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강의

봉사 19030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4. 2. 17:35
2019-03-09 00:28:13조회 : 274         
봉사 190308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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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은주 (IP:119.♡.152.148)19-04-02 13:23 
안양20190308a야5장1절(봉사)-이 근호목사 

야고보서5장1절에 보면 부한 자들아, 되어있지요. 들으라, 부한 자들아, 에서의 중요한 것은 이 들으라 부한 자들이 부한 자보고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부한 자들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사도가 부한 자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부하지 않고 나도 부자 욕 좀 해보자고 하는 우리보고 이야기하는 이야기라고 여러분이 아시기 바랍니다. 

“그래, 나는 부자 아니니까 나는 빼주세요.” 이런 거 안돼요. 성경에 그런 거 없습니다. 부한 자들아! 할 때는 우리보고 들으라는 이야기에요. 왜냐하면 우리가 은근히 부에 대한 질투 같은 게 있기 때문에. 남을 욕한다는 것은 질투심 때문에 될 가능성이 굉장히 많습니다. 자기가 뭔가 좋은 건데 못 가졌다는데서 오는 결핍을 질투심으로 마저 메꾸기 위해서 자기 조정이라 하는데 스스로 남한테 밀리지 않도록 내가 나를 조절하는 겁니다. 

이게 참 무서운 거예요. 이게 큰 죄입니다. 이게 죄에요. 자기 조절. 자기 조절 이런 짓하면 안 되거든요. 사실은 자기 조절. 성경에서는 자기 조절을 오히려 유도하고 있잖아요. 자기 관리, 자기 절제, 이런 성경 비슷한 말이 나오니까 자기 조절을 해야 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데, 자기 조절을 하게 되면 계속 떨어지는 결과물은 어디에다가 치중해야 돼요? 자기에게 치중해야 되지요. 그러면 자기를 부인하라 하고 점점 멀어지는 겁니다. 자기를 부인하라. 

주님은 우리한테 책임을 묻지 않거든요. 하나님이 우리한테 책임을 물을 것 같으면요, 메시아를 보내지를 않았습니다. 주님 섬길 때 똑바로 섬겨라! 그거 하라고 메시아 보낸 게 아니에요. 내가 메시아 보내줬잖아. 그러니까 메시아를 잘 대접하란 말이야! 이런 식으로 우리한테 메시아를 보내줬다는 그런 근거로 또 우리한테 책임을 묻고 그렇지를 않아요. 

메시아가 우리의 손님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에 보면 이런 게 있지요. 신용불량자 나왔을 때에 누구한테 자문을 얻느냐 하면 법무사한테 주로 가요. 법무사한테. 그럼 법무사가 신용불량자한테 대접 잘하세요. 똑바로 하세요. 이렇지 않지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수수료만 주시면 제가 알아서 가장 적절하게 채무문제를 해결해 드리고 도와드리겠습니다. 하잖아요. 그럴 때 성경에 나오는 이 단어가 적절한 거예요. 보혜사,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 이거와 가장 비슷한 직업이 오늘날 뭐냐 하면 간호사에요. 간호사. 옆에서 도와주는 거예요. 치료된 사람을 잘 건사해 주는 것. 치료된 사람을. 이미 건강하게 된 사람을 건강 유지하도록 돌봐주는 겁니다. 참 친절하신 하나님이시지요. 

니 건강했지. 이젠 니가 알아서 해라. 이런 거 없어요. 예수님 보내주시고 그 다음에 또 누구까지 보내주신다? 성령 보내주시는 거예요. 예수님 보내주시고 땡하고 손 떼는 거 아닙니다. 성령 보내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모르면서도 예수 믿었으니까 이제 제가 알아서 식업 난 이제 정신 차린 내가 알아서 내 인생 내가 욕심조절하고 죄 조절하고 이리 나온다면 누구 보내심이 의미가 상실하지요? 성령오심이 아무 의미가 없지요. 

예수님 보내주시고 성령 보내주시는 것은 예수님도 먼저 성령 보내주셔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자기의 메시아 의무를 다 마무리 짓도록 그렇게 성령께서 도와주셨습니다. 예수님 혼자 하신 게 아니에요. 희생은 혼자 하셨지만 모든 희생을 도와주시는 것은 성령께서 그렇게 했고 그건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자기 조절을 계속해 봅시다. 이게 자기 조절을 나서버릴 때에 여기에 뭐가 따라오는 개념이 있어요. 그것도 상당히 나쁜 개념인데 뭐냐 하면 ‘희망’입니다. 희망은 자기 조절과 관련되어있어요. 어떻게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내가 저걸 반드시 희망, 다른 말로 하면 요걸 기대함이에요. 내가 기대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저 기대를 쟁취하고 획득하기 위해서는 필히 나는 어느 작업에 돌입해야 하느냐 하면 내가 나 조절에 나서야 내가 기대했던 그 소기의 성과를 소유할 수 있다는 의식이 이렇게 같이 관련되어있습니다. 

그러니 희망만 없다면 자기 조절이 있어요? 없어요? 희망이 없으면 그냥 자살하지 뭐하려고 자기 조절하겠어요. 뭔가 내다보는 게 있기 때문에 은근히 내가 아직도 버텨야 될 이유가 있기 때문에 하잖아요. 희망이 없으면 자기 조절도 없는 거죠. 같이 없지요. 그러면 희망은 왜 생기느냐 하면 나는 안 망가져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안 망가져야 된다. 이게 나는 안 망가져야 된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바로 예수님의 복음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에요.  

이 세상에서 악마가 주는 시험과 협박과 요새 또 유행하는 개념, 급박 고전적인 개념입니다. 협박, 급박, 두려움, 공포, 이 모든 바탕에는 뭐가 깔려 있느냐 하면 나는 안 망가져야 된다. 모든 교육의 상담이라든지 심리적 상담의 그 기저, 그 그라운드 바탕에는 나는 절대로 이 세상은 망가져도 나는 안 망가져야 된다는 고집 같은 게 있어요. 목회하시잖아요? 망가지고 싶어요? 안 망가지고 싶어요? 교인 앞에서 자기가 좀 존중받는 목회자 되고 싶은 생각 없습니까? 그게 주님의 얼굴을 모독하는 거예요. 깡그리 짓밟는 모습이에요. “망가져도 괜찮아요.” 라는 목회를 해야 돼요. 

아~~ 이거 진짜 목사님이 이 목사한테 잘 배워라했는데 잘  배우는 거예요. 욥기에서 마귀가 계속 하나님하고 내기하는 게 뭐예요? 인간은 한계가 있다는 거예요. 그건 하나님도 아시고 악마도 알아요. 욥이 한계까지 가는데 악마가 도와주지 않으면 욥은 자기 한계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 한계가 뭐냐 하면 내가 하나님 앞에 있는 대로 순종  하고 믿음 다할 테니까 제발, Please 제발 나를 안 망가지게 해주시옵소서! 만약 이 대로 망가진다면 저 차라리 제가 안 태어났으면 저한테 이익이 될 뻔했습니다. 하는 거예요. 욥의 그러한 본심이지요. 여러분, 제가 전에 여러 번 했는데 진심하고 진리하고 같아요? 안 같아요? 진심은 진리다. 아니지요. 진심은 본심이에요. 

본심인데 인간은 우기지요. 내 솔직함이 곧 진리이어야 한다고 우기는 겁니다. 진리어야 한다고 우기는 겁니다. 회사에서 신입사원 여자직원을 뽑는데 다른 사람은 토익이 900점이고 하는데 가만히 보니까 옆 사람 보니까 자기는 스펙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면접 보면서 막 우는 거예요.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지금 암 걸려서 말기인데요. 하면서 이리 나온다 말이죠. 회사 업무의 생산성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 자기 삶의 시달림가지고 막 울고불고 내 반드시 해가지고 병든 엄마와 불쌍한 애를 돌봐야 한다고 할 때, 그러니까 찌질이죠. 

제가 만약에 면접관 같으면 그 면접하는 아가씨 호소에 그 자리에서 웁니다. 울고 위로해 줍니다. 불합격시켜요. 합격은 회사에 얼마나 생산성을 보탤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있는가가 합격해야지 동정하는 거 하고 달라요. 그 아가씨는 뭘 이야기했습니까? 다른 사람은 실력을 이야기할 때 자기는 진심을 이야기했지요. 진심은 회사에 진리입니까? 아닙니까? 진리가 아니지요. 울고불고 한다고 천당 갑니까? 못가지요. 아픈 것은 아픈 거 맞아요. 괴로운 것은 괴로움 맞아요. 그걸 거짓되다고 우리는 욕하면 안돼요. 속 쓰리지요. 그러나 천국의 원리와 부합되느냐 그걸 생각해야 돼요. 

천국의 원리와 전혀 부합되지 않습니다. 천국의 원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아는 원리는 너는 어떻게 고생해도 그건 니가 고생하기에 마땅함이라. 망가져도 니가 원래부터 안 망가져야 될 인간이 망가진 게 아니고 처음부터 애초부터 어떻게 더 많이 망가져도 니는 입 다물라. 너는 입 다물라. 

거기에 대해서 권리라든지 자기 주장할 수 있는 입장을 모른다. 왜냐 하면 니는 니 진심을 이야기했지만, 주님, 하나님 안목을 니가 전혀 모르고 하나님 앞에서 니 진심은 모른다. 하나님 안목은 뭐냐,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신 거예요. 바로 저주받아 죽는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내 자리는 그 자리에요. 십자가 자리에서 죽어 마땅한 거예요. 죄로 마땅한 거예요. 

그래서 야고보서4장 끝에 한 번 봅시다. 4장15절, 5장 들어가기 전에 4장15절 다시 한 번 정리해야 돼요.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4절에 보면 우리가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지요. 잠간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입니다. 그러면 안개 주제에 희망을 갖겠다는 자체가 이건 자기의 본질과 대치가 되는 주장입니다. 안개 같으면 안개 다워야 되지요. 안개는 안개다워야 돼요. 

안개가 뭉쳤다고 해서 그걸 실체라고 우기면 안 된다 말이죠. 매일같이 우리는 슬라이스처럼 전기톱에 고기 썰려나가듯이 대패삼겹살 있지요. 백종원이가 히트 친 거. 계속 슬라이스처럼 잘라내는 것처럼 우리는 매일같이 이렇게 더 잘게, 잘게 부서지는 거예요. 부서지면서 우리는 그 부서지는 내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막강한  내 인생이 내 뜻대로 안 되는 데서 나오는 강력한 숨어있는 반발심이 우리 속에서 이렇게 괴물처럼 고개를 내밀게 되어있어요. 

그게 우리 안에 어두운 동굴 안에 잠복되어있던 겁니다. 마귀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 속에 마귀를 끄집어내는데 성공하시지요. 불신자 같으면 그냥 내어버리기 때문에 수술을 안 해요. 주님께서는 완전히 절개합니다. 절개하고 암 조직을 물컹하게 끄집어낼 때 이게 십자가의 위력이다 말이죠. 십자가의 위력을 설명할 때 가장 간단한 이야기는 뭐냐 하면 낯설다는 겁니다. 십자가가. 

뭐 집께나 잘 살고 훌륭하고 남한테 욕들은 적 없고 착실하게 살아왔는데 어느 날 성령이 와서 십자가를 알았다는 말은 자기가 지금껏 살아온 것과 연계성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연계성이 하나도 없는데, 쓱~ 하고 십자가가 들어와 버린 거예요. 뭐지 이거? 

착실하게 되면 복 받는다. 주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생각이거든요. 죄 안 짓고 바르게 살게 되면 뭔가 좋은 날 볼 거야. 희망을 가지니까 나는 자기 절제와 자기 조절에 충실해야 돼. 이 관계망, 이 그물망인데 십자가가 훅 들어오면 낯선 것이 들어와 버리면 지금껏 했던 것은 전부다 폐기처분하고 이것은 쓰레기통에 다 던져버려야 되거든요. 여기서 오는 희열, 기쁨, 말할 수 없지요. 

이걸 내가 살아왔던 이 자기조절 모든 것이 결국 뭐냐 하면 사람과 상대하는 거거든요. 사람과 상대. 사람이 왜 인생 피곤합니까? 사람과 상대하기 때문에 피곤한 거예요. 그러나 십자가가 훅 들어오면 이제는 사람 상대할 필요가 없어요. 자유에요. 자유. 사람을 자꾸 안목, 시선, 평가, 부모는 자식한테, 자식은 부모한테, 아내는 남편한테, 남편은 아내한테, 그거 너무 스트레스 받는 거예요. 사람 의식하는 게. 뭐 공부하겠다고 밤중에 돌아다니느냐. 성경공부 한다고 돌아다니느냐. 이러한 남편의 잔소리도 너무 이게 스트레스 받는다 말이지요. 

그런데 내가 요청한 것도 아니고 쓱~ 들어와 버리면 이건 뭐냐, 니는 누구와 사귀라? 이제는 주님과 사귀는 거예요. 저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어요. ‘깊은 현실감’ 주님과 너무 가까이 사귀다보니까 이젠 주님만 생산하고 내 앞에 있는 사람은 이게 눈이 나빠 가지고 흐릿하게 보이는 거예요. 사람이 안보이고 안개로 보이는 겁니다. 우리 집에 손님이 열 명 온다. 안개 또 열 명 오는구나. 안개로 보이는 거예요. 왜? 너무 생생하기 때문에. 주님과. 

주님의 무게가 내 인생에 너무 대부분 차지하기 때문에 이제는 사람 상대하는 것은 건성 건성으로 상대하는 거예요. 건성 건성으로. “우리 회사 왜 지원하시려는 겁니까?” “뭐, 내가 좀 필요한 거 같아서요.” “뭐 잘하는 거 재주 있습니까?” “스펙 쌓았고 이런 일 잘합니다.” 면접관이 이야기하면 면접하러온 신입사원이 그냥 어디 툭툭 던지는 거예요. 내가 이 회사에 꼭 되어야겠다는 것은 아까 뭡니까? 희망이란 말이죠. 그런데 옆에 있는 지원자는 땀을 삐질, 삐질 흘리면서 넥타이 다시 한 번 모아 매면서 ‘나, 이거 떨어지면 벌써 12번째 떨어지는 건데. 요번 해가지고 요번 추석 때는 촌에 가야 돼. 이 회사 떨어지면 나는 이제 죽어. 지금 사랑하는 애인과 결혼도 못하고 미뤘는데 이거 해가지고 빨리 결혼해야지.’ 그러니까 바짝 긴장이 돼가지고 자기 조절되는 거예요. 예 썰! 예! 하고 있는데, 

사람하고 상대하지 않고 주님하고 실존으로 상대하기 때문에 남을 대할 때 편하게 대하지요. 의식하지 않고. 제가 면접관 같으면 그 사람 합니다. 그 사람해요. 왜냐 하면 눈치 본다는 것은 자기를 감춘다는 뜻이에요. 진짜 본심은 감추고 자기를 위장해서 자기를 조작해서 그 사람에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은 회사가도 나올 가능성 있어요. 아마 면접관쯤 되면 그런 것은 알 거예요. 저 사람이 진짜 자신감이 있는지, 아니면 지금 자기를 겸손해 보이려고 위장하는지 대번 알아요. 

야고보서4장에서 우리보고 뭐냐 하면 안개 같다 했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사실은 쓱 들어오게 되면 이건 낯설다 했는데 다른 말로 하면 예상 밖이에요. 결국은 이 세상은 예상 밖의 것과 우리가 예상한 것과의 경쟁마당 이리 보시면 됩니다. 

우리가 예상한다는 말을 쓴 것은 아까 기대한다. 또는 나는 희망을 가져야 돼. 했지요. 희망을 갖는다는 이것이 일종의 이 세상에서 악마가 제시한 인간을 꼼짝 못하게 만든 아주 마지막 무기가 희망이에요. 그 희망에 우리가 발목 잡힌 거예요. 악마한테. 

저는 거리에 가면서 취미 중에 하나가 운동할 때 심심하잖아요. 또는 시내 걸으면서 내 잘 아는 거리에 가면서 뭘 보느냐 하면 저 가게 새로 새 간판 걸었는데 6개월내 문 닫는다 내기 걸어요. 나 혼자서. 정말 우리 동네에 6개월 안에 다 문 닫아요. 혼자 꽃하고 축하합니다. 해놨지요. 6개월 되면 다 문 닫아요. 우리 동네에. 시장조사도 안 해봤어. 분명히 될 리가 없어요. 

그런데 폐업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게 뭐냐 하면 폐업이 안 되면 폐업보다 더 무서운 거예요. 2년 계약 해놨지요. 막상 해보니까 장사 안 되지요. 은행 대출 이자는 나가지요. 그러면 이게 계약 1년만 해도 빨리 1년 되면 손해보고 걷어치우고 딴 데 다른 장소에서 해야 되는데 이게 2년 계약이 되어 요새는 5년 계약 요새 법에 10년 계약한다고요. 

그러면 이건 뭐가 되느냐 하면 빼도 박도 못해요. 울면서 겨자 먹기로 계속해서 집세 나가야 됩니다. 나중에 다 떨어 먹고 나가야 돼요. 그런데 그 장사 안 되는 가게만 그럴까요? 우리 인생이 그렇습니까? 내 희망이 내 발목을 잡는다니까요. 진작에 희망을 버리면 될 거 가지고. 그 놈의 자존심이 뭔지. 

애초에 딱 신혼여행 갔다 오고 안 된다고 싶으면 갈라서야지요. 아직 혼인신고 안했을 테니까. 보통 혼인여행 갔다 와서 하잖아요. 그런데 남의 이 눈치 저 눈치 봐가지고 이러다 애 생겨버리고. 우리 주위에 그런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애 생기고 이혼하면 더 힘들다고요. 내가 이혼을 조작하는 것 같고. 빼도 박도 못해요. “엄마 그 사람 아무리 봐도 아니야.” 하면 친정엄마가 등짝을 들이 패면서 “야, 들어갈 때 오천만원 들었다.” 금전적으로 문제 잡고 들어오고요. “니 빚 다 갚을래? 니가 집안 우사 하려고 아예 하지 말고 아예 눈 꽉 감고 고추 단추 맵다하되...” 그런 노래 있지요. 우리 민요조 히트 친 대중 트로트 노래 있어요. 

여자의 일생은 참는 거다. 이래 가지고. 언제까지? 이건 무기한이에요. 내가 몸 담았던 곳에 내가 발목을 못 뺀다는 것. 그냥 안개처럼 왔다가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세상은 그렇게 만만치 않습니다. 이건 성경 말씀이고요.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일단 몸 담았으면 내 마음대로 못 뺍니다. 내 마음대로 못 빼요. 내 마음대로 폐업이 안돼요. 그런다고 자살하면 안돼요. 우리가 그런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그래서 이 야고보서4장에서 하는 이야기는 이렇게 보시면 돼요. ‘성도는 사적인 의도를 갖지 않는 사람’ 사적인 의도입니다. 사적인, 개인적인 의도는 없어요. 성도는 개인적인 의도는 없습니다. 어떤 보이지 않는 집단에 소속되어있어요. 교회나 또는 이스라엘이라는. 여기 야고보서1장에 흩어진 열두지파지요. 흩어진 열두지파가 동일한 원리에 의해서 지금도 움직이고 있습니다. 동일한 원리에 의해서. 

택배회사 직원들 많지요. 전부 다 자기가 돈 내서 차를 하던 간에 일단 대한통운이라든지 옐로우 캡이라든지 전부 다 어쨌든 간에 개인적인 사업체긴 하지만 그 상표는 전부 다 그걸 해야 돼요. 그거 해야 전화오던지 그럴 거 아닙니까. 이삿짐센터도 마찬가지지요.  

흩어진 열두지파가 아무리 개인적으로 놀아도 그것을 묶고 움직이는 것은 열두지파를 동일한 원리 안에서 움직입니다. 그러니까 각자 직업이 다 다르고 건강상태부터 인물부터해가지고 남녀노소 전부 다 달라요. 다르지만, 뭐 하나만은 같으냐 하면 절대로 하나님께서 이미 구원받은 그 집단은 사적인 의도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은 공통점이에요. 사적인 의도. 

아까 사적인 의도를 가지고 저는 희망이라고 했잖아요. 니가 힘을 갖던 있든 간에 관계없이 안개처럼 다루신다 말이지요. 그럼 안개처럼 살면 구원받습니까, 할 때 그게 바로 사적인 구원욕구에요. 그걸 용납하지 않아요. 저 어떻게 하면 구원받아요? 용납하지 않아요. 왜냐 훅 들어왔기 때문에. 구원받기 위해서 십자가를 믿자! 라고 그렇게 하게 되면 그것조차도 그것은 마귀의 교리에요. 예수 믿어야 피를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그것도 마귀의 교리입니다. 그 말이 뭐냐, 사적인 의도가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서는 뭐냐 하면 벌써 보편적으로 안개를 처리했기 때문에 안개가 무슨 사적인 의도나 가치가 있겠어요? 그냥 잠시 나타났다가 소멸하면 끝나는 거지요.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이거 무슨 뜻이에요? 개인이 있더라도 니는 니 의사에 의해서 움직이는 그런 대상이 아니다. 그런 뜻이에요. 이게 위에서 보는 드론에서 보는 안목입니다. 위에서 봐야 돼요. 아래에서 쳐다보게 되면 계속 내가 남아있어요. 

그래서 직업을 바꾼다든지 이제는 다 때려치우고 기도원에 가서 기도할까요? 이런 사적인 기대조차도 그것도 악마에게 발목을 잡힌 겁니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 하는데, 인간은 뭘 변신해도 유죄에요. 사적인 의도를 가지면 뭐든지 그건 주께서 용납할 수 없는 겁니다. 사적인 의도를 갖지 않는 상태에서 세상을 보게 되면 이 세상은 뭐냐 하면 이미 주님에 의해서 접수당한 세상입니다. 

야고보서5장 1절 이제 들어갑시다. 다시 한 번 적어볼게요. 세상은 어떤 세상이라고요? 주님에 의해서 접수 당했다. 주님의 나와바리에요. 어떤 것도 주님의 권한밖에 못 벗어납니다. 우리가 이것이 즐거움과 기쁨으로 다가와야 되는데 이게 기쁨과 즐거움으로 다가오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사적인 나와바리, 자기 영역을 고수하기 때문에 그래요. 접수의 반대말은 뭐예요? 고수에요. 고수. 

자기 고집하는 거예요. 고집하는 이유는 아까 이야기했지요. 안 망가지려고 하는 거예요. 안 망가지려고 고수하니까 손에 꿀 들고 아카시아 꽃 근처에 가면 누가 달려 듭니까? 난데없는 초청하지도 않는 비행물체가 마구 달려들지요. 벌떼면 괜찮은데 거기에 말벌도 온다는 게 문제에요. 귀신들 오면 괜찮은데 마귀까지 온다는 게. 귀신에 대왕까지 오는 거예요. 손을 놓으면 되는데, 자기가 망가지면 돼요. 나는 너무나 고상하고 나는 너무나 인격이 품위가 있는 품격이 있는 여자기 때문에 나는 안 망한다 하는데, 품격하면 강남에 가던지 해야 돼요. 

본인에게 마귀가 오는 요인이 작동하고 있는데. “목사님, 자꾸 마귀가 와서 나를 힘들게 합니다.” 본인이 뭘 놔야 되는데 안 놓고 있어요. 어떤 아파트에 보니까 시공업자가 세면대에다가 대리석을 깔아놨어요. 새집이라고 좋아서 들어가 보니까 거기서 라돈이 기준치12배가 나온 겁니다. 라돈이. 라돈이 언제부터 생겼느냐 하면 45억년이 됐대요. 45억년. 지구 역사하고 똑같아요. 방사성이니까. 

그걸 빼버리니까 다시 기준치가 됐어요. 원래 실내에 세면대에 쓰면 안 되는데 이쁘게 보이려고 시공업자가 했고 시공업자는 시행업자가 넣어라 해서 넣은 거예요. 그게 오늘 아침 뉴스에 나왔어요. 그 뉴스를 보고 복음하고 관련을 시켜보세요. 우리 속에 라돈 방사능이 나오고 있어요. 그래서 용감하게 꼴 보기 싫지만 망치로 해서 떼어버렸어요. 떼어버리니까 속이 시원하다는 거예요. 세면대는 엉망인데, 그건 다른 것으로 바꾸면 되겠지요. 

자꾸 내 것을 고수하면서 어디로 모이느냐 하면 교회에 모입니다. 그럼 교회에서 기다리는 것은 모든 신학과 교리는 악마가 다 접수했거든요. 교회의 모든 신학과 장로교건 뭐건 다 마찬가지로 접수했기 때문에 자기 것을 고수하는 고객만족이라고 고객이 자기 거 고수하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왔기 때문에 목사의 설교에서는 여러분의 희망 살리는 그 설교 외에는 나올 게 없어요. 

뭐라고 설교하느냐 이렇게 합니다. 착하면 희망성취하고 나쁜 짓하면 저주받아서 망합니다. 이거 하고 대나무 걸린 무당집하고 차이점이 뭡니까? 둘 다 인간관계 차이점이 뭐가 있어요? 도대체 어느 대목을 가지고 달라졌다고 하는 대목이 어디 있습니까? 없어요. 절에 가도 교회가도 마찬가지에요. 성당가도 마찬가지에요. 뭐가 거듭났어요? 도대체. 뭘 보고 거듭났다고 할 수 있습니까? 목사가 거듭 안 났는데.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목사들이 많이 들으면서 이 말이 맞아요. 맞긴 맞는데 그러면 교회가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럼 교회가 안 된다는 말은 같은 말이 뭡니까? 나는 안 망해야 된다. 손에 마귀가 오는 요인을 손에 쥐고 있어요. 자존심이란 이름으로 쥐고 있다고요. 

그럼 이리 이야기하면, “목사님, 그러다가 진짜 망해버리면 나만 손해 아닙니까?” 이렇게 하는데 그 사람은 뭘 놓쳤느냐 하면 그동안 살아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놓쳐버렸어요. 은혜를.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살게 된 거예요. 도와주셔서. 그 은혜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내가 노력한 것이 아니고 바로 저주받아야 마땅하다는데서 오는 십자가에서 나온 은혜에요. 그게 바로 이 성경해석의 핵심입니다. 

모든 은혜는 어디서 온다고요? 십자가에서. 십자가는 뭡니까? 십자가 세자로 뭡니까? 새 언약이에요. 새 언약. 이스라엘은 어떻게 운영된다? 언약으로 운영됐지요. 그럼 이스라엘의 존재의 이유는 마지막 언약이 올 때, 확연하게 드디어 마감으로 끝나겠지요. 완전히 다 드러나지요. 이걸 에베소서에서는 뭐냐 하면 숨겼던 창조의 비밀이 마지막 날에 드러났으니, 그게 바로 십자가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예정하신 숨겨있던 복음의 비밀이 마지막 때는 복음 그 자체로서 드러났다. 

그 복음이 뭐냐, 십자가의 비밀이지요. 이 말은 뭐냐, 세상을 해석하고 성경을 해석할 때 어디로 해서 시작을 출발해야 된다? 십자가로 출발해야 돼요. 십자가 기능이지요. 십자가로부터 출발해야 되는데 사람들은 성경 해석할 때 뭐로 하느냐 하면 기능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 존재에요. 누구 존재, 누가 있다. 누가 있음. 내가 있음. 내가 있는 내가 어떻게 잘 되겠습니까? 이렇게 해석하는 거예요. 내가 죽어서 천당 가겠습니까? 지옥 가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거예요. 

그러니 해석 자체가 다른 것은 다 주님이 접수해도 내 영역, 내 몸, 내 인생만큼은 주께서는 안 들어왔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알아서 하고 도와주시기만 하시고 나한테 그냥 훈계만 하시고 말씀으로 지키라는 말만 하시고 최종책임자를 내 인생이니까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하는 것이 마지막 버티기에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버티기를 잘하는 사람은 두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잘 몰라요. 하나는 이 만기, 두 번째는 강호동입니다. 천하장사된 거예요. 어지간히 해서는 안 넘어가요. 버티기에서 우리나라의 달인이에요. 그런데 인간성, 악마성은 강호동이보다 더 세지요. 우리 안에 강호동이 있고, 이 만기 있다고 보시면 돼요. 평생 동안 헛짓하다가 죽을 때 돼가지고 “아버지, 십자가 앞에서 아버지 죄인인 것을 인정하십니까?” NO. 천하장사에요. 천하장사. 앞에 이름 붙여요. 천하장사 우리 아버지라고. 

도대체 뭘 믿고 그렇게 버티는지 몰라요. 남 욕할게 아니에요. 우리도 그렇게 살아왔잖아요. 남하고 비교하면서 니가 잘 버티나 내가 잘 버티나 우리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부터 계속 학교생활자체가 오늘도 버티기. 니 도시락에 소시지 있다고? 나는 오늘 내 도시락에 계란후라이 해줬다. 이거 버티기. 이런 거 버틴다고요. 

치킨 집 차렸는데, 앞집에 치킨 집 생겼다고 버티기. 누가 간판 먼저 내리는가 보자. 치킨 한 마리에 5천원 갑자기 반값으로 내립니다. 저쪽에서는 졌다. 이쪽에서는 이겼습니다. 이 사회생활 자체가 나의 희망과 너의 희망과, 희망과 희망끼리 예상과 예상의 경계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뭡니까. 예상하는 것들을 치고 들어오는 예상 못한 낯설음의 경쟁 마당. 이것이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들으라, 부한 자들아, 할 때 전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이 세상은 누가 접수했다? 주님이 접수했지요. 주님 앞에서의 부한 자들아, 라고 했을 때는 결국 이게 부한 자들이라는 것은 3만불 이상, 십만불 이상을 논하는 게 아니고 부하고자 하는 모든 자들아. 정말 가난에 너무 너무 싫어. 애들 우리 형제들 8명인데 다 가난했어. 둘은 못 키워서 남의 집의 양자로 팔리고, 셋은 고아원에 가고, 나 어릴 때 생각하면 미치겠어. 라고 하는 사람의 한 맺힘 같은 거. 그런 게 있을 수 있어요. 

인생의 목적은 오직 하나가 되어가지고 뭡니까. 나 돈 벌어서 부모님 크루즈여행 보내주고 호강 시켜주겠다. 그 놈의 효심이 부모를 망쳐요. 오죽했으면 우리나라 사람 두 명이 스위스로 도망가가지고 거기서 안락사 했겠습니까. 자식의 효심피해가지고 내 죽고 싶을 때 죽는다. 내 인생 내 거다. 와? 자식이 뭔데. 내가 죽겠다는데 자식이 뭔데 효심발휘하면서 못 죽게 하느냐. 나 죽을란다. 해가지고 두 명이. 스위스에서는 안락사 된답니다. 참 좋은 나라에요. 경치만 좋은 게 아니에요. 앞으로는 지가 죽고 싶으면 안락사 말고 더 발달해야 돼요. 알아서 주위에서 의논해서 죽여야 돼요. 의논해서.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이 자리에 쓸데없이 공짜로 지하철타고 왔다 갔다 하는 거 그건 전부 다 제거대상 되어야 돼요. 저도 공짜로 타니까. 

여기서 부한 자를 하면서 너희가 금과 은은 3절에 녹슬었다 했지요. 금과 은을 한 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돈이라 하지요. 돈. 이 돈이 뭐냐 하면 돈은 이 땅에 최종 고정점을 이 땅에 두는 방식이 돈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발전합니다. 그런데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게 뭐냐 하면 이 세상 누가 접수했다? 주님이 접수했지요. 주님이 접수한 그 영역에서 돈으로 최종 고정점을 박을 특정한 장소가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그러니까 돈을 사랑하는 부한 자는 헛짓하고 있는 거예요. 뿌리를 박는데 예를 들어서 베네치아라든지 새만금있지요. 간척지. 간척지에 100층짜리 빌딩 지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짓지요. 간척지인데. 뿌리가 없잖아요. 100층 하려하면 그만큼 내려가야 하는데 뿌리를 내릴 데가 없잖아요. 단단한 암석층이 나올 때까지 뚫어야 하는데. 네덜란드 같은데도 마찬가지고요. 

이 땅이 안전빵으로 삼을 수 있도록 이 세상에 그런 장소는 이 땅에 없어요. 그러니 이 부한 자들의 특징이 뭐냐, 죄를 짓는 게 아니고 무지한 거예요. 죄를 지으면 반성이라도 가능하지 이 무지할 때는 지가 똑똑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거는 가능성이 거의 없어요. 가능성이 없습니다. 무지한 건. 

부한 자들아! 다른 말로 하면 이 멍청구리들아! 이 말이에요. 이 바보들아! 이미 이 세상을 누가 접수했어요? 주님이 접수한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언약과 합치되지 않는 것은 전부 다 복음과 합치되지 않는 것은 뿌리 내릴 수가 없습니다. 다른 것은 복음이 거부해요. 밀어내게 되어있어요. 

그걸 제가 어느 설교에서 그런 얘기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때 도와주느냐 하면 오직 복음을 위해서 살 때만 도와줘요. 복음을 위해서 살 때만. 이 복음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우리는 망가져도 상관없어요. 주님. 저는 주님과 깊이 사귀는 것만 해도 너무 감사해요.” 이리 돼요. 주님과 깊이 사귀다보면 사람 사귀는 것은 뒷전입니다. 말을 바꿔볼까요. 사람 사귀는데 너무 몰두하게 되면 주님은 뒷전이 돼요. 이게 제로섬이 한쪽이 밀리면 한쪽은 줄어들게 되어있어요. 둘 다를 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그럼 사람을 사귀는 이유는 거기에 내가 안전빵으로, 내가 영원히 편하게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줄 수 있는 것이 그 사람한테 있다고 착각하고 그 사람만 붙드는 거예요. 옛날 여성들이 조선시대나 60년대나 70년대 마찬가지지만 여성들이 결혼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살기 위해서 했어요. 살기 위해서. 그걸 제도와 관습이라고 합니다. 

제도와 관습에서는 딸 낳으면 언젠가는, 딸 낳으면 뒤에 나오는 단어가 있어요. 치워버린다. 바퀴벌레입니까? 딸 낳으면 치워버려야 돼요. 첫 째 이유는 제사를 못 드리니까. 남의 자식이에요. 우리 집 가문에서 배제되는 거예요. 정통 족보에 들어갈 필요가 없어요. 그러니까 친정이라는 것을 잊으라는 말이죠. 경상도 말로 화장실하고 친정은 멀리 있을수록 좋다는 말이 있잖아요. 같이 나온 속담이 명태하고 여자는 사흘마다 패야 된다는 거예요. 그건 왜 그러느냐 하면 자꾸 어릴 때 친정에서 살던 관습이 있어서 안패면. 그쪽을 잊어라. 니는 이미 이쪽 귀신이지 시집귀신이기 때문에 쉽게 말해서 그쪽에서 귀염 받았다면 그걸 귀염을 대체해서 이제는 시집에서 귀염을 받아야 되고 그게 니가 새로운 삶의 의미로 장착되어야 된다. 

그럼 시집한테 시아버지한테 잘해주면 너는 딸처럼 귀염 받을 거다. 그러면 이게 너의 인생이다. 그리되는 겁니다. 그게 이렇게 인간성에 세뇌 받고 누적이 돼요. 누적이 되면 그 시집왔던 새댁이 나중에 시어머니 되어가지고 그 시어머니 관점에서 똑같이 자기 딸이나 아들한테 그대로 그게 대를 이어 그 교리를 전파하게 되어있어요. 

여자가 여자다움이라 하는 것은 니가 밥벌이하는데 몸을 다 던져야 돼요. 그게 불행하게도 1970년도까지입니다. 많이 봐줘도 80년대까지. 드디어 90년도부터는 여자들이 결혼 안 해요. 남자들이 결혼 안 하는 게 아니고, 여자들이 결혼 안 해요. 

자, 묻습니다. 너는 왜 나이가 서른이 넘었는데 결혼을 안 하느냐, 니가 결혼하지 않는 이유는? 답변은 딱 한 개 나와요. 혼자살고 싶어서. 답변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지금껏 혼자 살았잖아요. 주욱 혼자 살고 싶어서. 지금껏 혼자 살았다고요. 이 가정이 우선이 아니에요. 가문이 우선이 아니고 자기가 어릴 때부터 자기는 자기 방이 있어요. 어릴 때부터. 옛날에는 상상도 못했지요. 요새는 각자 자기 방 따로 있잖아요. 혼자 살았어요. 줄곧 혼자 살았기 때문에 혼자 살기 때문에 뭐가 이상하느냐 하면 혼자 살다가 옆에 붙는 게 이상해. 

혼자 살다가 혼자 사는 게 이게 가장 자유스러워. 왠지 몸이 거기에 익숙해졌으니까. 제가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방에 바퀴벌레가 있으면 짜증납니다. 그런데 하물며 바퀴벌레보다 큰 등치가 내 집에 내가 사는 영역에 들어온다? 내가 미쳤어요. 내가 왜 받아줍니까. 얼마나 많은 양보가 필요해요? 희생이 필요합니까? 아니 혼자 살고 직장생활해서  따박 따박 월급 나오는데. 살잖아요. 

옛날 여자들은 왜 시집갔다 했습니까? 못 먹고 살아서 간 거예요. 치워 버리려고. 공부도 안 시켜줬어요. 빨리 해서 그쪽 시집가서 제사음식만 만들면 돼요. 제사음식만 만들면 살 수 있어요. 제사음식만 잘해가지고 전만 찌익~~ 잘 구우면 살 수 있다고. 옛날 최고의 여자 과는 뭐냐 하면 이화여대 가정과였어요. 가정과 나오면 최고에요. 유명한 지휘자 정명훈을 키웠던 그 엄마가 이화여대 가정과 나왔잖아요. 가정과 나오면 여자는 최고로 가정과. 아주 훌륭한 전이나 잘 굽고. 

지금은 가정위주가 아니고 나 위주에요. 이상해. 내 곁에 누가 들어온다는 게 이상해. 그런데 어른들이 이야기합니다. 니 곁에 누가 들어온 것이 아니라 니가 그 집에 가야된다는 거예요. 그럼 여자가 “미쳤어요!” 지금껏 이만큼 내 것을 꾸몄잖아. 꾸몄다는 말은 자기 연출이라 해요. 자기 연출. 자기 연출은 반드시 뭐냐 하면 뭘 동반하느냐 하면 자기 방어가 동반되게 되어있어요. 자기 연출. 

아가씨가 차 사보세요. 안에 분홍색으로 허다합니다. 시트 바꾸고. 왜 그래요? 자기 연출이지요. 여자들이 치마를 짧게 입으면 남자들이 오해하기를 니가 남자를 꼬시려고 하는데, 꼬시려고 하는 게 아니고 자기만족이에요. 자기만족과 자기 연출이라고요. 니 만족하라고 하는 게 아니고 거울 앞에 내 만족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걸 요번에 어떤 글을 평하면서 그런 글을 썼지요. 아침에 거울 앞에서 자기한테 참배한다고. 참배하고 출근해요. 자기가 자기한테 참배하고 출근해요. 부모가 키워준 게 없어요. 어릴 때부터 자기 방에서 자기가 알아서 다 했어요. 그런 딸자식이 자기 방에 있거나 나와서 직장에 하던 간에 그 인간이 그대로 옮겨간 거예요. 누구를 용납할 여지나 공간이 없습니다. 그런 거 없어요. 

내게 이익이 될 경우에만 받아주되 그것도 잠시 한시적으로. 그래서 계속해서 사귀면서 내가 용납할 수 있는 실력이 있느냐를 계속 하다가 1년간 사귀다가 결별. 저 둘이 이제 2월달 되어, 3월달 되어 결별할 줄 알았다. 해가지고 아나운서하고 슈퍼모델 출신하고 결별. 이건 당연한 거거든요. 각자가 자기만족에 빠졌는데 그 만족을 누굴 위해서 약간 양보한다. 미쳤어요. 내가 그걸 왜 양보해야 되는데. 공들인 게 얼마인데요. 

그래서 제가 수련회 때 이야기했지만, 내가 우선이에요. 여자가 되는 게 우선이 아니고 사람이 되는 게 우선이라고 우리는 그런 식으로 1970년 이후에 여자가 되는 게 아니고 여자다운 여자가 아니고, 사람다운 사람 되는 것에 계속해서 교육을 그렇게 받았어요. 완전한 사람인데, 여자 남자를 찾는다는 것은 어떤 미흡함이 있을 때 찾지요. 꽃뱀이 아닌 이상 돈 있는 남자를 붙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이미 나는 나 혼자 사는 게 충분하니까. 뭐가 필요하냐, 개만 필요하면 돼요. 개와 고양이. 개와 고양이, 강아지 외로울 때. 개나 고양이 특징이 뭐냐, 잔소리가 없다는 거예요. 남자의 소원은 여자가 잔소리 안하는 거예요. 여자의 소원은 남편이 잔소리 하지 않는 것. 

이제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알겠지요. 사적인 기대와 희망으로 이렇게 뭉쳐진 곳이에요. 사적인 거. 그게 모여서 마귀의 악마의 나라가 된 겁니다. 각자 각자가 사적 하지만, 위에서는 악마가 그걸 다 그런 마음을 집어넣었어요. 그래서 악마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뭐냐 하면, 그 사적인 의미가 전부 다 무효화되는 어떤 대표되는 사적 개인이 등장해서 그분이 이 세상을 전부 다 접수하는 것을 악마는 극도로 질겁을 하면서 그걸 못 듣게 하는 거예요. 

“여러분, 교회에 헌금하세요.” “왜?” “여러분 교회잖아요. 여러분.” 여러분 교회 되면 이게 뭡니까? 이게 어떻게 되느냐, 이게 사적이 되지요. “당신의 교회가 커지면 좋겠어요? 나쁘면 좋겠어요?” 이리 묻는 거예요. 묻는 자체가. “교인이 다 떠나면 좋겠습니까? 부흥되면 좋겠습니까?” 물음 자체가 그렇게 물어요. 하면 된다. 조폭 구원인 동시에 감리교 구원. 하면 된다. 열심히 기도하면 된다. 이게 같은 말이거든요. 하면 된다. 

“여러분의 소망, 사적인 소망 이룰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여러분을 도와줍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잘못도 있지만, 누구 잘못이에요? 우리가 지가 안 망가져야 된다는 이 땅에 뿌리를 박고자 하는 우리 자체가 문제가 있습니다. 이 문제는 어떻게 이게 날아가고 망가져야 되는가, 두 번째 시간에 합시다.

 공은주 (IP:119.♡.152.148)19-04-02 13:24 

안양20190308b야5장1절(봉사)-이 근호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모든 세상을 주님께서 접수했다는 말은 부자들이 아무리 자기 사적으로 자기 자랑하고 돈 많다고 해도 그것은 독 안에 든 쥐라고 볼 수 있어요. 손바닥 안에서 논다. 손바닥 안에서 논다는 말은 시편39편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우리 인생이 손바닥 안에 있다는 거예요. 손바닥이 이리 있는데 이 안에 뭔가 흔적을 남겨봤자 이걸 손가락가지고 접어버리면 이걸 가지고 시편39편은 없음으로 해요. 없음. 

야고보서4장에서는 안개. 안개는 없어지는 과정까지 포함됐지만, 없는 것과 동일합니다. 없다는 말을 구약 전체 흐름가운데 이야기하면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허상이라고 해요. 허상. 허상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사야에 보면 우상이라고 합니다. 우상. 

이 말은 굉장히 중요한 건데, 허상이 허상으로 행세하는 게 아니고 허상에서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신을 창의해 내요. 창의. 신을 창작하는 거예요. 어디서 나온 신이다? 인간의 확대 이미지. 포에르바흐라는 그 철학자가 그 사람이 원래 신학을 했던 사람인데 아주 강력하게 이야기합니다. 신은 인간의 자아상을 크게 키운 것이다. 기독교만 그런 게 아니고 모든 종교의 신. 부처 다 포함해서 하는 겁니다. 

모든 종교에서 신을 어떤 대화의 상대로 삼겠다는 것은 이것은 보이지 않는 보이는 내가 보이지 않는 걸 보고 중얼 중얼거리는 거와 똑같은 것이지요. 일종의 치매현상이죠. 그저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처럼 부엌에서 종이 태우면서 습자지 태우면서 그저 남산위에 노루새끼처럼 잘 해주시고, 정한수 떠놓고. 정한수가 진짜 정한수인지 한 번 조사해보고 싶어져요. 옛날 수돗물 떠놓고 이건 뭐냐 하면 다른 식구들 보기에는 그 현장에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지만, 자기 몸의 이미지화되어버리면 삼신할머니가 음력으로 2월말에 오는 삼신할머니. 내 자식을 잉태할 때 보탬을 줬던 그 신이 삼신할머니거든요. 

그러니까 그 자식이 남산위에 노루새끼처럼 잘 뛰어 놀고 몸 건강하고 사업잘 되는 것은 역시 삼신할머니한테 약간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되는 거예요. 신하고 나쁘게 해가지고 손해 볼 일 없잖아요. 일부러 나쁜 관계는 할 필요가 없잖아요. 늘 돌아보기는 바빠서 못 돌아보지만 시간 정해놓고 일 년에 한 두 차례는 그 쪽 신한테 빌게 되면 그것이 신이 있든 없던 관계없이 북두칠성한테 빌던지 부처한테 빌던지 어떻든 간에 뭐는 남느냐 하면 자기의 성의는 표했다는 것은 남아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나한테 유리하게 예상 못한 미래에 작용한다는 것은 그것은 진짜 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만약 있다면 있다고 치고 하여튼 그 선행에 대해서는 반드시 값을 하는 식으로 나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나와 아니면 후세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라는 필연적 논리인 거예요. 인간의 필연적 논리. 

옛날 고대 문화에 보면 그 논리, 그 신이라 하거든요. 기독교에서는 우상하지만, 사실 신입니다. 신은 뭐냐 하면 누구 신이냐 하면 조상의 신이에요. 조상의 신. 그래서 죽었던 우리 조상님 어디가 있지? 라는 질문에 대한 그 당시 합리적인 답변이 뭐냐 하면, 죽은 자들 한 곳에 모여 있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우리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믿었던 그 신의 나라에 우리 죽은 조상들이 전부 다 합류해 있다는 겁니다. 제가 여기서 잠시 뜸을 들이는 이유는 이 논리가 창세기나 성경을 보면서 우리 논리와 별반 다를 바 없지요? 라고 묻고 싶어서 그래요. 

아브라함의 하나님한테 아브라함이 가고, 이삭의 하나님한테 이삭이 가듯이 그쪽 이방종교에서는 신이 조상의 하나님에게 가는 것이, 이쪽논리, 저쪽논리 동일한 논리인데 그쪽은 옳고 이쪽은 그르다는 게 이건 무슨 근거에서 그렇게 독선적으로 주장할 수 있느냐, 이런 반박이 나올 수 있다 말입니다. 그렇지요? 

너희 이방신은 가짜고 우상이다. 어디에 근거해서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지금도 복음 전하면 안 믿는 사람들 그렇게 이야기하지요. 왜 다른 사람을 존중할 줄 모르느냐 이 말입니다. 왜 그리 사고방식이 독단적이고 독선적이냐, 성질머리가 왜 그렇게 더러우냐, 배려심이 없어. 배려심이 없어. 인품이 왜 그래? 예수 믿고 잘 되는 줄 알았더니 인품이 더럽게 되어버렸네. 어찌 니 믿는 거는 옳고 남이 믿는 건 이단이고. 같은 인간의 존엄성으로서 그게 니 예의상 옳다고 생각해? 오히려 그런 반격이 들어올 때 어떻게 답변해야 되겠어요? 

사도바울은 어떻게 답변했습니까?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바울이 부지런히 돌아다녔지요. 온갖 사람 만났을 거 아닙니까. 거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반격했느냐 이 말입니다. ‘소리 없는 현실’이란 책 보신 적 있지요. 사도행전 녹취한 책이거든요. 거기에 이렇게 했어요. 오직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은 누구 밖에 없다? 예수님밖에 없다. 그게 있습니다. 복음은 십자가에 있어요. 

신의 존재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의 존재를 의미하지 않아요. 신은 살아계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있다. 그건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능히 나오는 거예요. 확실한 객관적인 증거가 있어야 돼요. 뭐냐 하면 빈 무덤이에요. 죽었다가 갔는데 보니까 무덤이 비어있다. 비어있는 그 분 어디 갔겠는가, 살아서 여기에 계시다. 어디에 계시는데? 복음을 전파하는, 전파하도록 현장에서 사건화 되어서 사건으로 계시는 거예요. 

사건으로 계시기 때문에 인간의 존재로서는 그게 잡을 수 있어요? 없어요? 못 잡지요. 여기 성경책이 있으면 성경책은 있다, 에요. 성경은 있잖아요. 존재잖아요. 나는 있잖아요. 존재는 존재를 손으로 붙잡을 수 있어요. 이렇게 붙잡을 수 있어요. 손으로. 팔을 도구화 시켜서. 여기 붙잡는 거 가지고 이게 어려운 말이지만, 몸의 현상에서는 몸의 확장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건 철학에서의 이론인데 들어보면 상식적으로 좋을 거예요. 몸의 확장이란 말은 뭐냐 하면 처음에 운전할 때는 운전대하고 나하고 몸이 따로 놀아요. 발발 떨지요. 그런데 한 10년 쯤하게 되면 운전대하고 나하고 몸이 하나가 되어가지고 저 앞에 골목에 차가 빠져나갈 수 있는지 없는지를 한 몸이기 때문에 감각신경세포가 전달되지 않더라도 감으로 딱 오는 겁니다. 통과한다. 그러나 초자 아줌마들은 벌벌 떨면서 안가. 뒤에서 빵빵거려도 가지를 않지요. 운전을 자주 안 해봐서 그래요. 

제가 아는 우리 친척 쪽의 어떤 60넘은 운전자는 평균시속140놓습니다. 멀리 한 번 갔다 오게 되면 속도위반 3장 끊겨 와요. 성격이 그래요. 앞에 110 놓으면 짜증나서 못 가요. 140 넘어서 추월해야 돼요. 그걸 운전 잘한다고 봐요. 신호무시, 법규무시, 140, 왜 운전이 그러느냐, 몸하고 운전대 차하고 자기하고 한 몸이기 때문에. 그러면 그것이 차에 관한 것 같으면 이게 범칙금만 까이지 별 의미 없는데. 

자식까지, 남편까지, 아내까지, 자기 몸의 확장으로 보는 겁니다. 아~ 이건, 이걸 정치적 전체주의라고 하는데 독재지요. 심지어 강아지까지. 그런 극단적인 현상이 뭐냐 하면 지가 사업을 부도났는데 애까지 해서 애의 미래를 지가 미리 예단해 버려요. 내 사업 망해서 니 고생하는 거 내가 못 보겠다. 번개탄해가지고 자기 인생도 아닌 애 인생을 같이 죽음 속에 몰아세워버리지요. 우울증 걸린 주부들. 지만 뛰어내리지 애를 데리고 뛰어내려. 왜 뛰어내립니까? 이게 몸의 확장이지요. 니는 내 몸이라는 거예요. 니는 내 몸이라는 겁니다. 스카이캐슬이에요. 아~ 이게 참. 

이걸 자르려면 내가 허상이라는 걸 알아야 돼요. 허상하고 없음의 차이가 뭐냐 하면 없음은 그냥 없는 거고 허상은 없는 게 있는 척 하는 게 허상입니다. 그 허상에서 뭐가 나온다 했습니까? 신이 나오지요. 우상. 우상이라 하는 것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니까 우상 버리고 그냥 간단하게 뭐냐 하나님 또는 여호와 또는 예수라 보자 말이죠.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입장이 아니고 내가 뭐라는 입장에서 예수를 믿던 삼위일체를 믿던 성령을 믿던지 십자가를 믿던 그 모든 것은 뭡니까? 우상이 되는 겁니다. 우상. 나를 위한 하나님. 성경에는 나의 하나님이 없습니다. 성경에는 나의 하나님이 없어요. 여기에 한 번 볼까요. 요한복음 한 번 봅시다. 

성경에는 사적구원이 없습니다. 나의 하나님은 없어요. 요한복음20장17절 읽어보세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나의 아버지 곧 뭡니까? 너희, 너희 하나님이지요.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가 되죠. 집단으로 본다고요. 집단. 너희라는 집단. 복수. 2인칭 복수지요. 너희 하나님이에요. 

내가 나의 하나님이라고 우기는 것은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만 나라는 존재를 예수님이 독점해 있다고 보면 돼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주의 이름’이라고 하는 거예요. 주의 이름. 주의 이름 앞에 나의 이름은 허구가 돼요. 허상이 돼요. 

왜냐 하면 우리의 이름은 우리의 혈통적 족보에서 나왔기 때문에. 앞에 성씨 붙잖아요. 그 육은 삭제 당하는 육이기 때문에 결국 안개가 됩니다. 안개가 무슨 성을 붙여요. 안개에다가 이름을 붙여요? 김안개, 박안개, 그런 거 붙일 거 없어요. 밤안개 붙일까. 그거 못 붙여요. 붙일 이유가 없어요. 우리가 있는 것은 우리의 존재를 대신하는 것은 주님이 대신 하시고 우리가 산다는 것은 뭐냐 하면 그 존재에서 나온 기능으로서 그 연계성 때문에 우리가 기능화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몸의 확장이 뭐다? 성도가 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에베소서에는 몸의 지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간단히 말해서 나의 구원은 없어요. 아~~ 이거 목사님들이 이거 설교하면 교회 안 될걸요. 내 가족 몽땅 천당 가려고 교회 오잖아요. 자기 부모, 내 가족. 자기 돈 떼어먹고 도망간 사람은 빼놔요. 자기가 골랐어. 천국 갈 사람은 본인이 고루는 거예요. 나한테 잘 해준 사람과 내 식구들 고루고 나한테 올 유산을 다 빼돌린 못된 형님은 천당 같이 가면 안돼요. 천당 가면 또 싸워서 안 돼. 그거는 지옥가라고 해야 돼. 

인간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선택을 자기가 해놓고 자기가 사랑해야 할 사람과 미워해야 될 사람을 누가 정합니까? 본인이 정해놓고 좋아할 사람만 중보기도라는 이름으로 기도해요. 리스트를 만들어 놓고. 그럴 때 철천지원수 같은 인간이 우리는 같은 예수 믿는 형제라고 달려들면 어떻게 됩니까? 기겁을 하지요. 니 천국가면 나는 내 선택은 하나밖에 없다. 나는 지옥 갈래. <밀양>이라는 영화에 전도연이가 그런 역할을 했지요. 

자기 아들을 죽인 사람이 자기가 가고자 하는 천국에 같이 합세한다 하니까 그게 못마땅해서 그게 꼴보기 싫어서 자기는 예수를 안 믿겠다고 나서요. 그러면 예수 안 믿겠다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예수 믿겠는 것도 누구 결심이었다? 훅 들어온 게 아니고, 자기 실익과 어떤 자기 사적인 자존심을, 야~ 요런 단어가 중요해요.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견지하기 위해서, 지금 내 괜찮은 가치를 어디까지 이어보겠다? 주님 앞에, 천국까지 이어보겠다는 자존심으로 나는 괜찮은 선택을 했습니다. 괜찮은 결심을 했습니다. 자기 자화자찬을 하기 위해서 예수 믿은 거예요. 

일종에 예수 믿는 것도 아까 이야기했지만, 이게 뭐냐 하면 자기 연출이고, 자기만족이고, 내 인생 내가 꾸미기 이런 자기 연출, 자기만족은 반대가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 방어. 강력하지요. 이것을 지키기 위해서 자동적으로 뭐가 나옵니까? 자기 방어, 자기 수세 또는 자기 공격을 최선의 공격이 최선의 방어니까 공격하게 되어있어요. 

이런 현상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복음을 전하게 되면 성령을 안 받은 사람에게 이런 아주 즉각적인 발작이 일어나는 겁니다. 나는 복음 안다!! 이런 식으로. 나도 복음 안다! 나도 십자가 안다! 나는 그 이야기가 아닌데. 개인 구원 없다는 이야기인데. 방금 십자가 이야기 나도 십자가 믿는다! 이러하거든요. 그런데 그 투가 화가 난 투에요. 십자가를 안다는데 다시 말해서 십자가를 아는데 나도 안다. 이 말은 나 안 망가졌어. 이렇게 하거든요. 

내가 아는 십자가는 안 망가지는 나를 망가뜨리는 십자가인데. 내가 아는 십자가하고 니가 아는 십자가하고 다른 것 같아. 자기의 가치를 연속성을 더 유지하려는 십자가는 이 세상에 어디에도 없는 악마가 만들어 낸 십자가에요. 교회 지붕에 있고 치솟아도 소용없어요. 내 잘되기 위한 십자가는 없습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은 없어요. 그러면 너희 속에 내가 있으면 되지 않겠느냐, 보통 이렇게 반발이 나오겠지요. 

그런데 너희에 가입되려면 나를 죽이고 가입되어야 돼요. 보통 세상의 논리는 나가 모여서 너희가 되는데 이리 모였다고 우리의 교회가 되는 게 아니에요. 다 죽어야 돼요. 죽고 들어오셔야 돼요. 죽고 들어와야 십자가만 자랑하지요. 그걸 고린도전서1장에서 교회라고 하는데. 교회는 우리 가운데 세상 것 자랑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다고요. 세상 것, 자기 자식 자랑, 교회 자랑, 돈 자랑, 자기 미모 자랑,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은 없습니다마는, 건강자랑, 자기 걸 자랑하려고 교회 온 건 아니잖아요. 헌금 자랑, 기도 자랑, 누가 오래 버티기 자랑, 이만기 강호동처럼. 그런 거 하는 게 아니거든요. 

참, 우리교회 교인들 보게 되면 감사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말을 다 해도 다 못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기도를 굉장히 짧게 해준다는 거. 꾸미지 않고 잘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 제가 감격스러워요. 저게 인력으로 안 된다. 매뉴얼을 맞추어서 하지 않는다는 것. 상투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좀 더 진도 나가 봅시다. 지금 어려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다시 한 번 두 번째 시간에서 한 것이 뭐냐 하면 허구, 허상 이게 오늘 본문에 이렇게 나옵니다. 3절 봅시다.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아까 야고보서4장에 안개라고 했지요. 

안개가 뭐가 잘못됐는가 하면 내가 어느 도시에 가서 장사해서 이득을 가질 것이라 했지요. 이득은 다른 말로 하면 소유지요. 소유. 그럼 소유가 되려면 누가 있어야 돼요? 소유주가 성립되어야 되겠지요. 그 소유주가 누가 소유주 하겠다는 말입니까? 내가 살아서 소유주 노릇하겠다는 거예요. 문제는 이 소유주 노릇하는 것이 일시적이 아니고 그냥 죽고 천당 갈 때까지 계속 무엇을 유지 하겠다? 나는 소유주 행세를 하겠다고 버티는 거예요.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서 부자가 지옥 갔을 때의 모습을 한 번 보세요. 부자가 지옥 가서 자기가 거지라고 생각합니까? 부자라고 생각합니까? 부자라고 여기지요. 왜냐하면 살던 것이 몸에 배었으니까. 부자니까. 물이 한 방울도 없잖아요. 그럼 나는 마땅해. 라고 생각하지 않고 이 정도 되면 물은 있어야 돼! 라고 하는 거예요. 지옥가도 애비앙 같은 거 없어요. 삼다수 그런 거 안 팝니다. 배달도 안 해줘요. 거기는. 마트가 없으니까. 지금 우리 동네에 마트가 있다는 것은 많이 은혜로 봐주고 있는 거예요. 마트 없어야 되는데 봐주고 있는 거예요. 북한에는 마트 없잖아요. 대형마트, 배달해 주는 마트 없을 거 아닙니까. 내가 안 가봤지만. 

그러니 우리가 북한 사람보다 더 나은 게 없지만,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거예요. 많이 받았으면 많이 망가져야 돼요. 받을만하다고 우기면 안 됩니다. 자꾸 소유주라고 버티면 안 되고, 많이 봐준 게 있다는 말은 은혜 다 더 밀고 들어왔으면 내 가치 면적을 좁혀나가야 되지요. 

복음 전한다고 경찰관 와서 케스파 와서 잡아가던가요. 아니지요. 북한의 인민군이던지 경찰관이 잡아가던가요. 복음전한다고. 중국의 경찰이 잡아가던가요. 아니지요. 보세요. 은혜 많이 받은 거잖아요. 세상에 이런 세상이 올 줄은 상상도 못해요. 복음 전해도 안 잡아가는 세상. 지금 전하고 있는데 똑똑! 경찰에서 나왔습니다. 이런 거 안 하잖아요. 핍박이 예상보다 약해요. 둘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안 전하든지, 우리가 복음이 아니던지. 아직 때가 안 되었던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감사하면 되지요. 허구와 허상, 우상 다 같은 말입니다. 녹이 슬었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을 가지고 그야말로 똥을 쥐고 그걸 자랑한다는 것은 정신병자 아니면 안 되거든요. 

의성에 쓰레산이 있다고 했지요. 그 지역을 내가 알아요. 한 열 번 이상 가봤을걸요. 사실은 의성읍이 아닙니다. 안개라는 쪽에 있어요. 의성읍에서 10키로 더 가는데 있어요. 거기에 쓰레기가 20만톤 쌓여있다는 겁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했어요. CNA가 방송해서 유명해졌는데. 그 쓰레기가 얼마나 오래됐으면 거기서 자연발화가 될 정도로 불이 나게 되었는데. 그 쓰레기를 이만큼 들고 가슴에 품에 안고 오면서 막 좋아가지고 나 부자 됐다고 자랑한다면 그건 치매라도 보통 정상의 나쁜 치매가 아닙니다. 이게 바로 이건희고 이정호입니다. 한진그룹이에요. 

우리는 그걸 못 가져서 환장했지요. 우리가 거기서 유혹을 받고 미혹을 받는다는 것은 주께서 접수한 이 땅에 안개로 살아야 될 우리가 자꾸 터를 잡으려고 지금 우리가 은연중에 애를 쓰고 있다는 거예요. 떠나기 싫다는 겁니다. 저를 데려가지 말고 우리 딸래미 시집 갈 때까지 좀 이렇게 잘 버틸 수 있도록 내 속에서 반발심이 복음에 대한 반발심이 아주 강렬해서 그래요. 그것은 바로 사적인 연속성을 우리가 포기를 안 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면 부자한테 이런 야고보서의 잔소리를 한다는 것은 그 부자모습이 곧 누구 모습이다? 그걸 부러워하는 내 모습이 되는 거예요. 내가 지금 부자가 내 모습을 대신해서 다 대표로 보여주는 거예요. 부자한테 폭격이 떨어지는데 사실은 나한테 나도 마찬가지로 잠재적 부자거든요. 한국에 아무리 못 산다 할지라도 한국에 추리닝만 입어도 아프리카 추리닝만 입어도 중산층이잖아요. 아프리카에. 

나이지리아 사람이 주택가 쓰레기를 뒤지면서 “아, 이걸 왜 갔다 버리지?” 하고 냄비를 들고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극장 취재하는 PD가 “아이고, 아프리카에서는 이것도 쓰십니까?” “이것도 쓰다마다요. 한국에서 수출해서 다 씁니다. 한국 사람은 쓸 만한 것은 다 갔다버려요. 그러나 아프리카 사람들은 나이지리아나 콩고나 다 그럴걸요.”  이렇게 이야기했다고요. 인간극장. KBS2 7시50분부터 10시20분까지 하는 거. 인간극장. 그 인간극장 보는 거 나한테는 야고보서 5장 보는 거나 똑같아요. 

녹슬은 그것이 마치 그걸 인생 목표로 잡고 애들한테 스카이캐슬 거기서 교육시키는 가정이나 나이지리아 사람이 한국에 와서 그런 식으로 제주도와서 살고 돈 벌려고 하는 그거나 전부다 원인은 돈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고 자기가 허상이라는 걸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자, 다시 질문해보겠습니다. 없음과 허상의 차이점이 뭐라고 했습니까? 없음은 아예 없는 거고, 허상은 없는데 있다고 우기는 거예요. 자기가 여기에 있다고 우기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뭐냐 하면 말씀에 니는 안개에 근거해서 니가 있다고 하는 있음은 도대체 어디서 도출된 있음인지 “나, 니 수상하다. 나, 니한테 혐의를 두겠다.” 혐의. 너의 잘못이 아니고, 내가 있어버리면 뭐도 있느냐 하면 자존심 있지요. 희망 있지요. 앞에 계획과 인생 설계 다 있게 돼요. 

그러나 이 있음을 없음으로 십자가 앞에서 없다고 여기면 뭐도 없어지는 거예요? 십자가 안에서는 희망도 필요 없고, 계획도 꿈도 쓸개도 전부 다 없는 게 돼요. 그러면 우리한테 있음은 어디서 나와야 돼요? 없음을 경유해서 나와야 되지요. 주님 계심에 주님 일하라고 한시적으로 우리에게 계획과 목표와 희망과 이런 것들을 주는 겁니다. 이런 것을 가지고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하면 ‘봉사’라고 하는 겁니다. 봉사. 

이걸 봉사라고 해요. 사도바울이 자기는 죽었다고 했지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너희들은 나 보기에 산 걸로 보이지만, 죽었다, 로 보였다. 오! 내가 살아있다고? 그건 너희들 오해야.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살아계셨겠지. 나는 죽고 날마다 그리스도가 살아지는 거예요. 

“그 몸이 있는데, 니 몸이잖아.” “아니.” 주께서 쓰시고자 하는 몸이 되는 거예요. 몸은 내가 부모로부터 온 혈육적인 몸이지만, 그 몸을 안에서 엔진으로 하고 거기서 가동하는 것은 주님의 기능이 있다 말이죠. 그럼 주님의 기능을 첫째시간에 배웠습니다. 주님의 기능은 언약 적으로 봤을 때 어디서 나온다 했습니까? 새 언약에서 나오지요. 새 언약에서. 

자, 요거 하니까 여러분들이 어리둥절한데 다시 한 번 논리로 설명하게 되면, 구약을 가지고 뭐라고 합니까? 옛 언약이지요. 언약 구약입니다. 옛 언약은 어디서 완성돼요? 십자가에서 완성되지요. 옛 언약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율법이라고 합니다. 

십자가에서는 오신 것은 마태복음5장에 일점일획이라도 내가 놓치지 않고 다 이룬다는 거예요. 그러면 다 이루었다는 것이 어디서 이루었습니까? 십자가에서 다 이룬 거죠. 십자가에서 다 이룬 거예요. 십자가에서 뭐가 나오느냐, 쓴잔이 나오잖아요. 

여러분, 한약에 약재 막 들어가지요. 옛날식으로 약재를 한다면 삼베에 해가지고 작대기 해가지고 이걸 달여 가지고 돌려버리면 찍~ 하고 즙 같은 게 나오잖아요. 그걸 주님의 피라고 보세요. 주님의 몸을 작대기 대면 피가 나오는데 그 피로서 죄사함을 받는다는 거예요. 그럼 그 안에 든 약재가 뭐냐, 율법으로 보자는 말이지요. 율법으로서 쫙 짜내면 피가 나오고 그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는 보약이 되는 겁니다. 왜? 아담은 독약을 마셨기 때문에. 마시지 말아야 될, 독약을 먹었기 때문에 해독제가 필요한 겁니다. 

주신 독약이 만들기가 주님 쪽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해독제도 누가 만들어요? 주님이 만들지요. 하면 된다가 되는 게 아닙니다. 마귀가 주장하는 게 해독제가 필요 없다. 니가 열심히 하는 나름 천당 갈 수 있다. 마귀의 말이 맞는 이유가 신도 인간이 만들어냈잖아요. 신을 만들었으면 신의 세계도 누가 만들겠어요? 인간이 만들지요. 

인간이 만든 나라는 선악으로 가는 나라에요. 선악 사상의 극대화가 선악사상으로 가득 찬 천국이에요. 그것은 불교의 극락이라든지 대표적으로. 이슬람교의 천국사상. 노력한 만큼 보너스를 줘요. 행함에는 반드시 성과급이 있어야 됩니다. 노는 놈하고 열심히 한 사람하고 차이남이 없으면 정의롭지 못하잖아요. 정의로운 사람이 되려면 일한대로 줘야 돼요. 일한대로. 

그러니까 아침10시에서 오후5시까지 일하면 이게 한 데나리온 받게 되어있으면 오후5시에 와서 6시까지 일한 사람은 얼마 받아야 돼요? 1/6 데나리온 받아야 된다는 것이 인간들의 천국관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천국관이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20장에서 예수님께서 품삯을 어떻게 했습니까. 제일 먼저 오후5시에 와서 단락 1시간만 아르바이트한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 줬습니다. 아침10시부터 오후5시까지 한 사람은 이건 뭐 기대가 싱글벙글 웃음이 넘쳐나지요. 지 혼자 계산한 거예요. 1시간해서 한 데나리온 한 품삯이니까, 요새 남자 같으면 십만원 주거든요. 십만원 잡고 8십만원, 딱 계산했거든요. 

포도원 주인이 돈을 주는데 퍼짐하게 줘요. 세상에 이렇게 팔십만원 주시는가 보니까 천원짜리로 바꾼기라. 천원짜리로 바꿨다는 이야기는 없는데. 아니면 백원짜리 동전으로 바꿨던지. 그래놓고 주께서 하는 말이 천국은 이와 같으니. 천국은 알려주는 게 아니고 바꾸기 해야 돼요. 기존에 아는 천국만 버리면 천국입니다. 행함으로 가는 천국, 성과급으로 상급으로 가는 천국 바꿔버리면 돼요. 왜? 일하나 안 하나 우리는 망가져야 되기 때문에. 

일한다고 착하다고 성화됐다고 덜 망가진 게 아니고 마찬가지에요. 우리는 처음부터 망가져야 마땅한 겁니다. 그래서 세리와 창기가 가장 순수하게 오직 사랑만 그대로 보여주지요. 많이 용서받은 자가 그 다음에 뭡니까? 많이 사랑하는 거예요. 많이. 

제가 아가 수련회 하면서 제일 마음속으로 이거 하나는 꼭 알았으면 하는 좋겠다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사랑은 세상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라는 거. 이 사실.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주를 사랑하면 돼요. 사랑 앞에서는 이 모든 걸 다 이룬 거예요. 무슨 선교를 하고 전도를 해도 사랑하지 않으면 지옥입니다. 저주 받아요. 고린도전서16장22절.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받는다는 말은 사랑하면 아무것도 니한테 안 따지고 안 묻고 책임 안 지울게. 그런 뜻이에요. 그런데 인간은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반드시 뭘 내놓느냐 하면 행함을 내놓게 되어있어요. 자기의 이력과 전력을 내놓게 돼요. 이력서에 왜 이렇게 쓴 게 많은지. 혹시 집사님 시집갈 때 이력서 들고 갔습니까? 신부의 이력은 이렇습니다. 이런 거. 접수할까요? 말까요? 서류심사 할까요? 말까요? 서류심사 합격. 이런 거 없지요. 

보통 흔한 말로 당신 왜 결혼했습니까? 하면 이력보고 하지 않지요. 뭐라고 합니까? 흔한 말로. 사랑한다는 말은 너무 엄청나고 그냥 좋지요. 그냥 보기에 좋아서 했습니다. 심리학에 통계에 보니까 12년 가요. 좋은 감정. 많이 봐준 거예요. 12년 가고. 요새 심지어는 어떤 사람은 6개월까지 가는 사람이 있고, 3년 가고. 그건 너무 했고. 12년 가면 사랑은 시효가 다했다는 거예요. 여러분은 12년 다 넘어갔지요. 저쪽은 아직 12년 안됐고. 영국에서 나온 통계입니다. 

그럼 사랑 없는데 왜 사나? 돈. 돈. 시댁이 이익이 있느냐, 없느냐, 따지는 거예요. 뭐가 빠졌어요? 이 모든 것이 뭐냐, 부자를 욕할 수 없는 이유가 소유의식 때문에 그렇습니다. 4절에 보면,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륙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마음을 살찌게 할 때는 그냥 말로 살찌게 하는 게 아니고 뭐가 반드시 들어갑니까? 소유지요. 소유. 

소유라 하는 것은 이 성경대로 이야기하게 되면 부자는 혼자 부자 된 게 아니고 필히 가난한 자를 생산하는 그 대가로서 본인이 부자 됐다, 라는 논리입니다. 빼앗았기 때문에 줘야 될 걸 안 줬기 때문에 부자 됐다 하는 거예요. 이 대목에서 제가 최근에 올린 글 <영국 무정부주의 연구>을 한 번 읽어보세요. 

도둑놈은 두 가지의 도둑놈이 있다. 하나는 칼 들고 하는 도둑놈과 법대로 하는 도둑놈이 있다. 나와 있지요. 그런데 나라에서는 누굴 격려하느냐 하면 법들은 도둑을 오히려 상을 주고 칼 들고 한 도둑질은 무법자라 해서 감옥에 집어넣는 거예요. 법이라는 것은 갖은 자들이 만들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없는 사람이 만든 게 아니고. 갖은 사람이 만들어요. 그러나 그 논리도 잘못됐어요. 

만약에 없는 사람이 법을 만들면 무슨 법을 만들겠습니까? 지는 놀면서 실력도 없으면서 가진 자들의 그걸 탐내면서 빼앗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법을 만들겠지요. 둘 다 마찬가지에요. 결국 둘 다 남 욕할 게 없어요. 다만 우리는 여기서 기능적으로 봐야 됩니다. 부자는 부자의 기능. 쓸데없이 돈 모았던 기능. 

그리고 여기에 없는 가난한 사람은 그것도 하나의 주께서 주신 축복, 저는 그걸 뭐라 보느냐 축복이라 보지 않고 봉사라 해요. 봉사. 가난하게 된 것을 봉사라 보라 말이죠. 어차피 기능이니까. 내 존재의 자존심하고 무관하다 이 말이지요. “내 집안은 가난하다.” 라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주께서 가난케 하셨습니다.” 라고 이야기하란 말이죠. 왜? 세상은 누가 접수했기 때문에? 주님이 접수했거든요. 

그런데 내가 여기서 보면 나는 하나의 자존심을 위해서 나는 가난하니까 무시하지 말고 자기 방어에 나서는 거예요. 이건 장애자도 마찬가지에요. 장애자라고 무시하지 말라. 무시하지 말라는 말을 붙이면 안 되고 내가 장애자라는 것도 주께서 주의 일에 충성하는 하나의 봉사적 기능이라고 자부하고 장애인 하던지 하란 말이죠. 장애란 것은 사회에서 그렇게 멀쩡한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한 거고, 주께서는 니가 장애자니까 천국 보내고, 가난하니까 천국 보내고, 세월호 애 빠졌다고 천국 보내고 그런 거 없어요. 

반드시 묻는 것은 뭐냐 하면, 너의 사적 모든 욕구가 이게 사실은 우상이고 니가 니한테 우상이고 허상인 것을 니가 십자가를 통해서 니가 아느냐를 묻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 다시 해보겠습니다. 구약이라 했지요. 구약은 옛 언약이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지요. 그럼 앞에 있는 이스라엘은 망해야 되는데, 왜냐하면 구약이기 때문에. 구는 옛날 아닙니까. 옛날은 새것이 오면 폐기처분 되어야 되는데 그럼 이들이 하는 일은 뭐냐 봉사가 되는 겁니다. 무슨 봉사? 장차 오실 메시아를 보여주는 봉사. 

그러면 예수님 십자가 뒤에 신약이 오잖아요. 신약. 신약은 모든 성도들은 뭡니까? 성령 받은 사람은 뭡니까? 니 것 가지고 좋다고 하지 말고, 구약과 똑같은 원리에 의해서 다 이루었다를 증거하는 봉사적 기능을 하는 거예요. 봉사적 기능을. 잘 먹고 잘살고 이렇게 맛있는 거 먹는다고 남한테 가난한 사람에게 너무 맛있는 척했지. 그걸 양심에 꺼림칙하게 여기지 마세요. 지금 주의 일하고 있는 겁니다. 백화점에 가서 보석 고르는 것도 지금 주의 일에 열심히 하고 있는 거예요. 

딸 시집보낸다고 저쪽에서 혼수감으로 아무것이나 고르라는데 “야, 야, 이거 맞나. 나한테 어울려?” 할 때 “아이고, 엄마. 엄마 것이 되면 딱 어울린다.” 할 때, “얘, 그런 소리 하지 마! 주의 기능에 맞다고 해. 주의 기능에. 이 다이아가 나는 다이아같은 인품이기 때문에 다이아가 주의 기능에 맞다. 이 잘생긴 것도 죄야? 아니거든.” 보석을 차야 빛이 나는 인품들이 있어요. 잘생긴 걸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그걸 뭐 회개한다고 바꿀 것도 아니고. 웃을 입장들이 아닌 것 같은데. 

모든 게 기능이에요. 내가 니 같은 남자 만나서 망했다. 그러지 마세요. 그것도 하나의 각본에 있는 잘 짜낸 각본이에요. 드라마에요. 그것도. 그 남자 안 만났으면 복을 못 만날 뻔했어요. 전부 다 하나의 자기 역할을 한 거예요. 그 남자 만나야 되고 이런 자식 둘 낳아야 되고, 모든 게 어느 것 하나 주님의 은혜 아닌 게 없습니다. 

내가 먼저 주께 봉사한다 하지 마세요. 주께서 먼저 우리에게 봉사를 아주 뒤집어 씌었어요. 봉사를. 그래서 주님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섬기는 분이라 하는 거예요. 우리가 하늘나라 갈 때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겠습니까? 높은 자리 앉을 생각하지 말고 기능적으로 생각하라. 기능적으로. 

니가 얼마나 소유하고 쟁취하려고 하지 말고 그 제자들이 그 당시에 높으다는 것은 무엇에 미혹됐기 때문에 세상 권세 값을 하는 게 그게 굉장히 멋있어 보였던 거예요. 아이고, 나도 권세해가지고 위에 앉아가지고 전부다 마음대로 휘둘르면 좋겠다. 만약에 복음 아는 기독교 신자가 대통령 돼가지고 전국에 있는 사찰하고 천주교 다 없애버리고, 천주교는 봐주자. 절을 다 없애버리고 사주 팔자하는 사람 점치는 사람 세금 한200%올리고 술집 없애버리고 담배 값 200배 올리고 조상 숭배하는 거 다 법으로 금지시키고 모든 기독교에 전부 다 진화론 없애버리고 창조론 다 갈아치우고 그리고 기독교 나라를 만들자. 그걸 지상천국이라 합니다. 

그걸 누가 시도했느냐, 무정부주의가 시도한 거예요. 무정부주의자들이. 휴머니즘의 이상 국가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주장한 교리가 뭐냐 간편해요. 두 가지입니다. 상식과 온유함. 다른 말로 하면 배려지요. 누구로부터 지배하지도 않고 누구로부터 지배받지도 않는 그런 이상 사회. 자기 것은 꼬박 꼬박 챙길 수 있는 그게 용납되는 사회. 이런 상식. 

그런데 이것이 이상 국가가 안 되는 이유는 실제 이런 테마가 SF영화에 이런 테마가 많아요. 이런 테마가 있을 때 여기서 뭐가 침노하느냐 하면 이들로부터 억울하게 모든 걸 빼앗긴 땅 빼앗기고 모든 걸 빼앗긴 사람이 뭐가 되느냐 하면 반란군이 돼요. 이런 걸 가지고 좌파라고 합니다. 좌파. 이걸 우파라 하지요. 모든 인간은 이 땅에서 권력가지면 전부다 보수주의가 돼요. 

조정래라는 소설가가 대하소설이라는 3개를 썼어요. 처음에 나온 게 아리랑. 아리랑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만주에서 완전히 폭파해체 때까지 나오는 그 때 우리 농민들의 김제에 있는, 전라북도 김제, 아까 새만금 있지요. 그 동네 김제평야에 살던 곡창지대에 있던 농민들이 일제 강점기 수탈당한 그 과정과 반항하는 과정 거기서 사상적인 갈라짐 이런 걸 한 게 아리랑. 

그 다음에 나온 건 빨치산이야기, 태백산맥, 3번째 나온 게 뭐냐 하면 4.19, 5.16부터해가지고 월남전부터 해가지고 현대사에서는 한강이라는 거. 이 사람이 이 세 가지를 썼어요. 주로 무엇을 대변하는 거예요? 반란군 같아. 너무 가진 사람이 내 거 뺏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 사람의 사상은 뭡니까? 복음적 사상이에요? 아니면 우상적 사고방식입니까? 우상이지요. 전부 다 있지도 않은 걸 가지고 있다고 이미지를 해놓고 그 없는 이미지가 쟁탈전을 벌리는 겁니다. 

그걸 보고 감동받는다. 감동 받는 독자가 또 이상해. 왜냐하면 본인도 은근히 기득권자에 대한 어떤 노림수, 질투심, 분노, 그들의 꼴보기 싫은 으시댐과 그 자만심의 잠 못 이루는 것. 이런 것. 지는 지 산다고 남 밟아놓고. 그건 생각 안하고요. 지가 밟힌 것만 생각나는 거예요. 지가 밟은 사람은 생각 안나요. 인간은 그래요. 지가 남한테 해꼬지 해서 트라우마 없어요. 지가 남한테 해를 당해서 트라우마지요. 정신병도 교만이라. 전부 자기 위주에요. 아파트에 뛰어내려야 돼. 무슨 힐링하겠다고. 힐링 자체가 그 얼마나 교만입니까. 왜 힐링해야 되는데? 왜 치료되어야 됩니까? 나니까. 니가 뭔데? 나는 나 만족해야 되기 때문에. 니가 왜 만족돼야 되는데? 허상도 허구인 걸 모르는 겁니다. 

계속 오늘 본문 봅시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모든 것은 예수님이 세상을 접수한 이상은 이 세상 자체가 주님의 봉사적 기능에 의해서 주께서 움직이는 거예요. 자, 정리한 번 더 합시다. 봉사는 뭐냐 봉사란, 아까 내가 뭐라고 했습니까? 주님이 섬기는 것처럼 섬기는 했는데, 이게 너무 상투적인 용어가 돼서 바꾸겠습니다. 

봉사란, 비 소유. 내가 소유 없어도 마땅한 존재가 되는 것을 그런 인식 자체가 비 소유에요. 어려운 사람을 김장 담아주고, 빨래해주고, 그게 봉사가 아니라 살아가는 자체가 나한테 소유라 하는 것은 언감생심 너무 과분한 것이라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겁니다. 우리 애가 둘인데 하나는 전국에서 0.1% 공부를 잘하고 딸애는 그 애보다 약간 공부 잘하고 그런데 그 애를 볼 때 나는 그것도 나한테 주신 주님의 봉사라 생각한다. 그렇게 이야기한다면 남들이 얼마나 질투심 느끼겠습니까. 모든 걸 가졌구나. 가진 자의 여유를 봐라. 저거. 니가 공부 못한 자식을 한 번 가져봤으면. 이런 식으로 나오겠지요. 

어쨌든 간에 누가 그렇게 오해하든 말든 본인은 내 자식이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어쨌든 간에 형편은 이것은 나의 소유가 아니라는 말이에요. 비 소유다는 말이에요. 주님께서 접수한 세계에 주님이 나한테 붙여준 사람들이고요. 그쪽이 나에게 봉사하고, 내가 또 그쪽에 봉사하는 거예요. 이 봉사된 입장에서는 서로가 있다는 자체에 대해서 그냥 있는 게 아니고 봉사적 기능으로 있다는 것 때문에 서로에 대해서 봉사해야 돼요. 

그런데 그 쪽에서 니는 봉사해줬으니까 이 값을 해야 돼. 이렇게 나오면 그거는 우리가 감사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돼요. 실망했다. 뭐 이리 나와야지요. 오늘 야고보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 부자는 뭐냐 하면 소유를 지금 자기 존재 화시킨 거예요. 부자될만해서 부자 됐다는 거예요. 내거라는 겁니다. 이 재산이. 

7절에 봅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다시 말해서 주께서 이미 접수 당한 자들아, 주의 강림할 때까지 길이 참으라. 아~~ 여러분, 이게 위로가 됩니까? 억울하게 사기당해가지고 보증 잘못 서가지고 파산해서 소위 전문 해결사라 해서 법무사를 찾아가가지고 어떻게 신용할 수 있는 방법 없습니까? 하는데 그 법무사가 가만히 보더니만, “우리 다 같이 야고보서5장7절을 봅시다.” 이렇게 하고 하는 말이 “주께서 곧 오십니다.” 이게 무슨 상담료를 낼만한 상담이 되겠어요? 쓰레기통가지고 머리를 패버려야 돼요. 니나 믿고 나 그런 거 안 믿는다. 할 거예요. 

다시 말해서 존재는 누구 몫이다? 존재는 누구의 존재다? 주님만이 존재를 가질 만이 있다. 내가 고통 받습니다. 하고 고통 받는 내 존재를 내 존재로 하지 말고 주님이 당했던 그 기능에 참여하는 기능으로서 우리는 가난하게 된 거예요. 

한 달 수입이 칠백만원, 이게 이천만원짜리 앞에서 너무 너무 가난해. 한달 수입 이천만원 대접을 이사에 비해서 지금 부장까지 올라왔는데 칠백만원밖에 안 돼. 아휴~ 억울해. 주여! 너무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내가 벌은 돈 이사가 다 가져갔습니다. 주께서는 뭡니까? “참아라. 칠백만원 푼돈이라도 참아라.” 왜? 저쪽은 저쪽 기능이고, 니는 니 기능만 하면 되잖아. 그 다음에 뭐냐, 주께서 다 아신다.  주께서 다 아신다. 

다시 말해서 그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니는 개뿔도 모른다. 니는 무지하다. 모른다.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살려준 대로 살았는데 마치 뭐냐 하면 내가 가난하다는 이유 때문에 사는 거잖아. 오해하지 마. 가난이 자기 의가 되어버리거든요. 가난하다고 유세를 해. 유세를 떨어. 좌파 같아. 완전히. 가난이 어디 자기 의입니까? 가난도 자랑이에요? 그게 어디 권력입니까? 가난한 게. 

여자가 남자보다 소득이 적다. 그건 여자들이요, 소득이 없는 직종을 선택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거 조금만 생각하면 모르겠어요? 여자가 힘든 일 안하잖아요. 힘든 일 안하는데는 그만큼 생산성이 적기 때문에 그만큼 돌아갈 자기 몫이 적게 마련이에요. 

케이블에서 지금 무슨 방송하느냐 하면 박진영이 JYP에서 인턴을 뽑는 사장이 일시키는 거 보세요. 그 일 시키는 게 적어도 이백오십만원짜리 공장에서 일 시키는 것보다 훨씬 약해요. 이게. 약하다고요. 젊은 애들은 뭔가 연애계에 종사하니까 뭐 괜찮아 보이지요. 하지만 그 애보고 가죽공장 금속공장 가보세요. 열심히 하면 이백오십만원 받거든요. 사람이 골병들지만. 한 번 비교해 보세요. 고기 잡는 거 비교해 보세요. 약하기 때문에 백오십만원 밖에 이백만원 줘도 고마운 줄 알아야 돼요. 일은 편하게 하고 그럴싸한 대우는 오백만원 받으려고 하고. 이거 마귀가 집어넣은 마음이에요. 마귀가. 

여자가 임금이 적은 것은 선택을 자기 체력에 맞게 선택해서 그런 거예요. 여자를 폄하해서 그런 게 아닙니다. 세상을 자기 위주로 보시면 안돼요. 세상은 뭐가 문제냐 하면 오십만원도 고맙게 여기는 그 마음가짐, 주님이 아르바이트해서 얼마 받았습니까? 그게 봉사에요. 내 소유가 아니니까. 아버지가 하라 해서 한 것뿐인 것은 주께서 이 땅에 잠깐 가는 세상이지만 시킨 대로 삽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남 흉내 내면서 남 따라 가는 게 옳은 줄 알았습니다. 배운 것이 그것밖에 안 배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쓱 십자가가 들어와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이 어떻게 살았는가에 참여시켜주는 기능을 발휘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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