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81012a야4장8절(관통)-이 근호
야고보서4장8절, 오늘 강의는 초반에 약간 정신 차려야 돼요. 초반이 많이 난해해요. 8절에 보면,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요 대목이 왜 어려우냐 하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죽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죽어요. 멀찍이 떨어져야 돼요. 멀찍이. 멀찍이 떨어져서 지킬 것은 지키고 순종할 건 순종하면 되는데 너무 가까이 가버리면 구약에는 죽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죽으라는 이야기에요. 죽음이 무서워서 가까이 안 오는 그런 행위는 하지 말라는 거예요. 끝장 보자는 이야기죠. 끝장 보자.
사람이 멀리서 펜팔 할 때는 얼굴을 안 보잖아요. 우리 시대에서는 펜팔 했어요. 그냥 글로 봐가지고 그래서 실패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니지만. 글만 보고 얼굴은 안 보고 자기가 혼자 상상하는 거예요. 이런 글 솜씨에 얼마나 멋있을까, 이렇게 하는데 막상 보게 되면 그 다음에는 대 실망이죠. 멀리 있을 때, 안 보일 때는 신을 상상하게 되어있어요. ‘내가 하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흡족케 하실까, 그래, 나는 하나님 만나길 잘했어. 하나님은 늘 은혜를 주셔서...’
제가 얼마 전에 영천 화복이라는 곳에 갔어요. 화복에 가면 우리나라에 초창기 기독교 교회가 있어요. 그 교회를 유적지로 해서 50억을 들여 가지고 경상북도 도지사가 예산으로 해서 옛날 예배당을 그대로 복원을 해놨습니다. 거기 가서 사진도 찍었지요. 남자석 여자석 따로 있어요. 그대로 칸막이로 해서. 칸막이가 있어가지고.
제가 설교단에 올라가봤어요. 남자석, 여자석 해가지고 보이겠는가 싶어서 보니까 다 보여요. 설교단에서는 다 보이는데. 남자와 여자는 서로 못 보게 했습니다. 이 칸막이. 칸막이가 있는 게 좋을까요? 없는 게 좋을까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이 칸막이가 뭐였느냐 하면, 이제부터 상당히 정신 좀 차려야 돼요. 어려워요. 이게 바로 율법이거든요. 칸막이가 율법입니다.
칸막이가 율법이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에 말씀대로 순종을 하게 되면 하나님 보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하나님께 복을 받는 게 중요하니까, 율법에 보면 뭐로 되어있어요? “O”하면 복이고, ‘NO.’하면 뭐가 됩니까? 저주가 되거든요. 칸막이에 그런 기능이 있다는 겁니다. 칸막이가 웨하스 과자로 생각하신다면 거기서 축복이 스며 나올 가능성도 있고, 저주가 스며 나올 가능성도 있고. 이스라엘은 도망치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율법에 의해서 이미 가두어졌기 때문에 도망칠 수가 없는 입장에 있어요.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운명은 ‘도’아니면 ‘모’에요. 축복 아니면 저주, 저주 아니면 축복, 어중간 한 건 용납이 안 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데 칸막이 있는 채로 함께 있는 그러한 상당히 난처한 처지에 있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세상 다른 민족은 하나님이 안 계시지요. 하나님은 안 계시고 자기들끼리 거기서 법을 만들고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살아가지요. 이 자체가 저주가 되고 이스라엘 백성은 이 저주에서 벗어나되 율법이라는 조건하에서 벗어났거든요. 하나님과의 자기의 어떤 칸막이 조건하에.
이 칸막이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가지고 옛 언약이라고 합니다. 옛 언약을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율법이지요.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함께 할 수가 없다. 이거 분명히 해야 돼요. 함께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칸막이를 통해서 애들이 먹는 과자, 웨하스같이 거기서 복이 스며나올지 저주가 스며나올지 그들이 하나님의 이 언약에 대한 취지를 알게 되면 복이 나오고 언약의 취지를 모르게 되면 이방민족과 동일하게 됩니다. 이방민족과.
사람이 이렇게 살다보면 잔소리하고 간섭받는 거 싫어하잖아요. 나, 내 마음대로 살래! 이렇게 하잖아요. 그건 이방민족에게는 늘 상 그래요.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아이고~ 뭐, 이제는 하나님도 귀찮고 집도 아파트도 하나 해놨겠다 이제는 뭐~ 하나님 다 잊어버리고 그냥 내 평소에 하고 싶은 대로 살래.’ 이리 나오면 갑자기 주변에서 농약이 날아온다든지 갑자기 집값이 내려가든지 해가지고 엉망진창이 된다든지 사고가 난다든지 이래가지고 빼도 박도 못하고 저주를 받는 거예요.
이 정도하면 살겠다고 생각했는데 주변에 일어나는 벌어지는 사태가 그냥 언약 없이 못 살도록 사람들을 궁지로 몰아넣는 작용을 주께서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자체가 복이 될 수도 있고 함께 없으면 저주 받는데 다만, 함께 있음으로 말미암아 복고 저주가 어디서부터 결정되느냐는 그 정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민족과 차이 나게 그걸 아는 거예요.
복과 저주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 정도는 알아요. 예레미야에 보면 내일 죽기 때문에 오늘 마음대로 살자. 지 맘대로 사는 그러한 투가 저주받는 투라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그래도 하나님과 함께 있어서 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얻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여기까지는 어려운 게 없어요.
그럼 뭐가 어려우냐 하면 인간은 율법을 못 지킨다는 거예요. 이게 어려워요. 왜냐하면 율법이라 하는 것을 이제부터 한 5분간 정신 차리면 됩니다. 율법은 뭐로 환원되느냐 하면 말로 환원됩니다. 말로 돼요. 말 또는 문자. 하나님의 말이 율법이에요. 방금 제가 누구 말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에 율법을 못 지키게 되어있어요. 출제위원이 교무부장이 아니에요. 출제위원이 따로 있다니까요. 그 분이 문제 출제하고 우리보고 맞추라고 했기 때문에. 지키라고 하기 때문에. 출제하신 분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가 못 지킵니다. 지킬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지킬 수도 없는데 지키라고 이 율법을 줬다. 이건 무슨 뜻이냐 하면, 어렵지만 쉽게 가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민족하고 같은 인간이기에 똑같아요. 어떤 법이 있고, 말이 있고, 법이 있으면 이걸 지키려고 덤벼듭니다. 지켜야지! 십계명 지켜야지! 암~ 지켜야지. 탐내지 마라. 살인하지 마라, 해야지. 지키려고 덤벼들거든요.
그런데 말씀과 법은 어떠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관통을 해요. 관통. 뚫어버려요. 구멍을 내고 이걸 작대기가지고 차고 들어오는 거예요. 말씀이 우리 속에 차고 들어오면 지키려고 하는 나에게 제일 본질 되는 그 자리에 텅하니 어떤 터널, 구멍이 생겨버립니다. 뻥하니 뚫리지요. 종이로 이렇게 사람 모양을 해놓고 날카로운 작대기가지고 이 종이로 만든 사람을 인형을 한 번 쫙 꿰어보자 말이죠. 쫙 꿰어보면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뭐가 되느냐 하면 죄인이 되면서 죄인 되게 하신 그 기준이 뭐냐 하면 주어진 말씀이 인간을 관통해서 이건 하나의 꼬치가 되지요. 일본요리의 하나의 꼬치가 되지요. 오뎅. 어묵꽂이가 되는 거예요. 어묵꽂이가.
그러니 그동안 우리가 성경 말씀보고 교회에서 성경말씀 지키자고 하는 게 얼마나 잘못된 거예요. 이게 근원적인 사고방식 출발자체가 이게 터무니없이 우리는 잘못 살아온 거예요. 우리는 어떤 신약의 착각이 있었느냐 하면, 신약의 사도바울의 명령이나 성경이 이만큼 두꺼우니까 지키려고 들춰본다 말이죠.
그렇게 되면 이것 안했더니만 내가 몸이 아프잖아. 아~ 이거 했더니만 봐라. 성적 올랐잖아. 계속해서 그 말씀을 그 잔소리는 나보고 순종할 수 있다고 여기고 준 그거라고 생각했지 말씀이 관통한다는 생각은 못하는 거예요. 그러면 관통하는 것과 말씀 지키는 것과 차이점이 뭐냐, 하나님을 멀찍이 떼고 있을 때는 지킨 게 돼요. 하나님을 멀찍이 떼고 있을 때는.
제가 어릴 때 잔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설교 때도 많이 했지만, 우리 할아버지가 취미가 잔소리하는 게 취미기 때문에. 나뿐만 아니고 온 자식들마다 앉아가지고 지긋지긋했어요. 잔소리를 많이 했다 말이죠. 심지어 할아버지는 어느 정도로 잔소리가 심하냐 하면 지금 잠자고 있는데도 와서 불구하고 잔소리를 해요. 자고 있는데. 물론 자는척했지요. 물론 내가 알아챘지요. 자는척해도 잠자는 꼬라지 봐라! 이런 식으로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잔소리고 말씀이라 하는 것은 개체와 개체사이에 떨어져 있을 때나 성립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잔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고 “아이고, 춥겠다. 추운데 홑이불 차면 안 되지.” 덮어주잖아요. 창세기9장의 셈과 야벳이 뒷걸음쳐서 덮어주듯이. 노아의 하체를.
이렇게 덮어줄 때는 이건 지키라는 말이 아니에요. “니가 이래서는 안 돼!” 라고 그걸 사랑으로 덮어주는 거예요. 그래서 율법의 완성은 뭐라고 합니까? 로마서13장9장에서.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뭐 하지 마라, 뭐 하지 마라, 마라, 마라, 하지만 모든 완성은 뭐냐 하면 사랑이라. 구약의 노아의 언약으로 본다면 덮어주는 거예요. 율법으로 덮어준다는 말은 뭐냐, 지키라는 말이 아니고 율법으로 우리의 몸을 관통해버리는 겁니다. 이게 로마서3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율법으로 우리에게 뭘 덮어주느냐 하면 애초부터 니는 아담의 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내가 준 율법은 너는 지킬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로 우리를 덮어줘요. 쉽게 말해서 지키지 말라는 뜻이에요. 지키지 말라는 겁니다. 마귀는 지키라고 하겠지요. 주님은 지키지 말라. 다만, 조건은 뭐냐 그냥 안 지켜버리면 만약에 어머니가 밤중에 이불로 덮어줬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났다. 어머니는 저기 계시고 나는 여기 있어서 또 역시 개체가 떨어져 있잖아요.
그러나 주님께서 관통하시는 이 율법은 율법 자체의 이 작대기 안에 스스로 이게 발열해요. 완성을 향하여 율법 자체가 자진해서 완성의 레벨을 여기서 만들어냅니다. 오뎅꼬지처럼 관통해놓고 관통한 상태에서 율법이 품고 있는 그 최종의 완성을 사랑이라 하는 건데 완성을 여기서 하나님께서 실시를 해버립니다.
실시를 해버리면 뚫고 왔다. 옛 언약, 완성했다, 새 언약. 옛 언약 + 새 언약이 우리 몸이라는 것을 하나의 시료. 실험의 시료로 두고서 율법의 저주가 무엇인지, 그리고 저주를 율법을 스스로 극복해서 어떻게 사랑으로 그걸 완성해내는지 둘 다를 한꺼번에 보여주는 하나의 과정을 통해서 보여주는 자기 증인으로 삼는 거예요. 나중에 한 분 오시면 다시 이야기하겠는데 이 이야기가 들어보면 어려운 거 없는데 왜 자꾸 어렵다 하느냐 어느 대목이 어렵냐 하면 이 대목이 어려워요.
방금 한 것은 문장으로 적으면 어려운 것을 알 수 있어요. ‘말이 시작되므로 죄가 시작된다.’ 말이 또는 말씀이 또는 법이 말이 시작됨으로서 뭐가 시작되는가, 죄가 시작되는 거예요. 이걸 감수해야 돼요. 이걸 받아들여야 돼요. 말이 말씀이 율법이 시작되는 곳에 없는 죄가 더욱더 개시가 되는 겁니다. 시작되는 겁니다.
이걸 누가 싫어하느냐 하면 바로 악마에게 매여 있는 사로잡혀 있는 인간들이 바로 이 죄에 대해서 아주 예민한 반응을 아주 극렬한 반응을 저항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악마는 뭘 집어넣느냐 하면 선과 악의 기준을 집어넣었거든요. 선과 악의 기준을 집어넣어놓고 외부에서 말씀의 활동 말고 니 내부에 선과 악을 니가 스스로 결정하라고 하는 겁니다.
스스로 결정해서, 스스로 결정하게 되면 인간은 악을 싫어하고 선을 좋아합니다. 악을 싫어하고 선을 좋아하기 때문에 인간의 삶이라 하는 것은 피폐해지기 시작하고 그 다음부터는 스트레스 또는 정신병자로 되어가는 거예요. 악에 대한 책임을 져야 된다는 거예요. 누구한테 책임지는 것도 없어요. 하여튼 절에 가든 교회 안 나가던 관계없이 인간은 악에 대해서 굉장히 민감합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 안 나간다고 신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자기 내부에 이미 하나님만 알고 있는 선악과를 악마가 하나님만 아는 데서 덜렁 들어가지고 그 요소를 들어가지고 선악과나무를 악마가 인간 내부에다가 집어넣은 거예요. 피조물인 인간이면서도 뭘 감당해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만이 아시는 선악을 감당하려니 이 평생에 이런 수모가 어디 있어요.
나는 하나님 안 믿는다. 예수 안 믿는다. 아무리 큰 소리쳐도 술 먹고 비틀거리면서 들어와서 마누라~ 미안하다! 미안하다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그게. 내가 지금 내 행동 봐도 약간 좀 이건 선한 모습이 아니다 하는 것을 본인이 안다는 것이 본인의 트라우마가 되는 거예요. 인간은. 모든 행동이 다 그래요. 아무리 악해도 극단의 악을 즐겁게 할 수 없다는 그것이 인간의 괴로움이에요. 그러면서도 악을 알면서 누가 하느냐, 악이 새로운 자극제가 되고 악이 새로운 쾌감을 준비해 놓은 것처럼 여깁니다. 극단적인 쾌락을 향하여 악 쪽으로 갑니다. 가놓고는 또 후회하지요. 울면서 후회하네. 나오는 유명한 노래. 울면서 후회하는 거예요. 울면서. 후회 안하는 인간 나와 보라고 그래요.
처음에는 큰 소리 치다가도 술 한 잔 들어가면 전부다 여보, 마누라! 미안해. 해놓고 뭐 잘못 했는 줄도 모르고 미안해가지고 아침 눈 깨면 또 해장국 끓여줘 하고. 남자들 술 먹고 와가지고 자는 아들 입에 뺨에 뽀뽀하고 자는 아들 다 깨워놓고, 지는 기분 좋아 싱글벙글 웃으면서 오늘 한 잔 했다. 누가 하라 했어. 지가 비틀거리면서 하는 그 몰골 보면 지가 스스로 양심에 가책이 된다 이 말입니다. 이런 모습 보여줘서 미안하다 그런 뜻이거든요. 미안하면 그런 짓 안하면 될 거 아닙니까. 아니에요.
마귀가 그걸 가만 둡니까. 더 인생을 즐겁게 살기위해서 해놓고 돌아서서 또 울고 후회하고. 후회와 슬픔과 걱정 근심으로 계속 점철되는 인생, 이게 뭐냐 하면 인간 속에 악마가 선과 악을 서로 합치될 수 없는 걸 집어넣어가지고 완전히 내부가 엉망진창으로 비비꼬이는 거예요.
말이 시작됐다는 말은 이제 이해하기 쉬울 거예요. 죄가 시작됐다는 말은 앞에 뭘 집어넣어요. 가만히 있어라. 니가 죄인된 것에 대해서 지금 정상적으로 청구하고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가만히 있어. 하나님 말씀 자체가 죄인 되게 하는 거니까 나를 훌륭하게 만드는 게 아니에요. 그건 기존 교회에서 다 그렇게 마귀 자식들이 그렇게 가르치고.
말이 시작됐다는 말은 죄가 되게 하는 이 작업에 나섰다는 자체가 니 행운이야! 이런 뜻이에요. 니가. 왜냐하면 뭘 해도 죄기 때문에 내가 내 인생에 대해서 손을 놓을 수 있는 찬스가 온 거예요. 어차피 죄니까. 나에 대해서 그냥 손을 놓으란 말이죠. 그냥 막 사는 거예요. 짬뽕 먹던지 뭘 먹던지. 삼계탕 먹던지. 그냥 아무 의미가 없다니까요. 그게.
뭐를 선택하든 간에 축복과 저주는 우리는 상관없어요. 왜? 우리를 뚫어 논 그 율법이 축복과 저주를 발휘하는데 결국은 그 저주와 축복이라는 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무엇이 저주며, 무엇이 축복인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 몸을 관통해서 스스로 활동을 하시거든요. 스스로 활동한다고요.
그러면 죄가 시작됐으니까 죄가 많아질 게 아니겠습니까? 성경 안 보면 괜찮은 사람인데 성경 보는 순간 어느 구절하나 지킬 수 없다는 걸 알지요. 원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제비를 뽑는 것은 매 순간 선택하는 것은 우리가 할 짓이지만, 일의 작정은 누구다? 여호와가 작정하지요.
이걸 보면서 대번에 무슨 생각 듭니까? 그러면 작정한 게 있다면 우리보고 이 아슬한 선택을 강요했느냐 말이지요. 주님께서 주신 취지를 나의 취지로 번뜩 받아들이기가 힘들어요. 우리가. 굉장히 힘들다고요. 모든 매사가 그래요. 하나님 자기 좋아라고 만든 책이에요.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는 항상 가시덤불 같은 느낌이 들어요. 오늘도 이거 어긴 게 아닌가. 이렇게 할 때 기도한 번 하고 일을 또 벌여야 되는가. 모든 성경을 지키려하니까 이거 채이고 저거 채이고 이거 자빠지고 저거 넘어지고 이건 또 안했다고 요번 주 고생시키는 건 아닌가. 자꾸 걱정, 염려 온다 말이죠.
우리 인간 자체가 잘못됐기 때문에 거기서 굉장히 우리가 아슬아슬해요. 그래서 그게 믿음이 없는 거고, 믿음이 있는 사람은 일의 시작을 하나님이 말을 출제를 주님이 출제를 한 거예요. 우리가 문제 내고 우리가 지킨 적 없어요. 시작하신 분이 죄 되게 하신 거예요. 우리보고 죄인 되게 하셨다 말이죠. 죄인 되게 하셨다면 율법 못 지키면 뭐가 나옵니까? 저주 나오지요. 그 저주를 그냥 받아들이자 이 말이죠. 살아가는 것도 저주라. 아무리 착하게 해도 그게 저주다.
한 번 적어볼게요. 이 말이 얼마나 기분 좋은 말인지. 평소에 안 해보겠지만. ‘뭘 해도 나는 저주다.’ 라는 요 문장. 요 문장이 율법에 합치되는 문장입니다. 내 능력으로서는 이 고백이 안 나오게 되어있어요. “나는 저주 받는 게 싫어!” 이게 우리의 본성이에요. 모든 게 만사형통해야지. 교회 가려하는 이유가 만사형통하러 가지 나는 뭘 해도 저주받게 되어있어. 이거 고백하려고 교회 안 갔습니다. 하는 게 우리의 강렬한 반발이거든요.
그런데 이 율법가지고 확 쑤셔버리면 뭘 해도 저주다. 할 때 이게 뭐냐 하면 내가 하고 싶은 말과 원래 율법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런 차이가 있음을 그 차이를 우리가 감지하게 됩니다. 뭘 해도 저주다. 하는 게 로마서3장이야기입니다. 두 번 이야기합니다. 찾아봅시다. 로마서3장19절,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율법으로 하여금 의롭다 할 사람 없고 율법으로 이미 온 사람은 율법을 어기면 저주아래 있어요. 저주아래 있다는 걸 알게 하려 함이라. 라는 것이 로마서3장19절에 나오잖아요. 전에는 뭐냐 하면 로마서3장 성경책에만 이렇게 얌잖게 앉아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활동하면서 내 입을 통해서 나온다는 것은 이 문자가 이 말씀이 나를 구멍을 내고 구멍 낸 상태에서 우리 입을 통해서 아주 다행스럽다는 식으로 세상에 내가 이런 고백을 다 할 수 있다니 감격스러운 마음으로서 “나, 뭘 해도 저주야.” 그리 하는 겁니다.
이걸 그대로 결혼식에 하게 되면, 결혼식 하객들 다 저주받은 사람들이에요. 신랑, 신부 저주 받고 주례한 사람 저주받았습니다. 주례자가 아주 웃으면서 이야기해요. “오늘 이렇게 저주 받은 식을 하게 되어서 상당히 취지가 좋습니다. 애기 낳으면 애기도 저주받을 거예요.” 주례 끝. 이게 상상이 안 되지요. 그것도 웃으면서 아주 다행스럽다는 식으로 어찌! 어찌! 이걸 알았을까 하는 그런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이게 바로 프리덤 자유입니다.
이걸 남한테 떠들 필요 없어요. 미친 사람 취급받으니까. 아~ 언제 내가 성경 말씀을 내 입에서 그것도 기쁨으로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이렇게 문자로 박혀있는 말씀인데 입에서 삶을 통해서 나올 수 있을까요. 상상도 못하지요. 요번에 수련회 교재에 보면 거기에 대중가요 가사 2개 올려놨지요. 언제 한 번 가슴을 열고 소리쳐 남자라는 이유 때문에 언제 그 긴 세월을 언제 한 번 이렇게 터트려보고 싶은 거예요. 나 저주 받았어. 태어날 때부터. 우리 엄마 저주받고 저주받은 그 부모 밑에서 저주 받았어. 아~ 임금님 귀는 무슨 귀? 당나귀라는 이 이야기를 도대체..., 전부 다 쉬쉬했는데 한 번 터트려 보고 싶은 거예요. 로마서3장19절을. 이게 내가 어떻게 구원 받느냐가 아니라 주의 증인이에요. 말씀의 증인되는 거예요. 언약의 증인되는 겁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면 죽어요. 그러니까 죽으라고 가까이 오라는 거예요. 니가 니 고유의 가치와 의미와 니 잘남을 유지하게 되면 이건 멀찍한 관계에요. 멀어지게 되면 펜팔 하는 것 밖에 안 됩니다. 하나님, 오늘도 이런 예배를 드렸고, 오늘은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이건 펜팔이에요. 그냥.
하나님이 누군지도 몰라요. 그리고 그렇게 기도 열심히 해놓고 기도한 자기 자신을 다시 되돌아 와가지고 자기를 대견스럽게 여기고 이렇게 기도를 해가지고 사전에 재수 없는 짓거리를 전부다 사전에 다 카바를 했으니 다음 주에 수능이 있는데 점수 잘 나오겠지. 사전에 자기가 자기를 카바하기 위해서 온갖 몸부림을 치는데 그래봤자 그것은 악이 주는 그 딜레마를 못 벗어나요. 그 스트레스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이게 더 해야지. 그래서 되겠어? 더 열심히 해야지. 라는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거예요. 강의 다시!
다시해도 몰라요. 뭘 했는지 몰라요. 야고보서4장 8절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구약에서는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가까이하면 죽어요. 가까이하면 죽거든요.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죽습니다. 아마 이건 누구나 이야기할 수 있는데. 왜 죽습니까? 라는 이유를 제시되어야 되지요. 그냥 “여러분! 가까이 하면 죽습니다.” 하지 말고 “왜 죽습니까?” 라고 해야 돼요. 왜 죽습니까?
왜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죽느냐 하면 바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칸막이가 있는데 그 칸막이가 율법이고 율법을 하나로 옮기면 어떻게 돼요? 여기서 뭡니까? 저주가 주어지는 거예요. 구약에서 가까이하면 죽는다는 말은 특히 신명기5장에서는 불이라 했거든요. 죽는다는 말은 니는 너를 모르지만, 나 하나님은 너를 알기 때문에 가까이 오면 죽는 거예요.
그럼 멀찍이 하면 살 수 있지 않겠는가. 멀찍이 하게 되면 무엇이 눈에 들어오느냐 하면, 율법이 스스로 어떤 결과물을 낸다는 사실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율법이. 가까이 온 인간 대신에 인간이 그냥 가면 안 되겠지요. 여기서 어린 양이라든지 염소나 소를 가지고 오겠지요. 소를 갖고 오는데 소가 하나님 계시는 성막입니다. 하나님 계시는 가까이 가면 그냥 산채로 그냥 갈 수 있습니까? 죽은 채로 가까이 가요. 피를 내야 하니까 죽은 채로 가지요.
그러니까 인간이 하나님께 가까이 왔을 때에 완전히 나오는 그 결과를 소와 양이 제물이 먼저 희생타로 되어가지고 주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아주 명확하게 보여주는 거예요. ‘아~ 저렇게 무섭구나!’ 하나님이. ‘저렇게 겁나는 분이구나!’ 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면 “아휴, 우리는 저주받아 마땅하네.” 라는 고백이 나올 때 그 저주가 뭐로 바뀌느냐 하면 바로 이 희생물의 덕분으로 이게 축복으로 바뀌는 거예요. 축복으로.
가까이 하는데 가까이 와보니까 하나님과 악수 먹을 상대는 아니고, 하나님이 이렇게 생겼다 하는 것도 아니에요. 이게 출애굽기32장에 나오는 말씀인데요. 모세가 가까이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얼굴을 돌려버렸어요. 그러면 하나님의 얼굴은 다시 돌리지 마시고 바로 보여주면 되지 않느냐.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주는 장치가 있어요. 그 장치가 뭐냐 하면 바로 법궤라는 겁니다. 법궤 위가 하나님의 얼굴이 나타나는 장소에요. 법궤 위가.
그 법궤 위는 그냥은 안 되고 하나님께서 피 흘린 희생제물의 그 얼굴이 뭐냐 하면 하나님 얼굴이에요. 장차 오실 하나님의 얼굴이거든요. 진짜 하나님이 왔을 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범벅이 됐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얼굴이에요.
우리가 상상하는 신은 뭐냐 하면 이걸 무슨 신이라 하느냐 하면 지고의 신이라 합니다. 아주 높고, 높고 너무나 높고 거룩해서 우리가 상상할 이상의 거룩인데 그분이 하나님 쪽에 가까이 오게 되면 그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은 조금도 죽이지 않고 조금도 유지되면서 가까이, 가까이 인간 속에 왔는데 그 인간에 의해서 핍박받는 오히려 인간 쪽에서 외면할 흉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 분. 그게 바로 지고의 신입니다.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인간이 이런 하나님인줄 모르고 지고의 신 가지고 상상의 나래를 펴지요. 마귀한테 속은 거예요. 그것은. 마귀한테 속은 겁니다. “천국 있는 거 봤냐? 지옥 있는 거 봤어?” 안 믿는 가족이나 친구들이 시비 걸지요. 하나님이 얼굴을 보여줬다니까요. 가봐서가 아니라 지옥이 왔고 천국이 온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을 때에 아버지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했지요. 그 처절한 모습으로, 그게 바로 지옥이에요. 그리고 사흘 만에 깔끔하게 무덤이 깨끗하게 청소됐지요. 요양사가 왔다갔나 깨끗하게 옷까지 개어놓고 주님이 다리 꼬고 앉아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앉아계시고 무덤이 없지요. 시체가 없지요. 그게 부활이거든요. 나타나서 문 열지도 않았는데 오셔가지고 나 만져봐라. 이게 부활이잖아요.
그러니까 천국, 지옥을 상상하지 마세요. 아버지께 버림받는 그 십자가의 모습이 지옥이고 사흘 만에 부활한 모습이 천국이에요. 안 믿는 사람은 “내가 천국, 지옥 보여주면 갈게. 꿈에 보여주면 갈게.” 자꾸 이렇게 자기 식대로 하는데, 사실은 그들이 그런 식으로 할 때, 우리는 입도 뻥긋 못하고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는 말도 우리가 평소에 교회 다니면서도 우리도 그런 질문이 왔을 때 당장 뭐라고 답변해야 될지를 답변할 준비가 안 된 상태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도 가봐야 알지. 뭐 이런 조로 전혀 신앙의 기초도 없고 상상의 나래를 펴서 뭐 가보면 좋은 일이 있겠지. 하는 식으로 그렇게 신앙생활하지 않았는지 반성해야 돼요. 그런 사람을 통해서.
사도바울이 십자가 눈앞에 보인다는 말을 왜 했을까요? 인간이 너무나 상상에 상상을 심하게 해요. 너무 심하게 해서 그렇게 상상할 필요 없어. 하나님 내가 찾아갈게. 찾아갔는데 아무도 못 알아봤어요. 심지어 12제자도 못 알아봤어요. 잠시 보였지요. 변화산에서. 변화산에서 보면 뭐합니까? 그 때는 가까이 간 게 아니고.
다시 합니다. 강의를. 하나님이 계시고 인간 알 때, 인간이 하나님을 아무리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도 이건 이미 멀찍이 입니다. 이렇게 관계가 뚝 떨어져있어요. 떨어져있으면 인간은 하나의 개체가 되고 하나님도 하나의 개체가 되어버려요. 합치가 안 된다고요.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은 어떻습니까? 율법은 우리보고 하나의 관통하는 꼬챙이라 했지요.
이스라엘 백성을 아까 이렇게 해놓고 여기다가 어묵꼬지처럼 뚫어보니까 어떻습니까? 율법이 우리가 지키는 게 아니고 그냥 창으로 뚫어버린 거예요. 이걸. 뚫은 우리는 중앙에 뻥하니 구멍이 뚫리면서 이게 율법에서 관통됐지요. 관통된 이 사람들이 바로 이스라엘이에요. 그들은 구원받으려고 율법을 준 게 아니고 율법의 저주가 무엇이며 율법의 축복이 무언가를 이 사람들을 이렇게 오뎅꼬지처럼 뚫어가지고 다른 이방민족에게 하나님께서 자랑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 언약이거든요. 언약. 노아가 술 먹고 하체를 드러냈을 때에 그 축복받은 아들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뒷걸음쳐서 하체를 덮어줬지요. 그 때는 율법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율법 없었어요. 율법 없었는데 어떻게 축복이 되고, 어떻게 저주가 되지요?
축복과 저주는 우리가 알기에는 십계명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 그 여부인데 모세가 율법을 받기 전에 이미 셈과 야벳은 복을 받고, 함과 자기 아들 가나안은 저주받았잖아요. 그 기준이 뭐냐 말이지요. 그 기준이. 노아의 부끄러움을 덮어주는 거잖아요.
그것이 뭐냐, 언약의 완성입니다. 율법을 이렇게 뚫어놓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줘놓고 칸막이 줘놓고 그 인간이 갖다 바친 것은 완전히 여기서 처참하게 재물이 파괴돼요. 파괴되고 피 흘리고 난리도 아니라. 사실은 예를 들어서 탈곡기나, 고기 파는데 가보면 으깨는 거 있지요. 보기만 해도 겁나요. 고기 완전히 으깨가지고 할 때 만약에 거기에 내 손가락 집어넣었다고 해보세요.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요.
바로 그 기계가지고 하나님과 우리를 만나는 거예요. 신약에서는 그게 십자가고. 십자가라는 기계에다가 니 한 번 들어가 볼래? 하는 거예요. 어디에? 아니라예. 경상도 말로 그렇다 말이죠.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어디에 아니에요. where 이런 뜻은 아닙니다. 그 장치가 이스라엘 내내있는 거예요. 이스라엘 내내. 대신 죽었다는 게 복이라는 뜻이에요. 대신 죽어서 흘린 그 피가 하나님의 얼굴을 덮어주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저주가 뭐로 바뀌었어요? 복으로 바뀌는 겁니다. 저주를 저주되게 충분히 인지시키고 그 다음에 저주에서 복으로 바뀌는 것은 니가 손 떼라는 겁니다. 율법을 지키라고 준 게 아니에요. 저주를 더욱 더 저주되게. 율법을 준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그것만 어긴 것이 아니고 아주 관통을 했다니까요. 관통을 한 순간 우리는 뭘 해도 한 평생 뭐가 됩니까? 죄인이 되는 그러한 자유함. 뭘 해도 죄라는 것. 더 이상 악이나 죄에 쫓길 이유가 있다? 없다? 그러지 마세요. 쫓겨도 죄고 안 쫓겨도 죄인데, 아이고~ 죄가 막 따라오는구나! 사탄아 물러가라. 사탄이고 사탕이고 간에. 지가 가만히 앉아있어도 죄인데 뭘 사탕이고 사탄이고 있어요?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율법을 거론해놓고 로마서13장에 보면,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죽 10계명 언급했잖아요. 이걸 왜 언급하느냐 하면 이미 사람들이 여기에 주눅 들어있는 거예요. 주님이 하신 십자가는 완전히 개 무시 해버리고 구약하고 사고방식이 똑같아요. “주여, 말씀만 하옵소서.” 자기가 멀찍이 신을 상상의 지고의 신으로 상상하니까 저는 여기에 있으니까 말씀만 이렇게 솔솔 뿌려주면 지켜나가면 복 받고 못 지키면 알아서 벌서고 이러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것을 주님께서는 아예 여기다가 집어넣는 겁니다. 어떻게 하느냐 하면 율법이 사랑으로 바뀌었다는 겁니다. 이게 나오잖아요.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라. 사랑으로 덮였는데, 그러면 이렇게 하면 또 여러분이 생각하기를 아~ 내가 여기 있고 주님이 여기에 있으니까 우리를 사랑으로 사랑하거나, 사랑 받으면 되겠구나! 만약에 삐져서 안 받으면 나는 지옥가고, 사랑받으면 천당 가고 이리 생각하지요. 지금 멀찍이 떨어진 게 아니고 사랑은 뭐라고 했습니까? 덮어주는 거죠.
내가 잠자고 있을 때 우리 할아버지는 “이 잠자는 꼬라지하고는” 지적질하지만 사실은 우리 어머니가 덮어 준 게 아니고 우리 할머니가 덮어줬어요. 우리 할아버지와 상극관계에요. 에이구 내 손자 춥겠다. 하고 할머니가 덮어줬다 말이죠. 여성성이 우리를 구원한다. 사랑의 담요가 덮어줄 때 이게 피가 묻어있어요. 피는 뭐냐 하면 내가 100점 맞았다는 거예요. 교무과장이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농땡이라도 전교1등이에요. 전교1등했어요. 전교1등.
숙명여고 쌍둥이 애들이 성적이 사건이 일어나가지고 온 천하에 전 세계에 전 우주에 다 알려졌어요. 한 애는 121등이고, 하나는 60 몇 등이에요. 그 애들이 1등이 된 겁니다. 바로 얼마나 복음적이에요. 보세요. 교회 50년 다닌 사람은 32등, 교회 초자는 176등, 교회 다녀도 소용없어요. 주님이 1등 만들었다니까요. 왜냐하면 십자가의 기능이 피를 냄으로서 하나님의 진노의 그 모든 것을 주께서 사랑으로 덮어준 겁니다.
방금 사랑의 담요로 덮어줬다고 말했는데, 사랑의 담요도 좋지만 구약적 장치로 말하면 덮어준 것보다도 차라리 관통이 더 좋아요. 아예 우리가 이리 있는데 덮어주면 우리의 죄가 안 보이잖아요. 관통해버리면 관통해가지고 실내축구 보셨지요. 꿰어가지고 움직이는 거. 쇠꼬챙이 꿰어가지고 선수들 인형 만들어서 하는 거 있잖아요. 우리는 인형이라면 사랑으로 꿰어져있어요. 그래서 주님의 희생은 개인용이 아니고 집단용입니다. 개인구원은 없어요. 본인의 실력으로 1등 된 거 아니거든요. 그 쌍둥이 딸들이. 개인의 솜씨나 기능 이것을 주님께서는 점수를 안 줍니다.
고린도전서3장에 나오는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물 주는 사람도 있고, 씨 뿌리는 자도 있지만, 백날 씨 뿌리고 물주고 해도 자라게 하시는 것은 주님 맘 대로에요. 관통해서 사랑의 증인으로 하는 거예요. 관통이 좋아요. 왜 관통이 좋으냐 하면 관통하게 되면 살아있는 우리는 뭐가 됩니까? 육이요, 죄인이요, 막사는 존재로 그토록 부각되는 겁니다. 주님이 살아있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껏 망가져도 괜찮은 거예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증인되는 거예요.
완벽함이 아니고, 철저함이 아니고 이 사랑 때문에 우리는 왜 주님께서 피 흘려야 되는가를 우리의 행동거지를 통해서 마음대로 보여주는 거예요. 나 이것밖에 안된다고. 그걸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어야 돼요. 제가 이렇게 하면 여러분들이 “그럼 우리가 뭘 해야 됩니까?” 라고 이야기 할 거예요. 그럼 우리는 앞으로 뭘 해야 됩니까? 이게 첫 번 째 난해하고 두 번째 난해한 게 바로 그걸 답변하는 거예요.
뭘 해야 되는가가 뭐냐 하면 우리가 사실은 할 게 없어요. 왜 그러느냐하면 에스더6장1절 누가 찾아보세요. “그 날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아니하므로 명령하여 역대 일기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서 읽히더니” 지금 모르드개가 체포되어있어요. 곧 죽을 참입니다. 그런데 사로잡힌 유대인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아까 질문이 뭐냐 하면 “그럼 목사님, 우리는 앞으로 뭘 하면 됩니까?” 우리 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 할 게 아무것도 없다고요. 우리가 뭘 한다고 해서 사태가 달라지는 게 없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에스더6장1절에 보니까 밤에 왕이 잠이 안와가지고, 잠이 안 올 줄 우리가 어떻게 알았어요. 모르드개가. 일기장을 보다가 자기에게 이렇게 위기에서 벗어나게 한 그 충신한 자가 누구냐? 이리 된 겁니다. 그게 바로 지금 하만에 의해서 잡혀있는 모르드개가 바로 왕의 목숨을 구한 위인이 된 거예요. 그렇게 되니까 바깥에 누가 있느냐 하면 하만이 있는 거예요. 하만은 모르드개가 미워서 죽이려고 하는데. 여기서 이런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어요.
자, 그렇다면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왜 잠이 오지 않았지요? 누가 그렇게 했지요? 하나님이 그렇게 한 거예요. 이 세상은 우리가 손댈게 없어요. 뭐 발걸음을 세는 거, 어떤 거 하나 하나님이 개입 안 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다 개입했어요. 짬뽕 먹으려다 여기에 국물 튀는 것까지. 전부 다 주님이 다 개입한 거예요.
성경의 에스더6장1절을 믿으신다면, “앞으로 뭘 할게요.” 가 아니라 지난날 내가 이 순간 살아오면서 주님이 1분1초라도 주님이 활동 안 한 적이 없음을 우리가 알아야 돼요. 어떤 경우라도. 주님께서 그렇게 하고 온 겁니다. 자기 백성 철저하게 자기백성 자기가 챙기거든요.
얼마 전에 신성일 죽었잖아요. 대구사람이거든요. 경북고등학교 나왔어요. 얼마나 경북고등학교가 머리가 좋아요. 우리나라에서 일류인데. 그러니까 자기 몸 관리 철저하게 한 겁니다. 해롭다하는 것은 다 끊었어요. 그런데 한 가지 안 끊은 것 때문에 죽었습니다. 이건 신성일 죽음의 비사인데, 특별히 여러분에게 알려드립니다. 뭐를 끊어야 되느냐, 이걸 끊어야 했어요. ‘효심’ 이걸 끊어야 했어요. 술, 담배 끊는 건 좋은데 이걸 끊었어야 했어요.
영천에다가 한옥지어가지고 거기서 뭐했느냐 하면 교회도 안 나가고 절에도 안가고 이리 하니까 그냥 지 종교거든요. 자기가 지 잘났다 그 종교다 말이죠. 부모 효심 한다고 거기에다가 자기 나름대로 돌아가신 양쪽 부모 처음에는 아버지 하다가 어머니까지 사당을 만들어 놓고 매일아침으로 뭘 했느냐 하면 향불을 피웠어요. 향불이 폐암된 겁니다. 거기다가 자기 아버지가 폐암으로 죽었거든요. 아버지 DNA로 나를 이 땅에 낳으신 거예요. 정철의 시조를 바꿔야 돼요. 아버지가 날 낳으시고, DNA가 날 낳으시고. DNA가 날 기르시니 이렇게 되어야 돼요.
폐암 DNA가 있는데 그 DNA에다가 향불을 매일같이 그걸 처음에는 한 짝하다가 나중에는 두 짝하니까 폐암 걸린 거예요. 문제는 효심이 없어야 돼요. 이 효심이 문제라.
자, 아버지, 어머니를 왜 이렇게 했을까요? 아까 강의했습니다. 인간은 악마가 뭐였다? 선악을 집어넣었지요. 선악을 집어넣었으니까 자기 하는 인생 알잖아요. 여자 아나운서도 좋아해가지고 바람피운 거부터 해가지고 그 뿐이겠습니까. 수십 명 될 걸. 엄앵란이가 얼마나 속 타겠어요. 그런데 그걸 양심이 계속 악에 쫓기는 거예요. 쫓기었으면 그냥 죄로 관통하면 되는데 선이 있으니까 문제는 내가 나쁜 짓한 게 문제가 아니고 나는 선할 수 있다. 나는 의로울 수 있다가 인간의 사라지지 않는 것이 이게 스트레스입니다.
율법을 준 것은 죄인 되게 하라했는데 그게 로마서3장인데 그 로마서 복음이 입에서 안 나오고 그게 반대되는 악마의 말이 나와요. 나는 착할 수 있는데 뒤늦게지만 부모한테 효도해야지. 이래다 죽었어요.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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