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90614a야5장10절(소명의 폭력적 침입) - 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야고보서5장11절부터 하겠습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우리가 누구로부터 계속 도움 받고 있다는 것. 그 느낌 때문에 우리가 교회 다닙니다. 그리고 신이라 하는 것을 믿고자 하는 겁니다. 이 세상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혜택을 입고 있다는 그 느낌만 해도 장래에 우리가 희망이 생기지요.
혼자서 뭔가 세상을 꾸며나가면 엎어지고 자빠질 때 우리를 일으켜 줄 절대자가 없을 때 상당히 우리는 좌절을 느낍니다. 그런데 우리가 누구로부터 늘 도움을 받고 있다고 한다면 그 분과의 좋은 관계가 우리의 장래까지 보장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되지요. 그러면 도움을 받게 되게 되면 상당히 우리가 기쁜데, 그러면 어떤 생각까지 하게 되느냐 하면 도움 받고, 도움 받고, 또 도움 받고 해서 나중에 죽어서 이 세상보다는 훨씬 더 월등하게 좋은 세상에 갈 때까지 도움 받게 된다. 그건 횡재한 겁니다.
특히 그런 마음을 가지고 내가 여기서 고생을 하지만, 나중에는 행복한 미래가 내세가 주어졌다는 그런 마음을 일단 가지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성경을 창세기를 보게 되면, ‘아~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인간을 낙원에 살게 했구나!’ 그게 딱 들어오잖아요. 낙원. 우리 조상은 낙원에 살았던 적이 있는 사람인데, 뭐 우리 인간은 그 위에는 없었고요. 조상이 낙원에 산다면 그게 낙원에 살도록 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참 좋은 결정이라는 생각을 갖게 돼요. 내가 이런 사실을 몰랐으면 어쩔 뻔 했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든다 말이죠.
낙원에 보내주신 하나님을 내가 안다. 그러면 나의 미래는 보장된다. 아이고~ 이거 기쁘다. 우리는 그것을 굉장히 좋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 창세기2장 낙원 에덴동산이 있다는 것은 기쁜데 오늘 본문 11절을 보게 되면 여기 욥이 나온다고요. 10절에 보면,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이리 되어있지요. 선지자라고 하고 선지자의 특징을 뭐로 보느냐 하면 고난으로 보는 거예요. 선지자들은 무엇을 받은 사람이다? 고난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면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하나님께서는 좋은 분이라서 우리를 낙원에 보내준다. 그 생각하면 즐거운데 실제로 하나님과 함께 있던 사람들은 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즐거움이 유지되는 것이 아니고 연속되는 것이 아니고 뭐를 대표로 내세우는 거예요? 선지자의 삶이라는 것을 대표로 말한다면 고난 받은 적이 있던 사람 또는 고난 속에 있는 분. 이게 그들의 특징이 대표가 된다 말이죠.
낙원이 있을 때는 좋았지요. 희망이 있다는 건 좋은 겁니다. 그런데 이 고난 없이는 갈 수 없겠느냐 하는 겁니다. 고난 없이. 여기서 이제 살짝 갈등이 오는 겁니다. 하나님은 좋은 분인데 왜 고난을 주지? 고난 없이 우회해서 다른 길로 빙 돌아서라도 고생 없이 천국 가는 그런 방법을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왜 고난을 주시지? 그런 생각이 들고, 또 선지자들이 하나님과 함께 있어 고난 받았다면 이건 무슨 공식을 쓰느냐 하면 뭐 없이는 뭐 없다? 고난 없이는 뭐 없다? 구원 없다가 돼요. 고난 없는 구원은 있을 수 없다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 가야 되느냐 하면, 낙원이 있다. 낙원이 요새 말로 하면 천국이겠지요. 낙원이 있다, 즐겁다, 기쁘다, 에서 어디까지 포함을 시키느냐 하면 고난 받게 된 것이 기쁘고 즐겁다로 까지 나아가야 돼요. 고난 받는 것이. 왜냐하면 이 코스 말고는 다른 코스는 없기 때문에. 여기서 이제 소위 예수 믿고 하나님 믿고 천당 가려는 사람 많이 떨어지지요. 여기서 우수수 다 떨어져나가요. 다 떨어져나간다고요. 천국 가는 건 좋은데 고난까지 즐거워하라는 것은 너무 인간의 능력을 오버하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 없습니다. 따라서 나도 그 정도까지 감내할 마음은 없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이리 되는 거예요.
그렇게 자꾸 성경내용대로 피할 것이 아니고 제대로 될 사람 같으면 물어봐야지요. “왜 고난 없이는 고난이 없습니까?” 물어 봐야 된다고요. 성경을 보고 묻던지, 목사님보고 묻던지. 먼저 아는 사람에게 묻던지, 자꾸 물어봐야 돼요. 물어봐서. 그냥 고난 있다는 것은 이건 특별한 사람, 믿음 되게 좋은 사람에게 해당되고 나머지는 고난 없이도 갈 수 있겠지. 라는 그러한 지 마음대로 그렇게 구원에 코스를 설정하지 마세요. 그건 반칙입니다. 고난 없이 무슨 구원이 있습니까? 성경을 아무리 봐도 고난 없이도 구원이 된다는 구절은 없어요.
“너가 예수를 믿느냐?” “예” “믿는다면 주님의 십자가 가는 길을 니도 가라.” 그게 성경 줄거리 아닙니까? 저는 그렇게 보이는데요. “예수 믿습니다. 예수 믿고 천당 간다면서요? 행함이 아니고 믿음이라고. 믿습니다. 끝.” 이게 아니라 “믿냐?” “믿습니다.” “그럼 니 차례” 왜? 선지자들도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그리고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이름 나오지요. 스데반집사. 집사 중에 집사. 스데반집사가 많은 구제를 하고 성령을 통해서 전도도 많이 하고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지요. 그러나 인생 끝이 어떻게 끝장났습니까? 돌에 맞아죽지요. 우리는 스데반집사 보고 장하다, 훌륭하다, 믿음 좋다, 정말 순교자구나! 성령 받은 사람 티를 팍팍 내는구나! 아, 정말 대단하다. 지금 이러고만 있을 거예요? 성령 받은 집사가 이 길로 간다면 성령을 받은 성도가 이 길을 회피하거나 기피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냥 두시겠어요? 스데반집사 가는 길을 가게 하시지요.
성경에 나오는 모델케이스는 그야말로 모델케이스에요. 시범케이스라고요. 시범케이스. 시범이라 하는 것은 우리는 니는 안 해도 된다는 게 아닙니다. 니가 예상 못한 길을 가게 할 것이라는 뜻이에요. 이게. 선지자, 오늘 본문 욥의 인내. 욥이 갑자기 등장하는 거. 하나님은 욥을 쓰레기 취급했어요. 욥은 스스로는 쓰레기 아닙니다. 믿음 좋지요, 부자지요, 아이 열 명 믿음으로 신앙으로 잘 키웠지요. 어딜 봐서 쓰레기입니까? 어딜 봐서 남한테 욕 얻어먹을 일이 뭐가 있어요? 어딜 봐서 벌 받고 고난 받을 그런 건덕지가 없습니다.
친구들이 아무리 분석하고 탐색해도 도대체 욥이 고난 받는 이유를 몰라요. 욥이 고난 받는 이유를 모른다는 말은 한마디로 말해서 그들은 하나님을 잘못 섬기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아는 기존의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었다. 아니었다 하는 겁니다.
이야기를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 뭔가 누구로부터 혜택 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그것은 아마 신일 것이라고 여기고, 전능하니까. 그 신이 어떤 뜻을 갖고 있는가 성경을 펼치니까 낙원이 등장하더란 말이지요. 그리고 요한계시록22장에 보면 거기에 마지막 낙원 나오지요. 천국이란 이름의 낙원. 낙원과 낙원 사이에 인간이 끼어 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 말씀대로 믿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나는 어디 간다? 천국 가니까 이런 장사를 내가 마다할 리가 없지요. 이런 혜택을. 죽기 살기로 믿어야 되겠다는 마음이 들지를 않습니까.
자, 그런 생각이 들 때, 이런 생각을 내가 이건 분명히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까요? 안 들까요? 추호도 들 리가 없지요. 게다가 교회에서 목사, 집사, 장로들이 계속해서 부추기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 믿으면 잘된다. 잘 풀린다. 하나님 믿어서 복 받은 사람 사례를 한 바가지로 들어도 그 숫한 사례들이 있다. 그러니까 당신도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만 믿으면 하나님은 복 주시는 하나님이고, 사랑이 많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당신이 어떤 오류를 하더라도 주께서는 당신을 지켜주셔서 당신의 원대로 편안한 인생을 보장한다. 그런 식으로 위로와 위로 덤버기 포기 위로 더하기 위로. 위로 포하기 위로. 위로. 위로. 격려, 격려 외에는 할 일이 설교에 나올 게 뭐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니 교인들은 자기가 잘나고 있고 정상적인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교회 가서 무슨 자랑하느냐, 누가 누가 복 받는 자랑 그거 내놓고 배틀 경쟁에 나서는 겁니다. 그거 없으면 음메 기죽어! 있으면 음메 기살어! 하고 그 재미로 가는 거죠. 집에 문제 있으면 교회에 안 나오고요. 교회에 안 나오면 무슨 문제 있다고 보시면 돼요. 뭔가 자랑거리 있으면 씩씩한 보람찬 발걸음을 해서 교회에 나와서 기도해서 티 다 내버리고. 감사헌금해서 티 다 내버리고. 뭔가 이 자체가 이게 옳지 않거든요. 이게 지금 속은 거예요. 이게. 방금 이야기했던 이 자체가 속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어떤 근거해서 속고 있느냐를 말씀드린다면 그것이 뭐냐, 말씀이 나 자신을 안 건드리기 때문에. 성경 말씀이 내 내부에 감추어진 것을 안 건드려주고도 천국 가는 방법을 이 교회에서 하고 있어요. 회원 모집하는 게 급하기 때문에. 교회 부흥이 급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근원적인 것을 안 건드려요. 아니 건드리고 싶어도 몰라요. 인간 안에 인간 속에 뭐가 있는지 마귀가 들어있다는 것을 애써 감추기도 하고 또는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를 수도 있고. 성령 받아 새사람 되었습니다. 하니까 진짜 새사람 된 줄 알고 있어요.
여러분, 새사람 되었다는 생각을, 자부심을 왜 갖느냐 하면 무엇을 피하고 싶은 충동을 있기 때문에 그러냐 하면 이 고생, 고난을 어쨌든 간에 피하고 싶은 발악입니다. ‘내가 이렇게 바르게 살면 설마 바르게 사는데 하나님께서 고난과 고생을 면제해 주겠지.’ 하는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자, 이런 구원은 성경에 없습니다. 이런 구원은 성경에 없는 거예요. 성경에는 없고 기독교나 종교에는 있어요. 교회는 있는데, 성경에는 이런 구원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지 않아요. 구원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하고 거래 안 나왔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이 있다는 그것만 보지마시고 3장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추방했습니다. 추방했기 때문에 추방했다는 것은 나는 니하고 이야기 안한다는 뜻이에요. 나는 니하고 거래 안한다는 뜻입니다. 기도 백날 해봐야 나 그거 안 받는다는 뜻이거든요.
그래서 인간이 헌금하던지 뭐 할 때는 노림수가 있어요. 이거 받으시고 저 구원해 주시고 고난 줄여주시고 나중에 천국 보장해 주세요. 그 노림수하고 내미는 거거든요. 일종의 흥정이지요. 이만큼 드리면 이만큼 채워주시겠지요. 라는 흥정인데, 하나님은 인간하고 흥정하지 않습니다. 이 구원이라는 것도 역시 없습니다. 구원은 망상에 불과한 거예요. 인간이 세상이 너무 힘들다보니까 지어낸 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구원은 어디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자기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속에 있는 여분의 것이 바깥으로 나온 게 구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자기 일을 하면 하나님이 다른 한 분이 있어서 일을 해야 돼요. 다른 분이, 다른 하나님이 또 있어야 돼요. 다른 하나님이 있어야 되겠지요.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서 아들에게 나타나셔서 이 땅을 떠나면서 남겨진 여분의 것이에요. 그러면 그 구원이라는 것은 어디에서 흘러나온 거예요? 인간의 소망에서 욕망에서 나온 겁니까? 아니면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에서 나온 거예요? 어느 쪽이에요? 구원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사이에서의 그 관계에서 약속에서 흘러나온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으면 구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구원이 없고, 구원으로 인정 안 해주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기본적으로 내 구원은 내 망상은 하나님께서 듣는다? 안 듣는다? 아예 안 듣는다는 것을 기본으로 해야 됩니다. 더 쉽게 말씀드릴게요. 구원은 성령이 주지 아니하면 우리한테는 얻을 수 없는 거예요. 누가 주지 아니하면 우리가 얻을 수 없는 거예요.
그러면 언제 구원 받는 걸 아느냐, 이미 줬기 때문에 알아요.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안다고요. 구원에 대해서 안다고요. 구원을 안 주게 되면 내 욕망의 구원만 계속해서 내가 조작해 나가는 겁니다. 이걸 어떻게 잘 유지하고 보존하고 백날 이렇게 행함이 아니고 믿음이라고 하니까, 그래 믿습니다. 믿습니다. 계속 믿겠다는 거예요. 그 믿음이 치매현상으로 끝났습니다. 치매현상으로. 알츠하이머 들리는 순간 그 다음부터는 그 사람은 내가 언제? 언제 믿었는데? 자기 자신도 자기 관리 못합니다. 끝나요. 젊을 때 잘 믿었는데 나이 들어서 끝장났어요.
그것은 내가 믿는 믿음을 내가 쥐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하니까 그 천당 가는 동아줄, 믿음이란 동아줄을 내가 꼭꼭 쥐고 있는 거예요. 그래, 믿어야 돼! 믿어야 돼! 아~ 어떤 경우라도 환란과 곤고가 올지라도 나는 믿어야 돼! 믿어야 돼! 계속 믿음을 쥐고 있는 거예요. 그 믿음은 하나님이 받지도 않는 믿음인데. 지가 용을 쓰는 거예요. 어디 변비 걸린 거 같아. 계속 하는 소리가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는 소리가 그것 밖에 없어요. 천국 구원 받는데 아무 상관없는데요.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낙원은 물 건너갔습니다. 낙원은 하나님 쪽에나 있지 인간 쪽에는 없습니다. 낙원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생명나무만 남아 있잖아요. 다른 나무는 훼손돼도 생명나무는 남아있지요. 생명나무가 있는 곳은 인간은 간다? 못 간다? 근처도 못 가요. 그러면 인간에게는 있다? 없다? 생명나무가 없는 거예요. 성경 제대로 봅시다. 생명나무는 인간 쪽에는 없다. 인간 쪽에는 구원도 없다. 천국도 없다. 인간은 없는 것 밖에 있을 뿐이에요. 없어요. 그냥 살다 죽는 거예요. 그냥 끝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천국 안 간다고 너무 억울해하지 마세요. 원래 인간은 그래야 되니까. 사랑의 하나님 찾지 마세요. 구원의 하나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옆 동네에 집 짓고 할 때에 시끄럽지요. 우리 동네에 3개월째 뜯고 부글부글하고 시끄러워요. 잠도 못자요. 하여튼. 시끄러운데 이 구조물을 지을 때 인부들이 왔다 갔다, 왔다 갔다 굉장히 바쁘지요. 인부들이. 어떤 때는 포크레인이 와서 땅을 팠다가 콘크리트를 실은 레미콘차가 왔다가 굉장히 바빠요. 나중에 건물이 완성돼서 보세요. 그 인부들 다 어디 갔습니까? 하나도 없지요. 하나도 없어요.
하나님께서 생각한 것은 구조물은 말씀이라는 건축 구조물입니다. 말씀의 건축 구조물에 개미같이 온갖 사람들 다 동원시켜요. 그런데 건축 구조물이 딱 되고 난 뒤에는 여기에 아무도 없어요. 완공됐기 때문에 아무도 없습니다.
자, 여러분들이 아신다고 생각하고 물어봅니다. 여러분, 천국을 여럿이 만들었습니까? 홀로 만들었습니까? 홀로. 그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그게 아버지와 아들의 약속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천국 짓는데 여러 가지 모세와 엘리야고 아브라함이고 들락 달락 하면서 지었잖아요. 이 사람들의 존재 의미는 뭐냐, 홀로 짓는데 대해서 그들은 전혀 보탤 수 없는 존재였음을 대조하고 비교하기 위해서 주의 일에 참여된 사람입니다.
그 신약의 대표적인 사람이 열두제자지요. 열두제자가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에 거기에 십자가 못 박지 말라고, 십자가 못 박아 죽으실 때에 그 십자가 못 박아 돌아가실 때에 그 때에 실질적으로 보탬 준 제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 현장에 있던 사람도 겁나서 이리 있었고, 사도요한 세 명의 마리아만 있었지 나머지는 전부다 근처도 안 갔습니다. 도망쳤습니다. 목자를 치니 그 다음이 뭡니까? 목자를 치니 양이 흩어졌지요. 흩어지면 누구만 남아요? 매 맞는 목자만 남지요. 그 목자 되신 예수님만이 아버지의 약속을 다 이루어서 천국을 만들어 놓은 거예요.
말씀이 완성되면 천국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일점일획을 다 이루면 천국이에요. 일점일획을 누가 이루었습니까? 예수님이 이루었지요. 그러면 천국은 예수님이 이룬 거예요. 십자가 지실 때 다 이루었다, 했다 말입니다. 이루었다 했고, 다 완성된 마감된 그것을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통해서만 줘요. 성령을 십자가영이라 하는데, 예수님의 영인데, 예수님의 영이 와서 주게 되면 이 받는 사람은 천국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면 내가 더 보탤 게 남아있다, 안 남아있다? 남아있지 않은 걸로 이해하게 돼요. 성령 받은 사람 특징이. 지금 논리가 그렇게 정리되는 겁니다. 논리가.
그렇게 하게 되면 이 받은 인간은 우리하고 똑같은 다 같은 육이고 아담의 자손이니까 나름대로의 처음에 이야기한 인간은 자기의 좋은데 천당 가야지. 이런 욕심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많겠지요. 굉장히 많겠지요. 그 많은 그것과 예수님 홀로 이룬 그것과 대조하면서 누구를 부인합니까? 내 행함이나 믿음도 행함이니까, 내 믿습니다. 내 소망, 사랑, 이 모든 것은 이 모든 것의 덕분으로 내가 천당 가는 것이 아님을 알지요.
그 이야기를 예수님의 포도원 비유에서 계속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아침 10시에 온 사람, 12시에 온 사람, 오후3시에 온 사람, 5시에 온 사람, 그 아침 10시에 온 사람부터 1데나리온 줬으면요, 10시에 온 사람 삐지지 않습니다. 고맙습니다. 하고 집에 가면 돼요. 뒤에 어떤 계산하던지. 그런데 일부러 포도원 주인이 일부러 집에 처음부터 온 사람 주는 게 아니고 품삯을 제일 마지막에 온 사람을 1데나리온을 줘가지고 앞에 온 사람으로 하여금 기분 업되게 만든 거예요. 1시간 일했는데 1데나리온. 6시간 일했으면 6데나리온. 기대를 반짝하게 만들었는데 늦게 온 사람이나 나중 온 사람이나 똑같이 1데나리온을 줬을 때 그 의미가 뭐겠어요?
그 의미가 뭐겠습니까? 포도원 비유의 앞에 이렇게 있어요. 천국은 이와 같다. 이 바리새인들아, 너희들이 생각하는 천국은 인간적인 갈망에서 자기 좋은데 가려하는 천국인 반면에 예수님을 통한 천국은 이런 거예요. 천국이라 하는 것은 놀고 있는 사람입니다. 포도원에 일하고자 애쓰는 게 아니에요. 그냥 놀고 있는 사람을 찍어서 포도원에 집어넣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포도원에 일하는 것조차도 선물입니다. 주의 일 하는 것도 선물이에요.
그래서 이 선물을 받았을 때 우리 하는 것은 뭐냐, 뭐를 평생 동안 대조해야 돼요? 내가 열심히 추구하는 것과 이미 주께서 주시는 것과는 이것이 엄청난 차이가 있다. 차이가 있고 천국은 내 욕심의 차원에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기 숙제라는 사실입니다.
제가 지난 오전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지요. 하나님은 스스로 출몰하시고 스스로 퇴장하신다고요. 끝부분에서 하나님은 스스로 출몰하시고 스스로 퇴장하시면서 알을 깠다 했습니다. 그 알이 뭐냐,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주님이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가면서 이 땅에 없는 것을 내놓은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여러분 자신을 어떻게 생각해야 됩니까. 내가 평생 공부 이만큼 했고 어떻게 했고, 어떻게 고생했고 라는 내가 있고, 있고, 있고의 연쇄 고리로서의 나를 보면 안 되고, 도대체 나 같은 것이 어디서 튀어나왔지? 자기를 이상스럽게 봐야 돼요. 자기를 이상스럽게 봐야 돼요.
특히 다른 사람과 대조해서. 친구들과 만나서 대조해서. 동창회 참석해가지고. 그들은 모였다 하면 이바구를 푸는데 그거 전부다 자기 자랑 아닙니까. 자식 자랑하고, 지 잘사는 거 자랑하는데 전부 다 그러한 결과는 누구 때문이다? 자기가 애써서 고생한 결과로서 이러한 혜택, 그것도 하나님까지 집어넣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고생하니까 봐줘가지고 은혜로 축복해서 이렇게. 그런 걸 채운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성령을 받은 성도는 그걸 가만히 듣고 있으면서 뭘 어떤 생각을 해야 돼요? ‘아, 내가 알던 저 모습이 내 모습이었구나!’ 내가 나를 비춰보던 나가 바로 저 친구로 인해서 나로 하여금 또 확인시켜주는 거예요. 친구가 나 자신이라는 말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친구가 내 자신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했어요. 쉬운 이야기지만, 아리스토텔레스를 또 집어넣어야 이게 또 무게 있는 내용이구나.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안다. 그런 뜻이에요. 쉽게 말해서.
그 친구와 만나면서 세상의 친구지요. 낯설음. 낯설다는 것을 느껴져야지요. 낯설다. 아, 나도 저런 생각을 가졌었었지. 나도 저게 정상인 줄 알았었었지. 그게 다인 줄 알았었었지. 하지만 그럴 경우에는 고생 뒤에 낙이 온다는 식이 돼요. 그냥 거듭나지 않은 새로운 피조물이 아닌 사람들의 집합체로서의 교회의 설교의 주 내용은 뭡니까? 고생 뒤에 낙이 온다에요. 동양철학과 똑같아요. 고생 뒤에 낙이 온다.
여러분들이 고생스럽게 한 교회 봉사, 헌금, 전도, 선교, 다 여러분 대에 복을 받거나 여러분 대에 복을 안 받으면 여러분 자식들에게 복을 받습니다. 이게 무슨 사상이냐, 이게 불교사상입니다. 이걸 가지고 업보사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업보사상. 불교신자보고 거듭났다고 하면 안돼요. 그들은 고생을 인내하면서 노림수가 있어요. 이 고생은 언젠간 보답되겠지. 부처님 살아계신다면. 그럼 그 부처님에다가 예수님이나 하나님이나 삼위일체를 대입해 보세요. 하나님 살아계시면 내가 이만큼 고생하는데 낙을 보겠지. 이 땅에서 낙을 못 보면 나중에 천국 가서 상급주시겠지. 뭐 이런 거. 내 대에 아니면 내 자식 대에 잘 되겠지. 그만큼 성과급을 했으니까. 이게 바로 인간들이 생각하는 엉터리 고난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도 은혜 받았다 하는 것은 뭔가 수상해요. 왜냐하면 성경은 나를 건드려줘야 된다고요. 내가 쓸모없다고. 내가 쓰레기라고. 그러나 어떤 인간도 자기가 쓰레기라는 것을 알고 성경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가능성이 있는데 성경까지 더 추가해서 가능성이 현실화 시키는데 보탬 되라고 성경 보잖아요. 우리가.
내가 양심은 착한데 어떻게 해야 하나님 앞에서 착한 줄 모르는데 성경을 통해서 참고로 해가지고 착한 나를 더욱 더 착하게 만들겠다. 그거 하는 게 열두제자였고, 그게 바리새인들이었고, 그게 멸망했던 유대인들이 했던 거예요. 이미 인생 선배들이 했던 거고 우리 주변에서 교회는 안다니지만 그런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교회는 안 다니지만 언젠간 낙을 보겠지. 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없는 사람들이 없어요. 다 그래요. 전부 다.
인간의 할 도리를 다하고 그 다음에 뭘 기다린다? 천명,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 진인사대천명. 그게 그 뜻 아닙니까. 진인사대천명이. 좀 적어놓으세요. 고급스러운 이야기를 할 때는. 세상에 우리는 그 마음가지고 교회에 간다고요. 그 마음가지고. 이게 무슨 신자입니까? 그게. 이게 교인이지요. 이만큼 고생했으면 주님도 양심 있으면 어느 정도 내 소원 하나 들어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어디서 누구하고 건방지게 거래를 해요? 거래를. 쫓겨난 주제에.
잘 들어보세요. 욥의 인내는 뭐냐, 욥 본인이 욥의 문제성을 몰랐던 겁니다. 어렵게 이야기할까요. 욥과 욥의 친구 사이에 주님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마귀가 찾아온 전까지는 그것을 가지고 연속성이라 해요. 니하고 내 생각에는 그다지 멀리가지 않고 대충 딱 맞다는 식의 연속성. 그러니까 찾아온 4명이 뭡니까. 욥의 프랜드 아닙니까. 욥의 친구잖아요. 의견이 통했다? 안 통했다? 의견이 통한사이었어요. 누가 오기 전에.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마귀가 오기 전까지는 욥은 욥의 친구와 차이 남을 몰랐던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가 뭐가 문제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내가. 내가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고 우리는 성경보고 있는 거예요.
문제는 나한테 있는데 나를 해코지하는 저 이웃 사람이라든지 누구 내 돈 떼어먹은 사람이 문제 있고, 나는 문제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욥 이야기가 구약에 있습니까? 신약에 있습니까? 구약에 있지요. 욥의 이야기는 구약에 있다고요. 신약 적으로 뭐냐 하면 우리는 죽은 자에요. 죽은 자. 죽은 자는 남을 평할 권한이 없습니다. 모든 불행과 비극은 남을 평하기 때문에 오는 거예요. 모든 비극은.
평생 자기가 불행하게 살았습니까? 그건 남에게 평했기 때문에 그래요. 남을 평하는 자세로 남을 타인을 보기 때문에 그래요. 남을 평할 수가 없어요. 왜? 내가 나를 평할 자격이 없기 때문에. 내가 나를 모르기 때문에. 갑자기 김국환 노래가 생각나네. 니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한치 앞도 모두 몰라... 내가 나를 모르는데 어떻게 남을 평하겠습니까. 평하니까 누구 탓이다? 다 남 탓이 되는 거예요. 남 탓 그것을 해서 우리가 행복해집니까? 살림살이 나아졌습니까? 우리가 들 비극적이었습니까? 아니에요. 남 평하지 마세요. 모르는 주제에. 우리는 먼저 남 평하면 안돼요. 이 말은 내가 나를 평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남도 평하지 말고, 누구도 평하지 말라? 나를 평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신약에서 이미 규정을 해줬어요. 니는 이미 십자가에서 죽고, 니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입장에서 죽은 자의 특징은 남을 평하지 않는 것. 죽은 자의 전제는 이미 자기가 죽었다는 것을 확인만 하면 되기 때문에 남을 평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여기 야고보서에 욥이 나오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욥 이야기를 해야 되거든요. 성경대로.
다시 신약입니까? 구약입니까? 구약이지요. 그러면 욥은 뭘 몰라요? 자기가 죽은 자라는 것을 알아요? 몰라요? 모르고 있는 거예요. 자기는 죽은 자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왜 잘 살아있는 나를 힘들게 합니까? 이렇게 나온 겁니다. 그런데 이 욥의 고백을 들어보니까 이게 욥만의 고백이 아니지요. 매일 아침 눈만 뜨면 하는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보고 하는 고백을 지금 그냥 구약 욥을 통해서 보여주지 않습니까. “왜 내 뜻대로 안 됩니까? 만사가.” “주여, 왜 침묵하십니까?” 이런 식으로 대들고 반항하거든요.
어제 어떤 분이 저한테 전화를 한40분 동안 했는데요. 하면서 뭐냐 하면 왜 남들은 건강한데 내 몸은 왜 이리 아픕니까. 그날이 자기 생일날인데 남들은 뭐 생일 축하합니다. 하는데 자기는 생일날 기도하면서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고 아무리 하나님을 내가 영광 돌리고 싶어도 내 몸이 아픈 이유를 내가 모르고 있는 이상은 원망과 불평과 짜증과 그리고 도발하는 그 마음밖에 안 오니 목사님 어쩌면 좋아요? 라고 저한테 전화를 해줬어요.
제가 제시한 것은 이거에요. 믿음 없는 신앙. 이게 참된 신앙이에요. 신앙인데 어떤 신앙이냐, 믿음 없는 신앙. 그러니까 그 분은 뭐를 통과하고 있어요? 자기의 본색을 통과하고 있는 중입니다. 욥을 통과하고 있는 중이에요. 우리 안에 다 구약 들어있어요. 우리는 성질 급해가지고 정답부터 신약부터 들췄는데, 예수 십자가 믿으면 천당 간다고, 용서받는다고, 뜻도 의도 모르고 피로 용서받는데. 이제 내 맘대로 살자. 이리 끝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분을 너무 사랑해가지고 구약부터 찬찬히 뚫고 나가는 거예요. 자신의 믿음이라고 여겼던 것을 전부 다 긁어내는 겁니다. 그걸 고상한 말로 위세척이라고 합니다. 다 긁어내는 거예요. 다 긁어내야 돼요. 장래에 나쁜 일이 올까봐 미리 해서 착한 일 모아놓은 거 있잖아요. 다 긁어내요. 3년 뒤에 사업 망할까 싶어서 미리 십일조 조치하는 거 다 끄집어내요. 그 헛된 짓을 다 끄집어내요. 아무짝도 소용없는 것들. 마치 이것이 뭔가 내 인생을 책임질 수 있는 것 같고 인생을 내가 편안하게 갈 수 있을 거라고 여겼던 그 모든 것, 내 생각 모든 것, 다 끄집어내요.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형제우애라고요? 성령의 열매가? 그게 욥에서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뭐가 아프기 때문에? 자기 육체, 신체가 아프기 때문에 그래요. 욥의 곤란한 점은 지금 뭐가 곤란한가 하면, 자기 신체는 아픈데 자기가 지금 못 죽고 있다는 거예요. 욥의 소원이 뭐였습니까? 죽여 달라는 거잖아요. 누구 맘대로 죽여요? 쓸모 있는데. 주님 보시기에 쓸모 있는데 왜 죽여요. 왜 죽어야 됩니까? 죽겠다는 것도 주께서 응답을 안 해줘요. 철저하게 써먹을 대로 다 써먹는 거예요. 꼭 오늘날 저와 여러분 같아요. 꼭 여러분과 저가 그렇습니다. 다 써먹는 거예요. 우리는 인부거든요. 인부.
우리는 구원도 없고 천국도 없어요. 없는데,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소명의 과격한 침입’ 뭔 뜻인지 아시겠지요? 이미 창세전부터 예정된 자에게 소명입니다. 이 이야기는 로마서8장에 나오는 거예요. 미리 아신 자를 뭐한다? 미리 아신 자를 부르지요. 부르는 걸 소명이라면 그 앞에 뭐가 있어요? 미리 아신 자가 있잖아요. 미리 정한 자. 정해 놓은 자. 또 미리 아신 자, 그 다음에 부르시지요. 소명이지요. 그 절차에 의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불러서 오는 게 아니잖아요. 주님이 뭐 대리입니까? 대리기사입니까? 주님이 콜택시 아니잖아요. 우리가 부른다고 오시는 게 아니에요.
우리의 시작은 우리의 출생부터 시작해서 사단난 거예요. 주님의 시작은 우리가 출생하기 전에 창세전에 시작한 거예요. 출발점이 달라요.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할 때가 언제입니까? 에서와 야곱이 태어난 뒤입니까? 그 전입니까? 그 전이잖아요. 이 이야기 동창회에 가서 이야기해 보세요. 완전 미친 사람 듣지요. 인생이란 것은 니가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정해진다. 우리가 아는 상식은 그래요. 내 운명? 그거 내가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우리의 상식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를 도와준다. 신이라 하는 것은 내 뜻이 우선이고, 그 다음에 신의 뜻은 내 뜻을 보좌하는 역할로서 우리는 열심히 기도하고 하잖아요. 그게 엉터리라는 말이지요. 제가 지금 그게 엉터리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성경에는 그렇게 돼있다? 안 돼 있다? 성경에는 그렇게 안 된 겁니다. 에덴동산 좋았지요. 창세기2장. 3장에 보세요. 3장에는 기약도 없어요. 에덴동산 다시 준다는 보장도 없고. 추방하고요, 그 다음 조치가 뭐냐, 들어오기만 해봐라! 하고 철저하게 두루 도는 천사로서 막아놨어요. 막아놨으니까 막아놓은 것을 함축해서 말하면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단절’ 이걸 4자로 하면 ‘불연속성’이라고 합니다. 끊어짐. 3자로 하면 ‘끊어짐’이에요.
이미 끊어진 상태에서 인간은 끊어진 상태에서 이 안에서 온갖 망상과 상상과 종교를 다 만들어내요. 기독교라는 것도 만들어내고, 불교도 만들어내고, 천주교 만들어내고, 이슬람교 만들어내고, 온갖 다 만들어낸다고요. 그게 이 단절을 뚫을 수 있겠어요? 인간들이 유대인들이 그렇게 애썼으면 그들이 천당 가야 돼요. 하지만, 누군가 따로 하늘에서 오시지 아니하면 인간 구원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지요. 따로 오실 때 그냥 옵니까? 우리하고 차이나는 걸 가지고 옵니까? 아니면 우리하고 같은 걸로 옵니까? 차이나는 것을 가지고 와요. 왜냐, 차이나는 것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했습니까? 죽여 버렸잖아요.
죽음이라는 것은, 모든 의미는 죽음부터 출발해야 돼요. 끊어졌다. 부터 출발해야 돼요. 그러면 끊어졌으면 양쪽 편에 개념들이 다 다르겠지요. 내 기도 있으면 누구 기도 있겠습니까? 주님의 기도있겠지요.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르지요. 인간의 기도는 뭐냐, 주시옵소서! 에요. 마태복음6장에서. 자꾸 이방인들이 기도할 때 어떻게 기도한다? 자꾸 달라고 기도한다고요. 그런데 주님의 기도는 뭡니까? 니한테 무엇이 있어야 할 줄로 미리 아시느니라. 미리 아신다 했어요.
참, 여러분들이 다 아는 이야기를 나 혼자 한숨 쉬면서 안 믿는 것처럼 이야기해서 죄송합니다마는, 하나의 예를 들어볼게요. 하나님의 뜻이 어느 정도인가 보세요. 어떤 사람이 마약상습범입니다. 계속 마약을 했어요. 몰래 옆집 아파트에 있는 사람이 봤다고 칩시다. 계속 택배가 왔는데 택배를 가만히 보면 창문으로 보면 택배 봐가지고 허연 가루를 뜯어가지고 먹어가지고 헬레레 해가지고 누워있다. 아, 마약을 많이 했구나! 실제로 행동을 보면 비틀거리고 어지럽고 난리에요. 그 다음에 한 달 되어서 마약을 몰래 또 택배로 받아 했다 말이죠. 그래서 옆집에서 경찰에 신고를 한 거예요. 신고를 딱 해가지고 경찰이 그날 또 택배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와가지고 과연 택배는 딱 왔고, 택배를 경찰 앞에서 보는데 뜯어보니까 하연 가루에요. 그래서 경찰이 먹어보라고 했어요. 딱 먹어보니까 경찰도 맛을 보니까 설탕이었어요.
어찌된 일이냐 하면 그날만 설탕이에요. 그날만. 그날만 설탕이었어요. 배달이 잘못된 거예요. 마약 하는 입장에서는 운이 나빠 가지고 배달이 잘못된 거예요. 택배원이 실수해가지고 설탕을 보냈는데 현장에 있던 경찰한테는 그전에 아무리 마약을 해도 그 현장에서는 뭡니까? 잡을 수가 없는 거예요. 왜? 현장에 설탕을 먹는데 잡아가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신고한 사람도 헛방이 되고 경찰도 헛수고한 거예요. 자, 그렇다면 우리가 매일같이 범죄 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를 어기면 다 위배가 되지요. 하나를 어기면 다 범죄자입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범죄 하는데, 그런데 어느 날 이제는 악마가 니는 지옥 가. 하고 왔는데 하필이면 그 때 성령이 와 버렸다 말이죠. 우리 체포할 날만 기다리는데 와 보니까 성령 보니까 예수의 피로 용서가 택배로 된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훌륭한 거예요? 배달 사고가 난 거예요? 배달 사고 난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그래서 우리는 좋았다. 구원받았다. 가 아니라 주님은 자기 택한 백성을 어떤 식으로 건진다? 배달 사고처럼 느껴지도록 그런 식으로 주님이 자기의 공로를 위해서 우리에게 마약 대신에 설탕. 우리 죄의 심판 대신에 피의 용서를 우리에게 택배로 해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통해서 누구의 공로만? 주님의 공로만 드러내는 거예요.
그래서 옆집에서 와가지고 “아저씨, 마약 하는 거 맞잖아요.” “맞아.” “그런데 왜 하필이면 그날은 설탕이 왔어요?” “나도 몰라. 가만히 보니까 나한테 설탕 준 사람은 이 설탕의 자기 영광을 위해서 준거야. 나는 마약쟁이인데.” 경찰이 와서 안 걸린 거예요. 그 예가 바로 십자가 옆의 강도 이야기입니다. 강도질했어요. 지옥가야 됩니다. 그런데 주께서 창세전에 예정된 자라서 니가 오늘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고 해버린 거예요.
그러면 그 강도가 죽었지만, 강도가 죽기 직전까지 자기는 누구 공로만 돌리겠어요? 예수님 공로만 돌릴 거예요. 주님이 원하는 건 바로 그겁니다. 이 모든 일이 너의 일이 아니고, 너의 이 구원이 너가 소망한 구원, 니가 계획한 구원이 아니라 치밀한 구원받기 위해서 내가 뭘 해야 되고, 뭘 해야 되고, 치밀한 계획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그냥 소명의 뭐라고 합니까? 소명의 과격한 침입이죠. 침입. 침입이라는 말이 좀 이렇게 심심합니까. 그럼 용어를 고치겠습니다. 난입. 난입이 뭔 뜻이지요? 주인 허락도 없이 쳐들어 온 게 난입이죠. 우리 허락도 없이 갑자기 성령이 용서를 가지고 쳐들어 와버렸을 때 우리는 뭘 느낍니까? 신난다는 느낌입니까? 아니면 뭘 느낍니까?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떠나소서. 베드로가 한 고백 나오지요.
사도바울이 사울일 때 주님 만난 순간을 사도바울은 3번이나 이야기했습니다. 거기서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주님 이럴 줄 알았어. 이랬습니까? 뭐라고 했느냐 하면, “누구십니까?” “Who are you.” 누구십니까. 주여, 누구십니까? 주님의 답변은 간단했습니다. “니가 핍박하는 나다.” 니가 핍박하는. 그러면 사울은 한평생 지 나름대로 하나님 영광 돌린다고 애썼던 그 모든 일들이 진짜 하나님이 보시기에 무슨 요소가 가득했다는 거예요? 주님을 핍박하는 짓거리만 해온 거예요. 폭탄이었습니다. I am 폭탄. 나는 폭탄이었습니다. 주님을 피 흘리게 할 수밖에 없는 그 폭탄. 사도가 그걸 알고 그 다음부터 로마서, 갈라디아서, 편지를 씁니다. 쓰면서 뭐냐 하면 나의 의가 아니고 주님의 의라는 말로 표현하지요.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그 의를 주님의 의를 로마서1장16절에서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복음이라고 이야기하고, 복음이 나타났으니 나의 의가 아니고 누구의 의? 주님의 의. 주님의 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것이 복음이다. 이 하나님이 자기 숙제, 자기 과제, 자기 일을 하면서 아까 여러분 건축 구조물 이야기해 봅시다.
건축 구조물 말씀에 의해서 완성된 건축 구조물에 엘리사, 엘리야, 아브라함, 이삭, 모세, 요나, 온갖 선지자 막 나왔지요. 투입할 때 그들이 그 일이 주의 일에 도움 됩니까? 안 됩니까? 도움이 되지 아니하고 주님의 일에 전혀 보탬이 되지 않고 대조하는 거예요. 인간의 할 수 있는 한계를 그들이 보여 준 겁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나타날 때 그 옆에 누가 모세, 엘리야 등장했지요. 등장할 때 멍청하게 가만히 있었습니까?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어요? 어떤 쪽입니까? 그 이야기 먼저가 누가복음에 나와요. 그게 뭐냐 하면 “주님, 죽으셔야 되지 않습니까.” 주님의 별세에 대해서 이야기한 거예요.
내가 선지자 노릇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아브라함이 아들 바친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그게 믿음이 아니라는 말이죠. 뭐가 믿음이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셔야 우리가 구원되는 거예요. 그 연결망. 그게 바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성령을 주신 믿음입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욥은 뭐가 문제였다. 자기 자신이 누군지를 몰랐다. 신약 적으로 하면 욥은 죽은 자지만, 이건 욥은 구약이기 때문에 아주 멀쩡하게 살아있다고요. 그럼 내가 살아있으면 뭐도 살아있겠어요? 나의 잠재력, 나의 가능성, 나의 선함, 나의 추억과 나의 기억, 남한테 과부한테 돌봤던 그런 추억들이 남아있겠어요? 안 남아있겠어요? 남아있지요. 그래서 욥기에 보면 친구들이 욥을 그렇게 괴롭힐 때, 욥이 자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어려울 때 고아와 과부를 내가 도와줬다. 내가 이런 고난 받을 이유 없다. 너희들은 나를 몰라. 내가 얼마나 착하게 살았는지를 모르잖아. 나 이 정도로 착하게 살았어. 그런데 고난이 왔다. 하나님이 주셨다. 너희들은 내 심정을 몰라. 이런 식으로 나오고.
저 친구들은 뭡니까? “아이고, 분명히 고난 받을 때는 나쁜 짓을 했을 건데. 한 번 찾아봐라.” 이런 식인 거예요. 욥이 찾고자 하는 것은요, 잘 들어보세요. 욥이 찾고자 했던 자기 죄. 자기 죄는 내가 착할 가능성이 있다는 근거해서 나올 자기 죄에요. 실수, 오류, 아차, 이런 거. 이걸 죄라고 본 거예요. 근본은 착한데 정신이 좀 미미해서 치매 걸려서 나쁜 짓했다. 이런 거. 내가 미처 몰라서 알지를 못해서 잘못된 오류를 죄라고 본 거예요.
그런데 욥이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죄는 뭡니까? 근원적으로 먼지를 뒤집어쓰고 죄를 뒤집어쓰고 근원적으로 나는 뭐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뭐예요? 죄인으로 태어난 것을 내가 감사하지 못한 게 죄에요. 이 욥의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이라서 욥은 친구들을 위해서 마치 예수님처럼 십자가 지는 대속의 제물을 친구를 대신해서 바칩니다.
고난은 우리가 생각하는 고생과 그런 게 아니에요. 고난은 무엇이 고난이냐 하면 내가 헛바람 들어서 나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고 남의 평이나 하고 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고 내 평가한 기준가지고 남을 평가하고, 세상을 평가하고 국가를 평가하고, 죽은 존재가 평가한다는 그 자체가 얼마나 나 자신에 무지했는가를 내가 뒤늦게 새삼 알 때 내가 몰랐던 죄를 알 때 그 죄로 인하여 주께서는 죄인을 부르러 오시기 때문에 그 죄로 인하여 구원받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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