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강의

나는 기계다 19041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5. 15. 23:08
2019-04-13 00:30:23조회 : 413         
나는 기계다 190412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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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은주 (IP:119.♡.152.148)19-05-15 16:28 
안양20190412a야5장7절(나는 기계다)-이 근호목사 

오늘은 야고보서5장5절부터 보겠습니다.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세상을 설명하는데 있어서의 야고보서는 대표자를 딱 등장시킵니다. 

대표자를 등장시켜가지고 이 땅에서 당하는 사람의 대표자. 또 이 땅에서 공격하는 자의 대표자. 그렇게 분류를 해놨어요. 5장에 보면. 1장부터 4장까지 오면서 그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람의 모델은 뭐냐 하면 4장에 나오지요. 너희 생명은 잠간 보이는 안개다. 뭔가 계획을 하려고 하지 말고 이것 저것 하려고 하지 말고 다만 주께서 힘주시는 대로 하라. 이런 식으로 되어있거든요. 4장15절 보면 그렇게 되잖아요. 

이걸 약간의 복잡한 거 같아서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순간적으로 기계가 돼요. 또는 다른 말로 하면 바보지요. 순간적으로 바보가 되는 그게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의 대표 모델이 되는 겁니다. 바보 되기 싫지요. 바보 되기 싫고 똑똑하게 살려면 5장에 하나님이 내치는 사람의 모델이 돼요. 잘나고, 똑똑하고. 순간적입니다. 순간적으로 하나님의 지시가 오게 되면 우리는 바보가 되고 너무 기분 나쁘잖아요. 그러면 바보라는 말 대신에 기계가 된다 합시다. 

무감정. 감정 없는 기계. 감정 없는 기계가 될 때에 기계의 장점이 있어요. 자기가 기계라고 느끼는 순간 뭐냐 하면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히지 않습니다. 이게 얼마나 좋은 거예요. 자기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 거예요. 만약에 내가 내 자신보고 “이 바보야!”라고 할 때는 어떤 거냐 하면 내가 나를 두 개를 상정해요. 바보같이 굴었던 나와 그 바보같이 되지 않고 아주 똑똑한 그 똑똑하기를 늘 애쓰고 있는 나. 두 개가 상정이 되어있고 똑똑 하려고 애쓰는 나가 바보 등신 같은 짓을 한 나를 굉장히 괴롭히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반복해서 자기가 자기를 못살게 구는 방식이 그런 삶이 되어버립니다. 안타깝지요. 그렇게 바보 짓했다고 자기가 자기를 꾸중하는 것은 똑똑해야 산다는 그러한 강렬한 의식이 있는데 그 똑똑해야 산다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 버림받은 사람의 모델로서 야고보서 5장이 등장합니다. 야고보서5장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는 것을 몇 번째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야고보서4장 끝에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모델을 제시한다 했지요. 그 모델은 뭐냐 하면 여기에 나와 있어요. 15절에 보면,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도 하리라 되어있어요. 주의 뜻이면 산다는 말은 ‘나는 살아남아야 똑똑해.’ 라는 생각을 접어버린 거예요. 

순간적으로 우리는 살고 안 살고가 아니라 그냥 감정이 없는 기계가 되는 순간에 기계가 산다는 게 의미가 있습니까? 기계가 살아요? 아니지요. 기계가 죽는다는 것도 의미가 없는 겁니다. 이 기계는 죽어있다. 살아있다. 하는 것은 그건 누가 일방적으로 그렇게 규정한 것이냐 하면 인간들이 그렇게 규정한 거예요. 

주의 뜻이면 코드를 꼽으면 방앗간에 기계가 있는데 코드를 꼽으면 기계가 철커덕해서 기계가 돌아가는 것처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꼭 살고 죽는 것을 마치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오늘 무슨 역할 할까, 사는 역할 할까? 오늘 오후 2시에 죽는 역할 해봐? 자기하고 아무 상관없이 그냥 단순한 하나의 기계라고 여기는 겁니다. 집에 컴퓨터가 있는데 컴퓨터 옆에다가 나 자신의 영정사진을 같이 놓던지 아니면 컴퓨터가 내 영정사진 붙인 거와 똑같은 거예요. 나는 I am computer. 누가 부팅해주면 그 다음부터는 뭔가 여러 가지 화면을 보여주고 꺼버리면 나는 그냥 잠잠해지고. 그걸 4장15절은 그렇게 이야기한 거예요. 우리 이리 살 수 없습니까? 

자, 이리 살 수 없을까요? 5장에 들어가서 이제 약간 난해한 이야기가 나오는 겁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이리 되어있지요. 형사가 범인을 잡는데 몽타쥬 비슷한 사람을 열 명을 세워놓았어요. 수사실에 열 명 모아놓고 목격자한테 지적을 하라 합니다. 니가 그 때 그 현장에 있던 범인 중에 이중에서 누구야? 지적을 하라고 하는 거예요. 실제로 나는 본 적이 없는데 영화에 보면 많이 나와요. 전부다 멍뚱하니 있고 뒤에는 키 재는 수치 같은 게 있고요. 흉악하게 생긴 사람 열 명이 있고. 여기는 유리로 되어가지고 저쪽에서는 이쪽이 안 보이는 유리 안에 들어가 가지고 누구야? 너를 괴롭힌 아저씨가 누구야? 지목하라고 하지요. 

야고보서5장이 뭐냐 하면 야고보서5장이 지목을 해요. 하나님이. 이런 자는 망한다. 라고 쭉 세워놓고 지목을 하는데 그 지목을 당하는 자가 누구냐 하면 부한 자들이에요. 지목을 당하는 자가. 범인이라고 이 세상을 잘못 인식시킨 범인으로서 주님이 딱 지적을 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부한 자들입니다. 부한 자들. 

그러면 가난한 자들은 해당이 안 되느냐, 가난한 자들도 부자 옆에서 같이 지적당할 수가 있어요. 왜냐 하면 가난하다는 것은 지금 가난한 것을 자기 자신의 의미라고 수용하지 않고 가난에서 자꾸 탈피하려고 하고, 부자가 은연중에 자기의 삶의 목표가 되고 있는 이상은 그쪽은 가난한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그 근거가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여기에 나와요. 5절에 나옵니다.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살륙의 날에 그 다음에 무슨 말이 나와요? 다 같이 해봅시다.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그러니까 가난하다고 해서 구원받고 천국 가는 게 아니에요. 비록 현재는 내가 돈이 없지만, 마음만큼은 부자 되고 싶어 하는 그것에 지향한다면 그것은 같은 계열에 속하는 겁니다. 

여기에 부한 자들아, 하는데 이게 재산세 얼마 이게 없지요. 이런 거 전혀 없어요. 부한 자들아, 하는 것은 부자 되기를 소망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의 전부. 그 사람의 전부. 얼마부터 얼마 없어요. 돈이 수백억, 수천억이 있더라도 거기에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은 이건 마음이 살찌지 않았기 때문에 부한 자 여기에 대한 범인으로 지목을 당하지 않습니다. 

야고보서4장3절에도 그런 말씀 나오지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야고보서4장3절에서 그 세상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그 세상은 뭐냐 하면 그 세상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라고 여기는 겁니다. 제가 말로 하면 상당히 난해하기 때문에 이렇게 도표 비슷한 것으로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요런 도표 같은 것은 알아놓으시면 성경이해하기에 굉장히 편리합니다. 세상에서는 둘로 되어있어요. 하나는 지옥요소도 있고, 천국요소도 있습니다. 둘 다가 있어요. 세상에서. 그냥 지옥 요소밖에 없다면 이건 세상은 끝난 거예요. 세상은 이렇다. 세상은 이래서는 안 된다. 자꾸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지시가 온다는 말은 아직 세상이 세상 안에 무슨 요소가 있다 하느냐 하면 이런 잔소리를 이해하는 자들이 아직 있다는 뜻이에요. 

부부싸움 할 때 계속 말로 부부싸움 할 때는 관계 괜찮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둘이 입 다물고 있으면 게임 끝난 거예요. 말도 섞기 싫은 거예요. 게임 끝난 거예요. 말을 한다는 것은 계속 희망과 기대를 걸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야고보서라는 이 말씀을 주신다는 것은 “있어! 있다니까! 세상이 악한 걸 내가 아는데 하지만 그 속에서도 내 백성 있단 말이야!”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내 백성이라고 야고보서1장에서는 뭐냐 하면 흩어져있는 열두지파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야고보서1장1절에서는. 지금 성경 말씀은 세상 구하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그 속에 섞여있는 자기 백성을 구하는 겁니다.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면 돼요. 푸딩위에 있는 건포도. 푸딩위에 흩어져 있는 건포도. 푸딩위에 건포도가 가끔 있잖아요. 가끔. 애들은 그것만 빼먹지만. 가끔 있다 말이죠. 

그 건포도가 포도만 있으면 맛이 없어요. 푸딩이라는 곳에 있어야 건포도의 맛이 나듯이 이 세상이 지옥이 돼줘야 돼요. 이 세상이 지옥이 돼줘야 거기에 같이 있으면서도 섞이지 않는다는 그 의미가 부각이 되는 겁니다.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잠을 자고 같이 놀러가고 같이 활동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뭔가 아무리 해도 섞이지 않는 요소. 이게 뭐냐 하면 아주 기이하죠. 

자, 섞이지 않는 요소에 대해서 야고보서4장에서는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이런 천국요소 있는 사람을 두자로 이야기했는데 뭐라고 했어요? 기계. 기계가 안 닿습니까? 그러면 등신. 바보 되는 거, 바보 등신 되는 거예요. 이 지옥요소에서는 바보, 등신 되는 것을 아주 최악의 것으로 보는 겁니다. 

왜냐하면 똑똑하고 알아야 살 수 있기 때문에. 바보 등신은 사기만 당하거든요. 사기 당하지 않으려면 많이 알아야 되고 많이 안다는 것은 우리가 어린애 같은 심정이 안 되고 갈수록 점점 더 어른이 되어야 돼요. 어른 된다는 것이 사실은 자기가 지금 실수하고 있는 겁니다. 어른은 안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어린아이를 내세우지요. 열 두 제자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을 내세우지요. 마치 열 두 제자를 책망하듯이. 

그 어른이 누굽니까? 어린 아이 아닙니까. 그 어른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어린아이는 예수님 자신으로 보면 돼요. 나는 어린애 같은데, 왜 내 제자들은 전부다 어른이 못돼서 환장했느냐 이 말입니다. 그래서 하신 말씀이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고 했어요. 주님의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보게 되면 천국 못 가는 게 왜 그리 많은지요. 여기 걸려도 천국 못가고, 여기 걸려도 천국 못가고 천국 못 가는 게 굉장히 많아요. 부자 돼도 천국 못가고, 모든 말씀을 지키지 못하면 천국 못가요. 주여, 주여 한다고 천국 가는 게 아니에요. 아버지 뜻대로 행하지 않으면 나는 모른다고 되어있거든요. 마태복음 7장에. 

그래서 여러분들이 마태복음, 마가복음 죽 보면서 이걸 한 번 골라보세요. 천국 못가는 사람의 리스트를 한 번 작성해보세요. 거기다가 모자르다 싶으면 사도바울까지 한 번 동원시켜 가지고 집어넣어보세요. 나오는 결론이 뭘까요. 옛날 율법 못지않습니다. 야~ 이거 어느 거 하나 다 걸리게 되어있어요. 

정답은 뭐냐 하면 사랑입니다. 사랑. 사랑인데 그게 고린도전서13장13절에 나오지요.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선물로 받은 사랑이라. 그냥 우리가 만든 사랑이 아니고 주고 딜해서 받은 사랑이 아니고 그냥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 사랑이에요. 

그 사랑이 사랑답기 위해서는 우리로 하여금 아까 등신 된다고 했고 우리가 바보 되고 기계 된다고 하는데 이걸 보편적 단어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나를 논하거나 평할 가치가 없다. 그리 되는 겁니다. 같은 말로 자기 역사를 쓰지 마라. 자기 역사를 쓰지 마세요. 

왜냐하면 기계라 하는 것은 기계가 스스로 자기가 작동하지를 않아요. 기계를 작동하는 것은 외부에서 작동을 시켜줘야 되거든요. 외부에서 기계를 작동시키면서 그 외부, 외부는 주님이죠. 주님이 그 역사를 친히 써 가시는 겁니다. 야고보서4장15절 다시 봅니다. 그냥 보지 마시고 지금까지 한 거 여러분이 생각하고 그걸 안다고 치고 15절 다시 봅시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그러니까 등신이 말하기를, 또는 기계가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도 하리니, 이제 훅 들어오지요. 주의 뜻이면 다시 말해서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니가 있는 게 아니고 주님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내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내가 있다, 로 발걸음이 스톱이 된 거예요. 내가 여기 혼자 있는 게 아니거든요. 달이 왜 있습니까? 해가 왜 있지요? 왜 사람의 뒤에는 눈이 없고 코가 없습니까? 왜 등짝에는 아무런 두드러진 특징이 없어요. 앞쪽에 다 있어요. 왜 그런가, 이건 사람이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거든요. 사람이 만들면 앞뒤로 다 만들어요. 사람이 만들지 않았습니다. 기본적으로 그걸 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 이상 괴롭히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괴롭힐 대상이 안돼요. 나라는 이름으로 나를 괴롭히지 마세요. 뭔가 착각을 하면 안 됩니다. 괴롭힐 때 나 자신을 어떻게 괴롭히는 줄 알아요? 똑바로 하지, 제대로 하지, 이런 식으로 괴롭힌다고요. 마치 고참 되는 시어머니가 새로 시집온 며느리 아무것도 모르니까 시어머니 값하면서 계속 잔소리하듯이. 내가 시어머니 되어가지고 나를 며느리 다루듯이 그렇게 괴롭히게 되면 그래놓고 남 탓하지 마세요. 내가 나를 괴롭혔잖아요. 

그러면 주님께서 말씀을 주시는 것은 이겁니다. 천국요소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이 천국요소는 어떠냐 하면 이게 나인데요. 여러분 자신입니다. 여러분 셀프인데, 여러분이 에고인데, 이건 내가 모르는 나에요. 내가 미처 몰랐던. 어! 나한테 이런 면이 있었어? 그건 누구 솜씨냐 하면 주님이 말씀으로 새롭게 잉태한 자. 그걸 거듭난다 하는데 새로운 아기처럼 잉태한 자가 바로 이게 야고보서에 4장 15절에 나오는 주의 뜻이면 내가 이것저것도 할 거고, 주의 뜻이면 죽기도 할 것이고, 살기도 할 것이고, 이건 죽는 것이 내 일이 아닙니다. 주여. 하는 이런 것. 이런 희한한 자아지요. 

사는 것이 내 일이 아니듯이, 죽는 것도 내가 신경 쓸 것 없잖아요. 자기 죽음에 대해서 자기가 신경을 안 쓴대요. 아~~ 정말, 신기한 자아에요. 이런 자아를 친히 주께서 야고보서4장15절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만들어주는 겁니다.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왜? 지옥이 온전한 지옥이 아니고 거기에 천국요소가 담겨있는 섞여있는 지옥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푸딩위에 건포도처럼 지옥이 먼저 선제되어야 돼요. 지옥이 먼저 전제되고 지옥은 심판받아야 마땅하지만, 다 심판받으면 안 되잖아요. 의인 열 명이 있어야 되거든요. 의인 열 명이 있어야 된다고요. 거기에 의인이 있거든요. 아브라함언약처럼. 따라서 의인은 사실은 없어요. 한 명도 없는데, 없는 의인을 주의 말씀이 와서 만들어내는 거예요. 

여러분, 미치도록 말씀에 관심을 둬야 돼요. 그래야 나한테 관심을 안 두게 돼요. 자기한테 관심을 아무리 관심을 둬도 해결책이 없습니다. 어떤 조언도 필요 없어요. 나한테 주로 관심이 있는데. 자기한테 관심이 있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나는 남한테 지기 싫어해요. 남한테 지기 싫어해요. 인생의 모든 삶의 엑기스는 뭐냐 하면 남한테 지기 싫다는 거예요. 그게 정영 그 모델이 뭐냐, 부자 되기에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자 되는 게 이기는 겁니다. 

그게 남한테 지기 싫어한 그것이 주께서 지목한 바로 범인이었습니다. 내가 범인이고 이 범인 지목당한 범인 안에서 이런 자아말고 다른 자아를 야고보서 말씀에 의해서 새롭게 거기서 만들어내시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은 다시 보면 세상이라 하는 것은 쪼개봐야 돼요. 

수요 설교한 거 잠시 소개하겠습니다. 수요 설교가 좀 난해한 게 있어서 뭐냐 하면 사람이 1이 되면 안돼요. 숫자 1. 영어로 one이죠. 1이 되면 안 되고 반드시 영어로 two가 돼요. 1은 2조각나야 돼요. 하나가 두 개로 갈라져야 돼요. 갈라져서 이쪽과 이쪽이 서로 통하는, 이쪽과 이쪽을 묶어내서 하나 되게 하는 중간에 속에 있는 속의 경로가 발췌되어야 됩니다. 속의 경로가. 

그러니까 내 안에 내가 모르는 무엇이 들어있는 거예요. 인간 안에. 하나를 둘로 쪼개야 되거든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모든 인간은 인간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실존주의 철학에서 이걸 ‘개별자’라고 해요. 개별자. 이 개별자는 다른 말로 하면 그냥 ‘개체’라 해요. 개체. 개체가 개체+개체+개체+개체+ 이렇게 되면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람들은 이걸 ‘우리’라고 해요. 이 사회를 가지고 커뮤니티라고 해요. 커뮤니티 이게 뭐냐 하면 공동체라고 이야기하면 돼요. 공동체.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유토피아를 원하는. 

그런데 그 유토피아는 구성요소 재료가 뭐예요? 개체가 구성요소지요. 그러니 아무리 공동체가 있어도 나한테 이익이 어느 정도 있느냐가 늘 계산, 척량이 되고 계산이 되는 한, 유지되는 커뮤니티에요. 나한테 손해가 되면 나는 다시 내 개체를 다시 빼돌려버립니다. 

개체로서 약간은 봉사, 희생을 하지만 이익이 없다 싶으면 발을 뺄 준비가 되어있는 개체. 이 개별자. 이 개별자는 꼭 호두 같아요. 너무 딱딱해요. 너무 딱딱합니다. 딱딱하기 때문에 이게 야곱이지요. 남한테 지기 싫어하는 사람, 야곱. 대표자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이 야곱을 쪼개버려요. 호두를 쪼개버립니다. 쪼개버리면 그 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 이스라엘 예수님 들어있어요. 

아브람 안에 아브라함 들어있고, 이삭은 처음부터 없는 사람이니까. 처음부터 약속이고. 야곱 안에 이스라엘이 들어있는 거예요. 그러면 저와 여러분 안에 누가 있느냐 하면, 주님이 들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이게 주의 이름으로 하는 것을 알려면 쪼개 떨어져나가는 껍데기가 있어야 돼요. 그 껍데기 역할을 지금 우리가 흔히 안일하게 살아가면 느껴지는 매일의 삶, 주인공 누구십니까? 누가 여러분을 위로해 주지요? 여러분. 오늘날 우리 모두가 이게 깨어져야 될 껍질인데 안에 그리스도가 있는데 우리는 여기에 정성을 다해서 여기다가 바깥에 치장을 하고 조작을 합니다. 남한테 기 안 죽으려고. 주눅 들지 않으려고. 많이 알아야 되고, 많이 모아야 되고, 재산이 더 있어야 되고, 니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 붙고 그러는 거예요. 

제가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지만, 이혼이 문제가 아니고 누가 튕기느냐가. 이혼은 당연히 하고 결국 마지막 자존심 싸움이 되어버려요. 왜냐하면 결국은 가정도 뭡니까? 커뮤니티 아닙니까. 가정도. 나를 위한 가정이지, 가정을 위한 나는 아예 없어요. 옛날에는 가문을 위해서. 뭐 광산김씨라든지 가문을 위해서 있는 가정이지요. 

그 수요일날 9시30분에 하는 광산김씨 이야기하면서 제가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했잖아요. 그거 안 본 사람은 화를 막 내고 있고 아는 교과서는 안하고 왜 교과서에 없는 것을 왜 출제하느냐 이리 나오는데 그걸 보면서 제가 많은 걸 느끼거든요. 예수 믿지 않던 시절에 추억거리라든지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하루 하루를 어떤 식으로 살아가는가를 대표적으로 잘 보여주지요. 

특히 거기 나오는 백씨부인, 국민 우아함. 우아한데 운전면허 못 딸 정도로 아무것도 모르는 필기시험도 떨어질 정도로 그런데 우아해. 한 미모로 버티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그 미모를 광산김씨가 다 이용해 먹잖아요. 천하 바보같이. 남자 셋이 다 엄마 하나를 이용해 먹잖아요. 그 모습을. 그러면서도 그 집 귀신이 되어야 된다는 관습적인 것이 자아의 우아함에 마지막 재료가 되는 겁니다. 내가 어느 가정에 가서 이런 대우를 받겠느냐 하는 겁니다. 인간이고 싶은 거예요. 등신이 아니고 기계가 아니고 사람이고 싶어 하는 겁니다. 

이게 함정이에요. 덫에 빠진 거예요. 이 개체의 개별자는 창세기3장에 의하면 악마가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니가 신처럼 되리라는 그 작전에 의해서 등장된 악마의 작품이에요. 그래서 이 아담은 어떤 아담이냐, 폐기되어야 될 아담이에요. 폐기되어야 될 아담. 의성 안개에 가면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이 쓰레기 모아놓은 데가 있어요. 제가 그 동네를 열 번 이상을 가봤는데, 무려 45만톤인가. 25만톤인가 있어요. 그 쓰레기들을 모아놨어요. 그래서 처리비용도 40억이 넘는다하는데. 

이 아담은 쓰레기입니다. 커뮤니티는 쓰레기 + 쓰레기 + 쓰레기 더하기에요. 쓰레기 앤드 쓰레기 앤드 쓰레기 앤드. 계속 쓰레기 보태기에요. 생일 축하합니다. 쓰레기 출생을 축하합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아담을 준비했어요. 새로운 아담. 그게 천국요소거든요. 천국요소. 이제 궁금한 것은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천국요소를 어떻게 만드는가 하는 거예요. 

그게 오늘 제목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지옥 속에서 없는 쓰레기 아닌 아담으로 어떻게 만드는가, 야고보적인 방식, 야고보 사도가 이야기하는 방법은 뭐냐 이거에요. 전쟁입니다. 전쟁. 전쟁은 누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적이 있어야 돼요. 적이 없으면 전쟁은 없지요. 사람들은 자기 개체의 커뮤니티가 되어버리면 사람은 전쟁을 원치 않고 평화를 원합니다. 화목, 화해, 평화. 그런데 평화가 되어버리면 이게 어떤 단체든 어떤 조직이든 평화로우면 이게 장래가 없어요. 

어느 학교에 시험이 없다. 그럼 애들이 전부다 성적은 다 떨어지는 거예요. 치열한 경쟁만이 집단의 질을 높이는 거예요. 제가 전에 설교 시간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아담스미스 이야기했지요. 경제학자 아담스미스 세상이 돌아가는 것은 서로 도와줘서 돌아가는 게 아니고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궁극적으로 세상을 발달시켰다. 따라서 사회주의 같은 경우에는 동유럽 같은 경우에는 나라가 나라꼴이 엉망입니다. 환경문제, 그리고 인권다루는 그런 나라는 경제성장률이 나라발전이 정체되어있어요. 

여인들의 천하 천국,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여자들이 힘이 발휘하는 나라는 뉴질랜드입니다. 수상부터 해서 전부 여자고 거기에 여자가 어떤 짓을 해도 남자하고 여자하고 이혼하게 되면 재산의 80%는 여자가 다 가져가요. 여자가 어떤 짓을 해도. 유책사유건 그런 거 필요 없어요. 어떤 짓을 해도 다 줘야 돼요. 남자가 아무리 깨끗하고 여자가 아무리 그냥 비리비리 놀고 제정에 한 번도 도움이 안 되도 이혼하면 재산의 80% 다 가져가게 되어있어요. 다 가져가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뉴질랜드 같은 나라의 남자들은 어디 가느냐 하면 뉴질랜드도 안 살고 미국으로 다가버려요. 경제발전이 될 일이 없지요. 여인천하이기 때문에. 필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호주, 호주는 좀 예외지만, 그런 나라가 경제가 침체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갑자기 배부른 소리했어요. 복지정책을 내세우기 시작했고, 점차 자본주의 내에 사회주의 경향들이 있게 되면서 나라가 엉망이 된 겁니다. 

이게 힘들고 긴장되고 싸워야 돼요. 그 싸움이 사실은 외부와의 싸움처럼 보이지만, 자기가 나태한 안일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에요. 학생들도 마찬가지고. 뭔가 가정이 평화로우면 사실은 그건 죽은 가정이에요. 가정이 평화로우면. 뭐 들쑤셔야 돼요. 그냥 둘 다 교회에 갔다. 말씀 알 수가 없어요. 하나가 이상한 거 받아와야 이 말씀이 과연 옳은지 과연 그런가 한 번 보자. 이리 돼야 다른 성경구절을 찾다보면 성경구절을 많이 외우지 그냥 가다가 점심 먹고 와가지고 그냥 오후에 놀러가고. 산책하러. 이래가지고는 말씀이 그런 말씀이 있는 줄 몰라요. 

주님은 계속해서 전쟁을 했다 이 말이죠. 그러나 유대사회는 그 전쟁이 싫어서 전쟁 유발 요인 그런 적에게 빌미를 줄 수 있는 그런 유발요인을 제거하려고 한 사건이 무슨 사건이냐 하면 십자가사건이에요. 한 사람을 죽여서 나라가 평화로운 게 낫지 아니하냐. 요한복음1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3장18절 봅시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상당히 말씀이 어려워요. 

다시 한 번 해보겠습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아! 내가 예수를 믿었으니까 심판 받지 않겠지. 그런데 믿지 아니한 자는, 다음에 뭐 믿으면 되지. 되는데 이게 아니고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 오신 것이 심판을 주러 온 게 아니고 이미 심판 속에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거예요. 안 믿으면 지옥 가는 게 아니고 지옥 가는 것이 기본이라는 겁니다. 당연히 지옥 가야 되지. 딴 군소리 말라. 가짜 쓰레기 인간인데 갈 곳은 지옥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음껏 지옥적인 모양새를 내게 되면 그건 주님 입장에서 믿음이 없는 거고, 지옥가야 될 인간이 지옥가야 될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니고 기이한 모습, 뭐냐 하면 “저는 지옥가도 마땅합니다. 주여. 심판주 맞습니다. 주께서 오신 것은 심판하러 오신 거 맞습니다.”라는 이상한 고백을 내놓으면 그건 이미 심판에서 면제된다는 거예요. 

결국 이 이야기는 뭐냐 하면 천국이냐, 지옥이냐, 기준은 예수님에 대한 자존심 문제에요. 예수님의 자존심을 돋아주면 천국이고, 예수님의 자존심을 인정 못하면 지옥인 겁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누구 나라냐 하면, 우리나라가 아니고 아들의 나라, 예수의 나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나라를 요한복음5장에 보면 누구한테 다 일임했느냐, 아들에게 다 일임한 거예요. 재벌총수가 죽으면서 죽기 전에 개골개골하고 있을 때에 이미 자기의 예를 들어서 둘째 아들한테 모든 회장을 다 줬는데 큰아들이나 큰딸이나 다른 동생들은 그걸 개무시하고 인정하지 않을 때 그 회사에서 다음에 구조조정에 잘릴 사람은 누구? 바로 형제난이지요. 그 줄을 잘못 선 사람들. 자기한테 모든 게 일임됐는데 그 형들이나 그 사람들도 전부 다 재벌회사에서 한 자리하면서 열심히 상품팔고 애쓰고 있지만, 그런 것으로 안 잘릴 이유가 되질 못해요. 

아무리 열심히 하고 아무리 기여도가 높다할지라도 지금 새롭게 인계받을 재벌총수가 누구냐에 대해서 거기에 그 자존감을 높여주지 아니하면 그건 다음 구조조정에서 잘리게 되어있어요. 이 세상은 전쟁마당이에요. 줄을 서세요. 여러분, 줄을 잘 서야 돼요. 여러분,  천국 지옥의 기준은 줄을 잘 서냐의 문제입니다. 주님의 자존심을 높인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요한복음3장에 의하면 자기를 뭐로 본다? 자기를 쓰레기로 보는 거예요. 

나는 내가 나에게 행동을 잘했니, 못했니, 평하거나 논할 가치조차도 없는 거예요. 처음에 강의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여러분 자신을 뭐하지 말라? 괴롭히지 말라. 자기 자신을 뭐 가치 있는 양, 의미 있는 양 괴롭히지 마세요. 아이고~ 바보야, 똑바로 하지. 똑바로 하고 안 하고 문제가 아니에요. 지금. 

주님을 쳐다보고 있는데 나에게 쳐다볼 여력이 없어요. 내 쳐다볼 여력이 없다고요. 나를 쳐다보는 것은 남한테 지기 싫어하기 때문에 그래요. 개별자로서 개체로서 나를 계속 붙잡고 싶은 겁니다. 말 안 듣는 인간은 말 안하면 돼요. 아마 그게 다른 사람에게는 그게 제일 무서울 걸요. 그렇다, 이렇다, 말을 안 할 때, 제일 무서운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기존의 관계가 다 끊어졌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찾아올 때에, 자기 백성은 없지요. 올 때, 먼저 너가 똑바로 하라! 가 아니라 먼저 관계. 관계망을 가지고 오는 겁니다. 여러분, 바닷가에 고기 잡을 때 어부가 빈손으로 나갑니까? 뭘 들고 나가지요. 뭘 들고 나가지요? 그물 들고 나가지요. 그물이 있어줘야 좋은 고기가 잡히잖아요. 예수님께서 베드로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 사람을 낚는 어부. 얼마나 시사하는 함축된 의미가 깊습니까. 나는 인간 같은 인간은 안 잡는다는 뜻이에요. 내가 원하는, 천국에서 원하는 사람을 그렇지 않은 사람을 내가 안다는 겁니다. 

정말 주님은 취미가 뭐냐 하면 사람 무시하는 게 취미에요. 사람을 완전히 쓰레기 취급하는 게 취미 같아요.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지만, 성도의 취미는 있어야 해요. 뭐냐 하면 내가 이 세상을 분리 되는 것. 떠나는 그 재미. 내가 죽는 흔적을 발견하는 재미. 그게 취미가 돼요. 왜냐하면 취미는 계속하고 난 뒤에 지루함이 없어야 되거든요. 

성령께서 매일같이 떠나게 하니까 이게 지루할 여유가 없어요. 왜? 이 세상은 전쟁이니까. 경쟁이니까. 싸움판이니까. 평화는 물 건너갔습니다. 평화는 없습니다. 우리는 평화롭고 싶어요. 조용하고 편안하게 살고 싶어요. 하지만, 주님이 가만두지 않습니다. 

자, 여기서 문제 나갑니다. 천국의 기준에서 나의 행복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천국의 기준에. 내 행복이 들어갑니까? 안 들어갑니까? 안 들어가지요. 내가 행복하다. 내가 만족하다. 내가 행복하고, 내가 만족한 게 천국의 기준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반대로 내가 불만족하면 지옥 갑니까? 아니지요. 내가 불행해도 지옥 가는 거 아닙니다. 나한테는 신경을 뚝 꺼야 돼요. 왜? 나는 하나의 기계니까. 오늘 제목은 ‘나는 기계다.’ 후딱 바꿔야 돼요. 

하나의 기계는요, 야고보서4장15절 말씀처럼 주의 뜻이면 부팅하기도 하고 부팅 끄기도 하고, 내가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리니, 이 말은 니가 니한테 신경 끄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야고보서5장에 들어가면 부자가 나오지요. 부자는 누굴 상대했느냐 하면 상대적으로 약한 사람을 상대했다고 되어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부자가 안됐다고 이야기합니다. 5절에 보면. 

5장6절에 봅시다.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야고보 당시에는 산업시대가 아니고 농경시대거든요.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씨 뿌리는 비유 있잖아요. 농경시대라는 말이지요. 예수님 시대 가운데 천국 비유할 때 포도원이야기 나오지요. 농경시대입니다. 물론 대장장이 같이 있지만 뭐냐 하면 달란트 비유 하는 거 있어요. 일하는 직원에게 임금 주는 거 있지만 그것은 소소고, 대부분은 농사짓는 게 대부분입니다. 다른 에너지원이 없어요. 그냥 사람의 육체의 노동으로 땅 개간해서 사는 그겁니다. 

따라서 야고보서5장4절에서 땅을 이야기하고 밭을 이야기할 때는 이건 오늘날 산업 전반으로 확대 해석하면 되는 겁니다. 자, 이 확대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전쟁으로 보면 되는데 전쟁에는 어떤 전쟁이 있느냐 하면 사기 치는 전쟁입니다. 야고보서5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너희가 사기를 쳤다는 거예요. 사기를 쳤는데 그 사기가 뭐냐 하면 보이스피싱하고 투기를 한 게 아니고 돈이 많은 것이 정신적으로 남을 지배할 자격이 있는 증거로 여기는 사기. 

돈을 가진 자가 더 대우받고 정신적으로 남을 밑에 둘 수 있는 그러한 위치에 부유한 자만이 그걸 차지할 수 있다고 거짓으로 유포하는 그 사기. 그 전쟁. 그게 자로 부자들이 한 거예요. 그러니까 부자들의 잘못은 돈으로 인하여 남을 조정할 수 있고 남을 지배하려는 그 심보 자체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봉사정신과 배치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전쟁은 뭐냐 하면 섬기는 전쟁이거든요. 이 쓴잔을 마시는 거예요. 아무도 마시지 않는 쓴 잔을 마셔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이 세상은 쓴 잔 같은 건 누가 하느냐 하면 3D산업체나 하는 사람이 하는 거지 그런 일하려고 부유한 게 아니기 때문에. 오직 그런 험한 일에서 빠지려고 하는 거예요. 

그게 세상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는 정신적 사기가 되는 겁니다. 그럼 우리 자신을 한 번 돌아보세요. 우리 자신이 자식들을 가르칠 때, “니가 그렇게 공부 안하지. 공부 안하면 니는 남한테 당한다. 남한테 종속되고 지배받고 남이 시키는 대로 해야 된다.”라는 식으로 우리는 훈계를 하잖아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니나 내나 남을 지배하고 통치하고. 남위에 서는 게 좋아? 남 밑에 있는 게 좋아? 이렇게 이야기해보면 “나, 최고가 되고 싶어.” “그래, 그러면 공부를 해야지.” 라고. 공부하더라도 남위에 서는 것을 공부하고 싶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제일 낮은 자리. 사실 낮은 자리 그 자리가 천국으로 통하는 유일한 하수구에요. 개구멍입니다. 개구멍이에요. 

그 개구멍가려면 진짜 기계 되어야 돼요. 아주 내가 가려고 애쓸 필요 없어요. 기계 되어야 돼요. 세상의 모든 갈등이나 투쟁은 서로 윗자리를 얻으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윗자리를. 위에서 얻으려고 하면 할 수없이 4절,5절과 같이 이야기했지만, 두자로 착취지요. 착취. 착취란 말은 자기가 노동하지 않고 남이 한 노동을 자기 것이라 여기는 것. 이걸 착취라 할 수 있고 이걸 도둑질이라 할 수 있고. 

그 도둑질을 했기 때문에 그 다음에 뭐냐 하면 5절에 보면 너희가 땅에서 착취하고 쾌락을 즐기고 이 사치와 쾌락을 즐긴다는 말은 자기가 노동한 그 희생보다도 그 여분의 것을 많이 얻었기 때문에 이것은 아주 값싸게 날려버리는 식의 태도지요. 공돈이지요. 공돈. 공돈은 그다지 가치 있게 안보잖아요. 공돈 쓸 때 어떻게 씁니까? 벌벌 떨면서 안 쓰잖아요. 공돈이기 때문에. 예상 밖의 공돈은 그냥 공찰 때 뻥하고 차듯이. 공돈은 그냥 헤프게 쓰기 마련이란 말이죠. 그런데 그 액수가 어디서 왔는가, 여기 4절에 보니까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이리 되어있어요. 

마치 창세기4장을 다시 재현하는 것 같습니다. 창세기4장에서 억울한 사람이 있지요. 가인이 아니고 누굽니까? 아벨이지요. 전쟁에서 형은 자기가 가치 있는 인간으로 기계가 아니고 가치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 할 수 없이 자기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다고 여겨지는 아벨을 죽일 수밖에 없었어요. 신데렐라 동화, 또는 백설 공주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전부 다 창세기4장 이야기가 전부 다 인간의 뇌리에 다 공통적으로 들어있는 거 같아요. 그런 예를 설교시간에 많이 들었는데. 

시골에서 총각, 처녀 몇 명 안 되는 마을사람 얼마 안 되는 데서 예배당 하나 있을 때에 거기에 올겐 치는 아가씨는 그 마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하는 거예요. 그 아가씨가. 왜? 객관적 기준이 없기 때문에. 올겐을 치기 때문에. 피아노도 아니고 올겐을 치기 때문에. 아주 고상한 손놀림을 보여주잖아요. 그 동네에서의 커뮤니티가 그 마을이기 때문에 그 마을에서는 제일 예쁜 아가씨인 거예요. 최진사댁 셋째딸처럼. 그쪽에서는 최고 좋은 거죠. 담배 가게 아가씨. 송창식 노래도 나왔지만. 

그런데 거기에 있던 총각이 서울에 갔다. 로데오거리에 갔다. 명동이라든지 강남에 갔다. 그래서 오랜만에 다시 촌에 왔다. 지가 올겐을 치든. 이제는 아~ 내 눈이 뼜지. 내가 뭔가 정신적으로 사기를 당한 거라. 이 세상의 전쟁은 점점 확대가 되면서 옛날에는 작은 것도 주님께 감사했던 그 감사가 다 깨져요. 먹는 거 입는 거로 족한 줄을 아는 게 아니고 남이 치는 골프도 쳐야 되고, 남이 가는 크루즈 여행도 가야 되고. 자꾸 수위가 높아져. 수준이 높아진다고요. 마귀로부터 우리가 정신적으로 사기를 당하는 겁니다. 일종에. 속임수를 당하는 거예요. 

그럴 것 같으면 차라리 이런 게임에 말려들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어떤 사람이 성도냐 할 때 성도는 없어요. 없고, 이게 야고보서에서 하는 이야기는 뭐냐 하면 강자에 의해서 눌림 받는 우는 약자를 여기 제시하는 겁니다. 강자와 약자. 여기서는 결국 강자와 약자는 뭐냐 하면 그 가운데 전쟁을 하는데 이 전쟁은 무슨 전쟁을 합니까? 사기 치는 전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사기라 하는 것은 딴 게 아니고 바로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의 계열, 계층. 왜냐하면 제가 하는 게 아니고 여기에는 부자와 가난한 자 딱 둘로 나눴으니까 저도 그렇게 나누는 거예요. 계층별로 강자와 약자로 나눠졌다. 자, 그러면 이 약자들은 다 구원받겠습니까? 아니지요. 약자는 구원받는 게 아니지요.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약자는 무슨 약자냐, 7절 봅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야~~ 이게 대책입니까? 대책이라고 내놓은 게 고작 이거에요. 참으라. 속은 다 썩어문드러지는데요. 참으라. 이게 무슨 대책이 되는 겁니까? 이거 뭐예요. 참으면 무슨 일이 있어요? 참으라, 하는 이 말 자체가 결국은 이건 뭐냐 하면 성도가 아닌 가난한 사람 있잖아요. 성도가 아닌 가난한 사람. 이 사람들은 못 참습니다. 참을 수가 없어요. 이 말에 동조가 안돼요. 동조를 할 수가 없습니다. 10분 쉽시다.

 공은주 (IP:119.♡.152.148)19-05-15 16:28 
안양20190412b야5장7절(나는 기계다)-이 근호목사 

이미 세상 자체가 지배자에 의해서 종속된 지배기 때문에 사고방식이 억울하다, 분하다, 당신이 내거 가지고 갔잖아. 하고 그 일꾼들이 밭에서 일하는 일꾼들이 부자에게 외친다는 이 말은 정신적으로 이미 부자에 종속된 거예요. 당신이 내가 한 힘든 거 다가져가고 당신은 사치하고 우리는 당신 때문에 괴롭다. 하는 그 의식 자체가 그 부자의 테두리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에게 어떻게 조금만 기다려라.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부자 것을 빼앗아서 너가 부자 되게 해줄게. 라는 그런 보복, 복수 그런 관점에서 해결책이 주어지게 되면 그 가난한 사람은 “그러면 좀 기다리지요. 뭐. 1년 뒤에 좋은 일이 있겠지요.” 기다리겠지만, 아예 참아라. 이리 되어버리면 이건 판이 게임의 판이 다른 게임에 돌입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누구도 여기에서 제시하는 7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참아라. 할 때 여기에 선뜻 동조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 이유가 인간이란 자체는 부자나 가난한 자나 동일한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같은 성질을 갖고 있는 인간들이 재산 문제가지고 또 누가 부자 되어서 지배계층에 속하느냐 그 싸움을 싸웠기 때문에 알고 있는 정보는 뭐냐 하면 그 범위 내에 머물러 있을 뿐이에요. 

그래서 여기에 7절에 나오는 말씀은 우리에게 새로운 인간, 기존에 있는 돈 떼어서 억울하다는 그런 인간 말고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는 근거가 됩니다. 어떤 식으로 관여하게 되느냐 하면, 아무런 상관없는 일에 부름을 받습니다. 나랑 아무런 상관없는 일에 부름을 받아요. 만약에 내가 밭에서 일했는데 품삯을 못 받았다. 이건 나와 관련되어있어요. 기어이 저 부자가 가지고 간 저 내 고생한 삯을 돌려받아야 되겠다고 해서 계속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집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참아라, 이 말은 일방적이에요. 하나님이 일방적이기 때문에 나랑 상관없는 일이에요.
나랑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우리라 하는 것은 세상 사람과 같은 류의 사람. 우리는 세상에서 못 벗어납니다. 저쪽 사고방식이나 내 사고방식이나 동일해요. 우리가 부자 되면 마찬가지로 똑같은 짓을 할 수 밖에 없어요. 우리는 아담의 몸을 받았기 때문에 동일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는 것을 먼저 전제로 해야 돼요. 진작 그리 되어야 돼요. 우리는 그렇게 별나지 않습니다. 똑같아요. 인간은. 그 육에 그 육이에요.
 

중요한 것은 뭐냐 주님께서 이 육인 너무나 세속적이고 세상적이고 부자 못 돼서 환장한 우리 속에서 주님의 자기 사명을 뽑아낸다는 이게 중요한 겁니다. 뽑아내는 거예요. 주사기에서 약을 뽑아서 우리의 생체 피부조직을 통해서 주사액을 집어넣듯이 우리는 주사액이 들은 병이라면 병에서 주님이 주사기를 우리를 그냥 쫙 공기 집어넣듯이 빨아 당기는 거죠. 뽑아낼 건 다 뽑아내는 거예요. 주께서. 쓰레기 같은 우리를. 어떤 인간도 부자를 마다할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부자 됐기 때문에 예수를 찬미하고 주님을 찬양하고 하지만, 막상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는 주님에 대한 감사보다도 이 억울함을 보복을 대신해 주길 바라는 거죠. 억울한 일을. 그 정도로 사람은 아프면 아플수록 자기로부터 멀어지는 게 아니고 오히려 자기한테 더 응결이 돼요. 자기한테 더욱 더 집착을 하면 할수록 온갖 병 스트레스로부터 해서 온갖 췌장암이란 암은 다 걸리는 거예요. 종합 암이 다 들어와요. 종합 암이. 자기한테 응축이 되게 되면. 

그런데 주님께서는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에게서 주사기를 가지고 뽑아내는데 나한테 뽑을 것은 없어요. 그러나 우리 성도에게 주어진 것은 주님의 자기 사명이에요. 사명. 보통 우리가 사명이라 하면 누가 갖고 있는 사명입니까? 성도가 지닌 사명을 말하잖아요. 그거 얼마 못갑니다. 성도가 지니고 있는 사명을 말하잖아요. 그거 얼마 못갑니다. 그거 얼마 못가지요. 교회에서 밖에 나가면 사명이고 뭐고 내가 무엇이 못나서 이런 싫은 소리를 들어야 되느냐 하면서 자기 본전 생각이 막 든다니까요. 본전 생각. “주여. 나는 이 정도로 대우받을 입장이 아닌데요.” 이런 식으로. 자기 방어에 나오고 자기변호에 나서거든요. 

우리의 사명은 소용없어요. 이거 몇 일, 이건 너무하다. 몇 달 못가요. 몇 달 못갑니다. 교회에서 1월1일날 위임식 할 때 하나씩 증을 하나씩 받고 하지요. 형식적이지만 주의 종이라 해가지고 또 그 본문 설교해가지고 성가대는 성가대 데로 위임장주고 주일학교는 교사대로 주고 구역사찰은 사찰대로 해가지고 위임장 받고 액자 해서 걸어놓고.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면류관같이 귀한 것이다. 해가지고 해놓지만. 나중에 벌써 3개월 되고 4개월 되고 이렇게. 

북한도 아니고 왜 그리 회의를 많이 하는지. 빨리 예배 마치고 집에 가서 밥해야 되는데. 뭐 그리 교사회의 있고, 성가대 회의 있다 해가지고 또 모이고. 그것도 회의 모이면 되지 회식은 왜 그리 많은지. 노래방회식, 불고기파티 회식. 이 커뮤니티가 그렇잖아요. 이 커뮤니티가. 뭐 먹어야 들어가야 맛이 나거든요. 단팥빵이나 먹어야 교제가 되는가요. 

이게 뭐냐 하면 억지로 힘을 쓰는 거예요. 억지. 억지로 단결을 촉구하는 거예요. 받아먹은 정이 있고 꼴에 니가 양심이 있다면 어느 정도 봉사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건 일방적으로 줘놓고 빼먹을 생각을 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5월 달부터 하기 싫은데 저한테 옛날에 그런 전화오고 그런 상담도 있어요. “목사님, 12월 달까지 꼭 해야 됩니까?” 주님의 사명의 날짜를 알려드릴게요. 12월35일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12월35일이라니까요. 없습니다. 어떤 장소도 없고, 어떤 시간도 관계없는 이유가 옥에 갇혀 있을 때도, 또는 몸이 아플 때도 병원에 누워있을 때도 주님은 얼마나 야무지게 사명을 뽑아내요. 

병원에 누워있다고 뭐 건강해서, 건강해서 해라가 아니라 니 몸 아픈 것이 그 자체를 사명으로 보는 거예요. 몸 아픈 그것을. 여기 참아라, 하는 것은 우리가 참는 게 아니에요. 주님의 참음을 우리 속에서 뽑아내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전쟁이 가난한 자는 부자와의 전쟁이 아니고 누구와의 전쟁이냐, 바로 우리 내부에서 주님과의 전쟁입니다. 

기존의 가치 있는 나를 붙들려고 하는 것과 그것을 강제로 뜯어내려고 하는 주님의 싸움에 주님사이의 그 갈등이에요. 쓰레기라고 해도 이 쓰레기가 정들었던 쓰레기 때문에 못 놓겠습니다. 그건 우리 고집이고, 주님의 새로운 일을 주시는데 그 새로운 일은 일이 뜯겨 나갔을 때에 그게 느낌이 뭐냐 하면, “그렇다면 주님, 나랑 아무런 상관없습니다.” 이게 바로 성도의 사명입니다. 나의 존귀함, 나의 후짐 그런 것과 아무 상관없는 내가 얼마나 이 일을 통해서 내가 잘되고 못되고 이런 것도 필요 없어요. 내가 천당 가고 지옥가도 관계없어요. 

그냥 아무런 상관없는 외부적인 일이 우리한테 일방적으로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그냥 들어온 거예요. 들어오게 되면 우리 안에 들어온 사명으로 인하여, 아까 첫째시간에 한 거 다시 한 번 해봅시다. 주님이 우리한테 찾아올 때는 그물망 들고 온다고 했지요. 그물망이라 했는데 다른 말로 하면 관계망이라 합시다. 

주님께서 자신의 관계망, 수요일날은 이걸 두자로 언약이라 했거든요. 하나님의 약속을, 약속을 해봐야 약속을 받을 사람 없어요. 무조건 약속은 하는 거예요. 약속을 집어넣는 겁니다. 단팥빵 안에 단팥을 집어넣듯이. 약속을 일방적으로 손가락으로 후벼가지고 집어넣어요. 집어넣어놓고 그 다음에 언약만 살짝 잡아당기면 사실은 살짝이 상당히 아프지만. 살짝 잡아당기면 언약에 꿰어가지고 새롭게 만들어져서 딸려 나오는 그 관계가 영원히 천국 가서도 유지되는 관계에요. 주님과 그 증인. 이렇게 딸려 나오는 거예요. 새로운 관계망에 이슬방울 초롱초롱 방울 맺힌 것처럼 새로운 방울로서 여기에 달려 나오는 겁니다. 이런 사람을 성경에서 마태, 마가에서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종이라고 했지요. 

종은 종이 했을 뿐이지 종이 무슨 존귀를 받겠습니까. “밥 같이 먹지.” 종이 “아이고, 저는 나중에 먹겠습니다.” “수고했잖아.” “종이 종의 할 일 했지 무슨. 종한테 수고했다는 말을 하지 마세요. 저는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까라하면 까나이다. 이런 뜻이다 말이죠. 

종이기 때문에 자기와 아무 상관없는 자기가 계획하고 입안한 게 아니에요. 자기가 구상한 게 아닙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모든 구상과 계획은요, 그 끝머리에 뭐냐 하면 자기 존귀함과 관련되어 있어요. 자기가 우수하게 변화된 걸 이야기한 겁니다. 천로역정 같은 것이 그런 이야기고, 왜 위험하냐 천로역정 같은 경우는 천당 가는데 뭐가 있습니까? 뭘로 되어있어요? 계단으로 되어있어요. 

한 계단 올라갈 때마다 맹세하고, 두 계단 올라갈 때마다 언약 맺고, 이런 식으로 계속 194계단인가, 이게 용두산 엘레지 노래에 나와요. 부산에 용두산 계단이 있는데 194개인가 그런 모양이에요. 니가 한 가지 헤어지지 말자고 맹세했잖아. 또 한 계단 얻을 때마다 니는 우리 이렇게 살기로 언약했잖아. 하지만 니는 왜 다른 남자 만나가지고 나 지금 이리 됐다고 그런 내용이거든요. 엘레지 슬픈 노래를 엘레지라 하잖아요. 용두산 엘레지. 우리는 천국의 엘레지. 

뭐든지 내가 지금보다 더 향상되고 세상에 대해서 여유만만하게 살고 싶다는 자기마음의 포부 같은 게 있어요. 그 포부가 돼가지고 나한테 벌어졌던 모든 상처들을 거뜬히 보상하고도 남아있는 어떤 여분의 행복 같은 것을 챙기려고 시도합니다. 어디서 간교한 꼼수를 씁니까. 

주님의 소유됐다는 말은 곡해하시면 안 됩니다. 주님의 소유됐다는 것은 주께서 내 것을 빼먹는 게 아니에요. 우리 것은 쓰레기이기 때문에 빼먹지 않습니다. 돈을 바쳐도 돈 안 받고요, 봉사해도 봉사 안 받습니다. 아무것도 안 받습니다. 주께서 집어넣었는데 그 집어넣은 게 뭐냐 하면 우리가 성취할 수 있고 우리가 가능성 있는 것을 집어넣지를 않았어요. 애초부터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성경이 이렇게 두껍잖아요. 이거 지킬 수 있는 게 몇 개 있습니까. 몇 개가 아닙니다. 하나도 없어요. 성경은. 

성경은 누구 이야기이냐 하면 예수님이 요 계획에 맞추어서 자기 성도에게 성경 전체를 그냥 집어넣은 겁니다. 에스겔에게는 어떻게 집어넣었느냐 하면 입을 벌리고 집어넣어버렸어요. 에스겔 같은 경우에는. 요한계시록에 나와요. 이걸 두루마리를 꿈이지요. 환상 속에 이걸 먹었는데, 꿈에 먹었는데, 입에는 다나 속에 들어가면 쓰린 거예요. 위궤양인지 모르지만 쓰린 거예요. 그러니까 쓰리다는 말은 왜 쓰리냐 하면 그 에스겔은 사람이잖아요. 우리 아담에 속하지요. 들어온 것은 누구냐 장차 자기가 이루지 못하고 주께서 이룰 주님의 장차 오실 일이 에스겔에게 미리 들어온 거예요. 이게 사고가 안 맞지요. 그래서 이 사명에 의해서 아내가 갑자기 죽어요. 죽는데, 미리 예언했습니다. 인자야, 에스겔아, 아내 죽더라도 그냥 울지 마라. 

오늘 강의 같으면 니는 기계다. 죽던지 살든지 그것도 그동안 아내가 살아온 것도 주의 덕분이고, 죽은 것은 이제는 그만 살리려고 하시는 모양이다. 그냥 죽어버리고 목석도 이런 목석이 없지요. 아내 죽음에도 울 필요 없고. 부의금도 받지 말고. 그냥 집에 벌레하나 죽었구나, 이리 생각하라 말이지요. 듣는 아내들은 섭섭하겠지만. 이렇게 되면 남편이 은혜 받으면 곤란한 문제지만. 남편이 복음 몰라서 천만다행이에요. 알았으면 아내를 완전히 개무시 했을 테니까. 

에스겔이 바로 그런 예언을 보여줍니다. 이사야 같은 경우에는 요번에 수련회할 때는 이사야 하거든요. 여름수련회. 이사야 같은 경우는 3년 동안 벌거벗고 애굽에 나가서 전도하고, 옷도 벗고 그건 왜 그러느냐 하면 너희들이 잘 차려입어도 결국은 마지막 때 너희들이 다 벌거벗게 될 것이다. 라는 것을. 자기가 애굽사람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기 모양새를 통해서 미래의 그들의 장래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 달린 모습은 이건 무엇을 보여줄까요? 예수님이 바로 인자거든요. 에스겔이다 말이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다는 말은 아무리 재벌이니 어떠니 잘난 체해도 결국은 우리는 강도와 다를 바 없는 거예요. 진즉에 이렇게 십자가에 달려야 돼요. 진즉에. 뭐 인권해가지고 가스실에 가가지고 약 먹여가지고 주사 놔가지고 안락사 정도가 아니고. 생생하게 느끼면서 고통은 고통대로 감내하면서 십자가에 나무에 달려서 죽는 치욕스런 죽음 아닙니까. 

십자가 죽는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냥 죽음이 아니고 치욕 스러운 개도 그렇게 처리 안하잖아요. 개도 그렇게 하게 되면 요새 벌금 물 거예요. 개를 십자가에 매달아서...아이고,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집에 키우는 개를 십자가에 매달아 볼까요? 뭐 곤충채집합니까? 안되잖아요. 인간을 곤충채집하듯이 잠자리 매달 듯이 그렇게 매달고 죽게 하는 것은 이게 내 이야기 아니고 누구 이야기라는 말이에요? 바로 너희들 이야기라는 말이에요. 너희들. 

너희들 신세가 지금 그런 처지에 있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는 거죠. 따라서 주님의 관계망은 상관없는 일에 우리가 관여하기 위해서는 우리를 뭘로 만듭니까? 기계로 만들어야 되지요. 기계로 만드는 방법은 바로 어제 나와 오늘의 나를 강제로 잘라버리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제의 나는 우리는 좋은 믿음이거든요. 오늘 되면 그 믿음 다 무효가 돼요. 시효가 끝났어요. 오늘은 오늘치의 믿음이 또 있어요. 왜냐하면 나 구원하려는 믿음이 아니고 주께서 일하기 위한 믿음이기 때문에. 주님의 관계망이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믿음이지, 나 이 믿음가지고 천당 갈래. 이리 되어버리면 믿음 한 번 가지고 다음부터는 지 맘대로 살고 이리 되잖아요. 

아까 첫 째 시간에 무슨 이야기했느냐 하면 이런 이야기했어요. 자기 역사를 쓰지 마세요. 사람이 이렇게 하루가 지나서 하루 저녁만 되면 이미 하루치 역사가 일기처럼 하루시제가 또 이렇게 연결고리가 또 형성되어있어요. 고 일기를 써가지고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고 되어버리면 그게 하나님의 사명이 날아가 버린 사명이 없는 잘나버린 또 자기 자신으로 이미 돌변해있어요. 인간은. 

그러면 이걸 제가 방금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자른다 하는데 이 자를 때 들어가는 요 칼, 가위, 가위가 뭐냐, 가위가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바로 야고보서5장 9절에 나옵니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있다는 게 칼이에요. 심판주가 문 밖에 서있다. 그러면 사람들은 어디에 있어요? 문 밖이 아니고 문 안에 있겠지요. 문 안에. 

문 안에 있으면서 문 밖에 있다는. 참, 이런 게 어려운데 문 안에 있으면서 문 밖에 누가 계시는 것을 아는 것은 결국 주님이 문 밖에 있더라도 그 어떤 상황이냐 하면 문 안에 있는 사람에게 문 밖에 있다는 주님의 사명이 이미 여기에 장착돼 있다는 그러한 현상을 말합니다. 성경 다시 보니 어렵지요. 여기 문이 있습니다. 문만 보면 늘 생각나는 게 바로 옛날 CF에 그런 게 나와요. 트라이. 속 옷 갈아입고 올 걸. 트라이. 냄새나는지 문을 안 열어주는 거예요. 이덕화 나오는 거. 문 탁 칠 때. 

여기에 주님께서 세상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일방적으로 자기 계획에 있어서 세상을 묘사해버려요. 배정을 해버려요. 오늘같이 배치를 이렇게 해버려요. 문을 하나 또 만듭니다. 주께서. 이 문을 세상 사람이 아무리 찾아도 그 문은 없어요. 세상은 커뮤니티 하나의 공동체인데 무슨 문이 있습니까. 있는 문도 다 폐하고 평화를 외칠 판인데. 남북도 지금 휴전선 서로 대화하자 해가지고 있는 문도 없앨 판인데. 

문이 있다는 것은 이것은 상상도 못하지요. 문 인식을 제공합니다. 그 다음에 문 밖에 누가 있는가, 문 밖에 주님 계시고 문이 있는 이유가 밖과 안을 이야기하면서 안에서 벌어졌던 세상 사람한테 돈에 시달리고 사기당하고 억울함을 당한 그것은 사실은 니가 니 인생 자체가 니가 뭔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문 밖에 계신분이 문 안에 있을 때라면 너 못지않게 똑같은 사정을 상황을 맞이해야 될 분이었다. 누가? 우리 주님이. 

주님이 이 땅에 사신다면 현재 니가 당하는 것을 그대로 다 당했고 또 당해야 될 그런 분이었다. 그 정도로 이 세상에 지옥의 미세먼지가 그렇게 지독해요. 아주 시커멓게 캄캄해요. 앞뒤가 안 보일정도로 세상은. 오직 여기 부한 자는 돈이지요. 돈밖에 모르는 세상에서 꽉 담겨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자식들이고 그 교육과 양육으로 인하여 모든 사고방식은 세상이 제공된 사고방식 외에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이에요. 우리가 가난하던 부하던 중간쯤  던 관계없어요. 우리는 그 나물에 그 밥이에요. 똑같아요. 

똑같은데 놀랍게도 주님께서 밖에서 관계망을 담이라는 의식을 제공했고, 밖에서 기다린다고 이야기했고, 니는 참으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이 구조 있잖아요. 이 구조. 이 구조 우리의 아이디어입니까? 안양모임에서 지어낸 아이디어에요? 어떻습니까? 그거 아니지요. 우리는 참는 것도 힘들어죽겠어요. 애 키우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애 키울 때 아 우는 것도 힘든데, 그걸 참으려하니 더 힘들지요. 

어린이 집에 보면 동영상보면 애들 밥 먹을 때 때리고 하잖아요. 그래서 어떤 엄마는 어린이집 원장한테 도끼 들고  들어갔는가 해가지고 징역 받았는데. 죽인다고 어린이집원장한테. 내 아들 그렇게 버린다고 하는데. 지는 집에서 그리 안 키웁니까. 뭐 선생님 부모처럼 키워 달라면서. 부모가 자기 애 안 때립니까. 때리지요. 밥 안 먹는데 “밥 드세요.” 이렇게 합니까? 부모가 집에서 부모가 한 그대로 하게 되면 독한 선생님 되어버려요. 부모의 이중인격이지요. 

나는 되고 니는 안 된다. 결과는 내가 되는 식과 그것보다 더 나은 결과를 내가 하는 식 말고 다른 식을 내놓아라. 그것도 어린이집 애가 한 둘이 아닙니다. 많지요. 무척 힘듭니다. 정말 힘들어요. 말이 통하면 말로 하지요. 8개월, 10개월 뭐가 말이 통합니까? 그냥 본능인데요. 강아지한테 이야기하는 게 낫지, 강아지보다 더 못하잖아요. 강아지는 사람보다 일찍 시건(철들음)하잖아요. 사람은 강아지보다 두뇌 성장속도가 그만큼 늦게 돼가지고 파충류수준으로 보면 돼요. 파충류 수준. 그 애한테 어떻게 당합니까. 어떻게 자기 원하는 대로 다 안 되지요. 

그래서 이 땅에서 참으라 하는 것은 좀 이렇게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맥없는 하나님, 실력 없는 하나님, 유능하지 않는 어린이집 원장 이런 거요. 참아라, 에 맡길 수 있는 사람 나와 봐라 그래요. 1년만 기다려. 내가 다 30배, 60배, 100배 다 채워줄게. 이러면 우리는 그걸 믿을 만한데 그저 참으세요. 라고 맡길 그런 사람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인간은 자기가치를 포기를 못하기 때문에 그래요. 결국 이런 구조는 예수님께서 지금 누구하고 전쟁하느냐 하면 나한테 악하게 했던 부자들과의 전쟁이 아니고 나한테 전쟁이에요. 이런 구조를 가지고 이런 구조가 없는, 이런 구조를 원하지도 않는 구조를 고대하지 않는 나에 대해서 이런 구조를 일방적으로 들이대는 겁니다. 

그러면 주께서는 양보하시겠어요? 주님께서는 양보 없어요. 양보 없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는 거예요. 우리하고 좋게, 좋게 해서는 우리가 구원될 수가 없습니다. 주께서는 양보 없이 그냥 들이대면서 비로소 우리가 구원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우리를 매일같이 우리가 갖고 있던 사고방식 있잖아요. 우리의 의식의 범주를 주님께서 지금도 매일같이 새로운 구조, 아까 이야기한 언약의 구조를 가지고 이것을 무시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의 기쁨이라 하는 것은 자기 뜻이 깨어짐으로서 비로소 성도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이 나옵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게. 예수님이 기도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했지요. 그게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이 됩니다.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 조건하에 우리는 성도입니다.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 

그걸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일방적인 일을 나에게 덤배기로 나를 가지고 던져놓고 그 성취성에 있어서의 조금씩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음을 알리는 시그널을 보여주는 식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그러면 이런 주의 일에 강렬하게 반대한다면 누가 반대하겠어요? 바로 우리 자신이 주께 극렬하게 반대하겠지요. 

극렬히 반대할 때 우리가 반대하는 근거를 제시하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우리가 하루, 하루 살아있다고 여기는 그것을 근거로 하는 겁니다. “주여, 제가 살아 있잖아요. 그러니까 저한테 지시를 해주셔야지 왜 자꾸 제 뜻을 뭉개버리면 저는 무슨 재미로 무슨 보람으로 무슨 희망과 의미를 가지고 살 힘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우리는 솔직하게 우리의 본심을 우리의 그 상당히 주님 앞에 안 좋은 본심을 꽁꽁 못 감추게 만들어요. 기어이 그것을 우리 입을 통해서 터져 나오게 만들지요. 

그게 바로 야고보서4장 14절의 이야기입니다. 13절부터 보겠습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요 13절 요 대목만 이렇게 가위가지고 칼 가지고 쫙 오려가지고 요걸 딱 문제지라고 붙여놓고, 어떤 사람이 요 주장을 하는데 요 주장의 문제점을 쓰세요. 만약에 천국 시험 문제 낸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쓰겠습니까? 

4장13절을 딱 해놓고. 자, 이 문장이 포함하고 있는 사고방식의 문제점은? 14절, 15절 모른다고 한다면. 영원히 거기에 대한 답변은 못하겠지요. 만약에 14절, 15절 말씀을 안다고 한다면 친히 여러분들이 답을 한 번 써보세요. 뭐라고 해야 됩니까? 

“우리는 기계에 불과한데 우리는 우리 계획 때문에 존재하는 게 아닌데 주님의 뜻 때문에, 주의 뜻이면 했으니까. 주의 뜻 때문에 존재하는데 우리는 내 뜻을 고집했습니다.” 라고 답변을 쓸 게 아니겠습니까. 답변만 그렇게 100점 맞으려고 잘 쓸 게 아니고 그게 우리의 실생활이게 한다면 여러분들은 그걸 얼쑤 받아야 돼요. 그걸. 감사해야 돼요. 

야고보서4장13절, 14절의 그 문제 던짐과 거기에 대한 정답을 우리보고 쓰라고 한다면 우리는 시험 좀 잘 치니까 쓰기는 하는데 이게 실제 내 인생으로서 푹 젖어든다는 것은 이것은 주님의 능력, 주님의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있는 말씀이 되게 하기 때문에. 살아있는 야고보서4장13절, 14절 돼야 하기 때문에. 

그러면 답은 답만 있어서는 답의 의미를 모르겠지요. 그럼 뭐가 먼저 되어야 됩니까. 문제 주어지고 답변 주어져야 되겠지요. 그럼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 주님의 던지는 야고보서4장 13절도 되고 그 다음에 뭐가 되고? 14절도 되고.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 

“여보, 우리 이제 회사 잘렸으니까 이제 경기도 동탄 가가지고 치킨집할까?” 이런 식으로. “몫 좋은데 누구한테 해가지고 해볼까?” 그럼 해야지요. 집에서 놀까요? 뭐든지 해야 될 거 아니겠습니까. “애도 둘이나 되는데 뭐든지 해야 될 게 아니냐, 애도 어린데.” 이 사고방식의 문제점은? 이렇게 문제점이라고 지적한 사람이 오히려 욕을 얻어먹을 지경이에요. 

그러면 그 중에 하나가 복음 아는 아내가 하는 말이 “여보, 우리는 그냥 주의 뜻이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리니.” 이렇게 하면 남편이 뭐라고 합니까? “당신의 답변은 항상 모호해. 너무 관념적이야. 구체적이 아니고 추상적이야. 당신은 너무 비겁해. 대답하는 것이. 이러면 정말 당신 같으면 대책 없잖아.” 그러면 또 아내가 하는 말이 “참읍시다. 주께서 기다린답니다.” “어디에서?” “담 뒤에서.” “담 철거하는데, 어느 담에서 기다리는데?” 

그러니까 우리가 나오는 모든 답변이 주님의 일이 우리하고는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에 그 답변을 우리가 쏘아내도 답을 내는 우리가 내가 봐도 내가 허황 돼. 내 자신이 좀 한심하다는 느낌이 안 듭니까? 차라리 그보다도 구체적인 것. “새벽기도 40일 연속 나오세요.” “가서 기다리세요.” 이것보다 훨씬 더 처방전이 낫지 않습니까. 

우리가 늘 꼼수 부리는 거 우리는 늘 뭔가 복음들을 때는 그렇다 해놓고 돌아서면 자기 스토리, 자기 역사, 어떻게 또 용두산 엘레지처럼 계단 밟고 올라가가지고 지금보다 내일이 더 낫고 내일이 더 낫고 미래를 위하여 한 발자국부터 지금부터 노력하면 그만큼 대가가 보상이 주어진다는 이런 원리를 꼭 고수하고 싶다고요. 

그래서 되고자 하는 게 뭐예요. 갑자기 강의가 끊어졌습니다. 되고자 하는 게 뭐입니까. 용두산 179계단 올라가서 뭘 할 거예요. 뭐 할 거예요. 대한민국 독립만세 할 거예요? 뭐할 거예요? 그러면. 

야고보서4장16절 봅시다.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주의 뜻입니다. 해놓고 행지 아니하면 뭡니까? 죄니라.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삶은 뭐를 보여주는 것이냐, 바로 우리가 몰랐던 죄를 보여주는 것. 이것이 주님의 사명입니다. 

그 관계로 인하여 우리는 죄를 보여주고 주께서는 죄를 용서하므로 그 관계가 우리로 하여금 성도라고 칭하는 겁니다. 우리 이름을 쓰고 읽기는 성도라 읽으라 이 말입니다. 우리 이름을 쓰고. 아무개 이름을 쓰고 이름은 성도가 되는 거예요. 

죄를 안 지을 수가 없어요. 문제는 죄가 아니라고 우기는 게 문제거든요. 왜? 새로운 범주가 안 들어왔으니까. 담이 있고 주님 밖에 있고 우리는 안에 있다는 새로운 범주가 없으니까. 맨날 하는 소리가 뭐냐 하면 “최선을 다하면 좋은 결과가 있겠지.” 라는 거예요. 최선을 다하면. 최선이 최악이에요. 우리는 악밖에 나오는 게 없습니다. 정말 어려우면 악만 나와요. 최악만 나와요. 

지금 우리가 선을 행하는 것은 아주 배부르다는 뜻이에요. 지금 배불러. 단팥빵도 먹었겠다. 삶은 계란도 먹었겠다. 배불러. 하지만 정말 어려울 때는 예수 하나님 보이는 게 없습니다. 살고보자는 겁니다. 죽기는 왜 죽어. 야고보서4장15절과 정반대입니다. 죽기는 왜 죽어. 니가 죽어라. 그래서 주님이 죽었잖아요. 우리는 항상 죄인 줄 모르고 버티는 거고요. 버티는 외에는 하는 재주가 없어요. 버티는 재주밖에 없어요. 그런데 주께서는 그것을 이쁘게 보지는 않지만 그걸 죄로 보시고 주님께서 문 밖에 나가계시는 겁니다. 죄는 죄대로 알려주시고 문 밖에 나가계시는 거예요. 

그리고 주님은 문 밖에 나가 계시고 우리는 문 안에 있으니까 니가 아직도 남아 있는 죄가 있을 거니까 평생 모든 니가 원 없이 죄라는 것은 죄다 다 지어버려라. 모든 죄는 죄다 다 짓기를 조장하시면서 결국은 마지막에는 뭐냐 하면 자기 풀에 내 풀에 내가 포기하게 만들지요. 내 풀에. 

그게 뭐냐, 내 역사를 찢어버리는 거예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사이는 주님의 새로운 계획이 삽입돼 있기 때문에 어제의 나를 오늘의 나라고 우기면 안 된다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어제의 나는 어제의 고민거리와 오늘의 고민거리 다르지요. 예측하지 마세요. 

이건 건방진 겁니다. 예측하는 건 건방진 거예요. 동탄에 치킨집하면 한 달에 얼마고. 예측하지 마세요. 그냥 그 가게 하나 했거든 이것도 죽으라는 주의 뜻인 줄 알고 이 세상 빨리 이별하라는 뜻인 줄 알고 대출 한 5억 내가지고 치킨집하는 거예요. 파리바게트 하던지. 죽으면 대출 안 갚아도 되잖아요. 죽었는데 돈을 갚을 수가 있어요? 5억 내려면 10억 있어야 내지만. 그것도 없으면 대출도 못 내요. 대출 내가지고 이제 직장 잘렸으니까 파리바게트 해볼까. 이런 식으로. 

이게 뭐냐 하면 결국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이게 살라는 일이 아니고 이게 어제의 나와 오늘 가게 한 나와 다른 나인 거예요. 어제 뭘 해야지 하는 그 나는 없어졌고, 오늘 지금 이 가게를 차리고 하게 하신 오늘치의 일이 내 일이 아니고 누구 일이다? 주의 일을 되게 하는 거예요. 그리고 아침에 청소하고 저녁에 자게 되면 내일되면 내일 가게에 불이 날지 아니면 손님이 되게 해가지고 빵 맛있다고 소문 나 있을지 그건 주께서 하실 문제고. 주의 문제고. 우리는 주께서 하시는 그 일에 봉사할 뿐이지요. 

참아라, 하는 것은 주의 몫이고 못 참는 것은 우리의 몫이지만, 못 참아하는 우리가 참아라, 하는 주의 말씀에 봉사하는 식으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나는 틀렸고 주님은 옳았습니다.” 하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거예요. 나는 어떤 생각을 해도 이건 옳지 않은 거니까 내하는 일에 내가 논하거나 평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성경 마태복음7장을 봅시다. 잘했다, 못했다, 함부로 조심스러워도 평하지 마세요. 마태복음7장에 보면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라고 되어있어요. 
이 말은 모든 인간을 비판하는 자리에서 인간은 알지를 못한다. “나를 제대로 비판할 자리가 어디 있지?” 를 인간은 찾을 수 없다 말이지요. 없는 상태에서 남들이 이야기한 걸 가지고 나한테 적용하고 또 그걸 남한테 적용하고. 서로가 서로를 비판하는 그런 일 말고 달리 초월적인 비판을 인간은 해낼 수 없습니다. 이건 인간은 정답을 모른다는 뜻이에요. 내가 누군지를 모른다는 뜻이에요. 

내가 누군지를 모르지만 내가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은 무조건 주께서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어야 돼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할 때 마옵시고에 해당되는 일은 아주 재주껏 잘하고 있다는 것.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대가는요, 어제로 우리의 수명이 다해도 우리는 할 말이 없어요. 

어제까지 한 우리 짓은 어제로 우리의 운명하고 우리를 달리해도 우리가 목숨 끊어져도 마땅한 나쁜 짓을 어제까지 해온 거예요. 오늘 더불어 사는 것은 내가 착해서 사는 게 아니고 나쁜 짓은 나쁜 짓으로 돌리고 또 새로운 나쁜 짓을 위해서 또 주께서 살게 하셔서 또 나쁜 짓 짓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나쁜 짓이라 하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주의 말씀에 의하면 그런 말씀을 우리가 못 지킨다는 거예요. 왜? 주의 말씀이니까요. 주님이 지키지 우리가 우이 지킵니까. 내 말입니까. 내가 지키게? 주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가 못 지키는 거예요. 그런데 마귀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지킬 수 있다는 거예요. 마귀의 구조는 뭐냐 하면 니 옆에서 누가 이야기하던지 니 인생은 니가 관리해야지. 니 아니면 아무도 관리 안 해준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내 등짝에는 코가 없는데. 왜 등짝에는 눈이 없는데? 왜 이 모양 이렇게 만들어놨어요? 왜 해는 있고, 달이 있습니까? 

이건 제가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욥보고 이야기한 거예요. 니가 지금 왜 고난 받느냐 이유를 따지는데 이유를 따지려면 그 변수를 우주의 모든 천체까지 확장시켜야 된다는 겁니다. 주님의 의견은. 나는 왜 아픕니까? 묻기 전에 아무도 개간하지 않는 사람 없는 황무지에 비오는 이유를 니가 아느냐, 그거 알면 니 알게 될 거다. 니 그거 알면. 

저건 몰라도 되고 이건 알아야 되고 그런 거 없어요. 전체를 다 알아야지. 야고보서2장10절에 뭡니까. 사람이 모든 율법을 지켜도 하나를 어기면 어떻게 다 어기게 된 이유가 뭡니까? 알면 다 아는 거고, 모르면 다 모르는 거지. 부분적으로 안다는 것은 그런 반칙이 어디 있느냐,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이야기죠. 

주님께서 오늘 야고보서5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거에요.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그런 말도 되지도 않는 소리 하지도 말라는 말이죠. 이미 문 밖에 계신 분의 요소가 문 안에 있으면 주님이 참았던 그 참음에 이미 우리 안에 들어온 거예요. 예수님이 경험했던 거 있잖아요. ‘당하고 당했지만 두고 보자. 내가 너희를 심판한다.’ 고 마음이 이미 우리가 요청하지 않았는데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버렸어요. 이것보다 더 귀한 게 있습니까? 이것보다 큰 기쁨 있어요? 

이보다 큰 기쁨 없어요. 왜? 내가 생각하지 않는 예상 밖의 다른 요소가 주님의 요소가 들어와 버렸다 말이죠. 이래도 참아라. 저래도 참아라. 이건 뭐냐 하면 니 인생은 니 인생과 상관없는 예수님과 상관하는 일이 니 속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다 말이지요. 니가 하는 일은 허접스런 일로 보이지만, 이건 예수님 나의 사명이 돼요. 니가 죄 짓는 것도 누구 사명이라고요? 주님의 사명이에요. 

끝으로 죄 짓는 거 다시 해보지요. 인간이 죄 짓는다는 말은 인간은 죄 지었다. 할 때 그거 오해한 겁니다. 인간은 죄 짓는다 할 때 무엇을 염두에 두느냐 하면, 지금 요 짓은 죄고 요 짓을 안 한 요거는 죄가 아닌 선한 일이라는 선악의 논리에 의해서 죄라고 규정한 겁니다. 

“나 뭐든지 나쁜 짓 했어.” 라고 할 때 그럼 나쁜 짓 아닌 게 뭔가를 지가 안다고 우기기 때문에 나쁜 짓이라 하거든요. 그런데 인간은 선악 자체를, 성도는 선악 자체에 있으면서도 결과적으로서는 주께서는 선악으로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뭐로 구원하느냐 하면 사랑으로 구원하는 겁니다. 

사랑 안에는 무엇이 없다고 했습니까? 사랑 안에는 요한일서4장에는 사랑 안에는 뭐가 없어요? 두려움이 없지요. 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안 두려 우니까. 자기가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행악질에 대해서 본인이 겁내지 않고 있으니 세상에 자기보다 무서운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 앞에서 자기를 내팽개쳐버리니 자기하고 상관없는 일에 자기가 말려들었으니까 결국은 내 인생은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 되잖아요. 그리고 두려운 일이 있을 리가 없지요. 내가 나한테 논하거나 평하지 않겠다는데. 니는 채점 70점, 80점. 평하지 않겠다는데. 인생을 70점 평하는 것은 100점을 안다는 뜻이거든요. 100점이 어떤 상태인지를 안다고 했을 때 70점이라는 게 성립된다 이 말입니다. 논리적으로. 

우리가 100점을 알아요? 100점도 모르면서 무슨 70점입니까? 아마 70점이 만점일걸. 만약에 40점이 만점이면 40점이 만점이에요. 지금 내가 있는 일이 빵을 먹든 내 일이 주의 일이라니까요. 아이고, 빵을 먹을 때 질질 흘렸느냐. 질질 흘리는 것이 주의 사명이에요. 아이고, 흘렸다. 봐~ 행동 봐! 줄줄 흘린 것을 이것은 해서는 안 될 짓으로 여긴다는 그 자체가 빵을 먹는 동시에 뭐가 나왔어요?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선악체제가 죄라는 이름으로 발각된 거예요. 

두 시간 뒤를 살아있을지를 보장할 수 없습니다. 오늘 아침에 잠이라는 게 뭐냐 하면 죽음이거든요. 네비나스가 그런 이야기했는데. 잠이라는 것은 죽음이에요. 잠잘 때는 잠잔다는 의식조차 없기 때문에 죽음이에요. 의식이 끊어진 걸 죽음이라 하지 않습니까. 잠 잘 때는 외부에서 잠자는 것을 알지 내부는 몰라요. 수면내시경 해보세요. 나는 지금 자고 있는데 지금 간호사가 침대로 옮긴다. 그런 거 없어요. 깨보면 벌써 지금 의사가 내 앞에 있고 의사의 가운이 보이고. 지금 간호사가 마취제로 프로포플을 집어넣는다. 어디까지 들어왔을까. 어디까지 들어왔을까. 깨보면 벌써 회복실에 와있어요. 

그 잠을 평생토록 늘인 것이 뭐냐, 야고보서4장15절입니다. 너희가 잠간 자는 안개 하는데, 잠간 자는 안개에요. 잠 같은 거예요. 인생이라는 것은. 자다 깨어나 보니 회복실이에요. 천국이에요. 그럼 그 사실을 어떻게 아느냐, 모르지요. 이게 어떤 지혜로 아는 게 아니고 이 세상은 인간들이 활동하는 영역이 아니라 무대가 아니라 우리 주님이 무대라는 사실을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그게 감지된다는 거예요. 

어떤 논리로 아는 게 아니고 그냥 감지되는 거예요. 감각되는 거예요. 하루, 하루가 이게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고 주의 뜻대로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고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불만을 품는 것조차도 차질 없이 불만을 나타내요. 차질 없이. 차질 없이 분노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다시 성령께서 와보니까 아~~ 내가 또 역사 내 찬란한 내가 이만하면 인생 괜찮게 살았잖아. 나름. 라고 내 역사를 또 따로 준비하려는 또 죄를 범했다는 사실, 죄 아닌 게 없다는 것. 

그래서 주께서는 내 뜻대로 안 해주신다는 것. 이 기쁨은 사랑에서 오는 기쁨이에요. 이미 사랑은 어떤 두려움 없습니다. 사랑은 두려움 없고 사랑은 왜 두려움이 없는가, 따질 수 있는 문제지를 찢어버렸어요. 그걸 골로새서2장에서는 문서를 찢는다. 율법의 문서를 찢어버린다는 거예요. “시험 치지 마! 시험 치지 마! 합격이야!” 찢어버리는 거예요. 

니가 잘하고 못하고 따질 수 있는 어떤 여건도 없애버려요. 선악과 자체가 잘못이기 때문에. 빵점이기 때문에. 문제 시험을 치면 뭐합니까. 쳐봐야 선과 악, 선과 악, 이런 오답만 나올 뿐이지. 그걸 찢어버리는 거예요. 

그냥 사랑으로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심판 대상이 안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사명, 우리의 사명이 아니고 예수님의 사명을 감당하시길 바랍니다. 

참아라, 이제는 그냥 참지 마시고요, 전에는 억지로 참았는데, 이건 바보같이 히죽히죽 웃으면서 기계가 되어가지고 등신 같은 기계가 되어가지고. 아, 이게 기계 되는 게 참는 거구나! 참는데 별로 힘들지 않는데. 아, 이것도 참는 거구나! 이리 이해하시면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우리가 이 발목을 내가 내 발목을 잡았습니다. 쓰레기 같은 것도 가치 있다고 놓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그것마저 주를 아는 계기가 된다는 사실을 또 다시 알고 모든 범사에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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