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90308b야5장1절(봉사)-이 근호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모든 세상을 주님께서 접수했다는 말은 부자들이 아무리 자기 사적으로 자기 자랑하고 돈 많다고 해도 그것은 독 안에 든 쥐라고 볼 수 있어요. 손바닥 안에서 논다. 손바닥 안에서 논다는 말은 시편39편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우리 인생이 손바닥 안에 있다는 거예요. 손바닥이 이리 있는데 이 안에 뭔가 흔적을 남겨봤자 이걸 손가락가지고 접어버리면 이걸 가지고 시편39편은 없음으로 해요. 없음.
야고보서4장에서는 안개. 안개는 없어지는 과정까지 포함됐지만, 없는 것과 동일합니다. 없다는 말을 구약 전체 흐름가운데 이야기하면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허상이라고 해요. 허상. 허상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사야에 보면 우상이라고 합니다. 우상.
이 말은 굉장히 중요한 건데, 허상이 허상으로 행세하는 게 아니고 허상에서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신을 창의해 내요. 창의. 신을 창작하는 거예요. 어디서 나온 신이다? 인간의 확대 이미지. 포에르바흐라는 그 철학자가 그 사람이 원래 신학을 했던 사람인데 아주 강력하게 이야기합니다. 신은 인간의 자아상을 크게 키운 것이다. 기독교만 그런 게 아니고 모든 종교의 신. 부처 다 포함해서 하는 겁니다.
모든 종교에서 신을 어떤 대화의 상대로 삼겠다는 것은 이것은 보이지 않는 보이는 내가 보이지 않는 걸 보고 중얼 중얼거리는 거와 똑같은 것이지요. 일종의 치매현상이죠. 그저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처럼 부엌에서 종이 태우면서 습자지 태우면서 그저 남산위에 노루새끼처럼 잘 해주시고, 정한수 떠놓고. 정한수가 진짜 정한수인지 한 번 조사해보고 싶어져요. 옛날 수돗물 떠놓고 이건 뭐냐 하면 다른 식구들 보기에는 그 현장에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지만, 자기 몸의 이미지화되어버리면 삼신할머니가 음력으로 2월말에 오는 삼신할머니. 내 자식을 잉태할 때 보탬을 줬던 그 신이 삼신할머니거든요.
그러니까 그 자식이 남산위에 노루새끼처럼 잘 뛰어 놀고 몸 건강하고 사업잘 되는 것은 역시 삼신할머니한테 약간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되는 거예요. 신하고 나쁘게 해가지고 손해 볼 일 없잖아요. 일부러 나쁜 관계는 할 필요가 없잖아요. 늘 돌아보기는 바빠서 못 돌아보지만 시간 정해놓고 일 년에 한 두 차례는 그 쪽 신한테 빌게 되면 그것이 신이 있든 없던 관계없이 북두칠성한테 빌던지 부처한테 빌던지 어떻든 간에 뭐는 남느냐 하면 자기의 성의는 표했다는 것은 남아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나한테 유리하게 예상 못한 미래에 작용한다는 것은 그것은 진짜 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만약 있다면 있다고 치고 하여튼 그 선행에 대해서는 반드시 값을 하는 식으로 나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나와 아니면 후세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라는 필연적 논리인 거예요. 인간의 필연적 논리.
옛날 고대 문화에 보면 그 논리, 그 신이라 하거든요. 기독교에서는 우상하지만, 사실 신입니다. 신은 뭐냐 하면 누구 신이냐 하면 조상의 신이에요. 조상의 신. 그래서 죽었던 우리 조상님 어디가 있지? 라는 질문에 대한 그 당시 합리적인 답변이 뭐냐 하면, 죽은 자들 한 곳에 모여 있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우리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믿었던 그 신의 나라에 우리 죽은 조상들이 전부 다 합류해 있다는 겁니다. 제가 여기서 잠시 뜸을 들이는 이유는 이 논리가 창세기나 성경을 보면서 우리 논리와 별반 다를 바 없지요? 라고 묻고 싶어서 그래요.
아브라함의 하나님한테 아브라함이 가고, 이삭의 하나님한테 이삭이 가듯이 그쪽 이방종교에서는 신이 조상의 하나님에게 가는 것이, 이쪽논리, 저쪽논리 동일한 논리인데 그쪽은 옳고 이쪽은 그르다는 게 이건 무슨 근거에서 그렇게 독선적으로 주장할 수 있느냐, 이런 반박이 나올 수 있다 말입니다. 그렇지요?
너희 이방신은 가짜고 우상이다. 어디에 근거해서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지금도 복음 전하면 안 믿는 사람들 그렇게 이야기하지요. 왜 다른 사람을 존중할 줄 모르느냐 이 말입니다. 왜 그리 사고방식이 독단적이고 독선적이냐, 성질머리가 왜 그렇게 더러우냐, 배려심이 없어. 배려심이 없어. 인품이 왜 그래? 예수 믿고 잘 되는 줄 알았더니 인품이 더럽게 되어버렸네. 어찌 니 믿는 거는 옳고 남이 믿는 건 이단이고. 같은 인간의 존엄성으로서 그게 니 예의상 옳다고 생각해? 오히려 그런 반격이 들어올 때 어떻게 답변해야 되겠어요?
사도바울은 어떻게 답변했습니까?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바울이 부지런히 돌아다녔지요. 온갖 사람 만났을 거 아닙니까. 거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반격했느냐 이 말입니다. ‘소리 없는 현실’이란 책 보신 적 있지요. 사도행전 녹취한 책이거든요. 거기에 이렇게 했어요. 오직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은 누구 밖에 없다? 예수님밖에 없다. 그게 있습니다. 복음은 십자가에 있어요.
신의 존재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의 존재를 의미하지 않아요. 신은 살아계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있다. 그건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능히 나오는 거예요. 확실한 객관적인 증거가 있어야 돼요. 뭐냐 하면 빈 무덤이에요. 죽었다가 갔는데 보니까 무덤이 비어있다. 비어있는 그 분 어디 갔겠는가, 살아서 여기에 계시다. 어디에 계시는데? 복음을 전파하는, 전파하도록 현장에서 사건화 되어서 사건으로 계시는 거예요.
사건으로 계시기 때문에 인간의 존재로서는 그게 잡을 수 있어요? 없어요? 못 잡지요. 여기 성경책이 있으면 성경책은 있다, 에요. 성경은 있잖아요. 존재잖아요. 나는 있잖아요. 존재는 존재를 손으로 붙잡을 수 있어요. 이렇게 붙잡을 수 있어요. 손으로. 팔을 도구화 시켜서. 여기 붙잡는 거 가지고 이게 어려운 말이지만, 몸의 현상에서는 몸의 확장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건 철학에서의 이론인데 들어보면 상식적으로 좋을 거예요. 몸의 확장이란 말은 뭐냐 하면 처음에 운전할 때는 운전대하고 나하고 몸이 따로 놀아요. 발발 떨지요. 그런데 한 10년 쯤하게 되면 운전대하고 나하고 몸이 하나가 되어가지고 저 앞에 골목에 차가 빠져나갈 수 있는지 없는지를 한 몸이기 때문에 감각신경세포가 전달되지 않더라도 감으로 딱 오는 겁니다. 통과한다. 그러나 초자 아줌마들은 벌벌 떨면서 안가. 뒤에서 빵빵거려도 가지를 않지요. 운전을 자주 안 해봐서 그래요.
제가 아는 우리 친척 쪽의 어떤 60넘은 운전자는 평균시속140놓습니다. 멀리 한 번 갔다 오게 되면 속도위반 3장 끊겨 와요. 성격이 그래요. 앞에 110 놓으면 짜증나서 못 가요. 140 넘어서 추월해야 돼요. 그걸 운전 잘한다고 봐요. 신호무시, 법규무시, 140, 왜 운전이 그러느냐, 몸하고 운전대 차하고 자기하고 한 몸이기 때문에. 그러면 그것이 차에 관한 것 같으면 이게 범칙금만 까이지 별 의미 없는데.
자식까지, 남편까지, 아내까지, 자기 몸의 확장으로 보는 겁니다. 아~ 이건, 이걸 정치적 전체주의라고 하는데 독재지요. 심지어 강아지까지. 그런 극단적인 현상이 뭐냐 하면 지가 사업을 부도났는데 애까지 해서 애의 미래를 지가 미리 예단해 버려요. 내 사업 망해서 니 고생하는 거 내가 못 보겠다. 번개탄해가지고 자기 인생도 아닌 애 인생을 같이 죽음 속에 몰아세워버리지요. 우울증 걸린 주부들. 지만 뛰어내리지 애를 데리고 뛰어내려. 왜 뛰어내립니까? 이게 몸의 확장이지요. 니는 내 몸이라는 거예요. 니는 내 몸이라는 겁니다. 스카이캐슬이에요. 아~ 이게 참.
이걸 자르려면 내가 허상이라는 걸 알아야 돼요. 허상하고 없음의 차이가 뭐냐 하면 없음은 그냥 없는 거고 허상은 없는 게 있는 척 하는 게 허상입니다. 그 허상에서 뭐가 나온다 했습니까? 신이 나오지요. 우상. 우상이라 하는 것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니까 우상 버리고 그냥 간단하게 뭐냐 하나님 또는 여호와 또는 예수라 보자 말이죠.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입장이 아니고 내가 뭐라는 입장에서 예수를 믿던 삼위일체를 믿던 성령을 믿던지 십자가를 믿던 그 모든 것은 뭡니까? 우상이 되는 겁니다. 우상. 나를 위한 하나님. 성경에는 나의 하나님이 없습니다. 성경에는 나의 하나님이 없어요. 여기에 한 번 볼까요. 요한복음 한 번 봅시다.
성경에는 사적구원이 없습니다. 나의 하나님은 없어요. 요한복음20장17절 읽어보세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나의 아버지 곧 뭡니까? 너희, 너희 하나님이지요.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가 되죠. 집단으로 본다고요. 집단. 너희라는 집단. 복수. 2인칭 복수지요. 너희 하나님이에요.
내가 나의 하나님이라고 우기는 것은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만 나라는 존재를 예수님이 독점해 있다고 보면 돼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주의 이름’이라고 하는 거예요. 주의 이름. 주의 이름 앞에 나의 이름은 허구가 돼요. 허상이 돼요.
왜냐 하면 우리의 이름은 우리의 혈통적 족보에서 나왔기 때문에. 앞에 성씨 붙잖아요. 그 육은 삭제 당하는 육이기 때문에 결국 안개가 됩니다. 안개가 무슨 성을 붙여요. 안개에다가 이름을 붙여요? 김안개, 박안개, 그런 거 붙일 거 없어요. 밤안개 붙일까. 그거 못 붙여요. 붙일 이유가 없어요. 우리가 있는 것은 우리의 존재를 대신하는 것은 주님이 대신 하시고 우리가 산다는 것은 뭐냐 하면 그 존재에서 나온 기능으로서 그 연계성 때문에 우리가 기능화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몸의 확장이 뭐다? 성도가 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에베소서에는 몸의 지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간단히 말해서 나의 구원은 없어요. 아~~ 이거 목사님들이 이거 설교하면 교회 안 될걸요. 내 가족 몽땅 천당 가려고 교회 오잖아요. 자기 부모, 내 가족. 자기 돈 떼어먹고 도망간 사람은 빼놔요. 자기가 골랐어. 천국 갈 사람은 본인이 고루는 거예요. 나한테 잘 해준 사람과 내 식구들 고루고 나한테 올 유산을 다 빼돌린 못된 형님은 천당 같이 가면 안돼요. 천당 가면 또 싸워서 안 돼. 그거는 지옥가라고 해야 돼.
인간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선택을 자기가 해놓고 자기가 사랑해야 할 사람과 미워해야 될 사람을 누가 정합니까? 본인이 정해놓고 좋아할 사람만 중보기도라는 이름으로 기도해요. 리스트를 만들어 놓고. 그럴 때 철천지원수 같은 인간이 우리는 같은 예수 믿는 형제라고 달려들면 어떻게 됩니까? 기겁을 하지요. 니 천국가면 나는 내 선택은 하나밖에 없다. 나는 지옥 갈래. <밀양>이라는 영화에 전도연이가 그런 역할을 했지요.
자기 아들을 죽인 사람이 자기가 가고자 하는 천국에 같이 합세한다 하니까 그게 못마땅해서 그게 꼴보기 싫어서 자기는 예수를 안 믿겠다고 나서요. 그러면 예수 안 믿겠다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예수 믿겠는 것도 누구 결심이었다? 훅 들어온 게 아니고, 자기 실익과 어떤 자기 사적인 자존심을, 야~ 요런 단어가 중요해요.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견지하기 위해서, 지금 내 괜찮은 가치를 어디까지 이어보겠다? 주님 앞에, 천국까지 이어보겠다는 자존심으로 나는 괜찮은 선택을 했습니다. 괜찮은 결심을 했습니다. 자기 자화자찬을 하기 위해서 예수 믿은 거예요.
일종에 예수 믿는 것도 아까 이야기했지만, 이게 뭐냐 하면 자기 연출이고, 자기만족이고, 내 인생 내가 꾸미기 이런 자기 연출, 자기만족은 반대가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 방어. 강력하지요. 이것을 지키기 위해서 자동적으로 뭐가 나옵니까? 자기 방어, 자기 수세 또는 자기 공격을 최선의 공격이 최선의 방어니까 공격하게 되어있어요.
이런 현상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복음을 전하게 되면 성령을 안 받은 사람에게 이런 아주 즉각적인 발작이 일어나는 겁니다. 나는 복음 안다!! 이런 식으로. 나도 복음 안다! 나도 십자가 안다! 나는 그 이야기가 아닌데. 개인 구원 없다는 이야기인데. 방금 십자가 이야기 나도 십자가 믿는다! 이러하거든요. 그런데 그 투가 화가 난 투에요. 십자가를 안다는데 다시 말해서 십자가를 아는데 나도 안다. 이 말은 나 안 망가졌어. 이렇게 하거든요.
내가 아는 십자가는 안 망가지는 나를 망가뜨리는 십자가인데. 내가 아는 십자가하고 니가 아는 십자가하고 다른 것 같아. 자기의 가치를 연속성을 더 유지하려는 십자가는 이 세상에 어디에도 없는 악마가 만들어 낸 십자가에요. 교회 지붕에 있고 치솟아도 소용없어요. 내 잘되기 위한 십자가는 없습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은 없어요. 그러면 너희 속에 내가 있으면 되지 않겠느냐, 보통 이렇게 반발이 나오겠지요.
그런데 너희에 가입되려면 나를 죽이고 가입되어야 돼요. 보통 세상의 논리는 나가 모여서 너희가 되는데 이리 모였다고 우리의 교회가 되는 게 아니에요. 다 죽어야 돼요. 죽고 들어오셔야 돼요. 죽고 들어와야 십자가만 자랑하지요. 그걸 고린도전서1장에서 교회라고 하는데. 교회는 우리 가운데 세상 것 자랑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다고요. 세상 것, 자기 자식 자랑, 교회 자랑, 돈 자랑, 자기 미모 자랑,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은 없습니다마는, 건강자랑, 자기 걸 자랑하려고 교회 온 건 아니잖아요. 헌금 자랑, 기도 자랑, 누가 오래 버티기 자랑, 이만기 강호동처럼. 그런 거 하는 게 아니거든요.
참, 우리교회 교인들 보게 되면 감사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말을 다 해도 다 못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기도를 굉장히 짧게 해준다는 거. 꾸미지 않고 잘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 제가 감격스러워요. 저게 인력으로 안 된다. 매뉴얼을 맞추어서 하지 않는다는 것. 상투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좀 더 진도 나가 봅시다. 지금 어려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다시 한 번 두 번째 시간에서 한 것이 뭐냐 하면 허구, 허상 이게 오늘 본문에 이렇게 나옵니다. 3절 봅시다.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아까 야고보서4장에 안개라고 했지요.
안개가 뭐가 잘못됐는가 하면 내가 어느 도시에 가서 장사해서 이득을 가질 것이라 했지요. 이득은 다른 말로 하면 소유지요. 소유. 그럼 소유가 되려면 누가 있어야 돼요? 소유주가 성립되어야 되겠지요. 그 소유주가 누가 소유주 하겠다는 말입니까? 내가 살아서 소유주 노릇하겠다는 거예요. 문제는 이 소유주 노릇하는 것이 일시적이 아니고 그냥 죽고 천당 갈 때까지 계속 무엇을 유지 하겠다? 나는 소유주 행세를 하겠다고 버티는 거예요.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서 부자가 지옥 갔을 때의 모습을 한 번 보세요. 부자가 지옥 가서 자기가 거지라고 생각합니까? 부자라고 생각합니까? 부자라고 여기지요. 왜냐하면 살던 것이 몸에 배었으니까. 부자니까. 물이 한 방울도 없잖아요. 그럼 나는 마땅해. 라고 생각하지 않고 이 정도 되면 물은 있어야 돼! 라고 하는 거예요. 지옥가도 애비앙 같은 거 없어요. 삼다수 그런 거 안 팝니다. 배달도 안 해줘요. 거기는. 마트가 없으니까. 지금 우리 동네에 마트가 있다는 것은 많이 은혜로 봐주고 있는 거예요. 마트 없어야 되는데 봐주고 있는 거예요. 북한에는 마트 없잖아요. 대형마트, 배달해 주는 마트 없을 거 아닙니까. 내가 안 가봤지만.
그러니 우리가 북한 사람보다 더 나은 게 없지만,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거예요. 많이 받았으면 많이 망가져야 돼요. 받을만하다고 우기면 안 됩니다. 자꾸 소유주라고 버티면 안 되고, 많이 봐준 게 있다는 말은 은혜 다 더 밀고 들어왔으면 내 가치 면적을 좁혀나가야 되지요.
복음 전한다고 경찰관 와서 케스파 와서 잡아가던가요. 아니지요. 북한의 인민군이던지 경찰관이 잡아가던가요. 복음전한다고. 중국의 경찰이 잡아가던가요. 아니지요. 보세요. 은혜 많이 받은 거잖아요. 세상에 이런 세상이 올 줄은 상상도 못해요. 복음 전해도 안 잡아가는 세상. 지금 전하고 있는데 똑똑! 경찰에서 나왔습니다. 이런 거 안 하잖아요. 핍박이 예상보다 약해요. 둘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안 전하든지, 우리가 복음이 아니던지. 아직 때가 안 되었던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감사하면 되지요. 허구와 허상, 우상 다 같은 말입니다. 녹이 슬었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을 가지고 그야말로 똥을 쥐고 그걸 자랑한다는 것은 정신병자 아니면 안 되거든요.
의성에 쓰레산이 있다고 했지요. 그 지역을 내가 알아요. 한 열 번 이상 가봤을걸요. 사실은 의성읍이 아닙니다. 안개라는 쪽에 있어요. 의성읍에서 10키로 더 가는데 있어요. 거기에 쓰레기가 20만톤 쌓여있다는 겁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했어요. CNA가 방송해서 유명해졌는데. 그 쓰레기가 얼마나 오래됐으면 거기서 자연발화가 될 정도로 불이 나게 되었는데. 그 쓰레기를 이만큼 들고 가슴에 품에 안고 오면서 막 좋아가지고 나 부자 됐다고 자랑한다면 그건 치매라도 보통 정상의 나쁜 치매가 아닙니다. 이게 바로 이건희고 이정호입니다. 한진그룹이에요.
우리는 그걸 못 가져서 환장했지요. 우리가 거기서 유혹을 받고 미혹을 받는다는 것은 주께서 접수한 이 땅에 안개로 살아야 될 우리가 자꾸 터를 잡으려고 지금 우리가 은연중에 애를 쓰고 있다는 거예요. 떠나기 싫다는 겁니다. 저를 데려가지 말고 우리 딸래미 시집 갈 때까지 좀 이렇게 잘 버틸 수 있도록 내 속에서 반발심이 복음에 대한 반발심이 아주 강렬해서 그래요. 그것은 바로 사적인 연속성을 우리가 포기를 안 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면 부자한테 이런 야고보서의 잔소리를 한다는 것은 그 부자모습이 곧 누구 모습이다? 그걸 부러워하는 내 모습이 되는 거예요. 내가 지금 부자가 내 모습을 대신해서 다 대표로 보여주는 거예요. 부자한테 폭격이 떨어지는데 사실은 나한테 나도 마찬가지로 잠재적 부자거든요. 한국에 아무리 못 산다 할지라도 한국에 추리닝만 입어도 아프리카 추리닝만 입어도 중산층이잖아요. 아프리카에.
나이지리아 사람이 주택가 쓰레기를 뒤지면서 “아, 이걸 왜 갔다 버리지?” 하고 냄비를 들고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극장 취재하는 PD가 “아이고, 아프리카에서는 이것도 쓰십니까?” “이것도 쓰다마다요. 한국에서 수출해서 다 씁니다. 한국 사람은 쓸 만한 것은 다 갔다버려요. 그러나 아프리카 사람들은 나이지리아나 콩고나 다 그럴걸요.” 이렇게 이야기했다고요. 인간극장. KBS2 7시50분부터 10시20분까지 하는 거. 인간극장. 그 인간극장 보는 거 나한테는 야고보서 5장 보는 거나 똑같아요.
녹슬은 그것이 마치 그걸 인생 목표로 잡고 애들한테 스카이캐슬 거기서 교육시키는 가정이나 나이지리아 사람이 한국에 와서 그런 식으로 제주도와서 살고 돈 벌려고 하는 그거나 전부다 원인은 돈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고 자기가 허상이라는 걸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자, 다시 질문해보겠습니다. 없음과 허상의 차이점이 뭐라고 했습니까? 없음은 아예 없는 거고, 허상은 없는데 있다고 우기는 거예요. 자기가 여기에 있다고 우기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뭐냐 하면 말씀에 니는 안개에 근거해서 니가 있다고 하는 있음은 도대체 어디서 도출된 있음인지 “나, 니 수상하다. 나, 니한테 혐의를 두겠다.” 혐의. 너의 잘못이 아니고, 내가 있어버리면 뭐도 있느냐 하면 자존심 있지요. 희망 있지요. 앞에 계획과 인생 설계 다 있게 돼요.
그러나 이 있음을 없음으로 십자가 앞에서 없다고 여기면 뭐도 없어지는 거예요? 십자가 안에서는 희망도 필요 없고, 계획도 꿈도 쓸개도 전부 다 없는 게 돼요. 그러면 우리한테 있음은 어디서 나와야 돼요? 없음을 경유해서 나와야 되지요. 주님 계심에 주님 일하라고 한시적으로 우리에게 계획과 목표와 희망과 이런 것들을 주는 겁니다. 이런 것을 가지고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하면 ‘봉사’라고 하는 겁니다. 봉사.
이걸 봉사라고 해요. 사도바울이 자기는 죽었다고 했지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너희들은 나 보기에 산 걸로 보이지만, 죽었다, 로 보였다. 오! 내가 살아있다고? 그건 너희들 오해야.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살아계셨겠지. 나는 죽고 날마다 그리스도가 살아지는 거예요.
“그 몸이 있는데, 니 몸이잖아.” “아니.” 주께서 쓰시고자 하는 몸이 되는 거예요. 몸은 내가 부모로부터 온 혈육적인 몸이지만, 그 몸을 안에서 엔진으로 하고 거기서 가동하는 것은 주님의 기능이 있다 말이죠. 그럼 주님의 기능을 첫째시간에 배웠습니다. 주님의 기능은 언약 적으로 봤을 때 어디서 나온다 했습니까? 새 언약에서 나오지요. 새 언약에서.
자, 요거 하니까 여러분들이 어리둥절한데 다시 한 번 논리로 설명하게 되면, 구약을 가지고 뭐라고 합니까? 옛 언약이지요. 언약 구약입니다. 옛 언약은 어디서 완성돼요? 십자가에서 완성되지요. 옛 언약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율법이라고 합니다.
십자가에서는 오신 것은 마태복음5장에 일점일획이라도 내가 놓치지 않고 다 이룬다는 거예요. 그러면 다 이루었다는 것이 어디서 이루었습니까? 십자가에서 다 이룬 거죠. 십자가에서 다 이룬 거예요. 십자가에서 뭐가 나오느냐, 쓴잔이 나오잖아요.
여러분, 한약에 약재 막 들어가지요. 옛날식으로 약재를 한다면 삼베에 해가지고 작대기 해가지고 이걸 달여 가지고 돌려버리면 찍~ 하고 즙 같은 게 나오잖아요. 그걸 주님의 피라고 보세요. 주님의 몸을 작대기 대면 피가 나오는데 그 피로서 죄사함을 받는다는 거예요. 그럼 그 안에 든 약재가 뭐냐, 율법으로 보자는 말이지요. 율법으로서 쫙 짜내면 피가 나오고 그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는 보약이 되는 겁니다. 왜? 아담은 독약을 마셨기 때문에. 마시지 말아야 될, 독약을 먹었기 때문에 해독제가 필요한 겁니다.
주신 독약이 만들기가 주님 쪽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해독제도 누가 만들어요? 주님이 만들지요. 하면 된다가 되는 게 아닙니다. 마귀가 주장하는 게 해독제가 필요 없다. 니가 열심히 하는 나름 천당 갈 수 있다. 마귀의 말이 맞는 이유가 신도 인간이 만들어냈잖아요. 신을 만들었으면 신의 세계도 누가 만들겠어요? 인간이 만들지요.
인간이 만든 나라는 선악으로 가는 나라에요. 선악 사상의 극대화가 선악사상으로 가득 찬 천국이에요. 그것은 불교의 극락이라든지 대표적으로. 이슬람교의 천국사상. 노력한 만큼 보너스를 줘요. 행함에는 반드시 성과급이 있어야 됩니다. 노는 놈하고 열심히 한 사람하고 차이남이 없으면 정의롭지 못하잖아요. 정의로운 사람이 되려면 일한대로 줘야 돼요. 일한대로.
그러니까 아침10시에서 오후5시까지 일하면 이게 한 데나리온 받게 되어있으면 오후5시에 와서 6시까지 일한 사람은 얼마 받아야 돼요? 1/6 데나리온 받아야 된다는 것이 인간들의 천국관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천국관이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20장에서 예수님께서 품삯을 어떻게 했습니까. 제일 먼저 오후5시에 와서 단락 1시간만 아르바이트한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 줬습니다. 아침10시부터 오후5시까지 한 사람은 이건 뭐 기대가 싱글벙글 웃음이 넘쳐나지요. 지 혼자 계산한 거예요. 1시간해서 한 데나리온 한 품삯이니까, 요새 남자 같으면 십만원 주거든요. 십만원 잡고 8십만원, 딱 계산했거든요.
포도원 주인이 돈을 주는데 퍼짐하게 줘요. 세상에 이렇게 팔십만원 주시는가 보니까 천원짜리로 바꾼기라. 천원짜리로 바꿨다는 이야기는 없는데. 아니면 백원짜리 동전으로 바꿨던지. 그래놓고 주께서 하는 말이 천국은 이와 같으니. 천국은 알려주는 게 아니고 바꾸기 해야 돼요. 기존에 아는 천국만 버리면 천국입니다. 행함으로 가는 천국, 성과급으로 상급으로 가는 천국 바꿔버리면 돼요. 왜? 일하나 안 하나 우리는 망가져야 되기 때문에.
일한다고 착하다고 성화됐다고 덜 망가진 게 아니고 마찬가지에요. 우리는 처음부터 망가져야 마땅한 겁니다. 그래서 세리와 창기가 가장 순수하게 오직 사랑만 그대로 보여주지요. 많이 용서받은 자가 그 다음에 뭡니까? 많이 사랑하는 거예요. 많이.
제가 아가 수련회 하면서 제일 마음속으로 이거 하나는 꼭 알았으면 하는 좋겠다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사랑은 세상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라는 거. 이 사실.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주를 사랑하면 돼요. 사랑 앞에서는 이 모든 걸 다 이룬 거예요. 무슨 선교를 하고 전도를 해도 사랑하지 않으면 지옥입니다. 저주 받아요. 고린도전서16장22절.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받는다는 말은 사랑하면 아무것도 니한테 안 따지고 안 묻고 책임 안 지울게. 그런 뜻이에요. 그런데 인간은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반드시 뭘 내놓느냐 하면 행함을 내놓게 되어있어요. 자기의 이력과 전력을 내놓게 돼요. 이력서에 왜 이렇게 쓴 게 많은지. 혹시 집사님 시집갈 때 이력서 들고 갔습니까? 신부의 이력은 이렇습니다. 이런 거. 접수할까요? 말까요? 서류심사 할까요? 말까요? 서류심사 합격. 이런 거 없지요.
보통 흔한 말로 당신 왜 결혼했습니까? 하면 이력보고 하지 않지요. 뭐라고 합니까? 흔한 말로. 사랑한다는 말은 너무 엄청나고 그냥 좋지요. 그냥 보기에 좋아서 했습니다. 심리학에 통계에 보니까 12년 가요. 좋은 감정. 많이 봐준 거예요. 12년 가고. 요새 심지어는 어떤 사람은 6개월까지 가는 사람이 있고, 3년 가고. 그건 너무 했고. 12년 가면 사랑은 시효가 다했다는 거예요. 여러분은 12년 다 넘어갔지요. 저쪽은 아직 12년 안됐고. 영국에서 나온 통계입니다.
그럼 사랑 없는데 왜 사나? 돈. 돈. 시댁이 이익이 있느냐, 없느냐, 따지는 거예요. 뭐가 빠졌어요? 이 모든 것이 뭐냐, 부자를 욕할 수 없는 이유가 소유의식 때문에 그렇습니다. 4절에 보면,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륙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마음을 살찌게 할 때는 그냥 말로 살찌게 하는 게 아니고 뭐가 반드시 들어갑니까? 소유지요. 소유.
소유라 하는 것은 이 성경대로 이야기하게 되면 부자는 혼자 부자 된 게 아니고 필히 가난한 자를 생산하는 그 대가로서 본인이 부자 됐다, 라는 논리입니다. 빼앗았기 때문에 줘야 될 걸 안 줬기 때문에 부자 됐다 하는 거예요. 이 대목에서 제가 최근에 올린 글 <영국 무정부주의 연구>을 한 번 읽어보세요.
도둑놈은 두 가지의 도둑놈이 있다. 하나는 칼 들고 하는 도둑놈과 법대로 하는 도둑놈이 있다. 나와 있지요. 그런데 나라에서는 누굴 격려하느냐 하면 법들은 도둑을 오히려 상을 주고 칼 들고 한 도둑질은 무법자라 해서 감옥에 집어넣는 거예요. 법이라는 것은 갖은 자들이 만들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없는 사람이 만든 게 아니고. 갖은 사람이 만들어요. 그러나 그 논리도 잘못됐어요.
만약에 없는 사람이 법을 만들면 무슨 법을 만들겠습니까? 지는 놀면서 실력도 없으면서 가진 자들의 그걸 탐내면서 빼앗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법을 만들겠지요. 둘 다 마찬가지에요. 결국 둘 다 남 욕할 게 없어요. 다만 우리는 여기서 기능적으로 봐야 됩니다. 부자는 부자의 기능. 쓸데없이 돈 모았던 기능.
그리고 여기에 없는 가난한 사람은 그것도 하나의 주께서 주신 축복, 저는 그걸 뭐라 보느냐 축복이라 보지 않고 봉사라 해요. 봉사. 가난하게 된 것을 봉사라 보라 말이죠. 어차피 기능이니까. 내 존재의 자존심하고 무관하다 이 말이지요. “내 집안은 가난하다.” 라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주께서 가난케 하셨습니다.” 라고 이야기하란 말이죠. 왜? 세상은 누가 접수했기 때문에? 주님이 접수했거든요.
그런데 내가 여기서 보면 나는 하나의 자존심을 위해서 나는 가난하니까 무시하지 말고 자기 방어에 나서는 거예요. 이건 장애자도 마찬가지에요. 장애자라고 무시하지 말라. 무시하지 말라는 말을 붙이면 안 되고 내가 장애자라는 것도 주께서 주의 일에 충성하는 하나의 봉사적 기능이라고 자부하고 장애인 하던지 하란 말이죠. 장애란 것은 사회에서 그렇게 멀쩡한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한 거고, 주께서는 니가 장애자니까 천국 보내고, 가난하니까 천국 보내고, 세월호 애 빠졌다고 천국 보내고 그런 거 없어요.
반드시 묻는 것은 뭐냐 하면, 너의 사적 모든 욕구가 이게 사실은 우상이고 니가 니한테 우상이고 허상인 것을 니가 십자가를 통해서 니가 아느냐를 묻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 다시 해보겠습니다. 구약이라 했지요. 구약은 옛 언약이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지요. 그럼 앞에 있는 이스라엘은 망해야 되는데, 왜냐하면 구약이기 때문에. 구는 옛날 아닙니까. 옛날은 새것이 오면 폐기처분 되어야 되는데 그럼 이들이 하는 일은 뭐냐 봉사가 되는 겁니다. 무슨 봉사? 장차 오실 메시아를 보여주는 봉사.
그러면 예수님 십자가 뒤에 신약이 오잖아요. 신약. 신약은 모든 성도들은 뭡니까? 성령 받은 사람은 뭡니까? 니 것 가지고 좋다고 하지 말고, 구약과 똑같은 원리에 의해서 다 이루었다를 증거하는 봉사적 기능을 하는 거예요. 봉사적 기능을. 잘 먹고 잘살고 이렇게 맛있는 거 먹는다고 남한테 가난한 사람에게 너무 맛있는 척했지. 그걸 양심에 꺼림칙하게 여기지 마세요. 지금 주의 일하고 있는 겁니다. 백화점에 가서 보석 고르는 것도 지금 주의 일에 열심히 하고 있는 거예요.
딸 시집보낸다고 저쪽에서 혼수감으로 아무것이나 고르라는데 “야, 야, 이거 맞나. 나한테 어울려?” 할 때 “아이고, 엄마. 엄마 것이 되면 딱 어울린다.” 할 때, “얘, 그런 소리 하지 마! 주의 기능에 맞다고 해. 주의 기능에. 이 다이아가 나는 다이아같은 인품이기 때문에 다이아가 주의 기능에 맞다. 이 잘생긴 것도 죄야? 아니거든.” 보석을 차야 빛이 나는 인품들이 있어요. 잘생긴 걸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그걸 뭐 회개한다고 바꿀 것도 아니고. 웃을 입장들이 아닌 것 같은데.
모든 게 기능이에요. 내가 니 같은 남자 만나서 망했다. 그러지 마세요. 그것도 하나의 각본에 있는 잘 짜낸 각본이에요. 드라마에요. 그것도. 그 남자 안 만났으면 복을 못 만날 뻔했어요. 전부 다 하나의 자기 역할을 한 거예요. 그 남자 만나야 되고 이런 자식 둘 낳아야 되고, 모든 게 어느 것 하나 주님의 은혜 아닌 게 없습니다.
내가 먼저 주께 봉사한다 하지 마세요. 주께서 먼저 우리에게 봉사를 아주 뒤집어 씌었어요. 봉사를. 그래서 주님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섬기는 분이라 하는 거예요. 우리가 하늘나라 갈 때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겠습니까? 높은 자리 앉을 생각하지 말고 기능적으로 생각하라. 기능적으로.
니가 얼마나 소유하고 쟁취하려고 하지 말고 그 제자들이 그 당시에 높으다는 것은 무엇에 미혹됐기 때문에 세상 권세 값을 하는 게 그게 굉장히 멋있어 보였던 거예요. 아이고, 나도 권세해가지고 위에 앉아가지고 전부다 마음대로 휘둘르면 좋겠다. 만약에 복음 아는 기독교 신자가 대통령 돼가지고 전국에 있는 사찰하고 천주교 다 없애버리고, 천주교는 봐주자. 절을 다 없애버리고 사주 팔자하는 사람 점치는 사람 세금 한200%올리고 술집 없애버리고 담배 값 200배 올리고 조상 숭배하는 거 다 법으로 금지시키고 모든 기독교에 전부 다 진화론 없애버리고 창조론 다 갈아치우고 그리고 기독교 나라를 만들자. 그걸 지상천국이라 합니다.
그걸 누가 시도했느냐, 무정부주의가 시도한 거예요. 무정부주의자들이. 휴머니즘의 이상 국가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주장한 교리가 뭐냐 간편해요. 두 가지입니다. 상식과 온유함. 다른 말로 하면 배려지요. 누구로부터 지배하지도 않고 누구로부터 지배받지도 않는 그런 이상 사회. 자기 것은 꼬박 꼬박 챙길 수 있는 그게 용납되는 사회. 이런 상식.
그런데 이것이 이상 국가가 안 되는 이유는 실제 이런 테마가 SF영화에 이런 테마가 많아요. 이런 테마가 있을 때 여기서 뭐가 침노하느냐 하면 이들로부터 억울하게 모든 걸 빼앗긴 땅 빼앗기고 모든 걸 빼앗긴 사람이 뭐가 되느냐 하면 반란군이 돼요. 이런 걸 가지고 좌파라고 합니다. 좌파. 이걸 우파라 하지요. 모든 인간은 이 땅에서 권력가지면 전부다 보수주의가 돼요.
조정래라는 소설가가 대하소설이라는 3개를 썼어요. 처음에 나온 게 아리랑. 아리랑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만주에서 완전히 폭파해체 때까지 나오는 그 때 우리 농민들의 김제에 있는, 전라북도 김제, 아까 새만금 있지요. 그 동네 김제평야에 살던 곡창지대에 있던 농민들이 일제 강점기 수탈당한 그 과정과 반항하는 과정 거기서 사상적인 갈라짐 이런 걸 한 게 아리랑.
그 다음에 나온 건 빨치산이야기, 태백산맥, 3번째 나온 게 뭐냐 하면 4.19, 5.16부터해가지고 월남전부터 해가지고 현대사에서는 한강이라는 거. 이 사람이 이 세 가지를 썼어요. 주로 무엇을 대변하는 거예요? 반란군 같아. 너무 가진 사람이 내 거 뺏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 사람의 사상은 뭡니까? 복음적 사상이에요? 아니면 우상적 사고방식입니까? 우상이지요. 전부 다 있지도 않은 걸 가지고 있다고 이미지를 해놓고 그 없는 이미지가 쟁탈전을 벌리는 겁니다.
그걸 보고 감동받는다. 감동 받는 독자가 또 이상해. 왜냐하면 본인도 은근히 기득권자에 대한 어떤 노림수, 질투심, 분노, 그들의 꼴보기 싫은 으시댐과 그 자만심의 잠 못 이루는 것. 이런 것. 지는 지 산다고 남 밟아놓고. 그건 생각 안하고요. 지가 밟힌 것만 생각나는 거예요. 지가 밟은 사람은 생각 안나요. 인간은 그래요. 지가 남한테 해꼬지 해서 트라우마 없어요. 지가 남한테 해를 당해서 트라우마지요. 정신병도 교만이라. 전부 자기 위주에요. 아파트에 뛰어내려야 돼. 무슨 힐링하겠다고. 힐링 자체가 그 얼마나 교만입니까. 왜 힐링해야 되는데? 왜 치료되어야 됩니까? 나니까. 니가 뭔데? 나는 나 만족해야 되기 때문에. 니가 왜 만족돼야 되는데? 허상도 허구인 걸 모르는 겁니다.
계속 오늘 본문 봅시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모든 것은 예수님이 세상을 접수한 이상은 이 세상 자체가 주님의 봉사적 기능에 의해서 주께서 움직이는 거예요. 자, 정리한 번 더 합시다. 봉사는 뭐냐 봉사란, 아까 내가 뭐라고 했습니까? 주님이 섬기는 것처럼 섬기는 했는데, 이게 너무 상투적인 용어가 돼서 바꾸겠습니다.
봉사란, 비 소유. 내가 소유 없어도 마땅한 존재가 되는 것을 그런 인식 자체가 비 소유에요. 어려운 사람을 김장 담아주고, 빨래해주고, 그게 봉사가 아니라 살아가는 자체가 나한테 소유라 하는 것은 언감생심 너무 과분한 것이라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겁니다. 우리 애가 둘인데 하나는 전국에서 0.1% 공부를 잘하고 딸애는 그 애보다 약간 공부 잘하고 그런데 그 애를 볼 때 나는 그것도 나한테 주신 주님의 봉사라 생각한다. 그렇게 이야기한다면 남들이 얼마나 질투심 느끼겠습니까. 모든 걸 가졌구나. 가진 자의 여유를 봐라. 저거. 니가 공부 못한 자식을 한 번 가져봤으면. 이런 식으로 나오겠지요.
어쨌든 간에 누가 그렇게 오해하든 말든 본인은 내 자식이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어쨌든 간에 형편은 이것은 나의 소유가 아니라는 말이에요. 비 소유다는 말이에요. 주님께서 접수한 세계에 주님이 나한테 붙여준 사람들이고요. 그쪽이 나에게 봉사하고, 내가 또 그쪽에 봉사하는 거예요. 이 봉사된 입장에서는 서로가 있다는 자체에 대해서 그냥 있는 게 아니고 봉사적 기능으로 있다는 것 때문에 서로에 대해서 봉사해야 돼요.
그런데 그 쪽에서 니는 봉사해줬으니까 이 값을 해야 돼. 이렇게 나오면 그거는 우리가 감사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돼요. 실망했다. 뭐 이리 나와야지요. 오늘 야고보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 부자는 뭐냐 하면 소유를 지금 자기 존재 화시킨 거예요. 부자될만해서 부자 됐다는 거예요. 내거라는 겁니다. 이 재산이.
7절에 봅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다시 말해서 주께서 이미 접수 당한 자들아, 주의 강림할 때까지 길이 참으라. 아~~ 여러분, 이게 위로가 됩니까? 억울하게 사기당해가지고 보증 잘못 서가지고 파산해서 소위 전문 해결사라 해서 법무사를 찾아가가지고 어떻게 신용할 수 있는 방법 없습니까? 하는데 그 법무사가 가만히 보더니만, “우리 다 같이 야고보서5장7절을 봅시다.” 이렇게 하고 하는 말이 “주께서 곧 오십니다.” 이게 무슨 상담료를 낼만한 상담이 되겠어요? 쓰레기통가지고 머리를 패버려야 돼요. 니나 믿고 나 그런 거 안 믿는다. 할 거예요.
다시 말해서 존재는 누구 몫이다? 존재는 누구의 존재다? 주님만이 존재를 가질 만이 있다. 내가 고통 받습니다. 하고 고통 받는 내 존재를 내 존재로 하지 말고 주님이 당했던 그 기능에 참여하는 기능으로서 우리는 가난하게 된 거예요.
한 달 수입이 칠백만원, 이게 이천만원짜리 앞에서 너무 너무 가난해. 한달 수입 이천만원 대접을 이사에 비해서 지금 부장까지 올라왔는데 칠백만원밖에 안 돼. 아휴~ 억울해. 주여! 너무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내가 벌은 돈 이사가 다 가져갔습니다. 주께서는 뭡니까? “참아라. 칠백만원 푼돈이라도 참아라.” 왜? 저쪽은 저쪽 기능이고, 니는 니 기능만 하면 되잖아. 그 다음에 뭐냐, 주께서 다 아신다. 주께서 다 아신다.
다시 말해서 그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니는 개뿔도 모른다. 니는 무지하다. 모른다.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살려준 대로 살았는데 마치 뭐냐 하면 내가 가난하다는 이유 때문에 사는 거잖아. 오해하지 마. 가난이 자기 의가 되어버리거든요. 가난하다고 유세를 해. 유세를 떨어. 좌파 같아. 완전히. 가난이 어디 자기 의입니까? 가난도 자랑이에요? 그게 어디 권력입니까? 가난한 게.
여자가 남자보다 소득이 적다. 그건 여자들이요, 소득이 없는 직종을 선택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거 조금만 생각하면 모르겠어요? 여자가 힘든 일 안하잖아요. 힘든 일 안하는데는 그만큼 생산성이 적기 때문에 그만큼 돌아갈 자기 몫이 적게 마련이에요.
케이블에서 지금 무슨 방송하느냐 하면 박진영이 JYP에서 인턴을 뽑는 사장이 일시키는 거 보세요. 그 일 시키는 게 적어도 이백오십만원짜리 공장에서 일 시키는 것보다 훨씬 약해요. 이게. 약하다고요. 젊은 애들은 뭔가 연애계에 종사하니까 뭐 괜찮아 보이지요. 하지만 그 애보고 가죽공장 금속공장 가보세요. 열심히 하면 이백오십만원 받거든요. 사람이 골병들지만. 한 번 비교해 보세요. 고기 잡는 거 비교해 보세요. 약하기 때문에 백오십만원 밖에 이백만원 줘도 고마운 줄 알아야 돼요. 일은 편하게 하고 그럴싸한 대우는 오백만원 받으려고 하고. 이거 마귀가 집어넣은 마음이에요. 마귀가.
여자가 임금이 적은 것은 선택을 자기 체력에 맞게 선택해서 그런 거예요. 여자를 폄하해서 그런 게 아닙니다. 세상을 자기 위주로 보시면 안돼요. 세상은 뭐가 문제냐 하면 오십만원도 고맙게 여기는 그 마음가짐, 주님이 아르바이트해서 얼마 받았습니까? 그게 봉사에요. 내 소유가 아니니까. 아버지가 하라 해서 한 것뿐인 것은 주께서 이 땅에 잠깐 가는 세상이지만 시킨 대로 삽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남 흉내 내면서 남 따라 가는 게 옳은 줄 알았습니다. 배운 것이 그것밖에 안 배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쓱 십자가가 들어와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이 어떻게 살았는가에 참여시켜주는 기능을 발휘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