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

70이레1강(2011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아빠와 함께 2013. 4. 24. 08:08

 

2011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a

(강의:이근호 목사)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저희들의 사정을 모르지만 주께서 아시는 사정으로 인하여 이렇게 복음 이름으로 같이 모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의 의미가 어떻게 오늘날 우리들을 있게 했는지 앞으로 이 세상을 어떻게 결정지었는지 이번 기회를 통해서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제가 이 70이레 교재를 여기 와서 처음부터 찬찬히 읽어봤습니다. 엄두가 안 납니다. 한 문장 설명하는데도 제가 제일 적게 잡아도 10분 이상 걸립니다. 문장이 천 개도 넘을 것 같은데. 엄청난 내용이에요. 그럼 이걸 설명한다고 아나? 그것도 아니지요.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이 교재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봤는데 군데군데 성경구절 몇 군데 나오지요. 그거는 여러분들이 안면 있는 거니까 이해된다 하지만 성경구절 앞뒤로 깔아두는 설명자체가 성경구절에 대한 선입감, ‘나는 성경구절을 이렇게 해석했다고 생각했었다.’라고 앞뒤를 설명하는 내용들이 그렇게 보시면 성경 전체의 중심과 충돌이 일어난다는 식으로 이야기한 거예요.


성경구절이 나오면 성경구절 이렇게 읽었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성경구절을 보시는 것은 여전히 자기가 부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성경해석이라고 앞뒤로 치게 돼있어요. 그래서 여기 나오는 문장들은 가만있으면 아무 문제없는데 뭔가 성경구절을 해석하려 치면 잘됐다고 달려들어 깨물어 버리는 그런 투로 돼있어요. 성경구절을 가만 놔두면 상관없는데 이 성경구절은 이렇게 봐야 된다고 우기면 와락 주위에서 달려들어서 ‘그게 아니거든.’라는 식이란 말이죠. 꼭 십자가마을에 댓글 다는 분위기


그래서 이것을 열 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가운데서 어떻게 여기 담긴 내용들을 처리해야 되는지 나름대로 생각해봤는데 기껏 제가 생각한 것은 아예 한 문장, 한 문장 또는 한 구절, 한 구절 설명할 때마다 전체의 내용을 결론 속으로 삽입시켜버리자. 다 집어넣어버리자. 한 시간 듣더라도 전체를 알고, 두 시간 듣더라도 전체를 알고, 세 시간 듣더라도 전체를 아는 그런 방법을 취해보자. 단 조건이 있는데 한 시간 듣고 집에 간 사람은 두 시간 알고 집에 간 사람한데 혼난다는 것. 세 시간 듣고 가신 분들은 열 시간 다 듣고 간 분한테는 아는 체 하지 않는. 어쨌든 간에 그런 식으로 중첩하는 방법을 제가 채택해봤습니다.


그 방법이 사실은 제가 지어냈다기보다는 성경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게 있다면, 아메바라는 원생동물이 있다면, 이 귀퉁이 연구하는데 5일 걸렸다. 그 다음에 5일, 일주일 걸려서 이 부분을 추가적으로 알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하게 되면 기껏 그 사람이 한 20년 연구해서 이것밖에 모른다면 나머지는 모르는 상태기 때문에 전체에 비해서는 모른다고 돼버리거든요.


그런데 이건 양적으로 이렇게 되지만 질적으로 한 대목을 떼어내니까 전체의 부분이 아니라 전체 집합의 부분 집합이 돼버리면 어떤 현상이 되느냐 하면, 수제비 하나를 떼도 수제비 맛은 알잖아요. 그 수제비를 다 먹지 않아서 배는 부르지 않지만 수제비는 이런 맛이라는 것이 수제비에 멸치 양념이 배어있으니까 느낀다 이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십자가 한 구석 아니까 ‘내가 뭘 알겠어.’ 하지 말고 십자가 이것이 만약에 초콜릿이라면, 초콜릿 이것만 하면 전체가 이런 식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여기서 ‘집합’이란 말을 한 것은 놀랍게도 부분집합 속에 전체집합이 다 들어있는 것이 수학에 집합론에서 나오는 하나의 신비로운 현상이에요. 부분 안에 전체가 다 들어있는 거예요.


이것은 불교에서 화엄경? 달은 하나인데 전 세계에 천 개의 강물이 달이 다 뜬다는 거예요. 세종대왕의 [월인천강지곡]있지요. 그것처럼 거울이 하나인데 거울이 세면바닥에 깨지니까 조각, 조각난 거울 하나에 우리 자신의 얼굴이 다 비추는 겁니다. 5년을 예수 믿어도 구원받는데 지장 없고, 꼭 50년 채워야 천국 가는 게 아니다. 하루를 믿고 죽더라도 천국 간다는 이 말은 같은 질 속에서 주님이 계시는 거예요.


그렇다면 전체를 합해도 예수님이지만 이 부분 속에도 구원받는데 충족될 만큼의 예수님의 효과가 충분히 들어있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럼 부분만 떼 낼래.’ 부분만 떼 내면 전체가 그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그 있는 부분이 그 사람의 게으름을 공격할 거예요. ‘너는 얍삽하구나. 어디서 요령을 부려?’ 이렇게 된다 말이죠. 부분이 바로 그것을 그렇게 지적하고 잘못이라고 평가할 것입니다.


그럼 제 방법은 복음을 설명하면서 전체를 다 설명하고 싶지만, 시간을 아무리 줘도 다 설명 못하지만. 하여튼 부분, 부분 속에서 결론을 계속 삽입해서 집어넣는 식으로 하면 어느 정도 강의목적은 이뤄졌다고 생각해서 제가 말씀드립니다. 그럼 첫째 시간에 결론부터 이야기해줘야 만족하니까 결론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십자가가 이렇게 있습니다. 십자가는 ‘미는 힘’을 갖고 있어요. 미는 힘이라는 것은 십자가 지신 분이 한 분, 단독자거든요. 단독자는 홀로죠. 나 하나, 숫자가 1이다. 여러 사람들이 자기가 메시아 노릇하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주체로써, 주인공으로써 끼어들려한다면 그걸 밀어내는 미는 힘을 갖고 있어요. ‘나뿐이야. 나 혼자 다 했어. 너, 아니거든. 네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거든.’ 미는 힘을 갖고 있어요. 여기 떠밀린 사람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심지어 제자들도 마찬가지고. 미는 힘에 의해서 전부다 다 나가떨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과 언약성취에 대해서 나름대로 끼어들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는데 우리는 복음을 설명할 때 방금 결론적으로 ‘주께서 밀고 예수님 혼자 다 했습니다.’ 지금 10분도 안 됐어요. 이것 듣고 집에 가셔도 구원받는데 지장 없습니다. ‘주님 홀로 하셨군요.’ 그런데 10분이 지나면서 무슨 이야기까지 여기에 곁들여지느냐 하면, 왜 보통 인간들은 하나님의 언약이란 말씀 실천하고 영광 돌리는데 떠밀려야 마땅한 존재인가를 생각하는 그런 내용이 곁들여져야 돼요.


그래서 그 내용이 곁들여지면 어떤 좋은 점이 있느냐 하면, ‘이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 하신 일만 받고 다른 인간들은 떠밀 수밖에 없구나.’를 깨닫게 돼요. 방금 제가 이야기한 떠밀리는데 떠미는 속에는 예수님뿐이다. 할 때 예수님만이 다 이루셔서, 예수님의 힘으로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는다고 했을 때 이 이야기, 이 문장을 듣는 순간 가만있을 우리가 아니거든요. ‘제가 바로 그것을 믿고자 하나이다. 또는 그걸 제가 믿고 있습니다.’라고 또 나서지요. 이걸 유명한 말로 ‘나댄다’고 하죠. 나대지 마라!


5분 듣고 집에 간 사람은, ‘역시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는 거야.’라고 내려갔는데 다음날 누굴 만나서 어떻게 구원받는데? ‘나, 예수 공로로 구원받는 걸 믿거든.’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그 5분 뒤에 말을 안 들어서 그래요. ‘나대지 마래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실천에 옮기려고 시도하는 그 순간, 경쟁적이죠.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가 나는 하나님 말씀 전한다 하면, 그 듣는 청년 중 거의 100% 모두가, 산상설교하시는 순간 100%입니다. ‘예수, 당신이 해석 잘 하나? 내가 하나님 말씀 해석 잘 하나? 두고 보자.’ 경쟁적 관계에 놓여있다. 그래서 산상설교 제일 끝에 무슨 말 나오죠? ‘놀랍도다. 누가 저런 지혜를 알게 했는고? 저런 아들을 두신 어머니가 복 되도다.’ 그런 말이 나온다는 것은 예수님을 현재 자기 중 누가 더 센가, 누가 더 대단한 존재인가를 이미 경쟁하는 관계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야기하니까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이, ‘너 어느 신학교 나왔어?’ 그렇게 묻는 사람 본인은 신학교 나왔겠어요, 안 나왔겠어요? 나왔다는 말이죠. ‘총신이야, 합신이야, 장신이야, 감리교신학이야? 어느 대학 나왔어?’라는 것은  처음부터 예수라는 존재가 등장했을 때 그 예수란 존재는 누가 더 세냐? 금요일 4시에 하는 [누가누가 잘하나] 우리 처갓집에 아는 아이가 거기 나가서 노래해서 일등했어요. 그런데 공부가 딸려서 포기한다는.


예수님을 나는 믿는다고 하는 순간부터 예수님을 돋보이게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나는 이렇게 믿는데 그 다음에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보고, ‘너는 어떻게 믿느냐?’ 그리고 네가 믿은 것 하고 내가 믿는 것 하고 어느 것이 더 대단한 신앙적인 힘을 발휘할까? 또다시 경쟁 관계에 놓이게 되는 겁니다. 과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예수님과 자기가 좋은 관계라고 우기는 그 사람 속에서 이런 쓸데없는 믿으면서도 또 하나의 경쟁이 유발되는 이런 주님이 탄식할만한 요소가 들어올 때에 이런 현상은 어디서 왔는지를 우리가 어떻게 설명해야 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글을 쓸 때 왜 그렇게 어렵게 쓰느냐? 제가 논문을 읽어보니까 참 현기증이 나요. 이게 무슨 말인지, 왜 이렇게 썼는지. 이렇게 써야만 복음이 전달되느냐? 이것 아니고 쉽게 쓰면 안 되느냐? 4영리 있잖아요. 의자 하나 갖다 놓고 하는 4영리. 그렇게 쉽게 하면 되는데 초반부터 뭐. 예를 하나 들게요. 왜 그 신학자들을 화나게 했는지 이유가 나와요. 2페이지, 한글초록, [다니엘 70이레에 대한 비역사적 해석] 위에서 두 번째 줄에. [설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말씀을 주시면서 오류를 유발하는 의도로 주실 리가 없다고 여기는 태도다. 그런데 성경자체가 이러한 인간들의 선입견을 반박한다면?]


여기서 ‘이러한’이라는 지시어가 무엇을 가리키는 겁니까? 수능 언어영역에 나올 이야기에요. 여기서 ‘이러한’에 줄 그어놓고 다음 ‘이러한’에 해당되는 사항은 뭡니까? 성경자체가 ‘이러한 인간들’ ‘이러한’이 뭘 이야기하느냐? ‘이러한’의 내용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성경말씀을 주면서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잘 생각해서 새겨서 이 말씀대로 실천에 옮겨서 그래서 나 있는 천국에 빨리 오너라.’라는 인간들의 선입감을 만약에 하나님께서 성경자체가 반박한다면, ‘그래서 너는 이단이야.’라고 반박하면 그때는 그 다음에 어떤 대책이 필요 하느냐 이 말이에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하면 어떤 사람은, ‘왜 그렇게 삐딱한 생각을 끄집어내는데?’라고 만약에 반박을 하신다면 저는 이렇게 합니다. 십자가에는 예수님만 달렸지 다른 사람은 십자가에 달리기를 허용하지 않고 밀어냈다 이 말이죠. 밀어냈으면 그만큼 밀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밀린 거예요. 하나님 보시기에. 예수님은 되지만 너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을 때 예수님만 되십니다고 믿으면 안 된다는 말이죠. 왜 나는 안 됩니까? 경건한 신앙심, 순수한 마음, 완벽한 행실, 철저한 양육, 온화한 성품 해당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멈출 수 없는 희생정신 왜 이런 것들이 하나님 말씀 지키는데 그게 걸림돌이 되느냐 말이죠. 왜 이러한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좋게 말해서 이슬람교, 불교, 무종교에도 많은데 왜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극구 밀어내느냐 하는 겁니다.


제가 그렇게 이야기하면 그쪽에서 화가 나서 하는 말이, 밀어낸다는 것은 너의 일방적인 생각이고 누가 밀어냈는데? 하나님이 누굴 밀어냈는데? 밀어낸 것도 없는데 네가 밀어냈다고 일부러 우기는 것 아니냐? 이런 반발을 우리가 예상 문제할 수 있습니다.


나 외에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다. 예수님의 구원에 있어서 어떤 협력자나, 어떤 동역자가 필요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일은 다른 이름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결정짓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이 우리와 평등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 예수님도 하나님 아버지, 인간들도 하나님 아버지 하는 관계가 아니란 말이죠.


큰일 났다. 정말. 이것 설명하는데 시간이 이만큼 지나갔는데. 이렇게 예수님과 우리가 같은 하나님을 섬깁니다. 다같이 에브리바디 우린 형제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뽑아서 언약의 주체로 삼음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본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은 악마인 줄 모르고 하나님인 줄 알고 그렇게 섬긴 거라고 들통이 난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오셔서 이쪽을 우상숭배라고 심판을 해버린 거예요. 그런데 심판기준이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이 심판하면 몰라도 모든 심판을 예수님께서 심판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자신의 경쟁상대자로 간주했던 모든 것이 예수님으로부터 심판받는 겁니다.

 

교회도 안 나오고 집에 가만있다가 심판받아요. 왜 절 심판합니까? 너는 예수님이 심판주인 줄 모르기 때문에 심판받으라는 거예요. 그러면 할머니가 하는 말이, ‘아무도 나한테 전도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전도를 안 해도 네가 알고 있는 신이 마귀인줄 알고 있어요. 그러면 그 할머니가 하는 말이, ‘내가 하나님을 마음속으로 알고 있었지만 그게 하나님인지, 마귀인지 몰랐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네가 믿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일까?’라고 의심하지 않는 자체가 이미 자기의 인생에 대해서 세상에 일어나는 일을 고려하지 않고 스스로 자족하고 만족하는 자기 자신을 절대시하는 우상숭배자가 되는 겁니다.


애가 태어나면 그냥 방치하는 것이 아니고 포대기로 싸죠. 인간이란 포대기 없이 그냥 있는 인간이 없거든요. 사람은 포대기 자체와 합쳐서 자기 정체성을, 자기 자신을 본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이라 하는 것은 주변의 환경 중에서 자기가 편한 마음으로 대충 모아서 그걸로 포대기를 만들어서 ‘나 이렇게 살래. 종교고, 교회고, 절이고 간에 이렇게 살래.’ 그것 자체가 세상의 전부인양 여기고 있다. 주변에서 예수님이 다녀간 것도 모르고, 세상에서 죽는 이유도 모르고, 자기가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왜 사는지도 모르고 방치되어 있을 때 방치된 것도 궁금해 여기지도 않고 나는 이것으로 좋사오니 하면서 사는 거예요. 이것 자체가 우상숭배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묵인했지요. 그러다가 묵인 못 하겠다고 마지막 때는 예수님을 보내셔서 십자가 부활을 통해서 심판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로써 전도가 시작되었다고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란 ‘나는 몰랐어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이 말이죠. 자기가 살고 있던 이 세상이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건짐으로 말미암아 자동적으로 예수님과 다른 사람 사이에는 원수 관계가 되는 겁니다. 로마서 5장에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 된 자였다.


그래서 언약이라는 것이 아주 희한해서 언약이 주어지면 언약 말고 외곽은 자동적으로 전쟁 상태에 돌입됩니다. 연평도에 폭탄 터져버리면 자연적으로 전쟁 상태에 들어가는 것처럼 언약이 주어지면 그 다음에는 비언약적으로 발각이 되고 언약과 비언약 사이에 전쟁 상태를 유발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어요. 이것이 바로 구약의 내려오는 역사인데 그 역사가 하나의 모의고사고 이제 본격적으로 전쟁은 신약에 와서 예수님을 통해서 실시가 되는 거죠.


진도 나가봅시다. 이렇게 해서 십자가에서는 사람들에게 떠미는 역할을 한다. 떠미는 역할을 할 때 어떤 분은 묻기를 ‘그러면 나의 위치는 어딥니까?’ 십자가 바깥에서 모든 사람을 떠밀고 나만 있다고 한다면, 성도의 위치는 십자가 바깥에 있는가? 아니면 이 옆에 있는가? 뒤에 있는가? 어디에 있는가? 상당히 궁금하지 않습니까?


성도는 어디 있느냐 하면, 갈라디아서 6장 14절처럼 십자가 안에 동결된, 얼어붙은 상태에 있어요. 과일이나 바나나 이런 것을 꽁꽁 언 얼음 속에 넣어버리면 마치 안에서, 그러니까 성도가 얼음덩어리, 빙괴에 땅콩이나 고기가 얼어버리면 안에 들어있는 고기나 바나나는 튀어나올 수 없습니다. 만약에 어떤 아이가 성령으로 십자가 안에 들어가게 되면 그 애는 놀래서 밖에 나올 수 없습니다. 그 애는 ‘엄마!’ 밖에 있는 엄마는 ‘너, 왜 거기 들어가 있어?’ 이산가족 나와. 안 우스워요. 난 되게 우습다고 생각했는데.


십자가 안에 본인이 들어갔으면 나올 수 있는 여지 있는데 십자가가 꽁꽁 얼어버렸으니까 예수님의 능력으로 얼게 했으니까 본인도 빼도 박도 못하고 안에 얼어져 있는 거예요. 바깥에 엄마는 아직도 안 얼어져 있고 십자가 바깥에 놀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애 본성이 뭐냐 하면, 옛날에 엄마와 같이 세상 이야기하면서 살아왔던 게 그리워서 엄마를 찾는 거예요. 육적인 본성상. ‘엄마. 여기서 꺼내줘!’ 엄마는 기가 차서 ‘너. 언제 거기 기어들어갔어?’ ‘몰라.’ 상당히 슬픈 이야기에요.


마치 지옥 간 부자가 평소에 놀던 식대로 자기 집에 개가 핥던 거지 나사로를 막 대하던 버릇을 못 버리고 천국 갔는데도 불구하고 막 불러대는 거예요. ‘거지 나사로를 보내서 내 동생한테 가게 해 달라.’ 아브라함도 참 기가 차고 코가 차죠. 한 번 들어가면 못 나오는 거예요. 본인이 알아서 ‘들어갈래, 말래.’ 이러면 나가면 자기 결정이에요. 들어오는 것이 미는 상태기 때문에 그 미는 상태를 능가하는 힘으로 들어갈 수 있는 힘이 우리 안에는 갖추어져 못하고 있어요. 장착되질 않고 있어요. 이게 없어요. 그냥 어느 날 십자가 안에 들어온 거예요.


들어오니까 십자가 바깥에는 죽은 자가 되고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은 산 자가 되고. 그리고 다른 사람은 친구들은 들어오려고 애쓰지만 주께서 계속 떠밀고. 들어가겠다는 사람은 떠밀고, 안 들어가겠다는 사람은 들어오고. 꼭 이사야 65장 같아. 부르지 않은 사람에게 부름을 당하고, 찾지도 않은 사람을 내가 집어넣겠다. 무슨 말입니까? 찾는 사람은 못 들어온다는 이 소리거든요.


왜 찾는 사람은 못 들어오고 찾지 않으면 들어옵니까? 왜 십자가는 그렇게 돼야 돼요? 그래야 들어온 사람이 오직 예수님의 기능만 자랑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기능만 인정하고 자기 기능은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들어오겠다는 사람은 안 넣어주고, 안 들어오겠다고 마음 놓은 사람은 들어오게 되고. 그래서 들어가기 위해서 안 들어가겠다고 버티는 사람은 속였다는 이유 때문에 못 들어오고. 어디서 꽁수를 써? 사실은 들어오고 싶지만 안 들어오는 척 해야 될까 싶어서 있으니까.


사울은 회개하고 사무엘 옷 붙잡아도 찢어버리고. ‘저리 가.’ 다윗은 온갖 짓을 해도 들어오고. 이 불공평이 하나님의 정의라는 겁니다. 줄이면 ‘의’,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의 절정이 불공평에 있습니다. 철저한 불공평. ‘나는 네 의견을 아예 듣고 싶지 않거든.’ 그 뜻이에요. 너 구원해줄까, 말까 하는 네 의견을 아예 안 듣거든.


왜 주께서 우리의 의견을 안 듣느냐 하면, 우리 말 들으나마나 우리는 죽어서 좋은데 가겠다고 다 이야기합니다. 자기 주제파악도 안 되면서. 자기 행세는 모르고. 그래서 그런 사람 구원 해줘봐야 내가 살아있으면 천국 가려고 애를 썼기 때문에 들어왔다고 이런 또 자기 자랑을 늘어놓을 거니까. 그러니까 천국 가봐야 데모나 하고 시위나 하고. 천국의 처우를 개선해 달라. 너무 예수님만 찾지 말고 다른 노래도 부르게 해 달라. 어린양의 노래만 부르면 재미없다. 조용필의 노래도 부르게 해 달라.


‘왜 나는 왔는데 사랑하는 어머니는 못 오게 했는가? 빽써서 빨리 보내 달라. 나는 왔는데 우리 자식은 안 오니까 내가 천국 와도 천국 온 기분이 안 난다. 나는 서글프다. 차라리 날 내 자식이 있는 지옥으로 보내 달라.’ 이런 해괴망측한 일들이 벌어질 거예요. 한국에 복음이 19세기 말에 들어왔는데 그러면 세종대왕은 착해도 지옥가면 너무 불공평하잖아. 이런 식으로. 강감찬 같은 사람은 복음 들으면 예수 믿을 사람인데 왜 늦게 들어와서. 택배가 늦어서 좋은 화장품 없어서 늙어졌는데 그 책임을 주문했는데 늦게 온 걸 주문자가 책임져야 되느냐? 이런 불공평이 어디 있느냐? 그러면 하나님이, ‘네가 아는 불공평 다 끄집어내봐라.’


그런 불공평 속에서 하나님의 의는 오똑 솟아나게 돼있습니다. 그런 불공평들이 있어줘야 ‘복음이 정말 놀랍고 놀라워라!’ 그런 불공평들을 자주 들어야 되고, 많이 들어야 되고 정 안 들리거든 만들어내세요. 본인이. 본인이 만들어내서라고 이 불공평한 처사, 하나님의 횡포 이런 증거들을 수집하세요. 우표수집하지 말고. 이제는 하나님의 말도 안 되는 짓들을 한 수집을 다 하세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 그런 것들이 모여들어야 ‘정말 복음이란 것은 이렇게 놀라는 것이구나.’를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십자가 앞에서 떠밀어요. 떠미는 것은 바로 나만 올라가야 되고 다른 사람은 안 돼요. 마치 여호수아는 안 되고 모세가 올라가야 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은 되질 않습니다. 그러면 떠밀려서 이러면 인간이 떠민다고 가만있을 성질이 아니잖아요. 여기서 천국은 십자가 뒤에 있으니까. 십자가를 통하지 않은 천국은 없습니다. 그래서 천국은 감춰진 거니까. 천국이 활동해서 항상 은닉된 채로 활동하기 때문에 십자가 뒤에 감춰져 있어요. 십자가 안에 또는 뒤에.


그렇다면 천국에 가기 위해서 그들은 여기서 십자가와 유사한 십자가 운동을 벌이게 되는 겁니다. 마치 남쪽 유다나라와 북쪽 이스라엘이 갈라지게 되고 난 뒤에 북쪽의 여로보암 왕이 유사종교를 만들어서 백성들의 마음이 남쪽 성전 있는 곳으로 끌리지 않도록 정책적인 유화책을 쓰죠. 상당히 달래주는 측면을 쓰지 않습니까? 정책적으로. 하나님이 어디에도 있는데 꼭 그 장소에 갈 이유가 없지 않느냐? 성전이 있는 장소에 왜 가야 하느냐? 만유의 주신데.


그렇다면 논문의 이 글 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뭐냐 하면, 여기서 못 가는 사람이 모여서 하는 작당을 분석하는 거예요. 여기에 분석할 때 뭘 집어넣고 분석하느냐 하면, 분쇄기의 날카로운 칼날이 있는데 이 칼날이 하나님의 말씀이죠. 이 논문 제목이 70이레니까, 70이레를 집어넣어버리면 여기서 인간들이 했던 모든 작당들이 산산조각 그 정체가 다 들어나게 돼있어요. 70이레뿐만 아니고 모든 말씀이 마찬가지지만. 여기선 70이레니까. 70이레 이야기를 집어넣으면 다 깨지죠.


그럼 여기서 구상한 게 뭐냐 하면, 이게 바로 권력이다. 또는 권력체, 권력집단인 거예요. 인간들이 모였다 하면 권력집단인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설명하면서 ‘십자가가 주님의 공로입니다.’라고 설명하면 그 이야기가 집단화 된 여기에서 이구동성으로 말하기를, ‘우리는 십자가를 믿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마을입니다.’라고 하면서 십자가 믿는 이 권력체가 충분하게 이단이 되는 거예요.


십자가, 십자가 이야기하면서 뭔가 포대기, 십자가 믿는 사람끼리 결속력을 다지면서 어떤 자생적으로 발생된 권력 같은 것이 안 깨어지기를 염원하면서 십자가를 바라보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모순적입니까? 십자가라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홀로 가는 건데, 꼭 십자가 믿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되는데 주님의 십자가복음 때문에 형성된 우리의 집단의 아름다움, 서로 십자가 이름으로 모였던 좋은 관계, 이것 왜 쥐고 있는데. 수상하죠. 대단히 수상한 거예요. 이걸 분석하는 거예요.


깊이 생각할 것도 없어요. 간단한 거예요. 어떤 병석에 있는 할머니가, ‘나는 십자가 피로 인하여 구원받았어. 너무 기쁘오.’라고 하고 있는데 옆에 와서 ‘십자가 복음 믿으십니까? 우리 교회에 가입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러면 그 할머니가 그때부터 갈등이 생기죠. 십자가만 믿을 것인가, 아니면 십자가를 믿는다고 우기는 집단을 거기다 추가적으로 믿을 것인가 갈등이 생기는 겁니다. 진짜 성령이 오면 갈등이 안 생기는데 성령이 아닌 뭔가 일시적인 감동과 느낌으로 받아들이면 그때부터는 뭐냐? ‘나는 십자가 복음을 믿는데 나 혼자 믿는다고 까불면 저쪽에서 시기하면 안 되지.’라고 은연중에 의식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쪽에 기분 나쁘게 믿으면 왜 안 되는데요? 기분 나쁘게 믿으면 그 사람이 나에게 궁시렁궁시렁 욕할 것이고. 그러면 욕 얻어먹으면 어떤데? 욕 얻어먹으면 내 자존심이 되게 상하는데. 드디어 본색이 드러났어요. 결국은 예수를 믿는다면서도 남아있는 게 뭐예요? 내 자존심이 여전히 달라붙은 채로 십자가를 믿는다고 고백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멋진 전략을 펼쳤는데 자기가 자존심을 달라붙은 채 믿는지, 없는 채 믿는지를 알게 하기 위해서 주위에 따가운 시선들이 가까이 다가오게 해서 잘 믿고 있다가 시선들이 다가오니까 갑자기 주님보다 그게 더 신경 쓰여서 고민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그것 봐. 아직까지 달라붙어 있잖아.’라고 아주 성공적으로 그 죄를 드러내는데 아주 박수칠 만 하죠. ‘들켰구나. 들켰어요. 또 이단 하나 생겼네.’


바로 여기 안에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방금 이런 모습들이 자기의 큰 반사 스크린으로 이 모습을 차후적으로 또는 결과적으로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내가 구원받기 전에 눌러앉았던 그러한 세력이 그러한 성질을 몰랐는데 이러한 사태가 일어나고 보니까 내가 이런 식으로 자존심을 위해서 살아왔다는 것이 차후적으로 발각이 되면서 다시 동결시킨 이유에 대해서 감사하게 되죠. 주께서 꼼짝 못하게.


‘너는 여기서 백날 죄 지어도 십자가 밖에 못 나가.’ 다만 이 안에 있으면서 과거에 이러이러한 사람이었던 것을 항상 되새기면서 그 죄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가 퐁성하게. 에베소서 3장하고 비슷하죠. 상당히 표절한 느낌이 드는데. 그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이걸 같은 말로 내 죄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가 더욱 더 알 것 같을 때 동결 처리한 이유에 대해서 주께서 더욱더 그걸 통해서 감사하게 될 겁니다.


그래서 이 두꺼운 글들의 내용들은 바로 십자가 안에 동결된 사람이 70이레가 들어왔을 때 자기는 미처 몰랐던 모든 죄성이 바깥세상과 같이 어울려서 환하게 조명을 보는 거예요. 결국은 내가 이런 죄인이기 때문에 주의 뜻에 의해서 구원받았지 내가 자의적인 선한 의도(지향성)와 선한 양심 때문에 구원된 게 아니라는 것을 이러한 사정들을 까발린 거예요.


만약에 이걸 ‘안돼. 너무 추접해. 너무 더러워.’라고 감춘다면 과연 이 안에 들어있는지 의심스러워요.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 뭘 감춰요. 구원받았으면 자기의 이런 죄가 있다는 것을 다 밝혀지는데 그 죄가 인간의 권력체라 해서 나중에 나오는데 짐승과 관련돼있어요. 악마와 관련돼있어요.


악마가 생각하는 죄는 주님이 생각하는 죄와 일치돼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악마한테 왔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를 멸하려왔지요?’라고 했단 말이에요. 멸하려왔다는 말은 멸망시키려왔다는 말이거든요. 그럼 이 말은 악마는 진작부터 멸망당하는 대상으로 이미 낙인 찍혔다는 걸 악마는 알아요. 그런데 악마 밑에 있는 인간들은 그걸 모르기 때문에 구원받으려고 시도하는 겁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큰 개들은 호랑이가 무섭다는 걸 아는데 하룻강아지는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거예요. 모르니까 범한테 대들 듯이 마귀는 이미 끝났다는 걸 아는데 마귀에 속한 인간들은 구원문제를 논하고 있고 아직도 자기 주제파악을 못하고 있어. 구원이 안 되는데 ‘아직도 교회 세울까요, 착하면 될까요, 테레사 수녀처럼 살까요?’ 구원이 안 되는데 자꾸 구원된다는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바로 짐승이 배후에서 자꾸 구원받아, 구원받아. 시키는 거예요. 애초부터 구원되질 않아요.


마귀는 아예 포기했어. ‘예수여. 우리를 멸하려 왔죠?’ 그 밑에 인간은 자기 자존심이 있어서 ‘주여, 다른 사람은 멸해도 저는 멸하면 안 됩니다. 지옥 가기 싫어요. 무서워요. 소금 치듯이 영원한 불하고. 나쁜 놈 가고, 김정일 가고, 착한 우리 집안 놔두고, 나와 우리 가족은 안 돼요.’ 이러고 있다고. 되고, 안 되고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부자가, ‘나는 비록 지옥 왔지만 아직도 죽지 않은 내 동생 다섯 명이 세상 있으니까 그 다섯 명 어쨌든 구원하길 원합니다.’ 이게 아직도 지옥 가도 철이 덜 들었어. 지옥 가도 사태파악이 안 돼.


부자가 지옥 갔는데 거지 나사로가 천국 간 이유를 부자는 아직도 모르고 있어요. 부자가 지옥에 왜 갔습니까? 갑자기 조용해졌어. 거지 나사로는 천국 가는 게 아니고 천국 갈 사람이기 위해서 미리 거지로 인생을 살아야만 했던 운명을 지닌 사나이였어요. 거지 나사로는 믿었기 때문에 알파요 오메가를 다 알고 있는데 부자는 자기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만 알고 있어요. 자기가 태어나서 60인지, 70인지 모르지만 죽을 때까지 그것을 정리해서 그것이 세상에 전부인 줄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자기가 덮은 포대기가 세상을 덮을 수 있는 포대기인 줄 착각하고 있다 이 말이죠. 인생을 살면서 자기가 경험한 게 전부가 아닌데 아직도 그걸 전부라고 여기고 전부를 알고 있는 거지 나사로에 대해서 한 소리하더란 말이죠. ‘거지 나사로는 믿게 하고 나는 못 믿게 하고. 에이.’ 이런 식이란 말이죠. 거지 나사로는 하나님 믿고, 예수님 믿어서 구원받은 게 아니고 거지 나사로는 부자 약 올리기 위해서 태어나야만 한 존재에요. 그러니까 거지 나사로의 입장을 이해한다면 부자는 어떤 인식이 오겠습니까? ‘나는 지옥에 가기 위해서 만들어진 진노의 그릇이구나.’ 게임 끝났지 뭐. 집에 가셔도 좋습니다.


우리가 하나님한테 그만한 권한이 있는 겁니다. 권한을 주지 맙시다. 우리가 그 권한을 하나님께 준다고 해서 날름 받을 분도 아니고 줘도 관계없이 주께서는 처음부터 그렇게 갖고 있는데 그걸 쉬운 말로 [창조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창조주의 창조원칙을 모르는 것을 심판하는 것을 쉬운 말로 [심판주]라 합니다. 참 쉽죠.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창조주가 갖고 있는 원칙을 창조주만 안다는 거예요. 따라서 창조주의 원칙을 모른다는 것을 심판받아야 될 것은 당연히 심판받아야 됩니다. 이것도 참 쉽죠.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와서 거쳐 올라갔던 경로를 그대로 밟기 때문에 내가 잘나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바로 예수님께서 나라는 껍데기에다 예수님 자신의 일대기를 거기다 덮어씌우니까 그것이 엔진으로 가동되어서 나로 하여금 어린양에 소속된 자로 천국에서 어린양과 영원히 사는 시나리오 속에 가담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면류관을 반납하면서 ‘면류관을 제가 잠시 썼는데 죄송합니다.’ 도로 벗어드리면서 ‘이 면류관을 쓰실 분을 따로 계십니다.’라고 주께서 면류관을 수집하는데 여기저기서 다 수집하니까 김정일 밑에 있는 장군들처럼 혼자만 주께서 훈장이 가득한 거예요. 심지어 창조의 원리를 알고 있던 천사들까지 자기 얼굴을 가리고 발을 가리면서 나머지 날개 두 짝으로 펄럭이면서 하는 말이, 펄럭거릴 때마다 멜로디가 나오죠. 가사가 나오고. ‘영광 받을 분은 오직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찬송을 이미 완료된 것을 증거하는 것이 찬송이다.


우리는 술 한 잔 먹고 취해서 완료되어 노래 소리나오는데. 그래서 취했을 때 사람이 부끄러운 줄 모르고 노래가 나오는 이유가 자아를 잊어버렸기 때문에 노래방에서 세 곡, 네 곡 부르는 거예요. 그것을 주님께서 아시고 술 취할 때도 자아가 없지만 이제는 성령에 취해서 잊어버리고 찬양하라 하시죠. 성령에 취해서 찬송해야지 술 취해서 노래 부르면 둘 다 자아를 모르는 상태는 맞지만 한 쪽 자아는 깨면 후회된다는 사실. ‘내가 미쳤지. 왜 불렀을까.’


70이레라는 불같은 말씀이 들어가게 되면 묽은 죽 같은 것이 70이레라는 말씀이 들어가게 되면 거기서 엉김현상이 일어납니다. 물이 딱딱한 액체가 고체로 변하면서 권력체가 형성되죠. 떴다. 말씀 떴다. 그 다음에 나오는 게 뭡니까? 쉐마, 쉐마. 말씀대로 실천해서 구원받자. 평소에 갖고 있던 구원의 욕구가 주의 말씀을 주니까 이 말씀 지키고 구원받을 수 있겠다고 와락 달려들죠. 거기서 나오는 것이 악마의 모습들이 나오는 겁니다. 꼭 구제품 나눠주는 것처럼. 육이오 동란 때.


70이레가 떴으면 70이레를 해석을 해내는 자에 한해서 구원을 주어진다는 자기 마음대로 법칙을 만들어놓고 70이레 해석 달성하기에 난리 났어. 70이레도 그렇고 요새 14만4천. 또 그 전에 유행했던 666. 여기에 달라붙는 거예요. 666을 알아야 피할 수 있다는 거예요. 니가 666이야.


666이라든지 14만4천은 이 자체가 완료입니다. 완료가 주어졌을 때 달라붙는 그들의 지저분한 그 미완료성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완료된 말씀이 주어지는 겁니다. 14만4천, 70이레, 666의 모든 완료가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에 의해서만 이게 밝혀지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 말고 자기 자신의 구원욕구에 입각해서 이걸 설명하게 되면 전부다 미완료만 남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을 깊이 연구했던 이 논문을 한 50분 동안 몸을 비비꼬면서 들었던 소위 자칭 신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것이, ‘진리라 하는 것은 미완성이다.’ 이게 그들의 마지막 멘트입니다. ‘역사는 끝에 가봐야 알지. 언놈이 아노.’ 그럴 줄 알고 결론에 그게 있어요. 그런 소리 나올까 싶어서 ‘그런 소리하는 것이 쓰레기입니다.’라고 결론 맺은 거예요.


그러니까 결론 내린 게 뭐냐 하면, 이거에요. ‘지금 이근호 당신 말대로 복음을 교회에서 전하면 사람들이 어리둥절해서 난감하고 복음에 관련해서 거부하게 된다. 그러면 목회자의 거처는 어디냐 말이고? 복음을 전했는데 쫓겨나면 다음에 어느 교회 가는데 그래.’ 주님의 완료성보다도 더 입에 풀칠하고 다급한 게 뭐냐 하면, 자기의 완료이다. 어느 교회에서 근무하면 평생 동안 밥 먹고 사느냐? 어느 것이 완료냐?


그러니까 주님의 완료는 듣기 싫다는 거예요. 내 거처의 완료가 그립다. 그걸 제가 결론부분에 써놨잖아요. 복음을 제대로 못 전하는 것은 자기 거처가 염려돼서 그렇다. 자기 거처문제가 중요한 거예요. 주여, 복음, 신학, 신학박사 백날 입에 달고 이야기해 봐도 성경구절이 이렇다, 난해한 것을 풀었다고 해봐야 결국 기본적인 것은


결론이 그거에요. 아무리 신학이고 복음해도 결국 사람 속에 깊이 남는 것은 내 남편 거처가 어디가 가장 안정적이냐 하는 겁니다. 그런 문제는 이미 십자가 밑에 모였던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다 고민했던 문제에요. 그리고 심지어 열두 제자가 다 걱정했던 문제입니다. ‘주님은 좋겠다. 가버리고. 우리는 고기 잡으러 가자.’ 이게 뭐예요? 결국 거처문제잖아요. 자기 토대문제잖아요. 그 토대가 역사고, 그 역사라는 우상을 디벼보자 이 말이죠.



10분 쉬고 디벼봅시다.




 

 첨부파일 : 2011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a.hwp (55.5K), Down: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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