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강의

너빠져 18121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1. 9. 17:33
2018-12-15 00:26:48조회 : 298         
너 빠져 181214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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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은주 (IP:119.♡.152.148)19-01-09 15:27 

안양20181214a야4장11절(너 빠져)-이 근호 

야고보서4장11절에서 12절까지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막 나무랍니다. 우리는 성경을 처음 봤는데, 본다고 하는 우리보고 막 나무라는 것 같아요. 

마치 동화에 보면 연못이 있어서 연못에 자기 얼굴 비추려고 이리 보면 연못 수면 아래 눈에 띄지 않는 다른 어떤 괴물이 있어가지고 우리는 내 얼굴 보려고 성경을 연못을 수면을 보는데 연못 주인이 안에 연못 괴물이 “어디 니가 얼굴을 나한테 들이대?” 하는 식으로 반격을 가하는 그러한 심정이지요. 

자, 성경 한 번 보고 내가 얼마나 훌륭한가 보자~ 하는데 니가 왜 판단하느냐? 하고 불쑥 연못 속에서 푹 튀어나오는 느낌을 주거든요. 이게 말씀이 살아있어서 그래요. 우리가 보통 보는 거울은 죽은 거울인 겁니다. 내 비취는 내 모습만 비춰주지요. 보통 기독교에서 좀 이렇게 자유주의 신앙을 하는 사람은 이걸 성경이라 하지 않습니다. 성서라고 해요. 거룩한 글씨라 했어요. 글. 그런데 옛날에는 성경이라 했다 이 말이지요. 거룩한 거울로 봤어요. 의미를 추가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그래서 저는 성서보다 성경을 좋아합니다. 

성서라 하는 것은 어떤 느낌이냐 하면 인간이 분석하고 째고 쥐포 째듯이 쫙쫙 쬘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지요. 요즘은 신학교에서 쫙쫙 쬡니다. 인간이 쓴 글이니까 하나님이 쓴 글이 아니니까 우리가 교훈을 얻기 위해서는 찢어야 된다. 분해해야 된다. 짜 맞춤 해야 된다. 그렇게 가르치지요. 홍해가 뭐 실제로 바다가 아니고 갈대숲이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다든지 그게 Y문서, J문서 이런 거 들어본 적 혹시 있습니까? 그런 거 잘 안 들어봤지요. 일반 교인들은. 

목사들은 좀 지 유식한 척 한다고 창세기1장과 2장은 2개의 다른 전선에서 원천이 서로 다른데 이게 다윗시대에 편집해가지고 짜깁기해가지고 이렇게 했다. 이런 식으로 멘트를 날려줘야 지가 프로의 냄새가 풍긴다. 이리 보는 겁니다. 아무튼 믿음 없다는 고백은 안하고 쪽쪽 쬐고 다시 풀 가지고 다시 붙이는 거예요. 가위와 풀만 있으면 성경 하나 새로 만드는 겁니다. 각자. 문제 크지요. 

자, 성경은 살아있어요. 살아있다는 것은 뭘 하느냐 하면 성경은 창조합니다. 무엇을 창조하느냐, 새 피조물을 창조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창조를 한다는 것은 새 피조물이 없다는 이야기에요. 이 세상에는 인간 본인한테 맡겨가지고는 절대로 개과천선 백날해도 새로운 피조물 되지 않습니다. 몰라. 홍탁 아들이야 뭐 백 종원 때문에 개과선천 했을 줄 모르지만. 국민 불효자. 그 애는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연못 속에 있는 괴물이 우리를 잡아먹어야 돼요. 우리는 연못 속에 빠졌다가 나와야 됩니다. 그게 십자가에 죽었다가 성령으로 부활되는 거예요. 여러분, 성령으로 부활된다는 말은 여러분이 간만에 듣지요? 오랜만에. 우리는 보통 성령 빼놓고 부활이잖아요. 그러면 성령으로 부활 같으면 우리는 언제 부활되느냐 하면 계속 죽고 난 뒤에 주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 때 영광된 몸으로 다시 부활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우리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러나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그렇게 안 되어 있거든요. 첫 부활을 두 종류로 나눕니다. 첫 째 부활이 있고, 둘 째 부활. 첫 째 부활에 참예하지 못한 자는 둘 째 부활에 참예하지 못한다. 못을 박아 놨어요. 그러면 첫 째 부활이 되려면 어디 강한 힘에 사로잡혀야 되는 겁니다. 그 강한 힘이 나보다 더 센 강한 힘. 나보다 더 센 강한 힘. 

마태복음8장으로 이야기한다면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이리 되거든요. 말씀을 주신 것은 어떤 우물인데 그 우물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내가 스스로 개과천선하기 위해서, 내가 더 발전하기 위해서 들여다보는데 갑자기 우물에서 손 하나 그야말로 포항에 있는 호미곶이 있어가지고 바다에서 손이 올라와가지고 모가지를 딱 쥐는 거예요. 

강제로 우리를 말씀밖에 있는 우리를 말씀 안으로 풍덩하고 집어넣는 겁니다. 진짜 이건 동화이야기가 아니고 이상한 이야기죠. 집어넣고 다시 토해내지요. 집어넣고 토해내는 겁니다. 제가 이리하면 와! 구라도 세다. 이렇게 하겠는데 사도바울이 그렇게 했던 사람이에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고 되어있습니다. 장악되었다 이 말이에요. 나는 그 분 안 만났으면 안 죽었지요. 

그런데 그 분 만나고 난 뒤에 그냥 대화만 하는 사이가 아니고 예수님하고 제자들 사이에는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그냥 대화하고 옆에 붙어있고 같이 동거 동락한 사이지요. 모든 걸 쥐고 장악한 사이는 아니었다 말이죠. 충실하게 적고 배우고 공부하고 그런 사이였고 주님 가신 데 따라가겠습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누가 우리 중에 제일 높은 제자가 되겠습니까? 라고 이런 기대를 걸고 했는데 전부 다 그게 말짱 다 헛방이었다는 게 드러나는 겁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자기 세계로 들어올 때에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안’이에요. 예수안. 예수안에 대해서 많은 신학자들이 또는 목사들이 이야기하겠지만, 정작 예수안을 아는 사람은 어떤 고백이 나오느냐 하면 “모든 목회와 신학은 가짜다.” 이런 고백이 나올 때에 이게 예수 안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이것 가지고 신학하고, 이것 가지고 목회하고 예수안 이용하면 안돼요. 

진짜 예수안에 들어온 사람은 내가 하는 목회 일이나 모든 신학도 다 죄가 된다는 걸 고백을 해줘야 이게 예수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의 이건 아주 당당함이고 배짱이지요. 예수안에 있다는 말은 나는 내 안에 내가 있지 않다는 뜻이거든요. 예수 안에 있는 나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보통 종교라는 것은 뭐냐 ‘내 안에 예수 모시기’에요. 내 안에 예수 모시기. 어떻게든 꼬셔가지고 재롱부리고 아양 떨어서 찬양, 찬미하고 이렇게 경건해가지고 어쨌든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기를 바라는 거죠. 그래서 찬송가에 유명한 가스펠송 외국에서 만든 가스펠송이 있어요. 그 제목이 뭐냐 하면 주님 내 손 잡아주소서. 그런 가스펠송이 있어요. 주님! 내 손 잡아 인도하소서. 들어보신 적 있을 건데요. 그게 대표적인 거예요. 

나 여기 있는데 주님께서 좀 붙잡아서 나를 선하게 인도해달라는 상당히 은혜스럽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러나 그런 찬송을 가사 대로 하게 되면 이건 자기감정에 자기가 놀아나는 겁니다.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잡아줬고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안 잡아줬고 자기가 그걸 벌벌 떨면서 그걸 재단하기에 급급한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이야기를 하면서 다시 말씀드립니다마는 말씀이 자체적으로 어떤 창조의 힘을 계속 지속하고 있다. 따라서 이 야고보서4장 읽었던 이 말씀도 그냥 죽은 말씀이 아니고 우리가 살아있고 말씀이 죽은 게 아니고 반대로 돼요. 말씀은 살아있고 우리는 말씀보고 괜찮은 내가 되려는 내 자신이 이건 죽은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반대로 해야 됩니다. 

그러면 오늘 10절, 11절, 12절 말씀을 아까 보라했으니까 보잖아요. 담박 딱 떠오르는 내용이 뭐냐 라고 한다면, 잡기 힘들어요. 제가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10절, 12절 전체 말씀은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이겁니다. “주의 일 따로 있고, 나의 일 따로 있을까?” 라고 묻는 거예요. “주의 일 따로 있고, 나의 일 따로 있습니까?” 라고 물을 때 이것은 주의 일이고, 이것은 나의 일이고. 또는 주의 일 가운데 일부 떼어서 요거는 나의 일이고, 내가 관리해야 되고, 내가 처리해야 될 나의 일이 따로 있다. 라는 것이 잘못된 생각이라는 겁니다. 

전체가 주의 일이든지 아니면 전체가 나의 일이든지 둘 중의 하나여야 돼요. 우리가 하는 이 설거지나 커피 뽑아내고 하는 이 모든 일이 이게 나의 일입니까? 주의 일입니까? 주의 일이지요. 주의 일이면 가치 평가를 내가 내릴 자격이 없어요. 옳았다. 그르다를 그런 건 내가 내리는 게 아닙니다. 이게 나의 일이 됐을 때는 옳았다. 옳지 않았다. 가 되고 나의 일이 됐을 때는 내가 이익 봤다. 손해 봤다. 이게 성립이 돼요. 

그런데 전체가 주의 일이 되어버리면 나의 이익, 손해, 죄 지었다. 안 지었다 하는 그 자체도 의미가 없는 겁니다. 지금 11절, 12절 말씀이 뭐냐 하면 율법 전체가 주의 일이기 때문에 니 빠져라! 는 이야기에요. 오늘 제목 괜찮다. “너 빠져라!” 니 일에서 니가 빠져버리라는 말이지요. 너의 일에서. “주님, 이것은 나의 일이기 때문에 성실히 해가지고 주님께 영광 돌리겠습니다.” 그런 주제 넘는 짓은 이제는 제발 그만! 이제는 제발 그만 두라는 말이지요. 

무슨 주의 일이 따로 있고, 나의 일이 따로 있습니까? 신학교 가면 교수들이 그렇게 가르쳐요.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인간의 일이고,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은 것은 주의 일이고, 하나님의 일이라고 가르치기를 그렇게 가르쳐요.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그런 경계선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예수님한테는 밥을 먹을 때는 나의 일이고, 밥 내려가면 식도의 일이고, 이건 아버지 일이고, 그런 식으로 예수님한테는 이게 구분이 안 되듯이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에요. 구분이 안돼요. 

모든 게 주의 일이기 때문에 건방 떨지 말고, 니가 니 일을 거기다가 뽑아내지 말라는 말이지요. 만약에 주의 일인데, 그 중에서 내 일이 따로 있게 되면 뭐가 되느냐 하면 우리가 율법자가 되고 판단자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그 이야기에요. 11절, 12절 말씀을 그런 입장에서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맞는지.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이리 되어있어요. 요걸 한 마디로 뭐라고요? 이 세상에 모든 일은 내 일은 없다는 거예요. 만약에 내 일이 있어버리면 우리는 완벽한 타인이 됩니다. 벌벌 떱니다. 덜덜 떨어요. 나는 망했다. 내 인생 조졌다. 내가 그런 짓은 안 하는 건데. 

또는 반대로 내가 이만큼 복권 당첨되었다. 드디어 나는 내 식대로 내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돈을 써야지. 이건 왜? 내 일이니까. 그동안 평생토록 우리가 어떤 의미에서 이 성경을 대하기 전에 그대로 대하기 전에는 뭔가 속아왔다는 감을 잡아야 돼요. 우리가 속고 살아온 거예요. 벌벌 떨면서 속고 산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 율법의 모든 일이 주의 일이다. 하는 것은 이건 납득이 돼요. 약간의 상식이 있는 사람은 납득이 되거든요. 납득이 된다. 그러면 주의 이 일이 어떤 목적이 있을 텐데 그럼 우리 자신의 일도 주의 일에 속한단 말인가, 그러면 우리는 목적을 부여받은 게 되는데 그 목적이 뭐냐, 그 목적이 ‘열매 맺기’입니다. 열매 또는 열매 맺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가지고 할 때는 어떤 결실을 내요. 내는데, 여러분이 이건 꼭 안 찾아봐도 알아요. 마태복음13장에 보면 씨 뿌리는 비유라는 게 있습니다. 워낙 말씀의 도사들이니까 볼 필요도 없겠지요. 그런데 그 씨 뿌리는 비유를 다시 한 번 우리가 들여다봅시다. 도대체 예수님의 씨 뿌리는 이유가 뭔지. 

모든 일은 무슨 일이다? 모든 일은 주의 일이다. 이 말은 나의 일은 애초에 나의 일이라 하는 것은 주께서 허락하신 적도 없고 주신 적도 없어요. 나의 일이라는 것은 없어요. 그럼 나의 일도 없는데 왜 자꾸 명령하느냐. 명령하는 이유는 손을 놔라는 말이죠. 니 철봉에서 손 떼라는 말이지요. “아휴! 밑에는 절벽인데.” “니 원래 떨어져서 죽게 되어있어. 지금 니가 니 자신이 어색하다는 걸 니가 못 느끼느냐?”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는 겁니다. 나이 늙어서 죽잖아요. 아직까지 그렇게 연세 많은 분은 안 계시지만. 이건 아부하는 소리입니다만. 

70, 80 넘으면 죽어요. 원래 죽게 되어있다니까요. 저 철봉 손 놓게 되면 밑에 떨어진다면 죽잖아요. 원래 우리가 가는 방향이 죽는 쪽이에요. 아직도 우리 자신이 이유를 모르니까 살아야 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죽어야 되는데 지금 살려고 하니까 이게 어색한 거예요. 몸에 안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산다는 게 굉장히 거북스러워요. 자연스럽지를 못해요. “내 일을 해야겠습니다.” 주님이 보시기에는 “야~ 어색하다. 어색해. 니 일 없어.” “아닙니다. 요건 꼭 내가 성취시켜야겠습니다.” “어색한데. 니도 알지? 이게 껄끄럽다는 거.” “나중에 니가 우울증 걸릴 수 있어. 잘못하면. 니 정신병 돼.” 그렇게 늘 말씀을 통해 지적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준 것은 나의 일은 없어요. 주의 일인데, 목적이 있지요. 열매입니다. 그럼 이 열매라는 것을 제가 왜 언급하느냐 하면 마태복음13장에 씨 뿌리는 비유가 있는데 씨 뿌리는 비유는 여러분이 첫 번째는 다 아실 거예요. 길가에 떨어졌는데 마귀가 윙~ 하고 날아와 가지고 떨어지는 쪽쪽 다 주워 먹었다 말이죠. 왱~ 하고. 

두 번째 보세요. 씨를 뿌렸는데 잠시 좀 생육했다 싶어서 좋아했는데 뿌리가 땅속까지 내려가 보니까 커다란 바위 덩어리가 있었다 말이죠. 자, 바위 덩어리 있었다. 연약한 뿌리가 바위 덩어리를 뚫고 내려갈 수는 없는 거죠. 제가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을 가다가 앞에 골목길이 막혀 있으면 돌아가야 되겠지요. 그렇지요? 그건 당연한 거잖아요. 뿌리가 내렸는데 바위가 있다. 두루룩 뭐 공사할 일이 있습니까? 바위 있으면 뿌리를 안 내리면 그만이죠. 뿌리를 내리지 말라고 바위가 있으니까 그건 돌아가면 되거든요. 피해가면 되거든요. 

그것처럼 우리 인생이라 하는 것은 억지를 부려봤자 거대한 바위가 막혀있으면 우리는 뿌리를 못 내립니다. 다시 말해서 열매가 없는 게 자연스럽고 당연한 거예요. 예수님께서 그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자연스럽게 아무리 너희들이 몸부림쳐도 내가 보기에 하나님 보기에 주님 보기에는 너희들은 내가 설정한 그 설정의 범주를 절대로 너희는 이겨내지 못한다. 극복하지 못한다를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는 바위를 뚫어서 30배, 60배, 100배 열매 맺는 백성이 돼야지.” 이런 고집을 부리지 말라 말이죠. 인생살이 하면서 안 되면 돌아가면 그만이지 뭐. 애 공부 못하면 기술배우면 되지. 그걸 또 SKY들어가려고 밀실 만들고 자물쇠 잠그고 그럴 필요 없다 이 말입니다. 애들도 알아요. 나는 춤추는 게 더 잘하지 공부는 못한다고. 그리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씨 뿌리는 이 비유 자체가 모든 일은 너의 일이 있다? 없다?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다른씨는 왜 30배, 60배, 100배 열매를 맺습니까? 내 마음대로다 왜? 주님 마음대로에요. 주님은 말씀을 주면서 공통점을 찾아라 이 말이죠. 바위를 뚫지를 못해서 시들 시들 열매가 없어 말라버린 그 씨앗과 30배, 60배, 100배 맺은 씨앗과 공통점이 있는데 둘 다 내 소원대로 내 뜻대로 되는 것은 없었더라 라는 그런 공통점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그런 속성으로 무장된 사람 천국 갑니다. 

천국이 우리를 집어넣어 줄 때 주님의 목적이 있어요. 어떤 목적이냐, 열매가 된 상태에서 천국을 가게 해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열매가 되려면 우리는 이미 죄인이기 때문에 모든 일은 주의 일이 아니고 누구 일입니까? 모든 일은 항상 예민하게 작용하는 것은 내 일 경우에만 우리가 관심 갖고 남의 일은 관심 없어요. 우리는 내 일이라는 이유 때문에 열심내고 있어요. 남의 일 같으면 열심 안 내잖아요. 

그만큼 우리는 예민합니다. 내 것에 예민해요. 이래가지고는 구원이 안 되겠지요. 내 것에만 예민한 것에서는 지옥에 가야지 천국 못가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물 속에 있는 호미곶이 손으로 멱살을 쥐는 이유가 그냥 들여다봐서는 내 일로 시작해서 내 일로 마감이 돼요. 교회 가는 것도 내 일이고, 예수 믿는 것도 내 일이고, 마감이 되니까 이게 멱살을 쥐어서 아예 처음부터 니는 속고 있다는 것을 다른 세계에 속해서 다른 세계가 예수안이죠. 

다른 세계에서 속해서 거기서 새롭게 조작되어야 되고 새롭게 창조되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잡아당겨서. 그러면 그 일을 요한복음4장 봅시다. 35, 36절,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다시 말해서 성도는 무슨 역할을 맡기느냐 하면 추수꾼 역할을 맡기는 거예요. 

추수꾼은 노는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복음 전하면요, “목사님, 이제 저는 복음 듣고 놀면 되겠네요.” 복음 듣고 놀 생각하는데 복음이 들어가 버리면 요한복음4장됩니다. 주와 함께 움직여요. 신입사원들 처음 들어가면 혼자 일 안 맡깁니다. 고참 하나 대리하고 함께 움직여요. 밖에 나가 영업할 때도 함께 움직여요. 하나, 하나 다 가르쳐야 돼요. 문을 두드릴 때는 띵동~ 할 때는 이렇게, 이렇게 누르고, 영업사원들 다 가르치는 것처럼 주님은 영업사원이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초자거든요. 초자 데리고 우리가 노는 게 아니라니까요. 

그런데 감사한 것은 이미 평생의 연봉을 다 받고 해요. 이미 삯은 다 받았어요. 영생을 다 받은 거예요. 영생을 다 받고 우리와 똑같이 영생을 다 미리 받아야 될 사람을 찾아나서는 작업을 하시는데 우리는 몰라요. 누군지를. 함께 있는 주님은 알고 우리를 추수꾼으로 보내는 겁니다. 

그 추수꾼의 대표가 요한복음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이에요. 물 길러 왔다가 자기 목적, 자기 일, 물동이 던져버리고 심봤다! 하는 식으로 물 길러 왔다가 물은 안 길고 물동이 던져버렸어요. 메시아 만났다고 더 급한 이야기를 했던 이 사람. 

주님께서는 뭐냐 하면 그 여인이 이미 추수된 자고 영생 얻고 영생 얻은 자만이 뭘 하느냐 하면 추수꾼이 되는 거예요. 영생 얻은 자만이. 추수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구원은 챙기고 평생의 연봉은 다 받았다니까요. 영원히 축복받는 영생보다 더 센 연봉이 어디 있어요. 평생 다 받고 이제는 나는 메시아 만났다. 하고 물동이 버려두고 29절에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그리스도를 알고 그것을 전하는 추수꾼이 된 겁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주님의 양식이라고 30절에 되어있거든요. 

자, 야고보서4장 봅시다. 제가 추수꾼이 되었다 하면 그 다음에 나오는 질문은 “그러면 추수꾼 스케줄은 어떻게 됩니까?” 먹고 그 다음에 추수하자. 해가지고 지하철이나 동네에다가 커피 한 잔씩 나눠주고, 껌 나눠주고, 휴지 나눠주고, 교회 소개하고, 건강이 행복이 다가 아니다. 그런 문구해가지고 그게 추수꾼일까요? 

오늘 하는 야고보서 11절, 12절 근거하는 추수꾼은 뭐냐 하면 이겁니다. 적을게요. ‘아무도 믿지 말라.’ ‘아무하고도 엮이지 말라.’ 이게 추수꾼의 본질이어야 되지요. 이거 복음입니다. 특히 ‘아무하고도 엮이지 말라.’ 이게 복음이에요. 남편 자식한테 엮이지 마세요. 남편, 자식이 우리를 영생 준 거 아니에요. 영광 다 준 거 아니거든요. 사람에게 엮이게 되면 추수꾼이 아니고 나의 자존심을 추수하려 해요. 나의 명예와 나의 명성과 나의 가치를 자꾸 놓지를 못하고 있어요. 자식보고 니가 공부를 잘해야 이 엄마 가오가 선다고. 왜 자식은 그런 생각 안하는데 엄마가 너무 자식한테 엮이고 있어요. 너무. 

왜 엮이느냐, 누가 자기를 구원해 주지 않았으니까. 모든 세상에는 내 일밖에 없으니까. 자식 잘 키우는 것도 내 일이고, 가정 행복도 내 일이니까. 내가 나를 믿지 않으면 누굴 믿겠어요. 그러니까 주의 일은 아니고 전부 다 나의 일이 되는 거예요. 이게 속고 있는 거예요. 이게. 지금 교회고 뭐고 간에 지금 우리가 행복이 없었던 것은 너무 엮여서 문제에요. 엮였고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너무 믿었어. 믿지 마세요. 

우리가 믿는다는 말은 이걸 좀 어렵게 표현하면 주체는 객체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작업을 자꾸 시도를 하기 때문에 사랑이 아닙니다. 저 사람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에요. 그래서 안 되면 화내고 울고불고. 내가 이만큼 해줬는데 니는 왜 내가 원하는 걸 안 해주느냐고 하지만, 사실은 자아가 있으면 타자는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겁니다. 나를 위해서 존재하도록 하는 걸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동일성’이라 합니다. 

타인마저 나의 ‘동일성’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본능을 이건 어른이건 어린애든 갓 난 36개월 애도 마찬가지에요. 전부 다 그 집안을 자기 손아귀에 다 쥐려고 합니다. 언제 울면 맛있는 요구르트 주더라. 다 있어요. 동질성은 이게 뭐냐 하면 지배욕이에요. 지배욕. 또는 평정. 이 가정을 내 입맛에 맞게 평정하겠다는 거예요. 식구가 4식구 같으면 4식구 다 갈등을 갖고 있어요. 왜냐하면 서로가 서로를 평정하려고 하니까. 

각자가 패를 갖고 있어요. 모였다하면 고스톱 친다고 보시면 돼요. 이 말하면 엄마가 얼마나 잔소리할까, 이 말하게 되면 아빠가 용돈을 더 줄까, 말까, 딸도 아들도 전부 다 자기 고스톱을 치고 있어요. 패를 갖고 있다고요. 패를. 이건 친구한테 내밀 패, 이건 엄마한테 내밀 패, 그런데 갑자기 급습해가지고 다 뒤집어가지고 “니 요새 공부 안 한다 보니 성적서 떨어지는 거 보니까 니 이 짓하려 하느냐, 학교 가지 마!” 한바탕 한 것은 패를 다 들춘 거예요. 

그러면 친구한테 가서 “야야, 엄마한테 들켰다. 6개월간 만나지 말자.” 이리 되는 거예요. 도대체 자식을 낳았는데 자식은 그 가정을 자기 위주의 공간으로 월드로 자기 세계로 전부 다 전환시키는데 악을 쓰고 있어요. 악을 쓰고 있어요. 형은 형대로, 동생은 동생대로, 언니는 언니대로, 자매는 자매끼리, 남편은 남편끼리, 아내는 아내대로. 

“그러면 목사님, 어쩝니까? 태생이 이런데 어떡하란 말입니까?”라고 한다면 엮이지 말아야 되고, 믿지 말아야 되고, 우리는 지금 이거 외에는 하는 일과가 매일 엮이고 믿고 하는 일과인데, 이용하는 일과인데,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물으신다면, 이건 아이하고 개하고 공통점이 있어요. 아이하고 개 특히 눈이 올 때, 아이하고 개보세요. 그들은 지금 작업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놀고 있습니까? 노는 거예요. 

에덴동산은 작업하는 곳이 아닙니다. 에덴동산은 놀라고 준 거예요. 그런데 작업을 한 게 사단 난겁니다. 진짜 사탄에 의해서 사단 난거예요.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어디에 못 갑니까? 천국 못 가지요. 그러면 천국은 어떤 세계다? 일하는 세계가 아니고 놀아야 될 세계지요. 그러면 이 땅에 구원 받아야 될 사람은 이 땅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고 놀아야 될 사람이에요. 노는 식으로 살지 아니하면 천국 못 갑니다. 저의 또 공식입니다. 

왜냐하면 가는 나라에 맞아야 돼요. 우리가 사는 세계에 맞으면 안 되고, 사는 세계와는 이질적이고, 가는 세계와 동질적이어야 돼요. 그쪽 세계는 마구 마구 노는 세계에요.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는 말은 노는 데는 뭐가 없느냐 하면 목적 달성이 없어요. 성과급이 없어요. 성과라는 게 없어요. 성과는 회사의 그래프가 성과지, 학교 성적표가 성과지, 천국에 무슨 성적표가 있습니까? 내가 몇 명 전도했나 보자. 이런 그래프가 있습니까? 아니 우리가 천국가면서 천국 가는 세상이 어떤 세계인지를 진짜 모르고 가시는 거예요? 그러면 안 되겠지요. 

우리는 가야 될 나라에 맞춰야 돼요. 그리고 이 땅에서는 엮이지 말아야 됩니다. 이 땅에서는 발을 빼야 돼요. 믿지 말아야 돼요. 괜히 믿어놓고 속았다. 사기 쳤다 하는데 이건 분명히 사기 당한 것도 전부 다 믿었기 때문에 사기 당한 거예요. 처음부터 믿지 말라고 했으면 이 복음을 들었으면 사기도 안 당지요. 

오늘 본문에 율법이라 하는 것은 우리 소관이 아니라는 것을 11절, 12절에서 말합니다.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율법은 하나의 사물이 물건이 아니에요. 물건의 특징이 뭐냐 하면 외부의 살아있는 사람이 이걸 옮겨줘야 여기서 이렇게 옮기는 게 사물이거든요. 율법의 실행이나 성취는 물건이 아니에요. 우리가 지켜줄 때만 옮겨지는 게 아닙니다. 율법은 스스로 주님에 의해서 스스로 이게 움직이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오늘 11절, 12절 말씀은 뭐냐 하면 누가 움직이고, 누가 죽은자냐 분명히 하라는 겁니다. 누가 살아서 움직이는지 누가 그냥 수동적으로 피동적으로 옮겨짐을 당하는 사람인지 제대로 파악하라는 이야기가 11절, 12절 이야기에요. 니가 주제 넘게 뭔데 형제를 판단하고 형제를 평가해? 니가 뭐야? 하는 식인 거예요. 

오늘 본문 11절, 12절 다시 한 번 봅시다. 그러면 우리가 보통 어떻게 살아간다는 이야기에요? 이 성경 말씀은 이미 전제가 뭐냐 하면 우리가 어떤 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익히 알고 이 말씀을 율법을 줬거든요. 율법이라 하는 것은 모든 입을 막고 우리로 하여금 저주 아래 있게 함이라. 로마서3장 19절에 나오지요.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울산에 천상이라는 장소가 있어요. 이름이 참 희한하지요. 천상. 하늘 위라는 말이 있어요. 거기에 우리교회 따서 우리교회라는 교회가 있어요. 그 얼마 전에 제가 강의했잖아요. 그 강의하면서 뭐냐 하면 그 강의 제목이 ‘판결’이란 이름으로 강의를 했거든요. 

그 잠간 중요한 내용이 뭐냐 하면 우리가 뭘 행하기 전에 이미 판결난 상태라는 것을 알아야 된다. 우리는 절대로 심판에서 못 벗어난다는 것이 이미 최종 판결이 났어요. 이게 바뀌지 않는 판결입니다. 심판아래 있게 함이라. 율법을 준 것은 우리로 하여금, 쉽게 말해서 율법을 준 것은 하나님이 우리한테 “니가 어떤 행동을 취하든 안 하든 관계없이 나는 너를 알고 있거든.” 이라는 뜻이에요. 나는 니를 안다. 너는 나를 모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알아요. 그래서 주께서 준비한 것이 바로 십자가의 피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준비한 이유가 알기 때문에 알아도 너무 아시기 때문에 피를 준비하신 거예요. 너무 똑똑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피를 준비한 거예요. 지혜롭게 하려고 아주 몸부림을 쳐요. 조금 더 지혜롭게. 교회 가서 남보다 더 지혜롭게, 지혜롭게. 지혜롭게 환장하기 때문에 가장 안 지혜로운. 지혜롭다는 것은 내가 지혜롭잖아요. 예수님의 피는 뭐냐 하면 내가 지혜롭다, 안 지혜롭다는 전혀 나를 배제하고 주님 쪽에서 준비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요. 

그러기 때문에 인간이 어떻게 몸부림치는 걸 이미 알고 있어요. 알고 율법을 준 거예요. 로마서3장19절 말씀하고 똑같은 말씀이에요. 너는 판단할 자격이 없다는 말은 니가 지금 무수하게 남들을 판단하고 있다는 거예요. 아까 제목이 뭐라고  했지요? 너 빠져. 

남을 판단하는 이유는 아까 잠깐 언급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동질성인데. 누구 위주냐, 나 위주의 동질성입니다. 나 위주의 동질성. 나는 하나의 살인거미에요. 내가 있는 곳에 거미가 있어요. 아지트에요. 거미는 바깥에 거미줄을 해놔서 완전 스파이더맨처럼 쫙쫙 뽑아내서 자식이고 남편이고 하여튼 여기 택배기사까지 전부 다 내 손으로 잡을 거예요. 백화점에 가면 백화점 점원 막 잡아. 어디가도 내 뜻대로 되어야 돼요. 전부 다 내 뜻대로 다 되어야 돼요. 전부 다. 

시집가면 시집은 내 뜻대로, 친정가면 내 뜻대로 전부 다 내 뜻대로 다 되어야 돼요. 나는 한 마리의 거미. 제목 바뀌었다. 거미로. 나는 한 마리의 거미에요. 내 중심. 내 앨범에는 여고 때 찍었던 사진들 요리 삐쭉이 찍었던 그런 사진. 한 줄로 서서 찍은 건 40대. 한쪽 15도로 보는 거. 비행기 지나가는 거 같아. 그거 다 보고 있어. 전부 다 한 마리의 거미에요. 완전 곤충이에요. 곤충. 카프카의 단편소설 같아. 변신하는 게 있거든요. 갑자기 세일즈맨 온 가정의 가장이 자기가 안 벌면 다 굶어죽는 가장이 하루아침에 거치게 되어있으니까 처음에는 아버지 걱정, 남편 걱정하다 나중에는 뭐 걱정하느냐 하면, 당신 돈 못 벌면 그러면 벌레 되어가지고 집에 완전 누워있으니까 당신 못 벌면 우리는 어떻게 살지. 자기 걱정하는 그 내용이에요. 

인간은 서로를 이용해 왔다는 거죠. 거미지요. 그러면 우리 옆에 누가 있습니까? 다른 쪽은 못지않아요. 다른 거미가 있어요. 거미가 또 있다고요. 그러면 이 거미와 거미의 만남에서 서로 자기 위주의 동질성을 추구할 때는 이건 뭘 해야 돼요? 이건 서로 날카로운 판단들이 주고 가는 겁니다. 완전히 컴퓨터 게임 같아요. 레벨을 2, 3으로 올리고 하는 거 있잖아요. 판단들이 있지요. 판단들. 

판단들에 의해가지고 판단들이 맞으면 서로 동질이 되고, 판단 안 맞으면 갑자기 적이 돼요. 동질이 됐다가 적이 됐다가, 적이 됐다가 동질이 됐다가. 완벽한 타인이지요. 있을 때는 칭찬하다가 뒤에서는 험담하고. 전부 다 이게 되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뭐냐 하면 ‘정치적 협상’이라 합니다. 정치적 협상은 노리는 게 있습니다. 이건 뭐냐 하면 평화, 또는 화목. 이걸 목적으로 정치적 협상과 타협에 나섭니다. 늘 배틀하는 거예요. 줄 거주고 양보와 협상에 나서는 겁니다. 

그러면 양보와 협상에 나가게 되면 거미왕국 또는 거미국가, 나의 국가지요. 나의 국가는 하나의 캐슬, 성으로 둘러 쌓여 있겠지요. 이걸 자기 동질성이라 해요. 이 자기 동질성가지고 철학자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가지고 ‘주체’라고 하는 겁니다. 주체인데 옛날에는 주체가 이렇게 고형화되다가 딱딱하게 콘크리트처럼 굳어졌다 해서 주체를 굳어진 하나의 주체로 봤는데. 좀 더 연구를 해보니까 이 주체가 환경에 따라서, 시대에 따라서 이게 늘 바뀌는 거예요. 

그래서 현대철학자는 이 주체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체를 둘로 나눕니다. 하나는 고체 주체와 액체 주체로 나눠요. 액체주체라는 특징은 뭐냐 하면 잔의 모양에 따라서 몰망인데 같이 즉각 즉각 달라지는 거죠. 카멜레온. 얍삽하게 이래 됐다, 저리 됐다. 저리 붙었다가 이리 붙었다가 액체 같아. 그런데 고체 주체는 주로 어떤 특징이냐 하면 깊은 산골이나 농촌에 있는 노인네들. 고집이 보통 고집이 아니에요. 곧 죽어도 병원에는 안 가겠데. 나 주사 맞는 게 아프데. 

이 콘크리트 석고처럼 굳어져가지고 “그래, 니가 그렇게 잘 배웠나? 그럼 니 알아서 해라.” 이런 식으로 자녀들 이렇게 효도를 해도 효도 안 받아. 왜? 자기 굳어진 고집이 있어가지고. 제발 다단계 사지 말고 노인들 어디 놀러 가가지고 그거 해가지고 선물 준다고 물건 이만원짜리 오십만원주고 사지 말고. 백날해도 소용없어요. 아이고, 그 아저씨. 니보다 더 낫더라. 얼마나 다정하게 이야기하는지. 말은 듣지 않아요. 이게 고체에요. 고체. 

차달래부인 나오는 그 남편 같아. 치매 걸린 남편. 완전히 왕고집있잖아요. 왕고집. 왕고집에다가 가부장적 제도. 김언중씨. 광산김씨. 고체 주체. 사기는 또 다 당해요. 고체주체는 융통성이 하나도 없거든요. 그런데 액체주체는 융통성은 있어요. 하지만, 융통성은 있는데 단점이 뭐냐 하면 주체가 고정되지 않아가지고 내가 왜 사는지를 몰라요. 어떤 가게 같아. 가게 뭐 해놓고 한 3년 가겠나 싶으면 앞에 라이벌 있어가지고 인테리어도 새로 해야 되고. 같은 업종해가지고 팍삭 망하면 또 다른 업종 바꿔야 돼요. “당신은 뭐 일 하나 해도 오래 진득하니 하는 게 없네.” 아내로부터 그런 소리를 많이 들을 때 남편은 초조하기 시작합니다. 애는 고등학교3학년인데 당신은 사업 바꾸다가 돈 다 날려가지고 어디 2년을 못 넘기네. 이제는 친정에도 돈 빌리기 미안해서 못 빌리겠다. 아내는 또 바가지 긁지요. 

이 시대가 마치 방랑자 신세 같아요. 한 곳에 진득하니 못 살아요. 동탄에도 못 살고 여기와도 못 살고 자꾸 돌아다녀. 그것도 새로 가면 분위기에 맞춰야 되지 친구 새로 사귀어야 되지. 사귀다 보면 떠나야 될 조건 또 생기지. 유동성이에요. 유동성. 고향은 없고 자꾸 타향만 만들어내는 시대. 

자, 거기에 대한 해결책을 제가 이미 이야기했습니다. 뭐냐 하면 아무도 믿지 말고 아무도 엮이지 마라. 그러면 주체가 모호하기 때문에 외로울 수도 있고 도저히 왜 사는지 모를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라고 이야기하신다면 바로 주님 자체가 유일하게 우리의 주체가 되는 겁니다.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부산강의에서 했던가.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은 예수님만 쓸 수 있다고요. 우리 하나님이지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건 예수님만 쓸 수 있고,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요. 우리 아버지. 

새로운 주체를 줄 때에 이미 영생, 영원한 연봉은 다 받고 온 거예요. 그리고 동행합니다. 뿌리는 자나 거두는 자가 함께 해요. 그러면 우리가 남은 것은 뭐냐, 아무도 믿지 말고 엮이지 말라 하는 것은 상관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약을 올려버리라 말이지요. 어떻게 약을 올리느냐 하면 아무도 판단 안 하면 되는 거예요. 판단 안 하는 방법이 뭐냐, 나는 죄인이다. 나는 누구보다도 죄인이다. 이러면 마귀도 재미없어 떠납니다. 마귀가 정당성을 주장해야 마귀가 확 달려들거든요. 

마귀는 선악에 꽂이는 존재에요. 자기가 알고 있는 선악을 인간에게 전수해가지고 인간을 자기 종으로 만든 겁니다. 그러면 인간을 계속 지배하려면 인간 속에 뭐가 계속 있어야 하느냐 하면, 선과 악의 갈등 투쟁이 계속 있어줘야 마귀가 나설 명분이 만들어져요. 마귀가. 니가 그래서 신부답냐, 니가 그래서 목사답게 될 수 있느냐. 니가 그래서 중다울 수 있느냐, 그래가지고 사장다우냐, 계속해서 마귀가 갖고 놀고 협박, 공갈치고 추궁할 수 있는 빌미가 인간 속에 그 내부가 장착되어있어요. 위치 축적기가 우리 안에 달려있다고 보시면 돼요. 어디 가도 다 들켜요. 우리는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악마는 다 알고 있어요. 쫙 오거든요. 이 위치추적기를 빼버리면 되거든요. 

언제 빠지느냐, 이게 죽을 때 빠져요. 그럼 미리 죽었다 하지. 미리 죽으면 되잖아요. 자, 미리 죽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번개탄 아닙니다. 넥타이 아닙니다. 미리 죽는 방법은 안 죽으면 되는 거예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인간이 지금 2018년도 제가 만약에 제가 만약에 2052년도 죽는다면  이미 2015년에 있는 상황이 어떤 상황이냐 나는 이미 죽은 상황이에요. 파티마 병원에서 이미 장례 치렀어요. 나는 관 속에 누워있습니다. 파티마병원 관 속에 누워있는데 관 속에 누워있으니까 간지럽고 화장실도 가야 되고 잠시 관문을 스르륵 열고 바깥에 돌아다니면서 우리 집까지 왔다 칩시다. 그러면 나는 뭡니까? 모든 게 뭐가 돼요? 과거가 되겠지요. 이걸 가지고 순수과거라 하는데. 

순수라는 말을 붙이는 이유는 없어질 과거가 아니고 전에 있었던 그 과거가 그대로 살아있는 과거가 된다는 게 순수과거에요. 이 말은 어려운데 그냥 넘어갑시다. 어쨌든 간에 이게 돌아오기는 과거가 되는 거죠. 과거가. 순수과거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나한테는 순수라는 게 없어요. 없기 때문에 진짜 세상은 어떤 세상이냐 그 내막은 뭐냐 그 순수한 모든 것은 누가 아느냐 하면 예수님이 아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미 죽은 자거든요. 죽은 자가 예수님의 성령에 의해서 다시 이렇게 문 열고 이리 왔다면 이 인생은 뭐가 되느냐 하면 나의 인생이 아닙니다. 아니고 주께서 나에게 허락한 인생이에요. 주의 인생이에요. 그래서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나의 일은 없고 주의 일이에요. 아까 커피 탔잖아요. 그게 주의 일이에요. 나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주님의 아바타로, 주님이 안에 들어있는 아바타로 껍질로서 맛있게 커피를 마시는 거예요. 

지금 이걸 인위적으로 자꾸 말로 하니까 골치 아프지요. 왜냐 인위적으로 그걸 자꾸 그렇게 합체하고 맞추려고 하니까 이게 요소가 몇 가지 요소더라. 일단 죽었다가 파티마병원 갔다가 관 열고 이러니까 골치 아픈데, 그래가지고는 안 되고요. 수시로 주사가지고 나는 항상 망상가거든요. 왜냐 하면 항상 내 세계를 주장하기 때문에 망상가에요. 망상가. 세상은 내 뜻대로 안되는데 나는 우기고 있어요. 세상은 내 뜻대로. 

나는 내가 원하는 팀이 있는데 내가 원하는 팀은 베트남 박항서 감독이 팀이다. 내일 동남아시아 월드컵하는데 우승해가지고 우리나라 제품이 베트남에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뭐든지 생각하면 내 일이 되어버려요. 뭐든지. 축구 이기고 지는 건 누구 일입니까? 주님이 알아서 할 일이에요. 베트남이 이기려고 하는데 12명 가운데 10명이 배탈나가지고 전부다 기다가 5:0으로 질수도 있는 문제에요. 주의 일인데 이게 나는 상상하기를 뭐냐 하면 나의 일로 보는 거예요. 

그게 나는 망상가에요. 모든 인간이 다 망상가입니다. 일방적이에요. 일방적. 망상을 실제라고 우기기 때문에 왕고집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아, 세상이 그리 됐어. 니 성적 어떻게 됐어? 성적 내려갔어. 어, 내려갔구나! 이러면 되는데 내가 뭐라고 했어? 이리 노니까 성적 내려갔잖아. 라고 망상을 강요하고 우기는 겁니다. 마치 안 그래야 되는 것처럼. 마치 주님이 개입 없는 것처럼. 이건 주님이 없는 세상. “주님이 어디 있어? 인간들이 하기 나름이지.” 이걸 자꾸 고집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순간 순간에 성령으로 주사를 놔버립니다. 주사를 놓으면 뭐 한 순간이 잘못된 게 아니고 내 자체가 입법자가 아니고 판단자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말해서 나는 입법자, 판단자도 아니면서 판단하는 자체가 내가 망상가라는 사실을 깨우치게 하는 일을 하시지요. 10분 쉽시다.

 공은주 (IP:119.♡.152.148)19-01-09 15:30 
안양20181214b야4장11절(너 빠져)-이 근호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 그 12제자 같은 경우에 예수님과 더불어 함께 있을 때는 예수님 따로 있고, 자기 일 따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맨날 하는 말이 “제가 어떻게 해드리면 됩니까?” 이건 자기 일인 거죠. 자기는 그게 망상인 줄 몰랐어요. 주께서 수시로 이야기했습니다. 니 일은 니 일이 따로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수시로 어떤 기적을 했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물위에 풍랑이 있을 때에 그들은 할 도리를 다 해요. 그런데 그 자체가 믿음이 없음이 되어버려요. 

분명히 내가 살기 위해서 평소대로 했는데 니가 왜 그리 믿음이 없느냐고 되어있다 말이죠. 그리고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제자들에게 오천명 중에서 있는 이 사람들의 음식을 너희들 편에서 먼저 제공하라고 먼저 던지지요. 그러니까 제자들이 난감한 상태에 있어요. “지금 남자만 오천명인데 어디서 우리가 다 사오겠습니까?” 라고 하지요. 그래서 어린애 도시락가지고 오천명을 하고도 넉넉히 남겼잖아요. 

그러면 이미 그들은 주의 일속에 편입돼 있어요. 자기 일은 없어요. 주의 일밖에 없어요. 그 떡 먹고 배부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왔는데 주님께서 이야기하기를 니가 나를 따라온 이유를 안다. 너희들은 떡 먹고 배부른 까닭으로 왔다. 그걸 예수님께서 뭐냐 하면 니가 육의 일을 생각한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제가 하는 것은 이 육의 떡. 이 육의 떡이 아니고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영원히 나와 함께 할 수 없다.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다 가버렸지요. 망상가들 다 가버린 거예요. 그런데 그들은 다 가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님을 망상가로 본 겁니다. 

따라서 아까 이야기 계속 해봅시다. 이미 어느 정도 죽었다고 치고 죽었는데 다시 오는 방법은 뭐냐 하면 주님께서 성령 안에 예수님의 죽으심이 근거가 되어있어요. 일종의 양탄자지요. 죽으심에다가 이걸 덮쳐버리면 우리는 살아있다고 하지만,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오게 되면 나는 살아있는 채로 뭐가 되느냐 하면 나는 죽고가 돼요. 

나는 죽고, 그 다음에 누가 산다?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산다는 이 문장 자체가 내가 그렇다는 말이 아니고 주님이 그렇다는 거예요. 주님이 이 일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너희들이 보기에는 내 홀로 있는 걸로 보이느냐. 주님이 부지런히 지금 나와 함께 있어 나에게 계속해서 일을 발생시키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증명해 주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사도바울이 혼자 있는 거 맞아요. 하지만 주님이 함께 있다는 것을 너희들이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아는 사람은 같이 성령을 받은 사람끼리만 그걸 공유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그래서 믿는 자를 만나는 것은 정말 이건 죽은 자가 돌아온 것보다 더 기쁘지요. 기적이거든요. 그럴 수 없는데 그런 일이 생겼으니까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인간은 돈과 엮이면 안돼요. 자본주의 사회는 돈과 엮이는데, 돈과 엮여버리면 돈 없으면 관계도 다 연수가 다 되어버리잖아요. 돈 엮인 관계 말고 이거 끊어버리고 복음으로 성령으로 엮여버리면 그것이 바로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한 몸이고 형제에요. 

자, 지금까지는 설명하는 것이 평화로워요. 주님 성령 오셔서 내 일은 없고, 나는 망상가니까 내 일은 없고, 망상가인 나를 붙들어서 주님의 실재하심을 증거한다. 이리 되는데. 실재로 이렇게 주께서 성령 오시게 되면 이렇게 곱게 오지를 않아요. 어떤 일이 생기게 되느냐 하면 바로 이게 생깁니다. 분통, 절통한 억울한 일이 발생돼요. 실제로 성령이 찾아오게 되면. 

이게 제 이야기가 아니고 베드로전서4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4장14절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성령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복음으로 인하여 고난을 받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고난을 우리가 어떻게 주문했습니까? 요청했습니까? 그런 적 없지요. 주문하지 않았는데 고난이 왔다는 것은 이것은 달리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분통하고 절통하고 억울한 일 당한 거예요. 오해를 받은 거예요. 오해를. “아니야. 그런 뜻이 아니야.” 이렇게 하면 그쪽에서 “에이그, 고집부리지 마. 내가 다 알아.” “아니야. 내가 그런 뜻으로 이야기한 것이 아니야. 그렇게 살아가는 게 아니야.” 아무리 해도 주위에서 알아보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굉장히 억울함을 복음알고 억울한 일 당한 거 있습니까? 진짜 이건 돈이 몇 푼 있다. 그런 정도가 아니고 정신적으로 억울함을 당하지요. 잠언서에 나오지만 사람 중에 제일 가장 하기 어려운 것이 남의 마음을 갖는 게 제일 어려워요. 남의 마음을. 이걸 다른 말로 하면 그쪽 마음이 내 속에 들어오는 것. 또는 내 마음이 저 쪽에 들어가는 것. 이게 제일 어려워요. 그런데 잠시 헤헤 웃고 한다고 서로 마음에 공유했다고 착각하지요. 

그런데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면 이게 진짜로 좋아한 사람이 들어온 게 아니고 원수가 들어왔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지요. “이럴 것 같으면 헤어져!” 이런 말이 그냥 막 나올 때가 있다고요. 아름다웠던 추억, 좋았던 시절, 아무리 10년 20년 있었어도 한 순간에 기분 나쁨이 그 모든 것을 무효화 시킵니다. 한 순간에. 

“당신이 이런 사람이었었어.” 이 말 한마디에 그만 지나간 과거는 다 날아가 버립니다. 왜 날아가야 되냐 어차피 망상이니까. 어차피 자기 자신은 누군줄 모르고 꿈만 꾸는 몽상가에요. 몽상가. 우리는 다 몽상가에요. 내가 모르는 상태기 때문에 몽상가라고 감히 이름 붙이는 겁니다. “니 누구야?” “몰라.” 꿈만 꿔. 아침에 출근할 때 꿈만 꾸고 일방적이라. 뭐든지. 뭐든지 일방적이에요. 무조건 잘되어야 되고 무조건 우리 가정 잘되어야 되고 건강해야 되고, 출세해야 되고, 무조건 행복해야 되고, 일방적이에요. 

따라서 우리의 소원은 뭐냐, 행복입니다. 남북통일 아니에요. 남북통일 20조 퍼줄 일이 있습니까. 남북통일 아니고 행복이에요. 행복인데, 행복을 방해하는 게 뭡니까? 내가 일부러 불행을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갑자기 들어 닥친 이 억울함입니다. 곡해와 오해. 내가 잘못한 걸 예상해서 잘못했으면 미리 대비는 되지요. 

이건 대비되지 않는 상태에서 쑥 들어오는 거예요. 갑자기 벌어진 사태. 애 키우는데 애가 갑자기 죽었다. 이런 거요. 내가 공들여서 30년 키웠는데 죽었다. 이런 것. 뭔가 나 어찌 살라고. 나 어떡하라고. 너무나 이거는 나라는 그 모든 것이 다 없어질 때, 억울한 상태. 그게 뭐냐 하면 ‘추상적 죽음’이 아니고 이게 ‘실제적 죽음’이에요. 

야~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우리는 착각하기를 우리 몸이 숨 쉬고 있어서 살았다고 하잖아요. 이건 아니에요. 우리 몸이 과거가 있을 때는 산거예요. 만약에 숨 쉬고 있다고 하면 짐승하고 개하고 우리하고 다를 바가 없어요. 똑같아요. 심지어 내가 이리 하면 개도 화낼 거예요. 나도 추억이 있습니다. 이리 할 거예요. 그러면 추억 없는 거. 박테리아? 박테리아도 추억 있습니다. 할 거예요. 

인간이 산다는 이유는 살기 때문에 사는 것은요, 이건 정박아 애들은 몰라도 아주 IQ낮은 사람은 몰라도 정상적인 사람은 과거에 만든 꿈 때문에 살아요. 그것 때문에 안 죽고 싶어요.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한 고집들 하는 이유가 희망이라는 게 있기 때문에 희망이 살아있는 한 나는 죽는다는 것은 꺼져버려! 죽는다는 건 저리 가! 나는 죽을 때가 안 됐어. 딸 아직 시집도 안 보냈는데. 안 돼! 저리 가! 살아있다는 것은 뭐냐 하면 내 꿈이 흠집나지 않는 조건하에 살아있는 겁니다. 

이 말은 지금 내가 죽을 만큼 힘들어도 내 희망한 가능성이 있다면 생생하게 나는 살아있다. 자살해. 미쳤어? 내가 왜 자살해. 꿈이 있는데. 꿈이 있는 한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나는 거예요. 인간은. 이게 살아있는 거예요. 그런데 억울한 일을 당해버리면 그 꿈마저 와자작 작살나는 순간이 성령이 개입한 순간입니다. 일체에 나의 가치와 나의 명예, 명성, 내 자존심은 일체 챙겨주지 않는 순간. 그리고 다시 힘 있게, 힘 있게 일어설 수 있는 여지를 완전히 작살내는 거예요. 그 정도 되어야 억울한 거예요. 

다른 나쁜 사람이 있어서 내가 그 사람이 억울한 게 아니라 특정 상태도 없는데 갑자기 내 인생이 이리 망가지나,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내 것, 그 내 것 안에는 나의 가족도 들어있지만, 내 돈도 들어있지만, 내가 애쓰고 먹을 거 안 먹고 쓸 거 안 쓰고 노력했던 돈도 우선이지만, 그 노력했던 자기한테 절대적 신뢰했고 자기를 밀어줬던 그 열성, 그 열성이 무용지물로 끝났을 때, 그게 바로 내 인생이 억울한 거예요. 

내 인생 억울한 것. 이게 성령이 임할 때입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사도바울이 주님이 찾아왔을 때, 낯선 타자지요. 타인. 완벽한 타인이 아니고 낯선 타인이에요. 그러니 여기서 문제 삼아봅시다. 첫째 시간 논리에 의하면 억울하다는 말이 성립이 안 되어야 정상입니다. 내 일이 아니고 다 주의 일이니까.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이론이에요. 

이론이 좀 밑으로 내려가야 돼요. 밑에 내려가면 뭐가 필요한가, 원심분리기가 필요한데. 뱅뱅 돌려버리면 진액과 물 부분이 이렇게 갈라지게 되어있어요. 비커에 보면 갈라지게 되어있어요. 섞여있던 것이 혼탁한 것이 밑에는 건더기 있고 위에는 물 있듯이. 하나님께서 뺑뺑이 돌려버립니다. 뺑뺑이 돌리면 진짜 내 모습이 죽어도 못 내놓는 게 있겠지요. 이걸 작살내 버려요. 

그러면 다 작살나는 거예요. 정말 내가 누구냐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왜? 돈만 있으면 사니까. 꼭 내가 누군 줄 알 필요 없어요. 돈 주고, 돈 쓰고, 살림사고 끝. 내가 누군 줄 알 필요가 뭐가 있겠어요. 그래가지고서는 아주 조용하고 행복하게 지옥 갑니다. 행복한 가운데. 아무 무탈하게 지옥가요. 왜냐, 내가 누군 줄 모르니까. 그냥 살던 대로 사는 거예요. 바위 있으면 피해가면 되고, 가시덤불 있으면 열매 안 맺으면 그만이에요. 열매 소관은 주님 소관이지 내 소관 아니거든요. 

그냥 되는 대로 힘들면 피해가고 방해하면 돌아가면 되고, 아주 살기가 편해요. 우리는. 그런데 이 억울함이라는 게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억울함이라는 것은 우리의 폐부, 심부까지 깊숙이 주사바늘이 들어오는 거예요. 그 억울함. 그 억울함이 누구 억울함이냐, 주님의 억울함입니다. 평소에 우리는 주님의 억울함에 대해서 아무 관심 없어요. 왜냐, 나만 안 억울하면 돼요. 왜냐, 주님은 어디까지나 타인이니까. 나의 행복이 우선이지 주의 행복이 우선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성령이 와서 주사바늘을 집어넣어버려요. 주님의 억울함이 와요. 그러면 아까 베드로전서4장 14절에 보게 되면 성령이 임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 아니 그리스도는 2000년 전 사람인데, 맞아요. 2000년 전 사람인데 2000년을 뛰었다면 지금 내가 살아있어도 2048년도에 죽는 순간이 올 거 아닙니까. 언젠간 죽잖아요. 죽는 순간을 주님의 성령에 의해서 죽는 순간을 이미 죽었다고 치고 지금에다가 지금 섞어 넣을 수 있는 권한이 주님한테 있다 이 말입니다. 성령 안에서. 

아이, 이까지 2000년도 뛰어넘었는데, 그까짓 거 몇 년 산다고, 그것도 같이 이렇게 결합을 시킬 수가 있어요. 시간을 초과해서 결합을 시킬 수가 있다 말이죠. 그런데 이 이야기 계속해봅시다. 억울함이 있다는데 과연 우리가 첫째 시간 이론에 의하면 억울함이 생기지 않아야 돼요. 그럼 생기는 겁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몰랐습니다. 우리는 늘 자신을 뭐로 세우느냐 하면 ‘입법자’ 같은 말로 ‘판단자’로 행세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리 아니라고 부정과 부인을 해도 우리는 내 잘되기 위한 입법자, 입법이라 하는 것은 행정은 입법인데 법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거예요. 없는 법을 국회의원들이 모여서 법을 새로 만들어요. 입법이죠. 

그 입법 행위가 내가 입법을 해요. 입법을 하게 되면 법이 생겨버리면 법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정의 그리고 정의로움 그리고 선을 의미하거든요. 진리. 그럼 입법자가 누굽니까? 내가 입법자가 되지요. 그럼 입법자 만들었으니까 누가 만들었어요? 누가 정의롭다? 나는 항상 정의롭고 나는 항상 선하고 나는 항상 진리답고 나는 항상 정당한 거예요. 완벽한 타인이지요. 타인. 

이럴 경우에만 억울함이 발생되는 거예요. 억울함이. 그 대표적인 사람이 욥입니다. 욥은 자식들 10명이 있는데 그 애들이 남한테 피해를 주지 않고 죄 짓지 않기 위해서 부모로서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늘 예배드리면서 기도하는 거예요. “하나님, 내 자식이니까 내 자식을 통해서 타인이 고통 받지 않게 하옵소서.” 기도했어요. 그 내용만 봐도 욥이 고난 받을 짓이라고 욥이 감히 생각하지 못한 거예요. 

욥은 자기가 입법자로 여기지 않았고 판단자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믿는 자이기 때문에 모든 판단은 주님이 알아서 할 거라고 시작을 했어요. 언제까지 그랬습니까? 자기 몸이 고통이 오기 전까지. 그리고 친구들이 와서 자기에게 해당되지도 않는 상황을 가지고 마치 자기를 그런 식으로 몰아세울 때에 여기에 즉각적인 반응으로 뭐냐, 갑자기 없던 입법 요소가 튀어나와서 강력하게 펜스가 되어가지고 그쪽에서 날아오는 불화살을 나의 정당함으로 강력하게 방어에 나섭니다. 우리 모습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몰랐던 겁니다. 앞으로도 70, 80 돼도 몰라요. 성령께서 미리 당겨서 봐버립니다. 너는 이미 죽었고, 왜 죽었느냐, “니 하는 짓거리가 너를 죽일 수밖에 없는 짓거리다. 니가 죽는다는 것은 니가 과도해서 벌 받는 것이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너는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죽는 것은 원래 가는 코스다.” 라고 분명하게 주께서 언질을 주게 되어있어요. 말씀을 통해서 언질을 줍니다. 

누가 입법자냐, 누가 판단자냐 하는 이 본문을 보게 되면, 만약에 목사가 이런 설교를 하게 되면 전부 다 자기 안 보고 앞에 장로 보고 있는데요. 전부 다 봅니다. ‘헌금 좀 했다고 니 나보고 놀렸지? 니 고3이라고 교회 안 보낸다고 믿음 있는 가정이 애 교회 안 보낸다고 니가 뒤에서 험담했지?’ 전부 다 봐요. ‘교회 놀이터에서 놀 때, 우리 애 밀었잖아.’ 뭐 이런 것까지. 괜찮습니다. 해놓고는 잊지를 않아요. 용서는 하되 잊지는 않아요. 잊을 리가 있습니까? 

거미의 왕국에 거미줄 하나 떨어졌는데. 자기 왕국인데 어떻게 잊어요. 매일 신경 쓰는 게 내 왕국 관리인데. 내 왕국 인테리어 하기 바빠요. 리스칠 하고요, 데코레이션하고 이리 하는데. 자기 관리하기 바쁜데 뭐. 남의 차 박은 건 생각 안나요. 지 차 박은 건 생각나지. 

내가 입법자니까 입법자마는 외부에서 무슨 욕을 하던 내 내부에서는 내 정당함에 대한 조건들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거예요. 법을. 만들어낼 때 성경말씀 가지고 만들어내요. 주여, 이것도 믿고요, 이것도 지켰고요, 전에는 못했는데 성화돼가지고 이것도 하고요, 계속해서 자기 정당성에 근거할 수 있는 것만 재다 쫙 해요. 그게 보편적인 것이 뭐냐, 기도해서 복 받았다는 이야기, 교회에서 계속 내놓는 간증들 그런 겁니다. 어려웠는데 기도하고 회개하니까 복 받았다. 그런 거 하잖아요. 

다시 말해서 나는 욥처럼 똑같아요. 나는 이 정도로 억울할 정도로 나쁜 짓은 한 기억이 안 납니다. “주님, 어쩌려고 저를 이렇게 망가뜨립니까? 제가 주님 앞에 무엇을 그렇게 나쁜 짓을 했습니까?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는 예수님을 믿고 따를 수 있는 어떤 여력도 다 없어졌습니다. 이러하면 저는 못 믿겠습니다.” 이리 되는 거예요. 

주님의 뜻은 뭐냐 하면 믿지 마라에요. 왜? 안 믿는 게 니 본성에 부합된다는 겁니다. 안 믿는 자를 구원해요. 주께서는. 믿는다는 것은 지가 믿는다는 이 법을 만든 거예요. 자기를 위해서 법을 만들어 놓고 믿는 사람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십니까? 이러고 따지는 거예요. 그게 마귀적이지요. 

자, 그렇다면 이 억울함이라 하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을 제 이야기 이론에 의하면 억울하다 하는 것은 평소에 주님에게 관심이 없었다는 뜻이에요. 관심이 없는데 억지로 관심을 주시는 겁니다. 지난 수요일날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처음에 야곱은 내편이지요. 내편은 구원 못 받습니다. 누구 편 되어야 돼요? 하나님 편 되어야 됩니다. 그러나 항상 인간은 내편이에요. 아까 이론대로 하면 자아가 있음은 어떤 타자, 타인이든 전부 다 나를 뭐로 만든다? 나의 세계의 지배권을 행세해서 나의 동질성에 합류시켜 버리지요. 나의 세계에 다 집어넣어요. 왜? 내편은 깨지면 안 되니까. 나는 내 편 때문에 내가 사니까. 이걸 어떻게 인위적으로 벗어납니까. 못 벗어나요. 강제적으로 성령이 와버립니다. 

성령이 오시게 되면 갑자기 처음에는 뭐냐, 억울함이 생기는 거예요. “주여, 이럴 수는 없습니다. 너무 심합니다.” 억울하다는 말은 그 순간에 뭘 안다? 자기가 나를 위한 그러니까 하나님을 위한 율법이어야 되는데 이게 누굴 위한? 나를 위한 율법으로 장착되어서 마치 바깥으로 위장하기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인 양 철저하게 내가 거짓말 쳐가며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자, 야고보서4장 13, 14절 한 번 봅시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안개 앞에 형용사가 붙어있지요. 안개 앞에. 없어지는. 우리는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없어지는 이니까 우리는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없어지고 있는 동사니까, 없어지고 있으니까 나라는 명사는 사실은 사라지는 동사로 해체되지요. 어떤 동사로? 점점 닳아지고 있는 거예요. 양초 같아. 점점 더 없어지고 있어요. 

제가 부산강의에서 했잖아요. 우리가 죽게 되면 아예 안 산 게 된다고요. 너무나 냉정한 이야기지만, 맞는 말이에요. 내가 죽는 순간 나는 처음부터 이 세상에 안 태어난 사람 되어 버려요. 우리는 평소에 살아있으면서 내가 안 태어났다고 못 하잖아요. 그러니 우리는 망상가인 거예요. 내 본질과 내 행동에 달라도 너무나 다른 겁니다. 주님이 규정한 것과 내가 나를 규정한 것과 차이나도 너무나 차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가짜에요. 가짜고, 구라고, 거짓말이고. 맨날 거짓말 때리는 거예요. 왜냐? 맨날 나는 내 위주로 살아가니까. 내 정당성을 변호하고 방어하는데 급급하니까. 전부 가짜인 거예요. “아휴, 그럼 가짜끼리 우이 살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한50년 지나면 다 없어져요. 

여기 어제 눈 왔잖아요. 오늘 낮에 눈 다 녹았어요. 저 같으면 우리는 녹아진 눈이에요. 참이슬이나 이리 된다 말이죠. 없어질 걸 왜 만들었습니까? 그건 바로 우리를 통해서 악마의 속셈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왜냐, 악마가 이미 쥐고 있으니까. 우리는 입법자, 법을 따로 챙기겠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그 법은 하나님을 위한 법이 아니고 나 살려달라고 나 천당 보내달라고 버티는 법이에요. 이게 법이. 그게 바로 마귀적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이 억울함을 발생시켰을 때에, 이 억울함이 있을 때에, 이 억울함이 이게, 억울하다 하는 것은 나쁜 거죠. 지가 뭔데 억울해요. 나는 개입니다. 하면 되는데. 그게 입으로 나오는 것하고 현실하고 안 맞다 이 말이죠. “맞습니다. 저는 개입니다.” 해놓고는 개라고 했으니까 다시 원상회복시켜 달라고 또 버티는 이게 인간이거든요. 이건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를 계속 내뱉는 거예요. 

그러면 이걸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냥 맡기세요. 오늘 이 집에 시계를 보니까 이 시계가 오늘 말씀과 딱 부합이 되네요. 앞에 시계 한 번 보세요. 시계 틀이 어디 있습니까? 없지요. 틀은 없는데 움직이는 시침 꽂혀있고 숫자는 본드로 붙였는지 돌아가면서 붙였지요. 없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뭐가 없어요? 나의 세계가 없어요. 나의 세계의 망상 자체를 손을 놓으라는 뜻이에요. 니가 자살하라는 말이 아니고. 그냥 살아요. 바위 있으면 피해가고, 못가면 뒤돌아 가면 그만이에요. 하더라도 그 바탕 자체가 주님이 일구어 나가는 세계에요. 율법의 세계, 말씀의 세계라는 말이지요. 

문제는 뭐냐 하면, 틀이 나라는 시계 틀이 따로 있다는 게 문제가 돼요. 주께서 쓰시는 대로 그냥 있는 곳에 가면 돼요. 어디가든지, 부산가든지 살면 되는데 “아니야, 서울로 목표를 해야지.” 갑자기 목표가 생기고 목적이 생겨버려요. 사람이 힘이 들 때 첫 번째 현상이 뭐냐 하면 목표가 생긴다는 게 현상이고. 둘째는 그 목표를 위하여 목적으로 나간다는 게 문제에요. 

목적으로 이끄는 삶이 이게 악마로 가는 지옥으로 가는 삶입니다. 책 한 번 읽어보세요. 목적으로 이끄는 삶. 그거 지옥 가는 책이에요. 전부 다 시험 드는 거예요. 왜 시험 드느냐 목표가 있기 때문에 시험 드는 거예요. “아휴, 오늘 이 정도 하려고 했는데 일이 안됐다.” 왜 시험 들었어요? 이게 목표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한 거예요. 누가 만들래? 누가 세우래? 안 세웠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매일같이 죄인으로 태어나게 되면 매일같이 목표 없고, 목적 없는 날은 없어요. 

주께서 우리 성질대로 그대로 드러내고 그 다음 매일같이 그걸 억울하게 하고 분노하게 만들고 화나게 만드는 작용을 주변의 상황을 통해서 계속 줍니다. 그 주변 상황이 누가 배치되어 있느냐 마귀 들린 사람들로 쫙 배치가 되어있어요. 산에 도 닦으려 하지 마세요. 그냥 시장 바닥에 살아야 돼요. 거기에 마귀 들린 사람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분 앞에 손님이에요. 그분들이 우리를 좌지우지하고 주먹거리고 난리 납니다. 왜, 주님께서 그렇게 허락하셨어요. 

날마다 만들어 내는 그 꿈과 계획이 늘 주위의 사람으로 인하여 강제로 좌절되게 만드는 역할을 그들은 충실해야 돼요. 그게 바로 13절 나옵니다. 제가 읽어볼게요.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자, 장사하면서 이득을 보겠다고 했는데 그게 좀 이렇게 시원찮고 잘 안됐다 치면 질문은 이겁니다. 이거 누구 때문에 장사 안 된 거예요? 요게 제 질문입니다. 백종원 때문에? 골목장사 안된 거예요? 누구 때문에? 아니면 문재인 때문에 안 된 거예요? 노무자는 데모해서 그런 거예요? 김정은 때문에 안 된 거예요? 아니면 미국과 중국 무역 분쟁 때문에 그런 거예요? 세상은 경제구조로 짜여 있거든요. 

이리 생각하면 제일 간단합니다. 공사 중에 있는 지하1층부터 있는 콘크리트 작업하고 철근 작업하잖아요. 처음에 단단한 콘크리트하고 거기다가 2층 지으려면 아래층에 철근해서 콘크리트 작업해야 되잖아요. 요걸 경제로 봅시다. 한쪽이 넘어지면 한쪽의 비중이 분산되기 때문에 이쪽이 같이 넘어져요. 세계경제라 하는 것은 이리 된다고요. 

촌에 오이 농사하는 사람이 갑자기 오이 값이 내려갔다. 분명히 다른 데서 치고 들어왔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갑자기 남편의 직장이 구조조정 당한다. 뭔가 치고 들어온 거예요. 혼자 조용히 살림만 하고 살란다. 이래가지고는 그 수입이 안 들어와요. 전부 다 1층의 구조가 전부 다 연결되어있다 말이지요. 이걸 경제학자나 상식 있는 사람은 다 알아요. 그렇다면 장사가 안됐다. 누구 때문에 안 된 거예요. 자기 때문에 안 된 거예요? 자기 때문에 안 된 거예요? 남들 때문에 안 된 거예요. 나라가 대표적으로 조정을 못해서 그런 거예요. 다들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직도 뭘 포기 못한 거예요? 자기의 목표와 목적을 포기 못한 거예요. 왜? 자기는 뭐하기 때문에? 자기는 이 경제가 자기 장사가 안 될 정도로 그렇게 정당함이 손실되지 않았다고 보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는 깨끗하고 자기는 더 욕심내지 않았고. 보통 중소 기업하는 사람이 제일 힘들어요. 새벽에 나와서 저녁까지 해요. 사장은 제일 일을 많이 하고 제일 많이 노는 농땡이는 초자가 제일 농땡이고. 사장부터 제일 힘들어요. 중소기업 같은 경우는 제일 힘들다고요. 보통 가게해보세요. 직장생활은 9시부터 하면 되지요. 치킨집은 하루 14시간해요. 집에 못 있어요. 나가야 돼요. 월드컵할 때는 밤샘합니다. 주문배달 때문에. 왜? 내거니까. 내가 사장이니까. 

내년도 사장되려면 내가 지금 잠이 옵니까? 바깥에 가게에 나가야 되지요. 몸 버리고 난리나지요. 내가 왜 살아야 됩니까? 나는 정당하기 때문에 살아야 되지요. 그럼 남은 왜 죽어야 되지요? 부당하니까 죽어야 되는 거예요. 선악구조입니다. 선한 사람은 오래 살고, 악한 사람은 일찍 죽어도 괜찮고. 음주운전해가지고 사고 나면 사형시켜야 돼. 내가 대통령되면 음주 운전하는 사람들 3진제도. 그거 필요 없어요. 제일 간단한 방법 있습니다. 그 사람 차를 폐차시키면 돼요. 벤츠가 되던 트럭이 되던 그 즉시로 “예, 예, 집에 편안히 계세요. 차는 우리가 모시겠습니다.” 해가지고 폐차시켜가지고 폐차 값 십만원주고 끌어 보내면 돼요. 실제로 그렇게 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이태리에 있는 소곡?이 그렇게 해요. 음주 운전 될 리가 없지요. 차가 날아가니까. 최고 좋은 방법이에요. 

그러니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스스로가 입법자가 되기 때문에 입법이 법을 세울 때는 항상 누구는 마땅히 정당한 거예요? 법을 누가 세워요? 내가 세울 때, 누구는 이유를 불문하고 항상 뭡니까? 내가 정당해요. 내가 만약에 음주 운전 3번을 걸렸다 합시다. 그럼 나보고 음주 운전 법을 세우라 하면 뭡니까? 10번을 걸려야 벌금50,000원. 그리 세울 거예요. 

왜냐하면 그래야 아직까지 7번 남아있으니까. 법을 누가 세우느냐에 따라서 누가 정당하냐가 되는 겁니다. 국회의원들 자기 세비를 올린다 하지요. 왜 그렇게 합니까? 자기들이 입법자이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들이 OK하면 그냥 월급 올라가는 거예요. 

입법자라 하는 것은 기준이 뭐냐 하면 이겁니다. 선악과 지식을 알았다. 왜? 꼬아? “하나님, 나는 선과 악을 알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 싫어요? 이미 알아버렸으니까 내가 하나님 되렵니다. 싫어요?” 하나님 앞에 대드는 모습이에요. 악마의 모습입니다. 

자, 강의를 처음부터 돌아가 봅시다. 처음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성경을 보는 이유가 지금 성경 보는 내가 이걸 봄으로서 지금보다 더 발전하기 위해서 하는 거죠. 그런 이야기했지요. 자, 발전한다는 말은 뭡니까? 내가 이 법을 가지고 조리해가지고 나의 정당성을 더욱 단단히 굳히기 위한 새로운 법을 또 하나의 계속해서 만들어내기 위한 겁니다. 

그런데 연못 속에서 뭐가 나온다고 했습니까? 호미곶에서 손이 올라와가지고. 진짜 호미곶 보세요. 해뜰 때 찍으면 손 사이에 해가 있어요. 호미곶이 손이 올라와가지고 나를 잡아당겨버리지요. 이미 니는 죽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니가 하는 모든 것은 니 일이 아니고 다 주의 일이에요. 말씀의 일이다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죽었다가 안개처럼 사라져야 될 운명입니다. 그냥 사라지면 안 되지요. 왜 사라져야 됩니까? 정당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왜 정당하지 않는 이유가 입법을 하기 때문에 그래요. 자꾸 판단자가 되고 입법을 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 장사는 잘 되어야 되고 남은 망해도 괜찮다. 왜? 입법자로 보니까 나는 오래 장사해야 될 가치가 있고 니는 내 장사 앞에서 사라져도 마땅한 나보다는 덜 중요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개인의 동질성에 항상 인간은 거기서 집착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는 겁니다. 이거 고칠까요? 말까요? 어디 고칠 수 있습니까? 안 고쳐지지요.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구원은 이걸 드러내는 겁니다. 들춰내는 겁니다. 제가 아까 식사하면서 이야기했는데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오늘 누가 십자가마을에 질문했지요. 답변했다 했는데. 질문이 뭐냐 하면 “ 령을 소멸하지 말라 하는데 그게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성령을 소멸치 말라 했는데 이게 무슨 말입니까?”할 때 제가 답변을 이렇게 했어요. 

그것은 독자적으로 살지 말라는 것이다. 예를 들기를 어떤 가장이 있는데 그 가장이 보기에 자식이 항상 밤10시에 들어오더라.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밤10시 이후에 들어오면 내 자식 아니다.” 라는 선언을 해버렸다 했어요. 그러면 그 다음에 그 자식이 들어올 때는 9시에 들어올 때도 있고, 10시에 들어올 때도 있고, 11시에 들어올 때가 있더라도 그 자식이 계속 자식  는 이유는 뭐냐 하면 내가 만든 입법, 내가 만든 기준 말고 우리 아버지는 밤10시 되면 자식 아니다. 하는 기준이 계속 남아있는 채 11시에 들어와도 괜찮고 12시 넘어서 들어와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내 기준이 빠지고 누구 기준이 들어왔기 때문에. 아버지 기준이 들어왔기 때문에 늦게 들어와도 아버지 기준이 살아 있잖아요. 

그런데 이게 그야말로 손이 내밀어서 나를 잡아올 때는 그런데. 만약에 성경을 그냥 내 잘남으로 보려고 보게 되면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 하니까 스스로 성령을 소멸했다. 안 했다를 결정하는 입법을 누가 제정해야 돼요? 내 행동을 정당화하는 입장에서 그걸 제정을 해야 된다고요. 그리고 혹시 성령을 소멸하더라도 다시 성령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조차도 내가 법을 만들어요. 일방적으로. 그걸 반성기능입니다. 회개기능이라 하거든요. 

내가 스스로 반성해서 다시 원상 복귀할 수 있는 그런 법까지라도 내가 스스로 내가 만들어버려요. 그걸 지적하는 거예요. 만들면 뭐합니까? 사라지는데. 그 만든 법이 진짜 하나님 뜻에 맞으면 안 사라져야 되지요. 그 자기 사라짐과 동시에 법도 안개가 되어 사라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어차피 사라질 거 내가 누구냐는 알고 사라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바로 성령이 찾아온 사람은 ‘아~ 내가 주님께서 나를 입법자, 선악적인 체계에 서 있다고 나를 죽이시는구나!’ 라는 기준이 선악을 아는 자는 정녕 죽으리라 하는 창세기2장의 기준이 우리 안에 장착되어 있으면 그 사람이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지요. 이미 주의 백성 맞습니다. 그래서 이미 죽었다고 치고, 죽었다고 쳤는데, 오히려 아직 안 죽었다 하지만. 

여러분, 오래 살고 숨 끊긴다고 해서 죽음이 아닙니다. 2018년도 있는데 2052년 죽었다 칩시다. 그런데 이게 죽음일까. 죽음이 아니에요. 진짜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 십자가 죽음이 죽음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죽어도 안 죽어요. 다시 의의 부활로 악의 부활로 하기 때문에. 인간은 죽으면 사실 속 편하지요. 죄 짓고 죽으면 제일 편하지요. 사람 죽이고 난 뒤에 사형 당하면 제일 편해요. 자기가 사형하는 것은 자살이라 하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자살이 성립이 안 된다는 겁니다. 

자살해서 죽어도 다시 일으켜 세워요. 주님 뒤끝 있습니다. 한 번 인간 됐잖아요. 끝났어. 우리는 계속 인간되어야 돼요. 우리 소관 아니에요. 우리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끝까지 다 날아가야지. 영화를 끝까지 봐야 돼요. 끝까지. 반전이 있어요. 끝까지 다 봐야 돼요. 다 보고 난 뒤에 다 본 내용 시나리오를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집어넣어버립니다. 

그러면 잠시 우리는 억울함을 느껴요. 욥처럼. “이럴 수 없습니다. 내 인생 망가졌습니다.” 하면 “니 인생 어디 있어?” ‘아! 그렇지. 내 인생 없지.’ “이건 내 월드 내 테두리입니다.” “니 봐! 시계 봐! 니 테두리 없어. 니는 그저 숫자판이야.” 널려있는 숫자판 중에 하나에 불과하지요. 초침은 주님이 초침이고, 주님이 알리는 시간을 지정하기 위해서 너는 거기에 7자로 박혀있을 수도 있고 12로 바뀔 수도 있고, 집사님은 4로 박힐 수도 있고. 그건 죽을 사자인가. 그럼 3으로 바꿔드릴게요. 

각자 다 달라요. 다른데, 주님을 하시는 일을 지향하고 그것을 증인하고 증언하고, 그걸 드러내는 게 중요하거든요. 그런 관계가 되려면 우리는 이 야고보서의 말씀처럼 우리는 이름을 아예 안개라 칩시다. 안개. 그것도 멋진 안개가 아니고 칙칙한 밤안개. 현미가 불렀던 밤안개~ 칙칙한 밤안개가 되어도 괜찮아요. 어차피 우리는 운명은 확정적이라는 사실을 평온하게 합니다. 평화롭게 만들어요. 

순간, 순간 억울한 것은 인간 개과천선하려다 일부러 마귀가 와서 그렇게 북돋은 거예요. 되지도 않는 게 이만하면 됐습니다. 까불다가 한방에 훅 갈 수 있다 말이지요. 인생을 살면서 희한한 일이 좋은 일 하나 있잖아요. 그러면 좋은 일이 있으면 혹 나쁜 일 있어요. 나쁜 소식부터 먼저 할래, 좋은 소식부터 먼저 할래 그렇듯이. 항상 이렇게 하도 경험했기 때문에 뭔가 좋은 일이 생기면 불안, 불안해요. 이쯤 되면 한 건 쯤 터지게 되어있는데..., 안 터지면 또 안 터지는 대로 불안해. 마이 월드. 나의 세계를 계속 고수하려고 하다 보니까 그런 현상이 일어나거든요. 

그래서 여기에 12절에 봅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뭡니까? 하나이시다. 17절에 보면 하나, 주님밖에 없어요. 그 분이 하는 것이 뭐냐 하면 구원하기도 하고 멸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구원받으려고 애쓰지 말라는 거예요. 또 그렇다고 구원 안 받으려고 애 쓸 필요는 없어요. 

구원은 뭐냐 하면 내편에서 주님 편으로 옮겨가잖아요. 내 위주에서 내 이력 없어지고 주의 일로 가게 되면 주의 일에 대해서 동의하고 참모하게 되면 그게 주의 백성입니다. 사실은 주의 일 같으면 우리는 주는 남의 일이잖아요. 보통 우리는 남의 일에 대해서 나보다 더 중요시 여기지 않는 것이 우리의 본성에 맞는데, 이 본성을 이겼어요. 성령께서. 

성령께서 우리의 본성에서 끄집어 내줘가지고 주님의 본성 속에 집어넣어 놓으니까 우리의 안목이 주님의 본성 쪽에서 물끄러미 전에 있던 내 쪽을 바라보는 거예요. “니는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것을 바라보는 안목을 허락해 주시는 겁니다. 전에는 내가 구원 받아야지. 하다가 이제는 구원이고, 멸망이고 간에 이건 내 소관이 아니라는 것을 편하게 인정해요. 그걸 아주 벌벌 떨면서 인정하면 안 되고 만약에 믿음 없이 성령 받지 않고 성경을 보게 되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이것 밖에 안 주어집니다. 

공포에요. 공포. 성경을 보면 볼수록 공포스럽습니다.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와 버릴 자를 이미 정해져있다. 로마서9장.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윽! 그러면 내 노력도 안 먹힌다는 말이지. 내 노력도 안 먹혀요. 내 열성과 마음 낮음도 안 먹히지요. 그러면 내가 50년 교회 다녔는데 아무 소용없지요. 그 소용없다는 걸 성령 받은 사람은 이제야 종을 놓아주시는군요. 하고 속편하게 생각하는데. 그 병원이 속편한 내과라 하는 거예요. 

속이 그렇게 편한 거예요. 마치 얹혔던 것이 쏵 내려가는 것처럼. ‘아이고~ 내가 쓰잘데기 없는 내 일이 없는데 내 일이라고 우겼구나!’ 생각하는데 구원이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인데 편하게 생각하는데,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내가 나 밖에 없기 때문에 분노가 일어납니다. 격분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거 뭐 아마 예정론인데, 이걸 예정론이라 이야기하는데 아마 다른 해석이 있을 거야.’ 다른 해석을 일부러 찾아가요. 그러니까 신학자들은 안 믿는 사람을 위해서 다른 예정론을 만들어놨어요. 예를 들어서 이런 겁니다. 예정된 건 아무도 모르지만 열심히 말씀대로 살면 예정된 사람이다.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그런데 그것도 문제 있어요. 열심히 사는데, 열심히 살았다. 안 살았다 누가 입법합니까? 누가 판단해요? 본인이 본인의 정당성. 열심히 살았다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본인이 법 세웠는데 그 법은 소용없는 법이에요. 

왜냐하면 본인이 세웠기 때문에 본인은 반드시 천국에 넣어줍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주님이 입법자가 되면 구원하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고. 이게 구약에 사무엘상에 이렇게 되어있어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고 낮아지게 하기도 하시고, 숫자가 2가 되게 하시고 6으로 가게 되어 6으로 밀릴 수 있고, 이게 밀린 게 아닌지 모르지만. 6에서 8이 될 수 있고 10될 수 있고. 이건 주님 마음대로에요. 

왜냐하면 어차피 내 일은 없으니까. 장기알 가는대로 가야지요. 피동적으로 옮기는 대로 가야지요. 갈 수밖에 없어요. 옮기면. 이리 옮겼다가 또 가면 가야지요. 동탄 살다 이리 옮겨놓으면 좋겠다. 왔다 갔다 마음대로 하겠지요. 

그러니까 15절 봅시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너희라 하는 것은 성도를 말합니다.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도 하리라 할 것이요. 아! 이거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이렇게 스스로 자기를 쥐포 뜯듯이 완전히 자기 마음을 해체시키는 사람 없습니다. 마치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안 되지만, 이게 기준인 것을 우리는 감사히 받아줘야 지요.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이. 심지어 내 뜻대로 되도 내 뜻이라고 우기면 안 되어야 된다는 것. 명심해야 됩니다. 내 뜻이 되더라도 이건 진짜 소가 뒷걸음치다 쥐 잡는 식이 돼도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애가 평소에 반에서 한 중간쯤하다가 요번에 한 2등쯤 올랐다. 우리 애가 실력이 이 정도구나! 하지 말고 이거 뭐 지가 뒷걸음질하다 뭐 하나 잡았구나! 우린 애는 내 머리 닮아서 애는 공부 잘하는 게 안 돼. 그런데 그 애가 특수할 때 뿔이 나가지고 전교1등 했네요. 

“엄마, 전교 1등 했어요.”  “그래, 될 수가 없어. 니는 내 머리를 닮아서 될 수가 없어.” 그런데 그 애가 서울 의대 들어갔네. “이거 뭐 출제 문제가 잘못 돼서 그래.” 항상 이렇게 살아야 된다 이 말입니다. 이렇게. 뭐 인위적으로 마음을 낮추고 할 거 없어요. 왜? 나를 아니까. 주께서 서울 의대 들어가게 하신 거예요. 주께서. 그게 뭐 대단한 학교는 아니지만. 어차피 돼봐야 고생하니까. 하지만 남들 보기에는 “엄마가 저렇게 복음으로 살고 마음을 낮추니까...” 마음을 낮춘 적이 없다니까. 뭘 마음을 낮춰요. 

실제로 이야기할 뿐인데 뭘 마음을 낮춰요. 마음을 낮추면 입법자가 되는 거예요. 입법자. 나는 마음 낮아졌다. 나는 지금 마음을 낮췄다. 완전히 도 닦는 것도 아니고, 마음을 정숙하게. 릴렉스! 릴렉스! 그런 짓 한 거 아니거든요. 있는 거 있는 대로 할 뿐이에요. 내가 살았다. 이건 기적이에요. 이건 잘못된 거예요. 어제로 끝나야 돼요. 오늘 또 살면. 이상하게 나 왜 살지? 

이건 마음을 낮추기가 아니라 실제로 하니까. 왜?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데 아직도 주의 뜻이 어느 쪽이다? 사는 쪽으로 결정한 거예요. 오늘까지만. 내일은 몰라요. 오늘 오후4시까지만 그래요. 5시 되면 어떻게 될지 몰라요. 트럭이 와서 박을지 그것도 몰라요. 그 다음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했잖아요. 항상 우리 내부에는 항상 없어질 수 있는 요소가 우리에게 꽉 차있다고 생각하세요. 가득 차있어요. 없어질 수 있는 요소가. 

그래서 이렇게 하면 무슨 목적을 이룹니까? 그게 바로 감사와 온유와 화평이란 열매가 맺히지요. 성령의 열매. 온유와 감사와 양성과 형제우애. 이런 열매를 주께서는 목표로 원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동안 누가 방해했어요. 내가 정당했고 내가 입법자 되어서 한 겁니다. 남은 죽어도 나는 더 살아야 마땅하다고 우겼던. 주님을 누가 방해하는가, 내가 매일같이 방해하는 겁니다. 

이거 알았다고 해서 인간 바뀌는 게 아니에요. 오늘 오후도 마찬가지에요. 
마찬가지더라도 중요한 것은 이미 개입했다는 것. 이미 말씀으로 실시해서 내가 율법을 안 만들었다는 이 가장 단순한 것. 오늘 제목대로 “너 빠져!” 라는 이것이 세상에 세상에 이렇게 좋은 기쁜 소식일 수가 없어요. 니 인생에서 니가 좀 빠져! 남한테 엮이지 말고. 남 믿지 말고. 

왜냐, 주님만 믿고 니는 빠지고 그냥 놀러왔듯이 죽었는데 관 좀 열고 놀러와 가지고 “아이고~ 내가 이렇게 살았어.” “아이고~ 내가 열심히 낼 필요 없습니다. 주의 일인데.” 이렇게 어슬렁거리듯이 여러분, 남은 인생을 그냥 소풍 왔듯이 그렇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떠나야 될 세상에 좋은 구경났다는 식으로 편하게 살도록 주께서 허락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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