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b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아까 첫째 시간 끝에 제가 이야기하기를 결론에 거처문제라 했지요. 거처문제라 하는 것은 이걸 성경에서는 ‘자리’ 너의 자리. 이스라엘, 유다 나라가 멸망할 당시에 주변에 있는 시돈, 두로, 블레셋, 애굽, 바벨론, 앗수르에 대한 예언이 뭐냐 하면, 너의 자리가 낮아질 것이라고 이야기해요. 자기가 존재하는 자리를 길게 엿가락처럼 끌어당기면 이게 바로 역사에요. 그래서 사람마다 역사가 각기 다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런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어요. 성경은 윤리지, 윤리가 최고다. 궁극적으로 윤리의 문제라 하는데, 윤리라 하는 것은 피자 판의 토핑이라 하죠. 윤리는 자기 자리를 감추기 위한 장식입니다. 일단 자리가 확보되고 난 뒤에 자기 자리를 안 빼앗기기 위해서 그러니까 욕 얻어먹지 않기 위해서 아주 고상하고 착하고 어질고 선한 것들을 거기다 장식하는 거예요. 고구마 장식은 8000원이고 소시지 있는 것은 12000원, 콤비네이션 해서 있어요. 주님께서는 피자 판을 다 털어버립니다. 이게 뭐야? 결국 남는 것은 판때기 같은 우리의 자리, 이 자리 하나 쥐고 있는 거예요. 그 자리를 교묘하게 감추려고. ‘제가 이렇게 여기다 착한 일을 많이 하는데 날 치워버리면 전 섭합니다.’ 하는 마지막 저항 같은 것. 때로는 협박으로, 때로는 아부로서. 마지막 쥐려고 하는 자리에요. 그 자리에 연연하고 그 자리의 정당성을 보존하기 위해서 사람들마다 과거에 있던 여러 가지 사건들 가운데서 현재 이 자리가 내가 차지할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음을 보이기 위해서 소급해서 여기서 적당한 것을 끌어당기는 겁니다. 이게 바로 역사란 거예요. 왕이나 대통령이 등장하면 역사는 다시 재편되는 겁니다. 자기는 이 자리에 올라갈 마땅한 이유 때문에 여기 왔다고. 그런데 거지 나사로 같은 경우에는 나는 구원받아야 마땅하다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거지 나사로의 자리가 없어요. 그 자리를 누가 차고 들어가 버립니까? 그 자리는 주님이 차고 들어가 버리죠. 그러면 거지 나사로의 자리가 두 개가 돼버려요. 하나는 주님으로부터 부정당한 자리, 이것은 거지 나사로의 육적인 자리. 그 육적인 자리는 일반적으로 우리의 모습처럼 나는 구원받을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그걸 보장하기 위한 역사로 점철된 역사의 모든 이유를 끄집어낸 자리죠. 그 자리가 뭐냐 하면, ‘나는 창세전에 예정됐기 때문에 구원받을 만하잖아.’라고 우기는 육의 자리. 그러니까 에베소서 1장 4절의 그 말씀이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그 자리를 ‘옳다구나. 그래서 나는 구원받을 만해.’라고 이것을 주님의 자리고 가지 않고 누구 자리로 끄집어 당깁니까? 내 자리로 오는 거예요. 창세전에 예수 안에서 구원받았다는 이걸 캘빈은 중간에 뭘 빼버리느냐 하면, ‘예수 안에서’를 빼버리고 창세전에 선택받았다는 거예요. 창세전에 선택받았다는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창세전부터 구원받았기 때문에 까불지 마라.’라고 우기는 겁니다. 그게 캘빈주의의 예정론이고 선택론이에요. 그거는 피자의 토핑입니다. 중요한 걸 빠뜨렸어요. 중요한 게 뭐예요? 예수 안에서 선택되었다는 그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캘빈은 모릅니다. 예수 안에서의 선택과 그냥 창세전의 선택의 차이를 몰라요. 하늘과 땅 차이인데. [시편 속의 그리스도]에 보면 나오죠. ‘아무리 봐도 한우 맛이 안 나는데 어찌 그걸 한우라고 하시옵나이까?’ ‘그렇다. 한우와 한우 아닌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몇 페이지인 줄 모르지만 그 대목 나와요. 예수 안에서 선택된 것과 그냥 창세전에 선택된 것의 구별을 사람들이 또는 신학자, 목사들이 해내질 못합니다. 왜? 손님 수급하기 바빠서. 간만에 교회 왔으니까 상품을 제공하리라. 그걸 통 큰 복음이라^^ 옆에 소매점 다 죽어. 옆에 치킨집 다 죽어버려요. 그래서 십자가마을, 십자가복음이라 하니까 전부다 통 큰 복음인줄 알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선택이라 하는 것은 너의 자리를 없애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반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대하는 거죠. 성경을 대하면서. 육을 가진 인간이 자생적으로 튀어나오는 온갖 더러운 추잡한 구원욕구가 이런 것이라고 오히려 더 뚜렷이 윤곽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주께서 너를 인도하시고 동행하시고 다루신다 말이죠. 왜? 그게 있어줘야 주의 이름이 더러운 인간의 이름 속에서 빛이 나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아니고 주의 은혜라고 또 다시 크게 증거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방금 제가 간단하게 빨리 이야기했어요. 인간의 존재가 있다면, 존재는 자리, 또는 하이데거에 의하면 ‘터’. 존재는 숨어있는 건데 존재가 숨어있는 걸 어떻게 아는가? 존재자를 통해서 존재가 숨어있다는 걸 안다. 그러면 존재자를 통해서 존재를 아는 방법이 뭐냐? 하이데거는 그걸 어쩔 수 없는 죽음이라 했어요. 이 죽음을 ‘한계상황’이라고 이야기했어요. 하이데거라는 독일의 철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 불트만이 옳다구나 하고 이걸 차용한 거예요. 실수한 거예요. 하이데거의 이런 사상은 복음하고 아무 상관없습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죽음을 한계상황으로 보는데 성경은 놀랍게도 죽음을 둘로 쪼갰어요. 첫 번 죽음과 두 번째 죽음으로 나눠버렸습니다. 첫 번 죽음과 두 번째 죽음이 유사한 것도 아니고 도리어 반대가 되게 했어요. 첫 번째 죽는 것이 오히려 첫째 부활이라고 본 겁니다. 그걸 요한계시록 20장에 반대로 이야기해버렸어요. 베드로가 자기의 목숨을 순교해도 베드로는 천국에 못 갑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 요구하는 죽음과 베드로가 죽겠다고 하는 그 죽음은 같은 게 아니에요. 설교할 때 번잡스럽고 방해하는 것도 벌써 일 개월 되니까 이력이 나서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사람이 죽어도 죽음을 모르게 돼있어요. 왜냐하면 내 자리가 없어지는 걸 죽음으로 보는데 누가 내 자리를 떠미는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 상태에서 그저 내 자리가 없다는 그 자체를 죽음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자리를 없애는 방법이 뭐냐? 주님이 제시한 죽음과 우리 자리를 바꿔치기해서 주님의 죽음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영생을 얻게 돼있어요. 그래서 내가 자살한다고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죽음과 예수님과 더불어 죽어야 비로소 생명이고 부활입니다. 함께 죽어야. 이게 로마서 6장에 나오잖아요. 예수님과 더불어 합하여서 함께 죽는 것. ‘그러면 함께 죽으면 어떻게 부활입니까? 같이 살아나야 부활이지.’ 이러는데 함께 죽으면 그 다음부터 살고 안 살고는 이미 죽은 우리한테는 소관이 없어요.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죽은 자가, ‘주님, 전도해서 이렇게 해주세요.’라고 요구할 수 없어요. 그건 죽은 놈이 아니에요. 죽었으면 입 싹 닦고 재를 뒤집어쓰고, ‘난 할 게 없습니다.’ 할 때 그 뒤에 주께서 부활하시면서 함께 죽은 사람이란 이유 때문에 건져주는 거예요. 함께 죽은 사람이란 이것을 길게 늘어뜨린 것이 성도의 한 평생이라 하는 거예요. 성도의 다이어리, 성도의 일기장. 하루하루 사는 거예요. 날마다 우리의 입을 막고 저는 이것까지는 했습니다만 죽음을 유발시킨 행위에 불과합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살려내고 하는 것은 또 다시 이미 그 고난을 매일같이 주님한테 넘겨져 있다고 고백하는 거죠. 그래서 고린도전서 4장에 보면, 나는 날마다 예수님과 함께 죽음에 넘기우고, 그렇게 하는 이유는 내 안에서 예수님의 생명이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활동하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살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럼 다른 사람이, ‘예수님이 살아계신 것을 사진 찍어봐라. 예수님께서 지금 어떤 활동을 하시는지 네가 증거를 제시해보라.’ 하면 그때는 우리의 고백밖에 없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지금 나를 살게 했잖아. 그럼 주위 사람이, ‘네가 열심히 용 써서 살았지. 왜 자꾸 주님을 끌어 잡아당기느냐?’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내가 그런 걸 네가 탓할 순 없다.’ 이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주께서 살린다 할 때 그것을 심리적으로 분석해서 사도 바울은 지금 거짓말하고 있다고 누가 그걸 판결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그렇게 하는 게 너무 일방적인 이야기잖아. 남한테 증거 없이 들이대는 것이 되지 않느냐?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돼있어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사도 바울이 더 심하게 나가네. 완전히 똘라이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나는 돌은 건 맞는데 사랑에 미쳤다.’ 그럼 다른 사람이, ‘완전히 맛이 갔네. 저것 이단이잖아.’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나한테 이단이라고 하는 자가 바로 이단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나한테 욕을 얻어먹게 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사도 바울을 갈구지도 못하고 다룰 수도 없고. 결국은 ‘에이 계룡산에서 계시 받은 놈.’ 그 소리밖에 할 수 없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을 구성하게 된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왜 당신은 자꾸 성경말씀을 들이대느냐? 그게 불쾌하다는 거예요. 그들이 말하는 건 이런 겁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보더라도 성경말씀 그 자체의 활동을 보는 것이 아니고 성경말씀이 이러이러 해서 내 자리를 구축하는 역사의 단편으로 끄집어 당기는 식으로 성경말씀을 해석해왔다. 사람들이 대부분 다. 나 좋으라고 성경말씀 해석했단 말이죠. 그런데 사도 바울이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살아계신다는 거예요. 그럼 세상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신 게 아니고 네가 살아있다. 네 주둥이가 살아있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야기하다보니 미궁에 빠졌는데 사실은 미궁에 빠진 게 아니에요. 다시 정리해봅시다. 역사는 역사의 주인공이 있고, 그 역사의 주인공은 이미 자기 자리를 자기 것이라고 확보했단 말이죠. 자기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모든 역사를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는 거죠. 이것은 바로 과거에 있던 기억들을 재편집해서 있고, 과거에 따른 기억들에 의해서 뭔가 미흡하고 자기 야심에 뭔가 충족되지 않은 것은 따로 빼내서 미진한 것으로 남겨두는데 이 미진한 걸 그들은 미래라고 보는 거예요. 나의 미래. 그래서 타율 2할9푼9리 같으면 이 사람의 미래는, 내년도 희망은 기어이 3할 넘는 거예요. 반에서 11등 하는 애는 기어이 내년에는 10등 안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이걸 철학에서는 ‘문턱’이라 합니다. 문턱이란 말이 굉장히 중요한데 문턱이라 현재 있는 자기 자리의 경계선을 문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내년에는 이 문턱을 넘어보겠다는 거예요. 어떻게 문턱을 넘을 수 있느냐 하면, 여기서 힘을 비축해요. 힘을 모으면 여기서 현재 있는 자리에서 탈출이 가능한 힘을 모으는데 그 힘이 ‘잉여’, 쉬운 말로 ‘여분의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알뜰살뜰하게 살림살고 나머지 떼어놓은 걸 부동산이나 펀드해서 지금 궁색 맞은 29평, 19평의 아파트를 넘어서 기어이 30평대의 아파트에 살 수 있는 문턱을 넘겠다는 거예요. 결국은 이 미래는 주님이 주신 미래가 아니고 현재 내 자리는 일단 확보돼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하면 내 자리를 확장시킬 것인가가 나의 소망이 되고, 그 소망에 필요한 것은 오직 힘밖에 없는데 그 힘을 나대로 힘을 비축하되 모자란 힘은 어디서 얻는다? 큰 힘을 가진 분이 계신다는 거예요. 큰 힘을 가진 걸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건 어디서 얻는가? 새벽기도나 금요일 철야할 때 얻는 거예요. 내신 성적을 높이는 겁니다. 내신 성적을 높이면 잉여분을 축복이란 이름으로 보너스를 추가할 수 있다는 겁니다. 또는 그러한 다단계 성공한 사람을 청년회헌신예배에 강사로 모시는 거예요. 청년회헌신예배에서 목사의 노림수는 돈밖에 없어요. 그 사람들은 그것 말고 자기가 아는 문턱을 넘을 수 있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얻고자 합니다. 이런 것들을 만약에 획득하게 되면 그 다음에 자기 자리를 획득했으니까 토핑, 피자에 장식을 해야 되거든요. 고상한 것은 다 끌어 모아요. 그 고상한 게 하나님의 말씀, 신년예배 때 뽑기 해서 받았던 말씀 있잖아요. 그 모든 말씀을 전부다 현재 자기 자리가 확보할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확보했다고 다 집어넣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에 옮겼더니만 하나님께 순종했다는 것 때문에 오직 순종한 자에게는 복이 온다. ‘순종하는 자에게 복이 온다.’ 이 문장을 간단하게 말하면, ‘떼쓰는 자는 힘을 얻는다.’ 이걸 네 자로 줄이면 ‘하면 된다’ 같은 뜻인데 이걸 약간 변형시키면, ‘안 하면 국물도 없다.’ 하면 된다가 무서운 게 아니고 목사들이 노리는 것은 안 하면 국물도 없다. 저주받는다. 이게 무기에요. 하면 된다는 식상해, 시시해. ‘봐라. 안 하니까 저주받잖아. 교회 며칠 안 나오니까 저주받잖아.’ 다음에 대학 또 떨어진다. 안 하면 국물도 없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목사나 나나 원하는 것은 문턱 넘을 수 있는 힘 원하다. 까놓고 솔직하게 해보자. 힘 원하지? 주신다. 이걸 통 큰 상품으로 제시한 것이 교회라는 마트 아닙니까. 다단계 아닙니까. 이것을 크게 키우기 위해서 요소요소에 단결해서 모았는데 이게 권력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논문에서 이 권력이 어디서 오느냐? 그게 다니엘서에 바다 속에서 옵니다. [시편 속의 그리스도]란 말도 되지만 사실은 ‘바다 속의 그리스도’. 짐승들이 우글거리는 그 속에서 튀어나오죠. 그래서 주님의 뜻은 이겁니다. ‘마귀가 빨리 정체를 드러내. 숨지 말고. 다 보고 있어. 얼굴 들이밀어.’ 어떤 분이 질문했어요. ‘성공이 뭡니까?’ 성공은 얼굴 내미는 거예요. 얼굴 빨리 내밀란 말이죠. 토핑하지 말고. 좋은 것, 경건한 것, 복음, 십자가, 언약 이런 것으로 자기 자리, 판때기 근사하게 만들지 말고 얼굴을 내미는데 어디 앞에서 내밉니까? 십자가 피 앞에서. 다시 말해서 나의 자리, 돗자리를 들고 십자가 피 앞에서 우리 자리와 만남이 되 이것 십자가 안에 냉동 동결된 사람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 자리와 주님의 언약 완성의 자리가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를 대비, 대조해보는 그것이 바로 십자가 안에서 이뤄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러한 방금 이야기한 권력에 대한 추구는 우리 육이 이 땅에 살아있는 한 계속 추구해야 됩니다. 계속 시도돼야 돼요. 주~욱~ 세상 끝 날까지 계속 돼야 돼요. 남한테 기죽기 싫고, 승부세계에서 남한테 지기 싫어하는 우리의 본성을 우리의 피자 판에다 깔아가야 돼요. 다 까시고 그걸 늘 십자가 앞에서 비추세요. ‘주여. 이게 제 자리입니다.’ 주님이, ‘더 예쁘게 포장해오지 왜?’ ‘제가 실력이 없어서....’ ‘한 수 배워라. 더 예쁘게 포장해 와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지. 네 자리 넓히는데 온갖 수단 다 써야지. 더 자리 넓혀서 오라.’ 그래서 우리 마음대로 살아야 돼요. 그래서 자기가 얼마나 지저분한 인간인지 돼야 되는데 그래서 그걸 매일같이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해야 되는데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자기 자리 토핑한 건 좋았는데 두 번 다시 십자가 피로 안 돌아오는 게 문제에요. 안 돌아오는 것 보니까 처음부터 십자가 안에 동결 안 된 것 같아. 처음부터 십자가 안에 안 들어온 사람 같아. 지금 웃는 게 웃는 게 아닙니다. 지금. 늘 십자가 앞에 와야 되는데 오는 길을 잃어버렸어. 오는 방법을 잊어버렸어. 왜? 십자가 피 앞에 오게 되면 그동안 자기한테 투자한 것이 세월이 너무 아까워. 그걸 어떤 사람이 이런 노래를 불렀지요. 남자가 우는 걸 참기엔 너무 길어요~ 남자라는 이유 때문에 참고 기다린 세월이 너무 길어요. 왜 참노? 터뜨리지. 남자 체면이 있지. 그래서 성경말씀이, 70이레를 하나의 예표로 했지만 나머지 모든 성경구절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그동안 자신마저 미처 모르고 감춰놓았던 나의 자리, 나의 자리에 여자분 같으면 남편이 있을 것이고, 자식이 있겠죠. 자식과 남편이 자기 시선이 멈추는 지평선입니다. 남의 자식은 모르겠어요. 내 자식은 어디 갔는지 항상 원격조종하죠. 원격조종해서 지금쯤 영어학원에 잘 다니는지 보죠. 이것이 자기 자리에요. 아무리 네가 뛰어봐야 부처 손바닥 위에 있는 원숭이처럼 백날 뛰어봐야 소용없어요. 이게 내 자리에요. 그래서 교인수가 많으면 목회하기 힘들다는 말이 자기 자리가 이만큼 큰 거예요. 그런데 우리 노회 목사들은 교인수 많아서 힘든 게 아니고 교인수 적어도 힘들어.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누구나 이런 자리가 겹치죠. 이렇게 겹치고, 이렇게 겹치게 되는 거예요. 만약에 어떤 아내가 이런 자리가 있다면, 아내의 이런 자리에 남편이 들어와 주면 참 고맙겠는데 놀랍게도 남편의 꿍꿍이는 딴 자리가 또 있어요. 겹치는 부분이 있고 못 겹치는 부분이 따로 있어요. 같이 살아도 남남 같아. 그런데 놀랍게도 정성들인 큰 아들도 친구하고 놀기 바쁘고. 자기 자리가 따로 있어요. 나중에 커서 엄마 때문에 얼굴 못 생겼다든지 전부다 자기 자리가 따로 있어요. 그러니까 결국 이걸 한데 모으면 전부다 환상이에요. 저 혼자 꿈을 꾼 모양이에요. 꿈이지만 요소, 요소를 억지로 붙들어 매는 힘이 악마에서 공급하는 힘에 의해서 자기 자리를 연연하고 그걸 붙들고 있는 거예요. 그것 붙드는데 얼마나 스트레스 받겠습니까? 내 자리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내 자리에서 떨어져나가서 마치 우주선이 떨어져나가면 그 자리를 찾아오는데 얼마나 스트레스 받는지 몰라요. 교인 하나 떨어져 나갔을 때 또 새로운 교인 하나 들어왔을 때 전부다 교인으로 보지 않습니다. 내 자리를 확장시키는 하나의 힘이 하나 들어오고 나가는 거예요. 이건 목회할 때도 그렇고 학원 할 때도 마찬가지고. 장사할 때도 마찬가지고. 이 힘들이 어디서 오는가? 이 힘의 제일 어른 격으로, 제일 고참 격으로 보여주는 그 나라를 다니엘에서 유명한 바벨론 제국이에요. 이 바벨론 제국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어요. 요한계시록 17장에 보면 바벨론 제국이 나와요. 이 말은 이 세상에 지구상의 어떤 인간도 바벨론 제국의 속성을 지니지 않은 인간은 아무도 없다. 그 바벨론 제국의 숨어있는 주도권자는 악마였다. ‘나와! 악마. 바벨론 앞세우지 말고, 불쌍한 인간들, 소시민들, 서민들 앞장세우지 말고 나와. 배후에 숨어있는 마귀 빨리, 빨리 나와. 안 나오면 내가 쳐들어간다.’ 쳐들어가는 방법이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으로 사건을 유발시켜서 그 마귀를 밝혀내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 사건, 하나님의 진짜 진리의 사건은 다른 사람 근처에는 안 와요. 오직 예수님이 왔던 그 주변에 최후의 권력들이 거기 집결하게 돼있습니다. 예수님이 있던 그 곳에. 그래서 그 사건, 힘과 힘의 부딪침에서 누가 승리합니까? 살아있는 자가 예수님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살아있는 인간이 결국은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살아있는 하나님을 이기죠. 죽였다고 승리한 그 위에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악마에게는 하나님을 이길 무기가 없어요. 무기가 없다는 말은 이제는 마음 놓고 하나님이 악마 속에 있는 자기 백성을 데려가도 그들은 붙잡을 방법이 없습니다. 그걸 부활의 능력으로 구원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죽음을 이기신 능력으로 건지기 때문에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의 능력이기 때문에 붙잡을 수가 없어요. 붙잡았다 하면 참기름 발라서 다 빠져버려요. 이길 수가 없어요. 마귀는 자기가 졌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외부에 알리지 않기 위해서 성도를 죽이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봐라. 내 말 안 들으면 저렇게 죽잖아.’라고 돼있는데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님께서 죽음으로서 마귀를 이기죠. 죽었기 때문에 이겼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무슨 역설입니까? 이 세상에서 죽었다는 건 패배자를 의미하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우리의 자리는 그 힘이 악마에게서 왔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악마가 만든 항공모함에서 자기의 평수를 하나 챙긴 것에 지나지 않죠. 몇 평수 챙기다가 거기서 길면 칠십 길면 구십, 백 살까지 살다 죽어버리죠. 기껏 아는 것은 악마의 항공모함 갑판에서 한 자리 차지한 거예요. 필리핀 사람은 필리핀 어느 시골에 하나, 일본은 나까현 하나, 미국은 아리조나 어디 하나, 콜로라도의 어디 하나, 독일 쾰른에 어디 하나. 이렇게 하다가 여행 가도 마찬가지. 사람이 여행한다고 세상을 아는가. 여행해도 돌아갈 자리는 있잖아요. 여행 해보세요. 당신 고향 어딥니까? 아무리 돌아다녀도 결국 그 집에 올 걸. 그 자리에 옵니다. 아무리 돌아다녀도 자기 보금자리 있지만 그 보금자리란 결국 마귀가 만든 항공모함 갑판 위에 조그마한 터 잡고 거기서 살다 죽는 거예요. 하나의 점 같아요. 작은 점 하나 왔다가 없어지는 겁니다. 이런 자리에다가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었다가 살아나신 부활의 힘으로 오니까 결국은 세상과 주의 말씀 사이에는 죽음의 힘이 센가, 죽음보다 더 센 힘이 세냐? 이 싸움입니다. 윤리가 아니에요. 우리가 얼마나 착하냐, 얼마나 고상하냐 윤리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을 자리싸움이에요. 그러니까 그 자리는 무엇의 뭉치다? 힘의 뭉치다. 힘들이 모여야 자리가 확장되니까. 이건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자리란 분석해보면 겹겹이 내가 그동안 노동해서 얻었던 힘들이 모인 거예요. 그 모여진 힘이 무슨 힘이라 했습니까? 잉여의 힘, 여분의 힘 아닙니까. 이걸 자본주의라 합니다. 자본주의란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으면 자본주의가 아니에요. 자본이라 하는 것은 돈을 말합니다. 돈주의라는 거예요. 옛날에는 돈주의가 아니고 돈이라는 게 있었는데 돈은 물건과 물건을 바꾸기 위해서 그냥 교환하기 위해 딱지 같은 게 돈이었어요. 딱지를 모으는 것은 초등학교 애들이 하는 거예요. 그런데 딱지를 모아야 힘이 되는 새로운 경제 질서가 근자의 이름으로 전 세계에 다 퍼졌어요. 자본주의가 아닌 나라, 특히 동양, 중국, 한국 이런 나라는 자본주의를 일찍 받아들인 일본에 의해서 외국 열강에 의해서 다 무너졌습니다. 그때 무너지면 무너진 대로 살면 되는데 안 무너져야 되겠다고 자본주의를 도입한 거예요. 아직도 자본주의를 도입하지 않은 나라는 이 세상에 종교단체밖에 없습니다. 그 종교단체가 북쪽에 있는 김일성 종교단체죠. 종교단체하고 여호와증인하고 무슨 대화가 됩니까? 난 이해가 안 돼요. 북한은 힘을 모으기 위해 사는 게 아닙니다. 힘이 아니고 명분입니다. 그 명분은 이 세상에 유일하게 형제애로써 뭉쳐진 우리가 최후에 남은 민족이란 자긍심을 가지자. 북조선인민공화국. 오직 형제애로써 우리가 남보다 못 사는 것 인정하자 말이죠. 그러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란 말이죠. 우린 못 살아도 꼭 성경말씀 같아. 그저 초라한 채소 먹고 살아도 고기 먹고 사는 것보다 화목하게 사는 게 낫다고. 잘 먹고 잘 사는 게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종교단체에요. 티벳불교 같아. 마귀 종류도 여러 종류인 모양이라. 자본주의라는 잉여, 여분의 것. 내가 노동해서 얻은 것은 자본주의가 아닙니다. 그건 아주 소박하고 순진한 거고. 그런 것은 취직해서 월급 받아먹으면 되고. 월급 받아먹지 말고 자기 사업하면 항상 여분의 것, 세금 떼어먹고, 여분의 것을 챙겨줘야, 뒷돈 챙겨야 그게 자본이 되고 그게 돈 되는 거예요. 취직하지 말고 취직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부동산투기 하면 돈 수 억 벌어요. 오늘의 복음, 부동산투기를 하자. 그게 빠른 길입니다. 힘이 생성되는 그 과정을 성경말씀이 도입되면서 이젠 추적해 들어가는 갑니다. 힘은 있는데 그 힘이 어디서 오는지를 모를 때 성경은 이렇게 합니다. 그 힘은 7이레에서 온다. 악마에 의해서 주어진 힘은 어느 원칙에 의해서, 어느 계획에 의해서, 어떤 시나리오에 의해서 바벨론 제국에 힘이 왔는가? 그것은 창조의 원리, 7이레에서 왔다는 거예요. 7이레는 창세기 2장 1절에 나오죠. 하나님께서 며칠 만에 창조했습니까? 7일 만에 창조했죠. 그 다음부터 7일의 반복이 아닙니다. 7일 자체가 위로 올라가 7일의 확장이죠. 위는 하나님의 형상이 계셔요. 밑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만든 인간들이 있어요. 이 인간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7일 만에 창조한 그 원리에 의해 어떤 식으로 전개되어서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 되시는 예수님에게 속할 수 있는 그런 세계가 되느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밑에 인간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이 결국 창조에 관여했다는 말인데 그것이 유명한 골로새서 1장 16절에 나와 있어요. 모든 만물은 모든 피조물들은 오직 하나님 형상 되시는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이 만드셨어요. 누구까지? 마귀까지. 마귀가 천사 아닙니까. 모든 피조물들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그런데 오늘날 교인은 예수님은 빼버리고 거기다 하나님을 집어넣은 거예요. 하나님을 위하여. 예수님을 지워버리면 뭐가 빠지느냐 하면, 우리 존재는 목적을 잃어버립니다. 만약에 예수님을 빼버리고 하나님을 집어넣으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이렇게 돼버려요. 이것은 [왕의 남자]에 나오죠. ‘너 거기 있고, 나 여기 있다.’ 하나님 거기 계시고 나 여기 있습니다. 어떻게 구원하렵니까? 예수님 보내주시렵니까? 사다리 보내줄랍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 하나님은 없어요. 이게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란 의미를 빼버리고 인간의 타고난 종교성으로 구조를 그려버리면 나 여기 있습니다. 말씀을 계시를 주시면 지키겠습니다. 예수님 오시면 예수님 믿겠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항상 예수님 와도 제2인자에요. ‘예수님을 위하여’란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요. ‘하나님을 위하여’는 알아듣는다는 거예요. 알아듣는다는 말은 그만큼 그것은 엉터리란 뜻입니다. ‘예수님을 위하여’를 못 알아먹으면 ‘하나님을 위하여’ 만들었다는 말을 완전히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구상한 거예요. 그런 복음은 없어요.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70이레이라든지 성경을 해석할 때 충돌입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만들어졌는가, 하나님을 위하여 만들어졌는가?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은, ‘성자를 위해서 만들었는가, 성부를 위해서 만들었는가?’ 하는데 어려운 것 계속 합시다. 못 알아들어도 할 수 없다. ‘하나님을 위하여’와 ‘성부를 위하여’는 말이 달라요. 성부라 하는 것은 항상 전제가 성자와 관계에서 아버지를 성부라 합니다. 성부는 예수님을 모르면 성부를 모르게 돼있는데 인간들의 이성적 논리는 뭐냐 하면, 구조를 만들어버렸어요. 예수님을 2인자로 보고, 성경에 아들이라고 돼있으니까 아버지 있을 것이라고 아들을 몰라도 아버지를 아는 해괴망측한 현상이 나옵니다. 아들을 모르는데 아버지를 안 데요. 더 나아가서 아들은 몰라도 돼. 아버지만 알면. 그 아버지가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이런 호로 자식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예수님은 말합니다. ‘너희의 아버지가 아니야. 내 아버지야. 어디 내 아버지를 함부로 자기 아버지라고 우기고 있어.’ 하나님 아버지. ‘아니야. 너희들이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그 근원은 오직 내가 아버지한테 가서 처소를 만들어놓고, 다시 성령이 와서 너희들 비로소 그때는 나의 아버지가 너의 아버지가 되는 거야. 그 전까지는 내 아버지는 결코 너의 아버지가 아니야.’ 요한복음에 나옵니다. 무슨 말인지 사람들이 못 알아들어요. 힘이 달라요. 하나님이 다릅니다. 그리고 진짜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이에요. 예수님만 알지 우리는 몰라요. 예수님 안에서 비로소 우리는 아버지를 알게 돼있죠. 어떻게 압니까? ‘예수님의 아버지구나.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입장이 못 되었구나.’ 우리는 아들이 아니니까. 그런데 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으면 비로소 그때는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겁니다. 그런 말이 로마서 8장에 나와도 이 말이 왜 써졌는지 몰라요. 사도 바울이 왜 골치 아프게 하나. 그냥 그 하나님이 아버지라 하면 간단할 문제 가지고 뭐 논리가 이렇게 복잡해. 이러면 치매 걸린 할머니들이 믿겠어. 오히려 걱정을 늘어지게 해요. 사도 바울 보고. 성경 어렵게 썼다고. 자기가 모른다는 소리를 안 하고 너무 어렵게 썼데. 성경대로 이야기하면 지루하다고 주무시고, 자기가 알고 있는 하나님을 이야기하면 좋다고 하는데 보면 전부다 이단이고. 신학자들의 신학이라는 것은 손님을 채집하는 방법론을 교회에 제시하는 겁니다.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멘델스존 이런 사람들이 음악가라고요? 음악을 파는 장사꾼이죠. 목사나 신학자들은 뭐냐? 교회에서 돈 대주는 것에 맞추어서 맞춤 신학을 제시한 사람입니다. 왜 돈에 현혹 됩니까? 돈은 자본주의사회에서 힘이 되고, 힘이 있을 때 내가 생각한 피자 판이 넓어지기 때문에 좀더 사는 것처럼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결국 문제는 어제 이야기한 것처럼 거처입니다. 아무리 꼬깃꼬깃 숨겨놔도 할머니 쌈짓돈 같아. 없다 해도 마지막 제일 예쁜 손자 오면 꼬불쳐놓은 그것 주잖아요. 마지막 우리가 내놓는 것은, ‘주여 이것은 나의 최후의 거처인데 주께서 차마 이 거처에다 손대시면 정말 섭합니다.’ 주님께서는 그 거처마저 압수하십니다. 압수하시면 우리는 공중에 붕 뜨죠. 붕 뜨면 비로소 그 순간 우리 자신의 거처가 없을 때 우린 비로소 그동안 내 안에서 살던 내가 예수 안에 동결돼있다는 사실을 그 짧은 순간에 최초로 맞이하는 멋진 순간입니다. 그걸 무중력 상태라 하죠. 어디로 갈 줄 모르고. 시간과 공간을 박탈당했어요. 안인숙 여사가 내일 일은 난 모른다고 했지요. 그건 시간만 모른다 했죠. 공간도 봐요.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 거예요. ‘목사님, 우리 집 있는데요?’ 그래서 자기 집 있는 것을 전부 뒤집어보면 그 집이 주님의 집인 동시에 임시적인 거처가 되는 거예요. 사랑하는 아내가 있는데 아내가 언제 떠날지 모릅니다. 자식도 언제 아버지 누구시냐고 할 때가 있어요. 제가 이것 이야기했다간 세 번째 이야기하는데 식상해서 예를 못 들겠습니다. 하나교회에서 이야기했지, 울산에 가서 이야기했지 또 이야기해야 되는데 호주 영화이야기. 아버지가 아들 나무라니까 아들이 하는 말이, ‘누구신데 나무랍니까?’ ‘내가 네 아비다.’ 하니까 아들이 못 알아듣는 거예요. 아비면 낳으면 그만이지 왜 간섭하느냐는 거예요. 그 말은 낳아줄 때 외에는 자기 힘으로 살았는데 아버지는 아버지 인생이나 살고, 나는 내 거처 따로 버티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은 십자가 지고 용서하는 건 좋은데 십자가 이후의 삶에 대해선 나한테 간섭하지 마소. 이게 오늘날 교회 아닙니까. 왜 자꾸 십자가냐? 이제는 자립해서 살고 싶은데. 내 보따리 있는데, 내 거처 있는데 왜 자꾸 거기다 토핑도 못하게 만들고 고상하게 놀고 싶은데. 그게 뭐냐? 창세전에 어디 안에서? 예수 안에서란 우리 거처는 둘도 아니고 셋도 아니에요. 이미 하나가 결정 나버린 상태에요. 예수 안이란 유일한 영원한 거처를 고집하기 때문에 우리가 육적인 상상으로 만든 모든 거처를 매일같이 교체시키고, 교체시키는 것이 성령님의 하시는 일입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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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 2011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b.hwp (52.0K), Down: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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