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강의

맹세 19071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7. 23. 22:46
2019-07-13 00:31:15조회 : 183         
맹세 190712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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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은주 (IP:119.♡.152.148)19-07-23 12:02 

안양20190712a야5장12절(맹세) - 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야고보서5장12절,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 그렇게 되어있지요. 맹세하는 그것이 바로 죄가 된다. 라고 하는 겁니다. 왜 맹세를 인간은 하지 말아야 되느냐 하면 세상의 모든 것은 인간의 맹세에 의해서 주어진 게 아니고 주님의 맹세에 의해서 주어진 거예요. 주님의 맹세에 의해서 세상이 주어진 거예요. 성경이 두껍잖아요. 성경책의 모든 내용은 주님의 맹세를 확인하는 책이 바로 이 성경책입니다. 

어느 것 하나가 주님의 맹세 없이 된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궁금한 건 그 하나의 맹세를 누구보고 맹세했느냐 라고 궁금해 하실 건데, 히브리서 6장에 보게 되면 13절, 14절에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맹세를 누구보고 하느냐 하면 자기보고 맹세를 해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할 때, 또는 맹세할 때, 자기보다 더 큰 자가 없기 때문에 자기를 가리켜 맹세한다.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보고 맹세하는 거예요. 

맹세하신 하나님과 맹세 받는 하나님이 따로 있겠지요. 그래야 그 둘 사이에 맹세가 성립되니까. 그 맹세가 그냥 흐지부지로 끝났을까요? 아니면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자연 전체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이 그렇게 완료가 되는 식으로 주어졌을까요? 어느 쪽일까요? 하나님의 맹세가 무효화된 겁니까, 아니면 제대로 다 완성이 된 걸까요. 완성이 다 됐겠지요. 그 완성됐다는 증거가 니는 맹세하지 말라, 에요. 니가 이 땅에서 더 추가해서 할 일은 일체 남아있지 않다. 

그런데 사람은 맹세를 하고 싶어 하는데, 이 맹세는 불안해서 오는 거죠. 불안, 불안해서 오는 겁니다. 사람이 왜 불안하냐 하면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내 일이 따로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인간은 거기서 이제 불안이 오는 겁니다. 그렇다면 맹세라는 것이 뭐냐 하면 죄 짓는 거고, 오늘 본문에 의하면 죄 짓는 거고, 죄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드는 거죠. 

그래서 맹세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는 일에 대해서 자기 몫에 자기 일을 따로 마련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일에 대드는 식이 되어버립니다. 맹세한다는 게. “비키세요. 이 일은 내가 하겠습니다.” 이런 식이에요. 그러면 인간이 맹세를 하고 대들게 되면 무엇이 생기느냐 하면 ‘자아성’입니다. 인간의 자아성은 대들면서 생기는 거예요. 

군대에서 졸병들이 고참한테 시키는 대로 하다가 언제 자아성이 생기느냐 하면 고참이 한 말을 거부하고 대들 때 그 때 자아성이 생기는 겁니다. 갓 시집온 새댁이 고분고분하다가 언제 자아성이 생기느냐 하면 시어머니한테 대들 때, 시집에 대들 때, 비로소 그동안 미뤄 놓았던 자아성을 되찾는 겁니다. 부딪치고 마주치지 않으면 자아성이 생기지 않아요. 

그러면 자아성이 생기게 되면 자아성은 이미 무엇을 거부하느냐 하면 순복, 순종은 이미 물 건너 간 겁니다.  순종을 순복하되 내가 알아서 판단해서 하겠다는 거예요. 내 마음에 들면 순종할 만하면 하고 순종 안하면 나는 순종 안하겠다는 거예요. 순복, 순종은 일종의 믿음의 행동이거든요. 믿음이 있느냐 하는 것은 순복, 순종으로 드러나는데 순복, 순종을 내가 알아서 순종하고 순복하겠다는 말은 내가 믿을만하면 믿겠다는 것. 그게 이 믿음은 하나님께 대든 죄의 결과가 뭐다? 믿음이 되는 겁니다. 

이 믿음은 자아성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게 무슨 믿음이냐 하면 나의 믿음이 되겠지요. 나의 믿음으로 예수 믿어서 천당 가겠다는 것은 이 자체가 죄가 되는 겁니다. 이 자아성이 생기게 되면 생겨버린 내 자아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허세, 또는 맹세, 이것을 계속 하게 됩니다. 하늘을 통해서, 땅을 통해서. 

그래서 이 맹세와 이런 가짜 믿음에 대해서 거짓 믿음에 대해서 하나님의 조치가 있어야 되겠지요. 왜냐하면 세상은 누구의 맹세대로 됐다 했지요? 하나님의 맹세대로 만들어졌는데 여기서 군데, 군데 반란이 일어난 거예요. 쿠데타가 일어난 거예요. 군데, 군데. 우리도 내 목소리 내고 싶은 거예요. 

회사 사장이 노동자들 직원들이 순복하고 순종하게 되면 늘 한결같이 순복, 순종하게 되면 이게 월급이 오를까요? 안 오를까요? 안 오르지요. 오를 리가 없지요. 견딜만하구나! 그 정도로도 견딜만하구나! 그 여분의 돈은 지 골프치고 지 사치하는데 다 쓰고 안 주는 겁니다. 반발하고 반항한다면 약간 인상해주고 그러면 이제 노동자는 이거 대들면 이게 오르는구나! 해가지고 또 대들다 그 다음에는 짤리고. 너무 까불다가 잘리고. 우리는 감당이 안 됩니다. 그 월급 가지고는 다른 초자 둘 쓰는 게 더 훨씬 낫습니다. 잘려버리고 그렇지요. 막 나갈 때 주의해야 되거든요. 잘된다 싶을 때 주의해야 될 일이에요. 이게. 

우리가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맹세를 남발하게 됩니다. 남발하면서 이 맹세를 통해서 내 믿음이 그 사람들은 자기가 거짓 믿음인지를 모르지요. 이 진짜 믿음이 진짜 믿음인가 확인하려고 하면 필히 뭐가 생기겠습니까? 불안감생기지요. 확인하면 불안감 생기는 겁니다. 어디까지 왔는지를. 그 애들 놀이에 여러분들이 해봤습니까. 자기는 눈 감고 친구의 손을 잡고 등어리에 푹 숙이고 가고 친구는 자기 손을 잡고 앞서 갑니다. 그럼 뒤에 애가 묻지요. 어디까지 왔나? 묻지요. 어디까지 왔다! 어디까지 왔나? 자꾸 묻잖아요. 

확인한다는 것은 지금 우리 목표 지점에 다 왔는지를 자꾸 불안해하기 때문에 하게 되고, 그 확인하는 테스트 방법이 맹세를 해보는 거예요. 맹세하는 방법은 주로 어떤 방법을 사용하느냐 하면 기도를 통해서 하지요. 이런 기도는 꼭 뒤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빠트리지 않습니다. 야무지게. 주문이니까. 주문 같은 거니까 예수 이름으로 빠트리면 새로 다시 해야 돼. 아이~ 귀찮아 죽겠어. 이게. 다시 예수이름으로 해가지고 못을 딱 박고 부적 붙이듯이. 예수 이름으로 부적을 붙이듯이 꼭 해가지고 시험을 하는 겁니다. 

야고보서1장5절,6절에 보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여기서 기도 응답 방법은 뭐냐,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기도하게 되면 주께서는 주시리라, 이리 되어있어요.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그러니 이 말씀은 인간이 행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니에요. 

왜, 그 말 자체가 인간의 행위에서 이걸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는 겁니다. 왜그러느냐 하면 의심하지 말고 구할 때 의심하지 않는다는 그 자체가 의심하지 않는 자체가 이미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기도의 응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이 말씀은 뭐냐 하면 기도하면 주시는 것이 아니고 기도하게 하셔서 이미 너에게 응답된 상태에 니가 놓여있음을 주님 쪽에서 알려주는 거예요. 

만약에 인간이 이 말씀을 지키려면 일단은 의심을 안해야 되거든요. 응답을 받으려면 의심을 안해야 되겠지요. 그러면 의심을 안 하려면 의심하는 경우와 안 하는 경우를 둘을 본인이 상정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건 이미 뭐냐, 두 마음을 품은 게 돼요. 내가 지금 의심 안하는 것이 의심일까, 의심 아닐까를 생각하는 거예요. 어떤 것이 의심이고, 어떤 것이 의심 아니지. 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의심이에요. 

그래서 성경 말씀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성경 말씀은 전체가 하나님의 맹세로 된 책입니다. 맹세로 된 책이에요. 맹세로 된 책은 그 말은 오늘 본문과 연관시키면 내가 맹세로 내가 알아서 만들어 놓은 세상이기 때문에 니가 거기서 니 자아성에 입각한 나의 것을 따로 챙길 이유는 전혀 없다. 맹세하지 마라. 니가 여기서 압력을 가한다던지 어떤 니 뜻을 거기다가 집어넣을 수 있는 어떤 여지는 전혀 없다는 거예요. 

그런 인간은 자꾸만 맹세하고 기도하고 의심하지요. 거기서 주어지는 것이 붉은 걸로 해야 되겠지요. 이렇게 시험하고 테스트하게 되면 여기서 생긴 게 대자연은 그 인간에게 뭘 주느냐 하면, 위기를 주는 겁니다. 위기. 기도의 응답이 안됐다는 자체가 뭔 뜻이냐 하면 나 지금 위기가운데 있다. 이런 뜻이에요.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기도 응답이 안 되면 어떻게 하지? 그게 의심이거든요. 

니가 왜 마음에 불안해하는고? 불안하고 싶어 불안합니까. 불안은 내 자아성에서 나오잖아요. 근심과 내 자아성이에요. 내가 아무것도 안 해도 꾸준히 내 안에서 자꾸 뭔가 나오고 있어요. 계속해서 뭔가 나오고 있으니까. 그것이 주님의 이루신 맹세와 잘 이게 타협이 안 되고 불화상태에 들어가는 겁니다. 맹세하지 말라는 그 말씀 자체가 우리의 속을 완전히 뒤집어놓는 말씀이에요. 우리로 하여금 그야말로 순복하고 순종하라는 말씀이거든요. 

옛날에 집안에 한 가정이 잘되면 순종, 순복하라고 이름도 순종, 순복이라 이름을 옛날 사람들은 많이 지었다 말이죠. 어디가도 니가 순종하고 순복하면 밥은 먹고 산다는 겁니다. 먹을 게 없을 때는 밥만 먹으면 그게 내 평생 얻은 것 다 얻은 것 같지요. 일단 밥을 먹게 됐다 싶으면 그 다음부터는 그 다음에 챙기는 것은 뭐냐, 그러면 나는? 내 자아성은 어떻게 되느냐, 이렇게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인간이라는 것은 늘 이렇게 불안해서 확인하고 확인해 놓고 또 불안하고. 이것은 누구를 테스트하느냐 하면 인간이 날마다 신에게 테스트하는 거예요. 이것은 마태복음4장에서 악마가 하나님에 대해서 하는 주 일이 뭐였던가요?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테스트하지요. 그 악마의 하는 일이 지금 대를 이어서 우리가 매일같이 하고 있습니다. 계속 테스트하는 거예요. 어디까지 왔나? 아직도 전봇대다. 어디까지 왔나? 우리 집 언제 오느냐 이 말이지요. 계속해서 확인해가지고 내가 지금 제대로 잘하고 있는지 없는지를 자꾸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하늘로도 땅으로도 아무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라는 말은 이미 완성된 큰 홀 또는 체육관 엑스포같은 그러한 전시회장, 이처럼 거대한 빈 공간에 우리는 거기에 이미 놓아져 있는 인물입니다. 맹세하지 말라고 했을 때에, 맹세를 자꾸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맹세는 주님의 맹세로 되어가는 주님의 약속으로 언약으로 되어가는 세상에서 자꾸 인간이 자기 나름대로의 다른 노선, 맹세라는 그걸 테스트하듯이 자꾸 맹세를 해대니까 주님께서 위기를 줬다고 했지요. 

그런데 야고보서에서 맹세하지 말라할 때 그냥 말만 맹세하지 말라하면 안되잖아요. 그럼 맹세 좀 하면 어떻습니까? 이리 할 때는 반드시 뭐가 온다고 했습니까? 위기가 오는 거예요. 성도한테는 위기가 오는 겁니다. 그럼 이 위기에 대해서 2가지 설명할 수가 있어요. 

하나의 위기는 뭐냐 하면, 개인적인 위기. 개인적인 위기 이건 무슨 말이냐 하면 현대인들이 잘 경험하고 있습니다. 실존적이다. 실존적. 제가 실존적이라는 어려운 말을 했는데 실존이란 말은 뭐냐 하면 그냥 돌멩이를 가지고 실존이라 하지 않습니다. 돌멩이는 그냥 존재라 해요. 있다. 선풍기가 있지요. 선풍기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손자가 있다. 그건 손자보고 그냥 있다, 하면 그 며느리나 아들이 싫어해요. 왜냐하면 손자가 그냥 있으면 안돼요. “그럼 우리 애가 돌멩이입니까? 아버님은 돌멩이로 보입니까?” 이런다고요. 손자가 이리 노는데, “야야, 애를 치워라.” 기분 되게 나쁘잖아요. 그렇지요. 

손자한테는 치우라하면 안되고 좀 치워줄래, 하는 손자한테 물어야 되잖아요. 대화의 상대가 실존입니다. 아무리 뭐라고 이야기해도 그쪽이 죽은 물체가 아니고 살아있는 거라면 대화를 해야 돼요. 대화를. 그래서 본인의 의사가 따로 존재할 때 그걸 실존이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실존이겠습니까? 아니면 존재겠습니까? 실존이지요. 악마는 실존이겠습니까? 존재겠습니까? 실존이지요. 악마가 바보등신 아니거든요. 욥기1장에 보세요. 바보등신 아닙니다. 

악마는 지금 하나님과 이야기한다는 말은 하나님도 실존이고, 악마도 실존이에요. 그런데 욥은 뭐냐 하면 본인은 실존이라고 우기지만, 막상 높은 레벨, 높은 단계에서의 악마와 하나님의 조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당하니까 졸지에 욥은 실존이 아니고 뭐가 되었어요? 존재가 되고만 거예요. 돌멩이와 똑같이 되어버린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욥은 강렬하게 반발하지요. 나를 개무시하다니. 내가 뭘 잘못했는데 그렇게 나옵니까. 나도 한 인간입니다. 반발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 실존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실존을 내거는 인간 쪽이 아니고 위쪽이다. 

그 이유가 뭐냐,
인간은 이 땅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다른 데서 이곳으로 옮겨온 거기 때문에.
다른 데서. 이쪽으로 옮겨온 거예요. 이게 성경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로마서9장에 나옵니다.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야곱은 사랑 받기로 작정했고요,
없어요. 지금. 존재가 없어요. 존재가 없는데 실존이 먼저 있어요. 무형의, 형태가 없는 실존이 먼저 있어요.
 

에서는 미움 받고 야곱은 사랑받기로 했다.

두 실존 사이에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이걸 가지고 아까 제가 맹세는 누구보고 한다고 했어요? 이 세상을 만든 맹세는 누가 누구보고? 하나님이 누구보고? 자기보고 맹세한다 했지요. 히브리서6장에. 그래서 아브라함은 빠지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맹세가운데서 하나님이 하나님에게만 맹세했지, 사람에게는 묻지 않는다를 보여주기 위해서 데려놓은 자가 누구냐 하면 아브라함입니다. 그게 아브라함이에요.
 

아까 야곱도 마찬가지에요. 에서는 창세전에 미워하기로 되어있고, 야곱은 사랑하게 되어 있잖아요.
지금 에서의 존재는 없어요.실존은 먼저 있고 

나중에 야곱, 에서를 태어나게 하고 존재로 태어나게 하고 

준비된 실존을 거기다가 집어넣는 거예요.이렇게. 

붕어빵 앙꼬 넣듯이. 밀가루 부어놓고 실존을 집어넣는 거예요. 

야곱은 이 땅에, 야곱의 몸은 범죄한 아담의 몸을 지니고 왔잖아요. 야곱의 몸은 악마의 몸이기 때문에 이게 자기 독자성, 자아성을 포기를 못하지요. 야곱이 항상 하나님을 생각할 때는 내가 얼마나 챙기느냐 얼마나 소유했느냐를 생각한다고요. 그게 창세기32장에서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에 비로소 자기의 실존이 자기의 존재를 넘어서는 거예요. 하나님과 결부됐다는 말이죠. 

그러면 내가 나를 보기위해서 이 땅에 있는 게 아니고 나를 통해서 장차 오실 하나님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나는 미리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그러면 야곱과 이스라엘 중에서 누구 하나는 죽어야 되지요. 야곱이 죽고 이스라엘로 태어나는 겁니다. 이게 지난 수요일 설교한 거잖아요.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제대로 산다고요. 

야곱은 죽을 때 죽은 게 아니에요.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천사와 만날 때 이미 죽은 거예요. 야곱으로 죽지 않으면 이스라엘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이스라엘이 야곱을 계속 죽이는 그 작용, 그 죽이는 작용이 바로 생명의 작용이에요. 하나님의 맹세의 덤태기를 씌운 거예요. 맹세로 하나님의 약속, 언약의 덤태기를 씌워지는 겁니다. 

야고보서4장 한 번 봅시다. 4장 14절, 이거 20번도 넘게 한 거 싶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물으면서 너희 생명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이 말을 하는 것은 우리의 생애라는 게 말씀과 관련해서 한시적이다. 

순간적이고 임시적이라는 뜻이에요. 우리가 말씀과 관련해서. 

말씀이 떨어져나가면 

우리는 내 인생 내거라고 내가 열심히 살아주지만, 

말씀의 관점에서 보게 되면 우리는 안개처럼 주님의 반짝 폈다가 없어지는 안개가 되는 거예요. 

있었나? 없네. 없잖아. 아~ 조금 전에 있었는데. 없잖아. 지금. 이리 되는 거예요. 

조금 전에 있어야 했었고, 조금 전에 있던 그것이 없어져야 될 운명이 우리 운명이에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맹세가 중요하고 말씀이 중요한 겁니다. 말씀이. 

인간의 육은 풀이고, 주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이 말씀과 맹세의 영원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시적인 것. 일시적인 실체, 또는 일시의 물체, 사물을 인간의 몸을 가지고 사용하신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럼 우리는 죽어서 어디에 갑니까?” 가 아니라 

“처음부터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질문을 그렇게 해야지요. 
질문이 잘못된 거예요. 

“우리는 죽어서 천당 갑니까? 지옥 갑니까?” 하지 말고 

처음에 우리가 어디 있어요? “우리가 몸을 입기 전에 우리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이리 돼요. 

“예수 안에 있었습니까? 예수 바깥에 있었습니까?” 

“예수님의 혜택 안에 있었습니까? 예수님의 저주 안에 있었습니까?” 

질문이 그리 되어야 되지요.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가 인생을 논하다가 갑자기 확대돼요. 범주가. 

확대되어가지고 창세전부터 있었던 계획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밀려옵니다. 

그럼 그동안 그것을 그러한 숙명의 지혜를 누가 방해했느냐 

우리의 육적인 아담의 몸인 내 자아성이 그걸 극구 반발하고 대들었지요. 

그 대들은 게 뭐라고 했습니까? 대들은 게 우리가 오늘 본문에 맹세하지 말라 했잖아요. 

그러면 맹세하지 말라 해도 맹세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게 하나님께 대들기 위해서. 


왜 대든다 했지요? 대들면 무엇이 생긴다 합니까? 자아성이 더욱 더 공고히 되는 겁니다. 나는 나다가 공고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맹세하지 말라는 거예요. 일체 하늘이나 땅이나 어느 것도 맹세하지 마라. 니가 권여할 일이 아니다. 니 인생이 니가 권여해서 될 인생이 아니다, 이 말이지요. 하나님의 맹세가 듬뿍 주어진 거예요. 하나님의 맹세가. 

여러분, 빙수 같은 거 한 번 보세요. 빙수를 탑으로 해서 함빡 주지요. 빙수에다가 팥 넣고 여러 가지 떡도 넣고 초코렛하고 연유도 붓고 하는데 그것이 주어진 빨간 주스, 노란 주스, 파란 주스도 전부다 빙수 알갱이 속에 녹아져 나가잖아요. 녹아져 나가지요. 그런데 우리가 만약에 빙수 속에 있는 하나의 팥 알갱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우리의 자아성이라는 것이 그게 의미가 있겠어요? 없지요. 전체 빙수를 위해서 그냥 참여한 거잖아요. 먹으시는 분의 맛있게 먹기 위해서 참여한 거다 말이죠.  

그러면 그 빙수가 녹아진다면 같이 녹아져야 되는 거예요. 제가 빙수라고 했는데 그 빙수에는 얼음조각을 저는 이렇게 봅니다. 시간으로 봐요. 우리한테 시간이 잔뜩 주어졌고 그 시간은 계획이 있으며 그 계획은 하나님의 약속 범주를 벗어나지 않아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시간에 우리는 거기에 끼어든 거예요. 그래서 시간이 지나게 되면 우리는 매일 이별해야 돼요. 우리는 매일 이 자아성과 조금씩 내가 나로부터 빠이 빠이 해야 돼요. 헤어져야 돼요. 매일같이 늘 이별이에요. 늘. 요거 제목 괜찮다. 조금씩 이별합니다. 

여러분, 어제까지 산 인생 어디 갔습니까? 어제 어디 있어요? 어제. 헤어졌습니다. 내일되면 오늘과 헤어져야 돼요.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보면 참 어제와 헤어진다는 것이 그렇게 안타깝고 아까워요. 스톱이 안 되고 계속, 계속 죽음 쪽으로 이렇게 내가 망가지는 쪽으로 허물어지는 쪽으로 간다는 것이 되돌릴 수 없다는 게 우울증 걸릴 정도로 힘든 현실이에요. 이 세상이. 

오래간만에 옛날에 드라마나 영화에 나왔던 영화배우나 탤런트를 한 20년 만에 그 사람이 새로 등장해 보세요. 제일 화면에 나오면서 우리가 하는 말이 저 사람 왜 이리 늙었지? 오랜만에 나오면. 다들 그런 이야기해요. 아이, 많이 늙었다. 하거든요. 그런데 우리 자신도 같이 늙어가잖아요. 

하나님께서 맹세하지 말라는 말은 니가 맹세한다고 해서 니 시간을 되돌릴 수 없고 니가 무너지는 것을 니가 안개의 꼴이 나는 것을 그걸 취소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정신 바짝 차리고 세상을 제대로 봐야 된다는 겁니다. 허망한 니 자아성에 입각한 니 허망한 꿈은 너 자신을 힘들게 하고 괴롭게 할 뿐 아니라 뭐를 초래한다 했습니까? 이 위기를 초래해요. 위기를 자꾸. 왜냐하면 이 현실하고 안 맞으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맹세와 싸우시는 하나님이 주님이에요. 우리의 맹세를 자꾸 하니까. 싸우니까 위기를 자초하게 되지요.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에게 제가 위로삼아 이야기하는 건데 이렇게 맹세하고 위기를 당하는 그 자체가 맹세의 완성이라는 점을 잊지 마세요. 맹세는 그렇게 이루어지는 겁니다. 곱게, 곱게 가는 법이 없어요. 반발과 반항을 온몸으로 받아내시면서 그걸 강제로 안 들어주면서 말씀은 말씀대로 성취해 나가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궁금한 것은 이 맹세의 마지막이 뭐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맹세의 마지막은 뭐냐, 그게 궁금하지 않습니까. 표정들이 궁금하지 않은 표정들인데, 맹세의 마지막은 이거에요. 나의 죽음입니다. 

우리는 뭐든지 정답을 알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요. 하나님께서 약속한 바에 의하면 우리의 최종 죽음이에요. 이 죽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뭐냐 하면 이게 ‘처벌’입니다. 처벌. 니 죽는 걸로 처벌 끝내자. 우리 그런 것으로 합의보자. 니 몸 없는 것으로 너는 너한테 물을 게 없다. 우리 그리 가자. 응? 

왜냐하면 옛 몸은 없어져야 새 몸이 주어지니까. 몸이 둘되면 안 되잖아. 그지? 그러니까 있는 몸 폐차하고. 이만원줄게. 이만원. 폐차시키고 새 차 뽑자. 응? 우리 그리 가자. 그렇게 하고 가도록 하자! 그러니까 맹세하지 마. 내가 그렇게 일이 잘되고 있으니까. 

“그러면 그렇게 해서 우리가 얻는 게 뭡니까?” 이리 나올게 아니냐 말이죠. 하도 이해타산이 예민하니까 우리는 하나님 대놓고, “그렇게 해서 맹세해서 우리한테 주어지는 게 뭡니까?” 하면 주님께서 뭐냐 하면, “니 본래 있던 자리로 데려가줄게.” 왜냐하면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게 아니고 어떤 동네에 있었는데 거기에서 잠시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이동해 온 거예요. 자리를 이동한 거예요. 있을 자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나그네니까. 이 자리에서 후딱 은퇴해가지고 다시 원래 갔던 자리로 창세전에 예정된 그 자리로 다시 보내줄게. 그게 니 실익이야. 니가 얻을 수 있는 게 바로 그거야. 

그런데 거기 가는 코스를 주께서는 그냥 위로만 하는 게 아니고 실제 온몸으로 보여준 거예요. 나는 너희를 떠나서 아버지께로 간다. 베드로말이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지금은 너 못 와. 그러나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을 너한테 보내줄 테니까 성령 따라서 오게 되면 내있는 곳에 너희도 나와 같이 있으리라.” 그러면 이제는 우리는 너희들은 바로 아버지와 함께 하나가 된다. 이 말입니다. 요한복음14장에 나오는 말씀이지요. 

성도는 목표는 뭐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 우리가 한 패밀리로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게 천국이에요. 그게 하나님 맹세한 바의 전부입니다. 거기에는 아브라함도 있고, 거기에는 이삭도 있고. 거기에는 누가 있고, 야곱도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요, 그리고 다시 부활한 사람들은 이 땅의 몸이 떠났으니까 이 땅의 몸 같지 않고 그 때는 천사의 몸과 같을 것이다. 주께서 친절에 친절의 극을 더하시면서 친절하게 우리에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자,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게 친절하게 해주셨는데 왜 우리는 그것이 화들짝 감사하지 않지요. 왜 정신을 딴 데 두고 있지요.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평소에 자아가 있으면 자아에서 내뿜는 게 있어요. 내 뿜는 게 억지인데, 억지스러움은 세상은 내 뜻대로 되어야 된다고 일종의 고슴도치가 가시를 뿜는 것처럼 계속해서 내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고 찌르고 하는 겁니다. 물론 여기에 예수님도 하나님도 같이 찌르고 하지요. 

이러한 모습이 될 경우에 여기는 뭐가 없느냐 하면 이게 없어요. 감사가 누락됩니다. 감사가 없어져버립니다. 맹세를 하지 말라는 이유가 뭐냐, 맹세를 하게 되면 감사가 없어져버려요. 감사가 없고 미흡함과 동시에 불만이 여기에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맹세 안에. 그래서 맹세는 감사를 제거한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지금까지 한 거 다시 한 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것으로나 맹세하지 말라는 것은 이미 인간 자체가 거대한 공간 안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설친다고 공간에 취지가 달라지거나 변동의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인간 나름대로의 어떤 자기 영역을 자기 창고 같은 걸 만들어놓고 아지트를 만들어놓고 여기서 계속 싸대니까 설쳐대니까 여기서는 뭐냐 하면 밀폐된 메아리 속에 스스로 자기가 놓여있어요. 자기 공간이 밀폐돼 있을 때는 여기는 뭐가 성립이 안 되느냐 하면 이걸 몰라요. 늘 떠난다는 것. 내 존재의 몸과 이별해야 된다는 것을 이걸 자꾸 잊어버려요. 

나는 나를 놓아줘야 된다는 사실을 이게 분명한 현실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자꾸 놓쳐버려요. 그러면 이 세상 모든 것을 자기가 자아성이 있으면 자아성은 결국 무얼 유발하느냐 하면 소유권을 유발해요. 자꾸 소유하려합니다. 그런데 자아성의 반대말로 하려면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으면 소유권이 아니고 뭐냐 하면 사용권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께서 사유재산 소유권을 주려고 한 게 아니고 사용권을 준다는 거예요. 내가 있는 곳에 네가 살게 하겠다. 이리 되는 거예요. 주님이 있는 곳에 살게 하겠다, 이 말은 주인이 누구라는 말입니까? 주님이 주인이 되는 거예요. 

내가 마련한 인생에 내가 사는 게 아니에요. 내가 주인공이 되어 사는 게 아니에요. 주인공은 따로 있고, 주인공은 따로 있는 데 내가 주인이 아니라는 그 안에서 내가 주인이 아니라는 조건하에 거기서 살게 되는 겁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는 거. 그러면 이 세상에 아담에 속한 인간들은 모두 자연적으로 뭐냐 하면 자기의 소유권을 자랑하게 되어있어요. 소유권을 갖게 되어있다고요. 소유권을.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만큼은 보이지 않는 주인이 따로 있기 때문에 소유권이 아니고 사용권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 땅 사용은 대를 위해서 물려줄 수 있어요. 그런 점에서 이방민족과 이스라엘 민족은 대질해보면 완전히 차이가 나지요. 완전히 차이가 확실히 나면서 이스라엘만의 독특한 특징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 이스라엘은 왕이 없고 왕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거는 지파중심이라 해요. 지파중심. 지파중심인데. 지파중심이라고도 하고 아니면 지파평등주의라 할 수 있어요. 지파평등주의에요. 그런데 나중에 인구가 늘어나게 되면 이 지파평등주의가 뭐로 바뀌느냐 하면 군주제로 바뀝니다. 군주제. 군주제라 하는 것은 우리에게도 왕을 주옵소서. 이렇게 되는 거예요. 왕이 등장해요. 

왕이 등장하게 되면 백성들은 우리가 여기 있는데 왕만 하나 뽑아서 우리를 위해서 봉사할 것이다. 이렇게 순진하게 생각한 거예요. 그러나 사무엘상8장에 보면 사무엘 선지자가 왕이 있다는 것은 너희들에게는 아무 다친 게 없고 그냥 왕만 따로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은 너희의 자녀와 너희의 좋은 포도주와 그리고 너희의 포도원과 십일조 이런 것을 다 강탈해 갈 것이다. 라고 미리 이야기했거든요. 

그럼 강탈해 가면 평등주의가 뭐로 바뀝니까? 평등주의가 깨지겠지요. 깨진다는 말은, 평등주의가 뭐냐 하면 사용권이 날아가 버리고 소유권으로 바뀝니다. 하나님께서 아까 위기 준다고 했지요. 이게 집단적 위기인데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위반했을 때는 위기가 찾아오고 이 위기는 자연적인 가뭄과 기근으로 찾아오고 전쟁으로 찾아오는데 가뭄이 되어버리면 이거 농경시대에 농사짓는 사람들이 일반백성들이 가뭄이 되어서 소출이 없으니까 소출을 못 내겠지요. 

그러면 군주제라 하는 것은 군주제 밑에 왕만 있는 게 아니고 곧 한 그들의 패들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전쟁하는 귀족들이에요. 군인들. 군인들이 땅을 차지하게 되면 그걸 가지고 왕이 거기서 니 땅 해가지고 세입자 되어버려요. 그러면 땅이 넓어지겠지요. 땅이 넓어지게 되면 이건 뭐냐 소유가 늘어나겠지요. 소유가 늘어나게 되면 이 소유 늘어나는 것에 대해서 부자가 된 것에 대해서 농민들이 여기에 부자의 곡식을 빌리러 오겠지요. 고리로. 이자 맞춰서. 그리되면 어떻게 됩니까. 빈부격차가 심화되겠지요. 

이게 왕제도가 되면서 왕은 또 왕제도하면서 그냥 하는 게 아니고 건축을 많이 해요. 토목사업. 하다보면 여기서 토목사업하면 노동력이 필요하고 인부들이 필요하잖아요. 그러면 인부들이 수당을 받고 임금을 받고 일하다보면 자기는 토지를 떠나버리고 간다고요. 또 전쟁할 때 군인들이 가요. 그러면 토지는 누가 짓습니까. 소는 누가 키울 거예요? 소는 제대로 못 키우지요. 못 키우니까 소출이 없지요. 소출이 없으면서 여기 이 땅의 진짜 주지들, 그걸 부재주지라 하는데. 부재주지 같으면 소득세가 60% 띱니다. 도시에 있는 주인은 도시에 있고 농촌에 임대차해서 한 사람들에게 세금을 떼어가 버리면 그럼 점점 더 가난해지겠지요. 

이 자체가 집단적 위기에요. 위기가 온다했지요. 이스라엘이 세상나라처럼 되니까 위기가 찾아온 겁니다. 그러면 위기가 찾아오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선지자를 통해서 너희들에게 위기가 찾아온 것은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다. 우상. 우상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맹세가 빠진 게 우상이에요. 

자꾸 우상하니까 전에 제사지내고 부처섬기고 점치고 그게 우상이라 생각하지 마세요. 우상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맹세한 그 맹세가 빠진 게 우상이에요. 그러니까 오늘날 우상이 뭐예요? 기독교가 우상이고, 교회가 우상이지요. 그러면 인간들의 한 맺힘이 오잖아요. 내 자아를 키워주세요. 하고 오잖아요. 내 자아를. 그리고 금요일 되면 방석 딱 깔아가지고 커피 딱 준비하고 뭐해야 됩니까? 맹세할 준비하잖아요. 맹세. 

자, 맹세라 하는 것은 뭐가 생긴다? 자아성이 생기는 거예요. why me? 하필이면 저를 이렇게 이따위 식으로 인생을 꼬라박게 하시겠습니까? 펴놓은 대드는 시간을 마련한 건데. 하나님 앞에 데모하는 시간을 마련한 거예요. 최저임금 인상하라고. 이리 못살겠다고. 솔직히 말해서 니가 뭔데 내 인생을 조지느냐 이 말이거든요. 하나님이면 다냐? 그걸 이제 순화해가지고 전능하시고, 자비하시고, 노골적으로 깨놓고 “니 왜 그렇게 기도를 열심히 하는데?” “내 인생 조저 놨잖아요. 내 인생. 그것 때문에 내가 지금 항의할 데 없어서 주님께 항의합니다. 빨리 기도응답해서 원상회복하라고요.” “그리고 주님의 기도응답조건으로 내 압니다. 야고보서1장 안양공부 때 했습니다. 의심치 않고 기도하면 응답된다고. 그거 내 의심 안합니다.” 그 자체가 벌써 의심이에요. 의심 안하겠다는 자체가 의심이라. 꿍꿍이속이 딴 데 있어요. 

“주여, 맹세라는 그러한 무빙, 그러한 움직임에 그러한 홍수에 내 몸을 던집니다.” 이게 아니고 내 것 다시 찾아주세요. 내 인생 찾아내놓으라는 거예요. 주님의 목숨이라 하는 것은 잠시 허락한 거잖아요. 잠시. 잠시 허락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이고, 니는 없어질 말씀에 비해서 비현실로 계속해서 사라져야 된다는 것을 대비해서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잠시 목숨을 준 거예요. 내 목숨 자체가 없습니다. 

주께서 내일 허락하지 않으면 우리는 오늘로서 끝이에요. 여러분, 마트에 계산할 때 앞에 손님하고 뒤에 손님하고 뭐로 막습니까? 막대기로 딱 놓고 이 쪽 사람 저쪽 사람 물건 구분하잖아요. 그게 매일 매일 우리 구분 짓는 거예요. 오늘은 오늘치의 말씀에 허락한 인생, 내일은 내일치의 말씀을 드러내기 위해서 허락한 인생이 따로 있어요. 섞어버리면 니거 내거 분간도 안 되잖아요. 

맹세하지 말라는 것은 이 세상 전체가 주님의 맹세에 흠집 내지 말라는 거예요. 니 오기와 니 독선과 니 자아성 때문에 흠집 내지 마라. 흠집 낸다고 흠집 날 나도 아니다. 오히려 니가 힘들어질 뿐이다. 이 말이지요. 맥시코 선인장 맨발로 한 번 뒤로 차보지요. 가시 때문에 얼마나 아픈지요.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이려니까 하나님이 하신 비유가 예수님이 하신 비유가 뭡니까? 니가 가시채로 니가 그냥 맨발로 하면 니만 아프지, 내가 아프냐 이 말이죠. 니가 왜 그렇게 부질없는 짓을 하느냐 이 말이죠.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그 사람이 주님을 떠났어요. 하는데 주님을 떠날 수가 없어요. 구원 아니면 저주, 그 주님의 품을 주님의 맹세에서 못 떠난다고요. 그들이 그 예수 복음 안 믿는 것은 그들이 복음을 못 믿게 한 거예요. 

마태복음11장 한 번 봅시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아버지를 안다는 거, 예수님을 안다는 거, 그것은 창세전에 이미 야곱처럼 사랑받기로 작정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겁니다. 

이 일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일을 지금 제대로 하고 계신 거예요. 자꾸 성도라는 이름으로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교회는 뭐 달랑 3가정 돼가지고 이제 한 가정도 달랑 달랑 이제 나중에 헤어지겠다 하는데, 무슨 교회가 그런 교회라 하는 것은 택함 받은 자의 집합이기 때문에 니 교회, 내 교회 없어요. 교회는 오직 몸이 하나요, 몸이 하나밖에 없어요. 교회가 한군데 밖에 없는데 무슨 내 교회가 또 있겠어요. 그 내 교회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 좌석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자꾸 내가 설교해서 얼마 몇 명 더 오는가 하는 것은 테스트하는 거라니까요. 

내가 과연 신자인지 아닌지 테스트하기 위해서 자꾸 측정을 하다보니까 마귀처럼 자꾸 주님한테 기도하고 맹세하고 맹세한 거 기도응답 됐나 들춰서 확인해보고 계속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 모든 실없는 짓 이유가 뭐냐, 떠나기 싫어서 그런 거예요. 정들었던 나와 헤어지기 싫어서 그런 거예요. 

선악과 따먹고 지옥 가는, 지옥가는 게 뭐 그리 좋다고 주님은 지옥 가는 나를 선악과 따먹고 지옥 가는 나를 생명나무로 나를 건지려하는데 우리는 어디에 정이 들었느냐 하면 선과 악을 논해서 내가 착한 인간이 되는 게 그게 버릇이 들었기 때문에 선한 사람 되는 거, 착한 사람 되는 걸 놓지를 못해요. 

지난 수요일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수요설교 때, 젊은 애들이 지는 안착하면서 착한 아가씨와 착한 총각원한다고요. 지는 안착하면서. 착할 마음 추호도 없으면서. 무조건 착한 남자, 착한 여자를 찾고 있다 말이죠. 왜 그래요? 자기한테 순복, 순종하라고. 자기한테. 자기는 주님한테 순복 안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은 아버지의 아들과 아버지의 계시 외에는 오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못 보고 못 오게 하시는 그것이 이미 맹세 안에 포함됐다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돼요. 함부로 보고 함부로 믿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이 성경 말씀이. 인간은 누구나 자아성이 있기 때문에 항상 자기 위주이기 때문에 어떻게 자기 위주를 스스로 자기 위주를 벗겨낼 수 있어요. 못 벗겨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지금 잘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위반하던 관계없이. 범사에 감사하면 되는 거죠. 10분 쉽시다.

 공은주 (IP:119.♡.152.148)19-07-23 15:09 

안양20190712b야5장12절(맹세) - 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남을 의지하는 버릇이 있지요. 자기를 위해서 남한테 의지하는 버릇이 있어요. 맹세하는 것도 하나님께 의지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잘 보이기 위해서 하는데 맹세를 하게 되면 어떤 부작용이 생기느냐 하면 사과하게 돼요. 뭐든지 맹세하게 되면. 맹세 못 들어줘서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사과합니다. 죄송합니다. 전부 다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선악체제에서 나온 거예요. 지옥에 갈 이유가 됩니다. 지옥에 갈 요건이 되는 거예요. 요건을 갖춘 거예요. 요런 게. 

사과하고, 미안하고, 죄송하고. 내가 나한테 죄송하고, 내 자식들에게 죄송하고. <교회오빠>라는 영화 평을 써놨잖아요. 내 죽는 것은 안 아까운데 딸 하나 이름이 소연인데 소연이가 병든 엄마, 아빠 만나가지고 제대로 못 커서 내 죽으면서 그거 하나 미안하다. 하는 거예요. 이 <교회오빠>라는 그 영화가 지금은 대충 끝났어요. 몇 달 전부터 했어요. 뜨문 뜨문 교회 안에서 그게 소문이 나가지고 사람들이 꽤 많은 사람들이 봤습니다. 저도 보려고 했는데 하는 데가 없어가지고 우이 찾다가 한군데에 있어가지고 시간 일찍 가서 내가 봤는데. 사과하고 미안하다, 죄송하다, 이 말은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질 때 나올 이야기입니다. 이게. 왜냐하면 인간은 누굴 의지하느냐 하면 인간은 타인을 의지하거든요. 타인을 의지하면서 내가 남과의 관계형성을 어떤 식으로 잘 유지를 해야 될까, 유지하기 위해서는 나에게서는 어떤 태도가 적절할까, 그게 항상 미안하고, 죄송하고, 사과할 준비가 되어있으면 나의 착함에 대해서 상대방이 이렇게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라는 계속해서 의지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의지할 만한 가치. 좋게 말해서 그렇지요. 사실은 이용할 만한 가치가 되겠지요. 자식이 부모한테 잘못했을 때 엄마 미안해요. 한다고 해서 계획을 바꾼다는 것은 그것은 엄마가 자식을 의지해서 그래요. 좀 냉정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엄마가 어떤 일관된 자기 생각이 전혀 없는 거예요. “그래? 니가 담배를 피우다니 니가 몇 살인데 니가 공부할 나이에 담배를 피우면 돼?” 하면서 엄마가 걷어! 옛날 또 들은 방식해가지고 회초리 가져와! 때리면서 드라마는 본 게 있어가지고 때리면서 얼마나 아프겠노? 때리는 엄마가 또 같이 울고. 엄마, 내가 또 잘못했어. 우는 엄마를 붙들고 또 아들이 울고. 한 편의 감동드라마를 연출해 내요. 때릴 때 내 마음이 아프다. 이리 하면서. 어서 들은 대사해가지고요. 주님께서 그런 거 원하십니까? 놀고 있네. 주일날 했잖아요. 겸손도 꼴보기 싫다고요. 

겸손이 뭡니까? 내가 저 사람을 계속 이용할 수 있도록 내 마음을 낮추자는 방식밖에 안돼요. 내가 예수님 앞에 겸손하자. 이 무슨 수작이에요. 무슨 이런 수작이 다 있어. 왜 주님 앞에 겸손해야 돼요? 겸손한 만큼 죄인 됩니까? 의인됩니까? 물어봅시다. 의인되잖아요. 겸손한 만큼. 마음을 낮춘 만큼 의인된다고요. 주님은 우리를 죄인으로 보는데 우리는 주님 앞에 지금 재롱을 부리고 있는 거예요. 

성령이 임해야 될 이유는 바로 무엇의 안목 때문이냐 하면 하나님의 안목 유지, 안목 장착. 이것 때문에 성령이 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 맹세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 이게 성령이 와야 보여요. 위에서 보는 안목이에요. 내 쪽에서 보는 안목이 아니고. 그런 주님의 안목으로 봐야 오늘 본문이 풀립니다. 맹세하지 말라. 야~~ 이거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그러면 왜 이거 야고보서에서 맹세하지 말라는 생뚝맞는 이야기를 했느냐, 야고보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사도 야고보라 보면 돼요. 왜냐하면 배웠던지 안 배웠던지 그 야고보 말고 또 다른 야고보 있고 예수님의 형제도 있지만, 그 사상은 동일한 사상으로 보면 되거든요. 마태복음5장보겠습니다. 마태복음5장33절,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하는 이 이야기가 구약에 있는 하나님의 모세율법을 볼 때 우리의 잘못된 안목, 하나님의 안목이 아니고 지옥 갈 안목, 마귀와 단짝이 된 안목을 들추는 방식으로 율법을 줬다는 이야기에요. 

맹세를 했으면 지켜야 되고 헛맹세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그 말씀을 이야기할 때, “맹세한 것은 지키라는 그런 뜻이지요? 그런 뜻으로 이해하면 정답이지요?” 라고 그런 식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그 마음 자세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라는 거예요. 모세에게 말하기를 헛맹세하지 말고 맹세한 것은 지키라는 말은 아예 인간은 이 땅에서 이 세상 안에서 맹세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는 뜻이다. 이게 누구 안목이냐 하면 하나님의 보는 안목이에요. 

마태복음 그 뒤에 보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이렇게 되어있어요. 야고보서에서 오늘 본문에서 맹세하지 말라는 것은 이미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예수님이 이야기를 하신 거예요. 예수님이 누굴 보냈느냐 하면 예수님이 모세를 보냈거든요. 모세가 시내산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말이죠. 만나서 모세에게 이런 말씀을 준 것은 이런 내용을 담고 맹세하지 마! 라는 말을 담고 이 세상 언어로 이야기한 거예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이 자아성 때문에 남에게 의지해서 자기 이득을 보려는 그 마음으로 이미 무장돼있는 상태기 때문에 자기 의로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의 말씀 지킨다고 맹세한 것은 무조건 지키고 헛맹세 안하고 제대로 맹세하면 되지. 라는 식으로 모든 걸 정리하는 거예요. 그들이 정리한 것이 낯선 게 아니에요. 오늘날 우리가 매일같이 하고 있는 겁니다.  

이 기도대로 안했다고 해서 나한테 얼마나 많은 벌을 내리실까, 이렇게 생각한다는 자체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벌 내리는 게 너무나 당연한데도 불구하고, 왜 당연합니까? 우리의 맹세 끝이 뭐라고 했던가요? 첫째시간에. 맹세의 끝은 우리를 당연히 죽이는 게 맹세의 끝 아닙니까. 우리가 죽어가는 것은 이 일이 잘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나쁜 짓 많이 해서 죽어가는 게 아닙니다. 좋은 사람, 남녀 직위, 남녀노소를 무론하고 주께서 다 휩쓸어버리듯이 홍수 나서 휩쓸어버리듯이 한꺼번에 다 휩쓸어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그 휩쓸림 안에는 뭐냐, 하나님이 자기가 자기한테 맹세한 하나님 맹세의 강한 실천성이 거기에 담겨있습니다. 강한 실천성. 그 탁류에 쓸려 가면 착하고, 안착하고, 그 별 차이 없습니다. 사업 잘됐다고 복 받고, 사업 망했다고 싫어하지 마세요. 사업 잘된 그 순간도 하루치 늙었고, 사업 망했다고 울어도 24시간 하루치는 이미 소비되고만 거예요. 

주님의 시간은 고장난 벽시계에요. 나훈아의. 이건 가만히 있어도 가지도 않아요. 시간이 흐르지도 않아요. 자, 그렇다면 이 구약에 하나님께서 옛사람에게 맹세에 대해서 뭐라고 이야기했는지를 우리가 알아볼 필요가 있겠지요. 자, 이제부터 부지런히 성경 한 번 찾아봅시다. 

레위기, 신명기 동네기 때문에 한 번 펼쳐놓으면 쉬워요. 레위기19장12절 한 번 보겠습니다.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내 이름으로 맹세하지 말라.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면 니는 그것은 나에게 맹세할 권한을 준적도 없는 니가 내 하청업자도 아니면서 내가 니한테 지시한 적도 없으면서 니는 니 욕심에 개인적인 야욕을 채우기 위해서 이건 주의 뜻이지요? 하나님의 은혜요, 하면서 자기 뜻을 채우는 그런 수작질을 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그런 거짓에 나는 안속아 넘어간다 이 말입니다. 

레위기5장4절에 보면, “만일 누구든지 입술로 맹세하여 악한 일이든지 선한 일이든지 하리라고 함부로 말하면 그 사람이 함부로 말하여 맹세한 것이 무엇이든지 그가 깨닫지 못하다가 그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는 그 중 하나에 그에게 허물이 있을 것이니” 완전히 성경은 인간을 무시해요. 이렇게 개무시해요. 내가 맹세한다는 것은 현재에서 미래를 예단하는 거거든요. 이것은 인간에게 선택성이 있고 인간의 선택은 미래를 결정한다는 그 인간의 강한 자아성에서 유출된 태도다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과거와 헤어지게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 현재가 주의 것이잖아요. 그러면 현재의 우리를 받아서 미래까지 갈 때 밑에 시간이라는 발판을 깔고 끌고 가요. 발판을. 미래가 미리 와서 우리의 두 발을 밑에 깔아버려요. 깔면 이동하기 싶잖아요. 뭐든지 가구 같은 거 이동할 때 이삿짐 할 때 뭘 깔고 하잖아요. 주께서는 미래의 시간이 와서 현재 우리를 깔고 왔을 때는 우리는 미래로 이동이 가능해요. 이게 시간이 거기서 스톱이 되어버리면 우리는 거기서 내일이라는 것은 없고 죽어야 돼요. 시간은 주의 것이지 우리의 것이 아니다 말이죠. 

왜 시간이 주의 것이냐 하면, 모든 일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일은 누가한다? 주님이 일을 하거든요. 그게 주의 이름이 하실 일, 또는 주의 일, 또는 주님이 홀로 하실 일, 다 같은 말이에요. 내일 계획은 주님이 이미 주의 이름으로 갖고 있어요. 주의 이름이 내일 할 일이 있는데 인간이 주의 일도 모르면서 무심코 하는 내가 지금 맹세하면서 이 말을 내용도 모르면서 지 딴아 안다고 내일 뭐 할게. 라고 말을 내뱉었을 때 니가 그거 책임질 수 없다. 말이죠. 그럴 때는 뭐하느냐 하면 여기 속죄제를 드려야 돼요. 

 6절에 보면, “그 잘못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속죄제를 드리되 양 떼의 암컷 어린 양이나 염소를 끌어다가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그의 허물을 위하여 속죄할지니라” 그 병과로 인하여 속건제를 드리되 양떼와 소와 염소를 드리다가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 속건제도 드리고 속죄제도 드리고. 둘 다 속건제, 속죄제 할 수 있는데요. 굳이 구분한다면. 속죄제를 드린다는 것은 속죄제의 의미가 뭐냐 하면 죄가 발각되었을 때에 본인 좋아라고 드리는 게 아닙니다. 

이런 걸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속죄제, 속건제라는 제사는요, 본인 좋아라고 한 게 아니고 하나님 내가 있는 이 장소가 니 때문에 청소해야 된다는 거예요. 더럽혀졌다는 거예요. 애가 주스를 흘리잖아요. 주스를 흘리면, 애보고 “니는 주스 흘리면 지옥 간다.” 이것 때문에 니가 닦아라 하는 게 아니고 내 뜻은 어쨌거나 이곳은 깨끗해야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은. 

다시 말해서 니가 치우면 깨끗하다가 아니라 원래 처음부터 깨끗했었는데 니가 더럽혔다는 겁니다. 그 의미가 다르지요. 니한테 부탁한다. 내가 앞으로 니한테 당부한다. 니가 일을 안 하면 하나님답지를 못해. 그러니까 부탁한다. 제발. 깨끗하게 살아라. 이게 아니고 이미 깨끗했는데 인간이 자기의 자아성, 자기의 고집을 의사를 표현하는 순간 이게 더럽혀진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물걸레질로 빨리 해야 되겠지요. 요새 세탁기(청소기)는 물걸레질까지 딱 되어있는 것. 백만원을 혹 간답니다. 빙빙 털털 터는 게 있고, 돌아가는 게 있는데 돌아가는 게 성능이 더 낫답니다. 터는 것보다도. 물걸레질을 해서 씻는 방법인데 물걸레가 피걸레가 되는 거예요. 그게. 왜? 양을 잡아야 되니까. 피걸레에요. 피. 

그 아내 십보라가 남편보고 당신은 피남편이라는 말은 당신은 청소부다. 이스라엘을 책임지는 청소부라는 뜻이에요. 피로서 씻어내는 겁니다. 모세나 아론이 관심 두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타락하느냐가 아니라 이 피와 결부되어있는 피가 어느 일과 결부되어있는가, 그 결부된 관계성을 주목하는 거예요. 

피가 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인간은 이미 뭐로 봤다? 죄인으로 기정사실화 시킨 거예요. 이제는 인간에서 뭐만 끄집어낼 때마다 죄만 나올 때마다 피의 효과성, 효력성 다시 말해서 이 모든 세상은 하나님의 맹세로 이루어졌다. 피 맹세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데, 이게 이스라엘 죄는요, 이방민족은 죄도 아니에요. 

그런데 그게 이스라엘에 와서는 애굽에 있을 때는 죄가 아닌데 애굽에서 나와서 죄가 되는 이유는 이스라엘 사람과 뭐와 이렇게 맞닥뜨리게 되느냐 하면 시내산에서 받았던 모세의 율법과 만남으로서 죄도 아닌 게 죄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죄도 아닌데. 죄가 된 거예요. 죄가 더한 곳에 뭐가 넘친다 했습니까?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는 거예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것은 누구를 배제하느냐 하면 나. 이 자아성 지키기를 완전히 배제해야 진짜 아멘이 아멘다운 겁니다. 

예수님 십자가 달리기 직전에 어떤 한 여자가 향수를 가지고 예수님 발 앞에 붓지요. 제가 그 설교할 때에 우리가 만약에 그 현장에 있다면 다른 제자들과 같이 똑같은 소리했을 거다 말이죠. 예수님 발 씻는데 물로 씻을 수 있는데 왜 비싼 향수가지고 씻느냐, 그렇게 한다고 때 더 벗겨지는 거 아닌데 향기는 나겠지만. 니는 보기에 발 씻는 것으로 보이느냐, 발 씻는 게 아니고 뭐냐 하면 장례한 거예요. 장례. 

장례라 하는 것은 원래 죽고 난 뒤에 치르는 게 장례잖아요. 그러나 이 여자를 통해서 죽기 전에 이미 시작된 장례인 거예요. 그렇다면 이 여자가 하는 일을 곧 누가 해야 되느냐, 나중에 열 두 사도가 해야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운구해야 되는 거예요. 그들이. 오늘날 또 성도가 이걸 해야 되는 거고. 날마다 이별할 때 그냥 이별하면 안 되지요. 주님가신 곳으로 이별하려면 주와 함께 움직여줘야 주님 가신 곳으로 이 땅과 이별하고 주님 가신 곳으로 합류가 되지요. 주님 가신 길로. 

주님가신 길로 합류가 되면서 오늘 본문 야고보서에서 뭐라고 합니까? 맹세하지 말라. 니라는 인간은 맹세할 잽도 못된다. 그것을 일깨워주는 그 말씀이 우리와 함께 같이 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야고보서 말씀을 주신 거예요. 너는 안개다. 임시적이다. 니가 거울 앞에 있는 모습은 니 모습이 아니야. 그건 존재야. 니 실존이 아니라는 말이죠. 존재는 껍데기라면 실존은 알맹이잖아요. 알맹이는 어디 있습니까?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 이미 있잖아요. 있다 이 말이지요. 남들 보기에는 욕할 거예요. 저보고. 와 자꾸 지어내느냐. 성경대로 안하고 성경을 넘어서느냐. 지옥 가는 거 모르느냐. 넘어서지 말라고 하는데 이게 넘어선 게 아닙니다. 골로새서3장3절 뭐라고 되어있어요? 

우리는 이미 이 땅에서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어디에 있어요? 우리의 실존은, 생명은 하늘에 감추어뒀다 했잖아요. 지가 그런 성경구절이 생각이 안 나니까 상당히 과격하고 도발적으로 보이는 그 말씀을 하게 되면 우리는 감당을 못하겠나이다. 누가 어디 감당하라고 말씀을 준 줄 알아요? 안 믿어지면 안 믿으면 돼요. 못 오게 하시는데 내가 무슨 백이 있다고 오게 하십니까. 못 오면 못 오는 거죠. 애 본다고 못 오는 건 할 수 없지만. 

관심사가 자아성을 키우고 자아성이 이렇게 나는 잘났다는 것을 그걸 키우기 위해서 남하고 자꾸 의지하는 거예요. 소위 사귐이요. 사귀고 의지하고 만나고 그게 나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어디에? 나의 생존에. 하지만 이미 그렇게 할 때 이미 서산에 해는 지는데. 우리의 어떤 분주함과 상관없이 sunset, 해는 지잖아요. 노을은 들것이고. 오늘도 보람찬 하루 살았습니까. 오늘도 요걸로 오늘 죽는구나! 또 하루치 주신 것은 하루하고, 그럼 또 내일 준비된 시간의 선반이 오게 되면 내일 하루치 살아가는 거예요. 그 나라 의를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는 내일까지 갈 것 없어요. 괜히 자식 걱정하지 마세요. 자식도 오늘 지가 지 나름대로 잘 살고 있습니다. 부모이용해서 아주 잘 살고 있어요. 괜히 부모가 그런 모습보이면 자식이 뭐 더 효도하고 그런 거 없습니다. 

인간은 부모한테 잘 보일 경우에 유리할 경우에 잘 보이게 되어있어요. 그리고 더 이상 엄마, 아빠한테 나올 게 없다 싶으면 싸늘하게 돌아섭니다. 엄마, 아빠한테 돈이 나올 것도 없는 것도 문제지만, 새로운 지식이라든지 뭐 고치는 게 이게 안 나오면 친구 찾아가겠지요. 남편도 마찬가지에요. 남편도 나중에 힘이 없으면 조강지처 찾아오게 되어있습니다. 남편이 언제 아내한테 붙냐 하면 아침에 일어났는데 일을 나갈 때가 없을 때. 아침에 일어났는데 갈 데가 없네. 아침 드라마 다 보는 거예요. 별 할 일 없으니까. 사람이 가장 비참하게 될 때는 아침에 일어났는데 갈 데가 없다는 것. 얼마나 비참해요. 하루 종일 이불 속에서 상상만 할까요. 휴식이라는 것은 더 설치기 위해서 잠시 쉬는 게 휴식이지요. 그러나 일자리가 없다 하는 것은 휴식이 아니고 이건 자아의 죽음이에요. 그동안 사람만 의지했기 때문에 나를 불러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게 이건 자살의 동기가 되고 우울증의 이유가 되겠지요. 내가 쓸모없데. 이 잘난 나를. 쓸모없데요. 

결혼정보회사에 아가씨들이 결혼 안한다 해놓고 전화로 신청해 보면 결혼정보회사 자체가 뭐가 되느냐 하면 이게 여탕입니다. 여자9, 남자1이에요. 남자도 결혼할 남자냐, 아니에요. 아르바이트입니다. 돈만 빼먹은 거예요. 결혼정보회사에서. 신청한 남자가 없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돼서 우리가 사기 당했다. 실망했다. 하는데 주님은 절대로 실망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보고. 

우리보고 사과를 불러내지 않아요. 미안한 이야기 듣고 싶지도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사과합니다, 하는 것은 아직도 우리가 맹세하고 싶어서 근질근질해서 그래요. 우리가 남한테 맹세한다는 것은 그만큼 맹세한 만큼 인격이 우수하다는 것을 남한테 보여 가지고 더 잘난 나를 안 죽이고 싶은 생각이 있어서 그래요. 하나님은 인간의 맹세 맡아두십니다. 마치 야곱이 하나님과 다투듯이. 맹세하지 말라해도 계속 맹세해요. 계속. 

계속 봅시다. 신명기4장31절,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 맹세하신 언약, 언약 앞에 뭐가 붙어요? 맹세하신 언약이지요. 맹세하신 것은 누가 잊지 않는다? 주님이 잊지 않지요. 그렇지요. 이게 인간의 자아성이 있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이 말씀을 못 믿습니다. 인간의 자아성이 있으면. “진짜로에? 진짜로 해주십니까?” “그래, 해줄게.” “못 믿겠는데에. 증거를 보여주세요.” 이런 식으로. 

여러분, 사사기 유명한 대목 있지요. 기드온이 하나님께서 지시를 했잖아요. 하니까 이게 하나님의 일인지, 내 일인지 착각인지 못하겠으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천사가 와도 해요. 천사가 와도. 천사가 와도 하나님의 일이 착각이라 생각하는 거예요. 천사가 와도 못 믿는 이유가 있어요. 거울 보면 나는 오래가지만, 천사는 왔다 가버리잖아요. 이게 꿈인지 환상인지 모르잖아요. 천사가 왔다 가니까. 손으로 만져지지 않잖아요. 천사가. 

그래서 인간은 자기 자아성이 용납되는 거기에 부합되는 믿음의 증거를 찾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솜뭉치에요. 솜뭉치가 물체지요. 이 말은 솜뭉치를 통해서 기적을 확인하겠다는 것은 나 자신을 뭐로 보느냐 나는 나에게 뭐가 된다? 사물이 되고 물체로 본다. 평소에 믿는다는 게 뭐냐, 눈에 물체로 보일 때만 믿겠다는 그 믿음을 내 자아가 지금 유지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천사와 인간의 만남은 죽음입니다. 

사사기에서 삼손의 아버지가 천사 만나고 죽었다고 호들갑을 떤 이유가 천사와 인간은 만날 수가 없어요. 인간 쪽에서 죽어요. 그러니까 인간은 소위 내가 스스로 내 보고 살았다고 여기는 것은 같은 살아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만의 속에 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겁니다. 만약에 주님이 나타나게 되면 우리는 이미 죽은 자가 되지요. 그런데 이 착각이 편한 걸 어떻게 합니까. 어릴 때부터 착각 속에 살아서 그 착각 말고 다른 진실은 듣고 싶지 않아요. 

너는 죽었고, 니 생명은 하늘에 있다는, 너희 존재는 죽었고 실존은 따로 있다는 그걸 우리가 듣기 싫어해요. 그냥 하는 대로 하고 싶어. 하는 대로. 중력의 법칙인가요. 끌려가는 대로 가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성령의 강권함, 성령이 찾아올 이유를 이제는 아시겠지요. 성령이 방향키를 틀어주지 아니하면 우리는 정신없이 넓은 길로 합세해서 넓은 길로 죽 갑니다. 

좁은 길, 넓은 길 생각할 때마다 나이아가라폭포를 생각합니다.  제가 미국 쪽으로 가봤기 때문에. 높이가 55m였는데요, 꽤 높아요. 아주 소리도 굉장하고. 얼마 전에 어떤 사람이 여기서 뛰어내렸는데 살았다합니다. 운 좋게도. 내가 가보니까 근처에 와서 폭포인 줄 알아요. 바로 앞에 있어도 폭포인 줄 몰라요. 무지개는 폈는데 앞이 어디인 줄 몰라요. 많은 사람들이 앞에 지옥으로, 앞서 간 지옥맨들이 지옥으로 으악! 떨어졌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가고 있어요. 계속. 앞서 간 소위 교우들이 죽었잖아요. 지옥 갔잖아요. 계속 가고 있다고요. 교회가면 천당 간다고. 세례 받고 학습 받으면. 이게 뭐 복음이 있든지 없던지 그냥 다수가 진리겠지. 다수가. 예수님의 말씀을 완전히 노골적으로 반대합니다. 

다수는 진리가 아니에요. 그럼 소수가 진리냐. 소수가 진리가 아닙니다. 특이한 게 진리에요. 미친 게 진리에요. 미친 게. 사랑에 미쳐야 진리지. 자아성이 있는데 이걸 자기 자아성 꼬라지를 자기를 미워하는 이런 특이성. 요한복음12장에 나오지요. 자기를 미워하지 않으면 생명이 없다고. 자기 자신인데. 그렇게 다들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자기 자신을 아이구~ 꼴보기 싫어라. 나 니하고 헤어질란다. 이런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이건 성령의 역사, 초능력 아니면 이런 현상이 안 일어나지요. 어떤 일을 생각할 때에 당연하다 할 때에 이게 남들도 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건 필히 진리가 아닙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최고중에 엘리트중에 엘리트였던 거예요. 그런데 모세의 율법을 푸는데 자기는 똑똑에 똑똑을 더해서 해석을 똑똑하게 해석했다고 했는데 주님 보시기에는 전부 다 갇혀있는 상태에서 자기 메아리, 동굴 속에서 아아아~ 지 소리 들리지요. 내가 듣고 싶은 것을 내가 듣는 바보등신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 앞에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16장에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을 왜 했겠어요? 자기를 부인하라. 아~~ 참. 말은 굉장히 간단한데 일관되게 계속 나옵니다. <교회오빠>라는 영화의 평을 하면서 제가 평에 이런 대목을 했어요. 모든 말씀에는 반드시 뭐냐 하면 죽음 요청이 들어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암4기에 걸린 사람이 성경말씀 의지해가지고 지가 믿음으로 병을 나으려고 애를 썼는데, 아이야, 미안하다. 아빠가 건강해서 하나님의 응답받아가지고 주님은 살아계십니다. 주여, 제가 증거해 드리겠습니다. 응답해주옵소서. 백날 하는데 욥기던 모든 말씀에는 뭘 요청하느냐, 빨리 죽으라는 말씀이 들어있어요. 그걸 빼먹은 거예요. 이 말씀을 지키면 더 살겠지. 하고 반대로 생각한 겁니다. 오늘날 교회가 그렇게 가르쳤고. 다들 그렇게 가르친 거예요.  

이창동감독 혹시 아십니까. 이 사람이 만든 유명한 영화가 있어요. 거기서 여우주연상을 전도연이가 받았는데 <밀양>이라는 영화에요. 그 밀양의 영화에 보게 되면 그 전도연이가 그 밀양 제일교회에 가서 은혜를 받아서 그야말로 교우들과 함께 섞이면서 거리에 나가서 찬양도 해요. 전도연이가 얼마나 연기를 잘하던지 찬양할 때 눈 감고 찬양하구요, 정말 회개 기도할 때는요, 상 안 줄 수가 없어요. 세계최고의 연기자로서 상을 안 줄 수가 없어요. 송강호하고 매치되어서 교도소에 가서 면회를 한다고요. 자기 아들 유괴해서 죽인 그 남자를 만날 때,  만나기 전에 상상해보지요. 남자는 지금 흉칙하게 해가지고 불쌍한 죄인 되어가지고 지옥 갈 거다 하는데, 그 범인이 들어갈 때 그 모습이 아니고 왕왕왕~~ 천사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자기가 전도한다고 배운 대로 전도해 보니까 “이렇게 자매님이 그런 이야기하니까 너무 감사합니다. 사실은 저도 여기 교회에 와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주님이 저를 찾아왔어요. 주님이 저를 찾아오셔서 새사람 되어가지고 저는 이제는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저는 오늘 밤이라도 천국 갑니다.” 여기에 돌아버린 거예요. 전도연이가. 

어떻게 가해자가 나보다도 더 행복하냐, 쓰러지지요. 그 다음에 김추자 노래 나오지요.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바로 밀양에서 전도연이 갔던 그 길이 모든 성도가 가야될 길이에요. 모든 성도가. 내가 믿던 예수는 모든 사람이 믿는 예수에요. 이건 나를 지옥으로 인도하는 예수입니다. 가짜 예수에요. 왜? 나의 자아성을 부인 못하게 만들고 나의 자아성을 계속 인정하게 만드는 예수고, 나의 자아성을 미워하지 못하게 만드는 말씀에 위배되는 가짜 예수인데, 말씀에 위배되기 때문에 가짜예수에요.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역사에 의해서 뭐냐 하면 


예수를 부인한 자가 누구냐 말이지요. 바로 멀리 찾지 말고 

예수를 부인한 자가, 예수를 밀친 자가 누구냐, 죽인 자가 누구냐 말이지요. 

나다. 내가 바로 죄가 될 때에 누굴 만납니까? 속죄제와 만나는 거예요. 

이게 율법이 애굽에 있던 애굽화된 자기 백성을 데려와서 이미 피로 데려와서 

그 전부터 율법을 준 게 아니고 데려와서 시내산에서 율법을 준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피의 의미. 

너의 구원의 의미가 아닙니다. 내가 약속의 땅에 오래 산다. 지금 그 의미가 아니고 

피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그동안 광야에 40년 동안 다 죽어야 돼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희생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그리고 주님의 희생의 의미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냥 지켜보다가 희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인간들과 같이 있으면서 죽으신 거거든요. 

그런데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살했습니까? 스스로 죽은 거예요? 

스스로 돌아가셨지요. 그게 바로 복음의 핵심이에요. 

누가 봐도 이건 바리새인들이 잡아다가 죽였잖아요. 

그러면 주님은 스스로 죽었다는 말은 

나를 죽였던 그 책임을 너한테 묻겠다? 안 묻겠다? 안 묻겠다. 다만 니 몸만 회수하겠다. 

우리가 복음과 십자가에 대해서 이걸 알게 되면 

복음과 십자가에 대해서 죄송하고, 미안한 게 아니고 그냥 감사할 뿐이지요. 

감사할 뿐이지 다른 고백이 나올 수가 없어요.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한테는 그런 소리 하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낌없이 뭐든지 너의 행세나 너의 어떤 태도에 불문하고 내걸 그냥 니한테 주겠다는 것이 사랑인데 

만약에 니가 미안하고, 죄송해버리면 내 조건에 맞춰서 준 게 되니까 이건 흥정이지, 사랑이 아니잖아요. 

주께서 우리를 이쁘게 봐서 구원해줬지, 우리가 이쁜 짓을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잖아요. 

교회마다 이쁜 짓 하라는 거예요.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이쁜 짓 못합니다. 교체될 뿐이지 이쁜 짓하면 안돼요. 

성경의 모든 말씀은 맹세와 연관되어 있고 

그 바탕에는 뭐냐, 이미 구원했으니 못 지키는 너는 내가 알아서 회수해 줄 테니까 죽자. 우리 같이. 

그런 죽음에 대한 초청입니다. 요청입니다. 즐겁게 가는 거죠. 

사도바울의 소원이 그거였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빨리 합했으면 좋겠습니다. 참, 이거 살 동네도 아닌데 남의 땅에 와 살라니까 껄끄럽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을 위해서 내가 주께서 일하니까 일한다는 조건하에 가겠습니다. 이리 되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실직해서 집에서 빌빌 노는 거 없어요. 끝까지 주의 맹세대로 그는 죽음을 향하여 질주하는 사람이에요. 달려가는 사람이에요. 그것을 사도바울은 자기를 표현하기를 마라톤하는 사람이다. 아직 나 도착 안했다. 아직까지 나 안 죽었어. 내가 죽어야 내 일은 마감되는 거야. 이렇게 하면서 달려갈 길을 다 달린다, 하지 않습니까. 나의 죽음을 위하여. 나의 자기 부인을 위하여. 나의 목숨을 미워하기 위해서. 달려가는 거예요. 

신명기6장10절 봅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여기에 왜 자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자꾸 거론하시는 거예요. 이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그야말로 자기 뜻이 묵사발되는 모델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 뜻이. 하나님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자기 뜻이 있었어요. 찾아오고 난 뒤부터는 자기 뜻대로 되지를 않았어요. 받기는 받았는데 내 뜻과 원인, 결과가 이어지지 않은 채 받은 거예요. 내가 의도한 대로 받은 게 아닙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이삭이에요. 분명히 자기는 누구를 밀어주려고 했느냐 하면 첫 째 아들 에서를 밀어주려고 했어요. 왜? 에서는 자기의 성격과 취향이 딱 맞았어요. 자기는 사냥고기 좋아하고 에서는 사냥하는 사람이니까. 야곱은 샌님처럼 집구석에 앉아있기만 한 거예요. 내 몸에서 태어난 자식이지만 나하고 안 맞아요. 이삭한테는 야곱과 에서가 주님의 계시입니다. 

어떤 계시냐 이삭에게 내가하는 결정 이상의 것의 결과에 내가 동의하게 만드는 두 아들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그 대목이 하이라이트인데요. 자기가 분명히 형 에서에게 밀어주려고 하는데 새치기해서 동생 야곱에게 복이 갔잖아요. 복이 갔으면 뒤늦게 바꿀 수가 있어요. 내가 축복하니까. 그런데 그렇게 뒤바뀌어진 거, 나를 속였다는 그 자체를 뭐로 보느냐 하면 이게 내 뜻이 아니고 내 뜻을 꺾고자 하는 주님의 뜻이 내 두 아들을 통해서 나에게 강제적으로 찾아왔다고 자기가 수긍을 해버려요. 수긍을. 

이것은 자기 부인입니다. 자아성을 버린 게 아니고 자아성이 있는데 이 자아성 자체가 죄라고 인정해버리는 거예요. 나에게서 나오는 것은 전부 다 죄가 됨을 수긍해 드리겠습니다. 수긍하겠습니다. 그래서 이삭의 하나님이에요. 이게 이삭의 솜씨가 아니고 하나님이 이삭으로 하여금 완전히 충격, 쇼크를 받게 한 거예요. 살아있는 내가 또 살자가 아니라 현재의 내가 살아있는 것과 하늘에 있는 살아있는 것과는 이게 연결이 안 된다는 것을 내가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6장10절, 신명기4장31절 이런 말씀은 인간의 자아의 죽음, 자아의 소멸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내 맹세대로 내가 약속의 땅에 갈게.” 이 말은 “아이고~ 신난다.”가 아니라 “죽어.” “너의 뜻대로 못 간다.” 다시 말해서 “너는 못 간다.” 내 맹세가 내 맹세 속에 네가 합류될 때만 갈 수 있지, 맹세에 실려야 갈 수 있지, 내가 알아서 가겠습니다. 하는 것은 어림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두는 겁니다. 모든 말씀이 그런 거예요.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모든 의지를 꺾고자 하는 겁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우리의 의지는 뭐다? 남에게 의지하는 겁니다. 왜 의지할까? 남을 이용하는 것. 누구 좋아라고? 나 좋으라고. 그러니까 나는 나를 없앨 수가 없어요. 하는 행동, 몸짓 모든 것이 이 땅에 더 발붙이고 살고자 하는 짓이기 때문에 절대로 주께서는 사랑의 주께서는 이 뜻을 요구에 들어주지를 않아요. 내 뜻대로 안되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주의 뜻은 뭐냐 하면 

너 자아를 없앨 수 있는 환경을 지금 너에게 주었다는 거예요. 지금. 

지금 환경이 니가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앞으로 잘할게요. 라는 말을 못하게 만드는 환경이에요.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사과합니다, 라는 말을 뭐로 바꾸라는 말이지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로 바꿔야 돼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로 바꿔야 돼요. 

바꾸도록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일이 잘돼서 감사한 거예요? 어떻게 된 거예요? 

별개라는 것 때문에 감사하죠. 

나한테는 호들갑 떨고 심각한 문제지만 

주님께서는 전혀 심각하지도 않고 호들갑 문제도 아니고 시시하기 짝이 없는 문제에요. 

마라톤하는 마라톤 주자가 신발에 모래알갱이 들어가면 어떻게 합니까? 굉장히 짜증나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요. 신발 벗어가지고 털고 가면 되지요. 우리는 우리 자아를 왜 모래알갱이 만큼 생각 안하느냐 이 말이지요. 왜 나를 털고 가면 되고, 오늘 털고, 내일도 아침에 일어나면 살아나면 또 주께서 주신 내일 일을 살면 되는데 우리는 털지를 못해. 그래서 신발이 저벅저벅해. 과거의 모든 추억과 아픔, 연애하다 깨진 거 부터해서. 우리의 존재의 바탕에는 온갖 것 다 기억하고 있어. 온갖 것 다 기억하고 있어요. 16억 못 갚은 것 부터해서. 

아이구! 그 때 실수 했다고. 미안합니다, 사과합니다, 죄송합니다, 가 뭔 뜻이에요? 나 실수 잘 안하는데 요번에 실수했다. 이 뜻 아닙니까. 그만큼 자기 부인이 안 되고 있는 거예요. 아직도 자기한테 신뢰하고 있는 거예요. 기도응답은 전에 했지만, 기도응답은 이미 응답된 상태에요. 그 예를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이미 하나님께서는 냉장고에 바나나우유 다 들어있어요. 냉장고 문 열고 수고했다고 바나나우유 주듯이 기도응답은 이미 주님께 필요한 응답은 맹세와 부합되는 것은 다 들어있어요. 

그래서 맹세할 때는 뭐냐 주의 이름으로 맹세하라는 말은 

니가 나한테 어떤 기도를 했든 맹세를 했던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맹세한 응답을 아무 한 것도 없는 너에게 그냥 은혜로 주신 거예요. 

그게 맹세입니다. 그걸 누가 보여줍니까? 

아브라함이 보여줬고, 이삭을 통해서 보여줬고, 야곱을 통해서 보여준 거예요. 

아브라함의 자손의 하늘의 별만큼 많다고 했는데, 아브람 자손은 몇 명이었습니까? 단 한명도 없지요. 아브람 자손 제로입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약속한 것은 아브람 자손이 아니고 아브라함 자손이에요. 아브라함 자손. 따라서 아브람에서 아브라함 되는데, 아브람이 아무런 기여를 못 합니다. 어떤 노력을 해도 아브라함이 될 수가 없어요. 따라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이용해 먹은 거예요. 오늘날 우리를 이용해 먹듯이. 갈 수 없는 곳에 가게 하신 거예요. 

내 피가 아니고, 누구 피? 예수님의 피로. 내 십자가가 아니고 주님의 십자가로요. 고린도전서1장에 보면 아무도 우리는 십자가에 죽은 자가 없다. 이걸 자랑하는 거예요. 이걸. 고린도전서1장에 나오는 자랑이 뭐냐 하면 나는 못 났다,를 자랑하라는 거예요. 우리가 자랑할 것은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말은 맨날 예수 자랑하라는 말이 아니고 나는 아무것도 살 권한도 없고, 살 이유도 없고, 살아야 할 마땅함도 나한테는 없다. 그런데 살려주셨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살아계심을 증거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를 증거할 때는 반드시 출발을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I am nothing.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집에서 백수로 놀 때는 좀 느끼는 것 같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백수가 아니고 일하게 만들어요. 일하게 만들고, 고민하게 만들고, 당면한 문제 해결이 안돼서 끙끙거리면서 기어이 해결하게 만들어요. 해결하게 만들어 놓고 백수가 아니고 실컷 고생은 고생대로 해놓고, 이거는 아무것도 쓸모없는 인간이다. 아무것도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단정지어 주십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움직이면 가치가 발생되기 때문에. 움직인 만큼 자기가 굉장히 뭔가 꼭 살아야 될 이유가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게 되어있어요. 작가가 책을 썼으면 그 책을 버려야 되고, 박사학위를 받았으면 포기해야 되고, 목사가 목사 라이센스 받으면 그걸 버려야 돼요. 우리 교인들은 이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아무것도 안 합니다. 아무것도 안 받습니다. 아주 요령들이 도사들이 되었습니다. 안 주고 안 받기. 왜? 그게 내 자아성 사니까. 미안할 여지도 없게 만들면 되잖아요. 

그러나 성령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성령께서는 아프게도 하시고,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을 성령이 하셔요. 어차피 성도라 하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대로 받는 자만 성도되기 때문에 목사가 그 권한에 끼어들 어떤 자격도 없습니다. 목사 니나 잘하세요. 나도 마찬가지거든요. 

매일같이 쓸모없게 만든 인간을 살려주시는 하나님. 쓸모없는 인간을 살려주시는 이유는 주님이 주님 되게 하는 방법은 그 방법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나 처음에 일할 때는 자기가 쓸모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나 나중에 성령이 와서 깨닫게 하시면 ‘아~ 쓸모없는 인간을 착각하게 만들었구나!’ ‘야~ 내 없으면 일이 안 돼. 이 집안 내 없으면 일이 안 돼.’ 착각하게 만들고, 그게 착각이었다는 것. 

그 착각, 그 실패, 그것이 자기 부인으로 연결되면서 주께서는 날마다 우리를 실패하게 하고 죄 짓는 걸 통해서 주께서 영광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주님 보시기에 무슨 일이다? 선한 일이 되어버려요. 내가 할 수 있는 선한 일이 아니고 주께서 나를 악한 자로 드러내는 선한 일을 하심으로서 주님의 모든 영광이 주님 스스로 힘으로 주께 영광이 되는 방식.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내가 모르는 일, 다시 말해서 죄지요. 내가 미처 모르는 죄를 계속 지어드리면서 매일같이 이별하는 거예요. 하루 하루 빠이 빠이! 그동안 수고했어. 친하게 지냈어. 정 들었어. 날마다 어제의 나와 지금의 나를 끊어놓는 거예요. 빠이 빠이 하는 거예요. 

젊을 때 생각, 기억 자꾸 하게 되면 우리는 자아성이 없어지지 않고 고착됩니다. 다시 본문 말씀 돌아봅시다. 이제 여러분, 신명기, 레위기에서 맹세하지 말라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약속은 누가 이루신다? 우리가 이루는 게 아니고 주님이 이루신다는 것을 사이드에서 보완하기 위해서 맹세하지 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맹세는 지켜라. 지키라는 말은 못 지킨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야고보서5장12절 한 번 읽어봅시다. “내 형제들아 무엇이든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라” 여기서 벗어나면 뭐라 합니까? 그게 죄가 되고. 이렇게 되면 죄 정함을 면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미 주께서 결정한 것을 니가 받아들이면 그게 바로 하나님이 죄가 아니고 의가 된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을 해왔는데 우리는 마귀적 습성 때문에 내 인생을 내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주여, 이제는 내 일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주의 일로 맡길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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