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 해외가을특강 : 소모품인생 - 이 근호목사
마태복음에 25장 14절부터 30절까지 봅시다.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쌔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 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상당히 길게 말씀 읽었지요. 그 스토리가 있잖아요. 길게 이야기해도 그 흐름이 뭐라는 것은 아시겠지요. 열 개, 다섯 개, 한 개, 각각 줬는데 열 개는 열 개 남겼고, 다섯 개는 다섯 개 남겼고, 하나는 있는 하나 그대로 가지고 있다가 주인에게 되돌려 줬는데 주인이 버럭 화를 내면서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이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 바로 천국 이야기입니다. 이상하지요? 천국이라면 살기 좋은 곳으로 이야기해야 납득하기 쉬운데 천국 이야기가 살기 좋은 곳이 아니고 이 땅에서 두 패로 나눕니다. 하나는 악함, 악하게 등장하고 다른 한쪽은 충성되게 등장하지요. 그러면 이 악한 사람과 충성된 사람 다 해서 세 사람이 나오지요.
세 사람 나오는데 그림을 이렇게(칸을 지워서) 그렸지만 (칸을 없애서) 이렇게 그려봅시다. 이러면 세 사람 되잖아요. 세 사람이 되기에 여기서 예수님께서 천국 이야기, 달란트 이야기를 하기 전까지는 이걸 모른다고 치면 세 사람은 동등하지요. 등등해서 차이가 없어요. 이 사람, 이 사람, 이 사람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차이가 없는데 천국 이야기가 개입되는 순간 이 세 사람은 두 패로 나뉘었습니다. 한쪽은 충성된 칭찬받는 쪽, 또 한쪽은 졸지에 뭐가 되었지요? 지금 이 대목에서는 충성된 사람 몇 명입니까 두 명이고 악한 사람은 한명으로 되었지요. 이게 분류거든요. 선함과 악함이 분류되었잖아요. 이게 뭐냐? 천국은 죽어서 가는 데가 아니라 천국은 이 땅에서 일을 이미 시작하게 되면 뭐가 발생된다? 분류가 발생돼요.
어느 나라가 있는데 죽어서 가면 되겠지, 가 아니라 천국은 나중에 죽고 나서 어떤 거기에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천국이 이 인간세계에 개입되고 있다는 거예요. 어떤 일을 벌이고 있는 겁니다. 무슨 일을 벌입니까? 무슨 일을 벌인다고 되어 있지요? 사람과 사람사이를 분류를 시키는 겁니다. 분류를 시키는데 어떤 분류한다고 되어 있습니까? 충성된 자와 악한자가 분류가 된 거예요.
그러면 이 충성된 자와 악한 자가 분류될 때 어떤 자는 충성된 자고 어떤 자가 악한 자냐? 지금 우리가 이게 궁금한 거지요. 그래서 어떤 자가 충성된 자고 어떤 자가 악한자인지 결론부분이 굉장히 궁금해요. 다시 말씀드릴까요? 이게(분류) 없을 때는 모든 인간이 동등합니다. 고만고만해요. 살아가는 것이.
돈 벌고, 돈 쓰고, 그냥 끝나는 거예요. 그냥 똑같아요. 네가 잘났다, 내가 잘났다, 해도 믿지 맙시다. 왜? 인간이 인간을 평가하는 것은 인정하지 맙시다. 옆 사람이 다른 옆 사람을 평가하는 것을 인정하지 마세요. 왜? 그 평가가 하나님이 아니니까. ‘죽어서 좋은데 간다는 그것은 네 생각이고 나는 네 생각과 달라. 네가 어떻게 나를 평가해?’ 그것은 건방진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네가 하나님이야?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평가해요? 그 평가에 대해서 신경 쓸 필요도 없고 거기에 대해서 귀담아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너는 네 인생 살고 나는 내 인생 살면 되는 거예요. 같은 인간이 다른 인간 간섭할 자격도 없고 권한도 권리도 없습니다. 몰라요. 권세가 대단한 사람이면 아부라도 하는데 권세라는 것도 한 때 권세 아닙니까? 권세 없어버리면 그 다음부터 사람들은 또 갈아타기 합니다.
다른 권세자를 찾아다니기 때문에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평할 최종적인 위치에 있지 않는 거예요. ‘바르게 살면 천당 가겠지.’ 라고 생각하는데 그 천국이 여기에 개입되지 않는 상태에서 그 천국은 죽으면 가는 나라에요. 그런데 예수님말씀은 뭐냐? 천국이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고 이렇게 평범하게 서로 뭉쳐져 있는 여기에 천국이 찾아오게 되면…….
몇 번 물었는데 다시 물어봅니다. 여기 무엇이 일어났다 했습니까? 분류가 일어나요. 분류가 뭐냐? 충성된 종과 악한 종. 악한 종은 악하니까 어디에 가겠어요? 지옥에 가고 충성된 종은 천국에 가는 거예요. 그러면 무엇이 충성된 자고 무엇이 악한자인가, 그것이 결론적으로 궁금한 겁니다. 그 궁금한 것을 제가 미리 말씀드릴게요.
논리가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충성된 자, 이것은 뭐냐 하면, 몰살하는 거예요. 이 달란트 비유에서. 몰살이라는 뜻은 뭐냐 하면, ‘자기파괴’입니다. 자기파괴. 그러면 반면에 악하다고 하는 것은, 이쪽은 천국 가는 쪽인데 이쪽이 반대쪽이니까 이쪽은 ‘자기지킴’이지요. 내 인생 내가 지키면서 살겠다는 이것이 악함에 해당되는 거예요.
자, 천국의 개입이 없을 때는 세상은 다 고만고만해서 차이점을 몰랐는데 막상 천국이 개입하다 보니까 사람은 두 종류로 분류되는데 한 종류는 자기파괴, 자기몰살, 자기말살, 자기 자신을 없애버리는 쪽이 충성된 자고, 끝까지 내가 내 것을 지키겠다는 쪽이 악함에 해당되어 버리는 겁니다.
제가 결론부터 내렸기 때문에 이렇게 해서는 어떻게 그런 논리가 나오는지를 잘 모르겠지요. 그래서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미국 간 삼촌이 20대 조카보고 ……, 요새 한국에서는 조카가 좀 유명해요. 5촌 조카지요. 여러분 잘 모르지요. 미국 간 삼촌이 20대 5촌 조카보고 10억을 남기고 갔는데 가면서 그 10억을 다 말아먹고 3년 내에 미국으로 오라는 숙제를 냈어요. 그 십억을 다 말아먹고 오라는.
그러면 그 20대 조카가 한국에서 해야 될 일은 뭡니까? 미국에서 삼촌과 합류하기 위해서는 남겨진 10억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재산을 다 뭐하면 돼요? 말아먹으면 되지요. 이것을 소멸, 말살, 다 같은 뜻인데 소멸로 합시다. 소멸하는 일을 해야지요. 그 일을 할 때 돈 10억을 다 날리는 거예요. 유흥업소에 가든 어쨌든 돈 10억을 3년 내에 다 날리는 겁니다.
그게 자기에게 준 숙제라면 그 조카가 3년 후에 재산 다 날리고 미국의 삼촌을 만날 때 미국에 있는 삼촌이 칭찬할 조건이 뭡니까? “너 내가 준 돈 어딨어?” “다 날렸습니다.” “잘했다 이 충성된 종아. 참 잘했다 충성된 종아.” 그렇게 되는 겁니다. 왜 잘했다, 충성된 종이냐 하면 그 조카는 자기 것을 따로 남기지를 않았어요.
부부라 합시다. 부부는 남편과 아내, 남자와 여자로 되어 있지요. 이 남자가 부부생활 하면서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내 아내를 행복하게 하고 다정하게 해서 ‘참 나에게 시집 잘 왔다.’ 라는 것을 남기고 싶어서 남자가 여자에게 잘해준다면 그것은 충성된 종입니까, 악한 종입니까? 악한 종에 해당되는 거예요.
이해가 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내를 주신 것은 그 아내와 더불어서 인생 말아먹으라는 거예요. 인생 말아먹으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고 악한 남편은 뭐냐 하면, 내 아내를 내가 너무나 사랑해서 훌륭하게 키웠다는 자기 의로움이 남겠지요. 이게 바로 하나님 뜻에 위반되는 거예요. 여러분, 진짜 하나님이 상상이 안 되지요.
자, 가짜 하나님은 뭐냐 하면, 가짜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을 이용해서 누가 잘된다? 하나님을 잘 섬겼더니 나에게 이런 혜택을 줬다고 하나님을 우회했어요. 우회라는 말은 아시지요. 여기 인간이 있다면 하나님을 우회해서 어디에 소환하느냐 하면, 내가 이정도 괜찮은 존재임을 소환시키는 것, 구약에서 이게 바알신이고 이게 우상이에요.
인간이라면 다 이런 신이에요. 하나님을 이용해서 누가 잘된다? 궁극적으로는 내가 빛이 나는 그런 의도를 가지고 신을 믿는 것, 그걸 두자로 해서 종교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기독교거든요. 종교란 뭐냐 하면, 절대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믿는 나를 사랑해요. 그래서 성경의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과 달라요. 다른 민족은 종교를 갖고 있어요. 이스라엘은 본인이 소멸되어야 돼요.
아까 10억 받은 무슨 입장? 조카 입장이 되는 거예요. 10억 받은 조카 입장인데 이스라엘은 그걸 못했어요. 왜? 본인이 너무 아까워서. 그런데 그걸 해낸 분이 계십니다. 누구겠습니까? 예수님이지요. 아버지의 뜻을 받고 아버지의 뜻은, 내가 이 땅에서 사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서 소멸되는 거예요. 몰살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저주에 의해서 자기가 말살되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네 자로 자기파괴에요. 오늘 이 강의 제목을 대라면 ‘소멸’이라고 해도 괜찮고 더 정확하게 하라면 ‘자기파괴’라고 하면 돼요. 제목은 자기파괴. 아까 조카 이야기 다 시 해봅시다. 어렵지 않아요. 굉장히 쉽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조카에게 10억이 자기 돈입니까, 삼촌 돈 입니까? 삼촌 돈이지요.
삼촌 돈을 받은 것은 이걸 종자돈 삼아가지고 20억 30억 더 불리라는 것이 아니에요. 달란트 비유를 교회에서 설교하면서 어떻게 해왔습니까 제가 이야기하는 것과 정 반대로 하지요. “열 달란트 줬으니 열 달란트 남기세요. 두 달란트 줬으니까 두 달란트 남기세요.” 그런데 한 달란트는 남기지를 못했으니 지옥가고 봉사하고 충성해서 교회에 남긴 사람은 어디 간다? 천당 간다.
교회에서 이렇게 정반대로 가르쳤는데 정반대로 가르치는 이유가 모든 인간들은 신이 무슨 신이냐 하면, 참된 하나님이 아니고 바알신이기 때문에, 그런 의도가 있기 때문에 주님해석을 반대로 하는 거예요. 충성된 자라 하는 것은 주께서 남기신 것을 내가 많이 불리면 하나님에게 칭찬받겠지, 하는 거예요. 내 인생이 괜찮아야 내가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옥 가는 사람이고요. 이것은 악한 종들이고 천국 가는 사람은 내 인생이라 하는 것은 애초부터 있었다, 없었다? 없었지요. 내 돈 10억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없었어요. 전부 다 삼촌 돈이라니까. 아까 그 예 다시 들어볼까요? 남편이 아내에게 잘해줬다. 그래서 나는 무슨 남편 된다? 훌륭한 남편 된다. 이 의식, 이 사고방식이 지옥 갈 사고방식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부부가 결혼해서 아내를 왜 만났는가? 나는 말살당해도 마땅한 존재인 것을 아는 거예요. 왜냐하면 아무리 아내에게 해줘봤자 아내는 이 무슨 괴물인지 만족할 줄을 모르네요. 그런 것 느끼십니까? 아무리 최선을 다해봤자 이 괴물은 들어가기만 하지 나오는 것은 없어요. 뭔가 바닥이 없는 것 같아요. 계속 집어넣어도 끝이 없어요. 이거 해주면 저거 해 달라. 저거 해주면 이거 해 달라. 신도 아니고 말이지요. 남자가 무슨 신입니까? 로봇 입니까? 인공지능입니까?
도대체 고맙다는 말이 없고 만족도 없어요. 남편은 죽을 판 살판 하는데. 바닥이 없어요. 바닥없는 우물은 아무리 뭘 던져도 소리가 안나요. 풍덩이라도 소리가 나야 되는데 나지를 않아요. 왜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하고 왜 자꾸 반대로 생각합니까? 모든 교회가 그런 소리를 하고 모든 사람들이 교회는 그렇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본인이 자기파괴하고, 몰살하고, 소멸하는 이것이 얼마나 복입니까? 모든 고민과 근심이 어디서 나옵니까? 버티는데서 나오는 거예요. 지옥 가서도 버티려고 해요. 지옥 가서 버티는 사람 한 둘이 아닙니다. 자기 잘난 사람들 다 모여 있어요. 인생은 왜 사느냐? 소모하라고 하는 거예요. 10억을 소모하라고 하는 거예요.
그걸 키울 생각하지 말고. 말아먹는다는 제목이 제일 적당하네요. 내 인생 내가 말아먹어야 돼요. 한 90 사십니까? 90년 말아먹으세요. 한 80 사십니까? 80년 동안 말아먹고. 지금 이 달란트 비유를 길게 이야기했는데 그 길게 이야기 한 것 하나하나 설명하면 시간이 많이 가지만 핵심은 이겁니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이 한 달란트를 계속 남겨두었다는 것이 문제에요. 땅 속에 남겨둔 거예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것은 주인님 것이니 돌려드리겠습니다.” 하고 남겨둔 거예요. 주인님은 남겨두라고 준 것이 아니에요. 남겨두라고 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찬찬히 생각해 봅시다. 달란트란 옛날 돈을 이야기하는데 그 돈을 주신 분이 직원입니까, 주인입니까? 직원들에게 열 개 주고, 다섯 개 주고, 한 개 주고 자기는 먼 타국에 가버렸거든요.
공장이라 합시다. 그러면 그 공장의 주인이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그러면 누군가가 혹시 이거 하나 빌려줄 수 있습니까? 누군가가 없다는 말은, 눈에 안 보인다는 뜻이거든요. 눈에 안 보이는 것. 사람이 눈에 안 보이는 것에 대해서 신경을 안 쓰지요. 그러면 어디에 신경 쓰느냐? 눈에 보이는 것에 신경 쓰지요. 눈에 보이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있다. 또는 ‘여기 있다’고 하는 거예요.
우리 원장님, 그 의자에 누가 있어요? 누가 눈에 보입니까? 지금 그 의자에 누가 있는 거예요? 본인이 있지요. 있는데 오늘 이 강의에 의하면 이 있음을 소모를 시켜 놔야 돼요. 누가 소모를 잘 하고 있느냐를 하나님께서 지금 묻고 있는 거예요. 내 인생 영원토록 보존하고 간직하라는 말이 아니고 우리가 없는데서 생겼잖아요.
“당신 생일이 언제입니까?” 하면 “1천 구백 몇 년도……” 이렇게 나오잖아요. 그러면 1천 8백년 도에는 어디에 계셨습니까? 없지요. 없는데 천 1천 9백 몇 년도에 태어났잖아요. 그러면 없는데서 태어나서 지금 있지요. 그러면, 있으려면 이 있음을 어디로 바꿔야 되느냐 하면, 인간의 의무와 책임을 없음으로 바꿔줘야 돼요.
이게 뭐냐? 소모하라고 준 인생이에요. 10억을 줘서 돈 더 벌라고 준 것이 아니고. “아이고 조카야. 10억 줬으니까 20억으로 불려라.” 지금 삼촌이 그걸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그걸 원래 자리……, 원래 자리는 내가 없던 자리에요. 내가 없던 자리에요. 내가 없는 자리가 내 자리라니까요. 신기하지 않습니까?
내가 없는 자리에서 이게 있다는 이것이 신기하지요. 그러면 없는 게 있으면 여기 누가 있어야 되지요? 보이지 않는 분이 작용해서 없던 내가 있게 되지요.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 합류한다는 것은 있는 나를 없앰으로서 다시 없음으로 합류하면 되겠지요. 그 기능을 오늘 본문에서 달란트가 하는 거예요. 주인은 떠나도 뭘 남겼다? 열 달란트, 다섯 달란트 남겼지요.
그러면 그 달란트 가지고 용도가 뭐냐 하면? ‘내 것이 있다’가 아니라 아무리 벌어도 내 것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용도로 달란트를 써야 돼요. 그래서 열 달란트 받은 사람이 자기 것으로 했습니까, 주인에게 돌려줬습니까? 돌려주는 거예요. 천국은 뭐냐? 돌아갈 곳입니다. 우리가. 있는데 없음이 되면서 돌아가는 거예요.
목사님, 죽으면 그렇게 되지 않습니까? 아니에요. 천국은 죽어서 가는 데가 아니라 살아 있을 때 분류되는 거예요. 내 소속이 어디냐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면, 살아 있는 나를 없애려면 나는 뭐 하면 돼요? 있는 나를 소모하면 돼요. 소모하는 겁니다. 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면 돼요.
예를 들면, 미국에서는 고 3이 치는 시험을 수능이라 하지 않고 SACT라고 한다는데 그 SACT, 그 시험을 치러야 할 때 엄마가 자기 일을 포기하고 그 뒷바라지를 합니다. 그러면 엄마의 자기 일이 없어지지요. 없어지니까 그 순간 있음에서 뭐가 되었습니까? 없음이 되고 자식을 위해서 자기 것을 소모한 것이 되지요.
그 모습을 이 주인의 직원들이 보여줘야 된다는 그 말입니다. 사실은 가만있어도 소모해요. 늙어죽으니까. 그러나 가만있어도 소모되는 것은 결국은 소모되면서 무엇이 아까우냐 하면, 세월 가는 것이 아까워요. 이것이 악한 종이 돼요.
왜? 자기 자신에 계속 미련이 있으니까. ‘평생 40, 50 되도록 나는 뭐 했지? 미국 가서 고생만 되게 하고. 대체 미국 가서 뭐했나?’ 이걸 네 자로, 여러분이 다 아는 용어인데, 이걸 자기연민이라 해요. 자기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것인데 이걸 두자로 줄이면 이것을 교만이라고 해요. 이게 바로 악함입니다. 자기연민. 자기 자신에 대해서 굉장히 불쌍히 여기고 가련하게 여기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를 가련하게 여기는 것은 자기를 소모하고 버리겠다는 뜻입니까, 끝까지 지키겠다는 뜻입니까? 끝까지 지키는 곳이 어디냐? 이게 바로 지옥이거든요. 지옥은 주님이 주인공이 되어야 할 세계에 본인이 자기가 주인공이라고 버티는 모습입니다. ‘한 달란트 준 것이 주인이라면 그것은 내 것 아니야. 이것은 주인 것이니까 나중에 주인이 다시 오게 되면 주인 것 당신 것으로 돌려주면 될 것이 아니냐?’ 하는 이 말은 당신 것과 내 것 사이에 넘어오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당신 것 돌려줄 테니 당신은 내 것 건드리면 안 돼.’ 이것이 바로 천국에서는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은 없는 존재에서 있는 존재가 되었잖아요. 있는 존재가 되었다면 어떻게 없는 존재에서 있는 존재가 되었는가? 과학은 설명할 수 없지요. 과학은 dna를 기초로 하니까. 과학은 있는데서 있는 것이 나와요. 왜냐하면 과학은 왓슨과 클릭이 1953년도에 발견한 dna구조가 있어요.
노벨생리학상 받았어요. 제가 이 숫자를 기억하는 이유는 제가 그 해에 태어났기 때문에. 이들이 영국학자들이거든요. 이 dna 때문에 25년 된 미제의 범죄가 해결되었어요. 한국의 화성 연쇄살인사건. 모든 의학이 이 dna 아닙니까? dna를 편집하고 잘라서 새로운 인종을 만들겠다고, 그게 돈 된다고 하잖아요.
인간의 모든 육체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dna가 자기 확장을 추구해서 그게 자손이 된다는 이론이 나왔다는 말이지요.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이 나왔잖아요. 이렇게 있는데서 있는 것이 나와요. 그러면 dna이전에는 뭐냐? 그냥 계속 dna에요. 그 이전은 몰라요. 그냥 모른다고요.
성경에서는 없는데서 나왔다는 말도 되지만, 이것은 구약이지만,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나왔다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피조물이다. 그렇게 합니다.
그러니 천국은 누구의 세계입니까? 인간의 세계가 아니고 하나님나라니까 하나님의 세계지요. 하나님의 세계에 우리가 합류하는 거예요. 합류할 때는 무엇이 방해되느냐 하면, 내 것이 방해돼요. 왜냐하면 천국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내 것을 계속 사수하면 안 되잖아요. 그러면 이 땅에 60년, 70년 계속 왜 사느냐? 소모하라는 말이지요. 내 것이라 여기는 것을 소모하는 거예요. 없애버리라는 말이지요.
아까 자식 공부하는 것도 예를 들었고 또 열심히 무슨 일을 벌이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아까 한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해보겠습니다. 처음으로 돌아왔습니다. 여기 세 사람이 있다고 했지요. 고만고만해요. 네가 잘났다 내가 잘났다고 할 수가 없어요. 그 하는 말도 들을 필요도 없고요. 왜 남이 나에게 무슨 권리로 이렇다 저렇다 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똑같아요.
너는 네 갈길 가고 나는 내 갈길 가면 돼요.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이 있다면 각자 너는 네길 가. 너는 네 길로 가고. 너도 네 길로 가고. 그러면 그만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니 인간이 인간에게 주눅들 필요가 없어요. 주눅이라는 말 아시지요? 인간이 인간에게 주눅들 필요가 없다고요. 한 때 돈 벌수도 있고 또 망할 수도 있고요. 망하다가 계속 망할 수도 있고 잘되는데 계속 잘 될 수도 있고.
이것은 누굴 부러워할 필요도 없고, 각자 개성 있는 자기 인생을 살면 그만이에요. “내 일에 간섭하지 말라. 내일에 토 달지 말라. 너는 네 일이나 하라.” 이렇게 살면 그만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빨강, 노랑, 파랑, 이 셋 중에서 파란색 사람이 교회를 다닌다는 거예요. 교회를 다니면 빨간색이나 노란색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우우~, 하겠지요.
네가 교회 가서 결국 기도하는 목적이 뭐냐? 이쪽이 5억이고 이쪽이 3억 가지고 있는데 교회 가서 기도해서 3억이 뭐로 바뀐다? 7억이나 8억으로 바뀌면 그것으로 네가 나 이기려고 하지. 이쪽이 위너가 되지요. 갑자기 한쪽이 위너가 되면서 졸지에 상대방이 뭐가 됩니까? 루저가 되어버려요. 졸지에 패자가 되지요.
인생이라 하는 것을 한 번 따져보세요. 간단한 겁니다. 승자와 무엇의 구분이다? 승자와 패자의 구분이지요. 승자와 패자가 있는 것을 가지고 이것을 게임판이라고 합니다. 이 게임판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세상, 또는 현실입니다. 사업하시지요? 왜 하십니까? 패자가 되려고 합니까, 승자가 되려고 합니까?
승자가 뭐냐 하면, 승자가 오래 살아남는 것이 승자에요. 일찍 말아먹고 자살해서 죽는 것이 패자라는 겁니다. 이 세상은 아무리 학문적으로 따져도 간단하게 조립하고 정리하면 딱 이겁니다. 게임이에요. 게임하고 있는 겁니다. 특히 여성보다 남성들이 민감해요. 왜냐하면 못 먹어도 허세 같은 것이 있어서 나는 안 졌다, 하는 것이 있습니다.
특히 남자들이 술 먹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낮에 패배한 것을 밤중에 ……, 뭔가 패배한 것을 술잔 앞에서 자기는 패자 아니라고 애써서 감추기 위한 허세 같은 것으로 술을 먹어요. 술 먹으면 더 플러스 되는 기운 같은 것이 올라와서 큰소리칠 수 있거든요. 승자는 큰 소리 치는 자고 패자는 유구무언,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 겁니다.
이 세상은 게임판이고 무조건 따지지 말고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뭐가 되어야 된다? 승자가 웃는 자고 이 웃는 자를 사람들은 행복한 자로 보는 겁니다. 인생관이 어떠니 따지지 마세요. 제가 간단하게 정리해 드리면 세상은 게임이고 사람은 나름대로 패자보다 승자가 되려고 하는 거예요. 예쁜 아내 만나는 그것도 못난 아내보다 승자가 되는 거지요.
내가 남자로서 성공했다는 소리를 들어야 예쁜 아내를 가질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했잖아요. 자식들 잘 먹인다고요. 자식들 잘 먹이기만 하면 됩니까? 이왕이면 패자보다 뭐가 되게 하고 싶어요? 승자가 되게 하고 싶지요. 여기에 기운이 좀 빠졌다. 그러면 이 파란 여자가 어디로 간다고 했습니까? 교회로 가요. 왜 갑니까?
뭐가 되기 위해서? 승자가 되기 위해서. 이게 바로 종교, 또는 종교생활이라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지옥 가는 방법인줄 아시겠지요. 이 교회에서 무슨 용어 이야기합니까? 많이 들었지요. 주 이야기하지요. 성령 이야기하지요. 예수 이야기하지요. 삼위일체 이야기하지요. 자, 이 용어는 무엇에 필요한 겁니까? 나로 하여금 게임판에서 뭐 되게 하기 위한 용어? 승자가 되게 하기 위한 용어, 핑계에 변명에 지나지 않아요.
이 교회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 지옥이에요? 얼마나 무서운 단체입니까? 천국을 가로 막잖아요. 여기는 승자가 되고 싶은 사람, 또는 승자가 못돼서 한이 맺힌 사람, 또는 승자를 기약하는 사람, 또는 승자가 되었다고 으스대는 사람, 또는 승자되지도 못했으면서도 있는 척 하는 사람들이 다 모여 있어요. 그 교회 가서 “하나님 저 말살되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 봤어요?
“하나님, 빨리 소멸되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 봤습니까? 아니지요. 오래 살되 건강하고 부자 되게 해달라고 하잖아요. 심지어 아까 여자 쪽에서 교회 간다고 했는데 남편은 왜 여자가 교회 가는 것을 방치하느냐? 네 확신은 안 믿지만 혹시 네가 기도해서, 혹시, 혹시라도, 그런 일은 없지만, 혹시라도 네게 승자가 되는데 필요한 조건들을 제공한다면 아내덕분에 내가 이익을 보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오늘날 교회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누가 세웠게요? 마귀가 세운 거지요. 십자가 걸고 마귀가 세운 겁니다. 그걸 설교시간에 이렇게 했어요. 주술적이라고 했어요. 주술적이 무슨 뜻이겠어요? 같은 단어를 반복하면 신께서 기적이나 효과를 줄 것 같은 기대감, 이게 주술적이에요. 옛날 주술적인 것들은 좀 촌스럽지요.
부적, 또는 점치는 것, 토정비결. 이게 주술적인 거예요. 이제는 용어가 바뀌었어요. 옛날에는 좀 촌스러웠지만 교회 가서 보면 서양식이기도 하고, 또 찬양 선교, 뭔가 상당히 멋있어 보이지요. 성만찬도 하고. 멋있어 보이지만 주술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왜 목적이 이 게임판에서 패자가 아니고 졸지에 행운 얻어서 승자가 되기 위하기에 그렇습니다.
좋은 가정 이루고, 화목한 가정 이루고, 착하면 뭐 받고? 복 받고. 승자가 되잖아요. 착하면 복 받아서 이 복이 나를 이 게임판에서 승리자가 되는 거예요. 패자가 되지 않고. 그래서 남자에게 제일 싫은 것이 뭐냐? 네가 졌다는 것. 이것은 초등학교 애들부터 지기 싫어서 벌써 주먹 쥐고 싸우려 들지요. 이게 커서 어른 되어도 마찬가지에요.
“무슨 차타고 다녀?” ‘음매 기죽어.’ 또 ‘음매 기 살아.’ 하잖아요. 무슨 차, 어느 아파트. 모든 것이 다 게임에서 내가 최고가 되겠다는 그 본성은 달라지는 일이 없어요. 처음부터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세 사람이 있어요. 세 사람이 있을 때 서로가 서로를 봅니다. 1. 나는 쟤보다 아니지만 얘보다는 이겼다. 2. 나는 이중에서 제일 못났다. 3. 나는 저 사람들보다 제일 낫다. 이 때 제가 물을게요.
이 평가가 맞습니까, 틀렸습니까? 이것은 틀렸지요. 왜냐하면 일방적이에요. 이 사람이 보는 것과 이 사람이 보는 것이 다 다르지요. 가위 낸 사람, 보 낸 사람, 가위 바위 보, 각자 내는 사람들이 다 다르듯이 어떤 하나가 진리가 아니거든요. 서로 평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고 전부 일방적이에요. 그런 식으로 전부 뭉쳐서 돌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 사실을 통해서 ‘그들은 누가 뭐래도 나는 멀쩡하다.’ 하는 이런 기본자세가 되어 있지요. ‘그래. 잘 먹고 잘살아라. 소박하나마 나는 이 돈 가지고 살 거야.’ 이 말은 뭔 뜻입니까? ‘아무리 돈 없고, 힘없고, 남들이 나를 실패자라 할지라도 나는 나를 절대로 그런 식으로 패자로 보지 않아.’ 이게 네 자로 뭐라고 했어요. 자기연민이지요. 내가 나를 안 챙겨주면 이 세상에 누가 나를 챙겨주겠어요?
남자들 술 먹으면서 하는 소리잖아요. ‘내가 아니면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그런데 이것은 자기가 멀쩡하다고 하면서 ‘나는 옳다. 나는 정당하다.’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천국은 ‘아이고, 죽어보면 있는지 없는지 그 때가서 확인할 것인데 미리 알 것이 뭐가 있어?’ 했는데 예수님은 미리 천국은 이렇다고 여기 와버렸다는 말이지요.
분류를 해버렸지요. 분류를 해보니까 한쪽은 충성된 종이라고 했지요. 또 한쪽은 뭐냐? 악하다고 했지요. 그 이유는 설명해 드렸습니다. 그러면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이 충성된 자가 스스로 충성되면 악합니까, 악하지 않습니까? 이 충성된 자, 주님이 충성되었다고 이야기한 그 자가 스스로 나는 충성된 자가 맞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악할까요, 선할까요? 악합니다.
뭐가 붙었느냐 하면, ‘충성되다’는 것이, 있는 분이 우리를 이렇게 규정을 해줘야 되는데 본인은 소모용이잖아요. 없어질 인간이 마치 ‘나는……’ 이라고 이걸 집어넣으면 충성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계속 살아 있어야 될 모순에 빠지는 거예요.
언젠가 그런 이야기 했는데 맨해튼에 가면 세계에서 제일 비싼 아파트가 있어요. 중앙파크에 보면 그 빌딩이 세계에서 제일 비싼 아파트에요. 그 아파트에서 나이 50된 어떤 전직 모델이 자살을 했는데 자살을 한 이유가 뭐냐? 내가 옛날처럼 예쁘지 않기 때문에 자살했거든요. 그거 잘 기억하세요. 예쁘다 할 때 앞에 뭐가 붙어요. 누가 예쁘지요? 내가 예쁘지요. 남들이 예쁘다 하면 돼요. 문제는 남들이 예쁘다 하는 것에 사람들이 멈추지 않고 남들이 뭐라 하니까 ‘내가 예쁘다’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이것은 어느 단계냐? 예수님말씀 없이 인간들끼리 살 때는 이게 돼요. 내가 예쁜 것이 아니고 여기 있는 빨강, 파랑, 얘들이 나를 예쁘다고 했는데. 이렇게 되면 예쁜데 그 다음 언젠가부터 안 팔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모델인데 안 팔려요. 내가 분명히 예쁜데 남들이 안 알아주지요. 그러면 남들 보기에 ‘예쁘지 않다’가 되지요.
한때 예뻤지요. 예쁘지 않을 때는 내가 있을 이유가 없지요. 나는 예쁜데 예쁘지 않은 나는 내가 용서가 안돼요. 그러면 그 여자는 얼추 살만한데도 불구하고 뭘 선택했느냐 하면, 자살을 선택했습니다. 이 말은 곧 뭐냐? 남들이 주는 평가가 곧 내가 되어버린 거예요. 그리고 그 평가가 나를 좋게 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자 다시 묻습니다. 참 중요한 거예요. “충성된 종아” 할 때 앞에 뭘 붙이면 돼요, 안돼요? “내가 충성되다”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응용문제 들어갑니다. “나는 믿는다.” 이게 신자에요, 신자 아니에요? 신자 아니지요. 믿는다는 말을 앞에 붙이면 안돼요. 나는 소모용이니까. “나는 믿지 않는다.” 이걸 가지고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일반교회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믿는다고 하지 않아요. “믿씁니다!” 해요. “믿씁니다!” 할 때 누가 잘났어요? 믿는 내가 잘났지요. 그러니까 기존교회에서 믿는 이 사람들이 지옥 가는 이유가 자기 자신을 너무나 믿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그 교회에서 승자가 되기 때문에 아까워서도 소모를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스스로 말살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10억을 빨리 허비를 해야 되는데 내 인생이 너무 찬란하고 너무 멋있어서 소모가 안 돼. 목숨 걸고 지키고 싶어. 이것은 정신병이에요. 왜 정신병이냐 하면, 이 빨강인 내가 아무리 지켜도 옆에 있는 노랑, 항상 나보다 앞서가는 사람이 있어요. 백 평짜리 아파트 사는 사람이 있으면 옆에 150평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있어요.
현대 차 몰고 왔는데 벤츠 몰고 온 사람이 있어요. 재산 한 40억 되는데 동창생이 60억 가지고 나타났어요. 자기는 백억 자산가인데 천 억짜리 재벌 되어서 왔어요. 내가 나를 지키려 하니 스스로 본인이 지옥갈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와서 뭐라고 하면, 이것은 하나님 것이라고 하면서 도로 줘버리는 거예요. 하나님 것 따로 놀고, ‘내가 잘난 맛에 사는 나는 내가 잘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거예요.
자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거예요 그러면 성도는 어떻게 되느냐? 성도를 이렇게 보면 돼요. 자, 진짜 어려운 것인데요. ‘성도 = 말씀의 운동장’이에요. 또는 말씀의 통, 믹서기라고 보면 돼요. 성도는 껍데기인데 안에 말씀이 있는 것을 성도라 해요. 이 말씀 속에 뭐가 있느냐 하면, 충성된 자도 있지요? 앞에 나를 붙이면 안 됩니다. 주께서 일방적으로 충성된 자라고 하죠. 그 다음에 또 악한 자가 있지요.
그러면 성도라 하는 것은 이 두 가지 요소가 다 들어 있겠습니까, 아니면 악한 요소가 없고 충성된 요소만 있겠습니까? 성도는? 어느 쪽입니까? 성도는 충성된 것만 있겠어요, 악한 것과 함께 둘 다 있겠어요? 둘 다 있어요. 이게 정답입니다. 성도가 온전하지가 않습니다. 성도는 천사가 아니에요.
성도는 본인이 얼마나 허접하고, 얼마나 믿음 없고, 얼마나 돈밖에 모른다는 사실을 성도가 아닌 사람은 감추는데, 성도는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절대로 내 힘으로 구원이 된다, 안 된다? 안 되는 것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거예요. 주께서 아무리 소모하라고 해도 나는 내 것 따로 챙기고 싶어요.
‘주님, 이것은 누가 뭐래 해도 내가 투자했잖아요. 애 네 명 이거 내가 키웠습니다.’ 성도라 하는 것은 완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해지는 것은 교만이고 성도라 하는 것은 완전할 수 없음을 미리 당겨서 아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자기가 죽는 것은 내 죄 값으로 당연한 조치임을 아는 거예요. 충성된 자, 악한 자, 이게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말씀이잖아요.
말씀에 들어 있으면 이 말씀의 완성이 뭘까요? 말씀의 완성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내가 죽어야 되는데 누가 죽었다? 예수님이 대신 죽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성공의 결과가 성도라는 이 빈 깡통 속에 들어옴으로서 성도는 그 말씀의 운반체지요. 주님의 말씀의 운반하다 보니까 어디 갔다? 천국 가는 거예요.
못났는데, 악한일 선한일이 다 들었는데 그 다 들어 있음의 완성이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이거든요. 예수님의 죽었다는 사실과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과 만나서 함께 가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의 삶은 하루를 살고 일 년을 더 살면 죄가 늘어날까요, 줄어들까요? 죄가 늘어나지요. 죄를 더 지었단 말이 아니고 몰랐던 죄가 발견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는 것도 죄고 헌금하는 것도 죄고 이 강의하는 이것도 죄가 되고. 아까 빨강, 파랑 노랑, 이 사람 세 명이 다 성도라면, 지금 우리들처럼 ……, 갑자기 뭐가 좀, 어쨌든 우리들처럼 했다면 서로 뭘 내놓겠어요? 나는 못난이. 나는 잘난 것이 없습니다. 말만 해도 잘했어요. 나는 내가 잘한 것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잘난 것이 없습니다.
잘난 것 없으면 누구만 자랑하겠어요? 못난 자를 못났다고 알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라고 되어 있어요. 성령님은 예수님이 대신 죽었다는 것을 앞장세워서 하는 거예요. 진짜 끝으로 말씀드립니다. 예수님 죽으실 때 십자가가 몇 개 있습니까? 세 개 있잖아요. 한쪽 강도는 자기를 지키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한동안 예수가 구원자라고 유명했거든요.
이 강도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당신이 능력이 있거든 나를 당장 이 죽는데서 빼내주면 믿지 말래도 믿어줄게.”라는 이야기를 한 거예요. 이 강도의 말이 굉장히 이성적이지요. 이성적이고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너무나 우리 맘속 바탕에서 뿜어져 나오는 우리의 욕구에요. 예수님이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두 종류의 강도를 다 둔 거예요.
“당신에 나에게 유리하도록 작용하도록 하면 믿지 말래도 믿을게 자진해서 헌금할게. 자진해서 새벽기도 나올게.” 당신이 먼저 나에게 해주면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겠다는 거예요. 일종의 사업 거래하듯이 하는 거예요. 그런데 다른 한쪽의 강도는 말하기를, “내가 강도된 것은 주님의 뜻입니다.” 왜? 내가 지킬만한 가치가 없이 소모용이니까.
아까 이야기한대로 한국에 있는 조카가 가진 10억짜리 재산을 무사히 이 강도는 다 소모를 한 겁니다. 아, 이런 발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정말 찾기 힘들어요. 내 인생은 지키기 위함이 아니고 소모하기 위함이다. 소모하고 결국은 내가 죽을걸. 결국 내가 죽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소모하면서 어느 정도로 나는 악하고, 어느 정도로 나는 내 중심적이고, 어느 정도로 나는 남들도 모르고 나는 나밖에 없다는 것을 아주 처절하게 절감하는 기간, 그게 내 인생, 내 인생은 바로 그 인생이다.
일부러 칼 들고 설칠 필요는 없고요. 그냥 곱게 살아도 나 중심이에요. 강도 둘 다 나 중심이에요. 여기서 뭔가 벗어날 생각하지 마세요. 다른 인생 찾지 마세요. 도 닦을 생각하지 마세요. 교회 다니나 안다니나, 하나님 믿나 안 믿나 인간은 나중심입니다. 중요한 것은, 한쪽은 그걸 안다는 것과 한쪽은 그걸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아는 사람은 뭘 받았다? 성령 받은 사람이고 모르고 있는 사람은, 성령이고 뭐고 항상 옆의 사람만 쳐다보고 살아가기 때문에 ‘누구야? 나 지적할 사람 없지? 나는 옆 사람 보고 버틸 거야.’ 하는 사람, 이게 바로 지옥 가는 사람이에요. 하나님께서는 분류하십니다. 죽어서 분류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을 때 이미 분류해요.
‘죽어서 천당 간다. 가봐야 알지.’가 아니라 이미 살아 있을 때 난데없이 멀쩡한 인생을 가지고 “너 보기에는 잘나 보이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더럽다.”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 “다른 사람보고는 몰랐는데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대신 희생한 것을 보면서 내 죄 때문에 저분이 저렇게 피 흘려 죽었구나.” 하는 연관성을 가질 때, 연결성을 가질 때 그 연결성을 가지게 하는 것이 성령이거든요, 그 십자가와 나와 연결성을 가질 때, 내가 돈 좀 있지만 나는 자랑하는 것이 뭐냐? 오직 십자가만 자랑할 뿐이다. 그것이 바로 성도인 겁니다. 충성되고.
주님 보시기에 자기 모습을 십자가의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니까 충성되었다는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지요.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짧은 시간이지만 예수님의 개입을, 일찍 오신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 주셔서 감사합니다. 죽어서 만날 수도 있는데 일찍 와서 나대신 피를 흘려주시고, 걱정하지 말라, 다 이루었다고 해주신 그 뜻과 그 의미를 저희들이 이제 모르지 않고, 눈치 채고, 알아채는 살아 있는 성도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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