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강의20190614b 베드로전서2장 25절(일상의 무능함)-이 근호 목사
제가 첫 번째 시간에 목자에게 돌아온다고 했어요. 그러나 어떤 인간도 항상 자기로부터 자기에게로 돌아오면 그게 의미가 마감되기 때문에 내 잘났고 내가 이렇게 대단하다는 그 의미 말고 다른 의미는 더 이상 얻을 생각을 안 합니다.
하나님 믿는다. 그러니까 내가 잘났지. 난 그림을 잘 그린다. 그러니까 내가 잘난거야. 헝가리에 유람선 빠졌는데 우리 아내만 살아 왔으니까 그래서 난 잘난거야. 항상 이 세상에 이런 경우 저런 경우 있더라도 어떤 경우 있더라도 관계 없어요. 전부 다 나는 잘난거야, 난 잘난거야. 20세 이하 월드컵에서 결승전 올라간 나라의 국민 된 것을 자랑스러워 합니다.
항상 이 의미가 종결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염두에 둬야 되요. 그걸 두 자로 뭐라고 했습니까? 그걸 가지고 일상생활 또는 우리 일상, 이렇습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우리가 어디 간다는 게 성립이 안돼요. 내가 여기 있는데 누구한테 가요? 나한테 오면 되지.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은 뭡니까? 뭐든지 성경 말씀대로 되거든요. 우리 뜻대로 안되고. 지난 수요일 제가 그런 설교 했거든요. 예언이라고 하는 것은 본인이 원해서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갖다 붙여준 거예요. 주님의 뜻이라니까요. 주님의 뜻은 인간들이 지킬 수 있는 게 아니고 무조건 그렇게 인도해요. 그러니까 목자 되신 주님께 간다는 주님의 뜻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게 아니고 그 전에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주께서 해 내시는 겁니다. 주님의 열심이고 주님의 고집이지요. 또 자기 숙제이기도 하고.
그러면 우리가 가려면 인간으로 가는 게 아닙니다. 뭐로 가야 되냐면 양으로 가야 되요, 양으로. 김 양, 이 양 하잖아요. 양이 되어서 가는 거예요. 그래야 그 분이 목자 되니까. 그 양과 목자의 관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 전부다 자기가 목자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양과 목자는 어디서 내려와야 되냐면 위에서부터 내려오고 그 상황을, 그 시스템을 몰고 오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말씀의 완성을 향하여 말씀을 끌고 내려오기 때문에 그 말씀 안에서 이 땅에 없는 구조, 말씀 안에만 있는 구조가 뭐냐, 양과 목자, 목자와 양과의 관계에요.
여러분 잘 아시는 시편 23편 있잖아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 다음에 뭐라고 되있죠?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 거예요. 내게 부족함이 없다. 왜? 내 때문입니까 내 곁에 계신 목자 때문입니까? 시편 23편에 분명히 이야기 했잖아요. 우리 목자 때문에 내게 부족함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의미가, 내가 부족함이 없기 위해서 내가 목자를 이용한 게 아니고, 인간은 자기가 목자라니까요. 그런데 목자가 자기가 아니고 따로 계시다는 말은 자기는 목자를 위해서 존재하는 무엇일 뿐이다? 양이 돼야 되지요.
그러면 양이 되는 방법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의미 사슬, 의미 구조가 깨어지고 주님에 의해서 가져온 주님이 내려오실 때 배후에, 후광에 같이 가지고 온 시스템이 있어요. 그 시스템 안에만 뭐가 되냐면 목자-양, 양-목자 그 구조가 거기 있는 겁니다.
우리 아는 이야기 합시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 빈 손으로 내려왔습니까, 어떤 시스템을 갖고 내려왔어요? 어떤 구조가 있지요? 하늘나라 구조 있잖아요. 모세가 시내산에서 계시받은 내용 속에 뭐가 있냐하면 바로 제사법 들어있죠. 그리고 친히 양쪽에 뭘 들고 왔습니까? 돌판 들고 왔지요. 그 다음에 언약궤 어떻게 만든다 구조 다 있고 성막 크게 만드는 구조, 하늘나라 세 번 네 번 가가지고 다 들어 왔잖아요,
그게 시스템이에요. 무슨 시스템? 하늘나라 시스템이에요. 그 시스템의 목적은 뭐냐하면 이거에요. 하나님과 인간이 ,with, 함께 한다.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하는 걸 가지고 두자로 성전이라 합니다, 성전. 여기서 말하는 인간이란 새 인간을 이야기하겠죠. 그러면 새 인간 하기 전에, 하나님과 인간할 때, 인간의 대표자로 하나님과 함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자가 누구죠?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자, 시효, 첫 번째 분, 누굽니까?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 그래서 예수의 이름은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예수의 이름, 네 자로 돼있죠? 두 자로 예수고 이름을 네 자로 풀면 ‘임마누엘’. 임마누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에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오셔야 우리와 함께 있다면 그 전에 유대인들이, 바리새인들이 아무리 하나님과 함께 있으려고 제사 지내고 성전 섬기고 해도 그것은 함께 있음이다, 있음 아니다? 있음이 아니죠. 오늘날 교인들이 돈 내가지고 예배당 짓고 예배 드리고 파이프 오르간, 성가대 백날 해봐야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 있음이 아니죠. 함께 있음은 뭐냐하면 예수님과 아버지가 함께 있는, 그러한 관계 속에서만 함께 있음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아버지가 함께 있을 때 새 언약, 내 피와 내 살, 새 언약으로 함께 있었잖아요. 그러면 사마리아 여인이 하나님과 함께 있을 경우에는 어떤 원리가 거기다 작용했습니까? 사마리아 여인.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예배를 드리려 할 때에 사마리아 여인 속에 예수님이 뭘 집어넣었지요? 뭐 마약입니까, 뭘 집어넣었어요? 끊임없이 나오는 생수의 우물을, 생수의 샘을, 영생의 샘을 사람 속에다가 집어넣은 거예요.
입에 대고 뿍 불면, 입에 대면 삑 소리나는 거 그런 과자나 문방구에 파는 그런 위험한 장난감 있잖아요. 애가 만약에 그걸 삼켰다 칩시다. 나쁜 짓 할 때마다 삑 소리 나는 거예요, 이 안에. 이물질이 들었다는 거예요, 뭔가. 낯선 게 들어있는 거예요, 낯선 게.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신령과 진정으로, 성령으로 예배드릴 때가 오나니, 그렇게 했죠? 그게 뭐냐면 성령이 우리 육신을 자기의 터전으로 삼고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이 있는 곳을 고린도 전서 3장 또는 고린도 후서 6장에 보면 그걸 성전이라고 합니다. 성령이 있으면 성전 되요.
고린도 후서 6장에 보면 성령이 임하면 성전이에요. 6장 16절,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 고린도 전서 3장에 보면 마찬가지로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지 못한다. (3장 16절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절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성전이 들어있는 거예요. 우리 육신을 성전이 장악하고 있다 이 말이죠. 삑-하고 소리 나듯이.
그러면 성령은 그냥 오시는 겁니까, 어떤 사건 이후에 오시는 거예요? 어떤 사건 이후에 성령이 오시는 거예요? 십자가 사건이죠. 그러면 성령이 있는 사람은 삐-소리 내면 무슨 소리가 나오냐 하면 십자가의 최종적인 마감된 내 존재가 의미의 마감이 아니라 십자가가 모든 최종적인 의미가 되어 버려요. 쉽게 말해서 십자가만 자랑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성령만 자랑한다고 성전 되는 게 아니고 성령 자체가 자기 자신을 양보해요. 누구한테? 예수님한테 양보한다고요.
성령은요, 예수님이 알려 준거, 예수님이 하실 일만 증거해요. 십자가만 자랑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십자가만 자랑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라이벌 되는 것들이 이제 옆에 붙어지는 거예요. 자, 1번 류현진 10승 달성하고 싶은 거, 아직 9승 밖에 못했으니까. 20세 월드컵에서 한국 우승하는 거, 그 다음에 제가 이렇게 얘기하면 어떤 아주머니는 치, 뭐 그 축구, 나 축구도 안 좋아하는데, 야구 할 줄도 모르는데. 이럴 거예요. 그러면 아주머니 애 서울 법대 들어가는 거, 이런 거. 갑자기 아-피죠. 피고. 그리고 갑자기 보험 한 10억 타는 거. 얼굴이 갑자기 아픈 게 다 나아버렸어. 확 피어버렸어. 누가 죽으면서 유산 한 76억 남겨 주는 이런 거. 확- 폈죠?
갑자기, 의미가 십자가로 마감될 의미가, 십자가로 마감되는 게 아니고 여기에 뭐가 가려져 들어가 버립니까? ‘나 이정도야’가 가려져 버리는 거예요. ‘나 무시하지 마. 나 하나님이 이 정도로 축복했어.’ 그게 뭘 가려버려요? 십자가를 가려버리죠.
자, 십자가는 누구 이야기다?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나는 누구 이야기냐? 내 이야기에요. 예수님의 적은 누굽니까? 나죠. 그러니까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이죠. 주님이 알거든요. 예수님을 가리는 것은 누구다? 바로 니가, 모든 각 개인이 예수님을 가려버리는 겁니다.
양이라는 것은 거기서 개인의 특성을 용납하지 않는 시스템이에요, 원리가. 양이라는 것은 목자가 등장함으로써 양이 성립되요. 성립되는데... 양 설명하기에는 요한복음 10장만큼 멋진 게, 자세하고 확실한 게 없어요, 성경에서 양 이야기 할 때. 아까 시편 23편 이야기했지만 아주 더 신약적으로 구체적인 것은, 내용이 깊어지는 것은 요한복음 10장입니다. 잘 들어보세요.
양은 없어요, 이 땅에 양은 없습니다. 내가 있지 양은 없어요, 양은. 없는데 목자가 오면서 내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목자가 필요한 것은 양이 필요한 거예요.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양이 되는 게 필요한 게 아니고 내 요구나 내 소원 때문에 내가 양 된거 아니고... 우리의 모든 의미는요, 나에게 종결돼요.
천국 가도 내가 가야지 남이 가면 싫어요. 그리고 천국 가도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천국 같이 오게 되면 천국 피해서 지옥으로 도망 칠거야, 아마. 고유정이라는 사람이 전남편이 죽어서, 그럴 리 없겠지만 만약에 천국 갔다 칩시다. 자기가 36살 때까지 못살고 여자 잘못 만나가지고, 여자가 죽여가지고 시체도 없이 그냥 영혼이 천국 갔다 칩시다. 천국 가 있는데 얼마 후에 고유정이라는 여자도 죽어서 내가 있는 데까지 같이 따라서 천국 와 버릴 때 천국 가서 무슨 이야기 하겠습니까? 니 내 죽였지?하고 멱살쥐고 또 부부싸움 할거에요, 천국 가서?
이런 일 있으면 안되잖아요. 그런데 교회에서 뭐냐 하면 우리가 예수 믿으면 내가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내가 구원받는 게 아니고 양의 보편성이 구원받아요. 양의 일반성, 양의 보편성. 그러니까 접시가, 초밥을 이동하는 접시가 구원받아요. 그럼 우리는 초밥 접시에 담기면 우리가 구원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접시는 예수님의 피가 묻어 있어요. 따라서 그 피에 의하면 우리는 죽은 자가 됩니다. 죽은 자는 계시할 게 없어요, 계시할 게. 우리가 혼자 죽으면 그건 자살하는 게 되거나 하면 그건 아무 의미 없어요. 주님과 함께 죽어야 되요.
한번 정리해 봅시다. 주님이 목자가 되심으로써 주님과 연계해서 양이 생긴다 했지요. 양은 없습니다. 주님과 연계해서 양이 되요. 우리 안에 생수가 들어온 거, 그건 예수님이 오시고 난 뒤에 있는 것이지 없을 때 아, 생수가 되게 하옵소서 이런 건 없습니다. 주님이 와서 벌어진 일이에요. 주님의 주님됨을 의미해서.
다시 말해서 모든 의미가 주님한테로 마감되기 위해서. 우물의 영원한 영생의 물이, 그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의 증인되기 위해서 주께서 오신 거예요. 주님이 오셨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양도 마찬가지에요. 그렇잖아요? 양 되고 싶어 양 되는 게 아니거든요. 목자가 원한다고 우리가, 양이 원한다고 목자가 원한다고 오는 게 아닙니다. 목자가 있어야 양이라는 게 성립이 된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오셔가지고 말씀을 다 이뤘다 했으니까 그러면 예수님께서 무슨 모집에 나서겠습니까? 자기 자신을 목자로 간주한다면 양이냐 아니냐의 결정권은 누가 가지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가지고 있죠. 그러면 우리는 집구석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죠. 그냥 예, 뭐 와야죠. 성령이 와야 양이 되야 되죠. 될 때 우리는 그냥 기다릴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몇 년을 기다려야 됩니까?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죽은 자한테는 몇 년이 소용없습니다. 그러니까 죽은 채로 있는 인간에게는 몇 년 하는 게 성립이 안돼요. 한 몇 년 더기다릴까? 그러면 아직 지가 살아있다는 뜻이에요.
우리가 예수 믿고 새로워야 됩니다, 이렇게 하죠. 보통 교회에서 그리 얘기하잖아요. 예수 믿고는 새사람 되세요, 새로워야 합니다, 한다 이 말이죠. 그럼 질문을 한 번 해보세요. ‘목사님 하루에 몇 번 새로워야 됩니까? 몇 번? 뭐 한번만? 이른번에 일곱 번만 새로우면 됩니까? 5년 전에 새로움하고 뭐 그거 백신 맞은거 5년째 계속 울궈 먹으면 되겠어요?’
1년에 부활절 몇 번이죠? 부활절은 한번이죠. 그러면 예수님은 몇 번 부활하십니까? 1년에. 이게 말이 안 되는게 예수님이 몇 번 부활하는 게 어디 있어요? 살아계신 분보고...몇번이라는 게 성립이 안돼죠. 주님한테는 모든 시간이 종결된 거예요. 시작도 끝도 종결된 겁니다.
제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양이 되려면 우리가 잃어버린 자가 되어야 되요, 잃어버린 자. 왜그러냐 하면...어렵더라도 좀 참으시기 바랍니다. 양의 정보를, 양의 정보칩이 있다면 그 정보가 뭐냐, 예수님의 이 땅에 와서의 활동성이 거기에 칩으로 들어있어요. 그러면 예수님이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했지요. 예수님이 아버지한테 잃어버렸죠. 잃어버린 지 사흘 만에 잃어버린 그 아들을 어떻게 합니까? 되찾았죠. 그 정보가 담겨있는 것을 양이라고 해요, 담겨있는 거.
그러면 하루에 몇 번 그걸 발휘하면 됩니까, 몇 번? 그건 성립이 안돼죠. 그걸 성경용어로 그럽니다. ‘무시로’ 무시로. 시도때도 없이 잠복되어있는 그 현상, 잠복되어있는 그 속성으로 인하여, 뽀글뽀글 그 유황물, 노란 유황물이 가스로 올라오듯이 적절한 때에 뽀글뽀글 늘 올라오게 되어 있어요. 우리의 잃어버림과 우리의 되찾음이.
제가 말하는 뜻이 잘 이해가 안 되시는 것 같은데 한 번 더 쉽게 하겠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걱정이 되는 때가 언제냐면 생활이 갑자기 불편함이 왔을 때 걱정이 되요, 불편함이 왔을 때. 멀쩡한 다리가 부러졌다든지 보일러가 안돌아간다든지 선풍기가 고장난다든지 이런거.
그러면 아 짜증나 오늘 바쁜데 또...기사 언제 불러야 되고 부르면 집에 누가 있어야 되는데 이런 거요. 선풍기가 또는 냉장고가 고장났다 그러면 누가 기사를 불러야 되지 않습니까 냉장고를 들고 갈수는 없으니까. 시간 맞춰서 삼성 냉장고 서비스센터에 전화하게 되면 또 얼마나 친절한지 ‘고객님 고객님한테 하는 건 다 녹음이 됩니다’ 목소리 해가지고 ‘그 동네 활동하고 있는 서비스 직원이랑 연락드려서 시간 맞춰드리겠습니다. 몇시에’ 그렇게 되거든요. 그럼 집이라도 좀 치워야 되고 안방까진 안들어가더라도, 이거 고쳐야되잖아요. 이게 얼마나 불편해요.
자 불편할 때 그날 소원이 뭡니까? 그리스도의 영광입니까 뭡니까? 십자가 알기입니까 뭡니까? 냉장고 정상 돌아가기거든요. 그러니 인간은 불편함만 있으면 그것이 다시 원상회복 하게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겁니다. 이게 계속 루틴, 반복되는 거예요. 그러면 아무 불편함이 없을 때가 있잖아요. 아무 불편함이 없을 때가 없어요.
인간은 새로운 불편함이 없으면 그다음은 욕심이 또 생긴다니까요, 욕심이. 아이고 갸들 좀 잘 있나 요새는 아이 데리고 오지도 않고 전화오지도 않네, 전화 한번 해볼까 또. 안사돈이랑 해가지고...야 뭐하노 집에, 빨리 가끔 손자 좀 보여줘 애 크나 이런 식으로 한다고요. 남의 바쁜 스케쥴을 또 공격을 해대죠. 왜 전화했는데? 손녀 보고싶다. 자 여기서 새로운 불편함이 생겼어요. 손녀가 보고싶은 거예요. 그러면 그전엔 왜 손녀가 안보고 싶었냐? 그 전엔 일한다고, 지금 자기 일에 바빠가지고 손녀가 와도 귀찮아. 와도 너희 집에 가라 빨리. 자기 한가하니까 손녀가 보고싶고 지 바쁘면 누가 오면 저 사람은 연락도 없이 왜왔나 나 지금 한참 바쁜데 귀찮아하고. 너무 오지마라하고. 여자가 시집가서 자주 오는 것도 안좋다 이래가지고.
누구 중심이에요 전부다? 세상 내 중심으로 흘러가는 거예요, 내 중심으로. 그것도 수시로, 수시로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은 늘 불편하고 이런 것을, 짜증나고 스트레스 받는 것을 뭔가 해소를 시켜야 되요. 그 해소방법이 뭐냐? 바로 류현진이고 축구인 겁니다. 남자들은 그걸로 잊어버려요. 또 나쁜 여자들은 도박이고 나쁜 짓해가지고 주부들끼리 모여가지고 화투치고...안그러면 노래방에 가 노래 부르고, 나이트클럽에 가 지루박 한 번 춤추고 곗돈 모아가지고 안그러면 또 건전하게 헝가리 가 빠져죽고...다음에 어디갈고. 살아남은 사람들 헝가리 안가고 또 다른데 스페인갈 거예요. 또 죽겠나 이제 물가에 가지말자 이러고.
이게 뭐냐면 인간의 내부 속에 이유도 없이 즐겨야 한다는 명령이 자꾸 솟아 나와요. 세상이 안정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세상이 반듯한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너는 계속 쾌락해야 되고 너는 계속 즐겨야 된다. 나는 즐기는 것을 원할 수밖에 없어. 이게 인간의 타고난 운명인데 어떻할 겁니까, 운명인데. 배고플 때는 밥만 있으면 만족하죠. 불편함이 해소됐죠. 잠잘 때 없으면 자기 집 있으면, 아파트 넚은 데 있으면 해소됐습니다.
그러면 밥먹을 때 있고 잠잘 때 있고 옷 입었으면 그걸로 더는 소원 없다 이래 됩니까? 넓은 집 한50평 사가지고 거기서 막 뒹굴면서 옛날 지하방 생각이 나면서 눈물이 난다 해가지고 굴러봐야 6개월 그걸로 그만 만족합니까? 끊임없이 우리는 끊임없이 뭐가 더 즐기는 거 더 즐거운 거 계속 즐거운 걸 찾는 거예요.
그러면 그 즐거워야 한다는 그 괴물이 우리 속에 왜 들어있습니까? 본인은 몰라요. 왜 들어있는지도 몰라요. 누가 언제 집어넣은 것도 몰라요. 그 즐거움은 뭐냐면 나한테 의미를, 내가 즐거워야 돼요. 그럼 내가 안 즐겁더라도 누가 연예인 하나가 이혼을 해주든지 마약을 해줘야 돼. 그래줘야 마약 안한 내 자신이 즐겁고 이혼안한 내가 흐믓하게 잘살고 있다고 착각들을 하는 거예요.
이런 굴곡, 내 갖고 있는 내 즐기는 것을, 대신 내 속에 카타르시스 해줄 것을 원해서 영화나 드라마 같은 것이 있는 겁니다. 드라마 있어가지고 ‘아 나는 이상하게 잘생긴 남자하고 결혼하고 싶어 너무 이쁜 여자하고 결혼하고 싶어.’ 걱정 마세요, 티비 틀면 나옵니다! ‘나는 일찍 결혼해서...삼십대쯤 해서 연애 원없이 하고 싶어’ 하면 걱정 마세요, 틀면 나옵니다! 서른여섯살 먹은 애하고 스물여섯살 먹은 애하고 연애하는 게 나와요. 더블유더블유더블유 하는 드라마 tvN에 보면 나옵니다. 스무살 애가 매달리고 서른살 애가 튕기는 그런 대목도 나와요. 여자는 뭐 아주 책임자에요. 월급도 많고 집도 잘살아요. 우리가 원하는 것은 거기서 다 해줘요.
그리고 세상적으로 자기가 즐긴다 하잖아요. 성경에서는 이렇게 표현하지 않습니다. 뭐라고 하느냐면 그것을 ‘자기 의’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게 어디 나오냐 하면 로마서 10장에 나옵니다. 로마서 10장 한번 찾아 볼께요. 얼마나 우리가 멀미 날 정도로 울렁거리는지. 로마서 10장 6절부터 보면 제가 그냥 읽을께요 시간관계상.
6절,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7절 혹은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가 분주하게 올라갔다 내려갔다 할 필요 없이 이미 주님께서 올라가신 분이고 이미 주님께서 음부에 내려가신 분이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의는, 그 분의 율법의 마침은 그분의 의로서 더 이상 율법 앞에서 우리가 죄라고, 죄인이라고 할 수 없다 이 말이거든요. 모든 마감이 되요, 율법의 마침이 된다 이 말이죠. 그 예수님의 의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말씀이 너희 가까이 있다는 말이죠. 그 말씀 안에 주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우리에게 안겨 준거에요.
그러면 우리는 뭐냐? 우리 안에 사마리아 여인처럼 그리스도의 의의 우물이 있는 겁니다. 이거는 시간이 없어요. 늘 반복해서 계속 하나님의 의가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의가 의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서 십자가의 사건이 반복되잖아요. 그러면 십자가 사건에서 부정적인 역할, 원수의 역할을 하는 게 누굽니까? 인간의 바로 육체성 아닙니까? 즐기는 거잖아요, 인간의 육체가.
예수님도 좋지만 난 이상하게 뭔가 즐기고 싶어. 뭐 시원한 거 뭐 맛있는 거 없나 맛집 없나? 계속해서 맛집 보고도 또 다른 맛집 냉면 먹고 싶다 해서 냉면 어제 먹었고 오늘은 삼계탕 맨날 바뀌어 맨날 바뀌어. 삼계탕 10번 하면 다시 냉면. 이 도대체 뺑뺑이 돌아 뺑뺑이. 이거했다가 저거했다가 저거했다가 맨날 하는 것을 그대로 유행처럼 맨날 돌고 돌고에요 그냥, 즐기는 거.
돈을 왜 버느냐? 즐기기 위해서. 삼십대 아가씨들이 돈이 없어. 기껏해야 300만원, 500만원 밖에 없어요. 왜 기껏 남은 돈이 왜 한달 월급밖에 안되느냐? 다 그 돈 어디 썼는가? 좀 했다 하면 연차내가지고 배낭 메고 이태리 저쪽에 애인 찾아가기. 혹시나 우연을 가장한 나의 사람, 운명적인 사랑을 찾아서 또 돌아다니는 거예요. 스페인 가서 또 갈 데 없어가지고 누굽니까 그 유해진 하는 식당 하는데 가가지고 일주일에 십일만원 하는 그 식당 가가지고 얻어먹고 오고.
전부 프로가 허영심 떠는데 그 허영심이라고 하지 마세요. 전부다 그게 자기도 자기 마음대로에요. 뭔가 즐길 거리를 찾아야 뭔가 사는 느낌을 가질 수 있어요. 집구석 아이 보고 손녀보고 해가지고 매일같이 집구석 치우고...도대체 못 살겠다 해가지고 돈모아 가지고 동남아나 가자 동남아 가가지고 또 댕기열이나 걸려 와가지고.
자 주님께서 일을 어떻게 하시냐하면, 우리가 즐겨야한다는 이것, 이 장소에다가 주님의 십자가를 집어넣습니다. 이건 폭탄이에요. 한번 정리해봅시다. 우리가 만드는 보편성, 일상이라 하는 것은 사실은 그 속에 일상을 가동시키는 엔진같은 알 수 없는 욕망이 계속 샘솟듯이 솟아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서, 사마리아 여인은 계속해서 뭘 길러 옵니까? 물 길러 와요. 육신의 허점이에요, 끊임없이. 물 먹는다고 사는 게 아니에요. 사는 건 아니지만 그 물을 먹어야 살 것 같애. 즐기고 싶은데 현실은 뭡니까, 물 길러 오면서 뭘 느낍니까? 고통을 느끼는 거예요. 인간은 즐기고 싶은데 즐기려면 고통스럽고. 내부적으로 상반된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에서는 해결이 안 돼죠. 인간의 보편성이란 이런 거예요. 여자 10명 해놓고 당신은 미인입니까? 물어보면 예. 당신은? 예. 전부다 10명 다 자기가 미인이라고 하죠. 미인대회 나왔으니까 미인이겠죠. 그게 바로 보편성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심사위원은 몇 명 뽑습니까? 진선미. 진은 몇 명이에요? 1명 뽑죠. 그러면 나머지 9명은 뭡니까? 거짓말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본인은 거짓말입니까, 진심이에요? 본인은 진심인데 딱 한명만 뽑으면 나머지는 그 사람에 비해서 못생긴 사람이 되는 거예요.
보편성이라는 것은 그저 하나의 임시적 가설천막, 가설무대. 그냥 그때그때마다 치웠다가 없어지는 이벤트 행사할 때 있잖아요. 의자 쫙 해놓고 다음에 가면 의자 다 하나도 없죠. 맨날 나의 세계를 위해서 내가 만든 그 멋있는 꽃다발 같은 거 가상적으로 내 사는 영역을 아름답게 꾸미지만 아이 갑자기 아프다든지 돈이 갑자기 없다든지 돈을 잃어버렸다든지 지갑을 잃어버리면 갑자기 그 환상은 지갑을 잃어버린다는 예측 못한, 예상 못한 새로운 돌발 요건으로 해서 한꺼번에 꿈은 다 허물어져 버려요.
그런 위험과 그런 불안과 협박에 우리는 늘상 시달리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야기하셨습니다. ‘먹는 거 입는 거로 족한 줄 알라.’ 예. 말로는 예 하죠, 아멘 하죠. 먹는 거 입는 걸로 족한다면 사실은 그런 악마의 협박에 공갈에 넘어갈 이유가 없는데, 내 속에 내 아닌 내가 내 아닌 그 무엇이 나로 하여금 먹는 거 입는 거로 족하지 않게 만들기 때문에 우리는 그때부터 악마의 협박을 받는 거예요. 계속해서 당하는 거예요.
우리의 일상이 이렇게 고뇌와 슬픔과 좌절과 걱정 근심으로 계속해서 이어지는 이유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협박과 공갈을 늘 받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나를 추스를 수 없다 이 말이에요. 나는 내 힘대로 독자적으로 살고 싶은데 그걸 방해하는 어떤 요소가 내안에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첫째시간의 이야기를 다시 해봅시다.
오늘 본문에서 양이 된다는 것은 무엇이 있다는 말입니까? 목자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양은 뭐로 삽니까? 양으로 사는 게 아니에요. 내가 양됨의 기쁨으로 사는 게 아닙니다. 목자 있음에, 목자 있음을 증거하라고, 확인하라고 양이 있는 거예요. 양은 하나의 보조라니까요. 양이 독자적으로 끊어서 양됨을, 대단함을 이렇게 하면 안 돼요.
여러분 자기 구원받은 게 기뻐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기쁩니까? 어느 게 기뻐요? 정답은 뭡니까? 사도바울처럼 뭘 자랑해야 되요? 십자가만 자랑해야 되잖아요. 그러나 실제로 보면 십자가 믿고 구원받은 나를 자랑한다니까요. 또 하나의 나의 즐거움이 되어 버렸어요.
그래서 십자가 믿고 구원은 받았는데 되게 심심해. 그 때 느꼈던 감정은 벌써 시효 떨어져 가지고 예수 믿은 지 5년 됐기 때문에 벌써 그 맛 갔어. 이제는 별로 좋아지지도 않고 복음도 별로 안 좋아져. 뭐 손 들었을 때 뿐이지 갑자기 팔이 아픈지 손 내리고 난 뒤에 일주일도 안 되가지고 십자가도 별로 시큰둥해. 그거는 십자가를 믿은 게 아니고 내 자신의 구원받음을, 나 자신의 일상처럼 내가 나한테 내 즐거움을 내가 만족시켰다고 착각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양이 되려면 반드시 무슨 과정을 거친다? 잃어버리는 과정을 거쳐야 되요. 그래서 불의한 청지기나 탕자의 비유가 얼마나 적절한 지 여러분 아시겠지요? 탕자는 집나갈 때 자기 자신이 주인공이에요. 아버지 없이 살아보겠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 비유 들으실 때 왜 들었겠어요? 벌써 인간들은 그것밖에 모른다는 거예요. 그러면 결국 탕자 이야기 한 것은 내가 아는 사는 방식 말고 내가 모르는 사는 방식이 따로 있음을 깨닫는 과정이 바로 탕자 비유입니다.
자, 우리의 사는 방식은 연대에서 배웠어요. 우리 집안에서 배웠습니다. 니가 잘되고 니가 남한테 칭찬받고 박수 받는 이게 사는 보람이라고 주위의 부모도 그렇게 가르쳤고 나도 그렇게 같이 동감했어요. 니 의사가 되게 되면 남들이 부러워하고 니가 원하는 여자 골라서 갖게 될 것이다. 그것도 못생긴 여자 고른다는 말이 아니죠. 미인 중의 미인들을 니가 원하는 대로 고를 수 있는 그런 혼처자리가, 중매자리가 많이 들어올 것이다. 부모가 그 말한다는 것은 뭔 뜻입니까? 니나 내나 사는 방식이 다를거 없어, 똑같애. 잖아요. 사람은 자기 즐거움을 위해서 남이 존재하는 식으로, 살아간다는 그 점에 대해서 너도 동의하고 나도 동의하지? 동의안하려면 다른 방식을 이야기해봐. 없지? 없으면 동의해. 내가 즐거운 것이 곧 아름다운 세상이고 뷰티플 세상이다. 그거라는 거예요.
자 예를 들어봅시다. 성경에 다윗 이야기 나오죠. 다윗이 암몬하고 전쟁할 때 다윗은 전쟁터에 안 나갔습니다. 평평한 지붕위에 거닐었어요. 암몬 전쟁은 누가 하냐 요압 밑에 있는 우리아 장군과 요압 장군이 열심히 암몬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아름다운 여인이 목욕하고 있다는 거예요.
성경이야기가 어려운 것이 전쟁과 뭣과 결부시킵니까? 뷰티플, 아름다움과 결부시켜요. 자, 바깥전쟁은 힘에 의한 전쟁이에요. 승자와 패자가 뚜렷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런데 내부 전쟁, 아름다운 여자를 내가 차지하겠다는 그 전쟁은 자기가 미처 몰랐던 자기의 내부 전쟁을 반영해 주는 겁니다.
만약에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보지 못했다 칩시다. 밧세바가 목욕을 저희 집 안에서 했고 바깥에는 안 나왔다고 남이 안보는 데서 했다 칩시다. 목욕했는지 안했는지 모른다 칩시다. 그러면 바깥 미세먼지 없는 공기 그냥 구경했을 거예요. 그렇게 되면 자기 자신을 알까요, 모를까요? 모르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전쟁을 왜 일으킵니까? 암몬과의 전쟁을 왜 일으켰어요? 그 전쟁이 있어줘야 누가 죽어요? 우리아 장군이 죽어줘야 ‘아, 내 왕이라는 위치가 사람을 살리는 위치가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속한 사람을 죽이는 자리가, 내가 왕의 자리로 있구나’하는 그 사실을, 만약에 전쟁이, 밧세바가 없었으면 몰랐을 거예요.
여러분, 누구십니까? 후야유? 여러분 누구십니까? 우리는 일상생활은 연대에서 남들이 이야기하는 그것이 나라고 소개하겠죠. 암몬에서 승리했다. 다시 말해서 나는 공부 잘한다 이거랑 똑같은 거예요. 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9급 지방직 공무원, 내일 참 9급 지방직공무원 시험친다, 9급 공무원 시험에서 합격되면 이거는 많은 적을 물리친 거예요, 50대1이 넘으니까. 내 하나되기 위해서 49명이 내한테 진거에요. 옴매 기살아, 저기는 옴매 기죽어 되겠죠. 니 또 재수해라 이래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나는 뭐가 되요? 내가 패배한 걸 즐길까요? 내가 합격한 걸 즐길까요? 나는 내 합격한 거 즐기는 거예요. 하나님의 의가 전혀 없죠, 들어올 틈이 없죠.
자 강의 다시 합시다. 우리의 목자가 뭔가요? 목자가 우리에게 오는데 그 때 우리는 우리가 아니고 양이 된다는 목표 하에 우리를 찾아와요. 그런데 양이 되어버리면 나라는게, 단독적인 나는 없어요. 목자를 위해서 존재하는 양일 뿐이지 양이 따로 내가 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면 목자가 오기 전까지는 우리는 무슨 전쟁을 해야 되요? 가짜인 나와 진짜 하나님이 원하는 나의 싸움이 있어야 되는데 다윗은 무슨 싸움을 했습니까? 자기 내부의 싸움을 하는 게 아니고 바깥 싸움을 했다니까요. ‘나 이스라엘 왕이야. 내 밑에 모압 장군 싸움 잘해. 이번 전쟁은 아마 이길 걸.’ 그렇게 끝나면 이스라엘은 ‘옴매 나는 이스라엘 왕으로써 또 승리했네. 주님이 축복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께 감사하면 자기는 그게 왕으로써의 승리라고 여겼죠.
그런데 하나님은 바깥 전쟁할 때 뷰티플, 영어로 아름다움, 아름다운 여인을 보게 했습니다. 자, 본격적인 이스라엘 왕의 지위가, 저 힘으로 된 전쟁의 승리입니까 아니면 자기가 죄인됨을 아는 겁니까? 어느 것이 이스라엘 왕이 해야 될 일입니까?
질문 다시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진 것이 우리 죄를 위함이죠. 아니면 우리의 잘남을 위함입니까? 우리의 못남이죠. 그러면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은 뭔 뜻이에요? 나는 천국 가는데 병신이라는 말이죠. 나는 접시 없이는 움직이지 못하는 초밥에 지나지 않는다.
주님의 하시는 언약적 전쟁은, 다윗 언약의 전쟁은 바깥전쟁이 아닙니다. 무슨 전쟁? 내 내부의 전쟁이에요, 내부의 전쟁. 그럼 내부의 전쟁을 할 때 ‘주여 믿습니다.’ 이러면 안 돼요. 내가 누군지를 분명히 보여줘야 돼요. 내가 얼마나 내 즐거움에 도취되고 나는 쉬지 않고 내 욕구를 만족하고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그런 사고방식에 철저한가를, 철저하게 그것이 내가 알아지는 경우와 사건들이 닥쳐져야 되요.
그 사건 바로 뷰티플, 아름다운 우먼, 여인을 뒤쪽에서 본 겁니다. 뒤만 아름다운 줄 알았는데 앞을 보니 더 아름답네. 주체 못하죠. 아름다운데 아름다움을 누가 이깁니까. 내 내부가 즐기라는 것에, 니가 즐긴 것을 니가 니 소유하라는 이 명령을 어떻게 우리가 거역합니까? 거역할 방법 없어요. 억누른다고요? 내일되면 그게 없어집니까? 내일 되면 두 배로 튕기는데...억누른다고요? 한 달 되면 더 갖고 싶을걸요. 뭐 주님께서 전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절제한다고 이길 전쟁을, 그런 식으로 전쟁을 안 하죠.
결국 다윗은 밧세바와 동침을 했고. 자, 거기서 재밌는 것은 이것은 가쉽거린데 과연 밧세바가 반항했을까요? 옴매 왕비가 될 찬스네 이랬겠어요, 아니 되옵나이다 뭐 이랬겠어요? 합의에 의한 관계냐 아니면 겁탈이냐 이 말입니다. 높은 지위를 이용한, 갑자기 후보 생각난다. 대통령 충청도 대전 시장입니까? 높은 지위에 의한 강요 아닌 것처럼 강요해서 비서를 그냥 성으로 갖고 놀았는지 안 그러면 마누라 쫓아내고 내가 저 자리 차지해가지고 내가 나중에 대통령 영부인 되려고 했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모르죠.
성경에서는 밧세바가 동의했는지 그것은 안 나타나요. 이거는 아니에요. 내가 남편 보기에 부끄러워 은장도 꺼내서 자결 하지는 않았어요. ‘어이구, 웬 떡이여’ 뭐 이랬든 어째든 간에, 하고 우리아를 불러냅니다. 그리고 우리아를 최전선에 보내버리죠. 최전선에 보낸다는 말은 가장 죽일 수 있는 확률이 높은 곳에 보내서 남편을 죽여 버렸습니다. 그게 고유정이 전남편을 죽인 거예요. 지금 자기 행복을 위해서.
자, 다윗이 왜 죽였냐하면 자기 행복을 위해서. 최소한의 행복을 위해서 나의 희생을 줄이고, 남이 희생되든 말든 내 희생만 줄이면 나는 성공했다는 거예요. 내 본 모습은 즐기는 데 지장이 없다는 거예요.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찾아와서 뭐라고 합니까? 양이 많은 부자가, 자기 종이 양이 하나밖에 없어서 맨날 그 양만 빨고 양만 안고 사는 그 양을 뺏어가지고 그 양을 잡아 죽여 버렸을 때에 그 주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을 때 다윗이 ‘내가 통치하는 이 나라에 그런 놈이 있다니 내가 이스라엘 왕으로서 용납치 아니하리라.’ 이렇게 했거든요.
그럴 때 나단이 뭐라고 했습니까? 니다 니, 너야. 반말했는지 안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가 당신입니다.’ 할 때에 이 전쟁은, 결국 그 바깥에 있는 암몬과의 전쟁은 누구와 연루되어 있어요? 이스라엘 왕은 뭐냐는 거예요. 도대체 이스라엘 왕은 뭐냐.
십자가, 죄로 말미암아, 십자가 죽어야 할 자리를, 초밥 얹는 그 접시의 실체를 보여준 자리가 이스라엘 자리에요. 우리는 죽어 마땅하다는 거예요. 지옥가야 마땅함을, 어디에서 보여주지 못한 그것을 다윗은 보여줍니다.
이것은 내가 그 여자를 겁탈한 게 죄가 아니고 나는 처음부터 뭐로 태어났다? 처음부터 잠복되어 있었다. 여자를 차지하고 그 남편을 죽이는 것은 잠복된 죄가 때가 되매, 하나님의 계시가 되매, 계기가 되매 터져나온 거죠. 그러니까 다윗은 뻔뻔스러운 거예요. 세상적 의미에서. 세상 사람들은 약점은 어떻게 한다? 감추고 뭐만 내놓는다? 장점을 내놓는데 다윗은 성신받고 난 뒤에, 나단한테 지적받고 난 뒤에 반대가 됐죠.
주께서 원하는 것은 장점이 아니고 상한 심령이라는 거예요. 이게 바로 십자가를 자랑하는 복음입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복음은 주님과 우리가 상호작용 가운데서 그 틈 사이에서 나오는 거예요. 십자가 줬다 이게 복음이 아니라 십자가 줌으로써 나의 반응 있잖아요, 반응과 결부해서 복음이 형성됩니다, 복음이 형성되요.
나는 천국 가는데 장애자다. 제목을 아까 뭐라 했노, ‘일상’, 고쳐야 되겠다, ‘천국의 장애자’. 천국에 대해서, 그냥 천국의 장애자. 우리는 천국 못가는 사람입니다. 무능자에요, 천국 못가요. 있어도 못가고...우리가 생각하는 건 가짜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뭘 만들고? 못가는 이유를 만들어요.
예수님이 왕이잖아요. 이스라엘 왕의 자리가 무슨 자리였다? 죄를 죄 되게 노출 시키는 자리죠. 그 죄의 자리에 누굴 집어넣어요? 우리로 하여금 탕자로써 그 자리에 집어넣습니다. 집어넣으면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그런 경험, 바람피우고 살인하고 그런 거 안해도 이미 우리는 그 죄의 잠복성, 잠재성을 지니고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그 사람은 그런 죽일 계기가 있었고 우리는 그런 기회가 안와서 못 죽인 거예요.
우리는 내 즐거움을 위해서 내 즐거움에 방해되는 것은 꼭 칼 들고 죽이지 않더라도 밉다, 나가라, 꺼져라 하는 식으로 마음속으로 미움이 생겨나게 되어 있어요. 연애하다가 왜 헤어집니까? 친구 사이에 왜 헤어집니까? 십 년 잘해주면 뭐합니까, 한 순간에 못해주면 십년 치 한 거 전부다 헛방인데...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백날 해도 설교시간에 말 한번 잘못했는데 또 그걸 오해해가지고 미워하고 하죠.
양의 특징은, 양이 아닌 사람은 자신이 노력한 걸 제시해요. 나 이정도 가치있게 노력하니까 나를 가치있게 봐달라는 겁니다. 그러나 양의 특징은 목자가 하신 일에 내가 참여했음을 증거합니다. 주님이 하신 일이 뭡니까? 잃어버렸다가 얻었죠. 십자가 죽었다가 부활했잖아요. 그러면 십자가 죽음부터, 죽음에 우리가 같이 끼어가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자세로 갑니까? 우리는 죽어 마땅함으로 가는 거죠.
그러니 양의 특징은 뭐냐 하면, 내 속에 예수님의 행하신 일로 하여금 양이 될 수 없고 천국 갈 수 없는 우리가, 주께서 지금도 양으로 되게 하셔서 예수님만 증거 하도록, 너는 내게 속한 양이라고 세상에 증거 하도록, 우리에게 새로운, 내가 모르는 새로운 이 세상 사는 방식을 성도만이, 양만이 노출시킬 수가 있습니다. 가끔은, 자주 자주, 가끔은.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사람들과 저희들의 차이점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옵소서. 세상은 자기 즐거우면 그만이지만 저희는 목자가 죄로 인하여 죽으신 그 사건을 우리를 통해서 삶을 통해서 현실화시키고 그걸 전개한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이제는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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