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90111a야4장15절(연출)-이 근호
야고보서4장15절부터 하겠습니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그렇게 되어있지요. 15절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주의 뜻이 뭐보다 우선되느냐 하면 나의 행함보다 우선된다는 겁니다.
“주여, 내가 이걸 행했고 주님 앞에 옳았느냐, 그렀느냐 내가 필요한 재료를 내 쪽에서 제공합니다.” 하는 것은 건방진 생각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뭘 하고 심사는 주님이 하신다는 것은 그런 것은 이 세상에 애초부터 없던 사항이 되는 겁니다. 인간 자체를 출발점을 인간 존재로부터 출발하는 것을 아예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니가 내 뜻을 벗어나서 존재하는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이걸 분명히 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뜻이라는 게 너무 포괄적이고 모호하지요. 주의 뜻이라는 게. 지 멋대로 하고 주의 뜻대로 한다. 하면 안 되잖아요. 그러면 주의 뜻이 뭐냐, 앞에 죽 면 바로 10, 11절에 나오지요. 거기에 누가 입법자냐, 라고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유일한 입법자로 간주합니다. 법을 만들 때 누구하고 의논 안했다? 인간하고는 의논을 안 한 거예요. 법을 만들 때.
그럼 법을 만들 때 인간하고 의논 안 했다. 이걸 쉽게 말하면 선악과 따먹지 말라. 는 그 엄명. 그 지시를 사람하고 의논해서 좋은 게 좋다고 만들어낸 법이 아니에요. 이건 너무나 일방적입니다. 일방적으로 니가 따먹지 말라. 그리고 니가 따먹는 날에는 일방적으로 너는 죽게 되리라. 이게 주의 뜻입니다. 이미 주의 뜻 안에 무슨 요소가 들어 있느냐 하면 내가 만들었기 때문에 내가 없앨 수 있다는 요소를 품은 채 주의 뜻이 나타나요.
자, 주의 뜻은 한 자로 하면 ‘법’이 되겠지요. 두 자로 하면 뭐가 돼요? ‘율법’이 되겠지요. 율법 안에서 무엇을 발견해야 하느냐 하면 우리의 부재, 부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음. 우리가 없음. 우리의 없음을 우리가 발견해야 된다 말이죠. 우리가 없음을. 주의 율법 안에는 우리의 없음을 전제로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없어야 되는데 있잖아요. 그건 주의 뜻에 의해서 우리가 출몰한 겁니다. 이 땅에.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하잖아요. 그게 우리 자신이 스스로 자기 영광을 받기 위해서 내가 여기 존재하는 걸 과시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게 아니고 부재해야 되는데 불구하고 이 땅에 니가 태어난 것은, 정자와 난자 사이에서 수억 분의 비율을 뚫고 태어난 것은 선재한다는 것은 선재라는 것은 먼저 계신 거죠. 주의 뜻이 선제하고 있음을 우리를 통해서 증명하고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가 부재 없는 데서, 부재한 데서, 부재에서, 존재가 되는 거예요. 있음이 되는 거예요. 없음에서 있음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있음에서 출발하면 안돼요. 모든 잘못과 오인이 뭐냐 과오가 여기 있는 내가 어떻게 하면 더 있게 됩니까, 그것이 잘못이에요. 우리의 자리는 어느 자리냐 하면 내가 있음이 우리의 자리가 아니고 우리가 없음의 자리로 들어가야 우리의 없음을 포함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의 성취. 뜻이 드러남의 목적이 이루어지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제가 이렇게 법이 우선이고 인간은 그 안에서 부재된 존재라는 것을 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준다. 라고 이야기하지요. “그러면 인간은 왜 있습니까?” 인간은 왜 있습니까, 라고 묻지 말고 질문을 이렇게 해야 돼요. “선악과 법은 왜 만들었습니까?” 이렇게 질문이 내가 여기 있습니까? 없습니까? 라는 그 질문을 나의 의미로 둬서는 안 되고, “나보다 먼저 있는 율법은 왜 있습니까? 주님은 왜 있습니까?” “하나님은 왜 그런 말씀을 줬습니까?” 질문 자체가 내 쪽에서 이탈해야 돼요. 나는 부재의 존재니까.
질문 자체가 뭐가 포함되었는가 하면 나는 없어도 되는데 왜 있지? 라는 투로 질문이 되어야 돼요. ‘나는 없어도 되는데 왜 있지?’ 여러분 자식들이 있을 때 자식이 얼마나 잘되느냐 묻지 말고 저 자식은 없어야 되는데 왜 나한테 애 둘이나 생기지? 왜 셋이나 있지? 그렇게 되어야 된다 말이죠. 질문 자체가.
질문 자체가 내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하고 질문하니까 뭐라고 답변해야 돼요. 주의 뜻이 우리의 구원하는 게 없습니다. 없는 존재가 무슨 구원을 받아요. 없는 존재가.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은 내가 있다고 치고, 그게 법에 이탈된 거예요. 법과 안 맞는 상태에서 내가 있다고 치고, 있는 내가 죽어서 좋은 나라 가겠습니까? 못가겠습니까? 를 점쟁이한테 묻듯이 목사한테 묻는 거예요. 내가 있다고 치고.
그럼 내가 없으면 주의 율법은 나의 부재와 연결이 되는데 내가 있어버리면 이건 주의 뜻에 대한 그 자체에 대한 반격이고 공격이 돼요. 내가 있는 것이 우선이 되어버리면 상대적으로 누가 밀치게 되느냐 하면 주의 법이 밀침을 당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유대인에게 밀침을 당한 겁니다.
예수님이 누구한테 죽었다? 성경에서 보면 유대사회에서 죽임을 당했거든요. 유대사회는요, 그 사람들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산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 사람들은 자신의 해방과 자기 민족의 해방과 구원을 열망했던 사람들이에요. 메시아를 간절히 고대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 보여준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면 메시아의 십자가의 죽음이거든요. 이건 뭐냐 하면 너희들이 열망하고 그 기대하는 너희 자체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대단히 수치스럽다는 겁니다. 그들이 고대했던 그 해방이 수치스럽고 그들이 하늘나라 이루겠다는 그 고상하기 짝이 없는 그들 보기에 대단하게 거룩하다고 자부하는 그것이 주님보시기에는 꼴사나운 겁니다. 지 주제도 모르는 채 뭘 해방을 원하고 로마에서의 해방, 죄에서의 구원을 원하느냐 이 말입니다.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시작을 해보는 거예요. 무턱대고.
하나님의 법이 우선이고 법의 법다움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여기에 없는 존재가 있게 되었다면 항상 그것을 인정한다면 나의 우선이 아니고 주님의 뜻, 율법의 우선권을 넘겨야 돼요. 그것을 15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도 하리라. 주의 뜻이면. 그러니까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산다는 말은 우리가 항상 죽을 수 있는 대상자로 주께서 우리를 주시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없어도 되는 존재야! 라는 것은 각인시키면서 주의 뜻은 주의 뜻대로 드러나는 거예요. 내가 있어서 내가 주의 뜻을 어떻게 행합니까? 묻지 말고 주의 뜻이 우선 있고, 그 뜻에 맞추어서 너는 행동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라고 언급하는 거예요.
그 행동하는 게 13절에 나오지요.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장사한다는 걸 좀 실감나게 하기 위해서 치킨 집 한다. 이렇게 봅시다. 우리가 어느 도시에 가서 어느 골목 식당에 가가지고 치킨 집 또는 피자집을 해서 할 때는 이유가 있지요. 장사해서 그 다음에 뭐를 보리라 했습니까? 장사할 때는 이득을 보리라. 이렇게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장사해서 이익을 보겠다는 것이 주의 뜻이냐, 이게 주의 뜻이 아닙니다.
뭐가 주의 뜻이냐 하면 장사를 하던 공직에 있던 상관없이 어느 도시에 가던 내가 이 도시에 안 나타나도 되는데 또는 내가 이 장사를 꼭 할 필요 없는데, 이익을 보면 이건 내가 꼭 장사해서 남을 필요가 없는데. 이게 유지되어야 되고 견지되어야 돼요. 왜? I am nothing. 나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내가 부재가 된다는 말은 내가 없다는 말이거든요. 내가 없어지면 없어질 게 덩달아 많이 생겨요. 뭐냐 하면 나의 기대와 나의 희망, 나의 목표도 같이 없어져야 마땅한 겁니다. 모든 인생의 고민과 화근은 뭐냐 하면 목표가 있고, 희망이 있고, 기대 하는 게 있기 때문에 그렇고 그 기대는 내가 계속해서 나는 무조건 이유도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살아남아야 된다는 것이 그게 기반이 되어있기 때문에 기대와 희망을 스스로 접지를 못해요. 포기를 못하는 겁니다.
그래놓고 말하기를 주의 뜻대로 살면 내 소원대로 들어주실 겁니까? 이리 나오는 거예요. 지금 주객이 바뀌었다는 걸 감 잡습니까? 이 성경하고 지금 다르지요.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그렇게 말하고 말씀을 이야기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그걸 여러분들이 고개 끄덕이고 받아들이지만, 많은 사람은 도망쳐버려요. 안양 공부했던 많은 사람들이 고개 끄덕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도망쳐버려요.
자, 제가 궁금한 것은 도망쳐서 어디로 가느냐 하는 겁니다. 그들이 말씀을 피해서 어디로 도피했느냐 하는 겁니다. 그 도피하는 장소가 어디냐 하는 거예요. 추적해보자 말이에요. 그들이 가있는 곳에. 거기에는 뭐가 없어요? 주의 뜻이 없어요. 나의 뜻만 있는 곳이에요. 인간은 아무리 복음을 들어도 주저 없이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그 요인이 뭐냐, 그것은 그것조차도 주의 뜻입니다.
그것 따라서 율법이 율법 되게 하기 위해서 조성된 상황입니다. 그 세계가 무슨 세계냐 하면 바로 나의 세계에요. 마이 월드지요. 나의 세계. 인간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구성되어있는 자기만의 세계를 자기만의 동굴을 따로 만들어놨어요. 그게 자기 안식처고 도피처에요.
거기서 빼꼼히 얼굴을 내다봅니다. 내다볼 때에 본인이 내다보는 게 아니고 자기가 속해있는 자기 세계의 원리 원칙, 질, 또는 성질, 질서, 여러 가지 이야기하는데 이 세계의 원리를 보여주는 대변자로서 빼꼼히 얼굴을 내밉니다. 나는 지금까지 내게 속한 세계는 이것이 옳다고 우기고 그것이 내 몸에 완전히 스며든 내 세계를 소개하는 대표자로서 빼꼼히 얼굴을 들이내면서 뭐냐 하면 이 성경 말씀과 잠시 접촉을 한 거예요.
지금 내가 살아온 내 원리와 성경에서 말하는 원리가 일치점이 있는가를 간을 본 겁니다. 간을 보다가 평소에 내가 속한 원리하고 틀리잖아요. 안 맞잖아요. 후딱 자기 세계로 되돌아와 버려요. 자기 세계로.
그리고 문 닫아 걸고 그 다음에 문 닫아 걸면 혹시 바람이 불면 그 틈새 사이로 바람 들어오잖아요. 그래서 뭘 하느냐 하면 문풍지를 발라요. 일체 바람이 못 들어오게 문지풍로 막아버려요. 이게 캐슬이에요. 이게 성이에요. 이게 하나의 성이라니까요.
이 성에는 주의 뜻이 있는 세계가 아니에요. 이것은 내 살고자 하는 것들만 진리로 채택이 되는 그것만 통용이 되고 그것만 허용이 되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하나님이 하시느냐, 그것조차도 주의 뜻이에요. 왜냐 하면 율법은 엄격하기 때문에 율법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어요. 율법은 무슨 기능이 있느냐 하면 무서운 기능이 있어요. 심판기능이 있어요.
율법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뜻입니다. 주의 뜻입니다. 주님의 뜻에는 심판기능이 있습니다. 굉장히 무서워요. 왜 복음을 듣다가 도망치느냐 복음이 무섭기 때문에 그래요. 무섭다는 말은 누가 존재한다는 말입니까? 내가 살려고 하면서 존재한다는 뜻이에요. 무섭기 때문에 도망치지 말고, 무섭기 때문에 나오면 되거든요. 주께서 알아서 없애주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그런데 안 없어지려고 하는 거예요.
그럼 왜 무서우냐, 없어질까 봐 무서워요. 사람이 언제 불편하냐 하면 자기가 좋아했던 사람이 장례식장에 관 속에 누워있을 때, 자기가 아주 좋아하고 귀하게 여기고 더 사귀고 싶고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죽어서 더 이상 이름을 불러도 대답이 없을 때, 굉장히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런데 제가 문제 낼게요. 관 속에 있는 사람이 불편합니까? 아니면 그 살아있는 사람이 불편해요? 살아있는 사람이 불편해요. 관 속에 있는 사람이 웁니까? 살아있는 사람이 웁니까? 살아있는 사람이 울지요. 살아있는 사람이 우는 거예요. 그동안 내 세계를 아름답게 꾸몄던 요소가 사라지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이 점점 나이가 들어가게 되면 주위에서 하나, 둘이 실종해요. 어디로 가요. 전에는 친구 만나러 가면 아파트에 딩동~ 누르고 들어가면 만날 수가 있어요. 우리 동창생 중에 죽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거든요. 그러면 만약에 그 친구가 죽었다면 그 사람 아파트가면 그 사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러면 그 사람이 살던 아파트는 임시 거처지요. 임시거처에요. 아파트에 산다고 그 지점이 최종지점이 아니라고요.
그러면 그 사람들은 어디로 끌려간 겁니까? 누가 끌고 간 거고 어디로 끌려간 겁니까? 그 사람은 결국은 죽음이 인간을 끌고 가고 있는 거죠. 15절 다시 봅시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어늘 니가 허탄한 자랑을 하고, 그 다음에 14절을 보면,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라고 했지요.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 아닙니까. 하나님의 뜻이다 말이죠. 하나님의 율법이잖아요. 너희 생명이 자체가 말씀이니까. 말씀이 우리보고 니 생명이 무엇이냐 묻는 것은 우리보고 정답 대라고 묻는 게 아니고 너희들은 내 생명 앞에 ‘내’라는 말을 생명 앞에 붙일 가치도 없다. 이 말에요.
내 생명 같으면 내가 관리자가 돼요. 그런데 니 생명이 무엇이뇨, 하는 것은 이미 그 안에 뭐가 포함된다? 해답이 포함돼있어요. 니는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니 생명도 없는 거고요. 필요에 따라서 생명을 주신 거예요. 따라서 다 떨어지면 주께서 어디로 납치해 가는 거예요. 어디로 가겠어요? 인간이. 나이 들면 하나, 둘 친구도 없어지잖아요. “집사님! 좀 나이 들어 없어진 사람이 더러 있지요?” 없어요. 다들 건강해가지고. 다들 테니스 치니까 건강하겠지요. 친척가운데 돌아가신 분 안 계십니까. 친척이 살아있어 줘야 인간은 자기의 과거가 생생하게 살아있어요.
그런데 어릴 때는 친척들에게 둘러싸인 그게 나의 세계가 일가친척들에 둘러싸인 세계거든요. 그런데 친척들이 나이 많아서 떠나 버리면 인간은 그 사람이 그냥 죽는 게 아니고 나의 과거도 같이 허물어져버려요. 나와 같이 놀던 어떤 어린이놀이터 같은 거. 어린이놀이터에서 동네 친구와 놀았는데 그 애가 얼마 전에 갑자기 암 걸려서 죽었다 하면 암 걸리고 난 뒤에 죽은 소식 듣고 옛날 놀던 놀이터에 한 번 가보세요. 뭔가 허전함을 느끼지요. 미끄럼틀 같이 탔던 그 친구 없어질 때에.
나의 세계 하나가 뻥 뚫린 거예요. 나의 세계 하나이 스폰지처럼 숭숭 구멍 뚫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허물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박정희대통령 살해당해 죽었을 때 우리나라 이천만명이 조문했다는 거예요. 저는 조문 안했습니다마는. 왜 그렇게 조문하고 슬퍼했습니까?
그것은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자기 인생을 자기 월드를 구성했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가 자기답게 내 인생을 내 인생답게, 보람 있게, 의미 있게, 제공했던 그 분이 내 인생에서 빠져버렸으니까 나의 의미 한 쪽이 확 뭉개져버린 거예요. 허파가 두 개인데 허파 하나가 날아간 셈이 된다 말이에요.
그 연로하신 부부가 같이 살다가 사흘 동안 죽어라 싸우다가 그래도 80 넘어서 누구 하나 죽어보세요. 왜냐하면 신성일이 있어줘야 엄앵란의 본인 세계가 맞춤 맞게 구성이 되어있어요. 그런데 한 쪽이 허물어져버리면 그 반 이상을 자기 인생에서 자기가 스스로 잘라내야 돼요. 그러면 자기의 추억과 과거가 다 날아가 버린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무리 현실적으로 날아가도 추억은 생생하게 그대로 있거든요. 그 괴리 어떻게 할 거예요. 그 허무함을 뭘로 메꿀 겁니까? 처음에는 자식들이 와서 “어머님, 식사하셨습니까?” 들여다보지요. 자식들은 지 인생 없습니까. 나중에 엄마가 미안해서 얘야, 이제 그만 와도 된다. 나 혼자 견딜게. 집에 강아지 세 마리 있잖아. 이름을 신성일로 지을 게. 이런 식으로. 버틸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게 오래 못가요.
결국 우울증 걸려서, 우울증 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아는 나와 현실에서 나한테 요구하는 나 사이에 알력이 생겼기 때문에 그래요. 현실과 내가 일치가 될 때 사람은 자아구성이 되면서 만족을 하게 되어있거든요. 참, 사람이라는 게 이상해요. 개는 그저 사료만 줘도 돼요. 일단은 짐승은 사료만 주면 돼요. 코끼리 자기 인생 그런 책은 없잖아요.
인간은 밥만 주고 사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밥보다 더 괴로운 것은 뭐냐, 인간의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 뭐냐, 외로움이에요. 외로움. 외로운 거예요. 혼자서는 못 살겠다는 겁니다. 혼자서는. 외국에 오래 살다 공관에 있다든지 대사관에 근무해서 오래 살다가 자식들 영어 미리 배워서 좋겠네. 자연적으로 배워서 좋겠네. 칭찬하지만 그 한국 얼굴 해가지고 외국에 이렇게 돌아다니다가 뒤늦게 퇴직해가지고 한국에 돌아와 보세요. 쌓아온 스펙이 없어요. 친구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고 어떤 단체나 조직에 배드민턴 동호회에 가고 싶어도 처음부터 회비 새로 내야 돼요.
회비 새로 낸다고 받아주는 게 아니거든요. 계속 경계해요. 심지어 성경공부도 마찬가지고요. 신참, 고참 있잖아요. 자꾸 경계하는 거예요. 자꾸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서 굉장히 노력을 해도 이게 노력해도 외로움은 해소가 안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의 외로움이 나의 외로움이기 때문에 그래요. 나의 외로움. 상대는 그다지 아쉽지 않아요. 상대는 나의 괴로움 때문에 상처받지 않습니다. 나 혼자 상처받는 거예요.
이럴 때는 어떻게 하느냐, 나 자신을 수정해야 되거든요. 나 자신을. 저 사람이 내 사람 되려고 하지 말고, 내가 저 사람의 사람이 되어야 되는데 그렇게 하려면 지금껏 살아왔던 자기 위주의 그 원칙이 이거 전부 다 바꿔야 돼요. 자기 위주의 원칙을. 그럼 자존심 박탈당하지요. 이것은 아이고 안 되지요.
자, 그럼 인간의 외로움이 왜 있느냐, 외로움이 있는 이유는 벌써 강의 어려워지는데 여러분 참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외로움이냐, 이게 없기 때문에 그래요. 대화 상대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대화 상대. 대화가 뭐냐, 언어를 주고받는 거잖아요. 언어를.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사랑을 해야 되는데 사랑이라 하는 것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고 뭘 해야 되느냐 하면 끊임없이 대화해야 돼요. 끊임없이. 끊임없이 대화하는 것.
말을 해야 돼요. 말을 할 때 언어 속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언어 속에는 원칙이 포함되어있어요. 이걸 법이라 하거든요. 법. 이 법에는 기본적으로 다치지 않으면 핵심이 있어요. 뭐냐 하면 나는 존재한다. 나는 잘되어야 된다. 이것을 담고 다른 친구들하고 누구하고도 이야기해요. 부부간 이야기해요. 절대로 나는 다쳐서는 안 된다. 내가 아파해서는 안 된다.
이유가 뭐냐, 이 법이 나를 위한 법이기 때문에. 내 잘되기 위한 법이기 때문에. 그러면 이 대화 상대에서의 이쪽의 상대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상대라 해야 되고, 저건 타인이죠. 타인. 남이 되겠지요. 그러면 지금 나의 세계의 원리가 뭐냐 하면 나는 무조건 잘 되어야 되고, 존재해야 된다는 원리지요.
그 원리 가운데 외로움을 덜기 위해서 누굴 상대한다? 타인을 상대하지요. 그 타인을 상대하는 식으로 누굴 상대하느냐 하면 하나님을 새삼스럽게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하고 교회에 나가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교회에 나와서 친구도 많고 대화 상대도 많고 그리고 또 교회에 나가면 추상적으로 하나님이 계시다고 느껴지기 때문에.
그런데 뭐는 지금 안 바뀌었어요? 나는 내 존재 위주는 안 바뀌었지요. 존재 위주도 안 바뀌면서 하나님을 상대했기 때문에 여기에 법이 동원될 때는 뭐냐 이 법 속에는 나는 다치면 안 된다는 원칙을 철칙같이 하면서 법을 하겠지요. 그러면 성경 모든 말씀을 이 법에다가 담는 거예요. 흉내 내기 하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 제가 야고보서4장이나 성경을 통해서 복음을 이야기해버리면 나는 안 다치려고 왔는데 복음의 이야기는 뭐냐 하면 어? 주님 본인의 뜻을 하나님의 뜻을 철회할 생각이 전혀 없는 거예요. 나는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왔는데. 하나님은 아예 니가 존재한 적도 없는 부재의 원래의 자리로 우리를 끌고 가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안 끌려가지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됩니까? 내 것 지키기 위해서 어떻게 합니까?
복음이 들어오지 않도록 문을 닫아걸고 문풍지를 발라버려야 돼요. 그래야 그나마도 나를 지킬 수가 있기 때문에. 그러면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모든 인간이 이러니까 천국 갈사람 아무도 없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법은 뭐냐 하면, 강력한 두려움과 무서움을 제공해 버려요. 그게 야고보서에 나옵니다마는, 심판에 관한 문제에요. 지옥 불에 관한 문제. 저주에 관한 문제.
율법이 주어진 것은 우리를 저주하게 함이라. 그런 것도 있고 여기에 야고보서 같은 경우에는 야고보서2장9절, 10절 봅시다.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율법이 너희로 뭐로 만든다? 범죄자로 만든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든 범한 자가 되나니. 그러니 율법은 우리를 뭐로 아예 기정사실화 시킨다? 뭐로 봅니까? 범죄자로 규정시키지요.
그러니 우리가 인간이 아니고 죄를 품고 있는 존재로 보는 거예요. 인간이 아니고. 우리가 인간이라면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안 지을 수도 있잖아요. 그렇게 보는 게 아니고 우리를 죄가 주가 돼요. 죄를 담는 그릇으로 보는 거예요. 죄가 있는 곳에 반드시 형벌과 심판과 저주가 마땅히 따라 오는 거죠.
성경은 그렇게 본다고요. 여기 2장 8절에 보면, 니가 이웃 사랑을 내 몸 같이 하라. 했잖아요. 요건 이웃 사랑에게만 해당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9절에 넘어가면, 10절에 보면, 이웃 사랑뿐만 아니고 어떤 율법도 어기면 뭘 했더라도 다 어긴 게 된다 말이죠. 이 말은 뭐냐 하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보고 새삼스럽게 잘해봐라, 도닥거려주고 격려를 해주는 게 아니고 율법의 우선됨을 너를 통해서 증명해내겠다는 거예요.
율법이 너보다 처벌이 우선됨을. 그리고 너는 처벌되어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왜? 율법에 의하면 완전하게 지킨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이건 극한의 두려움이죠. 극한의 두려움이 오는 방법으로 구원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극한의 두려움이 있다면 세상 사람이 두렵지를 않아요. 특히 자기가 망가진 것에 대해서 자기가 공포를 느끼지를 않습니다.
그전까지는 무엇이 공포냐 하면 내가 망가지고 내가 실패자가 되고 우리 집에 부도나고 내가 이혼하고 우리 집에 불이 나고 지금 가스 불 켰는지 껐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불로 폭발해버리고 지 집 말고 남의 집까지 다 물어주고. 하여튼 그런 모든 내가 아는 상황이 겁나고 두렵다는 것은 내가 나답게 유지하기 위해서 자체 내에 자기에 대한 어떤 방어체제가 가동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동안.
무조건 나는 지켜줘야 돼요. 이건 복음이 아니고 우하나님이고, 최하나님이고 간에 어떤 하나님이라도 내 것 다치면 나는 용서 안 되겠다는 그 품성으로 버티고 왔다 이 말이죠. 쉽게 말해서 사람은 실적을 원하는 거예요. 하나님 믿고 완전히 실적을 원하는 겁니다. 실적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내가 실적을 잡을 때까지 나는 안 죽어야 돼요.
존재해야 돼요. 그런데 그 존재가 우리는 나의 존재로 보잖아요. 하나님의 야고보서는 죄의 존재로 보는 겁니다. 죄가 펄펄 살아있구나! 니는 산낙지고, 활어다. 물고기가 펄떡 뛰는 게 아니고 그 안에 죄가 에너지를 줘가지고 죄가 펄떡 뛰니까 우리 인간이 펄떡 뛰는 거예요.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저한테 동영상이 하나 있는데, 멀리 독일에서 보낸 동영상이에요. 어떤 아버지 가장이 크리스마스를 맞이해서 자기 딸과 가까운 가족들, 아이를 위해서 산타크로스 복장을 해가지고 목소리도 변장해 가지고 “산타크로스 할아버지 왔어요~~” 하는 겁니다. 보여주는 게 실감나요. 나도 잘 모르겠어요. 산타크로스 할아버지 연출을 어떻게 했는지. 소리만 들으세요. 이 목소리.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복창하는 거예요.
애들에게 선물 나눠줍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갑자기 크리스마스를 뭐했어요? 연출한 거예요. 그걸 보면서 느낀 점이 우리 자신은 매일같이 하루, 하루 일과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늘 자기 자신을 연출했어요. ‘요게 가치 있는 내 모습이지. 아니면 요걸 잠깐 바꿔 봐! 이럴 땐 나는 살만한 보람이 있지.’ 매일같이 연출해요. 오늘 집사님 옷 연출했습니까? 늘 연출하거든요.
아가서에서 특이한 점이 뭐냐 하면 옷에 대해서 그다지 말이 없다는 거예요. 아가서에서. 그냥 벗은 몸이에요. 하나님은 인간에게 인간의 연출에 속아 넘어가지 않겠다는 거예요. 오히려 솔로몬의 입은 옷이 들풀보다 더 못하다. 이리 되어있어요.
아가서의 특징은 유일하게 성경에서 비교급이 많이 나와요. 뭐보다 낫다. 어떤 향기보다 더 진하다. 이리 되어있어요. 마태복음5장에서 예수님이 산상설교에서 뭡니까. 그 들꽃을 볼 때에 감히 비교가 안 되는 걸 비교하는 사람들이 가장 와~ 하고 놀랄만한 것 가지고 들풀과 아주 시시한 들풀과 대조를 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지요. 그게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들어있는 아가서적 요소에요.
아가서가 지혜거든요. 지혜요소를 담아서 산상설교가 된 겁니다. 여러분한테는 특별히 미리 말씀드립니다. 뭐보다 낫다는 거예요. 뭐보다. 오늘 강의대로 하면 ‘주의 뜻이 나의 뜻보다 낫다.’가 되는 거예요. 우리는 그걸 나에 대한 모독으로 평생을 내가 날 연출한 연출의 공로를 모독한 걸로 간주하는 거예요.
도피처로 도망갑니다. 어디로? 아파트로 가버려요. 그러나 아파트가 최종지점이 아니에요. 어디로 갑니까? 죽으러 가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뭘 알아야 돼요? 우리 집 아파트를 어떻게 꾸밀 것이 아니라 내가 영원히 기거할 그 죽음의 세계가 어떤 세계냐를 그걸 먼저 생각해야 되지요. 그 세계는 율법의 세계입니다. 심판의 세계고, 저주의 세계입니다.
다시 하면 율법 하나라도 어기면 사정 봐주지 않는 세계. 그것으로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 하나, 둘이 실종당하고 있어요. 그 사람들 어디 갔지? 어제 새벽에 우리 동서형님 돌아가셨어요. 제 아내 언니의 남편이 돌아가셨어요. 우리 처형님은 간호한다고 죽을 뻔했어요.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 간호한다고. 손님은 오지요. 간호한다고. 이틀 잠시 호스피스병동에 넣고 잠시 이틀 동안 못 잔 잠을 자고 오니까 돌아가셨어요. 이제는 약간 건강이 회복되고 장례식을 치루면 됩니다. 내일 발인예배해요. 내일 아침에 참석할 거예요. 그 형님하고 내가 바둑 두고 했는데. 그 바둑 둔 형님 어디 갔지요?
김춘추의 시에 그런 게 있다고 했잖아요. 평생을 해로했던 아내가 죽고 난 뒤에 부엌 쪽을 보는데 고등어 굽기 위해서 왔다 갔다 해야 되는데 고등어 굽는 당신 어디 갔느냐. 이러다가 우울증 걸려서 혼자 죽었어요. 얼마 못 살고.
누가 우선 되는 거예요? 내가 내 아내와 더불어서 행복하게 사는 게 절대로 그런 것을 주께서 용납한 적이 없습니다. 이건 우리가 연출한 거예요. 뭘 모방해서? 우리가 사는 육의 서로가 서로를 흉내 내고 모방해서 조작한 거예요. 연출한 거예요. 그런 연출로 우리는 스스로 위로 받았어요. 왜? 그게 우리의 법이기 때문에.
우리가 만든 법은 나를 위로하는 용도로 주어진 거예요. 나를 위한 용도로. 나의 가치로 출발하는 고 나의 세계가 누가 뭐래도 이건 옳고 정당함을 억지로 그걸 내비추기 위해서 매일같이 자기 자신을 그렇다. 그렇다. 하면서 억지를 부리면서 연출한 것을 가지고 뭐냐, 내 인생이에요. 그게 내 인생입니다.
그 인생 어떤 인생인지 야고보서4장 봅시다. 13절에,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또 연출하고 있어요. 치킨 집을 해서 이익을 보리라. 또 연출하고 있다고요. 이거 돈 벌면 나만 좋은 게 아니고 가족들 좋은 집 이사해가지고 빚 걱정 안하고 살겠다. 이런 연출을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이런 연출을.
그걸 뭐라고 하면, “이게 내 몸인데. 내 몸!” 이리 하거든요. “내 인생은 이렇게 살래. 간섭하지 마! 나는 이렇게 사는 것 밖에 몰라. 그러니까 좀 내버려 둬. 내가 어떻게 살던 간섭하지 마!” 이리 나오거든요. 그런데 간섭은 안 하는데, 14절 봅시다. 너희 일을 너희가 알지를 못하지요.
내일 너희가 죽어버리면 그렇게 연출한 게 뭡니까? 무엇에 끌려가기 위한 연출이다? 그것도 죽음으로 끌려가기 위한 연출인데 그 죽음이 그 죽고 난 뒤에 질이 복 받는 생명입니까? 저주받는 목숨이에요? 저주 받기 위해서 주께서 한시적으로 허락한 꿈을 꾸게 한 거예요. 장사해서 이득을 봤다.
그 비슷한 이야기가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데 한 번 찾아볼까요. 누가복음12장 19절, 20절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여기에 보면 ‘어리석은 자’라고 되어있지요. 어리석은 자.
이 대목은 안양공부하면서 내가 아마 수십 번 이야기한 것 같아요. 수십 번 이야기한 거예요. 그 땐 연출이라는 말은 안 했는데 누가복음12장 말씀 있잖아요. 19절, 20절. 이 말씀을 가지고 내가 연출하는 연출에다가 이걸 대사로 집어넣겠습니까? 안 집어넣겠습니까? 확 빼버리죠. 확 빼버립니다. 집에 가훈을 할 때, 가훈에 이게 들어가겠습니까? 안 들어가겠습니까? 확 빼버리죠. 그게 우리가 바로 유대사회에요.
우리가 예수님 십자가 못 박은 사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자신의 연출 아주 저주스럽고 죽기 전부터 우리 니 자신을 알아요. 죽을 때가서 내가 이런 인간인가, 그걸 그 때가서 아는 게 아니고 이미 알아요. 이미 우리가 내가 얼마나 쓰잘데기 없는 짓거리를 하고 있는지를 미리 알려주는 거예요. 그게 복음입니다.
그러니까 그 복음이 듣기 싫어서 피하잖아요. 그런데 구원받는 사람은 거기에 피하는 것이 아니고 그 두려움에 스스로 그 두려움이 자기 안에 바깥의 두려움이 아니고 자기 안에 그 두려움이 오기를 기대할 때 그 사람은 존재가 아니고 부재의 상태가 되는 겁니다.
나는 없다고 치고 이 안에 율법이 주는 그 무서운 징벌을 내 안에 가득 담겠습니다. 가득 담아내겠습니다. 제가. 그게 제 존재의 이유입니다. 내 뜻이 아니고 주의 일관된 뜻. 한결같은 뜻이 저주와 심판과 지옥 불의 뜻이 그대로 우리 속에 담기기를 원합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움직이는 말씀이 되는 거예요. 움직이는 야고보서4장이 되는 거죠.
이 말을 지키는 게 아니에요. 지키는 게 아니고 선제하고 있는 율법이 나중에는 우리를 제대로 이렇게 아구가 맞는 거예요. 이게 인간이 존재해야 될 원칙입니다. 이미 내가 부재의 상태기 때문에 나한테 이익이다. 손실이다. 말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말씀만 담겨있다면 그걸로 새롭게 달라진 그 말씀이 담긴 거기다가 후차적으로 그게 바로 나야! 라고 갖다 붙이면 되거든요.
주의 말씀이 담긴 그게 바로 나의 존재 이유라는 거예요. 필요했기에 나를 사용한다는 그 자체를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돼요. 그러니까 이건 내 뜻은 밀리던 완전히 찌그러져버리고 밀고 쳐들어 온 주의 뜻이 내 뜻을 몽땅 다 강탈해 나갔을 때, 삼켜버렸을 때, 그것이 바로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피하다, 피하다, 피하지 말고 받아들이면 돼요. 피하지 말고. 자꾸 피하면 또 동굴 파요. 동굴 파고 도망치고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기 위주의 신화요, 자기 위주의 영웅담입니다. 연출이 심해지면 자기 위주의 신화가 돼요. 현대의 신화, 삼성의 신화하잖아요. 그들의 신화만 있나요. 우리 자신은 신화를 안 갖고 있습니까? 옛날에 이렇게 잘 나갔었다. 이런 신화 없어요? 있잖아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사막을 헤매고 있었더니만 사막에 힘들고 헤매었을 때 어떤 동굴에 가니까 거기에 현자. 현명한 사람 세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람이 나에게 물과 떡을 먹이고 기력을 회복하라고 하면서 갑자기 그 사람이 나한테 절을 하면서 하는 말이 “당신은 우리가 기다렸던 사람이었습니다. 무려300년 기다렸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동화책에 나오지요.
우리는 그럴 때 뭐를 느낍니까? ‘그렇지. 내 뜻은 내 뜻이 아니고 주의 뜻이었어.’ 이렇게 느끼겠지요. 오늘의 내가 있기 위해서 이렇게 하나님은 그렇게 소쩍새는 울었고, 국화꽃은 그렇게 서리에도 피었구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그렇게 힘든 겨울을 지내왔구나! 이렇게 되면 이게 무슨 영웅담이 됩니까? 나의 존재를 극대화시킨 영웅담이 되지요. 그런 식으로 성경을 보기를 원한다 말이죠. 그런 식으로.
참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분이고, 참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이다. 그런 식으로 그동안 해석해 온 거예요. 그걸 가지고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이야기했고, 하나님의 예정이라고 지 맘대로 붙이는 거예요. 결국 남는 것은 뭐냐 하면 “내 존재는 안 죽었어. 나의 가치는 생생히 살아있다는 말이야.” 이걸 남한테 대외적으로 알리고 싶은 거예요.
그럼 오늘 본문에 보면 그렇습니까? 과연 그런 신화와 영웅담이 용납됩니까? 내가 살아있어야 돼요? 나보다 먼저 있는 주의 뜻이 살아있어야 돼요? 주의 뜻이 살아있어야 돼요. 주의 뜻은 나도 살고 주도 살고 이런 게 아니에요.
주님께서 그냥 말씀만 해버리면 나도 살고, 주님도 살아요. 그러나 십자가라는 게 뭐냐 하면 나를 아주 우습게 만들고 나를 수치스럽게 만드는 거예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난 이유가 뭡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을 생각할 때, 주님도 살리지만 먼저 누구의 가치도 유지 하겠다? 나의 가치도 훼손되지 않겠다. 이게 자기 연출 아닙니까.
내 가치를 손해 보지 않겠다가 그걸 유지하다가 기어이 주님께서는 그렇게 내 것을 유지하는 자의 마지막 고백은 결국 뭐냐, 예수 나는 당신을 안다? 모른다? 했어요. 베드로가. “나는 당신을 저주합니다. 나는 저 사람을 모릅니다.” 그런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내 위주의 모든 인생의 공통점이라는 겁니다. 내 위주로 사는 모든 인생의 공통점이에요.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천국 간다면 천국 가는 나는 어떤 존재냐 하면 우리가 이리돼요. ‘분실물’ 알지요. 기차 칸에나 버스 안에 이렇게 물건을 잃어버리면 택시에서 잃어버리면 택시 회사나, 버스회사에 전화하게 되면 그 분실물 함에다가 이렇게 있어요. 찾을 수가 있어요. 지하철에서 우산이나 휴대폰 잃어버리면 카드 잃어버리면 다 있습니다. 저도 많이 돌려준 적이 있어요. 분실물 있잖아요.
우리 자신에게서 우리 자신을 분실해야 되고, 어디서 찾아야 되느냐 하면 예수 안에서 찾아야 돼요. 그러면 평소에 우리는 누구 안에서? 내 안에서 살고 있어요. 내 세계 안에. 그러니까 복음 듣기 싫다고 도망치는 거예요. 도망칠 자리가 있다는 거예요. 자기는. 이 딴 거 안 들어도 나는 밥 먹고 잘 살고 내 행복에 대해서는 손해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람은 자연스럽게 지금까지 온대로 살게 되면 아무 탈이 없다는 거예요. 뭐가 없느냐 하면 새로움이 없지요. 니체가 그런 이야기했지요. 인간에서의 저주는 딴 게 아니고 권태라고. 할 일없이 조용히 시간 보내는 이것보다 더 지독한 지옥은 없다, 했습니다. 바쁜 젊은 사람한테는 이해 안 되지만.
하루 24시간 우에 보낼꼬. 고민하는 노인네한테는요, 고역이에요. 고역이고 복역이고, 교도소 근무하는 거하고 똑같아요. 교도소에서 목수하고 일 배워주면 시간은 갑니다마는 아무것도 안하고 독방에 있으면 차라리 사형을 시켜줬으면 좋겠어. 사형을. 사형시키는 게 낫지 그래서 사형제도 없애는 것이 그 사형보다 더 잔인한 짓이에요. 사람 치여 죽일 때는 니 죽고 나 죽겠지 하고 사람 죽였는데 세상에 얼마나 잔인한지요, 그 사람은 나의 칼에 죽었는데 나는 안 죽고 있어요. 안 죽는 것보다 더 잔인한 일이 어디 있어요. 세상에.
나는 내 죽는 걸 차마 못 죽여서 니 죽고 나 죽고 하는데 지는 멀쩡히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있으면 누굴 죽였다는 기억이 살아있을 게 아닙니까. 죄책감은 살아 있잖아요. 이게 지워집니까? 안 지워지지요. 그런데 그 교도소가면 죄책감 없어요? 아니면 살아있는 사람은 죄책감 없습니까? 다 있잖아요.
살아있는 게 고역이에요. 이거 어떻게 할 거예요. 교회 가서 예수 믿고 착한 일하고 온갖 바자회하고 온갖 착한일한다고 이게 지워집니까? 안 지워지지요. 왜냐하면 율법이라 하는 것은 내 죄책감 지워지라고 있는 게 아니거든요. 내 인생 따로 챙기라고 율법이 있는 게 아니에요.
원래 법하고 니하고 상관없다는 것. 니 위주로 법이 있는 게 아니고 법 위주로 니가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가 있는 거거든요. 그런데 자꾸 고집부리기를 나 먼저 있고 하나님은 나한테 뭘 해 줄 겁니까? 이리하니까 그 복음 안 듣겠다고 귀 막는 게 그게 지옥이고 그게 저주고 그게 고역이고 그게 고통이에요.
그리 한 번 살아보지요. 벌써 시작된 지옥생활이거든요. 우리에게는 뭐가 있느냐, 10분 휴식이 있잖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