죽는 게 기적이죠. 죽는 게 기적이라면, 죽는 게 더 기적인 이유가 우리는 살고 싶어 하니까. 살고 싶어 한다는 이것은 정상적인데, 살고싶어 해도 소용없이 죽잖아요. 그러니 죽으니까, 이건 내 뜻이 아니니까 내 뜻 아니면 누구 뜻이겠어요? 주의 뜻이죠. 그러니까 죽음이 더 기적인 것이 맞잖아요. 

아무리 잘 살아도 못 살아도 죽잖아요. 그러면 모든 의미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냐면 내 죽음부터 시작해야 되요. 그러면 죽음부터 시작하게 된다면, 죽음은 우리가 보통 눈으로 볼 때에는 사라짐이죠. 그럼 성경에서의 죽음은 뭐냐 하면, 바로 심판을 의미하는 겁니다. 

정리해 봅시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은 뭐 받기 위해서? 심판 받기 위해서라는 겁니다. 심판을 다른 말로 하면 저주죠.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은 저주 받기 위해서. 그걸 달리 하면 더욱더 죄인이, 죄가 죄 되게 하기 위해서. 게다가 율법까지 줘가지고. 율법 주게 되면 죄가 더욱더 죄 되게 하지요. 율법을 주게 되면 우리는 어디 아래에 있다 했습니까? 저주 아래에 있지요. 그게 주님의 의미란 말이죠. 

왜 주님은 저주하고 죽이고 심판하려고 합니까. 우리가 일상을 통해서 까불어도 너무 까불거든요. 아침에, 24시간 눈만 뜨면 그 때부터 까불기 시작하는데 주님보다 누구 생각 먼저 해요? 평소에 내가 날 살리는 일에 전념하고 몰두하는 거예요. 그러다 누가 나에게 욕이나 한다 치면 열 배나 갚아주죠. 완전히 라멕같애. 아니 열 배가 아니고 칠 배나 갚아줘. 미사일 한 방 쏘는데 일곱 방 날려 버리고. 나에게 존경을 표하라 이 말이죠. 니가 함부로 갖고 놀 존재 아니다 이 말이거든요. 주인공이 자기잖아요. 

남이 욕할 때, 그것을 ‘주께서 나에게 욕하게 하셨다’ 그런 생각이 아주 쉽게쉽게 그냥 그때그때 마다 떠오릅니까? 떠올라요? 노래가 안 뜨는 것도 주의 뜻이라고 떠올라요? 그냥 편하게 떠오릅니까? 다시 말해서 내가 사는 게 내 뜻이 아니고 죽여도 되는데 계속 살려주는 주의 뜻이라는 생각이 살아가면서 늘상 떠오릅니까? 일단 떠오른다고 칩시다. 안 떠오르면 그 다음 이야기가 안 되니까. 

다시 이야기할께요. 사람을 대할 때는 상대방을 어떻게 보느냐 하면 내가 나를 보는 기준 가지고 상대방을 봐요, 인간은. 나는 공부 잘 하는데 쟤는 왜 저리 머리가 나쁘지? 이런 거요. 나는 공부 잘 하고 싶은데, 저 사람은 공부 못하니까...내가 얼마나 잘났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타인이 필요한 거예요. 혹시 여기 있는 사람 중에서 남이 양발이나 팔목에 타투라고 하지요, 문신 보고 그렇게 부러운 사람이 우리 중에 있습니까? 없지요? 조폭도 아니고. 등짝에, 안 부럽죠? 그런데 타투 하고 싶은 사람한테는 뭐만 보입니까? 혹시 내가 문신한 것 보다 더 이쁘게 나왔나 그것만 찾지요. 

그것은 내가 관심 있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나한테 의미가 되는 타인을 찾아다니는 식으로 인생을 살아간다는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 연대라는 거예요. 연대는 일상성에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나만 그렇나 우리끼리는 다 그런데. 

어떻게 여자가 얼굴에 문신을 하느냐. 나만 그래? 우리 연대, 우리 커뮤니티, 우리 공동체는 다 해. 이것보다 더 심한 사람도 많아. 이건 약과야. 이런 식으로 변명하잖아요. 어떻게 여고생이 술을 먹고 담배를 피우냐고 하면, 우리 학교는 다 그래. 이렇게 한다고요. 연대에 속해 버리면 뭐가 뽑히지 않느냐 하면 자신의 문제점과 허점과 죄가 안 뽑혀 나오죠. 

자, 정리 됐습니다. 일상은 뭐다? 일상의 문제점은 뭐냐 하면은 나의 죄, 잘못이 안 뽑혀 나오는 거예요. 왜? 일상은 자꾸 연대를 구성하기 때문에. 연대를 구성하거든요. 

학생이 공부는 안하고, 몇 년 전에, ‘안녕하세요’라는 프로그램이 있거든요, KBS2에. 공부는 안하고 맨날 농사만 짓는 애가 등장했어요. 공부는 안하고 농사만 지어요. 그래서 걱정 되가지고 이 사람 걱정된다, 근심된다 삐빅삑 누르는 데에 나왔던 그 애가 지금 고등학교 1학년이 되었어요. 농사 짓는데 그 ‘풀 뜯어 먹는 소리’라는 프로가 있어요, 요새 뜨는 송가인도 나오고 해요. 그러면 학생의 본분이 뭐에요? 농사에요, 공부에요? 공부죠. 그런데 공고를 갔는데 공부에는 관심 없고 농사짓고 유행가 노래 부르는 게 관심사가 되는 겁니다. 

처음에 그 학생이 나올 때에는 근심거리에요. 집, 이쪽의 연대가 뭐냐, 학생은 공부해야 된다는 연대란 말이죠. 그게 그들의 일상이에요. 그러면 공부 못하는 애는 죄인이 되어 버립니다. 문제아가 되어 버려요. 그런데 걔가 농사 너무 잘 짓거든요. 농사 잘 짓고 어른스럽고 하니까 그 쪽 연대에서는 죄가 날아가 버려요. 

그러면 인간은 가정에서 컸지만 커서 주로 어디 가겠습니까? 어떤 모임에 가고 어떤 그룹을 형성하고 어떤 연대를 형성하고 어떤 커뮤니티를 형성하겠어요? 자기 죄가 드러나는 데에 가겠습니까, 자기 죄가 감춰지는 데 가겠어요? 자기 죄가 감춰지는 데에 가겠죠. 그러니 일상이라는 것이, 그 연대, 어려운 말로 심급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그 연대들, 수천 수만의 연대들, 그 연대들이 모여서 일상생활, 또는 일상입니다. 이래도 일상이 문제점 없어요? 

자기 자신의 잘남을 위해서 살아가는 인간들이 교회 갔다. 그러면 교회가게 되면 죄를 알기 위해서 가겠어요? 나를 믿음 좋다고 알아주기를 위해서 가겠습니까? 자기 알아달라는 거예요. 또 힘들었으면 목사님이 위로를 해주고 격려를 해주고 희망과 용기를 부여하기를 원해요. ‘지금은 힘들겠지만 결국은 당신은 호강할 사람이다.’ 그런 것 사실 들으려면 교회 가지 말고 저 길바닥에 공원 근처에 가면 펴 놓고 부스 하나 만들어가지고 사주팔자 보는 데 있잖아요. 그런데 가면 거의 다 그런 이야기 해줘요. 조금 어려운데, 조금 어려운 것 같은데, 아 걱정하시지 마시라고. 3년 내에 펼 겁니다. 이런 거. 아저씨 안 만났으면 큰 일 날 뻔 했어요, 나 좌절할 뻔 했어요. 이래 가지고 용기 주고... 

그런 것을 하는데 약간의 형식을 갖추고, 고딕 건물, 빨간 벽돌로 지어 놓고, 성가대 마련해서... 그게 약간 확장된 거거든요. 점쟁이는 점쟁인데 약간 그럴싸한 점쟁이. 그리고 점쟁이는 개인이 들어갔지만 이건 연대를 이루니까. 예수 믿고 복 받는다는 그러한 연대를 이루었으니까 사람들은 일상의 연장으로서 교회 다니고 있는 겁니다. 내가 대단하다는 것을, 누가 대신 내 뜻을 다 해주기를 기대하는 것. 

그러나 그렇게 원하지만 실제로서의 오늘 본문에서 또는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은 일을 어떻게 합니까. 잃었다가 얻지 아니하면 성도 아니다. 이겁니다. 잃었다가 얻는 거예요. 누가복음 15장에 쭉 나오죠?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은 양 한 마리 잃어버린 것, 두 번째는 동전 잃어버린 것, 세 번째는 누굽니까? 자식 잃어버린 것 나오죠? 아버지에게 유산 받아 가지고 허랑방탕한 것. 

그러니까 16장 넘어 가면 제일 먼저 나오는 게 뭐냐 하면 불의한 청지기. 불의한 청지기. 불의한 건 맞아요. 그런데 세상의 어떤 누구보다 지혜로워요. 어찌 그런 일이...이제 아까 일상과 한 번 비교해 보세요. 일상생활 하는 사람들은 주인공이 누구다? 자기 자신이다. 그 자기 자신은 의미를 자기로부터 출발하죠. 그 의미는 뭐냐. 나 이렇게 대단한 것을 될 수 있는대로 많은 사람들이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 

가수들이 무대에서 노래 부를 때 보람은 뭡니까? 박수 치는 사람들이 많기를 바라는 거예요, 박수 치기를. 스페인의 프리메라리가 라든지 또 영국의 무슨 리그입니까? 그 축구 리그에 관중들 보세요. 어떤 사람이, 런던에 있는 사람이 인터뷰 하니까 축구는 우리의 종교입니다...우리는 종교가 없다 이 말이죠, 축구가 종교다... 수많은 관중들이 손흥민! 토트넘 3000억 주고 다른 데 뺏아가면 토트넘 나 탈퇴할 거야, 이런 거.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가 원하는 그 의미를 당신이 실제로 그라운드에서 보여 달라는 거예요. 내가 당신을 응원할 테니까 당신은 우리 응원에 부응해서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 달라는 거예요. 그 비싼 돈 내고 폴란드까지 가가지고 20세 이하 축구시합, 세네갈 축구 할 때 마지막 차는 것, 패널티 킥 할 때 한국 선수 한 골 넣고 저 쪽 상대방 세네갈 선수가 못 넣었을 때, 그 때 목이 강의할 때 목 쉰 거보다 더 심해요. 아아~ 무려 백 분 이상 조마조마 했어요. 

자, 그 때 관심사는 누굽니까. 제발 이겨다오. 제발 이겨다오. 노아웃에 세컨드 서드. 투수는 류현진. 야 여기서 1점대 떨어지면 안 되는데...2점 떨어지면 안 되는데...조마조마...드디어 다 한 점도 안내주고 그 회를 끝냈다. 와아~류현진! 류! 잘 한다 류!. LA 다저스의 그 수많은 관중들, 비싼 돈 내고, 5만원 인가...그 관중들 뭐 보러 갑니까? 사는 보람을 주러 가는 거예요. 

자, 우리는 교회 왜 가죠? 아까 이야기 한 것처럼, 아까 초밥...갑자기 제목을 초밥으로...접시에 초밥이 움직이잖아요? 나는 절대로 등신 같고 병신 같아가지고 나는 맨날 내 잘난 것만 생각하고 내가 주인공이라는 그것 밖에 모르기 때문에 뭔가 밑에서 접시를 받쳐 주지 않으면 우리는 목자한테 이 접시 없이는 갈 수 없는 거예요. 그러면 그 접시는 우리를 어디로 인도합니까? 우리로 하여금 자꾸 우리 자신을, 이렇게 잘나고 나한테 존경심을 표하라고 우기고 까불대고 으스대고 시건방진 우리를 무슨 자로 만들어버려요, 접시가? 잃어버린 자로 만드는 거예요. 잃어버린 자. 그걸 누가 하느냐, 그게 바로 성령님이 하시는 거예요, 성령님이. 

성령님이 할 일은 우리 자아를 찢어 버려요. 찢어 버립니다. 쭉 찢어 버려요. 찢는다는 말은 성령님이 아니면 통합되어 있다는 거예요, 우리 자아가. 그것도 괜찮은 걸로. 괜찮은 것은 통합되고 내가 못한 것은 뒤에 은밀하게 감추고. 그래서 항상 나는 이렇게 할 가치있는 존재고,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그만한 자격이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대외적으로 알리고 싶은 거예요. 

가수가 무대에 섰을 때, 가수의 보람은 뭐냐 하면 박수 소리예요. 물론 벌벌 떠는 사람도 있겠지만...그 박수소리에 혼이 나갈 정도에요. 그래 이 맛이야, 이 맛이야. 관중과 자기가 노래로 하나가 되는 거예요. 목사님의 꿈에 저를 봤다는데, 운동장에서 보고 또 어디서 봤다 했습니까? 체육관. 관중 몇 명이었습니까? 아, 많았어요? 슬슬 이제 은퇴할 때 됐는 모양이네요.

자꾸 예수 믿고 교회 갈 생각 하지 말고 내 힘으로 내 일상을 못 벗어나는 그렇게 무능한 무능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되요. 사도행전의 교회는 부서지는 교회입니다. 부서지게 한 것을 감사해야 되요. 멀쩡한 사람이 계속 살아 있으면 그 사람 중심으로 통합이 되어 버려요. 사도 바울 쫓겨 다니잖아요. 베드로 밉상 받지요. 스데반 집사는 죽지요. 꾸역꾸역 그런 식으로 교회가 되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어, 스데반 집사 죽네. 나도 가만히 있다가 같이 죽는 수도 있겠다. 나는 예수 믿지 말까’ 이러한 경우들이 발생 되어야 되요. 예수 믿고 잘 되는 경우 말고, 예수님 믿고 뭔가 내 소망과 틀어지는 경우들이 있어야 되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나를, 하다 보니 실수한 사람일지언정 아예 처음부터 잃어버린 자라고 간주하지는 않아요. 이거 상당히 어려운 말인데... 

사람이 자꾸 뭐가 있느냐 하면, 내가 평소에는 정상인데 이런이런 몇 가지가 잘못 됐다 이러고 싶어요. 대다수는 나는 괜찮은 존재고 사람이 완전할 수는 없으니까 죄 지었다. 하고 약간의 흠집 몇 개 더 갖다 붙이는 걸로 이해되는데 성경은 그게 아니고 통째로 이미 그 자체는 어떤 수를 써도 그 자체는 잃어버린 자에요. 따라서 천국의 생명나무에 근접할 수 없는 존재. 생명나무 있는 곳에 갈 수 없는 존재로 간주하고 시작합니다. 이걸 가지고 제가 아까 뭐라고 했냐 하면 인간의 시작은 삶이 아니고 죽음부터, 심판부터, 저주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그러면 심판부터, 저주부터 출발 할 때, 그 출발점이 각 사람마다 다를텐데, 너 다르고 나 다를텐데 그 출발점이 어떻게 하나로 모일 수 있느냐. 그 출발점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에요. 예수님의 죽음은 모든 목자한테 가야 할 사람의 잃어버림의 출발점이에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릴 때 무슨 고백을 했냐 하면,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그 다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나를 버리시나이까...하나님께 버림받은 예수님이에요. 하나님께 버림받은 예수님. 그 절차가 만약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성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라는 인식이, 곧 하나님께 이미 되돌려서 구원 받은 자에게만 그 인식이 있어요. 왜 그러냐 하면 성령님은 부활의 영이거든요. 부활에 참여된 자만 옛날에, 과거에 내가 어떠했음을 소급해서 알려주는 기능을 성령님이 하십니다. 

그런데 그 성령님이 하실 때 우리는, 성령이 오기 전에 육신에 있을 우리는 자꾸 일상에 빠져 있어요. 자꾸 통합을 하려고 하는 거예요. 통합은 하나의 전체를 괜찮은 존재로 구성해 가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 와서는 이렇게 구성하면 안되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되야 되요? 이걸 해체시키고 찢어야 되겠죠. 그 일을 성령이 하시는 거예요. 

10분 쉽시다.

 이하림 (IP:61.♡.247.43)19-06-20 07:16 
서울의존강의20190614b 베드로전서2장 25절(일상의 무능함)-이 근호 목사 

제가 첫 번째 시간에 목자에게 돌아온다고 했어요. 그러나 어떤 인간도 항상 자기로부터 자기에게로 돌아오면 그게 의미가 마감되기 때문에 내 잘났고 내가 이렇게 대단하다는 그 의미 말고 다른 의미는 더 이상 얻을 생각을 안 합니다. 

하나님 믿는다. 그러니까 내가 잘났지. 난 그림을 잘 그린다. 그러니까 내가 잘난거야. 헝가리에 유람선 빠졌는데 우리 아내만 살아 왔으니까 그래서 난 잘난거야. 항상 이 세상에 이런 경우 저런 경우 있더라도 어떤 경우 있더라도 관계 없어요. 전부 다 나는 잘난거야, 난 잘난거야. 20세 이하 월드컵에서 결승전 올라간 나라의 국민 된 것을 자랑스러워 합니다. 

항상 이 의미가 종결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염두에 둬야 되요. 그걸 두 자로 뭐라고 했습니까? 그걸 가지고 일상생활 또는 우리 일상, 이렇습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우리가 어디 간다는 게 성립이 안돼요. 내가 여기 있는데 누구한테 가요? 나한테 오면 되지.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은 뭡니까? 뭐든지 성경 말씀대로 되거든요. 우리 뜻대로 안되고. 지난 수요일 제가 그런 설교 했거든요. 예언이라고 하는 것은 본인이 원해서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갖다 붙여준 거예요. 주님의 뜻이라니까요. 주님의 뜻은 인간들이 지킬 수 있는 게 아니고 무조건 그렇게 인도해요. 그러니까 목자 되신 주님께 간다는 주님의 뜻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게 아니고 그 전에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주께서 해 내시는 겁니다. 주님의 열심이고 주님의 고집이지요. 또 자기 숙제이기도 하고. 

그러면 우리가 가려면 인간으로 가는 게 아닙니다. 뭐로 가야 되냐면 양으로 가야 되요, 양으로. 김 양, 이 양 하잖아요. 양이 되어서 가는 거예요. 그래야 그 분이 목자 되니까. 그  양과 목자의 관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 전부다 자기가 목자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양과 목자는 어디서 내려와야 되냐면 위에서부터 내려오고 그 상황을, 그 시스템을 몰고 오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말씀의 완성을 향하여 말씀을 끌고 내려오기 때문에 그 말씀 안에서 이 땅에 없는 구조, 말씀 안에만 있는 구조가 뭐냐, 양과 목자, 목자와 양과의 관계에요. 

여러분 잘 아시는 시편 23편 있잖아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 다음에 뭐라고 되있죠?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 거예요. 내게 부족함이 없다. 왜? 내 때문입니까 내 곁에 계신 목자 때문입니까? 시편 23편에 분명히 이야기 했잖아요. 우리 목자 때문에 내게 부족함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의미가, 내가 부족함이 없기 위해서 내가 목자를 이용한 게 아니고, 인간은 자기가 목자라니까요. 그런데 목자가 자기가 아니고 따로 계시다는 말은 자기는 목자를 위해서 존재하는 무엇일 뿐이다? 양이 돼야 되지요.  

그러면 양이 되는 방법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의미 사슬, 의미 구조가 깨어지고 주님에 의해서 가져온 주님이 내려오실 때 배후에, 후광에 같이 가지고 온 시스템이 있어요. 그 시스템 안에만 뭐가 되냐면 목자-양, 양-목자 그 구조가 거기 있는 겁니다. 

우리 아는 이야기 합시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 빈 손으로 내려왔습니까, 어떤 시스템을 갖고 내려왔어요? 어떤 구조가 있지요? 하늘나라 구조 있잖아요. 모세가 시내산에서 계시받은 내용 속에 뭐가 있냐하면 바로 제사법 들어있죠. 그리고 친히 양쪽에 뭘 들고 왔습니까? 돌판 들고 왔지요. 그 다음에 언약궤 어떻게 만든다 구조 다 있고 성막 크게 만드는 구조, 하늘나라 세 번 네 번 가가지고 다 들어 왔잖아요, 

그게 시스템이에요. 무슨 시스템? 하늘나라 시스템이에요. 그 시스템의 목적은 뭐냐하면 이거에요. 하나님과 인간이 ,with, 함께 한다.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하는 걸 가지고 두자로 성전이라 합니다, 성전. 여기서 말하는 인간이란 새 인간을 이야기하겠죠. 
         
그러면 새 인간 하기 전에, 하나님과 인간할 때, 인간의 대표자로 하나님과 함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자가 누구죠?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자, 시효, 첫 번째 분, 누굽니까?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 그래서 예수의 이름은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예수의 이름, 네 자로 돼있죠? 두 자로 예수고 이름을 네 자로 풀면 ‘임마누엘’. 임마누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에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오셔야 우리와 함께 있다면 그 전에 유대인들이, 바리새인들이 아무리 하나님과 함께 있으려고 제사 지내고 성전 섬기고 해도 그것은 함께 있음이다, 있음 아니다? 있음이 아니죠. 오늘날 교인들이 돈 내가지고 예배당 짓고 예배 드리고 파이프 오르간, 성가대 백날 해봐야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 있음이 아니죠. 함께 있음은 뭐냐하면 예수님과 아버지가 함께 있는, 그러한 관계 속에서만 함께 있음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아버지가 함께 있을 때 새 언약, 내 피와 내 살, 새 언약으로 함께 있었잖아요. 그러면 사마리아 여인이 하나님과 함께 있을 경우에는 어떤 원리가 거기다 작용했습니까? 사마리아 여인.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예배를 드리려 할 때에 사마리아 여인 속에 예수님이 뭘 집어넣었지요? 뭐 마약입니까, 뭘 집어넣었어요? 끊임없이 나오는 생수의 우물을, 생수의 샘을, 영생의 샘을 사람 속에다가 집어넣은 거예요. 

입에 대고 뿍 불면, 입에 대면 삑 소리나는 거 그런 과자나 문방구에 파는 그런 위험한 장난감 있잖아요. 애가 만약에 그걸 삼켰다 칩시다. 나쁜 짓 할 때마다 삑 소리 나는 거예요, 이 안에. 이물질이 들었다는 거예요, 뭔가. 낯선 게 들어있는 거예요, 낯선 게.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신령과 진정으로, 성령으로 예배드릴 때가 오나니, 그렇게 했죠? 그게 뭐냐면 성령이 우리 육신을 자기의 터전으로 삼고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이 있는 곳을 고린도 전서 3장 또는 고린도 후서 6장에 보면 그걸 성전이라고 합니다. 성령이 있으면 성전 되요. 

고린도 후서 6장에 보면 성령이 임하면 성전이에요. 6장 16절,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 고린도 전서 3장에 보면 마찬가지로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지 못한다. (3장 16절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절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성전이 들어있는 거예요. 우리 육신을 성전이 장악하고 있다 이 말이죠. 삑-하고 소리 나듯이. 

그러면 성령은 그냥 오시는 겁니까, 어떤 사건 이후에 오시는 거예요? 어떤 사건 이후에 성령이 오시는 거예요? 십자가 사건이죠. 그러면 성령이 있는 사람은 삐-소리 내면 무슨 소리가 나오냐 하면 십자가의 최종적인 마감된 내 존재가 의미의 마감이 아니라 십자가가 모든 최종적인 의미가 되어 버려요. 쉽게 말해서 십자가만 자랑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성령만 자랑한다고 성전 되는 게 아니고 성령 자체가 자기 자신을 양보해요. 누구한테? 예수님한테 양보한다고요. 

성령은요, 예수님이 알려 준거, 예수님이 하실 일만 증거해요. 십자가만 자랑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십자가만 자랑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라이벌 되는 것들이 이제 옆에 붙어지는 거예요. 자, 1번 류현진 10승 달성하고 싶은 거, 아직 9승 밖에 못했으니까. 20세 월드컵에서 한국 우승하는 거, 그 다음에 제가 이렇게 얘기하면 어떤 아주머니는 치, 뭐 그 축구, 나 축구도 안 좋아하는데, 야구 할 줄도 모르는데. 이럴 거예요. 그러면 아주머니 애 서울 법대 들어가는 거, 이런 거. 갑자기 아-피죠. 피고. 그리고 갑자기 보험 한 10억 타는 거. 얼굴이 갑자기 아픈 게 다 나아버렸어. 확 피어버렸어. 누가 죽으면서 유산 한 76억 남겨 주는 이런 거. 확- 폈죠? 

갑자기, 의미가 십자가로 마감될 의미가, 십자가로 마감되는 게 아니고 여기에 뭐가 가려져 들어가 버립니까? ‘나 이정도야’가 가려져 버리는 거예요. ‘나 무시하지 마. 나 하나님이 이 정도로 축복했어.’ 그게 뭘 가려버려요? 십자가를 가려버리죠. 

자, 십자가는 누구 이야기다?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나는 누구 이야기냐? 내 이야기에요. 예수님의 적은 누굽니까? 나죠. 그러니까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이죠. 주님이 알거든요. 예수님을 가리는 것은 누구다? 바로 니가, 모든 각 개인이 예수님을 가려버리는 겁니다. 

이라는 것은 거기서 개인의 특성을 용납하지 않는 시스템이에요, 원리가. 양이라는 것은 목자가 등장함으로써 양이 성립되요. 성립되는데... 양 설명하기에는 요한복음 10장만큼 멋진 게, 자세하고 확실한 게 없어요, 성경에서 양 이야기 할 때. 아까 시편 23편 이야기했지만 아주 더 신약적으로 구체적인 것은, 내용이 깊어지는 것은 요한복음 10장입니다. 잘 들어보세요. 

양은 없어요, 이 땅에 양은 없습니다. 내가 있지 양은 없어요, 양은. 없는데 목자가 오면서 내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목자가 필요한 것은 양이 필요한 거예요.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양이 되는 게 필요한 게 아니고 내 요구나 내 소원 때문에 내가 양 된거 아니고... 우리의 모든 의미는요, 나에게 종결돼요. 

천국 가도 내가 가야지 남이 가면 싫어요. 그리고 천국 가도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천국 같이 오게 되면 천국 피해서 지옥으로 도망 칠거야, 아마. 고유정이라는 사람이 전남편이 죽어서, 그럴 리 없겠지만 만약에 천국 갔다 칩시다. 자기가 36살 때까지 못살고 여자 잘못 만나가지고, 여자가 죽여가지고 시체도 없이 그냥 영혼이 천국 갔다 칩시다. 천국 가 있는데 얼마 후에 고유정이라는 여자도 죽어서 내가 있는 데까지 같이 따라서 천국 와 버릴 때 천국 가서 무슨 이야기 하겠습니까? 니 내 죽였지?하고 멱살쥐고 또 부부싸움 할거에요, 천국 가서? 

이런 일 있으면 안되잖아요. 그런데 교회에서 뭐냐 하면 우리가 예수 믿으면 내가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내가 구원받는 게 아니고 양의 보편성이 구원받아요. 양의 일반성, 양의 보편성. 그러니까 접시가, 초밥을 이동하는 접시가 구원받아요. 그럼 우리는 초밥 접시에 담기면 우리가 구원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접시는 예수님의 피가 묻어 있어요. 따라서 그 피에 의하면 우리는 죽은 자가 됩니다. 죽은 자는 계시할 게 없어요, 계시할 게. 우리가 혼자 죽으면 그건 자살하는 게 되거나 하면 그건 아무 의미 없어요. 주님과 함께 죽어야 되요. 

한번 정리해 봅시다. 주님이 목자가 되심으로써 주님과 연계해서 양이 생긴다 했지요. 양은 없습니다. 주님과 연계해서 양이 되요. 우리 안에 생수가 들어온 거, 그건 예수님이 오시고 난 뒤에 있는 것이지 없을 때 아, 생수가 되게 하옵소서 이런 건 없습니다. 주님이 와서 벌어진 일이에요. 주님의 주님됨을 의미해서. 

다시 말해서 모든 의미가 주님한테로 마감되기 위해서. 우물의 영원한 영생의 물이, 그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의 증인되기 위해서 주께서 오신 거예요. 주님이 오셨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양도 마찬가지에요. 그렇잖아요? 양 되고 싶어 양 되는 게 아니거든요. 목자가 원한다고 우리가, 양이 원한다고 목자가 원한다고 오는 게 아닙니다. 목자가 있어야 양이라는 게 성립이 된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오셔가지고 말씀을 다 이뤘다 했으니까 그러면 예수님께서 무슨 모집에 나서겠습니까? 자기 자신을 목자로 간주한다면 양이냐 아니냐의 결정권은 누가 가지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가지고 있죠. 그러면 우리는 집구석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죠. 그냥 예, 뭐 와야죠. 성령이 와야 양이 되야 되죠. 될 때 우리는 그냥 기다릴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몇 년을 기다려야 됩니까?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죽은 자한테는 몇 년이 소용없습니다. 그러니까 죽은 채로 있는 인간에게는 몇 년 하는 게 성립이 안돼요. 한 몇 년 더기다릴까? 그러면 아직 지가 살아있다는 뜻이에요. 

우리가 예수 믿고 새로워야 됩니다, 이렇게 하죠. 보통 교회에서 그리 얘기하잖아요. 예수 믿고는 새사람 되세요, 새로워야 합니다, 한다 이 말이죠. 그럼 질문을 한 번 해보세요. ‘목사님 하루에 몇 번 새로워야 됩니까? 몇 번? 뭐 한번만? 이른번에 일곱 번만 새로우면 됩니까? 5년 전에 새로움하고 뭐 그거 백신 맞은거 5년째 계속 울궈 먹으면 되겠어요?’ 

1년에 부활절 몇 번이죠? 부활절은 한번이죠. 그러면 예수님은 몇 번 부활하십니까? 1년에. 이게 말이 안 되는게 예수님이 몇 번 부활하는 게 어디 있어요? 살아계신 분보고...몇번이라는 게 성립이 안돼죠. 주님한테는 모든 시간이 종결된 거예요. 시작도 끝도 종결된 겁니다. 

제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양이 되려면 우리가 잃어버린 자가 되어야 되요, 잃어버린 자.  왜그러냐 하면...어렵더라도 좀 참으시기 바랍니다. 양의 정보를, 양의 정보칩이 있다면 그 정보가 뭐냐, 예수님의 이 땅에 와서의 활동성이 거기에 칩으로 들어있어요. 그러면 예수님이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했지요. 예수님이 아버지한테 잃어버렸죠. 잃어버린 지 사흘 만에 잃어버린 그 아들을 어떻게 합니까? 되찾았죠. 그 정보가 담겨있는 것을 양이라고 해요, 담겨있는 거. 

그러면 하루에 몇 번 그걸 발휘하면 됩니까, 몇 번? 그건 성립이 안돼죠. 그걸 성경용어로 그럽니다. ‘무시로’ 무시로. 시도때도 없이 잠복되어있는 그 현상, 잠복되어있는 그 속성으로 인하여, 뽀글뽀글 그 유황물, 노란 유황물이 가스로 올라오듯이 적절한 때에 뽀글뽀글 늘 올라오게 되어 있어요. 우리의 잃어버림과 우리의 되찾음이. 

제가 말하는 뜻이 잘 이해가 안 되시는 것 같은데 한 번 더 쉽게 하겠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걱정이 되는 때가 언제냐면 생활이 갑자기 불편함이 왔을 때 걱정이 되요, 불편함이 왔을 때. 멀쩡한 다리가 부러졌다든지 보일러가 안돌아간다든지 선풍기가 고장난다든지 이런거. 

그러면 아 짜증나 오늘 바쁜데 또...기사 언제 불러야 되고 부르면 집에 누가 있어야 되는데 이런 거요. 선풍기가 또는 냉장고가 고장났다 그러면 누가 기사를 불러야 되지 않습니까 냉장고를 들고 갈수는 없으니까. 시간 맞춰서 삼성 냉장고 서비스센터에 전화하게 되면 또 얼마나 친절한지 ‘고객님 고객님한테 하는 건 다 녹음이 됩니다’ 목소리 해가지고 ‘그 동네 활동하고 있는 서비스 직원이랑 연락드려서 시간 맞춰드리겠습니다. 몇시에’ 그렇게 되거든요. 그럼 집이라도 좀 치워야 되고 안방까진 안들어가더라도, 이거 고쳐야되잖아요. 이게 얼마나 불편해요. 

자 불편할 때 그날 소원이 뭡니까? 그리스도의 영광입니까 뭡니까? 십자가 알기입니까 뭡니까? 냉장고 정상 돌아가기거든요. 그러니 인간은 불편함만 있으면 그것이 다시 원상회복 하게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겁니다. 이게 계속 루틴, 반복되는 거예요. 그러면 아무 불편함이 없을 때가 있잖아요. 아무 불편함이 없을 때가 없어요. 

인간은 새로운 불편함이 없으면 그다음은 욕심이 또 생긴다니까요, 욕심이. 아이고 갸들 좀 잘 있나 요새는 아이 데리고 오지도 않고 전화오지도 않네, 전화 한번 해볼까 또. 안사돈이랑 해가지고...야 뭐하노 집에, 빨리 가끔 손자 좀 보여줘 애 크나 이런 식으로 한다고요. 남의 바쁜 스케쥴을 또 공격을 해대죠. 왜 전화했는데? 손녀 보고싶다. 자 여기서 새로운 불편함이 생겼어요. 손녀가 보고싶은 거예요. 그러면 그전엔 왜 손녀가 안보고 싶었냐? 그 전엔 일한다고, 지금 자기 일에 바빠가지고 손녀가 와도 귀찮아. 와도 너희 집에 가라 빨리. 자기 한가하니까 손녀가 보고싶고 지 바쁘면 누가 오면 저 사람은 연락도 없이 왜왔나 나 지금 한참 바쁜데 귀찮아하고. 너무 오지마라하고. 여자가 시집가서 자주 오는 것도 안좋다 이래가지고. 

누구 중심이에요 전부다? 세상 내 중심으로 흘러가는 거예요, 내 중심으로. 그것도 수시로, 수시로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은 늘 불편하고 이런 것을, 짜증나고 스트레스 받는 것을 뭔가 해소를 시켜야 되요. 그 해소방법이 뭐냐? 바로 류현진이고 축구인 겁니다. 남자들은 그걸로 잊어버려요. 또 나쁜 여자들은 도박이고 나쁜 짓해가지고 주부들끼리 모여가지고 화투치고...안그러면 노래방에 가 노래 부르고, 나이트클럽에 가 지루박 한 번 춤추고 곗돈 모아가지고 안그러면 또 건전하게 헝가리 가 빠져죽고...다음에 어디갈고. 살아남은 사람들 헝가리 안가고 또 다른데 스페인갈 거예요. 또 죽겠나 이제 물가에 가지말자 이러고. 

이게 뭐냐면 인간의 내부 속에 이유도 없이 즐겨야 한다는 명령이 자꾸 솟아 나와요. 세상이 안정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세상이 반듯한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너는 계속 쾌락해야 되고 너는 계속 즐겨야 된다. 나는 즐기는 것을 원할 수밖에 없어. 이게 인간의 타고난 운명인데 어떻할 겁니까, 운명인데. 배고플 때는 밥만 있으면 만족하죠. 불편함이 해소됐죠. 잠잘 때 없으면 자기 집 있으면, 아파트 넚은 데 있으면 해소됐습니다. 

그러면 밥먹을 때 있고 잠잘 때 있고 옷 입었으면 그걸로 더는 소원 없다 이래 됩니까? 넓은 집 한50평 사가지고 거기서 막 뒹굴면서 옛날 지하방 생각이 나면서 눈물이 난다 해가지고 굴러봐야 6개월 그걸로 그만 만족합니까? 끊임없이 우리는 끊임없이 뭐가 더 즐기는 거 더 즐거운 거 계속 즐거운 걸 찾는 거예요. 

그러면 그 즐거워야 한다는 그 괴물이 우리 속에 왜 들어있습니까? 본인은 몰라요. 왜 들어있는지도 몰라요. 누가 언제 집어넣은 것도 몰라요. 그 즐거움은 뭐냐면 나한테 의미를, 내가 즐거워야 돼요. 그럼 내가 안 즐겁더라도 누가 연예인 하나가 이혼을 해주든지 마약을 해줘야 돼. 그래줘야 마약 안한 내 자신이 즐겁고 이혼안한 내가 흐믓하게 잘살고 있다고 착각들을 하는 거예요. 

이런 굴곡, 내 갖고 있는 내 즐기는 것을, 대신 내 속에 카타르시스 해줄 것을 원해서 영화나 드라마 같은 것이 있는 겁니다. 드라마 있어가지고 ‘아 나는 이상하게 잘생긴 남자하고 결혼하고 싶어 너무 이쁜 여자하고 결혼하고 싶어.’ 걱정 마세요, 티비 틀면 나옵니다! ‘나는 일찍 결혼해서...삼십대쯤 해서 연애 원없이 하고 싶어’ 하면 걱정 마세요, 틀면 나옵니다! 서른여섯살 먹은 애하고 스물여섯살 먹은 애하고 연애하는 게 나와요. 더블유더블유더블유 하는 드라마 tvN에 보면 나옵니다. 스무살 애가 매달리고 서른살 애가 튕기는 그런 대목도 나와요. 여자는 뭐 아주 책임자에요. 월급도 많고 집도 잘살아요. 우리가 원하는 것은  거기서 다 해줘요. 

그리고 세상적으로 자기가 즐긴다 하잖아요. 성경에서는 이렇게 표현하지 않습니다. 뭐라고 하느냐면 그것을 ‘자기 의’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게 어디 나오냐 하면 로마서 10장에 나옵니다. 로마서 10장 한번 찾아 볼께요. 얼마나 우리가 멀미 날 정도로 울렁거리는지. 로마서 10장 6절부터 보면 제가 그냥 읽을께요 시간관계상. 

6절,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7절 혹은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가 분주하게 올라갔다 내려갔다 할 필요 없이 이미 주님께서 올라가신 분이고 이미 주님께서 음부에 내려가신 분이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의는, 그 분의 율법의 마침은 그분의 의로서 더 이상 율법 앞에서 우리가 죄라고, 죄인이라고 할 수 없다 이 말이거든요. 모든 마감이 되요, 율법의 마침이 된다 이 말이죠. 그 예수님의 의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말씀이 너희 가까이 있다는 말이죠. 그 말씀 안에 주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우리에게 안겨 준거에요. 

그러면 우리는 뭐냐? 우리 안에 사마리아 여인처럼 그리스도의 의의 우물이 있는 겁니다. 이거는 시간이 없어요. 늘 반복해서 계속 하나님의 의가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의가 의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서 십자가의 사건이 반복되잖아요. 그러면 십자가 사건에서 부정적인 역할, 원수의 역할을 하는 게 누굽니까? 인간의 바로 육체성 아닙니까? 즐기는 거잖아요, 인간의 육체가. 

예수님도 좋지만 난 이상하게 뭔가 즐기고 싶어. 뭐 시원한 거 뭐 맛있는 거 없나 맛집 없나? 계속해서 맛집 보고도 또 다른 맛집 냉면 먹고 싶다 해서 냉면 어제 먹었고 오늘은 삼계탕 맨날 바뀌어 맨날 바뀌어. 삼계탕 10번 하면 다시 냉면. 이 도대체 뺑뺑이 돌아 뺑뺑이. 이거했다가 저거했다가 저거했다가 맨날 하는 것을 그대로 유행처럼 맨날 돌고 돌고에요 그냥, 즐기는 거. 

돈을 왜 버느냐? 즐기기 위해서. 삼십대 아가씨들이 돈이 없어. 기껏해야 300만원, 500만원 밖에 없어요. 왜 기껏 남은 돈이 왜 한달 월급밖에 안되느냐? 다 그 돈 어디 썼는가? 좀 했다 하면 연차내가지고 배낭 메고 이태리 저쪽에 애인 찾아가기. 혹시나 우연을 가장한 나의 사람, 운명적인 사랑을 찾아서 또 돌아다니는 거예요. 스페인 가서 또 갈 데 없어가지고 누굽니까 그 유해진 하는 식당 하는데 가가지고 일주일에 십일만원 하는 그 식당 가가지고 얻어먹고 오고. 

전부 프로가 허영심 떠는데 그 허영심이라고 하지 마세요. 전부다 그게 자기도 자기 마음대로에요. 뭔가 즐길 거리를 찾아야 뭔가 사는 느낌을 가질 수 있어요. 집구석 아이 보고 손녀보고 해가지고 매일같이 집구석 치우고...도대체 못 살겠다 해가지고 돈모아 가지고 동남아나 가자 동남아 가가지고 또 댕기열이나 걸려 와가지고. 

주님께서 일을 어떻게 하시냐하면, 우리가 즐겨야한다는 이것, 이 장소에다가 주님의 십자가를 집어넣습니다. 이건 폭탄이에요. 한번 정리해봅시다. 우리가 만드는 보편성, 일상이라 하는 것은 사실은 그 속에 일상을 가동시키는 엔진같은 알 수 없는 욕망이 계속 샘솟듯이 솟아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서, 사마리아 여인은 계속해서 뭘 길러 옵니까? 물 길러 와요. 육신의 허점이에요, 끊임없이. 물 먹는다고 사는 게 아니에요. 사는 건 아니지만 그 물을 먹어야 살 것 같애. 즐기고 싶은데 현실은 뭡니까, 물 길러 오면서 뭘 느낍니까? 고통을 느끼는 거예요. 인간은 즐기고 싶은데 즐기려면 고통스럽고. 내부적으로 상반된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에서는 해결이 안 돼죠. 인간의 보편성이란 이런 거예요. 여자 10명 해놓고 당신은 미인입니까? 물어보면 예. 당신은? 예. 전부다 10명 다 자기가 미인이라고 하죠. 미인대회 나왔으니까 미인이겠죠. 그게 바로 보편성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심사위원은 몇 명 뽑습니까? 진선미. 진은 몇 명이에요? 1명 뽑죠. 그러면 나머지 9명은 뭡니까? 거짓말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본인은 거짓말입니까, 진심이에요? 본인은 진심인데 딱 한명만 뽑으면 나머지는 그 사람에 비해서 못생긴 사람이 되는 거예요. 

보편성이라는 것은 그저 하나의 임시적 가설천막, 가설무대. 그냥 그때그때마다 치웠다가 없어지는 이벤트 행사할 때 있잖아요. 의자 쫙 해놓고 다음에 가면 의자 다 하나도 없죠. 맨날 나의 세계를 위해서 내가 만든 그 멋있는 꽃다발 같은 거 가상적으로 내 사는 영역을 아름답게 꾸미지만 아이 갑자기 아프다든지 돈이 갑자기 없다든지 돈을 잃어버렸다든지 지갑을 잃어버리면 갑자기 그 환상은 지갑을 잃어버린다는 예측 못한, 예상 못한 새로운 돌발 요건으로 해서 한꺼번에 꿈은 다 허물어져 버려요. 

그런 위험과 그런 불안과 협박에 우리는 늘상 시달리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야기하셨습니다. ‘먹는 거 입는 거로 족한 줄 알라.’ 예. 말로는 예 하죠, 아멘 하죠. 먹는 거 입는 걸로 족한다면 사실은 그런 악마의 협박에 공갈에 넘어갈 이유가 없는데, 내 속에 내 아닌 내가 내 아닌 그 무엇이 나로 하여금 먹는 거 입는 거로 족하지 않게 만들기 때문에 우리는 그때부터 악마의 협박을 받는 거예요. 계속해서 당하는 거예요. 

우리의 일상이 이렇게 고뇌와 슬픔과 좌절과 걱정 근심으로 계속해서 이어지는 이유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협박과 공갈을 늘 받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나를 추스를 수 없다 이 말이에요. 나는 내 힘대로 독자적으로 살고 싶은데 그걸 방해하는 어떤 요소가 내안에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첫째시간의 이야기를 다시 해봅시다. 

오늘 본문에서 양이 된다는 것은 무엇이 있다는 말입니까? 목자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양은 뭐로 삽니까? 양으로 사는 게 아니에요. 내가 양됨의 기쁨으로 사는 게 아닙니다. 목자 있음에, 목자 있음을 증거하라고, 확인하라고 양이 있는 거예요. 양은 하나의 보조라니까요. 양이 독자적으로 끊어서 양됨을, 대단함을 이렇게 하면 안 돼요. 

여러분 자기 구원받은 게 기뻐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기쁩니까? 어느 게 기뻐요? 정답은 뭡니까? 사도바울처럼 뭘 자랑해야 되요? 십자가만 자랑해야 되잖아요. 그러나 실제로 보면 십자가 믿고 구원받은 나를 자랑한다니까요. 또 하나의 나의 즐거움이 되어 버렸어요. 

그래서 십자가 믿고 구원은 받았는데 되게 심심해. 그 때 느꼈던 감정은 벌써 시효 떨어져 가지고 예수 믿은 지 5년 됐기 때문에 벌써 그 맛 갔어. 이제는 별로 좋아지지도 않고 복음도 별로 안 좋아져. 뭐 손 들었을 때 뿐이지 갑자기 팔이 아픈지 손 내리고 난 뒤에 일주일도 안 되가지고 십자가도 별로 시큰둥해. 그거는 십자가를 믿은 게 아니고 내 자신의 구원받음을, 나 자신의 일상처럼 내가 나한테 내 즐거움을 내가 만족시켰다고 착각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양이 되려면 반드시 무슨 과정을 거친다? 잃어버리는 과정을 거쳐야 되요. 그래서 불의한 청지기나 탕자의 비유가 얼마나 적절한 지 여러분 아시겠지요? 탕자는 집나갈 때 자기 자신이 주인공이에요. 아버지 없이 살아보겠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 비유 들으실 때 왜 들었겠어요? 벌써 인간들은 그것밖에 모른다는 거예요. 그러면 결국 탕자 이야기 한 것은 내가 아는 사는 방식 말고 내가 모르는 사는 방식이 따로 있음을 깨닫는 과정이 바로 탕자 비유입니다. 

자, 우리의 사는 방식은 연대에서 배웠어요. 우리 집안에서 배웠습니다. 니가 잘되고 니가 남한테 칭찬받고 박수 받는 이게 사는 보람이라고 주위의 부모도 그렇게 가르쳤고 나도 그렇게 같이 동감했어요. 니 의사가 되게 되면 남들이 부러워하고 니가 원하는 여자 골라서 갖게 될 것이다. 그것도 못생긴 여자 고른다는 말이 아니죠. 미인 중의 미인들을 니가 원하는 대로 고를 수 있는 그런 혼처자리가, 중매자리가 많이 들어올 것이다. 부모가 그 말한다는 것은 뭔 뜻입니까? 니나 내나 사는 방식이 다를거 없어, 똑같애. 잖아요. 사람은 자기 즐거움을 위해서 남이 존재하는 식으로, 살아간다는 그 점에 대해서 너도 동의하고 나도 동의하지? 동의안하려면 다른 방식을 이야기해봐. 없지? 없으면 동의해. 내가 즐거운 것이 곧 아름다운 세상이고 뷰티플 세상이다. 그거라는 거예요. 

자 예를 들어봅시다. 성경에 다윗 이야기 나오죠. 다윗이 암몬하고 전쟁할 때 다윗은 전쟁터에 안 나갔습니다. 평평한 지붕위에 거닐었어요. 암몬 전쟁은 누가 하냐 요압 밑에 있는 우리아 장군과 요압 장군이 열심히 암몬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아름다운 여인이 목욕하고 있다는 거예요. 

성경이야기가 어려운 것이 전쟁과 뭣과 결부시킵니까? 뷰티플, 아름다움과 결부시켜요. 자,  바깥전쟁은 힘에 의한 전쟁이에요. 승자와 패자가 뚜렷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런데 내부 전쟁, 아름다운 여자를 내가 차지하겠다는 그 전쟁은 자기가 미처 몰랐던 자기의 내부 전쟁을 반영해 주는 겁니다. 

만약에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보지 못했다 칩시다. 밧세바가 목욕을 저희 집 안에서 했고 바깥에는 안 나왔다고 남이 안보는 데서 했다 칩시다. 목욕했는지 안했는지 모른다 칩시다. 그러면 바깥 미세먼지 없는 공기 그냥 구경했을 거예요. 그렇게 되면 자기 자신을 알까요, 모를까요? 모르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전쟁을 왜 일으킵니까? 암몬과의 전쟁을 왜 일으켰어요? 그 전쟁이 있어줘야 누가 죽어요? 우리아 장군이 죽어줘야 ‘아, 내 왕이라는 위치가 사람을 살리는 위치가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속한 사람을 죽이는 자리가, 내가 왕의 자리로 있구나’하는 그 사실을, 만약에 전쟁이, 밧세바가 없었으면 몰랐을 거예요. 

여러분, 누구십니까? 후야유? 여러분 누구십니까? 우리는 일상생활은 연대에서 남들이 이야기하는 그것이 나라고 소개하겠죠. 암몬에서 승리했다. 다시 말해서 나는 공부 잘한다 이거랑 똑같은 거예요. 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9급 지방직 공무원, 내일 참 9급 지방직공무원 시험친다, 9급 공무원 시험에서 합격되면 이거는 많은 적을 물리친 거예요, 50대1이 넘으니까. 내 하나되기 위해서 49명이 내한테 진거에요. 옴매 기살아, 저기는 옴매 기죽어 되겠죠. 니 또 재수해라 이래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나는 뭐가 되요? 내가 패배한 걸 즐길까요? 내가 합격한 걸 즐길까요? 나는 내 합격한 거 즐기는 거예요. 하나님의 의가 전혀 없죠, 들어올 틈이 없죠. 

자 강의 다시 합시다. 우리의 목자가 뭔가요? 목자가 우리에게 오는데 그 때 우리는 우리가 아니고 양이 된다는 목표 하에 우리를 찾아와요. 그런데 양이 되어버리면 나라는게, 단독적인 나는 없어요. 목자를 위해서 존재하는 양일 뿐이지 양이 따로 내가 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면 목자가 오기 전까지는 우리는 무슨 전쟁을 해야 되요? 가짜인 나와 진짜 하나님이 원하는 나의 싸움이 있어야 되는데 다윗은 무슨 싸움을 했습니까? 자기 내부의 싸움을 하는 게 아니고 바깥 싸움을 했다니까요. ‘나 이스라엘 왕이야. 내 밑에 모압 장군 싸움 잘해. 이번 전쟁은 아마 이길 걸.’ 그렇게 끝나면 이스라엘은 ‘옴매 나는 이스라엘 왕으로써 또 승리했네. 주님이 축복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께 감사하면 자기는 그게 왕으로써의 승리라고 여겼죠. 

그런데 하나님은 바깥 전쟁할 때 뷰티플, 영어로 아름다움, 아름다운 여인을 보게 했습니다. 자, 본격적인 이스라엘 왕의 지위가, 저 힘으로 된 전쟁의 승리입니까 아니면 자기가 죄인됨을 아는 겁니까? 어느 것이 이스라엘 왕이 해야 될 일입니까? 

질문 다시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진 것이 우리 죄를 위함이죠. 아니면 우리의 잘남을 위함입니까? 우리의 못남이죠. 그러면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은 뭔 뜻이에요? 나는 천국 가는데 병신이라는 말이죠. 나는 접시 없이는 움직이지 못하는 초밥에 지나지 않는다. 

주님의 하시는 언약적 전쟁은, 다윗 언약의 전쟁은 바깥전쟁이 아닙니다. 무슨 전쟁? 내 내부의 전쟁이에요, 내부의 전쟁. 그럼 내부의 전쟁을 할 때 ‘주여 믿습니다.’ 이러면 안 돼요. 내가 누군지를 분명히 보여줘야 돼요. 내가 얼마나 내 즐거움에 도취되고 나는 쉬지 않고 내 욕구를 만족하고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그런 사고방식에 철저한가를, 철저하게 그것이 내가 알아지는 경우와 사건들이 닥쳐져야 되요. 

그 사건 바로 뷰티플, 아름다운 우먼, 여인을 뒤쪽에서 본 겁니다. 뒤만 아름다운 줄 알았는데 앞을 보니 더 아름답네. 주체 못하죠. 아름다운데 아름다움을 누가 이깁니까. 내 내부가 즐기라는 것에, 니가 즐긴 것을 니가 니 소유하라는 이 명령을 어떻게 우리가 거역합니까? 거역할 방법 없어요. 억누른다고요? 내일되면 그게 없어집니까? 내일 되면 두 배로 튕기는데...억누른다고요? 한 달 되면 더 갖고 싶을걸요. 뭐 주님께서 전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절제한다고 이길 전쟁을, 그런 식으로 전쟁을 안 하죠. 

결국 다윗은 밧세바와 동침을 했고. 자, 거기서 재밌는 것은 이것은 가쉽거린데 과연 밧세바가 반항했을까요? 옴매 왕비가 될 찬스네 이랬겠어요, 아니 되옵나이다 뭐 이랬겠어요? 합의에 의한 관계냐 아니면 겁탈이냐 이 말입니다. 높은 지위를 이용한, 갑자기 후보 생각난다. 대통령 충청도 대전 시장입니까? 높은 지위에 의한 강요 아닌 것처럼 강요해서 비서를 그냥 성으로 갖고 놀았는지 안 그러면 마누라 쫓아내고 내가 저 자리 차지해가지고 내가 나중에 대통령 영부인 되려고 했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모르죠. 

성경에서는 밧세바가 동의했는지 그것은 안 나타나요. 이거는 아니에요. 내가 남편 보기에 부끄러워 은장도 꺼내서 자결 하지는 않았어요. ‘어이구, 웬 떡이여’ 뭐 이랬든 어째든 간에, 하고 우리아를 불러냅니다. 그리고 우리아를 최전선에 보내버리죠. 최전선에 보낸다는 말은 가장 죽일 수 있는 확률이 높은 곳에 보내서 남편을 죽여 버렸습니다. 그게 고유정이 전남편을 죽인 거예요. 지금 자기 행복을 위해서. 

자, 다윗이 왜 죽였냐하면 자기 행복을 위해서. 최소한의 행복을 위해서 나의 희생을 줄이고, 남이 희생되든 말든 내 희생만 줄이면 나는 성공했다는 거예요. 내 본 모습은 즐기는 데 지장이 없다는 거예요.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찾아와서 뭐라고 합니까? 양이 많은 부자가, 자기 종이 양이 하나밖에 없어서 맨날 그 양만 빨고 양만 안고 사는 그 양을 뺏어가지고 그 양을 잡아 죽여 버렸을 때에 그 주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을 때 다윗이 ‘내가 통치하는 이 나라에 그런 놈이 있다니 내가 이스라엘 왕으로서 용납치 아니하리라.’ 이렇게 했거든요. 

그럴 때 나단이 뭐라고 했습니까? 니다 니, 너야. 반말했는지 안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가 당신입니다.’ 할 때에 이 전쟁은, 결국 그 바깥에 있는 암몬과의 전쟁은 누구와 연루되어 있어요? 이스라엘 왕은 뭐냐는 거예요. 도대체 이스라엘 왕은 뭐냐. 

십자가, 죄로 말미암아, 십자가 죽어야 할 자리를, 초밥 얹는 그 접시의 실체를 보여준 자리가 이스라엘 자리에요. 우리는 죽어 마땅하다는 거예요. 지옥가야 마땅함을, 어디에서 보여주지 못한 그것을 다윗은 보여줍니다. 

이것은 내가 그 여자를 겁탈한 게 죄가 아니고 나는 처음부터 뭐로 태어났다? 처음부터 잠복되어 있었다. 여자를 차지하고 그 남편을 죽이는 것은 잠복된 죄가 때가 되매, 하나님의 계시가 되매, 계기가 되매 터져나온 거죠. 그러니까 다윗은 뻔뻔스러운 거예요. 세상적 의미에서. 세상 사람들은 약점은 어떻게 한다? 감추고 뭐만 내놓는다? 장점을 내놓는데 다윗은 성신받고 난 뒤에, 나단한테 지적받고 난 뒤에 반대가 됐죠. 

주께서 원하는 것은 장점이 아니고 상한 심령이라는 거예요. 이게 바로 십자가를 자랑하는 복음입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복음은 주님과 우리가 상호작용 가운데서 그 틈 사이에서 나오는 거예요. 십자가 줬다 이게 복음이 아니라 십자가 줌으로써 나의 반응 있잖아요, 반응과 결부해서 복음이 형성됩니다, 복음이 형성되요. 

나는 천국 가는데 장애자다. 제목을 아까 뭐라 했노, ‘일상’, 고쳐야 되겠다, ‘천국의 장애자’. 천국에 대해서, 그냥 천국의 장애자. 우리는 천국 못가는 사람입니다. 무능자에요, 천국 못가요. 있어도 못가고...우리가 생각하는 건 가짜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뭘 만들고? 못가는 이유를 만들어요. 

예수님이 왕이잖아요. 이스라엘 왕의 자리가 무슨 자리였다? 죄를 죄 되게 노출 시키는 자리죠. 그 죄의 자리에 누굴 집어넣어요? 우리로 하여금 탕자로써 그 자리에 집어넣습니다. 집어넣으면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그런 경험, 바람피우고 살인하고 그런 거 안해도 이미 우리는 그 죄의 잠복성, 잠재성을 지니고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그 사람은 그런 죽일 계기가 있었고 우리는 그런 기회가 안와서 못 죽인 거예요. 

우리는 내 즐거움을 위해서 내 즐거움에 방해되는 것은 꼭 칼 들고 죽이지 않더라도 밉다, 나가라, 꺼져라 하는 식으로 마음속으로 미움이 생겨나게 되어 있어요. 연애하다가 왜 헤어집니까? 친구 사이에 왜 헤어집니까? 십 년 잘해주면 뭐합니까, 한 순간에 못해주면 십년 치 한 거 전부다 헛방인데...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백날 해도 설교시간에 말 한번 잘못했는데 또 그걸 오해해가지고 미워하고 하죠. 

양의 특징은, 양이 아닌 사람은 자신이 노력한 걸 제시해요. 나 이정도 가치있게 노력하니까 나를 가치있게 봐달라는 겁니다. 그러나 양의 특징은 목자가 하신 일에 내가 참여했음을 증거합니다. 주님이 하신 일이 뭡니까? 잃어버렸다가 얻었죠. 십자가 죽었다가 부활했잖아요. 그러면 십자가 죽음부터, 죽음에 우리가 같이 끼어가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자세로 갑니까? 우리는 죽어 마땅함으로 가는 거죠. 

그러니 양의 특징은 뭐냐 하면, 내 속에 예수님의 행하신 일로 하여금 양이 될 수 없고 천국 갈 수 없는 우리가, 주께서 지금도 양으로 되게 하셔서 예수님만 증거 하도록, 너는 내게 속한 양이라고 세상에 증거 하도록, 우리에게 새로운, 내가 모르는 새로운 이 세상 사는 방식을 성도만이, 양만이 노출시킬 수가 있습니다.  가끔은, 자주 자주, 가끔은.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사람들과 저희들의 차이점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옵소서. 세상은 자기 즐거우면 그만이지만 저희는 목자가 죄로 인하여 죽으신 그 사건을 우리를 통해서 삶을 통해서 현실화시키고 그걸 전개한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이제는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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