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90919b야5장13절(말씀의 매트릭스)-이 근호 목사
불신자라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을 개입하지 않더라도 해석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불신자입니다. 하나님을 개입하지 않더라도. 그럼 하나님을 거론해도 불신자냐, 불신자가 돼요. 하나님을 자기 논리의 외곽에 세워두면 되지요. 그냥 시작을 하나님이 하셨다, 해놓고 나머지는 자기가 다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셨다, 해놓고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알아서 잘하겠습니다, 해놓고 나머지는 자기가 다 하는 거예요. 여기 모든 과정 순서 자리에 주께서 들어오지 않고 본인이 원인이 되고 본인이 결과를 유발하는 식으로 해석할 때, 세상을 나아갈 때에 그게 전부 다 불신자들입니다.
그러면 불신자가 아닌 건 뭐냐 하면, 어떤 원인 결과에다가 예수님이 하셨다, 해도 이게 불신자에요. 우리 교회 주님이 세웠다, 해도 불신자입니다. 그게 왜 그러느냐 하면 자기 부인이 안 되면 이게 불신자에요. 하나님이고 온갖 미화를 하고 하나님 전능하시고 백날해도 “너 뭐야?” 거기에 대해서는 입 다물고 이 정도로 하나님을 퍼붓듯이 나는 완전히 하나님 앞에 몰입돼있다. 하나님과 나와 함께 있다. 함께 있고, 좋은 거 있잖아요. 더불어 산다. 나는 동행한다. 어디서 들은 구석은 있어가지고 온갖 것 갖다 붙이는데 아무리 해도 자기 부인이 안돼요.
야고보서4장14절 봅시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우리를 뭐라고 봅니까? 내일 일을 모르는 사람으로 보고, 그래서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안개지요. mist. 그걸 내용으로 표현하면 empty 비어있는 것. 텅텅 비어있는 것. 또는 nothing 아무것도 아닌 것. 이렇게 되는 거예요. 사도행전3장6절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낫게 했을 때 그 멋진 예가 나와요. 분명히 뭐 했어요. 오늘 본문처럼. 야고보서5장처럼. 예수 이름으로 걸으라 했다 말이죠. 예수 이름으로. 그런데 사람들 보기에는 뭐냐 하면 어떤 사람이 예수 이름이라는 단어 사용한 걸로 보이는 거예요.
실제로 주님은 안 보이고. 주님의 개입은 안 보이고. 그러면 차이가 뭐냐, 어떤 사람이 진짜 예수님을 통해서 그 사람이 병을 고치는 것과 예수 이름이라는 주술적인 그걸 사용해서 어떻게 병이 낫게 하는 것과 차이점이 뭐냐, 고 뒤에 나와요. 내가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부인이 나와요. 자기 부인.
이 말은 병 고치는 사람은 시그널에 불과하지만, 병을 고치겠다고 목격하고 그 사람에게 다가간 본인도 병자 못지않게 둘 다 공허하고 빈(empty) 사람이고 자기 부인을 해야 될 존재에요. 둘 다. 고침 받는 자나 고치는 자나 둘 다 처지가 동일하다고 고백이 나와 줘야 그게 주님의 말씀의 매트릭스 위에 점멸하는 깜빡 깜빡거리는 각자 자기의 자리에서 위치하고 있는 주님의 시그널의 일부가 되는 겁니다. 해석을 그렇게 봐야 되거든요.
아까 이야기한 거 다시 이야기하면 안식일에 누가복음13장10절에 18년 동안 병든 자가 있었다. 자, 이걸 하나님을 개입하지 않고 불신자로서 이 성경을 본다고 칩시다. 뭐 교회는 다 불신자들이니까 자연스럽게 생각하면 돼요. 보니까 이걸 보는 교인들이 집사나 장로나 목사 마찬가지로 안됐다. 누구 누구가 18년 동안 여성이 18년 동안 병들어 꼬부라졌다. 참 안됐다. 그러면 거기에 나오는 제일 첫 번째 반응은 뭐냐, 우리교회 교회가 뭐냐, 착한 일하는 단체가 교회다. 도와주자. 이리 나오지요.
그게 뭐냐 돼요? 동정이 되지요. 동정. 동정은 뭐냐 하면 정을 주는 거예요. 정을 주는 겁니다. 문제는 이게 동정을 하고 정을 주는 것이 이게 그 사람을 구원하는 구원의 능력이 안 된다는 거예요. 구원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야고보서5장에 의하면 뭐가 안 되느냐 하면 의인이 아니에요. 왜냐,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나오는데 어떤 힘? 구원하는 힘이 나오는데 이건 동정만 쳐 바를 뿐이에요.
그리고 그 쳐 발라는 동정은 언젠가 회수하기 마련이고 누굴 동정했을 때는 어떤 인간도 손해 보는 장사 안합니다. 그 사람이 만약에 우연히 그 사람을 도와줬는데 그 사람이 너무 너무 잘 되어가지고 한달 수입이 10억이 넘는다. 이리 나오면 “내가 니 인간 만드는데 얼마나 애쓰고 널 위해서 철야기도 했는데 니는 지금 잘됐다고 건방을 떨고 말이야.” 이리 나오게 되어있어요. 본전 찾는 거예요. 본전. 본전 찾는다 말이죠.
다시 본문 돌아봅시다. 야고보서5장 13절,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나오지요. 주께서 어떤 사람을 사용하여 어떤 순간에 병이 나는 시그널을 보냈었었다면 거기서는 교회 전체 매트릭스가 기도를 다시 유효화하는 기도가 다시 살아있는 경우로 사용하기 위해서 누구 하나를 병 들게 한 거거든요. 그리고 어떤 사람이 그걸 보면서 찬양을 한다면 전체 보편적인 기도 전체가 또 다시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양을 부여하는 계기로 삼기 위해서 이런 병든 자 또는 기뻐하는 자가 발생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병들지 않고 갑자기 뭔가 예상치 않은 큰 행운이 왔다면 그 사람은 찬송하라. 찬송할 때 사촌이 논 사면 갑자기 복통이 나잖아요. 그런 소리 할 것이 아니고 다 같이 찬송하라는 말이죠. 같은 말씀의 매트릭스 위에 있으니까.
15절 봅시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자, 여기서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렵고 중요한 자리에 왔습니다. 병이 들었는데 죄가 등장해요. 그 다음에 저가 일으키시리니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죄 사함을 얻는다. 이리 되어있지요. 여기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 설명을 위해서 제가 의도적으로 누가복음13장10절을 언급했고요, 18년 동안 병 들었다. 또 38년 동안 병 들었다. 그동안 18년 동안 논 게 아니었고, 38년 동안 논 게 아니지요.
그 당시 유대인이니까 하나님 이름하에서 이 병을 고치려고 얼마나 애를 썼고 본인도 노력하고 주위에서 동정이라든지 가족들 같으면 측은해 하면서 얼마나 도와줬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다 18년 동안, 38년 동안, 이 기간의 의미가 뭐냐 하면 한 마디로 하면 ‘예수님 만날 때까지.’ ‘만나기 이전까지.’ 이런 기간이 되겠지요. 예수님 만나기 이전까지.
그런데 제가 아까 첫 째 강의에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의 것이 되기까지가 아니라 예수님이 쓰시기까지. 예수님이 쓰시기까지의 기간입니다. 예수님이 쓰시기 까지니까 18년, 38년 동안 병 들었다는 것이 병자 본인에 관한 일입니까? 주님의 일입니까? 주님에 관한 일이지요. 요걸 알아야 돼요. 주님에 관한 일이에요.
이 논리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병이 낫는 최종적인 상태는 무엇일까요? 이건 사도바울 서신에 나옵니다. 죽음입니다. 죽으면 안 아파요. 죽으면 감기도 안 걸리고 암4기는 암에 걸렸어요. 그런데 죽어버리면 암에서 나아버려요. 희한하지요. 암에서 낫지요. 죽어버리면. 아이고! 이런 방법이 있다니! 이런 방법.
왜냐하면 병이 나아봤자 계속해서 죽을 때까지 계속 병이 또 생길 가능성이 굉장히 많아요. 그리고 병 안 들어도 쇠약한 자체가 이것이 사는 게 고난 같아. 고생 같아요. 그야말로 안개가 안개 값을 다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이런 죽는 것이 병든 거거든요. 그러면 주님께서 궁극적으로 우리를 낫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겁니다. 우리로 하여금 안개니까. 죽어 마땅하니까. 오늘도 주께서는 열심히 우리를 죽음 쪽으로 몰아넣습니다.
이게 뭐냐, 병을 영구히 낫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요 대목에서 한 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다음 내용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결국 궁극적으로 뭘 하느냐 하면 이겁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죽음을 극복하고 허락한 자리에요. 우리에게 구원이라는 게. 구원은 죽음을 극복하고 허락한 자리에요. 죽음을 극복했으니까 이 말을 제대로 아는 사람 같으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 인생이 우습게 되어도 상관없습니다.”가 그대로 나와야 돼요.
병이 들었다. 낫게 해달라, 하는 것이 아니고 이참에 아예 병든 자는 “잘됐습니다. 그냥 내 목숨 데려가 주시옵소서.” 라고 하게 되면 그 사람은 죄에서 사함을 받았다는 새로운 다른 시그널을 병든 시그널을 통해서 뽑아낼 수 있다니까요. 어차피 사도바울에 의하면 교회들 보고 날마다 죽어라. 이미 너희는 죽었고, 라는 말을 반복하거든요. 사도바울에 의하면. 그걸 야고보서 식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병 들었다는 말은 우리의 창조 자체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시그널로 병이 들었다. 따라서 병에 집착하지 말고 우리의 진짜 본질은 누구냐를 되돌아 볼 수 있는 계기로 삼자. 이 교회들아! 이리 되는 거예요. 교회들아!
자기 부인이 안 되는데 ‘아! 주께서 되지도 않는 부인을 되게 하시도록 우리 예상 없이 주의 뜻대로 병을 일으켰구나!’ 그러면 그 사람에게 있는 병은 병이 들었다는 말은 하나의 뾰루지니까 피부에 난 뾰루지니까 그 사람 병이지만, 나한테는 병이 아니고 죽을 수도 있거든요. 그럼 언제 죽어도 괜찮지요. 안개니까.
그 사람 병들어서 나았다고 좋아할 거 없지요. 그러면 병들지 않더라도 죽지 않더라도 이미 죽었다고 치고 매일같이 찬양하면 되잖아요. 그게 주께서 원하는 거잖아요. 고난 통해서 찬양된다면 아프기 전에 찬양하면, 우리 사는 거 자체가 고난이기 때문에 아프기 전에 찬양한다면 주께서 뽑아내실 것은 다 뽑아낼 수 있다 말이죠.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다 보여줄 수 있으니까.
그렇게 되면 우리가 뭘 포기해야 되느냐 하면 이걸 포기해야 돼요. ‘내 자리 없다’ 유명한 말로 “영구 없다” 영구 없다. 이게 내 자리 없다. 다른 말로 하면 내 이름의 자리는 없다. 그래서 장로들이 기도할 때 14절에 보면 뭐로 기도합니까? 기름 붓고 뭐로 하지요? 무슨 이름으로 한다고 되어있어요? 주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내 자리가 없는 거예요. empty, 또는 nothing. 공허함, 이리 되는 겁니다.
‘그러면 내 자리가 없는 데도 내 몸은 있잖아요? 그게 어떻게 앞뒤가 잘 연결이 안 됩니다. 이해가 안 됩니다.’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그러면 그 때는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임시적 활주로를 생각해 봅니다. 임시적. 임시적 활주로. 평소에는 고속도로에요. 임시적 활주로가 고속도로에 군데, 군데에 있어요. 전쟁을 대비해서 할 때 고속도로가 칸막이도 있고 한데, 어떤 고속도로 달리면 옆에 칸막이가 없어요. 없고 임시로 시멘트 블록으로 막아놓은데 있어요. 영주에도 그런 게 있어요. 풍기, 영주 그 동네 내가 살아봤기 때문에 아는데.
도로가 나있는데 임시로 되어있어요. 뭔가 군사 훈련한다 할 때는 치워버리면 이게 뭐로 되느냐 하면 활주로로 사용한다고요. 그렇다면 나라는 자리가 임시적인 활주로 되기 위해서 이동성 블록이 되는 거예요. 어제는 서울 살다가 오늘은 안양 살다가 그 때 그 때마다 이동한다는 말은 그것은 주님의 말씀의 매트릭스가 니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말씀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너희 인생이 어떻게 우습게 되거나 망가져도 그것은 상관없는 존재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고정적으로 살던, 이사를 자주 가던 상관없이 이걸 뿌리를 발목을 잘라내 버리는 거예요. 뜯어내버리는 거예요.
내가 이 땅에 뿌리 박혀 살겠다는 그 세상에 대한 집착과 미련을 잘라버리는 겁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좋은 세상이라도 눌러 앉아 있으면 이것은 기도가 찬양으로 바뀌는 게 아니고 찬양이 불만과 불평으로 바뀌게 되어있어요. ‘아이고~ 지겹다. 처음 살 때 아파트 좋았는데. 이건 뭐 새 아파트 다 들어서고 그동안 내 인생 뭐 나 왜 이리 사나. 남들은 잘 사는데 평소 50평 100평 이사 가는데 처음 올 때 18평 아파트 그대로. 이게 사는 기가. 지하 살다 이제 겨우 20평짜리 마련했는데 이게 사는 거야? 아이구,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아들아! 미안하다. 돈 못 벌어서’ 이런 식으로.
대개 겸손해 보이고 또 거기에 하나님 앞에서 “주여, 이 정도로 나는 욕심 없습니다.” 라고 이렇게 내숭을 떨지만, 그 떨 수가 없는 게 뭐냐 하면 아까 했잖아요. 불신자는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 개입하지 않고 본인이 모든 걸 본인 위주로 세상과 자기 자신을 해석해 버려요.
해석하니까, 해석자가 멀쩡하니 살아있으니까 자기 부인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해석자가 어떤 해석을 해도 항상 마지막에 남는 것은 이런 괜찮은 해석을 했으니까 나는 정당하다. 나는 의롭다. 이리 되어버립니다. 그건 주님의 능력을 가려버리지요.
주께서 의인이라 하는 것은 자기 분수를 알고 자기 주제파악이 되는 사람 의인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마태복음10장 11장에서 열 두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쳤는데 그들은 그들의 능력이 아니고 주님의 권세라고 되어있어요. 주님의 권세.
주님의 권세 앞에서는 우리는 앰프티(비어있는) 우리는 완전히 구멍이 뚫려있어야 돼요. 하수구가 막혀있으면 물이 안 통한다고요. 하수구가. 주님의 능력이 물이라면 하수구가 막혀있으면 그 능력이 제대로 안되지요. 왜곡되지요. 주님이 능력 줬는데 지 자랑하고 있다 말이죠. 설교 잘한다. 교인 수 몇 명이다. 자기자랑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첫 째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교회가 예배 마치고 우르르 가가지고 장로들이 아픈 사람 만나면서 자기 능력이 있는 게 실험거리 잘됐다는 식으로 가지고 막 간절히 기도한다고요. 쭈여! 야고보서에 나와 있잖아요. 의인의 기도는 간구하는 힘이 있다. 가만히 보자, 우리교회에서는 누가 의인이고, 김장로 니가 할래? 나, 의인 아니야. 그럼 최장로할래? 아니야. 역시 우리 교회는 당회장 목사님밖에 없어. 당회장 목사님 오셔서 기도하세요. 하면 뭐 같이 합시다. 아니에요. 야고보서5장에 목사님은 말씀도 안 믿습니까?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 하는데 까짓 거 평신도기도 하는 것보다 주의 종 목사님이 기도하는 게 능력이 있지요. 한 번 해보세요.
목사님은 그 때 걱정이 되는 거예요. 지가 구라는 쳐놨지 나중에 췌장암 4기 안 나으면 이건 뭐 우리 목사 능력 없으면 그럼 나는 나가야 되나, 또 이 자리 뽑혀가지고 딴 데 또 가야 되나. 걱정이 되는 거예요. 그럼 이제 목사가 교인들 앞에서 의인의 능력이 뭔가를 본대를 보이기 위해서 기도도 아니고 간구거든요. 간절히 기도합니다. 쌍시옷이 많이 들어가요. 쭈여! 믿씁니다. 쭈여! 그거에 신바람 나면 헬렐루야! 랄라라라. 그래야 남들 보기에 그게 기도가 아니고 일상적인 기도가 아니고 간절함이 묻어있는 그런 간구처럼 모션을 취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병든 사람은 시끄럽다. 가라. 하고 나훈아의 유행가나 들을란다. 하고.
다시 말씀드립니다. 병이 문제가 아니고 죄 사함의 문제입니다. 죄 사함의 문제라면 예수님께서 죄 사함을 위해서 주께서 병든 자로 쓰시고 또 병 고치라고 병 달려들어서 병 고치는 자로 쓰신 거예요. 그 쓰실 때 그들의 갖고 있는 마음 자세는 나의 자리는 없다, 가 되게 됩니다. 그럼 내 자리가 없다는 말은 이건 일시적이라고 했지만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유동적이다. 나의 자리는 유동적이다.
왜 주님에게서는 우리 자리를 허락하지 않느냐 하면, 주님은 우리 인간을 너무 잘 알아요. 자기가 자리에 있으면 처음에는 불평하다가 그 자리에 오래 있으면 마치 그 자리가 무엇이 되느냐 하면 이게 돼요. 소유화돼요. 소유화. 그 자리가 소유화 된다고요. 그러면 소유화되면 여기서 무슨 현상이 있는가, 그 소유의 주인공이 있어야 되겠지요. 소유화라는 것은 동그라미 치는 거니까. 여기서 여기까지 내꺼. 여기서는 니 꺼가 되거든요. 이게 소유잖아요.
그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고 동그라미 칠 수 있는 그 범위 내에서는 주인공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 주인공은 누가 해야 돼요? 내가 소유하니까 내가 주인공이 되지요. 내가 주인공이 되게 되면 나는 자기 부인이 과연 방향, 그걸 수학에서는 벡터라고 해요. 벡터라 하는 것은 어떤 양이 방향을 화살표 방향을 갖고 있는 걸 벡터라 해요. 어떤 방향을 지니게 되는데 그 방향은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한테 방향이 꽂히게 되어있는 거예요.
나는 이렇게 많은 기도해서 많은 사람이 나았다든지 나는 주의 말씀을 안다. 라든지 나는 몇 년을 믿었다든지, 나는 이 교회에 충성을 다해서 이 교회가 나 때문에 교인수가 500명 됐다든지, 여기 있는 교육관 내가 돈 내서 지었다든지, 방향성이 있어요. 교인 아니더라도 이 회사 내가 세웠다. 우리 어머니 병은 내가 고쳤다. 우리 아버지 내가 요양원에 데려 갔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무엇이 강화되느냐 하면 자기 부인이 되지 못한 부인들이 계속해서 찾아오고 쌓이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건 뭐냐 하면 그 자체가 병든 거예요.
그렇게 되면 누가 와서 그걸 건드리면 공포를 느끼고 얼굴이 어두워지면서 얼굴이 불안해지지요. 자기 부인이 안 될뿐더러 엠프티 비어있는 게 아니지요. 내 걸로 꽉 차있고 그것을 지키기 위한 아주 발악을, 참 강의해서 더 확실한 표현이 있는데 차마 못하고 여러분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아주 발악을 해요. 발악을.
그런데 발악하는 사람을 귀신들릴 때는 그걸 발악이라 하지 않아요. 발악 말고 다른 말이 있어요. 차마 말 못해요. 이렇게 하고 또 이야기해준다고. 아니 오늘 이야기 못해요. 너무 말이 거칠기 때문에, 성경에 보면 말을 고르게 하라는 게 있어요. 하여튼 성경 말씀 아는 것도 문제라. 말을 고르게 하고 좋은 말로 하고 이리 있어가지고 차마 상스러운 말 하지 말라고 해서 내가 말을 못하는데. 아이고, 이러려고 하니까 내 마음이 아까 그 병 비슷하게 닮아간다.
형식이라는 것이 형식이 자체적으로 내용을 가지면 안 됩니다. 형식은 형식다워야지 자체적으로 내용을 가져버리면 이건 소유화돼요. 나는 이런 형식이 내게 딱 맞다. 아니에요. 형식은 주께서 임시로 유동적으로 주신 거예요. 따라서 형식을 줬을 때 감사하는 것이, 형식보고 감사하게 되면 이건 자기 죄 사함과 무관해 버립니다. 형식에 따라온 내용이 무엇이었던가를 봐야 돼요.
형식은 단편적이고 파편적입니다. 단편적, 파편적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애들 퍼즐 게임에서 한 조각이다 말이죠. 한 조각. 그러나 내용은 모든 거와 연결되어 있는 매트릭스에요. 보편적이어야 돼요. 보편적. “아, 니 형식 좋겠다. 뭐 내 형식은 슬프다.” 이 말은 가능해요. 하지만, “니 내용은 좋겠다. 내 내용은 니 보다 못하다.” 이러면 안돼요. 왜, 모든 교회는 동일한 내용을 가지고 형식만 각각 단편적으로, 파편적으로 차이 날 뿐이지 내용이 차아나면 안됩니다.
그러면 성경 자체가 이건 특정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이지 모든 죄인에게 주어진 성경이 안 돼버리잖아요. 성경이 모든 사람에게 건강한 사람이나, 아픈 사람이나, 장로나, 장로 아닌 사람이나, 모든 사람에게 공히 되려면 이러한 것이 하나의 사례들이 되어야 되지 이것이 모델이 되면 그게 하나의 전체적인 이상적인 목적이 되면 안 된다 말이죠.
교회에서 누가 간증집회하고 암4기인데 기도해서 나았다 하면 은근히 사람들이 어떤 영웅주의에 빠지느냐 하면 나도 병 나아서 돈도 안 들고 기도해가지고 내가 병 낫고 내가 안수기도해가지고 간구해가지고 나도 의인됨을 증명하는 기회로 삼았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병이 아팠는데 내가 내 기도해가지고 내가 간절히 했더니만 병이 나았습니다. 이래가지고 폼 나게 교회 좀 다녀보면 좋겠다. 라는 은근한 질투심이라든지 경쟁의식이 또 발생돼요.
이건 뭐다? 내용과는 관계없이 형식을 보고 질투를 느끼고 탐을 내는 겁니다. 형식을 보고. 그건 임시 활주로가 아니에요. 그건 완전히 활주로에다가 자기 집짓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비행기가 와서 확 밀어버립니다. 주님이 오셔서.
좀 더 깊이 있는 거 해봅시다. 야고보서5장15절 봅시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했으니까 이건 제가 여러 번 설명했듯이 예수님의 제자들 예를 볼 때 절대로 그들이 그들의 힘으로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구원할 수 있는 능력 없습니다. 다만 제자들은 하나의 파이프. 막힌 배수가 아니고 뚫린 배수관이 쭉쭉 되겠지요.
그런데 만약에 예를 들어 봅시다. 그 하수관이 막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막혔으면 그 사람들을 버리겠지요. 왜, 주께서는 자기 일이 방해 받으면 안 되니까. 그러니까 이게 유동적인 거예요. 임시적인 거예요. 사람은 본능상 한 자리에 있으면 마치 자동적으로 능력이 나오는 것처럼 생각하는 겁니다. 설교는 툭 건드리면 설교가 나오는 줄 알아요.
자기 부인이 안 되면 복음 설교가 나올 리가 없어요. 자기 부인이 안 되면 안 되거든요. 그런데 어떤 목사님이 복음이 나오더라. 복음이 나온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자기 부인된다고 착각하지 마세요. 형식적인 담론이나 아, 어렵다. 담론 나오면 어렵거든요. 담론 잘 안 들어봤지요. 미셀푸코, 신영복, discourse라고 하는데 개인의 의견을 말하지 않고 여러 사람들의 동의를 얻는 동의를 취득한 진리로서 인정받는 분위기에 맞춘 화제거리를 담론이라 해요.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대세. 대세여론. 그걸 국가적으로 이야기하면 이데올로기. 이념이라 합니다.
그래서 국가는 대체로 반대되는 좌파, 우파, 두 개의 담론이 있다 이리 생각하면 담론의 이해가 확 오지요. 인간은 자기가 어디 고정돼있으면 자기 스토리, 자기 역사를 차근, 차근 꾸미기 시작하는 겁니다. 아파트 사는 사람 말고요, 주택에 사는 사람들이 수박을 먹고 수박을 턱 던져 놓으니까, 어! 예상도 못했는데 다음해 여름에 보니까 수박 새싹이 나온다면 그걸 집사님은 밟아버립니까. 한 번 키워볼까? 이런 생각이 들겠어요.
뭔가 땅에 박히면 그걸 새로 ‘하루 세끼 한 번 결실을 한 번 맺어 봐!’ 라는 생각이 자동적으로 들게 되어있어요. 고정성은 반드시 자기 부인이 아니고 다른 벡터, 다른 방향을 가지고 있어요. ‘야~ 이 식대로 잘하게 되면 내가 편안히 남은 여생을 살 수 있겠네.’ 라는 생각이 절로 나게 되어있어요. 그게 나의 바운드리에요. 나의 나우바리라니까요. 나의 영역이 돼요.
그렇게 되면 이건 무엇이냐 하면 배수관이 막히게 된 겁니다. 배수관이 막힌 거예요. 주님께서 일 안하지요. 막혔는데 억지로 뚫어서 일할 필요 없고. 그냥 딴 데로 가는 거예요. 딴 데로 간 현상이 뭐냐,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병들었다는 이런 소식을 들을 때, 이게 하나의 신호로서 아차 싶은 거예요.
“병들었어? 그렇지 내처럼 신앙 좀 좋지 그래. 평소에 신앙생활 자기 부인하고 살지 그래.” “니나 부인하세요. 니나.” “저리 사니까 저리 벌 받았구나!” 이게 어떤 망대가 무너져서 18명 죽었을 때에 제자들의 생각은 그거에요. 어떤 소경이 소경되고 지나가니까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저 소경은 자기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조상 죄 때문입니까?” 참, 주님이 보시기에 가찬지도 않아요. 주님의 답변은 간단했어요. “주께서 쓰신단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장님이 된 거예요. 죄 지어서 장님이 된 게 아니고. 죄 지어서 장님이 되는 게 아니에요. 그건 개인적인 죄잖아요. 그래서 개인적인 죄는 여기서 내린 결론은 뭐냐 하면 개인적인 죄는 놀랍게도 없다가 됩니다.
개인적인 죄는 없어요. 괜히 마귀한테 농락당하지 마세요. 마귀가 우리보고 합니다. “니 죄지어서 그런 벌 받았다.” 마귀는 그 말 뒤에 뭘 남겨 놓습니까. 앞으로 바르게 살면 니는 그 고난이 없어지고 잘 될 거야. 이거거든요. 마귀의 주특기는 우리로 하여금 자기만의 소유성을 확보하라. 소유성. 소유성을 지키라. 그러면 너의 것이 되고 너의 것이 되면 곧 너의 절대화가 가능하다는 거예요.
그러면 마귀가 뭐라고 합니까? 예수를 믿게 되면 너는 소유가 늘어난다. 이걸 뭐라고 하느냐, 복이라 하지요. 복을 주는 걸 축복이라 합니다. 소유하게 되면 소유하는 순간 이게 뭐가 돼요? 마귀에 의하면 이게 누구 것이 돼요? 나의 것이 되지요. 나의 것은 안 빼앗기고 싶지요. 안 빼앗기고 싶은 것이 뭐냐, 나의 절대성이에요. 나의 절대성이에요. 이 이야기를 제가 아까 뭐라고 했느냐, 이걸 가지고 나의 이야기. 나의 담론. 내가 소설의 주인공이 되는 나의 역사가 되는 겁니다. 나의 역사.
그런데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하면, 갑자기 매트릭스 저 쪽 편에 누가 병이 들었다. 병은 무엇을 무효화 시킵니까? 아무리 재산 많아도 병 들으니까 기쁨이 없어요. 몸이 아프니까. 집에 곶감부터 해서 맛있는 게 있어도 입맛이 없어. 몸무게가 마구 줄줄 빠지기 시작해. 밥을 같이 먹어야 입맛이 있는데 혼자 먹으니 입맛이 없어. 홈쇼핑에서 육개장 시켜놨는데 입맛이 없어. 마트에 가가지고 볶음밥사서 해도 입맛이 없어. 그냥 때 때우고 치워버리자. 빨리 내 할 일이 바쁘다. 이런 식이에요.
아프니까 나의 것 하는 절대성이 이게 의심이 들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면 나의 절대성은 건강한 나이고 싶어요. 비실 비실한 나는 내가 꼴보기 싫어. 그러니 불신자들의 특징이 뭐냐, 자기가 자기를 미워한다는 거예요. 비실한 내가 꼴보기 싫어요. 92살 할머니가 있는데 외손녀가 할머니를 모십니다. 왜 모시느냐 하면 엄마가 도망가고 할머니가 키워줘서 그 은혜를 못 잊고 나이 28살에 결혼해가지고 사위하고 같이 할머니를 자기 집에 모시는데 일부러 오라해서 모시는데 그 외손녀가 자꾸 사진을 찍어요. 사진을 찍으니까 노인네의 심정을 모르니까 할머니가 찍지 마라. 이리 되는 거예요. 왜 자꾸 찍느냐. 노골적으로 찍으면 싫어해서 몰래 찍고, 밥 먹는 거 찍고. 방송기자가 물었어요. 왜 그렇게 외손녀가 할머니 사진을 찍습니까? 이렇게 하니까. 이 이야기가 인간극장 지금 하고 있는 거예요. 경기도 광주에 사는 이야기인데.
물으니까 날마다 내가 달라지는 게 내가 싫다는 거예요. 내가 달라지는 게. 달라져도 플러스 쪽으로 달라지는 게 아니고 마이너스로 달라지거든요. 날마다 뭉개져가는 모습을 찍으니까 차라리 젊을 때 사진 이것이 위로가 되지 지금 찍은 이 사진보고 자기가 깜짝 놀래요. 왠 귀신이고? 가만히 보니 귀신이 자기가 되거든요. 아직 그럴만한 연세들이 안됐지만, 정말 나이 많은 사람들은 뭐냐 하면 동영상 사진 제발 찍지 말라고 해요. 찍으면 신뢰가 되겠지요.
이 말은 뭐냐 내가 나를 꼴보기 싫은 거예요. 늙음 자체를 뭐로 보느냐 하면 병듬으로 보기 때문에. 늙었다는 게 병듬. 자살 왜 하지요? 자기가 자기를 꼴보기 싫어서 자살하는 거예요. 자기 앞에서 자기가 사라지게 하면 내가 마음이 더 편하다. 내가 나를 의식하는 것보다 내가 없다는 것이 나한테 더 유리하다 싶어서 자기가 죽어버리잖아요.
나의 절대성이 이렇게 훼손되니까 여기서 노골적으로 악마가 작용합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훼손되기 싫지? 너가 싫지?” 너를 기쁘게 하는 방법은 뭐냐, 만회해야지. 만회하는 방법은 기도와 열심, 헌금, 전도, 봉사, 모든 목적은 결국 제가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은 자기 유리한 것에서 발걸음을 멈추는 거예요.
자기의 달려감이 주님의 만족을 거쳐서 결국은 자기만족에서 스톱해요. 이게 브레이크가 고장 났거든요. 악마로 인하여. 밑에 기름을 발라놨어. 자꾸 미끄러져. 주님께 영광하고 끝나야 되는데 그래서 수요일에 했잖아요. 음녀가 아니면 하나님의 혼인잔치에 참석할 수 없다고요. 왜냐하면 이 자체가 나의 역사 자체가 안에 내부에 바탕이 형식 바탕이 뭐냐, 나는 잘났다! 나는 잘났다! 나는 의인이다! 나는 의인이다! 나는 정당하다! 이게 이미 내용으로 안 들키게 딱 있고 바깥에 형식으로 딱 갖춰 있는 거예요.
나는 못 났어요. 저는 부족합니다. 입만 띠면 거짓말하는 거예요. 입만 띠면 거짓말하면서 그런 소리 할 정도로 나는 겸손하다가 밑에 깔려 있습니다. 교회 다니나 안 다니나 마찬가지에요. 교회 안 다녀도 굉장히 겸손한 사람 한 둘이 아닙니다. 많아요. 소위 교육을 배웠고 가정교육 잘 돼있고 남한테 싫은 소리, 남한테 절대로 피해 주는 일은 하지 말라고 철떡 같이 믿은 사람은 입에 발린 소리나 마나 행동하나 마나 반드시 남을 먼저 배려하는 태도가 나옵니다.
하지만 그 안에 뭐가 들어있어요? 뭐가 안 됩니까? 도무지 자기 부인이 안돼요. 자기 부인이. 자기 부정이 안 된다고요. 도무지에요. 도무지. 어떤 대책도 수가 없어요. 그리고 누가 지켜요? 나를 지켜야 되잖아요.
그런데 신자는 뭐냐 하면 영생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거든요. 영생보다. 영생 받았으면 망가져도 괜찮아요. 38년이 아니고 58년 돼도 괜찮아요. 영생 얻었으니까. 영생이 뭡니까? 나는 영생 얻었다가 영생이 아니고 주께서 나를 쓰신다는 겁니다. 주님의 구원을 위해서 내가 죄인으로 태어나서 나의 죄마저 주님이 주님 되기 위해서 쓰임을 받는다는 그 사실로 모든 기쁨과 고마움이 스톱이 되지요.
나의 기쁨보다 주님의 기쁨으로 사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십자가 외에는 나는 자랑할 게 아무것도 없다. 예수님 죽으심 외에는 아무 것도 자랑하지 않겠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서 나의 내용은 앰프티 비어있는 거예요. 내가 만회할 것도 없고 보상 받을 것도 없고, 나는 텅텅 비어 있는 내용, 다시 말해서 나는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산다가 나의 내용이 된다 말이죠.
그게 뭐냐, 그게 바로 구원이에요. 병들었다는 그 신호, 신호를 통해서 어디까지 이어진다? 구원과 이어지는 그런 과정 속에서 무엇이 발생되느냐 하면 소위 의인이 발생되고 의인은 하나님의 배출구이기 때문에 의인의 기도는 뭐가 되느냐, 곧 주님의 기도가 되는 겁니다.
왜, 지 마음대로 안 하기 때문에. 쓰시는 대로 하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병이 나아도 주께서 낫게 하신 거고, 병이 안 나아도 주께서 안 낫게 할 뿐이고, 나는 오직 주의 이름만 증거 하면 돼요. 주의 이름이 죽었다 살아난 주의 이름이거든요. 주의 이름은 주의 기능을 이야기하거든요.
예수님의 죽으심과 살으심을 병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면 나머지 결과는 내 소관 아니지요. 만약에 내가 어떤 사람에게 해서 병이 나서 병이 나아버리면 온 동네에서 소문난 거예요. 용하다고 소문이 났는데 그 용하다는 소문 배후에 뭐가 담기느냐 하면, 돈 없이 낫는 다는 것. 역시 돈이 최고거든요.
병원에 가는 비용보다 헐게 친다는 데서 용한 어떤 목사 없나. 용한 목사. 특히 귀신 쫓아내려 하면 돈이 많이 들거든요. 귀신 쫒아내려 하면 누구한테 가느냐 하면 송가인 엄마한테 가면 된다. 인간문화재 아닙니까. 무당으로서. 그 무당도 자기 딸한테는 못 이기지요. 딸이 학교 때 공납금이 없으니까 뭐를 팔아서 공납금을 댔느냐 하면 무당 하는 제단 있지요. 신 내림하는 장소 있잖아요. 그걸 팔고 딸 공부시켰어요. 역시 무당보다 조상신보다 누가 더 세다? 자식이 더 세요. 자식이. 될 만한 자식이 더 센 거예요. 우리의 인간의 본색을 너무나 잘 보여줍니다. 전라도 진도에서. 그러니까 TV를 틀면 복음이 나와요.
복음을 아는 사람에게는 TV 어느 홈쇼핑 뭘 틀어도 복음이 나온다니까요. ‘아, 저게 내 모습이다.’ 자식 잘되면 표정이 다르고 말씨가 다르지요. 어떻게 속일 수 있을까요. 이게 뭐냐 보편성이에요. 인간의 죄의 보편성. 이게 병든 거예요. 주님이 의인되셔서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그 의인의 기도의 간구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 사함을 얻은 겁니다.
죄 사함은 뭐냐 나 구원받았다, 가 아니라 주께서 영생을 위해서 매트릭스에서 하나의 전등이 깜빡 깜빡하는 신호로서 주께서 계속 활용해 주신다는 그것이 감사할 때 그게 찬양이 되는 겁니다. 그게 야고보서5장의 이야기에요. 복음 전하는 이야기에요.
자, 그 다음에 16절을 봅시다. “이러므로 서로 죄를 서로 고하여” 아~ 나오네. 딱 나오네요. 그러니까 병든 사람이나 병 고치려고 덤벼든 사람이나 둘 다 보편적으로 주께서 니 병은 니가 들었지만 마치 내가 병들었다고 치고 다시 병들어 버리면 나의 뭐가 깨진다? 나의 절대성을 포기해야 되겠지요. 여기서 여기까지는 내 꺼! 라는 걸 포기해야 되겠지요.
아픈 마당에 죽는 마당에 창고에 있는 모든 곡식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 소용없잖아요. 그 나한테 잘해줬던 효도하겠다는 자식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인간은 안개인데, 평소에 자기가 안개 아니고 독자적인 나는 인간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자기 스케줄을 계속해서 고집하는 거예요.
그럼 나의 스케줄은 누구의 영광입니까? 결국은 내 자존심과 내 명예와 위신, 체면을 지킨 용도지요. 그걸 지금껏 지켜버리면 이게 뭐냐 하면 나의 역사가 되고 이건 나의 역사는 나의 절대성이 되면서 가면 갈수록 이걸 아까워서 이걸 흠집 날까봐 싶어서 벌벌 떨면서 얼굴을 어두운 얼굴로 하고 교회에 나오는 겁니다.
혹시 이것이 훼손될까봐 혹시 훼손되었으면 빨리 기도해서 만회하려고. 관심사가 자기밖에 없어요. 자기 절대성밖에 없어요. 있음이 문제에요. 엠프티 텅텅 비어있고 낫싱 아무것도 아니어야 되는데, 그 말씀의 매트릭스를 극히 거부한다고요.
다시 말씀을 드리면 이런 말씀의 매트릭스 위에 걸치면 안 되는데 자꾸 하나의 점멸이거든요. 오늘 여기 있다가 내일 여기 갈 수도 있고. A지점에서 B지점으로 돌아갈 수 있는데. C지점에서 오래 있었다고 해서 여기서 자기의 캐슬 자기의 스카이 캐슬, 자기의 둥지를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하고, 하나님 앞에 협상에 나서는 겁니다. 하나님 잘 해줄 테니까 내가 그만큼 평생 투자하고 노력한 내 자식이나 내 자산만큼 손 안 댔으면 좋겠습니다. 내 명예와 체면 이런 거 좀 안 다쳤으면 좋겠습니다. 할 때, 주께서는 어떻게 합니까?
그게 바로 야고보서5장에서 이게 병 든 거란 말이죠. 사랑하기 때문에 병들었다고 이야기해주는 거예요. 사랑하기 때문에. 남의 자식 같으면 이야기 안 해줘요. 사랑하기 때문에. 그게 병 든 거예요.
그럼 우리의 인생이라 하는 것은 매일우유처럼 매일 아침 되면 우유 오잖아요. 매일 우리는 병들었어요. 하루 살면 하루만큼 병 들어있고. 또 하루 살면 병 들어있고.
주께서 말씀의 매트릭스가 작용해 줘야 말씀이라는 내용과 예수님의 영생이란 보편성과 나의 사적인 형식과 또 하루를 살면서 마주치게 함으로서 ‘아~ 내가 병들었구나! 내가 죄 지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이 누가 아플 때에 그 사람 찾아가서 뭡니까? 당신 죄 지었어요. 하지 않고 누구 죄부터 먼저 이야기하느냐, 내 죄부터 먼저 이야기해요. 그게 바로 16절에 뭐냐, 서로 죄를 고백하는. “형제여, 걱정하지 마세요. 나도 지금 멀쩡한 게 아니라 내가 속이 문드러졌습니다. 한 달 수입은 1억 5천이지요. 이거 관리 어떻게 합니까. 펀드 하나 지금 들어갔는데 사촌 조카가 지금 망해가지고 이게 문제 됐지요. 우리 애는 지금 의대전문대학에 있는데 지금 쫓겨날 판이고, 이게 자랑인지 죄인지 모르지만, 아~ 이거 다 죄입니다.” 라고 자기 부인을 할 수 있는 사람.
참,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죄 사함을 받은 교회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 기도는 결국 타인의 기도입니까? 자기를 포함한 기도에요? 저 쪽 병든 자만 죄인이 아니고 나도 죄인이니까 우리 손잡고 같이 나의 이름, 나의 역사지요. 나의 찬란한 나의 역사 포기하고 주께서 그냥 쓰시고자 한 일이라고 여기고 주의 이름, 주의 십자가와 부활을 다시 바라보는 계기로서 주께서는 교회를 그렇게 친히 지금 운용하고 계시는 겁니다.
17절에 한 번 봅시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나오지요. 성정이 같은 사람 나오지요. 요걸 살짝 이렇게 이해하세요. 예수님은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이해하시면 되는 겁니다. 엘리야는 물론 우리와 같지만.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모든 조건이 같은 성정이 같다는 말은 형식 조건이 똑같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마귀한테 속아 넘어가가지고 자기 절대성을 취하고 주님은 마귀한테 이겨서 아버지의 뜻대로 자기 부인, 자기 버림, 이 땅에서는 마음껏 내가 소멸 돼도 괜찮아. 라는 자유를 가지고 우리를 구원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있으니까 그 힘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나는 힘을 가졌다가 아니라 나는 비어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그 비어있을 때 바닥에 있는 매트릭스의 힘이 팍 올라오잖아요. 그게 찬양이라는 모습으로 튀어나오는 겁니다. 확 올라오는 거예요. “주여, 나 같은 인간도 쓰시옵니까? 마음껏 쓰시옵소서.” 이게 확 올라오는 것. 이게 의인의 기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못났다고 충분히 인정하지만, 체험상 경험상 정말 못 났는지 아니면 수시로 못났지만 잘난 구석이 있는지 우리도 알고 주께서 너무 잘 아실 줄 믿습니다. 소원이 있는데, 그것은 주의 복음만 증거 되는 사람으로 쓰여 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