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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모임 질의응답2 오용익

아빠와 함께 2019. 8. 30. 14:46
2019-08-30 11:26:01조회 : 12         
190826 여수모임 질문답변2 이름 : 오용익 (IP:58.29.196.72)
190826 여수모임 질문답변2

(질문1) 계시록에서 7년대환란이 무슨 뜻입니까?

7년이라 할 때 7은 ‘구약적 7개념’과 ‘신약적 7개념’이 달라요. 시간이라 하는 것은 구약에서는 반복되지요. 구약에서는 반복되는 겁니다. 그림으로 그리면 수평선에서 일, 월, 화, 수, 목,금, 토, 토요일은 안식일이지요. 수평적시간이 (한주를 단위로) 흘러가다가 그 다음에 한 단계 높아져서 다시 일, 월, 화, 수, 목, 금, 토, 1, 2, 3, 4, 5, 6, 7, 이렇게 가는 겁니다.

이렇게 가서 결국은 7 × 7 = 49, 여기에 +1 하면 희년이 돼요. 이렇게 구약은 수평적인 겁니다. 그런데 신약에 오면 예수님께서 이미 모든 것을 다 이루셔서 하늘로 올라갔지요. 하늘로 올라가게 되면 예수님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구약이 다 빨려 올라가는 거예요. 펌프처럼. 그러면 성경은 누구를 증거 하느냐 하면, 예수님을 증거하는 겁니다.

증거하면서, 전에 구약에서는 수평적으로 순환되잖아요. 신약에서는 수직적으로 순환돼요. ‘다 이루었다’ 하면서 순환되는 겁니다. 그런데 아직도 구약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7이, 1년 → 2년 → 3년 → 4년……, 이런 식으로 가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그것은 뭘 잊어버렸기 때문인가? ‘나는 살아 있다.’ 그렇게 돼요. 내가 살아있게 되면 무엇도 같이 살아 있느냐 하면, 시간의식도 살아 있다. 내가 살아 있으니까 시간의식도 나에게 같이 살아있게 되지요.

그런데 골로새서 3장에 보게 되면 나는 살았어요, 죽었어요? 나는 이미 죽었지요. 죽었으면 시간의식도 없는 거예요. 시간의식이 없고 뭐가 있느냐? 시간의식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사건만 있지요.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보면 십자가사건이 눈앞에 보인다 했지요. 그 때 이미 십자가사건 이후 15년 후에요. 사도바울이 십자가를 본 적이 없어요. 십자가 근처도 안 갔어요. 아예 딴 동네서, 안디옥에서 살고 있었으니까. 다소 출신이니까 그 당시에 본적 없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는 거예요. ‘어? 이미 과거의 이야기인데.’ “네 눈앞에 이순신장군이 보이지 않느냐?” 이순신장군은 1592년 임진란 때 있었지요. 그 때 총 맞고 죽었잖아요. 지금 이순신 장군이 있는 곳은 무당집밖에 없어요. 없어요, 이순신장군이.

이순신장군이 몇 번지 살지요? 여수 어디쯤, 아, 이순신장군이 여수하고 관련이 있구나. 여기 이순신장군 광장이 있는 것을 가본 적이 있는데 가보니까 햄버거집이 있어요. 수제 햄버거. 이순신장군 수제 햄버거 있다니까요. 어떤 사람은 거북선 올라가다가 계단에서 넘어져서 죽고. 그 때 나도 올라갔거든요. 나는 끄떡없었어요. 타이밍이 내가 죽는 타이밍아 아니었던 모양이라. 내가 올라갈 때는 안 무너지고 다른 사람이 올라갈 때 한 5미터 높이에서 떨어져서 두 명인가가 죽었는데, 어쨌든 이순신장군은 없습니다.

없다는 그 말이 맞아요. 만약에 교과서에 “지금 이순신 장군님이 서울 종로구에 살고 있다.” 한다면 이것은 교과서 검증이 나면 안돼요. 옛날에나 있었던 분이지요. 지금도 교과서에서 예수님이란 분은 뭡니까? 옛날에 유대에 살았던 어떤 인물이지요. 교과서에서. 그것이 그들이 보는 현실이잖아요. 그들의 현실에는 예수님이 없어요.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에서 뭡니까? 예수님이 살아 있다는 것이 현재 눈앞에 십자가가 살아 있는 거예요. 어디에 살아 있는가? ‘내 소자에게 한 그것이 나에게 한 것이다. 이 작은 자에게 한 그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주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그 현장을 십자가의 현장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그 현장에서 나는 죽고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살지요.

나는 죽어도 괜찮아요. 율법을 다 이루었기 때문에. 안식일을 다 이루었기 때문에. 그러면 요한계시록에서 7이라는 것은 뭡니까? 구약적용어를 잡아당겨서 해석은 뭘로 한다? 신약적요소를 만남으로서 해석이 되어야 되는 거예요. 7같은 숫자는 다 뭡니까? 이것은 구약적용어에요. 구약적용어는 어디를 경유해야 돼요? 예수님 십자가를 경유해서 해석이 되어야 해요.

그러면 7년 환란이라는 것은 뭐냐? 이 세상 전부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님 없는, 예수님을 떠나보낸 이 세상 전부가 ‘7년대환란’이에요. 3년 반으로 그걸 쪼개든 뭘 하든 관계없어요. 이 세상 전부가 7년이고, 일곱 인이고, 일곱 나팔이고 그런 거예요. 666도 다 그런 거예요. 내가 행할 것, 내가 지켜야 되고, 내가 생수 사들고 지하벙커에 들어가고, 비상식량 준비하고 그럴 일은 없다, 이 말입니다.

마지막 아마겟돈 전쟁을 위해서, 핵폭탄 터지면 지하 몇 미터까지 가야 방사능에 안 퍼질까, 해서 돈 모아서 벙커 만들어서 거기 들어갈 이유가 없어요. 티그리스강 저쪽이 이란인데 이란을 공격하는 것이 에티오피아고 그리고 러시아가 한 팀이 되어서 북쪽의 아갈마가 어떻고 하면서 터키를 공격하게 된다는 시나리오를 짜서 “깨어라!” (갑자기 큰 소리가 나는데) “깨어라. 마지막 때가 되었다. 666 바코드 주의하고 받지 말라.” 그것 전부 사기입니다. 사기에요.

(질문 2) 천년왕국은 그러면……?

그럼요. 천년왕국 같은 것은 없어요. 하늘나라가 천년이에요. 천이라는 숫자가 묵시적으로 예수님이 다 이룬 거예요. 성경을 전체로 볼 수 있어야 돼요. 사람이 죽었다는데 왜 살 궁리를 하지요? 그 자체가 모순되잖아요. 그 논리가 안 맞잖아요. 십자가에서 이미 죽었는데 왜 갑자기 살아야 되지요? 구원을 못 느끼겠다는 거예요. 그거 느껴서 뭐할 건데요?

주님의 도구인데. 주님에 의해서 다루어지면 내가 따로 느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얼음과자에 구멍 뚫어주면 몰라도. 아, 그래서 이 마귀가 이러한 성령의 오심을 모르고 인간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 내 구원욕망, 욕구에 붙잡아 두려고 이런 문자적인, 구약적용어를 가지고 지켜야 되고, 피해야 되고, 조심해야 되고, 그래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조심한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조심해야 구원 된다.’ 그런 것은 없어요. 내 피로 이미 구원받은 거예요. 조심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에요. 조심한다고 해서 그 조심이 인간의 의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아까 했지요. 뭐가 의입니까? 예수님의 피가 의지 내 조심이 의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아까 강의에서 한 대로 변수를 다 모르는데 조심을 어디까지 조심해야 됩니까? 말이 안 되지요.

나만 살겠다는 그 욕망, 그 구원론이 마귀의 이론이에요. ‘나만 살겠다. 너 죽든 말든 나만 살겠다.’ 그게 그 이론이에요. 얼마나 이기적이에요? 주께서는 다 죽여 버리는데 나만 왜 살리겠어요? 주님은 나하고 관련지을 것이 아니라 반드시 예수님과 관련지어요. 예수님과 관련지어서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나는 살고자 하는 것도 뭐가 된다? 죄가 된다는 사실. 전에는 그걸 몰랐지요.

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인줄 알았지요. 그게 아니고 살고자 한다는 것은 주님의 살려줌을 내가 모독하는 거예요. 주님이 사도바울 만난 것처럼 우리는 핍박하는 존재지 주님하고 좋은 관계로 유지될 그런 관계가 아니에요. 주께서 이미 핍박했다고 지적하게 되면 ‘아, 살아가면서 주님을 핍박하고 있구나.’ 이렇게 하면 되지, 그걸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되지 ‘이정도 괜찮은 내가 왜 핍박을 해? 이제는 성령 받았으니 핍박하지 말아야지.’ 그런 뒤처리 하지 마세요. ‘뒤처리 + 남아 있는 뒤처리’ 그런 것은 없어요.

그걸로 이미 죽었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으면 그걸로 되는 문제지요. 내가 내 몸에 손대서 뜯어고치고 그럴 필요는 없어요. 뭐든지 하세요. 그렇게 살면 그것이 죄가 될 줄로 믿습니다. 죄가 된다는 그것이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그동안 잘난 체하면서 얼마나 내가 힘들었어요? 왜? 잘나야 복이 오니까. 잘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 지긋지긋한 집구석과 살림살이 내 인생을 한번 만회해 보자. 개과천선해보자. 남들은 복 받았다고 그렇게 간증들 하는데 나도 같은 인간인데 못할거 뭐 있으랴. 나도 한 오기 하는데.’

그런 식으로 경쟁하면 안돼요. 그것은 무당집 다니신 거예요. 살아온 것이 억지로 주께서 살려줘서 살아온 거예요. 살고 싶어도 못살아요. 지붕 무너지면 못산다니까요. 사람이 죽고 싶어서 죽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살고 싶어 하다가 죽었지요. ‘음주운전차량이 다가오는구나. 5, 4, 3, …… 죽자.’ 이거 아니에요.

학교에 애 바래다주다가도 차에 치어 죽고 그러는 거예요. ‘내가 음주운전을 해서 여러 명 죽이자.’ 그런 것 없어요. 정신도 없이 박았는데 보니까 제주도 70대 노인 죽고, 50대 아줌마는 부상당하고, 남자 20대는 도망치고……. 모든 사건은, 망대가 무너져서 18명이 죽었지요. 제자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휴 다행이다’ 했잖아요.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다행같은 소리한다. 네가 회개 안하면, 다시 말해서 나를 제대로 모르면 너도 이와 같이 망하리라.” 했잖아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면 그 공식에 우리가 맞춥시다. 죄인 자리에 우리를 간단하게, 기쁘게, 신난다 하면서 죄인 자리에 들어갑시다. 의인되어서 복 받을 생각 말고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주어졌으니 얼마나 감사할 거예요. 그래서 감사하면 성령의 일이고 억지로 하면 악령의 일입니다. 아무리 명분이 좋아도 소용이 없어요. 억지로 하면 악령의 일이고 감사하게 되면 성령의 일이에요.

(질문 3) 그러면 목사님, 우리가 성경을 어떻게 봐야 돼요?

십자가를 가지고, 아까 원유시추 이야기했지요. 모든 성경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에. 다 이루었으면 그 통로를 사용하는 거예요. 세상은 악마에 의해서 갇혀 있습니다. 이런 아이스크림이 있지요. 안에 아이스크림이 들었는데 바깥에 빵조각이 덮여 있는 것이 있지요. 그런 종류의 아이스크림이 있잖아요. 카스텔라 비슷하게 생겼지요.

이처럼 꽉 막혀 있어요. 인간은 못 빠져 나가요. 왜냐하면 죄가 왕이 되기 때문에. 왕은 뭐냐 하면, 모든 것을 지배하고 명령합니다. 악마가 지배하기 때문에 이 세상은 복음의 광채를 가리는데 진력을 다하고 전력을 다하고 있어요. ‘네가 훌륭한데 네가 뭐가 못나서 십자가를 믿나?’ 이런 식으로 악마가 계속해서 가르치는 거예요.

교회도 그런 식으로 가르쳐요. “여러분이 성령 받았지요. 그래서 십자가 믿지요? 그러면 여러분 역량대로 발휘해서 하늘나라 확장에 여러분이 기여하는 사람이 되세요. 너무 자기 집만 짓지 말고 교회 짓는데 돈 바치세요.”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 말이지요. 그게 악마의 짓이거든요. 미진한 것이 남아 있고 보람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미흡하다는 뜻이라 감사가 안 나와요.

뭘 해야, 이 정도해야 감사하겠다는 자기 나름대로의 전략이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어떻게 했느냐? 구멍을 뚫어버렸다, 그 말이지요. 세리와 창기가 어디 간다? 누구보다 먼저 어디 간다? 잘난 사람보다, 윤리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보다 먼저 어디에 간다? 천국에 가지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이지요.

금식한다. 이것은 주술적이잖아요. 주님은 금식한 것이 아니고 뭐 했다? 그 때 술 잡숫는다는 거예요. 죄인들과 함께, 세리와 함께. 이것은 뚫는 거예요. 다 이루었다. 그 때 제자들은 어디 있습니까? 제자들 어디 갔지요? 십자가 질 때 제자들은 다 어디 갔습니까? 도망갔지요. 주님은 항상 극한으로만 이야기하는 것을 제자들은 몰랐던 거예요.

극단이라도 너무 극단이에요. 자기가 믿는 아버지한테 버림받았으니까 그런 극단이 어디 있어요? 극단이에요 극단. 심한 극단이죠. 어중간하게 어디 돌아올 희망은 없어요. 갈 때까지 가보는 거예요. 극단이에요. 그 극단 속에 ‘다 이루었다’가 들어 있습니다. 극단이 오게 되면 이 안에 모든 죄가 다 드러나지요.

요한복음 15장에서는 ‘내가 오기 전까지는 죄인이 아니었으나 내가 옴으로 비로소 너희가 죄인인 것이 들통났다.’ 십자가가 오게 되면 여기에 말씀이 기다리고 있지요. 그러면 말씀은 우리에게 ‘네가 이래서 죄인’이라는 율법적 기능을 이야기해서 이것이 십자가중심의 해석입니다. ‘아, 내가 이렇게 죄인이구나.’

지금 보니까 안경을 쓰셨는데 눈에 별로 안 좋아요? 아, 빛 때문에. 지금 오른 눈 괜찮지요? 정상이지요. 그렇지요?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오른 눈으로 범죄하면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지금 그 눈알을 안 뽑았다는 것은 둘 중 하나에요. 하나는 내 눈으로 죄지은 적이 없다는 것이고, 한번이라도, 심지어 꿈속에서라도 죄 지은 적이 없다는 거예요.

또 하는 뭐냐? 빼야 되는데 아까워서 못 빼겠다는 겁니다. 오른 손이 범죄하거든 뭐하라 합니까? 찍어버리라 했지요. 지금 오른 손을 올려볼까요? 되네요. 둘 중 하나에요. 아까워서 못 찍든지 안 그러면 오른손으로 죄지은 적이 없든지. 그런데 인간은 오른 손으로 죄 안 지을 수 있겠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잘난 체하는 죄를 제가 죽을 때까지 지금 지니고 있습니다.’ 하는 것을 아는 감사와 기쁨이 있어야 되지요.

이거 자른다고 이것 가지고 또 죄 안 지을까요? 이것 뺀다고 이 눈으로는 괜찮을까요? 남은 이것 자른다고 몸통은 가만있겠어요? 또 죄짓지요. 그러니까 인간은 뭐냐? 너희들 모든 죄는 내 몸통에 짊어지고, 내가 대신 아버지한테 오른 눈 빼고, 이거 잘리고, 피 흘리고 몽땅 내부에 있어야 할 피가 바깥으로 나와 버렸지요.

그 피와 죄가 섞여서, 용서와 죄가 섞여서 흘러넘치는 거예요. 그러면 흘러넘치는 것을 우리가 적시자 그 말이지요. 그게 마지막 약속이니까. 약속을 수행하게 되면 나는 뭘로 완전히 뒤집어 쓰인 거예요? 바가지로. 예수님의 피를 바가지로 뒤집어쓰면 나에게서 나올 것은 죄와 더불어서 예수님의 피만 증거하면 되는 거예요.

하루에 몇 분동안 그렇게 해야 됩니까? 몇 분이 뭡니까? 구멍 난 얼음과자, 쭈쭈바의 구멍은 작아요. 어떤 때는 하루에 2초, 또 어떤 때는 한 달에 2초만 나올 수가 있어요. 이 십자가의 감사한 것이. 그러나 구멍 뚫렸으면 그 사람은 그 구멍을 따라서 필요에 의해서 계속해서 ‘걱정하지 마라 다 이루었다’ 하는 것을, 예수의 피를 집어넣어서, ‘너는 너 자신을 위해서 살 필요 없어. 이제는 나의 운반체야.’ 하는 것을 심어주는 일이 있을 겁니다.

있을 것이라고 하니 벌써 참 오래 됐지요? 한 6개월 지났는가요? 6개월이 지나든 1년이 되든 그게 바로 주일 낮에 설교한대로 정상이 아니고 비정상적인 사람이에요. 하늘에서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받을 수 없다는. 세례요한 자체가 비정상이잖아요. 정상적인 세계 가운데서 전혀 다른 세계관과 성경관을 갖고 있다는 것, 십자가중심으로 본다는 그것. 이것이 성령 받은 사도바울의 해석입니다. 자 되었지요?

(질문 4) “깨어 있으라”는 의미를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십시오.

첫 번째는 변수라는 것을 모른다. 두 번째는, 시간의 순환이라는 것을 몰랐지요. 세 번째 요한계시록은 다 이루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깨어있으라, 하는 것, 명령은 우리보고 행하라는 것이 아니고 주의 명령이 우리를 통치하고 지배한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의의 왕이에요. 왕은 주특기가 명령하는 거예요.

전에는 누가 명령했습니까? 죄가 나에게 명령하지요. 이 문을 열지 마세요. “엄마 바깥에 나갔다 올 테니 절대로 이 문 열지 마라.” 하는 순간 애는 벌써 이 문을 열 번도 더 열었어요. 절대로 이 함을 열지 마세요. 할 때 그 함은 벌써 뚜껑이 다 날라 갔어요. 너무 열어가지고. 하지 말라는 것은 곧 내 안에 괴물, 악마가 ‘하지 말라’를 ‘하고 싶다’로 전환시킵니다.

로마서 7장의 이야기입니다. “탐내지 말라”고 하는 순간 그 때부터 우리는 거기에 관심을 갖게 되어 있어요.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유명한 어떤 여류작가의 소설 이름이지요. ‘나는 소망한다.’ 금지한 것이 없으면 소망을 안 해요. 시시하기 때문에. 류현진이라는 야구선수가 미국에서 던지는데 못 던져. 맨날 했다 하면 10점 내주고 잘 못 던져요.

그러면 우리는 류현진 중계방송을 안 봅니다. 그런데 류현진이가 자책점 1점대 2점대, 여자 분들이 알겠냐마는, 사이영상 받을까 하면서 미국의 그 많은 투수가운데 제일 잘 던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mbc에서 중계방송 하는 거예요. 혹시나 이번에도 잘 던질까 싶어서 또 내가 소망하는 거예요. 내 소망한 것에 내가 계속해서 관심 갖기 마련입니다.

사람 사는 것이 밥 먹고 살다 보면 뭘 포기해야 되느냐 하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나 둘 잘라내야 됩니다. 유럽 여행도 가고 싶고. tv에 스페인여행 120만원, 이렇게 나오고 하면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나는 갈 시간도 없어. 처녀 때 같으면 결혼도 안 했겠다 돈 벌어서, 회사 경리해서, 돈 벌어서 연차내고, 배낭 지고 갔다 오겠는데 결혼하게 되면 애도 있고 또 허락받아야 되는 사람도 한 둘이 아니잖아요.

못가지요. 못가면서도 남편 탓 하면서 남편 붙들고 잔소리 해 대지요. 너 만나서 내 인생 조져놨다고. 가고 싶은 거예요.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서 하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뭐 때문에 못합니까? 그보다 더 급한 것이 있기 때문에 못하잖아요. 왜? 돈을 벌어야 그 나마 살림살이가 겨우겨우 애들 학원이라도 보내면서 이어가기 때문에 못하는 거예요.

그렇지요? 골프 치고도 싶고 다 하고 싶어요. 그런데 골프장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라요. 몰라 또, 골프장 캐디로 근무하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사람은 골프장 모르지요. 사람은 뭔가 계속해서 잡아당기는 것이 있습니다. 하고 싶어도 못하지요. 그러면 그 못한 것이 날라 갈까요? 아니면 그냥 속에 눌려져 있을까요?

‘돈만 벌어봐라. 제트 비행기 사서 다닐 거야.’ 눌려져 있지요? 그게 뭐냐 하면 정신병이에요. 위선자. 사이코패스에요. 터트릴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여자들이 전화 붙들면 두 시간씩 하는 이유가 이걸 풀어야 돼요. 언어로. 들어보면 레퍼토리가 똑같아요. 벌써 전화한다. ‘저 친구는 한 시간 반짜리다. 저쪽은 두 시간짜리.’

5년 전에, 10년 전에 했던 이야기 다 끄집어내요. 한 바퀴 돌면 1시간 걸려요. 거기에 새로운 것 보태면 한 시간 반 까지 늘어나지요. 해놓고 하는 말이, 우리 전화로 하지 말고 만나서 하자고 해요. 한 시간 반 동안 전화했는데 또 만나자고 해요. 뭐가 남아 있다고요. 그러나 이상하게 만나면 이야기할 것이 없었는데 만나면, “만나면 좋은 친구~” 만나면 또 생겨요.

현장성. 시도 때도 없이 생겨요. 왜 하느냐? 언어를 남에게 전달하면 자아를 잊어버리고, 자아를 잊어버리면 심적인 고통도 같이 어느새 없어져요. 제가 지금 아프잖아요. 다리 아프거든요. 불나보세요. 제가 제일먼저 뛰어나갈걸요? 급한 것이 있으면 서열화 시켜서 급한 것부터 먼저 처리하고 아쉬운 것은 창고, 나의 토치카, 깊숙하게 있는 나만의 고유한, 감추어놓은 금고 같은 것에 쟁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그 뾰족한 끝이 어디로 향할까요? 건성건성 앞에 내세운 것으로 향할까요? 아니면 어디를 겨냥할까요? 십자가가 여기에 꽂혀 버려요 빵구나버립니다 이게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내가 고이고이 비밀금고에 그 귀한 것, 주여 이것만큼은 안 다치려는 거기에 꽂혀 버립니다. 어떤 동생이 주님 앞에 와서 상담합니다. “형이 도둑놈 같아서 아버지 유산을 혼자 다 차지했습니다. 내 재산 좀 나누어주도록 주님이 좀 조언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 답변이 뭐였습니까? “이렇게 하면 네 재산 찾을 수 있다.” 이렇게 했습니까? “생명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라고 했지요. 그 소리만 들은 것이 아니고 잔소리까지 들었어요. “아직 집에 가지 마. 내가 이야기해줄게. 어떤 농부가 있었는데 농사가 너무 잘되었어. 처치할 데가 없어서 창고를 지었다. 창고 지어서 곡식을 다 집어넣어놓고 뭐라고 했게? ‘내 영혼아 염려하지 마라. 앞으로 먹고 살 것이 넉넉하다.’ 그렇게 했지.”

그러나 그날 오후 새벽 2시 46분에 주님이 찾아와서 그 영혼 데려갔습니다. 그 영혼 데려가면 이 창고에 있는 것이 누구 것이 되겠습니까? 누구 것이 되겠느냐고 도로 묻는 거예요. 상담하러 왔다고 도리어 질문을 받은 거예요. 네가 그 꼴이라는 거예요. 네가 예수를 우습게 본다는 겁니다. 네 소유나 챙기기 위해서 날 이용했다는 거예요.

주님은 피를 줬는데 그들은 돈을 달라고 교회 오는 거예요. 잃어버린 돈 달라고. “목사님, 그거 고쳐야 됩니까?” 고치지 마세요. 그걸 왜 고칩니까? 내 본색이, 천성이 그런데. 다만 그걸 발각되게 해주신 것이 대해서 감사하세요. ‘아, 이정도 개 같은 인간에게 주께서 귀한 피를 흘렸구나. 주여, 감사합니다.’ 한 5초나 가는가, 모르겠습니다만 5초면 어딘데요?

‘아, 주님, 살아 계시구나.’ 그냥 살아계신 것이 아니고 십자가로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아까 그 질문에 답변이 되었습니까? 그런데 아까 질문이 뭐였지요? 아, 깨어 있으라. 명령이에요, 명령. “깨어 있으라” 하는 것은 그 5초가 명령이었어요. 깨어있으라고 나보고 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에게 ‘깨어 있으라’하는 그 말씀대로 그대로 현실화시키는 도구로 너는 사용되었다는 겁니다.

말씀은 “깨어있으라.” 우리는 못하는데 주께서 “깨어있으라.” ‘아, 이게 깨어 있는 거구나. 주께서 다 이루었다는 것을 알게 하는구나.’ 돌아서면 다시 봉합돼요. 세상이 바쁜데 오래 가겠어요? 명령은 주께서 친히 행하십니다. 그것은 아까 요한계시록 할 때 했어요. 안에서 주께서 일하십니다. 베드로전서 4장에 그런 말씀이 나오지요. 네가 봉사하고 뭘 할 때 네가 했다고 하지 말고 주로 말미암아 했다고 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내가 멀찍 있는데 “너 말고. 너 아니었어.” 제가 청소했는데요. 아니고 “주께서 하게 하셨습니다.” 해줘야, 예수님을 경유해야 아버지께 영광이 된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베드로전서 4장에. 아, 이제 배고프다. 식사시간 되었습니까?

베드로전서 4장 10-11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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