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강의20191107b 베드로전서3장 16절(선입견 공략)-이 근호 목사
그리스도 안에서는 죄가 없는데 내가 이게 죄가 아닐까 하는 순간, 없던 죄가 추가적으로 생산되는 거예요. 죄가 없는데 아, 이거 죄일거야 하는 순간 죄가 죄책감에 확 다가오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주님께서는 뭐냐 하면 죄를 유발하는 그 중심이 바로 너라는 말이죠. 주님 안에서는 죄가 없어요. 없는데 본인이 걱정되는 거예요. 본인이 왜 걱정되느냐 하면 죄가 무엇인가 궁금한 게 아니고 혹시 죄짓게 되면 이틀, 사흘 뒤에나 앞으로의 일, 내가 벌여 놓은 일에, 나한테 손실을 줄까봐 싶어서 겁을 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손실이 문제가 아니고 내가 죄가 뭐냐 하는 순간 내 것, 내 영역을 따로 챙겼다는 이게 죄가 되는 거예요. 내 것이 없어도 되는데. 그리고 다 주님 거거든요. 주님 것이다 이 말이죠. 마음이라 하는 것은 이미 자기가 살아오면서 누적된 거거든요.
그러면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의 마음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이 주신 거잖아요. 내 마음이 아닌 거예요. 예수님이 주신 마음 아닙니까? 예수님이 주신 마음에는 죄냐 의냐 하는 것을 이미 넘어선 생명나무 세상에서 제공된 마음인 거예요. 죄가 있을 리가 없지요. 왜냐하면 죄 씻고 난 뒤에 주신 마음이기 때문에 그 안에는 ‘죄가 없다 의밖에 없어’ 하는 그 내용만 줬는데, 그렇게 받고 난 뒤에는, 주님께서 너 죄 없다 할 때에는 결국 무엇을 포기하라는 말이에요? 나만의 영역, 나만의 개인적인 세계 자체가 무의미하다. 의미없음을 네가 인식하라는 이야기거든요. 이게 무슨 마음이냐 하면 선한 마음이에요.
마음이 선하다는 말은, 이 선은 누가 가져다 주는 선이냐 하면 우리가 선하게 해서 선이 아니고 주님이 우리 만날 때 주님의 선함이 여기에 온 선함이에요. 그래서 이 선함에는 뭐가 없습니까? 일말의, 조금의 악도 이미 해결된 거예요. 해소된 마음이에요, 그 마음이. 그런데 그 마음을 가지는 순간 이미 그게 악한 마음이 된다니까요.
이 선한 마음은 우리가 가질 이유가 없어요. 주시는 것이지 우리가 달라 해서 주는 게 아니거든요. 왜냐면 우리가 달라해 버리면 내 영역이 또 따로 형성이 되어 있어야 한다 이 말이죠, 형성이. 아까 저한테 빵 주셨잖아요. 나는 빵 대신 짬뽕 주세요. 이게 성립이 됩니까, 안됩니까? 이게 중국집도 아니고 갑자기 짬뽕을 왜 찾아요? 이 말은 주는 대로 먹어라, 인간아. 주는 대로 먹어야 돼요. 주는 대로 먹으란 말은 내가 뭘 먹고 싶다는 것을 주최측에서 완전 개무시해버렸다는 거예요.
주님은 우리를 몰라요? 우리를 알아요. 교도소 안에 있는, 감옥소 안에 있는 인간이 어떤 줄 알거든요. 자기를 뭐로 봅니까? 선한 인간이라고 까불락대잖아요. 강남강의에서 했잖아요. 아직 까불이 안잡혔다고. 공효진 불쌍해 죽겠어, 아직 까불이 안잡혀가지고. 우리는 지금 까불까불대는 거예요, 지금. 라이터 놓고 사료해서 흔적만 남기는데 누가 죽인지 몰라요, 하여튼. 언젠가는 잡히겠지.
이미 우리는 잡혔어. 우리가 감사한 것이 까불대다가 우리가 까불이라고 이미 체포됐어. 체포됐기 때문에 용서를 해주시는 거예요. 네가 앞으로 잘할 가능성 있다, 없다? 없어요. 주님 보시기에 없는데 왜 우리한테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 우리가 가능성을 둡니까? 잘할 거라고. 잘될거야. 뭘 잘돼, 잘되기는? 뭘 잘돼요? 잘될 구석이 있어야 잘되죠, 까불인데. 나밖에 모르는데 뭘 잘돼요? 이런 인간을 세상에 보냈으니까 주변의 까불이들이 고난을 안주겠어요? 주죠.
성도라는 이유 때문에 우리는 이 땅에서 핍박을 받는 것을 감사하세요. 선악이라는 그 논리구조를 넘어서버렸다니까요. 생명나무 영역에서 선악을 보고 있는 입장이에요. 그래, 내가 참 저기에 시달렸지.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 모든 말씀은 결국 무엇의 공격이냐 하면 나의 선입견에 대한 공격이에요. 선입견을 문제 삼습니다. 저 사람은 교도소 가야 돼,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 또는 내가 이런 행동 하는 것은 참 나쁜 것이다 할 때 주님께서 하는 말이, 내가 의롭다고 하는 건데 네가 뭔데 나서서 그걸 죄 있다 하느냐 네 몸, 네 마음이 네 거 아닌데, 나는 너를 의로운 몸이라고 간주했는데 너는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엉뚱한 기준을 가지고 와가지고 그걸 악하다, 나쁜 짓했다, 죄인이다라는 말을 왜 하냐 이 말이죠. 그건 네 선입견 자체가 주님의 의견을 지금 모독하는 행동이 되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도라고 하면서도 고난 받기를 기피하는 이유가 뭐냐? 그 이유는 간단해요. 나같이 착한 사람, 고난 받는 게 아니고 상을 받아야지 하고 피해버리는 거예요. 예를 들면 교회에서 전기공사를 하는데, 재료값만 주고 공사를 하는데 한 사람은 열심히 붙들고 공사해요. 그런데 다른 사람은 나는 힘들어 안할래 도망쳤다고 합시다. 자, 도망친다는 것은 현장에서 피한 거죠. 현장에서 왜 피한 겁니까? 이유는 간단해요. 힘드니까. 힘드니까 피한 거예요.
아까 악마 유혹의 3종 세트 이야기했죠? 뭐가 필요하다? 인간은 밥심으로 살아간다. 지극히 상식적이고 누가 들어도 옳은 거죠. 그 다음에 인간은 건강하고 싶다. 세 번째는 세상으로부터 나는 이쁨받고 사랑받고 싶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은 곧 뭐냐 하면 보험이다. 누가 나를 보호해줬으면 좋겠어, 지켜주고. 관심 가져주고 내가 힘들 때 도와주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라고 생각하죠.
아가씨들이 남자를 원하는 이유는 보디가드, 충실한 보디가드 하나 얻기 위해서 결혼하는 거예요. 내가 어려울 때, 심심할 때 말동무해주고 내가 울고 싶을 때는 위로해주고 기쁨이 있을 때는 같이 나누고 그런 것을 여자 입장에서는 짝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남자 입장에서는 뭐냐 하면 빨래해주고 밥해주고. 말 잘 듣고 남편 시키는대로 하고 밥해주고 빨래해주고. 밥도 그냥 해주는 게 아니라 맛있게 반찬해서 주고 남편이 무슨 짓을 해도 잔소리 안하고 호응해주고.
그런 여자? 없습니까? 없습니다. 무슨 그런 여자 있겠어요. 그런 남자 있습니까? 없어요. 없을 수밖에 없죠. 전부다 개인의 사적 자기 욕망이 있기 때문에. 사적 욕망이란 자기 과거가 누적된 거거든요. 그러니까 내 과거 누적된 것과 네 과거 누적된 것이 만났으니까 제대로 합치될 수가 없죠. 기껏 하는 게 정치적인 협상, 타협 그런 겁니다.
자, 이렇게 되는데 고난 받는다는 말은 이 세 가지 중에서 어느 것 하나가 손실이 난다는 뜻이잖아요. 전기공사 하는데 힘들다. 왜? 건강이 힘들다, 나 빠질래. 피했죠? 고난을 피했잖아요. 왜 피합니까? 바로 뭘 지키기 위해서? 나만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서. 내가 생각한 나의 세계를 그냥 유지하기 위해서 하는 거죠. 그럼 왜 유지하느냐 물어보면 나는 원래부터 착하기 때문에. 이 안에서는 항상 나는 착한 존재가 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양심으로 고난 받는다는 말이 우리 인간의 행함으로 달성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지금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제가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첫 시간 끝부분에 이렇게 했죠. 공격적으로 나가라 했죠.
뭐냐 하면 사람이 자꾸 피해버리면 자기가 착한 사람 돼요. 그런데 공격적으로 나와 버리면 노출되어 버리죠. 그러면 주위에서 네 행동은 나쁜 행동이야, 너 저래서는 안돼 라고 공격이 오겠죠. 오히려 죄인이라는 소리를 들으므로 말미암아 내가 과연 어느 선입관에 의해서, 주님의 선입관과 내 선입관 어느 것에 나는 지금 마음을 갖고 있느냐가 드러나는 기회가 되는 거예요. 주위로부터 포화를 받고 주위로부터 잔소리를 들어가고...
그러니 공격적이라는 말은 나 착해, 그건 실수였어. 자꾸 비실비실 도망치지 말고, ‘그 때 그 일은 내가 어떻게 하고 싶었네. 안하게 되면 후회할 것 같아서 했어’ 이렇게 공격적으로 나오라 이 말이죠. 나오게 되면 주변에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16절 다시 읽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하여금 그 비방하는 일이 뭐가 된다? 부끄러움을 당하는 거예요.
저 사람은 진짜 때려죽일 사람이다 라고 욕했는데 주님이 나서서 뭐라고 합니까?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한 여자를 현장에 데려와서 돌로 쳐죽이려고 하기 직전에 주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들 가운데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했죠? 그들이 그 소리 듣고 떳떳할 것 같으면 그 자리에서 돌 던졌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말씀 하는 것은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에요.
밧세바라는 사람 아시죠? 밧세바. 밧세바가 다윗한테 당해가지고 복받았어요. 다윗한테 안당했으면 지옥갈 거예요. 밧세바가 자기 이해를 넘어서서, 다윗이 남편이니까 누구까지 이해가 됩니까? 남편의 세계까지 이해가 된 거예요, 남편의 세계까지. 밧세바가 우리아 죽였다고 삐져가지고 따로 삽니까, 어떻게 삽니까? 전남편 죽고 난 뒤에 전남편한테 너무 미안해가지고 같이 수절하거나 따라 산위에 가서 뛰어내리고 투신자살하고 이랬습니까? 전남편 우리아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으로? 사랑같은 소리 하고 있어요. 현남편은 왕인데? 죽은 놈은 죽은 놈이고 팔자 고쳐야지. 옛날 남편은 이미 없어요. 주위에서 뭐라고 했겠습니까? 수절해라, 이 과부야. 그래, 니 남편을 죽인 원수와 결혼하나? 진짜 니는 나쁜 여자다. 뭐 그런 소리하겠죠? 거기에 대해서 당당하다 이 말입니다, 밧세바가. 당당한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마리아가 임신하고 난 뒤에 요셉 있잖아요, 요셉이 가만히 끊고자 할 때에, 그 요셉이 얼마나 사람이 신사적입니까? 자기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 만나서 임신을 했는데... 그 동안 가방 사줬지, 옷 사줬지 철따라. 그게 아까워서 데이트폭력도 할 만한데 사람이 얼마나 침착하고 양심적인지 그냥 문자로 보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왕 임신한 거 할 수 있나. 그래, 니 좋아하는 남자 있는 모양인데 우리 여기서 조용히 헤어지자, 내 문제 삼지 않을게. 이렇게 나온 거예요. 이렇게 나오나 폭력적으로 나오나 마리아하고 떨어지겠다는 생각은 한결같잖아요.
그런데 능히 누가 개입했느냐? 바로 하늘의 천사가 와서 개입해버립니다. 요새 말로 하면 예수님이 개입한 것과 똑같아요. 예수님이 개입해 보니까 내가 알았던 이 선입관이 얼마나 허술한 선입관인지. 내 잘못된 판단 때문에 내 아내 임신한 것에 대해서, 기존에 내가 알던 것을 다 주워 모아서 너는 나쁜 여자라고 규정했던 그 규정, 그 죄와 의에 대한 규정 자체, 죄, 선, 악에 대한 규정 자체가 이게 바로 죄가 되고 악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거예요. 누가 누굴 욕해요? 다같은 수용자 입장에서, 다같이 교도소에서 지금 지내고 있는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왜 모든 인간을 죄 아래 가두어 두었습니까? 왜 죄라는 감옥에 집어 넣었습니까? 어느 하나 문제없는 인간 없고 어느 하나 제대로 된 인간, 아무도 없다는 이야기에요, 어느 인간 하나. 다 문제 있는 거예요. 그럼 누가 옳은 사람이에요? 그런 문제점을 용감하게 드러내는 사람이죠.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 말이죠.
문제는 지금 교회라고 하면서 너무 조심스럽게 살아가고 있어요. 죄 지으면 하나님의 거룩이 손상되고 영광에 이르지 않고. 에이, 그게 더 영광에 이르지 않아, 그게. 그게 더 미워.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그게 뭐냐 하면 피하기에요, 피하기. 그걸 대구강의에서 꾀부리기, 요령 부리기. 교회 50년 다녔으면 50년 다니는 동안 배운 것은 뭐냐? 요령 부리는 것밖에 안 배웠어요, 요령. 변명거리를 만드는 요령. 어쩔 수 없었습니다. 라고 핑계대는 요령.
나 원래 죄인입니다. 라는 말을, 주님 보시기에 죄인입니다 라는 말을 하지를 못하고 벌벌 떠는 그것이 뭐냐 하면 어릴 때부터 교육을, 교도소에 있는 엄마로부터 태어나가지고 교도소 교육을 받아가지고 엄마가 나보고 착한 사람이래. 평생 지워지지 않는...나 착한 사람이래.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어느 엄마가 너는 나쁜 딸이라고 얘기할 엄마가 누가 있겠어요? 긍정적 마인드를 심어 준다고.
진짜 할머니들이 애 키우지도 못해. 뭐든 좀이라도 해로운 거, 밀가루도 못 먹이고...먹일 게 없어, 먹일 게 없어, 전부 다. 아토피 생긴다고 다 빼가지고. 인터넷 찾아봐가지고요, 새싹보리부터 해서 온갖 거 오메가3, 좋다는 거, 애들한테 필요한 거...그것도 모르고 엄마가 키우다가 몰래 애 엄마 없을 때, 먹어라 초콜렛, 사탕 막 먹이고...아이는 좋다고 할머니 최고. 영문도 모르고 아들은 니가 왜 할머니 최고지? 아들은 몰라, 할머니 최고. 해로운 거 다 먹여놓으니까 할머니 최고죠.
소위 진짜 자식이나 모든 걸 최고로 키우겠다는 그거, 그렇게 되면 이건 수비형이 돼요, 공격형이 되지 않고. 자꾸 변명의 꼬리가 길어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잘해보려고 하는데 상황이 그런 걸 봐주세요. 아주 비겁하게 나서는 겁니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물됨, 감사됨이 나올 수 있는 근거를 본인 쪽에서 철회시키는 겁니다.
자, 그러면 공격적으로 자기가 죄됨을 드러내야 되는데 이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위에서 내려와야 되겠죠. 그 내려오신 분이 있습니다. 성경 한 번 찾아볼까요? 요한복음 3장 27절,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세례요한의 관심사는 하늘에서 주신 것에 관심이 있어요. 아, 진짜 선지자 맞죠, 예? 사람들의 관심사는, 밥심과 건강과 사랑은 내 노력에 따라서 얻었다 이러잖아요. 하늘에서 주신 게 아니고. 자기가 쪼다 안되려고. 내가 착한 인간이니 착한 값을 한다고. 착해서 성실해서 돈 벌었고 건강하고 그 다음 사랑받을만 해서 사랑받는다 우기잖아요.
그러나 세례요한은 그렇게 봅니까, 안봅니까? 하늘에서 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 완전히 대비적이죠, 대조적이죠? 그 세례요한, 세례요한이 하늘에서 왔을 때 세례요한의 몸 자체가 새로운 선입견, 새로운 규정을 갖고 온 거예요. 그래서 마태복음 3장에 보면 세례요한이 굉장히 공격적입니다, 용감해요. 옷차림도 남달라요. 옷차림은 뭐 한독모피입었어. 광야에서 모피입고,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가죽이 양가죽인지 소가죽인지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 이게 상당히 돌발적이죠? 교도소에 갇혀 있는 그러한 균질성,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냥 평범하게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것과는 다른 튀는 옷차림이죠? 형식만 그럴까요, 아니면 내용도 그럴까요?
여기서, 아 참 어려운데, 세례요한의 인간성을 문제삼지 맙시다. 인간성은 빠져요. 세례요한이 있다면, 거기서 형식+내용이라면 형식은 아까 봤잖아요? 튀는 복장에다가 튀는 생활을 했다, 광야에서 생활했다고. 내용은 뭐냐? 이것은 하늘에서 주신 거죠. 중간에 뭐가 빠졌어요? 세례요한의 인간됨. 이거는 빠져요, 이건 빠진다고요. 그래서 이 말은 뭐냐? 나는 죽고 내 안에서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산다와 똑같은 원리에요. 나는 챙길 게 없다니까요. 챙길 필요도 없고 챙길 이유도 없고.
내가 지금 주에게 받은 사명이 있는데 사명 앞에 나라는 인간은 무슨 가치가 있겠어요? 주님의 선함은 딱 한가지 밖에 없어요. 복음에 지장되지 않도록 해라, 이거 아닙니까? 복음에 지장되지 않도록! 네가 무슨 짓을 해도 관계없는데 복음을 복음답게 드러내라. 그러면 복음이 복음답게 드러나려면 우리는 뭐가 됩니까? 죄인이 죄인답게 굴어야죠. 뭘 죄를 피해서 도망쳐요? 누구 좋으라고. 무엇이 허물어지는데? 복음이 허물어지는데. 복음이 허물어지면 주님께서 가만 두지 않습니다. 여우 피했더니 범 만난 꼴 되지요.
지금 천국과 지옥을 가름하는 기준은 십자가 복음뿐이에요. 교회 천 명 모이고 예배당 평수가 몇 평이고 그런 데에 여러분 속아서 가지 마세요. 그건 교도소입니다. 충현 교도소, 충현 교회, 영락 교도소, 소망 교도소. 교도소장 바뀌었다고 난리고 교도소장 연금 많이 받는다고 난리고. 연세 교도소, 또 세습 때문에 말썽났던 데 뭡니까? 명성 교도소. 그들의 형식은 종교적 형식인데 내용은 어디서 가져온 겁니까? 전부다 그 형식과 내용은 전부다 세상에서 가져온 거잖아요, 세상에서.
그걸 어떻게 장담합니까? 그 교인들이 개인의 잘남을 포기를 못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교회 괜찮다, 나 괜찮다, 우리 가정 괜찮다. 교회 왔으면 세례요한이 되어야 하는데 세례요한이 되는 게 아니고 여전히 연속적으로 이 ‘착한 나’가 교회 다녔다는 그걸로 인하여 착함에다가 더 강화된 거예요.
그리고 강화되었기 때문에 고난 받는 것하고는 점점 더 내가 상관이 없을 걸? 내 인생 이제는 편하게, 평탄하게 갈 걸? 이제 꽃길만 걸을 걸? 이렇게 나오고 있다 이 말이죠. 왜? 기도를 많이 하니까. 기도한 애씀과 그 축복을 물물교환하려고 하는 거예요. 거래한 거죠. 기도 많이 했으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옵소서. 상거래하고 있는 거예요, 상거래. 하나님을 상대로요. 그래서 누구 좋으라고? 자기 밥심과 건강과 사랑. 자기 칭찬받는 거. 그런 거를 목표로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마귀의 밥이죠. 악마가 얼마나 좋아하겠어요. 자기가 시킨 것만 기억하고 있으니까. 악마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만 기억하고 살거든요. 인간의 선입관이 뭐냐 하면 악마를 이길 선입관은 하나도 없고 악마에게 질 수 있는 선입관들로만 가득 무장되어 있어요.
여러분, 제가 글 쓸 테니까 이게 누구의 구호인지 한 번 보세요. ‘차카게 살자’ 이거 누구 구호입니까? 조폭구호 아닙니까? 착하게 사는 인간이 목욕탕에 문신하고 와요? 남한테 피해주고, 문신해서 겁주고. 그 인간들이 ‘차카게 살자’나 영락교도소라든지 명성, 새문안 교도소라든지 ‘착하게 살자’나 차이점이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세례요한 보세요. 반대로 나갑니다. 성경을 제대로 한번 보세요. 내가 착하다고 보면 절대로 이게 안보인다니까요, 이게. 성경을 백독을 해도 안보여요. 나는 망해야 되는데 왜 구원받지? 이상하네. 이런 마음으로 봐야 되는데. 나는 지옥가야 되는데 주께서 나한테 무슨 짓을 했지? 그런 식으로 봐야 돼요. 보니까 이게 개인적인 자질이나 그런 것을 아예, 주께서는 아예 묻지도 않아요.
시험칠 때 이름도 쓰지 말래요. 주님이 자기 싸인을 해서 천국 보냈기 때문에 주님 싸인에다가 네 이름 쓰면 주님 싸인이 죽어요. 주님 이름이 죽는다고.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어요. 주님 싸인으로 합격이에요. 그런데 거기다가 그거 지우고 왜 ‘차카게 살자’ 이걸, 착한 나를 왜 거기에 씁니까? 목사님, 칭찬해주세요. 저 착해서 건강해요. 우리 집안이 돈 번 것은 다 내가 기도 많이 해서 그런 거예요. 이걸 거기다가, 주의 이름에다가 왜 그걸 씁니까? 그 피흘림에다가, 그 위에다가 왜 베껴 쓰느냐는 말이죠. 성도는 고난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고난 받는 걸 자꾸 고생이라 여기지 마시고 바로 악마가 나의 가치를 계속 깔짝깔짝 건드리는 거예요. 너 오늘 살면서 나쁜 짓 몇 번 했어? 자꾸. 나쁜 짓 자체가 나쁜 짓 되는 순간이거든요. 그거 생각안하면 나쁜 짓은 없는데, 아이고 그래 맞아 내가 성도답지 못하게 그런 행동을 하다니. 그러니 그 자체가 이미 주님의 싸인을 모독하고 있는 거예요. 생명나무에서 짜낸 피로 와서 썼다고요. 그런데 인간은 거기다가 지가 선악과 따먹은 지식으로 도배를 해버리면 그건 뭐냐 하면 예수님을 핍박하는 일밖에 안되잖아요.
그러면 목사님, 뻔뻔스럽게 살라는 말입니까? 하는데 주님께서 수시로 우리로 하여금 뻔뻔했다가 자기 단도리하다가 이걸 반복시킵니다. 아까 그랬죠? 의도적으로, 지금 상황에서는 내가 버틸 수 있는데 막상 갑작스럽게 새로운 상황이 터져 버리면, 이건 내가 죄지어서 그래, 맞아 요새 내가 기도를 안해서 이런 일이 터져버렸네. 다시 한 번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하셔요. 왜냐하면 모든 구원의 경로에 대해서 내가 조심스럽게 주의 말씀을 경청했다는 그 공로를 빼기 위해서. 내가 침착하고 착실한 덕분에 나는 계속 구원, 구원, 구원을 유지했다. 이 정도로 난 대단해. 라는 그것을 없애기 위해서 우리는 매일 실수투성이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이건 세례요한도 예외가 아니에요. 예수님 증거해 놓고 뒤늦게 뭐합니까? 뒷북치죠. 오실 분이 당신입니까? 이러고 있다고요. 그 말은 세례요한의 그 행함이 세례요한을 구원하는 게 아니고 그 약하고 결핍된 세례요한을 위하여 십자가 지는 거예요. 십자가 안질만큼 깨끗하고 괜찮은 존재는 이 세상에 아예 없다는 겁니다.
아직까지 오늘 본문 안들어갔는데 세례요한 이야기하고 오늘 본문 해야 돼요. 그 본문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뭐가 어려우냐 하면 “그리스도께서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이 대목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제가 세례요한을 경유하는 겁니다. 자, 세례요한 이야기 해봅시다. 마태복음 3장에서 세례요한이 그렇게 형식은 튀는 복장, 내용은 자기 것이 없고. 그러면 사람들이 야, 세례요한 니는 잘났어, 잘났어. 이렇게 하겠죠? 니가 나하고 다른 게 뭐가 있는데? 이렇게 하죠. 여러분들이 만약에 어떤 친구나 가까운 사람에게 복음 전할 때 꼭 그런 시선을 받게 되죠. 그게 바로 세례요한이 받는 고난이에요.
고난이라 하는 것은 반대세력과 마주침이 있어줘야 됩니다. 복음 전하는데 아이고 훌륭하다 뭐 잘한다 이런 소리만 듣는 게 아니에요. 사실은 인사치레로 듣더라도 속으로 그래, 잘났다 이 인간아. 이렇게 속으로 욕을 하고 있는 순간이에요, 그 사람들이. 듣고 있으면서도. 노골적으로 욕하면 착한 인간이 나쁜 인간 소리 들을까봐 그걸 또 계산해가지고 항상 눈을 이렇게 이쁘게, 하회탈처럼 이렇게 해가지고 아이고, 복음을 아네, 나는 그걸 왜 몰랐을까? 이렇게 하면서 뒤에서 욕하고 있다고. 사람이 복음에 호응하면 믿는 사람 아닙니다. 그거 수상한 사람이에요. 이중인격자될 가능성이 많아요. 거기에 속아 넘어가면 안됩니다. 좀 핍박 좀 해줘야 아, 이거 믿을 가능성이 있겠다. 이런 생각 해야 되지 갑자기 호응해버리면 많이 수상해요. 아 이거 완전히 나를 엿먹이는구나 복음의 가치를 모독하고 있는 거구나.
자, 그 다음에 세례요한을 보면 그 때 누가 옵니까? 마태복음 3장 7절에,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먼저 공격하려고 나서죠. 피하지 않고. 권력자가 오는구나, 내가 말조심해야지. 이런 것 없죠? 그걸 선방이라고 합니다. 오늘 제목을 선방. 선방 날리는 거예요. 선빵 날리는 겁니다. “독사의 새끼들아” 날려요. 그 독사를 개로 바꾸면 적절하게 의미가 있어요.
이 얼마나 나올 수도 없는 말이 성경에 나와요. 그러니까 언론이 감옥소죠. 자체적으로 검열하잖아요. 성경은 그런 검열 없습니다. 그냥 날려버려요. 검열 누가 하는데요? 하나님이 말씀하는데 무슨 검열. 검열할 자격자가 누가 있습니까? 역사검열은 주님 쪽에서 해요. 유다민족이 역사를 검열해요. 이번 에스더 교재에 벌써 나왔습니다. 막간에 수련회 홍보하고. 백날 해야 오지도 않는데 뭐. 안가기로 작심을 한 모양이죠, 아예.
뭐냐 하면 "독사의 새끼들아" 날리죠. 너무 과한 이야기 아닙니까? 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얼마나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들이에요? 어른이에요. 그 사회의 어른입니다. 막가는 깡패들 아니에요. 개, 독사하고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고 기어이 독사 안되려고, 개 안되려고 누구보다 노력했던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세례요한은 아예 선방을 날립니다. 독사의 새끼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저쪽에서 뭐라고 합니까? 너는? 그렇게 하겠죠?
그래서 세례요한은 말합니다. 나보고 뭐라 하지 마. 나는 소리다. 아니 스피커보고 따지면 안되잖아. 가수가 마이크 쥐고 하면 마이크보고 욕하면 안되지. 가수가 노래 부르면 가수보고 나가라고 해야지, 마이크보고 ‘마이크야, 나가라’ 이게 말이 되겠어요? 그러니까 세례요한은 마이크로 사용되는 거예요. 얼마나 베짱 편한 인생입니까? 사명 받았다는 것이 그렇게 힘든 게 아니에요. 나는 마이크다. 이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나는 마이크다. 복음의, 죄의 증인이고 의의 증인이고 하늘나라 증인이고 참된 교회의 증인이고 주님의 증인이다. 나는 마이크니까. 그렇게 하면 되거든요.
전에 내 설교에 그런 게 있지만 권투 체육관에 샌드백이 있단 말이죠. 출연자들이 샌드백 막 치잖아요. 애들이 여기에 무슨 스티커를 붙여뒀습니다. 탐정 스티커를 붙였든 뭐 껌도 있을 거고 막 치면 스티커가 아프다 하면 안돼요. 왜냐면 스티커는 폭이 얇으니까, 딱 붙어 있으니까. 지금 스티커를 공격하는 게 아니라 샌드백을 공격하잖아요. 예수님이 예언하기를, 제자들아, 세상이 너를 미워하거든 자꾸 나를 미워한다고 오해하지 마. 그렇게 되면 나름ㄷ로 폭이 이만큼 되면 이 스티커가 벽돌이 되고 완전 덩치가 되니까 딱 갖다 붙어있어야 되죠. 아예 습자지처럼.
나의 것이 없어야 돼요. 나를 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칠 때 그게 뭐냐 하면, 죄란 주님의 복음됨을 거스르는게 죄고 의란 주님 복음 증거하는 게 의죠. 나는 내 개인적인 자질이나 성격 같은 것은 상관없고요. 지난 강남강의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주님께서는 자질을 보고 구원하는 게 아니라고요. 주신 성령을 회수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게 주의 일이 되기 때문에 인간을 배제하거든요. 어른들 하는 일에 끼어들면 안돼요. 어른들 고스톱 칠때 아이들이 끼어들면 배제시키잖아요.
우리는 배제당해도 괜찮아요. 우리는 그 정도로 무의미합니다. 자꾸 무의미한 나를 의미를 가중시키지 마세요. 그래놓고 고민 있다고 상담하고 그러지 마세요. 우리는 고민 있는 것도 사치인 줄 알아야 돼요. 고민 있다는 자체가 좀 수상하기도 하고. 어째든 간에 세례요한이 전한 복음은 내 입장이 아니고 주님의 입장만 전한다. 너희들 보기에 너희들이 훌륭하지. 그런 네 선입관 자체가 잘못됐어, 독사의 자식들아. 이제는 독사의 자식이라는 선입관으로 바꿔. 이게 주의 명령이야. 나는 마이크이니까 나보고 따지지 말고. 나 스피커니까 따지지 말고.
그 다음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희들이 회개해?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여기지 말라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뭐되게 한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일을 전할 때 나는 완료시점에서 전하고 있는데 너희들은 아직도 완료가 뭔지를 까마득히 모르고 완료에 대해서 받아들이지도 않고 우리가 뭔가 최선을 다해보자는 식으로 나왔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아무리 최선을 다해봤자 다시 말해서 이 돌들이 사람 되는 절차에 대해서 너희들이 설명해봐라, 설명할 수 있는가. 나는 설명하는데 너는 설명되는가 한 번 봐라. 안되죠. 백날 해봐야 돌이 사람되는, 아브라함 자손되는 그 원리에 대해서. 출제를 한 거예요, 세례요한이. 물론 자기 뜻이 아니고 주의 뜻이죠.
할 때 바리새인이 인간을 인간 만드려고 개조했지 인간도 아닌 돌멩이를 천국가는 사람 만드는 것이 그게 가당키나 합니까? 안되죠. 그 정도로 사람이 천국간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 불가능을 저와 여러분들이 받은 거예요. 그러니 짬뽕이면 어떻고 빵이면 어떻습니까? 그게 무슨 대수입니까? 내 인생이 밥심 없고 건강 안하고 사랑 없다 해도 그게 무슨 대수겠어요? 그게 뭐 문제가 됩니까? 지킬 것은 복음이지 나의 자존심이 아니잖아요. 나의 가치가 아니잖아요. 뭐 아멘 좀 해야 되는데 진짜 독사의 새끼들인지. 그건 아니겠죠.
왜 한평생 살면서 자기 선입관을 지키려 합니까? 지키지 말아야 될 선입관을 계속 쥐고 있어요. 그게 오류를 일으키는데도 갖다가 폐기처분할 생각을 하지 않고 아이고 내 인생이 얼마나 귀한데 자꾸 껴안을 생각한다고요. 나훈아가 불렀던 노래 가운데, 나훈아 별로 모르는데, 이런 노래가 있어요. ‘십팔세 순이’라는 노래가 있어요. 나훈아 노래 몇 개 몰라요, 십팔세 순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가사가 살구꽃이 피면 온다고 했는데 왜 안왔어 이래 되는 거예요. 살구꽃이 필 때면 돌아온다는~ 살구꽃이 폈는데 순이가 안온 거예요. 지금 나훈아는요, 복음에 관심이 없어요. 지금 뭘 지키려고 하느냐면 내가 18세 순이를 사랑하는, 내 사랑을 내가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보세요. 온 세상이 복음을 찾으려고 하면 찾을 거리가 다 널려 있잖아요. 대중가요가 세상에서 나오기 때문에 평소에 살아가는 것이 왜 저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닌가를 선입관만 바꾸면 보여도 다 보입니다. 다 보여요. 전부다 자기 가치, 자존심 챙기려고 하는 그 자체가 제2, 제3의 바리새인들의 물결이에요, 전부다.
자, 그러고 난 뒤에 선방 때리고 도끼 이야기 아시죠? (마태복음 3장 10절,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그거 하고 오늘 본문 한번 봅시다. 베드로전서 3장 18절, 그리스도께서 한번 죄를 위하여 죽었다했죠? 죄가 뭐냐?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여기서 ‘죄는 포괄적이다’ 이 말이죠, 포괄적. 다시 말해서 교도소 전체가 죄가 돼요. 개개인을 문제 삼는 게 아니고 너 똑바로 해, 저 사람처럼 착해. 이런 거 없어요. 인간과 인간하고 비교하지 않습니다. 너는 저 사람처럼 왜 착실하지 못해? 너는 왜 착하지 못해? 그걸 문제 삼지 않아요. 포괄적이라니까, 전체적이에요, 전체적.
죄를 위하여. 이 세상은 착한 사람, 착한 사람이 전체라고 보는데 정상이라고 보는데 사실은 뭐냐, 한마디로 이 세상은 뭐다? 죄다 라고 규정짓기 위해서 주께서 뭘 하셨다? 죽으셨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 죽으셨는데 말리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잖아요, 아무도 없죠. 신기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예수님이 무슨 잘못을 크게 저질러서 강도, 바라바보다도 더 가치없는 인간으로 봤습니까?
우리가 십자가를 정말 아십니까? 안다면 그 현장에, 예수님 재판 현장에 갔을 때 우리는 손들고 저 예수님은 죄가 없습니다, 풀어주세요. 라고 손들고 나올 수 있겠어요? 아까 세례요한 이야기했는데 세례요한은 사명이 자기 목숨보다 우선했죠. 스피커니까. 세례요한 죽을 때 어떻게 죽었습니까? 처참하게 죽었죠. 왜 하나님께서 세례요한을 여자의 말 한마디에 목이 날아가게 하셨습니까? 그 당시에 여자는 별로 가치없는데 가치없는 여자의 한마디에 그냥 몰래 죽은 것도 아니고 공개적으로 죽었어요. 쟁반에다가 목이 담겨 죽었다고요.
세례요한이 분명히 부모가 있었을 거 아닙니까? 그걸 보고 이거는 기절하겠죠. 세례요한을 남의 자식이라고 보지 말고 집안에 있는 내 자식의 일부라고 보자 이 말이죠. 그 부모가 하나님 믿겠습니까? 저런 짓을 한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겠어요?
세례요한은요, 제가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인간이 넘을 수 없는 경계선을 깔아버린 분이에요. 인간이 넘을 수 없는. 따라오려면 따라와라. 못따라온다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것도 완전하지는 않지만. 완전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완전하지만.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기 때문에 인간들이 감히 흉내낼 수도 없는 극단 한도까지를 보여준 거예요. 세례요한이 무슨 나쁜 짓을 해서 그렇게 처참하게 죽어야 되는 겁니까? 살인강도도 그렇게 안죽겠습니다. 그것도 공개선상으로. 보이는 겁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사람들은 이 세상이 극악무도한 죄의 세상이라는 것을 어느 누구도 인정할 줄을 모르고 있어요. 그저 소소한, 내 외손자, 외손녀, 내 밥심, 내 건강, 코 앞에, 눈 앞에 있는 그것만 챙기면 내 할 도리 다했고 나는 남한테 욕 안얻어 먹는다 그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것만.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백종원의 골목식당 같아. 그 골목에서는 제일 맛있지, 그 골목에서는. 조미료 치고 설탕 쳤으니까 맛있을 수밖에 없죠. 우리는 각자의 골목식당에서 대장질하고 있다니까요.
성경을 볼 때 착한 사람으로 보니까 성경이 보일 리가 없고. 세례요한을 죽여도 남의 일로 여겨요. 나와 연관을 못시킨다니까요. 예수님 죽어도 남의 일로 본다니까. 예수님 죽으심과 내가 속해있는 이 세상이 어느 정도로 거리가 먼지를 깜짝, 깜놀, 깜짝 놀라야 되는데 안 놀라고 죽을까 싶어서 겁을 더 집어먹고 권력을 더 붙들고 있다니까요. 제자들처럼, 제자들하고 똑같이. 믿는 건지 안 믿는 건지. 우리가 이 세상을, 그 자체가 먹고 마시고 시집장가 가고 할 때 지옥불 와도, 뭐 어떤 일이 일어나도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라고 하는 그 마음자세가 이미 고난을 받고 있는 중이에요, 그게. 세상 사람들에게. 왜? 사람들의 선입관과 성령 안의 선입관이 너무 대조가 되니까.
복음을 아는 사람이 교회가게 되면요, 진짜 돌 맞아 죽는 수가 있어요. 돌까지는 안맞지만 성경책으로 얻어맞을 수가 있어요, 뒤통수라도. 나가라 꺼져라 인간아 하고. 너는 입 다물고 있어 이런 식으로, 미가야한테 한 것처럼. 미가야 선지자가 뺨맞았잖아요. 예수님도 귀싸대기 맞았죠? 이게 남의 이야기입니까? 그걸 보고 우리는 이렇게 합니다. 나 교훈 얻었어. 난 나대지 말아야지. 또 도피하고 피하고 수동적이고 기피하고 내 밥심과 건강과 사랑만 챙기면 그만이지 뭐 이런 식이에요.
예수님께서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말은 예수님의 죽으심 앞에서 우리가 그렇게 집착을 하고 미련두고 있고 떠나기 싫어하는 이 세상이 지금 침몰하는 중이다 이거예요. 배는 커요. 큰 배라고 침몰 안하는 게 아니고 기어이 침몰시키는 그러한 사건, 사태를 주께서 의도적으로 몰아넣습니다. 탈출하라 이 말이죠. 벗어나라. 탈출됐거든 너는 더 이상 다른 거 더 원하지 마라. 너는 의인이다. 네가 잘해서 의인이 아니라 나의 새로운 선입견, 너에 대한 의가 있음으로써 악마가 어떤 수작을 부려서 너 모자란다 그러면 너 죄인이야 경건치 않으니 거룩한 인간이 아니야 어떤 수작으로 이렇게 하나님의 복음을 흐릿하게 만드려고 노력하더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제대로 보면서 먼저 이걸 버려야 돼요.
나의 선입관을, 나의 선악적 선입관을 날마다 폐기처분해야 됩니다. 내가 남에 대해서도 모르고 나에 대해서도 잘못되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주님이 구원했는데 내가 나를 닦달내다니. 내가 그럴 자격이 있어?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그만 괴롭히세요, 자기 자신을. 아이고 목사님, 뭘 우리가 우리를 괴롭힙니까? 그건 너무 오버다 이렇게 하는데요. 우리가 남을 괴롭히기 때문에 우리를 괴롭히는 그것이 남탓으로 나오는 거예요.
우리가 남탓하는 이유는 본인이 본인을 괴롭히고 있는 중이라는 뜻이에요. 내가 이렇게 시집와서 고생하는 것은 다 당신 때문이야. 당신 만나서 인생 조졌어. 나 좋다는 남자 얼마나 많은데 왜 당신이랑 아다리 되가지고 무를 수도 없고. 남자는 물러 물러! 하면 너 혹시 무슨 다른 여자? 기어이 이기려고 허물을 또 덮어씌워가지고 기어이, 하여튼 대인관계에서 기어이 안져. 뭐로 이깁니까?
나의 선으로 저쪽 선을 이기려고 하는 거예요. 십자가를 지켜야 될 사명을 받은 자가 십자가 자리에 뭐가 있느냐 하면 나 이렇게 안졌습니다. 이겼습니다. 그게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 그거는 악마는 좋아하고 주님은 싫어하겠죠.
여러분 한복판에 주님의 십자가, 꽂혀 있습니다. 꽂혀 있기 때문에 여러분으로 하여금 여러분의 선입관으로 밀어붙이도록 주님께서 호락호락 그냥 방치하지 않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내가 죄라고 생각한 자체가 이게 욕심이라는 것, 주님의 복음을 훼방하는 모습이라는 것을, 죄의식이 안나온다는 게 아니라 나오더라도 이 죄가 나온다는 이것이 또 내가 나를 지키는 수작인데 십자가 대비해보니까 아 이게 죄였구나 그럼 여기서 나올 것은 뭐밖에 없습니까?
날마다 감사가 나온다는 거죠. 주여 나같이 나만 챙기는 인간을 어찌 죄인이라 하지 않으시고 의인이라 칭해주시는지 저는 이 순간부터 나는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그 순간이 5초 갑니다. 이 순간부터 나는 십자가만 자랑하겠습니다. 주께서 또 새로운 사태를 주게 되면 그 마음도 없어지고 또 자기방어에 나서겠죠.
기도하겠습니다. 우리의 방어 나서더라도 말씀이 살아있어 성령으로 살아있어 날마다 말씀대로 우리를 지적질 해주는 그것을 오히려 감사히 여길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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