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강의

연출 19011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1. 28. 20:40
2019-01-12 00:35:45조회 : 239         
연출 190111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Q0ws_hBx4Zs"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ryBEq0geFlk"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

 공은주 (IP:119.♡.152.148)19-01-28 08:53 

안양20190111a야4장15절(연출)-이 근호 

야고보서4장15절부터 하겠습니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그렇게 되어있지요. 15절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주의 뜻이 뭐보다 우선되느냐 하면 나의 행함보다 우선된다는 겁니다. 

“주여, 내가 이걸 행했고 주님 앞에 옳았느냐, 그렀느냐 내가 필요한 재료를 내 쪽에서 제공합니다.” 하는 것은 건방진 생각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뭘 하고 심사는 주님이 하신다는 것은 그런 것은 이 세상에 애초부터 없던 사항이 되는 겁니다. 인간 자체를 출발점을 인간 존재로부터 출발하는 것을 아예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니가 내 뜻을 벗어나서 존재하는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이걸 분명히 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뜻이라는 게 너무 포괄적이고 모호하지요. 주의 뜻이라는 게. 지 멋대로 하고 주의 뜻대로 한다. 하면 안 되잖아요. 그러면 주의 뜻이 뭐냐, 앞에 죽  면 바로 10, 11절에 나오지요. 거기에 누가 입법자냐, 라고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유일한 입법자로 간주합니다. 법을 만들 때 누구하고 의논 안했다? 인간하고는 의논을 안 한 거예요. 법을 만들 때. 

그럼 법을 만들 때 인간하고 의논 안 했다. 이걸 쉽게 말하면 선악과 따먹지 말라. 는 그 엄명. 그 지시를 사람하고 의논해서 좋은 게 좋다고 만들어낸 법이 아니에요. 이건 너무나 일방적입니다. 일방적으로 니가 따먹지 말라. 그리고 니가 따먹는 날에는 일방적으로 너는 죽게 되리라. 이게 주의 뜻입니다. 이미 주의 뜻 안에 무슨 요소가 들어 있느냐 하면 내가 만들었기 때문에 내가 없앨 수 있다는 요소를 품은 채 주의 뜻이 나타나요. 

자, 주의 뜻은 한 자로 하면 ‘법’이 되겠지요. 두 자로 하면 뭐가 돼요? ‘율법’이 되겠지요. 율법 안에서 무엇을 발견해야 하느냐 하면 우리의 부재, 부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음. 우리가 없음. 우리의 없음을 우리가 발견해야 된다 말이죠. 우리가 없음을. 주의 율법 안에는 우리의 없음을 전제로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없어야 되는데 있잖아요. 그건 주의 뜻에 의해서 우리가 출몰한 겁니다. 이 땅에.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하잖아요. 그게 우리 자신이 스스로 자기 영광을 받기 위해서 내가 여기 존재하는 걸 과시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게 아니고 부재해야 되는데 불구하고 이 땅에 니가 태어난 것은, 정자와 난자 사이에서 수억 분의 비율을 뚫고 태어난 것은 선재한다는 것은 선재라는 것은 먼저 계신 거죠. 주의 뜻이 선제하고 있음을 우리를 통해서 증명하고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가 부재 없는 데서, 부재한 데서, 부재에서, 존재가 되는 거예요. 있음이 되는 거예요. 없음에서 있음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있음에서 출발하면 안돼요. 모든 잘못과 오인이 뭐냐 과오가 여기 있는 내가 어떻게 하면 더 있게 됩니까, 그것이 잘못이에요. 우리의 자리는 어느 자리냐 하면 내가 있음이 우리의 자리가 아니고 우리가 없음의 자리로 들어가야 우리의 없음을 포함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의 성취. 뜻이 드러남의 목적이 이루어지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제가 이렇게 법이 우선이고 인간은 그 안에서 부재된 존재라는 것을 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준다. 라고 이야기하지요. “그러면 인간은 왜 있습니까?” 인간은 왜 있습니까, 라고 묻지 말고 질문을 이렇게 해야 돼요. “선악과 법은 왜 만들었습니까?” 이렇게 질문이 내가 여기 있습니까? 없습니까? 라는 그 질문을 나의 의미로 둬서는 안 되고, “나보다 먼저 있는 율법은 왜 있습니까? 주님은 왜 있습니까?” “하나님은 왜 그런 말씀을 줬습니까?” 질문 자체가 내 쪽에서 이탈해야 돼요. 나는 부재의 존재니까. 

질문 자체가 뭐가 포함되었는가 하면 나는 없어도 되는데 왜 있지? 라는 투로 질문이 되어야 돼요. ‘나는 없어도 되는데 왜 있지?’ 여러분 자식들이 있을 때 자식이 얼마나 잘되느냐 묻지 말고 저 자식은 없어야 되는데 왜 나한테 애 둘이나 생기지? 왜 셋이나 있지? 그렇게 되어야 된다 말이죠. 질문 자체가. 

질문 자체가 내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하고 질문하니까 뭐라고 답변해야 돼요. 주의 뜻이 우리의 구원하는 게 없습니다. 없는 존재가 무슨 구원을 받아요. 없는 존재가.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은 내가 있다고 치고, 그게 법에 이탈된 거예요. 법과 안 맞는 상태에서 내가 있다고 치고, 있는 내가 죽어서 좋은 나라 가겠습니까? 못가겠습니까? 를 점쟁이한테 묻듯이 목사한테 묻는 거예요. 내가 있다고 치고. 

그럼 내가 없으면 주의 율법은 나의 부재와 연결이 되는데 내가 있어버리면 이건 주의 뜻에 대한 그 자체에 대한 반격이고 공격이 돼요. 내가 있는 것이 우선이 되어버리면 상대적으로 누가 밀치게 되느냐 하면 주의 법이 밀침을 당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유대인에게 밀침을 당한 겁니다. 

예수님이 누구한테 죽었다? 성경에서 보면 유대사회에서 죽임을 당했거든요. 유대사회는요, 그 사람들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산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 사람들은 자신의 해방과 자기 민족의 해방과 구원을 열망했던 사람들이에요. 메시아를 간절히 고대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 보여준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면 메시아의 십자가의 죽음이거든요. 이건 뭐냐 하면 너희들이 열망하고 그 기대하는 너희 자체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대단히 수치스럽다는 겁니다. 그들이 고대했던 그 해방이 수치스럽고 그들이 하늘나라 이루겠다는 그 고상하기 짝이 없는 그들 보기에 대단하게 거룩하다고 자부하는 그것이 주님보시기에는 꼴사나운 겁니다. 지 주제도 모르는 채 뭘 해방을 원하고 로마에서의 해방, 죄에서의 구원을 원하느냐 이 말입니다.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시작을 해보는 거예요. 무턱대고. 

하나님의 법이 우선이고 법의 법다움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여기에 없는 존재가 있게 되었다면 항상 그것을 인정한다면 나의 우선이 아니고 주님의 뜻, 율법의 우선권을 넘겨야 돼요. 그것을 15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도 하리라. 주의 뜻이면. 그러니까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산다는 말은 우리가 항상 죽을 수 있는 대상자로 주께서 우리를 주시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없어도 되는 존재야! 라는 것은 각인시키면서 주의 뜻은 주의 뜻대로 드러나는 거예요. 내가 있어서 내가 주의 뜻을 어떻게 행합니까? 묻지 말고 주의 뜻이 우선 있고, 그 뜻에 맞추어서 너는 행동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라고 언급하는 거예요. 

그 행동하는 게 13절에 나오지요.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장사한다는 걸 좀 실감나게 하기 위해서 치킨 집 한다. 이렇게 봅시다. 우리가 어느 도시에 가서 어느 골목 식당에 가가지고 치킨 집 또는 피자집을 해서 할 때는 이유가 있지요. 장사해서 그 다음에 뭐를 보리라 했습니까? 장사할 때는 이득을 보리라. 이렇게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장사해서 이익을 보겠다는 것이 주의 뜻이냐, 이게 주의 뜻이 아닙니다. 

뭐가 주의 뜻이냐 하면 장사를 하던 공직에 있던 상관없이 어느 도시에 가던 내가 이 도시에 안 나타나도 되는데 또는 내가 이 장사를 꼭 할 필요 없는데, 이익을 보면 이건 내가 꼭 장사해서 남을 필요가 없는데. 이게 유지되어야 되고 견지되어야 돼요. 왜? I am nothing. 나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내가 부재가 된다는 말은 내가 없다는 말이거든요. 내가 없어지면 없어질 게 덩달아 많이 생겨요. 뭐냐 하면 나의 기대와 나의 희망, 나의 목표도 같이 없어져야 마땅한 겁니다. 모든 인생의 고민과 화근은 뭐냐 하면 목표가 있고, 희망이 있고, 기대 하는 게 있기 때문에 그렇고 그 기대는 내가 계속해서 나는 무조건 이유도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살아남아야 된다는 것이 그게 기반이 되어있기 때문에 기대와 희망을 스스로 접지를 못해요. 포기를 못하는 겁니다. 

그래놓고 말하기를 주의 뜻대로 살면 내 소원대로 들어주실 겁니까? 이리 나오는 거예요. 지금 주객이 바뀌었다는 걸 감 잡습니까? 이 성경하고 지금 다르지요.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그렇게 말하고 말씀을 이야기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그걸 여러분들이 고개 끄덕이고 받아들이지만, 많은 사람은 도망쳐버려요. 안양 공부했던 많은 사람들이 고개 끄덕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도망쳐버려요. 

자, 제가 궁금한 것은 도망쳐서 어디로 가느냐 하는 겁니다. 그들이 말씀을 피해서 어디로 도피했느냐 하는 겁니다. 그 도피하는 장소가 어디냐 하는 거예요. 추적해보자 말이에요. 그들이 가있는 곳에. 거기에는 뭐가 없어요? 주의 뜻이 없어요. 나의 뜻만 있는 곳이에요. 인간은 아무리 복음을 들어도 주저 없이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그 요인이 뭐냐, 그것은 그것조차도 주의 뜻입니다. 

그것 따라서 율법이 율법 되게 하기 위해서 조성된 상황입니다. 그 세계가 무슨 세계냐 하면 바로 나의 세계에요. 마이 월드지요. 나의 세계. 인간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구성되어있는 자기만의 세계를 자기만의 동굴을 따로 만들어놨어요. 그게 자기 안식처고 도피처에요. 

거기서 빼꼼히 얼굴을 내다봅니다. 내다볼 때에 본인이 내다보는 게 아니고 자기가 속해있는 자기 세계의 원리 원칙, 질, 또는 성질, 질서, 여러 가지 이야기하는데 이 세계의 원리를 보여주는 대변자로서 빼꼼히 얼굴을 내밉니다. 나는 지금까지 내게 속한 세계는 이것이 옳다고 우기고 그것이 내 몸에 완전히 스며든 내 세계를 소개하는 대표자로서 빼꼼히 얼굴을 들이내면서 뭐냐 하면 이 성경 말씀과 잠시 접촉을 한 거예요. 

지금 내가 살아온 내 원리와 성경에서 말하는 원리가 일치점이 있는가를 간을 본 겁니다. 간을 보다가 평소에 내가 속한 원리하고 틀리잖아요. 안 맞잖아요. 후딱 자기 세계로 되돌아와 버려요. 자기 세계로. 

그리고 문 닫아 걸고 그 다음에 문 닫아 걸면 혹시 바람이 불면 그 틈새 사이로 바람 들어오잖아요. 그래서 뭘 하느냐 하면 문풍지를 발라요. 일체 바람이 못 들어오게 문지풍로 막아버려요. 이게 캐슬이에요. 이게 성이에요. 이게 하나의 성이라니까요. 

이 성에는 주의 뜻이 있는 세계가 아니에요. 이것은 내 살고자 하는 것들만 진리로 채택이 되는 그것만 통용이 되고 그것만 허용이 되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하나님이 하시느냐, 그것조차도 주의 뜻이에요. 왜냐 하면 율법은 엄격하기 때문에 율법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어요. 율법은 무슨 기능이 있느냐 하면 무서운 기능이 있어요. 심판기능이 있어요. 

율법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뜻입니다. 주의 뜻입니다. 주님의 뜻에는 심판기능이 있습니다. 굉장히 무서워요. 왜 복음을 듣다가 도망치느냐 복음이 무섭기 때문에 그래요. 무섭다는 말은 누가 존재한다는 말입니까? 내가 살려고 하면서 존재한다는 뜻이에요. 무섭기 때문에 도망치지 말고, 무섭기 때문에 나오면 되거든요. 주께서 알아서 없애주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그런데 안 없어지려고 하는 거예요. 

그럼 왜 무서우냐, 없어질까 봐 무서워요. 사람이 언제 불편하냐 하면 자기가 좋아했던 사람이 장례식장에 관 속에 누워있을 때, 자기가 아주 좋아하고 귀하게 여기고 더 사귀고 싶고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죽어서 더 이상 이름을 불러도 대답이 없을 때, 굉장히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런데 제가 문제 낼게요. 관 속에 있는 사람이 불편합니까? 아니면 그 살아있는 사람이 불편해요? 살아있는 사람이 불편해요. 관 속에 있는 사람이 웁니까? 살아있는 사람이 웁니까? 살아있는 사람이 울지요. 살아있는 사람이 우는 거예요. 그동안 내 세계를 아름답게 꾸몄던 요소가 사라지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이 점점 나이가 들어가게 되면 주위에서 하나, 둘이 실종해요. 어디로 가요. 전에는 친구 만나러 가면 아파트에 딩동~ 누르고 들어가면 만날 수가 있어요. 우리 동창생 중에 죽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거든요. 그러면 만약에 그 친구가 죽었다면 그 사람 아파트가면 그 사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러면 그 사람이 살던 아파트는 임시 거처지요. 임시거처에요. 아파트에 산다고 그 지점이 최종지점이 아니라고요. 

그러면 그 사람들은 어디로 끌려간 겁니까? 누가 끌고 간 거고 어디로 끌려간 겁니까? 그 사람은 결국은 죽음이 인간을 끌고 가고 있는 거죠. 15절 다시 봅시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어늘 니가 허탄한 자랑을 하고, 그 다음에 14절을 보면,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라고 했지요.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 아닙니까. 하나님의 뜻이다 말이죠. 하나님의 율법이잖아요. 너희 생명이 자체가 말씀이니까. 말씀이 우리보고 니 생명이 무엇이냐 묻는 것은 우리보고 정답 대라고 묻는 게 아니고 너희들은 내 생명 앞에 ‘내’라는 말을 생명 앞에 붙일 가치도 없다. 이 말에요. 

내 생명 같으면 내가 관리자가 돼요. 그런데 니 생명이 무엇이뇨, 하는 것은 이미 그 안에 뭐가 포함된다? 해답이 포함돼있어요. 니는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니 생명도 없는 거고요. 필요에 따라서 생명을 주신 거예요. 따라서 다 떨어지면 주께서 어디로 납치해 가는 거예요. 어디로 가겠어요? 인간이. 나이 들면 하나, 둘 친구도 없어지잖아요. “집사님! 좀 나이 들어 없어진 사람이 더러 있지요?” 없어요. 다들 건강해가지고. 다들 테니스 치니까 건강하겠지요. 친척가운데 돌아가신 분 안 계십니까. 친척이 살아있어 줘야 인간은 자기의 과거가 생생하게 살아있어요. 

그런데 어릴 때는 친척들에게 둘러싸인 그게 나의 세계가 일가친척들에 둘러싸인 세계거든요. 그런데 친척들이 나이 많아서 떠나 버리면 인간은 그 사람이 그냥 죽는 게 아니고 나의 과거도 같이 허물어져버려요. 나와 같이 놀던 어떤 어린이놀이터 같은 거. 어린이놀이터에서 동네 친구와  놀았는데 그 애가 얼마 전에 갑자기 암 걸려서 죽었다 하면 암 걸리고 난 뒤에 죽은 소식 듣고 옛날 놀던 놀이터에 한 번 가보세요. 뭔가 허전함을 느끼지요. 미끄럼틀 같이 탔던 그 친구 없어질 때에. 

나의 세계 하나가 뻥 뚫린 거예요. 나의 세계 하나이 스폰지처럼 숭숭 구멍 뚫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허물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박정희대통령 살해당해 죽었을 때 우리나라 이천만명이 조문했다는 거예요. 저는 조문 안했습니다마는. 왜 그렇게 조문하고 슬퍼했습니까? 

그것은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자기 인생을 자기 월드를 구성했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가 자기답게 내 인생을 내 인생답게, 보람 있게, 의미 있게, 제공했던 그 분이 내 인생에서 빠져버렸으니까 나의 의미 한 쪽이 확 뭉개져버린 거예요. 허파가 두 개인데 허파 하나가 날아간 셈이 된다 말이에요. 

그 연로하신 부부가 같이 살다가 사흘 동안 죽어라 싸우다가 그래도 80 넘어서 누구 하나 죽어보세요. 왜냐하면 신성일이 있어줘야 엄앵란의 본인 세계가 맞춤 맞게 구성이 되어있어요. 그런데 한 쪽이 허물어져버리면 그 반 이상을 자기 인생에서 자기가 스스로 잘라내야 돼요. 그러면 자기의 추억과 과거가 다 날아가 버린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무리 현실적으로 날아가도 추억은 생생하게 그대로 있거든요. 그 괴리 어떻게 할 거예요. 그 허무함을 뭘로 메꿀 겁니까? 처음에는 자식들이 와서 “어머님, 식사하셨습니까?” 들여다보지요. 자식들은 지 인생 없습니까. 나중에 엄마가 미안해서 얘야, 이제 그만 와도 된다. 나 혼자 견딜게. 집에 강아지 세 마리 있잖아. 이름을 신성일로 지을 게. 이런 식으로. 버틸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게 오래 못가요. 

결국 우울증 걸려서, 우울증 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아는 나와 현실에서 나한테 요구하는 나 사이에 알력이 생겼기 때문에 그래요. 현실과 내가 일치가 될 때 사람은 자아구성이 되면서 만족을 하게 되어있거든요. 참, 사람이라는 게 이상해요. 개는 그저 사료만 줘도 돼요. 일단은 짐승은 사료만 주면 돼요. 코끼리 자기 인생 그런 책은 없잖아요. 

인간은 밥만 주고 사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밥보다 더 괴로운 것은 뭐냐, 인간의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 뭐냐, 외로움이에요. 외로움. 외로운 거예요. 혼자서는 못 살겠다는 겁니다. 혼자서는. 외국에 오래 살다 공관에 있다든지 대사관에 근무해서 오래 살다가 자식들 영어 미리 배워서 좋겠네. 자연적으로 배워서 좋겠네. 칭찬하지만 그 한국 얼굴 해가지고 외국에 이렇게 돌아다니다가 뒤늦게 퇴직해가지고 한국에 돌아와 보세요. 쌓아온 스펙이 없어요. 친구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고 어떤 단체나 조직에 배드민턴 동호회에 가고 싶어도 처음부터 회비 새로 내야 돼요. 

회비 새로 낸다고 받아주는 게 아니거든요. 계속 경계해요. 심지어 성경공부도 마찬가지고요. 신참, 고참 있잖아요. 자꾸 경계하는 거예요. 자꾸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서 굉장히 노력을 해도 이게 노력해도 외로움은 해소가 안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의 외로움이 나의 외로움이기 때문에 그래요. 나의 외로움. 상대는 그다지 아쉽지 않아요. 상대는 나의 괴로움 때문에 상처받지 않습니다. 나 혼자 상처받는 거예요. 

이럴 때는 어떻게 하느냐, 나 자신을 수정해야 되거든요. 나 자신을. 저 사람이 내 사람 되려고 하지 말고, 내가 저 사람의 사람이 되어야 되는데 그렇게 하려면 지금껏 살아왔던 자기 위주의 그 원칙이 이거 전부 다 바꿔야 돼요. 자기 위주의 원칙을. 그럼 자존심 박탈당하지요. 이것은 아이고 안 되지요. 

자, 그럼 인간의 외로움이 왜 있느냐, 외로움이 있는 이유는 벌써 강의 어려워지는데 여러분 참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외로움이냐, 이게 없기 때문에 그래요. 대화 상대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대화 상대. 대화가 뭐냐, 언어를 주고받는 거잖아요. 언어를.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사랑을 해야 되는데 사랑이라 하는 것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고 뭘 해야 되느냐 하면 끊임없이 대화해야 돼요. 끊임없이. 끊임없이 대화하는 것. 

말을 해야 돼요. 말을 할 때 언어 속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언어 속에는 원칙이 포함되어있어요. 이걸 법이라 하거든요. 법. 이 법에는 기본적으로 다치지 않으면 핵심이 있어요. 뭐냐 하면 나는 존재한다. 나는 잘되어야 된다. 이것을 담고 다른 친구들하고 누구하고도 이야기해요. 부부간 이야기해요. 절대로 나는 다쳐서는 안 된다. 내가 아파해서는 안 된다. 

이유가 뭐냐, 이 법이 나를 위한 법이기 때문에. 내 잘되기 위한 법이기 때문에. 그러면 이 대화 상대에서의 이쪽의 상대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상대라 해야 되고, 저건 타인이죠. 타인. 남이 되겠지요. 그러면 지금 나의 세계의 원리가 뭐냐 하면 나는 무조건 잘 되어야 되고, 존재해야 된다는 원리지요. 

그 원리 가운데 외로움을 덜기 위해서 누굴 상대한다? 타인을 상대하지요. 그 타인을 상대하는 식으로 누굴 상대하느냐 하면 하나님을 새삼스럽게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하고 교회에 나가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교회에 나와서 친구도 많고 대화 상대도 많고 그리고 또 교회에 나가면 추상적으로 하나님이 계시다고 느껴지기 때문에. 

그런데 뭐는 지금 안 바뀌었어요? 나는 내 존재 위주는 안 바뀌었지요. 존재 위주도 안 바뀌면서 하나님을 상대했기 때문에 여기에 법이 동원될 때는 뭐냐 이 법 속에는 나는 다치면 안 된다는 원칙을 철칙같이 하면서 법을 하겠지요. 그러면 성경 모든 말씀을 이 법에다가 담는 거예요. 흉내 내기 하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 제가 야고보서4장이나 성경을 통해서 복음을 이야기해버리면 나는 안 다치려고 왔는데 복음의 이야기는 뭐냐 하면 어? 주님 본인의 뜻을 하나님의 뜻을 철회할 생각이 전혀 없는 거예요. 나는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왔는데. 하나님은 아예 니가 존재한 적도 없는 부재의 원래의 자리로 우리를 끌고 가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안 끌려가지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됩니까? 내 것 지키기 위해서 어떻게 합니까? 

복음이 들어오지 않도록 문을 닫아걸고 문풍지를 발라버려야 돼요. 그래야 그나마도 나를 지킬 수가 있기 때문에. 그러면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모든 인간이 이러니까 천국 갈사람 아무도 없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법은 뭐냐 하면, 강력한 두려움과 무서움을 제공해 버려요. 그게 야고보서에 나옵니다마는, 심판에 관한 문제에요. 지옥 불에 관한 문제. 저주에 관한 문제. 

율법이 주어진 것은 우리를 저주하게 함이라. 그런 것도 있고 여기에 야고보서 같은 경우에는 야고보서2장9절, 10절 봅시다.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율법이 너희로 뭐로 만든다? 범죄자로 만든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든 범한 자가 되나니. 그러니 율법은 우리를 뭐로 아예 기정사실화 시킨다? 뭐로 봅니까? 범죄자로 규정시키지요. 

그러니 우리가 인간이 아니고 죄를 품고 있는 존재로 보는 거예요. 인간이 아니고. 우리가 인간이라면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안 지을 수도 있잖아요. 그렇게 보는 게 아니고 우리를 죄가 주가 돼요. 죄를 담는 그릇으로 보는 거예요. 죄가 있는 곳에 반드시 형벌과 심판과 저주가 마땅히 따라 오는 거죠. 

성경은 그렇게 본다고요. 여기 2장 8절에 보면, 니가 이웃 사랑을 내 몸 같이 하라. 했잖아요. 요건 이웃 사랑에게만 해당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9절에 넘어가면, 10절에 보면, 이웃 사랑뿐만 아니고 어떤 율법도 어기면 뭘 했더라도 다 어긴 게 된다 말이죠. 이 말은 뭐냐 하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보고 새삼스럽게 잘해봐라, 도닥거려주고 격려를 해주는 게 아니고 율법의 우선됨을 너를 통해서 증명해내겠다는 거예요. 

율법이 너보다 처벌이 우선됨을. 그리고 너는 처벌되어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왜? 율법에 의하면 완전하게 지킨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이건 극한의 두려움이죠. 극한의 두려움이 오는 방법으로 구원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극한의 두려움이 있다면 세상 사람이 두렵지를 않아요. 특히 자기가 망가진 것에 대해서 자기가 공포를 느끼지를 않습니다. 

그전까지는 무엇이 공포냐 하면 내가 망가지고 내가 실패자가 되고 우리 집에 부도나고 내가 이혼하고 우리 집에 불이 나고 지금 가스 불 켰는지 껐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불로 폭발해버리고 지 집 말고 남의 집까지 다 물어주고. 하여튼 그런 모든 내가 아는 상황이 겁나고 두렵다는 것은 내가 나답게 유지하기 위해서 자체 내에 자기에 대한 어떤 방어체제가 가동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동안. 

무조건 나는 지켜줘야 돼요. 이건 복음이 아니고 우하나님이고, 최하나님이고 간에 어떤 하나님이라도 내 것 다치면 나는 용서 안 되겠다는 그 품성으로 버티고 왔다 이 말이죠. 쉽게 말해서 사람은 실적을 원하는 거예요. 하나님 믿고 완전히 실적을 원하는 겁니다. 실적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내가 실적을 잡을 때까지 나는 안 죽어야 돼요. 

존재해야 돼요. 그런데 그 존재가 우리는 나의 존재로 보잖아요. 하나님의 야고보서는 죄의 존재로 보는 겁니다. 죄가 펄펄 살아있구나! 니는 산낙지고, 활어다. 물고기가 펄떡 뛰는 게 아니고 그 안에 죄가 에너지를 줘가지고 죄가 펄떡 뛰니까 우리 인간이 펄떡 뛰는 거예요.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저한테 동영상이 하나 있는데, 멀리 독일에서 보낸 동영상이에요. 어떤 아버지 가장이 크리스마스를 맞이해서 자기 딸과 가까운 가족들, 아이를 위해서 산타크로스 복장을 해가지고 목소리도 변장해 가지고 “산타크로스 할아버지 왔어요~~” 하는 겁니다. 보여주는 게 실감나요. 나도 잘 모르겠어요. 산타크로스 할아버지 연출을 어떻게 했는지. 소리만 들으세요. 이 목소리.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복창하는 거예요. 

애들에게 선물 나눠줍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갑자기 크리스마스를 뭐했어요? 연출한 거예요. 그걸 보면서 느낀 점이 우리 자신은 매일같이 하루, 하루 일과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늘 자기 자신을 연출했어요. ‘요게 가치 있는 내 모습이지. 아니면 요걸 잠깐 바꿔 봐! 이럴 땐 나는 살만한 보람이 있지.’ 매일같이 연출해요. 오늘 집사님 옷 연출했습니까? 늘 연출하거든요. 

아가서에서 특이한 점이 뭐냐 하면 옷에 대해서 그다지 말이 없다는 거예요. 아가서에서. 그냥 벗은 몸이에요. 하나님은 인간에게 인간의 연출에 속아 넘어가지 않겠다는 거예요. 오히려 솔로몬의 입은 옷이 들풀보다 더 못하다. 이리 되어있어요. 

아가서의 특징은 유일하게 성경에서 비교급이 많이 나와요. 뭐보다 낫다. 어떤 향기보다 더 진하다. 이리 되어있어요. 마태복음5장에서 예수님이 산상설교에서 뭡니까. 그 들꽃을 볼 때에 감히 비교가 안 되는 걸 비교하는 사람들이 가장 와~ 하고 놀랄만한 것 가지고 들풀과 아주 시시한 들풀과 대조를 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지요. 그게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들어있는 아가서적 요소에요. 

아가서가 지혜거든요. 지혜요소를 담아서 산상설교가 된 겁니다. 여러분한테는 특별히 미리 말씀드립니다. 뭐보다 낫다는 거예요. 뭐보다. 오늘 강의대로 하면 ‘주의 뜻이 나의 뜻보다 낫다.’가 되는 거예요. 우리는 그걸 나에 대한 모독으로 평생을 내가 날 연출한 연출의 공로를 모독한 걸로 간주하는 거예요. 

도피처로 도망갑니다. 어디로? 아파트로 가버려요. 그러나 아파트가 최종지점이 아니에요. 어디로 갑니까? 죽으러 가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뭘 알아야 돼요? 우리 집 아파트를 어떻게 꾸밀 것이 아니라 내가 영원히 기거할 그 죽음의 세계가 어떤 세계냐를 그걸 먼저 생각해야 되지요. 그 세계는 율법의 세계입니다. 심판의 세계고, 저주의 세계입니다. 

다시 하면 율법 하나라도 어기면 사정 봐주지 않는 세계. 그것으로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 하나, 둘이 실종당하고 있어요. 그 사람들 어디 갔지? 어제 새벽에 우리 동서형님 돌아가셨어요. 제 아내 언니의 남편이 돌아가셨어요. 우리 처형님은 간호한다고 죽을 뻔했어요.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 간호한다고. 손님은 오지요. 간호한다고. 이틀 잠시 호스피스병동에 넣고 잠시 이틀 동안 못 잔 잠을 자고 오니까 돌아가셨어요. 이제는 약간 건강이 회복되고 장례식을 치루면 됩니다. 내일 발인예배해요. 내일 아침에 참석할 거예요. 그 형님하고 내가 바둑 두고 했는데. 그 바둑 둔 형님 어디 갔지요? 

김춘추의 시에 그런 게 있다고 했잖아요. 평생을 해로했던 아내가 죽고 난 뒤에 부엌 쪽을 보는데 고등어 굽기 위해서 왔다 갔다 해야 되는데 고등어 굽는 당신 어디 갔느냐. 이러다가 우울증 걸려서 혼자 죽었어요. 얼마 못 살고. 

누가 우선 되는 거예요? 내가 내 아내와 더불어서 행복하게 사는 게 절대로 그런 것을 주께서 용납한 적이 없습니다. 이건 우리가 연출한 거예요. 뭘 모방해서? 우리가 사는 육의 서로가 서로를 흉내 내고 모방해서 조작한 거예요. 연출한 거예요. 그런 연출로 우리는 스스로 위로 받았어요. 왜? 그게 우리의 법이기 때문에. 

우리가 만든 법은 나를 위로하는 용도로 주어진 거예요. 나를 위한 용도로. 나의 가치로 출발하는 고 나의 세계가 누가 뭐래도 이건 옳고 정당함을 억지로 그걸 내비추기 위해서 매일같이 자기 자신을 그렇다. 그렇다. 하면서 억지를 부리면서 연출한 것을 가지고 뭐냐, 내 인생이에요. 그게 내 인생입니다. 

그 인생 어떤 인생인지 야고보서4장 봅시다. 13절에,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또 연출하고 있어요. 치킨 집을 해서 이익을 보리라. 또 연출하고 있다고요. 이거 돈 벌면 나만 좋은 게 아니고 가족들 좋은 집 이사해가지고 빚 걱정 안하고 살겠다. 이런 연출을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이런 연출을. 

그걸 뭐라고 하면, “이게 내 몸인데. 내 몸!” 이리 하거든요. “내 인생은 이렇게 살래. 간섭하지 마! 나는 이렇게 사는 것 밖에 몰라. 그러니까 좀 내버려 둬. 내가 어떻게 살던 간섭하지 마!” 이리 나오거든요. 그런데 간섭은 안 하는데, 14절 봅시다. 너희 일을 너희가 알지를 못하지요. 

내일 너희가 죽어버리면 그렇게 연출한 게 뭡니까? 무엇에 끌려가기 위한 연출이다? 그것도 죽음으로 끌려가기 위한 연출인데 그 죽음이 그 죽고 난 뒤에 질이 복 받는 생명입니까? 저주받는 목숨이에요? 저주 받기 위해서 주께서 한시적으로 허락한 꿈을 꾸게 한 거예요. 장사해서 이득을 봤다. 

그 비슷한 이야기가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데 한 번 찾아볼까요. 누가복음12장 19절, 20절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여기에 보면 ‘어리석은 자’라고 되어있지요. 어리석은 자. 

이 대목은 안양공부하면서 내가 아마 수십 번 이야기한 것 같아요. 수십 번 이야기한 거예요. 그 땐 연출이라는 말은 안 했는데 누가복음12장 말씀 있잖아요. 19절, 20절. 이 말씀을 가지고 내가 연출하는 연출에다가 이걸 대사로 집어넣겠습니까? 안 집어넣겠습니까? 확 빼버리죠. 확 빼버립니다. 집에 가훈을 할 때, 가훈에 이게 들어가겠습니까? 안 들어가겠습니까? 확 빼버리죠. 그게 우리가 바로 유대사회에요. 

우리가 예수님 십자가 못 박은 사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자신의 연출 아주 저주스럽고 죽기 전부터 우리  니 자신을 알아요. 죽을 때가서 내가 이런 인간인가, 그걸 그 때가서 아는 게 아니고 이미 알아요. 이미 우리가 내가 얼마나 쓰잘데기 없는 짓거리를 하고 있는지를 미리 알려주는 거예요. 그게 복음입니다. 

그러니까 그 복음이 듣기 싫어서 피하잖아요. 그런데 구원받는 사람은 거기에 피하는 것이 아니고 그 두려움에 스스로 그 두려움이 자기 안에 바깥의 두려움이 아니고 자기 안에 그 두려움이 오기를 기대할 때 그 사람은 존재가 아니고 부재의 상태가 되는 겁니다. 

나는 없다고 치고 이 안에 율법이 주는 그 무서운 징벌을 내 안에 가득 담겠습니다. 가득 담아내겠습니다. 제가. 그게 제 존재의 이유입니다. 내 뜻이 아니고 주의 일관된 뜻. 한결같은 뜻이 저주와 심판과 지옥 불의 뜻이 그대로 우리 속에 담기기를 원합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움직이는 말씀이 되는 거예요. 움직이는 야고보서4장이 되는 거죠. 

이 말을 지키는 게 아니에요. 지키는 게 아니고 선제하고 있는 율법이 나중에는 우리를 제대로 이렇게 아구가 맞는 거예요. 이게 인간이 존재해야 될 원칙입니다. 이미 내가 부재의 상태기 때문에 나한테 이익이다. 손실이다. 말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말씀만 담겨있다면 그걸로 새롭게 달라진 그 말씀이 담긴 거기다가 후차적으로 그게 바로 나야! 라고 갖다 붙이면 되거든요. 

주의 말씀이 담긴 그게 바로 나의 존재 이유라는 거예요. 필요했기에 나를 사용한다는 그 자체를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돼요. 그러니까 이건 내 뜻은 밀리던 완전히 찌그러져버리고 밀고 쳐들어 온 주의 뜻이 내 뜻을 몽땅 다 강탈해 나갔을 때, 삼켜버렸을 때, 그것이 바로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피하다, 피하다, 피하지 말고 받아들이면 돼요. 피하지 말고. 자꾸 피하면 또 동굴 파요. 동굴 파고 도망치고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기 위주의 신화요, 자기 위주의 영웅담입니다. 연출이 심해지면 자기 위주의 신화가 돼요. 현대의 신화, 삼성의 신화하잖아요. 그들의 신화만 있나요. 우리 자신은 신화를 안 갖고 있습니까? 옛날에 이렇게 잘 나갔었다. 이런 신화 없어요? 있잖아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사막을 헤매고 있었더니만 사막에 힘들고 헤매었을 때 어떤 동굴에 가니까 거기에 현자. 현명한 사람 세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람이 나에게 물과 떡을 먹이고 기력을 회복하라고 하면서 갑자기 그 사람이 나한테 절을 하면서 하는 말이 “당신은 우리가 기다렸던 사람이었습니다. 무려300년 기다렸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동화책에 나오지요. 

우리는 그럴 때 뭐를 느낍니까? ‘그렇지. 내 뜻은 내 뜻이 아니고 주의 뜻이었어.’ 이렇게 느끼겠지요. 오늘의 내가 있기 위해서 이렇게 하나님은 그렇게 소쩍새는 울었고, 국화꽃은 그렇게 서리에도 피었구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그렇게 힘든 겨울을 지내왔구나! 이렇게 되면 이게 무슨 영웅담이 됩니까? 나의 존재를 극대화시킨 영웅담이 되지요. 그런 식으로 성경을 보기를 원한다 말이죠. 그런 식으로. 

참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분이고, 참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이다. 그런 식으로 그동안 해석해 온 거예요. 그걸 가지고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이야기했고, 하나님의 예정이라고 지 맘대로 붙이는 거예요. 결국 남는 것은 뭐냐 하면 “내 존재는 안 죽었어. 나의 가치는 생생히 살아있다는 말이야.” 이걸 남한테 대외적으로 알리고 싶은 거예요. 

그럼 오늘 본문에 보면 그렇습니까? 과연 그런 신화와 영웅담이 용납됩니까? 내가 살아있어야 돼요? 나보다 먼저 있는 주의 뜻이 살아있어야 돼요? 주의 뜻이 살아있어야 돼요. 주의 뜻은 나도 살고 주도 살고 이런 게 아니에요. 


주님께서 그냥 말씀만 해버리면 나도 살고, 주님도 살아요. 
그러나 십자가라는 게 뭐냐 하면 나를 아주 우습게 만들고 나를 수치스럽게 만드는 거예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난 이유가 뭡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을 생각할 때, 주님도 살리지만 먼저 누구의 가치도 유지 하겠다? 나의 가치도 훼손되지 않겠다. 이게 자기 연출 아닙니까. 

내 가치를 손해 보지 않겠다가 그걸 유지하다가 기어이 주님께서는 그렇게 내 것을 유지하는 자의 마지막 고백은 결국 뭐냐, 예수 나는 당신을 안다? 모른다? 했어요. 베드로가. “나는 당신을 저주합니다. 나는 저 사람을 모릅니다.” 그런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내 위주의 모든 인생의 공통점이라는 겁니다. 내 위주로 사는 모든 인생의 공통점이에요.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천국 간다면 천국 가는 나는 어떤 존재냐 하면 우리가 이리돼요. ‘분실물’ 알지요. 기차 칸에나 버스 안에 이렇게 물건을 잃어버리면 택시에서 잃어버리면 택시 회사나, 버스회사에 전화하게 되면 그 분실물 함에다가 이렇게 있어요. 찾을 수가 있어요. 지하철에서 우산이나 휴대폰 잃어버리면 카드 잃어버리면 다 있습니다. 저도 많이 돌려준 적이 있어요. 분실물 있잖아요. 

우리 자신에게서 우리 자신을 분실해야 되고, 어디서 찾아야 되느냐 하면 예수 안에서 찾아야 돼요. 그러면 평소에 우리는 누구 안에서? 내 안에서 살고 있어요. 내 세계 안에. 그러니까 복음 듣기 싫다고 도망치는 거예요. 도망칠 자리가 있다는 거예요. 자기는. 이 딴 거 안 들어도 나는 밥 먹고 잘 살고 내 행복에 대해서는 손해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람은 자연스럽게 지금까지 온대로 살게 되면 아무 탈이 없다는 거예요. 뭐가 없느냐 하면 새로움이 없지요. 니체가 그런 이야기했지요. 인간에서의 저주는 딴 게 아니고 권태라고. 할 일없이 조용히 시간 보내는 이것보다 더 지독한 지옥은 없다, 했습니다. 바쁜 젊은 사람한테는 이해 안 되지만. 

하루 24시간 우에 보낼꼬. 고민하는 노인네한테는요, 고역이에요. 고역이고 복역이고, 교도소 근무하는 거하고 똑같아요. 교도소에서 목수하고 일 배워주면 시간은 갑니다마는 아무것도 안하고 독방에 있으면 차라리 사형을 시켜줬으면 좋겠어. 사형을. 사형시키는 게 낫지 그래서 사형제도 없애는 것이 그 사형보다 더 잔인한 짓이에요. 사람 치여 죽일 때는 니 죽고 나 죽겠지 하고 사람 죽였는데 세상에 얼마나 잔인한지요, 그 사람은 나의 칼에 죽었는데 나는 안 죽고 있어요. 안 죽는 것보다 더 잔인한 일이 어디 있어요. 세상에. 

나는 내 죽는 걸 차마 못 죽여서 니 죽고 나 죽고 하는데 지는 멀쩡히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있으면 누굴 죽였다는 기억이 살아있을 게 아닙니까. 죄책감은 살아 있잖아요. 이게 지워집니까? 안 지워지지요. 그런데 그 교도소가면 죄책감 없어요? 아니면 살아있는 사람은 죄책감 없습니까? 다 있잖아요. 

살아있는 게 고역이에요. 이거 어떻게 할 거예요. 교회 가서 예수 믿고 착한 일하고 온갖 바자회하고 온갖 착한일한다고 이게 지워집니까? 안 지워지지요. 왜냐하면 율법이라 하는 것은 내 죄책감 지워지라고 있는 게 아니거든요. 내 인생 따로 챙기라고 율법이 있는 게 아니에요. 

원래 법하고 니하고 상관없다는 것. 니 위주로 법이 있는 게 아니고 법 위주로 니가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가 있는 거거든요. 그런데 자꾸 고집부리기를 나 먼저 있고 하나님은 나한테 뭘 해 줄 겁니까? 이리하니까 그 복음 안 듣겠다고 귀 막는 게 그게 지옥이고 그게 저주고 그게 고역이고 그게 고통이에요. 

그리 한 번 살아보지요. 벌써 시작된 지옥생활이거든요. 우리에게는 뭐가 있느냐, 10분 휴식이 있잖아요.

 공은주 (IP:119.♡.152.148)19-01-28 08:53 

안양20190111b야4장15절(연출)-이 근호 

자, 해봅시다. 첫 번째 시간에 제가 복음을 가르치려고 하는 게 아니고 사람이 죽으면 어디 가느냐, 이 말이에요. 그 현실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현실을. 복음 안 듣겠다. 성경 안 보겠다. 그건 좋아요. 듣든지 못하는데. 그러면 최종 어디 가는데. 우리 집에. 우리 집에 계속 있는 게 아니거든요. 어디 가잖아요. 

세상에 살 때는 자기가 원하는데 갈 수 있어요. 그러나 죽음이라 하는 것은 본인이 원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더 강한 힘이 우리가 현실이라고 하는 이 현실 속에 내가 버티는 힘보다 더 강한 힘이 현실에 함께 공존해 있고 그 힘의 원리가 성경에 나와 있다 이 말이지요. 율법으로 사람을 죽이는 거예요. 율법으로. 

율법 아래 있는 자가 저주 받는다 했잖아요. 율법을 우리가 요청했습니까. 이건 우리가 요청할 자시고 할 게 아니고 현실의일부로 우리가 수용해줘야 돼요. 나 안 믿겠어. 나는 주님 안 믿겠어. 나 복음 안 듣겠어. 그렇게 발악하는 그 순간에도 계속해서 복음의 힘에 의해서 율법의 힘에 의해서 어디로 끌려가고 있다 말이지요. 

자기 딴아 그걸 잊어버리기 위해서 그 현실을 없애버리기 위해서 다른 어떤 자극적이고 즐거운 행복거리를 찾지만, 그게 문제 해결이 돼요? 안 되잖아요. 인간들만 있는 세계가 아니고 여기에 누가 이미 침투했습니다. 이스라엘입장에서는 율법이 침투했고, 신약 성경에 와서는 누가 침투했지요? 주님이 오셨잖아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그걸 이렇게 이야기해요. ‘성신’ 

그 분이 몸 하나 달랑 왔습니까? 아니면 뭔가 거기서 구현해내고 있잖아요. 예수님이 없을 때는 유대인들은 자기들끼리 오인했지요. 뭐냐, 율법을 지키면 복 받고 안 지키면 저주받는다. 그건 어디까지나 오해한 거예요. 잘못 생각한 거예요. 예수님이 오셔서 완전 다져났지요. 예수를 믿지 아니하면 저주받는 거예요. 

예수 믿는 자는 구원을 받고. 그럼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입에서 나오는 그게 있잖아요. 예수님의 고유의 자기 월드, 자기 세계가 있다 말이에요. 그 자기 세계관을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그 세계관 앞에서 누구의 세계관은 가짜로 들통 나야 됩니까?  그동안 나를 지켜왔고 내 사는 것을 기본으로 컨셉으로 잡았던 이 세계가 이게 다 망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 야고보서 4장 13에서 15절까지 계속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너의 생명은 아무것도 아니다. 니가 사는 건 니 뜻에 사는 거 아니다. 주의 뜻이 있었기에 살았다. 따라서 살고 죽는 것은 너의 취지를 너의 소망을 들어주기 위해서 살려주고 안 살려 주고가 아니라 이 율법의 취지, 하나님의 말씀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 동반해서 병행해서 너도 같이 살고 죽고 하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제대로 된 율법을 전개할 때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17절에 보면 그걸 ‘선’이라 해요.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바로 죄니라. 그러니 인간을 볼 때 인간이라 보지 않고 이게 율법의 완성이냐, 악이냐, 죄냐, 그 두 관점으로만 그냥 보고 있는 거예요. 

선생님이 학생들 채점하면서 숫자가 약간 삐뚤우냐 글씨가 삐뚤우냐 그런 거 안 보거든요. 니 시험지가 질이 좋으냐 그런 거 안 보지요. 그 시험지에서 채점하는 기준이 뭡니까. 글씨가 나쁘고 볼펜이 나쁘구나 그런 거 보는 게 아니에요. 뭐를 표현하느냐는 거예요. 뭐를 드러내느냐에요. 이 선생님이 가르친 그대로 여기서 방출되고 있느냐, 발산되고 있느냐, 그걸 보는 거예요. 

우리는 시험지라면 거기서 주께서는 자기가 한 것을 얻어내지 못하면 그 시험지는 빵점이고 찢어버리지요. 그렇다면 주님이 우리를 쳐들어왔을 때 그럼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냐, 그냥 아무것도 아니냐, 하는데. 자, 이게 오늘 강의 제일 어려운 부분입니다. 두 가지를 한 번 구분해 볼게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와 ‘나는 없다.’ 와 같을까요? 다를까요? 의미가. 달라요. 그냥 아무것도 없어버리면 이건 불교가 됩니다. 살다가 자살하면 그만이지요. 자살한 사람 있잖아요. 목사. 살다가 힘들면 되는. 전에 이야기했지만, 자살할 때 행복해서 자살합니까? 불편해서 자살해요? 불편하다는 거예요. 우리는 불편할 자격이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따라서 자살할 자격도 없어요. 뭐 우발적으로 농약을 마신다면 이건 병이다. 이건 발작했구나 하는데. 아주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자살할 때 보통 울컥해서 뛰어내리는 것은 자살이지만. 기분 나쁜 일이 있는데 갑자기 뭔가 한강물에 빠지면 시원하겠다. 이리 죽을 수도 있어요. 그건 충동적인데. 

충동적 반대말이 이성적이거든요. 이성적으로 계획 세워서 자살했다. 그런데 그것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어요? 없어요? 봐주면 안 되지요. 계획 잡힌 게 있잖아요. 계획 잡힌 게. 내 목숨, 내 인생은 내가 처리하겠다는 거예요. 그걸 어떻게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겠어요. 그래도 그렇게 천당 갈 수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충동적이 아니고 계획적이라니까요. 

우울증이라도 계획적인 우울증 있잖아요. 다릅니다. 이게 아무것도 아니라면요, 없음에서 더 내려가야 돼요. 이게 어렵다는 말은 뭐냐, 없으면 제로기 때문에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이건 이야기할 건덕지가 없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마이너스가 있잖아요. 마이너스. 없음 안에 더 깊은 반대쪽으로 새로 시작되는 거예요. 반대쪽으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 자체가 있어야 돼요. 없는 곳에 뭐가 있어야 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가 그 안에 들어있어야 돼요. 그건 우리가 생각하는 없음이 아니고 없음보다 더 있는 것. 마이너스가 있는 거죠. 

주님께서 구원하는 사람은 주님 편에서 구원하는 게 아니고 주님 반대편에서 구원해요. 주님의 적대관계에 있는 저 반대세력에서 끄집어낸다고요. 요나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요나가 멀쩡하게 구원 받는 게 아니고 어느 속에 떨어졌어요? 바다 속에 빠지고 난 뒤에 건지지요. 

강도가 멀쩡한 의인되어서 구원되는 게 아니고, 강도가 자기 죄 속에서 구원받지요. 예수님의 이름이 뭐냐 하면 자기 백성을 어디서 건진다는 말입니까? 죄 속에서 건지잖아요. 그러면 그 모든 인간은 어디다가 집어넣어야 돼요? 죄 속에 집어넣어줘야 돼요. 그것 때문에 세례요한이 물세례 준 거예요. 

전에도 설교시간에 이야기했지만, 

세례라는 것은 뭐냐 하면 강남강의에서 했지요. 

뭐냐 하면 내 죄에 대해서 더 이상 책임질 수 없음을 아는 거예요. 그게 물세례입니다. 

그런데 물세례 정신이 없어버리면 인간은 뭡니까? 내 죄책감을 어떻게 해결해요? 변명으로 일관하는 거예요. 

내가 말씀 지키고 예수 잘 믿고 성실하게, 거룩하게, 성화해서 그래서 내 죄책감을 자꾸 해소시키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그러면 없음에서 나간 게 아니고 있음을 가지고 자꾸 어떻게 조작해버려는, 연출해보려는 거예요. 있음을 가지고. 

자, 이야기가 성육신입니다. 인간들만 있는 세상에 누가 오셨다. 주님이 여기에 뛰어들었어요. 뛰어들을 때 주님 몸만 달랑 온 게 아니고 주님의 세계가 함께 여기에 섞여있지요. 제가 이걸 증강현실 또는 중복현실, 다중현실이라 했습니다. 현실이 두 개의 현실이 있어요. 

묵시라는 것은 초역사거든요. 역사를 초월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역사를 초월한 것이 어디 있느냐, 역사 안에 있어요. 역사 안에. 하나님의 의라는 게 어디 있느냐, 죄 안에 있어요. 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죄 안에서 없는 의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없음에서 아무것도 아님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주님 진영에 반대현실 속에서 자기 백성을 만들어 내서 끄집어오는 겁니다. 그럼 나는 어디서 찾아야 됩니까? 나를 찾으려면 나의 세계에서 찾지 말고 나를 강탈하는 나의 반대쪽에서 찾아야 되지요. 그게 바로 예수 안이에요. 내 안에서 살다가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데서 예수 안에서 내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를 진정한 자아를 예수 안에서 찾아야 돼요. 

예수 안에서 찾는 걸 가지고 갈라디아서6장에서는 그걸 십자가 안에 내가 들어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6장 14절 한 번 읽어볼게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되어 있잖아요. 지금 이 이야기가 뭐냐 하면 나 지금 십자가 안에 들어있다는 거예요. 내가 십자가를 바라보는 게 아니고 십자가 안에 들어있어요. 

바라보면 관람자가 돼요. 관찰자가 되고 분석의 대상이 되잖아요. 내가 분석해서 내게 이득 되는 것 만 채택하게 되잖아요. 그러나 십자가 안에 들어있으면 뭡니까? 분석하고 자시고 할 이유가 없어요. 인간이 자기 자신을 못 벗어납니다. 왜냐, 내가 만든 세계 안에 내가 있을 때는 내가 그 세계를 내가 스스로 벗어날 수 없어요. 왜? 내가 형성하고 내가 구성하기 때문에. 내가 존재하매 덩달아서 만들어진 세계에서는 내가 벗어날 수 없어요. 

예를 들면 지난 초등학교 동창생을 만났다. 드라마 보면 그런 게 많이 나와요. 

이라는 드라마에 나오는데. 뭐냐 하면 이태란이 친구를 만났어요. “니 정육점 딸 아닌가?” 하니까 “아니다.” 버티고 있거든요. 그 사람이 아무리 성형을 하고 바꿔도 자기 기억은 자기가 버릴 수가 없어요. 그래서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뭐냐하면 “나, 금시초문인데.” 이게 아니고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나는 아는데 애써 부정하겠다는 뜻이에요. 

자기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은 아무리 해도 내 세계에서 내가 못 벗어난다는 겁니다. 아무리 성공을 하고 출세를 해도 어릴 때 내가 만약에 출생에 비밀이 있다면 그 비밀은 지울 수가 없어요. 출생의 비밀이 없으면 우리나라 드라마 90%가 드라마 안 됩니다. 전부 다 출생의 비밀이에요. 

회장 집 아들로 지 아들 바꿔서 바다에 넣고 해놓고 이제 와서 가짜가 진짜 행세한다고 난리치고. 온갖 모함을 꾸미고 MBC에 나오는 <비밀과 거짓말>드라마가 어디까지 막장 할 수 있는가 테스트하고 있거든요. 웃기지도 않아. 막장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거. 

늘 내가 아닌 나를 연출하고 있잖아요. 인간은. 자꾸만. 왜 그렇게 하느냐, 자기의 죄책감을 그런 식으로 해소가 되리라고 기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율법은 아주 냉정해요. 하나를 어기면 몽땅 어긴 것이 된다. 니가 백날 노력해 봐도 너는 너의 세계에서 못 벗어난다. 우리의 세계를 나에게서 찾으면 안돼요. 십자가에서 찾아야 돼요. 

그 십자가에서 찾는 방법은 제가 어제 수요일날 ‘요셉의 눈물’을 통해서 언급했습니다. 지워지지 않는 내 과거를 내 허락도 없이 몽땅 가져가신 분이 있어요. 왜 가져가셨는가, 책임지려고. 그게 바로 세례요한의 물세례입니다. 우리 죄인들만 입수해야 될 물속에 풍덩하고 죄도 없으신 주님이 뛰어들었어요. 

자기백성을 의인이니까 반대편이 되는 죄 속에서 찾는 거예요. 그 죄를 십자가 피로 해결하시고 그 해결된 십자가 안에다가 우리를 이미 집어넣었습니다. 그걸 가지고 어렵게 말해서 보편자 속에 특수자로 이야기합니다. 참, 말도 어렵게 하지요. 

‘보편자속에 특수자’ 이 특수자는 보편자속에 잠기겠어요? 안 잠기겠어요? 안 잠기지요. 보편자속에 특수자가 이렇게 희석되겠어요? 안 희석되겠어요? 안 희석되지요. 생생히 살아있겠지요. 인간들 속에, 아담들 속에 아담이에요. 첫 아담들 속에 그 집단 속에 마지막 아담이 온 겁니다. 이게 성육신이에요. 보편자속에 특수자. 이 보편자들과 특수자는 합치되지 못합니다. 왜냐 하면 여기에 십자가라고 단절되어있기 때문에. 십자가사건을 통해서 미워했기 때문에. 십자가가 이렇게 중요한 거예요. 

십자가가 없었으면 우리는 내가 하늘나라에 간다고 여깁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착하게 되면 하나님이 받아준다고 생각해요. 이게 유대인들의 신학이 잘못이에요. 어떤 단절이 없어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단절이 없습니다. 그 유대인의 사고방식과 오늘날 교회의 사고방식과 똑같아요. 열심히 내 행함대로 행하면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어떤 단절성이 없어요. 

계속 주인공은 하나님이 주인공이 아니고 누가 주인공이에요. 착하게 살면 살수록 점점 더 주인공은 누구 주인공이에요. 내가 나에게 주인공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인간들의 보편자속에 인간 본인을 뭐로 만드는가 하면, 특수자로 만들어요. 자기를 절대자로 만들어요. 이게 바로 마귀가 우리에게 부추기는 목표점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한 사람이 되어라. 다른 사람보다 더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 그러니 우리 자신을 절대화시켜요.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우리는 신처럼 되려는 악마의 속성이 있습니다. 그걸 장려하고 오히려 그걸 부추기는 거예요. 

니가 내 말만 들으면 국가대표 오래할 수 있고 니는 전 세계 스케이팅해가지고 쇼트트랙해가지고 금메달 딸 수 있다. 4년 동안이나 그렇게 당했잖아요. 코치한테. 심 석희가.  니는 특수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왜 신고를 안했느냐, 눈앞에 특수자가 보이는데, 악마의 본성이 뭡니까? 내가 최고되고 내가 내 존재의 가치가 극대화되는 게 고지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데 어떻게 포기합니까? 

왜 가장 착한 바리새인이 왜 천국가기가 제일 힘든 이유가 뭐예요? 자기를 제외시키기에 너무나 들인 공이 많기 때문에 그래요. 목사가 구원받는다는 게 왜 그렇게 불가능한지, 목사가 예수 믿는 사람이 없다는 이유가 왜 그래요? 평소에 자기가 주의 종이라는 그걸 가지고 장사를 사업을 해왔기 때문에 그래요. 권사, 집사, 장로 다 마찬가지에요. 뭔가 안겨주게 되면 이 훈장 같은 것이 돼가지고 에이~ 이 쓰레기! 하고 감히 버릴 수가 없어요. 

여러분들이 어릴 때 다 소꿉놀이 해봤잖아요. 지금도 하고 계신 분도 계시겠지만. 나이 들면 다 어린애 되니까. 소꿉놀이 해봤잖아요. 왕 게임 같은 거 해봤지요. 그 별거 아닌 거 알면서도 기분 더럽지요. 꼴지 들어가면. 가위 바위 보 해가지고 밀치면. 괜히 왕 자리 앉은 사람에게 차렷 경례 하고 자리 빼앗고 하는 자체가. 자기 인기에 대한 스스로에 대한 모독처럼 느껴지잖아요. 그런데 그 게임이 즐거운 이유는 목표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 목표는 악마가 준 심성과 부합되어서 그래요. 내가 저 자리에 있어야지. 사람이 어떤 목표가 있을 때 사람은 생존의지가 불탑니다. 권태에서 벗어나요. 노인네가 괴롭고 권태로운 것은 목표가 이제는 직장에서 쫓겨났지 아파트 경비도 이제는 10대 20대 1이 넘지 자식들은 안 찾아와서 위로도 안 해주지요. 

만만했던 매일 무시하는 재미로 살았던 마누라 먼저 죽어버렸지. 어디 또 여자 얻으려하니 돈이 있어야지. 돈 떨어져, 이야기할 사람 없어. 노인정에 가도 10원땡이 해도 매일 잃어. 돈10원 따봐야 오늘 150원 따고 내일 200원 잃고. 기껏 하는 것은 케이블보고 문재인 욕하는 거 그거. 사사건건 정치하는 거 다 비난하고. 할 일이 없는 사람은 이미 죽은 자에요. 할 일이 없으면 의존적입니다. 스스로 설 수 없기 때문에. 할 일이 자립성을 맞추거든요. 

그런데 할 일이 없어버리면 누굴 붙들고 애걸복걸하고 종속되어야 돼요. 그래서 돈 버는 여자들이 결혼을 안 하잖아요. 왜냐하면 여자에게 결혼이란 종속을 의미하고. 남자에게 결혼이라 하는 것은 시다발이하는 여자 하나 얻는 거예요. 자기는 안 다치고 여자는 희생하고 그것 때문에 결혼하고. 

여자도 남자처럼 그걸 그대로 본 따가지고 내가 결혼하면 몽땅 남자를 위해서 몸 바쳐야 되잖아. 이렇게 해서 이것저것 따져보니까 결혼하기 싫은 거예요. 여자가 돈 번다고 남자가 존경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시다발이로 봅니다. 또 그런 사고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그나마도 나에게는 내 친구는 남편이 죽었는데 내 남편이 살아있으니 얼마나 행복하냐, 이런 식으로 스스로 자기를 또 위로하고 있고요. 

보편자속에 특수자. 이건 섞일 수가 없습니다. 자, 그러면 어려운 문제가 우리는 분명히 보편자속에 속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핍박하는 사람이에요. 왜? 나의 세계가 있기 때문에. 오직 내가 절대자기 때문에. 하늘의 태양은 둘이 되면 안 되거든요. 내가 태양이잖아요. 주님 태양 아니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어? 영원한 나는 여기 있지 않고 십자가 안에 있다. 내 반대편에 내가 있는 거예요. 이쪽에 내가 있는 게 아니고. 나는 졸지에 가짜가 되는 거죠. 가짜. 

가짜인데, 우리는 그걸 못 느끼잖아요. 인정을 안 하잖아요. 주께서는 가짜 되게 하시는 거예요. 어떻게? 죽여 버리는 거예요. 매일 하루, 하루 죽여 버리는 겁니다. 죽는 것이 불신자는 자기 죽음이지만, 우리는 죽으면 죽을수록 생명이 더 만개하는 수순이죠. 생명이 만개하는 수순이에요. 사도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나는 이미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고 했고, 또 내 안에 죽은 육체 안에, 자기를 이미 죽은 육체로 봐요. 죽은 육체 안에 주님의 생명이 계속 살아난다고 했거든요. 고린도후서4장에서.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의 특징이에요. 

지난 낮 설교에 제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기도할 때 여기에 나오는 사람은 절대로 없는 사람이 나온다고 했어요. 없는 사람이. 주일 낮 설교 처음에.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보고 지금 사도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뭐냐,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에요. 내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고. 

그러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는, 성경 전체를 통해서 내 안에서 못 빠져나온 내가 어느 새에 빠져나와가지고 저쪽 세계에 가있다면 그렇게 된 어떤 절차, 수순, 과정은 어떤 형식이냐가 여기서 관건이 되는 겁니다. 

법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어요. 율법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는데, 아까 저주하고 두려움을 준다고 했지요. 법이 주는 두려움에 어떤 융통성이나 이런 게 전혀 없어야 돼요. 철저함이에요. 철저함. 봐주는 거 없어요. 여러 번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만, 도화지에 노랑색, 빨강색, 이쁜색, 분홍색이 있더라도 만약에 동생이 와서 실수해가지고 검은 잉크를 확 쏟아버리면 그 노랑색, 분홍색도 다 검은색 앞에 무채색 앞에 묻혀버리지요. 

죽음이라 하는 것이 뭐냐 무채색입니다. 국회의원이나 의사나 판사나 이게 다 죽음 앞에서 전부 다 묻혀버리지요. 그게 율법의 기능이 뭐냐, 모든 것을 죽음 안에 저주 안에 두는 거예요. 율법의 기능이. 

야고보서4장에 보면 재판자는 오직 주님이시니 능히 구원하시기도 하고 멸하시기도 한다. 그러니 율법의 기능이 뭐가 있습니까? 멸하는 기능이 있지요. 멸망시키는 기능이 있지요. 율법을 어기면 멸망해요. 여기는 뭐 어떤 이의도 제의하지 마세요. 어떻게 고생스럽게 살던 환하게 살던 무탈하게 살던 무탈이고, 유탈이고 관계없어요. 무조건 율법 있음 자체가 율법을 어기면 그건 멸망이에요. 

그리고 구원은 뭐냐 하면 일단 멸망을 거쳐야 돼요. 이게 순서입니다. 로마서3장으로 하면 그냥 저주아래 있게 함이에요. 저주 아래 있다 함은 아주 입을 다물게 하는 겁니다. 입을 다문다는 말은 내 쪽에서 구원해 주세요. 천국 보내주세요. 뭐 해주세요. 우리 가정 행복하게 해주세요. 이렇게 요청할 수 있는 모든 그것을 그 분 색 속에 다 없애버리는 거예요. 

노래 그런 노래 있잖아요. 할 말을 잊었지마는, 김 수희 노래 나오지요. 김수희 노래가 괜히 있는 게 아니에요. 할 말을 잊었잖아요. 할 말을. 할 말을 잊었지만은 노래도 있고, 또 우연이 불렀던 노래 있잖아요. 나 벌써 용서 했노라. 과거완료. 나이트클럽에서 오랜만에 남자 만났는데, 나 벌써 니 용서했다. 니 나를 버리고 갔더라도 나는 니 벌써 용서했다. 나는 벌써 용서했다는 말이에요. 

이게 요셉의 울음에 보면 나와요. ‘요셉의 울음’하는 설교에 나옵니다. 내 죄책을 내가 책임지면 안 된다는 거예요. 수요일 설교가 뭐냐 하면 요셉의 울음 속에 이미 형들의 과거가 다 거기에 집결되어 있고 형들은 모르지요. 왜? 자기 세계기 때문에 자기 과거인 줄 알았지요. 그 과거와 결부된 자가 요셉이었고 요셉이 형들의 잘못을 대신 짊어지고 꿈의 계시와 결합된 거예요. 결합되고 꿈의 계시의 결과 속에 뭐가 있느냐, 형들은 이미 용서했노라, 에 결과가 국무총리가 된 거예요. 

그래서 창세기45장 5절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다시 말해서 형들이여, 나와 당신과 상관할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과 나와 상관할 문제입니다. 울음이 신약에 오면 예수님의 거든요. 

피안에 우리의 죄책임이 이미 해결되었어요. 예수님은 우리하고 상대하지 않습니다. 니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우리한테 다구치고 우리한테 뭘 요구하지를 않아요. 왜냐하면 주님은 아버지하고 상대하지 우리하고 상대 안하는 겁니다. 

이걸 못 믿도록 발악을 하는 게 뭐냐 하면 악마고 이게 오늘날 교회가 그 짓을, 악마 짓을 하는 거예요. 니가 믿지 않으면 구원 못 받는다 하는 거예요. 계속해서 뭐냐 하면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하는 것을 애써 그걸 안 알려지기를 모든 역량을 다해서 교회가 그걸 가로막아요. 인과응보의 정신에 의해서. 

니가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서 복을 받고 천당가고 지옥가고 그건 니 결정에 달려있다고 그렇게 가르쳐요. 그 자체가 자기한테 이미 내가 여기 존재함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악마가 준 율법이 되어버려요. 교회법이. 교회 있음이. 저 교회가 있어야 내가 산다는 생각. 결국 교회 중심이 아니고 내 중심이지만. 내 존재 중심이지만. 

그게 모든 인간이 내 사는 게 위주기 때문에 안속아 넘어갈 수가 없는 거예요. 모든 게 사기고 모든 것이 거짓입니다. 교회하는 모든 것이 거짓이에요. 하나님의 영광, 주권사상, 십자가, 모든 게 거짓이에요. 주님의 방식은 그 방식이 아니고 끝까지 우리 자신을 절망케 해버려요. 절망케. 

교회 있어도 소용없고, 내가 있어도 소용없고, 내 인생은 내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까지. 내가 이렇게 된 것이 내 의도가 아님을 내가 알 때까지. 예수님의 의도로 내가 태어났고, 살아가고 있지. 내 좋아라고 내가 태어난 게 아니라고. 이씨 집안에 김씨 집안에 태어난 게. 내가 조성한 상황이 아닙니다. 

이 상황이 율법에 의해서 주님의 뜻에 의해서 조성한 상황이지 내가 조성한 상황이 아니에요. 이 세상은요, 율법이 율법답게, 십자가가 십자가답게, 주님이 주님답게 그렇게 활동하는 하나님의 자기 영역이에요. 자기 활동 영역입니다. 

법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 멸망하는 기능이 있어요. 두려움을 줘요. 그런데 두려움이 왔다는 말은, 두려움이 있다는 말은 뭐냐, 나한테 법적인 책임과 죄책감이 발생될 때 두려움도 함께 와요. 이러다가 내가 망하는 게 아닌가, 내가 쌓아온 인생 몽땅 다 무너지는 게 아닌가, 쪽 나는 게 아닌가, 수련회 참석하면 가장 바닥나는 게 아닌가, 두려움을 줘요. 

피해서 가버리면 이건 동물 돼요.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겁니다. 차라리 그 두려움을 내 속에 품으면, 그 두려움이 왔을 때, 그 두려움이 어디까지 따라오겠습니까? 도망치면 안 따라옵니까? 죽을 때까지 따라오지요. 계속 따라오지요. 내 다리 내놔라~~ 하듯이. 계속 비는 부슬부슬 오지요. 지는 부모 효도한다고 남의 무덤에 가서 엉덩이 살을 뺏는데 시체가 아직 들 죽었는 모양이라. 귀신이. 쫒아와 가지고 내 다리 내놔라~~ 하면서 다리 하나로 펄쩍 펄쩍 뛰면서 오는데 뛰는 속도가 허들선수보다 더 빨라요. 나는 100미터 11초인데, 뛰는 것은 100미터 10.5초에 따라오네. 

그래 간신히 집에 도착해서 부모 먹이고 살리고, 무덤에 찾아가가지고 미안합니다. 해가지고 무덤을 새로 정리해 놓으니까 그재사 조용해가지고 이제 만족하다고 귀신이 안 쫒아온다는 전설의 고향 이야기에요. 충남 서산에서 내려오는 이야기. 이게 인과응보라는 겁니다. 왜 전설의 고향에 사람들이 혹하느냐 하면 인과응보거든요. 

내 죄 책임은 누가 해결한다? 내가 착함으로 보상해주면 만사가 형통하게 처리된다는 겁니다. 마귀는 어디서 찾습니까? 그게 바로 마귀의 소리에요. 복음은 뭡니까?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거든요. 양쪽에 누굴 상대로? 강도가 달려있어요. 강도를 보고 예수님은 이야기하는 거예요. 강도를 보고, 앞에 있는 제자를 보고. “강도야, 니 오늘 밤에 나와 함께 어디 간다? 낙원에 간다.” 이게 그렇게 싫은 이야기에요? 그게 귀 막을 이야기입니까? 그게 도망칠 이야기에요? 천길만길 도망칠 이야기입니까? 그게. 

그냥 없는 존재로 두려움을 받는 게 아니고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러니까 무의미한 거죠. 내가 무의미해지는 거예요. 여기서. 자, 무의미라는 말은 뭐냐 하면 아까 언어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언어에는 법이 있다 했지요. 언어는 구조로 되어있고 구조가 있음으로서 여기서 뭐냐 하면 신호등에 보면 파란불, 빨간불이 있지요. 빨간불과 파란불의 그 차이 때문에 두 색깔의 의미가 생겨요. 빨간불만 있으면 건너라는 말인지, 건너지 말라는 말인지 몰라요. 파란불과 대비를 시켜 놓고 짝을 이룸으로서 아! 파란불은 건너고 빨간불은 건너지 말라는 말이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쁘다 하는 말은 무슨 말을 대조해야 의미가 생기느냐 하면, 못 생겼다와 대비될 때 이쁘다가 이게 의미가 생기는 거예요.

의미라 하는 것은 반드시 차이에서 나는 거예요
. 차이에서.

주님께서 자기세계를 몰고 올 때는 예수님의 언어세계에 통하는 언어를 가지고 오시는 거예요.

그러면 기존에 인간들의 모든 의미는 어디서 발생되는가,
아까 했잖아요. 인간의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서로 의미를 발생시키거든요.
그 의미의 장이 현실이라는 겁니다.
 

애들은 현실감이 없어요. 말 못하는 애는 현실감이 없어요. 애들하고 개는 그냥 부모가 베풀어주기만 하면 돼요. 엄마가 “아이고, 맛있다. 맛있다.” 애가 맛있는 거 몰라요. 그런데 엄마가 무조건 맛있다를 이 경우에 요걸 가지고 맛있다고 하는 거야. 이 애야! 라고 언어를 제공하는 겁니다. 

그럼 애가 멋도 모르고 액체귀신 같은 거 입에 들어가면 “에테테 에테테”하잖아요. 먹지 말라 하거든요. 액체귀신 알아요? 문방구에 가면 그거 판답니다. 먹어서는 안 된다고 에테테 한다고요. ‘아~ 요것은 먹어서는 안 되는구나!’ 대조가 되는 두 상황을 가지고 언어를 배우는 겁니다. 선과 악을 가지고 언어를 배우는 거예요. 그게 우리는 평생을 길들여진 거예요. 평생을 길들여진 거예요. 

그 안에서 우리가 나는 이 정도로 착하고 약간은 못된 구석이 있지만, 대체로 나는 우수함. 교도소에 가면 그런 사람 많습니다. 대체로 우수한 사람들 많아요. 왜냐, 자기가 있는 세계에서는 음주운전이 그다지 나쁜 악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기분 좋아서 한 잔 걸치고 가까운 거리이기 때문에 운전했고, 그리고 대리기사를 부르고 난 뒤에 운전 좀 하다가 차 열대 박았다. 이렇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자기는 변명거리가 많아요. 변명거리가 있는 한 자기는 악하지 않아요. 왜? 변명거리가 있으니까. 우리의 일상은 늘 그런 식이에요. 자기를 좋게 보는 식으로 모든 게 움직인다니까요.

계속해서 내 안에 살아요. 그래서 내 안에 살기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것은 산상설교나 주의 말씀이 필요하지 십자가를 원하지 않아요.
왜? 망가져도 너무 망가졌으니까. 십자가하고 대조해 보세요.
 

교회 가서 나보다 먼저 착실하고 나보다 기도 오래하고 헌금 많이 하고 나보다 선교 많이 한 사람은 우리가 그 사람과는 어떻게 본받을 게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건 근원적으로 본받을 문제가 아니에요. 이건 죽으란 말이지 살아서 착하게 살으라는 뜻은 아니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은 나의 본받음 리스트에서 제거해 버리는 겁니다. 십자가를 제거하고 남는 것은 나는 열심히 잘 할 수 있다. 나는 여전히 정당하다. 그것만 남는다니까요. 

그런데 그것이 뭐냐 기존에 악마가 준 의미입니다.
이 의미와 예수님의 십자가 새겨준 의미를 주께서는 만나게 해주지요.
그걸 결합시켜 버립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그 두려움이 에스더가 하는 고백처럼 “주여, 죽으면 죽지 뭐.” 이 고백. 죽지 뭐.
어차피 내가 살아있으면 어떤 실적, 업적을 예상하게 돼요.
 

내가 요렇게 대처하게 되면 요런 괜찮은 무탈한, 행복한 가정이 어떻고 미래가 어떻고 이러는데. 내가 만약에 죽는 순간이 된다면 뒤가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 하루, 하루를 뒤가 없는 생활을 해야 돼요. 내가 지금 이 순간, 이걸 ‘사실 있음 그대로’라고 누가 표현했는데, 이건 레비나스라는 철학자가 이걸 표명했지요. 사실 있음 그대로. 

딴 거 생각하지 마라. 지금 여기 있다는 그 사실. 지금 이 순간!
오페라 있잖아요. 지금 이 순간. 달랑 요것만 생각해요. 요것만.
그래서 아가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순간. 그게 초월적시간이지요. 묵시.지금 이 순간. 그리스도와 함께.
그러니까 나중에 늙어 죽겠다가 아니라. 지금 나는 없음의 존재로서
그동안 내 있음으로 살았던 보람이 이제는 나를 없게 하는 주님의 여기 있음으로 그 기쁨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내가 있음에. 뭐가 있음에? 주의 뜻이 여기 있어서 내가 존재함에. 내가 있음에를 뭐로 바꿉니까? 주의 뜻이 나와 함께 있음에. 야고보서4장15절이 여기 있음에. 야고보서4장15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내가 여기 지금 이 순간까지 내가 살아왔고 태어나야 했음에, 라는 사실을 증거 하는 겁니다. 

너희가 두려움에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려니, 라는 이 실효성 있는 이 효과 이 말씀의 효과 때문에 내가 여기 있음에 내가 여기 사는 이유는 바로 주의 뜻에 의해서 살았지. 내 뜻에 의해서 살지 않았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증명하기 위해서 내가 여기 살아있는 거예요. 

그렇게 되려면 바로 십자가에 효과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어요. 십자가가 쳐들어와서 나로 하여금 교체를 해버려요. 그걸 어렵게 말하면 ‘이름 교체’라고 합니다. 내 이름으로 살지 않고 주의 이름으로 삽니다. 이름 교체에요. 이름 교체가 되어버리면, 되려면, 뭐냐 하면 내 이름을 누군가가 와서 내 이름을 극복해야 돼요. 

그런데 인간은 자기 이름을 자기 식으로 극복 못합니다. 넘어서지를 못해요. 왜냐 하면 모든 하는 것이 내 이름에 명예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내 살아온 과거와 관련되어있거든요. 내 과거를 완전히 쓰레기로 만들 수는 없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십자가의 효과가 뭐냐, 또는 특수자의 효과가 뭐냐, 뭔가 없애지는 게 아니고 뭔가 여분의 것을 남겨요. 그걸 가지고 저는 찌꺼기. 찌꺼기에요. 우리는 주님의 말씀의 찌꺼기 돼요. 

옛날에 집에서 막걸리 담글 때 막걸리만 나오는 게 아니고 막걸리 되는 공정을 위해서 그 공정 과정에서 반드시 나오는 게 있어요. 술 찌꺼기 있지요. 그거 먹고 배고프다고 먹고 학교 가서 취해가지고 있어요. 우리는 주님의 찌꺼기에요. 양초가 타면 뭔가 심지의 재가 떨어지지요. 시커먼 심지 똥이 떨어지지요. 그 주님이 지금 이 세상을 운영하고 있는 똥. 그게 바로 성도입니다. 

성도가 주의 일은 도울 수는 없지만, 찌꺼기는 될 수 있어요. 그 윤시내가 불렀던 노래 있잖아요. <열애> 태우리라. 주께서 우리를 주님의 열성으로 다 태워버리고 남아있는 찌꺼기. 오늘은 오늘의 찌꺼기. 내일 되면 내일 찌꺼기 또 만드는 거예요. 이 찌꺼기가 얼마나 귀한 신분인지 누가 부러워하냐, 천사들이 부러워해요. 

아~ 나도 인간 되어서 찌꺼기 되었으면 좋겠다! 나도 언제 주님의 일하신 효과가 되어볼까. 주님의 일하시는 파장이 되어볼까. 주님의 야고보서4장15절의 찌꺼기가 되어볼까. 천사들이 그렇게 부러워하는 겁니다. 

찌꺼기라는 것은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그래서 고린도전서에 보면 사람이 자기가 성도가 아니라면 세상 재판에 나가 판사들에게 잔소리 들어라. 억울합니다. 저 사람이 내 돈 사기쳐먹었습니다. 해야 되는데 만약에 니가 주인공 아니라면 니가 천사도 감히 재판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너라면 세상 판사에 가가지고, 세상에는 판사는 세상 법이 통해요. 인간들의 우월감과 존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인간은 결코 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게 담겨있는 법이 세상법이거든요. 인권이라는 거 그런 거 있잖아요. 

그 법에 해당도 안 되면서 왜 거기에 가서 그들에 대해서 훈계를 듣느냐 이 말입니다. 그럴 필요 없지 않느냐. 찌꺼기라면 찌꺼기 쓰레기 된 걸로 감사하면 그만이지. 왜 갑자기 세상 주인공 역할해가지고 “그 봐! 내 가치는 이 정도야. 나 무시하지 마!” 왜 다시 세상조로 돌아갈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고린도전서나 야고보서나 로마서나 편지 대상이 누굽니까? 육의 세계에서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에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에게만 이야기하는 거예요. 

제가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그렇게 넘어가는 방식은 주님의 율법의 완성의 효과로서 우리를 찾아와서 우리를 죽인 정도가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사람 되게 하거든요. 그렇다면 우리가 할 것은 그 방법에 대해서 요청할 필요는 없고 요청할 권한은 없어요. 왜냐, 우리는 멸망대상이기 때문에. 

다만, 뭐는 알 수 있느냐 하면 우리가 과연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그 흔적은 우리가 체험이 가능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날마다 새롭고 낯설고, 날마다 새롭다. 

사실 있음 그대로 이기 때문에 내일 모레를 미리 생각할 거 없거든요. 내일 모레를 미리 생각하면 그게 우리한테 권태가 돼요. 권태. 지루하게 된다고요. 뭐든지 예상하게 되면 재미없어요. 제가 십자가마을에 영화평을 쓸 때에 오 목사님이 제일 말립니다. 제발 마지막 대목은 안 썼으면 좋겠다. 그러나 저한테는 그런 거 없습니다. 세세하게 마지막 반전까지 다 써버려요. 재미하나도 없게. 

미리 알게 되면 모든 게 권태로워요. 재미가 흥미가 없어요. 늘 새로워야 되는데 새로운 방법이 뭐냐, 늘 낯설어야 돼요. 내가 낯설고 내가 속해있는 가정과 상황들이 주어진 현실이 낯설어야 돼요. 오늘 아침에 잠시 헤어졌던 자식이 오후에 만날 때는 낯설어야 돼요. “얘? 니 누구야?” 익숙하면 안돼요. 익숙하게 되면 다리 꼬는 사람 되어버려요. 다리 꼬는 노래 보면 익숙한 노래 나와요. 그건 몰라도 됩니다. 

익숙하면 안돼요. 왜? 주님이 살아있을 때는 과거에 미리 예측한 것이 주어지지 않는 것이 분명하거든요. 미리 예측해 버리면 이게 시간이 늘어나버리면 그 안에 권태가 나요. 권태. 재미가 하나도 없어요. 날마다 새롭지를 않아요. 권태가 되게 되면 그게 추억이 되고 추억이 있으면 추억이 나를 잡아당겨버리면서 그걸 가지고 우리가 특수자에 속했다는 것이 효과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만약에 내가 점이 아니고 선분을 가지면 그 선을 가만히 간직하는 게 아니고 다른 사람보다 더 기냐, 짧으냐를 대비하게 돼가지고 경쟁마당과 그리고 투쟁마당에 나서게 되는 겁니다. 김남주라는 시인이 있는데 운동권 시를 쓴 사람이에요. 운동권의 시는 그 사람에게서 다 나왔다 보시면 돼요. 그 사람이 시집이 나한테 있거든요. 보게 되면 민주주의는 피의 눈물로 쟁취한다. 이런 아주 운동권 구호들이 그쪽에서 다 나왔어요. 그 시에. 

그 사람은 가난하면 사람도 아니에요. 그 사람 입장에 봐서는. 그 사람은 사회주의자기 때문에. 그러면 그 사람에 있어서의 인생은 뭡니까. 결국은 비교에서 오는 거예요. 비교에서. 운동권 하다가 교도소가고 난 뒤에 바뀐 사람 있잖아요. 생명 운동한 사람 있잖아요. 김지하. 그 사람이 자기 운동권을 회개하는 거예요. 하찮은 일차원적 삶을 산거예요. 비교하는 삶이에요. 내가 가진 선분과 니가 가진 선분과 누가 더 훨씬 기냐 보여주는 겁니다. 

그게 얼마나 철딱서니 없는 짓이라는 것을 이제는 아는 거죠. 복음도 모르고 완전히 생명 운동에 빠져있는데. 땅이 생명이고 그런 생명 이데올로기에 빠져버렸는데. 생태학 쪽에 가버렸는데. 그게 인간의 한계에요. 왜냐하면 인간은 지가 자연의 아들로 보기 때문에. 자연이 나를 만들었다는 거예요. 죽으면 자연 속에 섞인다는 거예요. 불교의 윤회사상과 똑같은 거예요. 

그러나 성경은 뭡니까? 주의 뜻에 의해서 만들어졌어요. 성육신을 그들은 인정을 안 해요. 창조자가 우리와 함께 섞였다는 것을 인정을 안 합니다. 그런 소리들을 우리가 듣고 온 거예요. 그런 소리를 들어서 거기에 동조를 했었고 감동했었고 참 대단하다. 훌륭하구나! 남을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개선하기 위해서 희생하니까 얼마나 훌륭하냐. 라고 동조한다는 말은 결국 우리에게는 뭐가 없다? 

우리에게는 어떤 특수자가 우리 속에 끼어드는 것을 우리가 용납 못하겠다는 거예요. 나는 나대로 살겠다는 거예요. 그러니 그것은 성도의 효과가 아니지요. 누구의 찌꺼기가 아니라니까요. 누가 열심히 하는 그 결과물이 아니고 오히려 그걸 극대히 저지하는 거예요. 

내가 참한 인생은 내 손에서 일궈보리라. 인생 조심스럽게 살아서. 이게 바로 우리가 평소에 내뱉는 악마의 고백입니다. 내 속에 악마 있다! 자랑질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 악마, 귀신 열댓마리 있구나! 그래. 

악마가 바로 그런 소리한다는 자체가 뭘 방해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모든 십자가를 방해하는 겁니다. 아직도 나는 내 세계 속에서 살고 있구나! 하지만 그 세계는 죽음으로 끌려가는 세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악마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복음을 안다, 들었다 하면서도 다시 자기 세계를 고집하는 우리의 모습, 연출, 찌꺼기가 아니고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그 재미. 이미 익숙해진 새롭지 않은 권태로운 그런 인생살이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십자가 앞에서 저주받을 일인 것을 그 하나님의 지적을 이제는 내 안에 담을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안양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기계다 190413 이근호  (0) 2019.05.15
봉사 190308 이근호  (0) 2019.04.02
너빠져 181214 이근호  (0) 2019.01.09
관통 181109 이근호  (0) 2018.11.27
마귀대적 181012 이근호  (0) 2018.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